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신학구성의 초안
Towards a Theological Structure in Torah
이한영, ACTS 구약학
I. 들어가는 말
구약성경신학을 연구함에 있어 오경의 적절한 이해는 몸의 척주와도 같은 역할을 분담한다. 구약성경의 전체적인 신학적 흐름이 통괄 적으로 오경의 신학구조를 직접-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를 들어 바울서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구약 안에서 오경의 메시지들은 나머지 구약 각 권의 기본적 신학의 틀(backbone)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본 논문은 이러한 중추적인 신학구성의 초안을 오경본문 즉, 토라( )에 기록된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서 공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오경의 중심적 신학의 틀에 대한 논쟁은 무엇보다도 본문의 통일성에 대한 견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왔다. 그중 특별히 문서비평을 전제한 부정적인 의견들이 설득력을 가지고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의 동향은 최종편집의 문학형태에서 공시적인 내용분석(content analysis)을 통해 오경은 그 장르에 있어 하나의 역사-신학적(historical-theological) 네러티브로써 문학-수사학적이고 신학적인 일관적 틀을 구성하고 있음을 학자들은 논하고 있다. 문제는 "그 신학적 구성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있다. 이를 답하기 위해 오경 본문에서 서론적인 "창조 이야기"가 기록된 이후(창1-2장)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네러티브)을 공시적으로(synchronically) 또한 총괄적으로 분석하여 그 내용을 담고 있는 신학구성의 초안(theological structure)을 밝혀보고자 한다.
II. 오경의 신학구성
먼저 오경본문의 내용이 하나의 큰 신학적 틀로 구성되어있음을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게하르드 하젤(G. Hasel)은 지난 1세기동안 구약성경신학을 형성해 가는 작업에 있어 많은 구약학자들은 하나의 큰 핵심적 신학구성, 혹은 중심적 해석 원리(single center or organizing principle)를 제안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있어 하나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중심적 틀을 강조한 나머지 다양한 구약 각 권의 수평적인 주제들을 놓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히로트(W. Eichrodt), 카이저(W. Kaiser), 팔머 로버트슨(Palmer Robertson)같은 학자들은 구약 각 권들을 언약(covenant)신학의 단일적 틀로 묶어 이해하려 했다. 언약 개념이 오경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나의 큰 책으로 엮어 가는 모티프, 즉 중심적 신학구조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효(孝)의 개념이 심청전의 기본 문학-사상적 원칙이 되듯 언약을 오경의 이야기들을 형성하는 중심적 틀로 본 것이다. 같은 범위에서 젤린(E. Selin)은 하나님의 거룩성, 다이슬러(A. Deissler)는 신인관계, 짐멀리(W. Zimmerli)는 야웨의 정체성, 부르스 워키(Bruce Waltkie)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약신학을 구성하는 하나의 중심적 틀로 보았다. 이에 비해 마켄지(Mackenzie는 다양한 주제들로(multi-thematic) 그의 구약신학을 구성했다. 그는 구약신학을 제의(cult), 계시(revelation), 역사(history), 자연(nature), 지혜(wisdom), 정치-사회제도(political-social institutions), 그리고 이스라엘의 미래(The future of Israel)라는 7개의 큰 주제로 서술해 나갔다. 이러한 방법들은 구약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데 있어 그 중심적 연결점이 무엇인지, 혹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양한 틀(주제)로 엮는데 있어 유리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단 점이 있다면 하나의 중심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혹은 다양하지만 특정한 주제들을 정해 그 범위를 벗어나는 구약 각 권의 수많은 수평적 내용들을 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 속의 윤리, 경제, 토지, 등등, 다양한 주제들을 들 수 있다. 또 예를 들어 창조이야기나 지혜서의 내용들을 언약의 개념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하나의 큰 신학적 틀을 구성하는데 있어 로버슨은 언약을 "a bond in blood sovereignly administered"라고 정의하며 구약의 다양한 메시지들을 연결시킨다. 