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기다림은 세 가지 차원에 있다.

하나님아들 2012. 8. 31. 18:28

기다리는 신앙으로 사는 성도

기다림은 세 가지 차원에 있다.

고린도 전서 1:4-9/하원식 목사


 우리가 사는 시대는 스피드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다. 동시에 인스턴트 시대다. 광속의 시대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급증에 사로잡혀 있다. 기다리는 것을 못 견딘다.  한겨례 신문에 보니까, 한국인들이 성급한 증거 10가지가 나온다.


(1)외국인은 자판기의 커피가 다 나온 후, 불이 꺼지면 컵을 꺼낸다. 그러나 한국인은 자판기 커피 눌러놓고, 컵 나오는 곳에 손 넣고 기다린다. 가끔 튀는 커피에 손을 데기도 한다.  (2)외국인은 사탕을 쪽쪽 빨아먹는다. 한국인은 사탕 깨물어 먹다가 이빨 부러진다. 특별히 “빨리 빨리 병”에 걸린 우리는 기다리는 데 익숙하지 않다. 사탕을 입에 넣자마자 치아 건강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으드득” 씹는다. 실제로 사탕을 주고 실험을 해 본 결과 한국 사람이 가장 먼저 사탕을 깨트려 먹었다. (3)외국인은 아이스크림은 혀로 핥으며 천천히 먹는다. 한국인은 아이스크림은 베어 먹어야지 핥아먹다간 벌떡증에 걸린다. (4)외국인은 한국인을 보고 ‘저런 냄비근성 다혈질 민족 이탈리아 같으니’라고 하고 한국인은 ‘저런 여유만만 느려터진 지중해쪽 이탈리아 놈들. 아 답답해.’라고 한다.

 

(5)외국인은 정류장에 서서 기다리다 버스에 천천히 승차한다. 한국인은 일단 기다리던 버스가 오면 도로로 내려간다. 그리고 문 열리기도 전에 문에 손을 대고 있다. (6)외국인은 인도에 서서 “택시” 하며 손을 든다. 한국인은 도로로 내려가 택시를 따라서 뛰어가며 문손잡이를 잡고 외친다. “철산동” (7)외국인은 야구는 9회말 2사부터라면서 ‘힘내라 우리 편’ 끝까지 응원한다. 한국인은 ‘다 끝났네, 나가자’고 함으로 9회말 2사쯤이면 관중이 반으로 줄어든다. (8)외국인은 영화의 마지막은 엔딩 크레딧과 함께 OST를 감상하며 여운에 젖는다. 한국인은 극장에서 영화도 미처 끝나기도 전에 우르르 일어난다. (9)외국인은 식당에서 여러 시간을 즐기며 식사하는 데 한국인은 앉기도 바쁘게 재촉하고 10분 내에 먹고 일어난다. (10)외국인은 ‘그 영화 어땠어? 연기는? 내용은?’라고 묻는다. 한국인은 ‘아, 그래서 끝이 어떻게 되는데;라고 묻는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최근에는 너무 급한 것이 악성이 되어 이규태 씨의 표현대로 ‘카악 병’에 걸리어 웬만한 것은 참지 못함으로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실험을 했는데 10명 가운데 3사람은 동전을 넣자마자 뚜껑을 열고 컵을 붙잡고 있더란다. 그리고 나머지는 어떤가? 다 나오면 불이 꺼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뚜껑을 열고 허리를 숙여 쳐다보고 있다. 자판기에 커피를 뽑는 것만 봐도 얼마나 기다리지 못하는 지 알 수 있다.

 

 밥을 할 때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빨리 밥 먹겠다고 솥뚜껑을 열면 밥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반드시 뜸을 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패스트푸드 문화, 인스턴트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쉽지 않다. 기다림은 내일의 희망이요 꿈이다. 기다림은 우리 인생을 성숙시키고, 풍요롭게 한다. 기다림은 오늘의 현실을 넘어 내일로 다가가게 하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자다. 서양 속담에는 ‘서두르면 망친다‘는 말이 있다. 서둘러서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음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경험하기도 한다. 그래서 느긋함이 범사를 아름답게 한다. 아브라함이 기다림이 부족해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음으로써 가문의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이다.

