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의 관계
1. 들어가면서
우리는 예레미야를 위시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사상이 일차적으로는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시사하고 있으나, 보다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이루어질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의 출현을 전망하고 있음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지자들의 새 언약 또한 처음부터 여타의 언약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고 있었던 이중성을 띠고 주어진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된 구약 언약의 총화인 ‘새 언약’의 경우는 어떨까요? 그 동안 구약역사 속에서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 진행과정을 살펴보는 가운데 각각의 언약들 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확인된 바 있는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구조적 일치성 및 연속성의 원리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도 발견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은 구약의 제반 언약들의 총화인 선지자들의 새 언약의 실체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 확인된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이중구조 및 상호관계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
성경이 시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반적인 개념은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듯이 죽어서 가는 천당내지는 천국의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원천적으로 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신약의 복음서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성격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가 현재적으로 능력 있게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에 모아집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귀로 들을 수 있는 실체가 되어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실제화 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적으로 도래한 이 하나님의 나라를 밭에 감춘 보화와도 같이 찾을 수도 있고, 아주 값진 진주와 같이 살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마13:44-46). 그러나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특징은 천상적 통치권이 이 땅에 보편적으로 역사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적극적으로 이 왕권을 수납해 순종함으로 영생에 이르는 가하면, 누구는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확인할 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현재적으로 도래한 사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축사사역에서 가장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그것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표지입니다(마12:28, 눅11:20).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을 자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실 수 있음은 마귀보다 더 강한 자로 오셔서 귀신의 총수격인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심으로 저를 먼저 결박해 놓으신 사실에 근거합니다(마4:11, 12:29, 요일3:8). 물론 그 외 다른 초자연적 치유사역 또한 구약에 예언 된 메시아적 사역을 보증하는 증거(사35:5-6)로서 메시아의 왕권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특별히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마9:1-8, 막2:1-12)은 다른 치유사건과는 달리 그의 죄를 먼저 사해주시고 이를 확증케 하기 위한 방편으로 후에 중풍병을 치유해 주심으로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신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한결 같이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그 분의 메시아성의 확증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가 권세 있게 그 천상적 권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함으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 도래의 확실성과 사실성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바로 이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그 분의 왕적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린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삶의 현장 속에서 왕의 통치권을 받아 순종하는 천상적 모습이 구체적으로 확인돼야 합니다. 재창조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난 새 인격의 발휘로서 말입니다. 구원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자율적이고 실천적인 삶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본질적으로 은혜의 수납자로 하여금 시혜자의 뜻에 따르려는 자율적 순종을 촉발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잠시 지적한 대로 이런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과 이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수납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어느 경우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거부되고 배척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식의 거부와 배척의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제약을 받습니다. 부인되기도 합니다.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일부 따르는 무리들에게만은 사정이 다릅니다. 예외입니다. 이들에게는 그 나라가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발휘되는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권능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적극 좇습니다. 기꺼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됩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권세 있게 실현되는 대상이고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통해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능력있게 전파됩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증인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들 가운데 현존하는 실체로 기능합니다. 이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천국)는 작은 겨자씨에서 새 들이 깃들만큼의 큰 나무로 자랄 것이며 세상을 그 나라의 천상적 능력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마13:31-33).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메시아 왕국을 현재적으로 도래시키셨습니다. 제자들로 그 나라의 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믿음으로 따르는 제자들에게 붙여진 교회라는 이름은 가견(可見)적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정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어쩌면 본질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이고 현상적으로는 여전히 지상의 지역교회의 모습 속에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가 공존하며, 갖가지 죄의 권세와 역사가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 불가분의 연속적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를 동일시 할 수 없음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둘 사이에 여전히 불연속성의 긴장과 갈등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교회를 통해 가시화 된 천국 = 통치적 개념)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부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국면만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신정적 통치가 비록 예표적이기는 했지만 가시화 됐던 역사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측면에서 세상 역사의 끝에 비로소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왔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아직'(not yet) 오지 않은 것으로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이란 지적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을 말할 때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세상의 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친히 집행하실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포함합니다(마13:39-41, 49-50, 눅21;31). 