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 !!! 구원사!!!

[스크랩] 아브라함의 시험 속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

하나님아들 2014. 3. 8. 13:54
아브라함의 시험 속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
(창22:1-19)

1. 서론

창세기 21장의 이삭 출생사건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 언약(창12:1-3)의 첫 열매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여자의 후손 언약(창3:15)이 예비적으로 성취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본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서 창세기 저자는 무엇보다도 언약을 신실히 성취하시는 하나님 곧 여호와 하나님(출6:2-8)이심을 적극적으로 소개합니다. 이런 사실은 성경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생명의 도리와 신앙의 준거(準據)로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여호와 신앙의 본질임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내신 계시를 오직 그리고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이유가 이에서 나와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제되지 않거나 그 말씀에 의존하지 않는 한에는 기독교 신앙은 어떤 형식을 통해서라도 결코 정당하게 성립될 수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딤후3:15-17, 요20:30-31, 창2:17, 롬10:2-3, 마7:21-23). 교회를 일컬어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르는 이유 또한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딤전3:15). 유일한 진리로서 성경 말씀의 올바른 해석과 인식 및 이에 따른 적극적인 순종력의 발휘는 교회를 하나님의 통치가 막힘없이 시행되는 천상적 기관으로서 본질에서 곧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이삭의 출생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충만히 계시함으로써 언약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을 시종일관(始終一貫)하게 발휘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언약의 형식을 통해 먼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피조세계의 역사 속에서 주권적으로 섭리해 가십니다. 그래서 정하신 때와 시한이 차면 신실히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성도는 이런 일련의 사실들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성경을 통한 제반의 경험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변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믿음과 자율적 순종의 행동에로 기꺼이 나아가게 함으로서 계시 의존적이고 섭리 의존적인 여호와 중심의 신앙적 동기부여의 원동력이 되게 합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25년(창12:4, 17:1, 21, 21:1-3)만에 자신의 ‘씨’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사건을 현실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상식적인 차원에서 기대했었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전혀 뜻밖의 방식을 통해서 성취된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던 노령의 아브라함과 불임녀인 사라의 태를 통해 약속의 자녀로 이삭이 출생한 것입니다. 실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은 당신의 고유한 방법을 통해서 친히 행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심을 언약 백성들로 하여금 신앙하게 하시는 분임을 본 사건을 통해서 확실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기독교 신앙관이 계시 의존적이고 동시에 섭리 의존적인 토대 위에 성립돼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만물의 존재의 원인이며 만사의 발생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창1:1-31, 요1:1-4, 롬11:36, 히4:12).

따라서 이삭의 출생은 하나님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고도의 수준과 깊은 경지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이는 오래 참으심으로 변치 않는 하나님의 부성애(父性愛)적 사랑의 배려이며 하나님의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적극적 열심의 결실이기도 합니다. 곧 당신의 언약 자손들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이요 은혜의 실질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의 출생을 경험하는 가운데 비로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 그 분의 마음에 합한 수준의 신앙적 깊은 경지에 이르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간섭하심이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수준에까지 올려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우리 됨의 배경에는 이런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어떤 경우라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자애스런 부성애적 사랑과 언약적 통치가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신앙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할 줄 압니다. 이렇게 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동일한 우리의 창조자 하나님 ,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 , 그리고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생애를 선용하심으로 남은 구속의 경륜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성취해 가시는 섭리자 하나님으로 믿고 섬길 수가 있게 됩니다. 성도의 구속사적 존재 의미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야 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전12:13).

