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의 유형들(Die Gattungen der Psalmen)
1. 시편
시편은 아마도 가장 많이 인용되고 설명될 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 가장 신뢰받는 구약의 책이라 본다. 그러나 시편의 역사적인 이해는 굉장히 난해하며 모든 노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려움이 그대로 남아 있기만 하다. 이런 난해성의 마지막 이유들을 엄밀하고도 정확하게 알아내는 일은 학문적인 관찰자에게나 어울린다; 왜냐하면 그런 관찰자에게는 시편 한절한절의 적은 부분이라도 그 난해성을 극복하려는 기대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난해성(Schwierigkeiten)은 처음에는 히브리시의 어법류의 독특성에서부터 커졌다. 고대 이스라엘은 그의 직관(Anschauung)의 능력이 강했고 그의 감수성`감정(Empfindung)이 심오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논리적인 사고(die Logik der Denkens)에 있어서는 희랍사람들보다 못하였다. 그래서 히브리시에 있어서, 두 세 마디로 작성되는 매우 짧은 문장들로 진행하는 히브리어의 시귀절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좀 짧은 듯은 문장들은 시인들에 의해서 아주 자주 그의 논리적인 결합의 표시 없이 나열되어 있다. 히브리인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시를 읊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여기에서 희랍사람 같으면 둘째 문장은 첫째 문장의 결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그렇기 때문에"라는 접속사를 빠뜨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시들은 왕왕 종의 주명악(奏鳴樂, Glockenspiel)과 같다; 개별 가락들은 힘차고 웅장하게 울린다. 그러나 모든 가락들은 제 소리글 내고 있다. 그리고 오로지 그런 소리를 아는 자만이 예술가`음악가의 의도에 따라 형성된 멜로디(선률)을 가려서 들을 수 있다. 이런 창작이 성립되고, 시인에 의해서 표현되지 않은 뜻을 쉽게 보충해야만 했던 시대에 있어서, 그런 창작의 이해는 아주 어렵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후 시대 사람들에게는 그런 내적인 문맥이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와 닿지는 않는다. 게다가 모든 시 특히, 시편의 시는 그의 품성에 따라 불명료한 표현 방법`표현법(eine unbestimmte Ausdruckesweise)을 애용한 사실이 있다.
담담하고 특히 학문적인 산문은 사물들을 가능한 한 최대로 엄정하게 표시하려고 한다. 시의 종류는 일반적인 현실성과 본질적인 것(das Wesentliche)을 말해야 한다: 시작(詩作, Dichten)은 단순화하는 것이다. 끄집어내거나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 것(herausholen), 고양시키는 것(emporheben), 생략하는 것이다.
이렇게 탄식시인은 - 뒤에 나오는 장(paragraphen)에서 이러저러한 유형들을 상세하게 - 아마도 자기의 많은 적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탄식시인은 그런 적들이 어떤 류의 인간들인지 상세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묻는다 : 탄식시를 부르짖는 그들에게 종교의 적이 존재하는가? 그런 시인의 백성의 적이 있는가? 그의 개인적인 적이 있는가? 개인적인 적대자가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이 탄식시인을 공격하는가?
적대자들은 탄식시인을 공격해서 무엇을 취하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본문자체에서부터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거나 적어도 충분한 것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저자의 운명에 대해서 명쾌한 상(Bild)을 획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실감한다!
- 아니면 탄식시인은 모든 풍자(변죽거림, Anspieluugen)와 상징`표상들(Bilder)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적들은 탄식시인에게 마치 사냥꾼들 이 들짐승에게 하는 것처럼 덫을 놓았다; 적대자들은 탄식시인을 향하여 무엇을 행하고 싶었던가? 탄식시인은 자기가 깊은 수렁에 빠져 흉용한 파도 물결이 그를 덮치는 것을 단언하는 것 같다 : 확실히 표상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어떻게? 시인이 살던 시대에서 모든 이런 묘사`표현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각자는 시의 언어형식(die Formenaprache der Gedichte)과 전제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해설자`설명자들은 그러한 경우에 우왕좌왕하고, 때로는 아주 실패하게 된다. 좌우간 그들은 불활실한 상태에서 시를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시의 해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인의 기질, 두려워하지 안고 바로 추구하고 탐색하는 열정이 계속해서 과잉된 아주 심한 과장으로 인해 저해를 받는다. 현대의 탐구자는 그의 현실의 의미, 그의 정신의 엄격성과 평정성에 있어서 완벽한 자요, 그리고 더군다나 냉정성을 기하는 주석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언어학에 조예가 있는 성서해석자는 흥분하기 쉬운 열혈(熱血)의 히브리인의 분출과 발산 행동 앞에서 별도리 없이 속수무책으로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이따금씩 그런 언어들에게서부터 어지간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 희귀한 타개책을 취한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시인은 자기가 이미 죽었지만 지하 세계에서부터 구출되었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또 자기의 개인적인 적들을 대항하여 세계의 심판을 환기시킬 수 있으며 가난하고 약한 유다의 왕에게 모든 이방민족(열방들)을 통치하고 승리하려는 소원을 나타낼 수 있을까? 물론 한번도 그렇게 말할 수 없고 현대인에게 그러한 과장법(Hypergel)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서 히브리시에 있어서 시제들(Tempora)의 사용법에서 성장한 본래적인 난해성들을 고려해 보자. 히브리어 문장 형성 특히, 시적인 문장형성은 좀 단순 소박한 것(etwas Primitises)이다. 그리고 시제들은 대단히 애매하고 의미가 다양하다. 그래서 현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주석들(die Kommentare) 자체는 하나의 시(詩)가 현대의 역경에 대한 탄식(Klage)인지 아니면 다행한 구출에 대한 감사(Dank)로서 파악 되어야하는지에 대해서 불확실한 일이 생길 수 있다. 시 41;116;사 38,10-20 참조.
시편(die Psalmen)은 아주 포괄적이지는 못하다는 사실이 추가된다. 히브리 시편시인이 종종 가장 좁은 틀에서 가장 심오하고도 섬세한 영향을 목적하고 또 그런 시인들이 가끔 더욱이 아름답고 인상적일수록 그의 부피가 족은 것이 이스라엘의 정신에 속한다면, 그런 것이 우리와 같은 후대 사람들에게는 더욱이 이해하기가 더 어렵게 되는 것이 아닌가! 긴 시들은 해석하기가 좀더 쉬울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개별적인 구절들이 그 안에서 해설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인들, 시의 계기들, 성립시대에 관한 신빙할만한 전승이 거의 빠져있다! 사전의 배려(Vorsehung)가 과제`임무를 맡겨주는 사람들이 후 세대를 베려하고, 우리들에게 개별적인 시가들의 이해와 시대에 관한 몇 가지 확실할 수 있는 암시를 남기면서 이런 귀중한 것을 수집하게 놓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거의 완전히 전승을 내던져 버렸으며, 이런 간격과 틈을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서 보충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서 시편에 관한 우리의 연구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본문의 상태로 말미암아 초연(?然)히 - 의기를 잃고 - 착잡하게 된다. 시편 본문은, 유감스럽게도 의심할 수 없지만, 특별히 우수에 잠긴 애처로운 저술 상태로 있다. 전체적인 시귀절들은 확실하게 번역할 수가 없다. 왕왕 전체적인 시의 이해는 지금까지의 수단을 가지고 있는 불분명함에는 틀림없다.
이제 끝으로 가장 중요한 고찰, 이를테면 개별시편들의 내적인 질서`차례가 전적으로 전달`전승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 시편을 수집하는 가운데 종종 유사하고 비슷한 것끼리 함께 놓여있다. 말하자면 "개인탄식시들" 시 5-7;54-57;61-64;69-71;140-143; "찬양들" 시 65이하(95-100);103-105;134-136;145-150; "감사 시편들" 시 40이하; "제왕시가" 시 20이하; "예배공동체의 탄식시들" 시 79이하; "지혜신탁들" 시 127,1이하.3-5; 알파벳에 따른 구절들 가진 시편 111이하; 이스라엘 행위의 운명에 관하여 시 74-83; 시 105이하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시 46-48은 종말론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 사이에는 아무런 내적인 관계는 발견할 수 없다. 특별히 다음 부류들 사이에서 그렇다 : 시 15-20;22-24;28-30;31-37;41-46;48-51;71-75;76-79;80-82;83-87;88-95;100-102;108-110; 이런 부류들 가운데는 다른 시편들과 유형적으로 일치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른바 순례의 시가들 120-134 만에도 역시 거의 다양한 유형들이 결합되어 있다. 문제가 있는 경우(불확실한 경우) 하나의 시편이 그와 가까이 있는 시편에 따라 이해될 수 있다는 어떠한 확실성도 나타나지 않는다. 유형들이 앞에서 언급되고 인증`인용 부호가 매겨진 유형들에 관해서는 다음의 장(Paragraphen)에서 다룬다. 그래서 그것은 괴테가 동서 디반(축복의 집달리)에서 언급한 바 있는 개별 시편에는 적용된다 : 각명(Inschrift)은 그 뒤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각명은 그 자체이다. 그리고 너에게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 그러나 이제 그런 것과 관련을 갖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은 학문의 깨칠 수 없는 기본원칙이다. 따라서 시편연구의 본래적인 과제는 개별시가들 사이의 결합을 다시 찾아내는 것이다. 이런 시가들은 전승에 의해서 제공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단지 어떤 일정한 부분으로 제공되는 것들이다.
우리가 이런 시편이 내적으로 서로 소속 되 있는 것을 함께 모은다면, 면밀한 비교를 통해서 시문(Gedichte)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얻고 그 다음 뚜렷한 대조를 근거로 해서 많은 개별적인 어려움들을 해결 해 낼 수 있으리라 희망을 걸 수 있다.