빅톨 플랭클 이라는 정신분석학자가 있다. 그는『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자신이 유대인 의사로서 나찌 치하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그리고 있습니다. 독일의 패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1944년 겨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망하기를 이번 크리스마스 만큼은 가족과 함께 지내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 해를 아무런 소식 없이 넘기자 많은 사람들이 그 해 겨울에 목숨을 잃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플랭클은 묻는다. 마음에 분명한 희망을 가진 사람, 분명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 사랑하는 애인이나 아내,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 돌아가서 자신이 꼭 이룩해야할 일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해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그는 목격하였다. 그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묻는다. “사람은 먹는 것으로 사는 것도 아니요 오직 희망으로 산다. 오직 기다림으로 산다” 고 말한다.

 

 사회 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은 인간을 “희망을 품고 사는 존재,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존재”라고 말한다. 내일에 대한 희망은 인간의 의지요 용기이며 모든 불행을 치료할 수 있는 명약이다. 희망은 우리 인생을 앞으로 달려가게 하는 에너지다. 신학의 거장인 몰트만은 "나는 소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삶 속에서 희망을 빼면 절망의 늪에 떨어진다. 그런 점에서 꿈과 희망 그리고 기다림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기다림의 여정이다. 우리는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기쁘고 행복한 날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기다린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내일을 향한 꿈과 희망이 있으면 기다릴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급증에 사로잡혀 있다. 기다리는 것을 못 견딘다. 특별히 “빨리 빨리 병”에 걸린 우리는 기다리는 데 익숙하지 않다.

 

 대림절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쁨으로 기다리는 절기를 뜻한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신 기쁨을 기념하며, 장차 재림하심으로 세상을 완성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누구를 기다린다는 말인가? 무엇을 위한 기다림이어야 하는가? 그 옛날 메시야 강림을 기다리던 하나님의 백성들처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인 것이다.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이 믿음의 기다림은 다른 기다림과는 다르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이 기다림은 일반 여느 기다림과는 다르다. 그 기다림 속에 주님의 축복이 담뿍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 기다림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다림은 정말 아름다운 기다림인 것이다.

 

그러면 이 기다림이 왜 아름다운 기다림일까요? 어떤 면에서 이 기다림이 복일까요?  대림절은 다음 3 가지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과거의 의미로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실 메시아의 대망이다.  둘째는 현재의 의미로 임마누엘의 주님과의 만남을 대망 하는 것이다. 셋째는 미래의 의미로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신앙과 삶이 바로 기다림의 은총이다. 그것이 대림절의 깊은 의미다. 어떻게 성탄과 재림의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가?

 

1. 교회는 기다림의 공동체다.

성도들의 기다림은 세 가지 차원에 있다.

 
첫째는 예수님의 초림을 기다리는 기다림이다. 이것은 구약 전처에 흐르는 중심 사상이었다. 아브라함 이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가 오실 것에 대한 기다림은 출애굽 시대와 왕국 시대를 거쳐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된 사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의 희망으로 모진 세파를 이기며 살았고, 또한 승리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기다림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성도들의 마음속에 임하는 나라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고 하셨다. 이 때에 성도들의 마음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로 적인 하나님의 나라다.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천국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재의 형편이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리고 큰 희망으로 오늘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마음 속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와 성도들의 생애가 끝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맞이하게 되는 천국을 기다림이다.


셋째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림이다. 성도들은 저 하늘에 이상한 구름만 떠도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가하여 흥분하며 기다린다. 승천하실 때 예수님께서 [내가 다시 올 것이다]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지금까지 주님의 재림을 학수고대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참된 모습이요,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다림의 공동체다.

 

 인생은 기다림이다.

