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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존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

하나님아들 2015. 7. 4. 22:42

 

존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

                                  -이경남 목사

 

 

1) 유아시절

1703. 6.28 영국 엡윗에서 국교회 목사 사무엘 웨슬리와 엄격하고 뛰어난 어머니로 소문난 수산나 사이에 19남매 중 15째로 태어남(둘째아들)

웨슬리의 가정은 이미 3대째 목사의 가정이었고 수산나의 가정도 증조모로부터 그에게 이르기까지 신앙과 재덕을 겸비한 가정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수산나의 부친은 청교도 목사 에네스리로서 당시 성 바울이라 칭함을 받았고 런던 시내의 유수한 교회에서 목회하며 그의 숭고한 인격과 신앙심으로 많은 교중을 이끌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나타내는 문구가 있는데 “여러가지 무익하고 유치한 장난에는 시간을 줄이고.. 신앙 생활의 향상을 위해 시간을 다썼다”라는 것이다.

그녀는 10대에 신학 논문같은 것들을 탐독하였는데 후에 자녀 교육의 바탕이 된다.

(남편의 아내, 자녀의 교육자, 교회의 사모로의 역할)

그의 가정 학교는

1) 습관 교육 : 소리내어 울지 못하게 함, 제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순종하게 함, 연상자에게 경어를 사용하게 하고, 거짓말이나 상스런 소리를 하지 못하게 함, 자제력을 길러 주었고, 자애로운 가운데 엄격하게 교육하였다.

2) 종교 교육 : 주기도문, 교리 문답, 산수, 문법, 역사, 지리등의 기초 과목과 고전 문학과 논문쓰기 이같은 가정 교육의 체험은 그가 킹스우드 학교를 세웠을 때 그 교육 과정에 반영된다. 그가 6세 때 방화 사건이 발생하여 구사일생으로 살게 되는데 이것은 그에게나 모친에게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섭리적이고 인상적인 사건으로 기억된다. 2년후 모친은 “주님이 주신 이 아이를 더 큰 정성으로 양육하고 그 마음에 참된 종교적 도덕적 교훈을 주기로 힘쓰겠나이다. 주여 나에게 은총을 베푸사 이 일을 진실되게 그리고 섬기는 마음으로 실행할 수 있게 하옵시고 성공하게 하여 주옵소서!”하는데 그녀의 이런 기도는 후에 응답되는 것이다.

 

2)학창시절(챠터하우스-옥스퍼드)

1714년(12세) 집을 떠나 챠터하우스에 입학하여 엄격한 학교 생할을 하게 된다.

우리의 중학생 시절과 같을 때인데 웨슬리는 이 생활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엄격한 가정의 훈육을 벗어나 학교에서 외적 제제가 제거됨에 따라 외적인 의식까지 경시 하는 마음이 생겼으며 따라서 여러 외적인 범죄를 저질렀다(타인들은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 것이라 보았다)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그는 성경을 읽었으며 조석으로 기도하였고

1) 다른 사람처럼 불량히 되지 않겠다

2) 종교에 대해서 호의를 가질 것

3)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할 것등을 결심한다.

 

1723(18세)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지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 한다.

웨슬리의 집안은 가난하였는데 그의 학창시절의 검소한 생활을 나타내 주는 기록이 있다.

런던 시내에 전과 6범의 강도가 다시 탈출하여 시민들이 공포로 떨었는데 이 사건을 어머니에게 편지하면서 그는 전혀 두렵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기는 빈지갑 밖에 빼앗길 것이 없음으로...

대학 생활 중 그는 중대한 결심과 영향을 입게 되는데

그리스도를 본 받아 9토마스 아 켐피스, 거룩한 삶과 죽음(제레미 테일러), 경건한 생활에로의 부름, 그리스도의 완전(윌리암 로우), 인간 영혼안의 신적인 생활(소우갈)등의 책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종교에 의식과 규율 같은 외적인 것을 넘어 종교의 내적인 영역, 마음의 종교, 내적인 종교에 눈뜨게 된다.

“내 생명의 전부를 바친다 해도 내 마음 전부를 바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반쯤만 내 자신을 바치는 것은 마귀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레미 테일러의 책을 읽고 곧바로 (1725.24세)

1) 시간의 선용

2) 생활의 반성을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후 죽을 때까지 계속된 이 기록은 영국 문학사상으로나 당시의 풍속, 사회상, 민정상태, 종교상을 반영하고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1724(22세)에 그는 성직자가 될 결심을 하게 된다.

