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서!! 룻기!!

[스크랩] 욥기

하나님아들 2015. 2. 1. 23:13

욥기

 

 

 

 

 

시가서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가장 부담 없이 읽고 은혜를 쉽게 받을 만한 부분이 시가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서 전체가 시로 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이 시적 운율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며, 종교적인 교훈을 주로 담고 있다. 구약의 시가서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5권의 책을 의미한다. 이 시가서를 특별히 '지혜서'라고 하는데, 이는 시의 요소는 물론 일부의 부분은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가서에는 아름다운 시와 찬양, 지혜와 교훈의 말씀들이 잘 함축되어 나타나고 있다.

 

 

 

 

 

 

 

1. 시가서의 분류

 

 

 

 

 

 

 

구약성경은 많은 부분이 시로 되어 있다. 엄밀히 말할 때 구약의 약 1/3이 시로 되어 있으며, 포괄적으로 본다면 히브리어의 특성상 구약 전체를 시가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구약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도우심을 노래하며, 종교적인 교훈을 주는 감동적인 시구(詩句)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구약에서 시가서라 할 때는 주로 시편, 잠언, 욥기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맛소라 학자들이 현재의 성경을 편집할 때 위의 세 권만을 시가서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섯 두루마리 혹은 오축, 즉 아가, 전도서, 룻기, 애가, 에스더라고 불려지는 책들 중에서도 시가서로 분류할 때 큰 하자가 없는 책이 아가서와 전도서이다. 아가서는 그 의미가 '노래 중의 노래' 라는 뜻이며, 전도서 다른 시가서가 가지고 있는 지혜의 요소는 물론 시적인 장르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서에서는 분류상의 편의를 위해 기존 세 권의 책에 아가서와 전도서를 포함하여 시가서로 소개하고 있다.

 

 

 

 

 

 

 

2. 히브리 시가의 성격

 

 

 

 

 

 

 

1) 대구법(parallelism)의 발달

 

 

 

히브리 시에 있어서 대구법은 '의미상 운율'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상의 균형이나 분배로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53년 성경 학자 로버트 로드(Robert Low-th)는 이러한 대구법의 형식을 유사식, 대조식, 종합식의 제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유사식 대구법(Synonymous Parallelism)은 비슷한 말을 사용해서 같은 생각을 반복하는 것이며, 대조식 대구법(Antithetic Paralle-lism)은 뒷행에서 대조적인 사상을 반복하여 앞행의 사상을 강조하거나 확인하는 작시법이다. 종합식 대구법(Synthetic Parallelism)은 생각을 계속하여 표현하는 것으로서 뒷행 이하에서 첫 행에 무엇을 더하거나 그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2) 운율성

 

 

 

히브리 시가의 운율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대의 히브리 시그 인들은 시를 매우 정서적으로 썼으며 그 나름대로의 운율을 맞추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후대의 서양이나 헬라인들에게 있었던 것과 같은 엄격한 작시법 아래서 쓰여졌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3) 상징성

 

 

 

히브리 시는 함축적인 의미를 띤 언어들과 강한 상상력 혹은 숫자로 수식된 것이 많이 나타난다. 이렇게나 말들은 명유(明喩), 암유(暗喩), 전유(轉喩), 대유(代喩), 과장법, 두운법, 의인법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4) 반복법

 

 

 

히브리 시가의 대표적인 성격 중 하나가 반복법이다. 특히 히브리 시가의 반복과 운율은 그 구절을 배나 더 기억하기 쉽고 또 인상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복은 가나안 사람들이 즐겨 쓰는 하나의 기법이었고, 또 성경에 나오는 시들 중 몇몇 편이 반복적으로 강조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반복법은 가나안 사람들이 사용하던 기법을 성경에서 자주 인용하였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3. 시가와 지혜 문학

 

 

 

 

 

 

 

구약의 시가서 중에 잠언, 욥기, 전도서 그리고 시편 중 일부(1, 37, 49, 73, 112, 119, 127)는 지혜 문학으로 분류된다. 외경에는 솔로몬의 지혜서와 벤시락의 지혜서가 있는데, 이들은 정경의 지혜 문학을 많이 모방하고 있다.

 

 

 

 

 

 

 

1) 지혜의 어원적 분석

 

 

 

히브리어 h!qj(호크마; 지혜)는 고대 근동의 아카우디아어와 우가릿어의 어원과 뿌리를 같이 한다. 아카디아어의 지혜는 '하카무'이며 우가릿어에 있어서의 지혜는 '하큼'이다. 이 단어들의 뜻은 '어떤 사람을 성공시키는 기술'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는 히브리인들의 이해한 지혜의 개념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어서의 지혜는 주로 온전한 지혜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고 생각되었다(31:2).

 

 

 

 

 

 

 

2) 히브리적 지혜

 

 

 

일반적으로 지혜는 재치와 통찰력 그리고 올바른 판단력 등을 바탕으로 인간의 가치와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능력이라 정의 될 수 있다. 따라서 지혜는 지식, 즉 어떤 사물에 대한 명료한 의식이나 앎과는 구분된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상에서의 지혜는 현재 우리가 규정하고 있는 것과 같이 명확히 구분 지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1:7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한 것과, 9:10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라고 한 말씀을 볼 때 잘 알 수 있다. 히브리적 사고에 있어서는 지혜나 지식이 분리된 것이 아니며 서로 상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나 지식이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아울러 히브리적 사고에 있어서의 지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소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이다.

 

 

 

 

 

 

 

3) 히브리적 지혜의 기능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히브리인들의 지혜는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요소와 맞물려진다. 그러므로 지혜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절대적 확실한 수단이 되며,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며, 의로운 자에게는 상을 주는 근거가 된다.

 

 

 

 

 

 

 

4. 시가서의 편집

 

 

 

 

 

 

 

일반적으로 시편과 지혜서들이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추고 읽혀지기 시작한 것은 포로기 후기의 일로 여겨진다. 이러한 시가서는 많은 저자들에 의해 짧은 단편으로부터 시작하여 매우 오랜 역사를 두고 형성된 것이다. 특히 시편은 율법의 수여자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왕국 시대의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그 저자가 다양하다. 현재 시가서의 편집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126, 137)들로 미루어 볼 때 학사 에스라의 활동 시기와 그 이후의시대로 봄이 가장 타당하게 여겨진다. 익명의 편집자에 의해 편집되고 정리된 시가서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지속되어감에 따라 서서히 그 가치와 영감성을 인정받고 결국은 정경으로 채택되어 읽혀지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5. 기록 목적

 

 

 

 

 

 

욥기: 시가서 중에 욥기는 '의인이 왜 고난을 받는가'라는 문제에 답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첫째, 하나님은 의인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며 강하게 하는 수단으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생각과 그분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마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대하심을 나타내기 위해 욥기를 기록했다.

