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계열간의 투쟁적 사례에 관한 고찰
(창3:15)
1. 들어가면서
창3:15을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관점에서 흔히 여자의 후손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언약은 창1-3장의 언약적 문맥을 통한 내용의 전개상 원시복음의 성격을 띤 은혜언약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신적 언약의 특징 중 하나인 연계성이란 관점에서 접근해 볼 때,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일명 선악과 언약 또는 아담언약)을 위반해 죄인으로 전락해 버린 아담과 하와의 죄책을 여자의 후손을 통해 대속적으로 해결해 주는 방식을 통해,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 곧 진정한 의미의 차별화 된 여자의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건설해 갈 수 있도록 사죄의 길을 열어준 복음의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함의돼 있는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는 단수적이며 동시에 집합적인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관점은 뱀의 후손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이상의 원리 속에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내포돼 있는 두 계열 간에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될 수밖에 없는 첨예한 긴장과 대립 및 충돌과 투쟁적 제반 요소들이 민감하게 교차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미 뱀의 후손의 총수라고 할 수 있는 사단은 천상계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일차 실패해 세상으로 쫓겨난 뼈아픈 경험이 있기에(유6절, 벧후2:4, 사14:12-15, 겔28:13-17, 요12:31, 16:11, 고후4:4, 마4:8, 벧전5:8) 이번에는 우회적인 방식을 통해 더욱 집요하고 간교하게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인 사람들을 미혹해 자기 하수인으로 삼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에 도전할 것입니다(고후11:14-15). 세상 끝날 까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한 뱀의 간계 속에는 천상계에서의 실패를 만회해 보려는 사단의 악의적인 계략이 담겨있는 셈입니다.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격이 사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와 동시에 심판이라는 양극단의 이중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배경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상 창1-3장까지 연속적으로 소개된 일련의 하나님의 언약적 계시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창4장부터 소개되는 아담과 하와의 자녀출산 기록은 표면적으로는 세상역사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취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진행되는 본격적인 구속사의 출발인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본 논고에서 이를 굳이 언약적 구속사라고 언급하는 이유는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세상역사를 무대삼아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선(先)언약/후(後)성취라는 언약의 방식을 도구삼아 진전돼 가기 때문입니다.
2. 펼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세상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는 것과 관련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계열간의 첨예한 투쟁과 대립의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런 사실의 연장선상에서 오늘 날 세상 속에 현존하고 있는 가시적인 교회공동체(유형교회)를 일컬어 전투하는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사실상 이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이미 승패는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최종적으로 종식되지는 않은 상태에서 잠정적인 긴장상태가 지속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만왕의 왕 되신 신분으로 다시 오시는 그날 이 싸움은 마침내 끝을 보게 될 것입니다(마25:41, 46).
①아벨에 대한 가인의 살인사건(창4:8)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습니다. 그리고 감격에 겨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4:1)고 기쁨의 탄성을 발합니다. 가인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얻었다, 낳았다’(I have created)입니다. 다시 말해 하와는 가인의 출산 속에 담긴 본의를 철저히 여자의 후손언약의 일차적 성취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남편 아담은 물론 후손들인 온 인류까지도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시킨 장본인으로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약속해 주신 구속의 은혜가 이처럼 가인의 출생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하와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겠는지요. 다시 말해 하와는 가인의 출생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구원의 길이 성취될 것을 가시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당시의 상황에서 가인은 여자의 후손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담당할 언약계승의 당사자로 여겨질 수 있었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이름까지도 ‘구속자를 낳았다’는 의미가 함의된 가인으로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들의 기쁨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아들 가인은 아담부부가 생각했었던 것처럼 여자의 후손언약의 합당한 계승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가인의 무엇이 아담부부로 하여금 그토록 부정적인 확신을 갖게 했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우리는 가인에 대한 이런 저들의 실망과 후회스런 심정이 가인의 동생 아벨의 이름 속에서 역설적으로 암시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아벨의 이름이 다름 아닌 ‘무의미, 하찮음’이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인에 대한 기대감이 여지없이 무너진데 대한 반작용의 심정이 이런 식으로 아벨의 이름을 통해 표출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가인에 대한 아담부부의 실망과 후회의 심정은 이후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행위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즉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거부당합니다. 이에 극한 시기 질투의 반감을 품게 된 가인은 어느 날 결국 동생 아벨을 들로 불러내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수차 사전 경고를 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가인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인의 저변에는 분노한 감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음을 적절히 다스리지 못하는 데서 온갖 유형의 범죄가 유발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은 일체의 행위의 좌소(座所)로 기능합니다. 분노와 혈기를 다스리는 것과 관련해 잠언기자가 이렇게 교훈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을 통해 율법의 본의를 밝히 해명해 주시는 가운데 살인행위와 분노한 마음을 동질선상에서 해석하고 계심을 봅니다(마5:21-22). 이는 살인행위의 성립이 분노한 마음에서부터 기인하고 있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본 주제를 통해 가인의 살인행위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서 이를 단순히 제사의 열납 유무와 관련한 가인의 시기, 질투 및 분노한 마음의 발로 차원에서만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위의 서론 부분에서 언급한 대로 이 사건이 문맥상 여자의 후손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이 여자의 후손언약과 어떤 식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미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겨 있는 두 계열, 즉 여자의 후손계열과 뱀의 후손계열 간의 지속적인 적대적 투쟁과 극한 대립의 불가피성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창3:15).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빛과 어두움의 첨예한 반목과 긴장관계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엡5:8). 이런 관점에서 가인의 살인사건의 의미를 접근해 보면, 이는 사단이 가인을 미혹해 하수인 곧 뱀의 후손으로 삼아 여자의 후손인 아벨을 제거함으로써 여자의 후손언약이 아벨을 통해 계속해서 성취돼 갈 것을 사전 차단하려는 사단의 고도로 계획된 모종의 책략이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언약의 계승자인 아벨을 죽임으로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원천봉쇄하려는 사단의 적극적이고도 간교한 전술과 전략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절대 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누가 방해할 수 있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어찌 비교될 수 있겠는지요. 사단의 지혜와 능력이 어찌 하나님의 그것을 능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이 말씀은 피조물인 사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아벨의 죽음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이 무효화된 것이 아닙니다. 단절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주권성과 은혜성이라는 신적 언약의 특성상 실현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must)을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4장 말미에 아담부부에게 죽은 아벨을 대신해 셋(허락하다, 주다, granted)을 주신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창4:25).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은 여자의 후손언약을 아담에게서 셋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성취시켜 나갈 수 있는 언약적 구속의 길을 열어주심으로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새롭고 산길’(히10:20)을 예수님의 속죄사역 안에서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이 ‘크신 일’(행2:11)을 이루신 우리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②애굽 왕 바로의 이스라엘 남아 살해명령(출1:15-22)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적대적인 계열간의 극한 투쟁과 대립의 사례는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에 이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의 등극으로 말미암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바로의 압제통치 속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그 대략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1:28)과 노아의 보존언약(창9:1-2, 8-10) 및 아브라함 언약(창12:1-3, 15:13-21) 속에 이미 약속된 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해 가면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출1:1-7). 그러나 이스라엘의 창성함과 강대함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게 되자 상황이 돌변합니다. 이제까지 평화와 공존의 상호호혜 관계가 반목과 경계와 압제의 주종관계로 전락합니다. 새 왕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관점에서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고(國庫)성을 짓는 작업현장의 노역과 각종 육체노동에 이스라엘 민족을 강제동원 시킵니다(출1:8-14).
이스라엘의 민족적 상황이 한 순간에 이렇게 노예처럼 비참한 지경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더욱 번식하고 창성해 갔다고 출애굽기 기자는 기술합니다(출1:12). 언약을 신실히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 애굽인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큰 불안과 위기감을 고조시키게 됩니다. 마침내 새 왕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특단의 조치를 강구합니다. 곧 이스라엘 여인들이 출산 할 때, 히브리 산파로 하여금 남아(男兒)인 경우에는 가차 없이 다 죽이라는 살해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먼 훗날에 유대의 헤롯왕이 장차 ‘유대의 왕’으로 오실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 자신의 왕권에 심한 도전과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두 살 미만의 영아(嬰兒)들을 몰살시키려고 끔찍한 살해명령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마2:16-18). 그런 경우가 지금 애굽 왕 바로에게서 일차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의 이런 잔인한 조치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생육과 번성에서 오는 정치-군사적인 위협의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한 강구책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돼 있는 두 계열간의 극한 투쟁과 적대적 관계에 대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과 동시에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성취되는 현장이요 무대인 사실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 바로 왕에 의해 하달된 이스라엘 남아에 대한 살해명령은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두 세력 간의 적대적인 투쟁과 반목의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성질의 주제입니다. 다시 말해 사단은 창세전부터 집요하게 하나님의 뜻에 대항해 나온 것을 통해 그 후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방해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은 곧 자신의 파멸과 최후를 의미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말입니다(마25:41).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남아를 지속적으로 살해하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여자의 후손계열의 단절과 차단을 재차 목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 이래 이 두 계열 간의 적대적 투쟁과 반목은 훗날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직전에 광야에서 40일 금식 후 마귀로부터 직접 시험을 받으시는 사건을 통해 본격화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후에 이 사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바로를 통해 공격해 오는 사단의 책략을 좌시하지 않으십니다. 적극적으로 이 사건에 개입하십니다. 곧 히브리 산파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바로의 명령을 피해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십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아들이 무사히 출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 하였더이다”(출1:18-19). 바로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깊이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며 동시에 언약적 구속사의 진전이란 관점에서 보면 사단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차 명령을 내립니다. 이번에는 더욱 확실한 조치를 취합니다. 곧 애굽 백성들로 하여금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산에 적극 관여하도록 지시합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남아를 출산하면 이내 나일 강에 던져서 익사시키고 여아를 낳게 되면 살려주라고 말입니다. 이는 겉으로 이스라엘의 생육과 번성을 사전에 차단함으로 자신의 정치-군사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여자의 후손계열을 아예 말살시키려는 고도의 사단적 책략이 숨어있는 조치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이런 바로의 악의적인 조치가 이후 어떻게 진전되었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2장을 시작하면서 이내 모세의 출생과 관련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의 손길을 통해 버려진 하수(河水)로부터 때마침 목욕 차 나온 바로의 공주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돼 애굽 왕실에서 안전하게 보호와 양육을 받게 되었는지를 소상하게 소개합니다(출2:1-10). 출애굽기 기자는 이런 방식으로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이스라엘의 모든 남아들 또한 동일한 원리 하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간섭에 의해 섭리적으로 인도와 보호를 받게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손길이 바로의 지혜와 능력을 압도하심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후에 출애굽기 기자는 이스라엘 남아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 애굽 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 그 명령 또한 지속적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음을 우회적으로 암시해 줍니다(출2:23). 이는 사단의 역사 또한 한시적이며 종말론적 패배를 상징적으로 표상함에 다름 아닙니다. 롬8:38-39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방해를 받을지언정 결코 무효화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생명처럼 소중하게 붙들고 살아가야 할 당위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는 법이고 들음의 내용은 곧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입니다(롬10:17).
