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연구(강의안)
Ⅰ. 개요
Ⅱ. 주제
Ⅲ. 창세기에 나타난 특징적 내용과 본문 구분
Ⅳ. 창세기를 공부하는 입장
Ⅴ. 창세기를 공부하는 목적
Ⅵ. 맺음말
Ⅰ. 개요
창세기는 신구약 66권의 첫 책으로서 성경 전체의 근본으로서, '모든 교리 와 신앙의 모태'(Luther)이며 성경의 묘판(苗板)입니다. 그래서 유일신관(唯一 神觀)을 가진 유대교, 기독교는 모두 이 창세기에 근거합니다. 특히 신약 성 경에는 창세기 말씀이 200번 이상이나 인용되며, 예수님께서도 많은 교훈과 진리를 창세기를 근거로 가르치셨습니다(막12:36). 그러므로 모든 성경 말씀 은 창세기 말씀에 뿌리를 둔 줄기요, 가지요,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아브라함과 이삭 과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배우려면 창세기를 공부해야 합니 다. 이처럼 창세기는 크리스챤들에게 믿음의 기초를 튼튼히 놓아주는 중요한 책입니다. 여기서는 창세기의 전반적인 개요, 주제, 특징적 내용과 본문 구 분, 그리고 창세기를 공부하는 입장과 목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명칭
본래 구약 성경의 각 책에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 의 편리를 위해 각각의 책 첫머리에 나오는 단어를 따서 그 책의 이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창세기의 이름도 그러한 유대인의 관습에 의해 히브리 성경 에는 책의 첫 단어인 <뻬레쉬트>가 그대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태초에(in the beginning)'라는 뜻입니다. 그 후 70인역(구약의 헬라어 역본)에서는 창세 기의 명칭을 '게네시스'로 명명(命名)하고 있는데, 그 뜻은 '기원(origin)', '시 작(beginning)'입니다. 이 말은 창세기 2:4의 '하늘과 땅의 기원(시작)의 책(헤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우라누 카이 게스)'이란 말의 '게네세오스'에서 나왔습 니다. 영어 성경의 창세기를 가리키는 말(Genesis)은 헬라어 '게네시스'를 번 역한 것이며 개역 성경의 '창세기'라는 명칭도 이 헬라어에서 유래되었습니 다. 따라서 '창세기'는 '기원', '시작', '태초'라는 의미이고, 이것은 창세기 전체 의 성격을 함축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작'을 선포하고 있는 창세기에는 ① 인간의 거주지로서의 지구의 시작(1:1-2:3), ② 인류의 시작(2:4-25), ③ 죄의 시작(3:1-7), ④ 구원계시의 시작(3:8-24), ⑤ 인류가족의 시작(4:1-15), ⑥ 인간문화의 시작(4:16-9:29), ⑦ 국가의 시작(10: 1-32), ⑧ 다양한 언어의 시작(11:1-9), ⑨ 히브리 민족의 시작(11:10-50:26) 이 나옵니다.
2. 저자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오경(五經)이라고 하는데, 창 세기는 오경의 첫 책입니다. 오경을 특징별로 살펴보면, 창세기는 '시작의 책', 출애굽기는 '구속(속량)의 책', 레위기는 '제사의 책', 민수기는 '방랑의 책', 신명기는 '회고와 전망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오경의 저자 는 모세이기 때문에 보통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창세기의 저자 도 '모세'가 되며, 창세기의 저자로 모세보다 믿을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왜 냐하면 구약성경 자체가 오경의 기록자가 모세임을 증명하였고, 신약 역시 오경이 모세의 저작임을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출 24:4;레 14:3;민 5:2-4;신 31:9;마 8:4;막 10:3;눅 5:14;요 5:46,47).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오경 은 모세가 쓴 것으로 인정하셨습니다(눅 24:27,44). 루터는 독일 성경을 번역 할 때 '모세의 제 1 책'이라고 저자를 분명히 못박았습니다. 특히 모세는 하 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의해 애굽 사람의 학문을 모두 배울 수 있었으며(행 7:22), 그런 까닭에 유용한 모든 기록, 필사본, 구전 자료들을 해독하고 이용 할 수 있었습니다.
3. 기록 연대
신 34:7을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출애굽 후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12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창세기는 모세의 생애 중, 출애굽부터 사 망 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일반적으로 출애굽 사건은 - 애굽의 '토 트메스' Ⅲ세(Thotmes, BC 1504-1448)를 이스라엘의 탄압자로 보고 그 아들 - '아멘호텝' Ⅱ세(Amenhotep, BC 1450-1420) 때의 BC 1446년경으로 추정 합니다. 특히 열왕기상 6:1에 의하면 출애굽 사건은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4년째 되는 해'로부터 480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솔로몬의 통치 4년째 되는 해는 BC 966년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출애굽 사건은 BC 14 46년경에 일어났다고 봅니다. 출애굽 사건이 BC 1446년이었음을 근거로 하 여 볼 때, 창세기와 다른 네 권의 책들은 BC 1446년부터 - 광야생활을 한 40 년 동안의 - BC 1407년 사이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4. 기록 목적
창세기의 기록 목적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었던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구원받게 되는 구속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세계의 시작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내려가 신정국가를 형성하는 준비 단계에 이르는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를 간단하게 서술하는 것입니다.
Ⅱ. 주 제
창세기에서는 '이 세상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또 지금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를 보여 주며, 그 가운데 인간의 존재 의미와 만물의 이치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창세기 저자는 이러한 '역 사 원칙'을 가르치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이 흐르는 몇 가지 주제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창조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선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천 지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임과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하나님 의 영광임을 가르쳐 줍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세상 만민을 본래의 선하 신 목적대로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2. 저주와 축복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 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3:15)." 이 말씀에 기초한 저주와 축복의 역사 는 창세기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나타나기까지 성경 전체 에 흐르고 있는 주제요 구속역사의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성경 전 체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떠난 성경을 생각할 수 없습니 다.
3. 약속과 축복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 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12:2)." 이 말씀에 근거한 '약속과 축복' 은 한결같이 계속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본문의 아브라함은 창세기의 중심 인물입니다. 창세기는 단순한 인류 역사의 기록이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 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역사에 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서 천하 만민을 구원하실 뜻을 두셨습니다. 창세기 1-11장까지는 아브라함을 통한 인류 구속역사를 시 작하기까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12-50장까지는 아브라 함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구속역사의 발전에 대한 기록 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저주의 역사도 똑 같은 배경으로 대조되어 나옵니다.
아담(인류)/홍수심판 => 노아(새인류) => 아브라함(이스라엘)
=> 예수 그리스도(새이스라엘)/불심판
Ⅲ. 창세기에 나타난 특징적 내용과 본문 구분
1. 창세기에 계시된 하나님
(1) 천지창조의 하나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만물은 결코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 니다. 천지는 하나님이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2) 역사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 살아 계신 분이십 니다. 창세기에는 인류의 생활과 문명의 발달 과정, 그리고 초기 역사 시대 에 대한 기록이 담겨져 있습니다. 특히 1-11장에 나오는 기록은 모두 역사적 인 사건이요, 결코 이론적인 것이나 인간의 지혜로 지어낸 허황한 이야기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3) 섭리자 하나님
인간이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에게 계시되어졌습니다. 하나 님은 경고하기도 하시고 인간의 잘못을 선으로 바꾸기도 하셨습니다. 홍수 이전 시대나 이후 시대, 그리고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인 류역사를 하나님께서 그 목적하신 대로 이끌어 가시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 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범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본성이 악하여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신 섭리에 는 결코 실패가 없으십니다.
(4) 구속의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지만(창 1:31),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지 타락 한 인간을 구원코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창조(Creation)', '타락 (Decreation)', '재 창조(Recreation)'라는 세 마디로 그 내용을 요약할 수 있습니 다. 특별히 창세기 3:15 말씀은 '원시복음'이라 불리는 말씀으로, 구속의 씨를 약속하신 첫 약속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5) 인간의 생활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
창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깊은 관계성 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부터 요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인간 을 어떻게 대하셨으며,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 는가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 창세기 저 자는 독자들에게 영적인 안내와 경고를 하며 매우 중요한 진리들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에서 나오는 이러한 진리를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어야 하는가' 하는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2.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1) 창조 :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1,2장), (2) 타락 : 하나님의 계시와 자비 (3,4장), (3) 홍수 :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5-9장), (4) 사회 : 하나님의 주권과 왕권(10-11장), (5) 아브라함 :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망(12-25장), (6) 이삭 :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성(12-25), (7) 야곱 :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27-36 장), (8) 요셉 : 하나님의 섭리
3.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의 관계성
성경 저자는 모든 존재에는 시작이 있고 마지막이 있다고 증거했는데, 그 원인은 창조주의 섭리에 있습니다. 창세기는 바로 천지의 시작을 설명합니 다. 그런데 창세기는 인간의 기원과 인류의 역사로서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서도 중요합니다. 창세기가 실락원(失樂園)에 대한 기 록이라면 계시록은 복락원(復樂園)에 대한 기록입니다.
Α 창세기에 나타난 세상
빛과 어둠이 나뉨(1:4)
땅과 바다가 나누어짐(1:10)
해와 달이 낮과 밤을 주관함(1:16)
준비된 에덴 동산(2:8,9)
에덴을 적시는 네 강들(2:10)
금이 있는 땅(2:12)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2:9)
베델리엄과 호마노(2:12)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거니심(3:8)
Ω 계시록에 나타난 세상
밤이 없음(21:25)
바다가 없음(21:2)
해와 달이 필요 없음(21:3)
준비된 새 예루살렘(21:2)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강(22:1)
도시에 있는 금(22:21)
도시에 가득한 생명나무(22:2)
온갖 보석(21:19)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거함(21:3)
이상을 볼 때 창세기에 나타난 세상은 시험적인 세상으로서 죄 없는 인간, 시험받지 않았던 인간에게 적합한 세상이었습니다. 그 세상이 그 본래의 목 적을 위하여 완벽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영원한 하나님 나 라는 아니었습니다. 이제 계시록에 나타난 세상은, 비록 죄를 경험하고 실패 를 거듭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체험하고 새롭게 창조된 인 간을 위해서 예비된 완전하고 영원한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예언된 세상은 인간의 영원한 구원에 합당하도록 설계된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Α 저주받은 세상(창세기)
저주받은 땅(3:17)
종신토록 수고(슬퍼)함(3:17)
가시와 엉겅퀴(3:8)
얼굴에 땀을 흘림(3:19)
밭의 채소를 먹고(3:19)
흙으로 돌아감(3:19)
악이 계속됨(6:5)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심(3:21)
사단이 일어남(3:15)
생명나무 열매 금지(3:24)
에덴에서 추방(3:23)
구원과 약속(3:15)
Ω 영원한 세상(계시록)
더 이상 저주가 없음(22:3)
다시 슬픔이 없음(21:4)
고통이 없음(21:4)
눈물이 없음(21:4)
열 두 나무 열매를 먹고(22:2)
다시 죽음이 없음(21:4)
더러움이 없음(21:27)
흰 옷을 입히심(19:14)
사단이 사라짐(20:10)
생명나무 열매 허락(22:14)
그 성에 들어감(22:4)
구원이 완성(5:9-10)
이상의 말씀들을 살펴 볼 때 우리가 비록 저주받은 세상에서 많은 고생을 하며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하나님 나 라를 바라볼 때 소망이 넘칩니다. 이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위해서 에덴 동산보다도 더욱 완전하고 영원한 나라를 예비해 주신 사랑과 은혜의 창조 주이십니다.
4. 창세기에 나타난 메시야 예언
창세기에는 죄의 기원과 함께 그 모든 죄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줄 그리스 도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으며, 그 예언이 점차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1) 여자의 후손 (3:15)
이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모든 인생이 부모를 통해 태어나는 반면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여자 의 몸에 의해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여자의 후손'으로 탄생하실 그리스도는 사단에게 발꿈치를 물리는 고통, 즉 육체적인 핍박과 정신적 괴로 움, 십자가의 죽음 등을 당하시지만 궁극에는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씨 (22:17)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로써 막연하게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시대에 와서 '아브라함의 씨'라는 말로써 좀 더 구체적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미래에 탄생하실 그리스도는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시지만(마 1:1), 그가 바로 영원한 축복의 근원이 되실 것 을 예언하셨습니다.
5. 창세기에 나타난 족보
창세기에는 "…의 대락이 이러하니라." "…후손이 이러하니라." 와 같은 말이 20회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2:4)
"아담의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5:1)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6:9)
"셈의 후손은 이러하니라"(10:1)
"데라의 후손은 이러하니라"(11:27)
"사라의 여종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
니라"(25:12)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25:19)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36:1)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의 가족의 이름이 이러하니라"(46:8)
창세기의 족보는 문학적 또는 역사적 목적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 같습니 다. 어떤 경우는 결론을 맺기도 하고, 또는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쓰 여지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경우는 역사적 교량으로 쓰여지기도 합니다. 셋 을 통한 아담의 족보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후손과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아담의 창조와 아담의 형상을 닮은 셋의 탄생은 인류와 창조, 인류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해 줍니다. 가장 긴 족보는 10, 11장 입니다. 이 부분은 홍수 후 세계가 어떻게 다시 번성하게 되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1-11장은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의 서론이 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저자의 목적은 아브라함 한 사람 이삭 한 가 정, 야곱 한 민족과 세우신 언약 관계(covenant relationship)를 통한 하나님 의 구속역사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긴 족보는 36장에 나오는 에서의 족보입니다. 여기서 에서의 가족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36장 전후에 나오는 사건들입니다. 야곱의 개인적인 생애에 대한 기록은 35장에서 끝납니 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들의 역사가 37장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의 구속역사는 11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 요셉을 쓰시는 데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들을 족장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족보는 46:6 이하에 있는 족보입니다. 여기에는 애굽으로 내려간 70명의 이 스라엘 가족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400년 후 애굽에서 민족을 이루 는 모체가 되었습니다.
6. 본문 구분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11장까지는 천지창조와 타락 및 홍수 심판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12-50장에서는 구속 역사의 시작과 함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믿음의 조상들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있 습니다.
Ⅰ. 역사의 시작 (1:1-32)
1. 천지의 창조(1:1-32)
2. 인간의 낙원(2:4-25)
3. 실락원(3:1-24)
4. 가인의 죄와 벌(4:1-26)
5.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5:1-32)
6. 노아의 방주와 홍수심판(6:1-9:29)
7. 노아의 후손들(10:1-32)
8. 바벨탑(11:1-9)
9. 셈에서 아브라함까지의 족보(11:1-32)
Ⅱ. 아브라함의 하나님 (12:1-25:18)
1. 부르심과 순종(12:1-25:18)
2. 언약을 견고케 하심(15:1-17:27)
3.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18:1-20:18)
4. 언약의 성취(21:1-34)
5. 아브라함을 시험하심(22:1-24)
6. 사라의 죽음(23:1-20)
7. 이삭의 결혼(24:1-67)
8. 아브라함의 죽음(25:1-18)
Ⅲ. 이삭의 하나님(25:19-26:35)
1. 야곱과 에서(25:19-34)
2. 이삭과 아비멜렉(26:1-11)
3. 우물을 파는 이삭(26:12-35)
4. 에서의 결혼(26:34,35)
Ⅳ. 야곱의 하나님(27:1-37:1)
1. 야곱의 축복 쟁취(27:1-41)
2. 벧엘의 서원(28:1-22)
3. 밧단아람의 야곱(29:1-33:55)
4. 야곱의 변화(32:1-32)
5. 엘헬로헤 이스라엘(33:1-34:31)
6. 엘벧엘의 감사(35:1-22)
7. 야곱과 에서의 가족(35:23-37:1)
Ⅴ. 요셉의 하나님(37:2-50:26)
1. 요셉의 소년 시절(37:2-36)
2. 유다와 다말(38:1-30)
3. 요셉의 팔림과 애굽의 총리가 됨(39:1-41:57)
4. 요셉과 그 형들의 만남(42:1-45:15)
5. 애굽으로 건너온 야곱의 권속들(45:16-47:26)
6. 야곱의 최후(47:27-50:14)
7. 요셉의 죽음(50:15-26)
Ⅳ. 창세기를 공부하는 입장
우리는 창세기를 공부할 때 나름대로 여러가지 입장에서 공부할 수 있습니다. 문학도는 문장의 구성과 문체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과학도는 과학적이냐 비과학적이냐 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과학적인 교육을 받고 과학적인 사고 방법에 깊이 물든 지성인 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예민합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시기가 BC 16세기 정 도니까 그 당시의 자연과학의 발달이란 아주 미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자연과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창세기는 모순 덩어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알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선택하신 그의 종을 성령으로 감화시키셔 서 그의 말씀을 쓰게 하셨는데, 이것이 성경입니다. 창세기도 하나님께서 모 세를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 씀이기때문에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창세기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기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고자 하시는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즉, 창세기 저자가 어 떠한 입장에서 창세기를 썼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창세기 저자가 전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 면 저자는 어떠한 입장에서 창세기를 기록했습니까?
1. 유신론적 입장
세상을 보는 데는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신론적인 입장과 무 신론적 입장입니다. 이 양자의 차이는 한 개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 대한 기준이 됩니다.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본 고대 철학자들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근원을 물, 불, 바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어떤 생 물학자는 인간의 근원을 아메바라고도 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모두 하나의 가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말대로 세상의 기원을 물, 불, 바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첫째, 만물의 기원이 물, 불, 바람이라면 그 물, 불, 바람은 어떻게 존재하 게 되었습니까?
둘째, 이런 물, 불, 바람으로부터 어떻게 인격적인 인간이 생겨날 수 있습 니까?
셋째, 만일 이러한 것들에서 인간이 생겨났다면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의 미가 있습니까? 인간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 존재입니까?
이와 같은 세 가지 물음에 대해서 무신론적인 입장은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볼 때는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신론적인 입장은 태초에(in the beginning) 하나님이 존재하 셨다는 대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저자는 1장을 "태초에 하 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1장에서만도 하나님이 란 단어가 30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천지창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 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 하셨으며, 섭리 가운데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존재하셨다는 대전제 아래 창세기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말씀의 참 뜻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공부해야 합니 다.
2. 역사적 입장
역사를 서술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일어난 일들을 순 서적으로 나열하는 서술 방법입니다. 이러한 역사 서술은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history)라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역사가가 분명한 역사관을 가지고 의 미 있는 중요한 사건을 추려서 기술하는 방법입니다. 창세기는 단순한 사건 의 나열이 아닙니다. 저자가 독특한 역사관을 가지고 기술한 '사건으로서의 역사(Historical Geschichte)'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논리와 이성, 합리적인 생각으로 전후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해설을 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인간구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을 중심 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역사적 입장은 종합적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조그만 가지를 붙들고 따지기보다, 전체 가운데 흐르는 사상을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에 대한 선입관, 편견, 상식을 버리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겸손히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3. 신앙적인 입장
창세기는 과학적인 지식을 알려주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통해서 과학적인 지식을 얻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창세기가 과 학의 지식을 전해 줄 목적으로 쓰여졌다면 지금쯤 일말의 가치도 없는 낡고 형편없는 책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은 해마다 새로운 과학 지식이 홍수처럼 옛 학설을 뒤엎고 나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의 홍수 시대에도 창세기는 여전히 그 가치와 권위를 잃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 까? 창세기는 과학적인 지식을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 '하나님은 누구 며, 인간은 무엇인가?'하는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에 기록한 모든 사건들이 과학에서 완전히 떠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을 신으로 섬기며, 우상숭배와 미신으로 가득찬 그 시대에 우주질서와 자연의 조화를 가장 질서 있고 조화 있게 기록한 책은 창세기밖에 없습니다. 자연과학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한 우주의 질서와 조화, 사물의 내부에 존재하는 질서와 그 법칙들을 발견해 체계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과학이 발전할수록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무한하신 창조의 지혜가 높이 평가될 뿐입니다. 또 순수하게 학문을 하는 자연과학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세계가 우연히 존재하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질서정연하며, 필연적인 인과법칙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과 학적인 입장에서 단편적인 지식을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공부해서는 안됩니 다. 창세기는 영의 세계를 우리 앞에 열어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지성인들은 과학적인 사고 방법에 연단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합리적 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말씀을 공부하려면 일단 이러한 합리주의적인 사고 방법을 극복하고 신앙적인 입장에서 공부해 야 합니다. 바로 믿음을 갖고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보는 것보다 더 확실히 아는 방법이있습니 다. 그것은 믿음의 방법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들과 진리들은 우리의 경험권 밖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머니 태 속에 있 을 때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눈은 공이 굴러가는 것은 보지만, 지구가 굴러가는 것을 보지는 못합니다. 이처럼 특별히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다른 이의 증거가 필요하고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창조에 관한 한 그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때문에 창조를 믿을 수 있습니다.
Ⅴ. 창세기를 공부하는 목적
1.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위해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론적인 신이나 관념론 적인 신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 나님이시요, 인간을 창조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려 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자연을 통해 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물 가운데는 하나님의 능 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롬1:21). 그러나, 이러한 자연계시만으 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기가 너무 막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 간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자기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들의 삶과 생애를 통해서 또는 택하신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 자 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이 특수 계시입니다. 이 모든 특 수 계시를 모아 놓은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는 하나님을 밝히 알 수 없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대학에 들어와서 믿음을 버린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통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하다는 사실 입니다. 예배의 대상을 잘 모르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미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자기 나름의 신을 섬기다가 신앙 의 참도를 알지 못하고 도중에서 포기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 데 성경 말씀 중에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말 씀이 바로 창세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신 첫 책이기 때 문입니다. 창세기를 공부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이 세상의 역사가 어 떻게 시작되었으며, 무슨 뜻이 있는가,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 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 관(觀)'을 가지고 있어서 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성경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이 생각한 분과 전혀 다를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성경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 하신 유일한 책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이 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모두 안 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자연과 말씀 가운데서 계시하 신 한도 내에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2. 인간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알기 위해
도대체 나란 무엇(What)인가? 나는 왜(Why) 태어났는가? 나의 인생의미 와 목적이 무엇(What)인가? 내가 왜(Why) 살고 있으며 무엇(What)을 위해 살고 있는가? 또한 어떻게(How) 살아야 참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가? 이 'Why'와 'How', 'What'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생을 산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서 분명 한 해답을 주는 이가 없습니다. 인류역사는 행복을 찾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 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이 행복에 대해 논했습니다. 그러나 본 질적인 문제에 대한 답변 없는 행복론은 다분히 상대적이고 처세적이었습니 다. 지성인들 역시 본질보다도 당면한 실존문제 해결에 급급하여 살아 갑니 다. 그러면 왜 인간은 스스로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습 니까? 그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 울이 없으면 자기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 하고서는 피조물인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를 공부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면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 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자 앞에서 자기 발견을 하게 될 때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찾게 되고,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만물의 가치를 깨달아 알기 위해
우리는 자본주의(Capitalism) 시대 - 인간이 인간답게 서로 연대감과 공감 을 지니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행복이라고 느끼느니 보다, 남보 다도 더 풍부한 물질적 욕망의 충족에 의해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생 각하는 자본주의적(資本主義的) 인간이 지배적(支配的)인 시대 - 에 살고 있 습니다. 이 시대는 돈만 있으면 안되는 것이 없는 세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썩어질 재물을 모으기 위해 한 평생 을 다 바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 속에 전 인생을 투자합니다. 사람들은 돈을 하나님 같이 섬기고 있습니 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소유의 양이나 소유욕의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닙니 다. 물론 물질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물질의 가치를 바로 깨달아 알 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물질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공부를 통해서 현대인들이 숭상하고 있는 만 물의 가치를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은 숭배할 대상이 아니라 지배하고 다스려야 할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 세계 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 위해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쓰임받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세 조 상과 요셉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십니 다. 하나님은 개개인의 인격적인 하나님이요, 역사 가운데 살아 일하시는 역 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친히 구속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 땅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이 필요합니다. 창세 기 공부를 통해 믿음의 조상이요 구속 역사의 종으로 쓰길 원하시는 하나님 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Ⅵ. 맺음말
하나님은 관념상의 존재가 아니라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지 금도 살아 계셔서 인류를 주관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로 인류가 타락했을 때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시고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어 나가셨 습니다. 우리가 이번 창세기 공부를 통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배울 수 있 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타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 역사 방법 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겸손한 자세로 말씀을 배워 나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캠퍼스 구원역사의 주인공들로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 를 기도합니다.
2. 창세기에 나타난 족장시대의 역사성 이해(15-50장)
1. 족장시대 역사성이해
창세기 12장 이후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해 보면, 이 당시의 특징은 부권사회였으며, 일부 다처제의 사회였다. 그리고 문화사적인 특징은 '청동기 시대 후반'으로 주전 2300년경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족장'(부족의 대표)이라고 하는데, 창세기는 단순히 족장으로 나오는 남자이야기(Patriarchs)만이 아니고 사라, 리브가, 라헬, 레아 등 여자이야기(Matriarchs)도 등장한다. 그래서 창12-50 까지를 '신앙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함께 다루어야 한다.