 

 

 

시편: 본 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인생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시적인 고백과 기도와 찬양들로서 개인 신앙 생활에 위로나 교훈을 주며, 공중 예배 때 찬양의 책으로 쓰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깊은 경건의 내용들은 신앙인의 발전을 위한 지침서가 된다.

 

 

 

잠언: 본 서는 그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앙 생활에 필요한 가장 실천적인 지혜,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이를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 저술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율법들을 지켜 순종하는 것을 그 기초로 삼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표준대로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형통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전도서: 본 서는 다른 시가서와는 달리 하나의 뚜렷한 목적을 보여 주기 보다는 전통이나 일관성이 없는 지혜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비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는 모순되는 것 같은 말들이 하나의 통일된 교훈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세상에 새로운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된 것 같으나, 우주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아가서: 본 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아름다운 사랑을 통해 인간의 고뇌하고 순수한 사랑을 찬미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이런 사랑의 근원자이시며 완성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구약 성경의 형성사에서 시가서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은 결국에는 정경으로서 아무 문제점이 없음을 드러났었다. 그것은 다른 성경과 비교해 볼 때 시가서들에는 하나님의 구언 업적과 말씀에 대한 직접적인 찬미와 응답 그리고 확고한 여호와 신앙을 기초로 한 지혜의 언어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욥 기?

 

 

 

 

 

 

 

?욥기 개관?

 

 

 

 

 

 

 

1. 욥기의 특성

 

 

 

 

 

 

 

1) 특수한 전개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1:1)라는 이 책의 첫 마디 부터가 다른 책과 구별되어지는 독창적인 문학 형태임을 시사하고 있다. 주인공 욥은 사람이 바라는 최고의 행복의 표상인 부와 명예와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의까지 갖춘 순전한 인물이다. 그러나 사단에 의해 시험을 당하게 되고 삽시간에 비참하도록 몰락한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은 위로한답시고 있지도 않은 그의 죄를 들추어 내려고 협박 어린 열변을 토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한계성을 넌지시 나무라시며, 화해의 방법을 제시하시고 갑절의 회복을 허락하심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2) 천상의 회의

 

 

 

창조주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요 순전하고 정직한 의인을 무한히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천상의 회의 장면을 통해서 알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피조된 하나님의 아들들만 모아 놓은 편파적인 회의가 아니라, 유배당한 적대사 사단도 참석을 허락하신다. 뿐만 아니라 공개석상에서 사랑스런 의인을 칭찬하시며 참소자의 확인을 받아 두시려고 한다. 사단은 의인의 순전함은 하나님의 사단의 방해 적엽을 한계 안에서 허락하시는데, 그것은 사랑스런 의인의 믿음을 거룩한 자부심으로 신뢰하시기 때문이다.

 

 

 

 

 

 

 

3) 풀 수 없는 의문점

 

 

 

왜 어떤 사람은 불행을 옷처럼 이고 고통당하고 멸시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왜 어떤 사람은 그 행실이 방자하고 극악스러운 데도 건강하여 장수하고 그 산업이 번성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계신 다면 어째서 무고히 고난받는 자에게 관심을 주지 않으시는 것일까? 과연 하나님은 공평한 선을 베푸시는가? 무엇 때문에 침묵하시는가? 인간이 살아오면서 고래로부터 현재까지 가지고 있으며 품고 있는 이 심각한 의문이 욥기 3장에서부터 38장에 이르도록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지식의 한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2. 욥기의 주요 사상과 역사성

 

 

 

 

 

 

 

1) 고난의 의미

 

 

 

욥기의 대주제는 고난이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 (5:7)는 말이 실감될 만큼 사람의 삶은 험난스럽다. 더욱이 의인에게는 더 고난이 많다(34:19). 그것은 창조주로부터 공급되어지는 은혜와 축복의 줄을 끊고, 자기에게 굴복시켜 자기의 종을 삼으려는 사단의 극성스러운 획책 때문이다. 결국 사단은 의인을 시험하는 승인을 받아내고야 만다. 그러나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고전10:13)라는 말씀처럼 감당할 만큼만 허락하시는 주님이심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자에게 부과되는 이 시련을 통하여 주권자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할 것을 가르친다.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시인하고 순종할 때 바로 지혜의 눈이 열리며 그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2) 욥기의 역사성

 

 

 

욥기가 가상적인 작품인가, 아니면 역사적 작품인가, 또는 둘다 겸한 작품인가의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벤 게르솜(Ben Gershom)과 스피노자(Spinoza)는 본 서를 하나의 소설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탈무드에 인용된 레쉬 라키쉬(Resh Lakish)와 나흐만(S. B. Nachman)의 대화를 보면서 본 서가 유대인의 역사적 성서에 인정되지 못했고 이야기의 신빙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 랍비달과 초대 교부들은 본 서를 절대적인 역사적 작품으로 취급했고, 무엇보다도 욥은 역사적인 인물로서 욥의 실존이 약5:11과 겔14:14, 20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또한 소설이라면 그 시대의 배경과 인물의 성격을 그처럼 조화롭고 생동감 있게 사실화하지 못할 것이며, 그 시대의 사람들은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터무니 없는 가상 설계에 전혀 익숙하지 못한다. 따라서 본 서는 역사적인 작품이면서 또한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영감 어린 창작품이라 할 수 있다.