2. 전승된 소재 전체에 대한 개괄을 제시
성서의 시편의 시(詩)들만 고찰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편들이나 시편과 비슷한 시문들이 성서 시편 밖에도 존재하였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가 비성서적인 시편과 관련을 맺었을지라도, 시문들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런 기본원칙을 진지하게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요이유들 가운데 하나이다. 말하자면 현대의 시편연구는 아주 혼란스럽고 불명확한 상(像)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연구자들은 설령 그가 다르게 사건의 참된 상을 보존하려고 해도, 우선적으로 사물`사실들이 다소 우연하게 나타나는 그런 사건의 문맥을 도외시해야만했다; 오히려 그런 사물들을 그런 문맥에서 살피는 것이 목표가 된다. 말하자면 그런 사물들이 원래 점유하였던 문맥을 관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는 그러한 시가들(Lieder)이 정경 안에서 혹은 정경 밖에서, 더욱이 그것들이 이스라엘 안이나 또는 밖에서 발견되는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여할 필요가 없다. 그런 시가들이 다만 실제로 시편과 내적인 친속성만 보인다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 밖에서 이런 시가들이 비교되는 시문들에 대해서 얼마나 높은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하는 것은 탐구과정에서 비로소 드러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부분들을 잔뜩 가지고 있다. 만족스러운 효과(Wiskeung)가 이야기책을 저술한 저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 추이가 산문의 과정을 때로 중단시킨다면, 추이는 싯귀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따라서 그런 부분들은 어떤 위치에서는 시가들을 삽입시키고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 돌려 그들의 입으로 말하게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와 그리고 다름에도 계속해서 완전한 것은 못되지만 몇 개의 실례들을 말하겠다; 몇 개의 개별적인 유형들 가운데서 전체적으로 고찰된 소재들이 모아졌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유형의 시가들을 보존하게 되었다. 모세의 바다의 노래(출 15), 한나의 감사시(삼상 2), 시 18편에서 반복되는 다윗의 감사시(삼하 22), 요나의 감사시(욘 2)와 히스기야의 감사시(사 38,9이하), 게다가 역대기(대상 16,8이하)에 나타난 시편 부분들의 수집, 그리고 우리는 외경서들 가운데서도 토비아의 노래(톱 13)와 유디트(윳16)의 시가들, 신약에서는 마리아와 스가랴의 찬양들(눅 1,46이하. 67이하들)이 보존되었다.
욥기서는 더군다나 그의 총체적인 태도가 입증하는 바와 같이, 시편시문의 토대에서 성장하지 않았지만, 시인은 개별적으로 그래도 시편을 많이 의존하였다 : 예를 들면 시인은 욥의 엄청난 고통을 서술하려고 하거나 욥은 무죄하다고 단언하려고 할 때, 시편에서 찾아 질 수 있는 "탄식시"들과 "무죄의 시가"를 울리게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方途)를 알지 못하였다. 욥 10;13,23-14,22;16,6-17,9;19,7이하 등등; 시인이 하나님의 지고한 위엄을 찬양하려고 하면, 그는 "찬양시"를 불렀다. 그런 찬양시들은 어조나 형식`양식에 있어서 시편과 비슷하다. 욥 5,9이하;9,3-13;12,13이하;26,5이하;36,26이하;38,4이하.
특별히 많은 시편류의 부분들은 예언서들에서 나타난다. 더욱이 이스라엘 예언은 원천적으로 종교적인 서정시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래도 그런 예언의 발전의 어느 단계에 있어서 완전하게 표현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에 있어서 수준높은 백성에게 효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른 문학적인 유형들과 같이 시편시(Psalmeadichtung)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
예언자들이 대개 그의 현재의 곤경과 또 구출에 대한 열망과 동경 가운데서 자기 백성의 탄식을 감동저긍로 표현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탄식시를 읊었다. 이런 시는 평소 예배공동체가 부르던 노래이다. 그와 같은 것이 시편에서도 나타난다. 렘 14,1-6.7-9.19-22; 사 63,11이하;미 7,7이하 참고. 혹은 그들은 이스라엘백성이 모든 곤경에서 해방되어, 자기 하나님에게 환호의 축제를 지키는 경우 부르게 될 노래를 찬양조로 지어냈다. 사12;25,1이하;26,1이하;42,10-12;49,13;52,9이하 등등 참고. 특히 예레미야는 조롱과 박해를 당해가면서 가끔 죽는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자기의 고통과 희망을 감동적인 시가를 통해서 쏟아 놓았다. 그것은 시편의 개인탄식시와 비슷하다. 렘 11,18-20;12,1-6;15,15-21;17,12-18 등등 참고. W.Baumgartner, Klagelieder des Jeremia 1917. 예언자들이 의존했던 서정시들에 관해서는 저자의 "Einleitungen "zu Haus Schmidt, Die gro?en Propheken 2 S. LVⅡff를 보라.
탄식시에 추가해서 예레미야 애가 3과 5가 다루어지는데, 이 양 탄식시들은 시편에 나타난 탄식시와 같은 계열이다. 그와 다른 반면 애 1;2;4;장은 만가(Leichenlieder)에서 유래하나 시편시들 가운데 편입될 수 있다.
특별히 풍성한 자료는 더 나아가서 외경서(Apokrgphen)에 나타난다. 예수 시락(Jesus Sirach)의 신탁수집서에 많은 서정시가 보존되어 있다. W.Baumgartner, Die literarischen Gattungen in der Weisheit des Jesus Sirach, ZAW XXXⅣ, 1914, S. 169이하.
그밖에 우리는 토비아와 유디트의 시가들을 고려하게 된다. 이미 알려진 것은 이렇다. 아시이라의 기도와 불난로 속의 세 남자들의 찬양인데 이 양 노래들은 희랍어판 다니엘서의 추가 부분에 들어 있다. 더 나아가서 므낫세의 기도, 바룩서의 서정시 부분, 맛카베어 Ⅰ서, 에스라 4서와 바룩묵시록 등등이다.
정말로 우리는 이런 시대에서 나온 전체적인 시편 수집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솔로몬 시편"은 주전 1세기에 기록되었다. 우리가 이런 부분을 성서시편 탐구를 위해서 충분하게 참작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특별히 그의 시대 확정`설정을 문제삼을 때에 어렵게 악화(惡化)되었다.
왜냐하면, 그래도 이미 앞에서부터 몇 개의 시편 혹은 많은 시편시가들을 맛카베어시대로 간주하는 이들은 시편 시가들을 확실히 후기 시대에 지어진 시들과 비교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詩)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까지 계속 되었다. 시편과 닮은 작품들은 신약에서도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다. 눅 1,46이하.67이하 외에도 요한계시록 4,11;5,9이하;11,7이하;15,3이하;19,6이하를 참고. 그렇다. 솔로몬 송시`송가(Oden Salomos) 자체는 주후`서기 세기경부터 영지주의 경향을 띈 유대교 계통의 기독교인에 의해서 지어졌던 것인데, 그런 송가들은 고대 양식들의 영향을 보이고 있다. 솔로몬 송가(Od Sal) 5;16,11이하;18;25;29 참고.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민족성(Volkstum)의 영역에 제한하여 있을 수 없으며 고대 다른 민족들의 서정시에서도 우리가 이스라엘과 비슷한 것을 보존하고 있는지를 두루 살펴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수십년 이래 엄청난 양의 바빌론과 앗수르의 제의시(Kuetusdichtung)를 알고 있지만, 사람들이 오랫동안 보아왔던 여러 창작물들은 시편연구를 위해서 아직까지는 충분하게 주목해서 유의하지 않았지만, 서정시편과 외적인 친속성 이상의 것을 제시하고 있다. (H. Zimmern, Babyloinache Hymnen u. Gebete 1905, ⅡAuswakl 1911; 등등 s. 6-7 책들을 보충)
이런 고대 중동의 시의 발전은 19세기에 시편 연구를 위해 가장 의미있는 시건었으며, 적어도 그런 것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고대 중동의 시는 성서시편 보다 수백년, 부분적으로는 수천년 먼저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세대와 모든 세대에게 지적된 관계에서 시편을 고찰한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개별 성서책 대신에 어떤 하나의 포괄적인 종교적인 시의 종류가 나타난다. 우리는 성서 밖에서도 일면의 원본들을 소지하고 있다. 그런 시의 종류들를 위해서 우리는 이스라엘과 외국에서 주전 3천년부터 기독교 형성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추적할 수 있다. 기독교 문화 영역에서 이런 종교시편의 종류는 점차적으로 고대 교회와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의 시(詩)로 말미암아 분리되었다.
그러나 그러므로써 동시에 우리들의 연구의 목적은 바뀌어졌다. 이제 우리들의 과제는 개별시편이나 시편의 책을 설명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 왜냐하면 커다란 문맥들을 주의하지 않고서는 지금까지의 연구가 내놓은 결과는 거절되기 때문이다 - 그의 최후의 목적은 전체시의 종류와 그의 역사, 확실히 동화 흡수된 과정들을 서술해야 한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서 시편들은 대개 기도문(Gebet)이요, 이스라엘 안팎에 있던 산문 기도(Prosagebete)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런 기도문이 표면적으로 전달되었던, 이야기에서 혹은 다른데서 그런 기도문이 언급되었던 간에, 전체적으로 통산(通算)적으로 받아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추가 될 수 있다; Hans Schmidt, Gebey Art. RGG, Woselbst Literatur und, 특별히 Heiler, Gebet 4 1921 참고.
3. 다양한 형태의 자료
그리고 그런 자료의 내부적인 분절을 제시하라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 그와 동시에 문학적인 창작물들이 다루어지기 때문에 이런 시의 종류의 유형들(dei Gattungen)이 고정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유형탐구(die Gattungsforschung)는 사람들이 임의로 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그냥 둘 수 있는 도락적인 취미(Liebhaberei)가 아니라 유형탐구는 근본적인 작업이다. 그런 기본적인 연구없이 어떤 다른 연구에서도 확고성, 안전성은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연구단계를 논의해야하는 확고한 근거가 된다.