2. 전개

그런데 이게 웬 말입니까? 창22장에서 하나님은 100세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자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본 장에 소개된 이삭의 번제요구 사건은 그의 출생의 경이로움과 더불어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못 불가사의하기까지 합니다. 25년 만에 주신 언약의 계승자요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그것도 이제는 십 대의 소년으로 자란 즈음에 불살라 번제물로 바치라니 말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임을 본 장 서두에 이미 밝힙니다(창22:1). 따라서 본 시험의 성격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삭을 죽여 번제물로 받으시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데 있습니다. 우리는 본 사건이 전개되는 내용을 통해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때때로 다가오는 예기치 못한 환난과 고난 및 시련은 불순종에 대한 언약적 채찍일 수도 있겠으나, 동시에 성도의 믿음을 연단해 성숙시키려는 고도로 계산된 하나님의 긍정적이고 의도적인 시험(God's test, not temtation)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라도 결국 성도에게는 신앙의 유익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범사에 감사할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적 요구 속에는 단순한 시험 이상의 구속사적 의미가 담겨 있음을 간파해야 할 줄 압니다. 다시 말해 이삭의 번제 사건에는 내용 속에서 원리적으로 발견되듯이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이라는 원시복음을 통해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포함해서 인류의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실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가 보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이며 예표적으로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①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이삭의 출생 후 십 여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삭은 이제 어엿한 소년으로 자랐습니다. 이때까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진행이나 하나님의 현현하심에 대해 일체 침묵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사역을 중단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정한 섭리적 기간’이 의미 있게 지나는 시기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 정하신 때에 정하신 구속사를 차착 없이 집행해 나가시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감옥에 갇혔던 요셉의 경우, 요셉의 꿈 해석대로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이 정확히 사흘 후에 출감해 복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기억하지 못함으로(창41:23) 요셉은 그 시점 이후 ‘만 이년’(창42:1)간의 섭리적 작정기간 동안을 더 감옥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수년의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기간이 지난 후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기쁨과 경외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실로 여러 해 만에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하나님의 방문은 여느 때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새로운 계시나 약속의 전달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현현이셨습니다. 그것은 청천 하늘에 날 벼락 같은 말씀을 주시기 위한 의도적인 방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내용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삭을 일컬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언급하심으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의 존재가 어떤 가치를 의미하는 지를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설명하십니다(창22:2). 이렇게 말하심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그의 생명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하나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삭은 당시 일백 열 살은 족히 넘었을 노령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의 희망이며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아 있어야 할 오직 한 가지 존재 의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의 신분이라기보다는 아브라함의 분신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신의 생명과 방불한 이삭을 이제 와서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것도 죽여서 번제로 불살라 바치라는 것입니다. 가장 비극적이고 처참한 모습으로 세상에서 데려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볼 때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노아의 보존언약을 통해서도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 것과(창9:4-7), 사람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이교도적 인신제사(人身祭祀)를 적극적으로 금지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바 있습니다(신12:31, 18:10). 이런 내용을 통해 보더라도 여기 하나님의 요구는 본래적인 것이 아닌 의도적 시험 이상의 ‘어떤 특별한 목적이 담긴 계시적 요청’인 사실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던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요구 앞에서 그 처음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여기에 더해 이 하나님의 돌발적(?)이고 강권적이며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강력한 명령 앞에서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적 여유는 단 하루 밤에 불과했습니다(창22:2-3). 나아가 아브라함은 그렇다 치고, 아내 사라의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이 부분에서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인간적 고뇌와 번민, 영적 회의와 갈등의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명령에 대한 이들 부부의 심리적이고 영적인 부정적 반응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적 순종의 결단만을 설명합니다. 이는 아울러 사라의 무언(無言)의 동의를 함축하고 있는 바에 다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서 창세기 저자가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며, 어디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지에 관심의 초점을 맞춰야 하겠습니다. 이는 구원의 은혜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신앙하며 섬기는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 권위와 최고의 규범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 적극적이고 자원하는 실천적 행동이 뒤따라야 함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실례(實例)이며 예증(例證)적인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 본 장에서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번제요구(창22:1-3)는 ‘일차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창15:6)에 대한 아브라함의 자율적 순종의 여부를 확인하시려는 의도성이 내포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근원적으로 창조와 생명의 근본이 된다는 사실을 통해서 모든 성도가 마땅히 좇아야 할 궁극적 관심이며 지고의 가치입니다. 아울러 창세기 저자는 성경의 역사가 철저히 하나님의 구속사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삭의 번제요구 앞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심리적 상태와 변화에 대해 기록하는 일에 의도적으로 지면을 아끼는 것을 통해 저자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요구 앞에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이의(異意)도 없이 기꺼이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신앙적 결단을 소개함으로 오늘날 동일한 구속사적 원리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신앙적 자태가 어떠해야 함을 구체적 사례(事例)를 통해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욥1:21-22, 2:10, 눅17:10).