 

 

 

 

 

 

 

3. 욥기의 가치성

 

 

 

 

 

 

 

1) 보여지는 하나님

 

 

 

인간의 방법과 인간의 지식으로 문제를 풀고자 하면 문제의 저변만 겉돌므로 고난의 시간만 더 가중시킬 뿐이다. 핵심에 다가가서 그 정곡을 찔러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의 핵심을 주재하는 주권자에게 다가가 그 통치의 온전하심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 욥은 고통에 겨워 울분을 터뜨리던 자세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 온전히 굴복하는 순간, 지금까지 그를 압제하던 세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뿐만 아니라 귀로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눈으로 뵙게 되는 영광을 얻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가 진심으로 회개하며 전심으로 찾을 때 아낌없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2) 은혜로운 목적

 

 

 

욥은 위로하러 왔다는 세 친구들로 인하여 더 큰 성처와 심적 괴로움을 겪는다. 세 친구들은 모두 고난은 죄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이며, 욥에게는 분명히 감추어진 대단한 죄가 있을 것이 분명하니 어서 속히 고백하라고 강요한다. 친구들의 야속함에 탄식을 하면서도 욥은 언젠가는 하나님이 보증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그는 자신의 고난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겸허히 순응함으로써 본 서를 절정으로 이끌어 간다. 하나님은 인간 자신의 공의에 대한 자만심을 제거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순전히 순응시키려고 의도하신다. 이 놀라운 믿음의 승계는 장차 오실 구속자의 사역으로 인한 승리와 부활의 소망으로 연결되어진다.

 

 

 

 

 

 

 

4. 욥기서가 주는 영적 의의

 

 

 

 

 

 

 

욥기는 유일하게 인간과 영의 세계와의 연관성을 밝혀 주며,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인간의 철학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인간의 한계성을 지적해 준다. 또한 고난 자체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의 첨가가 있음을 알게 될 때에 그 고난이 축복의 매체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본 서의 이야기는 "인전에 한 번 있었던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인간성 자체에 귀속되는 문제이며,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천사들을 그 관람자로 하는 한 인간의 시련에 관한 희곡이다." 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연구1] 욥의 고난과 좌절(1-3)

 

 

 

 

 

 

 

복음을 잉태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욥기는 하나님의 징계와 인간의 성화와의 연관과 더불어, 다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현 시대의 복잡한 조건과 맞서고 있는 성도들에게 전적인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호에 울타리 안에서 분복을 누리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지만 사탄은 경건자의 평안을 시샘하여 어찌하든지 훼방 놓을 구실을 찾아낸다.

 

 

 

 

 

 

 

1. 경건자의 분복(1)

 

 

 

 

 

 

 

?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창조주가 사랑하는 자에게 부여해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분께 사랑을 드리는 자는 마땅히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욥이 누린 행복은 무엇인가?

 

 

 

 

 

 

 

? 이러한 행복은 무엇으로 인해 오게 되었는가?

 

 

 

 

 

 

 

? 엄청난 축복을 누리던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잃고 만다. 이 고난이 누구로 인해 왔으며, 그 고난 가운에 욥이 취한 행위는 무엇인가?

 

 

 

 

 

 

 

 

 

 

 

1) 욥의 경건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 일컫음 받을 만큼 하나님과 사랑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대단한 복을 누리는 사람이었다 사랑스런 아내와 건강하고 충실한 열 자녀에 둘러싸여 늘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한다. 그 뿐인가? 그이 소유는 멀리 보이는 지평선이 울타리가 될 정도로 주변의 것이 거의 다 그의 것이었다. 인간이 바랄 수 있는 모든 행복의 조건을 이상적으로 누리는 그의 모습은 동화 같이 아름답고 부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욥이 모두에게 흠모 받을 만큼 큰 복을 받은 것은 바로 그가 정직과 순전의 예복을 입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 (1:1, 8)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한 가운데 사탄은 그의 이런 모든 복을 순식간에 빼앗아 버린다. 그러나 욥은 불평이나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여호와를 찬양하는 믿음을 가졌다(1:20-22).

 

 

 

 

 

 

 

2) 완전한 경건

 

 

 

모범적으로 체계가 잘 잡힌 가정은 성스러운 학교와 같다. 이 작은 학교에서 다져진 교육은 사회의 장에서의 큰 활동을 뒷받침해 주는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욥은 복스럽게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 주는 것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잔치 후에 반드시 성결의 의식을 행하였다. 그것은 그가 자녀의 종교 교육에도 경건한 부모로서의 최대한의 의와 본을 보인 증거이다. 욥은 어느 절기에만 한다든지 나중에 하겠다는 등의 미루는 습관의 작은 죄도 용납지 않고, 신속한 실행과 변함없는 완전한 경건을 유지하였다. 욥의 의와 행복은 그의 이러한 흠잡을 데 없는 경건한 자세에 기인하고 있다.

 

 

 

 

 

 

 

2. 사탄의 공격(2:1-10)

 

 

 

 

 

 

 

? 파괴자, 참소자, 비난자인 사탄은 하나님의 은총의 젖줄에 시기함의 가위질을 하려고 끈질기게 노력한다.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9)라며 하나님이 욥만을 지나치게 복 주신다는 비난으로 하나님을 격동시킨다. 마침내 사탄은 매우 신속하고 잔인하리 만큼 철저하게 욥에게 더 큰 재난을 준다. 그 재난이 무엇이며, 그의 아내까지 욥에게 어떤 고난을 주는가? 

 

 

 

 

 

 

 

1) 사탄의 제2차 공격

 

 

 

그렇게도 무참한 공격을 받은 욥은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의인답게 의연하게 대처한다. 오히려 그는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찬송의 향연을 올려 보냈다. 분명코 이 점에서 사단은 패배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단은 자기의 패배를 부인하고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는 일(2:4)까지 허락을 받아내고야 만다. 그것은 욥이 재산과 자녀만 잃었지 가장 욥 자신의 생명인 육신은 멀쩡한 것을 보고 그 육신을 치겠다는 것이다. 그 후 욥의 피부에는 처참한 악창이 발생하여 순간의 고통이 아닌, 장구한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래도 그는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2:5)는 사단의 예언을 빗나가에 하는 의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자 사단은 욥에게 단 하나 남은 또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 폭탄적인 선언을 하도록 충동질한다. 그 아내는 "그리도 순전을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2:9)고 당돌하게 제안한다. 참을 수 없는 고난을 통해서 점점 약해져 가는 욥의 의지에, 사랑하는 아내의 말은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욥은 어리석은 여자의 말로 치부하고 여전히 순전을 견지한다.

 

 

 

 

 

 

 

2) 욥의 신앙

 

 

 

욥은 모든 제물과 자녀를 잃은 시련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었으나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일어난 육체의 병과 아내의 배반은 도저히 참아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욥의 굳건한 신앙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한다.