이미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런 유형탐구의 중대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꽤 자주 시편개론을 유행에 따라서 시도해 왔다. 그래서 훗펠트-리임(Hupfeld=Riehm, Psalmen Ⅰ2, S. 3ff)은 전체자료들을 찬양시, 감사시, 탄식시와 간구의 시 그리고, 교훈시가들을 정리하였던 동시에, 실제로 몇 개의 유형들을 그의 본질적인 내용에 따라서 적절하게 표시했다. 설령 훗펠트는 교리학 개론에다가 이런 내용을 꽂아 두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시초`발단은 Ed, 로이쓰(Geschichte der hlg, Schriften Alten Tesraments, S. 148ff §126, S. 597ff와 §479f도 참고)와 Fr. 부울(Buhl, RE Ⅳ3, S. 626ff)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물론 상세한 분류`등급화에는 미치지 못하고 또 이런 시도들이 동시대인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 상태에서, 이미 주요유형들(dei Hauptgattungen)이 올바르게 인식되었다. Fr. 배트겐(Baethgen, Psalmen3 S.Ⅳ)의 제안, 말하자면 기쁘고, 슬프며 조용한 분위기의 시가들을 구별하자는 그런 제안은 훨씬 약하다. 그것은 상당히 부족한 관찰에서 나온 것이요, 더 이상 계속 수행할 수 없는 제안이다. E. 카우취(Kautysch, Heilige Schrift der ATS3 Ⅱ, S. 106)가 언급하고 있는 송가, 찬양, 시가들과 애가들의 분배는 유형들을 올바른 목표로 살리지 못한 이해이다; 어떻게 우리는 헬라적인 문서에서 나온, 차용된 히브리 시들을 표준에 따라 분리하려고 할 수 있을까? 그와 똑같이 Ed. 쾨니히(Keonig, Hermeneutik der ATS, 1916, S. 95)는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 구약의 유형의 진술은 일반 문학사의 공인된 문체론적인 규범에 따라서만 처리되어야한다는 요청은 거절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의 문학사가에게는 거의 정통하게 알려질 수 없는 교양들이 이스라엘 문학에서 다양하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이 쾨니히(Psalem, 1926, S. 33이하 )는 영적인 활동과의 관계에 따라서 그리고, 그의 내용에 따라 고대 히브리어 시들의 분배를 설명하고 있다 : 1. 이야기(사화), 2. 기술, 3. 증거 설명`입증, 4. 축제적인 고찰과, 5. 의지에 영향을 행사하는 선포`선언`토의(Ausprache)이다 : 너무나 일반화된 분배, 그런 분배는 시편의 특성을 잘 적중사킬 수 있을 것이며, 시편은 그의 주석에서 나중에 그 자체를 표함하지 않고 있는 분배이다. C. 스토이어나겔(Steuernagel, Einletung in das AT, S. 729이하)은 경건성의 전형에 따른 구별을 생각하고 있는 동시에, "포로기 전 시대 예언자들과 백성의 종교성의 차이, 특별히 신명기적인 경건성, 제사적-제의적인 종교성", "포로후기의 성전 제의", 서기관들의 종교성, 지혜교사들의 종교성, 종말론적인 관심사의 종교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러한 관찰은 확실히 가치가 있지만, 그래도 핵심을 맞추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문학적인 소재는 우선 그의 본래의 법칙에 따라, 그러므로 문학사에서부터 차용된 법칙`규칙에 따라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서시는 경건성의 다양한 시대적인 주기를 거쳐왔으면서 그런 경건의 영향을 받았던 사실은 옳다. 그러나 전체 연구의 선두에 놓여질 수는 없다.
설령 이런 모든 노고가 실제로 목표에 이르지 못하였다해도 그 사이에 탐구자들에게 제공된 확실한 유형 규정은 채용 되었다. "참회의 시가(Bu?lieder), 복수의 시편(Rachepsalmen), 제왕시가(Keonigelieder)"가 언급될 수 있다.
B.베르톨fpm는 물론 좀더 정확한 문학사적인 고찰에 의존하는 가운데, 아침의 노래와 저녁 노래, 질병을 앓는 환자의 넋두리, 개인적인 적수에 대한 탄식의 노래, 시온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탄식시, 구출을 경험하였을 때의 개인 감사시, 야웨에 대한 개인적인 신뢰`의지의 노래, 무죄 확인의 시가 그리고 개인 참회의 시가, 이스라엘 문화사외 노래를 구별하고 있다.
이런 여러 유형들의 나열에서부터 유형들의 구별은 아주 그의 소재의 순수한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그런 구별은 사실의 해석이 나타나지 않거나 혹은 부분적으로만 떠올랐던 것, 전체적인 해설을 내세우는 것을 결코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어야만 했던 사실이 결과로 생겨난다. 고로 다음과 같이 무엇인가 금시초문의 새것을 말하는 것이 다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 자명한 것이지만 지금까지 충분하게 인정 받지 못했던 고찰들을 질서있게 병렬하고 그 다음에 계속해서 시편을 설명하도록 시도하는 것이 다루어 질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전적으로 커다란 학문적인 진지함이나 특별한 이해 없이 시도된 음미들의 결과가 있었다. 말하자면 현대의 탐구자들은 시편들의 분류는 일반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그런 분류는 얻어 질 수 없다고 하는 일치된 의견이 확실시되었다.
이러한 탐구 상태에서 물론 더욱더 필수적인 것은 우리가 가능한 대로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모색해야하는 유형의 분배는 임의적으로 고안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유형의 탐구는 소재의 특성과 함께 그 자체대로 존재해야 된다. 탐구자는 이런 시의 종류에서 그의 본래적으로 자연스러운 분절을 사실대로 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고로 탐구자는 이런 시(詩)들의 가장 원래적인 원형에 대한 기본 고찰을 필요로 한다. 그런 시들은 다양한 유형들로 다양하게 갈라져 있다.
4. 이스라엘 문학사(die Literaturgeschichte)
그가 어떤 위치에서 이런 기본 고찰을 모색해야만 하는 가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태고적 시대에서 만들어진 문학적인 산출들은 발전된 높은 수준의 이민족들과 구별되는 데 그런 태고적 문학작품은 문명인들처럼 지면(紙面)에 기록하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인간의 실제 생활에서 유래하고 그런 생활 안에서 그의 과거를 두고 있다 :그런 태고적인 시절에는 여인들이 귀향하는 승전 군대를 마중나가면서 승전가를 노래하였다; 영면한 자의 관대(棺臺) 위에서, 아마도 만가의 노래를 부르는 물음꾼에 의해서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만가가 울린다; 혹은 예언자는 운집한 회중 앞에서, 아마도 상소 뜰안에 모인 군중에게 우레와 같은 음성을 말한다. 우리는 얼마든지 수를 늘릴 수 있는 그러한 실례들을 볼 수 있다.("Israelitiche Literatungeschichte" in der "Kultur der Gegenwart" ⅠAet. 71. 1906, S.58ff2, 1923, S. 60ff), 말하자면 본연의 문서`문헌의 유형들은 생활의 다양한 사정`사건에 따라 구별되어야만 한다. 그런 사건`계기에서부터 유형들이 생겨났다. (da? die Gttungen eines urtiimlichen Schrifttums nach den verschiedenen Gelegenheiten des Libeus unterscheiden werden meussen, aus denen 邨 hervorgegaangen seind) "Reden und Aufsätge" 1913, S. 33을 참고.
시편시는 그의 삶의 과거를 어디에서 가질 수 있었는가? 유대교는 그의 제의`예배(Kultus)에서 시편시를 봉독해왔다. 시편 명칭을 테힐림, 말하자면 찬양(Hymnen)으로 입증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바빌론의 시편들은 특정 예배적인 의식에 속한다. 예 E. Balla, Das Ich der Psalmen, 1912, S. 88; O. Weber, Literatur der Bah, u. Ass. 1907, S. 119 참고)
성서시편들은 유대교회당의 원문, 번역본들과 애작된 시편 그리고 기독교에서 예배때 쓰는 시편과 비슷하다. 이렇게 우리는 그런 성서시편들이 원래는 이스라엘 제의에서 유래하는 것이라 감히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시는 아니지만 많은 시들에 있어서 본래적인 형식성을 나타낸다. 하나를 다른 시와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시편들은 얼마나 이상하리만큼 비슷한가! 그와 이치하며 얼마나 그것은 순수히 개인적으로, 여기서 다만 한번 개인 시인에 의해서 주어진 시로 소급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실제로 이런 시가들 속에서 거의 특정한 개별성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가 말이다!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 우리는 이미 S. 1이하에서 그것을 언급했다 - 전적으로 일반적인 지시와 암시로써 만족하고 있는가! 모든 서정시의 류에서 - 우리가 본 바와 같이 - 이런 이야기 형식(Redenweise)은 어떤 일부분에서 밝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에서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다윗은 그의 만가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부르면 노래 할 수 있다; 시편들 가운데서는 왜 시인이 살던 시대의 유일한 인물이 표면상 등장하지 않고 있는가?
우선 이런 눈에 띄는 현상의 해명을 다음 사실에서만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시가들은 그의 원래적인 성질에 따라 전혀 가장 개인적인 경건성의 창작물로서 고찰 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런 시가들이 예배에 속한다면, 그런 시가들은 이렇게 불특정하게 말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 다음 그들의 가장 오랜 원천에 따른 제의적인 법식(kultische Formulare)이 존재하거나 아니면 그런 것들은 적어도 그런 제의 법식에서부터 유래한다. 우리가 이런 결과에서 올바른 길에 서있다는 것은 바빌론 시들도 역시 동일한 표현공식법(Formelhaftigkeit)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이미 인식해 왔던 것과 같이, 비빌론시에 똑같이 동일한 원인에서, 말하자면 예배를 위한 그의 목적에서 밝혀지는 현상을 제시하고 있음을 생각한다.