언약이 이야기들 사이에 있는 긴장과 대립적 모순들을 완충시키며 하나의 큰 신학적 틀로서 오경의 메시지를 구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에 로버슨은 결합(bond), 피(blood), 주권(sovereignty)이라는 언약의 삼대 본질을 구약신학의 중심적 틀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이야기들 속에서는 이 언약의 삼대 요소들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타락 전의 창조 이야기, 지혜서, 혹은 시편을 동일한 언약의 개념으로 설명하기에는 몹시 어렵고 부자연스럽다. 로버슨은 이점에 있어 창조언약(The Covenant of Cre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실제 논의에 들어가서는 결합, 피, 주권을 말하기보다는 안식(Sabbath), 결혼(marriage), 노동(labor)을 말하고있다. 이는 언약이 오경의 신학구성에 있어 중요한 중심적 원리임은 분명하나 하나의 큰 신학적 틀, 즉, 언약의 개념으로 오경의 다양한 주제들을 다 엮기란 역부족이라 할 수 있다. 언약을 중심으로 한 신학구성 외에 법정논쟁( ) 모티브를 욥기의 문학구조로 논하는 것과 같이 월터 부르게만(Walter Brueggemann)은 그의 구약신학을 증언(testimony), 기소-논쟁(dispute), 변호(advocacy)라는 법정개념의 틀로 엮었다. 이 작업에서 부르게만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고유적인 신앙표현의 매체로써 은유(metaphor)와 구두(verbal)를 지적-설명하고 이스라엘이 이러한 은유적 구두로 증언하고, 논쟁하고, 변호한 야웨( ) 하나님의 메시지를 구약신학을 구성하는 중심적 틀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공동체는 구두로 야웨는 창조하시며(creates), 약속하시며(makes promises), 구속하시며(delivers), 명령하시며(commands), 인도하시는(leads) 하나님이심을 증언했다는 것이다 (testimony in verbal sentences). 즉, 오경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증언이라는 틀을 통하여 야웨의 신학적 의미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구약을 이스라엘의 순 신앙고백서로 전제할 때 그 고백의 내용들을 분석하는데 있어 유익하겠으나 이는 반면 오경의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의미를 거의 배제하는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또한 오경의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며 과연 그 안에서 증언, 기소, 변호라는 법정개념들을 자연스럽게 발굴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케 한다. 이는 본문의 의도보다는 독자의 인위적인 접근이 본문-독자의 긴장을 독자 쪽으로 기울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경우와 같이 하나의 큰 신학적 틀보다는 또한 복합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어 세일하머(Sailhamer)는 구속이라는 큰 틀 속에서 각 권의 정경적 주제들(canonical themes)을 공시적으로(synchronic) 접근하는 방법을 취한다. 그러므로 세일하머의 오경신학은 오경 각 장에 대한 주석(commentary)과도 같이 느껴진다. 하나의 큰 신학적 틀로 본문을 조명하기보다는 각 장을 주석 하여 구속이라는 개념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언약은 구약신학의 중심적 틀이라기보다는 구속사에 있어 유기적인 중요한 한 주제로 다루어진다. 로휜크(Lohfink)는 오경신학을 P문서와 신명기의 시각으로 조명하여 중심적 구성보다는 다양한 주제들을 통시적으로(diachronic) 기술한다. 예를 들어 "나는 여호와, 너의 치료자라"(출15:26)는 주제, P 네러티브에 있어 원죄(original sin)의 주제, 신명기에 있어 개인과 공동체의 주제, 등등이다. 이는 세일하머의 접근과 유사하나 공시적 보다는 통시적이라는 점에서 차별이 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접근들은 각기 유익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의 공통적인 단점을 지적하자면 오경의 최종적 문학형태에 기록된 본문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괄 적으로 혹은 자연스럽게 읽어나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본문의 최종 편집자의 문학적 의도를 저 평가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세일하머와 같이 공시적으로 읽어나갈지라도 각 장의 독립적인 주석은 그 이야기들을 형성하고 있는 고유적이며 총체적인 신학적 틀을 반영시키기에 충분하지 못함을 지적할 수 있다.