1) 족장시대의 생활관습 이해
(1)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는 의식
이는 그 당시에 자식이 없으면 양자를 삼는 것은 극히 흔한 풍습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양자가 아닌 친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계시다.
(2) 자식 없는 아내
자식을 얻지 못한 아내가 자기의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자식을 얻으려 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유명한 주제이다. 누지(Nuzi) 문서 가운데, 만약 여자가 남편에게 자식을 낳아준다면 다른 아내를 얻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에 그녀는 여자노예를 씨받이(concubine)로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한 혼인계약이 있다. 그러나 누지의 조항은 창세기의 이야기와 달리, 아내보다 남편에게 유리하게 작성되어 있다.(창16:2 참고) 창세기의 기록과 평행한다고 주장되는 누지 계약에 따르면 첩이 자식을 낳은 후에 본 부인이 출산하게 되면 모든 상속재산이 본 부인이 낳은 자식에게 돌아가게 되는 데 반해, 창29-30에서는 여종의 자식이 상속 가운데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만일 누지형의 계약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었다면 사라가 "여자노예의 자식이… 나의 아들 이삭의 상속권을 가로챌까" 걱정할(창21:10) 이유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누지 서판의 내용은 특별한 유형의 혼인계약이지 표준적인 법적 기준은 아니다. 혼인계약의 부대 조건-예컨대, 남편이 다른 부인을 얻을 자유의 제한,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 남편이 다른 부인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아내의 양보, 아내와 첩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녀 각자의 상속권의 지분에 관한 규정 등-은 각각의 혼인마다 다를 수 있다. 누지의 기록들은 다양해서 창세기 이야기의 일반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은 해 주지만, 누지 문서의 그 어느것도 아브라함 이야기나 야곱 이야기의 경우와 정확한 평행을 이루는 것은 없으며, 혼인계약에서 그런 유형의 것이 누지 문화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족장 이야기와 누지 문서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 유사성은, 그 이야기가 오직 2000년대에 기원을 가졌다고 해야만 설명되는 관습이 족장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3) 족장들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임.
족장들이 외국의 왕에게 자신의 실제 아내를 누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기술되는 장면이 창세기에 세 번 나온다. 이 모티프가 후리인의 관습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족장 이야기가 기록화되던 시기에는 이미 낯선 풍습이 되어 있었다는 해석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스파이저(E. A. Speiser)였다. 이 관습이 행해지던 곳에서 남자는 결혼하면서 아내를 누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었을 것이며 이는 그 여자의 지위와 안전을 보장하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스파이저의 관찰에 따르면, 현재 기록된 형태의 창세기에서 설화의 화자는 이러한 "누이로서의 아내" 관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그런 까닭에 다만 단순한기만책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의 설화에서 기만으로 나타나는 것(즉, 사라/리브가가 아브라함/이삭의 누이라는 사실)은, 스파이저에 의하면, 원래는 진실이었으나 "누이로서의 아내" 관습에 대한 지식이 그 이야기의 문자기록단계에 와서 사라져버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지 텍스트를 자세히 음미해 보면, 한 여자를 누이로 받아들인 남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주선해 줄 의무를 지게되는 것을 보여준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아내로 취하면서 동시에 누이로 받아들인 경우의 분명한 예는 별로 없다. 그러므로, 누지 문화에 독특한 것으로 인정되는 이 어떤 관습에 창세기의 "누이로서의 아내" 이야기를 연관짓는 것은 지극히 빈약한 가설이다. 창세기 모티프에 대해 다른 가능한 자료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신과 영웅들이 자기 누이와 결혼한 것을 말해주는 수많은 근동의 전설들, "누이"라는 말을 애칭으로 사용하는 경우 등등.
(4) 라반이 야곱을 "양자로 들임"
야곱-라반 설화를 해석하면서 한 학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까지는 이 설화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누지의 풍속법을 통하여 쉽게 설명된다." 몇몇 해석자들이 야곱과 라반 사이의 관계와 밀접히 대응하는 것으로 보는 누지 텍스트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아르센니의 아들 나쉬위의 양자얻음에 관한 문서: 그는 푸히센니의 아들 울루를 양자로 들인다.
나쉬위가 살아 있는 동안 울루는 [그에게] 음식과 의복을 제공한다. 나쉬위가 죽으면 울루는 상속자가 된다. 만약 나쉬위가 친자를 얻게 되면 [상속]은 울루와 그가 공평하게 나누어갖게 되겠지만 나쉬위의 신(神)은 그의 친자만이 취할 것이다. 그러나 나쉬위가 친자를 얻지 못하면 울루가 나쉬위의 신을 물려받는다. 그리고 나쉬위는 딸 누후야를 울루의 아내로 준다. 만약 울루가 다른 아내를 취하면 그는 나쉬위의 토지와 가옥을 잃을 것이다. 누구라도 이 계약을 깨뜨리면 1 미나의 은과 1 미나의 금을 내어야 한다. 위에 인용한 내용과 야곱-라반 설화 사이에 있다고 믿어지는 상호관련은 다음과 같다.
(1) 야곱이 하란에 도착한 때에 라반의 아들이 있었다는 언급이 없으므로 라반은 라쉬위가 울루를 입양한 것 같이 야곱를 자신의 양자로 들이려 했을 것이다.
(2) 창31:43의 라반이 노해서 하는 말은 야곱이 그에게 (입양된) 아들임을 알게 하는데, 여기에서 레아와 라헬이 여전히 그에게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
(3) 야곱이 자신의 딸들 이외의 다른 아내를 얻어서는 안된다는 라반의 주장(창31:50)은 위에 인용한 계약에 나오는 바와 거의 일치한다.
(4) 라헬이 "집안의 신(드라빔)"을 훔친 사건(창 31:19, 30-35)은, 위의 계약에서 신을 소유할 권리에 대한 언급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볼 때, 유일하게 근거를 갖는 것은 세번째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와 같은 특징을 갖는 근동의 혼인계약이 시기적으로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이 창세기 기사가 2000년대의 배후 전승을 갖는다는 주장의 근거로서는 무용한 것이다. 야곱이 라반에 의해 양자로 받아들여졌다고 가정할 직접적 근거는 전혀 없다. 설화 내에서도 양자들임의 규정은 없다. 이 이야기 초반부에 라반의 아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을 그에게 아들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침묵의 과대평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그 자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주장이다.
야곱이 레아와 라헬을 신부로 맞기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것은(신부에 대한 대가로 널리 행해진 관습인 노동력의 제공-여기서는 각 한 명의 신부에 대해 7년), 그가 야곱의 양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만약 그런 경우였다면 신부를 얻는 데 대한 대가의 지불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야곱은 라반을 자신의 장인(창 31:4-13 참조)이자 고용인이 아닌 그 어떤 관계로 대접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일관되게 이삭을 자신의 아버지로, 가나안을 자신의 고향으로(창 30:25, 31:18, 30:25) 여긴다.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표시했을 때 라반은 양부(養父)에 대해 이행할 야곱의 의무를 내세워 그를 만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창 30:25-28). 이에 상반되는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라반이 노하여 한 [창 31:43]의 말은 단지 불만에 찬 사람이 내뱉은 말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라헬이 집안의 신을 훔친 것은 누지 텍스트에 의해 설명되는 바, 재산이 그 사람의 친자가 아닌 사람에게 돌아가려면 그는 반드시 그 집안의 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논의가 있다. 이 해석은, 야곱이 라반에게 양자 들었을 때는 라반에게 친자가 없었는데 그 아들이 출생하여 주상속자의 위치를 잃게 되었으리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라헬의 도둑질은, (논리의 전개상), 야곱이 양자 들던 때의 계약조항을 무효화하고, 야곱에게 상속재산의 대부분과, 라반의 사후 가부장(家父長:paterfamilias)의 지위를 확보해 주려고 의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테면 집안의 신과 같은 상징적인 물건의 소유만으로 상속재산을 확보하게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잠재적 상속자가 생존해 있는 부친을 그와 같은 물건을 훔침으로써 협박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야곱 이야기에서 그 어떤 부분에도, 야곱이나 라헬 또는 그의 가족 중 누군가가 라반의 재산에 눈독을 들였다는 내용이 없다. 라헬의 행동에 대한 보다 간단한 설명은, 요세푸스의 언급에서 보이는 그와 유사한 사정(분명 1500년 가량 후대의 일이었을), 즉, "이 나라의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의 풍습이 있는데 자기 집에, 모시는 물건을 두고, 먼 여행을 떠날 때는 가지고 다닌다."고 한 것과 연관짓는 것일 것이다.
2) 족장들의 생활 양식
다음과 같은 존 브라이트의 발언은 60년대의 일반적인 견해를 대표하는 것이다. 족장들은 천막생활을 하는 반(半)-유목민으로서, 양떼를 위한 목초지(牧草地)를 찾아 철따라 팔레스틴과 그 주변지역을 오르내리며 때에 따라서는 멀리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까지 가기도 하는 유랑생활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베두인은 아니었다. ... 다른 한 편으로 그들은 (롯을 제외하면) 도시에 정착하지 않았으며 농경을 배제하지도 않았는데 아마 일부 한정된 정도로 농경을 했을 것이다. ... 다시 말하면 족장들은 낙타-유목민이라기보다는 나귀-유목민으로 묘사할 수 있으며, 유랑을 정착지와 그 주변지역으로 한정한 것이었다.
브라이트는 말하기를, 이러한 묘사가 족장들이 2000년대 초기의 문화적, 정치적 정황에 완전히 부합됨을 나타내 준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반유목적 목축을, 이집트의 시누헤(Sinuhe) 이야기, 마리 텍스트, 베니-하산 분묘의 벽화 등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반유목적 생활방식은, 정착, 농경 생활양식으로의 발전과정의 한 단계로서 보편적, 자연적으로 선행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가정이다. 히브리 조상들을 유목민으로 묘사하게 되면 창세기 이야기는 분명히 우리가 기대하는 바대로, 이 민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최근에 이주해 와서 아직 가나안에 정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창세기의 족장 사화를 주의깊게 점검해보면, 초기 히브리인들의 생활이 유목적이라는 개념에서 어긋나는 특징들이 드러난다. 그들의 생활양태는 정착인들의 그것과 비교되면서, 유목적인 이스마엘 족과는 대조된다. 아브라함 주위의 사회구성은 유목집단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혈연관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가 더 낮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유목적 생활인 이동방목(겨울초지에서 여름초지로의 계절적 이동)을 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족장 사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주는 계절에 따라 초지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닌, 다른 원인에서 기인한 것이다.
2. 창12-50에 기록된 말씀들, 기록을 어떻게 이해할까?
1) 기본적인 이해
"Saga"(史話)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자가 있다. "Saga"(史話)는 전설과도, 역사와도 다른 의미로 쓰이는 말로 그 중간적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지역, 공동체의 삶과 이야기를 구전으로 전승시킬 때 그러한 이야기를 Saga(史話)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볼 때 그 이야기는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공동체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공동체의 공동원에 의해서 구전되고 전해 내려온 것이라는 것이다.(oral tradition)
오늘날 성경은 각각의 saga를 하나의 이야기처럼 묶어서 편집해 놓았다.(아브라함 사화+이삭사화+야곱사화) 즉 독립된 각각의 사화를 이어지도록 편집해 놓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사화를 살펴본다. 단순히 조상들의 이야기로서만이 아닌 그들이 반유목민적 삶으로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겪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반유목민적 삶은 정착하는 삶보다 더 위험하다. 그래서 그런 나그네적 삶을 고아와 과부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목민적인 삶은 동족이 그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동족으로부터의 추방이라고 하는 것은 끔찍한 형벌로서 누구든지 그를 죽여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사화를 보면,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하란으로 간 것은 두 지역 모두 강을 끼고 있었는데, 그 도시들은 달신(月神)을 섬기고 있었다. (추측으로 데라는 월신의 형상을 제작하는 기술공이었던 것으로 추정) 우르는 누가 보아도 번영을 이룰 수 있는 땅이었다. 데라는 사라를 며느리로 데려왔는데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함에 (남들은 다 번영하는데 자기만 번영하지 않음) 그래서 데라는 하란으로 가고자 하였다. 우르에서 하란으로 가는 길은 안전한 길(대로)이었다. 그런데 후에 아브라함이 갔던 길은, 즉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미스테리이다. 그의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로 갈 수 있는데 해안으로 가는 길과 왕의 대로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가 '세겜'으로 갔다고 하는 것은 그 중간의 길로 험한 이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모르고 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이는 굉장히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창11:27-) 광야에서 목적지 없이 배회한다는 것은 목숨을 잃을 수 도 있기 때문이다.
2) 내용구조(창12-50)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로서 후손약속, 땅 약속을 하고 있다. 그런데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은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조건이 너무 미약하다. 즉 사라의 불임과 아브라함의 믿음 없음이 그것이다. 아브라함이 땅에 대한 약속을 하나님께 받은 곳은 '세겜'땅에서 였다. 야곱의 이야기는 동심원 구조를 지니고 있다. 야곱, 애서의 이야기는 인종적이다. 왜 차자인 야곱이 이스라엘 부족의 장이 되었는가? 를 설명하고 있다. (야곱과 애서의 인종적 계보를 설명하고 있음) 현재 이스라엘 국가의 기원이 야곱.(spiritual father)
야곱의 씨름기사를 살펴보면 씨름의 대상은 어떤 사람(a man)이었다. 그들이 씨름을 한곳은 얍복강이었는데, 이 씨름의 이야기를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해 보면 (1) 종교학적으로 보면 강이라는 것은 국경을 의미하는 경우로 그리하여 강을 기준으로 각각의 신이 달랐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강 사이를 두고 어떤 수호신을 상정 대립으로 설명할 수 있다. (2) 심리학적인 이해로 이때는 야곱이 형 애서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있을 때라는 야곱의 힘든 시기로 두 진영(애서의 진영)을 보여줌으로 그 위압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성서를 보면 야곱이 애서에게 선물을 보내는데 그 선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같은 내용으로 애서에게 바쳤다. 야곱은 애서가 하나님처럼 두려웠던 것이다.우리가 야곱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aetiological(원인론적)으로 12개 지파의 구성근거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야곱의 자손이 12지파의 근거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화이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 바뀌는 이유와 벧엘이라는 지리적 장소 등도 주목할만하며, 야곱은 강력한 부족을 이루는 족장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디나의 추행"이라는 추행사건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않고 세겜에서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임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삭에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그들의 조상의 이야기에 있어서 아브라함 때에는 이삭은 소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야곱의 이야기에서는 노인으로 등장한다. 왜 이삭의 내용이 중간에 비었을까? 이는 성경은 말하고 싶은 부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예를들면 창22:3-4절을 보면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 준비하는 내용은 자세히 다루면서 가는 여정-3일길-은 소개하고 있지 않은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요셉의 이야기는 왜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애굽에서 살게 되었을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에서 살지 않게 된 이유를 요셉의 이야기에서 설명하고 있다(요셉의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요셉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도 신앙적인가르침을 준다).
요셉의 이야기는 Narrative 의 형식을 가진 "Novella" 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요셉의 이야기는 소설화시킨 장르임). 요셉은 늘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보디발의 아내의 이야기이다. 보디발의 아내는 둘 만 있음을 말하면서 유혹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계심을 늘 기억했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유혹을 이긴 것이다. 요셉의 주제는 상급과 상승이다. 이 요셉의 이야기는 후대의 이스라엘인들에게 긍지를 주는 이야기로 요셉의 지혜가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애굽은 "지혜전승의 왕국"이었는데 그런데 그런 애굽을 요셉(이스라엘인)이 먹여 살린다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그 어떤 지혜자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말하려고 하고 있으며 그런 이스라엘인이 애굽을 다스린다고 하는 긍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3. 창세기 개관
1. 주 제
창세기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만드신 과정과 목적, 인간의 배신, 족장들을 통한 언약의 성취 등이 기록되어 있다.
2. 저 자 : 모세(기록연대 : B.C. 1446-1406)
1) 모세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이 책을 기록했다.
2) 모세는 기존의 (영감있는)문서들을 참조하여 기록했다.
3) 모세가 죽은 후 익명의 편집자가 약간의 내용을 조정하거나 삽입했다.(창 36:1-30, 창 36:31 등).
3. 구 조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1-11장으로서 창조와 타락을 다룬다. 두 번째 부분은 12-50장으로서 하나님께서 족장들을 선택하셔서 그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다룬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모세는 ‘톨레도트’(תודלות)라는 특이한 단어를 사용하여 이 책을 구분하였다. 이 단어는 창세기에 10번 나오는데, 각각 ‘족보, 역사, 자손, 대략, 계보, 후예, 약전, 사적’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가 등장하는 곳은 다음과 같다.
① 2:4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② 5: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③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④ 10: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⑤ 11:10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⑥ 11:27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⑦ 25:12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고
⑧ 25: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⑨ 36:1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⑩ 37:2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전통적으로 이 단어는 창세기를 구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가 사용된 곳을 기준으로 하여 창세기를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앞부분은 계보 중심으로, 뒷부분은 족장들의 이름을 중심으로 구분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분이 톨레도트 중심의 구분과 크게 상이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A. 창조와 타락(1:1-11:26)
1) 서론 - 창조(1:1-2:3)
2) 하늘과 땅의 계보(2:4-4:26)
3) 아담의 계보(5:1-6:8)
4) 노아의 계보(6:9-9:29)
5) 노아의 아들들의 계보(10:1-11:9)
6) 셈의 계보(11:10-32)
B. 족장들의 역사(12:1-50:26)
7) 아브라함(12:1-20:18)
8) 이삭(21:1-26:35)
9) 야곱(27:1-36:43)
10) 요셉(37:1-50:26)
2. 서론 - 창조(1:1-2:3)
1. 창조기사에 대한 바른 이해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며, 과학자가 과학적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기록한 것도 아니다.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독자들에게 말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창세기의 저자는 역사의 일부분을 선택적으로 차용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조기사는 ‘사실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다. 그러나 과거의 사건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라고 해서 그것의 역사성이 파괴되지는 않는다.
2. 창조기사의 역사성과 기원에 대한 비평적 견해
1) 창조기사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신화일 뿐이므로 창조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2) 창조를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창조 방법은 진화의 과정을 따르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진화의 과정에서 넘을 수 없는 선들을 기적적으로 넘어갈 수 있게 간섭하셨다.
3) 과학과 성경은 양립할 수 없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는 성경뿐이며, 과학자들의 견해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4) 창조는 사실이며 이것은 과학으로도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수준은 완벽하지 못하다. 만일 과학이 완벽해 진다면 그것은 성경의 내용과 반드시 일치될 수밖에 없다.
* 이중 올바른 견해는 4번째 견해이다.
3. 하나님의 창조
1) 시작의 대 선언(1절).
1절은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이며, 2절 이하는 이미 창조된 우주의 완성(구속)의 과정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그 창조된 세상은 아직 공허하고 혼돈된 상태에 있다. 한편 1절에서 언급된 “창조하시니라”(바라)라는 동사는 히브리어에서 오직 하나님의 행위에만 사용된 말이다.
2) 정리(구속)이전의 상태(2절 상)
2절은 창조된 원시적 형태의 땅이 아직 정리(구속)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혼돈’, ‘공허’, ‘깊음’, ‘흑암’은 구속 이전의 모습을 가장 잘 대변하는 용어들이다. 이러한 네 가지 용어에 덧붙여 2절에는 땅이 물로 뒤덮여 있음을 말한다. 이는 사실적 진술이다. 태초에 정리되지 않은 지구는 물로 뒤덮여 있었다.
3) 정리(구속)를 위한 준비(2절 하)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고 있었다. “운행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신 32:11에서 사용되었는데, ‘독수리가 새끼 위를 배회하면서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정리(구속)할 것인지를 구상하며 준비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3절부터 이런 공허하고 혼돈된 상태에 있는 세상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가는 것을 언급한다. 즉, 창조는 이미 1절에서 이루어 졌고, 2절은 창조이후 정리(구속)되지 않은 모습을 언급하고 있으며, 3절 이하는 창조된 지구를 정리(구속)해 가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4. 구속의 구도(1:1-2:3)
1) 준비의 단계 : 분리를 통한 땅의 정리
① 첫째 날 : 빛과 어두움을 분리하심(3-5절)
② 둘째 날 :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분리하심(6-8절)
③ 셋째 날 : 육지와 바다를 분리하심, 식물을 준비하심
(9-13절)
2) 지배자 배치의 단계 : 지배자를 두어서 다스리게 함
① 넷째 날 : 낮과 밤의 지배자를 두심(14-19절)
넷째 날의 창조기사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3절에 이미 빛이 있었는데, 14절에서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라는 표현은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있어”(동사 하야 + 전치사 러)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는 ‘역할’을 말하는 것이다.
16절에서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라는 표현은 모순이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만든다’(‘아사’)라는 동사가 명사 두 개를 지니고 나타날 때 그 의미는 영어 사역동사처럼 ‘-을 -로 되게 하다’(become)로 번역해야 한다. 성경에 이런 표현이 40여 회 나오는데 모두 ‘되게 하다’(become)로 번역하였다.
16절에서 세 번째 광명체인 별은 두 번째 광명체에 이어서 접속사 ‘그리고’(and)와 함께 명사 그 자체만 나타난다. 즉, 별이 이 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다. 14-16절은 하나님이 새로운 광명체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광명체에 위치와 임무를 새로 규정지어 준 것이다.
② 다섯째 날 : 물의 지배자를 두심(20-23절)
21절, “창조하시니”에는 히브리어 동사 ‘바라’가 사용되었는데, ‘바라’는 하나님의 행위에만 사용되는 말이다(‘바라’는 1:1, 21, 27에서 사용되었다).
③ 여섯째 날 : 땅의 지배자를 두심(24-25절)
3) 인간을 창조하심 : 만물의 지배자인 인간을 만드시고 다스리게 하심(26-31절).
26절의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다.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회의를 하고 있다. 인간의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회의의 결과이다.
* ‘하나님의 형상’의 이중적 의미
① 인간의 통치권과 문화적 사명
(땅과의 관계, Physical likeness of God)
②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함을 의미
(하나님과의 관계, Moral likeness of God)
4)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심 : 구속의 완성(2:1-3)
하나님의 창조 사역(구속의 사역)이 이제 마쳐졌다.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의 창조가 완성되었다. 하나님은 이제 창조를 완성하신 후 창조물을 누리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만 쉬는 것은 아니다. 모든 피조물도 함께 쉬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안식이다. 일곱째 날에 대해서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이 없다. 이 말은 일곱째 날의 무제한성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이제부터 영원히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5. 창조기사에서 ‘날’의 개념
흔히 창조기사에 나타나는 “날(히, YOM)”을 오늘날의 24시간적 하루로 생각하여 하나님의 창조는 6일 동안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 대해서 구약학자들간에 의견이 나뉘지만 보수주의 학자들은 대체로 “날(YOM)”을 24시간적 하루로 보지 않는다.
구약학자 글리슨 아쳐는 창조기사에서 나타나는 “날(YOM)”이 24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성경 여러 곳에서 YOM은 24시간외의 의미로 사용된다(출 13:13=년, 잠 25:13=계절, 창 35:3,40:4=기간동안.period, 참 31:25=불확정적인 때, time.등).
그리고 심지어 창조기사에서도 YOM은 2:4에서 창조사역하신 그 기간을 말하는 것이지 정확한 24시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고, 1:5, 16에서는 낮(YOM, 12시간)을 표현했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기사의 “날(YOM)”을 특정한 기간 혹은 창조의 구분의 표현으로서 보아야 한다.
3. 하늘과 땅의 계보(2:4-4:26)
1. 1:1-2:3과 2:4-25의 관계
1:1-2:3은 하나님 나라의 한 과정을 완벽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2:4-25에서는 다시 앞의 것과 유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제2의 창조가 있었음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구속의 과정을 묘사하기 위함이다.
즉, 1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창조의 순서를 기록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인간이 중심에 위치하여, 인간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외부 환경에 이르기까지(에덴동산, 나무, 강, 들, 짐승과 새들) 논리적 순서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사람을 만드심(2:5-7)
5-6절의 내용은 사람이 창조되기 전의 상태를 묘사한다. 7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다. 물론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 외에 또 다른 사람을 만들었다는 기사가 아니라 1:27절과 조화를 이루면서 보충 설명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구절이다.
7절의 목적은 인간의 구조가 ‘흙+생기=생령’이라는 사실을 밝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손길로 만들어졌음을 말하는데 있다. 본문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구조적 분석을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7절은 인간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우리는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물로 이해하지 말고 오히려 전인격적 존재(whole person, 영육 통일체)로 이해해야 한다.