 

 

 

 

 

 

 

3. 위로와 탄식(2:11-3:26)

 

 

 

 

 

 

 

? 아내마저도 떠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멸시받는 처지의 친구를 욥의 세 친구들은 찾아온다. 그의 친구들이 욥을 어떻게 위로했으며, 욥이 자신에 대해 어떤 탄식을 했는가?

 

 

 

1) 자신에 대한 탄식

 

 

 

욥의 몰락의 소식을 듣고 함께 찾아온 친구들은 욥의 몰골을 보고 통분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자기의 겉옷을 찢고,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말없이 욥의 옆에 같이 앉아 있었다. 그 후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기까지 한다(3:1). 이것은 모든 고난과 재앙에 대해서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저주였다.

 

 

 

 

 

 

 

2) 진정한 신앙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성도들에게도 환난과 고난의 시험을 허락하신다. 이는 성도들의 신앙을 더욱 연단시켜 견고케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허락하시므로(고전10:3)이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다욥의 고통을 능가할 만한 것은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의 고통 이외에는 없다. 내적으로 고결하고 악에 대해서 완전히 떠난, 사랑하는 자가 받는 고통을 보시는 하나님은 슬픈 분노를 가지신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의 고통이 극복될 때까지 우정 어린 침묵의 응원을 보내 주신다. 십자가상의 주님께서 침묵했듯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는 그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섭리를 바꾸신다 해도 불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연구2] 엘리바스의 변론

 

 

 

(4-7,15-17, 20-24)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낸 파괴자는 욥의 울타리를 남김없이 부숴 버렸다. 정원의 울타리뿐만 아니라 육체의 울타리까지 파괴당한 욥은 오랜 침묵 끝에 친구들에게라도 자기 고통의 극심함을 하소연해 보고자 한다. 그들이 진정한 지혜의 소유자들이라면 침묵 뒤에 따뜻한 위로와 도움의 말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이에 그중 연장자인 엘리바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욥을 훈계하였다.

 

 

 

 

 

 

 

1. 친구의 충고

 

 

 

? 세명의 친구 중에 아마도 가장 나이 많은 것으로 추측되어지는 엘리바스는 데만 사람이다. 데만 사람은 지혜 있기로 유명하다(49:7). 멀리 살면서도 욥의 친구가 된 것은 당시에 그가 지혜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바스의 인품과 신앙관 그리고 엘리바스가 욥에게 충고한 내용은 무엇인가?

 

 

 

 

 

 

 

1) 엘리바스의 인품

 

 

 

그는 박식하며 꿈을 꾸는가 하면 영을 분별할 줄 아는 선견자였다. 그리하여 그를 당시의 예언자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는 친구 욥의 파산소식을 듣고 멀리 있는 다른 친구 빌닷과 소발에게도 연락하여 같이 만나기를 약정하는 주선을 했을 것이고, 급기야는 욥 앞에 와 진심 어린 아픔과 놀라움으로 칠 일간이나 함께 말을 잃었다. 그의 인품은 고통받는 친구에게 만사를 제치고 찾아온 것에서 돋보인다.

 

 

 

 

 

 

 

2) 엘리바스의 신앙관

 

 

 

그는 매우 신중하며 세심한 사람으로서 많은 명상을 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고요 속에 자아와 대면하게 되면 하나님과 만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그 분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엄숙한 그리고 위대한 음성을 들려 주신다. 엘리바스는 깊은 밤 만물이 잠들어 고요할 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고, 일반인이 볼 수 없는 환상을 보았다.

 

 

 

 

 

 

 

3) 엘리바스의 충고

 

 

 

그는 처음에 욥의 빛나고 찬연했던 기억에 호소하고 있다. 욥은 곤혹 가운데 처한 슬픈자, 약자에게 철학자요 인내자요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러한 은혜자가 왜 자신의 문제는 자신보다 더 큰 하나님에게 은혜를 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의인을 무고히 벌하시지 않는 분이니 창조주에게 불평하지 말고 진정으로 은밀한 죄를 고백하라고 한다. 그의 충고는 참되고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에만 근거를 두고 그 외의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경멸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의 전통에만 집착하는 신앙 형태인 것이다.

 

 

 

 

 

 

 

2. 엘리바스의 변론

 

 

 

? 엘리바스는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철학적 변론을 통하여 욥을 공격한다. 그렇다면 그의 변론의 내용은 무엇이며, 문제점은 없는가?

 

 

 

 

 

 

 

1) 악인멸망의 필연성 문제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4:8). 악인은 질풍으로 멸망당하며 하나님의 정확한 선별에 의해 가차없이 멸망당한다고 엘리바스는 확언한다. 그는 욥의 자녀들이 대풍에 의해 죽은 것을 은연중 암시하며, 욥도 그러한 종류의 악인임을 환기시키려 한다. 과연 악인은 그렇게 일점의 오차 없이 선별되어 망하는가? 그렇다면 욥은 어떠한 은밀한 죄가 있단 말인가?

 

 

 

 

 

 

 

2) 선인불멸의 필연성문제

 

 

 

"생각하여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4:7)라고 엘리바스는 선언한다. 즉 죄 없는 선한 사람은 결코 망하거나 불행하게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엘리바스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불쌍한 욥이 처한 상황을 보면 친구로서 할 말이 아니었다. 환경과 전혀 무관하게 진리만 선포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위로자의 위치에서는 신중하게 진리를 다루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비난점을 찾는 것보다 선을 발견해 내는 것이 훨씬 큰 소득이다. 엘리바스의 주장대로라면 고난받지 않는 사람은 다 의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3)고난의 필연성 문제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5:7)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삶이 복되고 평화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엘리바스는, 마치 고난 때문에 인생이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인간은 태어날 대부터 고통의 영역 가운데 보내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생이 고난받도록 주관하시는 것은 아니다. 

 

 

 

 

 

 

 

3. 욥의 변증과 기도

 

 

 

? 이러한 엘리바스의 예리하면서 합리적인 변론에 대해 욥의 변증과 기도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1) 욥의 변증

 

 

 

욥은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며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시증해 보이라고 강력하면서도 간절하게 요청한다. 그것은 합리적인 요구이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죄를 드러내시지 않은 채 무조건 회개하라고 하시지는 않는다. 예수님도 죄를 확인시키지도 않고 책잡지 말라고 하셨다(8:46)

 

 

 

 

 

 

 

2) 욥의 탄원적 기도

 

 

 

욥은 진지하게 죽음을 원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끊으실지라도 자신은 오히려 위로를 받겠다고 한다. 그는 죽음 후의 미래 세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은 없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한 번도 거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6:10). 그는 "나의 기도는 정결하며"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이 높은 데 계시니라"(16:19)고 확신다. 그는 자신이 비록 죽을지라도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을 뵈올 것을 애절하게 기원한다.

