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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문서설에 대하여

하나님아들 2015. 2. 8. 06:38

 

 

 

문서설에 대하여

1753년 프랑스의 의사였던 평신도 진 아스트룩은(Jean Astruc) 창세기의 기록에서 하나님의 명칭이 때로는 "엘로힘"으로, 또 때로는 "여호와"로 되어 있는 점을 보고 E 문서, J 문서라고 명칭하는 두 가지의 문서가 조합이 되어 있지 않는가라는 하나의 "가설"을 제시하였다.
그는 창세기의 저자가 모세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지만, 모세가 이 두 가지의 문서를 조합하고 참고하여 창세기를 기록하지 않았는가 하는 가설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곧 잊혀진 주장이 되었다.

그리고 합리주의시대에 들어서서 프랑스와 영국에서 그후 저술가들이 아스트룩의 가설을 상기하면서 문서설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스트룩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켜, 모세오경의 저자가 모세가 아닌 모세 이후의 어떤 인물인 것으로 가정했고, E 문서가 이전 문서이고 J 문서는 보다 이후의 것이 아닐까하고 구체적이으로 추론했던 것이다.
그리고 1853년 독일의 훔펠트라는 사람이 상황을 또다시 역전시켜 버렸다.
그는 E 문서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고, 한 부분은 아주 늦은 시기의 것이 아닐까하고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후 1878년 벨 하우젠이 J. E. D. P 의 4가지 문서설을 주장하였으며, 그는 모세오경이 모두 모세가 기록하지 않았으며, 모세가 죽은지 1000년 후에야 다른 사람들이 편집하지 않았는가 하는 가설적인 견해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벨하우젠 이후 자유주의에 물든 일련의 신학자들은 너도 나도 문서설을 가설이 아닌 기정사실화했으며, 단지 인위적인 추측에 의하여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문서설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J. E. Je. D. P 의 5가지를 주장하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J-1. J-2. P-a. P-b....등으로 세분하기도 했다.
그후 어떤 학자들은 8가지의 문서설로 분류하는 견해를 갖고 있기도 했고, 어떤 카톨릭의 신학자는 32개의 문서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또 다른 문서설이 먼저의 문서설을 비평하고, 그 문서설은 다른 문서설에 의해 부정되어지며 그야말로 문서설이 다양하게 주장되었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어떠한 형태가 되든 문서설이라는 가설은 당연한 진리라고 받아 들이며, 아예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서설은 하나의 논리적인 가설이며, 그러한 문서는 단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최근에 진보적인 신학대학에서는 이러한 문서설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그러한 문서설을 부정하고 일축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며, 특히 보수적인 신학대학에서는 신학자, 교수들 중에서 이러한 문서설을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문서설은 실존하는 문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가설일 뿐이다.
즉 성경해석학적인 견지에서 보는 하나의 방법론적인 견해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서설은 매우 다양하며, 그것은 단지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한 성경해석학의 방법(학문적인 견지에서)으로만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문서설이 사실 실존하는 문서라고 단정하여 말할 수 없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신학교에서 가르친다고 하여 당연한 진리로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자유, 진보주의적 신학을 추종하는 일부 신학대학에서는 문서설을 엄연한 사실로 간주하는 경향도 없지않아 있다.
물론 문서설을 강하게 부정하며 그 이유를 정확하게 하나하나씩 들어가며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자면, 문서설을 비판하는 "반문서설"이라는 책도 있다.

많은 고등비평가들은 성경이 알려진 저자들에 의하여 씌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단지 성경은 여러 단편적인 문서들이 조합되고 편집되어진 책이라고만 비평한다.
고등비평이란 용어는 정통보수학자들에게는 다소 올바른 의미로 이해되어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개념은 일부자유주의나 진보주의 학자들에 의하여 악의에 차있고 불신하는 고등비평과는 다른 것이다.
원래 정통보수주의의 고등비평이란 용어는 "성경개론"을 의미하는 용어가 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고등비평이란 불신앙에서 비롯된 형태의 고등비난을 의미한다.

의사들은 병을 치료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병의 원인도 공부해야 한다.
성경을 비난하고 비평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있어 왔다.
고등비평이란 "불신"에서 비롯되어진다.
오늘날 많은 신학교와 성경연구기관이 있다.
주로 몇몇 신학교와 주로 최근에 설립된 역사가 짧은 신학교에서 이러한 위험한 사상을 진리로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신학교의 현주소이다.
이러한 사상은 설교자와 목회자를 오염시키고 있다.
그들은 병을 치료하는 방법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질병의 원인만을 관심을 갖고 있으므로 그들 자신이 스스로 병을 퍼뜨린다.
1900년도 중반부터 소위 유럽등지에 신학을 공부하러 갔던 젊은 신학생들이 이러한 사상에 오염되어 와서 퍼뜨리게 된 것이다.

