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의 제정과 교회의 출현
새 언약의 핵심 사상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대속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의 구체적 내용은 예수님께서 친히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또한 저들을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 부활하신다는 사실 속에서 확인됩니다(롬4:25).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을 제정하시기 전, 당신의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는 것과 때를 같이해 의도적으로 십자가의 수난사건을 제자들에게 강조해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함이며, 동시에 십자가 사건 후에 사도들의 복음적 사명의 중요성을 각성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입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 사건을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발설하신 이유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는 발설의 시점을 유의해 살펴봄으로써 본질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어지고 이어 공식적으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직후입니다(마16:16-21). 이런 사실은 교회의 본격적인 출현과 예수님의 수난과는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의 한결 같은 신앙 고백의 내용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실 텐데(마16:16, 엡2:20),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이 먼저 지불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그 천상적 거룩한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는 암시입니다. 후에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서 석별의 정을 나누며 교회를 당부하는 과정에서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교회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보존케 하기 위해 장로들의 교육적 사명의 중요성을 심각히 일깨워 줍니다(행20:17-32). 이때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구속사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교회의 잉태와 출현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대속 사역에 기초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결의에 찬 말씀과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상호 연결시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새 언약의 본질이 다름 아닌 교회공동체를 세상 가운데 공식적으로 출현시키려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며 동시에 예례미야의 새 언약이 약속하고 있는 이스라엘(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렘31:31)은 다름 아닌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공동체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이 중간의 막힌 담을 헐고 한 새 사람, 한 새로운 교회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중보사역으로만 가능합니다(엡2:11-22). 구약의 속죄제사 제도는 바로 이 사실을 지향하는 그림자로서 처음부터 예표적 사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히10:1, 9:10).
그렇습니다. 새 언약의 목표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교회를 세상 가운데 출현케 하기 위한 불가피한 해산의 고통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도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교회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참된 구원은 교회를 바르게 이루는 것을 통해 그 당위성과 진정성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교회에 속해있느냐의 문제는 곧 구원론적인 근거로 작용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지적은 교회의 세속화가 보편화 된 이 시대에 각별히 심사숙고 해봐야 할 명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구원의 꽃이며 열매입니다. 때문에 바른 교회에 속해서 바른 교회를 이뤄야 된다는 명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물론 지상의 지역교회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사단의 공회라 일컬어지는 거짓 교회와 죽은 교회도 존재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계3:1). 그렇다면 바른 교회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종교개혁자들은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고 상고한 끝에 참 된 성경적 교회의 삼대 표지(標識)를 ‘말씀의 순수한 선포’, ‘성례전의 신실한 시행’ 및 ‘권징의 철저한 집행’에 있음을 천명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이 모든 교회적 요소들이 형식만 남아 있고 대부분 본질과 본의가 심히 왜곡돼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과연 이 시대의 교회들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로 서 있는지를 심각히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정녕 우리 중 어느 누구라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는 말씀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누구이겠는지요. 더욱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심이 성경의 총체적 지식의 체계를 좇은 것이 아닌, 그래서 부분을 붙잡고 자기소견에 좋을 대로의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우리의 수고가 무슨 유익이 되겠는지요(롬10:2-3, 마7:21-23). 그런 의미에서 바른 성경적 교회를 이룬다는 명제는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가히 지상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 설교, 전도, 교육, 봉사, 구제 등 제반 교회적 신앙활동들은 한결 같이 바른 교회를 이루기 위한 방편들로 작용합니다. 이때 보다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본질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한 총체적 계시관의 재정립을 통해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실제적 삶의 자세 말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훈시로 그 실체가 시사됐습니다. 이후 교회는 예수님의 새 언약의 구체적 실행인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서 잉태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시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하나님의 강림과 신비로운 공작 및 내주, 교통, 적용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세상 가운데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성령행전으로서 사도행전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복음이 실제화 돼, 성령님의 유기적이고 은닉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자들이 구원을 받으며 이들을 통해 교회가 본격적으로 세워지는 지를 보여주는 결정판입니다. 마16:18에서 약속하신 교회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함축하고 있는 새 언약의 구체적 실현과 시행을 좇아서 이런 식으로 역사 속에서 그 천상적 자태를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천상적 기관입니다. 여기서 교회를 ‘천상적’ 이란 용어로 표현한 것은 그 기원이 영원 전 삼위 하나님의 언약적 협약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며(엡1:4-6, 딤후1:9, 딛1:2), 그 성격 또한 본질적으로 계시의 말씀에 근거해 천상 지향적인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6:33, 골3:1-3, 롬12:1-2). 그렇습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이 처음부터 목표했던 것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교회가 궁극적인 목표였습니다. 참으로 교회는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동시에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십니다(엡1:23). 나아가 성령님의 내주, 교통하시는 역사로 말미암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입니다. 