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聖誕)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
(마1:1-25)
1. 들어가면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현실화 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일어난 자연적이고 평범한 세속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 우주적 경륜 속에서 일어난 계시적 사건입니다. 곧 창세 전(엡1:4-6)부터 수립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구원계획을 피조 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시키기 위해 의도된 구속사의 일환이란 사실입니다(갈4:4).
하나님께서는 이상의 구속사를 구체적으로 진행시키고자 선악과 언약(창2:17) 속에 담긴 금령법을 어김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대상으로 한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것이 창3:15에 언급된 소위 ‘여자의 후손’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내용상 삼중적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첫째로 뱀과 여자와의 원수관계입니다. 둘째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원수관계입니다. 그리고 이런 두 계열간의 적대적 원수관계는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궁극적으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일단락됩니다.
이런 일련의 진행과정에서 본문의 ‘여자의 후손’은 복수적이며 동시에 단수적인 성격을 띠고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복수적 의미로 기술된 여자의 후손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성도의 집합을 가리키며, 단수적 의미로 언급된 여자의 후손이란 다름 아닌 사단을 최종 굴복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하고 있음을 이후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과정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2. 펼치면서
따라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본의는 총체적인 관점에서 창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결정적으로 표명된 계시적 사건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제 보다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봅니다.
①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고 기술합니다. 이는 이제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에 의해 줄기차게 약속돼 나온 참 자손(창22:18, 행3:25-26, 갈3:16, 삼하7:11-16)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혈통적으로나 법적 자격에 있어서 명실공히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밝히 지적합니다. 사실상 다윗 왕조가 BC586년 바벨론에 의해 몰락된 이후 거의 6세기가 흐르는 동안 다윗의 왕통(王統)은 표면상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로마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오매불망(寤寐不忘)하던 다윗의 왕권을 이을 적법한 메시아가 되심을 밝히는 일은 다른 무엇에 앞서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논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사실상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에 예언 된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눅24:27, 44절). 그래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의 왕적 혈통을 객관적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이 중시했던 족보의 기술을 통해 그 분의 법적 자격과 메시아적 정통성을 입증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예수님의 탄생기록은 구약의 예표적이며 모형적인 계시시대를 마감하고 구속사의 실체로서 구원의 새로운 계시시대를 여는 신기원(新紀元)적 의미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밝히는 과정에서 족보의 시작을 아브라함으로부터 기술합니다(마1:2). 이는 유대인의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왕적 정통성과 법적 합법성 및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마태의 의도적인 기술방식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누가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아담을 거쳐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눅3:23-38). 이는 누가복음의 저작 동기와 강조점이 상대적으로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눅1:1-4). 그래서 예수님을 단순히 유대인의 메시아가 되실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전(全)인류의 구원자이시며, 나아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명백히 증거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족보의 기술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전(全) 족보의 내용을 크게 삼등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다윗까지(마1:2-6), 다윗에게서 여고냐(여호야긴)와 그의 형제들의 출생까지(7-11절), 그리고 여고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까지(12-16절)입니다. 이런 삼등분은 단순히 연대기적 편의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구속사적인 계시성이 깊이 개입돼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삼등분 한 족보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집약해 구분하면서 각각에 구속사적 의미를 부여해서 설명합니다. 곧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 이거까지, 그리고 바벨론 이거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가 그것입니다(17절). 마태의 이런 구분과 표현방식은 다분히 다윗 왕조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접근해 분류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구약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체성을 신정왕국으로 이해한 데서 나와진 하나님 나라의 흥왕기, 쇠퇴기 및 회복기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속자의 출현을 위한 최적의 상황을 준비하기 위해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오셨던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본격적으로 구속사를 역사의 전면에 부상시키시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4:4)라고 기술합니다. 바야흐로 구속사의 핵심사상인 여자의 후손언약의 종말론적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예비적 절정을 보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거의 4세기 동안 세상역사 속에 깊이 침잠했던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치 새 봄의 마른 가지에 새 싹이 움트듯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적 작정의 때가 이르매 새 언약의 남은 성취를 위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②자기 백성의 구원자
마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성격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라고 선포하므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중보 사역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한 마리 어린 속죄양(scape goat)으로 오신 분입니다(요1:29). 이사야는 메시아를 참 다윗 왕에 앞서 고난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메시아의 이중적 성격과 사역을 내다봅니다(사52:13-15, 53장). 하나님께서는 실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대속적으로 담당시키십니다(사53:5-6). 그 분의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죄를 대속하시는 중보사역(마9:12-13, 막2:17, 10:45)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이 보증하고 있는 죄책의 사면(렘31:34) 및 죄의 도말(사44:22)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 새 언약 안에서 약속된 회복된 이스라엘의 사죄의 문제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비로소 성취될 것임을 전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성취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속에서 선취적으로 보증됩니다. 새 언약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말미암는 메시아 왕국의 종말론적 완성인 사실이 이에 있습니다. 그 나라는 죄의 권세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공법이 막힘없이 시행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 또한 충만한 곳입니다(렘31:34). 인지능력의 한계가 극복되는 곳이기에 말입니다(고전13:8).