잠시나마 유럽에서 이 자유주의가 바람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자유주의의 아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반갑고 고무적인 일이다.
특히 고고학의 발달로 인하여 근동초기 역사가 드러남으로 인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수세에 몰림으로 총체적인 위기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며,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다.

그 중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모세시대에는 글자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으며, 창세기를 분석하여 볼때에 언어적 형태가 여러 가지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문서설의 실존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모세가 살 당시에는, 교육을 받은 상위층의 사람들은 적어도 3-4개의 다른 계층의 언어를 사용하였다는 확실한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문서설을 문자 그대로 가설로 끝나게 된 것이다.
특히 스파이저. 올브라이트라는 고고학자들은 족장시대의 풍습이 신명기 시대의 성경과 매우 일치한다는 사실마저 밝혀가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아기를 낳지 못하였고 그의 종인 하갈에게 아기를 낳게하여 이스마엘이 태어난다. 그런데 기원전 1500년 이전의 고대도시 "누지"가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 발견되어진 서판에는 만약 부인이 아기를 낳지 못하면 남편이 상속자를 얻도록 자신의 남편에게 여종을 주어야 한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었으며, 만일 원래의 법적인 아내가 그 후에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이 다시 상속자가 되어진다는 혼인계약서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사실은 기원전 900-700년전의 이스라엘의 풍습과는 거리가 먼 사실이었으며, 이 기록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시대의 기록은 적어도 기원전 1500년 이전의 기록이 틀림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진 것이다.

예를 들면 시편이 다윗시대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들의 악의에 찬 주장은 단순한 추측과 추리일 뿐이며, 단 하나의 증거도 없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발굴은 이러한 증거를 증거하여 줄 수 있었다.
모세의 시대는 글자가 없던 시대였으므로 어떻게 창세기를 기록할 수 있었느냐는 학자들의 의문이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들을 수 있는 케케묵은 질문이다.
첫째로, 모세 시대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은 기록하는 일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널리 사용하고 있었다. 모세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기록하는 일이 성행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고고학자들은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 성에서 석재 서적 수천권을 소장하고 있는 고대 박물관을 발굴해냈다. 이 석재 서적들은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것들 중에서 많은 서적들은 속세에 관한 기록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은 학자들 뿐만 아니라 평범한 상인들조차 읽고 쓸 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1700년대에 로제타석(대영박물관에 보관)이 발견되었는데, 고대 헬라어를 포함한 세가지 언어로 기록되었으므로, 고대 이집트언어를 푸는 열쇠를 제공하여 주었다.
또 1800년대에는 다리오왕의 비문이 해독되었다. 이것도 세 개의 언어로 기록되어있었는데, 앗수르와 바벨론의 고대 언어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었다.
학자들은 이것을 아카드어(AKKADIAN LANGUAGE)라고 부르는데, 창세기10장10절에 "악갓"이라는 도시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도시가 바로 아카드이다.

반세기동안 고고학의 발굴은 기원전 800년 전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집트, 바벨론, 앗시리아의 고대 왕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에, 이러한 왕들의 이름은 성경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것이며, 그 왕들의 초상화와 상의 조각까지 발견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 36장, 43, 45장에 기록된 서기관 바룩은 중요치 않은 이름이 분명하며, 그 이름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고고학의 발굴에서 예루살렘에서는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의 것"이라는 글귀가 있는 인장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같은 장소에서 "왕의 아들 여라므엘의 것"(렘36:26, 32)이라 새겨진 인장이 하나 발견되었던 것이다.

또 사무엘상13:19-21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스스로 무기를 만들지 못하도록 철공을 없게 한 사건이 나와있다.
수세기동안 근동지방에서 금속세공이 존재하였으므로 그 이야기는 전설, 설화같은 이야기거리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고고학의 발굴은 블레셋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철기시대를 도입한 후에 철기제품 제조에 대해 군사기밀로 취급하였기에, 이스라엘 철공이 단 한명도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아스트룩의(Jean Astruc) 문서설과 같이, 하나님의 명칭이 때로는 "엘로힘"으로, 또 때로는 "여호와"로 되어 있는 점을 보고 E 문서, J 문서라고 명칭하는 두 가지의 문서에 대한 견해에 대한 비평은 너무나 낡은 비평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서설은 E 문서와 J 문서를 마치 실존하는 것처럼 당연한 것으로 구별한다.
그러나 이미 여호와와 엘로힘의 명칭에 대해서 창세기를 분류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으며, 지금 그것을 문제삼는 사람들은 아마 신학에 대해 무지한 자가 될 것이다.
엘로힘이란 용어는 일반적인 신성에 사용되는 단어이며, 전지전능과 힘의 개념을 내포한다. 그러나 여호와란 용어는 이스라엘과의 언약과 선택적이며 민족적인 고유 개념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 두가지 단어의 용례는 서로 다른 두가지의 문서가 아니라는 것이 전문적인 학자들에 의하여 충분히 설명되어지며 이해되어진다.