*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인간론 일부분 요약)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은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특성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지침계 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가르침은 기독교 인간론의 심장부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27절)는 말씀은 인간의 영적, 도덕적 순결성만을 묘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이 그 이상의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이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최초에 어떠한 방향으로 자기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해(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서만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을 포괄적 존재(the totality of his existence)로 부각시키려는 것이 그 중심 목적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성경의 선언은, 인간은 그 구성 전체가 하나님을 닮았고, 하나님을 반영시키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바빙크는 말하기를,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거나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그 전체성(entirety)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형상’(히브리어로 첼렘과 데무트)이란 단어 속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사상은 ‘···과 같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창조시에 하나님과 닮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상은 인간은 마땅히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투영(mirror)하고, 하나님을 대표(represent)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① 본래적 형상(The Original Image)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본래적 형상이 존재하였다. 최초의 인간 부부는 순전함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삼중적 관계 속에서(대신, 대인, 대물) 순전함과 순종으로 그들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들이 존재했던 단계는 아직도 죄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단계였다. 타락 이전 아담과 하와가 존재했던 원상의 상태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② 변질된 형상(The Perverted Image)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은 모두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변질되어 일그러져 버렸다. 구조적 측면의 하나님의 형상은 여전히 존속했으나 - 인간의 재능, 재질, 역량 등은 타락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았다 - 이제 인간은 이러한 재능들을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변한 것은 인간의 구조가 아니라 그가 그의 역할을 감당하는 방식, 다시 말해서 그가 지향해 가는 방향이 바뀌게 된 것이다.
③ 새롭게 된 형상(The Renewed Image)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변질된 그 이래로 그 형상은 갱신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 갱신과 복원은 구속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는 능력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던 인간이 이제는 구속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그것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 회복은 종종 ‘거듭남’이라고 불리는 중생-이 사건은 “성령의 역사라고 정의될 수 있는 사건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으며 그 말씀의 선포를 통해 성령께서 사람을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연합을 이루게 하시며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사 전에 영적으로 죽은 그를 다시 살리사 이제 기꺼이 복음을 믿게 하시며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다”-에서 시작된다.
그 형상의 회복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화의 단계 속에서 계속되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주묙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형상이시기에 하나님을 더욱 닮아 간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형상의 갱신이 교회론적 측면을 갖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형상의 새로워짐은 독립된 개체로서의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의 성도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교회와 관계된 것이다(엡 5:26).
형상이 새롭게 되는 것은 사람 속에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책임성도 포함되고 있다는 점이다.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나 옛 사람을 벗는 일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돌보는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 새로워지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신약성경에서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단순히 찬미되어지고 관람되어지는 박물관의 진열품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따르도록 명함을 받는 살아 계신 모범 즉 그리스도라는 모범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이 형상의 새로워짐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생각과 말과 삶에 이르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새로워짐의 중심부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사랑하라는 사랑에의 부르심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의 새로워짐은 우리가 그 속에서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경험에 우리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강조컨대 이러한 갱신은 여전히 기본적으로 성령의 역사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최후의 부활의 이쪽 언덕에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들은 훗날 온전히 새로워지게 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처럼 보일 것인가에 대한 약간의 힌트요 암시에 불과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④ 온전케 된 형상(The Perfected Image)
인간이 마지막으로 영화롭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 그 완성에 이르게 된다. 형상의 이러한 종국적 완성은 그의 구속받은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절정이다. 우리가 확신하건대 그때에 우리는 완전히 그를 닮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닮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기독론적 인간관의 최상을 보려면 최초에 창조되었을 때의 인간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오히려 미래에 새롭게 되어질 그 인간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영화롭게 되심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 또한 그리스도의 영화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형상의 종국적인 완성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어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그 모양이 완성될 것이다.
우리가 그 형상의 미래적 완성에 대해 계속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완성된 형상이 무엇과 같을 것인가를 정확하게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 불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확신컨대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삶과 우리의 미래의 존재 사이의 유사점들을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순히 유사점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3. 에덴동산의 창조와 그곳에서의 안식(2:8-17)
1) 에덴에서의 안식
4절 후반부부터 황무지가 원시상태로 변해가며 땅이 습기를 가지고 생명력 있는 모습으로 변해 간다. 이렇게 구속이 완성된 땅은 결국 에덴동산의 아름다운 땅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인간이 안식하도록 하셨다. 이 구절은 인간 창조의 목적과 궁극적 의도를 보여 준다.
2) 에덴 동산의 위치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셨다. 에덴 동산의 위치는 동방의 에덴(직역하면, ‘동방으로부터’), 즉 서쪽에 있었고 강의 근원지에 있었다.
3) 에덴 동산의 요소들
계시록에 언급된 미래의 하나님 나라와 비교하여 볼 때 에덴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새 하늘과 새 땅)의 그림자인 동시에 진전되지 않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① 강 : 강은 유대에서 생명의 근원의 상징이다. 계 22:1-2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도 생명수 강이 흐르고 있다.
② 보석 : 계 21:19에서도 그 성이 열 두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말한다.
③ 생명나무 : 계 22:2에서도 그 성에 생명나무가 있음이 언급된다.
④ 하나님의 임재 : 계시록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에 하나님의 보좌가 내려옴으로 완성된다.
4. 하나님과 아담의 언약(생명과 사망의 언약)
에덴 동산 중앙에 특별한 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하나는 생명을 주는 나무였고 하나는 사망을 주는 나무였다. 즉, 이 두 나무는 생명과 사망의 나무였다. 하나님은 이 두 나무가 짝을 이루고 서 있는 것을 통해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이 왜 이러한 나무들을 만드시고 언약을 맺으셨는가? 그것은 인간을 얽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하여금 더 좋은 것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에덴에서의 인간은 완전했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완전함이었다. 그것도 물론 좋은 것이었으나 만약 인간이 순종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취한다면 그것은 극치의 완전함이 되는 것이다.
* 종주권 언약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은 종주권 언약이다. 종주권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이지만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서 지시는 언약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일방적인 언약을 맺으셨지만 아담이 타락한 결과에 대해서도 역시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셨다.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5. 여자를 만드심(2:18-25)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여겨서 돕는 배필(직역하면 ‘상응하는 조력자’)인 하와를 만드셨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고 서로 좋아하게 되는 것은 창조질서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동성연애는 창조질서를 역행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남자의 갈비뼈(직역하면 ‘옆구리’)를 취하셔서 여자를 만드셨다. 그리고 한 몸이 되게 하셨다. 그들은 성적으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관계는 나중에 타락을 통하여 파괴되었으며, 오직 한 쌍의 남녀가 서로간에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결혼의 때에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 창조질서에서 본 남성과 여성의 관계
①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다. 그러나 먼저 창조되었다고 해서 남자가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보다 짐승들이 먼저 창조되었다고 해서 짐승이 인간보다 우월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단지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으므로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고 주관하는 것이 창조질서인 것이다.(고전 11장, 딤전 2:11 참조)
② 성의 구별은 상호 보완하는데 목적이 있다.(창 2:18) 인간은 반드시 이성을 통해서 참다운 만족과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성간의 연합은 결혼을 통해 가능하다.
③ 결혼을 통하여 둘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독자적이고 견고한, 하나님이 보증한 결합이다(막 10:8 참조).
④ 그들 서로에게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한 자연스러움이 있었다(25절).
6. 인간의 타락(3:1-24)
1) 타락의 원인과 경위 : 죄의 근원은 사단이다. 사단은 뱀의 형체를 입고 인간에게 접근하여 유혹하였는데, 뱀은 하나님이 만드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짐승이었다.
그러나 간교하다는 말이 나쁜 의미는 아니다. 문자적으로 “간교한”이라는 말보다는 “영리한”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다고 보아진다. 간교하다는 말을 나쁜 의미로 이해하면 이미 그때 동물세계에 악이 내재해 있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1:31의 의도와는 상충될 것이다.
사단의 유혹으로 인간은 죄를 범하고 말았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었으며 선악과 자체에 죄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2) 타락후의 인간의 모습
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다.
② 육체의 시각이 발달하여 흙의 것만 추구하게 되었다.
“눈이 밝아 자기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7절) 아담과 하와는 몸을 감싸기 위한 치마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성기를 가리기 위한 것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옷을 지어 입음으로써 육체를 가꾸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③ 선악의 기준을 인간 마음대로 설정하게 되었다(22절).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과 동일한 판단 수준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라 선악의 판단 기준을 인간 스스로 설정해 버렸다는 뜻이다. 인간은 선악의 판단 기준으로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의 능력을 택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의 이성을 놓은 것이다.
3) 하나님의 저주(3:14-19)
① 사단에 대해(14-15절) : 하나님은 인간에게 와는 달리 사단에게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으시고 오직 판결만 할뿐이다.
a. 배로 기고 흙을 먹을 것이다.
뱀이 이제 배로 기어다닐 것이라는 선언은 원래 뱀이 다리로 걸어다니다가 이제는 기어다니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며, 마치 기어다니는 것이 현상학적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에 사용된 표현이다. “흙을 먹는다”는 표현은 실제로 뱀이 흙을 먹는 것이 아니고 낮아질 것이고 철저하게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시 72:9, 사 49:23, 애 3:29, 미 7:17 참조).
b. 여자와 원수가 되고 그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이다(3:15, ‘원시복음’).
② 여자에 대해(16절) : 여자가 먼저 죄를 지었으므로 여자에게 먼저 죄를 물으시고 판결하신다.
a. 아이를 낳을 때 해산의 고통이 있을 것이다.
b. 남편에 대한 사모함(남자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질 것이나, 남편에 의해 지배를 받을 것이다.
③ 아담에 대해(17-19절)
a.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b.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육체의 운명).
④ 땅에 대해(18절) :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피조물도 함께 형벌을 받게 되고, 후에 인간의 구원받을 때 피조물도 함께 구원받는 것이다.
4) 하나님의 긍휼(3:21)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인간에 대한 저주의 내용가운데도 간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지어 입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의미이다.
5) 에덴에서 쫓겨남(3:22-24)
24절에 나타나는 ‘두루 도는 화염검’이란 칼처럼 생긴 불길이 계속 회전되는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표현에서 죄인을 쫓아내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낙원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7. 타락한 인류의 초기 발전(4:1-26)
1) 아담과 하와가 자식을 낳음(4:1-2)
아담은 자식을 낳은 후 아마도 3:15의 약속이 당장 이루어지는 줄 알고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죄의 결과를 깊이 인식하면서 빨리 여자의 후손을 낳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담의 오해였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졌다.
2) 가인과 아벨의 제사(4:2-7)
① 본문을 근거로 하여 가인과 아벨을 농경문화와 목축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농경문화는 좋아하시고 목축문화는 싫어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비록 그런 예가 구약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예, 렘 35:6), 여기서 문화의 대조는 전혀 부수적인 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양쪽 방식을 다 인정하신다(참조, 신 8장).
②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 중 아벨의 것만 취하셨다. 왜 그랬는가? 어떤 사람들은 가인의 제사에는 피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피가 없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실격시켰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참조, 신 26:1-11).
본 절에 명시되어 있는 모든 것은 아벨이 자기 양떼 중에서 최상의 것을 바쳤다는 것과 가인의 영은 오만 무례하였다는 것이다(5절 후반부). 신약도 또한 아벨의 생활과는 달리 가인의 생활은 자기의 제사와 모순되는 모습이었으며(요일 3:12), 아벨의 경우 그의 믿음이 제사가 열납된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증언한다(히 11:4).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삶과 일치된 믿음의 제사이다.
* 7절, “죄가 문에 엎드러지느니라” : 이는 죄가 문밖에 있다가 문을 열면 안에 있는 사람을 덮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표현이다.
3) 가인의 범죄와 형벌(4:8-15)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11절 이하에서 회개하지 않은 가인에게는 아담보다 더 날카로운 저주가 선언되었다. 가인은 땅을 잃고 유리 방황하게 될 것이고 땀을 흘려도 땅이 소출을 충분히 내어 주지 않을 것이다. 죄가 깊어 갈수록 땅은 더욱 황폐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에게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신다(15절).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다.
* 14절, “나를 만나는 자가.....” : 이미 땅에는 아담의 자손들이 어느 정도 살고 있었을 것이다.
4) 가인의 정착(4:16-24)
가인은 하나님의 ‘유리방황’하라는 명령을 거역하고 에덴동편 놋이라는 땅에 정착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었다. 이 에녹이라는 말은 ‘시작하다’라는 뜻이다. 가인은 이곳에서 하나님 없이 새로 시작하려고 했던 것이다.
가인의 후예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예술과 문화와 기술을 일으켰다. 음악, 예술, 기술 등이 원래 불택자의 계보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술, 기술이 마귀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 비록 불택자의 계보에서 그런 것이 나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원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불택자 역시 자연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능력(Physical likeness)을 가지고 있으므로 문화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5) 셋이 메시야의 계보로 선택됨(4:25-26)
아담의 계보에서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경건한 자손 셋이 등장한다. 그것은 창조된 세상이 점점 퇴폐해 가는 중에도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6절에서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아벨 이후 영적 성장을 위한 새로운 줄기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4. 아담의 계보(5:1-6:8)
1. 아담의 계보(5:1-32)
1) 성경 계보의 원리
① 중요하지 않은 이름은 생략되었다.
② “A가 B를 낳고”의 구(phrase)는 단순히 부자관계보다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③ 저자는 구조적 조화를 맞추려고 노력했다(마 1장 참조).
2) 사람들의 장수에 관하여
노아 홍수 이전의 지구는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상태였으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금보다 장수할 수 있었다.
3) 에녹의 승천(5:21-24)
이 부분은 성경에서도 놀랍게 빛나는 한 장면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란 문구는 구약적 경건의 본질(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갔다. 혹자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갔다”라는 표현이 결국 죽었다는 표현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에녹과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간 것으로 설명한다.
2. 인간의 극도의 타락(6:1-8)
1) 1-2절 : 본문은 상당히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보수 신학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셋의 자손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한 당시 땅을 다스리던 통치자들이라고 다양하게 해석한다. 하지만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예를 가리킨다고 한결같이 주장한다. 어느 것이 정확한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으며 각각의 이론들은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여러 해석.
① 셋의 자손 : 경건한 셋의 자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해석한 견해는 대부분의 보수적인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이제 경건한 자손마저 타락함으로써 온 세상이 급격히 부패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② 천사 :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라고 보는 견해는 성경의 다른 곳에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으나, 근본적으로 천사와 같은 영물들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결혼하거나 생육할 수 없다.
③ 통치자들 : 홍수 직전 세상을 다스렸던 통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독재정치를 하므로 세상이 어지러웠으며, 또한 자신의 무절제한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여자들을 취했다. 그들의 난잡한 생활이 폭력을 수반하였기 때문에 “강포가 땅에 가득하였다.”(6:13)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편 고대의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른 예는 시편 82편 등에서 찾을 수 있다.
2) 3-4절 : 3절의 120년간이라는 표현은 노아 홍수전 유예기간이거나 아니면 짧아진 평균수명이라고 보여진다.
* 네피림 - AV는 giant(거인)라고 표현.
RSV, RV는 그대로 네피림이라고 표현.
3) 5-7절 : 5절의 “모든..... 항상....... 뿐임을....”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악이 외형상으로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 극도에 도달해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독보적 존재가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은 심판을 결심하셨다. 한편 모든 생명은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과 피조물을 함께 심판하실 계획이셨다.(롬 8:19-21참조)
4) 8절 : 7절에서는 과격하게 표현되었으며 8절에서는 단순하고 부드럽게 문장을 맺고 있다.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의 양극단을 동시적으로 대처하시는 분이시다.
5. 노아의 계보(6:9-9:29)
1. 노아와 방주(6:9-22)
1) 9절 : “노아의 사적”은 노아의 계보와 동일한 말이며, 이는 창세기에서 새로운 단원을 시작할 때에 사용하는 특수 어법이다. 이러한 어법이 암시하는 것은 창세기가 인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야의 보존된 혈통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의로운 사람)의 근거가 노아의 행동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8절).
인간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의 결과일 뿐이다. 어느 시대에나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항상 소수였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소수의 의인을 통해 역사를 움직여 나가신다.
2) 10-12절 : 이제 세상은 창조 질서의 아름다움과 반대 입장에 있었다.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의 원래 상태가 현저하게 파괴되었다.
3) 13-22절 :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신다. 이 방주는 은신처를 의미한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일은 역사적 사실이며 여기에 기록된 내용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 축구 경기장과 비교해 본 방주의 크기
2. 노아의 순종(7:1-16)
노아는 하나님의 명하심을 다 준행하였다. 16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는 표현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을 보여 준다.
3. 대 홍수(7:17-8:22)
1) 홍수의 원인 : 죄악의 관영(6:5, 11, 12, 13)
2) 홍수의 목적
① 타락한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서(6:7, 13, 17, 7:4, 21-23)
② 의인을 죄악에서 분리시켜 보존하기 위해서.
(6:8, 19-20, 7:1-3, 7-9)
3) 홍수의 범위
구약학자 영과 글리슨 아쳐는 부분적 홍수를 말한다. 즉 홍수의 목적은 인류의 멸망이었으므로 당시 인류가 그리 넓지 않은 지역에 한정되어 살았다면 홍수지역도 한정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중요한 논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4) 홍수의 과정
홍수의 과정은 창조의 과정과 정반대(역질서)이다. 이 역질서를 통해 1:2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① 하늘이 열려 물이 쏟아짐
↔ 궁창을 두어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구분함.
② 땅에서 물이 솟아 남
↔ 물이 한 쪽으로 모여 뭍이 드러남.
③ 물이 땅에 덮이고 생물을 죽임
↔ 땅을 정리하고 생물을 두심.
5) 7-12절 :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 물의 깊이를 판단한다.
6) 15-22절 : 홍수 이후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제사를 받으신 후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4. 새로운 법령(9:1-7)
1) 1-2절 : 비록 하나님은 아담에게 내리신 명령을 반복하시고 있지만, 이제 인간의 통치는 제한적일 뿐이다.
2) 3-4절 : 하나님은 원래 인간에게 식물만을 먹으라고 하셨으나 이제 홍수로 땅위의 식물이 멸절하자 고기를 먹으라고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피는 하나님께 속한 신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3) 5-6절 : 피의 신성함에 관한 주제는 이제 더욱 깊이 다루어져 있다.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사형제도의 정당성을 또한 증명해 준다.
9:5-6 He who pours out (A)
the blood of (B)
man (C)
by man (C')
his blood (B')
shall be poured out. (A')
5. 노아의 언약(9:1-17)
1) 언약의 성격
하나님의 언약은 ‘내 언약’, 즉 하나님의 개인적이고 일방적인 종주권 언약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언약은 어떤 새로운 언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언약(아담과 맺은 언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고 회복하는 것이다.
2) 언약의 요소
① 창조질서 보존에 대한 언약 : 땅위에서 번성하고 함부로 살인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다시는 땅을 물로 심판치 않을 것을 약속하신다.
② 창조질서의 회복에 대한 언약 : 생육하고 번성하고 자연을 지배하라고 명령한다.
③ 우주적인 언약 : 이 언약은 노아와만 맺어진 언약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모든 피조물과 함께 맺어진 언약이다. 노아는 여기서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④ 영원한 언약 : 언약의 징표인 무지개가 있는 한 언약은 하나님에게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라고 하신다(12, 16절). 무지개의 증거는 하나님 자신이 영원히 언약을 기억할 것이라는 맹세의 표시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언약을 비록 인간이 파기하더라도 자신이 친히 그 책임을 지실 것임을 천명하신다.
6. 노아의 실수와 셈, 함, 야벳의 운명(9:18-29)
노아는 처음으로 농사를 지은 후 포도주를 마시고 술에 취해서 그의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었다. 이때 그의 아들 함이 보게 되어서 죄를 지었다.
그런데 함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았는가? 어떤 이들은 함이 노아와 동성애를 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벌거벗었음을 보았다”의 히브리어 단어는 사역형이 아니므로 함이 단지 아버지의 하체(성기)를 본 것으로만 해석해야 한다.
고대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는 것을 가정 윤리를 파괴하는 행동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아버지의 권위가 조롱받는 것으로서 해석되었다. 함은 마치 자기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여 이긴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두 형제에게 말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사소한 사건인 듯 한 것이 당시에는 커다란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노아는 가나안 인들이 셈 족속과 야벳 족속의 종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함이 행한 잘못 때문이 아니라 가나안 인들이 함과 같이 타락한 삶을 즐겼기 때문이다.
6. 노아의 아들들의 계보(10:1-11:9)
1. 민족들의 족보(10:1-32)
1) 야벳의 아들들(2-5절)
야벳은 이스라엘과는 거리가 먼 북방 민족이었다. 북방 민족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많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예언서에서는 자주 나타났다(겔 27, 37-39장). 야벳의 아들들은 흑해와 카스피해로부터 스페인에 걸쳐 유라시아 지방에 흩어졌다. 그들은 지중해 연안과 섬에 거주하다가 점차 유럽 본토로 건너갔다.
2) 함의 아들들(6-20절)
함의 아들들은 동부와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민족들을 형성했다. 그들은 남 아라비아, 에디오피아, 이집트, 가나안, 붓 등에 거주했다. 그들은 같은 지역에 거주하던 셈족과 섞이게 되었다.
3) 셈의 아들들(21-31절)
셈족은 선택된 민족으로 남았으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속에 보존되어 왔다.
① 아람-우스, 훌, 게델, 마스
② 아르박삿-셀라-에벨(히브리인들의 조상:에벨 →이브리→히브리)-벨렉,(욕단)-.........
③ 엘람, 앗수르, 룻
2. 바벨탑의 건축(11:1-9)
1) 2절 : 시날이란 ‘두 강의 땅’이라는 뜻인데, 이곳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인 바벨론을 가리킨다.
2) 3-4절 : 두 가지 죄악
① 그들은 하늘에 닿기를 원했다. 즉 하나님만큼 높아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에덴에서의 뱀의 유혹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해서는 안된다.
② 인간들은 흩어짐을 면하려고 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흩어지라고 명령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뭉치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았다. 그들은 아마도 홍수심판에 관한 말을 듣고 높은 탑을 쌓아 다시 홍수가 와도 멸망당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3) 5-9절 : 여호와께서 강림하셔서 그들의 도전에 대해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케 하시자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언어 차이는 문화적, 역사적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심판의 결과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오순절에 있었던 언어 일치 현상(방언)은 새로운 회복을 의미한다.
4) 6절 : 여기서 “인간의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말은 인간이 극도로 타락해져서 더 이상 타락해 지면 인간이 다시 돌이켜 질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7. 셈의 계보(11:10-32)
1. 아브라함의 조상들(11:10-26)
선택받은 혈통은 이제 구 세계에서 나와 족장들의 세계로 진입한다. 10:22이하에 나와 있는 이름들 중에서 여기서는 오직 에벨의 조상만이 다시 나타나고 있으며, 이후로의 계보의 흐름은 10:25 이하에 있는 바와 같이 욕단이 아니라 벨렉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 족보는 아브라함에게까지 이른다. 즉, 여기에 기록된 족보는 아브라함의 역사적인 실존과 근원을 밝히기 위함이다.
노아의 아들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이르는 10명의 족장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셈 - 아르박삿 - 셀라 - 에셀 - 벨렉 - 르우 - 스룩 - 나홀 - 데라 - 아브라함
2. 데 라(11:27-32)
1) 데라는 아브라함, 나홀, 하란을 낳았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비록 장자가 아니지만 선택된 혈통의 주인공으로서 앞에 등장한다.
2) 데라는 우상숭배자였는데(수 24:2), 하나님은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심으로 더 이상 이방종교의 영향하에 머물지 않도록 하셨고 하란에 거하게 하셨다. 아마 아브라함도 당시의 사회가 철저한 부권 체제였으므로 처음에는 이방종교인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선택된 혈통으로 남은 것이다.
8. 아브라함(12:1-20:18)
1.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심(12:1-9)
드디어 아브라함이 등장한다. 11장에서 민족들을 땅에서 흩으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12장에 와서는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차지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아브람은 하란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다. 고대인에게 있어서 땅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을 가장 큰 복으로 생각했고 현실도 그러하였다.
하나님이 당시 방랑자였던 아브라함에게 주실 땅은 단지 오늘날 천국의 예표로서의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현세에서 사용할 수 있는 땅이었다. 게다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땅 뿐만 아니라 후손과 복에 대한 약속이었다. 당시 부족 사회에서는 자손이 대단히 중요했다. 가문을 잇고 재산을 상속하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 후손의 번창은 필수적이었다. 또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 역시 독특한 은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세 가지 약속, 즉 땅과 후손과 복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난다.
**아브람의 여정
* 세 겜
아브람은 ‘세겜’을 통과했는데 이곳은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세겜은 팔레스타인의 중앙 교차점이 되는 곳이며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의 대로에 위치해 있었고 후에 백성들에게 결심을 요청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에 회집되어 축복과 저주 사이에 선택하도록 명령받았고(신 11:29-30), 여기서 여호수아는 그의 마지막 훈시를 주었으며(수 24장), 여기서 솔로몬의 왕국이 어느 날 둘로 나뉘어 지도록 결정되었던 곳이다(왕상 12장).
2. 애굽(이집트)으로 이주한 아브람(12:10-20)
기근으로 인해 아브람은 애굽에 잠간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지도 않고 자기의 계산에 따라 애굽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소개하였다.