③아달랴가 유다 왕족의 씨를 진멸함(왕하11:1-3, 대하22:10-12)
본 사건은 유다의 왕족을 철저히 진멸함으로 황태후 아달랴가 유다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반역적 행위로서 단순한 왕권의 쟁탈차원을 넘어 다윗의 혈통을 단절시킴으로 다윗언약 속에 약속된 다윗왕권의 지속적인 보존과 계승을 차단하려는 사단의 또 다른 계략입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 이래 사단의 미혹은 뱀의 후손계열들을 도구삼아 부단히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채 기회만 있으면 여자의 후손계열을 공략해 오고 있습니다. 특별히 구속계시의 도구로 선용되고 있는 신정국(神政國)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런 상황이 첨예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언약적 구속계시의 점진성의 원리에 입각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참 이스라엘로 그 실체를 드러낸 신약시대의 교회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경험하게 될 사단과의 영적 전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엡6:12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벧전5:8-9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이제 당시 남북 분열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황을 통해 본 사건이 갖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살펴봅니다. 아달랴는 당시 유다의 왕인 여호람의 아내이며 동시에 북 이스라엘 아합 왕의 딸, 곧 이세벨의 딸이기도 합니다. 이세벨은 당시 가나안 북쪽에 위치한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로서 정략적으로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인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 결혼을 합니다(왕상16:19-33). 아합 왕은 이런 식으로 이방여인과 혼인관계를 맺었을 뿐 아니라, 그녀가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들여와 산당을 짓고 공개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적극 가담함으로 국가적 차원의 우상숭배를 도입해 이전 어느 왕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키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이 당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이방나라들 뿐만 아니라 동족 간에도 결혼관계를 통해 정략적으로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화친을 맺는 가운데 아합(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을 정략적으로 혼인을 시켜 사돈관계를 맺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식으로 정치 군사적 안녕을 명분삼아 이방여인과 혼인을 하는 일은 하나님의 신민(神民)으로서 이미 모세 율법에 명시된 금기조항을 고의적으로 위반한 결과가 성립됩니다(신7:1-4). 물론 이런 금기사항은 혼인관계 자체보다 그로 인해 우상숭배로까지 나아감으로 결과적으로 여호와 신앙으로부터 이탈 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임을 성경은 밝히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명백히 확인됩니다. 후에 분열 이스라엘의 멸망의 주된 원인은 다름 아닌 우상숭배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한결 같은 경고요 지적입니다(왕하17:7-8).
이런 방식으로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대에는 이세벨을 통해, 그리고 남 유다 왕 여호람 시대에는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왕비가 되는 것을 통해 바알과 아세라로 특징지어지는 이방의 우상숭배 신앙이 양 국가 전반에 걸쳐 막힘없이 들어와 만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과의 혼인관계를 경계시킨 이유가 바로 이런 사실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비록 손으로 만든 우상을 직접적으로 섬기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해서 마음을 빼앗기고 거기에 착념하게 된다면 이런 자기중심의 욕심과 탐심이 다름 아닌 본질상 우상숭배 죄가 성립된다고 성경은 엄중히 경고합니다(골3:5, 출20:4, 신5:8, 딤전6:9-10).
이런 식의 정략적 혼인관계의 분위기 속에서 유다 왕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아들 여호람이 왕권을 계승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호람은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딸인 아달랴와 혼인을 합니다. 여호람 또한 아합의 집과 방불한 우상숭배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성경은 여호람의 우상숭배의 동기를 아달랴가 아합의 딸인 사실에서 찾습니다(왕하8:17-18). 다시 말해 아달랴는 어미 이세벨로부터 우상숭배에 대한 악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영향을 여호람이 받은 셈입니다. 잠언기자는 유아교육의 필요성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지금 이런 사실이 부정적인 측면에서 이세벨로부터 아달랴에게 전수된 셈입니다. 여호람과 아달랴 사이에 여러 아들과 딸을 두게 됩니다. 후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들을 충동해 여호람의 죄를 물어 남 유다를 공격케 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호람의 말째 아들 아하시야(여호아하스)만 피신을 합니다(대하21:16-17). 얼마 후 하나님의 징계로 여호람이 병사(病死)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아하시야가 여호람의 뒤를 이어 유다 왕위에 오릅니다(대하21:18-20, 22:1). 아하시야 또한 모친 아달랴의 미혹을 받아 악을 행함으로 아합의 집의 길로 행했다고 역대기 기자는 고발합니다(대하22:2-3).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의 악행을 묵과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저들의 비참한 죽음의 종말을 예고해 주셨습니다(왕상21:17-26). 이 일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내정해 주시는 가운데 아합과 이세벨에 속한 자들을 철저히 진멸할 것을 명하십니다(왕하9:1-10). 예후를 아합의 집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예후는 아합과 이세벨 및 저들에 속한 혈육들을 철저히 살육합니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바알 선지자, 숭배자, 제사장들 또한 철저히 진멸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유다 왕 아하시야와 아합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요람이 예후에 의해 함께 살해당합니다(왕하9:21-2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합의 집을 척결한 예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4대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왕위를 계승할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왕하10:30).
이상의 일련의 혁명적 숙청사건 전개 속에서 본 주제인 ‘아달랴의 유다 왕족 진멸사건’ 속에 담긴 본의를 발견해야 할 줄 압니다. 당시 자신의 아들이며 유다의 왕인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예후에 의해 살해당하자 아달랴는 황태후의 자격으로 즉각 죽은 아하시야의 통치권을 접수하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친손자들인 왕세자들을 일거에 진멸합니다. 인륜을 저버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처사입니다. 왕인 아들의 죽음으로 자신의 위상이 위협을 받을 것을 예측하고 정권탈취를 통해 일신상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고도의 정치적인 책략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관점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특별히 다윗 왕가인 남유다의 정체성을 다위언약에 근거해 하나님께서 친히 보존해 주시는 신정왕국이란 사실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왕권의 찬탈이란 표면적 의미를 훨씬 능가하는 보다 깊은 의미가 내포돼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다윗의 혈통을 단절시킴으로 다윗언약에 약속돼 있는 진정한 자손(삼하7:12-13) 곧 여자의 후손의 씨를 진멸하려는 사단의 고도의 술책 말입니다. 지금 남유다의 정체성은 비록 다윗과 솔로몬 통치 때처럼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통일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전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여전히 다윗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신정왕국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열왕기서 기자의 한결 같은 지적입니다. 이런 사실은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내어 줄 것을 약속하시면서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11:36)고 하신 말씀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등불’이란 왕위 또는 왕권을 가리킵니다. 곧 다윗 왕권의 지속적인 보장과 계승 말입니다. 이런 사실의 구체적인 실례(實例)를 본 주제와 관련해 병사(病死)한 여호람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행하는 모든 일들이 아합의 집과 방불했는데 이는 아합의 딸 아달랴를 아내로 맞이한 연고였다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신 이유를 설명하면서 열왕기서 기자는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許)하셨음이더라“(왕하8:19)고 부연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남 유다 왕들의 범죄에 대해서는 ‘언약적 징계’로 다스릴망정 왕권을 아주 빼앗지는 않으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다윗언약이 영원한 언약의 성격을 띠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삼하7:11-17).
다윗언약의 영원성과 관련해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관점이 있습니다. 이는 다윗의 왕권과 왕위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참 다윗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가시적으로 연장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실 다윗의 왕권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시드기야 왕의 통치기에 이르러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략으로 인해 시드기야의 아들들이 저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을 통해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왕하25:1-7, BC586). 더 이상 다윗의 왕조는 지속되지 않습니다. 비록 이후 70년이 지나서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 1차, 2차,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귀환이 이루어짐으로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는 사실상 막을 내립니다(렘25:11-12, 29:10, 30: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왕권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력한 새로운 왕조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로 인해 가나안 지경은 열강들의 정치-군사적 목적의 각축장으로 변모합니다. 이 와중에 역사적 이스라엘은 국가적 정체성을 잃은 채 여러 왕조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 시기를 일컬어 신구약 중간사(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부릅니다. 성경적으로는 말4장에서 마1장까지 거의 400여년에 걸친 계시의 침묵기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잠시 언약의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이중구조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당시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 마저 멸망당한 사건은 유다백성들에게 신학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게 됩니다. 다윗언약에 약속된 다윗왕조의 영원성(삼하7:11-17, 시89:3-4)과 상충되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신학적 고민)? 언약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다윗왕권이 하나님의 계시사 속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본래의 신학적 목적을 고찰하게 될 때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즉 언약의 이중성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예표적 성격을 띠고 일차적으로 실현되고,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로 성취된다는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다윗왕권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장차 도래하실 참 다윗 왕이신 메시아의 사역을 계시하는 모형적 의미를 띤 채 계시의 도구로서의 한시적 기능을 담당했던 것입니다(시110:1).
따라서 다윗언약은 이후 예레미야를 중심으로 이사야와 에스겔 선지자들에 의해 주어진 소위 새 언약의 예언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역사적 이스라엘은 한편으로 다윗언약을 혈통적으로 계승해 나가는 동시에(마1:2-16, 눅3:24-38),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언약관계를 하나님과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렘31:31-34, 겔26-27, 37:24-28, 사9:6-7, 11:1-2, 52:13-15, 53:5-6, 마22:41-46). 다윗언약의 갱신과 확장 및 발전의 의미를 띠면서 말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미래는 가시적인 성전이나 다윗계통의 인간 왕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습니다. 본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공동체와 세우시는 “새 언약”에 초점이 맞춰집니다(눅22:19-20, 렘31:31, 23:5-6). 이 새 언약에 근거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세우실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 의로움”이며, 그는 이스라엘을 “정의와 의로움”으로 다스릴 것이며, “그의 날들에 유다가 구원을 얻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렘23:5-6, 사11:1-2, 9:6-7, 겔37:26-28, 36:26-27). 이 새 언약의 수혜자들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일컬음 받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참 이스라엘 곧 교회공동체입니다(엡2:11-23).