슬픈 이야기지만 문서설은 너무 널리 퍼졌으며 소위 현대신학의 기초가 되고 말았다.
본인은 문서설이 단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여러분에게 신학자들의 책을 몇권 소개하려고 한다.

1. 로날드 E. 클레멘츠의 "구약성서해석사" (나눔서)
문동학. 강성열 역인데, 문동학교수는 장신교수이며 강성열교수는 호남신학대 교수이다.

       "벨하우젠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심각한 한계는 그가
        이스라엘의 종교발달을 순수한 내적인 과정으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가 문서자료들을 자체적으로 논리
        정연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갖춘 것으로 간주하며 그들의 연대
        또한 최후의 발달시대의 산물로 결정하게 한 잘못된 전제 사항
        을 볼 수 있다."(253쪽)

2. 배제민의 "모세오경연구" (총신대 출판부)
배재민교수는 총신대 구약교수이다.

       "문서설이란 성경연구에 사용되는 학설로 이 학설의 골자는
        '분리분석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문서설을 가지고 성
        경을 연구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머리말에서 발췌)

3. Cassuto(예루살렘 히브리대학 교수)의 "반문서설". 배제민역.
이 책은 아예 문서설을 논리적으로 반대하고 부정하기 위한 책으로 아예 제목을 반문서설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문서설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명확히 논리적으로 비판하며 증거하고 있다.
다만 이 책은 초보자가 읽기에 전문적인 내용이 많다.

4. 홍반식교수(고신 대학원장역임)의 "구약성경과 신학" (교회교육연구원)
5.  레어드 해리스의 "성경이란 무엇인가?" 이승호교수역.

그 외에도 문서설을 비판하는 책은 그야말로 기독교서점에 가면 "널려" 있다.
오히려 문서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책이 희귀할 정도이다.
단지 아무런 비평이 없이 학문적인 견지에서 "문서설"을 설명하는 책도 있었으나, 잠깐 읽어 보거나 머릿말을 보면 모두 "가설"이나 "학문적 논리"로 설명하고 있었다.
더욱이 문서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책도 그것이 "가설"이라고 자진하여 언급하고 있었다.
사실 문서설이란 단 하나의 증거도 없이, 모두 인위적인 상상과 추측으로 시작하였다가 끝맺는 이론적인 가설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미 자유진보주의 신학에 물든 사람들은 문서설을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문서설을 반대하는 주장에 대해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자유주의와 고등비평에 대해 사단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책도 있다.
참고삼아 알려드리자면 프란시스 쉐이퍼란 학자는....
"자유주의자들은 영적으로 간음을 하는 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 레어드 헬리스는 "악의와 불신에서 비롯된 논리"라고 하며, 홍반식교수는 "파괴신학"이라고 하고 있으며 월간지 "교회와 신앙"(94.7)에서는 "이단의 온상이 되어지는 학문"이라고 하고 있다.
실제로 통일교와 같은 이단등에서는 이러한 논리를 역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이란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기 위한 체계적 학문"이기 때문에 다양한 학문적 배경과 경과도 함께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과 신학이 따로 따로 분리되어서도 안될 것이며, 이 둘 중에 어느 하나가 그 권위나 위상을 높이 세워 한쪽을 억압하고 누르는 일이 되어서도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나의 교단에서 배우는 학문만이 모든 학문을 제패하고 우선한다는 생각은 당연히 버려야 하며, 어느 한쪽에 치우친 논리가 모든 논리에 우선한다는 주장도 지극히 위험한 것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과 이성은 조화를 이루어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본인은 보수주의 신앙을 갖고 있으며 자유주의적 신학을 배격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에서도 받아들일 것은 있다. 신앙은 이유없이 무조건 보수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역시 본인은 다원주의나 혼합주의같은 신학도 매우 싫어 한다.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이 두 가지 논리는 받아들여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논리는 "성경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의 기록을 외면하는 신학은 기독교의 신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논리적인 기준이 인본주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성경이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혹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문학적인 작품이라는 자신들의 생각만으로 "편집" 혹은 "조합" 이라는 가설 아래에서 출발된 것이 "자유주의"와 "다원주의"이기 때문이다.
즉 불신에서 비롯된 학문은 신학이 아니라 문학비평이 되어진다.