②시험 속에 담긴 하나님의 본의(本意)

우리가 먼저 분명히 알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은 넘어지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성도의 신앙을 연단하여 정금 같이 나오게 하기 위한 성숙의 기회인 것입니다(욥23:10, 약1:2-4). 이런 의미에서 시편 기자는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된다는 사실과 이로 인해 주의 율례(하나님의 법도와 뜻)를 더욱 깊이 배울 기회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시119:71). 신앙의 여정에서 고난과 시련은 성도가 마땅히 경험하는 필요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세상 임금인 사단이 관장하는 세상 속에 나그네와 행인의 신분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본래적 내용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위에서 아브라함의 시험 속에 담긴 표면적 성격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수혜자에게 요구하시는 자율적 순종의 차원에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지적하고 있는 소위 ‘믿음의 행함’ 말입니다. 따라서 이때의 행함은 믿음의 진위(眞僞)성을 가늠하는 잣대로 작용합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적극적인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이런 하나님의 일차적인 요구에 지혜롭게 대처했습니다. 시험에 승리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 시험 속에 내재된 보다 본질적인 의도하심에 대해 살펴봅니다. 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삭은 필연적으로 죽어야 되며 이삭의 죽음은 스스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파기하신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언약의 상호 불가분의 연속적 특성상 여자의 후손언약을 비롯한 일체의 언약들이 결국은 동반해서 취소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때문에 이런 경우의 가능성은 근원적으로 절대 불가능합니다. 신적 언약의 주권성과 은혜성과 실현성의 특성상, 그리고 창조자 하나님의 절대 불변의 속성상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우리는 처음부터 이삭의 번제 사건은 보다 본질적인 구속사적 의미가 담겨진 계시적 사건임을 암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삭은 번제물로 죽음에 처해지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번제에 담긴 구속사적 계시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삭의 번제사건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암시적으로 내재된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가시적이고 예표적으로 계시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은혜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창3:15)은 ‘약속의 자녀’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만 죄책(罪責)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복음의 비밀 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일찍이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인류 앞에 암시적으로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는 이삭의 번제사건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예표적 사건으로 아브라함에게 제시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생애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해 인도돼 왔음과 이삭은 아브라함 언약의 계승자로서 죽어도 살리실 것이라는 철저한 계시 의존적이고 섭리 의존적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율적이고 필연적인 순종의 마음을 좇아서 이삭을 앞세워 모리아 산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정작 이삭이 번제물로 바쳐지기 직전 다급히(창22:11) 아브라함을 만류하시고 이삭을 대신해 수양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통해 비로소 시험 속에 담긴 대속의 본의와 구속의 방식에 대해 하나님의 심중을 헤아리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들 이삭을 통해 여자의 후손의 실체로 오실 종말론적 구속주를 보다 구체적으로 소망하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요8:56을 통해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이로서 이삭은 사실상 대속물(代贖物)로서 어린양과 인자(人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적으로 예표하는 여자의 후손의 예비적 당사자로 지목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대신해 수양을 번제로 드린 후 그 땅(모리아 산)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고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창22:14). 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해 수양을 준비해 주셨다는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의미적으로 이삭은 죽은 것이나 방불합니다. 때문에 이삭의 생존은 사실상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본질적인 구속사적 관점을 통해 이삭은 종말론적 구속주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는 내용 속에 담긴 본의가 이렇습니다. 이런 계시적 통찰력에 근거해서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여자의 후손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망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번제 사건을 통해 이삭 안에 감춰진 미래의 구세주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봤던 것입니다. 계시의존 사색신앙의 실질이 이런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의 체계와 신학적 원리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의 중심을 헤아릴 수 있는 영적 통찰력과 분별력의 발휘 말입니다. 따라서 모리아 산의 이삭의 번제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는 신약의 갈보리 산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사건과 밀접한 신학적 상응성(相應性)을 갖게 되는 바, 가히 ‘구약의 갈보리’라 일컫기도 합니다.