그동안 제안되어왔던 많은 신학적 틀들이 오경의 이야기들을 역동적으로 엮어나가기에는, 또한 오경을 단일적 문서로 받아들이기에는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다양한 내용들을 단 하나의 틀 속에 국한시키므로, 혹은 반대로 적절한 신학적 틀의 부재로 인해, 통합적인 접근이 어려웠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은 이러한 부족한 면들을 완성한다기보다는 좀더 보완할 수 있는 오경의 한 신학적 구성초안을 시도하고 제안하고자 한다.
III. 오경의 3부적 신학구성
오경의 집필 연대에 있어 끊임없는 논의가 지속되고 있으나 오경이 구약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책들 가운데 전기(early chronology)에 속한다는 보수적 입장에 대해 온전히 부정할 수 있는 증거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는 문서설 외에는 거의 부재하다. 혹시 오경의 집필이 상대적으로 후기에 속한다 할지라도 오경의 신학이 구약전체의 기본적 틀을 제공하고 있음을 부정할 학자는 없을 것이다. 후기 문서설을 전제한 고대 이스라엘의 비평적 역사재건을 통해 구약신학을 구성한 폰라드(von Rad)의 육경(hexateuch)론이나 마틴 노트(Martin Noth)의 사경(Tetrateuch)론도 오경과 나머지 구약의 신학적 공유를 전적으로 반박하지는 않는다.
그럼 과연 오경에서 반영된 고유적인 신학의 틀은 무엇일까? 물론 언약,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거룩, 신인관계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먼저 "과연 오경은 신학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논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오경은 신학에 있어 칼벵의 기독교강론이나 바울의 로마서신과 같이 교리적이며 조직적-체계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장르에 있어 법률이라 할 수 있는 율법 부문(출20-40; 레위기)과 전통적으로 모세의 설교집으로 알려져 있는 신명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네러티브 형식으로 나열하고 있으며 이들을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a) 에덴동산의 네러티브 (창1:1-3:24) (b) 가인과 아벨의 네러티브 (창4:1-26) (c) 홍수의 네러티브 (창6:1-9:29) (d) 바벨탑의 네러티브 (창11:1-32) (e)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네러티브 (창12:1-50:26) (f) 출애굽의 네러티브 (출애굽기) (g) 가나안을 향한 광야의 네러티브 (출, 레, 민, 신).
물론 (a)부터 (e)의 네러티브를 포함하고 있는 창세기는 히브리 문학유형에 있어 여러 개의 톨레도트( )로 구성되어 있음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어 바이즈멘-헤리슨(Wiseman-Harrison)이론에 의하면 창세기에는 13개의 톨레도트, 즉 구성적이며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있다: 1:1-2:4; 2:5-5:2; 5:3-6:9a; 6:9b-10:1; 10:2-11:10a; 11:10b-11:27a; 11:27b-25:12; 25:13-25:19a; 25:19b-36:1; 36:2-36:9; 36:10-37:2이다. 그러나 실제 BHS에서 의 용어를 사용한 네러티브는 10편에 이른다. 즉, 2:4a를 P문서의 결론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2:3을 오경의 서론적인 창조이야기의 첫 부분 마감 절로 여기면 그 이후로 2:4부터는 창세기의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10개의 톨레도트로 구분할 수 있다.
