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내용!! 강해!!

[스크랩] 신약성서개론

하나님아들 2014. 4. 7. 20:30

 

 -신약개론 강의안-

 

신약성서개론  

 

Ⅰ. 들어가는 말

 

 본서는 웨스트몬트 대학의 신약학 교수이자 종교학부 과장을 역임하고 있는 로버트 건드리 박사의 저술로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신약의 배경을 다루고 있는데 특별히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중간사와 유대주의를 일목요연하고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그리고 2부에서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한 핵심적인 사건들을 복음서의 기록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3부에서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만민의 구원을 위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제시한다. 끝으로 4부에서는 각종 서신서들을 다루면서 우리가 간과하고 넘어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이룩된 구속사의 신학적인 의미들을 통찰력있는 안목으로 밝혀주고 있다. 게다가 더욱 주목할 사실은 바울서신, 히브리서, 공동서신, 요한계시록 등을 기존의 개론서들이 그랬듯이 각각 독립적으로 다루는 것을 지양하고, 오히려 복음서에서 사도행전으로 이어지는 포괄적인 구속사의 안목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메시아의 재림을 고대하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최고의 절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통찰력은 나로 하여금 신약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고 구속사적 입장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Ⅱ. 신약의 배경

 

1. 중간사 및 신약시대의 정치사

1) 헬라시대

 구약사의 종결과 신약사의 시작 사이에는 400년 동안의 침묵기가 있었다. 이렇게 성경 기록이 중단되고 선지자의 목소리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 중동 지방의 주인으로 부상하였다. 그의 제국은 헬레니즘이라 하는 문화 양식을 확산시키게 되었고, 헬라어는 상용어가 되었다. 당시 건물은 헬라 양식으로 축조되었고 그와 군인들이 동양 여인들과 결혼함으로써 헬라 문화와 동양 문화가 혼합되기에 이르렀다.

 알렉산더의 사망으로 그 제국은 네 지역으로 나누어 졌고 그 중 톨레미 제국과 셀루키드 제국은 신약의 역사적 배경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톨레미 제국은 이집트를 중심으로 삼고 있었으며 셀루키드 제국은 시리아를 중심으로 삼고 있었다. 팔레스틴은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차지하고자 하는 경쟁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되기도 하였지만 셀루키드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같은 많은 박해도 있었다.

2) 마카비 시대

 안티오쿠스의 박해에 대한 유대의 저항이 시작되어 주전 167년 마타디아스 가문의 지휘하에 마카비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마카비 가문은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였고, 성전을 새롭게 봉헌하였으며, 팔레스틴을 정복하고, 셀루키드로부터 독립을 승인받게 되었다.

 이후 하스모니안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과 음모에 따라 경건한 마음을 가진 하시딤(Hasidim)들을 이간시켰고 결국 하시딤들은 바리새파와 에센파로 각각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 에센파의 일부가 쿰란(Qumran)에서 사해사본을 제작하였다. 그런가 하면 귀족적이며 정치적인 야심이 있던 하스모니안 가문의 제사장 직분을 가진 이들이 사두개파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 장군 폼페이(Pompey)가 팔레스틴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고 신약시대에는 로마 정권이 팔레스틴을 지배하였다.

3) 로마시대

 주전 8세기에 창건되었고 주전 5세기에 공화정이라는 정부형태가 조직된 로마의 지속적인 전쟁의 승리는 로마의 지배권을 확장시켰다. 로마의 무력 진압으로 팔레스틴의 평화는 깨졌지만 로마제국의 전체적인 통일과 정치적 안정은 기독교의 출현 이후 그 전파를 촉진시켜 주는 촉매 역할을 했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강화를 위해 지방 정부제도를 수립하여 두 가지 유형의 지방, 즉 원로원(senatorial) 지방과 황제(imperial) 지방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팔레스틴에는 본국 출신의 분봉왕들을 두었는데 주전 37년부터 4년까지 로마인들의 휘하에서 팔레스틴을 통치하던 분봉왕은 헤롯 대왕이었다.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예루살렘 성전을 미화하는 작업을 하였지만 유대인을 멸시하였다. 헤롯은 능력과 야망이 컸지만 헤롯의 아들들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팔레스틴을 조각조각으로 나우어 가졌다. 헤롯왕조에 의해 세례 요한과 야고보가 죽게 되었고 예수님도 심판을 받으셨다.

 로마의 총독들에 살펴보면,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매에 대한 아르켈라우스의 실정은 아우구스투스로 하여금 그를 공직에서의 사퇴는 물론이고 추방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했다(주후 6년).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로마 총독들이 아르켈라우스가 지배했던 옛 영토들을 그대로 관할하였다. 그러한 총독들 가운데 하나인 본디오 빌라도가 다름아닌 예수님의 재판관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헤롯을 비롯한 로마 총독들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일상사에 영향을 끼치는 지역 문제들에 대해서는 유대의 제사장과 산헤드린이 대개 조정하였다.

4) 제 1차 유대 전쟁부터 제 2차까지

 성전 예배와 제사 제도는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끝이 났다. 이를 대신하기 위한 조처로서 유대 랍비들은 지중해 해안 도시 얌니아에 학교를 설립하여 토라와 구약 율법 등을 보다 밀도 있게 상고하였다. 팔레스틴의 어지러운 상황은 유대성전의 터에 로마신 주피터의 신전을 세움으로써 계속되었고 할례 의식을 금지시켜 유대인들이 다시금 폭동을 일으켰다. 로마인들은 주후 135년에 그 폭동을 진압한 후 예루살렘을 로마 도시로 재건하여 유대인들이 그 성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유대 국가는 1948년부터 부활되기까지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2. 신약의 세속적인 배경

1) 유대인의 인구와 언어

 로마 세계 전체 인구의 약 7%였던 4,000,000명의 유대인 중에 약 700,000명만 팔레스틴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에 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반면에 팔레스틴의 여러 지역에서는 이방인의 숫자가 유대인 숫자를 능가하고 있었다.

 그들의 언어를 보면 로마 제국의 공식어는 라틴어였지만 상용어는 헬라어였다. 헬라어 외에도 팔레스틴 사람들은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였다.

2) 운송, 상업 및 통신

 운송, 상업 그리고 통신면에서 팔레스틴은 상당히 낙후된 상태에 있었다. 몇 개의 주요 간선 도로만 있었고 사람들이 여행할 때는 도보로 혹은 당나귀, 나귀, 마차, 들 것을 이용하였다. 상업을 위한 운송 수단 중 제일 첫 번째가 바로 수로였다. 알렉산드리아가 주요 항구로서 큰 배 한 척은 화물 외에도 수백 명의 승객을 수송하였다. 바울이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해외로 여행하다가 난파당했었다. 그리고 강과 운하에는 유람선들이 왕복 운행하였다.

 이러한 도로와 강 그리고 지중해는 교통 수단을 제공하였다. 파피루스, 오스트라카, 밀랍토판 등이 편지와 기타 서류들을 위한 필기 용품들이었다. 중요한 사본들을 위해서는 가죽 내지는 양피지가 사용되었으며 대부분의 소식들은 구두로, 혹은 타운 크라이어(town criers)나 게시판의 공고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3) 공공 시설들

 알렉산드리아는 학교 시설이 잘 발달되어 있었으며 시립 도서관에는 오십 만권 이상의 장서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안디옥 성은 800m에 달하는 거리에 가로수와 대리석으로 된 바닥과 완벽한 야간 조명 시설을 갖추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로마 제국의 주요 성들은 지하에 하수 처리 시설을 설치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대중 목욕탕들이 있었으며 샤워장 시설은 신약 시대보다도 훨씬 이전에 헬라인들에 의해서 고안되었다.

4) 의식주

(1) 주택

 로마의 서부도시에 있는 주택들은 벽돌 내지는 콘크리트로 지어졌지만 빈민촌과 시골 지방의 주택들은 목조 가옥이거나 오두막이었다. 한편 동부지역의 주택은 치장 회반죽과 햇볕에 말린 벽돌로 건축되어졌다. 좀 부유한 주택은 이중 출입문과 “아트리움”이라 하는 커다란 안뜰이 있었다. 지붕들은 기와나 짚으로 만들어졌고 부엌에는 평로 내지는 토기나 돌로 만든 화덕이 있어서 요리하는데 사용되었다. 빛으로는 등잔불이 있었으며 배관 및 난방 시설 등은 잘 발달되어 있었다. 로마의 화장실은 수도시설이 잘 되어 있으며 보다 큰 도시에 사는 하류층 및 중류층은 종종 평지를 빌려서 아파트를 짓고 살았다.

 팔레스틴의 성읍과 주택은 그레코 로만(Graeco-Roman)의 도시나 주택들과는 달리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성읍에 들어가려면 벽에 붙은 문을 통해서 가야 했고, 그 문 안쪽에는 탁 트인 광장이 있는데 이곳은 무역, 사교 그리고 법적인 왕래가 오가는 공공 장소였다. 주택은 나지막했으며 그 지붕은 평평하였고, 경우에 따라서 손님을 위해 꼭대기에 침실을 갖추기도 했다. 건축 자재는 진흙과 짚으로 엮어 만든 후 태양에 구운 벽돌들이었다.

 팔레스틴의 전형적인 하류층 사람들은 수많은 세대가 들어갈 수 있는 아파트 건물에서 한 칸을 얻어썼는데 모든 건물의 높이가 높지 않았다. 가구와 부엌 세간 등은 높은 쪽에 위치하였고, 가축과 기타 가금들은 낮은 쪽에 두었다. 만약 짐승들을 집 밖에서 기를 경우에는, 낮은 쪽에서 아이들이 놀았다. 평평한 지붕은 나뭇가지들을 서까래로 깔고 진흙 반죽으로 발라서 만들었다. 거기에 비가 오면 지붕이 새기 때문에 구멍을 메꾸기 위해 진흙을 반죽해야 했다. 지붕의 가장 자리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추락을 방지하였고, 지붕은 옥외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갔다. 옥상은 날씨가 더울 때 잠을 자거나 채소를 말리거나 또는 과일을 익힐 때 사용하였고, 경건한 가정는 기도처소로 이용하였다. 마루는 단단한 흙이나 돌로 만들었다. 침대는 마루 위에 매트나 이불을 깐 것에 불과했고 부유한 가정일 경우에는 침대틀이 있었다. 사람들은 낮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잤다.

(2) 음식

 로마 사람들은 매일 네 끼를 먹었다. 보통 사람은 빵, 죽, 렌즈콩 수프, 염소젖, 치즈, 야채, 과일, 올리브, 베이컨, 소시지, 생선 그리고 묽은 포도주 등을 먹는다.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정오와 저녁 두 끼만을 식사를 하였다. 그들은 대개 과일이나 채소, 그리고 생선을 먹었고, 고기는 구거나 삶아서 축제일에 먹었다. 설탕이 없어서 건포도, 무화과, 꽃, 그리고 대추야자 열매 등이 단맛을 내는 데 쓰여졌다. 공식적인 식사 때에는 방석에 기대어서 식사하였고, 비공식인 식사는 앉아서 하였다.

(3) 복장과 스타일

 남성들은 어깨에서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는 겉옷에 허리에는 신약 성경에서 “띠”라고 일컫는 일종의 벨트 내지는 현장을 둘렀으며, 머리는 모자나 스카프를 그리고 발에는 엉성하게 줄을 엮어 만든 신발이나 샌들을 착용했다. 추울 때는 망토나 두꺼운 외투를 입었다. 이러한 의복들은 대개 흰색이었다. 여성들은 짧은 겉옷을 입지만 때때로 길고, 화려한 색깔의 외투를 걸쳤다. 유행을 좇는 여성들은 값비싼 화장품들을 사용하였고 보석류로서는 귀거리와 코에 거는 장식품들을 달았다. 팔레스틴 여인들은 머리를 가리는 천을 쓰고 다녔으나 그 머리 모양만큼은 항상 변하였다. 반면에 남성들은 머리를 짧게 하고, 턱수염을 길렀으며 곧은 면도칼로 면도하였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 모두 머리를 염색하였는데 종종 머리 전체를 회색으로 물들였고 남녀 모두 가발을 썼다. 한마디로 팔레스틴의 스타일은 남녀 모두 하나같이 보수적이었다.

5) 사회 계층

 이교 사회에서는 지주와 정부 관리들 그리고 일부 사람들만 호화스럽게 살았다. 대부분의 노동은 노예들이 담당했기 때문에 중산층이 거의 없고 하층민이 많았다. 유대사회는 유대주의가 표방하는 평준화의 영향으로 거의 계층화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상류층은 대제사장들과 랍비들이며, 대부분은 농부, 기술자, 상인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유대인들 가운데서 세금 징수자들은 로마의 주권자들과 결탁해 가난한 자의 조세 부담을 가중시켰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문화권 속에도 노예가 존재했었고 바울의 서신에서도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조차 노예들을 부리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원래는 범죄 사실이 밝혀진 노예들만이 십자가형을 당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극악 무도한 범죄를 저지를 자유민까지도 십자가에 달았다.

6) 가족

 사회 구성의 가장 기본단위는 가족이었다. 그러나 노예들의 수적인 우세와 부모 대신 노예들에 의한 자녀 교육 등으로 가족이 붕괴되는 경향이 있었다. 낮은 출산률로 인하여 정부는 대가족을 권장하고자 특별한 혜택들을 제공하였다.

 팔레스틴에서는 대가족이 보통이었다. 남자 아이는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름을 갖지만 여자 아이는 한 달이 지나야 이름을 갖는다. 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서로 구별하기 위해 부친의 이름을 언급하거나 종파나 정파, 직업 등을 붙이기도 했다. 초상이 났을 경우 가족은 공식적인 애도 행사를 거행했다.

7) 윤리와 오락

 신약의 서신서들 안에 있는 권면들을 보면 대개 성적인 범죄들이 금지해야 할 항목들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모든 부도덕한 것들은 이방신들의 탓으로 돌려졌다. 신전에 처녀를 바치는 것은 이방 종교의 합법적인 의식이었으며, 신전에 남녀 매춘 행위도 널리 인정되었다. 노예 소녀들은 성적 유희의 희생물이 되었고 돈을 벌고자 자신의 아내와 자녀를 매춘을 시키는 남자도 있었다. 또한 동성애가 만연했으며 이혼 절차는 간단해서 비일비재하게 행해졌다. 살인이 횡행했으며 부모들은 자신들의 아기들을 버리기 일쑤였다. 어떤 이는 매춘을 시키고자 버려진 여자 아기를 주워다 기르곤 했다. 이처럼 도덕이 땅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상한 사람들이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가장 특별한 오락은 검투사들의 쇼였으며 전차 경주는 오늘날의 자동차 경주를 방불했다. 오락을 통해 그 당시 윤리의식을 반영했지만, 올림픽 경기는 각광을 받은 스포츠였다. 그리고 가치 있는 음악과 문학이 존재했었다.

8) 상업과 노동

 각각의 수호신들을 동반하고 있는 무역 길드들은 정치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고, 어려운 회원들을 돕기도 했다. 회원들의 미망인과 자녀들에게 혜택을 베풀고 노동하는 날짜와 사긴을 그들이 규정하였다. 사업은 생산품의 운송이 비싸서 소규모의 가게로 제한되었고 농업은 몇몇 분야에서 놀랄 만큼 발전해 있었다. 개인 상사들은 오늘날의 차용, 어음 할인, 대부 등에 해당하는 일을 맡아서 했으며 이자율은 4-12%까지 다양했다.

9) 요약

 1세기 그리스 로마 문화의 단면도를 보면, 비록 신약 시대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의 시대 이전에 살았지만 그들도 지적인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사회와 문화는 다방면에서 놀랍게도 우리 자신들이 속한 사회나 문화와 흡사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유사성은 기독교가 시작된 팔레스틴에서는 덜 했지만 팔레스틴 밖에서는 대단했으며 그런 곳에 기독교가 급속히 번져 갔다.

3. 신약의 종교적 배경

1) 이방 종교

 로마의 국교는 그리스의 신들 및 그 신화와 대부분 연결되어 있었다. 로마의 신들은 그리스의 신들과 동일시되었다. 더 나아가서 로마인들은 사제단과 같은 새로운 요소들을 첨가시켰는데, 이러한 사제단에서 황제자신이 대사제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 모든 신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은 그리스 로마 신들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파멸시킨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신약 시대까지 그 신앙을 지켜 왔다. 또한 통치자들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오랜 관습에 따라 로마 상원은 황제를 사후에 신격화시켜서 숭배하였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애국적인 의무일뿐 아니라 단합된 충성심에 대한 맹세로 생각되어졌고 여기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은 가일층 박해를 자초한 셈이었다. 또한 로마 제국 내에서는 미신적인 관습들이 일상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다양한 종교의 신앙들과 미신적인 관습들을 단지 혼합해 놓은 혼합주의도 성행했다.

 1세기에 영지주의가 형성되었는데, 그들이 말하는 종교적인 문제는 반드시 사죄를 받아야만 하는 범죄가 아니라 오히려 무지에 불과하며 따라서 회복된 지식으로 대체되기만 하면 되었다. 또한 물질을 악과 동일시하고 영을 선과 동일시함으로써 금용주의와 방탕 내지는 관능주의의 행동 양식을 낳게 되었다. 후기 영지주의자들은 최고의 신적인 영역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을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분리시켰고, 그러한 악한 세계는 보다 열등한 신적 존재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복잡한 천사론은 귀신론과 나란히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지식인 계급은 보다 순수한 철학 사조들로 돌아서고 있었다. 생의 최고의 선을 쾌락이라고 한 에피쿠로스 학파, 비인격적인 이성에 결정되 인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것을 가르치는 스토아 철학 등이 발전했지만 사람들에게 만족할 만한 해답을 제공하는데 실패하였다. 사람들은 천사와 악마로 여겨졌던 별들의 운명 아래 무력감 속으로 빠져 들었고 어둠과 절망이 점점 짙어만 갔다.

2) 유대주의

 기독교의 모체가 된 유대주의는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파괴된 성전 대신 유대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회당이라 불리우는 예배의 중심지를 각 지방에 설립했다. 회당은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종교적인 예배의 중심지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 주중에는 재판, 정치적인 모임들, 장례식, 유대인 소년들의 교육, 구약 연구 등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율법 교사인 랍비가 제사장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정식 성전은 약 26에이커 정도의 면적에 세워진 회랑과 뜻의 중간에 지어져 있었으며 이방인들은 바깥뜰까지만 들어올 수 있었다. 본 성전 바로 바깥쪽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고 성소 안쪽에는 일곱 금촛대와 진설병, 분향단이 서 있다. 그리고 두꺼운 휘장이 성소와 가장 안쪽방 즉 지성소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고 지성소 안에 있었던 언약궤는 혼란의 와중에 사라져 버렸다. 개인적인 제사들 외에도 온 국가를 위해 매일 같이 드리는 번제가 오전과 오후에 각각 드려졌고 그와 동시에 향을 피웠으며 이어서 기도와 제사장의 축복 기도, 포도주의 헌주, 나팔을 붐, 성가대의 합창 및 영창 등의 순서가 진행되었다. 안식일, 절기, 기타 성일들의 의식에는 이 밖에도 몇 가지 의식들이 추가되어졌다.