그렇습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합니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단 한번(once and for all)의 속죄로 영원히 죄를 도말해 주십니다(히10:14). 이로 인해 구약의 희생제사는 폐지되고 전적으로 새로운 언약의 시대가 도래 합니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백성이 구성되고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완전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새 언약의 중심에 대제사장 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안에서 하나님과 다시 화목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5:10).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 안에서 구약의 모든 약속들은 동시적으로 성취되기에 이릅니다(눅22:10-20, 24:27, 44절). 이 크신 일을 이루신 우리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하심과 그 절대 주권적인섭리의 역사를 찬양하며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감안해 볼 때 사단은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의 오므리 집안과 시돈의 엣바알 일가를 화친이란 명목으로 통혼케 해서 궁극적으로 유다의 다윗 왕가(여자의 후손)에 아달랴라는 마귀의 자녀(뱀의 후손)를 침투시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모략을 꾀해 왔다는 사실을 넉넉히 짐작하게 됩니다. 마치 ‘곡식 가운데 가리지를 덧뿌린 원수마귀의 악한 소행’처럼 말입니다(마13:24-25).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십니까. 누가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겠는지요. 비록 사단이 아달랴를 충동해 아하시야의 왕자들 곧 다윗의 왕족을 일거에 진멸시키려 시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신 섭리의 손길로 아하시야의 왕자들 중 유일하게 요아스를 절체절명의 위경으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이 일에 쓰임 받은 자가 다름 아닌 죽은 아하시야의 누이요 아비 여호람의 딸인 여호세바(여호사브앗)입니다(왕하11:2, 대하22:10-11). 그런 의미에서 여호세바는 동시에 아달랴의 딸의 신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달랴의 친 딸인지의 여부에 대해 성경은 침묵합니다. 사태의 정황으로 판단할 진대 친 딸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당시의 상황에서 다윗왕조를 도와 친어미에게 반기를 든다는 것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말입니다. 어찌했든 이 사건은 하나님의 극적인 반전의 섭리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어린 모세를 바로의 공주가 구해내 바로의 궁에서 키웠듯이 여호람 왕의 딸이 악한 어미의 손에서 왕손인 조카 요아스를 극적으로 구출해 아달랴가 집권했던 6년 동안을 하나님의 전에서 숨겨서 키우게 됩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여호세바가 당시 성전 제사장인 여호야다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여호람의 딸인 여호세바가 아비나 동생 아하시야처럼 아달랴의 우상숭배적 악행을 답습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일찍부터 배워 익혔기 때문임을 추정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어린 요아스를 보호하시는 일에 여호세바가 선용되었다는 사실로 보건대 하나님의 은혜가 일찍부터 그녀에게 임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이처럼 아달랴에 의한 유다 왕세자들의 살육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야욕에서 빚어진 한 여인의 정권탈취 사건만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에서 여자의 후손이 다윗언약에 근거해 다윗의 혈통을 통해 세상에 출현할 것에 대한 사단의 집요한 방해공작이란 시각에서 해석해야 할 문제입니다. 곧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출애굽사건 직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 왕이 온 이스라엘의 남아를 몰살 내지는 익사시키는 방식으로 여자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실 것을 철저히 방해하려 했음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사단은 아달랴를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다윗의 왕손들을 일거에 살해하는 방식으로 다윗언약에 약속돼 있는 여자의 후손 곧 다윗의 씨를 제거하려 시도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후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달랴에게 반기를 들어 그녀를 축출하고 요아스(즉위 당시 7세, 대하24:1)를 유다의 왕으로 옹립함으로 마침내 6년간의 정치적이고 영적인 암투는 하나님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왕하11:4-21, 대하23:1-21). 이처럼 다윗의 자손에 대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 씨를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이행인 것입니다. 롬8:35-37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런 의미에서 성도의 현세적 생애의 의미는 이미 미래가 승리로 보장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데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천상적 능력을 실질로 경험하며 누린다는 사실이 확증됩니다(히11:38). 복음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④하만에 의한 유다민족의 몰살음모(에3:1-6)
에스더서는 바사제국(페르시아)이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세계열강의 중심세력을 형성하던 시절, 성경적으로는 에스라6장과 7장 사이 즉 스룹바벨에 의해 인도된 첫 번째 바벨론 포로귀환과 에스라에 의해 시도된 두 번째 귀환 사이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비록 본문의 내용에는 하나님이란 언급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본서 전체의 내용 전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역사’라는 주제로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사제국의 아하수에로 왕이 다스리던 때(에1:1), 왕이 아각(아말렉)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여 모든 대신 위에 오르게 합니다(에3:1). 아마 총리자리에 임명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자 왕의 모든 신복들이 왕의 명을 받들어 하만을 볼 때마다 꿇어 절을 합니다. 그러나 유독 유대사람 모르드개 만은 이를 거부합니다. 아마도 하만에 대한 예(禮)를 표함이 단순히 존경의 도를 넘어 신적 경배행위를 강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런 사실은 동료관리가 모르드개의 그런 불손한 행동(?)에 의구심을 가지고 왜 하만에 대해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지 묻는 질문에 ‘자기는 유다인’이라고 답변하는 데서 사태의 전말을 추정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만에게 절하는 문제와 관련해 자신은 유다인이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입장표명입니다. 당시의 관례상 하급관리가 상급관리에게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경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가 자신이 유다인인 사실을 들어 하만에게 절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답변한 배경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그의 투철한 유일신 사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짐작케 합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으로서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사람에게도, 그가 비록 바사제국의 총리신분이라 할지라도 신적경배의 심정을 가지고는 결코 예를 표할 수는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됩니다. 그러자 모르드개에게 질문했던 하급관리가 이 일의 결국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모르드개의 일을 즉각 하만에게 보고됩니다. 하만이 분노를 발합니다. 그러자 그 하급관리는 기회를 타서 모르드개가 유다인인 사실을 부연해 고발합니다. 이는 모르드개만이 아니라 유다인 모두가 결국 하만에 대해 불경(不敬)하고 불손(不遜)한 심정을 갖고 있음을 싸잡아 고발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다시 말해 모르드개의 동료로서 그 하급관리는 이번 일로 인해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다인 전부가 하만에 의해 응분의 처벌을 받게 되기를 내심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 하급관리 또한 하만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마귀에게 속한 자(뱀의 후손)들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향해 강한 적개심을 발동시킵니다. 그런 결과로 모르드개 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유다인 전부를 일시에 살해할 것을 결의합니다(에3:6).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성급하고 부당한 결정이요 처사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모르드개의 신분노출로 인해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말렉 족속들과의 역사적인 오랜 견원지간의 앙숙관계의 앙금이 새삼스럽게 부각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 모르드개 한 사람의 일로 인해 유다인 전부를 몰살하려는 계획은 단순히 역사적인 적대적 관계 이상의 모종의 배후세력이 하만일행을 적극 충동하고 있음을 넉넉히 짐작케 합니다. 이 사건 또한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으로 접근해 볼 때 유다인 전체를 멸절시킴으로 결과적으로 여자의 후손계보를 근절시키려는 사단의 악랄하고 교활한 계교가 담겨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후에 하만은 이 일의 완벽한 성사를 꾀하고자 왕을 설득해 조서를 꾸미고 왕의 반지로 인을 쳐 아달월 십 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도륙하고 진멸할 뿐 아니라 유다인의 전 재산을 탈취할 것을 바사제국 관할 전국 각 도에 하달합니다. 이제 유다인의 목숨은 풍전등화와도 같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집니다. 스스로 구원의 길은 전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요. 지혜와 지식의 부요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사태의 전말을 이미 알고계신 듯 당시의 상황을 선용하심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적으로 주관해 오심을 봅니다. 사태의 배후에서 말입니다. 오늘도 동일한 원리가 여전히 적용되고 있음을 신앙으로 고백해 수납할 수 있음은 고난과 환난 중에도 믿음의 인내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의지함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천상적 능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하만의 계교를 알게 된 모르드개는 서둘러 혈육의 조카인 왕비 에스더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구원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때 모르드개는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계시의존사색신앙관을 발휘함으로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에스더에게 전합니다. 에4:14입니다. ”이때에 만일 네가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다시 말해 모르드개는 현재 유다인들이 처한 생사의 절박한 상황과 관련해 에스더의 왕비 간택사건을 하나님의 섭리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면서 그녀의 도움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드개의 고백 속에서 비록 유다인의 현재적 처지가 바사제국의 속국백성의 신분에 처해있고 하만에 의해 도륙의 위기에 몰려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유다인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확고부동한 믿음의 확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레미야나 에스겔 또는 이사야 선지자들에 의해 이미 예언된 유다민족의 회복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신 말입니다. 때문에 설령 왕비인 에스더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게 될 것’에 대한 모르드개의 확신에 찬 어조 속에서 언약적 구속사를 해석하는 그의 영적 통찰력과 계시적 안목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르드개의 이런 확신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있는 계시의존사색신앙과 섭리의존순종신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한 당시 유다인의 현실을 해석하고 있는 모르드개의 관점과 영적 통찰력은 정확했습니다. 신적 언약의 절대 주권성과 은혜성에 입각해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은 취소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습니다. 성취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신실히 성취하시고자, 그래서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도륙의 위기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만의 계략에 적극 개입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식이 다름 아닌 ‘반전(反轉)의 섭리역사’입니다. 곧 왕비 에스더의 지략에 의해 하만의 악의적인 계략의 전모가 밝히 드러났을 뿐 아니라(에7:4-6),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만이 준비해 둔 나무에 하만이 달려죽게 하는 방식으로 하만의 간악한 범죄행위를 고발해 심판하십니다(에7:9-10).
이 일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를 하만의 자리에 앉힙니다. 자신의 인장을 모르드개에게 넘겨줍니다. 모르드개는 왕의 서기관들을 소집해 하만이 선포한 조서에 맞대응으로 새로운 조서를 반포합니다. 곧 아달월 십 삼일에 하만이 반포한 조서를 따라 유다인을 멸절하려는 자에게 유다인들이 합력해 대응해서 저들을 도륙하고 진멸하며 재산을 탈취하도록 명합니다(에8:11). 이 반전의 드라마(?)에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깊이 관여해 주신 사실은 “모든 민족이 저희(유다민족)를 두려워하여 능히 막을 자가 없었다”는 기자의 설명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됩니다(에9:2). 유다인들은 대적들을 멸하는 과정에서 특히 하만의 열 아들을 도성 수산 궁에서 진멸하였으나 재산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에9:10). 이는 하만의 아들들을 포함해 유다인들의 대적을 진멸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성격을 띠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쟁의 방식을 통해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리적으로 수행하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창15:18하). 본 사건은 이후 유다인들에게 부림절의 기원이 됩니다.
악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사단의 결국은 패망이요 심판에 처해 질뿐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세상 끝 날까지 당신의 백성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만의 유다인 살해음모를 통해 유다인들은 다시 한번 존폐의 위기를 맞습니다. 이는 모르드개를 빙자해 전(全)유다인들에 대한 하만의 개인적이고 민족적인 적대적 감정이 폭발한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하만을 도구삼아 모르드개의 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멸하려 했던 계시적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다윗의 혈통을 단절시키고 결과적으로 여자의 후손의 출현을 차단하려는 고도로 계산된 음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적극 개입하셔서 위기를 반전시켜 주십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로 사태를 역전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본 사건을 살펴보면서 사단의 하수인인 하만의 모략으로부터 유다인들을 보존하심으로 궁극적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을 지속적으로 성취시켜 나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이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으로 말미암는 신적언약의 실현성, 구원의 안전성과 영원성 그리고 언약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단의 종말론적 멸망 등을 섭리적으로 주도해 가심을 본 사건을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생애 깊숙이 개입하셔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우리의 삶을 합력해 인도해 주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수납하게 될 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섭리의존적 신앙관에 깊이 접촉되게 됩니다. 오늘도 임마누엘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찬양하며 경배를 드립니다.
⑤헤롯의 2살 미만 영아 학살명령(마2:13-18)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궤계를 통해 여자의 후손계보를 차단해 말살하려는 사단의 계략을 주권적으로 간섭하셔서 무효화시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인 아기 예수님을 세상 가운데 탄생할 수 있도록 섭리적으로 주관하십니다(렘31:22, 갈4:4). 마태는 이런 사실을 언약적 구속사의 배경 속에서 통찰하는 가운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는 표현을 통해 기술합니다(마1:1). 이는 첫째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아브라함의 씨가 이삭을 통해 이삭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가리킵니다(창12:1-3, 7:21, 갈3:16). 둘째로 아브라함 언약의 갱신이며 발전인 다윗언약 속에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 솔로몬을 통해 솔로몬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더불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삼하7:11-16, 마12:42). 따라서 이 두 언약의 관계는 본질상 연속성을 갖는 것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삭의 후손으로서 동시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 및 시편에 언급된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예표들이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총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가리킵니다(눅24:27, 44절).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고려한다면 사단의 시도는 일단 수포로 돌아간 셈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씨를 제거하려 했던 그 동안의 숱한 계략들이 허사가 된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마침내 세상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결코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사여부가 관련된 절박한 상황이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을 시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번에는 당시 유다의 분봉왕인 헤롯을 충동합니다. 마침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 별을 보고 멀리 동방으로부터 경배 차 찾아온 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참 왕’이 탄생한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마2:1-3). 헤롯은 일순간 권좌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그러나 애써 이를 감추면서 어디서 탄생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미가 선지서를 인용해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에 대해 조언합니다(마2:6, 미5:2). 헤롯은 동방의 박사들을 불러서 아기 왕을 찾으면 자신도 경배하기를 원하니 알려달라고 조용히 부탁합니다.