 

 

 

 

 

 

욥이 죽기를 원하는 것은 그의 고통이 그만 큼 극심하였고, 더욱이 친구의 어줍잖은 위로가 그의 고통의 무게를 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능자 앞에서 자기의 무죄가 명백해지리라는 부활과 심판의 소망을 잉태하고 있다. 엘리바스와 욥의 논쟁에 나타난 위대한 진리와 장엄성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인간의 무지와 죄성에 이을진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불평과 비난을 할 특권은 없는 것이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오직 복종과 이해일 뿐이다.

 

 

 

 

 

 

 

?[연구3] 빌닷의 변론(8-10,19,25-31)

 

 

 

엘리바스의 점잖고도 권위 있는 예언적 훈계에 욥이 전혀 수긍하지 않고 오히려 가슴을 찢을 듯 안타깝게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자 이번엔 빌닷이 나섰다. 빌닷은 고대 조상의 전통과 역사를 통하여 욥의 부정을 조명하려 한다. 빌닷의 편견적 공론에 욥은 예레미야의 애가보다 더 진한 비통한 노래로 답변한다.

 

 

 

 

 

 

 

1. 친구의 공론

 

 

 

 

 

 

 

? 빌닷은 수아 사람으로서 엘리바스보다는 나이가 약간 적고, 소발보다는 좀 많은, 그들 중 중간 위치의 사람이다. 그는 엘리바스보다 진술의 요령이 부족하고 상당히 직선적이다. 그는 자기가 진리라고 신봉하게 된 것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언어의 화살을 쏘아붙이는 좁은 소견의 소유자이다. 그럼에도 그는 당대의 현인을 대표하는 자였다고 볼 수 있다. 빌닷의 노의의 새로운 면은 은유를 사용한 것과 과거의 교훈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빌닷의 신앙관은어떠한가? 그리고 빌닷이 욥에 대해 오해한 부분은 무엇인가?

 

 

 

 

 

 

 

1) 빌닷의 신앙관

 

 

 

빌닷은 엘리바스보다는 덜 민감한 감성을 소유했다. 그는 조상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진 전통주의 신앙자로서 자기 주장의 권위를 전통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 진리성에 대해 조그만 의심도 없이 그의 신학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다른 이들에게 속담과 금언을 인용하여 전달하려고 애쓴다. 이와 같이 공론가들은 형식과 선례를 중요시하고 일정한 룰의 적용을 즐겨한다. 우리는 실제적인 사실에 직면 할 때 전통이라 하더라도 오류가 발견되면 가차없이 버려야 한다. 그것은 전통이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진리만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 빌닷의 오해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되에 붙이셨나니"(8:4)라고 빌닷은 마치 자기가 욥의 자녀들의 죄지으니 현장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욥을 정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첫마디부터가 심한 질책으로, 욥의 말이 광풍처럼 헛되고 가증스럽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욥이자녀 양육의 방법을 옛 시대 사람, 열조에게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하다. 빌닷은 예 것에 대한 존경을 남용하고 있다. 우리를 지키는 최선의 것은 옛 규칙이 아니라, 항상 그의 백성 가운데서 살아계신 그리스도이다.

 

 

 

 

 

 

 

2. 생명의 법칙

 

 

 

 

 

 

 

? 빌닷이 그의 좁은 소견속에서도 :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는 위대한 예언을 하였다. 이 예언은 어떤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가?

 

 

 

 

 

 

 

1) 창대한 열매

 

 

 

이 말은 욥의 이전에 누렸던 축복은 별 것 아니라고 얕잡아 봄이 있는가 하면 '지금가지의 네 고난은 미약한 시작에 불과하다'는 협박의 의미도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빌닷이 부당하고 그릇된 견해로서 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예언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안내문이 된다. 성도는 작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할 줄 알아야 한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25:21,23)라는 말씀처럼 우리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에게 큰 열매를 맺게 해주시고 주님의 즐거움에 동참케 해주신다.

 

 

 

 

 

 

 

2) 결실의 은총

 

 

 

성장은 생명의 법칙이다. 성도가 작은 시를 심었다면, 즉 작은 일에 충성했다면 성장해야만 하고 반드시 창대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라는 말씀에서 불 수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자기는 보잘 것 없은 작은 씨를 심었을 뿐이고, 아볼로는 소리 없이 물을 주는 헌신을 하였으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밝히며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린다. 복음의 승리는 창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 비통 속에 부르는 찬송

 

 

 

? 욥은 빌닷의 공격적이며 직선적인 변론에 대해, 그를 저주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욥의 자신에 대한 애가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어떠한가?

 

 

 

 

 

 

 

1) 불행의 견고함에 대한 애가

 

 

 

욥은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9:27) 그의 고통이 워낙 심하고 사라지지 않음으로 떨면서 비통해 한다. 그의 육체의 고통은 "옷깃처럼 내 몸에 붙었구나"(30:18)라고 말할 정도로 병들어 헤어진 피부 조각을 친구들에게 보이며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9:21)고 애절하게 노래한다.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30:29)며 사람으로서 사람 취급을 못받고 어린아이와 비천한 자들에게조차 침뱉음과 조롱을 당하는 인격적 모멸의 참을 수 없음 토로한다. 이 불행은 단순한 회답만으로는 그 무게가 줄어들 수 없다.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주님께 벗어 놓아야만 그 짐이 가벼워진다(11:28). 주님 앞에 짐을 완전히 맡길 때 쉼을 얻게 된다.