(1) 창 2:4 창조의 톨레도트(네러티브) (2) 창 5:1 아담 자손의 톨레도트 (3) 창 6:9 노아의 톨레도트 (4) 창 10:1 노아의 아들들의 톨레도트 (5) 창 11:10 셈의 후예의 톨레도트 (6) 창 11:27 데라의 톨레도트 (7) 창 25:12 이스마엘의 톨레도트 (8) 창 25:19 이삭의 톨레도트 (9) 창 36:1 에서의 톨레도트 (10)창 37:2 야곱의 톨레도트
위와 같이 톨레도트의 문구 양식은 특정한 이야기의 장을 결론짓기보다는 그 장을 요약하는 서론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여는 "들어가는 말"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에는 조직적인 교리보다는 10개의 큰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물론 BHS의 번역판에서는 (예를 들어 한글이나 영어 NIV) 에 의한 분석보다는 내용분석(contents analysis)에 의해 이야기들을 정립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차준희는 그의 저서 "창세기 다시 보기"에서 창세기의 주 내용을 25개의 이야기로 나열했다. 그러나 이는 창조이야기를 첫 번째(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두 번째(흙에서 온 인간)로 나눈다던가, 홍수 이야기를 3편으로 만들어 세부적으로 설명한다던가, 아브람의 이야기를 "소명과 실수", "언약"등으로 나누어 설교를 위한 참고도서로써의 목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번역판 창세기라 할지라도 창세기의 자연스러운 독서과정에서 독자는 크게 (a) 에덴동산의 네러티브(창1:1-3:24); (b) 가인과 아벨의 네러티브(창4:1-26); (c) 홍수의 네러티브(창6:1-9:29); (d) 바벨탑의 네러티브(창11:1-32); 그리고 (e)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네러티브(창12:1-50:26)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이즈멘-헤리슨의 13개의 이야기와 위의 10개의 톨레도트를 요약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창세기 속의 이야기들을 포함한 오경의 나머지 이야기들을 큰 주제별로 정립하자면 위의 (a)부터 (g)까지 7가지의 이야기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7가지 이야기들의 내용들이 어떠한 고유적인 신학적 틀로 구성되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골드위디(G. Goldworthy)는 신구약을 통해 모든 이야기들의 신학적 틀을 "하나님의 백성-하나님이 거하시는 곳-하나님의 통치"라는 3부적 구조로 설명한다. 에덴동산의 이야기에서는 아담과 하와(백성)-에덴동산(장소)-하나님의 말씀(통치)에서 3부적 구조를, 또한 홍수의 이야기에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백성)-방주(장소)-언약(통치)의 3부적 구조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당장 창세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바벨탑의 이야기, 더 나아가 구약의 지혜서와 시가서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에 기원(Origin)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포하고 있는 창세기 1-11장에서 마크 스트롬(Mark Strom)은 반복되는 하나의 3부적 신학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죄-심판-은혜이다. 에덴동산의 이야기에는 아담과 하와의 죄가 있고 그들을 쫓아내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그러나 그들이 살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이러한 3부적 구조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홍수의 이야기, 바벨탑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엮어간다 (도표1).
도표1 창세기 1-11장의 반복되는 모형 (마크 스트롬)
스트롬은 "창세기 1-11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기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것인 만큼, 이는 또한 성경 전체 이야기의 출발점을 제시해 준다"고 말한다. 즉, 죄와 심판과 은혜의 3부적 신학구조를 구약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엮는 중심적 신학구성으로 제시한 것이다. 저자는 마크 스트롬을 접하기 전 오경에서 죄와 심판과 은혜의 반복적이며 일관적인 신학적 구조를 포착하며 그러한 오경의 고유적이고 명백한 3부적 구조가 구약전체의 내용들을 포괄적으로 담고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크 스트롬의 연구는 이러한 3부적구조(죄-심판-은)가 연역적 이론에 의하기보다는 귀납적임을 뒷받침한다. 죄-심판-은혜는 창세기 1-11장의 신학적 모형임을 넘어 구약에 기록된 대 다수의 주제들 속에서 신학의 구성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는 위에서 소개한 오경의 7대 네러티브들을 요약하고 그 안에 있는 3부적 신학구조의 모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a) 에덴동산의 네러티브 (창1:1-3:24)