 유대주의 문학으로는 구약성경이 1세기 유대인들을 위해 세 가지 형태의 언어 -히브리어, 70인경 및 탈굼-로 존재하였다. 또한 역사, 허구 그리고 지혜의 묵시문학과 침체된 유대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지어진 위경이 있었다. 이외에도 사해 근처에 있는 동굴 속에서 발굴한 사해사본들이 있고 구약의 율법으로부터 제기되는 해석상의 문제들에 관한 랍비들의 사례별 결정 사항들이 집대성 되어 탈무드로 기록되었다. 문제는 랍비들은 구약 성경 자체보다 탈무드를 더 중요한 위치로 끌어 올려 놓았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신앙은 신화나 신비주의 혹은 철학적인 사색 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거룩한 문서들의 문집속에 기록된 바 역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운명을 강조하고 있어서 개인적인 부활 교리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민족주의와 선민의식이 살아있다. 또한 유대주의는 바리새파와 사두개인파와 에센파로 나뉘어졌다. 사두개파는 마카비 혁명 직후 유대문화의 헬라화를 거부했던 하시딤으로부터 나왔고 사두개파는 중간사 시대의 하스모니안 가문의 상속자들로 하나님의 예정이나 천사, 영들, 영혼, 불멸과 육체 부활 등을 믿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에센파는 하스모니안 가문의 정치적인 야심에 불만을 품게 되어 나왔고 그들 중 일부는 쿰란 공동체와 같은 수도원적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이외에 헤롯 왕조와 또한 암암리에 헤롯에게 책임을 맡긴 로마인들을 지지했던 영향력 있는 소수의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헤롯당과 로마 정권 타도에 헌신한 열심당도 있었으며 종교적인 분파도, 정치적인 분당도 아닌, 전문적인 단체로 서기관이 있었다.

4. 신약의 정경과 본문

1) 정경(Canon)

 정경이란 표준, 척도, 자라는 뜻으로 교회로부터 믿음과 행위에 대한 권위있는 표준으로 인정받은 책들을 지칭한다. 정경이라는 개념 속에는 하나님께서 초대 교회를 인도하사 가지각색의 책들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참으로 영감된 책들을 정경으로 인정받게 하시고 반면에 영감되지 않은 책들은 비록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종종 인정을 받았는지 몰라도 정경에서는 제외되게 하셨다는 그런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선택의 과정에 시간이 걸렸고 의견의 대립도 있었지만 우리는 초대 교회가 평가도 없이 그리고 의논도 해보지 않고 책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데 대해 감사해야 할 것이다.

2) 본문(Text)

 파피루스는 신약 성경의 대부분 아니 전체의 필기 소재였다. 많은 저자들이나 서기관들은 고대의 두루마리 형식을 사용했으나, 몇몇 책들은 한 페이지씩 낱장으로 묶어 사본 형식에 따라 기록되어지기도 했었다. 원 자료들은 원본이라는 용어로 통하고 사본들은 개인이나 개 교회들이 원할 때 하나씩 만들어졌다. 또한 신약 성경의 신선함이 날이 갈수록 인정을 받게 되자 사본들이 급증하게 되었고 다소의 차이점을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의 원문을 결정하는 기준을 마련하는데 그 규칙들은 다음과 같다.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세심하게 복사된 필사본과 번역판에 실린 본문을 우선한다. 보다 난해한 본물을 우선한다. 그리고 보다 짧은 본문을 우선한다. 이러한 사본 비평가들의 수고 덕분에 헬라어 신약 성경의 본문에 남아 있는 불확실한 부분들은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이해를 뒤바꿔 놓을 만큼 심각하지 않다.

 

 

 

Ⅲ. 중심사건

1. 예수님의 생애

1) 자료들

(1) 성경 이외의 역사적인 문헌

 비정경적인 자료들-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바벨론 탈무드 그리고 청년 플리니,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루시안 같은 로마의 저술가들의 자료들-은 너무나 짧아서 예수님의 생애를 재구성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은 실존한 분이었으며 널리 대중에게 알려진 인물이었고 마침내 본디어 빌라도 치하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숭배가 사후 12년이 채 안되어 심지어 로마까지 퍼져갔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2) 아그라파(Agrapha)

 사복음서 외에도 예수님의 어록들을 기록해 놓은 자료들을 말한다. 아그라파란 헬라어로 “문서화되지 않은”이란 뜻인데, 이는 이 어록들이 물론 문서화되기는 했지만 복음서의 본문 안에 기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3) 어록집들

 사복음서 이외에 예수님의 어록들을 기록한 문서로서는 옥시린쿠스 파피루스와 도마복음이 있다. 이들 어록들과 신약 성경과의 상관관계에 관해서는 다음 세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① 정경 외 기록들이 정경인 복음서에서 파생되었다. ② 성경 외 기록들은 예수님의 어록을 담은 독자적인 전승을 따르고 있다. ③ 양자의 상관 관계는 혼합된 방식으로 작용한다. 아무튼 양자의 관계가 어떻든지 간에 널리 인정되고 있는 사실은, 옥시린쿠스 파피루스와 도마복음이 예수님의 말씀을 크게 와전시킨 전승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4) 외경적인 복음서들

 외경에 남아있는 증거들인데 이들은 이교적인 신앙들과 경건한 상상력을 한데 혼합된 모습, 특별히 정경적인 사복음서가 거의 침묵하고 있는 내용들을 기술하고 있다.

2) 복음서에 대한 자료 비평

(1) 공관복음 문제 : 구전

 세복음서의 유사성은 예수님에 관한 전승이 다소 고정된 구전 형식으로 급격히 구체화된 데서 기인하였고 이것이 후대에 성문화되었다는 이론이다. 현대의 대다수 학자들은 공관복음서 가운데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이야기가 실린 대목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 그토록 수많은 유사점들, 심지어 세세한 동사까지도 유사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이 구두 전달 방식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데 회의를 품고 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한 글자씩 축자적으로 암송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2) 마가복음 우선설(Marcan Priority)

 일반적인 해결 방법으로서 마가-Q자료설이 있다. 즉 대부분의 기사를 마가복음에 의존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어록 내지는 가르침의 대부분을 Q라고 명명되고 있는 한 소실된 자료로부터 발췌하고 거기다 자신들의 고유한 자료들을 첨가시켰다는 이론이다.

(3) Q자료 가설(Q Hypotyesis)

 마가복음에 실려있지 않는 교훈 자료들 가운데 존재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간의 유사점들은 두 번째 자료, 즉 Q자료가 있었다는 가정을 하게 만들었다. 소규모의 이야기체 양식을 띤 예수님의 초기 어록집으로 간주되고 있는 Q자료는 도마 복음과 옥시린쿠스 어록집 같은 것이었거나, 아니면 구약의 선지서같이 좀더 나은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이들 선지서는 선지자의 소명에 대한 기사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광범위한 기록들 그리고 몇 가지 단편적인 기사들을 다루고 있지만, 단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담고 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Q자료도 예수님의 세례와 시험에서 시작하여 그의 가르침들로 이어지지만, 그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기사는 다루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4) M.L 문서 및 원 누가복음

 스트리터의 가설로 예수님의 어록 중 마태복음에만 독특하게 나와 있는 내용을 M문서 그리고 누가복음에만 독특하게 나와 있는 내용을 L문서라고 각각 정의하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원-누가복음설(the Proto-Luke theory)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 제안들에 대한 전반적인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5) 그리스바흐의 가설(Griesbach Hypothesis)

 팔머(W.R. Farmer)는 18세기 학자 그리스바흐의 공관복음 이론을 재생시키고자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제일 먼저 마태복음이 쓰여졌고, 다음으로 누가복은, 그리고 끝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조화, 단축하여 마가복음이 저술되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긍정하면서도 구체적인 단어의 변화들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6) 결론

 결론적으로 마가복음 우선설이 상당히 총애를 누리고 있다. Q자료에 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추측컨대, 예수님의 어록을 담은 철해지지 않은 일단의 기록들이 있었고 이것을 마태가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이다. M문서와 L문서는 같은 자료들의 존재도 분명치 않다.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종종 예수님의 어록들을 연대순이 아닌 주제별로 편집하여 재배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마태복음보다는 덜 한 편이다. 대조적으로 누가는 마가복음을 자신의 기사의 골격으로 사용했다기보다는 보충자료로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스트리터의 주장). 그러나 이런 가능성은 사실과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게다가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 내지는 다른 공통 자료를 사용했을 경우 그들의 역사적인 증언이 마가복음이나 다른 자료에 비해 열등하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에 관한 사도들의 전승의 통일성을 보존하기를 원했는데 이는 그 전승이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름대로 통일된 증언으로서의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3) 복음서에 대한 양식 비평

(1) 방법

 20세기 초엽에 독일 학자들이 복음서에 대한 문헌적인 분석을 통하여 예수님에 관한 구전이 성문화되기 이전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추론하는 의욕적인 작업에 착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양식 비평가들은 초대 교회 당시의 문학 형식과 용례에 따라 기록된 복음서의 자료를 개별적인 단위들로 분류함으로써 구전의 특성과 내용을 결정지어서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범주들이 형성된다. ① 설교의 예화들을 위한 경구들이나 범례들 혹은 선포 기사들, ② 그리스도인 치유 사역자들의 활동들을 위한 모델로서 제시되는 이적 기사들, ③ 교리 문답 교육을 위한 어록들, ④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도록 꾸며진 전설들, ⑤ 성만찬을 기념하고 또 복음적인 설교를 위한 수난기사 등이 있다. 결과적으로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의 정황을 넘어서서 초대 교회의 삶의 정황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진위 여부를 규명하기 위하여 편집을 통해 첨가된 사항들을 벗겨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결과

 양식 비평가들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품고 있었던 전기적인 관심에 대해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만약 초대 교회가 자신들의 신앙과 관습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사실상 호소했다면, 그 경우에 가장 강력한 동기는 그분을 기억하는데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바울이 더 높은 권위자인 예수님을 끌어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3) 양식 비평에 대한 평가

 양식 비평가들은 복음서의 전승이 단지 사실이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 교육, 예배 등을 위한 훌륭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또한 양식 비평가들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기독교적인 목격담과 또 반기독교적인 목격담 이 양자가 모두 그런 자료에 대한 대대적인 왜곡이나 조작을 방지했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고대인들이 모두 어리숙하게 자신들이 들은 온갖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다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당시 그리스 로마세계에 만연해 있던 사상이 다름아닌 회의주의였다.

 만약 복음서가 믿을 수 없는 것이라면, 기독교 운동의 시작 자체가 무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처럼 극적으로 부상한 것을 볼 때 그런 현상에 상응하는 어떤 설명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서신서에 비유들이 없다는 사실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비유를 교육적인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있는 비유들도 그들이 창작한 것이 아님에 틀림없다. 이와 마찬가지로(복음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자”(Son of Man)라는 기독론적인 명칭이 서신서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칭호가 독특한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반영되고 있는 격렬한 이슈들 중 그 어떤 것도 복음서에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후대에 자신들이 발전시킨 교리를 경솔하게 예수님의 입에 집어넣어서 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4) 편집 비평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학자들은 복음서를 독특한 신학적인 관점들을 표현하기 위해 그 저자들에 의하여 세밀하게 편집된(redacted)통일성 있는 작품으로 분석했다. 대개 복음서 기자의 특별한 신학적 관점은 그가 속한 교회의 전반적인 생각에서 기인하는 법이다. 편집 비평의 공헌은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초기의 자료들을 자기 자신들의 시대의 필요성에 맞추는 방법들을 규명하여 그분의 말씀과 행적이 죽은 역사의 화석처럼 남지 않고 당면한 상황들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되도록 한 데 있다. 반면에 편집 비평의 위험성은 초기 전승들의 중요성 즉 복음서 기자들이 그 전승들을 편집, 재단 및 적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는 중요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5) 다른 종류의 고등 비평

 먼저 창작 비평(Composition criticism)은 전승의 편집상의 배열들과 첨가된 내용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다음으로 전승 비평(Tradition criticism)은 한 복음서에서 다음 복음서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신학적인 주제들의 발전상을 추적한다. 또한 문학 비평(Literary criticism)은 복음서의 메시지에 미친 문체의 영항력을 연구한다. 장르 비평(Genre criticism)은 보다 광범위한 문학 형태들의 의미를 관찰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한편 경향 비평(Tendenzkritik)은 초대 교회에서 벌어진 신학적인 분쟁들의 영향에 대하여 눈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구조 분석(Structural analysis)은 성경 본문이 이면에 깔려 있는 생각과 인간의 표현 속에 공통적으로 담겨 있는 사고 방식들을 검토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고등 비평은 비단 복음서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역시 적용되고 있다.

6) 예수님의 생애 연구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복음서가 예수님에 관해서 제시하고 있는 자료의 분량이나 유형으로 보아 복음서가 매우 선별해서 기록된 것이므로 예수님의 완벽한 전기(傳記)를 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데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예수님의 생애 연구에 대한 현재의 상황을 보면, 각기 다른 견해들이 서로 인정받기 위해 아우성치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불트만의 끈질긴 영향력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서 전승의 대부분을 거부하도록 작용하고 있다. 정통파 학자들(Orthodox scholars)은 복음서의 기록들을 전부 수납할 수 있는 훌륭한 역사적․신학적 이유들을 찾고 있다. 그와 같은 수용은, 복음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다. 복음서들간의 차이점들이 곧 편집적인 뜻과 의미를 전달하는 정해진 방법이다. 정통파 학자들도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완벽하고도 연대적인 기술(記述)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 의해 평가되어질 때 복음서는 우리의 신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2. 사복음서

1) 마가복음 : 예수님의 구속의 활동에 관한 복음

마가의 저작권과 베드로의 전승 - 처음으로 기록된 복음서에는 요한 마가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그는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바울, 바나바, 베드로의 동역자로 나타나 있다. 2세기 초엽에 교부 파피아스(Papias)는 그 이전의 전승에 기초하여 주장하기를 마가가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베드로의 회고담을 기록했는데, 그 목적이 과거 사건들에 대한 예술적인 연대기 작성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교훈을 주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연대적인 순서 내지는 수사적인 순서로 되어 있지는 않다고 했다. 이레니우스(Irenae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오리겐(Origen), 그리고 제롬(Jerome) 등은 베드로와의 관계 속에서 마가의 저작권을 확증하고 있다.

활동의 복음 - 마가복음은 장문의 설교 대신에 활동을 기술하고 있는 활동의 복음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서술 속에서 마가는 능력과 권세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활동들-특별히 그분의 치유와 축사(귀신쫓음)의 이적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께서 사탄과 마귀의 세력들을 대항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악의 나라를 침략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그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그 부분에 대해서 마가는 생각 밖의 엄청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메시아직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8:27-30)이 이 복음서의 전환점을 형성하고 있다. 그 사건 이후부터 예수님이 인자(the Son of Man)로서 자기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하기 시작하면서, 그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가차없이 내닫게 된다.

목적과 계획 - 유력한 저작 목적은 복음전도이다. 마가는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올 개종자들은 얻기 위해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이 목적을 위해서 마가는 복음서를 아주 간결하게 구성하였다. 그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와 시험(1:1-13)으로부터 시작하여 갈릴리와 그 근방에서의 예수님의 사역(1:14~9:50)에 이어서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는 도상(道上)에서의 사역(10:1-52)을 거쳐 거룩하게 계획된 예수님의 수난, 죽음 및 부활에 관한 기사들(11:1~16:8)로 결론을 맺고 있다.

저작연대 - 초대 기독교 전승은,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를 베드로의 순교(주후 64년) 이전에 기록하였는지 아니면 이후에 기록하였는지 그 여부가 불확실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 결과 현대의 학자들은 마가복음의 저작 연대를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누가가 로마에서의 바울의 재판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재판의 결과를 기록하지 않은 채 사도행전을 끝마쳤다면, 사도행전의 연대는 주후 63년 경임에 틀림없고, 그렇다면 그보다 앞서 쓰여진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누가복음은 그 연대가 사도행전보다 더 이른 시기일 것이고-만약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반영하고 있다면-필경 마가복음의 저작 연대는 40년대 말 내지는 늦어도 50년대 초가 되어야 한다.

로마인 독자와 저술 장소 - 아마도 마가복음은 라틴어에 익숙한 로마의 독자를 위해서 저술되었을 것이다. 마가는 그의 독자들의 편리를 위해서 아람어로 된 표현들을 번역해 놓고 있다. 더욱이 그는 헬라식 표현들을 그에 상응하는 라틴식 표현으로 설명하였고, 많은 라틴 용어들을 사용했다. 여기에 대해 확신을 더해 주는 사실은 15:21의 루포에 대한 언급인데, 로마서 16:13에 의하면 그는 로마에 살고 있었다. 이 밖에도 마가가 베드로의 통역자였다는 파피아스의 증언과 로마에서의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초기 전승과의 조화,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를 이탈리아에서 기록했다는 반-말시온파의 마가복음 서언(anti-Marcionite prologu to Mark)의 지적,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이레니우스의 증언들, 이상의 내용들이 마가복음의 로마 기원과 출처를 지지하는 외적인 증거들에 속한다.

마가복음의 전체적인 개요

주제 : 예수님의 구속의 활동

서론 - 세례 요한의 사역(1:1-8), 예수님의 세례(1:9-11), 예수님의 시험(1:12,13)

Ⅰ. 갈릴리와 그 근방에서의 예수님의 구속의 활동(1:14~9:50)

Ⅱ. 요단 건너편과 유대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에서 예수님의 구속 활동(10:1-52)

Ⅲ. 수난, 죽음 및 부활 주간 동안의 예수님의 구속의 활동(11:1~16:8)

 

2) 마태복음 : 메시아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에 관한 복음

저작권 문제 - 초대 교회 전승은 첫 번째 복음서의 저자로서 만장일치로 마태를 꼽고 있으며, 한편 마태와 같은 비교적 무명한 사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모든 사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생각 속에서 성인으로 칭송을 받게 되었던 시기, 그 중에서도 가장 늦은 시기까지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복음서의 세련된 구성은, 마태 사도의 같은 세리가 가지고 있을 법한 관심사 및 재능과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이 복음서만이 예수님의 성전세 납부 기사(17:24-27)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렇다. 또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기사에서 마가와 누가가 사용했던 “레위”라는 이름보다는 오히려 “마태”라고 하는 사도명을 사용하고 있으며, 마태가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했던 장소를 묘사함에 있어서 마가와 누가가 사용한 “그의 집”이라는 표현 대신에 거기서 소유대명사인 “그의”라는 표현을 생략한 채 “그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부수적인 세부사항들이 마태의 저작권을 밝혀주는 증거들이 되며 따라서 초대 교회의 전승을 지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저작 연대 - 만약 마태가 유대인들을 복음화하기 위해서 저술을 했다면 교회와 회당간의 불화가 심화되었던 주후 70년 이후보다는 유대인 개종의 전망이 보다 밝았던 시기인 주후 70년 이전에 마태복음이 저술되었을 것 같다.

주제들과 의도 - 마태복음은 메시아의 복음이자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즉 교회의 복음이며, 이 교회는 적어도 당분간 옛 언약의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였다. 이 마태복음서는 탄생 기사로 시작하고 있다(1~2장). 그리고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본론 부분에서는 주로 마가의 기사와 예수님의 강화들이 번갈아 나온다. 끝으로 26 ~ 28장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기사들로 복음서를 결론짓고 있다.