당시 아브람은 75세가량이었으며 사래는 그보다 10년 젊은(17:17) 65세였다. 족장들의 수명은 대충 우리의 2배 정도가 되었는데 아마도 사래는 상당한 미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브람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잘 해결된다.
3. 롯과 헤어짐(13:1-18)
여기서 아브람은 뛰어난 도덕성을 가지고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도록 양보한다. 롯은 자신이 원하는 땅을 먼저 선택하여 실패했으나 아브람은 하나님이 주실 땅을 기다렸기에 성공했다. 신앙인의 선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약속에 따라 믿음을 가지고 선택해야 한다.
4. 왕들의 전쟁과 멜기세덱과의 만남(14:1-24)
본문은 성경의 역사와 세계역사의 일치를 증거하는 부분이다. 본문에 언급된 사건, 지명, 인명 등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부분이다. 이 상황은 청동기 중기 시대이며 주전 이천 년대 초기이다. 즉 아브람의 역사성, 창세기의 고고학적 사실성의 증거가 되는 본문이다. 시날 주변의 왕들과 소돔 주변의 왕들이 전쟁을 한다. 이 과정에서 롯은 포로가 되고 아브람은 그를 구출한다.
그런데 아브람의 승리는 아브람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었다. 나중에 멜기세덱은 그 승리를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그것을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복으로 이해하였다(20절). 하나님은 실제로 그의 약속을 계속 지키신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도 승리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환경의 변화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고전 10:13등)으로 인한 것이다.
한편, 아브람은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고 그에게 십일조를 바친다. 멜기세덱은 성경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자신의 위대한 후손인 메시야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시 110:4), 히브리서(7장) 기자는 멜기세덱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전형(type)으로 언급하면서 멜기세덱의 익명성을 강조했다.
또한 아브람은 전리품을 취하지 않으므로 소돔왕으로 부터 절대적인 독립을 유지하게 되고 자신의 소유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장을 통해 아브람의 도덕적 상태가 더욱 강화되어 감을 알 수 있다.
5.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는다(15:1-21).
1) 언약의 도입 : 아브람이 땅에 대한 약속의 확증을 요구하였다.
2) 언약의 준비 : 짐승을 잡음(렘 34:18이하 참조)
3) 언약의 내용 : 땅, 후손, 복
4) 언약의 확증과 성격 : 캄캄함이 임하고 횃불이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갔다. 지나간 것은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언약의 책임을 지시겠다는 표시이다. 또한 이 언약은 죽음으로 유효해 지며 언약을 어길 시에 또한 죽음이 오게 된다는 표시이다.(히브리서 9:16-22 참조, 유언을 언약으로 바꾸어서 번역해야 함)
* 출애굽 사건의 예(13-18절)
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가? 어떤 사람들은 아브람이 언약을 맺는 가운데 실수 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브람의 자손이 바로 가나안에 정착하지 않고 애굽에 가게 된 것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갈 시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 자손들의 애굽 생활이 결코 저주의 기간은 아니었다. 처음에 그들은 풍족하게 생활했다. 단지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죄악이 늘어갔으므로 후기에 많은 고통을 당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켜서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셨다.
* 가나안에 바로 머무르지 못한 이유
①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에 바로 들어갈 경우 그들과 바로 동화될 위험성이 있다. 즉 이스라엘 자손에게 적절한 훈련이 필요하였다.(13절)
② 아직 가나안 인들을 쫓아낼 만큼 그들의 죄악이 심각하지 않았다(16절). 이 사실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이 침공이 아니라 심판의 차원에서 해석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③ 고고학적으로 가나안땅에 당시 기근이 심했던 것 같다.
6. 이스마엘의 출생과 하갈(16:1-16)
아브람이 하갈을 취하여 자손을 출생시키는 행동은 당시의 사회관습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아 들여졌으며, 아브람은 이런 식으로 15:3의 약속이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 인물(아브람, 사래, 하갈)들은 각각 거짓된 교만(4절), 거짓된 비난(5절), 거짓된 중립(6절)으로 죄성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사래의 가면은 곧 벗겨지며(6하반절), 정의에 호소하는 듯한 그녀의 배후에는 증오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갈은 도망하였고 노상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다. 그것은 하갈의 자손이 번성하여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게 될 것이라는 복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아들의 이름은 이스마엘이 될 것이며, 그의 후손들이 동방 곧 고대의 근동 지역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하갈의 눈에 비친 하나님은 보고 있으신 하나님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보이신” 하나님이셨다.
하갈은 “당신은 보이심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관망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한편 아브람은 후에 이스마엘을 비롯하여 많은 아들을 낳았다(23:1, 25:1-2).
7. 아브람의 언약이 재확인되고 인쳐짐(17:1-27)
1) 1-3절 : 15장에서와 17장에서 두 단계로 언약이 맺어지는데, 이것은 언약의 오랜 지연으로 인해 아브람의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아브람의 99세 때에’라는 말은 전장(16장)후 13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그 사이의 사건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은 성경은 단지 역사를 기록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2) 4-8절 : 아브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그것은 원래의 두 요소들 곧 ‘아브(아버지)’와 ‘람(높은)’과 덧붙여진(아브라함) 제 3요소의 ‘하몬(다수)’의 융합이다. 즉 아브람은 ‘고귀한 아버지’(high father)라는 뜻이지만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a father of many nations)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바꾸시면서 자신이 확실히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확인 시켜 주셨고 아브라함은 비로소 완전히 열국의 아버지, 즉 믿음의 조상이 될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3) 9-14절 : 언약의 표인 할례 제도가 제정된다. 할례는 이미 고대 근동에서 성인의 표시로 널리 행해지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할례 제도는 언약이 피(죽음)를 요구한다는 것과 양피를 베어 버림으로써 깨끗하게 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4) 15-22절 : 사래와 사라는 ‘공주’라는 똑같은 단어의 단지 구형식과 신형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명을 하는 것은 그녀를 어떤 표지물(landmark)로 세움이었고, 그녀 개인으로 본다면 그녀 자신을 약속으로 인도한 것이었다(16, 19절).
5) 17-18절 : 아브라함의 솔직한 믿음의 갈등에 대해 하나님은 결코 엄하게 책망하지 않으시고 단지 바르게 조정해 주신다.
6) 19-27절 : 이삭의 탄생이 예언되었고, 아브라함과 그 집안 식구들이 할례를 받았다.
8.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탄원함(18:1-33).
정오의 만남과 다음날 소돔에서의 밤의 장면은 어느 의미로 보나 빛과 어두움의 대조이다. 전자는 말없이 친밀하며, 약속으로 가득한 분위기이다. 더 나아가 중보기도로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사랑이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면서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러나 두 번째 장면은 온통 혼란과 파멸뿐인데, 사랑 없는 추악함과 누추함으로 장식된다.
9.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19:1-29)
1) 1-3절 : 롯이 두 천사를 대접한다. 아브라함과 만났던 나그네들은 3명이었으나 지금은 두 명뿐이다. 한 명은 하나님(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셨으며 그 분은 아브라함을 만난 후 하늘로 올라가셨고 여기 소돔성에 도착한 두 명의 천사는 소돔성을 심판하기 위해서 파송된 것이다.
영적 존재인 천사가 눈에 보이고 음식을 먹는 등의 현상은 가능하다. 롯은 당시 소돔성에서 약간의 명성만 있었던 사람으로 짐작되며 롯이 두 천사를 금방 알아 본 것은 아니고 단지 낯선 나그네 정도로 생각하고 정중히 모신 것으로 짐작된다.
2) 4-13절 : 두 천사에 대한 소돔인들의 행패가 나온다. 아마도 그들은 동성연애를 즐겼던 것 같다(“상관하리라”). 그리고 천사들은 심판을 롯에게 선언한다.
3) 14-23절 : 롯은 천사들을 위하여 자신의 딸을 바치려 했고 천사는 롯의 가족을 구출한다. 그런데 롯이 자신의 딸을 바치려 했다는 것이 결코 옳은 행위로 받아 들여 질 수는 없다. 악을 악으로 대처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지체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의 태도와 그들을 구출하는 천사들의 태도는 인간의 연약성과 하나님의 구원의 절대적 자세를 보여 준다. 천사들은 소돔성 밖으로 나온 가족들을 향해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세상으로부터 나온 자는 결코 다시 애착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4) 24-29절 :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하고,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다.
10. 롯과 그의 딸들-모압과 암몬의 기원(19:30-38)
1) 30-32절 : 딸들의 말에서 도덕적 부패성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롯의 딸들이 소돔 성에 있으면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곳 거민들의 죄악에 오염되었던 것 같다. 환경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2) 33-38절 : 큰딸은 모압 족속을 이루었다. 모압이라는 말은 ‘아버지로부터’라는 뜻이다. 작은딸은 아들의 이름을 ‘벤 암미’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내 백성의 아들’ 즉 ‘같은 피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난 자식을 의미한다.
11.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속이다(20:1-18).
아브라함은 그랄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그는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왕에게 자기의 부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거짓말이 전혀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에게서 태어난 이복누이이기 때문이다(1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거짓말의 동기가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므로 그의 말은 거짓말로 취급된다. 아브라함에 대해 아비멜렉은 책망한 후에 선물을 주는데 그의 선물은 아브라함에게 붙어 있는 능력에 대한 그의 존경심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결국 아브라함의 기도로 하나님의 아비멜렉에 대한 진노가 사라졌다.
9. 이 삭(21:1-26:35)
1. 이삭의 출생과 이스마엘의 추방, 그리고 아비멜렉과의 조약(21:1-34)
이삭의 출생은 “그 말씀대로....”이루어진 것이다. 이삭의 출생으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추방되고 천사가 하갈을 위로한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바란광야에서 사냥군으로서 생활하며 성장한다.
* 22-34절 : 아비멜렉과의 조약.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언약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물에 붙인 이름인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 혹은 ‘일곱의 우물’이란 뜻이다. 이 브엘세바는 그 후 성지로 취급되었다.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은 후 에셀 나무를 심은 것은 신실한 언약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22:1-24)
1) 3-5절 : 3절에서 아브라함이 아찜에 일찌기 일어났다는 것은 그의 민첩한 순종을 가리킨다. 5절에서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제사를 드린 후 ‘우리가(한글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있다) 돌아오리라’고 확신에 찬 가운데 말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21:12)라는 이삭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므로 담대하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히 11:17-19은 이삭이 부활할 것을 아브라함이 기대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2) 6절 :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는 것이 요 19:17에 나타나 있는 사건을 필연적으로 생각나게 하므로 이삭이 예수님을 예표한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에 대해서 그렇게 분명하게 말하기는 힘들다.
3) 12절 : “내가 이제야 아노라.”라는 것은 이제야 비로소 아브라함의 헌신과 순종이 입증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전에는 아브라함의 헌신이 입증되지 않았었다. 하나님의 이러한 입증에 대한 요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믿음은 언제나 행위로 입증되는 것이다.
4) 15-19절 :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13:14이하에서 얻었던 것과 같은 확약을 받는다. 16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 맹세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절대적으로 지켜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5) 20-24절 : 나홀의 12자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자녀들이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24:4의 아브라함이 결심을 내리는 배경이 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여기에서 의미깊은 이름들은 브두엘과 리브가이다.
3. 사라의 죽음과 막벨라 굴(23:1-20)
1) 사라가 가나안 땅에서 죽었다는 것이 굳이 표현된 이유는 사라가 블레셋 땅에서 죽지 않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죽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요셉의 유언에서도 이 사실은 명백히 나타난다(50:25). 이에 대해 칼빈은 “그들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죽음으로 인해).... 죽음의 장애물도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러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고 그들의 무덤이 외치고 있다.”라고 말했다.
2) 나그네인 아브라함은 본 장에서 예의를 갖추고 정중하게 작은 땅을 사서 소유할 수 있기를 요청하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영구적으로 발디딜 곳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달린 아주 민감한 일이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서 땅을 사기 원했다. 6절의 호의를 베푸는 듯한 말은 오히려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나그네로 남아 있으라는 권유이다.
3) 아브라함이 이에 지혜롭게 한 개인의 이름을 지명하는데, 이것은 한 집단이 침입자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자산의 소유주는 고객을 환영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재치있게 활용한 것이다.
4) 10-16절 : 에브론은 아브라함의 실력있는 지위를 알았다. 11절의 제스쳐는 습관적인 가식이었을 것이며, 그가 생각하는 땅의 실제 가격은 높았으리라 생각된다(15절 참조).
4. 이삭의 신부를 선택함(24:1-67)
1) 하나님은 이삭과 관련하여 끝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요구하셨다. 나이도 많고 안전할 만한 재물도 가지고 있는 그는 이제 부동의 자세로 약속의 다음 단계를 응시하면서 결단성 있게 행동했다.
2) 그리고 아브라함의 충성스런 종은 조용한 분별력과 경건(26절 이하)과 그의 주인에 대한 헌신과(12하반절, 14하반절, 27절) 사물을 꿰뚫어 보는 확고 부동한(33, 56절) 자세를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 환도뼈(thigh) : 엄숙한 선언을 의미.
3) 3-4절 : 오직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만 결혼하라는 명령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일관성 있는 명령이다. 결혼의 대상자를 함부로 정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우리는 반드시 믿는 자를 결혼의 상대자로 삼아야 한다.
4) 63절 : 이삭이 들에 나가 묵상했다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결혼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5.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온 민족들(25:1-34).
1) 1-4절 : 아브라함은 후처를 취하여 많은 자손들을 남겼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했다는 것이 일부다처제에 대한 성경적 기초가 될 수는 없다. 여기에 나오는 기사는 아브라함의 실수를 말해주는 것이며 아브라함의 이러한 실수로 말미암아 오늘날까지 중동에서는 끊임없는 분쟁이 있는 것이다.
2) 5-11절 : 결국 아브라함은 죽는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믿는 자가 영육간에 구원받아서 사망에 이르지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사망을 맞이하는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2장에 근거하여 생각해 보건대 인간의 육체적 구원이 종말(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연기되어 있다는 말로써 설명될 수 있다.
3) 27-34절 : 야곱과 에서가 이삭의 아들로 태어난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은 분명한 범죄이다. 그러나 야곱이 에서의 영광을 가로챈 것도 하나님 앞에서 명백하게 잘못된 것으로 판단 받는다. 그러나 본문은 야곱을 비난하지 않고,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12장은 그런 관점에 동의하며, 경박한 에서를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순례자들과 정반대의 예로 제시한다. 성경은 장자권을 쟁취하는 것보다 포기하는 것을 죄로 취급한다.
6. 이삭에게 나타나신 하나님(26:1-35)
1) 1-11절 : 이삭은 그랄로 내려가서 아비멜렉을 만난다. 여기에 등장하는 아비멜렉이란 명칭은 그것들이 바로 등과 같이 공직의 이름이었거나 되풀이 되는 가족의 이름들이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삭은 여기서 그의 부친 아브라함이 범했던 것과 같은 동일한 죄를 짓는다(12:13, 20:2). 인간은 여전히 연약하며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필요로 한다.
2) 12-22절 : 이삭이 번영했다는 것과 우물로 인한 분쟁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이삭이 번영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이다(12절). 그리고 13절 이후에 나타나는 우물이야기가 이삭의 이야기의 끝까지를 지배하는데 우물은 사막 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3) 23-33절 : ‘브엘세바에서의 언약’. 여기의 언약은 아브라함과의 처음 언약을 새롭게 한 것이다(21:22이하). 언약은 세대(주체)가 바뀌면 반드시 갱신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24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자신이 ‘언약의 하나님’임을 계시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계속 유효하며 하나님은 그 언약을 잊지 않고 지키신다는 의미이다. 브엘세바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던 신성한 장소이며 이삭이 하나님께 처음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던 곳이다.
4) 34-35절 : 에서는 헷 족속 아내들을 취했으며 이것은 이방 백성과의 결혼이었으므로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또한 에서의 일부다처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위반되는 죄악으로 에서가 육적인 쾌락주의적 생활에 빠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10. 야 곱(27:1-36:43)
1. 야곱이 복을 차지함(27:1-40)
27장은 자신의 책임을 믿음없이 육체를 따라 완수하려고 시도하는 가족 전체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관여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잘못에 빠져있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주신 신탁(25:23), 곧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물리치고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다. 아버지의 계획에 동조한 에서는 야곱에게 맹세했던 것(25:33)을 파기하였다. 리브가와 야곱은 정당한 동기에서 제각기 믿음이나 사랑을 배제한 채 속임수로 하나님의 복을 얻으려고 했다. 결국 가족 전체가 범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야곱은 자신의 허물에 대한 대가를 치루기 위해 기나긴 고난의 생애를 살아야만 했다(28-35장).
2.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감(27:41-28:9)
1) 야곱이 하란으로 떠나는 것은 결국 리브가와 야곱의 거짓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보아야 한다. 이후에 야곱은 “몇 날 동안”(44절)이 아닌 “20년간”(31:28) 하란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였고, 리브가가 다시 야곱을 만났다는 기록은 더 이상 볼 수 없다(35:8, 27 참조).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만 범죄한 인간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2) 이삭은 야곱에게 가나안 사람들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고 명령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나가기 위함이었으며,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결코 근친상간의 의미는 아니었다.
3. 사닥다리 환상과 야곱의 서원(28:10-22)
1) 하나님의 계시(10-15절)
하나님은 환상을 통하여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그와 함께 하겠다고 계시하시며, 아브라함 및 이삭과 함께 체결한 언약을 야곱에게 되풀이하시면서 반드시 그 언약을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2) 야곱의 경건한 응답(16-22절)
① 여호와 앞에서 두려워 함-경외하는 마음.
② 기념으로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부어 그것을 성별함.
③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일컬어 그 사건을 기념함.
④ 처음으로 여호와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서원 형식으로 표현함(“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⑤ 십일조를 약속함.
4. 야곱과 라반의 딸들(29:1-30)
벧엘에서의 경험이후 야곱은 이제 에서로부터의 피난 생활에서 후손에 대한 약속의 성취에로 관심을 돌린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쉽게 라반을 만나고 사랑하게 된다. 역사와 사건들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개입 속에 질서있게 일어나는 것이다.
야곱은 라반에 의해 속임을 당하여 많은 세월(14년)을 고생하게 된다. 이는 야곱이 과거에 뿌렸던 씨에 대한 결과였다. 성경은 심는 대로 거둔다는 원리를 계속해서 보여 주고 있다.
5. 자손의 증가와 재산의 확장(29:31-30:43)
1) 자손의 증가(29:31-30:24) : 언약이 성취되고 있다.
처 |
자 식 |
레아 |
①르우벤, ②시므온, ③레위, ④유다, ⑨잇사갈, ⑩스불론, * 디나(딸) |
빌하 |
⑤단, ⑥납달리 |
실바 |
⑦갓, ⑧아셀 |
라헬 |
⑪요셉, ⑫베냐민 *이름 앞의 번호는 태어난 순서 |
2) 재산의 확장(30:25-43)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가능했다. 라반은 비록 이방 신을 섬기고 있었으나 여호와께서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했다(27절). 그것은 야곱의 생활과 자신에게 일어난 결과(재산의 확장)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야곱은 이제 떠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가나안의 후계자로서의 사명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특별한 섭리(초자연적 섭리)속에 야곱의 재산을 늘려 주시고 그가 떠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셨다.
7. 라반으로부터의 도망과 하나님의 보호(31:1-55)
1) 야곱이 가나안으로 떠나려 한 이유는 첫째로 야곱의 물질적인 축복에 대한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의 적대감(1-2절)이 점차 증가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3절). 야곱은 자신의 떠나려는 계획을 두 부인에게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올린 서원(28:20-22)을 지켜야만 한다고 말했다. 부인들 역시 야곱의 말에 동의하고 떠날 것을 결심하였다.
2) 그리하여 야곱 일가의 도피가 이루어졌지만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家神像)을 훔치는 바람에 생각했던 것보다 위험스런 도피가 되고 말았다. 드라빔은 라반의 집안이 이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당시 드라빔을 갖는 것은 상속권을 갖는 것을 뜻했다(15c. B.C. Nuzi문서 참조). 아마도 야곱은 언젠가 몰래 하란으로 돌아가서 라반의 모든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고 했던 것 같다. 결국 드라빔을 찾는데 실패한 라반은 다시는 야곱을 그의 땅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조약을 체결한 후 떠나도록 허락했다.
*경수(經水) : 여자의 생리현상인 월경에 대한 은유적 표현.
8. 야곱과 에서(32:1-33:17)
1) 1-2절 : 야곱은 길르앗을 떠나 길을 진행할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the angels of God), 즉 천사들을 만났다. 야곱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많은 무리)라 하고 그 땅을 마하나임이라 불렀다. 이 사건을 야곱이 처음에 그 땅을 떠날 때 벧엘에서 천사들을 만났던 일(28:10-22)과 비교할 때 교훈되는 바가 많다.
“하나님의 사자들”이란 표현은 구약에서 32:2과 28:11절에만 나타난다. 분명히 이 두 본문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약속의 땅을 떠난 야곱에게 벧엘이라는 이름을 짓게 만든 그 사건이 이제 그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면서 마하나임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에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시켰고 그의 약속의 땅에 대한 더욱 강한 믿음을 갖게 했다.
2) 3-20절 : 천사들을 봄으로써 힘을 얻은 야곱은 에돔에 있는 에서에게 사자들을 보냈다. 야곱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였다. 야곱은 자신과 자신의 조상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면서 기도했다. 이러한 확신과 두려움, 기도와 근심의 교차는 비록 성도라 할지라도 연약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3) 21-32절 : 야곱은 가족들을 피신시키고 하나님과 중대한 씨름을 했다. 이 사건은 그의 생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야곱이 처음부터 그가 하나님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중에야 상대방이 비범한 인물임을 깨달았고 축복을 기원했다. 한편,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숨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언약을 지키겠다는 것의 확증을 주시는 행위이다.
4) 에서와의 화해(33:1-17)
야곱의 걱정과는 달리 에서는 야곱에 대해 적대감보다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신 결과였다. 에서에게 적대감이 없다는 것으로 인해서 안도감을 느낀 야곱은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그가 깨달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예비해 두셨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9. 세겜에서의 비극(33:18-34:31)
1) 33:18-20 : 야곱은 세겜 땅에 장막을 쳤다. 세겜은 과거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장막을 친 곳이었다(12:6). 야곱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그 땅의 일부를 사서, 거기에 단을 쌓고(12:7), 그것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다. 그 뜻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그가 단을 쌓고 그러한 이름을 붙인 것은 주께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의 여정을 인도하셨음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 34:1-31 : 세겜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또한 이 비극은 복수심에 불타 올랐던 야곱의 아들들이 히위족속을 몰살시키는 참극을 연출하고 말았다.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야곱이 과거에 서원한 대로(28:19-22) 즉시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10. 벧엘로 다시 돌아옴(35:1-29)
야곱은 결국 벧엘로 돌아온다. 사실 야곱의 생애는 벧엘로 시작해서 벧엘로 끝나는 생애였다. 야곱이 처음 나그네 생활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 복을 받은 곳이 벧엘이었는데(28:13-15), 그 후 30년간의 나그네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금 하나님의 복을 확인 받은 곳도 벧엘이었던 것이다(35:9-13). 드디어 베냐민이 출생함으로써 야곱의 가족은 완결을 보았고 이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11. 에서의 후손들(36:1-43)
36장은 복잡한 내용으로 인하여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삭의 계보(25:19-35:29)가 끝나자 그의 아들들의 계보가 논의되고 있는 바, 이는 선택받은 계보(37장)로 넘어가기 전에 선택받지 않은 계보의 역사(36장)를 먼저 취급하는 관례(4장, 5장, 10:1-20, 10:21-31, 21:8-21, 22:1-18등을 참조)를 따르고 있다.
11. 요 셉(37:1-50:26)
1.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감(37:1-36)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것은 택하신 가족을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 그리고 가나안 땅을 소유할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외국의 지배아래 두는 것이 이미 아브라함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의도(15:13-16)였기 때문이다. 본 장에는 이스라엘을 이집트로 인도해 들이는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12형제들의 경쟁과 곤경을 통해 개시되고 있다.
2. 유다 가족의 타락과 계시 역사의 대 전환(38:1-30)
언뜻 보기에는 이상한 사건이 끼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38장은 창세기의 흐름을 막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비평학자들은 38장을 근거로 하여 창세기가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편집자들이 38장의 위치를 잘못 잡는 실수를 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38장은 결코 잘못 끼어 있는 장이 아니라 계시역사에 있어서 대 전환이 일어나는 중요한 부분이다.
* 38장은 죄 문제의 해결 (↘ 38장 ↗)과 씨의 보존을 보여준다.
3. 시험받는 요셉(39:1-23)
요셉은 애굽에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일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한 자, 곧 성공한 자가 되었다. 39장은 네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2-3, 21, 23절). 요셉은 시위대장(경비대장?)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지만 이겨낸다. 이일로 인해 나중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감옥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형통함을 누린다. 요셉은 아마도 글을 알았기 때문에 형통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애굽에서 글을 아는 사람은 많이 없었을 것이다.
