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Helen Keller) 볼 수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헬렌 켈러
헬렌 애덤스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년 6월 27일 ~ 1968년 6월 1일)는 미국의 작가, 정치 활동가 및 교육자이다. 그녀는 인문계 학사를 받은 최초의 시각, 청각 중복 장애인이다. 헬렌 켈러의 장애로 인해 가지고 있던 언어적 문제를 앤 설리번 선생과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한 유년시절을 다룬 영화 《미라클 워커》로 인해 그녀의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헬렌 켈러는 많은 집필 활동을 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여행을 자주 다녔고 또한 전쟁에 대해 미국이 전쟁가담의 구실로 내세운 민주주의 옹호론을 "인종차별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겠다는 말인가?"라고 논박함으로써 반대 입장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여성의 선거권과 참정권, 비참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한 사회주의 운동가이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과 질병
앤 설리번은 1887년 3월에 헬렌의 집에 도착하여 곧바로 헬렌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헬렌이 단어의 스펠링을 그녀의 손에 적어주는 식으로, 그녀가 헬렌에게 선물로 가져온 'd-o-l-l'(doll, 인형)의 스펠링으로 시작하였다. 그 다음 달에는 헬렌이 의사소통 방식에서 큰 발전을 보였는데, 그녀가 헬렌의 손에 차가운 물을 틀어주고 '물(water)'이라는 단어를 손바닥에 쓰면서 연상시켜주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헬렌은 설리번과 세상의 다른 흔한 사물들을 익히는 데 시간을 쏟았다. 오른쪽 눈이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헬렌은 사물의 윤곽을 형상화시키며 배웠다. 그녀의 양쪽 눈은 의학적인 이유와 외관적인 이유때문에 유리 복제품으로 대신 교체되었다.
정규 교육
1888년 5월 초, 헬렌은 펄킨스 시각 장애 학교에 등록하였다. 1894년에는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이 라이트 휴머슨 청각 장애 학교와 호레스 만 청각 장애 학교를 다니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했다. 1896년에는 매사추세츠로 돌아가서 케임브리지 여학교를 다녔다. 그 후로 1900년, 헬렌은 레드클리프 대학교 입학을 허가받았다. 그녀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마크 트웨인은 스텐다드 오일의 간부이자 그의 아내와 함께 헬렌의 교육비를 지원해준 헨리 H. 로저스에게 그녀를 소개시켜 주었다. 1904년에 24살이 된 헬렌 켈러는 레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하면서 최초로 학사학위를 받은 시청각 장애인이 되었다. 그녀는 독일어를 비롯해 5개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그녀의 동반자
헬렌 켈러는 퀸스의 포레스트 힐즈로 앤 설리번과 남편 존 메시와 함께 이사했고, 집을 미국 시각 장애 재단의 지지를 위한 노력의 거점처럼 삼았다.
1936년, 앤 설리번이 사망하고 나서 헬렌 켈러와 폴리 톰슨은 코네티컷으로 이사했다. 그들은 세계적으로 여행을 다녔고 또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기금을 늘렸다. 톰슨은 1957년에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는 발작을 일으켰고, 곧 1960년에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1957년에 원래 폴리 톰슨을 치료하기 위해 데려온 간호사인 위니 코베리는 톰슨의 죽음 이후로도 헬렌의 집에 남아서 그녀의 남은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정치적 활동
헬렌 켈러라고 하면 흔히 앤 설리번 선생의 인내와 사랑으로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 여성으로 생각하지만, 역사 속의 헬렌은 진보적 사회운동을 실천한 사회주의 지식인이었다.
인권운동
헬렌 켈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연설가로 점점 더 유명해졌다. 그녀는 불리한 신체조건 등 많은 장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지지 및 옹호로 많이 기억된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론자이자 평화주의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반대자였으며 또한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에 여성 피임 지원자였다. 1915년, 헬렌 켈러와 조지 케슬러는 '헬렌 켈러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비전과 건강, 영양 연구에 열심이었다. 1920년에는 그녀가 미국 자유 인권 협회(ACLU)의 설립을 도왔다.
일본 방문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은 39여개 국가들을 돌아녔는데, 그 중에서도 일본의 몇 차례 방문으로 일본인들의 인기인이 되었다.
유명인사들과의 만남
헬렌 켈러는 그로버 클리블랜드부터 린든 존슨까지 모든 미국 대통령들을 만났고 또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찰리 채플린, 마크 트웨인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의 친구였다.