다섯 개의 강화들(Discourses) - 마태복음에 나오는 강화들은 다소 긴 “설교들”을 의미하며, 여기에 예수님의 개별적인 어록들이 적당한 위치를 찾아서 첨가되어 있다. 그 강화들과 각각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① 산상 수훈 : 참된 의(義)의 의미(5~7장)

 ② 열두 제자의 파송 : 그리스도를 위한 증거의 의미-박해와 상급(10장)

 ③ 여러 가지 비유들 : 하나님 나라의 의미(13장))

 ④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제목이 없다] : 겸손과 용서의 의미(18장)

 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과 감람산 강화 : 이스라엘의 배척당함의 의미(23~25장)

 이 강화들이 오중(五重) 구조는 마태가 유대인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 수님을 새로운 그리고 보다 위대한 모세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마태가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하여 있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탄생과 변화산 사건을 기술함에 있어서 모세의 이야기로부터 구절을 차용했다는 사실에서 또한 입증되고 있다. 강화의 5중 구조 외에도 마태의 구성 경향을 보여주는 수많은 실례들이 있다. 그는 세 그룹과 일곱 그룹으로 무리를 짓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마태복음에서 그토록 빈번하게 나온다는 것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는 달리 마태가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유대적인 특징들 - 예수님의 가르침, 그 속에 담긴 강한 윤리적인 내용 그리고 제자도에 대한 강조 등으로 편집 구성한 점으로 보건대, 이 첫 번째 복음서는 새로운 개종자들을 위한 교리문답서 내지는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교과서로 편찬되었으며, 초대 교회들의 예배시에 사용하는 기도 및 설교집으로 저술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복음서는 유대인들을 복음화하고 개심한 후 그들을 신앙으로 다지기 위해서 저술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표현들을 제공하고 있다. 율법과 구약에 나오는 메시아적인 예언을 예수께서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마태가 강조하는 것과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에게까지 거슬려 올라가고 있다는 것 역시도 이 첫 번째 복음서가 취하고 있는 유대적인 경향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그외 유대적인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다 :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하나님에 대한 전형적인 유대적 칭호,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뜻에서 하나님의 이름 대신 “하늘”로 대치함, 종말론에 대한 전반적인 유대적 관심,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자주 지칭함, 유대의 관습들을 아무런 설명없이 인용함, 예수님의 성전세 납부를 기록, 특별히 유대적인 색채를 띤 예수님의 진술들 이상의 항목들이 유대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주적인 선교관 - 또 다른 한편으로 마태복음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다름아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28:19,20)에서 절정을 이루는 우주적인 선교관이다. 마태복음이야말로 우주적인 시야(universal outlook)를 담고 있는 유대적인 기독교 복음서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저작 장소 - 마태복음이 안고 있는 유대적인 성격으로 봐서 팔레스틴이나 시리아 혹은 안디옥에서 기록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원래 팔레스틴 출신이었던 제자들 중 많은 수가 안디옥으로 이주한 사실도 있다(행 11:19,27). 또한 이방인들에 대한 두드러진 관심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바울을 파송했던 교회가 소재하고 있는 도시인 안디옥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마태복음의 전체적인 개요

주제 : 메시아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Ⅰ. 메시아의 탄생(1:1~2:23)

Ⅱ. 말씀과 사역을 통한 메시아의 공생애(3:1~4:25)

Ⅲ.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26:1~28:20)

 

3) 누가복음 : 역사적인 확실성의 복음

저자 -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동일한 저자에게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 그 이유는 이 두 책이 모두 데오빌로에게 바치는 헌정사로부터 시작하고 있고 또한 공통된 관심사들을 다루고 있으며 공통된 저술 양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동일한 저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저자로서 누가를 추론해 낼 수 있다.

인간 누가 - 누가는 헬라식 이름으로 이방인 이었을 것이며 시리아 안디옥에서 개종했을 것이다. 그의 문체는 히브리서의 문체와 더불어 신약 성경 중에서 가장 세련된 맛을 보여 준다. 바울은 골로새서 4:14에서 누가를 “사랑받는 의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방인/포괄성 - 누가는 자신의 작품을 데오빌도에게 헌정하고 있는데 그는 아마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출간을 후원해 준 개종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거나 최근에 개종한 사람 아니면 후원자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한 누가는 이방인들 특별히 기독교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 두 권을 저술하고 있다. 그는 이 복음서가 포괄적이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뜨리시고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했던 과거의 불평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전세계적인 공동체를 시작하셨다는 사실들을 보여 주고 있다. 누가는 이방인 청중들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성취된 메시야적인 예언에 대한 유대적인 관심을 겉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 또한 그는 이방인 독자들의 더 나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 독특한 유대적 표현들과 유대 관습들에 대한 암시적인 내용들을 수정하고 있다. 누가복음이 표방하는 포괄성은 넓게는 이방인을,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회적으로 버림받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세계를 포옹하시는 그리스도 - 누가는 예수님을 세계를 포옹하는 구세주로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리셨으며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세리들과도 교제를 나누셨고, 아울러 개인적인 재난을 당한 희생자들에게도 관심의 눈길을 돌리셨던 자비의 구세주셨다.

기도 -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기도의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모든 언급들이 독특한 면을 띠고 있다. 오직 누가만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두 가지나 기록하고 있으며(11:5-13 ; 18:1-8) 더욱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각별히 기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22:31,32).

성령과 복은 전도의 성공 - 누가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며 인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성령의 지칠 줄 모르는 성공의 역사(役事)에 대한 짜릿한 기쁨으로 고동치고 있다. “주” 예수께서 시작하셨고 그의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실천에 옮겼던 복음 전도의 필연적인 결코 당황해 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지극히 담대하게 주장하고 있다.

저술장소와 연대 - 사도행정의 연대는 바울(그리고 베드로)의 순교 연도로 가장 유력한 주후 67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더 나아가서 누가가 자신을 복음서를 사동행전보다 먼저 기록해되었다면

저술 의도 - 가장 분량이 많은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서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다. 특히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 기사는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있어서 누가가 제공하는 가장 두드러진 공헌이라 하겠다. 그 부분에서 누가는 베레아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을 알려 주고 또 다른 어느 복음서에서도 기록하고 있지 않는 가장 유명한 비유들을 상당히 제공해 주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지로서의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의 탄생 기사는 여러 편의 찬송과 세례 요한의 출생 기록 등 마태복음에 없는 많은 정보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른 예수님의 부활 기사를 싣고 있으며 예수님의 승천을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복음서 기자이기도 하다.

누가복음의 전체적인 개요

주제 : 복음서의 역사적 확실성

서두 : 데오빌로에게 바치는 헌정사와 역사적인 진실을 순서적으로 기록하게 된 경위와 목적을 서술 (1:1-4)

Ⅰ.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출생 및 유년 시절(1:5-2:52)

Ⅱ. 예수님의 사역 준비기(3:1-4:13)

Ⅲ. 갈릴리 사역(4:14-9:50)

Ⅳ.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9:51-19:27)

Ⅴ. 수난 주간, 죽음과 부활 이후의 사역, 및 예루살렘 근처에서의 예수님의 승천(19:28-24:53)

 

4) 요한복음 : 영생을 위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믿음의 복음

저자 - 단순한 문체로 쓰여진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을 능가하는 신학적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초대교회 전승은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한 도시 에베소에서 1세기 말엽에 본서를 기록했다는 주장을 지지한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사도 요한이 그 복음서의 저자라는 사실에 확신을 잦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 본위주위(egotism)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복음서의 내용들이 예수님께서 신임했던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믿을 만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더 나아가서 그 사랑받은 제자는 베드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거듭거듭 나타나고 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베드로와 함께 어부 생활을 했으며 그와 함께 열두 제자의 주축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미 오래 전에 순교하였고(행 12:1-5) 또 베드로 역시 그 사랑받던 제자하고는 다른 인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요한만이 그 사랑받는 제자이자 네 번째 복음서의 저자로 남게 된다.

공관복음의 보충 - 요한은 의식적으로 공관복음서를 보충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의 유대 지방에서의 사역을 강조하는 반면, 비유들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주제 등을 대개 생략하고 있다. 분명히 요한은 공관복음서가 갈릴리 사역과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충분한 내용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공관복음서의 기록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음을 명확하게 규명함으로써 공관복음서를 보충하고 있다. 예수님의 일생에 대한 완벽한 연대기를 제시하는 일에는 무관심했던 공관복음서 기자들에 비하여 요한은 예수님의 일생 동안 적어도 세 번 혹은 네 번의 유월절이 있었으며 따라서 그분의 사역이 적어도 2년 이상 그리고 어쩌면 3년에서 3년 반의 기간 동안 계속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강화 -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강화(講話)를 많이 싣고 있다. 종종 그 강화들은 청중들로부터 제기되는 질문들과 반론들로 끝을 맺기도 하며 요한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공관복음서의 보고와는 다른 스타일로 예수님의 말씀을 정연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차이가 생겨난 데는 주님의 가르침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요한이 풀어쓰는 습관에 기인하기도 하는데, 그 결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그 복음서 기자의 문체나 용어가 나타나기도 한다. 더욱이 회당에서의 설교라든가 유대 신학자들과의 논쟁 등을 볼 때,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보다 공식적인 모습들을 보존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요한의 신학 - 요한복음은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이 수없이 등장하며 또한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기도 하고 때로는 요한 1-3서와 요한계시록에서 계속 이어지기도 한다. 요한은 기사와 강화를 적절하게 바꿔가면서 이러한 주제들을 상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말씀들이 그분의 사역의 내적인 의미를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따러서 복음서에 나오는 행동의 대부분은 상징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컨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행동은 그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는 속죄의 효과를 대신한다. 그리고 아이러니(irony)한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예수님의 사역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띤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말씀도 때때로 이중 혹은 삼중적인 의미를 띠기도 한다.

요한복음의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 - 요한복음의 신학적 주제들은 계시의 범주 속에서 시작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Logos)이시다. 그 말씀으로 하나님은 진리를 계시하시는데, 그 진리는 단순한 진실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님, 성부, 성령, 성경 말씀, 그 밖의 여러 가지를 통해서 증거되고 이는 바 하나님 자신의 인격과 성품의 궁극적인 실체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 아버지로부터 내려오셔서 그분의 “시간” 즉 세상을 대신하여 고난과 죽음을 당하실 그때를 향해서 사역하셨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그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자, 그 아버지께서도 그 아들을 하늘의 영광스런 자리로 높이셨다. 선택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중생케 하는 역사를 체험하고 그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지식을 얻게 된다. 그러나 선택과 믿음은 오직 몇 사람에게만 국한될 뿐이고, 오히려 보편성이 구원 초청의 특징을 이룬다. 그 초청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생과 그리스도 안에 거함 그리고 보혜사 즉 위로자요, 상담자요, 변호자의 역할을 해주시는 성령님을 얻게 된다.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은 믿음의 복음이다. 실제로 “믿는다”(believe)는 동사가 이 복음서의 핵심 단어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독생하시고 선재하신 아들 예수님의 신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그 아버지께 순종하고자 인류의 구속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참인간이 되신 분이시다.

 마태복음에서 그분은 왕으로 오신 유대의 메시아(Messiah)로, 마가복음에서는 거룩한 종-일꾼(Servant-Worker)으로, 누가복음에서는 자비의 구세주(Savior)로, 끝으로 요한복음에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로 각각 묘사되고 있다.

실현된 종말론 - 사람이 믿을 때 곧 영생을 얻는다. 완전한 즐김은 미래까지 기다려야겠지만 모든 신자들은 현재에서 그것을 미리 맛본다. 이러한 강조와 함께 요한은 이 복음으로 불신자들을 전도하려고 애쓰고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의 믿음 가운데 굳게 세우려고 힘쓰고 있다.

반(反)세례 요한과 반(反)유대주의 논쟁 - 요한복음의 부차적인 목적이 세례 요한이라는 인물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어떤 종파에 대한 정정(訂正)이었다는 설이 가능하다. 더욱이 요한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보다 위대한 분이시라는 사실과 또 세례 요한은 쇠(衰)하여야 하고 예수님은 흥(興)하여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은 통하여 더 많은 추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푸셨다는 사실 및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주었던 것보다 더 큰 증거를 주겠다는 사실 등등을 기록해야 한다는 데서 큰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의혹에 싸여있다. 왜냐하면 이런 현상들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아선 사도 요한 자신의 체험을 오히려 반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를 유대주의에 대한 반론으로서 기록하였다는 주장을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 이유는 비록 불신하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나쁜 쪽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세상” 전체가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유대주의 대(對) 헬라주의 -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유대주의에 대한 의식적인 우월감 같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 복음서가 예수님의 헬라주의적인 특징들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가설은 거부해야 마땅하다.

요한복음의 내용 -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때, 요한복음 1:11,12은 이 네 번째 복음서 속에 포함되어 있는 온갖 자료들의 요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이 복음서의 어두운 배경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의 거듭되는 배척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대다수의 배척과는 반대로 몇몇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그분과의 만남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했다.“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이적들을 상세히 다룬다. 그러나 그것들이 예수 안에 있는 변화시키는 믿음의 능력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표적”과 “기사”라고 부르고 있다. 이상 세 구절은 수난 기사 속에서 포괄적으로 나타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재판과 십자가에 못박히심;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십자가 곁에 선 세명의 마리아와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변화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그것이다.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개요

주제 : 영생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

서론 :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1:1-18)

Ⅰ. 믿음을 낳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의 영향력(1:19~4:42)

Ⅱ. 예수님의 생명을 주시는 말씀의 권세(4:43-5:47)

Ⅲ.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예수께서 몸과 피를 주심(6:1-71)

Ⅳ. 백성들을 계몽하시는 예수님, 심판받을 운명에 처한 불신자들과 영생을 보장받은 신자들 사이의 필 연적인 분리(7:1-8:59)

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포학성과는 대조적인 예수님의 다정다감한 관심(9:1-10:39)

Ⅵ.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주어진 선물 - 영생(10:40-12:50)

Ⅶ. 예수님의 출발과 귀향(13:1-20:29)

결론 : 저술 목적 -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생명을 주는 믿음의 영감(20:30,31)

에필로그(21:1-25)

<사복음서 대조표>

복음서들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대략적인 저술연대

50년대

50 - 60년대

60년대

80 - 90년대

대략적인 저술장소

로마

시리아의 안디옥

로마

에베소

최초의 독자와 청취자

로마의 이방인들

(팔레스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관심있는 이방인 탐구자

소아시아에 있는 일반 사람들

강조된 주제

예수님의 구속사역

유대인의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제자들

복음서의 역사적 확실성

영생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믿음

 

3. 예수님의 공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서론적인 개관

공생애 기간 - 예수님의 공생에 기간은 다소 불확실한데,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누가가 가이사의 재임 원년(눅3:1)을 어떻게 잡았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후 29년부터 33년까지의 삼년 반이라는 기간이 어느 정도 그럴 듯하다. 전통적으로 공생애의 시간대(帶)는 무명 시절, 유명 시절 그리고 배척 시절,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왔다.

마지막 주간과 부활 이후의 사역 - 수난 주간은 종려 주일에 승리의 입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월요일에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고 다시금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화요일에 예수님은 성전 경내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논쟁을 벌이셨고, 감람산에서 자기 제자들에게 예언적인 강화를 선포하셨다. 또한 그날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계획을 짰다. 수요일에 대해서는 복음서이 기록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만약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다수 유대인들보다도 좀더 일찍 유월절 만찬을 먹었다면 아마 수요일 저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최후의 만찬은 목요일 저녁에 이루어졌으며, 예수님에 대한 심문이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이른 아침까지 진행되었을 것이고,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장사(葬事)지냄은 금요일 내내 되어졌을 것이다. 로마 병정들이 토요일까지 무덤을 지켰고, 부활은 일요일 이른 아침에 이루어졌으며, 부활 이후 40일 간의 사역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자기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셨다. 끝으로 예수님은 오순절 성령의 부으심을 입기 약 한 주일 전에 승천하셨다.

가르침의 방식과 내용 - 예수님의 가르침의 방식은 생생하면서도 비유적인 표현들이 풍부하다. 수많은 어록들이 셈어의 시(時)가 갖는 특징 중의 하나인 병행법의 형태로 주어지고 있으며 그분의 비유 사용은 완벽하기 그지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은 윤리적 단일신론-즉 자기 백성들과의 언약적 관계를 통하여 역사 속에서 구속과 심판을 행하시는 사랑과 의의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는 구약 성경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예수께서 죄사함을 선포한다든가, 모든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심판자가 되심을 주장하신다든가, 자기 자신에 대한 전폭적인 충성을 요구하신다든가, 하는 표현으로 볼 때, 그분은 자신을 독특한 분으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칭호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셨는데, 그 이유는 1세기 유대주의 상황하에서 그 말이 두드러지게 시사하는 정치적, 민족적 의미 때문이다. 그분은 자기를 “인자”('그 사람의 아들“)로 불러주기를 좋아하셨는데, 이 칭호는 다니엘이 환상 중에 온 세상을 심판하고 통치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초인적인 인물을 보고서 지칭했던 칭호이다(단 7:9-14).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인자로서의 자기 자신과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사52:13~53:12)을 연결시키고 계신다. 자신이 독특한 신적인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자의식은 그분이 “아바:(abba)라는 아람어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에서 그대로 표현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자기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바”로 부르라고 가르치셨는데, 이는 자신을 통해서 맺어진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의하면 두 가지 주된 윤리적 명령으로 이루어진다. 의로운 삶에 대한 그분의 견해는 외적인 표현에 반대되는 내적인 동기를 강조하셨다. 적극적인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황금률은 그분이 뜻하는 바 사랑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의 틀을 형성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그분의 선포였다. 그분께서는 친히 그 나라를 대표하셨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이 배척당할 것과 구속의 죽음과 부활을 예견하셨다. 이런 사건들 이후에는 그분의 제자들이 세계를 복음화할 때가 열려 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인류를 심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세우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4. 복음서에 대한 조화로운 연구 : 서두

1)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

사가랴에게 임한 천사의 예언 - 제사장들은 각기 다른 24진영으로 나누어 성전에서 수종들었고, 각 진영은 일년에 약 2주 정도씩 맡아 봉사했다. 사가랴가 “아비야의 반열”에 속하여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주의 천사가 그에게 예언하기를, 아들을 갖게 될 것이며 그 아들이 나실인으로 살아야 할 것과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의 시대를 준비케 해야 할 자임을 알려 준다. 이것을 사가랴가 불신하자 그 천사는 그를 벙어리로 만들었다.

마리아에게 임한 천사의 예언과 세례 요한의 탄생 - 누가는 마리아의 관점에서 탄생 기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멀지 않은 장래에 그녀가 하나님의 아들 다윗 후손의 왕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을 예언했다. 더욱이 성령의 신비로운 능력을 통해서 처녀의 몸으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가브리엘이 떠난 후 마리아는 자신의 비밀을 나누기 위해 유대에 사는 그녀의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다. 거기서 그녀는 “마리아의 송가”라는 찬양으로 드높이 불렀다. 때가 되어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았고, 생후 8일째 되는 날에 행해지는 할례식과 명명식(命名式)에서 친척들은 그 아이에게 부친의 이름을 그대로 지어주자고 했지만 그 양친 부모는 “요한”이라 부르기를 고집했는데 그 뜻은 이른 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였다.

요셉에게 임한 천사의 예언 - 마태가 탄생 기사를 쓴 목적은 다분히 변증적이다. 그는 요셉의 관점을 가지고 요셉이 예수님을 자신의 다윗 가문에 양자로 입적한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메시아의 보좌에 대한 예수님의 주장의 합법성을 입증하려고 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한 사이였으며,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요셉이 알았을 때, 그는 사람들이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은밀히 그녀와 이혼할 결심을 했다. 그러나 주의 천사는 그를 결혼하는 자리에까지 이끌어 갔고 그 아이를 이름하여 “예수”(“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 부르도록 했는데 이는 그가 가져다 줄 죄로부터의 구원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탄생과 목자들의 방문 - 마태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부연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의 재임 기간 중에 실시된 인구조사와 관련시키고 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의 조상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가야 했다. 거기 있는 한 마굿간에서 마리아는 출산을 했다. 아마도 그 마굿간은 동굴 속에 잘 다져진 점토로 만들었을 것이다. 베들레헴 근처에 머물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메시아의 탄생을 알려 주었다. 그 목자들이야말로 훗날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었던 그 낮은 서민들의 선구자들이었다.

성전 방문 - 마리아의 결례 의식(缺禮儀式)을 위한 40일의 기간이 지난 후에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성전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 있던 나이 지긋하고 경건한 두 유대인, 시므온과 안나가 아기 예수님이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메시아이심을 알아 보고는 행복해 하였다.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찬양 - 우리는 동방박사들(Magi)을 페르시아의 천문학자들로 생각해 왔다. 그들이 가져온 선물이 세 종류하고 해서 반드시 그들이 세명이었다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 동방박사들이 도착했을 때 예수님은 더 이상 말구유가 아닌 집안에 계셨다. 헤롯왕이 베들레헴에 있는 2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모두 살육했다는 사실은 그때 예수께서 거의 두 살 정도 되었다는 의미로 볼 필요가 없다.

