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위한 기도(마 6:9-10)
사람마다 각기 바램과 소원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느 세 사람이 항해를 하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간신히 어떤 무인도에 상륙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는데 그중의 한 사람은 몹시 부자였고 한 사람은 유명한 연예인이었고 한 사람은 실업자에 백수였습니다.
부자와 연예인은 날마다 자신이 살던 세계가 그리웠지만, 백수에게는 먹을 것만 있다면 전에 살던 세상이나 여기 무인도나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사람이 함께 바닷가에 앉아 지나가는 배가 나타나기를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천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천사는 세 사람이 마음을 깨끗이 하고 기도했기 때문에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살던 대저택에 돌아가 하인의 수종을 받으며 점심식사를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자 그는 당장 자신의 저택으로 옮겨졌고 진수성찬이 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연예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대군중이 모인 공연장에서 조명과 환호를 받으며 다시 한 번 멋있게 재기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자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마지막으로 백수를 쳐다보았습니다. 백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천사를 향하여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별로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런 세상에 돌아가봐여 별로이고, 그냥 여기 살면 족합니다. 그런데, 저 혼자 있을려니 그건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군요. 아까 같이 있었던 친구들이 계속 같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것도 그대로 되었습니다.
“……”
사람들마다 소원의 순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능력을 중요시 하고, 어떤 사람은 물질을 중요시 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어떤 사람은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 말할 때에는 갖가지 은혜로운 말을 다하고 아무리 믿음이 좋은 듯이 모양을 가졌을지라도 그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첫 번째 소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그의 신앙적인 수준과 상태를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복권이나 맞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소원은 백수의 소원입니다. ‘장사나 잘되면 좋겠습니다!’는 장사꾼의 소원입니다. ‘아이가 건강하길 원합니다!’는 부모의 소원입니다.
이 모든 소원이 각기 나름대로의 가치와 수준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에 가져야 하는 첫 번째 기도의 소원을 새롭게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결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소원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적어도 소원이 이쯤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기도의 대상 이후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다시한번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마 6:9-10)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누구를 위한 기도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먼저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나를 먼저 생각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를 닮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보고 그리고 나를 보아야, 하나님도 바로 보고 나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시는 자녀로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 기도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히브리 사람들에게서는 이름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 이름은 반드시 존재가 공존하는, 즉 임재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엘리야와 바알선지자 450명과의 갈멜산 기도싸움에서 엘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왕상 18: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그들은 신의 이름을 부르면 그 신이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도 심사숙고해서 짓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인물 중에 야곱이란 이름은 간사하다는 의미를 가진 좋지 못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평생 간사한 생을 살았습니다.
이름은 신앙적으로도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똑같은 말을 평생을 듣고 자라고 삶을 산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영향이 인생에 있지 않겠습니까?
원주에 가면 이집사님이 계십니다. 이 집사님에게 늦동이 아들이 아드님이 있는데 이 아이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이기도’입니다.
왜요? 이 아이를 기도로 낳았다고 합니다. 기도가 없었으면 있을 수 없는 인생이었으니 평생을 기도하면서 하나님 의지하고 살라고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평생 생각하지 않겠어요?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름 이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을 의미하고 그 존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매우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어떻게 되기를 원한다구요? 거룩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을 구별을 의미합니다. 막하지 아니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이 기도에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아들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행실이 그 아버지의 영광과 상관되는 것입니다.
자식의 행실을 보고 가정교육을 비판하는 것처럼 만일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성도의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선한 행실로 모범이 되지 못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어느날 전장에서 막사를 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병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던 나폴레옹은 그만 크게 화가 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병들의 말이 ‘보나파르트는 사기꾼이며, 협잡꾼이고, 질이 나쁜 자식’이라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성큼 막사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이 괘씸한 녀석들! 아무리 보지 않는 곳이라지만, 너희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서운하게 했다고 나를 그리 심하게 욕하느냐?”
그런데 병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폐하, 저희가 언제 폐하를 욕했다는 말입니까?”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보나파르트가 사기꾼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 않았느냐?”
“하하, 그거 때문이군요. 그건 전하가 아니라, 저희 소대에 있는 보나파르트라는 병사의 얘기인데, 그는 정말 질이 나쁜 녀석입니다...”
나폴레옹은 그제서야 일의 전말을 알고서 자기의 막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의장대를 시켜 그 소대의 ‘보나파르트’를 붙잡아 오게 하였습니다. 장군들조차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천하의 황제, 보나파르트 앞에서 이 사병은 바짝 얼어 덜덜덜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황제가 입을 열어 명령합니다.
“네 이놈, 너는 둘 중에 하나를 고쳐야 한다. 네 이름을 고치든지 아니면 네 행실을 고치든지... 알겠느냐?”
하나님도 우리에게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면 그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름은 영웅의 이름인데 고작 하는 짓이 사기꾼과 협잡꾼의 노릇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속상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데 이바지하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자세가 우리에겐 필요한 것입니다.
운전하다가 다른 차가 부당하게 끼어들어도 욕하고 싸우면 안됩니다. 누가 섭섭한 말을 했다고 꽁했다가 복수해서도 안됩니다. 노름판이나 술판, 혹은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숨기고자 할만한 자리에는 가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렇게 하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는 순간 그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과 구별된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천국이 임하기를 위해 기도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성경에서 말하는 ‘나라’는 ‘state’나 ‘country’가 아닌 ‘kingdom’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의지와 협력을 통하여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의미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30살의 나이로 처음 전도를 시작하셨을 때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신 많은 설교들이 천국을 비유로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설교하셨던 것입니다.