하루 하루의 일상에는 작은 기다림 들이 있다. 버스를 타기 위해 길게 늘어 서 있는 행렬 속에 기다림이 있다.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따뜻한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의 손길에 기다림이 있다. 또한 꿈을 이루기 위한 인생 설계에는 큰 기다림이 있다. 봄철에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속에는 기다림이 있다. 밤 잠 설쳐가며 공부하는 학생들의 포부 속에도 기다림이 있다. 이렇듯 우리네 인생에는 크고 작은 기다림 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기다림들 중에는 피하고 싶은 끔찍한 기다림 들이 있다. 갚을 길 없이 빚쟁이가 정해 놓은 그 날을 맞아야 하는 기다림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심한 통증을 견디며 초조하게 수술 시간을 맞이하는 그 기다림은 그 자체가 두려움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형 집행 시간을 맞이하는 사형수의 그 기다림은 그 자체로 절망이다. 우리 인생에 이런 기다림은 없어야 하겠다.

 

 그러나 기다림들 중에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기다림들도 있다. 어린 시절 소풍날을 손꼽던 그 기다림은 설레임 그 자체다. 결혼 날을 잡아놓고 그 날을 준비하는 신랑 신부의 기다림은 행복 그 자체다. 전역할 날을 달력에 표시하며 학수고대하는 말년 병의 기다림은 희망 그 자체다. 이런 기다림 들은 정말 아름다운 기다림 들이다. 신앙도 기다림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믿음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기다렸다. 노아는 홍수 심판의 약속을 믿고 방주를 지으며 무려 120년을 기다렸다. 모세는 출애굽 약속을 믿고 광야 생활 40년을 기다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낼 수 있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무려 모진 박해 속에서 약 15년을 기다린 후에 왕이 될 수 있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들에게 포로로 붙잡혀가서 착취를 당하고 온갖 억압과 고통 가운데 처해 있을 때, 그들이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내리 비취는 한 줄기의 빛이었다. 메시야가 오셔서 고통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확신에 찬 소망이었다. 이와 같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신약시대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기다렸다. 주님의 제자들은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려 성령을 받았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 약속을 믿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그래서 저들은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 교회사 시대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또한 예외 없기 기다려왔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처럼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왔다.

 

2. 우리는 소망 가운데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려야 한다.7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초대 교회 신앙의 가장 중요하고도 분명한 모습이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8)라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살았다. 참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성도로서의 모든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서도,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항상 바라보면서, 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가? 이 땅에서 주어진 교회와 사회와 가정의 일을 성실하게 함이 있어야 한다.  (7-8절) 7절의 '기다림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뜻은 '간절한 소망'이다. 손님을 기다리거나,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데는 맞이할 준비를 성심껏 한다. 성도가 주님을 기다린다면 준비가 있어야 한다.

 

첫째는 회개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대림절에는 오시는 분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참회와 간구 그리고 이웃에 대한 아픔에 동참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세상이 어지럽고 흉용할 때일수록 우리들의 신앙은 더욱 뜨거워 주님의 나라를 더욱 사모하는 믿음이 있어야 할 줄로 믿는다. 사람들의 나쁜 행실이 포화상태에 이른 이 현실에서 대림절은 사람의 뜻을 접고 위로부터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맞아들이기 위해 간절한 심령으로 기다리는 절기다. 이 계절에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매주일 예배 때마다 촛불 하나씩을 더해 가며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의 강생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이는 우리 마음의 소원과 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뜻에서이다. 주님은 이미 아기 예수로 세상에 오셔서 참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재림 주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신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약속과 성취를 동시에 경험한다. 約束은 장차 오실 분과 관련이 있고, 成就는 이미 오신 분과 관련이 있다. 이 둘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있다. 장차 오실 분의 성격을 드러냄으로 이미 오신 분을 영접하면 장차 오실 분을 영접하는 것이오, 장차 오실 분을 기다림은 이미 오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지금 오실 분은 이런 사람들을 가차없이 심판하신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悔改하고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신다. 어설프게 시늉만 내는 회개가 아니라 진심으로 회개하라고 하신다. 회개하면 지난날의 죄를 물어도 보지 않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던져 버리겠다고 하신다. 이제 우리 모두 지은 죄를 회개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자.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사와 은혜의 풍성한 결론적인 아름다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재림 신앙인 것이다. 그렇다. 기다림의 계절에 우리들이 소망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고린도 교회와 오늘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 가진 재림 신앙을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견고케 하시고,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킬 것을 권하는 말씀이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탈선하여 자기들 좋을 대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체만 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오신다면 어찌하겠는가?