그 후로 그는 초대 교부들의 서적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클레멘트 등과 마카리우스의 책등에서 큰 영향을 받는다. 그 외에도 그는 히, 헬, 라틴어등의 어학, 논리, 철학, 물리학, 시가, 신학 등의 다방면의 학문을 연구한다.

 

1725(24세)에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에 조교 임명도 되었는데 영광스러운 것이었고 이 때에 신성 클럽 운동의 시작이 있게 된다.

신성 클럽은 챨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웨슬리는 1729년 참여)

처음에는 주일 저녁에만 모이던 것이 나중에는 매일 저녁 6-9시까지 모여 기 희랍 성경 연구, 고전 문학, 전날 공부 복습, 다음날 순서 결정, 검소한 식사,매주 1회 성찬식, 매주 2회 금식하는 학문과 영적인 증진을 위한 모임이었고 또한 수인, 부채자 방문, 병자 빈자 방문, 무산 아동 교육 등 구제 사업을 하는 모임이었다.

이를 위해 생활비를 절약하였는데 웨슬리는 수입의 증가에 관계 없이 최저 생계비 28파운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업에 들였다.

이러한 운동에 대해 동료들은 성경벌레, 법칙주의자, 개혁클럽, 광신자들이란 조롱과 비난을 퍼부었다.

모르간이라는 사람의 죽음으로 한 때 매스컴을 통해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 운동의 특징은 (감리회의 모체가 된)

1) 순수한 학생, 청년 운동이었다는 것

2) 지적이고 영적인 운동이었다는 것(헬라어 성경 연구)

3) 규칙적이고 조직적이었다는 것 (즉 그들의 영혼을 구하려는 동기가 이렇게 추구되는 것)

4) 구체 사업들의 실천적 모습을 가진 것

5) 장차 큰 사업으로 발전되게 된 것 등이다.

 

1732년 영 오글렙토프 장군은 당시 빚을 지고 갚지 못하는 자들을 죄수로 가두어 옥에 넣는 법에 불만을 품어 아메리카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석방된 수인들을 이민하여 안정된 생활을 주려는 계획을 세워 정부에 식민 정책을 출원하여 캐롤라이나, 조지아 두 곳에 개척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영, 독, 스코틀랜드 등 각 지역에서 불우한 사람들이 이 아무런 구속이 없는 신대륙으로 모여들게 되고 식민지 개척 위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웨슬리가 여기에 선발 된다.

 

선교사 지원에는 (1735 .10.14 33세)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웨슬리의 열망

2) 가정에서의 기꺼운 승낙이 있었음을 본다.

“우리가 고국을 떠나는 목적은 (챨스, 잉함, 딜레모트) 하나님게서 이 세상의 축복도 많이 내려 주셨기에 궁핍을 면하려는 것도 아니요 오물과 쓰레기 같은 재산,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영혼을 구하려는 것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함이다”

(수산나는 내 아들이 20이라도 다 그와 같은 길로 가기를 희망한다, 그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할찌라도 기뻐할 것이다 라고 환영하였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교사 지망의 동기가

1)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고

2)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복음의 참 뜻을 깨닫고자 하고

3) 이웃 사랑의 교훈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

동시에 그에게는

“어려서부터 죄 가운데 자란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큰 사업을 성취할 수 있을까” 의심하였다. 57일간의 항해 중에 만난 큰 풍랑은 그에게 자신의 어설픈 종교 생활을 일깨운, 인상적인 것으로 남게 되었는데 후에 그는 (조지아에게서 귀국 후)

“나는 여전히 어설픈 종교 생활을 하고 있구나 위험이 가까지 있지 않은 동안은 나 자신을 믿고 사는구나 그러니 죽음이 나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 나의 영은 혼란에 빠진다”라고 기록한 것이다.

 

온전히 거듭나지 못한 웨슬리의 상태를 나타내는 사건이 또 하나 있는데 슈팡겐베르크 목사와의 만남이었다. 그 겸손하고 경건한 독일인 목사는 젊은 웨슬리가 조언을 구하자

1) 당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의 영으로 불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내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이에 답변을 못하고 망설였다.

2) 그러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오?

-예, 압니다. 그는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3) 그건 사실입니다만 당신은 그가 당신을 구원한 것을 아십니까?