③시험을 승리로 이끈 배경과 그 결과

이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런 믿음의 결단을 내리게 한 동인(動因)이 무엇인지를 살펴봅니다. 어떻게 청천병력 같은 하나님의 돌발적인 요구에 순순히 응답할 수 있었는지요. 그것은 불변하는 신실한 언약의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의 능력 말입니다. 그 내용인 즉 이렇습니다. 이삭은 25년 만에 주신 언약의 자손이요 약속의 첫 열매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지나온 삶의 족적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자손 언약이 어떤 경위를 통해 마침내 성취되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마치 죽음에서 다시 살아 난 부활의 생명이나 다름없습니다. 생명의 잉태에 관련해서는 죽은 것이나 방불했던 사라의 불임상태와 노년의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으로 태어난 자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초자연적 출생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이 모든 불가능한 여건을 가능케 한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우선하여 약속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신적 기원에 따른 초자연적 사건은 진행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히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증언입니다.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갈 뿐입니다(롬11:36).

이런 이유로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제반 언약들이 지속적으로 성취되어 나갈 유일한 언약적 통로로 기능합니다. 이 말은 이삭이 아니고서는 달리 하나님의 남은 약속이 성취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도 명분을 잃고 무효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기에 후회가 없으십니다(민23:19). 하나님의 언약은 당신의 생명을 담보로 재 확증 되었을 뿐만 아니라(창15:17),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신 까닭에(창22:15-18)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이 일어난다 해도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반의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이삭의 죽음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설령 죽는다 해도 언약성취의 필연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삭은 기필코 살아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언약은 이삭의 죽음으로 취소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사라와 더불어 밤을 지새우며 묵상과 상고 끝에 내린 최종적 결론입니다(창22:3). 곧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신뢰하는 신앙에 근거한 결단 말입니다.

이런 사실의 당위성을 뒷받침 해 주는 내용이 창22:5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같이 간 사환들에게 모리아 산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기다릴 것을 요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린다 해도 다시 살려 주실 것을 언약에 근거한 믿음의 안목으로 내다 봤습니다. 아니 어떤 식으로라도 이삭의 생명은 보존될 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언약에 신실하심이 결코 이삭을 죽음 가운데 방치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 담긴 구속사의 경륜을 꿰뚫어 보는 심오한 영적인 통찰력과 구속사를 해석하는 역사적 안목이 한껏 발휘되는 대목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상황을 신약의 복음의 빛 아래서 해석하면서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음이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8-19)라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계시 의존적인 신앙관에 깊이 접촉돼 있었던 관계로 만일의 경우 이삭의 부활까지도 내다보는 구속사적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크게 권고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을 신뢰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 언약이 지속적으로 이삭을 통해 진행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영적 위기를 고도의 경지에 이르는 신앙적 성숙의 기회로 승화시켜 나갔습니다. 이런 사실은 이삭이 번제로 드릴 어린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아브라함의 답변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이 실제로 이삭대신 어린양을 미리 준비해 주실 것을 아브라함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어린 이삭을 위로하며 격려하기 위한 우회적 답변이었을 뿐입니다. 다음 순간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단 나무 위에 올려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아 아들을 내려찍으려 했습니다. 이삭은 이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막으셨습니다. 황급히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그의 손을 붙잡으셨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때의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긴박했는지를 설명하면서 두 번에 걸쳐 아브라함의 이름을 호명한 사실을 기록합니다(창22:11).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애매히 고난 받는 것을 방관하지 않습니다. 기어이 그 대가를 갚아 주십니다. 성도가 범사에 하나님의 얼굴의 도우심을 잠잠히 바라야 할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눈동자같이 돌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위로가 이에 있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그의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으며, 누구를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지를 확인하셨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백세에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아들 이삭을 얻었지만 그는 그 사건이 의미하는바 계시의 본질을 철저히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첫 열매이며 동시에 차기 언약의 계승자인 사실을 구속사적 안목으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포기될 수 없는 하나님의 차기 언약의 당사자요 유일한 언약적 통로가 됨을 계시적 통찰력으로 분별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삭이 죽는다 해도 다시 살리셔서 지속적으로 언약을 계승해 주실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순전한 믿음으로 의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손길이 그의 전인격을 섭리적으로 간섭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라함의 전폭적인 신뢰와 순종의 믿음을 만족해 하셨습니다. 이에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 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아브라함의 중심을 모르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하심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묘사일 뿐입니다.

