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전광식(고신대 교수)
1.
언어분석철학자들이 지금부터 반세기만 되돌아간다면 'Postmodern '이니 'Postmodernism'이니 하는 용어에 비판과 분석의 매스를 가하는 데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작금의 분석 철학계가 난삽한 논리나 기초연구에 분주하다보니 이러한 개념어들을 잡고 시시비비를 논할 흥미나 기력이 없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어쩌면 Post-modernism을 더 Postmodern답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사실 이 용어는 보편적이고 일의적(-義的)인 개념규정이 되지 않음으로 해서 논의를 더 불러일으키고 호기심을 더 자극했는지 모른다.
오늘날 철학이나 예술, 개인의 삶이나 사회전반을 두고 Post-modernism이라는 용어를 흔하게 쓰고 있다. 사실 Post라는 접두어를 가지고 학술지나 문예지의 독자들에게 흥미를 유발시키며 주가를 올리는 사회 철학적 이론들이 많음이 분명하다. 이미' Post-Christianity', 'Postin-dustrialism'이 쓰이고 있고 'Postmaterialism'이니 'Posth-istory'같은 용어도 생경스럽지않다. 그리고 'Post-1ism'은 이제 'Postmodernism'에서 그 절정에 다다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용어들은 실제적인 사상 내지 문화의 변화보다 진단과 규정을 더 빠르게 하는 Chameleon적 사상사가(思想史家)들의 조급함이나 지적 경박성에서 온 것일 경우가 허다하다. 다시 말하면 사상 내지 문화에서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변화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충분한 토론과 논의도 없이 어떤 학자의 규정을 무비판적으로 확대하여 사용함에 있어서 빚어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여튼 'Postmodernism'이 란 용어는 이 시대의 정신과 문화를 규정하는 대표적인 용어로 서 공감대를 확대해 나가면서 쓰이고 있다. 그것은 다른 개념용어들보라 훨씬 더 애매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미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을 던지고 있다. 독일에서 Postkodernism 연구로 필명을 날리고 있는 Wolf-gang Welsch(Bamberg)는 이런 현상을 두고 '그릇된 명칭의 마술(Magie des falschen yamens)' 이라고 했다. 이 시대를 'Postmoderne'가 아니라 정확히 'Postmoderne Moderne '이라고 칭해야 한다는 Welsch는 'Postmoderne'라는 용어가 그것이 사용된 후 10년이 지난 작금에는 그 개념이 더욱 분명하게 된 것이 아니라 혼란만 더 가중되었다고 진단한다.
Postmodernism에 대한 개념논쟁은 독일과 불란서에서 철학자와 예술이론가들간에 활발히 이뤄졌는데 이들간의 쟁점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즉 'Postmoderne'에서 우선 'Moderne'를 정확히 어떻게 또 어느 정도 범위에서 성격을 규정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고, 또한 그런 규정하의 'Moderne'에 과연 'Post'를 붙일 수 있는지, 또 있다면 어떤 정도인지를 문제삼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점에 있어서 는 여전히 정확하게 객관화된 개념 규정이 수립되지 않고 다만 점차 일반화되어 가는 내용이 있다고 보여진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작금의 시대정신과 문화를 Postmodernism이란 개념어로 이해하려는 것이 확대되어가고 있다는 점이고, 그러나 시대현실 은 그 개념의 애매함보다 더 애매 모호하다는 점이다.
2.
Postmodernism은 문화의 전반현상에 대한 명칭이지만 특히 문학이론, 사회학, 건축이론과 철학에서 많이 논의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한 학자들은 주로 불란서와 독일에 포진되어 있는 데, 이를테면 Vattimo, Foucault, Delouse, Derridda, Baudrillard, Rorty, Benhabib, Huyssen, Foster, Jamesom, Habermas, Wellmer, Spaemann, Kamper, Solterdijk, Jencks 등이다. 그러나 Postmodernism을 가장 심도 있게 개발하고 연구하여 그것의 깃발을 선두에서 날리고 있는 이는 Lyotart이고, 또 그 이전에 Dubuffet을 들 수 있다. 1951년에 이미 Jean Dubuffet은 '우리의 문화는 우리에게 맞지 않는 옷이다'라고 하면서 금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다가올 Postmodernism의 사상적 경향을 얘기하고 있다. 그는 이제 예술뿐 아니라 가능한 모든 다른 영역에서도 깊은 정신적 변화와 새로운 방향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점이 새로운 변화의 특징이라고 했다.