③임마누엘의 성취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는 단지 대속을 위한 중보적 사역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명하면서 ‘임마누엘’의 성취로 선포합니다(마1:22-23).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언약적 구속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구약의 성막계시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임재, 통치, 연합, 교통과 동행의 예표적 계시(출25:8)가 성막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성막의 구속사적 계시와 동일시하므로 예수님을 성막의 실체로 오신 분임을 명백히 증거합니다(요1:14, 2:19-21). 오늘날 예수님은 성령님의 내주, 교통, 후원, 조명하시는 역사(고전3:16, 6:19, 갈2:20)를 통해 여전히 우리의 왕으로, 우리와 연합돼, 우리의 전 인격과 생애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십니다(욥23:10).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신학은 성령님의 신비하신 사역으로 인해 성도를 예수님께 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성도 간에도 지체로서 상호 유기적으로 연합되게 함으로 우주적 보편의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임마누엘 사상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상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다’(요1:14)는 사실과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임마누엘 신학은 언약사상의 본질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과도 동일시 간주됩니다. 그리고 이 핵심사상은 본질상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마침내 현실화된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관점입니다(계21:3, 7절). 이런 의미에서 임마누엘 사상은 곧 신정왕국사상과 신학적 상응성을 띠게 됩니다. 이런 상호 밀접한 신학적 관계성은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임마누엘의 실제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 땅에 도래했음을 명백히 시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 실례를 예수님의 본격적인 메시아적 공생애 사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12:28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특징인 천국복음증거, 죄사함, 각종 이적과 기사를 동반한 치유사역 및 축사사역 등은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왕적 권세가 능력있게 발휘되는 것으로 곧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통치가 막힘없이 시행됨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④새 이스라엘(교회)의 대표자
아기 예수님은 동방 박사들에 의해 경배를 받습니다(마2:1-2, 11절).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왕이신 사실을 증명합니다. 곧 인류의 왕이시며 메시아로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증거입니다.
헤롯의 살해음모를 천사로부터 고지(告知)받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대동해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마태는 호세아의 예언(호11:1)을 구속사적 계시안목으로 재해석하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을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에 적용시킵니다. 다시 말해 마태는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가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 속에서 신학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시각 속에는 마태가 아기 예수님의 불가피한 애굽으로의 여행사건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출애굽사건의 연장이 되는가를 보여주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아기 예수님의 애굽 피신 사건은 얼마 후 헤롯이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내 애굽에서 예수님을 다시 불러내셔서 나사렛에서 그 분의 유년시절을 보내게 하시는 것을 통해 출애굽사건의 재현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음이 더욱 확증됩니다(마2:19-20). 이처럼 구속사 진행의 정점인 예수님의 개인적 생애는 신구약 시대를 총망라한 하나님의 백성들(교회 공동체)의 생애와 영적으로 연합돼 동일시됩니다. 교회의 통일성, 연합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듯이,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원형(prototype) 내지는 실체(antitype)로서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의 자격을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성공적으로 준비하시는 과정에서 40일 광야금식사건과 마귀로부터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생활과 첫째 아담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해 보이심으로 자신을 모세의 실체인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그리고 둘째 아담의 자격으로 오신 새 인류의 머리이신 사실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시도는 예수님 자신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정당화시키며 공생애 사역의 성공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선취적 효과를 가져옵니다.
3. 마치면서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셔서 창1:28속에 담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 곧 하나님의 신정적 나라를 지속적으로 이뤄가게 하시기 위해 세속사를 방편삼아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해 가시는 계시적 사건의 일환으로 일어난 특별한 사건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통해 지적하고 있듯이 천국백성들의 삶의 성격과 방향성이 총체적인 관점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은 이처럼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구속의 경륜이 선(先)언약 - 후(後)성취의 방식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행해 나오는 가운데, 오늘날 나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사실을 깊이 묵상하며 감사함으로 우리의 남은 생애를 적극적으로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데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야말로 신앙의 본질로서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삶이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양하고 운반하며 건설하는 일에 이바지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마1:1-25)
1. 들어가면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현실화 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일어난 자연적이고 평범한 세속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 우주적 경륜 속에서 일어난 계시적 사건입니다. 곧 창세 전(엡1:4-6)부터 수립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구원계획을 피조 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시키기 위해 의도된 구속사의 일환이란 사실입니다(갈4:4).