마치 시편 속에 인격성의 등장이 부인되어져야 한다거나 아니면 충분하게 평가`사정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물론 이런 주장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으리라(M. Leohr, Psalmenstudien, S. 2ff를 반대한다). 오히려 언급되어진 것으로 말미암아 여기저기에서 다소간 또는 일반적인 것에서 현저하게 벗어난 것, 정말로 자신의 마음`심장의 소리가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거절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심장의 소리 가운데서 우리는 특별히 도식(das Schema)을 극복하는 고차원적인 종교의 영역과 시적인 감동력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시인이 살던 시대에 지배적인 규칙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개개인의 그런 시인으로서의 독립성을 위한 표준과 그의 창작의 특성을 점유한다.
§6. 개인 탄식시
1. 탄식시
시3.5.6.7.13.17.22.25.26.27,7-14.28.31.35.38.39.42.43.51.54.55.56.57. 59.61.63.64.69.70. 71.86.88.102.109.120.130.140.141.142.143.이며 비슷한 유형은 애가3이다.
시편 중 탄식시편에서 발전된 의지시는 시4.11.16.23.27,1-6. 62.131와 욥기의 개인 탄식시, 욥의 친구들의 이야기와 욥의 고통 중에서 나온 욥6,2-7,21; 9,25-10,22; 13,23-14,22; 16,6-17,9; 19,7-20;23,2-17;29,1-31,37; 3,3-26등이 있다.
왕의 탄식시는 시144,1-11; 89,39-52이며, 산문시에도 탄식시의 소재와 비슷한 것이 나온다. 창4,13f; 32,10-13; 43,14; 신3,23-25; 삼상 1,10f, 삼하12,16; 24,10.17; 왕상8,37ff; 19,4 삼하 20,2f; 욘1,14이 그것이다.
개인의 기도들은 중식적인 재난과 곤경에서 표현된 것들이라 바빌론과 앗수르의 탄식시와 비교되는 것들이 있다.
2. 개인의 탄식시는 시편의 고유한 근거
예루살렘 왕의 궁전 예배에서 쓰인 것은 시28,61.63이다. 이런 시들은 모든 사람 마음에 들고 마음을 사로잡는 내용들이다. 왕이 예배드릴 때 읽어졌던 시들로 보인다. 미가서 7,7-10
3. 시편의 나는 "공동체"와 관련
일인칭의 인격화는 격정에서 가능한 표현이다. 이런 표현은 시129,1; 사40,27; 49,21에 나온다. 시인 자신이다. 예레미야 탄식시에서 "나"는 예레미야 자신이다. 욥기에 나오는 욥의 탄식시도 "개인"이다.개인탄식시의 시인들(시102,1) '개인적으로' 이해되었다. 신약 눅1,46이하에서 마리아의 찬양에도 개인이 나온다. 이스라엘인들과 구별되는 나 일인칭이 나온다. 당신은 나로부터 내 친구는 멀리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시88,9; 나는 내 형제들로부터 낯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시69,9; 부모가 저를 버렸습니다(시27,10). 당신이 나를 구원하시면 저는 당신의 영광을 내 형제들에게 전하겠습니다(시22,23). 몇 개의 제왕시에서는 왕이 하고 있다. 시18; 공동체 "나"(공중·공동체)는 원래는 개별적인 탄식시가 변경된 것이다.
4. 개인탄식시의 유형의 자리
그 자리는 예배에서 찾아야 하고 제의 적인 형태에서 유래하고 그의 유형에 따르면 원래는 어떤 예배적인 행위에 속해 있었다. 이런 것은 고대 중동의 시편과 비교된다. 이점에 대해서는 모빙켈도 같은 견해이다. (S. Mowinchel, I Studien, 137)
기도자의 위치 시5,8 당신 장에서 충심으로 떨면서 기도하리라 ("오직 나는 주의 충성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시28, 2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28편은 왕이 개인적으로 성전에서 기도하는 상황이다. 기도자 자신이 시편을 기술하고 있다.
렘17,12-18에 보면 고대인의 탄식의 외침이 잘 서술되어 있다. 예레미야가 그의 적들의 박해를 받으며 주님을 찬송하고 구원을 기대한다. 곤경 속에서도 주님의 직분에서 떠나지 않고, 그는 박해하는 자들의 치욕을 받고 있다.
(새벽기도) 기도자의 시간은 아침이다. 성소에서 바치는 재물을 드리는 시간이다. 이에 대해서는 왕하 3,2; 16,15; 암4,4; 겔46,13이하; 호29,29; 레6,5; 민28,14; 창28,18에 나타난다. 아침에 소제를 드리는 시간; 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를 통해서 아침 번제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 모든 국민의 번제물이 드려질 아침마다 너의 희생(암4,4) 등이 나온다. 번제를 드릴 때 에 하나님의 신학이 나온다. 시5,4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30,6; 46,6; 90,14; 43,8. 저녁에도 울음이 깃들일 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이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6);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는 일생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90,14);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시143,8) 아침기도가 효험이 있다. 시5,4; 57,9; 59,17; 88,14;119,147.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57,9); 아침에 주님의 힘을 찬송하고 인자하심은 부르리이다;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저녁기도도 효험이 있고 "은혜의 시간"이 된다. 출29,41; 레6,13; 민28,4이하; 왕상18,29. 36; 왕하16,15; 에스라9,4; 단9,21. 저녁때에 드리는 어린양의 제물은 아침의 소제와 함께 향기롭다.(출29,41); 제단 불이 껴지지 않도록 피우다. 어린양을 아침 저녁으로 드릴 것이다.(민28,4f). 밤 시간의 탄식시가 예배시간과 관계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물을 드릴 때 계시가 임하는 이야기가 경우에 따라 언급되고 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창4; 발람의 이야기 민23,2-4, 창15,1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가리이다. 야훼께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는 것을 다 당신에게 알리이다. 하나님이 발람에 임하시는지라, 그 내용은 23,5-12에 잘 나오고 있다. 발락이 야곱을 저주하도록 박람에게 부탁했지만 발람도 야곱 족속의 특수함을 전하고 축복을 했고, 이방 예언자가 이스라엘에 축복을 주는 신탁이다. 발락이 그것을 듣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저는 당신 말씀을 바라나이다."(시130,5; 138,4)의 표현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시인이 깨닫기를 희망하고 그에게 삶과 건강이 다시 주어지는 의미이다. (시130,25 주석을 보라.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130,8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제물을 드릴 때 계시를 바라는 것과 관련된 예배이다. 백성의 탄식에 대한 청리의 확신을 시62,12ff; 주여 인자함을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같으심이니이다(인과응보사상) 시91,14-16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간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하시고 응답하시고, 찬양할때에 그를 영화롭게 하며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신다.
눈물의 기도:
여기에 탄식과 간구에서 나타나고 "청리의 확신"이 증언된다. 시4,7을 보면 의의제사를 드리고 자는 하나님의 얼굴이 비추이며 기쁨을 주신다. 시6,9;22,23;31,20;69,3f;94,22. 악행자의 박해 속에서 우는 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그의 간구를 들어주신다. 탄식과 근신의 눈물로 참회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신다(시6,9). 시22에는 야웨는 두려워하는 자,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시지 않는다. 숨기지 않고 울부짖을 때 들으시는 하나님(시22,22-24). 곤고한 자가 기쁨을 찾고, 궁핍한 자의 기도가 응답을 받음. 시94,22-23 죄악과 악을 악인에 돌리고 끊으시는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제사장들의 권면과 위로(인과응보적인 신학)
시27,14;42,65;55,23
"너는 야웨를 기다릴 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야웨를 기다리라"는 권면의 말씀
"낙심하고 불안해 하지 말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의 도우심을 믿고 찬송하라"는 말씀(42,5)
"네 짐을 야웨께 맡겨 버리라 그가 너를 붙으시리라"(55,2)
앗수르에서도 왕이 기도하면(앗수르 바니팔) 제사장 왕에서 위안의 응답이 나온다. 이와 비슷한 시편은 121에 나온다. 시121에 대한 주석을 보면, 하나님은 졸지 않으시고 주무시지 않고 지켜주시고 그늘이 되어 주시며 모든 환란을 면하게 하시며, 네 영혼을 지키신다.
기도자의 참회의 모습
그의 겉옷을 찢는다. 머리털과 수염은 쥐어뜯고 자기 몸은 먼지 속에 던지고, 저녁까지 고정을 한다. 하나님 성전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서 손을 벌려 기도한다(삼하12,16;욥1,20;2,8;에스라9,3-5;10,1). 그러나 개인 탄식시에서는 이런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기도자는 오랫동안 금식한다(시35,13;69,11;102,5;109,24;사58,5).
나는 병들었을 때 금식하며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다. 곡하고 금식하는 것은 놀림거리가 된다. 그래서 기도자는 마음이 상한다. 근심한다. 주위 사람들이 빈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곤고한 자,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듣고 그의 성소 시온을 구원하신다. 기도할 때 그는 성소 방향으로 손을 뻗친다(시28,2;141,2). 이 것은 바빌론의 참회자들의 행동과도 비슷하다(시35,14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 같이 하였도다). 탄식시의 개인들은 순전히 남자들뿐이었다. 부인네들은 그런 탄식을 부르지 못했다. 예배 때 탄식은 여인의 입장을 거부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탄식시는 주로 성소와 가까운 데서 장성되었다(시16;42/43;55;61;120 하나님이 줄 재어 준 구역(16,5참조)).