 

이것은 정직하고 공의로우며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돕는 경건한 생활이다. 본문5-7에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라고 말씀한다. 이와 같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준비하는 생활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건한 생활이다. 성도는 마땅히 경건한 생활에 힘써야 한다. 경건한 생활은 나의 욕심이나 계획이나 뜻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창조적인 능력과 그의 통치와 섭리와 축복하심을 믿는 것이다.

 

경건생활 1) 나의 욕심이나 계획이나 뜻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창조적인 능력과 그의 통치와 섭리와 축복하심을 믿는 것이다. 경건생활 2) 자기의 본능과 욕심과 향락과 이기적인 생각과 나태함을 절제하고 억제하는 것이다.
경건생활 3) 이웃에 대한 배려입. 이웃에 대해 이해하고 양복하고, 협력하고,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인내하며 온유, 겸손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 나를 드러내고, 내가 칭찬 들고, 나의 기쁨과 보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드러나고, 예수님께 영광이 돌려 지게 하는 생활이 기다리는 자의 준비생활이다.

 

셋째 우리는 믿음 안에서 주를 기다려야 한다. 
오늘 본문 6절과 8절 말씀에 보면, "견고케 되다" "견고케 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성도들은 견고하게 살아야 한다. 견고하게 산다는 것은, 믿음에 굳게 서서 세상의 풍랑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견고하다'는 말(헬라어 베바이오오)속에는 '확증하다', '굳게 서다', '안전하고 확실하다' 이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믿음에 굳게 서서 확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견고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다. 믿음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재림의 순간에 우리를 예수님 앞에 우뚝 서게 해 주는 것은,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믿음뿐이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는 믿음 안에서 생활하면서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깨어있는 성도의 눈은 열려 있다. 열려 있는 눈으로 주님의 때를 볼 수 있다. 주님 오시는 그 때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준비를 할 수 있다. 그것이 깨어있는 성도의 기다림이다. 그러기에 잠잘 때가 아니다. 자다가 깨어 기도할 때다. 그러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믿음 안에서 주를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이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다. 믿음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재림의 순간에 우리를 예수님 앞에 우뚝 서게 해 주는 것은,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믿음뿐이다.

 

 넷째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반드시 오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인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어떤 여자가 극장에서 밤 프로를 보고 나올 때 실수로 수천만 원 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떨어뜨리고 돌아 왔다. 이튿날 아침 집에 돌아 와서야 그 사실을 알고 황급히 극장 지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밤 프로를 본 사람인 데요 다이아몬드 목걸이 분실신고 들어 온 것이 있나요?>

 

 지배인은 없다고 말하면서 잠깐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리면 앉았던 자리에 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어제 밤에 영화를 보았다는 자리로 달려가 보았다. 컴컴한 극장 그 의자 밑에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그대로 있었다. 마지막 상영이라 청소로 아침에 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었다. 지배인은 기뻐하면서 급히 전화통 앞으로 달려와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응답이 없었다. 잠시를 기다리지 못 하고 전화기를 끊어 버린 것이다. 전화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으나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 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조금을 기다리지 못 하여 찾지 못 하고 말았다.

 

 바로 예배를 드리는 목적도 이러한 기다림의 은혜를 달라고 하는 우리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공급받기 위하여 내 이성을 죽이는 일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기 위하여 주님께 부복하고 철저하게 꿇어 엎드려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축복은 우리가 기다리며 열심히 매달리게 될 때에 임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7절의 '기다림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뜻은 '간절한 소망'이다. 간절한 기다림으로 나는 오늘 예수님을 기다리는가? 종종 생각한다.

 

