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배소서강해-6]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1-20)
6.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 자녀들아 !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5) 종들아 !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6:1-20)
"버지니아의 놀라운 가정 이야기"가 감리교 잡지에 소개되었습니다. 그 가정은 존 영이라는 농부의 가정입니다. 그는 결혼하고 은행으로부터 장기 대출을 받아 값싼 농토를 사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갚아 나갔습니다. 존 부부는 열 네 명의 자녀를 거의 연년생으로 낳았습니다. 배우지 못한 존은 식사 기도 때마다 "하나님, 먹을 입이 많으니 농사를 돌보아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어떤 해는 열 네 명의 아이가 한꺼번에 홍역에 걸려 누웠을 때도 있었고, 어떤 해에는 농작물을 전혀 거두지 못한 때도 있었습니다. 또 한번은 집에 불이나 전소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곤경에 처할 때마다 온 동네가 그를 도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쁘고 고달픈 생활 중에도 신앙생활과 교회 봉사에 철저했습니다. 그는 "이 집의 뿌리는 하나님이시다."는 가훈을 만들어 벽에 붙이고 아이들을 교육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가정의 모토로 삼은 것입니다. 그 결과 열 네 명의 자녀는 한 명도 죽지 않고 전체가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한 명은 코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땄고, 간호사 한 명, 도서관 전문직 한 명, 다섯 명의 교사와 네 명의 건축 업자, 한 명의 음악가가 나왔고 한 명은 대를 이어 농업에 종사했습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뿌리를 하나님께 둔 가정이 승리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내린 가정과 가정 교육이 무너지지 않는 건강하고 튼튼한 가정과 가정교육이 되는 것과 그의 좋은 열매를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지라"는 제목처럼 하나님 말씀에 뿌리 내리는 부모와 기업인, 근로자 여러분이 되시므로 좋은 결실을 맺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는 무엇보다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가정을 성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가정을 이루는 남자와 여자의 이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남자는 "이쉬"( )이고, 여자는 "이솨"(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인 여호와 ( )라는 이름이 남자인 "이쉬"에서 히브리어 알파벧의 <요드>( ) 라는 한 자, 그리고 여자인 "이솨"에서 <헤>( ) 라는 한 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면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그 부부가 꾸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가정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성전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시대 성전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至聖所)에 놓인 것은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는 법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정과 사회, 정치, 경제생활의 뿌리는 바로 이 법궤에 있습니다. 유대인의 학교교육을 보면, 그 교육의 중심에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 학교는 등교하면 1시간 동안 기도책을 보며 기도한 후 오전 내내 종교교육만을 시킵니다. 우리나라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교 교육과 학원교육을 받게 하지 않아도 수 많은 수재들을 배출하고 어느 민족보다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척박한 광야 땅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젖소 한 마리당 최고의 산유량(産乳量)을 자랑하고 있고, 농산물을 수출하므로 광야에서 젖과 꿀이 흐르게 하는 민족입니다. 그들의 부모 공경 역시 일반적인 도덕과 윤리적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그 공경(효)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녀를 대할 때에도 윤리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듯, 다시 말해 신앙적인 면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훈계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의 효와 자녀 교육에 있어서 그 중심이 부모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신본주의라는 것이며, 부모나 자녀가 효와 교육의 중심에 서 있는 인본주의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업주와 근로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주나 근로자가 그 기업의 중심이 아니라 그 기업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신본주의 정신으로 기업주는 기업을 경영하고 근로자는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근로자(노동자)는 그가 처해 있는 직장 환경에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몸담고 일하고 있는 직장을 자신이 노력해서 구한 일터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삶의 터전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직장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다 해서 도피하는 자세로 일하지 말고 그 환경을 극복하고 정복하는 자세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할 때 단순히 기업주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일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일한다는 가치관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맡은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훌륭한 것이 되도록 일해야만 합니다. 이는 근로, 직장이라는 노사문제를 경제적인 문제로 보지말고 종교적인 문제로 풀어가라는 것입니다. 