오경은 서론적이며 총괄적인 창조의 이야기 이후 그 초점이 에덴동산으로 옮겨지고 이제 그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를 중심으로 엮어져간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는 그 초점이 연대(chronology)나 순서에 있지 아니하며 위에서 논의한 바 톨레도트( ) 양식으로 구성된 주제(theme)에 있다. 주제에 관심을 모은 창세기 텍스트에서 연대는 숫자의 개념보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를 들어 창1장의 6일 창조를 24시의 개념으로만 해석한다던가, 혹은 창2장과 창1장과의 문학적 일관성을 두 장에 나열된 피조물들의 엇갈린 순서를 지적하며 반박하는 것은 각기 무리가 있다. 창세기 2장은 순서나 연대보다는 1장에 소개된 창조의 개론을 한층 더 세밀히 설명하며 구전의 고유한 병행법이 반영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2장의 보완적 설명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강화하며 인간의 존재적 의미를 부여해주는 하나의 주제를 형성한다. 그리고 3장에서는 바로 그 존재의 의미들이 죄로 인해 무시되고 타락하는 인간의 모습과 이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1장, 2장, 3장이 문학적 양식과 그 내용에 있어서 연속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타락이라는 하나의 큰 신학적 주제를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프로반(Iain Provan)은 창세기를 연구하는데 있어 그 초점을 타락(Fall)에 두는 것은 창세기가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The Kingdom of God)를 가리운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전체적인 조명 없이 오직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학적 개념을 초기 포착한다는 것은 상당한 상상력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그보다는 창1-3장이 타락의 주제뿐만 아니라 심판과 은혜의 주제를 평등하게 담고 있음을 논해야 할 것이다. 창1-3장의 네러티브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며 죄를 범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특별한 창조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 받은 영생의 본질에서 이제는 "정녕 죽으리라"(창2:17)는 심판을 받게 된다. 그 죽음까지의 과정은 고난이다. 잉태하는 고통, 종신토록 수고하며 땅의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워 얼굴에 땀을 흘려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는 고난. 이는 죄의 결과이며 심판의 과정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벗음을 인식하고 두려워 숨고있는 아담을 찾아가 구속의 메시지를 선포하시고(창3:15)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창3:21) 은혜를 베푸신다. 이는 죄-심판-은혜의 이야기다. 이 은혜는 고난 가운데서도 계속 진행되며 끝내 죄를 조작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 고난의 최후적 패지를 암시하고 있다(창3:15-16). 결론적으로 에덴동산의 네러티브는 창조나 계보의 연대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죄와, 심판과 은혜의 3부적 신학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임을 부정할 수 없다.
(b) 가인과 아벨의 네러티브 (창4:1-26)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속에서 가인은 아벨을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된다. 창3:22은 영생과 관련된 생명나무를 선악과와 함께 인간이 침범해서는 아니 되는 중요한 나무로 간주함으로써 생명의 영역이 하나님께 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타락 이후 이제 사람은 그 생명의 영역까지 침범하여 서로 죽이는 무서운 존재로 변질된다. 이로 인해 가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된다. 생존의 어려움과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창4:12)가 된 것이다. 아담에게도 언급된 이러한 땅으로부터의 저주는 그 땅에 피를 흘렸기 때문이며(4:10-11) 이로 인해 인간은 환경과의 갈등과 고난을 면치 못하게 된다. 존엠 루이스(J. M. Lewis)는 이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환경의 위기와 구속을 통한 환경에 대한 보호와 책임으로 대조시키며 환경신학의 논쟁을 전개한다. 그러나 본문의 이러한 환경문제도 결코 죄-심판-은혜라는 3부적 신학구조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땅으로부터의 저주가 있는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또 은혜를 베푸신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4:15하반절). 이러한 은혜는 창3:15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베풀어진 은혜와 그 본질이 유사하다. 조건 없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가인과 아벨의 네러티브에서도 죄와 심판과 은혜는 3부적 신학구조를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죄는 심판의 동기가 되고 이 심판이 고난으로 나타나며 고난이라는 정황 속에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소개된다. 후기 신약시대에 와서도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율법을 논의하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롬5:20)라고 기록하는데 이는 율법을 선행하고 있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아벨의 네러티브를 구성하고 있는 죄와 심판과 은혜의 신학적 구조를 전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c) 홍수의 네러티브 (창6:1-9:29)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에 대한 논쟁은 신학적인 것을 넘어 다양하다. 문학적-역사적 본질에 대한 논쟁, 실제성에 대한 논쟁, 또한 과학적인 시각에서의 논쟁들이 있다. 영블러드(R. F. Youngblood)는 이러한 논쟁들을 묶은 "창세기 논쟁"에서 구약에 기록된 홍수의 이야기가 실제라면 그것이 지역적이었는지 혹은 지구를 온통 덮은 사건이었는지 각각 보으드멘(Donald C. Boardman)과 어스틴(Steven A. Austin)의 논쟁을 소개한다. 