그 때에 모든 사람이 부활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의인은 복락의 세계로 들어가고 악인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것입니다. 영벌의 지옥과 영생의 천국의 삶으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마25:31-46). 우리는 이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측면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언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눅22:14-18입니다. 그 나라는 유월절의 본질이 온전히 성취되는 나라입니다. 본문의 요지는 땅에서의 유월절을 폐지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유월절 식사를 유보하시겠다는 구속의 도리가 이제 유월절 양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고전5:7)의 대속적 죽음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자인 예표를 폐지하고 실체인 새 언약의 성찬식으로 대체하시는 것입니다. 성찬식의 제정경위가 이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사면해 주시기 위해 기꺼이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만 그 분과 연합돼 죄책의 사면과 구원이 보장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폐지를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으시겠다’(18절)고 다짐하십니다. 16절에서는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을 빌려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본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접근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다시 유월절 식사를 행할 것이며, 아울러 포도주도 마실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제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으로 인해 유월절 규례는 폐지되고 새 언약이 발휘되겠지만 그것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즉각적인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 가운데서는 구원의 역사와 더불어 불의와 불법과 착취와 압제가 공존할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본질적인 의미가 온전히 실현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라는 촉구의 말씀입니다. 사실 유월절에 근거해 성취된 출애굽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애굽의 압제와 노역과 종살이로부터의 구원과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로서 죄로부터의 온전한 자유와 해방 및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은 사실상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라야 비로소 성취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대목은 새롭게 임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18절)에 대한 확실성과 사실성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치유하시는 사건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축사의 능력이 하나님의 손, 즉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능했던 사실을 선언하시면서 이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 사건과 연결시키십니다(눅11:20, 마12:28). 귀신을 축사(逐邪)하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시사하셨듯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가장 확실하고 명백하게 증거하는 사례입니다. 이 외에도 죄를 사하시고(막2:1-12), 천국 복음이 전파되며, 기타 초자연적인 메시아적 치유(마11:5)의 능력을 행하심은 한결 같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의 확증과 이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역사 속에 침노해 들어와 천상적 권세를 발휘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예증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시던 주님께서 이제 공생애 사역의 절정에 즈음해 다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눅22:18). 사건의 전말을 살펴 보건대, 지금 유월절 식사의 자리에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음으로 이미 현재적 도래가 확인된 하나님 나라(통치권)와는 다른 차원, 곧 다른 성격의 하나님 나라를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국면인 미래성 말입니다. 역사의 종말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구속사 진행의 점진적 성격상 속죄사역의 절정에도 불구하고 예비적이고 임시적이며 제한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세상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격을 띠고 도래함으로 최종적이고 완성적이며 최후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왕노릇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사도 요한은 자신의 계시록에서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기술합니다. 체질이 근본적으로 갱신된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권세로 인해 본질이 왜곡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계21:4).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과 아울러 ‘아직’ 실현되지 않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눅17:22-25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인자(人子)의 날로 규정하십니다. 여기서 인자란 구약적 표현으로서(단7:13-14)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오시는 만왕의 왕 되신 영광의 주님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심판의 환상을 통해 인자를 세상 끝 날에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서 추수하는 심판주로 묘사합니다(계14:14-16, 마25:31-33). 따라서 인자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날,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또는 메시아 통치의 시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판의 날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로 보건대 인자의 날의 성격은 성도들에게는 구속의 주님을 영광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만나는 희락의 날이 되겠지만(마24:30-31, 고전1:8), 불신자들에게는 죄를 판단해 영벌에 처하게 하시는 두려운 심판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마25:41-46).
누가는 인자의 날의 도래를 설명하면서 ‘번개의 비침’을 비유로 듭니다(눅17:24). 이는 비단 누가뿐만이 아닙니다. 마태의 소위 종말론장이라 일컫는 마24장에서도 인자의 임함을 설명하면서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7절)고 번개의 비침을 예로 듭니다. 여기서 번개의 비침을 통해 인자의 오심을 설명함은 예수님의 재림의 성격을 범우주적 가시성, 즉각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에 근거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림의 경우와는 근본에서 차이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더 이상 은밀한 중에 오시지 않습니다. 제한된 사람에게만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전 우주적으로 오십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계1:7). 만왕의 왕으로, 영광의 주님으로, 그리고 심판주로 오셔서 세상을 마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그 앞에 모으시고 우편 양과 좌편 염소로 구분하실 것입니다. 우편 양들에게는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해 주실 것입니다. 좌편 염소들은 지옥 형벌에 처해질 것입니다(마25:32-33, 41).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계21:1). 이런 식으로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나라의 미래적 국면을 동시에 증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교회시대는 ’이미‘ 실현된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래서 지금 오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와 중첩되는 과도기적인 기간 속에 위치해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 분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교회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능력을 일면 선취적으로 맛보아 체험하면서도 동시에 영적 긴장과 갈등과 대립의 구도 속에서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6:12).