사회주의 운동
헬렌 켈러는 29세 때인 1909년 미국 사회당(영어: Socialist Party of America, 1901년 창당)에 입당하였으며, 공개 서한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 발표와 방송 출연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미국의 도덕주의 비판과 민중운동
한계
하지만 헬렌 켈러의 사회주의 운동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이 당원으로 활동한 미국 사회당의 분열을 막지 못한 것이다. 당시 미국 사회당은 1913년 1월, 11만 당원 중 2만 명이 빌 헤이우드 집행위원에 대한 제명 조치에 반발, 탈당할 정도로 엄청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해 헬렌 켈러는 일치하여 민중의 편을 들어야 할 사회당이 두 파벌로 갈라져 서로 비열한 싸움을 벌인다고 비판했지만, 결국 내분을 막지 못했다. 헬렌 켈러는 1909년부터 1921년까지 노동 계급의 지원자들에게 투서하였다. 그녀는 미국 사회당의 대통령 후보자인 유진 뎁스의 모든 대통령 선거 운동들을 지원하였다.
보수언론들의 인신공격
"이때는 그가 제게 보내주었던 찬사들이 제가 그때를 떠올리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저에겐 너무나도 과한 칭찬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지금 그(편집장)은 저와 대중들에게 내가 장님이고 귀머거리이고 또한 오류를 쉽게 범한다는 걸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그를 만난 후부터 몇 년 동안 내 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꺼려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오, 어리석은 《브루클린 이글》! 사회적으로 눈이 안보이고 귀가 안들리는 것은 우리가 예방하고자 노력하는 신체적인 시청각 장애를 일으키는 질서를 옹호합니다."
노동운동
헬렌 켈러는 1912년에 세계산업노동자 단체(IWW 혹은 워블리)에 가입했으며[16] 의회 사회주의는 "정치의 수렁에 빠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1916년과 1918년사이에 IWW를 위한 글을 썼다. 내가 왜 IWW가 되었나라는 글에서 [18] 헬렌 켈러는 그녀의 시각 장애인들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나오는 실천적인 행동의 동기를 설명하였다.
"저는 시각 장애인들의 상태를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로 시각 장애를 인간의 제어를 벗어난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제가 대개 고용주들의 탐욕과 이기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잘못된 노동 환경이 존재하기 쉽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악은 그것에 일정부분 기여했습니다. 저는 가난이 여성들을 계속 장님인 상태로 끝나는 수치스러운 삶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여성들의 매춘과 시각 장애의 원인이 되는 매독을 언급한 것이다.
집필
22살에는 헬렌 켈러가 그녀의 자서전 내 삶의 이야기 (1903)를 앤 설리번과 설리번의 남편 존 메이시와 함께 출간하였다. 이 자서전은 그녀가 21살까지 자라온 이야기를 담았고 그녀가 대학생활을 하면서 썼다고 한다.
헬렌 켈러는 그녀가 어떻게 세계를 느끼는지 알게 깨닫게 해주는 내가 사는 세계를 1908년에 집필하였다. 어둠의 바깥이라는 사회주의에 대해 쓴 에세이 시리즈는 1913년에 출판되었다.
그녀의 영적인 자서전인 나의 종교는 1927년에 출판되었고 내 어둠속의 빛과 같이 다시 이슈가 되었다. 이 자서전은 논란이 많은 신비주의 신학자인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지지한다. 그는 최후의 심판과 예수의 부활에 종교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에는 스데벤보리아니즘이라고 이름이 붙기도 한다.
헬렌 켈러는 총 12개의 책을 출판하였고 많은 기사들을 썼다.
아키타
1939년까지 품종 기준(breed standard)이 만들어졌고 개 쇼(dog shows)가 열렸지만 이런 행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멈추게 되었다. 헬렌 켈러는 아키타 저널을 썼다.
"만약 천사의 털이 있다면 그것은 카미카제의 털이다. 나는 다른 애완동물에게서는 영원히 이렇게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없다는것을 안다. 아키타 견은 모든 것에 있어서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이 개는 온화하고 사교적이고 믿음직하다."
말년
헬렌 켈러는 1961년에 지속적인 뇌졸중에 시달렸고 말년을 그녀의 집에서만 보냈다.
1964년 9월 14일, 미국의 대통령인 린든 존슨은 헬렌 켈러에게 가장 높은 두개의 훈장 중 하나인 '대통령 훈장'을 수여했다. 1965년, 헬렌 켈러는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뽑혔다.
헬렌 켈러는 '미국 시각 장애인 재단'의 기부 활성화를 위해 헌신의 노력을 다했다. 헬렌 켈러는 말년을 미국 맹인 재단에 자금을 제공하는일에 온 힘을 다했다. 그녀는 1968년 7월 1일에 코네티컷, 웨스트포드의 아컨 리지(Arcan Ridge)에 위치한 그녀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워싱턴 D.C.에 위치한 성공회 대성당인 워싱턴 국립 대성당(영어: Washington National Cardinal)에서 행해졌으며 그녀의 유해는 영원한 동료이자 선생이었던 앤 설리번과 폴리 톰슨의 옆에 놓였다.
