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 !!! 구원사!!!

[스크랩] 아브라함의 선택권 양보 속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

하나님아들 2014. 3. 8. 13:53
아브라함의 선택권 양보 속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
(창13:1-18)

1. 도입

본문에서 아브람 일행의 출애굽 사건은 소위 ‘아브라함 언약’(창12:1-3)에 근거해 하나님께서 저들의 행보를 약속의 땅 가나안에로 인도하신 사건(창12:5)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아브람 일행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진행되는 주권적인 섭리역사로 인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을 복음의 빛 아래서 해석하면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히11:8)고 기술합니다.

이런 식의 적극적인 순종력의 발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굳게 붙들고 의지하는 데서만 나올 수 있는 계시의존 사색 신앙적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先)은혜가 당사자에게 전인적으로 임한 사실의 당연한 반응으로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제까지 삶의 전부요 존재이유로 알고 일심으로 추구해 왔던 바, 옛 사람적 삶의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한순간에 포기하고 어딘지도 모를 미지의 땅을 향해 미련 없이 길을 떠난다는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는 무모한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정의하고 있는 대로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세계에 속한 것을 현재적이며 사실적인 것으로 확신하는 믿음’(히11:1)의 발휘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선택일 뿐입니다. 따라서 아브람의 소명사건 속에는 여자의 후손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위해 세상역사 속에서 언약적 구속사를 집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이런 방식으로 아브람에게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의 확신을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가운데 마침내 아브람 일행을 저들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지명해 불러내신 것입니다.

사안(事案)의 성격이 이렇게 중차대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가나안 땅에 들어 온 아브람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땅에 기근이 임하게 되자 지체 없이 양식을 위해 애굽 행을 시도합니다. 어찌 보면 믿음의 정상에서 불신의 나락으로 한 순간에 추락하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선 줄로 알면 그 순간 이내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고전10:12). 매사에 하나님의 인도와 다스림을 적극 의지하지 않는다면 사단의 집요한 미혹과 총력적인 공격으로 언제 쓰러질는지 모르는 것이 성도들이 직면하고 있는 영적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적 삶의 특징은 자신의 무능과 무력 및 무지를 절감하는 가운데 범사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다스림을 적극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일반적인 증언입니다(잠3:6).
본문에서 기근이 어떤 성격을 띠고 주어진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기근은 본질에서 자연재해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흔히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왕상17:1, 대하7:13-14)로, 또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전개시켜 나가시는 과정에서 섭리역사의 방편(창41:25-31)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하여튼 아브람은 성령으로 시작한 믿음의 행보를 이제 다시 육체로 마치려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애굽 행을 결심합니다. 이 과정에서 애굽인들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장받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아내 사래를 누이로 위장시킵니다. 아내의 미모(?)를 담보로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려는 파렴치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단순히 불신의 죄를 훨씬 뛰어 넘는 비윤리적인 중죄임에 틀림없습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 부도덕한 범죄행위입니다. 죄성의 영향을 받는 우리의 옛 사람적 성향은 믿음의 줄을 놓게 되면 한 순간에 죄악의 깊은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사례(事例)입니다. 결국 하나의 범죄행위는 또 다른 범죄를 유발시킬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체의 죄는 마음의 생각에서부터 철저히 다스려야 합니다(마5:28).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철저히 쳐서 복종시키는 적극적인 통제와 절제를 통해서 말입니다.