홍수의 범위에 있어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창7:19-22)라는 구절은 문자 그대로 지구 전체를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 덮였더니"에서 (all)이 과장법(창41:56; 단2:38)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에 아주 광범위한 제한된 지역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연 창세기 6장 기록의 주 모티프가 홍수의 범위나 현대적인 지질학적 정보를 제공하는데 있는가는 논쟁의 여부를 남긴다. 본문의 내용은 사건에 근거한 것이나 사건의 연대적이며 과학적인 기술보다는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전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신학적 틀은 다시 죄와 심판과 은혜로 구성된다. 먼저 홍수이야기의 서문은 인간의 죄가 극치에 이르렀음을 지적하며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즉, 홍수의 이유가 인류의 죄로 인함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제에 있어 죄의 심각성은 "관영함"(죄의 강도), "그 마음의 생각"(죄의 내면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죄의 절대성과 연속성)이라는 문언으로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문학적 표현들은 그 정도가 아담과 하와의 네러티브, 또 가인과 아벨의 네러티브에서보다 훨씬 더 강함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범위에 있어서도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에 국한되어 서술되었던 죄의 문제가 이제는 "무든 혈육 있는 자"(창6:12)로 확대되었다. 즉, 범위와 용도에서 더욱더 역동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라는 기본적 신학구조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홍수 이야기에서도 죄에 대한 결과는 당연히 심판이다. 홍수 그 자체가 심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죄는 심판의 동기가 되며 홍수로 인한 고난은 그 심판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 이제는 아담-가인으로 상징되었던 심판의 대상이 더욱더 명백하게 전체적임을 밝히고 있다(6:7). 물론 심판을 이어 홍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는 3부적 신학구성을 완성한다. 그런데 이제 그 은혜는 타락의 보편성과는 달리 모두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오 제한된 것임을 본문에서 더욱더 확실하게 증언된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노아만이 그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9). 죄, 심판, 은혜. 이중 홍수의 네러티브는 죄와 심판의 보편성과 은혜의 특성을 이전보다 더욱더 명백히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전 네러티브들과의 비교에서 홍수 네러티브는 3부적 구조의 보다 세밀한 신학적 의미들을 노출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고난의 의미를 들 수 있다. 노아 시대에 닥쳐온 고난은 오히려 노아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정황이 된다(창9:1-17). 이는 고난의 의미가 노아에게 있어서는 은혜를 입는 계기로 함축될 수 있으나 노아 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면할 수 없는 심판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은혜를 향한 고난의 길이요 다른 이에게 있어서는 궁극적인 심판을 향한 고난임을 차별화하며 고난의 이중적 베일을 조금씩 벗기고 있다. 결론적으로 노아의 이야기도 최종적으로는 죄, 심판, 은혜의 3부적 신학구조 안에서 구성되며 이전 네러티브들과 그 신학적 테두리에 있어 동일하나 그 내용에 있어 가나안의 저주와(9:25) 셈-야벳의 축복(9:26-27)에서도 나타나듯이 점차적으로 죄에서 심판을 받는 자들과 죄에서 은혜를 받는 자들의 구별이 뚜렷해지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d) 바벨탑의 네러티브 (창11:1-32)
고고학에서는 인류의 문명을 고대근동 메소포타미아의 문자발전과 도시화에 기원한다. 이는 창11:2에 등장하는 시날(메소포타미아) 평지의 도시화와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구약의 연대기로 조명해 볼 때 창11:2의 배경은 초기청동기보다는(c. 3500BC) 훨씬 전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약은 홍수 이전에 벌써 도시(창4:17)와 금속(창4:22)문명이 존재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창세기 기록에서 바벨탑 이야기는 홍수 이후에 등장하나 이를 단순히 고대바빌론 함무라비(Hammurabi, c. 1792-1750BC)의 업적으로 알려진 지구랏(Ziggurat)의 설화로 설명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시날 지방의 바벨탑을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 은 바빌론의 지구랏과 같은 제단이나 신전이 아닌 군사적 용어로써 파수꾼의 탑이나 요새를 의미한다(대하 26:9-10). 그러나 이 바벨탑 네러티브에서도 중요한 것은 본문의 문학적 본질이 고유적으로 고고학적인 모티프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경에서 네 번째의 대 주제로 등장하는 이 이야기도 결국은 먼저 죄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근본적으로는 신학적 구성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창11:1-9의 기록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려는 교만으로 성과 요새를 쌓는 업적에 대해 기술하고 이에 대한 심판이 언어의 혼잡으로 인한 인류의 불화와 분산의 결과를 낳았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흩어짐은 곧 셈의 후예에 대한 이야기( )로 이어지며 그 가운데 다시 아브람의 소명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시작한다. 여기서도 언어 혼잡을 통해 나타난 심판의 보편성과 아브람이라는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반영된 은혜의 특수성이 대조되고 있다(창12:1-3). 즉 고난이 죄와 심판에 있어서는 보편성을 띄우고 은혜에 있어서는 특수성을 보이는 오경의 죄-심판-은혜의 3부적 구조를 다시 한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e)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네러티브 (창11:27-50:26)