4.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는 어떤 관계성을 맺고 있을까요.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인 개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권의 시행이라는 측면에서 정의한다면 그 나라의 의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왕으로 그 왕적 권능과 권세를 막힘 없이 발휘하시는 것을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가장 현저하고 명백하게 수납되고 확인되며 발휘된 내용들입니다. 한편 교회란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신앙하는 신앙공동체로서(롬10:9), 성령의 신비한 공작과 연합사역으로 인해 예수님을 머리로 각인의 성도들이 지체로 더해진 신앙적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합니다(고전12:13, 엡1:23, 5:30, 골1:24). 그래서 몸의 각 지체들이 머리의 통제 하에 다양성을 통해 통일된 행동을 나타내 보이듯이 교회공동체 또한 같은 원리 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적극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그 분의 구속받은 백성들의 신앙적 집합체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는 동일한 왕과 동일한 백성의 관계 속에서 왕의 통치권이 가장 권세있게 행사(行使)되는 현장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양자 간 상당한 동질성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질문하시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고백한 이른바 ‘메시아의 비밀’, 또는 ‘메시아의 자기은닉 사상’(마16:16, 20)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실 것을 선포하십니다(18절). 이어서 예수님은 천국열쇠를 교회에게 맡기심으로 천국을 매고 푸는 복음진리의 권한행사를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에게 맡기십니다(19절).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께서 논리적인 사고체계 안에서 교회와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바로 그 사실은 교회와 천국의 두 개념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천국열쇠의 효력은 교회설립에 대한 공표로부터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될 것임을 간파하게 됩니다(18-19절). 다시 말해 바야흐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드러난 ‘메시아의 비밀’로 인해 그때부터 천국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파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이 그 나라의 이르는 열쇠를 소유하고 그 일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즉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하나님에 대한 증거자로서,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에 대한 중계자(agent)로서의 역할을 이어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축복으로 이끄는 문을 열거나 닫는 지식의 열쇠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사도들에게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눅11:52).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인 실례를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의 복음설교를 듣고 하루에 삼 천명이 제자로 더해진 사실(행2:41)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롬1:16). 그리고 이렇게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불러 낸 구원받은 무리들의 집합체를 일컬어 ‘한 새 사람’들의 집합으로서 교회라고 부릅니다(엡2:14-15, 행5:11). 이들이 다름 아닌 천국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런 상호관계와 원리 안에서 교회와 천국(하나님 나라)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성과 연속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 할 수만은 없는 불연속성 내지는 이질성 또한 발견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크고 포괄적인 용어일 뿐 아니라 교회에 포함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교회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는 과정에 놓여 있기에(엡2:22)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대변하거나 현시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요소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양자는 비록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다할지라도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는 곧 교회다’라고 단정하기에는 더 깊은 숙고가 필요할 줄 압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서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과 능력을 힙 입어 신생(新生)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지로 삼고 현재 진행형으로 달려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교회는 구속사 진행 선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가까운 ‘근사치’(approximation)로서 존재하며 가장 신뢰할 만한 하나님 나라의 ‘지방자치기관’(communal)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구성된 교회공동체 - 그것이 비록 부족과 결핍과 불완전함이 여전하다 할지라도 - 속에서 가장 확실하고 현저하게 그 천상적 통치와 권세를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혹자는 교회를 일종의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5. 마치면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곧 믿음 안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로 구성된 교회의 만수(滿數)가 찰 때에 교회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귀속될 것입니다(롬11:25-26). 그 때에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 나라가 교회로 양자가 통일될 것입니다. 동일시 될 것입니다. 오늘날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고난과 긴장과 여러 가지 영적 역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음은 바로 이런 미래적 소망이 우리 앞에 확실히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종말론적 공동체(an eschatological community)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 까닭은 교회가 기독론적인 바탕 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들어가면서
우리는 예레미야를 위시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사상이 일차적으로는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시사하고 있으나, 보다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이루어질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의 출현을 전망하고 있음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지자들의 새 언약 또한 처음부터 여타의 언약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고 있었던 이중성을 띠고 주어진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된 구약 언약의 총화인 ‘새 언약’의 경우는 어떨까요? 그 동안 구약역사 속에서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 진행과정을 살펴보는 가운데 각각의 언약들 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확인된 바 있는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구조적 일치성 및 연속성의 원리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도 발견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은 구약의 제반 언약들의 총화인 선지자들의 새 언약의 실체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 확인된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이중구조 및 상호관계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