애굽으로의 피난 - 의미 심장하게도 그 메시아의 개인적인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사의 특정 국면들을 되풀이하고 있다. 애굽으로 내려간 것과 신적인 보호 아래로 돌아온 것(호11:1), 베들레헴에서 살육된 유아들의 어머니들의 애곡(렘31:15)등이 그러하다(마2:1-23, 눅2:39참조).

귀향과 나사렛에 정착 - 이사야는 메시아를 “순”(荀) 혹은 “어린 가지”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지리멸렬(支離滅裂)한 다윗 왕조를 잘려 나간 나무의 그루터기에 비유하고 거기서부터 자라날 순 혹은 어린 가지를 메시야에 비유한 것이다. 확실한 것은 “순(荀)-마을”인 나사렛이 “순(荀)-메시아”의 양육을 위해서는 비천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동네였다는 사실이다.

성전방문 - 누가만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며, 그나마도 매우 짧막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모도 그에게 성전과 거기서 열리는 절기들을 알려주기 위해 12살 되던 해에 그를 성전으로 데리고 갔다(눅2:40-52).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는 예수님의 대답은 성부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에 대한 인식을 일찍부터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요약적인 진술에 이어 예수께서 지적으로,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자라나셨다는 말씀으로 결론을 짓고 있다.

2) 팔레스타인을 중심한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

세례 요한의 예비 사역 - 세례 요한은 주후 30년보다 다소 이른 시기에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 회개를 설교했다. 이런 예비 사역은 말라기와 이사야의 예언들을 성취한 것이었다. 요한은 시대까지도 이방인 개종자들이 유대교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입문식으로서 세례를 받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죄에 대한 회개의 상징으로서 유대교에서도 세례를 요구하였다. 사회 문제들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누가는 요한의 권면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무리들에게는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며 사는 것이 회개라고 권면하고, 세리들에게는 정직이 곧 회개고, 군인들에게는 온유함과 만족함이 곧 회개의 필수 조건이라고 각각 권면했다. 그러나 요한의 임박한 종말적인 메시지는 한 위대한 분이 오시는데 그분은 알곡에 비유되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며 반대로 가라지에 비유되는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불을 내래시리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예수님의 세례 - 예수님의 세례는 자신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요한에 의한 세례는 일반적으로 죄에 대한 회개를 상징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에 그의 세례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요한은 도리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자신에게 세례를 주셔야 한다는 측면에서 자신과 역할이 뒤바뀌었다고 항거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고집했는데, 이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1)그분은 자신이 구원해야 할 죄인 된 인간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2)그분이 세례를 위해 물속에 잠겼다가 위로 솟구치는 과정은 다가올 그분의 죽음과 장사 및 부활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세례 기사에 삼위 하나님께서 모두 등장하고 계신다-성부께서는 성자를 보증하셨고, 성령께서는 성자에게 공식적인 직무를 명하셨다. 성부의 말씀은 구약에서 온 것으로서, 예수님을 다윗 왕조의 메시아이자 여호와의 종으로 인정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시험 - 예수님의 시험은 친히 죄를 물리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질 자질이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자격 테스트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아담은 최고의 조건에 굴복하고 말았다.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가장 열악한 조건을 잘 견디어 내셨다.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세례시에 있었던 성령의 강림이 그분의 정체를 요한에게 가르쳐 준 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네 번째 복음서에서는 요한의 회개하라는 메시지나 그에게 세례를 받던 일반 대중들 그리고 특별히 예수님보다는 예수님에 관한 요한의 증거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첫 번째 제자들 -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들은 안드레와 무명의 제자였다. 안드레는 그의 형제 시몬을 예수님께로 안내했다. 예수님은 시몬은 “게바” 즉 “베드로”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두 이름을 번역하면 “반석” 혹은 “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빌립을 부르셨다. 빌립은 다시 나다니엘을 안도했다.

첫 번째 표적 - 요한은 가나안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을 하나의 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그 사건은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로 대표되는 예수님의 구속사적인 역사와 메시지가 유대인의 정결 의식에서 사용되는 “성수”로 대표되는 유대주의 정결 의식에서 사용되는 “성수”(聖水)로 대표되는 유대주의를 능가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4. 위대한 갈릴리 사역

갈릴리로의 여정과 치유(막1:14, 마4:13-17, 눅4:14,15, 요4:43-54) - 유대인의 메시아로서 예수님은 유대교의 종교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가장 큰 칭송을 받으셔야만 했다. 하지만,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마침내 예수님은 갈릴리로 되돌아가셨고 가버나움을 자신의 활동 근거지로 삼으셨다.

첫 번째 제자들(막1:16-20, 마4:18-22, 눅5:1-11) - 누가복음의 기사는 다른 두 공관복음서의 기사와는 다른데, 전폭적인 헌신이 요구되는 제자도의 나중 단계 즉 세 번째 단계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요한복음 1장은 안드레, 요한(추측상) 그리고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과 이미 인연이 있는 사이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예비적인 사귐이 있었음을 놓고 볼 때, 왜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들의 어부라는 직업을 기꺼이 포기하게 되었는지 설명이 된다.

교훈, 치유 및 축사(逐邪)(막1:21-39, 눅4:31-44; 마4:23-25, 8:14-17)

문둥병자를 고치심(막1:40-45, 마8:2-4, 눅5:12-16) - 모세의 율법은 문둥병자를 마지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문둥병자를 만지셨을 때 그분은 부정함에 물들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분의 정결함이 그 병자를 정결하게 만들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 병자에게 정해진 의식을 행함으로써 사회 속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는 확인을 받도록 하라고 명하셨다. 아마도 이것은 예수께서 모세의 율법을 사실상 반대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풍병자의 치유와 사죄의 권세 -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죄의 권세를 강조해 주고 있다.

마태-레위를 부르심(막2:13-17, 마9:9-13, 눅5:27-32)

금식의 문제(막2:18-22, 마9:14-17, 눅5:33-39) - 금식하지 않는 자기 제자들을 변호하시려는 차원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유대인들이 고대하는 바 메시아의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다.

벳세다 못가에 있던 불구자를 고치심(요5:1-47) - 예수님은 자신의 치유 역사를 성부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 보존 사역 즉 창조와는 달리 안식일에도 계속해야 하는 보존 사역과 연관시킴으로써(17절) 그 일을 변호하고 계신다. 이와 같이 성부와 자신을 밀접한 관계로 묘사하는 얘기가 유대인들에게는 신성 모독(神性冒瀆)의 소리로 들렸다(18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굴하지 아니하시고 계속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성부 하나님의 활동들에 관한 충만한 지식과 인류에게 영생을 주고 또 그 인류를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충분한 권위를 주장하셨다.

안식일 논쟁들(막2:23-29, 마12:1-8, 눅6:1-5) -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면서 이삭을 잘라 먹었다. 이러한 행동을 바리새인들이 비판하자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먹을 수 없는 거룩한 진설병을 먹었던 사실(삼상21:1-6)에 비추어 자기 제자들을 변호하셨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필요가 법적인 전문 절차들에 우선해야 함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다.

배척(막3:1-6, 마12:9-14, 눅6:6-11)

열두 제자의 선택(막3:13-19, 눅6:12-16)

산상수훈[山上垂訓, 혹은 산상보훈(山上報勳), 혹은 산상설교] - 마태가 보고하고 있는 산상수훈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묘사하고 있다. 즉 과거 시내산에서 모세가 구약의 율법을 전파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새로운 율법을 산위에서 공포하셨다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모세라는 것이다. 산상 수훈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서 이미 구체화된 불변적인 신율(新律)의 원리들을 영적으로 재해석하셨다. 누가는 예수께서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포함한 큰 무리들이 한데 둘러앉을 수 있는 “평지에서” 설교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말씀을 자기 제자들에게 선포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누가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두드러진 유대적인 주제들을 일부 생략하고 있다. 반면에 마태는 다른 상황과 장소에서 행해진 예수님의 어록들을 산상 설교 속에 삽입하고 있다.

팔복(마5:1-20, 눅6:17-26) -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하는 그 내용들은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축복의 표현이 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 양식은 ”팔복“(beatitude)으로 잘 알려져 있다. 누가 역시 팔복과 상대적인 관계에 있는 일련의 화(禍)를 기록하고 있다.

참된 의(義) - 예수님은 내적인 해석들을 포함하고 있는 구약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셨는데, 이러한 내적인 해석들은 구약의 계명들을 그들이 추구했던 바 그 목표까지 이끌어 오는 역할을 감당했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종말론적 상황은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했는데, 이러한 새로운 해석들은 바리새적인 랍비들의 해석과 비교해 볼 때 랍비들의 해석을 외식적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반면에 예수님은 주장하시기를 만물들이 다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있기에 무엇을 두고 맹세했든 그 맹세는 구속력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맹세들을 남용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위이다. 사람이 “옳다“와 “아니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실제로 시종일관 “옳다“와 “아니라“를 의미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사람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실히 알기 위해 달리 맹세를 하게 할 필요가 없다.

복수와 사랑 - 예수님은 합법적인 정의의 원칙으로서의 그 법의 정당성을 반대하신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이 동태 복수법은 합당한 처벌을 강조했었다.

주기도문(마6:1-18) - 주기도문에서 신적인 친밀감이 신적인 초월성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하나님의 명성이 높이 드러나기를 구하는 내용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갈구하는 표현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육신 생활의 필요을 구하는 것이며, 사죄의 간구로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빚을 사하여 주옵시고“란 기도는 죄를 빚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간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는 공로가 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용서하는 일이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는 그런 뜻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는 “우리를 시험에 굴복하지 않게 하시고“란 의미이다. 마지막 간구는 “악에서 구하옵소서“인데, 여기서의 악은 “악한 자“ 사탄으로 의인화되기도 한다. 가장 초기의 대표적인 사본에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하는 가족 송영이 생략되어 있다.

탐욕과 염려(마6:19-34)

비판(마7:1~8:1, 눅6:37~42,31,43~49) - 예수님은 남의 잘못을 발견하고서 이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남을 헐뜯는 식의 비판을 금하셨다. 그렇지만 도덕적이고 영적인 비난을 할 권리 및 그 필요성마저 반대하신 것은 아니었다.

백부장의 믿음(마8:5-13, 눅7:1-10) - 부하의 질병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백부장이 예수님의 권위를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의 위대한 신앙을 언급하시면서 수 많은 이방인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며 반대로 영적인 기득권을 누렸던 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니라“

나의 성(城)의 과부(눅 7:11-17) - 나의 성 과부의 아들을 일으키신 사건에서 주된 관심은 죽은 아들이 아니라 그 하나뿐인 아들만을 의지하며 살았던 단 한 사람의 유족인 그 어머니에게 모아졌다.

세례 요한과 그의 회의(懷疑) - 투옥으로 인하여 다소 의기 소침해진 세례 요한은 자기 제자들 중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정말 당신이 나에게 세례를 받았던 바로 “오실 그”이신지의 여부를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이적들과 설교들이 이사야 35:3,6과 61:1의 성취임을 지적하셨는데 이 본문은 그분이 진정 “오실 그”이셨음을 증명해 주기에 충분한 증거 본문이었다.

화(禍)와 초대(마11:20-30) -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의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않으므로 그들에게 화(禍)를 내리신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자기들 나름대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겸손하고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택하사 그들에게 모든 것을 나타내 주심을 감사하셨다.

죄인인 여자에게 향유로 복음을 받으신 예수님(눅7:36-50) -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 저녁 잔치에 들어와서 구경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다음 이야기에 나오는 그 죄인(창녀)인 여자도 그렇게 참석을 하여 예수님 뒤에 서 있다가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공양(供養)하던 여인들(눅8:1-3) - 이 본문에 언급된 여인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순회 전도를 하는 기간 동안에 재정적인 지원을 베풀었다.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막3:19-30, 마12:22-37) - 예수가 사탄의 힘을 빌어 귀신들을 쫓아낸다는 비난에 대하여 예수님 자신은 사탄이 자기 부하들을 몰아낸다는 발상을 비웃으시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셨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내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증거를 고의적이고 최후의 방법을 동원하여 거부하는 것은 바로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는 죄를 짓는 셈이 되는데 다름아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요나의 표적(마12:38-45) -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다가올 자신의 죽음, 장사 및 부활의 징조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던 것에 비유하셨다.

영적인 친척(막3:31-35, 마12:46-50, 눅8:19-21)

1)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하늘”과 “하나님” - 세례 요한과 예수님 이 두 분의 첫 메시지는 그 “천국”에 그 초첨을 두고 있었다. 종종 “하나님의”와 “하늘”(天)이라는 두 단어가 “나라”(國)라는 용어를 수식한다. 즉 이 두 단어는 동의어 관계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마태복음 19:23,24에서 부자가 천국(天國)에 들어가는 것이 사실상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처럼 다른 복음서의 병행 구절에서도 역시 두 단어가 번갈아 사용되고 있다.

정의 - “나라”라는 용어는 두 가지 주된 의미를 담고 있다 : (1) 통치 영역과 (2) 통치 행위라는 의미이다. 두 번째 의미 속에 내포된 동적인 개념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의 통치 혹은 지배”라는 번역을 선호한다. 양자의 의미가 “나라”라는 용어에 대한 신약의 용례 속에 모두 나타나고 있다. 문맥의 사상적 흐림이 두 의미 중 어느 쪽이 더 우세한 지를 결정한다. 지배하는 행위는 그 백성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압제로부터 구원하고 그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행위를 포함한다.

실현된 종말론(Realiaed Eschatology) - 세례 요한과(처음에)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시면서 백성들에게 회개함으로써 준비해야만 한다고 전파하셨다(마3:2;4:17;막1:14,15).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진행되면서 그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세상을점령해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그 나라에 들어가야만 한다(요3:3). 이처럼 예수님의 지나간 과거 모습과 사역 속에서 이루어진 그 나라의 도래를 강조하는 사상을 일컬어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부르며 그 사상은 다드(C.H.Dodd)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철저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 - 또한 예수님은 그 나라의 도래에 관하여 또 다른 측면에서 말씀하셨는데, 그 내용인즉 현재의 악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게 될 때 그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 나라를 미래-특히 가까운 미래-로 제한하는 사상을 일컬어 “철저 종말론”이라고 부르며,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와 깊은 연관이 있다. 슈바이쳐 자신은 종말론을 믿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그것을 믿고 가르치셨다고 주장했다.

그 나라의 신비 - 그 나라의 “신비”란 예수께서 다시 오시므로 그 나라가 지상에 완전히 구현되기 전에 신자들이 현재의 삶 속에서 미래의 영생의 축복을 미리 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 그리고 교회 -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정치적, 민족적인 바탕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인 회개와 믿음이라는 영적인 바탕 위에서 유대인에게 주어졌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함으로써 지도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했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마19:28)까지 교회에게 넘겨주셨다고 가르치셨다.

비유들 -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의 상당 부분을 비유의 형태로 제시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제자들에게 보다 정교한 비유들을 설명해 줌으로써 그 진리를 실감 있게 보여주시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평범한 얘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거부하는 제자 이외의 사람들에게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진리를 모호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씨와 밭 - 그 비유의 요점은 예수님에 의해서 시행된 하나님의 통치가 처음부터 칼을 들이대듯이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강요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즉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믿음의 기회를 가진 이후를 기다린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단순한 말씀, 복음 전파 즉(비유적으로) 씨를 뿌리는 것에 의해서 자신의 나라가 소개되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신다. 모든 것은 이렇게 주어진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자세의 형태에 달려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즉 자신의 재림인 추수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대 이상의 좋은 결실을 거두리라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이다.(막4:1-25, 마13:1-23, 눅8:4-18)

자라나는 씨앗(막4:26-29) -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는 그 나라가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에 의해서 올 수 있다는 것을 거부 하셨다. 하나님께서 홀로 그 일을 이루실 것이며 이는 혁명에 의해서 그 나라의 도래를 재촉하려는 혁명가들의 시도나 모세 율법의 완전한 준수에 의해서 그 나라를 도래케 하려는 랍비와 그 밖의 사람들의 시도 등을 전부 배제한다. 추수에 관한 언급에서도 암시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 나라의 완전한 현현(顯現) 및 완성이 실현된다.

겨자씨와 누룩(마13:24-53, 막4:30-34) - 아주 작은 겨자씨가 나중에는 새들이 가지에 둥지를 틀 정도로 크게 성장한다는 내용의 이 비유는 비록 그리스도의 첫 출연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작게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매우 창대하리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누룩의 비유는 이와 비슷한 요지를 전달해 주고 있다.

보화와 진주 - 반복적으로 침략을 받았던 팔레스틴 백성들은 그로부터 자신들의 보물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땅에 파묻어 두는 습관이 생겼다. 여기서는 그 보화를 파묻어 두었던 사람이 아마도 사망했거나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그 보화의 발견자가 그것을 다시 감춘 후에 그 보화를 합법적으로 소유하기 위하여 그 밭을 구입한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 알곡과 가라지(일종의 독초)의 비유와 한 그물에 잡힌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의 비유, 이 쌍둥이 같은 비유는 예수님이 인자로서 다시 오실 그때(추수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한 지배권을 갖게 되지만 그 전까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서 사탄의 나라와 함께 공존할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즉 유대인들이 민족적인 개념을 가지고 기대하고 있었던 심판을 통한 구분이 즉시 일어나지는 않는다.

집 주인

폭풍을 잠잠케 하심(막4:35-41, 마8:18,23-27, 눅8:22-25) -폭풍을 잠잠케 하신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강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거라사(또는 가다라)의 귀신들(막5:1-20, 마8:28-34, 눅8:26-39)

혈루병 앓는 여인(막5:21-43, 마9:18-26, 눅8:40-56)

야이로의 딸을 일으킴

나사렛에서 배척(마9:27-34, 막6:1-6, 마13:54-58, 눅4:16-31)

열두 제자의 선교 사역(막6:6-13, 마9:35-11:1, 눅9:1-6) - 예수님께서는 추수 때 일꾼을 보내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명하신 후에 열두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워 갈릴리 전역에 걸쳐서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라고 보내셨다.

세례 요한의 참수(斬首)와 헤롯 안티파스의 두려움(막6:14-29, 마14:1-12, 눅9:7-9)

오병이어(五餠二漁)-예수님의 생애의 전환점(막6:30-46, 마14:13-23, 눅9:10-17, 요6:1-15)

물위를 걸으심(마6:47-56, 마14:24-36, 요6:16-21) - “밤 사경(四更)-예수께서 폭풍으로 쩔쩔매고 있는 제자들에게로 물위를 걸어서 다가가신 그 시간은 대략 새벽 3-6시 경이었다.

생명의 떡에 관한 강화(講話)-(요6:22-71)

의식적인 정결과 참된 정결(막7:1-23, 마15:1-20, 요7:1)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9막7:24-30, 마15:21-28)

사천 명을 먹이심(막7:31~8:9, 마15:29-38)

메시아적인 징조(막8:10-12, 마15:39~16:4)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누룩(막8:13-26, 마16:5-12)

예수님의 메시아직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막8:27-30, 마16:13-20, 눅9:18-21)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은 (1)베드로이다. 그는 전체 사도의 대표였다 ; (2)예수님이시다. 그분은 단순한 둘이 베드로와는 구별되는 기반(基盤)이시다 ; (3)베드로의 신앙고백의 진실성 즉 예수님의 메시아직과 신성이다 ; (4)예수님의 가르침들이다. “음부의 권세”가 그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진술을 영생으로의 부활 때문에 죽음이 그 교회를 정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수난 예언과 십자가 지심(막8:31~37, 마16:21-26, 눅9:22-25) -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이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변화산에서의 변화(막8:38~9:8, 마16:27~17:8, 눅9:26-36) - 변화산을 내려오는 길에 예수님은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들에게 말라기 4:5,6에서 예언한 바 엘리야가 어떤 의미로는 세례 요한의 인격으로 이미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믿음(막9:14-32, 마17:14-20,22,23, 눅9:37-45) -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의 기도가 부족한 탓으로 쫓아내지 못한 귀신을 몰아내셨다.