구약을 "우화"나 이교도와 이방인들의 유치한 "전설"로 간주해 버리는 행위는 바로 "불신"에서 출발한다.
즉 성경을 "신앙의 근거"나 "신앙의 표준"으로 보지않고, 단지 인간적인 추측이나 가설로 인하여 가능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문학적인 작품"이나 "사실성을 가름하는 학문"으로 보는 행위가 되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그러한 신학이 최근의 신학이며 최첨단의 진리인 양 알고 있는 것이다.
몇몇 교수들이 유럽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배워왔고, 자신이 배우고 익힌 학문만을 진리로 받아들였기에, 무조건 보수적인 신학은 케케묵은 학문으로 간주해 온 것이다.  
즉 올바른 신앙은 말씀에 그 표준과 근거를 맞추는 반면에..... 자유주의는 인간의 논리에 그 표준과 기준을 두고 있다.

      마 13:35 이는 선지자로 말씀 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 내리라 함을 이
               루려 하심이니라."

창세부터 감추신 것이 바로 선지자로 말씀 하신 바이다.
예수님이 사역하셨을 때에 "선지자로 말씀 하신 바"는 바로 구약성경을 말한다.
지금도 유대인이 갖고 있는 구약은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성경과 같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그 구약성경을 보고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라고 하셨다. (물론 언어의 형태는 다르지만....)
또한 예수님은 수차례에 걸쳐 구약성경을 "모세와 선지자의 글"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모세의 율법"이라고도 했다.
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직접 구약을 인용하셨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이 인간에 의해서 편집되거나 조합되어지고 혹은 이방인의 유치하고 반윤리적인 우화나 전설을 후세의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엄연한 증거가 된다.
그 성경은 하나님이 모세와 선지자로 하여금 감동을 주셔서 기록하게 한 책이라는 것이 바로 성경말씀이다.

아스트룩 이후 이 주장은 점점 발전되고 확대해짐으로 또 다른 문서설을 불러 일으키게 되고 또 다른 학자들은 서로 비평하고 서로 다른 문서설을 비난하며 그 모순을 파헤치기 시작하여 수많은 문서설로 퍼져 나가게 된다.
결국 벨하우젠이 4문서설을 제시하고 그것이 가장 보편적인 논리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 가설은 고고학의 발전에 따른 보수적인 견해에 힙입어 여지없이 가설로 끝나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비평학의 발전(?)으로 벨하우젠의 문서설은 구비평으로 묻히며, 이제 문서설은 신비평이라는 엄청나게 많은 문서설로 자리를 바꿈으로 이제는 누구의 주장인지조차 다 알 수도 없는 다양한 논리속에 파묻히고 만다.
단 하나의 증거도 없이, 수많은 논리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문서설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성경을 처음부터 인위적인 편집이라고 아예 결론을 단정하고, 그것을 증명하려고 이 견해 혹은 저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며, 학문과 신앙을 구별조차 못하는 사람들이며, 맹목적인 악의와 불신에 찬 고의적인 비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쨋든 문서설이란 시작부터 착각과 인위적인 추측으로 시작된 한 학문적인 논리이며 가설일 뿐이다.
특히 벨하우젠은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로 분류되어 지며 그는 종교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가 말하는 종교진화란 기독교의 초창기는 이방인의 종교에서 유래되어 차츰 진화된 것이라는 것이며 지금도 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밭에 뿌려지는가 자갈밭에 뿌려지는가 혹은 가시떨기 위에 뿌려지는 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채 위에 올려놓고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하였던 것"이다. (눅 22:31)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2)

우리의 신앙은 학문과 구별되어져야만 한다.
물론 신앙과 학문이 엄밀히 분리될 수는 없지만, 학문이 곧 신앙은 아니라는 것이다.
학문이란 인간의 상대적인 논리를 추구하지만, 기독교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는 것이다.
성경비평학은 성경해석을 위한 학문적 접근방법일 뿐이며, 그것이 신앙을 뿌리째 흔들며 하나님을 향하는 길을 막는 것이 되어진다면 그것은 사단의 바라는 바가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의 고등비평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눅16:17)

 

 

 

 

출처 : 개혁하는 마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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