성경이 시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반적인 개념은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듯이 죽어서 가는 천당내지는 천국의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원천적으로 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신약의 복음서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성격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가 현재적으로 능력 있게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에 모아집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귀로 들을 수 있는 실체가 되어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실제화 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적으로 도래한 이 하나님의 나라를 밭에 감춘 보화와도 같이 찾을 수도 있고, 아주 값진 진주와 같이 살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마13:44-46). 그러나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특징은 천상적 통치권이 이 땅에 보편적으로 역사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적극적으로 이 왕권을 수납해 순종함으로 영생에 이르는 가하면, 누구는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확인할 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현재적으로 도래한 사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축사사역에서 가장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그것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표지입니다(마12:28, 눅11:20).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을 자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실 수 있음은 마귀보다 더 강한 자로 오셔서 귀신의 총수격인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심으로 저를 먼저 결박해 놓으신 사실에 근거합니다(마4:11, 12:29, 요일3:8). 물론 그 외 다른 초자연적 치유사역 또한 구약에 예언 된 메시아적 사역을 보증하는 증거(사35:5-6)로서 메시아의 왕권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특별히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마9:1-8, 막2:1-12)은 다른 치유사건과는 달리 그의 죄를 먼저 사해주시고 이를 확증케 하기 위한 방편으로 후에 중풍병을 치유해 주심으로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신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한결 같이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그 분의 메시아성의 확증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가 권세 있게 그 천상적 권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함으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 도래의 확실성과 사실성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바로 이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그 분의 왕적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린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삶의 현장 속에서 왕의 통치권을 받아 순종하는 천상적 모습이 구체적으로 확인돼야 합니다. 재창조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난 새 인격의 발휘로서 말입니다. 구원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자율적이고 실천적인 삶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본질적으로 은혜의 수납자로 하여금 시혜자의 뜻에 따르려는 자율적 순종을 촉발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잠시 지적한 대로 이런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과 이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수납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어느 경우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거부되고 배척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식의 거부와 배척의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제약을 받습니다. 부인되기도 합니다.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일부 따르는 무리들에게만은 사정이 다릅니다. 예외입니다. 이들에게는 그 나라가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발휘되는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권능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적극 좇습니다. 기꺼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됩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권세 있게 실현되는 대상이고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통해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능력있게 전파됩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증인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들 가운데 현존하는 실체로 기능합니다. 이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천국)는 작은 겨자씨에서 새 들이 깃들만큼의 큰 나무로 자랄 것이며 세상을 그 나라의 천상적 능력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마13:31-33).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메시아 왕국을 현재적으로 도래시키셨습니다. 제자들로 그 나라의 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믿음으로 따르는 제자들에게 붙여진 교회라는 이름은 가견(可見)적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정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어쩌면 본질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이고 현상적으로는 여전히 지상의 지역교회의 모습 속에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가 공존하며, 갖가지 죄의 권세와 역사가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 불가분의 연속적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를 동일시 할 수 없음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둘 사이에 여전히 불연속성의 긴장과 갈등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교회를 통해 가시화 된 천국 = 통치적 개념)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부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국면만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신정적 통치가 비록 예표적이기는 했지만 가시화 됐던 역사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측면에서 세상 역사의 끝에 비로소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왔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아직'(not yet) 오지 않은 것으로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이란 지적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을 말할 때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세상의 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친히 집행하실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포함합니다(마13:39-41, 49-50, 눅21;31). 그 때에 모든 사람이 부활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의인은 복락의 세계로 들어가고 악인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것입니다. 영벌의 지옥과 영생의 천국의 삶으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마25:31-46). 우리는 이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측면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언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눅22:14-18입니다. 