아브람이 모의(謀議)했고 사래가 동조한 사기(詐欺)성의 위장전술로 인해 아브람 일행의 목숨은 일시적으로 보장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크게 환대를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이 사래를 자신의 아내로 삼으려는 데서 문제는 야기됩니다. 염려가 현실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허락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래는 아브라함 언약의 공동 수혜자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아브라함 언약에 명시된 자손언약의 성취는 아브람과 사래가 지속적으로 부부관계를 보존하는 것을 통해 마침내 때가 차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역사의 결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함의합니다(창17:15-16, 19, 21, 창21:1-3). 이런 관점에서 사래는 아브람 이외에 타인의 아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이 사건에 적극 개입하십니다. 창세기 저자는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창12:17)고 부연설명을 함으로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어찌 보면 바로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입니다. 애매하게 받는 형벌이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본질상 죄인인 사실을 감안하면 사래의 연고로 애굽의 바로 왕이 받는 재앙 또한 결코 애매한 것일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상의 사건경위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에게 저들의 실패와 범죄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언약적 은혜(특혜)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소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말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결코 방관하거나 묵과(黙過)하시지 않습니다. 죄의 법정적 성격상 죄책에는 응분의 대가가 반드시 형벌로 지불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언약백성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죄값을 가리켜 언약적 징계 또는 언약적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일례로 남유다왕국의 범죄는 바벨론 침공으로 무려 70년의 긴 세월을 포로로 잡혀가 종살이 하듯 형벌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70년이 차매 예언대로 다시 고토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렘25:8-14). 이 바벨론의 침공과 유다의 멸망사건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건은 언약적 징계와 심판에 해당됩니다. 반면에 70년 후 포로귀환 사건은 다름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언약적 은혜’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이제 동일한 원리에서 아브람의 위장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데 대해 바로는 아브람을 책망하며 그의 파렴치한 행동에 대해 아브람을 불러 공개적으로 부끄러움을 안겨줍니다(창12:18-19). 바로 이 부분이 언약적 징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사태의 전말을 고려한다면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더불어 바로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할 대죄를 저지른 셈입니다. 왕을 속이고 명예를 실추시킨 불경죄의 성립으로 인해 말입니다. 그러나 책망과 창피를 주는 정도로 사태를 일단락 시킬 뿐 아니라, 대신 육축과 은금을 풍성히 주어 보냅니다(창13;2). 이것이 언약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은혜 곧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불신앙적이고 파렴치한 행동까지도 선용하시는 가운데 애굽의 바로 왕을 섭리적으로 간섭하심으로 사태를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반전(反轉)시켜 주십니다. 물론 이런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곡해해 오남용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고의로 무시하면서 자의적으로 행동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경우까지도 선용하실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참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면 사욕(私慾)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고의로 거역하거나 외면하는 일은 본질상 불가능하기에 말입니다. 은혜를 더하려고 결코 죄를 의도적으로 지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롬6:1). 정상적인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을 확립하고 있다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실에 대해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라고 반문합니다. 자원해 죄를 지을 수 있는 성도란 원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구원을 누리는 실제적 삶으로서 거듭난 생명력을 발휘해 살아간다는 것은 궁극적인 목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영화롭게 해 드리는 삶을 부단히 추구한다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말씀을 나날이 깊이 깨닫고 거기에 자신의 삶을 부단히 드려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가능한 신앙인격의 지속적인 성숙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런 애굽에서의 기사회생(起死回生)의 경험이야말로 이후 아브람의 생애 전반에 걸쳐서 그로 하여금 철저히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 계시의존 사색신앙을 발휘함으로 섭리의존 순종신앙에로 나가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강론의 주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선택권 양보’의 문제도 이상의 맥락 속에서 그 본의를 밝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전개

아브람은 애굽에서의 뼈저린 경험을 마음에 깊이 간직한 채 일로 가나안에로 발길을 돌립니다. 마침내 처음 가나안에 들어와 여호와께 단을 쌓았던 벧엘 지역에 이릅니다(창12:7-9). 그리고 그곳에서 여호와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립니다(창13:3-4). 이는 기근으로 인해 애굽 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처음 그의 불신앙적 영성이 다시 회복되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사실은 특별히 소유가 많아짐에 따라 롯과의 동거가 불가능해져 불가피하게 헤어져야 하는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이때 아브람은 장자의 권한에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을 우선적으로 주장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조카 롯에게 양보합니다. 그래서 롯으로 하여금 가축사육의 최적지로서 물이 넉넉한 요단 들을 먼저 선택하도록 허락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요단 들녘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창13:10)고 비유적으로 부연해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람 또한 동일한 상황에서 요단 들녘 같은 장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진대, 어떻게 자신의 선택권을 주저 없이 양보할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런 결단을 가능케 했을까요. 애굽에서의 경험과 관련해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①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확고부동한 인식

사실 아브람의 아비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살 때에 ‘다른 신들을 섬김’으로 우상숭배와 불가피한 관계 속에 머물러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실을 확인시켜 주면서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었다고 지적합니다(수24:2). 이런 사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브람 또한 그의 생애의 전반기에 있어서 아비 데라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살 수 밖에 없었기에 그런 우상 숭배적 분위기를 아주 극복해 살기란 어려웠을 줄 압니다. 당시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선택적인 부르심이 있었고,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해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기꺼이 떠날 수 있었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지적(히11:8)은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가 적극 임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담 안에서 죄인 된 인류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베풀어 주시는 선택적인 은혜가 먼저 임하지 않고서는 스스로 자원해 하나님을 찾을 수도, 알 수도, 믿을 수도, 섬길 수도 없습니다(롬3:10-12). 다 한 가지로 치우쳐 자기 영광과 의를 추구하는 가운데 불신과 우상숭배로 인한 배도의 길을 치달을 뿐입니다(롬1:21-23).