베드로의 동전과 성전세(聖殿世) - '베드로의 동전“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성전 봉사를 해야 할 19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 성인 남자에게 부과되는 1년에 한번 내는 세금과 관련이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가 도래했으므로 그 성전은 예수님의 임재 앞에서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법을 따라-쓸데없이 사람들의 반대를 살 필요가 없기에-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명하시기를 호수에 그물을 던지면 고기 한 마리가 걸릴텐데 그 고기 안에 동전이 있으니 그것으로 세금을 납부하라고 하셨다.

어린아이와 제자도(弟子道)) - 예수께서 자기의 팔에 앉힌 그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연약하고 자기 방어 능력이 없으며 핍박의 대상이 되는 믿음을 가진 제자를 상징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제자 한 사람의 증거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화해와 용서, 무자비한 종 - 만약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죄들을 기꺼이 용서하지 않는다면 사살상 그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동정을 받지 못한다. 용서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감사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유(私有)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도의 본질 - 예수님의 제자도를 위한 세 가지 필수적인 자질들을 담고 있다-희생 정신과 즉각적인 순종심 및 결단력이 그것이었다. 제자도는 지적이면서도 무조건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초막절에 참석하기 위한 여행 -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활동을 명성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시간 계획에 다르겠다고 답하셨다. 게다가 그분의 운명은 대중의 환호가 아닌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분은 잠시 기다렸다가 예루살렘에 은밀히 입성하셨다.

 

5. 유대와 베라아에서의 후기 사역

초막절에 벌어진 논쟁 - 예수님께서 아직 초막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을 때 사람들은 이미 그분에 관한 논쟁에 휘말려 있었다. 그러나 다들 유대 지도자들을 두려워하여 그 논쟁을 드러내 놓고 하지는 못했다. 마침내 그분이 도착하셨을 때, 몇몇 유대인들이 그가 랍비 학교에서 훈련을 받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신학적인 논쟁에 참여할 수 있는가 하며 의아해 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의 교훈이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셨다. 예수계서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모의한다는 애기를 하시자 사람들은 비웃었다. 아마도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들이 꾸미는 계획을 모르는 척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해서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두려워했고 또 자신들의 지도자들이 어째서 곧바로 예수를 체포하지 않는지 의아해 했던 것으로 봐서 분명 그들도 그런 계획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 세상의 빛 - 한 주일 내내 계속된 초말절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보호했던 불기둥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전 지역에 있는 네 개의 커다란 촛대에 계속해서 불을 켜 둔다. 그러한 관례는 자신이 곧 영적인 참 빛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의 배경을 형성했다.

아브라함의 자손 -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그들의 자부심에 대해 예수님은 영적 자손이 육신적인 자손보다 더 중요하다고 반응하셨다. 사실 유대인들은 죄의 종들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적자(嫡子)인 이삭보다는 오히려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에 더 가까웠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는 예수님의 진술은 영존하시는 구속의 하나님 여호와 스스로 계시는 분(출3:14)이심을 주장하는 말씀이다.

눈 뜬 소경과 그의 출교, 선한 목자 - 선한 목자의 비유는 소경(양), 예수님(선한목자) 그리고 바리새인(절도며 강도)에 대한 주석(註釋)과 같은 것이었다.

칠십 인의 전도 사역 - 칠십이라는 숫자는 이방 민족의 총 숫자를 칠십으로 계수하는 랍비식 계산법에 맞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사역은 후에 있을 이방을 향한 전세계적인 선교를 예시(豫示)하는 것이다. 갈릴리 전역에 걸친 열두 사도의 전도사역과 마찬가지로 신속함이 중요시되었다.

선한 사마리아인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19:18)는 규약의 계명을 설명해 주고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 - 마리아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마르다는 오로지 수종만을 들었다.

귀찮게 졸라대는 벗 - 만약 그와 같은 상황에서 끈질진 요구가 마침내 성과를 거두게 된다면 우리의 요청에 대하여 마지 못해 응답하시는 일이 결코 없으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끈질긴 요구-인내-가 얼마나 크나 큰 효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 - 비유적으로 말해서 건강한 영적 지각이 사람의 모든 생애와 존재를 조명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예수님이 뜻하신 바였다.

바리새인 - 바리새파에 관한 예수님의 언급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중요한 원칙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사소한 종교적 규례들을 꼼꼼하게 준수했음을 지적하셨다. 한마디로 외식과 교만을 대량 생산하는 엄격한 율법주의였다.

메시아의 위기 - 다시 한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하여 경계하셨다.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 -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에서 그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열매가 의식적으로 정결하려면 처음 3년 간을 기다린 사실로 봐서 그 나무는 6년 된 나무였음에 틀림 없다. 무화과 나무는 대지로부터 엄청난 양의 양분을 빨아드리므로 주변에 있는 포도 나무와 다른 식물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 주인은 열매를 얻기 위해 1년을 더 기다렸다. 즉 7년을 참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열매를 맺기 위해 단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주후 70년에 끝이 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로마인들에게 유대 민족을 찍어버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던 것이다.

안식일 치유 - 안식일의 치유에 관한 또 다른 논쟁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이 한 주일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기에 가장 합당한 날임을 강조하셨다. 왜냐하면 그 날이야말로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날이요 더 나아가서 죄의 모든 영향력들로부터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해방을 미리 맛보는 날이기 때문이다.

겨자씨와 누룩 -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예시(豫示)와 미래의 완전한 모습 사이의 대조적인 양상은 겨자씨의 미미함과 거기서부터 자라난 나무의 울창함 사이의 대조적인 양상에 비견될 수 있다.

예수님 신성(神性)에 대한 주장 -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시한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나서자 예수님은 시편82:6에서 유대 관원들을 대표자라는 의미에서 “신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그 청중들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 예외 없이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셨다. 더욱이 그분의 기적들이 그분의 주장을 확증해 주었다.

구원받은 자의 수 - 구원받는 자의 수가 많은지 적은지에 관한 누군가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런 사색으로 걱정을 사서 하지 말고 도리어 구원받는 자의 수가 많든 적든 간에 자신이 구원받는 자들 가운데 있음을 확신하라고 말씀하셨다.

“저 여우” 헤롯 - 예수님은 경멸조로 헤롯을 가리켜 두려움을 주는 이를테면 사자와 같은 짐승이 아닌 아무런 두령무도 주지 않는 암 여우(vixen)라 불렀다. 이처럼 “여우” 중에서도 하필이면 여성형인 “암 여우”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그가 불법자인 아내 헤로디아-그녀가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었다-에게 쥐어 산다는 것을 암시했던 것 같다.

메시아의 향연(饗宴) - 겸손과 자비에 대한 예수님의 권면에서 잔치에 대한 얘기를 듣고서 누군가가 장차 올 메시아의 큰 잔치를 연상하면서 마치 그것이 탁월한 종교성을 가진 바리새인들을 위해 마련된 특혜(特惠)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하고 외쳤다.

제자도(눅14:25-35) -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려면 온갖 다른 우선권들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무리들에게 훈계하셨다.

“죄인들” - 누가복음 15장은 세 가지 비유를 담고 있는데 이 비유들은 예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그분의 환영을 받는 사람들을 변호하고 있다. 그 비유들 모두 회개하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을 보여주고 있다.

잃어버린 양 - 잃어비린 양의 비유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독선적인 사람들을 풍자적으로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잃어버린 드라크마 - 결혼 때 팔레스타인 여인들에게 주어지는 지참금의 일부로서 종종 머리에 쓰는 동전으로 꾸며진 머리 장식이 있는데, 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도 거기에 함께 달려 있던 것이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여인은 촛불을 들고 있는데 이는 한밤중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팔레스타인 가옥에는 창문이 없고 오로지 나지막한 대문만 있어서 거의 빛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 동전을 방이 하나뿐인 그 집의 바닥에 떨어졌다. 그 동전을 찾았을 때 그녀의 기쁨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 사자들 앞에 기쁨”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사자들의 기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자들 앞에 계신 하나님 자신의 기쁨을 언급하고 계신다.

탕자의 비유 - 일반적으로 상속은 팔 권리가 아니라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만을 이양한다. 왜냐면 만약 모든 가족의 재산이 팔리면 그 나이든 부모는 자신들의 노년에 살아갈 집조차 없이 지내야 할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둘째 아들은 뻔뻔스럽게도 자신의 상속의 몫을 팔아서 현금으로 교환했음에 틀림없다. 그가 재산을 탕진하는 모습은 죄악된 삶의 무익함과 최후의 파멸을 그리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모요적인 돼지 치는 일을 하는 고난도 있었지만 회개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기회야말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준다.

큰형 - 큰형은 세리와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예수님을 비판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상징한다. 불평을 하는 그는 무례하게도 “아버지”라는 경칭을 생략하고 탕자를 자기 동생이라 부르기를 기피했다. 그는 자신을 위해 파티 한번 열어 준 적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명백한 사실은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큰형도 자유에 대한 균형 있는 의식 없이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자기 아버지와는 교제도 없이 그저 섬기기만 하면서 자신의 공로들만을 스스로 내세웠다. 그러니 그가 탕자에 대한 자기 아버지의 은총에 대해 분함을 느끼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상을 받을 만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를 구별해야 한다고 하나님께 요구했다. 탕자의 편은 하나도 없고 징계가 더 마땅할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 -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그 청지기는 무엇보다도 자기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는 불충(不忠)과 그에 따른 직장 상실이라는 처벌-이러한 부정적인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1,2절과 10-13절을 비교). 사람이 주인과 돈을 모두 모두 섬길 수 없다. 그 청지기는 노력했으나 자기 직업을 잃고 말았다. 사람들이 세속적인 부요보다도 더욱 동경해야 할 영원한 보상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면 그 청지기와 마찬가지로 불성실해 질 수 있다. 돈을 무시해서도 안되면 오히려 그 돈을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부요를 얻는데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돈의 노예가 되지 말며 돈을 다스리라.

“부자”와 나사로 - 돈을 사랑하던 바리새인들은 다음 비유에서 나오는 부자를 닮았다.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그 부자는 무력하고 가난하여 그의 집 문앞에서 구걸하며 자비를 구하던 나사로를 경멸했다. 그래서 그 부자는 그 앞의 비유에 나오는 선견지명(先見之明)있는 청지기와는 대조를 이룬다. “아브라함의 품”이란 구절은 가장 최근에 도착한 손님으로서 아브라함 바로 앞에 있는 방석에 기대고 있는 나사로와 더불어 연 천상의 잔치를 의미한다. 그 잔치 광경으로 봐서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 부탁하는 부자의 요구는 합당할 수도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응답은 비록 유대인으로서 그 부자가 모든 유익을 향유했지만 히브리 혈통 자체가 천상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다.

나사로의 부활 - 누가복음 17:6에 있는 믿음으로 뽕나무의 뿌리를 뽑는 것에 대한 언급은 그 나무의 뿌리가 특히 깊고도 강하다고 여겨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마르다는 자기 형제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25,26절에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그녀에게 하신 예수님의 장담은 이중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 (1) 신자들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오는 영원한 죽음을 결코 당하지 않을 것이다. (2) 재림 때 살아있던 신자들은 육체적으로도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그분을 만나기 위해 들려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공회의 음모 - 산헤드린 공회는 그분의 명성이 되살아남으로써 예수님이 잔인 무도한 로마의 보복을 야기할 수 있는 메시아의 혁명을 초래하지 않을까 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 예수님은 자신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생각 또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특별한 모습으로 임할 것이라는 생각(20절). 이런 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생각들을 거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이미 그들 가운데(혹은 그들 내면에 적어도 잠재적으로)임했다.

과부와 재판관 -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불의한 재판관이었지만 과부의 끈질감에 항복한 나머지 그녀의 소송을 들어주었다.

바리새인과 세리 - 잘 알려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기도의 「유대기도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인용구에 유사한 것 같다 : “오 주 우리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지 아니하신 당신... 나를 노예로 만들지 아니하신 당신... 나를 여자로 만들지 아니하신 당신은 복이 있나이다.” 세리는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구석진 곳에 서 있었다. 세리들은 증오의 대상은 로마의 압제자들과 합하여 자기 동족 유대인들의 피를 빨아 먹고 온갖 종류의 부정을 다 저질렀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그들을 혐오했다. 그 청중들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나쁜 쪽으로 몰아가는 반면에 세리들은 좋은 쪽으로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처럼 예기치 못한 좋은 쪽과 나쁜 쪽의 대역전은 믿음의 바탕 위에서 아무 공로 없이 그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 용서의 본질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이혼 - 유대 랍비들은 모세의 율법이 재혼과 더불어 이혼도 허락하고 있다는 데 대해 그들 사이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예수님은 이혼에 관한 모세의 율법을 한 단계 넘어서서 태초의 아담과 이브의 창조의 얘기로 초점을 돌리셨다. 하나님의 원뜻은 이혼을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결혼 - 예수님은 선천적 기형이나 거세 때문에 육체적으로 무능력한 사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자(鼓子)된 사람에게는 결혼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들 - 결혼의 문제에 이어서 자연스럽게 어린 아이들이 주제로 부각되었다. 사회에서 어린 아이들의 낮은 지위가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자기 희생의 실례가 되고 있다.

부자 청년 관원 - 한 부자 청년 관원은 남다른 영웅적이 행위로 자신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하나도 없다고 질책하시면서 “선하다”란 말들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에 대해 회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청년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실제로 선하다면 그는 곧 신적인 분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그를 유도하셨다.

포도원의 품꾼들 - 그 주인이 하루 종일을 일한 일꾼들에게 불공평한 것이 아이라 후에 들어온 사람들도 생계에 적절한 품삯을 얻어야 하겠기에 그들에게 관대했던 것이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순수한 관용에서 우러나온 자신의 은총을 베풀고 계신다는 것이다. 구원 그 자체는 노동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온 일꾼들은 이 비유 속에서만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특별한 권세는 없다. - 제자들은 자신의 죽음이 예수살렘에서 일어날 것임을 예언하시고서도 그곳으로 가계사고 결단을 내리신 예수님의 결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야고보와 요한이 모친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특별한 지위를 요구하자, 다른 제자들도 그와 비슷한 야망들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얘기를 듣고 “분히 여기' 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영광을 얻기에 앞서서 ”(고난의) 잔“과 ”(죽음의) 세례“로 상징되는 고난과 순교를 당할 운명에 있다고 대답하셨다.

소경 바디메오 - 여리고에 있는 소경 바디메오의 이야기에서는 무리들이 예수께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시도록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열망했다. 당국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시겠다는 예수님의 결단은 전쟁을 선포하고 그의 대적들을 무찌르며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으로 비쳐졌던 것이 사실이다.

세리 삭개오 - 자기가 토색(討索)한 것의 4배를 갚겠다고 한 삭개오의 약속은 대개 이런 종류의 경우에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 것이다.

므나의 비유 - 먼 나라로 가는 귀인(貴人)의 여행과 그가 거기서 보낸 시간 그리고 그의 귀향과 셈을 하기 위한 종들의 소환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승천과 현재의 교회 시대 그리고 재림과 우리의 수고에 대한 심판 들을 상징한다. 그 비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 즉시 외형적이고 정치적인 형테로 나타나지 않을 것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떠나 계신 부재 기간이 있을 것이며 그 사이에 제자들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 예수께서 돌아오실 때 모든유대인들이 자동적으로 참여하게 될 유대 민족의 승리란 없을 것이다. 도리어 예수님께서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상주시기도 하고 심판하시기도 할 것이다.

 

6. 예수님의 사역의 대단원

1)수난주간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 - 요한은 마가와 마태의 기록에 덧붙여 그 향유가 예수님의 머리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발에도 부어졌다는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그 향유는 적어도 삼백 데나리온의 값어치 그러니까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 정도되므로 보통 노동자의 거의 1년 연봉에 해당되는 값어치를 지니고 있었다. 기룟 유다는 몇몇 제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의경을 표출하였는데, 그 내용인즉 그 향유를 팔아서 돈으로 바꾸어야 했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데 관심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사도들의 전대(纏帶)에서 한 푼 두 푼 훔쳐 쓰는데 재미를 붙여서 거기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랬다고 사설을 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대답하시기를 마리아가 자신의 장사(葬事)를 예견하여 자신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이기에 그 섬김의 행동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승리의 입성 - 종려 주일에 이루어진 승리의 입성이 갖는 여러 가지 측면들은 유대인들의 메시아적인 소망들을 일깨워 주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五餠二漁_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유월절 기간은 바로 메시아께서 자신을 알리실 것으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바로 그 시기였다. 그리고 스가랴가 메시아의 왕국이 세워질 장소로 예언한 바 있는 감람산(슥14장)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은 승리의 입성을 하셨다.

무화과 나무의 저주와 성전 청결 -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에 있는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저주하셨는데 이는 화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행위로서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헬라인들 - 그 성전에 몇몇 헬라인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유월절을 맞아 순례 차온 이방인 개종자들 내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빕고 싶다고 했다. 빌립은 다시 안드레에게 얘기하여 둘이 예수님께 나아갔다. 예수께서는 마침내 자신이 고난과 영광과 영광을 얻을 때가 왔노라고 응답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장사(葬事), 부활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영생을 땅에 떨어져서 싹을 내고 마침내 무성한 생명을 낳는 한 알의 밀에 비유하셨다. 예수께서 죽음에 관해서 얘기하시자 유대인들은 그렇다고 해서 그가 메시아일 수는 없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자신들의 생각에는 메시아가 죽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죽어야 할 인자는 불명의 메시아와는 다른 사람이어야만 하며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인자(the Son of man)라고 주장해야 옳다고 결론지었다.

시들어 버린 무화과나무 - 다음 날 아침 예루살렘 도상에서 제자들은 저주받은 그 무화과나무가 시든 것을 목격하였다. 그 결과 그 사건 전체가 마치 그날 하루에 일어난 것처럼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마태는 자신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마가복음을 통해 더 자세히 알고 있으리라 기대하고서 자신의 기록을 좀더 극적으로 구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그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불만과 심판을 상징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그 사건으로부터 믿음에 관한 교훈을 주고자 하셨다. 그분의 확실한 의도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과 하늘로의 승천이라는 위기 앞에 직면한 제자들을 격려하려는 것이었다.

신학적인 논쟁 - 산헤드린 공회의 유대 지도자들은 그분을 신학적인 논쟁에서 궁지에 몰아넣어 그 명예를 실추시킴으로써 그분의 영항력을 분쇄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전 경내에서 재치의 대결이 한판 벌어졌다.

예수님의 권세 - 유대인들이 도대체 어떤 권세를 가지고 “이런 일”을 행하느냐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세례 요한의 세례가 신적인 권위(“하늘”은 하나님을 상징한다)를 가진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권위를 가진 것인지를 되물어 보셨다. 산헤드린의 대표들은 예수님의 자신들을 진퇴 양난(進退兩難)의 딜레마 속에 빠뜨렸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 관원들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고 말았다.

두 아들의 비유 - 신학적인 논쟁의 주도권이 예수님에게로 넘어갔다. 그분은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각각의 주제는 유대 민족의 공적인 대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불만이었다. 첫 번째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자기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겠노라고 대답하고서는 이를 뉘우치고 순종한 그 아들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비종교적인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반면에 순종하겠노라고 대답하고서는 순종치 아니한 그 맏아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의 율례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독선적인 유대 지도자들을 상징한다.