데라가 아브람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Ur)를 떠나는 시기는 우르 제3왕조를 중심으로 신수메르(c. 2100-2000BC)가 잠시 적인 전성기를 지내고 엘람으로부터 몰락하는 중간후반기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데라가 가족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간 이유는 경제와 정치의 혼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창12:1은 그러한 정황을 배제하지는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르에서 데라를 부르신 것이 아니고 아브람을 부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신학적 조명을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데라가 그 어떠한 이유로 아브람을 데리고 하란으로 갔던지 와는 상관없이 아브람은 죄악을 상징하는 우상의 도시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과 족장의 네러티브 역시 죄에 대한 주제들을 기록하고 있다. 우상의 도시를 떠나는 아브람(창12), 죄로 인해 심판 받는 소돔과 고모라(창19),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죄의 모습(창20), 아버지를 속이는 야곱의 야망과 거짓된 삶(창27), 그리고 요셉을 파는 형제들의 시기(창37). 이 모든 이야기들이 신학적으로 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창12)을 통해 아무 조건 없이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또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중에서도 롯이 은혜를 입게된다. 야곱은 벧엘에서, 요셉의 형제들은 애굽에서 그들의 죄와는 상관없이 은혜를 입게되는 것이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이야기도 다시 한번 오경을 구성하고 있는 죄-심판-은혜의 3부적 구조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f) 출애굽의 네러티브 (출애굽기)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보면 세 가지형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 ), imago Dei로 창조된 타락 전의 인간(창1:26),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피하며 아우를 죽이기에 이르는 심판 받은 타락한 인간(창3:9-10, 4:8), 그리고 출애굽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그 타락함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다. 넨시 바우엔(Nacy R. Bowen)은 출애굽 텍스트에서 야웨의 구속(the Salvation of YHWH)이라는 어구의 연구를 중심으로 출애굽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이나 억압과 해방(oppression and liberation)이라는 이중적 신학 구조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출애굽의 신학구조를 좀더 넓은 단위인 오경의 구조로 조명해 볼 때 거기에는 타락한 인간의 구원이 전개되어 있고 이는 죄-심판-은혜라는 3부적 신학구조로 구성되어있다. 예를 들어 출애굽을 선행한 애굽생활 400년의 고난에 대해서도 오경은 그 이유를 죄-심판-은혜로 다방면 설명하고 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며 그를 노예로 판 죄의 결과는 후에 한 민족의 엄청난 고난을 도래케 한다. 그러나 후에 요셉은 그 형제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속사를 이어간다. 또한 애굽생활 400년은 가나안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으로"(창15:16)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기다려야 했던 시간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에도 초점은 죄와 은혜에 있다. 출애굽은 죄와 심판이라는 신학적 정황에서 은혜의 메시지를 던지며 엮어진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출1:20), 그리고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에게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임을 밝히신다(출3:6-7). 이는 그 조상과 세우신 은혜의 언약을 상기시킨 것이다. 이러한 죄-심판-은혜의 3부적 구조는 오경에 있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신학적 일체를 이루며 일관적으로 묘사된다. 형제들의 시기를 입어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에게 있어서도 그가 옥중에서 고난받는 정황을 구약은 오히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39:23)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죄의 상황이 은혜의 매체가 된 것이다. 끝내 홍해를 가르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를 여는 중추적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죄-심판-은혜, 이 3부적 신학구조는 출애굽에서도 어김없이 주요메시지의 기본이 되고 있는 것이다.