-나는 그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셨길 바랍니다.

4)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압니까?

-내가 압니다(그러나 이 말이 공허한 말 같아서 두려웠노라)

 

우리는 여기서 웨슬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경험이 없음을 알게 된다. (부단한 종교적인 열심과 노력에도) (여기서 구원이란 사람이 자기를 대신하여(만민)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입는 것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입는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부단한 수고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좋은 영향과 함께 선교 실패의 역사를 이룬다.

부지런히 설교하고 구제하나 허공을 치는 결과가 되어 나타났다.

즉 그의 종교적 봉사와 구제 모두가.

그의 실패의 원인에 대해

1) 신도들의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취향에 따라 먹이지 않고 자기의 주의, 주장만 내세운 것

2) 고교회주의자(의식과 회의 권위존중)에서의 태도와 처신,구교회에서 세례 받지 않는 자에게 성찬 거부, 장례식 사절, 비국교도 자녀에게 다시 세례, 침례주의등... 한편으로는 이것은 그의 강직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3) 비판과 정죄적인 설교 “당신의 설교는 모두 모두 누군가에 대한 비난뿐이요 우리는 당신의 설교를 듣지 않겠소 우리는 모두 개신교인이요 당신은 어떤 사람이요?)

 

2년 4개월 만에, 소피라는 여자와의 연애와 성찬 거부 사건으로 인한 재판에 휘말려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그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인디안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아메리카로 갔었다. 그러나 누가 나를 회개시킬 것 인가? 나를 이 악한 마음에서 건져낼 자가 누구일까? 나는 아직도 어설픈 종교 생활을 하고 있구나?”

여기서 그의

1) 어설픈 종교 생활의 답답함을 벗고자 하는 소원

2) 자신의 악한 마음에서의 구원에 대한 갈구 즉 참다운 구원 받은 생활에의 추구를 발견한다.

이러한 웨슬의 내적인 고통은 무감각한 종교적 자기기만에 비해 얼마나 유익한가?

이 때에 피터 뷜러라는 그의 종교적 사부를 만나게 되는데 (모라비아 교도) 그는 웨슬리 형제에게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선행에의) 오직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것임을 일깨우는 것이다.

당시 챨스는 이와같은 믿음에 의해 구원 받는다는 신앙에 반하여

“인간이 노력하는 것, 선행하는 것 외에 다른 의지할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였다.

뷜러가 챨스에게 (중한 병환 중에 있었는데) 구원 받기를 원하느냐 물었을 때 그는“나는 하나님을 섬기기에 최선을 다했소”라고 대답하였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저를 믿음으로 구원 얻게 하신 은혜 외에 다른 것, 즉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은 모두 종의 믿음인 것이다.

그 후 챨스는 1738년, 5,21. “그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32:1)”의 말씀에 의해 중생하는데 이 말씀을 통해 그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단순한 믿음으로 속죄의 능력을 의지하는 마음을 얻었으며 그 속죄를 얻었을 때 천근의 짐을 벗는 것 같은 홀가분과 참된 평화가 마음속에 깃듬을 느꼈다”라고 기록된바 있다.

요한 웨슬리는 1738, 3, 5

“나는 챨스와 동시에 뵐러를 만났는데 크신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 나는 뵐러로 말미암아 나의 불신앙을 분명히 깨달았다. 구원의 유일의 길인 그 신앙이 -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한 신앙,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내게 없음을 깨달았다”

뵐러는 그에게

1) 이런 믿음을 전하시오 믿음을 얻을때까지

2) 그리고 그런 믿음을 얻은 다음에는 그 믿음을 전하시오 하였다.

웨슬리는 처음으로 이러한 믿음을 전하였는데 그 상대는 클리포드라는 사형수였고 웨슬리는 그에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도를 전하였다.

이제까지 웨슬리는 임종시의 회개의 불가능을 확신하던 사람이었다.

3주후에 다시 그를 방문하여 (3,27)기도한후 히 9:27의 말씀 -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 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으로 전도하고 기도하였는데 그는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내 죄를 가져가신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이제 정죄함에서 벗어났습니다” 고백하였고 기쁨으로 죽어갔는데 (구원 받은 확신 속에서) 이 엄숙하고 감격스러운 광경은 웨슬리의 가슴속에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의 능력의 위대를 깊이 깨닫게 하였다.