탄식시는 야웨와 시온을 사모한다. 개인도 마음이 아프도록 성소가 가까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탄식한다. 그는 성소를 순례하며 야웨의 얼굴을 뵈오려고 했다(시42,3). 제단에 들어서려고 했다(시61,5). 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시46,4참조) 일체의 행동은 마음속에서 사무치고 뜨거운 동경이다.
시편 기도자의 적들:p181
기도자를 에워 싼 적들은 시22,13.17에 나온다. 그의 불행을 기뻐하고 조롱 조소하는 이들이다(시59,4;22,18): 기도자는 해치려고 강한 자들과 겉옷을 나누며 속옷은 제비 뽑나이다. 이런 일은 예배의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외부 밖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분리된 곳에서 일어난다. 시22,2 하나님이 주무시고 응답하지 않는 상황이다(시4,34;22,8ff;62,4ff 참조).
병든자와 병상에서의 기도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고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으리라. 밤이면 몸 부리 치는 고통, 불면증의 불안과 괴로움이 있는 환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 인자하심, 약속하심이 절망감을 가지는 환자들이다. 그래도 옛적의 기이하신 일을 기억하며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고 깊이 생각한다. 시41,5-11병상에 붙들어주시고, 병을 고쳐주신다는 믿음, 범죄한 죄로 인한 고통을 참회하고, 병의 치유를 기도한다. 병의 고통은 한 밤 중에 나타난다. 내면의 고통, 근심, 의심이 새롭게 솟아난다. 이런 때에 경건한 자들은 아침이 올 때까지 뜬눈으로 고통당하며 기도를 한다. 사38,13;시6,7;77,7;102,8. 욥도 고통스런 밤을 말하고 있다(욥7,3ff;30,17). 귀머거리 같고, 벙어리 같아 아무 말도 못하고 주님만 바라보며 응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사38,13 병자가 아침까지 견디고 뼈마디가 꺾기는 고통을 당한다(히스기야 왕의 기도).
시6,7 근심으로 쇠하여 눈을 뜨지 못 하고 침상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아침까지 주의 말씀을 읊으며 투병한다.
시102,8 밤을 세우니 지붕 위에 참새같이 고독한 병자 - 병든 자의 자리는 더욱 더 괴로워진다. 병중에 똥을 싸고 똥무더기 속에 앉아 있어야 한다. 욥2,8 "재 가운데"는 똥, 오줌, 오물 가운데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대소변을 못 가리고 일어나지 못하는 중병에 있어 수발드는 사람도 없었다. 그 아내는 지쳐서 욥을 돌보지 않고 있다.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독백을 한다. 그래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재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야웨께서 욥을 오물 속에 던지니 욥이 오물을 빵처럼 먹고 있다. 욥30,19;시102,10 "나는 오물, 재, 똥을 양식같이 먹고 눈물섞인 물을 마셨나이다" 병의 고통은 한 밤중에 R?chertsche(?)를 기억.
기도자가 기록할 수 없을 경우 그는 다음 날 아침 그의 한 친구를 불러 받아쓰게 하였다. 잠자기전 침상에서 기도 드림:시4;55,18;단6,11. 시55,18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며 탄식하리니 야웨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단6,10-11 윗방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끓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시4,4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지어다. 위 세 본문에서 공통적인 것이 있다. 특히 저녁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는 것은 잠들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어두운 감옥에 갇힌 죄수들과 포로들이 야웨께 외치며 기도한다(시107,10ff). 항해하는 뱃사람이 하나님께 외친다(시107,25이하;욘1,14). 이상에서 보면 하나님께 성전예배를 드리는 이외에 세상에서 다양한 세상에서 기도하고 탄식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
그러나 모빙켈은 그와 반대이다. 기도는 평신도를 위해서 성전직에 종사하는 종교인들이 직접적으로 기도시를 작성해서 예배형태로서만 사용되었다는 주장은 받아드리기 어렵다.
탄식시는 바벨론에서 지어진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성서의 탄식시는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하다. 물론 탄식시 형태에는 바벨론적인 흔적이 있다. 그런 것을 대본으로 탄식시 형식을 저술한 역사는 가능하다. 바벨론의 탄식시와 구약시편의 차이는 우선 구약의 탄식시는 기이하고 기적적인 생동성과 풍부한 다양성, 다채로움을 가진다. 이에 대해서는 모빙켈 시편연구Ⅰ.S.157;Ⅳ S.24이하를 참조해서 구별할 수 있다.
예배적인 기도시와 비제의적인 기도시를 구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첫째 예배적인 진행때 드리는 기도, 둘째는 사람이 그런 예배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시51,18이하: 제사보다는 상한 심령을 주님이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기도시. 시51,20참조) 셋째 경우는 성전 앞에서 드리는 기도와 예배시간에 드리는 기도(시28,2;141,2;에스라9,5이하;10,1). 동시에 기도는 제물의 대용으로 여겨졌다(시141,2). 먼 곳에서는 제물시간을 기도시간으로서,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이다(단6,11).
기도의 시간과 장소는 한 가지로 결정하기 어렵다. 그에 대해서는 느1,4에 서술되어 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여... 간구한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조상들의 죄를 통회하고 있다.
5. 기도자의 개인적인 상태·사정의 불확실
기도자는 그의 적수들, 죄악, 곤경, 불안을 말하고 있다. 이런 기도는 제의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기도자의 기도는 공중예배 사용을 위해서 나중에 편찬된 가능성이 있다. 개인적인 특징들은 사라졌다. 그들의 외적인 상황, 불행(Widerfaluniss)도 영적인 것보다는 가치가 덜하기 때문이다.
시41편은 적에 대한 시편이요 그의 적의 조롱이 그의 질병보다 더 자극적이다. 시51편은 그의 육체적 고통보다도 그의 괴의 자의식을 더 괴로워한다. (꺽어진 뼈의 육체적 고통과 상한 심령에 대한 고통이 탄식시에 나온다.)
히브리인의 "뼈"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탄식시 저자들은 소그룹과 대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감사시를 노래하는 그룹과 밀접하다. 그가 당한 고난, 역경에서 구출당한 후 승리하는 것은 감사하고 대중에 탄식과 감사가 동시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22,25-27절의 탄식시는 주께로부터 온 것이다. 야훼를 찾는 자가 찬송한다. 주의 백성과 모든 나라 족속이 함께 예배하는 자리에서 불러지는 찬송이다. 탄식시의 전자들은 기도자의 체험을 무언가 전적으로 유일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일반적인 사건의 두드러진 예로 보려고 했다.
그래서 탄식시는 시편저자의 공개적인 죽음의 위험에서 시작된 것이 특징이 된다. 그것은 곤경, 박해와 핍박, 불안이다. 그에 대해서 언급하는 시편들은 시25,17; 31,10-22. 23; 42,10; 71,20;86,7; 102,3등이다.
이런 시들은 일상생활의 일들이 아니다. 생사를 위해서 두려운 가운데 행한 결단을 다루고 있다. 공적생과 영웅적인-정치적인 생에서 극단적인 위기가 역경에서 경험된 결단들이다. 적과 기도자 사이에서 겨루어진 것은 누가 살고 이기느냐 구가 죽고 패배하느냐였다(시54,5.9). 인과응보적인 시편의 종교는 죽음과 대질하는 마당이다 (시102,12.24.25a; 109,23참고). 인생의 나약한, 무상한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기도자의 죽음을 바라고 적들의 이야기가 인용 선망되고 있다. (시22,19;41,6.9) 이런 내용은 기도자의 간구에서 알 수 있다.(시13,4; 51,16; 143,7) 기도자는 죽음세계에 가까이 있었던 체험을 종종 말한다. (시88,4; 51,16) 야훼가 도와주신다면 그것이 야훼를 위한 마지막 순간이다. 기도자는 탄식시에서 무덤구덩이, 샘물(큰 물을 덤음)과 물저장의 샘은 (시30,10; 시69,16; 시28,1; 88,5.7; 147,7) 69,15 "큰물"은 무슨 뜻인가. 드물게 사용한다.
혼합유형, 교독문시와 예전
1. 혼합유형의 관계성
다양한 여러 시편 유형들은 역사과정에서 다채로운 관계들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런 관계들을 제시하고 그런 원인을 입증하는 것이 이 절(paragraphen)의 과제이다. 우선 혼합유형보다 더 가깝게 표시하게 되는 시편들이 다루어질 수 있다. 거의 모든 시편 유형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고찰된다. 말하자면 역사 속에서 활기있는 삶을 보다 풍요하고 적절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한 유형은 다른 유형의 사상과 양식들을 받아들였다.
이런 과정을 다른 혼합유형과는 다르게, 받아들이는 유형의 해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렇게 받아들여지는 유형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보존되어 있다. 그러므로써 그런 유형이 파손되지 않고 있는 동안, 하나의 유형은 그런 온전히 보존된 유형을 기본성분들로 수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성분들은 소재(stoff), 분위기(Stimmung) 혹은 양식(Form)에 대한 다른 유형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혼합유형: 받아들이는 유형의 해체를 의미함. 그러나 위와 같은 혼합유형은 해체를 의미하지 않음(받아들이는 유형이 해체되지 않음). 어떤 유형이 손상을 입지 않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또 어떤 원인들이 그렇게 수용을 가능케 했는지는 개별적인 절(paragraphen)에서 고찰하는 구절에서 상세하게 서술되었다. 그런 것들을 고려하며 이미 앞의 서설에서 소개된 습득지(習得地)에 대한 짤막한 개괄은 이런 위치로서 만족하다:
2.혼합유형의 종류와 원칙적으로 구별
이런 혼합유형들은 그의 전제들을 유형들의 분해·해체에 두고 있다. 분해의 원인으로써는 성찰·반성의 투입 외에 무엇보다 그들의 원초적이요 구체적인 상황에서부터 유형들의 분리를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제의적인 시(詩)에서부터 비제의적-중요적인 시로 전환이다.