1) 우리는 서구의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에서 물러서고 있다. Dubuffet은 이것은 비인간화(非人間化, Enthumanisierung)의 현상이라고 하면서,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 우리는 이성과 논리의 절대성에서 물러서고 있다. Dubuffet은 우리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관념들은 더 이상 합리적인 수단들로 포착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합리성(Rationalitat)을 상대화시키는 것이지 그것에 대한 전반적인 배격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우리의 정신과 문화에서 합리적인 내용보다는 비합리적인 계기들과 선(낮)합리적인 실행이 더 비중이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3) 이제 예술에서도 일의적(-義的)이고 분명한(eindeutig) 작품보다, 다의적(多義的)이고 애매 모호한 작품을 내게 된다. 이러한 것은 이제 어쩌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산출된다.
4) 끝으로 예술은 아름다운 대상을 시각적 즐거움만 위하여 아름다운 모습과 색상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고 보다 풍부한 매력을 고려한 작품으로 나타나고 있다. Dubuffet은 여기에서 시각보다 정신에 대한 고려를 말하고자 한다.
이렇게 이미 수십년 전에 Dubuffet은 한 예술가로서 문화현상과 시대 정신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진단을 하였는데 이러한 점이 곧 Postmodernism의 주요한 성격을 구성하고 있다. 그가 말한 네 가지 점을 요약한다면, 인간중심주의에서의 도피, 합리주의에서의 도피, 시각의 무위성에서의 도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Anthropozentrismus, Logozentrismus, Monosemie, Visualprimat에 대한 사중적 비판은 바로 Postmodernism의 핵심적 본질을 이루고, 또 그것의 개념규정의 주요특징을 이룬다. Foucault나 Derrida, Lacan이나 Lyotard는 결국 1951년 Dubuffet이 진단하고 표방한 시대 정신과 문화적 경향에 공감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3.
Dubuffet의 소리가 Postmodernism의 전주곡이었다면 본 노래의 주인공은 Lyotard이다. Lyotard는 철학상에 있어서 Postmodernism의 '그' 철학자이다. 아무도 그보다 그렇게 일찍이 그렇게 상대하게, 또 그렇게 명확하게 Postmodernism의 철학의 개념을 개발한 이가 없는 것이다. 그의 첫 주저(主著)인 'Discours, Figure'(1971)에서 잘 나타나듯이 Lyotard의 Post-modernism에 대한 연구는 예술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었고, 또 그는 실제 Duchamp나 Newman, Buren이나 Adami 혹은 Arkawa 같은 예술가들과 더불어 이러한 사상적인 작업을 했다. 그러나 그의 예술에 대한 반성은 항상 철학적이었다. Lyotard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1979년에 나온 'La condition postmoderne' 이래 Habermas의 견해에 대립해 왔는데, 특히 Habermas의 진리의 Konsesus 이론에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했다. (여기에 관하여는 Manfred Frank의 Das Sagbare und das Unsagbare, 1989, 574-589 : 'Jean Fransois Lyotard und Jurgen Habermas'를 참조하라.)
또한 1980년 Habermas가 Adorno 상을 수상한 후에 행한 수상자 강연에 대한 반박논문 ‘Reponse a la guestion : Quest-ce gue le postmoderene?' (in : Critigue 1982, H. 419, 357-367)에서 Lyotard의 견해가 잘 드러나는데, 이 논문에서 그는 Habermas가 Postmodernism적인 경향들을 '신보수주의’로 비판하고 여전히 'Moderne‘의 이상과 구상을 고수해 Moderne의 미학을 가지고 Postmoderne 사상을 옹호하고 있다. 그는 Moderne의 예술을 Postmodern한 관점에서 해석을 하면서 Postmodern은 moderne에서 나왔고 moderne는 postmodern한 성격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Lyotard가 본 moderne 예술의 Postmodern적인 성격은 다섯가지이다.
첫째로 비구상(Dekompostion)이다. moderne의 예술은 더 이상 절대적이고 온전한 예술개념의 의미에서 작품을 만들지 않고, 그려진 것의 독립적 요소들, 예술개념들이 구조종합현상으로서의 예술의 부분들이 현상으로서의 예술의 드러낸다. 말하자면 예술은 대상, 상태, 구조, 종류 등의 해체(解體)작업을 통해 성격이 지워진다. Lyotard는 한 편으로는 이런 과정을 '미술의 해체'라고 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미술의 분석 '이라고 한다.
둘째는 반성(Reflection)이다. 이것은 Lyotard에 따르면 예술의 변화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전통적인 예술은 어떤 하나의 실재에 의존했는데 비해서 moderne한 예술은 허무주의에 뿌리가 놓여있다. moderne한 예술은 이제 그것이 어떤 실재와 상관하는 게 아니고, 또 어떤 실재로부터 발원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주체인 화가 자신과 예술자체에서 발원하고 따라서 반성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셋째는 고상한(Das Erhabene)이다. Moderne의 예술은 아름다움 내지 꾸밈의 미학에서 고상함의 미학으로 변천되었다. 반성적인 것으로서의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감각적인 것을 작업하는 게 아니라 정신과 사상을 작업한다. Lyotard에 의하면 'Moderne 한 화가는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는 것을 발견했다' Paul Klee가 한 말을 인용한다면 이런 예술가들은 이제 오로지 현세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더 이상 포착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사적으로 표현한다면 종교화내지 유사 종교화적 성격을 moderne한 예술이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전위예술(Avantgarde)은 이러한 고상함과 사상의 예술일 것이다.