그는 이것을 새 신앙(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이라 하였고

뵐러에 의해 참되고 산 믿음을 가지게 된 후로 좀더 큰 확신을 가지고 여러 교회에서 설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설교를 교회와 대학은 환영하지 않고 그의 설교를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는 여러 교회에서 설교 금지를 당하게 된다.1736, 5, 24 아침 웨슬리는 벧후 1:4의 말씀을 읽고, 막 12:14를 읽고 나가는데 그날 자신의 회심, 중생을 경험한다.

“저녁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올더스케이트 가에서 있는 어느 집회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쯤 전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믿는다고 느꼈다. 뿐만아니라 주께서 내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게 된 것,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믿음을 가지게 된 것, 두려움에서 화평함을 누리게 된 것, 정죄와 심판에서 용서와 사죄를 누리게 된 것) 나는 악의적으로 나를 이용했거나 박해한 사람들을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내 마음속에 느낀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터 놓고 간증하였다”

 

웨슬리의 회심 혹은 중생, 신생의 체험의 성격을 구명해보면

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마음속에 일으키는 변화, 역사에 대한 발견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믿는 자의 마음속에서, 중생자의 마음속에서) - 이것은 이전의 탄식- 누가 나를 이 악함 가운데서 건져 낼 것인가? 하던 탄식과 절망에 대한 답변이 되는 것이다.

2)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믿음을 갖게 된 것으로 나타나고 또한

1) 미움과 대적자들에 대한 용서와 축복의 시작

2) 자기 믿음의 공중적 고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귀는 얼마 안가서 넌지시 속삭였다.

이것은 믿음일수 없다. 그렇다면 기쁨은 어디있느냐?

그때 나는 배웠다. 평화와 죄에 대한 승리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통 처음 생기는 구원의 황홀한 기쁨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때로는 주시기도하고 주지 않으시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은 구원의 믿음에 감정적인 요소가 있으나 구원이 감정과 느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여러 가지 시험에 몹시 괴로웠다. 그러나 큰 소리로 외쳤더니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 시험은 계속 되돌아 왔다. 그럴 때마다 눈을 들어 주님을 향하자 주께서는 거룩한 곳으로부터 나에게 도움을 보내주셨다.

나는 여기서 이런 체험과 주로 전에 일관되었던 나의 신앙 상태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싸웠다. 나는 율법 아래서뿐만 아니라 은총 아래서 역시 있는 힘을 다해 투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자주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지는 생활을 나타냄) 때때로 승리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늘 승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을 요약하자면

1) 구원 받는 믿음은 감정적인 기쁨을 가지게 하나 감정에 좌우되는게 아니다.

2) 믿음으로 얻는 구원 후도 마귀의 시험은 계속된다.

3) 율법 아래서 뿐만 아니라 은총 아래서도 죄와의 싸움은 계속된다.

4) 은총 안에서 싸우는 자녀에게 주께서 도움이 되어 주신다.

5) 은총 안에서 그는 이제 늘 승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그의 일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예수 나의 주님은 나의 마음과 입 속에 계셨다. 오로지 내 눈이 주님만을 바라보고 내 영혼이 주님만을 섬기는 그곳에서 내 모든 힘이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럼에도 원수는 나에게 두려움을 넣어주었다. 네가 정말 믿는다면 보다 뚜렷한 변화는 왜 없느냐? 그것은 내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것은 안다. 나는 현재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 오늘은 내가 죄를 짓지 않는다. 예수 나의 주님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분명히 안다”

중생의 체험은 그로 은총 안에서 영적인 힘을 충분히 공급 받게 하는 것이 되었고 다시는 죄의 멍에는 메지 않는 자유인이 되게 하였다.

회심후 그는 3개월간 독일 모라비아 교도들을 방문하는데 이는

1) 조지아에서 부터의 마음의 소원이었고

2) 마음이 상하고 찢겨 있어

3) 믿음의 충만한 능력을 얻고 영혼이 새힘을 얻고 계속 달음질치기 위해서였다.

(예배, 교육사업 관찰, 진젤돌프와의 대화 수동적 신앙에의 거부감)

4) 야외 설교

 

1739년 웨슬리에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데 일생동안 계속된 야외 설교이다.

회심을 전후한 웨슬리의 설교에 영국 교회와 대학 당국자들은 비난과 경계를 하였고 배척과 함께 설교금지를 하였다.