4. 죄수들의 꿈을 해석해 준 요셉(40:1-23)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해 준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요셉을 비참한 감옥 생활로부터 영화로운 궁중 생활로 높여주기 위해 두 가지의 꿈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는 분이셨다.
5.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는 요셉(41:1-40)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준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다.
6. 총리가 된 요셉(41:41-57)
요셉은 드디어 총리가 되고 바로의 전권을 가지게 된다. 바로가 요셉에게 준 반지는 최종 결정권을 가진 반지였다. 바로는 또한 요셉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어 주었으며, 그를 바로 다음 가는 제 2인자로 삼고 그를 버금 수레에 태워줌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경의를 표하게 하였다. 이 때 요셉의 나이는 30세로서 애굽에 팔린지 13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37:2 참조).
7. 야곱의 가족들이 이집트로 내려감(42:1-47:27)
하나님께서는 기근을 이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요셉 치하에 있던 애굽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한 것(15:13)과 같이 거기에서 400여 년 동안 머물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로 내려 간 것이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저주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였다.
1) 46:1-4 : 하나님의 약속
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신을 네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밝히신다(3절).
② 하나님께서 애굽에 함께 내려가겠다고 약속하신다(4절).
③ 애굽에서 크게 번성하겠다고 하신다(3절).
④ 큰 민족을 이룬 후 인도하여 다시 오겠다고 하신다(4절).
2) 46:32-34 : 고센 땅을 지정받음
고센 땅은 가장 비옥한 땅이었다. 요셉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목축을 핑계삼아 고센 땅에 그들이 머물 수 있도록 의도했다.
8. 야곱의 신탁(47:28-49:27)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후 그의 12아들(12지파)에 대해 예언한다(복, 저주, 심판, 약속 등).
* 49:8-12 : 유다에 대한 예언
유다는 “실로가 오시기까지” 치리자의 지팡이(홀)를 가질 것이라고 했다. LXX는 이 부분을 He come into “belonging to him.”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실로가 메시야적 칭호로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유다의 줄기로부터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는 뜻이다.
9. 야곱의 죽음과 장례(49:28-50:14)
야곱은 죽은 후 막벨라 굴에 장사되기를 원했다. 그곳은 그의 조상들이 장사되어 있던 곳이었다.
10. 요셉의 유언과 죽음(50:15-26)
요셉은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24절에서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라고 유언한다. 또한 25절에서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서 약속의 땅에 묻어 줄 것을 요구한다. 즉 요셉은 항상 약속의 땅을 그리워하면서 그곳으로 가려고 했고, 이제 자신이 직접 가지 못했지만 후손들이 반드시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4. 창세기의 신학적인 내용에 대한 연구
송제근
1. 창세기 - 성경의 위대한 서론
처음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나 오랫동안 믿어오던 사람이나 관계없이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 세상, 인간,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세 종류의 역사의 장엄한 시작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지고 읽게 된다. 이 세 종류의 역사는 성경 전체가 나타내고자 하는 모든 신학적인 내용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
이 책에서 물론 기독교의 핵심적인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그가 오셔야 할 필요, 그의 위치, 그의 사역의 내용등이 예상되어있고 예언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경의 새로운 단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신약과 직접 관련될 뿐 아니라 그의 재림을 다루는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과도 연관이 된다. 이렇게 창세기는 성경의 통일성을 이루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또 창세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된 책이 아니고 모세 오경에 포함되어 있으며 오경내에서도 서론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즉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역사적 묘사는 출애굽기를 거쳐서 레위기, 민수기까지 이어지며 그것이 다시 신명기에서 종합적으로 재정리된다. 구체적으로 창세기는 세계, 인간의 역사에 이어서 족장들을 통하여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준비되는 역사를 묘사한다. 그리하여 창세기는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형성된 애굽을 떠나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며 광야여행을 계속하여서 족장들에게 약속한 언약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내용의 서론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만약 오경이 구약과 성경의 전체에 대한 기초요 서론이라는 일반적인 결론을 받아들인다면 창세기는 그야말로 성경 전체에 대한 서론의 서론인 셈이다.
그리고 내용적으로 창세기에서 말하는 것들은 역사속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그것이 교훈성을 지닌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보존되고 새롭게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경험들은 역사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우리 인간의 일반적인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여서 명확히 창세기를 읽은 사람에게 교훈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 역사의 원대한 섭리와 계획과 진행을 믿고 받아 들이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우리가 현재에서 이루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교훈을 얻을 목적을 가질 기대를 가진다.
2. 창조
창조 ! - 그 장엄한 시작
무엇을 시작해 본다는 것은 언제나 신선한 감동과 설레임이 있는 기대감을 주는데 특히 아무 것도 없는데서 어떤 것을 창조한다는 것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성경의 창조는 바로 이러한 감동을 준다. '창조한다'( 1:1)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하나님에게만 쓰였다. 또 목적어로 직접 창조되는 대상만이 표현되었을 뿐 창조에 사용되는 재료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으로 성경에서의 창조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행위요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창조의 내용은 '하늘과 땅'(1:1)으로 표현된 우주전체이다 (사 44:24). 이로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유일한 행동이 장엄하게 선포되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태초에' 하셨고 훗날에 다시 우주를 새롭게 하실 것(사 65:17, 계 21:1)의 원형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복수성(plurality)을 띄고 있음을 '하나님의 신'(1:2)이나 창조에서 표현된 '우리'구절들(1:26 이하)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사역에 있어서 명확한 질서를 가지고 하셨다. 6일동안의 사역을 통하여 먼저 된 창조사역의 기초위에 다음에 나올 사역이 놓여졌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창조는 점점 더 복잡하게 상승되며 세분화되어간다. 그리고 각 단계가 명확한 구획이 지어져 있음을 하나님은 각 날에 '종류를 따라서' (1:11,12,21,24,25) 즉 어떤 페턴을 따라서 만드신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 페턴중에서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인간인데 인간은 특이하게도 하나님의 종류를 따라서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어졌다. 즉 하나님이 생각하신 어떤 페턴을 따라서가 아니라 바로 창조주 하나님 자신을 따라서 인간이 만들어졌다. 여기서 나타나는 인간의 탁월성은 고대 근동을 비롯한 거의 모든 창조설화에서 그 비슷한 것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1:1에서 하늘과 땅의 창조에 대한 선언 이후 하늘에 대한 묘사는 극히 제한되고 땅에 대한 것을 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저자의 관심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는 삶의 조건인 땅을 중심한 창조사역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에 있는 것들에 대한 묘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이 살 땅을 비취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소개되었다 (1:14-19). 그런 인간 창조의 중요성 때문에 이제 그 인간을 중심으로 한 역사의 드라마는 다시 재조명되어서 2장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창조와 구속의 모티브
창세기라는 것은 좋은 책명이 될 수 있지만 한편 이 책이 창조에 관한 내용만을 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창조 자체에 대한 것은 초반중에서도 일부에 (1-2장) 불과하고 대부분은 (3-50장) 인간의 타락과 그 이후의 구속의 역사에 대해 할애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창조에 이어서 나오는 인간의 타락과 심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하나님의 구속은 이 책과 나머지 오경을 움직이는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저자는 자신의 작품의 자연스러운 출발이 되는 창조를 언급함으로서 인간과 세계의 구속에 대한 설명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하나님의 인류 구속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를 일반적으로 1-11장 그리고 12-50장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11장까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홍수와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악에서 보존하시는 소극적인 사역의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12장 이후는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적극적이며 전혀 새로운 조처와 방법들을 소개한다. 전자(1-11장)에서 역사가 진행되고 비록 문화가 발전되어도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는 발전대신 오히려 타락만이 있는 것 같으며 태어나는 아이마다 - 심지어 하나님의 선호하시는 아벨의 후손이라고 할지라도 - 악인들의 영향권아래 들어가 버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본다. 그러나 이제 후자(12-50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진행시키는 방식은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이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즉 한 사람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시려는 것을 본다. 이러한 행위는 새창조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와 구속은 서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오경 전체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제 7일에 표시된 안식의 개념에 드러나 있다 (2:1-3).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난 뒤 쉬신 제 7일은 후대에 시내산 언약에서 제 4계명(출 20:8-11)에서 안식일로 제정되었지만, 그것이 애굽에서 구속받았기 때문에 안식할 것으로 확대된 것은 모압언약에서의 제 4계명(신 5:12-15)에서이다.
클로우즈업 기법 (close-up technique)
창세기의 초반은 문서설이 예로 드는 중요한 곳이었다. 다시 말하면 창조사역이 반복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다른 문서들을 조합한 결과였으리라 추측하였고 그러한 분석을 위한 근거로 신명(神名)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창세기를 근본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이미 말한대로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묘사할 때 하늘에 대한 관심은 제외되고 땅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제 2장에서 땅에서 사는 모든 생물중에서 좁게 인간을 중심으로 창조사역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3장에서는 그 땅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에덴동산과 거기서 일어난 일에 집중하여서 묘사하였다. 이렇게 창조를 설명할 때에 줌렌즈를 사용하여서 먼거리의 물체를 점점 가까이 보면서 한 곳에 드디어 초점을 ㅁ추는 클로우즈업 기법(close-up technique)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2. 인간
하나님의 닮은 꼴로서의 인간
창조에 있어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중에서 유일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으로' (1:26)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형상'( )과 '모양'( )이 전형적인 히브리 문학기법인 평행법(parallelism)을 통하여 사용된 것으로 인정한다면 이 표현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의 닮은 꼴로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복수성과 인간의 복수성 (1:26)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실제적인 내용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본문 자체를 보면 1:26은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고 1:27은 그 선언에 대한 저자의 보충 설명이다. 즉 1:26에서 선언된 하나님의 닮을 꼴에 대한 선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1:27에서 설명한다. 히브리 시의 정상적인 평행법(parallelism)에서는 두 '콜론'(colon)을 가지는데 1:27은 특이하게 세 '콜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세 '콜론' 형식은 한 단락의 처음이나 마지막과 같은 위치에서 쓰여서 특수한 효과를 나타낸다. 여기서는 첫 번째 '콜론'이나 두 번째 '콜론'은 도치된 문장으로 되었을 뿐 (a-b-c // c'-b'-a') 사실상 거의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 번째는 본질적으로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히브리어 순서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콜론' : "창조하였다 / 하나님이 / 인간(단수)을 / 자신의 형상대로"
두 번째 '콜론' : "하나님의 형상대로 / 그가 창조하였다 / 그(단수)를"
세 번째 '콜론' : "남자와 여자로 / 그가 창조하였다 / 그들(복수)을"
이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1:27에서 결과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면은 세 번째 '콜론'의 내용인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러한 분석이 옳다면 인간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많은 내용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이 남녀로 존재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분석에 대하여 정당하고도 조심스러운 해석을 해야한다.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결코 성적인 존재로 표현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강력히 금지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성적인 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는 결코 해석할 수 없다. 오히려 1:27은 사람들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며 서로를 향하여 서는 것을 말하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예가 바로 남녀로 서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또 이러한 해석에서 고려할 일은 1:26의 하나님 자신의 말씀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이다. 여기서 갑자기 '우리'(의 형상을 따라...) 구절이 나타난다. 이것이 삼위일체를 의미한다는 전통적인 해석을 비롯한 많은 해석들이 있으나 1장 자체내에서는 일단 하나님의 복수성(plurality)을 의미한다는 포괄적인 해석이 적당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1:27에서 본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의 가장 중요한 예가 인간이 남녀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인간 존재의 복수성은 하나님의 복수성의 반향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많은 검증을 거쳐야 하겠지만 그 주석적 장점은 1:26과 1:27을 동시에 고려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남녀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2:18-25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관은 인간문화 전반에 대하여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혁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서구를 지배한 '나' 중심의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관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러한 성경의 인간관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인 나의 존재는 '나'됨에 있다기 보다 '우리'됨에 있으며, 여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의 신비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복수성과 하나됨이 하나님의 존재하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의 하나인 것과 같이 인간존재는 근본적으로 복수성과 하나됨을 이룬다는 선언은 '나' 중심의 철학에 근거한 서구 문화의 오래된 전통에 대한 혁명적인 도전이다. 이것은 또한 동시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적이며 '나'속에 우주가 존재한다는 동양철학적인 사고에 대한 원천적인 도전이다.
3. 인간의 타락,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구속
인간의 타락
2장까지의 내용인 창조는 3장의 내용인 타락과 아주 적절하게 연결되어 있다. 2:25의 (인간의) '벌거벋음'('아루밈' )과 3:1의 (뱀의) '간교한'('아룸' )이 같은 히브리 단어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순진성에 어두운 세력의 간사한 공격으로 어두워질 창조세계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하나의 '벌거벋음'에 대해서는 인간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2:25). 그러나 범죄의 결과로 깨닫게 된 또 다른 '벌거벋음'('에이롬' )때문에 인간은 두려워하고 도피하는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3:10).
창세기는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어두움의 그림자가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겼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2:17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이름과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2:17)는 경고에 이미 어두움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 암시되었다. 그러나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으면 이런 타락이 없었을 것인데라고 흔히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선악과는 하나님의 창조의 불완전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인격의 완전성에 대한 증거이다. 선악과는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정도의 높은 자유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어떤 면에서 창조의 영광의 표현이며 인간의 인격이 가지는 자유의 놀라운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그 어두움의 세력도 인격적인 실체라는 사실은 악한 일에 사용된 도구인 뱀이 인격적인 능력을 가진 대화를 하는데서 알 수 있다. 뱀의 간교한 질문형태(3:1)와 하와의 변형된 대답(3:2-3)은 서로 좋은 짝을 이루어 사탄의 간사한 계획에 딱 들어맞았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뱀은 전격적으로 거짓을 조작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어 사탄이 거짓의 아비임을 역사의 초기부터 증거하였다 (3:4-5, 참조:요 8:44). 그러나 이 거짓은 그 누구보다도 사탄 자신을 속이는 행위였다.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볼 때 생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인 그 세가지 유혹은 그리스도가 받은 세가지 유혹(마 4:1-11, 눅 4:1-13)과 유사하며, 세상에 속한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세 욕망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과 유사하다 (요일 2:16). 그래서 모든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를 보여준다. 먼저 우리는 근본적인 세 욕망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 근본 원인은 첫째 아담이 실패한 역사적인 경험속에 자신이 이미 속해 있기 때문임을 겸손히 시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절망가운데 앉아있지 않고 둘째 아담되신 예수께서 모든 유혹의 도전을 극복하심으로 근본적으로 인간의 욕심의 문제를 직접 몸으로 해결하셨을 뿐 아니라 오늘도 성령으로 우리를 도우심을 의뢰할 때에 우리의 현실 역사속에서 유혹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구속
하나님의 구속의 활동은 '원시복음'이라고 알려진 3:15부터가 아니라 이미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후 두려워하여 숨은 그들을 찾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행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타락했기에 받는 심판의 결과로서 '반드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이로서 하나님의 구속은 바로 창조의 첫 몇 페이지부터 시작된 것이다.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3:9)는 질문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현주소를 네가 스스로 아느냐라고 아담에게 물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동일한 질문으로 다가오고 계시는 분이시다. 피상적인 결과만을 말하여 본질적인 질문을 회피하는 아담과 우리의 대답(3:10)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 원인(3:11)을 물으신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더욱 회피적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핑계하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모든 일이 잘못된 원인은 하나님께 있다고 대답할 정도로 우리는 간혹 완벽한 악을 그러낸다 (3:12) :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또 일을 그르친 첫 번 원인자인 하와는 자신의 반대편에 선 하나님의 형상인 아담이 하나님께 심문을 받는 것을 보고 먼저 아담이 핑계대는 것을 닮아서 일이 잘못된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 뱀에게만 돌렸다 (3:13). 직접적인 원인인 사탄이 받을 심판은 물론 있지만 우리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나름의 책임을 지는 것을 포기하는 비인격적인 모습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이 이렇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며 그 속에서 끊임없이 해메고 있는 순환논리의 고리를 결연히 끊으시고 역사를 관통한 단정적인 조처를 내리신다 (3:15). 비록 뱀은 여인의 한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여인의 한 후손이 뱀으로 상징된 사탄의 머리를 부수리라. 그리고 각 사람의 죄에 대하여 내리신 심판(3:16-19)은 고통과 번민을 수반할 것이다. 또 생명나무에 인간이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근본질서가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게 하셨다 (3:22-23). 그러나 하나님은 당장에 인간을 사망이 이르게 하지 않으셔서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시간을 주심으로 집행유예의 은혜를 보이신다. 이것은 장차 나타날 그 한 후손의 죽음과 사역을 통하여 인간이 죽음과 그 공포의 노예된데서 해방되며,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형태가 없어지며, 모든 원수된 것이 철폐되며, 궁극적으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될 것을 대비한 것이다 (계 2:7). 이것이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깨닫게 된 벌거벗음의 수치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 지어 입힘으로 간접적으로 표현되었다.
4. 완전한 대조 :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첫째 아담 이후에 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미 인간의 타락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담은 아들을 낳았을 때 이 첫 아들에 대하여 3:15의 한 후손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이름을 가인이라 붙이고 그 이유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득남하였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그런 기대가 표현되지 아니한 둘째 아들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신 것에 대한 시기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원대한 기대속에 붙여진 이름을 가진 가인은 동생을 죽이게 되었다. 바로 이런 인간의 타락은 역사가 진행될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창세기는 11장이 되도록 보고한다.
먼저 아담과 하와의 타락(창 3장)에 비해서 가인의 타락(창 4장)이 더 악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사건에서 하나님의 두 질문에 있어서 서로 유사하다 : "네가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 (3:9, 4:9);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 (3:13, 4:10). 그러나 첫질문에 대한 가인의 대답은 아담의 그것보다 뻔뻔스럽고 악한 것이었다 (3:9, 4:9). 인간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는데 아담의 경우는 땅이 저주를 받지만 (3:17) 가인의 경우는 가인 자신이 저주를 받는다 (4:11).
그리고 다시 가인을 그 후손 라멕과 비교해 보면 타락이 더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가인은 한 아내를 얻었지만 라멕은 (4:19) 두 아내를 얻기 시작함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존재의 가장 중요한 면인 복수성의 예인 남녀로 서로 마주 서는 면이 무시되면서 인간공동체의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주어질 심판에 대한 반응에서도 심각하게 진행된 타락의 냄새가 난다. 가인은 사람들의 보복을 두려워했지만 (4:13-14), 라멕은 전혀 사람의 복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복수의 일념에 불탄다 (4:23-24). 보복의 경우도 가인의 경우는 오직 죽음을 당했을 경우이며 벌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형벌의 양은 7배였다. 그러나 라멕의 경우는 상하기만 해도 죽음으로 보복하고 벌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닌 라멕 자신이며 벌의 양도 77배였다. 여기에 더하여 라멕이 부른 두 아내에 대한 잔인한 연가(戀歌 4:23-24)는 그 참혹성에 있어서 아담이 하와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2:23)와 완전히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타락에 수수방관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나라를 지키시는 일을 하셨다. 그래서 역사가 진행될수록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뚜렸히 구분되어 갔다. 이 사실이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가계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두가지 예를 통해서 서로 철저히 비교되는데서 드러났다.
첫 번째는 가인계의 에녹과 셋계의 에녹의 비교이다. 가인계의 에녹(4:17)이란 이름은 그 아버지 가인이 이 땅위에서 지은 성에도 붙여짐으로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셋계의 에녹(5:22-24)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한 에녹은 이 땅위의 성을 쌓은 일에 관계하고 또 하나의 에녹은 하늘나라의 성을 쌓는 일과 관계하였다. 특이한 것은 가인계의 후예들에 대해서는 살았던 나이가 표시되지 않은데 비해 셋계의 후예들은 나이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가인의 후예들이 아무리 고도의 문화를 발달시켜도 (목축업 4:21, 예술 4:22, 기계문명 4:22)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판단하시기에 '아무 것도 아니며'(nothing) 헛되다는 점을 나타내신다. 이러한 가인의 후예들의 다양한 문화적인 업적에 비하여 셋의 후예들은 하나님을 공적으로 경배하며 (4:26)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그 생애의 가장 중요한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간 일년 일년이 의미가 있으며 그 결과 그 의미있는 삶의 햇수가 성경에 정확히 기록된 것이다 (5:22-24). 결론적으로 창 5:1에 있는 아담의 '계보'(톨르도트 )에는 이미 가인의 후예는 빠져있고 오직 셋계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미 가인의 후예는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제외된 것을 나타낸다.
두 번째는 가인계의 라멕과 셋계의 라멕의 비교이다. 우선 가인계의 라멕은 두 아내를 가졌으며 세 아들을 낳았는데 고대에 아내의 이름(아다와 씰라)이 전해져 내려온다는 것은 이 여자들이 유명한 사람이었음을 암시해준다 (4:19). 또 그 아들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은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살며 세상의 문화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였다 (4:20-22). 그리고 라멕의 연가 혹은 독백(4:23-24)은 자기과시와 철저한 보복주의, 탈취하는 삶을 전제하고 있어서 살벌한 당시의 세상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러나 셋계의 라멕은 이름은 나와 있지 않은 한 아내에 한 아들이 있을 뿐이었다 (5:28). 그 아들 노아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방주를 120년 동안이나 짓고 있는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은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6:13-22). 그리고 아버지 라멕의 독백은 하나님이 저주하신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정직히 나타내며 이 자녀를 통해서 안식을 기대하고 있음을 보인다 (5:29).
에녹이나 라멕이라는 이름이 모두 악한 가인의 계열 속에서 먼저 사용이 되었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셋의 계열에서 다시 이 말이 사용되어서 어떤 면에서 은혜의 승리를 암시한다.
5. 세상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 대홍수와 바벨탑
대홍수
비록 인간은 문화적으로는 목축과 예술과 기계문명의 발전으로 진보를 보이고 육체적으로는 네피림이 생길 정도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창조하신 세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깊은 탄식을 하실 정도로 - 이 탄식을 두 번이나 표현함 - 세상은 겉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타락의 수렁에 빠지고 있었다 (6:5-8). 심지어 셋계의 후손들조차 가인계의 영향으로 타락의 길을 걸어갔고 그 결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은 노아 가족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노아는 그 조상 에녹과 같이 (5:24, 6:9)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고 그 결과 그는 당대에서 완전한 자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러한 세상을 향한 조처는 타락한 세대를 향한 단호한 심판과 노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보전이라는 점에서 이원적이었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하는 120년의 삶은 단지 자신이 구원을 준비하는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유지하는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속에 들어간 생물들은 각기 그 '종류대로' 되었으므로 창조시에 이들이 종류대로 만들어진 것을 연상하게 하고 창조하신 세계를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준다 (7:14). 또한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실 때도 은혜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로 제한된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 알수 있다. 즉 7-8장이 소위 동심원적인 구조(同心圓的 構造 concentric structure)로 이루어졌으며 그 중심(8:1)에 하나님이 방주안에 있는 노아와 생명들을 '기억하심'(개역 '권념하심')에 대한 선언이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기억하심 후에 바로 하나님은 진노를 푸시고 세상을 정상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 은혜의 역사는 방주에서 노아가 나오고 난 뒤에 하나님이 스스로의 약속에 매이시는 것을 나타내는 언약(9:9)에도 다시 표현되었다. 이런 하나님 스스로가 매이는 언약은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실 때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으로 다시 나타났다.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리라는 언약은 인간으로 하여금 방금 겪었던 심판의 성격을 띤 대홍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은 심판 자체가 영원히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나라를 향한 또 다른 심판의 도구인 불이 기다리고 있고 그 영원한 심판이 일어나기 전에 불로서의 심판이 국지적으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에 행해질 것이다.
바벨탑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특히 어떤 사건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자의적인 해석을 함으로 결국에는 그 사건의 의미를 놓쳐버린다. 대홍수 사건의 경우도 인간은 그 원인과 과정과 결과에 대한 완전히 오해함으로 헛된 바벨탑을 쌓았다. 대가 하늘에 닿는 성을 쌓으면 이름이 나고 지면에 흩어짐을 피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연합된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하여 인간의 자부심을 만족시키려는 첫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중심의 문화건설에 대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차원의 심판을 베푸셨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는 것이다(11:9). 그러나 이것이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하여 인간적인 자만심을 채우려는 것에 대하여는 심판행위가 되지만 한편으로 참다운 인간 공동체의 형성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이제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소극적으로 형성되는 때를 지나 나라와 피부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적극적으로 형성되어야 할 때에는 인간의 죄악에 대한 저주와 심판으로 주어진 언어의 장벽은 없어져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사방에서 민족들이 몰려와서 오순절의 예배를 드릴 때에 성령이 임함으로 각 사람이 자신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듣음으로 이 장벽을 허물어지게 하실 때가 곧 오고야 말 것이다 (행전 2:11). 그러나 그 때가 오기까지 인간은 바벨의 심판 후에도 계속해서 타락해 갈 것이고 결국에는 하나님은 또 다시 모든 타락한 사람들을 포기하시고 오직 한 사람 아브라함만을 택하여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실 것이다.