 

 

 

 

 

 

2) 특별한 찬양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19:26).욥은 심한 좌절에 빠졌으면서도 반드시 그의 영이 하나님을 만나고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소망을 노래한다. 침체의 병에 소망의 노래는 어떤 의사보다 낫다. 그는 "내 수금은 애곡성이 되고 내 피리는 애통성이 되었구나"(30:31)하면서 눈물 어린 찬양을 부른다. 그리고 폭풍처럼 밀어닥친 환난의 와중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라는 특별한 찬송을 불렀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사랑하는 자의 찬송받기를 즐겨하신다. 흔히 기쁠 때에만 찬송을 하지만 괴로울 대의 찬양이 더 큰 위로와 능력이 된다. 우리의 찬송은 천사도 흠모하며, 찬송 소리에 사단은 힘을 잃는다. 욥은 불행 속에서 흐느껴 우는 연약한 자가 아니었다기독교는 모든 종교 가운데서 뛰어난 특별한 종교이다. 예배를 드릴 때 늘 찬양과 함께 드리다. 후에 욥이 갈망하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은 바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며 소망의 찬송을 드렸기 때문이었다. 견실한 신앙인은 하찮은 공론가의 규칙이나 예견에 속박되지 않는다. 기독교의 모든 교의는 역사적 교훈이다. 우리는 이 교훈을 속박의 틀로 볼 것이 아니라 발달하는 사회와 지식, 변화되는 환경과 역동적인 관계로 이끌어서 적용해야만 한다.

 

 

 

 

 

 

 

?[연구4] 소발의 변론(11-14, 21)

 

 

 

선견자와 공론자에 이어 세속적인 언동으로 소발이 등장한다. 그는 인간을 연구하였고, 인생에 대해 많은 상식을 가졌다고 뽐내는 자이다. 위대한 진리에 대해서는 어두운 시력을 가졌으면서도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전제하는 것은 오산이다. 친구들의 격앙된 충고에 욥도 점점 말이 많아지고 전능자에 대한 몰이해와 원망이 도를 넘어가고 있다. 소자인 인생들은 혀를 악에서 금하며,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해야 한다(34:13).

 

 

 

 

 

 

 

1. 다변의 허구성

 

 

 

 

 

 

나아마 사람인 소발은 세 친구 중에 아마도 연령이 가장 적어서 세 번째로 말한 것 같다. 그는 노기가 섞인 말로 난폭하게 자기 생각을 발표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저급한 기준으로도 능히 욥을 정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발언의 골자는 엘리바스와 빌닷의 입장에 동의하면서도 환상이나 공론을 멸시한다. 그는 형식주의자로서 당대의 선인이라 자처한다. 또한 자신을 당시의 가장 근대적인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소발이 말한 내용 중 어떠한 허구성을 찾아볼 수 있는가?

 

 

 

 

 

 

1) 말의 잔치

 

 

 

소발은 욥의 불평을 막고자 하는 성급함으로 신앙적인 열정이 결여된 과격한 발언을 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염려만을 앞세우느라 친구에 대한 온정은 잊고 만다. 그는 욥을 '말이 많은 떠벌이'라고 멸시한다. 욥이 말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도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며 말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11:2)면서 소발은 다변자의 모순을 욥에게만 덮어씌우려고 한다. 인간은 흔히 가까운 사람에게 공정치 못하며 완고하고 매정하게 대하는 일이 많다. 애통하는 자의 탄식을 비웃고 힐책하는 일은 상처에 불을 대는 것처럼 잔인한 행위이다. 말은 항상 조심성 있게 선정하여 간결하게 구사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인의 지혜이다.

 

 

 

 

 

 

 

2) 다변의 허구성

 

 

 

자기를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려고 하는 맹목적 노력이 적절한 어휘와 심도 깊은 표현 없이 망발될 때에는 더 악화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면 말로써 말을 이기고자 하는 언쟁 외에는 얻을 것이 없다. 다변으로써 상대를 제압하고자 함은 오산이다. 오히려 이성을 제어하는 능력이 무디어지고 감정만 더 부풀어 올라 결국은 의도하지도 않았던 지나친 말까지 쏟아 놓게 된다. 욥과 세 찬구가 언쟁을 통해 얻은 것은 우정에 금이 가게 할 정도의 적개심과 모멸감뿐이었다.

 

 

 

 

 

 

 

2. 인간의 무지

 

 

 

?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11:6)고 소발은 욥에게 핵폭탄 같은 저주를 부었다. 그는 자기 지식이 확실한 것처럼 주저없이 입술의 범죄를 저지른다. 도대체 욥이 얼마나 대단한 죄를 지은 것으로 오판했으면 현재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보다 더 중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가?

 

 

 

 

 

 

1) 무지로 인한 말

 

 

 

욥은 "주께서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신다"고 하며 까닭 모르는 고난으로 인한 혼돈되 분별력으로 하나님을 오도하고 있다. 욥과 세 친구는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열렬한 신앙인이면서도 무지로 말미암아 불신앙과 같은 발언을 남발하였다.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14:19),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구박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대적이 되어 뾰족한 눈으로 나를 보신다"(16:9)고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진술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단의 참소를 완전히 봉하시고 욥의 의로움을 돋보이게 하시려 정금같이 연단하시는 기간에 인내로 잠잠했더라면 그의 고통의 기간이 단축되었을 것이다.

 

 

 

2) 무지로 인한 고난

 

 

 

노아의 고달픔을 보시고 20년을 단축하신 하나님이셨다. 반대로 가나안 정탐꾼의 부정적 발언과 그 백성의 불평은 광야 기간을 40년으로 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나님의 힘과 지혜는 무한하고 광대하다. 인간은 하나님을 보고 알지만 그것은 부분적이다. 욥도 후에 하나님에 대해 미약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38-40). 이처럼 불완전한 시야의 적은 지식으로 진리를 해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3. 소발의 어리석은 판단

 

 

 

 

 

 

 

? 소발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20:3)라며 자신을 부추긴다. 그러나 그는 영혼의 내적 동요를 숨기기 위해 가장된 만용을 부린다.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20:7)고 조잡한 언어로 삭고한 자를 정죄한다. 이 말이 보편성과 타당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지적하는 욥에게는 해당되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1) 공의의 하나님

 

 

 

이 말은 악인의 결국이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만큼의 완전한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는 뜻이다. 즉 이 세상에서 똥이 매우 천대받는 것처럼 인간 중심의 악한 계획과 명예는 끝내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발의 언행으로 욥은 언어의 화살 공방전에 극단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기 의를 누차 강요함으로 겸손하고 경건한 본연의 자세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을 향하여 그들이 하는 것처럼 공격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의문으로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욥이 가장 괴로워하고 항변하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공평하게 취급하셨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그러나 욥은 악인이 번영하고 형통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현세적 심판을 반드시 받는다고 친구들을 공격한다.