회심 후 그가 행한 첫 설교는 성 마리아 교회에서의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라”였다. 더 이상 강단에 설수 없게 된 그는 옥외 설교를 1739, 4,1 주일에 시도하였다.

그의 옥외 설교의 첫 제목은 산상수훈 이었다.

4,2 눅 47:18-19의 말씀을 가지고 약 3000명의 군중에게 설교한다.

그의 노천 설교에 모인 수는 1500-15000명, 때로는 30000명이 모이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 본문은 그의 설교의 성격을 나타낸다.

1)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호14:4)

2)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고전1:18)

3) 너의 목 마른 자들아 이리로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4) 갚을 것이 없음으로 다 탕감하여 주었더니(눅7:42)

5)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우리의 지혜와 의와 성결과 속량이십니다(고전1:30)

6)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게 해 주실 것입니다(요일:17)

7)그를 믿는 사람 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한 것이다(요3:15)

8)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 와서 마셔라(요7:37)

9)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 주러왔다(마20:28)

 

이것은 웨슬리의 설교 목적과 내용이 어떠한 것이었나를 짐작케 해주는 것이다.

야외 설교에 따른 무수한 비방과 핍박이 따랐는데 (무지하고 악한 군중과 영국 국교회로부터) 심지어는 그의 설교를 듣고 따르는 감리교도들의 집을 약탈하고 방화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함께하심 가운데 그는 이 모든 방해를 이기었다.

감리교도를 비방하는 연극에 1500명의 군중이 극장에 모였는데 1,2,3,4,5차에 걸친 극장 붕괴 사건으로 중단한 일이 있기도 하다.

그의 설교는 영적으로 갈급해 하던 무리에게 큰 감명을 주는 것이었으며 굶주린 양떼가 푸른 초장을 보고 달려오는 것 같이 굶주렸던 영혼들은 그의 설교에 달려 나오기 시작하였다. “ 그는 전 영국을 태우는 불길이었으며 ”향후 50년간 말을 타고 다니며 전도를 하였는데 135000명의 사람을 회개시키고 514명의 자원 선교자를 양성하였다. 하루에 평균 4,5차례 설교하였고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치며 전 영국을 다니며 전도하였다.

그는

1) 평생 야외에서 3000-30000명까지 모아 놓고 설교하며 회개시킨 위대한 설교자였고

2) 회개한 이들을 속회와 밴드로 묶어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양육한 조직가였고

3) 엄격하고 이상적인 기독교 학교를 세워 교육한 실천적인 교육가였고

4) 광부 자녀를 위한 교육, 고아원, 의료원, 조합, 생산시설을 마련하여 무직자들의 생계를 도운 사회 사업가였고

5) 거룩하고 아름다운 찬송가 작자였고

6) 탁월한 저술가였고(400권의 저서, 성경 주석, 성시집, 교회음악, 영국역사, 자연과학,위생, 히,희,라,불,영 문법 저술)

7) 다량의 독서가였다(2000)

 

여기서 우리와 관계있는 그의 기독교 학교 교육에 대해 살펴보면

그의 교육적 관점은 계몽주의 시대의 문화와 이해 위해 세워진 기독교 교육으로부터 진정한 기독교 신앙 위에 세워진 교육을 이루는 것이었다.

“지고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와 사회에 쓰임 받도록” 이것이 그의 교육의 목표였다.

그가 설립한 킹스우드는 올드 하우스 뉴 하우스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광부 자녀 교육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목사의 자녀를 위한 기관이었다.

1) 종교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교육

2) 하층 자녀 (무신 계급을 위해 교육하였고

3) 철저한 정신으로 (엄격한) 교육하였다.

교과 과정은

1) 라틴어, 헬라어, 불어 등

2) 수학, 지리, 전기학, 중세문학, 논리학, 수학, 음악 등

3) 원시 기독교 고전, 순서에 따른 성경 읽기, 기독교 문고를 설정하여 연차적으로 읽게 하였다.

그는 거기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악에서 떠나 연약과 우유부단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성장하게 하려 하였다.

수차례의 실패 가운데 그가 목표하던 이상적 교육을 이룰수 있었다.

교사 임명에서도 그는 기독교 교사의 사명을 확인하였다.