이즈음에 또 다시 별이 나타나 박사들을 아기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면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그날 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주의 사자의 지시를 받고 박사들은 다른 길로 돌아서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롯은 심히 노한 나머지 동방박사들의 얘기를 참작해 베들레헴과 그 인근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미만의 영아(嬰兒)들을 일제히 몰살하라는 반(反)인륜적인 살해명령을 내립니다. 이 살해명령 또한 겉으로만 보면 권좌의 위협을 느낀 헤롯이 자신의 왕권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하나님의 구속계시와 깊이 연관이 돼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단순한 정쟁(政爭)의 양상인 세속사가 아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이제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언약의 씨’를 향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사단의 적극적인 시도가 일단 ‘사전 저지(沮止)’라는 차원에서 실패하게 되자, 이제는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인 아기 예수님을 향해 직접적으로 공격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발 앞서 이런 위기에 대처하십니다. 헤롯이 살해명령을 내리기에 앞서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해서 이르기를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아기와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잠시 피할 것을 전합니다(마2:13). 이들 요셉 가족의 출애굽 사건은 헤롯이 죽고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의 왕이 된 후에 이루어집니다(마2:19-23). 요셉 일행은 주의 사자의 지시를 따라 베들레헴 지역이 아닌 북쪽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 정착합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여기 갈릴리 나사렛에서의 아기 예수님의 성장배경과 관련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가 세상 가운데 오시기 전 사전공략에 실패하자 직접적으로 아기 예수님을 향해 공격의 화살을 쏘아댑니다. 이때 유다의 분봉왕 헤롯이 사단의 도구로 이용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하심의 손길이 아기 예수님을 애굽으로 피신시켜 이번에도 헤롯의 무자비한 살육으로부터 안전히 생명을 보존시켜 주십니다.
이런 식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창3:15) 속에 예언된 두 계열간의 적대적인 투쟁과 반목관계는 오랜 세월동안 간단없이 이스라엘 역사를 중심으로 세상역사 속에서 첨예하게 대립과 충돌을 반복하는 가운데 마침내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아니고는 결코 지속될 수 없었던 여러 차례의 숨 가쁜 난관과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여곡절을 극복케 하심으로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세상 가운데 보내 주셨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취는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성장에 따른 공생애 사역을 통해 마침내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우리의 죄는 도말될 것이며 이를 믿음으로 수납하는 모든 자들을 죄 없다 하시고 의롭다고 인(印) 쳐 주셔서 구원의 은총을 덧입혀 주실 것입니다. 롬3:21-22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⑥공생애 사역에 앞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님(마4:1-11)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에 앞서 세 번에 걸쳐 사단의 시험을 받으시는 사건에는 몇 가지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첫째는 아담이 사단의 미혹에 빠져 인류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 빠뜨리게 해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한 사건을, 이제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시는 가운데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의 새 생명의 길로 이끄신다는 사실입니다. 곧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실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의 의미 말입니다(롬5:18-19). 특별히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심에 있어서 성령님에 의해 내몰아졌다는 지적은 이 사건이 구속사적인 의의를 가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사실이 전제 될 때 비로소 창1:28 속에 담긴 창조언약으로서 문화명령을 정당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요, 그 결과 당초 계획했던 대로 진정한 여자의 후손들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가 든든히 서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12:28에 기록된 대로 성령을 힙 입어 귀신을 쫓아낸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곧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그 천상적 능력의 발휘라는 선언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가리킨다는 내용이 이런 사실을 명백히 뒷받침 해 줍니다.
둘째는 구약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40년 광양생활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교회(행7:38)의 자격을 가지고 광야에서 40년간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8:2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 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본 문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데스바네아에서의 가나안 정탐사건(미13:1-2, 25-26절)은 가나안을 진격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진위를 가늠해 보려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주어진 선의적인 사건이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정복은 오직 하나님과 그 분이 약속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광야’라고 하는 장소가 갖는 상징적 배경과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동시에 ‘40’일이라고 하는 시험기간에 대한 상징적 의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돼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식으로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연속선상에서 예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40년의 시련의 역사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신명기 말씀(신8:2-3, 16절)에 의지하여 다시금 이와 같은 방식을 재현하심으로 참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들 안에 과거의 실패를 성공으로 회복시키려고 스스로 대표자의 자격으로 마귀의 시험에 참여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이 과정에서 예수님을 향한 사단의 시험은 불가피하게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계열간의 적대적인 투쟁과 반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 시 사단은 헤롯을 충동해 두 살 미만의 영아들을 모조리 살해함으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간악한 음모를 꾀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섭리적인 개입과 간섭하심으로 아기 예수님을 애굽으로 사전에 피신시키심으로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기게 주선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시험하는 본 사건의 개요는 이제까지의 사태와 경우가 좀 다릅니다. 사단이 먼저 접근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단의 시험에로 우정 인도하셨습니다. 정공법을 쓰신 것입니다. 선의적으로 말입니다. 곧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끌게 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공생애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케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즉 성령께서 예수님 안에 충만히 임재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직무를 권세 있게 수행케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심으로 그리스도의 직무를 넉넉히 수행하심으로 과거 아담의 시절부터 시작하여 광야 교회와 이스라엘의 신정왕국 역사를 거치는 동안 늘 일삼아 왔었던 일체의 죄로 인한 불순종의 역사가 새롭게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단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심으로 후에 공생애 사역 중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사역의 의미를 마12;28-29을 통해 분명하게 선언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본 말씀을 상고해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나타난 각종 귀신들에 대한 예수님의 축사(逐邪)사역은 결과적으로 여기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사실에 그 기초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 승리는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사역에로까지 확장됨을 전망케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이곳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을 통해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이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사실을 통해서는 첫 사람 아담이 초래시킨 죄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전자의 순종은 첫 언약의 머리된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는 순종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졌고, 후자의 죽음 역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린 셈입니다.
새 이스라엘, 혹은 참 이스라엘로서 신약교회공동체는 이상의 사실을 생명으로 확실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지상의 가시적인 유형교회(지역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시는 예수님의 중보사역은 실로 위대한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실제와 그 본질적인 의미를 떠나서는 오늘날 가시적인 교회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직무는 교회로 하여금 참 아담, 참 아브라함의 자손, 참 이스라엘, 참 다윗의 아들 및 참 성전이 되게 하신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관심과 애정 및 섬김과 경배의 도리는 그야말로 우리의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바칠만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행20:24).
⑦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롬4:25)
여자의 후손언약의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죄인 아닌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심은 표면적으로는 성전모독 죄와 하나님의 아들을 자청한 불경죄로 말미암습니다. 이 일에 헤롯과 빌라도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합세했습니다(행4:27). 특별히 이 일에 한 때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에 포함되었던 가룟인 유다가 배신해 일조했습니다. 이때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매”라고 기술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관련해 유다가 사단의 하수인으로서 결정적인 일조를 담당했음을 지적합니다(눅22:3-4, 요13:2). 결국 유다의 고발로 예수님은 체포돼 법정에 서게 되고 일단의 무법자들에 의해 마침내 십자가형에 처해집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일단의 무리들은 사단의 적극적인 충동에 깊이 좌우되었음을 문맥을 통해 충분히 확인하게 됩니다. 십자가상에 높이 매어달린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단과 그 졸개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비웃으며 조롱하던 일단의 무리들과 더불어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이제 승리는 자신들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에 예언된 대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 적대적 투쟁사건의 절정을 보게 됩니다. 그동안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미혹사건 이래로 줄기차게 역사 속에서 전개돼 왔던 두 계열간의 극한 투쟁과 대립의 역사가 이제 바야흐로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인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결정적인 고비를 맞는 듯합니다. 그동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순간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을 통해 위기를 승리로 반전시켜 오셨던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간섭하심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뱀의 후손의 머리가 상함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가 상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지 사흘입니다. 사흘 후에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살아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사흘 후에 예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선언하신 예언의 말씀을 좇아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언약 속의 예언과 예수님의 죽음 및 부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다름 아닌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돼 있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사단의 결정적인 패배를 은유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또 한번의 결정적인 반전의 상황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의 반전은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한 번 죽으심으로 영원히 우리의 죄를 도말해 주신 영(永)단번(once and for all)의 구속사역의 의미를 담고 있기에 말입니다.
이제 여자의 후손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성취의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더 이상 사단에 의한 전면전은 불가합니다.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는 치명상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완패(完敗)말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도래할 때까지 승리가 보장된 부분적인 국지전(局地戰)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3. 마치면서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은 선악과 언약(금령법, 창2:17)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구속의 방식을 통해 사면해 주심으로 창조언약으로 맺어 주신 문화명령(창1:28)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감으로, 마침내 당초 의도하신 대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의 핵심사상입니다(엡1:3-6, 마6:9-10, 계21:1, 단2:44-45).
이런 사실로 인해 창4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아담과 하와의 생육과 번성으로 말미암는 인간역사 혹은 세상역사(세속사)의 본질은 자연히 창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을 구체적으로 성취시키려는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출발하게 됩니다. 세속사(世俗史)의 본질이 구속사(救贖史)이며 하나님의 구속사는 세상역사를 현장과 무대삼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진행된다는 원리가 이런 상호 불가분의 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를 통해 설명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일하심'(God is working)의 의미를 담고 있는 역사의 정체성(identity)은 본질에서 하나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 강의안에서 구속사를 언급하면서 언약적구속사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구속사가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될 때 ’선(先)언약-후(後)성취‘라는 언약의 틀을 도구삼아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죄를 구속해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하늘에서 이루신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창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구속사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언약을 구속사 전개의 방편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이후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언약적 구속사를 적극 집행해 가십니다. 이렇게 원시복음으로서 여자의 후손언약으로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하나님의 구속사는 노아의 보존언약을 통해 일차 갱신된 이후에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그리고 다윗언약을 거쳐 예레미야를 위시한 제반 선지자들의 새 언약을 통해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거듭해 마침내 예수님의 성찬식 제정을 통해서 그 의미와 해석이 비로소 구체적으로 확증됩니다(눅22:19-20). 곧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도말해 주심으로 우리를 죄없다하시고 마귀에게 종노릇하던 우리를 구원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로서 새 언약 말입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관련해 그 의미를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죄인이었던 사실은 본질에서 마귀에게 속해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있었음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요일3:8).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장구한 구약의 성격역사 속에서 사단은 여자의 후손언약에 예언된 대로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차단하고 그 씨를 근절시키고자 수많은 하수인들을 동원해 다양한 방식으로 방해공작을 펼쳐왔던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의 주권적인 섭리역사로 사단의 궤계를 무력화시키면서 마침내 예언대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요1:14)은 여자의 후손언약의 일차적 성취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오랜 구속사의 전개 속에서 마침내 ‘때가 차매’(갈4:4) 성령을 통해 여자에게서 아들을 나게 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 주실 예수님(마1:21)을 세상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계열간의 극한 투쟁은 사실상 일단락 된 것에 틀림없습니다. 최종적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공식적인 확인 절차만 남은 셈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자리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때까지 방심은 금물입니다. 아직 국지전 양상을 띠고 사단의 남은 세력들이 호시탐탐 성도들을 표적삼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5:8고후11:14-15). 아직은 깨어 근신하며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춰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대응해야 할 과도기적 상황입니다. 이런 영적 전시체제 하에서 사단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성령 충만을 통해 말씀과 기도로 철저히 무장하는 일 뿐입니다(엡6:12-19).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과 불가분리의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엡5:17-21, 골3:16-17).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4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 하였으리이다”(시119:92).
