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 에베소서

[스크랩] 에배소서 강해(1) / 엡 1:1 - 2

하나님아들 2014. 1. 2. 10:22
에배소서 강해(1) / 엡 1:1 - 2
: 전준식 목사



에베소서 1장 1절 - 2절

우리는 몇 년전에 저와 같이 로마서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구원의 진수를 맛보았습니다. 가장 순수한 복음이 로마서에 담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 테이프가 우연챦게 밖으로 흘러나가 책으로 출판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로마서 강해 집을 내면서 인사말에 저의 바램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로마서를 다시 한번 강해해 보고 싶다는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안식년을 지내면서 다시 목회를 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참다운 목회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이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내 안에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에베소서를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말합니다. 로마서가 복음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에베소서는 어떤 책입니까? 바울 신학의 꽃이요 면류관이라는 별명이 붙은 책입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서를 농축해놓은 책인 에베소서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16장인데 반하여 에베소서는 6장입니다. 압축파일로 남겨 놓은 것입니다. 때문에 에베소서가 짧은 장수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은 어떤 성경보다도 많은 보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베소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그리고 왜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입니까? 우리는 지난 95년부터 97년 8월까지 사도행전을 공부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사도행전 19장을 강해하면서 바울이 에베소 지방에 두란노 라는 곳에서 2년 동안 사람들을 따로 분리 시켜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많은 역사가 에베소에서 일어 났습니다. 병이 떠나고 악귀도 떠나 갔습니다. 귀신에 사로 잡혀 점치며 먹고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 사람들이 회개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점치는 책들을 다 내어놓고 불질러 버렸습니다. 얼마나 많은 책을 불살랐는지 사도행전19:19절에 보면 은 오만이나 되는 가치였다고 증언합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면 에베소는 귀신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에베소에는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아데미 신전있었습니다. 이 신전의 크기는 가로 55미터 세로 110미터의 웅장한 신전이었습니다. 또한 이 도시는 상업중심도시였습니다. 이런 도시에서 바울은 2년 동안 에베소 지방에 있는 두란노라는 곳에서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말씀을 하나 하나 풀어주었습니다. 어느 이단처럼 귀신 쫒는 집회를 해서 귀신이 나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감정을 흥분시키는 집회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강론함으로 귀신이 나가고 병든 자가 치유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도시라 할지라도 귀신이 강한 도시라 할지라도 복음이 그 도시에 들어가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망 없는 땅이라도 복음이 들어가면 귀신이 쫒겨 가고 병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림동을 보십시오. 이 땅에 소망이 있습니까? 서울대학이 있기에 소망이 있는 땅입니까? 나라를 살리겠다고 전국에서 모여든 젊은이들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에베소는 돈이 모이는 도시였고 우상이 지배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복음이 들어가자 성도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소망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서울 대학이 있어서 소망이 있는 땅이 아니라 바로 에베소 교회에 성도들 같은 사람들이 이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없으면 이 땅은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곳에 신림교회를 세우신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소망없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하여 우리를 거룩한 무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들에게 가서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제자 삼아 소망 있는 땅으로 만들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교회도 바울처럼 말씀을 강론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소망이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들이 출세해서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의 똑똑함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소망이 있는 가정이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에 순수한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많이 계신 것으로 인하여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1;1제자 양육이 조금 느슨해 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찌운 큐티 방에 활력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다시 정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잡초를 없애려면 날마다 만나를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올 한해 우리가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와 같이 말씀을 연구하는 데에 시간과 관심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에 소망을 주는 복음의 사람이 되십시요. 사도 바울은 2년동안 두란노에서 에베소 사람들에게 성경을 강해하고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우리가 나눌 이 에베소서는 바울이 죄인의 몸으로 로마에 가서 옥살이를 하면서 에베소 교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바울이 옥중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기에 우리는 이 편지를 옥중서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1절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누구에게 보낸 편지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편지는 어떤 위대한 신학자들에게 보내 편지가 아닙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식있는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아닙니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도 아닙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경 사본에는 에베소에 있는 이라는 말을 비워 둔 사본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편지가 어느 특정한 교회에 보낸 것이 아니라 에베소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가 돌려 가면서 이 편지를 읽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이 쓴 대부분의 편지는 교회가 문제가 생겨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편지들입니다. 고린도전후서는 교회 내에서 분쟁 때문에 쓴 편지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사람들 때문에 쓴 편지입니다. 우리가 작년에 나눈 빌립보서도 그토록 아름다운 교회가 여자 성도들의 질투가 있어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의 재림 문제로 논쟁하였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다른 편지와는 달리 논쟁이 없습니다. 