만약 당신이 그들을 가르치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읽고 쓰기 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당신의 수고가 열매를 맺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추수때가 되면.. 거두어 들이게 될 것입니다“

 

웨슬리는 가난한 가정이었으나 밝고 건강하게 자라났으며

“외모는 매우 빈약하였다(키는 작고 못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단정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링컨 대학 재직시 시작한 조기 기상의 습관을 평생 지켜 아침 시간을 경건이 활용하였다. 일생에 두 번의 연애와 한번의 결혼(47세)을 하였으나 연애에서는 성공하지 못하였고 결혼도 행복하지는 못한 것이었다.

그의 생애는 하나님이 또 다른 기쁨으로 충만히 채워진 것이었다.

 

웨슬리 시대에 불란서에서는 불란서 혁명의 사상적 지도자였던 볼테르가 등장 하였는데 유럽 무신론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그의 영향은 영국에서 토마스 페인에 의해 옮겨져 영국 사회를 혼란케 하였다. 이들은 우주 자체가 곧 신이라고 믿는 자연신론자들 이었고 하나님의 존재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의 희망도 믿지 않는 이들이었다. 이같은 자연주의 사조는 유럽 대륙을 급속히 세속주의화 함으로 신앙은 무기력하고 퇴색하였다. 웨슬리에 의한 신앙의 부흥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위에 이해 되어야 한다.

이같은 웨슬리에 의한 신앙의 부흥이 영국을 폭력 혁명에서 건져 내었다라고 카알라일은 말하였으며, 이것은 영국 교계의 혼수 상태를 깨우치고 무지와 죄악과 육체적 고통과 방탕과 빈곤등 모든 사회악과 싸우는 열정과 계획이었으며 (영국 국민사 요한 리차드 그린) “웨슬리는 앵글로 색슨 족이 낳은 최대의 종교적 지도자이며 그의 종교 운동은 종교 개혁 이상의 영향을 끼쳤다. 웨슬리는 전 인류 사회에 새로운 정신적 생명을 던져 주었다” (로이드 조지 수상)라고 말하게 하였다. 결국 웨슬리에 의한 신앙 부흥은

1) 18세기의 영국의 부패하고 무기력한 종교와 도덕을 혁신하여

2) 정신적 파산으로부터 건져 내었으며

3) 간접적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막대한 공헌을 하는

인간의 심령의 변화와 사회 개벽의 위대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웨슬리 회심 주간을 기념하는 것은

자신의 생애가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드려지고 자신을 하나님의 전적인 도구로 드려지기를 소원하던 한 청년과 그의 동료들이 믿음으로 거듭나는 회심, 중생의 체험을 한 이후 놀랍게 변화되어 전 영국을 불태우는 위대한 영혼의 불길로 태워지고 그로 말미암아 그 사회가 입은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되새기는 것이다.

오늘도 인본적 철학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있고, 사회 정치 운동에 몸을 던지는 이들도 있으며 풍요와 쾌락의 현세적 가치관을 쫓는 부류가 있고.. 여러 부류가 있을 수 있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쫓고 그에게 전폭적으로 드려진 그런 삶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이것이 세상을 비추고 변화시키는 길임을 믿는 자들이다. 그의 회;심 주간을 맞이하여 그가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버리고 온전한 그리스도인, 마음과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고 그의 삶이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기까지 끊이지 않고 가졌던 영적인 갈구와도 같이 하나님에의 전적인 헌신과 그에 의해 사로잡혀 사는 의의 제사로 드려지는 그런 믿음의 삶을 간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능력은 그것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생스터)

 

 

웨슬리의 사회 사상

 

국내 소비세, 노예제도, 나막신 문제

“밀수로 문화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천명이나 된다. 모든 항구도시에서 밀수에 관련된 사람들의 수가 상상할수 없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 도둑질한 물건을 사 들임으로써 국왕과 국민을 수탈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사람의 모든 법을 짓밟고 있다.

밀수업자는 도둑이다. 그런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지껄이지 못하도록 하자. 유럽의 모든 정부들이 이런 기생충들을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으로 추방하자“

 

-이와 같은 웨슬리의 싸움은 (밀수 근절 운동)당시 불의한 기득권자들과의 싸움이었다.

(불의로 치부하고 있는 계층에의 공격)

 

“노예 제도는 종교의 수치요 영국과 인간 본성의 수치입니다. 이일을 위하여 하나님에서 당신의 손을 들어 주시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람들과 악마의 저항을 받아 기절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신다면 누가 당신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계속하십시오. “같은 피조물이 인간 동료들의 눈물과 땀, 그리고 피로써 얻어지는 부보다는 정직한 빈곤이 더 낫습니다” 노예 제도가 도리어 아프리카에 문명의 빛을 비추었다고 궤변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동기이다라고 비판하였다.