(창3:15)
1. 들어가면서
창3:15을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관점에서 흔히 여자의 후손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언약은 창1-3장의 언약적 문맥을 통한 내용의 전개상 원시복음의 성격을 띤 은혜언약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신적 언약의 특징 중 하나인 연계성이란 관점에서 접근해 볼 때,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일명 선악과 언약 또는 아담언약)을 위반해 죄인으로 전락해 버린 아담과 하와의 죄책을 여자의 후손을 통해 대속적으로 해결해 주는 방식을 통해,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 곧 진정한 의미의 차별화 된 여자의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건설해 갈 수 있도록 사죄의 길을 열어준 복음의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함의돼 있는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는 단수적이며 동시에 집합적인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관점은 뱀의 후손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이상의 원리 속에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내포돼 있는 두 계열 간에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될 수밖에 없는 첨예한 긴장과 대립 및 충돌과 투쟁적 제반 요소들이 민감하게 교차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미 뱀의 후손의 총수라고 할 수 있는 사단은 천상계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일차 실패해 세상으로 쫓겨난 뼈아픈 경험이 있기에(유6절, 벧후2:4, 사14:12-15, 겔28:13-17, 요12:31, 16:11, 고후4:4, 마4:8, 벧전5:8) 이번에는 우회적인 방식을 통해 더욱 집요하고 간교하게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인 사람들을 미혹해 자기 하수인으로 삼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에 도전할 것입니다(고후11:14-15). 세상 끝날 까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한 뱀의 간계 속에는 천상계에서의 실패를 만회해 보려는 사단의 악의적인 계략이 담겨있는 셈입니다.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격이 사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와 동시에 심판이라는 양극단의 이중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배경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상 창1-3장까지 연속적으로 소개된 일련의 하나님의 언약적 계시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창4장부터 소개되는 아담과 하와의 자녀출산 기록은 표면적으로는 세상역사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취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진행되는 본격적인 구속사의 출발인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본 논고에서 이를 굳이 언약적 구속사라고 언급하는 이유는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세상역사를 무대삼아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선(先)언약/후(後)성취라는 언약의 방식을 도구삼아 진전돼 가기 때문입니다.
2. 펼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세상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는 것과 관련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계열간의 첨예한 투쟁과 대립의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런 사실의 연장선상에서 오늘 날 세상 속에 현존하고 있는 가시적인 교회공동체(유형교회)를 일컬어 전투하는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사실상 이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이미 승패는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최종적으로 종식되지는 않은 상태에서 잠정적인 긴장상태가 지속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만왕의 왕 되신 신분으로 다시 오시는 그날 이 싸움은 마침내 끝을 보게 될 것입니다(마25:41, 46).
①아벨에 대한 가인의 살인사건(창4:8)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습니다. 그리고 감격에 겨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4:1)고 기쁨의 탄성을 발합니다. 가인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얻었다, 낳았다’(I have created)입니다. 다시 말해 하와는 가인의 출산 속에 담긴 본의를 철저히 여자의 후손언약의 일차적 성취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남편 아담은 물론 후손들인 온 인류까지도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시킨 장본인으로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약속해 주신 구속의 은혜가 이처럼 가인의 출생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하와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겠는지요. 다시 말해 하와는 가인의 출생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구원의 길이 성취될 것을 가시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당시의 상황에서 가인은 여자의 후손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담당할 언약계승의 당사자로 여겨질 수 있었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이름까지도 ‘구속자를 낳았다’는 의미가 함의된 가인으로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들의 기쁨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아들 가인은 아담부부가 생각했었던 것처럼 여자의 후손언약의 합당한 계승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가인의 무엇이 아담부부로 하여금 그토록 부정적인 확신을 갖게 했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우리는 가인에 대한 이런 저들의 실망과 후회스런 심정이 가인의 동생 아벨의 이름 속에서 역설적으로 암시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아벨의 이름이 다름 아닌 ‘무의미, 하찮음’이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인에 대한 기대감이 여지없이 무너진데 대한 반작용의 심정이 이런 식으로 아벨의 이름을 통해 표출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가인에 대한 아담부부의 실망과 후회의 심정은 이후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행위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즉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거부당합니다. 이에 극한 시기 질투의 반감을 품게 된 가인은 어느 날 결국 동생 아벨을 들로 불러내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수차 사전 경고를 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가인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인의 저변에는 분노한 감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음을 적절히 다스리지 못하는 데서 온갖 유형의 범죄가 유발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은 일체의 행위의 좌소(座所)로 기능합니다. 분노와 혈기를 다스리는 것과 관련해 잠언기자가 이렇게 교훈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을 통해 율법의 본의를 밝히 해명해 주시는 가운데 살인행위와 분노한 마음을 동질선상에서 해석하고 계심을 봅니다(마5:21-22). 이는 살인행위의 성립이 분노한 마음에서부터 기인하고 있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본 주제를 통해 가인의 살인행위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서 이를 단순히 제사의 열납 유무와 관련한 가인의 시기, 질투 및 분노한 마음의 발로 차원에서만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위의 서론 부분에서 언급한 대로 이 사건이 문맥상 여자의 후손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이 여자의 후손언약과 어떤 식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미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겨 있는 두 계열, 즉 여자의 후손계열과 뱀의 후손계열 간의 지속적인 적대적 투쟁과 극한 대립의 불가피성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창3:15).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빛과 어두움의 첨예한 반목과 긴장관계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엡5:8). 이런 관점에서 가인의 살인사건의 의미를 접근해 보면, 이는 사단이 가인을 미혹해 하수인 곧 뱀의 후손으로 삼아 여자의 후손인 아벨을 제거함으로써 여자의 후손언약이 아벨을 통해 계속해서 성취돼 갈 것을 사전 차단하려는 사단의 고도로 계획된 모종의 책략이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언약의 계승자인 아벨을 죽임으로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원천봉쇄하려는 사단의 적극적이고도 간교한 전술과 전략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절대 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누가 방해할 수 있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어찌 비교될 수 있겠는지요. 사단의 지혜와 능력이 어찌 하나님의 그것을 능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이 말씀은 피조물인 사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아벨의 죽음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이 무효화된 것이 아닙니다. 단절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주권성과 은혜성이라는 신적 언약의 특성상 실현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must)을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4장 말미에 아담부부에게 죽은 아벨을 대신해 셋(허락하다, 주다, granted)을 주신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창4:25).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은 여자의 후손언약을 아담에게서 셋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성취시켜 나갈 수 있는 언약적 구속의 길을 열어주심으로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새롭고 산길’(히10:20)을 예수님의 속죄사역 안에서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이 ‘크신 일’(행2:11)을 이루신 우리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②애굽 왕 바로의 이스라엘 남아 살해명령(출1:15-22)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적대적인 계열간의 극한 투쟁과 대립의 사례는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에 이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의 등극으로 말미암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바로의 압제통치 속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그 대략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1:28)과 노아의 보존언약(창9:1-2, 8-10) 및 아브라함 언약(창12:1-3, 15:13-21) 속에 이미 약속된 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해 가면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출1:1-7). 그러나 이스라엘의 창성함과 강대함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게 되자 상황이 돌변합니다. 이제까지 평화와 공존의 상호호혜 관계가 반목과 경계와 압제의 주종관계로 전락합니다. 새 왕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관점에서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고(國庫)성을 짓는 작업현장의 노역과 각종 육체노동에 이스라엘 민족을 강제동원 시킵니다(출1:8-14).
이스라엘의 민족적 상황이 한 순간에 이렇게 노예처럼 비참한 지경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더욱 번식하고 창성해 갔다고 출애굽기 기자는 기술합니다(출1:12). 언약을 신실히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 애굽인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큰 불안과 위기감을 고조시키게 됩니다. 마침내 새 왕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특단의 조치를 강구합니다. 곧 이스라엘 여인들이 출산 할 때, 히브리 산파로 하여금 남아(男兒)인 경우에는 가차 없이 다 죽이라는 살해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먼 훗날에 유대의 헤롯왕이 장차 ‘유대의 왕’으로 오실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 자신의 왕권에 심한 도전과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두 살 미만의 영아(嬰兒)들을 몰살시키려고 끔찍한 살해명령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마2:16-18). 그런 경우가 지금 애굽 왕 바로에게서 일차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의 이런 잔인한 조치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생육과 번성에서 오는 정치-군사적인 위협의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한 강구책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돼 있는 두 계열간의 극한 투쟁과 적대적 관계에 대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과 동시에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성취되는 현장이요 무대인 사실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 바로 왕에 의해 하달된 이스라엘 남아에 대한 살해명령은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두 세력 간의 적대적인 투쟁과 반목의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성질의 주제입니다. 다시 말해 사단은 창세전부터 집요하게 하나님의 뜻에 대항해 나온 것을 통해 그 후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방해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은 곧 자신의 파멸과 최후를 의미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말입니다(마25:41).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남아를 지속적으로 살해하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여자의 후손계열의 단절과 차단을 재차 목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 이래 이 두 계열 간의 적대적 투쟁과 반목은 훗날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직전에 광야에서 40일 금식 후 마귀로부터 직접 시험을 받으시는 사건을 통해 본격화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후에 이 사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바로를 통해 공격해 오는 사단의 책략을 좌시하지 않으십니다. 적극적으로 이 사건에 개입하십니다. 곧 히브리 산파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바로의 명령을 피해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십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아들이 무사히 출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 하였더이다”(출1:18-19). 바로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깊이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며 동시에 언약적 구속사의 진전이란 관점에서 보면 사단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차 명령을 내립니다. 이번에는 더욱 확실한 조치를 취합니다. 곧 애굽 백성들로 하여금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산에 적극 관여하도록 지시합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남아를 출산하면 이내 나일 강에 던져서 익사시키고 여아를 낳게 되면 살려주라고 말입니다. 이는 겉으로 이스라엘의 생육과 번성을 사전에 차단함으로 자신의 정치-군사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여자의 후손계열을 아예 말살시키려는 고도의 사단적 책략이 숨어있는 조치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이런 바로의 악의적인 조치가 이후 어떻게 진전되었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2장을 시작하면서 이내 모세의 출생과 관련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의 손길을 통해 버려진 하수(河水)로부터 때마침 목욕 차 나온 바로의 공주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돼 애굽 왕실에서 안전하게 보호와 양육을 받게 되었는지를 소상하게 소개합니다(출2:1-10). 출애굽기 기자는 이런 방식으로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이스라엘의 모든 남아들 또한 동일한 원리 하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간섭에 의해 섭리적으로 인도와 보호를 받게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손길이 바로의 지혜와 능력을 압도하심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후에 출애굽기 기자는 이스라엘 남아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 애굽 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 그 명령 또한 지속적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음을 우회적으로 암시해 줍니다(출2:23). 이는 사단의 역사 또한 한시적이며 종말론적 패배를 상징적으로 표상함에 다름 아닙니다. 롬8:38-39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방해를 받을지언정 결코 무효화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생명처럼 소중하게 붙들고 살아가야 할 당위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는 법이고 들음의 내용은 곧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입니다(롬10:17).