곧 이어 하나님께서는 한 수양을 준비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수양으로 이삭을 대신해 번제로 드립니다(창22:13). 이런 사실을 통해 아브라함은 이삭의 번제 사건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의 본의를 비로소 밝히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요구는 단지 믿음의 진위여부만을 가늠해 보려는 단순한 시험의 수준이 아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의 오묘하신 구속의 본의’를 밝히 드러내시려는 계시적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이제 이삭을 대신해 손수 예비하신 한 수양을 번제로 받으심으로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계시 의존적이고 섭리 의존적인 구속사적 신앙관에 깊이 접촉된 사실로 인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시험을 넉넉히 감당했습니다. 나아가 시험 속에 담긴 구속의 도리, 곧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범죄 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시사 받게 된 것입니다. 곧 대속의 방식 말입니다(롬4:25, 3:21-22).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과 구속사적 계시안목은 한층 더 심화되고 확장되는 일대 전환의 국면을 맞게 됩니다. 매사에 철저히 천상적이며 영적인 관점으로의 전환 말입니다. 즉 이삭으로 말미암는 아브라함 언약의 궁극적 성취는 이삭의 실체이며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인 구속주의 대속적 사역으로 말미암을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나아가 이삭으로 인해 천하 만민이 받게 될 복(창22:18, 12:2-3)의 성격 또한 가나안이라는 지상의 제한적 땅에 국한되는 물질적인 축복이 아닌,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천상적 복 곧 죄로부터의 구원인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천상의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기업으로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런 내용을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 언약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성령의 감동으로 밝히 해명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히11:8-16입니다. 본 절에서 저자는 아브라함이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약속의 땅에 거한 삶의 성격을 ‘장막생활’(9절)에 비교합니다. 일시적 나그네와 행인의 삶이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의되는 이유를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곧 천상의 도성을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기술합니다(10절).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식으로 장막과 천상의 도성을 대비시키는 가운데 성경 독자들로 하여금 아브라함 언약의 본질을 모형과 실체를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지상의 일시적인 삶과 천상의 영원한 삶의 대비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 앞에서 언약성취의 현재성에 연연하기보다는 언약의 본질을 파악하는 구속사적 통찰력과 분별력을 한껏 발휘함으로써 믿음의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보다 본질적으로는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이후 아브라함의 남은 생애 속에서 구속사적 계시안목은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고도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적 승리를 만족해하시며 하나님은 재차 나타나십니다(창22:15). 기쁨과 만족의 현현이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이름에 맹세하심으로(16절) 아브라함 언약성취의 확실성을 굳게 보증해 주십니다(16절). 이때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17절)는 표현을 부가시킴으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적대적 대결구도는 결국 이삭의 실체로 오시는 여자의 후손의 종말론적 승리로 마감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본 절에서 ‘문을 얻는다’는 것은 곧 성을 점령해 접수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의 시험사건을 일단락 시킨 후(창22:19) 사라의 사망기사를 소개하는 창23장 사이에 일련의 짧은 기사내용을 삽입시킴으로 장차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의 출생기사를 소개합니다. 이는 앞으로의 창세기 기록 내용과 방향성이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옮겨 갈 것에 대한 기자의 사전 암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시대는 지나가고 바야흐로 이삭의 계시시대가 도래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사는 세상역사 속에서 섭리적 작정의 때를 좇아 차착(差錯)없이 종말론적 성취를 향해 달려갑니다.