 

(당시 영국 교회는 계급 교회로서 성직자의 태반이 귀족 출신이었으며 지방의 성직자는 그 곳 지주들에 의해 선임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정부나 부자들에게는 시녀와 같은 처지였다. 이것은 종교의 권력에 대한 시녀적 위치로의 전락인데 그는 이를 거부하고 모순ㅇ늘 비판하며 충고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에, 인간이란 이름에 가공할 만한 불명예가 있다니, 세상에 전쟁이 있다니, 사람들 사이에 전쟁이 있다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전쟁이 있다니....”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에 대하여, 그는 이 두 나라가 기독교를 신봉하는 나라였다는 점에서 크게 충격을 받았다)

 

“신령과 진리로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생각과 말과 행위로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그에게 들어 올리고서 외적 행위를 행하는 것, 매일의 일을 하나님께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고 팔고 먹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광야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못지 않게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1) 필요에 따라 누구에게나 기꺼이 나누어 주시오

2) 왜 이들 모두에게는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가? 그들은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일자리로 돌아 갈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생활 필수품의 가격 인하를 도모하라.

빈곤 문제의 또 하나의 원인은 물가고이다. 이 물가의 폭등의 원인은 높은 세율 때문이고 높은 세율은 전쟁으로 인한 국가 채무에 있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오늘의 식량난에 대한 견해)

 

“만일 어떤 사람이 유산으로 남겨줄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재산이 있다면 가족들에게 먹고 살 만큼의 것은 물려주어야 하겠지만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께 최대한의 영광을 돌리는 방법으로 써야한다”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버시오. 가난이 괴로운 것은 남에게 웃음 거리가 되기 때문이 아니고 먹을 것이 부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럽고 싸늘한 숙소로 돌아가서 충분한 영양을 회복할만한 음식조차 먹을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어떤 직업들은 비소를 많이 취급하거나 해로운 무기물을 취급하거나 또 용해된 납이 들어있는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게 해서 건강을 파괴 시킵니다”

- 생명, 건강, 타인, 자기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돈을 버는 것을 피하라 -

(고리대금, 주정 제조 및 판매 등)

“그들은 독살자들이며 양떼를 모는 목자처럼 사람들을 지옥으로 내 몰았습니다. 그들이 얻은 이익이란 사람들의 피 밖에 무엇이 있습니까?”

“귀중한 달란트를 바다에 던지지 마십시오... 재물을 무익한 경비로 쓰지 마십시오...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 생활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하지 마십시오. 왜 당신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기 자녀들을 위해 화려한 식사와 값비싼 옷, 사치스러운 물건을 위해 돈을 함부로 낭비해야 되겠습니까?

자녀들에게 돈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녀들의 영혼을 멸망시킬 함정을 파 놓는 것입니다“

 

“될수 있는대로 저축하는데까지 가면 다 된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사람이 거기서 그치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나가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 쌓아 놓기만 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저축이라 할 수 없습니다. 돈을 땅 속에 묻느니 차라리 바다에 던지는 것이 낫습니다. 될수 있는대로 많이 벌고 될수 있는대로 많이 저축하고 그리고 나서 될수 있는대로 모든 것을 주십시오”

 

“나는 런던에 은숟갈 2개와 브리스톨에 2개밖에 없습니다. 내 주위에 빵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지기 전에는 영원히 은기명을 더 사지 않을 것입니다”

 

돈을 사용할 때 자문

1)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사는가?

2) 재산의 소유자로서가 아니라 주님의 청지기로 쓰고 있는가?

3) 이것이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는가?

4) 의인들이 부활할 때 상급받을 만한 일인가?

 

“그리스도의 대사 불멸하는 영의 목자, 하나님의 택하신 이스라엘의 보초, 천사들이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신비의 관리자로 임명된 자가 저기 간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런던으로 브리스톨로, 노드햄턴으로. 그들은 왜 가는 것일까 돈을 보고 간다. 더 많은 보수를 받으려고 간다”

 

“이 땅에 홍수처럼 만연하고 있는 불의와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원수의 목전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가장 숭고한 방법의 하나이다.”

 

 

출처 : 효덕의 신앙과 신학(이경남 목사의 블로그)
글쓴이 : 비느하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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