헬렌켈러의 명언
♡ 말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사상이다. ♡ 신은 용기있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 고통의 뒷맛이 없으면, 진정한 쾌락은 거의 없다. ♡ 낙천(樂天)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신앙이다. ♡ 아름다움은 내부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빛이다. ♡ 태양을 바라보고 살아라. 너의 그림자를 못 보리라. ♡ 세상이 비록 고통으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힘도 가득하다. ♡ 인생의 불모지를 친절로 열매가 풍성한 곳으로 만드는 사람들과 상종하라. ♡ 당신의 마음속에 천국의 비전을 담고 다녀라. 그리고 그 비전에 부합되도록 개선 시켜라. ♡ 희망은 인간을 성공으로 인도하는 신앙이다. 희망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도 없다. ♡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한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
헬렌은 50대에 쓴 에세이 '사흘만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에서 만약 기적이 일어나 사흘 동안만 눈을 뜰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날에는… 나에게 삶의 보람을 찾아 준 친절함과 따뜻함과 동료애로 가득한 사람들을 만나보리라. 눈을 뜬 순간 어릴 적에 외부세계로의 문을 열어주었던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보리라. 단지 얼굴의 윤곽만을 보지 않고 나의 기억 속에 깊이 간직할 수 있도록 얼굴을 관찰하고 그리하여 고난의 교육의 임무를 완성한 그 동정어린 친절과 인내의 산 증거를 발견해 내리라. 그리고 소중한 친구들을 모두 불러내어 그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그들 안에 있는 아름다움의 외적 증거를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리라. 그리고 순진한 어린아이의 얼굴과 충직한 개의 눈을 들여다보고, 집안에 있는 모든 작은 물건들, 발밑 양탄자의 따뜻한 색깔들, 벽의 그림들, 그리고 인쇄된 책들을 보리라.
오후에는 숲속을 오래 거닐며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에 나의 눈을 취하게 하리라. 꽃들의 향기와 새들의 지저귐과 시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돌아오는 길에 농장에 들러 부지런히 움직이는 말과 흙을 벗하고 사는 농부의 삶을 보리라. 저녁이 되면 석양에 빛나는 황홀한 노을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리라. 밤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리라. 그날은 아름다운 기억들로 가득차서 한잠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
둘째 날에는… 동트기 전에 일어나서 밤이 아침으로 바뀌는 가슴 설레는 기적을 바라보리라. 그리고 잠든 대지를 깨우는 태양의 장엄한 광경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리라. 그리고 세상의 과거와 현재를 두루 살펴보리라. 낮에는 자연사박물관과 미술사박물관을 돌아보고 밤에는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오직 한 개의 연극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나는 점자를 통해 나에게 전해졌던 수많은 연극의 모든 장면을 그려 볼 수 있을 터인데…
셋째 날에는… 아침 일찍 큰 길로 나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리라. 5번가에 나가 눈의 초점을 맞추지 않고 움직이는 각양 색깔의 옷을 걸친 여인들의 색깔의 파노라마를 감상하고 싶다. 낮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에 올라가 시내 전경을 바라보고, 시내를 돌아보면서 슬럼과 공장과 공원에 가 보고 싶다. 이윽고 밤이 이르러 나의 보지 못함의 일시 유예가 끝나고 영원한 암흑이 나에게 다시 닥칠지라도, 미처 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할 틈도 없이 나의 마음은 광휘로 가득 찬 기억들로 꽉 차 있을 것이고, 내가 접촉할 때마다 모든 사물들은 그 모습에 대한 빛나는 기억들을 새롭게 하여 줄 것이다.
앤 설리반 - 설리반 선생님
현재 위대한 성인, 헬렌켈러를 만들게 힘은 바로 설리번 선생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녀의 부모는 1847년 아일랜드 감자 기근을 피해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고 어머니는 결핵에 걸려있었다(그후 설리반에 8살일때 사망하였다.)
앤 설리번은 5살 때, 트라코마에 감염되었는데, 이 질병은 잘못하면 시각을 상실시킬 수 있는 위험한 질병이였다. 그러나 퍼킨스 시각장애인 학교에 다니면서 그녀는 수술을 받아 시력을 회복 할 수 있었다. 1886년 그녀는 그 학교를 졸업하였고 그녀의 시력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 때, 퍼킨스 시각장애인 학교의 교장이였던 마이클 애나그너스는 그녀를 헬렌켈러의 교사로 위촉하였다. 이는 헬렌켈러와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게 해준 위대한 인연의 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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