하나의 유형, 대략 개인의 감사시가 생생한 축제예배 진행과 관계에서 적절하게 표현된 유형의 한계에서, 그런 유형의 구조와 양식은 불일치를 나타내는 변경 앞에서 보호된다. 그리고 축제의 계기와 다르게 생소하게만 느껴져야만 하는 소재와 사상이 멀리한다. 그러나 유형이 제단·제식(예배)의 터전에서부터 분해된 직후에도, 각인된 문체의 힘·영향은 축제들의 생동감있는 현재화와 협동(協同)하며 얼마동안은 유형의 단위를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런 문체의 독특한 힘은 쇠약해지고, 따라서 유형이 갖추었던 엄격한 문체가 지배했던 때에는 당시 외부의 것이 되고 들어 올 수 없었던 양식들과 소재들이 개방된다.
다양한 유형들과 다양한 구성요소들의 결합은 이런 경우 더 이상 확고 부동하고 구체적인 원인·동기가 아니라, 개별 시편(기자)·시인을 지도하는 연상들(Assoziation)을 규정한다. 우리들이 보존하고 있는 혼합시들(Mischgedichte)은 이런 성립과정의 다양한 여러 단계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해준다. 우선적으로 어떤 유형의 커다란 단락들은 다른 유형과 유기적인 조직이 없이 결합된다. 점차적으로 끝까지 관찰되어 보존되는 다락은 작아지고 혼합유형의 수가 증가된다. 가장 작은 유형부분들에서 나온 모자이크로 최종결과가 이루어지기까지 혼합이 된다(시119편).
3. 찬양시와 감사시에서의 혼합유형
예리하게 주의해서 볼 때에만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그런 혼합유형의 혼적들이 찬양시와 개인의 감사시에서 나타난다. 이런 유형에서 보면 개인 탄식시에서 차용해온 간구(Bitte)가 종결부를 이룬다. 시(詩)가 축제적인 행사 안으로 다시 유입되는 것을 촉구하는 엄격한 유형에서부터 혹은 구원받은 자들의 감격이 찬양 양식 안으로 유도되는 감사시에서는 이러한 벗어남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적인 시가의 시인에게서 그것은 파악할 수 있다. 종교적인 시가에서 예배적인 행동은 더 이상 생각되지 않는다. 경건하게 야웨의 기적에 몰입하는 시104편의 성가대원 가인의 시각은 세계의 영역을 정밀 검사할 때 경건한 자에게 거침이 되는 불경한 자에게 부딪친다. 그러므로써 경건한 자에게서는 찬양의 기분과는 아주 거리가 먼 불경한 자에 대한 항의의 감정과 그들의 멸망을 기원하는 간구가 상술된다. 경건한 자(시인)는 불경건한 자에게 거역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멸망을 바라는 간구를 덧붙인다. 그런 간구는 탄식시에서 말하는 경건한 자에게 흔히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상술(詳述)된 감사시와 비슷하다.
거기서 시인이 자기의 신앙고백에 간구를 첨가할 경우 그렇다. 시인에게 그를 행복하게 해주는 구출을 선포한 뒤에도 아직까지 머물러 있는 근심과 걱정이 여전히 전면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쁜 축제 예배와 관련해서 불경한 이들은 불리우지 않는다. 그러나 불경한 자들과 아무런 방해가 부딪치지 않을 때, 그들은 시인의 입술에 오른다. 우리는 양방 시편귀절의 이런 이해에 대해서 이의를 말할 수 있다. 그 중 하나인 시138,8c는 예배적인 행위를 전제하고 있다는 시편에서부터 유래하는바 그런 구절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는 비제의적인 시가 제의적인 시에게 소급되는 효과를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4. 흔적·단서를 인식
다른 시(詩)들 가운데서 아주 분명해 진다. 대략 시33편이 두드러진다. 시33,19에서 찬양은 야웨 행위를 찬양할 때 경건한 자와 관계된다. 탄식시의 위로의 사상으로서 유포되었던 이런 사상에서 시인은 자기 백성의 곤경들을 생생하게 본다. 따라서 그의 시는 백성의 탄식시로 넘겨진다. 탄식시들은 위로의 사상을 취하면서, 야웨를 향한 동경의 서술은 탄식시에서부터 알려진 서술로서 찬양의 진술을 뒤따른다(시33,20a).
시33,20.21의 신뢰의 표현(의지의 표현)과 그리고 원망(願望)의 양식에 포함된 간구 v20a는 종결짓는 의지의 동기로서 33,22b를 따른다. 시19에서는 혼합이 더 심하다. 19편에서는 자꾸 반복하여 계명들이 언급되는데, 이런 계명들은 태양과 함께 한 전체적인 창조, 경건한 자 자신이 그들에게 나란히 서 있다는 사상보다 더 높이 찬양된다. 그리고 경건한 자가 계명들을 따르는 동시에, 그는 개인의 탄식시를 향한다: 경건한 자는 12절에서 그의 변화를 단언한다(무죄동기). 경건한 자는 무의식적으로 모르고 저지른 위반을 죄스럽게 고백한다(13a절). 이것은 죄의 고백이다; 경건한 자는 33,14b-15에서 용서된 보존 그리고 은총으로 받아들여 주실 것을 간구한다. 시90과 139에 나타나는 혼합도 바슷하다. 그의 개별서들은 주석 책에서 지시된 것이다. 시129와 솔로몬 시편16도 역시 본질적으로 여기서 다루어진 혼합유형(Misung)과 일치한다. 시인은 민족 감사시의 문체로 이스라엘의 최초역사부터 있던 적대관계를 서술했던 시129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할 수 있었던 야웨의 도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고찰이 현재와 접촉하는 지점에 따라서 그의 곤경과 역경의 나날을 기억나도록 일깨워 주는 지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의 탄시시를 향하고 있다: 시온에 대적하는 모든 대적들의 수치와 멸망을 원망 양식(Wunsch-form)으로 말하는 격정적인 간구로 시를 끝맺는다. 솔로몬 시편16은 개인 감사시로서 시작한다. 시인은 야웨께서 거의 실족할 뻔했던 자기를 죄악과 타락에 던지지 않으셨던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 시인은 그가 패배해서 쓰러지는데 까지 이르지 않았던 위험을 당하면서, 자기가 죄책·실수 가운데서도 보존될 은혜를 간구하며 만족스러운 생활변화를 간구한다(솔로몬시편16,6-12). 간구를 뒷받침해주고 동기로서 이해할 수 있는 (16,13-15) 사상으로 끝이 맺어진다.
개인 탄식시에서 유래하는 사상과 양식들은 그 범위에 있어서 감사시를 두배나 능가하며 그러므로써 시의 마지막 부분의 강조가 감사시와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한 이질적인 요소들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이 시편전체에서 독특하다.
5. 다른 혼합유형(Mischungen)은 탄식시들에서 출발
대략 예레미야 애가 3장이 그에 대해서 특징적이다. 시(das Gericht)는 말을 거는 형식(Anrede)없이 독백의 형식을 갖춘 탄식 3,1-18의 내용으로서 시작된다. 그런 탄식이 끝난 후 비로소 시는 야웨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야웨를 향하여 간구를 드린다(3,19-20). 거기에 간구를 지니고 있는 모든 위로의 사상이 연결되어 있다. 그런 위로의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 범위는 엄정한 유형과 다르게 이상하게 만큼 크다(3,20-39). 애3,21.24의 의지의 확언외에 애가서는 위로의 사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야웨의 은총과 신실이 끝이 없다는 것이요(22-23절), 다른 사상은 야웨는 대망하고 찾는(3,25)자를 향하시는 야웨는 선하시다는 사상이다.
그런 은총과 신실 그리고 선하시다는 사상 외에 유형에서가 아니라, 지혜시에서부터 유래하는 사상이 표현된다(§10,3). 시인은 고통을 참는 것이 유익하다고 제시한다. 왜냐하면 고통 다음에는 희망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3,26이하). 시인은 야웨가 욕망을 부리며 재앙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서 위로를 한다. 그리고 시인 자신은 수사학적인 질문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신앙을 꼭 잡을 것을 권고한다: 야웨는 결코 인간을 부당하게 간과하지 않으시며, 야웨없이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고, 악과 선은 야웨에게서부터 나온다(3,33이하). 이런 맥락에서 시인은 사람이 야웨의 징벌을 자기의 죄로 인해 자초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권면한다(3,39). 이런 사상은 계속해서 지혜시의 양식에서 유래하는 권면을 하게끔 재촉한다. 권면은 행위와 마음을 시험하고, 야웨로 돌아와서 그에게 사죄함을 맡도록 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3,40-41). 그러므로서 민족 탄식시를 넘어가는 과정이 분명해 진다. 왜냐하면 죄의 고백의 행위에서도 이 것에 대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3,42). 그리고 야웨를 감동케 하는 감동적인 탄식·탄원이 나온다(3,43-47). 그러나 그 다음에는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시는 개인의 탄식시로 넘어간다. 백성의 곤경이 시인에게 개인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하는 바를 시인이 기술하게 될 때 그러하다(3,48-51). 시인은 곤경에서부터 자기의 곤궁함으로 되돌아가는데, 이런 것들이 시인을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다.