이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자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게 된 것’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꺼이 믿음의 여정 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여정이란 하루아침에 성숙의 정상에 이를 수 없는 법입니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통해 점진적으로 성숙과 성장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는 더더욱 환경과 상황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체질화되고 습관화 된 옛 사람적 기질과 행실들을 쉽게 벗어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앙하면서도 자주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게 됩니다. 믿음의 행보로 가나안 땅까지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와 다스림을 받았던 아브람이 가나안 지경에 기근이 임하자 이내 애굽 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신앙의 초기단계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이런 그의 불신앙적 연약함이 발동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아내 사래를 누이로 속이면서까지 만일의 경우 발생할 수도 있는 생명의 위협에 대비합니다. 사람의 지혜로 자신의 생명과 안위를 보전하겠다는 심사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제까지 보여주었던 하나님을 향한 아브람의 순전한 믿음의 자태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한 순간에 불신의 나락으로 깊이 떨어져 버린 셈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인도와 다스림을 외면하고 사람의 지혜와 지식을 따라 행동하게 될 때 그 결국은 생명이 아니라 사망과 멸망일 뿐입니다(잠16:25, 롬8:5-6). 결과적으로 아브람은 애굽 행의 결말을 통해 이런 실질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사태의 정황상 애굽이라는 대 제국의 왕을 속인 사실은 아무리 정상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중죄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그 일행들의 머리 털 하나까지도 다치지 않게 보전해 주십니다. 게다가 많은 육축과 은금까지 받아 나오게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역전이요 반전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로로 하여금 자신을 속인 아브람을 중죄로 다스리기보다 단지 가벼운 책망으로 일단락 짓고 오히려 후대하는 결과를 초래케 했을까요. 더구나 아브람에게 속임을 당해 사래를 아내로 취하려 했던 바로와 그의 집에는 하나님의 큰 재앙이 내려졌음에 반해 말입니다. 이는 당신의 언약백성을 은혜 가운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아브람 일행을 갈대아 우르지방에서 가나안 지경까지 인도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 애굽의 바로왕까지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관장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거해 준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람은 자신의 실수를 통해 바로 왕에게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역사를 생생하게 목격한 것입니다. 자신을 인도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만사와 만물을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주관해 가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며 확신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경험한 셈입니다. 때문에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바로 왕일지라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서는 일개 피조물로서 그 막강한 권세마저도 퇴색된 채 오직 하나님의 뜻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애굽 행의 실패를 통해 아브람은 바로 이 점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신앙으로 수납했던 것입니다. 창조주이시며 구원자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식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야말로 여호와 신앙의 정수(精髓)와 진정성을 대변해 주는 척도로 기능합니다.

②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

사태의 심각성에 비교해 볼 때, 아브람의 위증(僞證)죄에 대한 바로 왕의 반응은 상상을 불허하는 관용을 베푼 사건입니다. 이 과정에서 아브람은 바로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애굽에서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 만큼이나 아브람에게 강한 신앙적 인식을 갖게 한 부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신실성입니다. 여기서 신실성이란 하나님의 신적 언약과 관련된 내용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세상 가운데 펼쳐 나가실 때 언약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선(先) 언약하시고 때가 차매 후(後) 성취’하시는 방식을 취하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한 치의 오차도 허락지 않으신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때가 차매’(갈4:4, 딤전2:6, 막1:15, 창41:1, 출12:41)란 관용구적인 표현 속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아브람이 애굽 행을 통해 불신앙과 거짓말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앙인의 도리를 바르게 감당하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아브람을 포기하거나 외면치 않으셨습니다. 이는 한 번 언약하신 것을 결코 중도에서 변개(變改)시키거나 취소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속성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만일의 경우 바로에 의해 아브람이 사형을 당한다거나 바로가 사래를 아내로 취한다면 이는 아브람과 맺은 언약이 무효화되거나 취소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람 언약은 더 이상 성취를 향해 진행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거짓말 하시는 분으로 전락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성에 근거해 이를 용납지 않으십니다. 아브람은 바로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적극 구하시고 사래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을 통해 이런 식으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열심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취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니의 속성을 스스로 위반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애굽에서의 뼈아픈 실수를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과 더불어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적극 신앙으로 수납하는 절호의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③아브람의 생애를 언약에 근거해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