다섯째 성도들은 그 날에 책망 받을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어떤 날인가? 그 날은 '주의 날'(고전5:5, 살전1:10)이요, '그리스도의 날'(빌1:10), 역사의 종말이 임할 바로 '그 날'(살후1:10)입니다. 이날을 가리켜 구약 성경은 '여호와의 날'(욜2:31)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곧 이 세상이 끝나는 종말의 날이요, 심판의 날이요, 모든 성도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요,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날이다. 그런데 성도들은 바로 이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등장한다. 이것은 인간이 완벽하고 흠이 없어 나무랄 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점 없이 흠 없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죄로 인한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섯째 사랑함으로 주를 기다려야 한다. (9절)
9절의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에서 '교제'는 연합과 교통을 포함한 말로 함께 참여함을 의미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단어다. 곧 거룩하게 부름 받은 성도의 사랑의 공동체 생활의 총칭이다. 그 사랑을 나누는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을 통해서 더욱 커진다. 사랑의 나무 뿌리보다 더 견고한 것은 없다.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다. 그 사랑을 나누면서 기다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감사함으로, 믿음 안에서, 소망가운데, 사랑함으로 기다리는 성도의 생활이 바로 은혜와 평강의 생활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체험하며 살고 있는가? 내게 은혜를 주고 계심을 체험하며 살고 있는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내 인생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믿으며 살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지 않으면 내 인생이 그대로 무너지는 인생임을 고백하고 있는가? 우리 주님의 나타나심을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정하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셔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꾼들이 되게 하여 주신다.

 

3. 주의 재림을 대비해야 한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성도들의 신앙의 목표요,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신앙 자세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이라면 세상일에만 몰두하여 자아를 망각하지 말고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여야 한다. 재림 신앙은 초대 교회의 문서에서 많이 찾아 볼 수가 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폭풍이나 번개가 몰아치면 "주여 이제 오십니까"라고 생각했다. 밤중에 아름다운 별을 대할 때마다 "주님 언제 오시나요?"라고 말했다. 만날 때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인사를 주고받았다. "마라나타(주께서 곧 오십니다)." 이러한 마지막에 대한 긴박감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고 능력 있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게 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으라고 할 뿐만 아니라 언제 오실런지 모르니 항상 깨어서 예비하고 있으라고 당부하셨다. ‘기다리고 있다’는 말과 '예비하고 있다'는 말은 큰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이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1)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이 날은 도적같이 온다고 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해보면 기회란 기다릴 때는 안 오고 준비 없이 있을 때 갑자기 찾아온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는 사람만이 부끄럼 없이 이 날을 맞이할 수 있다. 기다린다는 것은 힘들다.
2.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한국인들이 잘 참지 못하고 서두른다.
3. 우리의 사명을 다함으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2) 은사를 활용하며 기다려야 한다.
오늘 본문 7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는 부족함이 없는 은사다. 이미 받은 은사는 충분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뒷전에 제쳐  놓고, '늘 부족하다'고 아쉬움만 토한다. 먼저 성도는, 이미 내게 주어진 은사를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3) 깨어서 기다려야 한다.

잠든 영혼은 주님 만날 수 없다. 깨어 있어야 한다. 어떤 영혼이 잠든 영혼인가? 믿음을 상실하고 약속을 믿지 못하는 영혼이, 잠든 영혼이다. 어떤 영혼이 깨어 있는 영혼인가?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오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영혼이 깨어 있는 영혼이다. 깨어 있는 영혼은, 오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다. 그 일이 크든 작든, 또는 쉽든 어렵든 관계치 않고 최선을 다하고 작은 일을 충성하는 자가 깨어 있는 영혼이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깨어서 근신하고 경건하게 살면서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이때에 재림의 때를 노아 시대와 비교한 주님의 말씀을 상고해 보면 이 세대를 바로 분별할 수 있고 우리의 재림 준비도 바로 할 수 있다. 노아의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세상에 취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다가 홍수에 다 멸망하고 말았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그러한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이 기다림의 계절인 대림절에는 말이다.

 

기다림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기대와 소망이다. 기대는 막연한 기다림이다. 반면에 소망은 약속된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의 많은 기다림은 기대 혹은 단순히 희망사항이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 중에 하나인 소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다.  이것은 약속된 기다림이다.
1)기다림 이란 초조한 것이다. 그것이 희망 찬 것일 때 더욱 그렇다.
2)기다림 이란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대상일 때 더욱 그렇다.
3)기다림 이란 거룩한 것이다. 하나님께 희망이 있는 사람은 기다릴 수 있다. 주님의 오심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기다릴 수 있다. 언제 오실 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주님도 그 날과 그 시는 모른다고 하셨다. 오직 아버지께서만 아실 뿐이다. 그러나 곧 오시리라고 하신다. 이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기다린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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