탄식시
시인은 이런 탄식의 맥락에서 어떻게 야웨께서 자기는 죽음의 지경에서 구출해 내셨는가 하는 것을 기억한다. 그런 것이 시인은 계속해서 개인의 감사시를 이야기하도록 이끌어 간다(3,55). 그런 이야기는 한때 불렀던 탄식시의 서두로서 작성되었다(3,56). 시인에게 이런 경험은 현재 당하는 고난·고통에 대해서 확신을 준다. 시인은 그의 적들의 멸망을 신뢰에 가득 찬 마음으로 간구하면서 말을 끝맺는다(3,59이하). 우리는 이러한 상세한 예로서 예레미야 애가 3,1-66을 본보기로 그와 비슷한 혼합유형의 시문을 간략하게 파악할 수 있다.
시94편은 불손한 불경건한 자들에 대한 백성의 탄식시로서 시작된다. 불경건한 자들은 극악무도하고 야비하게 고의적으로 처신하고 있다: 야웨는 보지 못하시며, 야곱의 하나님은 무지하다! 이것은 시인을 악인들과 격분한 논전을 벌이게 한다. 이런 격렬한 논전은 철두철미하게 지혜시의 양식과 사상으로 진행한다(§10,3). 그리고 더 나아가서 불경한 자와 경건한 자를 대조적으로 구별하는 지혜시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는 축복신탁, 말하자면 야웨에게서 가르치시는 날자에게 베푸는 축복신탁을 제시한다. 개별적인 것에 관해서는 시편 주석서를 참고.
알파벳 형식
마지막으로 이런 맥락에서 알파벳 형식에 맞추어진 시행 시 9/10편을 말할 수 있다. 거기서 보면 개인의 감사시(시9,1-5.14-15)와 종말론적인 찬양(시9,6-7) 그리고 거기에 개인의 탄식시(9,18.21 원망과 간구, 19절의 의지의 동기, 20절의 간구, 시10,1-11의 악인에 대한 탄식, 12절 이하의 간구, 14절의 의지의 동기, 15의 간구, 16의 기도의 동기, 17-18의 청허의 확신)가 혼합되어 있다. 시9/10편에서 알파벳 형식에 맞추어야 하는 강요도 역시 유형을 혼합하게 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주석을 참고.
6. 혼합 유형들 가운데 찬양과 감사시 해석
와 다른 한편으로는 지혜시 사이에서 행하며 쟀던 혼합유형을 기억할 수 있다. 만일 야웨의 업적과 행위를 성찰하는 고찰과 직접적인 감동에 의한 것 대신 찬양이 나타나면, 아래와 같이 볼 수 있다.
1) 찬양과 지혜시의 혼합은 가능하다.
2) 이런 찬양시는 찬양 진술의 내용을 주의하는 지혜의 말씀으로 끝일 수 있다. 그러나 이론 방법으로 사상들이 나타나는데, 이런 사상은 사건들의 목적에 관계하는 것으로서
3) 찬양 자체 안으로 투입된다. 만일 창조주가 모든 그의 업적에서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진술된다면,
4) 찬양시는 교훈적인 것으로 끌어드려 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찬양형식들은 지혜시의 양식에 의해서 관철된다. 이를테면 예수 시락서 39,12이하에 보면 화자의 해설이 서두 앞에 나온다. 화자는 지혜에 충만하게 말하려고 한다. 그는 경건한 아들들에게 듣기를 권면·권고한다. 찬양시의 시인이 야웨의 업적의 목적성을 찬양할 때,
5) 우리는 지혜의 양식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6) 지혜시를 나타내는 비교급 형식의 비교, 혹은 진술과 대답이 나타난다.
거꾸로 찬양소재와 양식들은 지혜시의 권면 말씀으로 들어온다.
7) 그런 경우는 지혜모사가 자기의 말씀을 야웨의 유일한 위대성, 두려움과 자비를 제사하면서 논증한다.
8) 역시 지혜시의 형식이 된 축복신탁도 찬양과 결합된다. 그런 결합은 축복신탁으로 끝맺음으로서 이루어진다. 축복신탁은 창조주가 경건한 자들에게 준비한 친절한 배당·몫으로 끝맺는다. 이런 사상은 하나님의 본질이 자비와 궁휼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자극한다.
감사시와 지혜시
엄격한 유형으로부터 파악될 수 없는 감사시와 지혜시의 혼합은 솔로몬 시편 3;13;15에서 나타난다. 솔로몬 시편3,2에서 보면 경건한 마음에서부터 울어 나오는 시편이 야웨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서 감사를 명령하고, 그 다음 논증이 뒤따른다. 그러나 3,3이 계속되면서 의인들은 항상 주님을 생각한다. 그 것은 지혜시의 특징인 바와 같이, 시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본질과 운명의 기술로 4-8절을 전향시키고 있다. 그리고 또 지혜에 일치하여 시편은 9절 이하에서 불경자의 상과 그의 멸망의 상을 대조적으로 제시한다- 솔로몬 시편에서 15,2은 감사시의 신앙고백에 연결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야웨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다. 그런 사상이 간접적인 찬양으로서 파악되는 것이라면, 그런 사상의 성찰태도는 지혜시에 관하여 자명한 대답을 포괄하는 질문형식과 같이 제시된다: 기쁘고 의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시편을 노래하는 자는, 불행으로 떨지는 않을 것이다(3-7절). 이것은 경건한 자의 본질과 운명에 대한 오인할 여지가 없는 기술이다. 만일 8-13절이 그에 연결되어 불행한 자들이 일치하둁게 서술된다면, 그것은 이해하기 쉽다.
솔로몬 시편 13: 솔로몬 시편13은 그 문맥이 첫 번 보기에는 분명하지 않다.: 경건 자들과 불경한 자들의 생각과 감사시는 서로 다르게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13,7-9에서는 결합된 사상이 표명된다: 야웨가 불경한 자들을 구출했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곤경·역경은 유익한 징책에 불과하다. 그런 정책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 줄 것이다. 그러나 불경한 자들의 고통은 징벌이요 멸망으로 끝난다.
7. 혼합유형
시119편에 나오는 혼합유형은 가장 넓은 범위이다. 율법찬양에 관하여 그의 시편을 저술하게 했던 시인은 넓게 확장된 테두리를 다만 채워 넣을 수 있었던 동시에, 저자는 오로지 어떻게 해서든지 가능한 대로 사상과 양식들을 끌어드렸다. 그런 것들은 율법과의 관계를 허용하게 했다. 그밖에 저자가 매번 8행을 동일한 문자로서 시작하는 강압이 안겨져 있기 때문에, 저자는 가능한 대로 줄마다 유형을 교체할 필요가 생겼다. 왜냐하면 알파벳의 원리에 일치하게 처음 시작한 단어들을 다르게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으로 다채로운 모자이크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런 기본 성분들은 주석책에서 단락들마다 입증되고 있다. 여기서는 다만 혼합유형의 기본원칙들만 주목할 수 있다. 대부분 양식과 소재들은 개인 탄식시에서 따왔다. 그런 탄식시에서부터 무엇보다 탄식, 간구, 원망, 개인의 독자적인 경건성의 확언과 그리고 갖가지의 위로의 사상이 나타난다. 그외에 찬양, 감사시와 지혜시의 동기들이 보인다. 거의 모든 서정적인 유형들이 대표한다. 백성의 형편에 관여하는 유형들만은 없다.
고로 여기서는 거의 모든 유형들의 한계·경계들은 서로 완전히 말살되어 버렸다. 그리고 유형들의 비유기체적인 혼합이 문학적인 발전을 위해 무엇을 의미하는 가가 분명해진다. 이런 발전은 단순히 순수한 유형들에서부터 출발하여 열매를 맺게 된다. 말하자면,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종극이다. 혼합유형들은 반드시 시편 시행 일반의 고사(枯死)에 다다른다.
8. 혼합유형에 시편시에서는 다른 가능성이 성립
다양한 유형들이 어떻게 서로서로 관계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유형들을 독자적인 크기를 가지고 있지만, 보다 높은 단위에서는 요약, 총괄된다. 즉 예전(Litergie)에서 총괄된다.
예전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은 그의 진행 때의 낭독, 낭송의 교대들이다. 이런 진행을 시편시와 함께 그린 육성들을 공통적으로 가진다. 이런 공통성을 예전의 형식(양식) 가운데 다양한 유형들의 총괄에 대해서 본질적인 것들일 수 있다. 예전의 취급을 교독문 시편의 고찰(Wechselgedichte)을 그래서 앞쪽으로 보내는 것이 추천될만 하다.
9. 교독문, 교송을 구약전승
어느 정도 분명한 상(Bild)을 얻는 것은 충분하다. 우선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시편시는 아무때든지 부를 수 있는 교송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가장 오래된 증언은 출15,20이하이다: 여선지자는, 아론의 누이 미리암을 그때 손에 팀파니(소북)를 잡고, 모든 여인들은 미리암 뒤 쪽으로 돌면서 소북을 쥐고 윤무(輪舞)를 추었다. 그때 미리암은 그들 앞에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야훼께 노래하자 그는 높아 지시기 때문이다! 그는 말과 전차를 바다 속으로 쳐 넣으셨기 때문이다! 이 구절 대신 가장 후기의 것을 유디트 15,14을 대비시킬 수 있다. 그 이야기의 문맥은 승전을 거둔 군대와 도시의 여인들로 말미암아 거룩한 춤을 상연하신 승전축제를 다루는 내용이다: "유디트는 모든 이스라엘에서 다음과 같은 찬양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서 모든 백성은 이 찬양을 그여자를 따라 불렀다."
주전 5세기경에 나온 다른 증서는 느헤미야 12,27이하에서 제시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새 성벽 축성식 때 두 부류의 성가대원들이 공통적인 출발점에서 떠나 서로 마주보는 방향을 따라 시편 노래를 부르면서 성벽을 한 바퀴 돌면서 다시 만나 그들의 성가 노래 소리를 함께 울리게 하고 있다. 역대상 16,36과 에스라3,11도 역시 여기서 인도할 수 있다. 그런 구절에 따르면 백성이 성가대의 노래에 대해 아멘과 할렐루야를 응답하고 있다.