③아달랴가 유다 왕족의 씨를 진멸함(왕하11:1-3, 대하22:10-12)
본 사건은 유다의 왕족을 철저히 진멸함으로 황태후 아달랴가 유다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반역적 행위로서 단순한 왕권의 쟁탈차원을 넘어 다윗의 혈통을 단절시킴으로 다윗언약 속에 약속된 다윗왕권의 지속적인 보존과 계승을 차단하려는 사단의 또 다른 계략입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 이래 사단의 미혹은 뱀의 후손계열들을 도구삼아 부단히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채 기회만 있으면 여자의 후손계열을 공략해 오고 있습니다. 특별히 구속계시의 도구로 선용되고 있는 신정국(神政國)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런 상황이 첨예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언약적 구속계시의 점진성의 원리에 입각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참 이스라엘로 그 실체를 드러낸 신약시대의 교회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경험하게 될 사단과의 영적 전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엡6:12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벧전5:8-9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이제 당시 남북 분열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황을 통해 본 사건이 갖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살펴봅니다. 아달랴는 당시 유다의 왕인 여호람의 아내이며 동시에 북 이스라엘 아합 왕의 딸, 곧 이세벨의 딸이기도 합니다. 이세벨은 당시 가나안 북쪽에 위치한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로서 정략적으로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인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 결혼을 합니다(왕상16:19-33). 아합 왕은 이런 식으로 이방여인과 혼인관계를 맺었을 뿐 아니라, 그녀가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들여와 산당을 짓고 공개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적극 가담함으로 국가적 차원의 우상숭배를 도입해 이전 어느 왕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키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이 당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이방나라들 뿐만 아니라 동족 간에도 결혼관계를 통해 정략적으로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화친을 맺는 가운데 아합(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을 정략적으로 혼인을 시켜 사돈관계를 맺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식으로 정치 군사적 안녕을 명분삼아 이방여인과 혼인을 하는 일은 하나님의 신민(神民)으로서 이미 모세 율법에 명시된 금기조항을 고의적으로 위반한 결과가 성립됩니다(신7:1-4). 물론 이런 금기사항은 혼인관계 자체보다 그로 인해 우상숭배로까지 나아감으로 결과적으로 여호와 신앙으로부터 이탈 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임을 성경은 밝히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명백히 확인됩니다. 후에 분열 이스라엘의 멸망의 주된 원인은 다름 아닌 우상숭배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한결 같은 경고요 지적입니다(왕하17:7-8).
이런 방식으로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대에는 이세벨을 통해, 그리고 남 유다 왕 여호람 시대에는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왕비가 되는 것을 통해 바알과 아세라로 특징지어지는 이방의 우상숭배 신앙이 양 국가 전반에 걸쳐 막힘없이 들어와 만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과의 혼인관계를 경계시킨 이유가 바로 이런 사실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비록 손으로 만든 우상을 직접적으로 섬기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해서 마음을 빼앗기고 거기에 착념하게 된다면 이런 자기중심의 욕심과 탐심이 다름 아닌 본질상 우상숭배 죄가 성립된다고 성경은 엄중히 경고합니다(골3:5, 출20:4, 신5:8, 딤전6:9-10).
이런 식의 정략적 혼인관계의 분위기 속에서 유다 왕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아들 여호람이 왕권을 계승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호람은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딸인 아달랴와 혼인을 합니다. 여호람 또한 아합의 집과 방불한 우상숭배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성경은 여호람의 우상숭배의 동기를 아달랴가 아합의 딸인 사실에서 찾습니다(왕하8:17-18). 다시 말해 아달랴는 어미 이세벨로부터 우상숭배에 대한 악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영향을 여호람이 받은 셈입니다. 잠언기자는 유아교육의 필요성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지금 이런 사실이 부정적인 측면에서 이세벨로부터 아달랴에게 전수된 셈입니다. 여호람과 아달랴 사이에 여러 아들과 딸을 두게 됩니다. 후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들을 충동해 여호람의 죄를 물어 남 유다를 공격케 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호람의 말째 아들 아하시야(여호아하스)만 피신을 합니다(대하21:16-17). 얼마 후 하나님의 징계로 여호람이 병사(病死)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아하시야가 여호람의 뒤를 이어 유다 왕위에 오릅니다(대하21:18-20, 22:1). 아하시야 또한 모친 아달랴의 미혹을 받아 악을 행함으로 아합의 집의 길로 행했다고 역대기 기자는 고발합니다(대하22:2-3).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의 악행을 묵과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저들의 비참한 죽음의 종말을 예고해 주셨습니다(왕상21:17-26). 이 일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내정해 주시는 가운데 아합과 이세벨에 속한 자들을 철저히 진멸할 것을 명하십니다(왕하9:1-10). 예후를 아합의 집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예후는 아합과 이세벨 및 저들에 속한 혈육들을 철저히 살육합니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바알 선지자, 숭배자, 제사장들 또한 철저히 진멸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유다 왕 아하시야와 아합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요람이 예후에 의해 함께 살해당합니다(왕하9:21-2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합의 집을 척결한 예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4대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왕위를 계승할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왕하10:30).
이상의 일련의 혁명적 숙청사건 전개 속에서 본 주제인 ‘아달랴의 유다 왕족 진멸사건’ 속에 담긴 본의를 발견해야 할 줄 압니다. 당시 자신의 아들이며 유다의 왕인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예후에 의해 살해당하자 아달랴는 황태후의 자격으로 즉각 죽은 아하시야의 통치권을 접수하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친손자들인 왕세자들을 일거에 진멸합니다. 인륜을 저버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처사입니다. 왕인 아들의 죽음으로 자신의 위상이 위협을 받을 것을 예측하고 정권탈취를 통해 일신상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고도의 정치적인 책략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관점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특별히 다윗 왕가인 남유다의 정체성을 다위언약에 근거해 하나님께서 친히 보존해 주시는 신정왕국이란 사실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왕권의 찬탈이란 표면적 의미를 훨씬 능가하는 보다 깊은 의미가 내포돼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다윗의 혈통을 단절시킴으로 다윗언약에 약속돼 있는 진정한 자손(삼하7:12-13) 곧 여자의 후손의 씨를 진멸하려는 사단의 고도의 술책 말입니다. 지금 남유다의 정체성은 비록 다윗과 솔로몬 통치 때처럼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통일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전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여전히 다윗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신정왕국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열왕기서 기자의 한결 같은 지적입니다. 이런 사실은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내어 줄 것을 약속하시면서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11:36)고 하신 말씀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등불’이란 왕위 또는 왕권을 가리킵니다. 곧 다윗 왕권의 지속적인 보장과 계승 말입니다. 이런 사실의 구체적인 실례(實例)를 본 주제와 관련해 병사(病死)한 여호람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행하는 모든 일들이 아합의 집과 방불했는데 이는 아합의 딸 아달랴를 아내로 맞이한 연고였다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신 이유를 설명하면서 열왕기서 기자는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許)하셨음이더라“(왕하8:19)고 부연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남 유다 왕들의 범죄에 대해서는 ‘언약적 징계’로 다스릴망정 왕권을 아주 빼앗지는 않으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다윗언약이 영원한 언약의 성격을 띠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삼하7:11-17).
다윗언약의 영원성과 관련해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관점이 있습니다. 이는 다윗의 왕권과 왕위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참 다윗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가시적으로 연장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실 다윗의 왕권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시드기야 왕의 통치기에 이르러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략으로 인해 시드기야의 아들들이 저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을 통해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왕하25:1-7, BC586). 더 이상 다윗의 왕조는 지속되지 않습니다. 비록 이후 70년이 지나서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 1차, 2차,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귀환이 이루어짐으로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는 사실상 막을 내립니다(렘25:11-12, 29:10, 30: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왕권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력한 새로운 왕조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로 인해 가나안 지경은 열강들의 정치-군사적 목적의 각축장으로 변모합니다. 이 와중에 역사적 이스라엘은 국가적 정체성을 잃은 채 여러 왕조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 시기를 일컬어 신구약 중간사(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부릅니다. 성경적으로는 말4장에서 마1장까지 거의 400여년에 걸친 계시의 침묵기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잠시 언약의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이중구조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당시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 마저 멸망당한 사건은 유다백성들에게 신학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게 됩니다. 다윗언약에 약속된 다윗왕조의 영원성(삼하7:11-17, 시89:3-4)과 상충되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신학적 고민)? 언약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다윗왕권이 하나님의 계시사 속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본래의 신학적 목적을 고찰하게 될 때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즉 언약의 이중성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예표적 성격을 띠고 일차적으로 실현되고,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로 성취된다는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다윗왕권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장차 도래하실 참 다윗 왕이신 메시아의 사역을 계시하는 모형적 의미를 띤 채 계시의 도구로서의 한시적 기능을 담당했던 것입니다(시110:1).
따라서 다윗언약은 이후 예레미야를 중심으로 이사야와 에스겔 선지자들에 의해 주어진 소위 새 언약의 예언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역사적 이스라엘은 한편으로 다윗언약을 혈통적으로 계승해 나가는 동시에(마1:2-16, 눅3:24-38),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언약관계를 하나님과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렘31:31-34, 겔26-27, 37:24-28, 사9:6-7, 11:1-2, 52:13-15, 53:5-6, 마22:41-46). 다윗언약의 갱신과 확장 및 발전의 의미를 띠면서 말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미래는 가시적인 성전이나 다윗계통의 인간 왕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습니다. 본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공동체와 세우시는 “새 언약”에 초점이 맞춰집니다(눅22:19-20, 렘31:31, 23:5-6). 이 새 언약에 근거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세우실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 의로움”이며, 그는 이스라엘을 “정의와 의로움”으로 다스릴 것이며, “그의 날들에 유다가 구원을 얻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렘23:5-6, 사11:1-2, 9:6-7, 겔37:26-28, 36:26-27). 이 새 언약의 수혜자들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일컬음 받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참 이스라엘 곧 교회공동체입니다(엡2:11-23).