월급을 올려준다거나 노동조건을 개선해준다거나 복지시설을 갖추어준다든가 하는 것만으로 훌륭한 노동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근로자에 대한 근로감독을 강화하거나 징계제도를 엄격히 하거나 때로는 강력한 협박을 한다고해서 좋은 노동자를 만드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그러한 방법에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한계가 있습니다. 좋은 기업인과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비결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을 위해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서 일 할 때만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주는 그 기업에 대한 주인이지만 여전히 그 자신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날이 오면> 기업주나 노동자 모두 다함께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계급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다 인간일 따름입니다. 주인되는 기업주나, 종이 되는 근로자 모두가 다 주어진 기업과 직장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노동과 생산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하나, 힘없는 근로자 하나를 결코 소흘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대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 하듯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터지기 몇 해 전이었습니다. 오하이오 주의 대농인 테일러(Worthy Taylor) 씨 농장에 한 거지 소년이 찾아 들었습니다. 17세의 짐이었습니다. 일손이 얼마든지 필요한 집이기에 그를 하인으로 고용하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 주인인 테일러씨는 짐이 자기의 외동딸과 사랑하는 사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농장주 테일러씨는 몹시 노하여 짐을 때려서 빈손으로 내쫓았습니다. 그후 35년이 지난 어느 날 테일러는 낡은 창고를 헐다가 짐의 보따리를 발견하고 한 권의 책 속에 기록된 서명을 보고 짐의 본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제임스 에이 가필드(James A. Garfield), 현직 대통령의 이름이었습니다. 짐은 히람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육군 소장을 거쳐 하원의원에 여덟 번 피선된 후 백악관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아이들과 소년 소녀를 보는 눈은 더 깊은 곳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엄청난 가능성을 볼 수 있을 때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눅 9:48)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심정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힘없는 근로자 하나일지라도, 무력한 장애자 하나일지라도 예수를 영접하듯해야 할 것입니다. 농장주 테일러씨가 "하나님 말씀을 가졌더라면" 그렇게 엄청난 후회는 맛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모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고, 자녀는 하나님 말씀 안에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기업인과 근로자, 정치인과 백성 그 모두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주어진 사명을 다 할 때 가장 아름답고 풍성하며 좋은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도브슨 박사가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한 학교에서 운동장 둘레의 울타리를 철거했습니다. 울타리가 아이들에게 정신적으로 구속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울타리 철거 후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울타리가 있을 때는 아이들이 운동장 전체에 흩어져서 놀았는데 울타리를 철거한 뒤에는 운동장 가운데에 모여 노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으로 아이들에게 있어서 울타리는 구속감이 아니라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울타리가 없어지자 아이들은 오히려 운동장의 활동 범위를 좁혀 자기들끼리 모여 서로 의지한 것입니다. 도브슨 박사는 "아이들에게는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자신의 명제를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였던 것입니다. 아이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며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좋은 교육이나 사랑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가정의 규율, 부모의 훈계와 징계, 사회 공중도덕 등의 울타리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채찍'이란 말은 교육학적으로도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에 울타리가 되어 그 인간의 삶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정과 사회 등 삶의 전반에 걸쳐 인간의 충분한 울타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가정에서 효와 교육의 중심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가정과 사회 등 모든 생활의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완벽하게 나타나 보여 준 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단순히 사랑만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자녀 사랑은 자식을 망치게 합니다. 공의가 없는 부모 사랑은 결국 부모를 슬프게 만들것입니다. 또한 사랑이 없는 공의는 자녀를 메마르게 할 것이며, 사랑이 없는 공의는 부모를 버리게 할 것입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기업을 부패하게 하여 그 기업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공의 역시 그 기업의 생산성을 떨어뜨려 함께 망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지시는 여러분이 되시므로 참된 가정 교육과 부모공경의 아름다운 열매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시는 여러분이 되시므로 여러분의 일터가 아름답고 풍성한 결실을 맺으시기 바랍니다. (이동희 목사)
6.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 자녀들아 !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5) 종들아 !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6:1-20)