다음으로 아브람이 애굽 행의 실패를 통해 얻은 생생한 신앙적 교훈은 자신의 생애가 아브람과 맺어주신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해 철저히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아브람은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관의 정체성이 철저히 ‘계시의존 사색신앙’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섭리의존 순종신앙’으로 표출되어야 함을 확신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아브람은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앞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원하심은 단순히 임기응변식의 돌발적이고 즉흥적인 개입과 간섭이 아니라, 적어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셔서 소위 아브람 언약을 맺어 주셨던 그 언약에 근거해서 자신을 위경으로부터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언약적 신앙 차원에서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시의존 사색신앙이란 다른 말로 언약에 근거한 신앙, 곧 언약신앙을 가리킵니다. 성도들 각인의 생애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과 은혜성에 근거한 신적 언약에 근거해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이를 신앙으로 수납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복 된 삶이요, 세상을 이기는 능력 있는 승리의 삶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해 주시며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면 누가 이를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내어주신 이가 어찌 우리를 중도에서 포기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부성애적인 사랑과 관심과 보호와 인도 속에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며 최후의 승리가 보장된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방식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성도의 현재적 삶의 정황이 고난과 시련가운데 놓여 있을지라도 항상 ‘예와 아멘’으로 수납해야 하는 당위성이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전투하는 현재적 교회 상태는 승리하는 종말론적 교회의 완성을 향해 오늘도 현재 진행 중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8).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이 아닙니다. 지극히 순리적입니다. 지정의(知情意)를 통해 수납되고 발휘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롬10:17, 1:5, 16:26, 약2:17, 26절).

아브람은 애굽 행의 신앙적 실패와 실수를 통해 자신의 생애가 철저하게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과 사래의 생명이 바로의 한껏 격앙된 분노로부터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자신들의 생애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언약 곧 아브라함 언약(창12:1-3)에 근거해 섭리적으로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됩니다.

3. 결론

아브람이 애굽 행에서 겪은 뼈저린 경험은 이후 그의 전 신앙여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자의적이 아니라 계시의존적 곧 언약신앙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해 줍니다. 이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최초의 사건이 다름 아닌 롯과의 결별(訣別) 시 선택권을 롯에게 먼저 양보한 경우입니다(창13:9). 삼촌 된 입장에서 차서(次序)를 따라 아브람이 필요한 땅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 할지라도 항상 죄성으로 말미암는 욕심의 발로가 형제 간에도 얼마든지 불화할 수 있는 요인은 항상 잠재돼 있습니다. 아브람은 이런 일로 인해 골육 간 다툼과 반목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물의 없이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한 선택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양보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해야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보편적인 행동지침이기 때문입니다(빌2:13-14).

그러나 본 사건에서 아브람이 취한 양보적 행동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마땅히 행할 보편적인 행동지침에 근거해 내린 결단이 아닙니다.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결부돼 있습니다. 다름 아닌 언약적 관점입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아브람은 애굽에서의 실패의 경험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 주권성과,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 및 자신의 생애 또한 철저히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 통치되고 있음을 절감해 이를 신앙으로 수납하기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의 계시의존 사색신앙 곧 언약신앙이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한 사건과 관련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비록 아브람이 롯에게 먼저 땅의 선택권을 양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결코 한 치의 부족함도 없이 아브람에게 주어질 것을 믿음으로 확신했다는 사실입니다. 절대 불가능했던 바로의 위협으로부터 자신과 사래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존해 주신 데서 비롯된 제반 하나님의 언약적 요소들이 결정적으로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해 준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브람은 당연히 바로로부터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의 왕권까지도 굴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절대 주권성과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안전하게 바로 왕으로부터 구원받은 사건의 경위를 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런 언약적 확신이 이제 롯과 땅을 선택하는 문제와 관련해 재산상의 막대한 손익(損益)이 결부된 심각한 문제를 앞에 놓고도 태연자약(?)하게 우선권을 조카 롯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 직후, 롯이 멀리 물이 넉넉한 요단 들녘을 택해서 아브람 곁을 떠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다는 듯이 아브람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있을 수도 있는 일말의 아쉬움을 떨쳐 내 주시려는 듯 “너 있는 곳에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고 위로의 말씀으로 확약해 주십니다. 이 말씀에는 문맥상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브라함 언약을 재확인 및 갱신해 주시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롯이 먼저 선택한 땅이 당초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시려고 했던 가나안 땅을 한 치도 선점(先占)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누가 방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누가 변경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새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우리에게도 동일한 원리가 여전히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일은 일체의 신앙적 위경을 이기게 하는 큰 위로와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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