그렇습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합니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단 한번(once and for all)의 속죄로 영원히 죄를 도말해 주십니다(히10:14). 이로 인해 구약의 희생제사는 폐지되고 전적으로 새로운 언약의 시대가 도래 합니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백성이 구성되고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완전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새 언약의 중심에 대제사장 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안에서 하나님과 다시 화목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5:10).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 안에서 구약의 모든 약속들은 동시적으로 성취되기에 이릅니다(눅22:10-20, 24:27, 44절). 이 크신 일을 이루신 우리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하심과 그 절대 주권적인섭리의 역사를 찬양하며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감안해 볼 때 사단은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의 오므리 집안과 시돈의 엣바알 일가를 화친이란 명목으로 통혼케 해서 궁극적으로 유다의 다윗 왕가(여자의 후손)에 아달랴라는 마귀의 자녀(뱀의 후손)를 침투시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모략을 꾀해 왔다는 사실을 넉넉히 짐작하게 됩니다. 마치 ‘곡식 가운데 가리지를 덧뿌린 원수마귀의 악한 소행’처럼 말입니다(마13:24-25).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십니까. 누가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겠는지요. 비록 사단이 아달랴를 충동해 아하시야의 왕자들 곧 다윗의 왕족을 일거에 진멸시키려 시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신 섭리의 손길로 아하시야의 왕자들 중 유일하게 요아스를 절체절명의 위경으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이 일에 쓰임 받은 자가 다름 아닌 죽은 아하시야의 누이요 아비 여호람의 딸인 여호세바(여호사브앗)입니다(왕하11:2, 대하22:10-11). 그런 의미에서 여호세바는 동시에 아달랴의 딸의 신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달랴의 친 딸인지의 여부에 대해 성경은 침묵합니다. 사태의 정황으로 판단할 진대 친 딸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당시의 상황에서 다윗왕조를 도와 친어미에게 반기를 든다는 것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말입니다. 어찌했든 이 사건은 하나님의 극적인 반전의 섭리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어린 모세를 바로의 공주가 구해내 바로의 궁에서 키웠듯이 여호람 왕의 딸이 악한 어미의 손에서 왕손인 조카 요아스를 극적으로 구출해 아달랴가 집권했던 6년 동안을 하나님의 전에서 숨겨서 키우게 됩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여호세바가 당시 성전 제사장인 여호야다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여호람의 딸인 여호세바가 아비나 동생 아하시야처럼 아달랴의 우상숭배적 악행을 답습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일찍부터 배워 익혔기 때문임을 추정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어린 요아스를 보호하시는 일에 여호세바가 선용되었다는 사실로 보건대 하나님의 은혜가 일찍부터 그녀에게 임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이처럼 아달랴에 의한 유다 왕세자들의 살육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야욕에서 빚어진 한 여인의 정권탈취 사건만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에서 여자의 후손이 다윗언약에 근거해 다윗의 혈통을 통해 세상에 출현할 것에 대한 사단의 집요한 방해공작이란 시각에서 해석해야 할 문제입니다. 곧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출애굽사건 직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 왕이 온 이스라엘의 남아를 몰살 내지는 익사시키는 방식으로 여자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실 것을 철저히 방해하려 했음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사단은 아달랴를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다윗의 왕손들을 일거에 살해하는 방식으로 다윗언약에 약속돼 있는 여자의 후손 곧 다윗의 씨를 제거하려 시도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후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달랴에게 반기를 들어 그녀를 축출하고 요아스(즉위 당시 7세, 대하24:1)를 유다의 왕으로 옹립함으로 마침내 6년간의 정치적이고 영적인 암투는 하나님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왕하11:4-21, 대하23:1-21). 이처럼 다윗의 자손에 대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 씨를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이행인 것입니다. 롬8:35-37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런 의미에서 성도의 현세적 생애의 의미는 이미 미래가 승리로 보장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데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천상적 능력을 실질로 경험하며 누린다는 사실이 확증됩니다(히11:38). 복음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④하만에 의한 유다민족의 몰살음모(에3:1-6)
에스더서는 바사제국(페르시아)이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세계열강의 중심세력을 형성하던 시절, 성경적으로는 에스라6장과 7장 사이 즉 스룹바벨에 의해 인도된 첫 번째 바벨론 포로귀환과 에스라에 의해 시도된 두 번째 귀환 사이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비록 본문의 내용에는 하나님이란 언급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본서 전체의 내용 전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역사’라는 주제로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사제국의 아하수에로 왕이 다스리던 때(에1:1), 왕이 아각(아말렉)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여 모든 대신 위에 오르게 합니다(에3:1). 아마 총리자리에 임명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자 왕의 모든 신복들이 왕의 명을 받들어 하만을 볼 때마다 꿇어 절을 합니다. 그러나 유독 유대사람 모르드개 만은 이를 거부합니다. 아마도 하만에 대한 예(禮)를 표함이 단순히 존경의 도를 넘어 신적 경배행위를 강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런 사실은 동료관리가 모르드개의 그런 불손한 행동(?)에 의구심을 가지고 왜 하만에 대해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지 묻는 질문에 ‘자기는 유다인’이라고 답변하는 데서 사태의 전말을 추정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만에게 절하는 문제와 관련해 자신은 유다인이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입장표명입니다. 당시의 관례상 하급관리가 상급관리에게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경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가 자신이 유다인인 사실을 들어 하만에게 절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답변한 배경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그의 투철한 유일신 사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짐작케 합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으로서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사람에게도, 그가 비록 바사제국의 총리신분이라 할지라도 신적경배의 심정을 가지고는 결코 예를 표할 수는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됩니다. 그러자 모르드개에게 질문했던 하급관리가 이 일의 결국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모르드개의 일을 즉각 하만에게 보고됩니다. 하만이 분노를 발합니다. 그러자 그 하급관리는 기회를 타서 모르드개가 유다인인 사실을 부연해 고발합니다. 이는 모르드개만이 아니라 유다인 모두가 결국 하만에 대해 불경(不敬)하고 불손(不遜)한 심정을 갖고 있음을 싸잡아 고발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다시 말해 모르드개의 동료로서 그 하급관리는 이번 일로 인해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다인 전부가 하만에 의해 응분의 처벌을 받게 되기를 내심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 하급관리 또한 하만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마귀에게 속한 자(뱀의 후손)들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향해 강한 적개심을 발동시킵니다. 그런 결과로 모르드개 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유다인 전부를 일시에 살해할 것을 결의합니다(에3:6).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성급하고 부당한 결정이요 처사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모르드개의 신분노출로 인해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말렉 족속들과의 역사적인 오랜 견원지간의 앙숙관계의 앙금이 새삼스럽게 부각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 모르드개 한 사람의 일로 인해 유다인 전부를 몰살하려는 계획은 단순히 역사적인 적대적 관계 이상의 모종의 배후세력이 하만일행을 적극 충동하고 있음을 넉넉히 짐작케 합니다. 이 사건 또한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으로 접근해 볼 때 유다인 전체를 멸절시킴으로 결과적으로 여자의 후손계보를 근절시키려는 사단의 악랄하고 교활한 계교가 담겨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후에 하만은 이 일의 완벽한 성사를 꾀하고자 왕을 설득해 조서를 꾸미고 왕의 반지로 인을 쳐 아달월 십 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도륙하고 진멸할 뿐 아니라 유다인의 전 재산을 탈취할 것을 바사제국 관할 전국 각 도에 하달합니다. 이제 유다인의 목숨은 풍전등화와도 같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집니다. 스스로 구원의 길은 전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요. 지혜와 지식의 부요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사태의 전말을 이미 알고계신 듯 당시의 상황을 선용하심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적으로 주관해 오심을 봅니다. 사태의 배후에서 말입니다. 오늘도 동일한 원리가 여전히 적용되고 있음을 신앙으로 고백해 수납할 수 있음은 고난과 환난 중에도 믿음의 인내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의지함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천상적 능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하만의 계교를 알게 된 모르드개는 서둘러 혈육의 조카인 왕비 에스더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구원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때 모르드개는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계시의존사색신앙관을 발휘함으로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에스더에게 전합니다. 에4:14입니다. ”이때에 만일 네가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다시 말해 모르드개는 현재 유다인들이 처한 생사의 절박한 상황과 관련해 에스더의 왕비 간택사건을 하나님의 섭리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면서 그녀의 도움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드개의 고백 속에서 비록 유다인의 현재적 처지가 바사제국의 속국백성의 신분에 처해있고 하만에 의해 도륙의 위기에 몰려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유다인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확고부동한 믿음의 확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레미야나 에스겔 또는 이사야 선지자들에 의해 이미 예언된 유다민족의 회복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신 말입니다. 때문에 설령 왕비인 에스더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게 될 것’에 대한 모르드개의 확신에 찬 어조 속에서 언약적 구속사를 해석하는 그의 영적 통찰력과 계시적 안목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르드개의 이런 확신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있는 계시의존사색신앙과 섭리의존순종신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한 당시 유다인의 현실을 해석하고 있는 모르드개의 관점과 영적 통찰력은 정확했습니다. 신적 언약의 절대 주권성과 은혜성에 입각해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은 취소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습니다. 성취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신실히 성취하시고자, 그래서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도륙의 위기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만의 계략에 적극 개입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식이 다름 아닌 ‘반전(反轉)의 섭리역사’입니다. 곧 왕비 에스더의 지략에 의해 하만의 악의적인 계략의 전모가 밝히 드러났을 뿐 아니라(에7:4-6),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만이 준비해 둔 나무에 하만이 달려죽게 하는 방식으로 하만의 간악한 범죄행위를 고발해 심판하십니다(에7:9-10).
이 일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를 하만의 자리에 앉힙니다. 자신의 인장을 모르드개에게 넘겨줍니다. 모르드개는 왕의 서기관들을 소집해 하만이 선포한 조서에 맞대응으로 새로운 조서를 반포합니다. 곧 아달월 십 삼일에 하만이 반포한 조서를 따라 유다인을 멸절하려는 자에게 유다인들이 합력해 대응해서 저들을 도륙하고 진멸하며 재산을 탈취하도록 명합니다(에8:11). 이 반전의 드라마(?)에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깊이 관여해 주신 사실은 “모든 민족이 저희(유다민족)를 두려워하여 능히 막을 자가 없었다”는 기자의 설명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됩니다(에9:2). 유다인들은 대적들을 멸하는 과정에서 특히 하만의 열 아들을 도성 수산 궁에서 진멸하였으나 재산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에9:10). 이는 하만의 아들들을 포함해 유다인들의 대적을 진멸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성격을 띠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쟁의 방식을 통해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리적으로 수행하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창15:18하). 본 사건은 이후 유다인들에게 부림절의 기원이 됩니다.
악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사단의 결국은 패망이요 심판에 처해 질뿐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세상 끝 날까지 당신의 백성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만의 유다인 살해음모를 통해 유다인들은 다시 한번 존폐의 위기를 맞습니다. 이는 모르드개를 빙자해 전(全)유다인들에 대한 하만의 개인적이고 민족적인 적대적 감정이 폭발한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하만을 도구삼아 모르드개의 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멸하려 했던 계시적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다윗의 혈통을 단절시키고 결과적으로 여자의 후손의 출현을 차단하려는 고도로 계산된 음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적극 개입하셔서 위기를 반전시켜 주십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로 사태를 역전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본 사건을 살펴보면서 사단의 하수인인 하만의 모략으로부터 유다인들을 보존하심으로 궁극적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을 지속적으로 성취시켜 나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이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으로 말미암는 신적언약의 실현성, 구원의 안전성과 영원성 그리고 언약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단의 종말론적 멸망 등을 섭리적으로 주도해 가심을 본 사건을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생애 깊숙이 개입하셔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우리의 삶을 합력해 인도해 주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수납하게 될 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섭리의존적 신앙관에 깊이 접촉되게 됩니다. 오늘도 임마누엘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찬양하며 경배를 드립니다.
⑤헤롯의 2살 미만 영아 학살명령(마2:13-18)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궤계를 통해 여자의 후손계보를 차단해 말살하려는 사단의 계략을 주권적으로 간섭하셔서 무효화시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인 아기 예수님을 세상 가운데 탄생할 수 있도록 섭리적으로 주관하십니다(렘31:22, 갈4:4). 마태는 이런 사실을 언약적 구속사의 배경 속에서 통찰하는 가운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는 표현을 통해 기술합니다(마1:1). 이는 첫째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아브라함의 씨가 이삭을 통해 이삭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가리킵니다(창12:1-3, 7:21, 갈3:16). 둘째로 아브라함 언약의 갱신이며 발전인 다윗언약 속에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 솔로몬을 통해 솔로몬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더불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삼하7:11-16, 마12:42). 따라서 이 두 언약의 관계는 본질상 연속성을 갖는 것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삭의 후손으로서 동시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 및 시편에 언급된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예표들이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총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가리킵니다(눅24:27, 44절).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고려한다면 사단의 시도는 일단 수포로 돌아간 셈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씨를 제거하려 했던 그 동안의 숱한 계략들이 허사가 된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마침내 세상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결코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사여부가 관련된 절박한 상황이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을 시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번에는 당시 유다의 분봉왕인 헤롯을 충동합니다. 마침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 별을 보고 멀리 동방으로부터 경배 차 찾아온 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참 왕’이 탄생한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마2:1-3). 헤롯은 일순간 권좌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그러나 애써 이를 감추면서 어디서 탄생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미가 선지서를 인용해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에 대해 조언합니다(마2:6, 미5:2). 헤롯은 동방의 박사들을 불러서 아기 왕을 찾으면 자신도 경배하기를 원하니 알려달라고 조용히 부탁합니다.