"버지니아의 놀라운 가정 이야기"가 감리교 잡지에 소개되었습니다. 그 가정은 존 영이라는 농부의 가정입니다. 그는 결혼하고 은행으로부터 장기 대출을 받아 값싼 농토를 사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갚아 나갔습니다. 존 부부는 열 네 명의 자녀를 거의 연년생으로 낳았습니다. 배우지 못한 존은 식사 기도 때마다 "하나님, 먹을 입이 많으니 농사를 돌보아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어떤 해는 열 네 명의 아이가 한꺼번에 홍역에 걸려 누웠을 때도 있었고, 어떤 해에는 농작물을 전혀 거두지 못한 때도 있었습니다. 또 한번은 집에 불이나 전소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곤경에 처할 때마다 온 동네가 그를 도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쁘고 고달픈 생활 중에도 신앙생활과 교회 봉사에 철저했습니다. 그는 "이 집의 뿌리는 하나님이시다."는 가훈을 만들어 벽에 붙이고 아이들을 교육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가정의 모토로 삼은 것입니다. 그 결과 열 네 명의 자녀는 한 명도 죽지 않고 전체가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한 명은 코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땄고, 간호사 한 명, 도서관 전문직 한 명, 다섯 명의 교사와 네 명의 건축 업자, 한 명의 음악가가 나왔고 한 명은 대를 이어 농업에 종사했습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뿌리를 하나님께 둔 가정이 승리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내린 가정과 가정 교육이 무너지지 않는 건강하고 튼튼한 가정과 가정교육이 되는 것과 그의 좋은 열매를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지라"는 제목처럼 하나님 말씀에 뿌리 내리는 부모와 기업인, 근로자 여러분이 되시므로 좋은 결실을 맺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는 무엇보다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가정을 성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가정을 이루는 남자와 여자의 이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남자는 "이쉬"( )이고, 여자는 "이솨"(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인 여호와 ( )라는 이름이 남자인 "이쉬"에서 히브리어 알파벧의 <요드>( ) 라는 한 자, 그리고 여자인 "이솨"에서 <헤>( ) 라는 한 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면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그 부부가 꾸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가정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성전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시대 성전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至聖所)에 놓인 것은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는 법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정과 사회, 정치, 경제생활의 뿌리는 바로 이 법궤에 있습니다. 유대인의 학교교육을 보면, 그 교육의 중심에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 학교는 등교하면 1시간 동안 기도책을 보며 기도한 후 오전 내내 종교교육만을 시킵니다. 우리나라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교 교육과 학원교육을 받게 하지 않아도 수 많은 수재들을 배출하고 어느 민족보다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척박한 광야 땅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젖소 한 마리당 최고의 산유량(産乳量)을 자랑하고 있고, 농산물을 수출하므로 광야에서 젖과 꿀이 흐르게 하는 민족입니다. 그들의 부모 공경 역시 일반적인 도덕과 윤리적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그 공경(효)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녀를 대할 때에도 윤리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듯, 다시 말해 신앙적인 면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훈계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의 효와 자녀 교육에 있어서 그 중심이 부모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신본주의라는 것이며, 부모나 자녀가 효와 교육의 중심에 서 있는 인본주의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업주와 근로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주나 근로자가 그 기업의 중심이 아니라 그 기업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신본주의 정신으로 기업주는 기업을 경영하고 근로자는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근로자(노동자)는 그가 처해 있는 직장 환경에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몸담고 일하고 있는 직장을 자신이 노력해서 구한 일터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삶의 터전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직장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다 해서 도피하는 자세로 일하지 말고 그 환경을 극복하고 정복하는 자세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할 때 단순히 기업주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일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일한다는 가치관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맡은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훌륭한 것이 되도록 일해야만 합니다. 이는 근로, 직장이라는 노사문제를 경제적인 문제로 보지말고 종교적인 문제로 풀어가라는 것입니다. 월급을 올려준다거나 노동조건을 개선해준다거나 복지시설을 갖추어준다든가 하는 것만으로 훌륭한 노동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근로자에 대한 근로감독을 강화하거나 징계제도를 엄격히 하거나 때로는 강력한 협박을 한다고해서 좋은 노동자를 만드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그러한 방법에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한계가 있습니다. 