6. 아브라함(1) : 하나님 나라의 극적인 새출발
하나님은 위에서 언급한 두 번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시는 것 같았다. 사실 마지막 심판인 바벨탑 사건에서 언어를 혼돈하게 하신 것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흩어져서도 여전히 악한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더 악한 길로 갈 것이며 또 악은 너무나 쉽게 자신의 영역인 세상 나라를 넓혀갈 것이고 상대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더 빨리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셨고 그것을 때가 되매 펼치셨다. 대부분의 셋의 후손과 노아의 후손들조차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 타락의 길을 갔기에 세상 나라는 항상 공격적이고 하나님 나라는 항상 수동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으나 하나님은 이제부터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길을 여신 것이다. 그것은 부름을 받은 한 사람의 후손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 나라로 빼앗기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구원은 단순히 한 사람이 어떻게 불러지고 구원을 받는가 하는 예로 생각하는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서 구속역사가 전혀 새로운 방법과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하여 준비되어서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형성되고 출애굽을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드디어는 약속된 땅을 받음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을 통하여 새롭게 진행되는 역사는 이 때까지 하나님이 사용하시던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전략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또 그렇기에 이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심은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장기적인 안목에서 나온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의 명령에는 엄청난 약속이 동반되었다 (창 12:1-3).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크게 되는 것은 우리 신자들이 동일한 페턴을 따라서 하면 우리도 큰 민족을 이루고 큰 이름을 가지게 된다는 개인적인 교훈이라기 보다 하나님 나라 전체에 대한 역사적인 교훈이다. 후대에 사는 우리가 또 하나의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그 축복에 동참하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전개방식이 결정적으로 변화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서 있다. 12:2의 약속 중에서 마지막에 나온 "너는 복이라"라고 직역될 수 있고 "너는 축복의 대명사라"라고 번역할 수 있는 구절(개역 :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은 모든 약속의 결론이다. 이것은 12:3에서 부연 설명되었다.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통하여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 축복은 후대에 일어날 선지자의 예언의 내용인 정죄와 심판을 지나서 마지막 소망의 차원을 거쳐서 아주 먼 훗날에야 비로소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반응도 없이 순종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앞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실 믿음의 행위(15:7)에 대한 서론이었다는 것을 신약은 증거한다. (히 11:8). 그러나 아브라함이 첫 여행을 끝내고 멈추어 섰을 때 이것이 네 땅이니라 라고 하신 곳은 아무도 살지 않은 임자가 없는 곳이 아니라 이미 전통과 유서가 깊으며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세겜이었다 (12:6-7). 그런데 이 약속은 사람들이 이미 사는 땅위에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인가 ? 이것은 아브라함이 마음으로 해 보았을 본질적인 질문이다. 세겜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이 약속은 언젠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15:16에서 밝혀지지만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이 인내하시는 한계를 넘을 때 하나님은 그 곳의 사람들을 심판하셔서 그들을 뽑으시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을 그 자리에 심으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가셔서 가나안 사람들을 심판하는 도구로서 이스라엘을 쓰실 것이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방의 심판은 글자 그대로 한 진리의 양면이며 이것은 먼 훗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할 마지막 사건과 연관된다.
아브라함은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이런 약속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나 현실적인 문제에서 허물어진다. 그것은 그가 거하는 남방에 닥친 견딜 수 없는 심한 기근이었다. 그 결과 물을 따라서 하나님이 약속하지도 않은 땅인 애굽에 내려가는 인간적인 결단 때문에 생기는 문제에 대하여 인간적인 속임수를 베푸나 오히려 그 계획이 드러나고 바로에게 책망받게 된다 (12:10-20).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교훈을 받고 가나안에 돌아온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 섭리를 신뢰하여 조카에게 양보를 할 줄 알게 된다 (13:1-8). 조카 롯이 '악하고 큰 죄인'인 소돔의 영적인 환경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풍요로운 자연적인 삶의 조건을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여 그 곳을 찾아 떠난다 (13:9-18).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소망과는 관계없이 롯은 국제분쟁에 휘말려 노예가 될 신세가 되지만 아브라함 결사대의 도움으로 해방된다 (14:1-16).
7. 아브라함(2) : 언약의 수립 (창 15, 17)
해가 돌아오면 다시 군대를 모아서 복수전을 감행하는 고대의 관습을 알기에 두려움에 처해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하나님 자신이 방패요 그 전쟁으로 실제적으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그에게 하나님 자신이 바로 상급임을 선언하신다 (15:1). 이 선언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처음으로 하나님께 하나님의 약속의 양면인 씨와 땅에 대한 질문으로서 반응을 보인다 (15:2-7).
먼저 씨에 대한 질문의 내용을 보면 사뭇 부정적이며 허탈감과 포기하는 마음이 진하게 배여있다. 자신의 적자(嫡子)는 그 당시의 관습을 따라서 다메섹 출신의 종인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선언한다. 그리고 이 냉소적인 표현에 설명을 덧붙이듯이 15:3을 내뱉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내하시고 아브라함과 만난 밤이라는 상황을 사용하여 중동의 까만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은 무수한 별을 통하여 그 종이 후손이 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온 후손이 별과 같이 많으리라는 실물교훈을 하신다 (15:5). 이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마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경배함으로 믿음으로 반응한 것 같고, 이 믿음의 반응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의로 선포하신다 (15:6).
둘째로 아브라함이 땅에 대하여 물었을 때에 하나님은 언약을 맺도록 아브라함에게 준비시키셨다. 그리고 준비된 언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당시의 습관을 따라서 쪼개어져 준비된 제물 사이로 언약의 쌍방인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같이 피가 흥건히 배여있는 그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징한 불만이 지나감으로 (15:17, 참고 렘 24:18-19) 이 언약의 성취의 최종적인 책임은 하나님이 지심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고대의 언약을 맺는 관습대로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생명이 문제가 되는 형편에 놓인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곧 이어서 할례를 행함으로서 언약 수립에 능동적인 입장에 선 것과 대응하는 것이다 (17:23-27). 대대로 이행해야 할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적극적으로 신실하게 지키심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언약 이행을 의미한다. 이 할례는 민족이 된 이스라엘이 정식으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에 하나님의 언약법에 순종할 것을 작정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이제 언약의 양방인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서약을 함으로 이 언약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과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간의 시내산, 모압 언약의 기초가 된다. 물론 아브라함의 언약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언약적 택하심과 약속에서 출발하지만 단순히 무조건적인 언약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그 속에도 대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일종의 조건성이 존재한다. 이 점에서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은 구조적인 유사성을 보인다.
하나님의 생명을 담보로 한 언약적인 이런 서약(15:17)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먼저 약해진 것은 인간들, 정확히 말하면 현실적인 압박을 더 많이 받고 있는 여자쪽이었다. 사라는 하나님과 엄청난 언약을 맺고 나자마자 (15장) 하나님 나라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엄청안 실수를 범한다 (16장). 종인 하갈을 아브라함의 첩으로 주어서 아들을 낳은 당시의 습관을 따르도록 16장 전체를 통하여 철저히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을 졸라서 일을 성사시켰다 (16:2). 15장에서 종을 아들로 입양하는 그 당시의 관습을 따르려 했던 것과 같이 16장에서도 세상의 일반관습이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움직이는 추진 원리가 되려고 밀고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고 궁극적으로는 결국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태어날 이삭의 자손과 이렇게 불신앙 가운데 태어난 이스마엘의 자손 사이에 역사적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견원지간의 관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하나님의 손에서 해결되도록 위탁될 수밖에 없었다. (16:7-12).
드디어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되어서 하나님이 씨와 땅의 약속을 재확인하러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은 (비)웃었다 (17장). 하나님이 씨에 대해서 재차 약속하시려 나타나셨을 때 사라도 (비)웃었다 (18:9-12). 이 주제가 동양의 정서를 따라서 사라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대화를 엿듣도록 의도적으로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면서 사라의 주의를 환기시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처리되어 있다 (18:9). 그 이후에 하나님과 사라 사이에 닭싸움하듯이 옥신각신하는 모습(18:12-15)은 오히려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인간과 같은 차원에서 낮아져서 끝까지 하나님이 옳으심을 주장하시는 희극적인 요소를 드러냄으로 독자로 하여금 인간과 같이 낮아져서 대화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한다. 이 희극적인 요소는 부부가 다 같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비웃었으므로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 즉 '웃음'이라고 하게 하시는 일종의 심판이라는 비극적 요소와 어울려서 그 차원이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이 두 번째 하나님의 찾아오심에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씨와 땅의 약속을 확인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참으실 한계를 넘어서는 죄악이 관영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었다. 순진한 롯은 그 도시의 사람들을 끝까지 형제로 여겼으나 (19:7 '형제들아') 그들은 롯을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이방인 취급하였다 (19:9 '이방인으로 우거하면서'). 또 롯이 내어놓은 두 딸을 집단 성폭행하는 것도 생각하기 어려운 타락인데 그것을 마다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따라서 롯을 찾아온 손님과 기어이 동성애를 하고야 말겠다고 함으로 그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있는가를 보여 주었다. 우리는 이 천사들의 방문에서 또 한 번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구원)과 소돔과 고모라라는 세상 나라의 심판이 공재하는 순간을 본다. 그런데 그 심판을 그냥 행해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되는 아브라함에게 숨기시지 않으시고 알리심으로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심판에 동참된 것을 나타낸다 (18:17-21). 이 심판의 정보를 듣고 아브라함은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동양에서만 그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과감한 게임을 감히 하나님과 하여 50인에서 10인까지 흥정해 내려간다. 이 희극성 속에서 그냥 두면 심판 속에 반드시 희생될 조카 롯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강력한 열기로 전달된다. 적어도 소돔에 10인의 의인은 있을 것이고 그 속에 롯이 포함될 것이라는 계산을 아브라함은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예상은 빗나가서 의인이라고는 오직 롯밖에 없었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곧 알게 될 것이었다.
반면에 롯의 탈출은 극적이었다. 영적으로 타락한 환경을 잘못 선택한 롯을 잡아당기는 소돔의 끈은 너무나 강인했고 끈질겼다. 먼저 결혼이 확정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그 사회에서 버려지게 될 상태에 있는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이 롯과 같이 소돔을 떠나기를 거부한 것이다. 딸을 데리고 떠나라는 천사의 명령이 없었으면 롯은 결단을 못내릴 처지였다. 그리고 롯의 아내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소돔과 강하게 연결되었는가는 천사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돔이 롯을 잡아 당기고 있는 최악의 강인한 끈은 소돔이 멸망된 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바이러스처럼 롯의 가정에 껍질을 쓰고 남아 있었다. 그 끈은 살아남은 롯의 두 딸이 소돔에서 눈으로 보아서 배웠던대로 자기의 아버지와 성적인 관계를 가짐으로 자손을 이어갈 비참한 계획을 수행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스마엘을 인정하시고 큰 민족이 되게하실 계획을 보이신 하나님(16:10-12)은 여기서도 인간이 만들었으나 인간이 도무지 풀 수 없는 역사의 실마리를 자신이 푸실 것을 약속하신다. 즉 롯의 두 딸을 통해서 그렇게 더럽게 태어난 모압과 암몬의 후손들을 이스라엘 옆에 살게 하심으로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시작되는 은혜를 미래에 나누어 가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19:36-38). 타락중에 태어난 이 아이들을 살려서 민족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국에는 승리로 나타날 것이나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고귀한 독생자를 죽도록 버려두시는 엄청난 역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미모 때문에 남방에서 장차 그 후손들이 싸울 불렛셋의 선조였던 아비멜렉에게 또 한번의 실수를 범한다 (20장). 이것은 소돔 사건에서 보인 믿음의 용사가 했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나약한 아브라함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씨에 대한 근본적인 약속이 무너질 위기와 관계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만약 사라가 늙었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여성으로서 다시 배란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을 때 아비멜렉과 관계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전체 계획이 허물어지게 되고 여기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 지셔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점 대신에 순전히 인간적인 것만을 고려하여서 순간을 모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신자가 불신자에게 책망을 듣는 부끄러움의 역사가 애굽에서와 마찬가지로 재현하게 하셨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도 수치이지만 장차 세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받아야 할 교훈과 심판을 위해서 자신의 이름이 걸린 성전조차 헐어버리실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과 일치하는 것이다.
기다리던 아들 이삭이 태어났을 때 17장에 나타났던 웃음의 희극적인 요소가 완성되었다. 태어날 아들에게 붙여진 이삭이라는 이름을 사라가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라가 출생을 전후해서 붙인 코멘트(21:6)에 잘 나타나 있다 : "하나님이 나로 웃게하시니 듣는 자가 다 웃으리로다." 비웃음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 이제는 기쁨을 주는 웃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전환되었다. 또 한 번 은혜의 승리를 경험하는 현장이다. 그러나 모두가 파안대소하는 시간들이 진행되는 어느 한 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갑자기 찬물이 끼얹어졌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사라가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을 내어ㅉ기를 얼음과 같이 차겁게 요구하는 것에 대해 아브라함은 헴릿과 같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깊이 근심한다' (21:11). 그러나 또 한 번 인간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생겼으나 인간이 처리하지 못하는 역사의 문제를 하나님은 당신의 손에 맡으셨다 (21:12-13). 하나님은 광야로 ㅉ겨간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우물을 발견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보호하신다. 그리고 때가 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만민이 체험할 때까지 이들의 후손들로 역사의 비주류의 강을 흐르게 하셨다.
8. 아브라함(3) :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 자체도 죽일 수 있는가 ?
아브라함의 생애는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라는 출발에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으로 가라(22:2)라는 수행하기 가장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으로 요약된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시련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삭은 단순한 한 아들이 아니었고, 또 단순히 늦게 얻어서 말로 못할 정도로 귀중한 아들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어 갈 가장 중요한 아들이었다. 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건너야 할 결심의 다리는 길고 난관이 많았다. 아비가 아들을 죽여야 할 정도로 인륜이 무시되어야 했으며 그 결과 나중에 아들을 죽여 제사지내는 몰렉신(神)을 섬기는 것을 금지하신 하나님의 속성 자체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시험의 제목은 하나님은 당신이 몇번인가 확정한 언약 자체도 죽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연하고도 차분한 모습으로 이 명령을 이행해 나갔다 (22:3). 사환에게 자신과 이삭이 두 사람이 같이 돌아올 것을 말함으로 ("우리들이 꼭 돌아오리라" 22:5) 하나님께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길을 가지고 계심을 확신한 것 같다. 그 결과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산 아들을 되돌려 받았다는 믿음의 평가를 받았다 (히 11:19). 아브라함이 침착하게 이삭을 제사드리는 절차를 따르며 칼을 드는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바쁘게 그의 행동을 제지하며 말려 부르셨다 (22:11). 이것은 손자인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로 이스라엘이라는 별명을 받은 것과 비슷한 결과를 가지게 되었다 (32:24-32).
9. 이삭 : 수동적으로 진행된 하나님 나라
이삭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수동적이다. 그가 태어나서부터 이스마엘에게 놀림을 당하나 그 때문에 부모의 보호 본능이 자극되었다. 그 결과 이스마엘이라는 어려운 요소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노력이 없이도 정리되었다. 그가 청년이 되어서도 명상적이며 관조적인 성품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24:63). 오히려 저자는 그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얻게 되는 사연에 대해 길게 묘사한다 (24장). 그랄 땅에서 아비멜렉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아버지가 처했던 같은 문제에 대하여 아버지가 실수했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리브가를 자신의 누이라고 할 정도로 수동성을 보인다(26:1-11). 또 우물사건(26:12-22)을 통하여 전쟁의 모습대신 평화를 위해서 양보하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런 가운데 그의 삶도 특별한 언급할 것이 없이 짧게 지나가고 이제 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늙어졌다. 이런 중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빠른 박자도 아니고 힘이 넘치는 것도 아닌 조용한 행진을 경험한다. 특히 그의 삶의 마지막에 있었던 장자축복 사건에서 보여준 수동성(27장)은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한 마지막 시련(22장)이 능동적인 것에 잘 대조된다. 하지만 이 수동성속에 있는 어리석음은 이삭의 사건들의 배경이 된다. 이삭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정해진 일상과 관습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파격속에서 예측하지 못한 굴곡이 생기기도 하는 역동성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이런 어리석음속에서 장자에 대한 편애가 생겼고 그의 육체적인 탁월함에 매료되었다. 반면에 아내 리브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적으로 이해하여 (25:23) 차자에 대한 편애를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서 하나님 나라의 진행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불일치가 한 가정내에 있음을 드러났다. 드디어 이삭은 리브가와 야곱의 잔꾀로 장자의 축복이 가로채어지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27장). 그러나 바로 이런 어리석음에 가까운 수동성이 원래 아이들이 태어날 때의 예언(25:23)이 성취되는 하나의 길이 되었다. 이삭의 생애에 대한 비교적 짧은 보고에 이어서 그의 임종이 보고되려면 한참이 걸린다 (35:27-29). 이미 그 아들들의 격렬하고도 적극적인 삶의 내용이 천년이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이 흘러가는듯한 이삭의 시대에 속하여야 할 보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만 것이다.
10. 야곱 : 능동적으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
야곱의 경우는 처음부터 아버지와 달랐다. 아들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아들이 둘이나 되어서 문제가 되는 경우속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첫째가 둘째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이상한 예언은 둘째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속에 있었고 또 그것이 둘째 자신의 마음에 깊이 박혔을 것이다. 그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 예언은 인간적으로 이해되었고 팟죽이나 (25:27-34) 속임수를 통해서 (27장) 인간적인 방법으로 쟁취되는 것 같았다. 야곱은 그 아버지의 수동성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무시내지 비웃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하나님의 당신의 약속을 이루는 전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의 부족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인간적으로 성취하는 일에 열을 올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가 치른 대가는 지루하고도 비참한 것이었고 밧단아람에 갔다 돌아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속임에 속임의 연속으로 이루어졌다 (29-32장). 심지어는 벧엘에서 한 서원(28:21-22)까지 망각함으로서 일종의 하나님을 속이는 지경까지 갔고, 자기 딸 디나의 사건(34장)을 통하여서야 - 이 사건도 아들들의 속임수로 처리된다 - 비로소 자신의 서원을 기억하였고 벧엘로 가면서 새로운 헌신을 약속한다 (35장). 결국 야곱의 모든 생애는 속이는 자가 속임을 당한다는 전체의 주제로 꿰어진다.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12아들이 준비되어 장차 12지파라는 하나님 나라 전체의 중요한 골격이 형성된 것이 야곱을 통한 하나님나라 역사의 의미이다.
11. 요셉 : 한 토막의 아름다운 스토리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
요셉의 모습은 선조들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 야곱의 역동성은 그가 11번째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것과 결국에는 이스라엘 전체가 애굽에서 정착하여 민족으로 성장하는 것을 준비하는 장자로서의 사명을 다했다는 점에서 요셉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야곱은 속임으로 시작하여 속임을 당함으로 마친다. 야곱이 요셉이 죽었다는 아들들의 거짓보고에 속임을 당하고 애굽에 내려가는 것도 요셉의 선한 속임의 완전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그 속임수 아래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요셉은 속임 당함(37장)에서 시작하여 선한 속임을 베푸는 (42-45장) 것으로 마무리 되는 점에서 철저히 대조된다. 야곱은 속임 때문에 여러차례의 어려움을 당하지만 요셉은 정직함 때문에 여러차례의 어려움을 당한다.
이삭에게서 보았던 수동성은 요셉에게서 아무리 밑바닥에 내려가더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곳에서 혁명이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보다 모든 상황속에서 최선을 다하는데서 보여진다. 그러나 이미 여기서 차이가 발견되는데 그 수동성이 어리석음으로 후퇴하는 대신 모든 오해와 불의 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찬란한 지혜를 나타내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보았던 전능한 가부장적인 모습을 모든 야곱의 가족을 애굽에 오게 하고 고센땅에 머무르게 하며 자자손을 무릎에서 기르기까지 한 점(50:22-23)에서 요셉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여자의 문제로 실수를 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함을 보여서 어떤 주석가들은 요셉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할 정도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물론 요셉의 스토리의 중간에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사건이 끼어 나온다 (38장). 자부인 다말과 동침하여 쌍둥이를 낳는 비참한 출산을 경험하지만 자신을 숨기고 있는 애굽의 총리대신인 요셉앞에서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며 베냐민과 야곱을 보호하며 토하는 사자후는 장차 때가 되어서 유다족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며 거기서 메시야가 나오는 가장 중요한 기초를 놓은 것이다.
요셉의 긴 생애는 어두운 색뿐 아니라 밝은 색 그리고 중립적인 색조차 조화된 한토막의 극히 아름다운 그림과 같이 묘사되었다.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창세기에서 기초된 하나님 나라를 70명의 인원으로 완전히 준비하여 출애굽기로 넘기며 민족이 이루어지고 또 하나님과 근본적인 언약이 형성되며 또 마지막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요소인 땅이 마련되는 것을 손짓하고 있다. 이것을 위하여 요셉은 야곱이 마지막 순간에 손을 어긋맞게 하여서 에브라함을 므낫세보다 먼저 축복하는 지혜를 배워야 했고 (48장) 야곱의 시신을 장차 이스라엘 민족이 차지할 가나안 땅에 묻었다 (50:1-14). 또 마지막으로 이것을 위하여 자신의 시신은 아버지와 같이 가나안 땅에서 열조에게 돌아가게 한 것이 아니라 애굽에 임시로 있게 하여 장차 출애굽의 진군명령이 떨어질 때 가지고 나갈 역사의 유물이 되게 한 역사의식이 있는 유언을 남긴다 (50:24-25). 이것이 그 훗날에 이행되었으며 (출 13:19) 드디어 가나안 정복의 기본골격이 마무리 되었을 때 요셉의 유골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에게서 산 땅(33:19)에 그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가나안에서 열조에게 돌아가게 된다. (수 24:32).