 

 

 

 

 

 

 

2) 하나님의 심판

 

 

 

사도 바울이 인간의 세상적인 자랑과 정욕을 배설물로 여긴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러한 신앙이 필요하다. 그리고 악이 형통한 것 같지만 결국은 패망과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욥은 하나님의 공의를 보고 깊이 뉘우친다.

 

 

 

 

 

 

진실한 신자는 사람들로부터의 신임이나 위로가 없이도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선명한 교통과 은혜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욥은 친구들의 논박에 그들을 원망하거나 동일한 비난을 하기 위해 흥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이 막히고 은혜의 햇살이 거두어진 데 대한 의문이 너무 사무쳐 괴로운 것이며 누구에게라도 그 까닭을 물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신실한 자에게 닥치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불의한 박해가 아닌 하나님 섭리와의 불일치 문제이다. 성도는 어려울 대 영적인 성실성을 가지고 꾸준히 그리고 조용히 기도하며 해답을 하나님께 간구 해야 할 것이다.

 

 

 

 

 

 

 

?[연구5] 엘리후의 변론(32-37)

 

 

 

엘리바스, 빌닷, 소반이욥과 격한 논쟁을 벌이고 나자 이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양상으로 대단히 설득력 있게 논술한다. 그의 긴 진술 속에서나 앞뒤의 다른 곳에서도 그 자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마침 멜기세덱이 아브람 앞에 나타나고, 아브람은 그에게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14:18-20)는 것 외에는 전호 어디에도 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을 삽입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느끼듯 엘리후를 통하여 주님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1. 중재자의 그림자

 

 

 

? 엘리후는 다름 사람의 말을 인내하여 끝까지 경청한 후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충동으로 인한 말을 감갔고, 자기가 해야 할 말을 미리 준비하고 정리하여 지혜롭게 은유적으로 이야기 한다. 엘리후는 어떠한 인물이며, 욥과의 변론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1) 엘리후의 변론

 

 

 

엘리후는 자신의 말이 신적인 감화력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32:8). 그는 환상이나 격언이나 과장된 경구가 아닌 순수하고 단정한 말로서 확실한 사실 위에 입증된 경험을 진술하며, 사악한 목적을 품지도 않았고, 웅변적으로 진리를 가장하려고 하지다 않았다. 그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담대히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엘리후로부터 전능자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33:4). 그는 전능자의 숨결에 의해 불이 밝혀졌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성령의 빛과 뜨거움으로 인간들의 마음을 비추시고, 감화시킨다고 알려준다.

 

 

 

 

 

 

 

2) 인격적인 도전

 

 

 

욥은 친구들이나 누가 하는 비난이든지 모두 다 반박할 수 있는 당당함이 자기에게 있다고 반박할 수 있는 당당함이 자기에게 있다고 큰소리친다(13:22 23:4-7 31:35-37). 그리고 자기를 고난으로 몰아넣은 적대자는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주장한다(9:32).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후라는 인물을 준비하셔서 하나님과 직면해야 할 욥의 곤경을 완화시켜 주신다(33:6,7). 엘리후는 간간이 욥에게 변론할 기회를 주며 당당하게 반박하단 욥의 대답을 기다려 주었으나 욥은 한마디의 답변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욥을 협박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욥의 잘못을 지적하되 부당성을 확신시키며 전능자의 초월적인 위대성을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은 결코 몰인정하고 비인격적인 심판자가 아니시다.

 

 

 

 

 

 

 

2. 하나님의 계시방법과 목적

 

 

 

 

 

 

 

? 해석자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재자 또는 사자를 의미한다. 사자의 사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하나님의 섭리를 특별히 지정된 자에게나 구속의 범위 안에서 일반인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죄성에 둘러싸여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지하다. 하나님께서 창조해 보내신 한 사람 한사람을 공평과 정의로 대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해석자를 보내시어 무지한 영혼을 교화하신다. 여기서 엘리후는 특수한 해석자의 완전한 위치로 보기에는 자만이라는 흠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욥에게도 교만한 마음이 있었는가?

 

 

 

 

 

 

 

1) 고난을 통한 겸손

 

 

 

인간은 교만이라는 사단의 유혹에 잘 걸려든다(3:5). 엘리후는 해석자로서 오류의 가능성이 짙고, 한계가 제한적인 자신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욥을 판단하고자 했던 교만이 있었다(34:3,4). 그리고 욥도 하나님이 인정하실만큼 순전한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에 대한 자만심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혼이 구덩이에 빠질 정도로 육체의 고난이 극심함에도 자기 의를너무 앞세웠고, 무지한 말로 전능자를 비방했다(33:8-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의 확고한 신앙심과 인내를 높이 평가하시어 엘리후를 통하여 욥을 부드럽게 일깨워 그의 고난을 겸허함 안에서 얻어지는 평안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셨다.

 

 

 

 

 

 

 

2) 꿈을 통한 선한 계시

 

 

 

흔히 심리학자들은 꿈이 개인의 심적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외적인 꿈이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 듯 교훈하실 때 기원의 심리적 기초에 기반하지 않는다(33:14-17). 느부갓네살, 바로, 아비멜렉과 같은 이방인에게도 꿈을 통하여 계시로 훈계하셨듯 하나님은 꿈이라는 초자연 계시를 통하여 인간을 범죄와 죽음의 길에서 보호하시고 선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3. 욥이 느낀 모순성

 

 

 

 

 

 

 

? 인간이 범하기 쉬운 큰 잘못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을 대적하신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의롭다는 사실뿐 아니라, 모든 섭리가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믿음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오는 고난의 조종자도 하나님이신 것으로 알고 그 하나님의 진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하나님을 괴팍한 횡포자로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욥은 어떻게 인식하게 되었는가?

 

 

 

 

 

 

 

1) 깨달음의 침묵

 

 

 

엘리후는 욥에게 연설 중간 중간에 대답할 기회를 주지만 욥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욥이 그 동안의 많은 변론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의자가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여태껏 자기가 너무 흥분 상태에 있었으며, 본심보다 과장되게 하나님을 비방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신뢰

 

 

 

자신의 의와 무죄만을 주장하던 욥은 엘리후의 긴 연설 속에서 하나님의 한없는 의와 사랑을 느낀다. 그 동안 자신이 하나님을 어리석게 비난했으며, 원망하였던 일이 얼마나 무지한 행동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오래 참으시며, 우리의 불평과 원망 가운데서도 인자하심으로 다가오신다. 이러한 사랑과 존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늘 감사함으로 그분을 따라야 할 것이다.