넷째는 실험(Experiment)이다. 앞서서는 고상함을 말하였으나 Christine Pries (Einleitung, in Das Brhabene, 1989)가 바르게 규명한 바대로 Lyotard는 형이상학적 고상함을 말한 것이 아니라 비판적 고상함(das Kritische-Erhabene)내지 실험적 고상함(des experimentelle Erhabene)을 얘기했다. 말하자 면 그는 초월의 형이상학을 표방 한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능성의 존재론을 말했다. 고상함이란 곧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굴절되는 것이고 바로 이러한 수평성을 통하여 비판적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요컨데 그는 가능성과 표현의 다양성에 주목한다. 아무런 예술작품도 '그(des)' 예술작품은 아니며 아무런 방식도 '그' 방식이 아니며, 또 아무런 성향도 '그' 성향이 아니다. 모든 구성작업은 허무주의라는 하나의 바닥에서 이뤄지지만 그것은 종결지을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다섯째, 복수성 (Pluralitat)이다. 위에서 말한 실험성에 우리는 이미 복수성이 있음을 본다. moderne한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 중 하나가 그러한 복수성이다. 그것은 하나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성을 내세우고, 동질적인 것만 말하지 않고 이질적인 것은 얘기한다. 이런 이질적인 것을 가미는 회화의 요소나 표현방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술형태나 판단양 태에도 관계한다. 그것은 다양한 스타일, 다양한 주의(主義)와 방향 속에 나타난다. Lyotard는 이러한 다섯 가지 성격이 moderne한 예술의 특성이라고 한다.
4.
Lyotard가 말하는 요지는 Postmodernism이란 이러한 moderne한 예술의 정신에서 태동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예술의 영역에만 머물 지 않고 학문과 문화, 삶의 전반 적인 영역까지 미치고 있는 Postmodernism외 정신을 보여준다. Lyotard의 다섯 가지 분석에서 우리는 Postmodernism의 성격이 해체주의, 주판주의, 정신적․영적 성격, 비판주의, 상대․복수주의 등임을 알 수 있다. 특수 복수주의의 문제와 관련하여 Lyotard와 비판이론의 Adorno와의 논쟁은 주목할만하다. moderne의 표지(標識)인 복수성에 대해 Lyotard 같은 이들은 긍정적으로, Adorno같은 이들은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들은 우선은 똑같이 moderns한 예술이나 정신은 전체의 해체 내지 형이상학의 쇠락에서 태동했음으로 복수적이라는 데 공감한다. Adorno는 moderns의 정신이 다양성의 해방(Befreiung desVielen)이라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이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약속이라고 본다. 그는 이것이 파당적 욕구(Partialtriebe)라고 보지, 그 속에 참으로 인간성의 구원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Adorno에 의하면 구원도 전체에 있고 온전한 화해에 있지 다양한 부분들의 상호 이질성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성내지 전체성에 대한 염원은 moderne의 사상가인 Adorns의 기본전제인 것이다.
그에 반해서 postmoderne한 사상은 이러한 통일성내지 전체성의 선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것은 복수성으로 진입하며 그 복수성을 포지티브하게 평가한다. Postmoderne가 Pramoderne나 Moderns와 가장 선명히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다른 Vision을 지향하고 있는 점인데, 이것은 곧 다양성이 유포되어진 것이다. 나아가 Lyotard 는 Adorno의 negativ한 미학과 대비시켜 affirmativ한 미학을 내세운다. Lyotard가 moderns한 기술에서 자기사상의 구실과 같은 것으로 이끌어 낸 두 가지 성격은 이질성(Heterogenitat)과 비통적(非通的性, Inkommensurabilitat 같은 방식으로 잴 수 없음)이다.
Lyotard가 자기자신에게도 이질적이고 난해한 다양한 언어놀이, 추론방식, 사유형태, 그리고 문화적 암호들을 통해 제시하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moderne한 예술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moderne한 예술에 대한 그의 성격규정은 바로 철학의 영역에서 잘 표출된다. 예술의 비구상에는 메타설론(Meta-Ergshlung)의 종국이 해당되고, 또 예술적 반성에는 항상 자기의 규칙을 찾고자 하는 사유의 근본자세가 해당된다. 고상함의 미학은 파라독스와 불가학적인 것에 대한 사상의 개방성과 연관된다. 그리고 실험성은 예술가와 똑같이 철학자도 취하는 것이다. 이질성과 비통약성을 통해 나타나는 복수성은 Lyotard의 생각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나 상대주의의 모습을 보여준다.