이즈음에 또 다시 별이 나타나 박사들을 아기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면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그날 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주의 사자의 지시를 받고 박사들은 다른 길로 돌아서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롯은 심히 노한 나머지 동방박사들의 얘기를 참작해 베들레헴과 그 인근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미만의 영아(嬰兒)들을 일제히 몰살하라는 반(反)인륜적인 살해명령을 내립니다. 이 살해명령 또한 겉으로만 보면 권좌의 위협을 느낀 헤롯이 자신의 왕권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하나님의 구속계시와 깊이 연관이 돼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단순한 정쟁(政爭)의 양상인 세속사가 아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이제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언약의 씨’를 향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사단의 적극적인 시도가 일단 ‘사전 저지(沮止)’라는 차원에서 실패하게 되자, 이제는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인 아기 예수님을 향해 직접적으로 공격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발 앞서 이런 위기에 대처하십니다. 헤롯이 살해명령을 내리기에 앞서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해서 이르기를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아기와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잠시 피할 것을 전합니다(마2:13). 이들 요셉 가족의 출애굽 사건은 헤롯이 죽고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의 왕이 된 후에 이루어집니다(마2:19-23). 요셉 일행은 주의 사자의 지시를 따라 베들레헴 지역이 아닌 북쪽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 정착합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여기 갈릴리 나사렛에서의 아기 예수님의 성장배경과 관련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가 세상 가운데 오시기 전 사전공략에 실패하자 직접적으로 아기 예수님을 향해 공격의 화살을 쏘아댑니다. 이때 유다의 분봉왕 헤롯이 사단의 도구로 이용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하심의 손길이 아기 예수님을 애굽으로 피신시켜 이번에도 헤롯의 무자비한 살육으로부터 안전히 생명을 보존시켜 주십니다.
이런 식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창3:15) 속에 예언된 두 계열간의 적대적인 투쟁과 반목관계는 오랜 세월동안 간단없이 이스라엘 역사를 중심으로 세상역사 속에서 첨예하게 대립과 충돌을 반복하는 가운데 마침내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아니고는 결코 지속될 수 없었던 여러 차례의 숨 가쁜 난관과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여곡절을 극복케 하심으로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세상 가운데 보내 주셨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취는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성장에 따른 공생애 사역을 통해 마침내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우리의 죄는 도말될 것이며 이를 믿음으로 수납하는 모든 자들을 죄 없다 하시고 의롭다고 인(印) 쳐 주셔서 구원의 은총을 덧입혀 주실 것입니다. 롬3:21-22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⑥공생애 사역에 앞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님(마4:1-11)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에 앞서 세 번에 걸쳐 사단의 시험을 받으시는 사건에는 몇 가지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첫째는 아담이 사단의 미혹에 빠져 인류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 빠뜨리게 해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한 사건을, 이제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시는 가운데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의 새 생명의 길로 이끄신다는 사실입니다. 곧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실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의 의미 말입니다(롬5:18-19). 특별히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심에 있어서 성령님에 의해 내몰아졌다는 지적은 이 사건이 구속사적인 의의를 가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사실이 전제 될 때 비로소 창1:28 속에 담긴 창조언약으로서 문화명령을 정당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요, 그 결과 당초 계획했던 대로 진정한 여자의 후손들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가 든든히 서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12:28에 기록된 대로 성령을 힙 입어 귀신을 쫓아낸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곧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그 천상적 능력의 발휘라는 선언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가리킨다는 내용이 이런 사실을 명백히 뒷받침 해 줍니다.
둘째는 구약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40년 광양생활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교회(행7:38)의 자격을 가지고 광야에서 40년간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8:2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 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본 문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데스바네아에서의 가나안 정탐사건(미13:1-2, 25-26절)은 가나안을 진격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진위를 가늠해 보려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주어진 선의적인 사건이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정복은 오직 하나님과 그 분이 약속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광야’라고 하는 장소가 갖는 상징적 배경과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동시에 ‘40’일이라고 하는 시험기간에 대한 상징적 의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돼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식으로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연속선상에서 예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40년의 시련의 역사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신명기 말씀(신8:2-3, 16절)에 의지하여 다시금 이와 같은 방식을 재현하심으로 참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들 안에 과거의 실패를 성공으로 회복시키려고 스스로 대표자의 자격으로 마귀의 시험에 참여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이 과정에서 예수님을 향한 사단의 시험은 불가피하게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계열간의 적대적인 투쟁과 반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 시 사단은 헤롯을 충동해 두 살 미만의 영아들을 모조리 살해함으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간악한 음모를 꾀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섭리적인 개입과 간섭하심으로 아기 예수님을 애굽으로 사전에 피신시키심으로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기게 주선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시험하는 본 사건의 개요는 이제까지의 사태와 경우가 좀 다릅니다. 사단이 먼저 접근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단의 시험에로 우정 인도하셨습니다. 정공법을 쓰신 것입니다. 선의적으로 말입니다. 곧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끌게 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공생애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케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즉 성령께서 예수님 안에 충만히 임재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직무를 권세 있게 수행케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심으로 그리스도의 직무를 넉넉히 수행하심으로 과거 아담의 시절부터 시작하여 광야 교회와 이스라엘의 신정왕국 역사를 거치는 동안 늘 일삼아 왔었던 일체의 죄로 인한 불순종의 역사가 새롭게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단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심으로 후에 공생애 사역 중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사역의 의미를 마12;28-29을 통해 분명하게 선언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본 말씀을 상고해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나타난 각종 귀신들에 대한 예수님의 축사(逐邪)사역은 결과적으로 여기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사실에 그 기초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 승리는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사역에로까지 확장됨을 전망케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이곳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을 통해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이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사실을 통해서는 첫 사람 아담이 초래시킨 죄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전자의 순종은 첫 언약의 머리된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는 순종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졌고, 후자의 죽음 역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린 셈입니다.
새 이스라엘, 혹은 참 이스라엘로서 신약교회공동체는 이상의 사실을 생명으로 확실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지상의 가시적인 유형교회(지역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시는 예수님의 중보사역은 실로 위대한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실제와 그 본질적인 의미를 떠나서는 오늘날 가시적인 교회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직무는 교회로 하여금 참 아담, 참 아브라함의 자손, 참 이스라엘, 참 다윗의 아들 및 참 성전이 되게 하신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관심과 애정 및 섬김과 경배의 도리는 그야말로 우리의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바칠만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행20:24).
⑦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롬4:25)
여자의 후손언약의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죄인 아닌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심은 표면적으로는 성전모독 죄와 하나님의 아들을 자청한 불경죄로 말미암습니다. 이 일에 헤롯과 빌라도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합세했습니다(행4:27). 특별히 이 일에 한 때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에 포함되었던 가룟인 유다가 배신해 일조했습니다. 이때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매”라고 기술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관련해 유다가 사단의 하수인으로서 결정적인 일조를 담당했음을 지적합니다(눅22:3-4, 요13:2). 결국 유다의 고발로 예수님은 체포돼 법정에 서게 되고 일단의 무법자들에 의해 마침내 십자가형에 처해집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일단의 무리들은 사단의 적극적인 충동에 깊이 좌우되었음을 문맥을 통해 충분히 확인하게 됩니다. 십자가상에 높이 매어달린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단과 그 졸개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비웃으며 조롱하던 일단의 무리들과 더불어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이제 승리는 자신들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에 예언된 대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 적대적 투쟁사건의 절정을 보게 됩니다. 그동안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미혹사건 이래로 줄기차게 역사 속에서 전개돼 왔던 두 계열간의 극한 투쟁과 대립의 역사가 이제 바야흐로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인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결정적인 고비를 맞는 듯합니다. 그동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순간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을 통해 위기를 승리로 반전시켜 오셨던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간섭하심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뱀의 후손의 머리가 상함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가 상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지 사흘입니다. 사흘 후에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살아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사흘 후에 예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선언하신 예언의 말씀을 좇아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언약 속의 예언과 예수님의 죽음 및 부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다름 아닌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돼 있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사단의 결정적인 패배를 은유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또 한번의 결정적인 반전의 상황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의 반전은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한 번 죽으심으로 영원히 우리의 죄를 도말해 주신 영(永)단번(once and for all)의 구속사역의 의미를 담고 있기에 말입니다.
이제 여자의 후손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성취의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더 이상 사단에 의한 전면전은 불가합니다.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는 치명상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완패(完敗)말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도래할 때까지 승리가 보장된 부분적인 국지전(局地戰)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3. 마치면서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은 선악과 언약(금령법, 창2:17)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구속의 방식을 통해 사면해 주심으로 창조언약으로 맺어 주신 문화명령(창1:28)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감으로, 마침내 당초 의도하신 대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의 핵심사상입니다(엡1:3-6, 마6:9-10, 계21:1, 단2:44-45).
이런 사실로 인해 창4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아담과 하와의 생육과 번성으로 말미암는 인간역사 혹은 세상역사(세속사)의 본질은 자연히 창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을 구체적으로 성취시키려는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출발하게 됩니다. 세속사(世俗史)의 본질이 구속사(救贖史)이며 하나님의 구속사는 세상역사를 현장과 무대삼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진행된다는 원리가 이런 상호 불가분의 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를 통해 설명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일하심'(God is working)의 의미를 담고 있는 역사의 정체성(identity)은 본질에서 하나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 강의안에서 구속사를 언급하면서 언약적구속사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구속사가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될 때 ’선(先)언약-후(後)성취‘라는 언약의 틀을 도구삼아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죄를 구속해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하늘에서 이루신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창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구속사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언약을 구속사 전개의 방편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이후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언약적 구속사를 적극 집행해 가십니다. 이렇게 원시복음으로서 여자의 후손언약으로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하나님의 구속사는 노아의 보존언약을 통해 일차 갱신된 이후에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그리고 다윗언약을 거쳐 예레미야를 위시한 제반 선지자들의 새 언약을 통해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거듭해 마침내 예수님의 성찬식 제정을 통해서 그 의미와 해석이 비로소 구체적으로 확증됩니다(눅22:19-20). 곧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도말해 주심으로 우리를 죄없다하시고 마귀에게 종노릇하던 우리를 구원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로서 새 언약 말입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관련해 그 의미를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죄인이었던 사실은 본질에서 마귀에게 속해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있었음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요일3:8).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장구한 구약의 성격역사 속에서 사단은 여자의 후손언약에 예언된 대로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차단하고 그 씨를 근절시키고자 수많은 하수인들을 동원해 다양한 방식으로 방해공작을 펼쳐왔던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의 주권적인 섭리역사로 사단의 궤계를 무력화시키면서 마침내 예언대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요1:14)은 여자의 후손언약의 일차적 성취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오랜 구속사의 전개 속에서 마침내 ‘때가 차매’(갈4:4) 성령을 통해 여자에게서 아들을 나게 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 주실 예수님(마1:21)을 세상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계열간의 극한 투쟁은 사실상 일단락 된 것에 틀림없습니다. 최종적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공식적인 확인 절차만 남은 셈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자리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때까지 방심은 금물입니다. 아직 국지전 양상을 띠고 사단의 남은 세력들이 호시탐탐 성도들을 표적삼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5:8고후11:14-15). 아직은 깨어 근신하며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춰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대응해야 할 과도기적 상황입니다. 이런 영적 전시체제 하에서 사단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성령 충만을 통해 말씀과 기도로 철저히 무장하는 일 뿐입니다(엡6:12-19).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과 불가분리의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엡5:17-21, 골3:16-17).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4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 하였으리이다”(시119:92).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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