 

 

 

 

 

 

 

신앙인들은 언행에 있어서 진지하고 솔직해야 하며, 특히 목회자들은 성실하게 연구하고 기도하여 성령의 감화력으로 무지에서 깨어나야 한다. 지도자가 무지한 채로 그의 열정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인도한다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처럼 모두를 구덩이에 빠뜨리고 만다. 그것은 대단한 죄악이다. 소자 하나에게라도 실족케 한다(18:6 9:42)를 반드시 심문하시는 하나님 앞에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연구6] 욥의 회개와 축복(38-42)

 

 

 

욥의 끊임없는 호소와 원인 모를 고통에 답변하시기 위하여 전능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 확실히 욥은 특별한 사람이다. "모든 행동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는 하나님"(33:13)께서 욥을 사랑하시므로 친히 그와 변론하려고 오신 것이다. 욥은 너무나도 엄위하신 여호와 앞에 자신의 부족함과 불손함을 깨닫고 회개의 제사를 드림으로 축복의 삶으로 희귀한다.

 

 

 

 

 

 

 

1. 하나님의 현현

 

 

 

?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 처음엔 회의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점차 반항적인 태도로 하나님께 만나 주실 것과 자신의 처지를 변론할 기회를 달라고 계속 희망했다. 하나님은 엘리후를 먼저 보내어 잘못 인식하고 있는 욥을 가르치신 후, 그 가르침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해 사자를 통해 제기되었던 논제들을 더욱 선명하게 확증하셨다. 하나님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폭풍 가운데서 위엄하고 거룩한 음성으로 고난중에도 딴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는 인생에게 자신의 현존을 알리셨다. 그렇다면 이 현존하신 하나님은 욥의 어떤 모습을 꾸짖으셨는가?

 

 

 

 

 

 

 

1) 욥의 깨우침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였다"(38:2)고 하나님은 욥의 죄를 꾸짖으셨다. 욥은 하나님의 섭리의 법칙과 근본적인 원리를 어둡게 하였고 함부로 발설하였다. 욥과 같이 한 순간이나마 억측과 비방을 하는 일이 인생들에게는 비일 비재하지만 원칙적으로 보면 피조물은 조물주에게 대항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현은 욥이 가졌던 자만심과 오해로 인한 의구심의 근거를 말끔히 제거했으며. 자신의 거룩하신 특성과 지순한 가르침을 고양시키기에 충분했다. 욥은 순식간에 하나님의 위엄과 자비 앞에 자기의 어두운 구석을 발견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비운 것이다.

 

 

 

 

 

 

2) 욥의 구원

 

 

 

사단은 욥의 구원이 불가할 것이라고 확실히 단언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손길로 욥을 잡아주셨다. 욥은 가혹한 참화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친구들의 공격에 그의 순전함이 균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엘리후를 보내어 욥의 마음을 순화 시키사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하신 후 찾아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2. 창조의 신비

 

 

 

 

 

 

 

?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의 기초를 놓으실 때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다"(38:7)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영적 능력을 부여받고 하나님을 보좌하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첫 번째로 창조되어 첫 번재로 부름받은 존재이므로 새벽별로 호칭된다. 이같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신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1) 하나님의 창조

 

 

 

이 땅의 모든 것은 저절로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하찮은 미물까지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 분은 누구의 조력이나 조언도 전혀 받을 필요가 없는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일직 피조된 천사들도 창조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다만 아름다운 성가로 창조주를 찬미한 것이다. 즉 만물은 무로부터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1:1).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그분만이 다스리실 수 있다.

 

 

 

 

 

 

 

2) 창조의 온전성과 법칙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속에 거하는 모든 것과 사막과 짐승들, 어족들 그리고 구름, 바람, 비와눈, 우박 등 갖가지를 다 지으셨는데 하나도 불완전함이 없이 각기 완전하게 만드셨다.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였다해도 하나님의 창조의 본질은 도저히 모방할 수 없다. 만물보다 선재하신 하나님은 지혜의 능력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셨다. 하나님은 온전한 창조의 위대한 성취에 대한 영광을 홀로 받기 원하시고 우리는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

 

 

 

 

 

 

 

3. 은혜 위의 은혜

 

 

 

 

 

 

 

하나님은 하찮은 미물에게까지 창조주로서의 사랑과 괸심을 가지심을 욥이 깨달을 수 있도록 소상히 들려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러한 동물과 자연들보다 바로 어떤 역경에서도 그 분만을 의뢰하는 성도들은 지극한 관심과 사랑으로 대해 주심을 깨우치시려는 것이다.

 

 

 

 

 

 

 

1) 회개와 중보의 제사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5,6). 욥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광스런 교휸으로 지금까지 가졌던 하나님에 관한 피상적인 지식, 즉 귀로만 들을 정도의 것이 완전히 자신의 영 속에 살아서 인간되어지는 체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한다. 욥의 이 경험은 모든 성도의 산체험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엘리바스에게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했다"(42:7)고 그들을 꾸짖으시고 번제물을 가지고 욥에게 가서 욥의 중보를 받으라고 명하신다.

 

 

 

 

 

 

 

2) 갑절의 은혜

 

 

 

욥이 자기를 적대하던 친구들을 적대치 않고 따뜻한 우정으로 맞이하여 기도해 준 것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다. 욥은 더 온전히 성화된 신앙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욥의 명예와 위상을 세워 주시고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더 주셨다. 사단은 욥의 육신을 박살 내놓고도 언제 욥이 하나님을 배반할까하며 틈을 엿보고 획책했지만 욥은 사단에게 승리의 카드를 던진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삶의 수수께끼인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번영 그리고 현상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에 문제의 해답을 얻게 된다. 하나님만이 의인의 고난을 시험과 순화 과정으로서 명하실 수 있다. 또한 성도는 이웃을 위해 애쓸 때 가장 큰 축복을 받고 자신의 축복도 더불어 받는다. 재난 중에서도 순전함과 의로움을 지켜 나가는 사람은 마침내 모든 세계의 승리자가 된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시험하시는 목적은 인격의 성화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이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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