롬11:33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새 언약의 핵심 사상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대속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의 구체적 내용은 예수님께서 친히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또한 저들을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 부활하신다는 사실 속에서 확인됩니다(롬4:25).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을 제정하시기 전, 당신의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는 것과 때를 같이해 의도적으로 십자가의 수난사건을 제자들에게 강조해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함이며, 동시에 십자가 사건 후에 사도들의 복음적 사명의 중요성을 각성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입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 사건을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발설하신 이유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는 발설의 시점을 유의해 살펴봄으로써 본질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어지고 이어 공식적으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직후입니다(마16:16-21). 이런 사실은 교회의 본격적인 출현과 예수님의 수난과는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의 한결 같은 신앙 고백의 내용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실 텐데(마16:16, 엡2:20),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이 먼저 지불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그 천상적 거룩한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는 암시입니다. 후에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서 석별의 정을 나누며 교회를 당부하는 과정에서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교회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보존케 하기 위해 장로들의 교육적 사명의 중요성을 심각히 일깨워 줍니다(행20:17-32). 이때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구속사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교회의 잉태와 출현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대속 사역에 기초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결의에 찬 말씀과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상호 연결시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새 언약의 본질이 다름 아닌 교회공동체를 세상 가운데 공식적으로 출현시키려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며 동시에 예례미야의 새 언약이 약속하고 있는 이스라엘(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렘31:31)은 다름 아닌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공동체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이 중간의 막힌 담을 헐고 한 새 사람, 한 새로운 교회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중보사역으로만 가능합니다(엡2:11-22). 구약의 속죄제사 제도는 바로 이 사실을 지향하는 그림자로서 처음부터 예표적 사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히10:1, 9:10).
그렇습니다. 새 언약의 목표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교회를 세상 가운데 출현케 하기 위한 불가피한 해산의 고통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도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교회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참된 구원은 교회를 바르게 이루는 것을 통해 그 당위성과 진정성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교회에 속해있느냐의 문제는 곧 구원론적인 근거로 작용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지적은 교회의 세속화가 보편화 된 이 시대에 각별히 심사숙고 해봐야 할 명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구원의 꽃이며 열매입니다. 때문에 바른 교회에 속해서 바른 교회를 이뤄야 된다는 명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물론 지상의 지역교회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사단의 공회라 일컬어지는 거짓 교회와 죽은 교회도 존재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계3:1). 그렇다면 바른 교회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종교개혁자들은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고 상고한 끝에 참 된 성경적 교회의 삼대 표지(標識)를 ‘말씀의 순수한 선포’, ‘성례전의 신실한 시행’ 및 ‘권징의 철저한 집행’에 있음을 천명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이 모든 교회적 요소들이 형식만 남아 있고 대부분 본질과 본의가 심히 왜곡돼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과연 이 시대의 교회들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로 서 있는지를 심각히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정녕 우리 중 어느 누구라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는 말씀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누구이겠는지요. 더욱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심이 성경의 총체적 지식의 체계를 좇은 것이 아닌, 그래서 부분을 붙잡고 자기소견에 좋을 대로의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우리의 수고가 무슨 유익이 되겠는지요(롬10:2-3, 마7:21-23). 그런 의미에서 바른 성경적 교회를 이룬다는 명제는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가히 지상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 설교, 전도, 교육, 봉사, 구제 등 제반 교회적 신앙활동들은 한결 같이 바른 교회를 이루기 위한 방편들로 작용합니다. 이때 보다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본질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한 총체적 계시관의 재정립을 통해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실제적 삶의 자세 말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훈시로 그 실체가 시사됐습니다. 이후 교회는 예수님의 새 언약의 구체적 실행인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서 잉태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시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하나님의 강림과 신비로운 공작 및 내주, 교통, 적용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세상 가운데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성령행전으로서 사도행전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복음이 실제화 돼, 성령님의 유기적이고 은닉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자들이 구원을 받으며 이들을 통해 교회가 본격적으로 세워지는 지를 보여주는 결정판입니다. 마16:18에서 약속하신 교회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함축하고 있는 새 언약의 구체적 실현과 시행을 좇아서 이런 식으로 역사 속에서 그 천상적 자태를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천상적 기관입니다. 여기서 교회를 ‘천상적’ 이란 용어로 표현한 것은 그 기원이 영원 전 삼위 하나님의 언약적 협약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며(엡1:4-6, 딤후1:9, 딛1:2), 그 성격 또한 본질적으로 계시의 말씀에 근거해 천상 지향적인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6:33, 골3:1-3, 롬12:1-2). 그렇습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이 처음부터 목표했던 것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교회가 궁극적인 목표였습니다. 참으로 교회는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동시에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십니다(엡1:23). 나아가 성령님의 내주, 교통하시는 역사로 말미암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입니다. 롬11:33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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