하나님께서는 이상의 구속사를 구체적으로 진행시키고자 선악과 언약(창2:17) 속에 담긴 금령법을 어김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대상으로 한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것이 창3:15에 언급된 소위 ‘여자의 후손’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내용상 삼중적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첫째로 뱀과 여자와의 원수관계입니다. 둘째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원수관계입니다. 그리고 이런 두 계열간의 적대적 원수관계는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궁극적으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일단락됩니다.
이런 일련의 진행과정에서 본문의 ‘여자의 후손’은 복수적이며 동시에 단수적인 성격을 띠고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복수적 의미로 기술된 여자의 후손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성도의 집합을 가리키며, 단수적 의미로 언급된 여자의 후손이란 다름 아닌 사단을 최종 굴복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하고 있음을 이후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과정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2. 펼치면서
따라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본의는 총체적인 관점에서 창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결정적으로 표명된 계시적 사건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제 보다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봅니다.
①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고 기술합니다. 이는 이제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에 의해 줄기차게 약속돼 나온 참 자손(창22:18, 행3:25-26, 갈3:16, 삼하7:11-16)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혈통적으로나 법적 자격에 있어서 명실공히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밝히 지적합니다. 사실상 다윗 왕조가 BC586년 바벨론에 의해 몰락된 이후 거의 6세기가 흐르는 동안 다윗의 왕통(王統)은 표면상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로마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오매불망(寤寐不忘)하던 다윗의 왕권을 이을 적법한 메시아가 되심을 밝히는 일은 다른 무엇에 앞서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논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사실상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에 예언 된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눅24:27, 44절). 그래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의 왕적 혈통을 객관적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이 중시했던 족보의 기술을 통해 그 분의 법적 자격과 메시아적 정통성을 입증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예수님의 탄생기록은 구약의 예표적이며 모형적인 계시시대를 마감하고 구속사의 실체로서 구원의 새로운 계시시대를 여는 신기원(新紀元)적 의미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밝히는 과정에서 족보의 시작을 아브라함으로부터 기술합니다(마1:2). 이는 유대인의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왕적 정통성과 법적 합법성 및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마태의 의도적인 기술방식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누가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아담을 거쳐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눅3:23-38). 이는 누가복음의 저작 동기와 강조점이 상대적으로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눅1:1-4). 그래서 예수님을 단순히 유대인의 메시아가 되실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전(全)인류의 구원자이시며, 나아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명백히 증거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족보의 기술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전(全) 족보의 내용을 크게 삼등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다윗까지(마1:2-6), 다윗에게서 여고냐(여호야긴)와 그의 형제들의 출생까지(7-11절), 그리고 여고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까지(12-16절)입니다. 이런 삼등분은 단순히 연대기적 편의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구속사적인 계시성이 깊이 개입돼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삼등분 한 족보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집약해 구분하면서 각각에 구속사적 의미를 부여해서 설명합니다. 곧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 이거까지, 그리고 바벨론 이거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가 그것입니다(17절). 마태의 이런 구분과 표현방식은 다분히 다윗 왕조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접근해 분류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구약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체성을 신정왕국으로 이해한 데서 나와진 하나님 나라의 흥왕기, 쇠퇴기 및 회복기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속자의 출현을 위한 최적의 상황을 준비하기 위해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오셨던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본격적으로 구속사를 역사의 전면에 부상시키시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4:4)라고 기술합니다. 바야흐로 구속사의 핵심사상인 여자의 후손언약의 종말론적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예비적 절정을 보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거의 4세기 동안 세상역사 속에 깊이 침잠했던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치 새 봄의 마른 가지에 새 싹이 움트듯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적 작정의 때가 이르매 새 언약의 남은 성취를 위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②자기 백성의 구원자
마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성격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라고 선포하므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중보 사역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한 마리 어린 속죄양(scape goat)으로 오신 분입니다(요1:29). 이사야는 메시아를 참 다윗 왕에 앞서 고난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메시아의 이중적 성격과 사역을 내다봅니다(사52:13-15, 53장). 하나님께서는 실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대속적으로 담당시키십니다(사53:5-6). 그 분의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죄를 대속하시는 중보사역(마9:12-13, 막2:17, 10:45)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이 보증하고 있는 죄책의 사면(렘31:34) 및 죄의 도말(사44:22)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 새 언약 안에서 약속된 회복된 이스라엘의 사죄의 문제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비로소 성취될 것임을 전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성취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속에서 선취적으로 보증됩니다. 새 언약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말미암는 메시아 왕국의 종말론적 완성인 사실이 이에 있습니다. 그 나라는 죄의 권세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공법이 막힘없이 시행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 또한 충만한 곳입니다(렘31:34). 인지능력의 한계가 극복되는 곳이기에 말입니다(고전13:8).