다른 증거 귀절들은 이사야서 몇 개의 시편에 나타난 암시에서부터 획득할 수 있다. 사6,3의 스랍들의 찬양은 한 부류가 부르면 다른 부류는 화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소위 창화(唱和)-
시19편에는 찬양노래가 이렇게 낮은 다른 낮에게, 밤은 밤에게 노래를 전하고 있다고(19,3(2)) 소개하고 있다.
본문이 정확하게 재연된 것이라면 시65,9와 14C의 교송은 아주 비슷하게 언급되고 있다: 65,9(8)... 주께서 아침되는 것과 저녁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매,... 65,14c(13c)... 저희가 다 즐거위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끝으로 시42,8이 될 수 있는데, 그 구절에 보면 예배때에 시인은 기쁜노래를 심하게 뒤집어서 묘사하고 있다. 테홈(Tehom)이 치노르 음악을 위하여 다른 테홈에게 노래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여기서 치노르를 키노르의 위치를 수용하였다.
10. 다양하게 언급된 구절
교송·대창(對唱, Wechselgesang)이 어떻게 좀더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몇가지 해명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동시에 대칭이 어떤 전제에서부터 형성되었는가를 인식하게 한다. 그런 구절들은 의심할 나위없이 그의 가능성의 굴레를 고갈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구절들은 적어도 시편의 대창들의 이해는 위해서 적어도 바람직한 발판들을 준다.
그것은 대상16,36와 에스라3,11과 같은 구절에서 시작한 것을 추천한다.(예 "...모든 백성이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 숙련된 성가대가 찬양을 한다. 큰 축제예배 공동체는 경건하게 찬양에 귀를 기울이며 그런 찬양은 향하여 아멘을 부르며 응답한다. 혹은 예배회중을 "할렐루 에트 야훼"하는 잘 알려진 찬양중에 큰 찬송소리로써 성가대 찬양때와 함께 참가하며 노래 부른다.
찬양귀절의 분배는 확실히 한편으로는 감동적인 찬양노래 자체에 참여하려는 예배공동체의 열망과 희구로써 발생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찬양시의 본문의 분배는 경건한 평신도가 본문과 연주방식을 정통하게 알지 못하고 숙련된 성가대를 대신할 수 있다는 전제에는 어려움이 있다. 찬양본문이 성가대와 평신도에게 다같이 분배되었다는 것은 옳다. 출15,21 미리암의 노래와 유딧트15,14 유딧트의 노래{1)감사 찬양은 16,1-2에 계속되고 있다.}가 서술하는 바와같이, 동일한 전제에서부터 연주방식이 공공연하게 성장하고 있다. 여기서 선창자(先唱者, Vorsänger)는 시편을 성가대(혹은 예배회중)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성가대는 선창자를 따라 노래한다. 아마도 한절 한절 따라 읽었던 것 같다. 전체적인 시편을 생각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히브리인은 커더런 단위형태들을 개관하거나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19,3; 42,8; 65,9 (비교사6,3)는 성가대들의 대창(對昌)을 말하고 있다.
시19,3; 사6,3에 따르면 한편 성가대가 다른 성가대에게 볼을 던지면, 다른 편 성가대가 볼을 첫 번째 성가대에게 다시 되돌려 주기 위해서, 볼을 받아 내는 경우와 같이 보인다. 또 다른 가능성을 시115,9-11; 118,1-4; 135,9이하를 추측하게 한다. 예) 시 115,9 : 1.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여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동일한 장엄하고 고결한 말들이 뒤이어서 여러 다른 특정 그룹에 의해서 불러지며 그러므로써 특수한 조화와 감동의 점층법이 이루어진다.
11. 시편의 노래 특징
시편의 노래는 교송, 대창(對唱)의 첫째부류로써 성가대의 노래가 강조된다. 그의 개별적인 단락들은 후렴귀로써 끝맺는다. 시46(종말론적인 시온시가), 시46(백성, 민족의 감사시가), 시80(민족의 탄식시)와 시99(종말론적인 등극시가). 그런 시가들의 상연이 이렇게 생각될 수 있기 때문에, 대창을 위한 시편본문은 성가대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예배공동체는 소절마다 그의 노래, 찬양을 짤막하게 고정되어 있는 같은 표현의 후렴귀절과 함께 받아 들였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이런 본문이 분배될 때는 분배될 때는 대상16,36; 에스라3,11과 같은 동일한 사상이 토대를 이룬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찌어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
후렴귀절은 가끔 독특한 작용과 격식을 갖춘 엄격성 때문에 문체적인 예술수단으로서 사용되어왔다. 후렴귀절은 엄격한 격식을 시에서 차용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대창에서 유래하는 것도 있다. 말하자면 시42/43에서 후렴귀절은 시인에게 소속한다. 교독문이 그의 정신과 혼에 속한다. 고로 분명히 다양한 인물에게 나뉘어진(배당된) 모방된 것이다. 성가대, 합창대들이 구구절절이 서로 단어, 어휘를 서술하고 있고 대창, 선창들은 시136의 3 남자들의 노래이다.
찬양본문은 한 찬양부류에게 넘어가면, 다른 찬양대는 서두에서 취해졌거나 아니면 찬양의 주요부분의 특색을 서술하고 있는 고정된 불변의 단어를 가지고 그의 차례의 구절을 대답한다.후렴귀의 시와 친속성을 가지고 있는 이런 시편에서 그의 형식의 설명을 대창, 환창시와 분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로지 우리는 이런 시편에서 예배의 노래에 관여한 평신도들의 참여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시편에서는 의식적인 예술수단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후렴귀절에서 찬양노래의 합창에 미학적인 영향을 주도록 규정된 예술적인 매개물이다.
독창과 합창의 교대도 역시 후렴귀절과 같이 시편시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예술적인 표현양식으로 찬양되었다. 시락서 51,12이하가 원천적인 상황에 가장 가까웁게 나타나 있다. 감사하는 이가 감사 축제 집회(예배)에 부르는 감사시의 마지막에 찬양을 부르면 감사집회참예자는 시136의 각절에 나오는 찬양의 동일한 어구(語句)를 가지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그의 선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시 8편은 독창과 합창의 대창,창화(唱和)를 의식적으로 예술수단으로서 사용한다. 시 8편은 성가대가 경이로운 찬양(v.2)으로 시작된다: "여호와 우리 주에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위에 두셨나이다." 그 다음에 개별적인 음성이 뒤따라 나온다. 그 음성은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과 인간에 대한 불가사의한 태도를 말하고 있다. 성가대는 그런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경외와 경악 가운데 그의 찬양의 말씀들을 반복한다 : 야웨, 우리 주여, 당신의 이름이 어찌 찬란한지요(아름다운 자요)! 언급된 대창시마다 순수한 유행의 본보기이다.
그것은 그의 본분이 오직 대창의 분배로 말미암아 다른 것들과 구별된다. 얼마 안되는 예들은 그런 분체적인 취급이 생활과 시편의 영향을 위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제시한다. 만일 우리가 대창의 독특한 영향을 알고 있었던 그의 원리,원칙 순수한 유행에 제한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런 도움으로써 다양한 유형들의 부분들을 하나의 새로운 고차적인 단위로 요약하는 것을 모색한다면, 그것은 이상한 것일까? 그러므로써 우리는 례전(Litugie)의 서술을 수행하게 된다.
12. 예전의 법칙
다양한 여러 유형들의 조각들이 통일된 영향을 의도하면서 대칭적인 음성에 의해서 예배로 이행되어진다면, 그럴때에 레전(Litugie)이 논해질 수 있다. 그런 동시에 다양한 여러 구성요소들의 병렬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제의적인 과정에 소속된 독특성에서 밝혀지는 특정 벌칙들에 좌우된다. 고로 만일 연구자가 례전 본문을 규정 지을 때, 자의화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예배 행위의 상을 얻기위해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 행동 가운데 례전은 그의 자리를 가지로 있거나 혹은 적어도만일 예배에 그에 의해서 인정된 례전의 법칙성을 모든 의심에서 벗어나게 할수 있고 동일한 구조 종류의 도립행을 제출하기 위해서 그가 내용대고 조정할수 있고 정실를 거절한다면, 그런 일은 시도해야 할 것이다.
13. 이스라엘 예배의 다양한 동기
동기들은 대화(Wechselrede)를 알고 있으며 따라서 례전(Litugie)의 예술형태를 위한 출발점을 형성할수 있다. 개별적인 정결 규절들과 특정 축제날에 대해서 미심쩍어하는 평신도는 제사장을 향해 상응하는 질문을 던지며 제사장으로부터 하나님의 위탁을 받고 기도하게 구하여진 율법의 대답을 받는다(학 2,10; 슥 7,14). 율법공포 이외에 제의적인 대화를 위한 신탁이 고려된다.
개별적인 평신도는, 만일 자기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 두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것을 찾는다(삼상 23,2.4.10.12;30,7이하 ; 삼하 5,19) 혹은 그가 곤경, 역경의 원인을 찾아낼수 없는 경우, 그런 것을 구한다(삼하 21,1 이하) 탄식시의 기도자도 역시 간구와 청히의 확신 사이에서 , 그에게 그의 소욕의 청허를 보증하는 신탁을 받는다 &6,23을 참조. 간구와 신탁의 동일한 교대는 만족 탄식시에서도 나온다.
14. 율법(tora)과 신탁에 대한 의미
율법례전(Toraliturgie)을 고찰해보자. (시 15;24,3-6 예언자의 모방 :사 33,14-16과 미 6,6-8)
율법례전은 위에서 이미 보사된 정창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가운데 교훈을 추구하는 이들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누가 야훼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거룩한 곳에 들어설 수 있는가?" 시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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