포도원의 비유 - 두 번째 비유는 대토지를 소유하고서 가난한 유대 농부들에게 땅을 빌려주고 소작케 하는 외국인 부자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계속되는 불황으로 말미암아 이 소작농들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땅 주인에게 소작료를 지불하지 않았으면 하는 유혹을 느꼈다. 이 비유에서 그 포도원의 소유주는 하나님을 상징하며 포도원 자체는 유대 민족이다.

혼인 잔치츼 비유 -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맨 처음 초대받은 손님들은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이다. 그들의 동네의 멸망은 또한 주후 70년의 사건을 묘사한다. 마침내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세리들, 죄인들 그리고 이방인들이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비유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채 혼인 잔치에 참석한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그 비유의 결론이 의미하는 바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초청되었으나 진정 회개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선택을 받아 메시아의 잔치 석상에서 음식을 나눌 수 있다는 뜻이다.

가이사에 대한 세금 - 예수님에게 뒤집어 씌울려고 한 올가미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즉 유대인들이 납세를 해야 한다고 예수님이 대답을 하실 경우 가뜩이나 세금을 싫어하는 무리들로부터 예수님의 명성이 실추될 것이다. 반대로 세금을 내지 말라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충고할 경우 유대 관리들이 정치적인 전복 즉 반역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로마 법정에 고소할 것이다. 이런 교묘한 질문에 대해 세금으로 바쳐지는 동전의 종류가 무엇인가라는 예수님의 반문은 도리어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와 하나님 이 양자가 모두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에게 부과된 것은 선물이 아니라 채무하는 사실을 인식시키셨다.

부활 - 다음으로 미래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들은 부활교리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기에 그것을 폭로함으로써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시도했다. 그들이 내세운 가상의 실례는 형사취수법(兄死取搜法)과 관련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이 성경 말씀도 하나님의 권능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조소하셨다. 부활이 육체의 생명을 회복시켜 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결혼 제도가 필요없을 정도로 삶의 양식을 바꿔 놓을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죽음이 폐지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종족을 번식시킬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라는 것이 그저 현재의 삶의 연장일 것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오류를 범했다.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신적인 메시아 - 그때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각각 첫 번째,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이라고 대답하셨다. 이 바리새인에 대한 칭찬은 앞서서 예수님께 질문했던 질문자들에 대한 불신을 극적으로 부각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가장 중요한 계명들 - 이로써 신학적인 논쟁에 대한 주도권이 다시금 예수님에게로 넘어 갔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도 이 말씀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다윗의 메시아에 관해 예언한 말씀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대체적으로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왜 다윗이 메시아를 “재 주”(主)라고 불렀는가 그 이유를 물으심으로써 메시아가 인간인 동시에 신이셔야만 한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공공연한 책망에 대해서 마태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게 나와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청중들에게 이르시기를 바리새인들이 가르쳐 주는 모세의 율법을 해석해 줄 때 앉는 의자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청중들에게 이르시기를 바리새인들이 가르쳐 주는 모세의 율법은 순종해야 하지만 그들을 본받지는 말라고 하셨다. 이어서 그분은 랍비들을 무자비한 약대 주인에 비유하고 있는데 모세의 율법에 자기 자신들의 규칙을 덧붙여서 가르치는 랍비들이 마치 자기 약대에게 과중한 짐을 지우면서도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그런 약대 주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사진들의 종교심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그 상자를 크게 만들었다. 그러한 과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자신들의 외투 자락에 있는 푸른색 테두리 내지는 술을 크게 했다.

 이 단원은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으로 끝을 맺고 있다.

과부의 헌금 - 성전 경내에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헌금을 드리는 장소인 연보궤 앞에서 일어난 사건

감람산 강화 - 성전의 아름다움에 관한 감탄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가올 성전의 멸망에 대한 암울한 예언으로 응답하셨다. 그때 제자들 중 몇 사람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 지 그리고 시대의 종말과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 지 예수님께 물었다. 이를 감람산 강화라고 한다. 그리고 대환란 기간 즉 권능과 위엄 가운데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불과 얼마 남기지 않은 마지막 몇 해 동안에는 흑심한 기후의 고난이 이를 것이다.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 - 누가는 자신의 이방인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난해한 유대 관용구를 “예루살렘이 근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 즉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포위 및 함락되고 짓밟히게 된다는 내용으로 표현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누가조차도 주후 70년의 사건과 그 이후 오랫동안 지속된 이방인의 예루살렘 통치를 특별히 가리켜서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누가도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취했던 행동과는 반대되는 그런 명령이다. 그리고 오히려 누가 역시도 마가와 마태나 마찬가지로 대환란의 마지막 시기에 이루어질 이방인들의 예루살렘 통치를 지적하고 있다.

재림 - 시대의 종말은 전우주적인 혼란과 함께 도래할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대화재와 불타는 도성들과 전쟁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이런 것들이 해와 달의 빛을 어둡게 만들 것이다. 운석들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추락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인자로서 하늘로부터 재림하실 것이다.

열 처녀 비유 - 열 처녀의 비유는 준비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를 현저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다섯 처녀는 어리석게도 혼인이 지체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못했기 때문에 연료가 바닥이 나고 말았다. 반면에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여분의 연료를 준비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준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달란트 비유 - 달란트의 비유는 준비성이 단지 마음의 자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는 것, 심지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투자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양과 염소 -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이틀 뒤에 자신이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을 예언하셨다.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께 동조하는 갈릴리 무리들이 보지 않는 사이에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기회를 이미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겠다고 제의함으로써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유월절 기간 중에 은밀하게 붙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고 그 결과 그들의 욕망과 예수님의 예언이 함께 맞아 떨어졌다.

최후의 만찬 준비 - 예수님께서 제자 중 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물동이를 가진 사람을 찾아 그의 집까지 따라가서 그곳에 유월절 상을 준비하라고 명하셨다. 다락방을 이미 준비해 놓았다는 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에 사는 안면이 있는 사람과 미리 약속을 해 두셨던 것임을 시사한다.

유월절 사건 - 요한의 기록에 의하며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대부분의 유대인들보다 유월절 잔치를 일찍 치루었거나 아니면 아예 유월절 잔치를 행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요한복음의 다른 곳에서 보면 “유월절”이라는 용어가 유월절 양을 잡아먹는 잔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주간 동안 계속되는 유월절 잔치를 총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요한이 의미하고자 했던 바는 유대인들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 전날 저녁에 유월절 양을 먹었으면서도 그 잔치의 남은 예식에 참석하고자 의식상의 부정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에게 이 행위가 바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겸손한 봉사를 어떤 식으로 베풀어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가룟 유다의 도피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제자들은 그가 누군인지 묻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그 배신자가 자신과 같은 그릇에 손을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다고 대답하셨다. 요한이 그가 누구인지 은밀하게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배신자는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요 13:26)라고 대답하시고 그 조각을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다락방 강론 -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시면서 시몬이라는 옛 이름을 부르셨는데 이는 그가 “반석 같은 사람”답게 행동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월절 잔치를 통해 제정된 주님의 성만찬 - 예수님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즉 교회의 구원을 기념하시기 위해 주님의 성만찬을 제정하셨는데 이 구원이야말로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의 희생 제사로서의 죽음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을 의미했다. 떡을 축사하는 것은 그것을 먹는 사람들에게 그 떡이 축복의 방편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잔에 담긴 붉은 포도주는 새 언약의 기초인 예수님의 피를 상징했다. 예수님의 피는 죄를 도말하셨다. 성만찬 의식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맹세하시기를 자신의 재림 때 거행될 거대한 메시아의 향연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다락방 강화(講和) - 다락방에서 주어진 설교에서 예수님은 언젠가 다실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분이 안 계시는 동안에 제자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을 따르는 그들이 그분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여 자신들의 기도를 아뢸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응답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성령께서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하실 것이며,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셨던 것보다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실 것이다.

“대제사장적” 기도 - 예수님은 중보 기도 속에서 제자들의 안전과 거룩 그리고 일치를 간구하셨다.

겟세마네 동산 - 예수님과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 평범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임박한 고통과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감정적 혼란을 일으키셨고 그것이 어찌나 심했던지 마치 피를 흘리듯 땀을 온통 쏟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원하셨다.

체포 - 로마 군인들, 성전 경비를 맡은 레위인들 그리고 유대 관원들의 개인 병사들이 제자들의 무장 저항을 대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겟세마네로 올라왔다.

2)재판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심

유대 청문회와 로마 청문회 - 예수님의 재판은 두 집단의 청문회를 거쳤다. 그리고 각 청문회는 다시 세 번의 청문회로 나누어졌다. 먼저 유대인 청문회는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에 의한 예비 심문과 곧이어 밤중에 행해진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는 심문 그리고 동튼 이후의 정식 판결, 이렇게 세 번으로 이루어졌다. 반면에 로마 청문회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의 심문과 헤롯 안티파스 앞에서의 심문 그리고 다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의 심문 이렇게 세 단계를 거쳤다. 이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붙여진 죄목을 부인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가야바와 산헤드린 앞에서의 심문 - 증인들이 자신에 대하여 상충되는 증거를 제시했다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협박에 굴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가야바는 예수님이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했는지 그 여부를 퉁명스럽게 질문함으로써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던졌다. 예수님이 그 사실을 확증하셨지만 그러나 가야바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런 메시아상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메시아임을 밝히셨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의 심문 - 신성모독 죄는 메시아라는 주장만으로는 성립이 안되는 것 같았다. 유대인들은 역사가 메시아라는 주장의 진위(眞僞)를 판가름해 주리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그 죄는 그 다음 주장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에서 성립되었는데 그 순간에 예수님이 외형상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목을 주장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 언도를 내렸지만 그것을 집행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이 사형 집행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부인(否認) -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이야기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의 두 번에 걸친 예수님의 심문 와중에서 벌어졌다.

가룟 유다의 자살 -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한 유다는 용서를 구할 믿음이 없었다. 그로 인해 유다의 시신이 그가 자신을 매달았던 그 곳과는 다소 떨어진 장소에서 발견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어 왔다. 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려고 애쓰던 제사장들이 바로 그 시간에 그 피값으로 성전의 보고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세심한 배려를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빌라도 앞에서의 심문 - 또 하나 아이러니한 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인 총독의 궁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의식적인 정결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반면에 그들 자신의 메시아를 정죄하는 일에는 열렬했다는 사실이다. 신성 모독 죄라는 것은 이방인의 눈에는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으므로 빌라도 앞에서의 고소명은 날조된 정치적인 죄목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전체 항목을 통해서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는데 주력하셨다.

안티파스 앞에서의 심문 - 헤롯 안티파스는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내어 재판을 부탁했다. 만약 예수님께서 헤롯이 바라던 대로 기적을 행하셨더라면 아마도 헤롯은 그의 편에 서서 재판을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는 것은 고사하고 헤롯과 말 한 마디 하지 않으셨다.

빌라도 앞에서의 심문 -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님에게서 신성모독의 혐의를 전혀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빌라도는 무죄 선언을 내렸다. 대신에 선정의 상징으로서 매년 죄수 한명씩을 풀어주는 관습에 따라 바라바와 예수님을 놓고 누구를 풀어줄지를 유대인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은 바라바가 혁명가였기 때문에 그를 선호했는데 그의 죄목이야말로 빌라도 앞에서 그들이 거짓으로 예수님께 뒤집어 씌운 바로 그 죄목이었다.

정죄(定罪) - 거칠게 소리를 지르는 것은 정보를 캐내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사형 집행의 전주곡과 같은 것이었다. 가시 면류관은 아마도 황제의 월계수 화관(花冠)을 본떠서 만든 일종의 고문 기구로서 거기에 달린 가시들이 예수님의 머리 속을 찔렀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매질해도 좋도록 허용한 빌라도는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가 이제 받아야 할 만큼의 벌을 충분이 받았다고 느끼게끔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피에 굶주려 있었다. 그들은 무심결에 자신들이 예수님을 정죄한 진짜 이유인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특히 황제들만을 가리키는 칭호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참으로 가이사 황제에게 맞서는 정치적인 라이벌이 아닐까 라는 두려움이 빌라도에게 되살아났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신성한 분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그를 더욱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만약 빌라도가 그를 놓아줄 경우 그는 더 이상 가이사의 친구가 아니라고 외쳤다. 만일에 경우 유대인들이 로마에 가서 자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면 자신의 통치권마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는 자신의 손을 씻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려고 애를 썼고 한편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명령을 내렸다.

십자가에 못박히심 - 십자가형은 주로 노예들과 죄수들을 처형하는 사형 방법의 일종이었다. 골고다로 가는 도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일부를 부축해 주었던 구레네 시몬은 이민 온 유대인이었다. 그 길을 따라서 여인들이 예수님의 운명을 슬퍼한 나머지 울며 뒤따를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위하여 울라고 권면하셨다. 유대인들은 그의 피를 자신들과 및 자기들의 후손들의 머리로 돌리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말대로 그 피를 그들의 머리로 돌리셨다. 예루살렘의 상류충 여인들은 처형될 사람들에게 그들의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하여 마취성 음료를 제공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제공된 신 포도주는 일종의 잔인한 조롱의 표시임이 분명했다.

표제 - 명패에는 그 죄인의 죄목을 기록하여 죄수의 목이나 십자가에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빌라도는 유대인을 조롱하는 뜻에서 예수님의 죄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그가 죄인처럼 십자가에 못박혔도다. 예수님은 낮에 세 시간 동안 그리고 정오부터 오후까지 세 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계셨다.

마지막 가상칠언(架上七言) -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마디 말씀, 일명 “가상 칠언을 기록하고 있다. (1) 자기 원수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기도 (2) 회개하는 강도에게 바로 그날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있을 것을 보장해 주는 말씀 (3)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의 보호를 부탁하는 말씀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부르짖음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을 표현 (5) “내가 목마르다”(요19:28)란 말은 육체적인 갈증에서 우러나온 것 (6) “다 이루었다”(요19:30)는 말은 승리의 외침 (7) 십자가상의 마지막 부르짖음은 예수님께서 호흡을 거두시자마자 곧바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다. 여기 또 아이러니가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시신들을 안식일(금요일 저녁 일몰 때부터 시작됨)까지 십자가에 두지 못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율법의 격식을 준수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일몰이 속히 다가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장사를 당장 서둘어 거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특히 거룩하게 사용 되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3)부활, 부활 후의 사역, 그리고 승천

텅 빈 무덤 - 일요일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영구히 장사지내기 위하여 그 준비 차 무덤에 갔으니 그분은 이미 부활하셨다!

여인들 - 동튼 직후에 여인들이 왔다고 말하는 마가와 누가의 기록과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가 왔다고 하는 요한의 기록 사이의 외형적인 불일치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가 저자들간에 공모(共謀)한 결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 마가복음의 본문은 마리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마리아가 그 분을 만지는 것이 마치 잘못된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마태복음28:9,10에서 다른 여성 제자들은 아무런 책망도 듣지 않고 그분을 만졌다. 같은 날 저녁에 예수님은 자신이 육체를 입으셨음을 입증하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자신을 만져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주말에 예수님은 도마에게 자기를 만져 보라고 말씀하셨다.

뇌물 -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군사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의 시신을 자기들이 잠든 사이에 훔쳐갔노라는 소문을 퍼뜨려 달라고 부탁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 - 엠마오 마을은 예루살렘 서족 약 7.5마일(약 12Km)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도상(途上)에서 예수님이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열한 제자 - 유월절 일요일 저녁에 예수께서 열한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셔서 자신이 유령이 아닌 진짜 몸을 입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직접 만져 보라고 하셨다.

어부 - 갈리리로 돌아간 베드로와 다른 여섯 명의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잡고 있었지만 그들의 수고는 허사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예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명하셨을 때, 요한은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 보았다. 속옷만을 입고 있던 베드로가 그 즉시 겉옷을 걸치고 물 속으로 뛰어 들어 해안까지 헤엄쳐 갔다. 거기서 이미 예수님은 숯불에 고기를 굽고 계셨고 떡도 준비해 두셨다.

베드로의 재임명 -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세 번 부인한 것을 만회라도 하듯이 세 번에 걸쳐서 자신에 대한 사랑의 확증을 부드럽게 요구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응답하심으로써 다른 제자들을 목양하는 사도장(使徒長)으로 그를 임명하셨다.

요한의 운명 - 예수께서 베드로가 노년에 나이들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시자, 베드로는 사도 요한의 운명을 물어보았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을 무시하셨는데, 요한은 예수님의 언급이 초대교회 당시에 자신이 결코 죽지 않고 살아서 그분의 재림을 보리라는 뜻으로 오도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상 명령 - “세상 끝날까지”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에는 “그 시대의 종말까지”를 의미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 같다. 민족 복음화의 명령은 가장 위대한 지상 명령이다.

승천 - 부활 후 40일 간의 사역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제사장적인 축복을 하신 후에 승천하셨다.

4) 특수 : 예수님의 부활

기절설 -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는 이론들이 있다. 그 첫 번째 이론은 예수께서 단지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난 후에 곧바로 다시 소생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참기 어려울 만큼 심한 매질을 당하셨고, 장장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으며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서 물과 피가 온통 쏟아졌다. 그리고 그분의 시신의 일부를 방부 처리하여 세마포로 감쌋다는 사실과 그분을 무덤에 안치한 후에 무덤 문을 봉인했다는 사실 등이 그 증거이다.

도난설 - 어떤 이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랬다면 그들은 로마의 경비병들에게 제압당할 것이 뻔하므로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고 또 군사들에게 뇌물을 쓰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비병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맞았다면 사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마포가 흐트러져 있지 않았고 두건도 개켜져서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는 것은 도적이 성급하게 시신을 훔쳐 갔다는 주장과는 맞지 않는다. 만약 훔쳐 갔다면 세마포와 두건이 동여진 채 그대로 시신을 운반했을 것이다.

환상설 - 제자들이 환상을 경험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에수님께서 각기 다른 시간에 각기 다른 장소에서 한 사람부터 오백명에까지 이르는 다른 대상들에게 자신의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증거한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비울은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목격한 목격자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도전을 주고 있다. 예수님의 출현 횟수는 너무나 많고 다양해서 환상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착각설 - 제자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갔다는 주장 역시 동일한 반론에 부딪혔다. 그렇다면 어째서 유대인들은 올바른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오지 못했는가? 그들은 빌라도에게 그 무덤을 경비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그 무덤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어야만 했다.

신화 모방설 - 제자들이 이방 종교에 나오는 신들의 죽음과 부활을 본떠서 예수님의 부활 기사의 모델로 삼았다고 본다. 그러나 유사점보다는 차이점들이 훨씬 더 많다. 신약은 이방 종교의 풍요 신화에 등장하는 매년 생성,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 현상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리고 부활 기사는 초대 교회에서 곧바로 등장함으로써, 섬세한 신화로 발전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역사성 - 독특한 그 무엇인가가 최초의 제자들로 하여금 예배일을 주일로 바꾸겠끔 만들었음을 틀림없다. 그들이 속임을 당했거나 그들이 세상을 깜쪽같이 속였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얘기들을 한다.

최종적인 결과들 - 예수님은 바로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셨던 예수님이시다. 그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능력을 불어넣어 줄 뿐만 아니라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재림과 부활 그리고 영생을 보장한다.

 

 

 

Ⅳ. 승리의 대행진

1. 사도들을 통해 예루살렘과 그 전역에 걸친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役事)

누가의 저작권 - 사도행전의 내적인 증거들이 누가의 저작권을 뒷받침한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마찬가지로 데오빌로에게 바치는 헌정사로 시작한다. 또한 어휘나 문체면에서 두 책이 매우 유사하다. 의학적인 용어의 잦은 사용은 누가가 의사였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문학적인 기술 -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와 함께 신약 성경 가운데서 가장 미려한 헬라어 문체를 구사한 작품이다. 반면에 누가가 셈어적인 자료들을 따르면 헬라어 문체가 종종 거칠게 나타난다.