좋은 기업인과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비결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을 위해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서 일 할 때만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주는 그 기업에 대한 주인이지만 여전히 그 자신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날이 오면> 기업주나 노동자 모두 다함께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계급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다 인간일 따름입니다. 주인되는 기업주나, 종이 되는 근로자 모두가 다 주어진 기업과 직장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노동과 생산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하나, 힘없는 근로자 하나를 결코 소흘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대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 하듯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터지기 몇 해 전이었습니다. 오하이오 주의 대농인 테일러(Worthy Taylor) 씨 농장에 한 거지 소년이 찾아 들었습니다. 17세의 짐이었습니다. 일손이 얼마든지 필요한 집이기에 그를 하인으로 고용하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 주인인 테일러씨는 짐이 자기의 외동딸과 사랑하는 사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농장주 테일러씨는 몹시 노하여 짐을 때려서 빈손으로 내쫓았습니다. 그후 35년이 지난 어느 날 테일러는 낡은 창고를 헐다가 짐의 보따리를 발견하고 한 권의 책 속에 기록된 서명을 보고 짐의 본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제임스 에이 가필드(James A. Garfield), 현직 대통령의 이름이었습니다. 짐은 히람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육군 소장을 거쳐 하원의원에 여덟 번 피선된 후 백악관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아이들과 소년 소녀를 보는 눈은 더 깊은 곳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엄청난 가능성을 볼 수 있을 때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눅 9:48)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심정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힘없는 근로자 하나일지라도, 무력한 장애자 하나일지라도 예수를 영접하듯해야 할 것입니다. 농장주 테일러씨가 "하나님 말씀을 가졌더라면" 그렇게 엄청난 후회는 맛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모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고, 자녀는 하나님 말씀 안에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기업인과 근로자, 정치인과 백성 그 모두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주어진 사명을 다 할 때 가장 아름답고 풍성하며 좋은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도브슨 박사가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한 학교에서 운동장 둘레의 울타리를 철거했습니다. 울타리가 아이들에게 정신적으로 구속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울타리 철거 후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울타리가 있을 때는 아이들이 운동장 전체에 흩어져서 놀았는데 울타리를 철거한 뒤에는 운동장 가운데에 모여 노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으로 아이들에게 있어서 울타리는 구속감이 아니라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울타리가 없어지자 아이들은 오히려 운동장의 활동 범위를 좁혀 자기들끼리 모여 서로 의지한 것입니다. 도브슨 박사는 "아이들에게는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자신의 명제를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였던 것입니다. 아이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며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좋은 교육이나 사랑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가정의 규율, 부모의 훈계와 징계, 사회 공중도덕 등의 울타리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채찍'이란 말은 교육학적으로도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에 울타리가 되어 그 인간의 삶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정과 사회 등 삶의 전반에 걸쳐 인간의 충분한 울타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가정에서 효와 교육의 중심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가정과 사회 등 모든 생활의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완벽하게 나타나 보여 준 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단순히 사랑만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자녀 사랑은 자식을 망치게 합니다. 공의가 없는 부모 사랑은 결국 부모를 슬프게 만들것입니다. 또한 사랑이 없는 공의는 자녀를 메마르게 할 것이며, 사랑이 없는 공의는 부모를 버리게 할 것입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기업을 부패하게 하여 그 기업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공의 역시 그 기업의 생산성을 떨어뜨려 함께 망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지시는 여러분이 되시므로 참된 가정 교육과 부모공경의 아름다운 열매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시는 여러분이 되시므로 여러분의 일터가 아름답고 풍성한 결실을 맺으시기 바랍니다. (이동희 목사)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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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배소서강해-4] 하나됨을 위하여 (엡 4:1-16) (0) | 2014.01.02 |
[스크랩] [에배소서강해-3] 그리스도의 비밀 (엡 3:1-21) (0) | 2014.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