그 나라는 유월절의 본질이 온전히 성취되는 나라입니다. 본문의 요지는 땅에서의 유월절을 폐지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유월절 식사를 유보하시겠다는 구속의 도리가 이제 유월절 양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고전5:7)의 대속적 죽음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자인 예표를 폐지하고 실체인 새 언약의 성찬식으로 대체하시는 것입니다. 성찬식의 제정경위가 이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사면해 주시기 위해 기꺼이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만 그 분과 연합돼 죄책의 사면과 구원이 보장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폐지를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으시겠다’(18절)고 다짐하십니다. 16절에서는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을 빌려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본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접근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다시 유월절 식사를 행할 것이며, 아울러 포도주도 마실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제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으로 인해 유월절 규례는 폐지되고 새 언약이 발휘되겠지만 그것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즉각적인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 가운데서는 구원의 역사와 더불어 불의와 불법과 착취와 압제가 공존할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본질적인 의미가 온전히 실현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라는 촉구의 말씀입니다. 사실 유월절에 근거해 성취된 출애굽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애굽의 압제와 노역과 종살이로부터의 구원과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로서 죄로부터의 온전한 자유와 해방 및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은 사실상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라야 비로소 성취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대목은 새롭게 임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18절)에 대한 확실성과 사실성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치유하시는 사건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축사의 능력이 하나님의 손, 즉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능했던 사실을 선언하시면서 이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 사건과 연결시키십니다(눅11:20, 마12:28). 귀신을 축사(逐邪)하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시사하셨듯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가장 확실하고 명백하게 증거하는 사례입니다. 이 외에도 죄를 사하시고(막2:1-12), 천국 복음이 전파되며, 기타 초자연적인 메시아적 치유(마11:5)의 능력을 행하심은 한결 같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의 확증과 이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역사 속에 침노해 들어와 천상적 권세를 발휘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예증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시던 주님께서 이제 공생애 사역의 절정에 즈음해 다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눅22:18). 사건의 전말을 살펴 보건대, 지금 유월절 식사의 자리에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음으로 이미 현재적 도래가 확인된 하나님 나라(통치권)와는 다른 차원, 곧 다른 성격의 하나님 나라를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국면인 미래성 말입니다. 역사의 종말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구속사 진행의 점진적 성격상 속죄사역의 절정에도 불구하고 예비적이고 임시적이며 제한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세상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격을 띠고 도래함으로 최종적이고 완성적이며 최후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왕노릇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사도 요한은 자신의 계시록에서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기술합니다. 체질이 근본적으로 갱신된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권세로 인해 본질이 왜곡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계21:4).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과 아울러 ‘아직’ 실현되지 않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눅17:22-25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인자(人子)의 날로 규정하십니다. 여기서 인자란 구약적 표현으로서(단7:13-14)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오시는 만왕의 왕 되신 영광의 주님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심판의 환상을 통해 인자를 세상 끝 날에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서 추수하는 심판주로 묘사합니다(계14:14-16, 마25:31-33). 따라서 인자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날,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또는 메시아 통치의 시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판의 날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로 보건대 인자의 날의 성격은 성도들에게는 구속의 주님을 영광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만나는 희락의 날이 되겠지만(마24:30-31, 고전1:8), 불신자들에게는 죄를 판단해 영벌에 처하게 하시는 두려운 심판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마25:41-46).
누가는 인자의 날의 도래를 설명하면서 ‘번개의 비침’을 비유로 듭니다(눅17:24). 이는 비단 누가뿐만이 아닙니다. 마태의 소위 종말론장이라 일컫는 마24장에서도 인자의 임함을 설명하면서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7절)고 번개의 비침을 예로 듭니다. 여기서 번개의 비침을 통해 인자의 오심을 설명함은 예수님의 재림의 성격을 범우주적 가시성, 즉각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에 근거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림의 경우와는 근본에서 차이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더 이상 은밀한 중에 오시지 않습니다. 제한된 사람에게만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전 우주적으로 오십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계1:7). 만왕의 왕으로, 영광의 주님으로, 그리고 심판주로 오셔서 세상을 마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그 앞에 모으시고 우편 양과 좌편 염소로 구분하실 것입니다. 우편 양들에게는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해 주실 것입니다. 좌편 염소들은 지옥 형벌에 처해질 것입니다(마25:32-33, 41).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계21:1). 이런 식으로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나라의 미래적 국면을 동시에 증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교회시대는 ’이미‘ 실현된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래서 지금 오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와 중첩되는 과도기적인 기간 속에 위치해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 분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교회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능력을 일면 선취적으로 맛보아 체험하면서도 동시에 영적 긴장과 갈등과 대립의 구도 속에서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6:12).