3.결론

25년 만에 이삭의 출생을 통해 성취된 아브라함의 자손언약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극명하게 예증하는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언약성취에 대한 하나님의 열심은 어떤 불가사의한 경우라도 이를 극복해 반드시 언약을 실현시킨다는 신학적 명제를 낳습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확증과 신뢰야말로 명실상부한 여호와 신앙의 근거로 작용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사를 선(先) 언약하시고 후(後) 성취하시는 방식에 근거해 역사 속에서 신실히 집행해 가십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어느 누구의 방해와 공작에도 결코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습니다. 오직 섭리적인 작정의 기한이 찰 때 궁극적인 성취만이 있을 뿐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절대 안전하게 보장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삭의 출생은 창3:15의 여자의 후손언약 안에서 비록 본질적 관점에서 예표적이고 모형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실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망케 하는 가운데 주신 여자의 후손의 일차적 당사자로서 특별한 계시의 성격을 띱니다. 갈라디아서 저자는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이런 식의 모형과 원형, 예표와 실체 사이의 상호 불가분의 언약적 관계성과 신학적 상응성의 원리에 입각해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을 그리스도에게 연결시켜 해석합니다(갈3:16). 이는 이삭의 출생과 번제 사건에 내포된 구속사적 성격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성취될 구속사역의 절정을 전망한다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약적 구속계시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은 믿음을 승리로 이끄는 동인이며 원동력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감당키 힘든 믿음의 시험 앞에서 언약계시에 대한 깊고 정확한 통찰력과 분별력의 발휘를 통해 마침내 이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지식이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기회로 작용했습니다. 물론 이런 긴박한 과정 속에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인 손길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전(全) 생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장악돼 섭리적으로 통치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고전15:10). 이때 우리의 힘과 능은 단지 선용될 뿐입니다.

언약계시에 근거한 동일한 신학적 원리 하에서 신약시대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절정을 통해 은혜로 맺어주신 새 언약의 백성들로 존재합니다(렘31:31-34, 겔36:26-28, 37:24-28, 히10:16-18, 눅22:19-20).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새 언약은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모형과 예표로 선포된 일체의 구약언약의 총화이며 궁극적 성취의 성격을 담고 있습니다(마1:1, 22-23절). 이로 보건대 결국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자손과 민족과 나라와 땅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근거해 확약된 새 언약을 통해 총체적으로 성취된 신약의 교회공동체를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입니다. 제사장 나라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친 백성들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신약의 교회는 비록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본질상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의 지상적 임재 방식으로서 그 나라를 적극 표상(表象)하는 유일한 천상적 기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성도들은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과 그 나라에 소속된 자들로서의 천상적 정체성을 뚜렷이 현시하는 가운데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일에 전심으로 경주해야 할 중차대한 사명을 가진 자들로 존재합니다. 이런 자세야말로 모든 시대에 걸쳐 동질의 구속사적 언약 안에서 천상 지향적인 신앙의 동질성을 추구하며 살았던 하나님의 친(親)백성들의 한결 같은 삶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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