(g) 가나안을 향한 광야의 네러티브 (출, 레, 민, 신).
오경의 마지막 이야기인 광야생활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들의 주 내용 또한 죄와 관련된 것들이다. 하나님을 불신하여 불평하는 죄; 광야 생활 중에서도 우상을 만든 죄, 가나안 정복에 대한 불신의 죄, 율법을 어기는 죄. 그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여지없이 임한다. 광야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을 오히려 그리워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불뱀으로 심판하신다(민21:6). 갈렙과 여호수아를 뺀 나머지 가나안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그들은 광야에서 40여 년을 방황하는 심판을 받게 된다(신1-2). 그러나 광야의 생활에 초점은 죄와 심판이 아닌 은혜이다. 모세가 기도함으로 놋뱀을 바라보는 자들이 독사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는다(민21:9). 40여 년의 광야 생활도 끝내는 가나안을 정복함으로 마감하며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를 공급받고, 구름-불기둥의 인도함과 모세의 율법과 장막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광야에서 주어진 언약서는 죄-심판-은혜의 3부적 구조를 집중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이는 율법이 철저하게 죄에 대한 심판을 경고할 뿐만 아니라 은혜의 개념과 실제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율법은 부모를 대항하는 자에게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명하고 있다(레 20:9). 그러나 오경은 이 처벌의 실제 실황을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자녀들의 죄를 위한 속죄의 법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레1-7). 이는 율법이 궁극적으로 죄와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은혜를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출24:7에서 모세는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려준다. 그때 백성들은 그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노라고 약속한다. 이는 준행하지 못할 경우 심판이 있음을 또한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절인 출24:8에서 모세는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며 바로 그 피가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리니라"고 선포한다. 율법의 준행과는 상관없이 피의 속죄가 약속된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죄-심판-은혜가 다시 한번 오경 네러티브의 신학적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IV. 나가는 말
위에 설명된 것 같이 오경의 크고 작은 주제들의 주요 신학 메시지를 죄-심판-은혜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3부적 구조의 접근은 구약 각 권의 다양한 수평적 메시지들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동안 구약의 핵심구조로 논의되어온 언약의 개념도 죄-심판-은혜의 3부적 구조로 조명될 때 그 이해가 더욱더 명백해 질 것이다. 또한 구약의 다양한 주제들이 3부적 구조로 해석될 때 그 의미의 복합성이 더욱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고난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오경에 함축된 고난의 의미는 죄와 심판과 은혜라는 3부적 개념 속에서 분석될 때 그 고난의 역동적인 본질을 더욱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난이 다만 죄와 심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동시 은혜의 발판이 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 고난이 죄와 심판에 있어서는 보편적인 면을 보이는 가 하면 은혜에 있어서는 한계적인 성격을 띄우고 있음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단일적 신학적 개념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고난의 미스터리와 복잡성을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3부적 구조로 접근한 구약의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단순히 아파해야 하며 괴로워해야 하는 죄와 심판의 결과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오 은혜를 요구하며 독촉하는, 더 나아가 은혜를 확인할 수 있는 모퉁이 돌도 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바울 사도도 성도들의 고난을 죄-심판-은혜의 구조로 설명한다.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구원이 율법으로 인함이 아니오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임을 강조하고 나아가 5장에서는 그러한 은혜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왜 은혜에도 불구하고 핍박과 고난이 있는지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이러한 결론은 바울 사도가 오경의 죄-심판-은혜의 3부적 신학구조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 고유적이며 일관적인 신학구조를 찾아내는 것은 아직도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죄-심판-은혜의 3부적 구조는 오경의 모든 내용을 포착하지 못할지라도 본문의 신학적 의미를 이해하고 특별히 복음주의 적 시각에서 정립하는데 있어 중요한 부가적이며 해석학적인 도구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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