역사적 정확성 - 사도행전 자료를 위해서 누가는 자신만의 문집을 접하기 쉬운 곳에 비치게 두었다. 그는 사건들이 일어난 시간에 그 내용들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바울로부터, 그리고 예루살렘과 시리아와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또한 그가 바울과 함께 혹은 혼자 방문했던 다른 지역들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실라와 디모데 같은 바울의 다른 여행 동료들로부터, 그가 머물도록 집을 제공해 준 빌립과 바울의 오랜 제자 나손으로부터 각각 정보를 얻었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 사항과 같은 성문화된 자료들과 예루살렘과 이를 둘러싼 기독교의 초기 사건들과 관련된 아람어 문서들이나 히브리어 문서들도 사용했을 것이다.

원(原) 자료들, 결론과 연대 - 누가는 로마에 투옥된 바울이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2년 동안을 기다렸다는 내용을 끝으로 바울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끝을 맺었다. 이러한 갑작스런 종결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주장들이 제시된 바 있다. 아마도 누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즉 그의 목적은 기독교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제국의 수도인 로마까지의 기독교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울의 로마 감옥에서의 사역은 거의 절정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이미 그곳에도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술 목적 - 주된 목적은 복음의 근원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제국의 수도인 로마까지 이르는 승리에 찬 복음의 행진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행적은 초대 교회에 대한 포괄적인 역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선택적인 역사이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총체적인 목적은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 시작된 기독교의 기원과 초대 교회 역사 속에서의 기독교의 확장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불가항력적인 복음의 진보를 보면서 자기 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만민의 구속을 위하여 인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차적인 목적은기독교가 합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유대교에서 파생되었고 또 로마에 정치적으로 반역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적인 자유를 누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다양한 지역의 정부 관리들이 기독교와 그 내용에 대해 호의적인 판단을 내렸다는 것을 거듭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변증이 필요한 이유는 기독교의 창시자가 로마 정부로부터 범죄자로 정죄를 받아 죽었다는 핸디캡을 안고서 기독교가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누가는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데오빌로와 같은 사람들의 환심을 얻고자 기대했다.

성령을 기다림 -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모든 제자들에게 그 영을 부어주겠다고 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약속을 회상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순절에 그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게 했다. 이젠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고 이미 주신 그 선물을 감사하기만 하면 된다.

지상명령(대 위임령)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가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실제로 이 구절은 사도행전 전체의 개요를 이루고 있다.

승천 - 승천하실 때 뒤덮은 구름은 성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 예수님의 수세시에 또 변화산에서 각각 그러했고 또한 재림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맛디아의 선택 -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선택한 것이 그릇된 일이 아니야 하는 논란이 있지만 제자들은 제비의 사용이 자신들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을 가리킨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오순절 날 - 성령의 임재함으로 인하여 이방의 언어를 기적적으로 말하게 함으로써 유대인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은 모든 설교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얘기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베드로의 설교 -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사 자신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다는 내용이었다.

투옥 -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주장하는 사도들을 감옥에 넣었다.

공동체 삶 -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나눔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순전히 자발적이었기에 공산주의와는 다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 논밭 전지를 팔아서 전체 금액을 헌금한 바나바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보기에 그야말로 빛나는 인물로 여겨졌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논밭을 팔아서 외형적으로는 전체 금액을 헌금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을 위해 일부를 감춰두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순수함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셨던 때였다.

일곱 집사 -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과부들이 식량의 분배에 무시당해왔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을 때, 히브리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분배의 일을 관장하기 위해 헬라파 사람들을 선출했다. 이 것을 계기로 교회 생활의 문제를 다루는 교회 집사의 직분이 발전하게 되었다.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 그의 설교로 인한 그의 죄목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성전과 및 그와 관련된 각종 예식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고 말았다고 하여 성전과 그 예식을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스데반을 돌로 친 사건은 성난 군중들의 탈법적인 행위였거나 아니면 빌라도의 부재시 그 권한을 남용한 산헤드린 공회의 공식적인 처형이었을 것이다. 스데반이 돌에 맞고 있을 때, 그는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서 자기를 맞이하기 위해 서 계시는 것을 보았다.

사울-바울에 의한 박해 - 스데반의 순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불신자 유대인들의 광범위한 박해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박해의 선봉자는 바로 소아시아의 한 박해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박해의 선봉자느 바로 소아시아의 다소 출신의 사울이었다. 그의 다른 이름은 바울이었다.

사마리아에서의 빌립 - 박해로 인한 그리스도인들의 흩어짐은 결과적으로 복음의 확장을 가져왔으며 스데반과 같이 설교하는 “집사”였던 빌립에 의한 사마리아에서의 복음 전파도 이루어졌다.

마술사 시몬 - 마법사 시몬의 신앙고백과 회심은 아마도 가짜였던 것 같다. 왜냐면 그는 성령을 부어주는 능력을 돈 주고 사려고 함으로써 백성들을 상대로 돈을 벌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어 했다.

성령을 받는 사마리아인들 -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 신자들과 사마리아 신자들간의 결속을 징표로서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기 전까지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오시지 않으셨다. 두 백성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허물어졌다. 성령의 임함이 지연됨으로써 당시 주도권을 갖고 있던 유대 기독교 그룹의 대표인 사도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전에서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사마리아인들도 용납하셨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에디오피아 내시 - 이 이야기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를 예시하는 사건이었다. 그 내시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유대의 종교적인 절기 중 하나에 참석하고 가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완전한 개종자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빌립과 같이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이 내시의 무리와 같은 순례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상례였다.

사울-바울의 회심 - 예수께서 사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그 말속에서 천상에 있는 자기 자신과 지상에 있는 핍박받는 자기 제자들과의 연합 내지는 일체감을 내포하셨다. 그리스도와 신자들간의 연합은 바울 신학의 생생한 일부분이 되었다.

바울의 초기 설교 - 다메섹과 그 근방의 아라비아 지역에서의 전도 사역은 바울의 회심 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베드로의 기적과 환상 - 베드로에 의한 애니아의 기적적인 치유와 다비다를 살려낸 기적 등을 기술한 누가의 목적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그들을 교회 안으로 인도했던 바로 그 시기 동안에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방인 가족 구원 -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설교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리고 세례와 안수 기도가 실시되기도 전에 벌써 믿음을 고백하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다. 이와 같이 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신자들이나 사마리아 신자들과 독같이 이방인 신자들도 교회 안으로 용납하신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안디옥까지 - 그는 안디옥을 바울의 선교를 위한 미래의 전초 기지로서 소개한다. 안디옥에 있는 불신자들에 의해서 최초로 신자들에게 붙여진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은 조롱조의 용어였다. 동시에 그 교회가 유대교 분파 이상으로 점점 더 인정을 받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거룩하고 은혜로운 삶을 통해 마침내 그 조롱조의 이름을 경애와 칭찬의 대명사로 바꾸어 놓았다.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한 박해 - 유대교의 수호자로 자처한 그는 야고보 사도를 순교시켰고 베드로를 투옥시켰다. 요세푸스는 장암과 같은 질병으로 그가 사망했다는 누가의 기록을 확증시켜 주었다.

2. 사도 바울을 통한 전세계적인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

바울의 첫 번째 전도 여행 - 유능한 저자인 누가는 스데반이 예루살렘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행한 설교를 통한 복음 전파, 기독교 증인들의 확산과 함께 박해로 인한 그리스도인들의 흩어짐,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와 에디오피아 내시의 회심, 다메섹에서와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인들에게 행한 사울의 설교, 룻다와 욥바를 거쳐 가이사랴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던 베드로, 안디옥까지 퍼진 복음 전파 등등을 미리 얘기해 줌으로써 자신의 독자들을 준비시켰다. 뿐만 아니라 누가는 이미 바나바와 바울을 동역자로서 소개해 주었다. 바나바는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였고, 이 두 사람은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기근으로 인해 고통받던 이들을 위로하고자 안디옥 교회에서부터 예루살렘 교회까지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끝으로 기독교의 대적하던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음과 성공적인 복음 전파를 대조시킴으로써 바울의 전세계적인 복음 전도 여행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다.

시리아 안디옥 -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하게 된 공로를 안디옥에 있는 교회와 성령께 돌리고 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파송하도록 그 교회를 감동시키셨던 것이다.

구브로 : 엘루마와 서기오 바울 - 바나바와 바울이 제일 먼저 구브로 섬에 간 것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바나바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바숫 엘루마가 로마의 총독 서기오 바울로 하여금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할 때 바울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버가 -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보조자였던 마가 요한은 되돌아갔다. 그 이유를 모르지만 바울은 그 이유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바나바는 적어도 양해해 줄 만하다고 생각했다.

바울의 전도 방식 - 바울은 주요 성읍에서 설교하여 중심지에서 부터 복음이 주변 마을들과 외곽 지역까지 번져나갔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간 지역에 유대인 회당이 있을 경우 먼저 그곳에서 복음을 전비시디아 안디옥 -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구약의 역사와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복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괄하고 있다.

법적인 문제 - 로마 정책은 제국 내에 존재하는 기존의 모든 종교들에게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었으나 새로운 종교에 대해서는 그것의 확장에서 오는 사회적인 소요를 두려워한 나머지 금지하고 있었다. 얼마 후 비로서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되나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공포했다.

루스드라와 귀향 - 루스드라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헬라 신 쓰스와 허메로 오인했다. 바울과 바나바가 숭배받기를 거절하자 성난 군중들은 바울을 돌로 쳐 죽이고자 했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 더베로 돌아오는 길에 바울과 바나바는 공개적인 설교를 피했고, 오히려 신자들을 격려하며 장로들을 임명하여 책임을 지움으로써 교회들을 조직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예루살렘 공의회 - 안디옥에 있는 모교회에 보낸 바울과 바나바의 보고서에서 그들은 이방인에 대한 성공적인 복음 전도를 강조했다. 이것으로 이방인 신자들의 위상 문제를 놓고 격론이 펼쳐진다. 이때까지 누가는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밝히지 않았었다. 15장은 유대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유대주의화에 대한 논란 -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베드로와 야고보의 지지를 받아 영향력을 행사하던 예루살렘 모교회의 충고는 이방인 신자들에 대해 모세 율법으로부터 확실히 자유하다는 쪽으로 개진되었으나 불필요하게 유대인들과 상반되는 관습들은 피하라고 이방인들에게 촉구했다.

바울의 두 번째 전도 여행 - 바울이 다시금 마가 요한을 데려가기를 거절하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마가는 로마에서 바울의 동역자로 등장하고 있다.

실라 - 바울의 동역자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사람이었다. 자신들이 자칭 그 모교회의 대표라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을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을 바울이 동역자로 얻었다는 것은 크나큰 유익이다.

디모데 -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또 다른 동역자 디모데를 얻었다. 이방인들의 눈에는 디모데가 유대인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그의 유대인 모친이 그를 유대교인으로 양육했기 때문이다. 한편 유대인의 눈에는 디모데의 아버지가 이방인임으로 그를 이방인으로 보았다. 디모데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대상인 유대인들로부터 불필요한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마게도냐 사람 - 빌립보는 마게도냐에 있는 네 개의 행정 구역들 중에서 첫째로 곱히는 성이었다. 그 성에 사는 유대인들은 회당을 세울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 인원인 성인 남자 10명이 없을 만큼 그 수가 너무나 적었기 때문에 강가에 기도처만을 가지고 있었다.

빌립보 - 점을 치는 소녀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이었음을 강조함으로써 반 유대적인 편견에 호소하여 그들을 고소하였으며, 그들이 로마법과 관습에 위배되는 관행들을 권장한다고 거짓 고소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감옥에 던져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간수 - 간수는 자신의 죄수들을 놓칠 경우 사형이라는 조건하에 정해진 시간까지 자신의 죄수를 호송해야 할 책임을 져야만 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지진으로 인해 죄수들이 도망갔다고 생각하고서 거의 자살 직전까지 갔다.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대접한 후 정해진 시간까지 그들을 다시 데려가는 것은 아주 합법적인 일이다.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 데살로니가의 불신 유대인들이 특별히 적대적이어서 바울을 자신들의 성에서 쫓아내었고 그 일을 반복하기 위해 베뢰아까지 좇아갔다. 아덴에서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부활”이 그들에게 낯설은 두 신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린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 고린도는 방탕하기로 수문이 난 항구 도시였다.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돈이 떨어져서 동료 유대인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장막을 만들었다.

갈리오 - 갈리오와 같은 지방 총독에 의한 반대 결정은 그 지방 전체에 걸쳐서 기독교를 증거하는 일을 금하게 할 수 있었고 설상 가상으로 그 제국 전역에 걸친 다른 지방 총독들의 결정에 대해서도 하나의 선례를 남기게 될 수도 있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상반되는 종교로 불법적인 종교라고 갈리오를 설득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갈리오는 유대 내적인 분란으로 간주하고 무시해 버렸다.

바울의 세 번째 전도 여행 - 그의 세 번째 전도는 안디옥에서 다시 사작되었다. 그는 더베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이 위치한 지역들을 재방문하였다.

아볼로 - 에베소에서의 바울이 사역에 대해 독자들로 하여금 미리 준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누가는 그곳에서의 아볼로의 설교에 관한 본문을 삽입하고 있다. 아볼로는 자신의 개종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았다.

에베소 - 바울은 에베소서에 복음을 전하고자한 자신의 오랜 열망을 성취하였다. 거기서 그는 아볼로와 같이 요한의 세례만 알고 오순절 날 이후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고 계신다는 것도 모르는 제자들을 만났다. 바울은 복음을 좀더 충분히 설명해 주고 그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방언을 말하게 하셨다.

소요 -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신전 자체는 거의 10,000 평방 피트에 달하는 평지로 되어 있다. 소동을 일으킨 군중들이 약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극장을 가득 채웠을 때, 비기독교인 유대인들은 자신들 역시 우상 숭배를 반대하는 설교를 전했기 때문에 혹시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불똥이 자기들에게도 튀기지나 않을까 노침초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알렉산더라는 사람을 내세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무관하다고 그 폭도들에게 말하게 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목소리는 성난 군중들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마침내 서기장이 그들을 진정시키고 나서 잘못하면 이러한 시민 소요가 시민의 자유권을 박탈당하는 사태로 발전할 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나서야 그 무리들을 해산했다.

예루살렘까지 - 에베소에서 2년 3개월을 머문 후에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여행을 했고 그가 가는 곳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걷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그 헌금을 건재준 후 로마로 가고 싶어 했다. 마침내 그가 로마로 가기는 했으나 그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하에서 갔다.

예루살렘에서의 바울의 체포 -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네 명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 당시 나실인 서원 기간 동안 의식상 부정케하는 것과 접촉하였고 그리하여 7일 간의 정화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로마 시민권 - 출생시 얻은 바울의 시민권은 월등한 위치에 있게 해 주었다.

벨릭스 앞에서의 심문 - 기독교가 유대교와 적대 관계가 아닌 유대교의 완성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베스도 앞에서의 심문 - 바울은 만약 베스도가 산해드린 공회에 자신을 재판하도록 넘겨 준다면 그 판결은 보나마나 뻔할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바울의 주장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로마 시민으로서 최고 법정인 로마의 가이사에게 호소할 수 있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했다.

베스도와 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의 심문 - 이 에피소드를 기록한 누가의 목적은 유대인 전문가인 아그립바의 의견이 로마인인 벨릭스와 베스도의 의견과 일치한다는 것, 즉 바울이 어떤 실제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있다.

폭풍 속에서 로마로 행해하는 바울 - 폭풍의 구름들이 해와 별들을 삼켜 버렸고, 나침반 하나 없어서 낮에도 방향을 잡지 못했다. 절망이 배에 탄 모두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바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갖고 계셨기에 마침내 그들 모두가 안전할 수 있었다.

로마에서 - 바울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순전히 자기 변호를 위해서 그곳에 왔음을 강조했다. 비록 로마 군병에 의해 포박된 채 그가 빌린 저택에 구금된 상태였지만 그는 방문객들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그의 친구들로부터 전해지는 각종 배려를 전해 받았다. 누가는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조차 복음이 불법 판정을 받아 금지되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은 자기 독자들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누가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로마에 이르는 복음의 승리 행진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사도행전의 전체 개요

주제 : 예루살렘에서부터 로마까지 이르는 지칠 줄 모르는 복음의 전진

Ⅰ.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1:1-12:25)

Ⅱ. 사도 바울을 통한 전세계에 걸친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13:1-28:31)

 

 

Ⅴ. 해석과 암시

 

1. 바울의 초기 서신들

1) 갈라디아서 :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논박

결정적인 이슈와 주제 -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은 유대주의화 논쟁과 관련이 있었다. 유대인들이었던 최초의 그리스도인들 중 대다수가 자신들의 유대적인 생활 양식을 크게 문제삼았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이 분파주의자들에 의해 위협당하도록 내벼려 두지 않으셨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야말로 당시 팽배하던 ‘인간의 노력에 의한 구원’ 이론들을 향한 위대한 기독교의 자유 헌장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교회 안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일체이며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위대한 선언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갈라디아로 알려진 지역에 살던 백성들에게써 보내었다.

 

북갈라디아설

남갈라디아설

 바울의 첫 번째 전도여행

 예루살렘 총회

 바울의 두 번째 전도여행

 갈라디아서 저술

 바울의 첫 번째 전도여행

 갈라디아서 저술

 예루살렘 총회

 바울의 두 번째 전도여행

 

이와 같은 혼합된 견해는, 바울이 여행했을 가장 확실한 경로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임과 동시에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간의 유사성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서론 - 본 서신은 문안 인사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그 인사에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에 맞서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독자들에게 널리 감사를 드려야 할 자리에서 바울은 황급히 그리고 다소 무례하게 자신의 저술 이유를 밝히고 있다.

결론 - 그는 복음전도를 위해서 기쁘게 감수한 고난들 쪽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의 관심을 모으면서, 그들에게 자신과 유대주의자들 갈라디아 교인들의 관심을 모으면서, 그들에게 자신과 유대주의자들 이양자 중 누가 더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갈라디아서의 전체적인 개요

주제 : 율법의 순종과는 무관하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의 의롭게 됨

서론 :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문안과 참된 복음을 왜곡시키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저주91:1-10)

Ⅰ.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은혜의 복음에 대한 자저적인 논증(1;11-2;21)

Ⅱ.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한 신학적인 논증(3;1-5:12)

Ⅲ. 반율법주의에 대한 경고(5;13-6;10)

결론 : 핍박에 대한 두려움과 과시욕에 차 있는 유대주의자들과 치욕적인 박해를 받는 바울, 이 양자의 대조 및 축복(6:11-18)

2) 데살로니가전서 : 축하와 위로

주제 -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바울릐 서신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및 그와 관련된 사건들에 관한 교훈들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종말론적인 언급은 재림으로부터 주어질 위로 및 재림을 향한 기대에 대한 특별한 강조와 아울러 미래의 발전에 대한 권면이다.

배경과 저술 시기 - 바울은 두 번째 전도 여행 때 복음을 전했다. 일부 유대인들과 많은 헬라인들, 그리고 유력한 부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포옹했다. 데살로니가의 불신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을 강력하게 반대하여 그는 베레아로 가게 되었다. 저술 시기는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돌아와 보고하자 바울에게 데살로니가전서를 저술하게 된다. 그리므로 우리는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기간 중에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전서를 저술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축하와 권면 - 데살로니가전서의 첫 번째 주요 단원은 축하로 이어져 있다. 그 축하의 내용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회심하고 또 향상한 것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권면을 하게 되는데 부도덕한 행위와 형제 사랑, 예수님의 재림을 바로보며 품어야 할 위로와 근신, 그리스도인의 행위와 관련된 다양한 실제적인 문제들에 관한 권면을 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전체적인 개요

주제 :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회심과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향상에 대한 축하와 미래의 발전에 대한 권면, 그리고 재림으로부터의 위안과 및 그것을 향한 기대에 대한 특별한 강조

서론 : 문안 인사(1:1)

Ⅰ. 축하(1:2-3;13) Ⅱ. 권면(4;1-5:22)

결론 : 축복과 최종적인 교훈(5;23-28)

 

3)데살로니가후서 : 재림에 대한 정정

저술 시기와 주제 -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기간 중에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전서를 저술한 직후 다시 데살로니가후서를 저술하였다.