Lyotard의 분석은 앞서 논의한 Dubuffet의 진단과 일맥상통하며 그것들은 함께 Postmoderne의 정신을 잘 드러내준다. Dubuffet은 인간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일의주의(一義主義), 시각우위주의에서의 도피를 주창했다. 이것은 Lyotard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Postmoderne한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시각의 우위성에서의 탈피는 서술 불가능한 것(Nicht-DarstelIbares)으로 방향을 돌리게 하였다. 일의적인과 전체적인 사유지령에서의 도피는 다양한 방식의 해체주의에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성중심주의에서의 탈피를 통하여서는 Postmoderne에 있어서 합리성이 복수적으로 되었고, 전통적 합리주의가 더 이상 보편 타당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중심주의에서의 도피는 후기구조주의자 들에게서 잘 표명되었다. mod-erne한 예술이 인간적인 것을 극복하려고 하듯이 - 이를테면 우주적인 것으로(Matewitsch), 부지향성으로(초현실주의), 그리고 질료적인 것으로(arte povera) - postmoderne한 사상도 인간 의 인본주의적 구상을 극복하려고 한다. 물론 이런 경향이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회귀하려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여하튼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인간 중심적 진보개념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에서는 이러한 Postmodernism외 비인간중심주외도 또 하나의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이고, 내주주의임이 분명하다.
5.
Postmodernism에 대한 논의 는 그 개념의 광의성만큼 광의적일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그러나 무척 한정된 지면에서 우리는 그것의 선구자와 대표적 이론가인 Dubuffet와 Lyotard의 사상을 중심으로 논의해 보았다. Postmodernism의 철학이 예술의 정신에 태동했다고 했듯이 이 사상의 최근 경향은 미학이론가들 사이에서 많이 논구 되었다. 특히 Jean Baudrillard와 Dietmar Kamper, Peter Stoterdijk 등에서 개발된 Postmoderne한 미학도 한마디로 '지각적 사상' (Aisthetisches Denken)이라고 할 수 있다. Postmoderne의 정신이 지각과 반성을 강조하므로, Moderne의 미적 정신이 미학(Asthetik)이라면, Postmoderne의 그것은 Aisthetik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속에 모든 대립적인 것들, 즉 한계의식과 전체적 시각, 고상함과 미(美) 우위주의, Lyotard적인 것과 Habermas적인 것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Postmodernism 미학의 다른 또 하나의 이론가인 Charles Jencks는 고전주의(Klassizismus)라는 개념을 확대하여 그것과 Poatmod- ernism을 연결시킨다. 그에 의하면 Postmodernism은 '새로운 고전주의(Neuer Klassizismus)' 이다.
이러한 Postmodernism온 그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Michel Foucault같은 후기구조주의자들의 견해에서도 나타나고, Jacgues Derrida의 형이상학비판과 해체주의 사상에도, Jacques Lacan의 프로이드적인 심리분석에도 잘 표출되고 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Habermas의 Moderns의 주창과 그것의 유지에서 발단하여 그것과 관련된 Postmodernism에 대한 여러가지 논의가 분분하다. Habermas에게는 Postmodernism은 아직 이루지 못한 노력을 포기한 것으로 비치고, 또 복수주의와 상하주의 때문에 새로이 개인주의와 보수주의가 새로운 틀을 쓰고 등장한 것으로 보여졌다.
A. Wellmer는 Moderne와 Postmoderne을 구분은 하면서도 변증법적 연결을 구상했다. 그리고 0. Marguard는 이 시대를 Postmoderne이라는 단일명칭으로 명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시대는 복잡하다고 보는 소위 신보수주의적 회의(Neokonserrative Skepsis)를 표방했다. Marguard는 이 시대를 '산업시대', '후기자본주의', '학문과 기술혁명의 시대', '핵 시대', '노동자 사회의 시대 ', '휴가 사회의 시대', '정보 사회의 시대' 등으로 부를 수 있다고 변론한다. 그리고 N. Luhmann은 소위 체계기능주의 (Systemfunktionalismus )를 제창하여 사회조직은 의사소통(Kommunikationen)만 구성되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Moderns 와 Postmoderne간의 엄밀하고도 절대적인 구분을 하기는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Postmoderne는 단순히 Trans-Moderne 와 Anti-Moderne가 될 수 없다. 그것은 Moderne의 속성을 그 자체의 속성으로 많이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는 Moderne의 특성과 다른 경향을 내보이는 점이 있음도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Moderns이든지 Postmoderne이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정신과는 동 떨어져 있음을 보아야하고, 특히 Postmoderne은 더 고차원의 인본주의요, 내재주요, 상대주의요, 주관주의임을 인지해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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