③임마누엘의 성취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는 단지 대속을 위한 중보적 사역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명하면서 ‘임마누엘’의 성취로 선포합니다(마1:22-23).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언약적 구속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구약의 성막계시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임재, 통치, 연합, 교통과 동행의 예표적 계시(출25:8)가 성막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성막의 구속사적 계시와 동일시하므로 예수님을 성막의 실체로 오신 분임을 명백히 증거합니다(요1:14, 2:19-21). 오늘날 예수님은 성령님의 내주, 교통, 후원, 조명하시는 역사(고전3:16, 6:19, 갈2:20)를 통해 여전히 우리의 왕으로, 우리와 연합돼, 우리의 전 인격과 생애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십니다(욥23:10).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신학은 성령님의 신비하신 사역으로 인해 성도를 예수님께 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성도 간에도 지체로서 상호 유기적으로 연합되게 함으로 우주적 보편의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임마누엘 사상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상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다’(요1:14)는 사실과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임마누엘 신학은 언약사상의 본질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과도 동일시 간주됩니다. 그리고 이 핵심사상은 본질상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마침내 현실화된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관점입니다(계21:3, 7절). 이런 의미에서 임마누엘 사상은 곧 신정왕국사상과 신학적 상응성을 띠게 됩니다. 이런 상호 밀접한 신학적 관계성은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임마누엘의 실제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 땅에 도래했음을 명백히 시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 실례를 예수님의 본격적인 메시아적 공생애 사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12:28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특징인 천국복음증거, 죄사함, 각종 이적과 기사를 동반한 치유사역 및 축사사역 등은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왕적 권세가 능력있게 발휘되는 것으로 곧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통치가 막힘없이 시행됨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④새 이스라엘(교회)의 대표자
아기 예수님은 동방 박사들에 의해 경배를 받습니다(마2:1-2, 11절).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왕이신 사실을 증명합니다. 곧 인류의 왕이시며 메시아로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증거입니다.
헤롯의 살해음모를 천사로부터 고지(告知)받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대동해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마태는 호세아의 예언(호11:1)을 구속사적 계시안목으로 재해석하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을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에 적용시킵니다. 다시 말해 마태는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가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 속에서 신학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시각 속에는 마태가 아기 예수님의 불가피한 애굽으로의 여행사건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출애굽사건의 연장이 되는가를 보여주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아기 예수님의 애굽 피신 사건은 얼마 후 헤롯이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내 애굽에서 예수님을 다시 불러내셔서 나사렛에서 그 분의 유년시절을 보내게 하시는 것을 통해 출애굽사건의 재현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음이 더욱 확증됩니다(마2:19-20). 이처럼 구속사 진행의 정점인 예수님의 개인적 생애는 신구약 시대를 총망라한 하나님의 백성들(교회 공동체)의 생애와 영적으로 연합돼 동일시됩니다. 교회의 통일성, 연합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듯이,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원형(prototype) 내지는 실체(antitype)로서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의 자격을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성공적으로 준비하시는 과정에서 40일 광야금식사건과 마귀로부터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생활과 첫째 아담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해 보이심으로 자신을 모세의 실체인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그리고 둘째 아담의 자격으로 오신 새 인류의 머리이신 사실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시도는 예수님 자신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정당화시키며 공생애 사역의 성공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선취적 효과를 가져옵니다.
3. 마치면서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셔서 창1:28속에 담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 곧 하나님의 신정적 나라를 지속적으로 이뤄가게 하시기 위해 세속사를 방편삼아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해 가시는 계시적 사건의 일환으로 일어난 특별한 사건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통해 지적하고 있듯이 천국백성들의 삶의 성격과 방향성이 총체적인 관점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은 이처럼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구속의 경륜이 선(先)언약 - 후(後)성취의 방식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행해 나오는 가운데, 오늘날 나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사실을 깊이 묵상하며 감사함으로 우리의 남은 생애를 적극적으로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데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야말로 신앙의 본질로서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삶이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양하고 운반하며 건설하는 일에 이바지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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