이 편지는 순수한 주님의 구원계획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늘의 풍성하심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계획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만일 바울이 우리 신림교회를 다녀간 뒤에 우리 교회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어떤 편지를 보내기를 소망하십니까? 이 땅에는 얼마나 좋은 교회가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반면에 늘 분쟁하고 거짓 교사 때문에 성도들간에 시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논쟁과 거짓 교사들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기보다는 늘 하나님의 온전하신 계획을 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순수한 구원계획을 보고 찬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을 뭐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다시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듣고 전율하십니까? 누구든지 이 말을 듣고 전율해야 합니다. 우리만 전율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전율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란 말은 구별했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이방인과 구분하셨습니다. 그 때에는 유대인들이 성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인 에베소 사람들도 유대인처럼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전에 누구에게 자기의 몸을 바친 사람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들은 아데미 신전을 따라 다닌 사람들입니다. 우상 앞에서 헌신 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전에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 다닌 세상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에베소 성도들처럼 우리도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무엇입니까? 성도는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가난한 곳에 가서 먹을 것을 전해 주고 같이 아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오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신림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도이십니까? 혹시 우리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분은 없습니까? 나는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주권자로 믿는다. 그러나 나는 성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다. 앞으로 성도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라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술 마시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남에게 본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여러분의 신분은 성도입니다. 우리나라를 통치했던 한대통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는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과 저는 같은 해에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그 가정에 귀한 아들이 속 썩이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아들이 사회에 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아들이 사회에 본이 되지 않는다고 대통령의 아들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그 아들은 한 나라 대통령의 아들입니다. 그 행동 때문에 신분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나의 주권자로 인정하면 우리의 신분은 성도입니다.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테레사 수녀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하고 못하고는 다음 문제입니다. 선교지에 가서 내 몸을 던져 그들을 사랑하고 안하고는 다음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도가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의 공로로 성인을 구분하지 마십시오. 나의 행위로 성인과 속인을 구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성도가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때문에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입니다.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성도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가 프로그램의 교회가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도인데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다시 1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신실함이라는 말은 믿음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성도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아들이 지탄을 받는 것은 대통령의 아들답게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신분을 가지고 신실하게 살지 못하면 우리의 신분은 변하지 않지만 우리는 세상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세상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을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남편에게 신뢰를 받는 아내이십니까? 아내에게 신뢰를 받는 남편이십니까? 예배를 마치고 가정에 가셔서 신실하게 사십시오. 직장에서 신실하게 사십시오. 내가 신실할 때 주님 앞에 신실할 때 남편을 신뢰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서 신실할 때 아내를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신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돈 안에 있으면 돈에게 신실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 수가 있습니다. 권력 안에 있으면 권력에 신실 할 수 있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유행 앞에서 신실하면 유행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신실한 사람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신실할 때 우리는 세상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렇게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1절 자기가 많이 배워서 사도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소원대로 사도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도가 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역자의 자세를 보게 됩니다. 사역자는 누구입니까? 사역자는 누구의 간청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능력이 많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계획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사람이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역에 대한 분명한 소명이 있는 사람이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려분을 여러분의 가정에 남편과 아내로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로 부르셨습니까? 그러면 주님 안에서 신실하게 가정 사역을 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신림교회에 부르셨습니까? 주님 안에서 신실하게 성도의 삶을 사십시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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