5. 창세기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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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창세기가 전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야훼가 땅과 하늘을 만들었을 때 땅에는 아직 들 에는 나무 한 포기 없고 풀도 없었다. 하나님은 땅에 인간 의 죄악이 가득 찬 것을 알고 땅에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 하고 분히 여겨 땅에 홍수를 일으켜 세상의 생명이 있는 모 든 피조물을 명말시켰다. 홍수는 40일간 계속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 주에 탄 노아와 그 가족과 각종 동물의 한 쌍 씩만이 구원 되어 아라랏산에 도착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아들들을 축복했다. 이윽고 피조물 들이 다시 번창하여 인류는 동쪽 슈메르 땅에 정주하게 되 었다. 그 때 온 세상은 말이 같았다. 그들은 불손하게도 벽돌로 하늘에까지 닿는 바벨탑을 건 설하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까지 모두 하나의 백성 하나의 말이었던 그들의 말을 혼란하게 하여 서로 말이 통 하지 않도록 하고, 그들을 그 땅에서 온 세상에 흩어지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도시를 세우는 일을 중단했다. 그렇 기 때문에 대혼란이 일어나고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디아인이며 우르에 살았으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 우르를 떠나서 하 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온 가족과 가산을 거느 리고 이주하였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신앙과 그 명령에 대 한 복종이 모범적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계 약에 의하여 그 자손이 번창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아 브라함과 늙은 아내 사라 사이에 오랜 기도가 효험하여 장 자 이삭이 태어나고 이삭이 그 뒤를 계승한다. 이삭은 레베카와 결혼하고 에서와 야곱의 쌍동이를 낳 는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여 형 에서는 사냥을 잘해서 들 에서 사는 청년이 되고 동생 야곱은 내성적이어서 집안에 만 묻혀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다. 이삭은 잡아오는 짐승의 고기 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사랑했다. 어느날 동생 야곱은 계략을 꾸며서 형 에서에게서 장자 권과 부친 이삭의 분노를 사서 동쪽에 있는 친척 라반에게 로 도망갔다. 야곱은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켈을 아내로 얻어 가나안 으로 돌아온다. 야곱은 또한 길르앗에서 흘러 요르단강으 로 들어가는 얍복 개울을 건너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이겼 기 때문에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다>의뜻) 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주어졌다. 민간 어원적 설명에 의하면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의 유래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및 야곱의 열두 아들들 의 4대는 족장이라고 해서, 모두 유목민의 족장이었다. 그 리고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이스라엘 12 부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2. 성서의 모델은 이집트인가 메소포타미아인가
창세기라는 이름은 70 인약에서 나온 것이며, 창세기 2 장4절의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창조하신) 순서는 위와 같다>는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헤브라이어 원전의 명칭은 1장 1절의 <베레시스>(<태 초에>라는 뜻)라는 어휘에 근거한 것이다.우리 말 성서 의 창세기라는 명칭은 한문 성서에 유래된 것이다. 현존하는 창세기는 적어도 시대를 달리하는 세 가지 주요 사료층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야 훼로 돼있는 야훼이스트 사료층, 하나님의 이름이 에로힘 으로 돼있는 제사적 사료층의 세 가지이다. 이것은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로니아 포로 후, 기원전 5 세기에 모세 5경 전체를 편찬한 제사학파에 의하여 기록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제사학파의 기록은 이스라엘의 전통을 정리하고 지키기 위해서 계보, 연대, 날짜, 통계 등의 객관적인 기록을 즐 겨 쓰고 모든 사료를 편찬하는 기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문체는 무미건조하고 딱딱하나 깊은 신한적 통창은 야훼 이스트 사료와 에로히스트 사료층이 훨씬 못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성립 당초의 유대교단의 신앙이 숨겨 져 있다. 제사학파에 유래되는 사료층 안에는 상당히 오래된 사료 도 들어있다. 내용은 만물의 기원과 인류의 역사(1장-11장), 족장들 의 역사(12장 -50장)으로 돼있다. 전자는 천지 창조, 인간의 타락, 카인과 아벨, 아담의 계보, 홍수와 노아의 자손, 바벨탑과 셈의 계보,후자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전설, 야곱의 전설, 요셉의 전설 등 으로 돼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4절 전반의 천지 창조설은 제사적 사료층에 의한 것이며, 그 원형은 <위로는 하늘의 이 름이 없고 아래로는 땅의 이름이 없을 때에>하는 구 절로 시작되는 바빌로니아의 창조 신하 <에누마.에리슈 신화>였다고 생각된다. 창세기 3장에는 낙원의 상실이 얘기되어 있으며, 이것 은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하는 이야기이며, 메소포타미 아의 전승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3장은 도덕적 종교적 통창이 대단히 깊고 구약성서 중 에서도 가장 훌륭한 부분의 하나이며, 어느 구약성서는 창 세기 중의 진주라고 극찬하였다. 불사와 금단의 열매에 관한 부분과 흡사한 내용을 가지 고 있는 점토판 문서가 이집트 제18 왕조의 이단왕 아벤 호테프 4세(BC 14세기)가 아멘신의 수도 테베의 하류에 세운 새로운 수도 아케토아텐, 현지명 텔.엘-아마르나와 앗시리아 왕 앗슐바니팔이 니네베에 건설한 왕 궁 부속의 도서관 자리에서 출토되었다. 이것은 <아다파전설.이라고 불려진다. 그 대충 줄거리 는 지혜의 신 에아가 자기 종을 삼기 위해서 아다파라는 원인을 인간의 모습을 닮게 만들었다. 에아에 의하여 초인간적인 지혜를 갖게 된 이 아다파가 에아의 질투 때문에 영생의 음식을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 이다. 어떤 학자는 이 이야기가 3장의 원형이라고 하고 야훼 이스트가 그것을 순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소재 는 메소포타미아로 소급된다 할지라도 제한된 적은 사료 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3. <성서>의 첫 부분에 숨겨진 신비
성서 중에는 <주해자의 십자가>라고 일러지는 난해한 부분이 적지 않다. 성서의 첫 부분에 있는 창세기 1장 13절은 그 첫번째 것이다. 창세기 1-2장은 천지 만물의 창조의 기사이며, 1장1절- 2장 4절상과 2장 4절하-2장25절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고, 그 어휘, 문장, 사상 등으로 보아 전자는 제사적 사료층이고 후자는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첫머리의 1장1절과 2,3절의 관계에 관해서 최 근에 많은 연구가 있다. 우선 여기서 원문을 보자 (1)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 하였다. (2)땅 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나님 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3)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여기서 제1절은 표제적 성격을 갖는 독립 구절이라고 보 는 전통적 해석이 일반적이고, 제2절에서 창조의 설명이 전개되고 창조의 소재인<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은 깊은 물> 이 어디서 왔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제사적 사료층은 창조를 무와 유의 대립으로서가 아니라 혼돈과 질서의 대립에서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해석자는 제1절을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독립 구절이 아니라, 3절의 <하나 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하는 구절의 종속절이라고 해석한다. 2절은 상황 설명의 도입 구절, 3절은 주 구절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성은 2장4절하-6절(야웨이스트 사료 층)의. <야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 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야훼 하나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 람도 없었던 것이다. 마침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 시었다>는 구절과 바빌로니아의 창조 신화 <에누마.에리슈.의 첫머리의 한 구절 <위에는 하늘의 이름 이 없고 아래로는 땅의 이름이 아직 없었을때.>하는 것과 같이 이 부분도 <야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 에, 땅에는 아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구약성서의 창조 설화에는 내용적으로 바빌로니아 신화의 다 신교적 요소가 배제되어 있다. 1장1절의 어순은 헤브라이어 원전에는 다음과 같이 돼 있 다. 숫자는 번역의 순서이다. 8 7 1 3 2 4 6 5 태초에 . 창조하셨다 . 하나님(이) . 을 . 하늘 . 그리고 을 . 땅 (<하나님>은 명사.남성.복수.형이 복수이며 의미가 단수인 것을 <경외의 복수>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 짝을 만들 어 주리라> 그래서 야훼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 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고는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든 다음, 아담에게 데려 오자 아담 은 이렇게 외쳤다. " 드디어 나타났구나!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 르리라!" 그래서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 게 되었다.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창세기 2장7-25절) 이것은 야훼이스트 사료층의 창세 기의 일부이다. 구약성서는 여러 시대를 통해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 어왔다. 유럽 중세기에는 <하와가 아담의 왼쪽 갈빗대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보다 못하다>고 하는 속된 생각이 있었다.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성향을 갖는 하와는 남자보다 짐승 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인가보다. 창세기에 의하면 낙원에서 사는 아담과 하와는 알몸이었을 것이다. 알몸의 남녀(이것은 왼쪽에 아담이, 오른 쪽에 하와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사이에 뱀이 서려있 는 나무가 서있는(고대 그리스나 서아시아에서는 유혹을 상징했다)그림이 3세기초에 나타났다. 그것은 1920년 에 우연히 발견된 투라.유로포스(북시리아의 안타오키아와 세르키아 사이)의 <그리스도교도의 집>의 세례실의 벽화 <아담과 하와>의 낙원 상실의 서막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로마의 라테라노 미술관 소장의 3-4세기의 석관 부조의 <하와의 창조> 장면의 묘사에도 보인다. 여기서 는 아담이 누워있고 그 발치에 하와가 서 있다. <뱀의 유혹>이 미술의 테마로서 중세를 통해서 취급되 었는데 <하와의 창조>는 9세기경부터 다시 취급되고, 13 세기부터는 신학적 의의 때문에 아담의 창조 이상으로 자 주 취급되었다. 그럼 중세기의 속된 생각처럼, 하와는 과연 아담의 왼쪽 갈빗대로 만들어진 것일까. 성서는 하와가 아담의 어느쪽 갈빗대로 만들어졌다는 언급은 없다. 아담이 깊이 잠든 사 이에 야훼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 만들었다고만 했다. 하와는 아담의 심장과 평행으로 있는 갈빗대로 만든 것이므로 하와와 아담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동등 하며 사회적으로 평등하다. 시각 예술의 면에서는 아담의 오른 쪽 갈빗대에서 하와가 만들어지는 장면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서양 미술에 있어서 오른쪽과 왼쪽은 무엇을 의미할까. 5. 바벨탑은 어디 있었는가
창세기 11장 1-9절은 바벨탑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전 하고 있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 았다. .야훼게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 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땅으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 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 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혼란 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탑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바빌론 제1왕조(BC 19-16세기) 시대에 바빌론 주변에 세워진 인공의 거대한 산, 즉 지 그라드의 하나이다. 그 정상에는 제사때에 신이 하늘에 서 강림했다고 생각되었다. 헤브라이어의 바벨은 바빌리 의 변음이며 바빌리안 앗카도어로 <신의 문>이라는 뜻 이며 원래는 도시 이름이었던 것이 뒤에 그리스어로 바 뷸론이라고 불리게 되고, 다시 그 지방 일대가 바빌로 니아라고 부르게 됐다. 이층탑은 메소포타미아 제 도시의 주요 신전의 중앙에 세워지고 파라밋 형태를 이루고 큰 토대 위에 보통은 7층으로 쌓아올린 햇 빛에 말린 벽돌로 돼있으며 각층 은 경사지게 만들어진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최상 층에는 신전이 설치 되어있고 거기서 희생을 드리는 의 식이 거행된다. 고대의 우르(현대명 텔.엘.무카이아르)나둘.운탄(현 대명 초가.잔빌)의 층탑은 특히 유명하다. 구약성서의 바벨탑은 바빌론의 유적 발굴조사의 결과 바빌론의 도성 마르둑의 신전 에사길라(<머리를 높이 든 자의 집>이라는 뜻)의 북방 에테메난키(<하늘과 땅의 토대의 집>이라는 뜻)라고 하는 층탑으로 동정 되어 있다. 이것은 슈메르인에 의해서 기공된 것이었 으나 셈족의 침입으로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 준공하지 못하고 그 미완성의 층탑은 오랫동안 고대 세계의 수 수께끼의 하나였다. 그후 재건이 시도됐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겨우 기 원전 6세기에 느브갓네살 2세(BC 604-562)에 의하여 수 축되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나 성벽도 이때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바벨탑 설화는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하며, 단순히 지 명의 유래를 설명하는 민간 어원이나 전설이 아니라 인 간의 오만이 인간 상호간의 몰이해를 빚어내어 탑 건축 이 중단된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의도는 바빌론의 탑의 기원에 빙자해서 홍수 후 다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에게 도전하려고 하는 인간의 오만에 대 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러시아 문호 도스토엡스키(1821-1881)는 <카라마조프의 형제>(1867-1880)에서 인간의 가공한 바벨탑의 건축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6. 점토판에 새겨진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형
1872년 가을, 당시 런던의 대영박물관의 유물 수리인 으로 있던 죠지 스미드(1840-1876)는 1853년에 모슬 주 재 영국 부영사의 동생 H.랫삼(1826-1910)이 니느웨의 앗슐.바니발 왕(BC668-626)의 왕궁 부속 도서관 자리에 서 출토한 점토판 문서들을 정리하다가, 그 중에서 한 단편의 기록이 창세기 6장에서 9장에 기록돼있는 노아 의 홍수 이야기(J사료층,P사료층에 들어 있는 것이며 중 복과 모순이 있다)와 흡수한 것을 발견하고, 동년 12월에 새로 창설된 <성서 고고학회>에서 그것을 보고했다. 이 보고는 각계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대단한 평판을 받았다. 이것이 <길가메슈 서사시>의 본래의 부분인지 여부는 별 문제로 치고, 이것이 후일에 <길가메슈 서사시>의 제11 서판의 일부라는 것이 알려지고, <길가메슈 서사시>중의 최대의 에피소드로서 각광을 받은 서판의 발견이 되었다. 죠지.스미드는 대영박물관에서 <앗사리아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H.C.롤링손이 간행한 착 쐐기꼴 글자 도판 의 제작 등을 도우면서 당시 알려져 있던 쇄기꼴 글자의 구조를 알게 되고 점토판 위에 기록된 고대 문학에 열중 하게 되었다. 그는 그때의 광경을 변견후 4년째인 1876 년에 출판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 단편들(랏삼이 니느웨에서 발굴한 점토판 문서의 일부)의 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후에 나는 반조각이 된 묘한 서판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처음에는 분명히 여섯 난으로 된 것이었다. 그 셋째 난을 보자 나는 배가 니 시르 산에 닿았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비둘기 를 날려 보낸 일, 그것이 내려 앉을 곳이 없어서 돌아왔 다는 기록이 있다. 나는 곧 이것이 <대홍수>의 갈디아(지 리적으로는 바빌로니아와 같다)판의 일부라는 것을 알았 다." 죠지.스미드는 신문사 등의 후원으로 다음 해 1873년 초에 현재 니느웨로 갈 수 있게 되어 1873년과 74년의 2회에 걸쳐서 발굴 조사를 지휘하고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또다시 홍수 설화의 일부가 되는 대량의 점토판들 을 발견하였다. 그는 먼저 발견한 서판이 12매의 서판 으로 된 대문학 작품의 일부라는 것도 알았다. 이것은 어는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서사시라는 것을 알 았으나 세개의 쐐기꼴 글자로 기록된 주인공의 이름을 쉽게 해독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창세기 10장8절에 보 이는 영웅 나므롯이다. 엔키두는 우르크로 내려와서 그곳 생활 양식을 익힌다. 양자는 우르크시의 성문에서 격투를 한다. 서로 상대의 힘을 알고 우정을 맺어 그후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 가 되고 힘을 합해서 모험을 하게 된다. 길가메슈는 엔키두에게 측백나무 숲으로 원정할 계획을 의논한다. 결국 두 사람은 우르크의 장로들과 의논해서 여행의 수호신과 태양신 샤마슈의 허락을 받고 측백나무 숲으로 원정을 떠난다. 두 사람은 측백나무 숲의 산지기인 괴물 프와와를 죽이 고 측백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돌아온다. 사랑과 향락의 여신 이슈탈은 개선하는 길가메슈를 발 견하고 이 세상의 부를 약속하고 구혼한다. 여신의 불륜을 알고 있는 길가메슈는 이것을 거절한다. 그래서 분노한 여신 이슈탈의 저주로 하늘의 신 아누로 부터 하늘소가 파견되지만 두 사람은 이것을 격퇴하고 우 르크로 돌아온다. 다음에 여신 이슈탈은 친구 엔키두를 12일간의 병고로 눕게 하고 저 세상으로 빼앗아 가버린다. 비탄에 젖은 길가메슈는 처음으로 이 세상이 끝이 있다는 것과 인 생의 공허함을 깨닫고 불사의 약초를 찾아 방랑의 여 행을 떠난다. 그는 산과 들을 넘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 드디어 삶과 죽음의 비밀을 알고있는 인간의 조상 우도 나피슈팀이 살고 있는 행복의 섬을 찾아가서 그에게 영 원한 생명의 비밀을 묻는다. 그는 신이 내린 대홍수의 위험에서 자기가 어떻게 피 했는지를 말한다. 신 에아의 말씀으로 자기는 네모진 배를 만들고 위험을 피할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죽음을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길가메슈는 찾고 있던 해답을 얻지 못하고 낙심해서 돌아오려고 하자, 우도나피슈팀은 그의 아내의 권고에 따라 바다 밑에 있는 불로장생의 약초가 있는 곳을 가 르쳐 준다. 길가메슈는 곧 바다 밑으로 가서 그 약초 를 얻고 기쁘게 그것을 우르크로 가지고 온다. 도중에 차고 맑은 샘을 발견하고 거기서 목욕하는 사이 에 이 약초의 향기에 끌려 온 뱀이 물 속에서 나와 이 약초를 훔쳐 달아난다. 길가메슈는 실망에 빠져 허무하 게 우르크로 돌아간다. 본문에는 이상의 줄거리에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첨가되 어 있다. 우도나피슈팀의 설화는 창세기 6장-9장에 기록되어 있 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흡사하다. 노아가 홍수가 빠졌 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날려보낸 새가 까마귀와 비둘기인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읽어보면 양자는 전혀 다르다. <길가 메슈 서사시>에서는 대홍수가 일어난 것은 신들이 서로 싸웠기 때문인 것으로 돼있는데,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인간의 죄가 만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노하여 내린 것 으로 돼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인의 대홍수 이야기를 그 신앙에 따라 고쳐 쓴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도나피슈 팀은 신에아가 특별히 불쌍히 여겨 가르쳐 주었기 때문 에 대홍수를 면한 것으로 돼 있는데, 노아는 의로운 사 람이기 때문에 방주를 타고 구원된 것으로 돼 있다. 노아의 홍수 설화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노아의 홍수 설화의 원형은<길가메슈 서사시>중의 우 도나피슈팀 설화로 소급되고, 다시 이 설화의 원형은 슈메르의 서사시들 중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파손이 많이 된 점토판 문서이긴 하지만 그 내 용은 인간의 창조와 왕국의 기원과 홍수 설화와 슈르파 크와이며 경건한 주스트라가 배를 타고 이 난을 면한 이 야기이다. 전승은 주스트라->아도나피슈팀->노아,로 이동된 것으 로 생가된다. <길가메슈 서사시>는 여러 민족 사이에 널리 애호되고 많은 조각과 그림 등의 테마가 되었으며, 또한 서사시 전편을 통해서 볼수 있는 이른바 동양적 허무주의는 구 약성서의 전도서로 계승되어 있다. 이 서사시는 바빌로 니아의 종교와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될 뿐 아니라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그리고 소아시아를 통해 서 그리스에도 전해진 문화 교섭의 역사를 해명하는데 도 중요한 연구 사료가 된다. 8. 노아가 도달한 아라랏산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노아와 배에 있던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들 의 생각이 나셔서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에 빠지기 시작 하였다. 땅 밑 큰 물줄기와 하늘 구멍이 막혀 하늘에서 내리던 비가 멎었다. 그리하여 땅에서 물이 줄어들기 시 작한지 150일이 되던 날인 7월17일 배는 마침내 아라랏 산 등마루에 머물렀다.> (창세기8장1-4절) 창세기 6장에서 9장에 걸친 노아의 홍수 설화는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돼 있지 않다. 방주에 실려진 짐승들 이야기도 홍수의 원인이나 기간 등도 오랜 야훼이스트 사료층과 새로운 제사적 사료층 이 섞여있으며 중복과 모순이 있다. 이것은 창세기의 편찬자가 천지 창조 설화와 같이 오래된 전승을 버리지 않고 남겼기 때문이다. 구약성서가 전해진 뒤로 많은 사람들이 홍수 설화를 읽고 노아의 방주에 관심을 가졌 던 것은 물론이다. 이 설화를 테마로 그린 화가도 많고 교회당의 장식으로 노아의 방주와 비둘기를 조각한 조각품도 많다. 아라랏산 과 노아의 방주에 관해서는 저 유명한 마르코 폴로도 언급 한 것처럼,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문제삼아 왔 다. 노아의 방주가 최후로 도착했다고 하는 아라랏산은 어디 있는 산일까. 지도를 보자. 흑해와 카스피해의 두 바다 사이에 아르메니아지방이라고 하는 고원지대가 있다. 높은 봉우리가 많고, 이것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티 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이 되어 이라크 평야를 적셔주고 있 다. 전설에 의하면 이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는 어느 높은 산 이 아라랏산이라고 한다. 아르메니아 지방은 소련, 터키, 이란의 세 나라로 갈라져 있는데, 아라랏산은 이 3국 국경에 솟아있는 화산이며 터 키령에 있다. 그 최고봉은 5,156미터나 된다. 아르메니아 지방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옛날부터 이 산마루에 노아의 방 주가 남아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 산에는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신성한 산으로 여기고 있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전설의 산 아라랏에 오르려 고 했다. 1929년에는 도이치 의학자이며 등산가인 파로트 가 이 아라랏산에 올라가서 산마루에서 노아의 방주가 앉 을만한 넓은 대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방주를 실 제로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창세기의 원문에는 <아라랏산들>이라고 돼 있으며 한 봉 우리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어느 지대 전체를 의미하는 것 같이 생각된다. 헤브라이어의 아라랏은 앗카 도어의 우랄루두(<높은지방>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반 호수지방의 고원지대를 가리켜 이름지어진 것 이며, 기원전 8세기경에 그 땅에는 우랄루두 왕국이 번영 하고 있었다. 이것은 창세기의 야훼이스트 사료층이 기록 된 시대와 맞먹는다. 오늘날 우리는 니실산이나 아라랏산 이나 방주의 도착지점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리고 슈메르 의 홍수 설화에는 산 얘기가 없다. <홍수층>쪽이 확실한 고고학적 사료의 증거가 되고 있다. 9.이스라엘 민족사의 시작
헬레니즘과 함께 유럽의 정신적 전통을 이루고 있는 헤브라이즘의 담당자였던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에 유가없는 기구한 운명을 짊어지고 오늘에 이른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원 제 20세기의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는 깊은 안개 속에 싸여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실증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근년의 여러가지 연구는 이에 관해서 고고학의 여러가지 성과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고 있다. 특히 <마리문서>(BC 18세기), <누즈문서> (BC 15세기),<아라락 문서>(BC 15세기), <우가리트문서.(BC 15-14세기),<보하스.쿄이문서>(BC 14세기)등이 그것이다. 창세기 12장 이하에 전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 즉 아브라함(12장-25장), 이삭(25장-26장),야곱(25-36장)등에 관한 족장 설화는 오랫동안에 걸쳐 구전되어 온 구비를 근거로 한 전승들이며, 이 전승들이 야훼이스트의 손으로 새로운 문맥과 수식이 가해지는 것은 기원전 10세기로 소급된다. 그리고 이것들을 현존하는 모양으로 완성한 것은 바빌로니아 포로시대(BC 6세기)나 그 이후라고 상정되는 제사적 사료층의 기록자와 그 밖의 약산의 가필자들이라고 생각된다. 족장 설화는 19세기 말경까지는 후대의 창작의 반영이라고 했으며, 아브라함 이하의 족장들은 신화적인 인물로 쳤으며, 그리고 수수께끼에 싸인 부족의 조상이라고 여겨져 그 사실성이 부정되는 일이 많았다. 그 후 오리엔트 고고학의 진전에 따라, 특히 1925년 이후의 고고학적 제 발견에 의하여 그 내용이 일변하였다. 즉 족장 설화와 메소포타미아와의 지리적 역사적 관계가, 특히 족장 설화의 역사적 배경이 기원전 2천년대 초기에서 중엽에 걸쳐서 메소포타미아 북부지방의 생활 관습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고 전승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사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족장 설화는 출토된 여러 사료와의 관련으로 역사적인 테두리 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족장들의 연대에 관해서 1950년 이후의 주요 견해들을 대별하면, 기원전 2천년대 전반기로 치는 설과 기원전 2천년대 중엽 이후의 아람인의 이주와 결부시키는 설로 나뉘고, 양자는 학계의 쟁점이 돼 있다. 전자는 <마리문서>나 <누즈문서>등을 근거로 해서 족장들의 연대를 기원전 2천년대 전반의 어느ㄸ로 잡는가는 학자에 따라서 다르다. 이와 반대로 족장들의 연대를 기원전 2천년대 중엽이후로 주장하는 학자로는 미국의 C.H.골든 등이 있다. 그는 <누즈문서>와 창세기에 전해지고 있는 족장시대의 관습이 평행되고 있는 예를 들어서, 그리고 <우가리트 문서>를 근거로 해서 족장들의 연대를 아마르나=미케나이시대로 잡는다. 골든의 견해에 관해서는 뒤에 소개하겠다. 10. <족장설화>에는 어떤 역사 배경이 있는가
족장 설화는 전승되는 소재들을 제공한 시댜와, 그것이 전승된 시대 및 그것들이 문장으로 기록되고 편찬된 시대를 포함한 이른바 세 가지 성격의 시대의 기록이다.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 이하의 족장들은 이스라엘 민족의이름난 선조들이다. 즉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난 선조들이다. 즉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 자체가 족장들의 생애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 족장 설화들의 핵심에 이스라엘 민족의 여명기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들어간 역사적 개요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2천년대 초기부터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유목민 집단이 남러시아의 습지대에서 파상적으로 남하하여 서아시아로 침입하고, 그 일족은 아나트리이와 고원지대 하티를 정복하여 힛타이트 왕국(BC 1700경-1200경)을 세 우고, 아시아의 원주민 속에서는 이란 서쪽 경계의 산간에 있던 카시드인이 바빌로니아를 검거하여 그 땅을 약500년간 지배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 이북지방에 있던 원주민 후르리인은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인도.이란어파의 일부인 미탄니인은 유프라테스강 중류 지역에 미탄니 왕국(BC 15-14세기 중엽)을 세웠다. 미탄니인이 기마술이 능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오리엔트의 대부분은 민족 대이동의 물결에 휩쓸려 불안 동요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이 불안 동요 가운데 소아시아지방이나 메소포타미아지방을 거쳐 시리아.팔레스타인지방에서 다시 남하해서 나일 강의 델타 지대까지 침입하여 그 땅의 아바리스를 근거지로 삼아 기원전 18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걸쳐서 1세기 남짓한 사이에 이집트의 태반을 지배한 것이 <힉소스>라고 하는 혼송 민족 집단이었다. 힉소스의 민족 구성은 분명하지 않으나 그들은 순수한 단일민족이 아니고 아시아의 후르리인을 기간으로 하고 거기에 옛부터 고대 오리엔트지방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셈어족 등을 포함하는 혼성 민족군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후르리인과 셈어족이 기원전 17세기 전후의 오리엔트 세계에 있어서 큰 세력을 차지하고 그 땅을 활동 범위로 했던 것이다. 그후 힉소스가 침입해서 1세기 후인 기원전 16세기 전반에는 이집트에서는 힉소스의 지배에 반항하는 이집트인의 세력이 발흥하고, 테베 출신의 아하메스가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를 점령하고, 뒤에는 북진하여 페니키아 연안까지 빼앗아 힉소스 세력을 완전히 타파했다. 이렇게 해서 아하메스 1세(BC 1567-47)는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제 18왕조(BC 1567-1320)의 기틀을 잡았다. 이 해로부터 이집트 역사 뿐아니라 오리엔트 전체 역사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는 아시아의 분열된 여러 나라 사이에서 신왕국 시대로 들어가서 이른바 제국주의적 침략을 해서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 약 200년 간 여러 나라의 우의에 섰다. 이 사이에 시리아.팔레스타인지방은 이집트 신왕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11. 할례는 언제 왜 시작했는가