격려와 교정 - 그의 목적은 그리스도께 오시면 판도가 뒤바뀔 것임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계속해서 인내해 줄 것을 당부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거짓 예언이나 바울의 이름을 사칭한 구두 혹은 문서로 된 얘기에 속지 말라고 바울이 경고한다.

데살로니가후서의 전체적인 개요

주제 : 박해로 인하여 야기된 것이 분명한 광신적인 신앙의 자제를 촉구

서론 : 문안 인사(1:1.2)

Ⅰ. 박해(1:3-12) Ⅱ. 재림, 휴거 및 주의 날(2;1-15) Ⅲ. 격려(3:1-15)

결론 : 본 서신의 신빙성을 보장하기 위해 마지막 몇 죽을 친필로 기록한 사실을 바울이 강조하면서 마지막 축복과 작별 인사를 고함

 

2. 바울의 주요 서신서

1)고린도전서 : 교회 문제들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예전 사역 - 고린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돈이 떨어진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도와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설교를 했다. 실라와 디모데가 그와 결합한 후에 그는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저술하고 전도 활동을 계속했으며, 회당장 그리스보를 개종시켰고 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를 로마 총독 갈리오가 다행히 취하시켜 주었으며 그 결과 그 도시에서 일년 반 동안 알차게 사역할 수 있었다.

저술 시기와 장소 및 동기 - 그는 제3차 전도 여행 기간 중에 에베소에서 그 서신을 기록했다. 고린도전서를 저술하게 된 동기는 다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1)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에 관해서 글로에싀 집으로부터 구두 보고가 왔기 때문에(1 : 11), 아니면 (2)고린도 교회로부터 사절단-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이 방문해서 그들이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바울의 판단을 바라는 요구와 아울러 서신을 부탁했기 때문에 적어도 이러한 생각은 16:17과 7:1로부터의 유추해낼 수 있다.

교회 문제들 - 고린도라는 극단적인 이교 사회에서 고린도 교회는 각종 문제들을 겪고 있었다. 결론적인 얘기는 여러 방면에 걸친 권면들과 인사 그리고 바울과 디모데와 아볼로의 현재 상황과 계획들에 관한 소식들로 이루어져 있다(16:10-24). 고린도의 분파주의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세속성을 책망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연합을 원하고 또 그럿을 위해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극악한 죄인을 교인으로 용인하고 있는 것을 책망한다. 그리고 결혼과 이혼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시하고 우상에 바쳐진 음식도 믿음이 연약한 자를 위한 바른 자세를 가르치고 있다. 교회내에서는 여인들의 머리를 가리게 햇고 주의 성만찬과 방언에 대해서 그리고 부활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결론이 되는 16장은 다양한 권면들을 담고 있는데 그 중 예루살렘으로 가져갈 연보에 관련된 일도 포함되어 있다. 22절에는 “마라나타”라는 중요한 아람어 구절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오 주여 오소서!”이다.

고린도전서의 전체적인 개요

주제 : 고린도에 있는 교회의 문제들과 그 해결책들

서론 : 고린도 교회에 대한 문안 인사와 감사(1;1-9)

Ⅰ. 글로에의 종들에 의한 각종 보고들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책망들91:10-6;20)

Ⅱ.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온 서신에 나타나 있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7:1-16:9)

결론 : 디모데의 임박한 고린도 방문과 아볼로의 방문 계획 취소.

 가지각색의 권면들과 마지막 인사 및 축복(16:10-24)

 

2) 고린도후서 ; 바울의 자기 사역에 대한 이해

주제 - 고린도 교회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반영으로서 바울의 자기 자신의 사역에 대한 이해

서론 - 문안 인사(1:1,2)

Ⅰ.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언급과 함께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의 관계(1:3-7:16)

Ⅱ.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모금에 관한 권면(8:1-9:15)

Ⅲ. 바울을 반대하는 소수에 대한 특별한 언급과 함께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의 관계(10:1-13:10)

결론 - 마지막 권면들과 작별 인사 및 축복(13;11-14)

 

3) 로마서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주어진 선물인 하나님의 의

주제 - 이신칭의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의 선물

서론(1:1-17) - 문안 인사, 로마를 방문하려는 바울의 계획, 주제에 관한 저술

Ⅰ. 모든 인간의 죄인 됨 -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를 보여주며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말한다.

Ⅱ.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의 칭의(3:21-5:21)

Ⅲ.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죄인들의 성화(6:1-8:39)

Ⅳ. 이스라엘의 불신앙

Ⅴ. 실제적인 권면들(12;1-15;13) -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교회 안에서의 사역을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과 그에 따른 덕목들을 언급하며 불신자들과의 관계성과 국가에 대한 순종 그리고 사랑을 말했다. 그리고 종말에 대한 각성을 촉구햇으며 자유함과 의식상의 문제들에 대해 권면했다.

결론(15:14-16;27) -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연보를 전달한 후 로마를 방문하려는 바울의 계획이 나오고 뵈뵈를 추천하고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를 하면서 작별인사를 고한다.

 

3. 바울의 옥중서신

1) 빌레몬서 : 도망친 노예들에 대한 변호

주제 -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도망친 노예에 대한 긍휼을 보여준다

서론- 문안 인사(1-3절)

Ⅰ. 빌레몬에 대한 감사(4-7절) Ⅱ. 오네시모에 대한 변호(8-22절)

결론 - 작별 인사와 축도(23-25절)

2) 골로새서 :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주제 -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창조 사역 및 구속 사역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이 그리스도를 평가 절하시키는데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론(1:-12) - 문안 인사와 감사와 기도가 나온다.

Ⅰ. 기독교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탁월성 -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과 구속사역이 나오며 바울에 의한 그리스도의 선포가 있고 골로새 이단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보여주었다.

Ⅱ. 기독교적인 행위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탁월성 -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및 승천에서의 그분과 신자와의 연합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죄악된 행동들에 적용하였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로운 행동들에 적용하였다.

결론 - 두기고의 오네시모의 방문과 끝 인사와 최종적인 교훈을 제시하였고 작별과 축복을 하였다.

 

3) 에베소서 :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주제 -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강조하면서 에베소 교회의 영적인 특권과 책임을 말한다.

서론 - 문안 인사(1:1,2)

Ⅰ. 에베소 교회의 영적인 특권 - 성부의 계획과 성자의 완성 그리고 성령의 적용에서 비롯되는 영적인 축복들에 대해 찬양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인한 감사의 기도를 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죄인의 중생을 말하였다. 하나님과 이방인들 그리고 그 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들과의 화해를 주장했고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바울의 특권의식을 보여주었다.

Ⅱ. 에베소 교회의 영적인 책임 - 분할된 사역의 다양성을 통한 통일성을 추구햇고 도덕적인 행동과 성령 충만을 그리고 서로간의 복종을 권면했다.

결론 - 두기고의 방문과 끝 인사와 축복을 기원했다.

 

4) 빌립보서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주제와 상황 - 바울이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들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서신으로 재정적인 후원에 대한 감사와 개인적인 소식 및 권면들을 다루고 있다.

Ⅰ. 개인적인 문제(1:3-26) -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감사와 기도 및 애정을 표현하였고 바울의 감옥전도와 석방에 대한 전망 및 임종을 준비하는 것에 대하여 썼다.

Ⅱ. 권면들(1:27-2:30)-가치있는 행동과 겸손을 통한 연합과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의 귀감을 권면

Ⅲ.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에 파송(2:19-30)

Ⅳ.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와 유명한 바울의 자서전의 본문(3;1-21)

Ⅴ. 권면들 -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연합과 기쁨과 신뢰, 고귀한 생각에 대하여 권면함

Ⅵ. 재정적인 후원에 대한 감사를 하였다.

결론 - 작별 인사와 축복기도로 마침

 

4. 바울의 목회서신

1)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 젊은 목회자들에게 주는 교훈

주제 - 디모데와 디도가 교회에서 담당해야 할 행덩적인 책임에 관련된 교훈을 담고 있다.

저작권 - 목회서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썼거나 아니면 바울의 추종자가 바울이 사후에 남긴 자료들 을 참조하여 썼을 것이라고 한다.

필명 - 목회서신이 바울에 의해 쓰여졋다는 또 하난의 근거는 당시 저작권의 문제에 있어서 매우 엄격했던 초대 교회가 목회서신을 바울이 직접 썼다고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단지 목회서신이 로마서나 고린도전서에 비해 증거가 부족했던 것뿐이었다.

어휘 및 문체 - 바울이 쓴 것으로 널리 인정된 서신들이나 그 서신 속의 문장들에서도 목회서신에서 바울의 저작임을 부인하는 근거가 되는 문체와 똑같은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2) 디모데전서의 전체적인 개요

주제 - 디모데를 통한 교회의 조직과 행정

Ⅰ. 이단에 대한 경고와 개인적인 회상 Ⅱ. 디모데를 통한 교회의 조직 Ⅲ. 디모데를 통한 교회의 행정

결론 - 디모데에 대한 최종적인 권고와 축도

 

3) 디도서의 전체적인 개요

주제 - 디도를 통한 그레데 교회의 조직과 행정

Ⅰ. 감독의 임명과 자격 Ⅱ.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 Ⅲ. 선한 행위에 대한 가르침

결론 - 디도에게 니고볼리로 와달라는 요청과 교훈을 주고 작별 인사와 축도로 마침

 

4) 디모데후서의 전체적인 개요

주제 - 바울의 사역을 감다하는 디모데의 헌신

Ⅰ. 사역의 능력에 대한 권면 및 나태함에 대한 경계

Ⅱ. 정통 신앙에 대한 권면 및 거짓 교사와 실천에 대한 경계

결론 - 디모데에게 곧 와달라고 요청과 바울의 시련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작별 인사와 디모데의 방문에 대한 간절한 요청 및 축도로 마침

 

5. 히브리서 :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

주제 - 그리스도를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묘사하고 그분은 죄에 대한 완전하고 충분한 대가로서 다름아닌 자기 자신을 희생 제사로 드린 분이시며 현재 하늘의 성소에서 사역하고 계신다.

Ⅰ.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그리스도께서 우월하심(1:1-3)

Ⅱ. 천사보다 그리스도께서 우월하심(1:3-2:18) ; 배교에 대한 경고(2:1-4)

Ⅲ. 모세보다 그리스도께서 우월하심(3;1-6) ; 배교에 대한 경고(3:7-9)

Ⅳ. 여호수아보다 그리스도께서 우월하심(4:1-10) ; 배교에 대한 경고(4;11-16)

Ⅴ. 아론 지파보다 그리스도께서 우월하심 및 배교에 대한 경고(5:1-12:29)

Ⅵ. 실제적인 권면들(13:1-19)

결론 - 작별 인사. 디모데의 석방 소식 및 축복(13:20-25)

 

6. 공동서신 즉 일반서신

1) 야고보서 :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

주제 - 일상 생활에서의 그리스도인의 행위

서론 - 흩어져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문안 인사(1:1)

Ⅰ. 시험의 기쁨(1:2-4) Ⅱ. 지혜를 구하는 기도(1:5-8) Ⅲ. 부에 대한 청렴함(1:9-11)

Ⅳ. 시험과 유혹의 차이91:12-18) Ⅴ. 말씀에 대한 순종(1;19-27)

Ⅵ. 부자에 대한 편애가 없는 사랑(2:1-13) Ⅶ. 믿음의 증거로서의 행위(2;14-26)

Ⅷ. 지혜(3:1-4;10) Ⅸ. 비방을 피함(4;13-17) Ⅹ. 자만(4;13-17), 인내(5:1-11), 정직(5;12)

Ⅺ. 병자를 위한 기도와 서로간의죄에 대한 고백을 포함한 공동체 의식(5;13-18)

Ⅻ. 그릇된 길로 가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교화(5;19,20)

 

2) 베드로전서 : 구원과 고난

주제 -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행위

Ⅰ.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하늘의 기업에 대한 찬양(1:3-12)

Ⅱ. 개인적인 거룩에 대한 권면(1;13-21) Ⅲ. 서로간의 사랑에 대한 권면(1;22-25)

Ⅳ. 구원 안에서의 진보에 대한 권면(2;1-10)

Ⅴ. 비기독교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대한 권면(2;11-4:19)

Ⅵ. 교회 안에서의 겸손과 박해에 대한 저항에 관한 권면들(5;1-11)

결론 - 필경사 내지는 전달자의 역할을 모두 맡은 실루아노 ; 작별인사 및 축복(5;12-14)

 

3) 베드로후서 : 정통 신앙에 대한 변호

주제 - 기독교 신앙의 참된 지식 對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재림 부인

Ⅰ. 서론 - 문안 인사(1:1,2) Ⅱ. 기독교 신앙의 참된 지식(1:3-21)

Ⅲ. 거짓 교사들(2:1-22) Ⅳ. 재림과 최종적인 해결(3:1-18a) Ⅴ. 결론 - 송영(3:18b)

 

4) 유다서 : 거짓 교사들 조심

주제 - 교회 내의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

Ⅰ. 서론 - 문안 인사(1,2) Ⅱ.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옴(3,4)

Ⅲ. 거짓 교사들의 불경건한 성격과 그들에 대한 임박한 심판의 도래(5-16)

Ⅳ. 거짓 교사들에 대한 저항(17-23) Ⅴ. 결론 - 축복(24,25)

 

5) 요한일서 : “나의 자녀들”에게 주는 아버지의 가르침

주제 -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진정한 기독교 신앙과 실천에 대한 기준을 제시

Ⅰ. 서론 -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기초로 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증거(1:1-4)

Ⅱ. 의로운 행위에 대한 기준(1:5-2:6)

Ⅲ. 그리스도인들간의 사랑에 대한 기준(2:7-17)

Ⅳ. 성육신에 대한 기준(2;18-28)

Ⅴ. 의로운 행위에 대한 기준(2:29-3;10)

Ⅵ. 그리스도인들간의 사랑에 대한 기준(3;10-24)

Ⅶ. 성육신에 대한 기준(3:24-4:6)

Ⅷ. 그리스도인들간의 사랑에 대한 기준(4:7-5:3)

Ⅸ. 의로운 행위에 대한 기준(1:5-2:6)

 

6) 요한이서의 전체적인 개요

주제 -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진리

Ⅰ. 서론 - 문안 인사(1-3) Ⅱ.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대한 권면(4-6)

Ⅲ. 거짓 교리와 거짓 교사의 출입을 경계(7-11)

Ⅳ. 결론 - 방문에 대한 희망과 끝 인사(12,13)

 

7) 요한삼서의 전체적인 개요

주제 - 교회의 논쟁

Ⅰ. 서론 - 문안 인사(1) Ⅱ. 순회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받아들이라는 권고(2-8)

Ⅲ. 요한의 사도권위에 대적하고 순회교사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디오드레베에 대한 비판(9-11)

Ⅳ. 요한의 특사이자 이 서신의 전령으로 보이는 데메드리오에 대한 추천(12)

Ⅴ. 결론 - 방문 의사와 끝 인사(13-15)

 

7. 요한계시록 : 그분이 오시리라!

주제 - 이 세상의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종말적인 승리에 대한 환상들

서론(1:1-8) - 요한계시록의 명칭과 의미, 본서를 읽는 독자들과 듣는 청중들에 대한 축복, 문안 인사. 송영, 주제 설명

Ⅰ. 일곱 촛대(교회)와 일곱 별(천사들 내지는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손에 들고 계신 왕적 제사장이신 그리스도(1:9-20)

Ⅱ.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2;1-3;22)

 - 에베소, 서머나, 빌라델비아, 사데, 버가모, 두아디라.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

Ⅲ. 하늘의 뜰(4;1-5;14) - 하나님을 경배하는 살아있는 네 생물들과 이십 사 장로들,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를 가지신 어린 양 그리스도의 출현과 더 큰 찬양

Ⅳ. 대환란의 재앙들(6:1-16:21) - 인간의 타락에 기인한 처음 여섯 인, 보호를 위해 144,000명에 인을 침, 대환란으로부터 온 흰 옷 입은 수많은 성도들, 일곱째 인(하늘의 고요함, 뇌성, 번개 및 지진), 사탄과 마귀의 활동에 기인한 처음 여섯 나팔, 자연을 피하기 위해 일곱 우레를 취소함, 열국에 관한 예언들을 담은 두루마리를 먹는 요한, 두 증인, 일곱째 나팔, 사내 아이를 낳은 여인을 용으로부터 보호함, 두 짐승, 시온산에서 어린 양 그리스도와 함께 노래하는 144,000명, 세 천사의 메시지, 두 차례의 추수, 하나님의 분노에 기인한 일곱 대접

Ⅴ. 바벨론(로마)의 멸망과 그리스도의 재림(17:1-19:21) - 음녀 바벨론에 대한 묘사, 바벨론의 멸망, 어린 양의 혼인 잔치, 그리스도의 강림, 악의 대군들의 패배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볼못에 던져짐

Ⅵ.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20:1-22:5) - 천년 동안의 사탄의 결박,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천년 통치, 사탄의 석방, 반역, 최후의 패배, 백보좌 심판,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

Ⅶ. 결론(22:6-21) - 요한계시록의 신뢰성과 경고 및 초청, 축복

 

 

Ⅵ. 나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종교적, 정치적 불안기에 이 세상에 오셨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은 로마 압제 속에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정치적인 비중을 실은 “메시아”란 용어를 가급적 피하시고 자기 자신을 영적인 구세주로 소개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 대다수는 그분을 거부하고 오히려 정치 혁명가였던 바라바를 택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로마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부활이 그분을 제자들 앞에서 변호하였다. 그분의 승천과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이후에 그들은 그분을 주와 구세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자신들의 나라가 이방 민족들을 지배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재림이 지연되었고 이방인적 편견이 적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개종하게 되면서 그들이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는데 제일 먼저 일치된 노력을 보였다. 그 결과가 바로 바나바와 바울의 파송이었다.

 복음 전도의 성공은 개종자들에 대한 교육과 예배를 위한 지역 모임들을 구성하도록 자극했다. 구조적인 교회의 모습이 차츰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교리적이고 윤리적인 교훈이 신약에서 성취되지 않은 구약의 요소들에 의해서,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에 대한 회상, 적용 및 확대를 통해서 틀을 형성하게 되었다. 성령의 지도 아래 이런 것들이 인간의 본성과 그리스도의 사역, 교회의 의미와 종국적 미래에 대해 더 깊은 고찰을 하도록 인도해 주었다.

 기독교 교리와 윤리에 대한 초대 교회의 전통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복음의 지리적 확장은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서신들의 저술이 먼저 시작되고 얼마 후에 불신자들을 복음화시키고 신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다지며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권위있는 기록을 제공하기 위한 문학적인 방편으로서 복음서의 저술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대다수의 목격자들이 거주하던 팔레스틴으로부터 복음 운동이 점차 멀어지고 또 그 증인들이 하나 둘 사망함으로 인하여 목격담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었고 그래서 더욱 문서화를 서둘렀던 것이다. 끝으로 1세기 말엽에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사도 요한이 복음서의 문학적인 양식과 서신들의 양식을 접맥해서 신약 정경의 마지막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책이야말로 신약 성경 중에 형식면에서 가장 독특한 책이다-환상적이며 앞을 내다보는 요한계시록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나서 수집과 정경화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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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Ez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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