4.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는 어떤 관계성을 맺고 있을까요.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인 개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권의 시행이라는 측면에서 정의한다면 그 나라의 의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왕으로 그 왕적 권능과 권세를 막힘 없이 발휘하시는 것을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가장 현저하고 명백하게 수납되고 확인되며 발휘된 내용들입니다. 한편 교회란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신앙하는 신앙공동체로서(롬10:9), 성령의 신비한 공작과 연합사역으로 인해 예수님을 머리로 각인의 성도들이 지체로 더해진 신앙적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합니다(고전12:13, 엡1:23, 5:30, 골1:24). 그래서 몸의 각 지체들이 머리의 통제 하에 다양성을 통해 통일된 행동을 나타내 보이듯이 교회공동체 또한 같은 원리 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적극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그 분의 구속받은 백성들의 신앙적 집합체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는 동일한 왕과 동일한 백성의 관계 속에서 왕의 통치권이 가장 권세있게 행사(行使)되는 현장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양자 간 상당한 동질성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질문하시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고백한 이른바 ‘메시아의 비밀’, 또는 ‘메시아의 자기은닉 사상’(마16:16, 20)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실 것을 선포하십니다(18절). 이어서 예수님은 천국열쇠를 교회에게 맡기심으로 천국을 매고 푸는 복음진리의 권한행사를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에게 맡기십니다(19절).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께서 논리적인 사고체계 안에서 교회와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바로 그 사실은 교회와 천국의 두 개념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천국열쇠의 효력은 교회설립에 대한 공표로부터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될 것임을 간파하게 됩니다(18-19절). 다시 말해 바야흐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드러난 ‘메시아의 비밀’로 인해 그때부터 천국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파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이 그 나라의 이르는 열쇠를 소유하고 그 일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즉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하나님에 대한 증거자로서,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에 대한 중계자(agent)로서의 역할을 이어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축복으로 이끄는 문을 열거나 닫는 지식의 열쇠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사도들에게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눅11:52).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인 실례를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의 복음설교를 듣고 하루에 삼 천명이 제자로 더해진 사실(행2:41)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롬1:16). 그리고 이렇게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불러 낸 구원받은 무리들의 집합체를 일컬어 ‘한 새 사람’들의 집합으로서 교회라고 부릅니다(엡2:14-15, 행5:11). 이들이 다름 아닌 천국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런 상호관계와 원리 안에서 교회와 천국(하나님 나라)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성과 연속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 할 수만은 없는 불연속성 내지는 이질성 또한 발견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크고 포괄적인 용어일 뿐 아니라 교회에 포함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교회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는 과정에 놓여 있기에(엡2:22)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대변하거나 현시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요소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양자는 비록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다할지라도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는 곧 교회다’라고 단정하기에는 더 깊은 숙고가 필요할 줄 압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서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과 능력을 힙 입어 신생(新生)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지로 삼고 현재 진행형으로 달려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교회는 구속사 진행 선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가까운 ‘근사치’(approximation)로서 존재하며 가장 신뢰할 만한 하나님 나라의 ‘지방자치기관’(communal)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구성된 교회공동체 - 그것이 비록 부족과 결핍과 불완전함이 여전하다 할지라도 - 속에서 가장 확실하고 현저하게 그 천상적 통치와 권세를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혹자는 교회를 일종의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5. 마치면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곧 믿음 안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로 구성된 교회의 만수(滿數)가 찰 때에 교회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귀속될 것입니다(롬11:25-26). 그 때에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 나라가 교회로 양자가 통일될 것입니다. 동일시 될 것입니다. 오늘날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고난과 긴장과 여러 가지 영적 역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음은 바로 이런 미래적 소망이 우리 앞에 확실히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종말론적 공동체(an eschatological community)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 까닭은 교회가 기독론적인 바탕 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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