창세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이름은 처음에 아브람이었으나, 후에 하나님 야훼는 아브람과의 계약을 맺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하였다. 하나님과 노아와의 계약의 증표는 무지개였고 아브람과의 증표는 할례였다.할례란 남자 생식기의 포피를 자르는 의식이며, 할례를 행하는 풍습은 옛부터 셈족이나 함족(이집트인) 사이에 보급되어 있었고 성인의 표시로 행해지고 있었으며, 고대 이스라엘인은 여기에 전혀 새로운 의의를 발견했다. 남자가 출생하면 8일째 날에 할례를 베풀고 명명하는 관습이 그것이고, 지금도 이것은 엄수되고 있다. 창세기 17장에서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계약의 증표를 의미하고 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언어학적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개명은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의 갱신을 뜻하고, 또한 인간의 생애의 중요한 계기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명의 갱신도 뜻하는 것이다. 창세기 12장 1-4절에 기록돼있는 야훼가 아브람에게 내린 축복과 저주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말하는 족장 설화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175세의 천수를 누리고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의 손으로 아내 사라가 묻힌 막벨라 동굴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아브라함 부부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서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 이슬람 교도의 마음 속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계속 살아있다. 아브라함의 계보를 사료 비판에 관계없이 창세기에서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12. 왜,약속의 땅<가나안>으로 떠났는가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셈으로부터 계산해서 10대째가 되며 데라의아들이고, 나홀과 하란의 두 동생이 있었다 가나안 땅으로 이사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갈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으나, 메소포타미아 서북부의 도시 하란까지 가서 그곳에 주저앉게 되었다. 아버지 데라는 여기서 250세의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왕비라는 뜻)는 창세기 20장 12절(E사료층)에 의하면 아브람은 이복 누이동생이지만 그 출생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창세기 11장 27-30절의 기록은 혈통이 가까운 부족 사이의 이합 집산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래의 이름은 아마 원래는 부족의 이름이었던 것 같으나 확증은 없다. 아내 사래는 남편 아브라함과 함께 조카 롯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과 재산과 물건들을 가지고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향해서 출발했다. 그때 아브라함은 75세였다고 한다. 아브람 일족이 메소포타미아의 변경인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향한 것은 그곳에서 안주할 땅을 찾기 위해서였다. 얼마후 그들 일족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고 야훼를 위해서 제단을 쌓지만,다시 남하하여 네게브 지방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이 지방에 기근이 들어 아브람은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 이집트로 갔다. 아브람은 이집트에 들어가면서 아내 사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정말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하오.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당신의 남편이라고 해서 나를 죽이고 당신만 살려 둘 것이오, 그러니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 덕으로 죽음을 면하고 대접도 받을 것이오"(창세기 12장 11-13절). 과연 그들이 이집트로 들어가자 이집트인들은 사래의 미모에 매혹돼 버린다. 유대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아담의 아내 하와를 빼놓고 사래는 세계 제일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이집트 왕의 신하들도 절세 미인 사래를 보고 매혹되어 그녀를 왕에게 칭찬했기 때문에 그녀는 왕궁으로 불려 들어갔다. 사래가 왕궁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그 기간이 얼마나 됐는지 일체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아내 사래는 무사히 남편 아브람에게 돌아왔다.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양 문명은 종래 주장된 것처럼 두개의 다른 문명이 아니라 동부 지중해라고 하는 공통된 지반에 세워진 유사한 구축물이라는 것을 원사료를 구사해서 강조하는 C.H.골든은 족장 설화와 우가리트의 <케레트 서사시>와 호메로스의 <일리앗>의 세가지가 모두 빼앗긴 아내를 다시 찾는 모티브에서 유사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13.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인가.누이인가
아브람은 이렇게 이집트 왕에게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는데,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창세기 20장 1-18절(E사료층)과 26장 6-11절(J사료층)에도 나온다. 전자에서 아브라함이 그랄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으며,후자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마찬가지로 그랄에서 아내 리브가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있다. 이 세가지 이야기는 아마 원래는 하나님의 사실이었는데 그것이 변형하여 현존하는 설화가 된 것인 듯하다. 1925년에서 31년에 걸쳐 언어학자인 동시에 고고학자로 유명한 E.키에라(1885-1933)가 지휘한 바그다드 아메리카, 오리엔트 연구소 및 하버드 대학의 학술 조사대에 의하여 티그리스강 동부의 구릉지대의 고도 누즈(바그다드 북쪽 약 240km )의 발굴 조사가 행하여지고,그 결과 그 땅에서 쐐기꼴 글자로 기록된 수천의 점토판 문서들이 출토되었다. 그후 이들 점토판 문서들의 해독과 연구에 의하여 족장 설화의 사회적 배경의 일단이 밝혀졌다. 이 문서들은 후르리인의 서기에 의하여 바빌로니아어로 쓰여진 것이며, 그중에는 본래의 후르리어도 자주 사용되어 있다. 문서들의 대부분은 기원전 15세기나 고바빌로니아 시대보다 조금 뒤에 쓰여진 것이며, 후르리인의 법률 문서가 많이 들어있으며, 그 내용은 족장 설화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누즈는 고앗카드시대에도 가슬이라고 해서 작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으나, 기원전 2천년대 중엽에는 후르리인이 살았고 그 지방의 중심지였다. 후르리어는 카프카스어에 속하며 인종적으로는 아르메니노이드계라고 한다. 후르리인은 이미 기원전 3천년대 후반의 기록에 나오며,그리고 우르 제3왕조 시대의 기록에도 나온다. 그들은 기원전 3천년대 후반에 카프카스산맥의 남쪽,즉 아르메니아지방의 반 호수 부근에서 티그리스 강 동쪽으로 침입해서 점점 서쪽 시리아지방으로 이동하고, 다시 남하하여 가나안 지방으로도 진출하여 기원전 2천년대를 통해서 셈어족과 함께 고대 오리엔트에서 가장 세력을 떨쳤다. 그들의 문화나 관습의 대부분은 아무르인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은 독자의 왕국을 세우지 않았으나 힉소스 이후 가나안에 새로운 문화 요소를 만들어내고 흑적 이색의 선상 문양으로 나타낸 물새나 태양의 장식이 있는 토기에 의하여 그들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그들은 구약성서에는 <호리족>(창세기 14장 6절,기타)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탄니 왕국의 지배 아래 있던 후르리인의 법관습에 의하면 아내는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누이가 되어 이중의 연분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이러한 이중의 연분에 의하여 아내의 지위가 사회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이중의 연분은 혈연 관계가 있을 경우에 더욱 많았으며 좋은 집안의 여자라면 같은 취급을 받았다. 따라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 아내가 좋은 집안의 여자이고 그 지위가 사회적으로도 존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4. 사라진 도시국가 우르는 어디 있었는가
바그다드와 페르샤만 중간, 유프라테스강에서 서쪽으로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텔.엘=무카얄(역청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언덕이 있다. 1854년에 J.E.테일러에 의하여 이 이름없는 황폐한 언덕이 구약성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고향 칼디아 사람들의 우르라는 것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우르의 유적은 1918년에 C.톰슨이나 H.R.H.홀 등에 의하여 소규모의 발굴 조사가 행하여지고,그후 1922년에서 34년 걸쳐 대영박물관과 펜실바니아 대학의 공동 출자로 L.울리 경의 지휘 아래 발굴조사가 행하여지고 그 성과가 많았다. 그 조사에 의하여 그곳이 슈메르의 도시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조사에 의하면, 우르의 도시 영역은 길이 1.2킬로 미터,너비가 800미터나 되는 다수 불규칙한 타원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벽에는 방어 시설이 설치되고 드문드문 성문이 있었다. 우르에는 우바이드 기(B.C.4천년대)이후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문화가 번창했던 흔적이 보인다. 채문 토기,원통 도장,진흙 토기(terracatta)등은 선사시대의 풍요했던 생활을 엿보게 한다. 그후에 우르는 대홍수에 의하여 유실되어 버렸다. 이 대홍수는 두께가 2.4미터나 되는 점토층이 덮여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홍수는 바빌로니아 평원 일대를 덮친 격심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홍수 전설을 낳았고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 설화는 그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이다. 우르 제1왕조(BC 26세기)는 슈메르의 패권을 잡고 있었으며<우르 왕릉군>은 당시의 높은 물질 문화의 번영을 말해주고 있다. 그후 같은 슈메르의 도시국가 라가슈에게 패배해서 당분간 외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다시 우르 제3왕조(BC 21세기)가 번영을 되찾아 전바빌로니아를 지배하여, 그 문화를 엘람,시리아에 전하고 모든 왕은 성문 법전<우로난므법전><슈메르 법>등)을 제정했다. 이어서 바벨로니아 전역은 바빌론 제1왕조(BC 19세기-16세기)아래 통일되는데 우르는 자주 슈메르인의 반란의 중심지가 됐기 때문에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후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우르는 재건되고 지그라드의 복구 공사등도 있었으나 페르샤 시대에 다시 쇠퇴하여 기원전 4세기 경에는 폐허가 되고 만다. 우르 제1왕조 및 제3왕조의 수도였던 우르는 이 도시의 수호신인 달의 신 난나르의 대신전을 중심으로 한 神域과 이 신역을 포함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그리고 그 성벽 바깥 쪽에 펼쳐지는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우바이드 기의 취락의 유적 위에 몇번이나 다시 세워진 작은 언덕 위의 도시이다. 유프라테스강과 그 운하에 따라 성벽이 있고 그 내부에는 제방이 있다. 달의 신 난나르와 그 배우신 닌가르의 신전은 시가지보다도 한층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흙벽돌의 거대한 담에 싸여 있었다. 신역에는 몇군데의 신전이 있고 각 신전에는 관청과 창고가 붙어있었다. 신전과 지그라드가 우르의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15.우르의 대지하 고분군의 발견
우르의 도시지역 중앙 북쪽에는 신역이 있었다. 1927년에 우르 제1왕조나 제 2왕조 시대라고 추정되는 <우르의 왕묘군>이 발굴된 것은 신역의 동남쪽이다. 메스.카람.두그의 왕묘에서 황금제 그릇,투그,촛대,은제 띠,단검 등 막대한 부와 정교와 기술을 말해주는 많은 유품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아.바르.기 왕의 고분 현낸 문서를 근거로 창세기 23장34장 10,21절,42장 34절,이사야서 23장 8절 등을 비교 논증하고 있다. 아래에 그 골자를 추려 소개하자. 아브라함도 하타이트 왕의 비호 아래<우가르트 문서>에 보이는 <우라>에서 가나안으로 온 호상이었다고 주장하며, 창세기 23장 6절의 <영감님>을 70인역이 <왕>으로 번역하고 있음을 주목하고,이것을 프토레마이오스 시대<왕>이 아니라 호메로스에 나오는 의미의 <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데,그것은 즉동부 지중해적인 의미의 <왕>이라고 해석한다. 다음으로 위에서 말한 창세기의 제 기록이나 아마르나 = 미케네 시대의 국제 환경을 더듬어 아브라함이 상업 활동을 했던 것을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우르 중에서 갈디아인의 우르라는 지명이 오직 한 군데 뿐이라고 할 수는 없고,아브라함이 태어난 고향인 우르는 갈디아의 우르가 아니라 <우가리트 문서>에 보이는 <우라>라고 하며, 그곳을 하란 근처에서 찾는다. 이상의 여러 점에서, 왕들의 서사시로서의 족장 설화는 틀림없이 왕실을 찬양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돼 온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즉 갈디아인의 우르는 바빌로니아 남부의 우르가 아니고, 크세노판이 언급하고 있는 아르메니아인의 이웃이라고 하는 북방 갈디안의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사야서 23장 13절의 갈디아인의 나라는 바빌로니아의 남부의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북방의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며,Hald는 아르메니아/우랄어 것 같지 않다. 16. 갈디아인의 우르는 어디인가.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아들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길을 떠나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에다 자리잡고 살았다(창세기 11장 31절). 갈디아인의 우르는 일반적으로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도시,현재의 이라크의 나사리아 근처의 도시라고 한다. 그러나 창세기의 전승은 우르의 도시보다도 오히려 하란을 중심으로 하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결부되어 있다. 현재의 시리아 국경에 가까운 터키 령,유프라테스강의 지류 베리크 강변에 <하란>이라고 하는 아랍인 한촌이 있다. 그 근처는 예전에 바빌로니아-소아시아-이집트를 연결하는 통로에 있는 통상의 중심지였다. 이 하란과 창세기의 전승과의 연결은 아브라함의 조상의 이름이나 형제의 이름과 하란 근처의 도시들의 이름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데, 구약성서의 족장들과 기원전 2천년대의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있던 도시들과의 관계를 직접 입증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C.H.골든은 하타이트 왕국의 수도 하투샤슈에서 기원전 15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서 번영했던 우가리트에 보실 근처와 선도(義道)에서 59명의 정장한 순장자의 유해가 발견되고, 두 대의 손수레와 그것을 끄는 소와 은제의 배 모형도 발견 되었다. 슈브.아드 왕비의 고분에서는 수금과 황금이나 청석금등을 사용해서 만든 머리 장식품이나 목걸이 등이 나왔다. 수금은 각각 숫소와 암소와 숫사슴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으며, L.울리경은 이것은 각각 베이스,테너,앨토의 표시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왕묘에서는 노는 방법은 모르지만 조개껍질을 상감한 게임 판이나 <우르의 군기>라고 불리는 조개껍질을 상감한 군기 등이 출토되었다. <우르의 군기>는 각각 출정과 개선의 그림으로 나뉘어 있으며, 예술 작품으로서도 훌륭하며 역사 기록으로서도 가치가 있고,당시의 전투 광경을 알려주는 귀중한 것이다. 우르의 왕묘군-대지하 고분군-의 발견은 종래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확실한 비문이 없기 때문에 왕묘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논란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풍년제>에서 사랑의 여신 이슈달과 곡물의 신 다므즈의 역할을 하는 제관의 분묘라 하고, 어떤 사람은 나일강 유역에서 온 망명자의 분묘라고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왕묘는 지하 깊숙히 만들어졌고 발굴 조사를 하려면 지하수가 넘쳐서 곤란하다 . 1천년 이상이나 지난 고대 은나라 왕묘와 흡사한 <우르의 왕묘군>에 이어지는 발견은 앞으로 다시 있을 것의 옛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갈디아인의 우르는 골든 경의 말처럼, 과연 <우라>일까. 앞날의 연구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17 .악덕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창세기에 의하면, 소돔<둘러싸인 곳>이라는 뜻과 고모라<깊다><물이 많다>는 뜻의 도시들은 아라바의 저지 습윤한 땅에 있던 가나안인의 다섯 도시 중에 들며,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의 아들 롯은 백부 아브라함과 헤어져 비옥한 요르단의 저지 소듬으로 옮겨 살았다. 소돔과 소모라는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의 내습을 받고, 소돔의 왕은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다행히 난을 면했다(14장2-22절).그후 이 도시의 악덕이 심해서 소돔과 고모라는 다른 도시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 불 비로 말미암아 멸망했다. 롯은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천사의 경고에 따라 소돔에서 도피했으나 롯의 아내는 천사의 경고를 어겨서 뒤돌아 봤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롯은 두 딸과 함께 요르단 동쪽의 산지로 피해서 동굴 속에 살았다고 한다. 사해 서남 연안의 이 이른바 소돔 가까이에서는 1952년에 칼리(Kali)공장이 세워지고 1955년에는 질소공장이 신설되어 사해 개발을 위해서 조업하고 있다. 1957년에는 광대한 천연가스층이 발견되었다. 그 지역은 과거 큰 지진에의하여 땅이 내려앉고 천연가스와 석유가 폭발했기 때문에 도시들이 화염에 싸여 사해의 수중에 침몰한 것으로 생각된다. 소돔과 고모라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해 남부 수중 수심 1.8미터 정도의 얕은 부분은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장소라고 한다. 오늘날 사해의 남단에 가까운 서안 지역 남북 10킬로미터,폭 2.4-5킬로미터,높이 216미터의 암염 산이 있다.이곳은 아라비아어로 제벨.우스돔(소돔의 산>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둥근 봉우리들로 돼 있다. 그 근처의 도로흙은 염분이 말라 백색으로 돼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기슭에는 풍화 작용으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이상하게 생긴 암염기둥이 여러개 서 있다. 제벨,우스돔의 북쪽 기슭 한 모퉁이에 있는 사람 형상의 암염 기둥이 <롯의 아내의 소금기둥>이라고 한다. 이 기암이 뒤를 돌아다 보는 부인의 모습과 가장 닮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리라. 물욕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 이야기는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다(누가복음 17장 32절). 영어의 소도미 (sodomy,異色)는 악덕의 도시 소돔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돔은 죄악과 악덕의 형용사가 되어 부패한 지도자는 <소돔의 백성>(이사야서 1장 10절),<소돔과 포도나무> (신명기 32장 32절)등으로 불리고, 또한 예루살렘의 죄악이 심함을 <소돔의 죄> (에스겔서 16장 49절)라고 표현했다. 성서를 통해서 소돔은 고모라와 함께 죄악과 하나님의 형벌의 귀감으로 인용되고 있다. 18. 악덕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실재했는가
악덕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과연 실재했을까 1976년 11월 1일 <요미우리 신문> 석간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미국 쎈트루이스에서 10월 29일 개최된 세계 종교학회연차 회의의 강연에서 로마대학의 죠반니 페티나드 교수(고고학)가 <시리아의 고대 유적에서 출토한 셈어로 기록된 점토판 중에 소돔과 고모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고 발표하여 관계자를 흥분시키고 있다고 한다. 단 한장의 점토판이기는 하지만 이 보고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소돔과 고모라의 이름이 구약성서 이외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보고자 페티나드 교수는 이미 10년 이상이나 시리아 북서부 텔.마르디크 지역에서 고대 에블라 왕국의 유적의 발굴 조사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에블라 왕국이란 어디에 있었는가. 지난 4월 1일자<요미우리 신문><아사히 신문>조간은 로마대학의 파테오.마티에 교수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대가 12년전부터 발굴 조사를 계속하고 있는데,동 조사대가 도시 에블라에서 약 1만5천장의 쐐기꼴 글자 점토판 문서를 발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7월 2일자<아사이 져널 특집 고대의 부르는 소리>(제18권 26호)에는 스기이사무씨가 <모습을 드러낸 에브라 왕국 - 기원전 20세기의 도시국가)라는 귀중한 논문을 보냈다. 이하 이에 근거해서 <에블라왕국>을 간단히 소개하겠다. 에블라 Ebla는 이블라 Ibla라고도 표기하며 셈어로 <목장>이라는뜻이다. 이것은 이 지방의 주민이 유목민을 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유적은 지금의 알레포의 남남서 70킬로미터 지점에 있으며 거의 지중해 연안의 대도시 라타키아(고대 우가리트는 이곳 북쪽 11킬로미터 지점에 있다)와 알레포를 연결하는 선상에 있으며 알레포 남쪽에 있는 하마와 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텔이라는 것은 시리아에서도 메소포타미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대 도시의 폐허를 가리키며,이곳의 윤곽은 거의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중앙은 아크로폴리스를 이루고 고지대와 저지대로 나뉘어 있다. 이 유적은 몇개의 층으로 나뉘고 가장 오랜 층은 대략 기원전 3500년에서 3000년경까지의 것으로 추정되고,이것을 제1기라고 한다. 제2기는 대략 기원전 2300년에서 2000년 내지 1900년경,제3기는 대략 기원전 1900년에서 1700년경의 것이다. 이 중에서 왕궁이나 신전의 유적이 발견되고 제3기의 신전은 특히 중요시 되고 있다. 처음에는 아크로폴리스의 제3기의 신전 발굴 등에 주력했다고 한다. 제3기가 되자 에블라는 타민족의 내습을 방어하기 위해서 대단히 견교한 성벽을 쌓게 되었는데 그 성벽도 발견되었다. 1만 5천장에 달하는 점토판 문서는 이 제3기의 유적지에서 나온 것이다. 궁정 도서관에 붙은 두개의 작은 방에서 점토판이 나왔고, 이 도시는 앗카드의 나람신 왕(BC 24세기)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이 도시는 약탈되고 소각당했으나 폐허 밑에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고 한다. 에블라의 국명은 이미 기원전 24세기로 소급되는 아카드 왕조의 조상 사르곤 왕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나라의 존재 자체는 여러 비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에블라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쐐기꼴 글자는 유프라테스강 중류 오른쪽 강안의 폐허 텔.하리리에서 출토된 <마리문서>(BC 18세기)의 예로 보아서 아마도 마리의 말과 같은 아무르(구약성서의 아모리)어 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함무라비 왕조시대(BC 18세기)의 말과 같은 서북 셈어족의 말이다. 따라서 <에블라 문서>는 <마리 문서>보다 오래된 것이 된다. 기원전 2천년대 초기라는 연대와 북시리아라는 지리적 상황으로 생각해보면 <우가리트 문서>의 경우처럼 1만 5천 장의 쐐기꼴 글자 점토판 중에는 북서 셈어족 이외의 셈어의 기록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19.고대 이스라엘인은 어떤 신을 섬겼는가
전승에 의하면, 족장들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해 왔다. 족장들의 지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 전승(창세기 12-25장)은 헤브론, 이삭 전승(25-26장)은 브엘세바,야곱 전승(25-26장)은 베델,세겜,드단과 연결되어 있다. 즉 이 주요 무대가 중부 팔레스티나의 일정한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들 각지에는 어디나 옛부터 가나안의 성소가 있고 각 족장은 이 땅에 제단을 쌓았다. 구약성서의 이러한 기록은 족장들의 각 전승이 가나안의 특정한 성소와 연결되어 생성,형성,전개된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각 족장의 전승은 원래 독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전승의 재료는 어떤 구체적인 사건에 의히셔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오는 시대를 거쳐서 만들어지고 편찬되어 현재의 문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각 전승과 관계가 있는 무대는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 의하면 어느 것이나 중기 청동기시대의 중부 팔레스티나의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창세기의 전승에 의하면,족장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가지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 엘.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창세기 17장 1절28장 3절,35장 11절,43장 14절,48장 3절,출애굽기 6장 3절,에스겔서 11장 5절),엘.요르욘(높으신 하나님의 뜻),창세기 14장 18절-24절),엘오람<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창세기 21장 33절),엘.로이(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뜻),창세기 16장 13절),엘.베델(베델의 하나님의 뜻).창세기 31장 13절35장7절),엘.베르테(계약의 하나님)의 뜻.(판관기 9장46절)등이 그것이다. 이 하나님의 호칭의 공통되고 있는 <엘>에라는 어간은 원래 셈어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였다. 한편 엘은 가나안의 만신전(Pantheon)의 주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가리트 문서>의 발견 해독 연구(50항 참조)에 의하여 엘은 또한 가나안 종교의 특정한 신격을 나타내는 고유 명사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엘은 여신 아슈라와의 거룩한 결혼으로 얌,모토 등의 신들을 낳았다. 엘은 조물주,왕,신들과 인류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백발의 노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엘은 폭풍의 신 바알에 의하여 가나안의 만신전의 왕좌를 빼앗기고 추방되었다. 이것은 엘을 주신으로 섬기는 종교가 이미 가나안에 존재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각 엘은 가나안의 특정한 성소와 결부되어 있다. 그들의 신들은 생성 번식을 기원하는 자연신이고 지연신이었다. 비옥한 땅 가나안의 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나안으로 들어간 족장들이 후대에 남긴 최대의 유산은, 도이치의 위대한 구약학자 A.알트(1883-1956)가 말하는 <족장의 신>이라는 신의 타입을 남긴 것이었다. 알트는 족장 전승이나 기타 구약성서의 전승에서 볼 수 있는 신의 호칭, 즉<아브라함의 하나님>(창세기 28장 13절31장 42,53절),<이삭의 하나님>,<야곱의 하나님><이삭을 돌보시던 두려운 하나님>(창세기 31장 42.53절)<야곱의 하나님>(창세기 49장 24절)등의 호칭에 족장시대부터 전해진 옛신의 호칭을 보고,이 신의 이름을 짓는 방법에 족장 종교의 특징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신의 이름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족장들의 신은 신의 현현을 체험한 족장의 이름과 결부시켜서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엘이 특정한 장소와 결부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들의 신은 족장 개인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즉 전자는 산, 강,나무,돌 등의 일정한 땅과 결부되는 <토지신>이고,후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특정 인물과 결부되는 <인격신>이다. 이 인격신이야말로 후대에 전해진 역사적 신이다. 이렇게 신이 일정한 토지와 결부되는 토착신이 아니라 특정한 인물에게 현현하는 특징이 바로 족장들의 종교와 모세의 종교와를 연결시키는 이스라엘 종교의 큰 특징이다. |
-참고도서-
1. 롤란드 해리슨, 류호준, 박철현 역, [구약서론],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3)
2. B.S 차일즈, 박문재 역, [구약신학],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3)
3. B.W.앤더슨, 강성열, 노항규 역, [구약성서이해],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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