주기도문이 나오는 마태복음 6장의 후반부 결론에 해당하는 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가 기도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많은 개념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권’입니다.
국가의 3요소를 국민, 영토, 주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에도 이 3가지는 존재합니다. 국민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이고, 영토는 바로 천국이며,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주권’이 가장 중요한 까닭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권리는 그 국민 된 우리를 지으신 권리이며, 또한 천국과 모든 현실계도 지으신 권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왔습니다.
이 ‘주권’이 나라에서 통용될 때에는 ‘다스림’ 혹은 ‘정치’가 됩니다.
우리는 정치가 무슨 말장난이나 사기꾼들의 집단으로 생각합니다. 그만큼 정치인들이 못하다보니까요.
사실 정치는 곧 그 국민을 유익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가장 좋은 계획과 가장 좋은 방법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정치의 목적이며, 그 결과는 곧 자애로우신 하나님께 우리의 입을 열어 찬양과 감사를 돌리게 하는 영광인 것입니다.
나라가 아무리 부요해도 왕이 무능하면 금새 거덜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황금으로 되어졌다느니, 놀고 먹을 수 있는 곳이며, 거기다 영원히 아픔과 고통이 없이 살 수 있는 장소라 하더라도 거기 좋은 통치자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을 퇴색시키고 망가뜨리는 것은 일순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이 한이 없으십니다.
지옥같은 곳일지라도 일순간에 그 불을 끄고 천국과 같은 곳으로 바꾸시는 능력이 하나님께는 있습니다. 또한 그분은 가장 행복한 나라를 이루는 지혜와 경륜이 계십니다.
온 세상이 운영되는 것을 보십시오! 계절마다 풀이 자라고, 개미와 같은 작은 곤충들이 그 대를 이어가는 것을 보십시오. 별자리와 해와 달이 계절을 좇아 한결같은 운행을 하는 것을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영토는 천국만이 아니라, 현실도 포함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가정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그 뜻대로 운영되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옳게 키우는 방법을 가르치시고, 부부가 함께 화목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고 섬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성경의 말씀과 우리 마음에 얘기 하시는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깨닫게 됩니다.
직장에도, 사회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시면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3.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
(마 6:10)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은 올바른 기도란, 우리의 필요에 앞서 신앙적인 목적,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목적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지 않다면 그가 무엇을 기도하든지 그것은 그의 바램일 뿐이지 하나님과는 무관합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구한다고 해서 무엇이나 다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현실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단순한 소원의 성취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기회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응답’이라고 부릅니다.
이 응답이란, 소원이 성취되지 않더라도 ‘왜 성취되지 않는가?’를 이해하게 되는 깨달음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기도한 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을 응답이라는 말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에 조카가 감기가 걸렸을 때, 약을 잘 먹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평소에 아무 증상이 없는데도 약을 먹으려고 고집을 부리면 참 한심한 일입니다.
무슨 쥬스나 사탕을 먹으려는 것처럼 때로는 냉장고를 열고 거기 보관된 감기시럽을 먹겠다고 성아를 부립니다.
이 조카가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고 하여서 그 약을 주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이 유아용 시럽이면 혹시 약간의 유두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일 아이가 먹으려는 약이 독성이 있다거나 잘못 복용했을 때 심한 부작용이 예상되는 약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그것을 주는 것이 과연 옳겠습니까?
그런데 인생은 실재로 그런 어린아이 같은 ‘떼쓰기’를 하나님께 기도라는 형식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당장 망할 회사가 눈앞에 있는데 겉모양만 보고 그 회사를 인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돈을 주체할 수 있는 인격과 신앙이 준비되지 못해서 돈이 생기면 곧바로 타락하기 쉬운 사람인데, 자신을 인격적으로 준비하기에는 관심이 없고 돈만 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노름판에서 좋은 패가 들어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것은 주기도문에 나오는 기도의 정신과 위배되는 것이기에 구하는 것을 받을 수 없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소망으로 해야지 욕심으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우리가 미련하고 모잘라서 그렇게 잘못된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무시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기도’라는 대화를 통하여 이런 삐뚤어진 시야의 사람들에게 인격적인 만남을 요구하시고 그들이 꾸준히 기도하는 동안에 올바른 것을 구할 수 있도록 교정과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래서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받지 못할지라도 ‘왜 내가 받지 못하나?’를 깨닫는다면 그것도 곧 ‘기도의 응답’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범사에 유익합니다. 어떠한 경우, 어떠한 사람에게도 기도는 유효한 방법이며 신앙적인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는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도’ 혹은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예수님은 오늘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기를 구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란 이미 이 뜻이 결정적이며 성취된 것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전능자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그것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은 선포되어 드러났고, 그것은 이미 ‘이룬’ 것처럼 보장된 확실성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땅에 적용하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는 그런 점에서 우리의 다짐과 결단이며, 또한 앞으로의 확실한 승리를 믿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결론
흔히 경험하는 일입니다만 기도할 때, 나의 형편과 처지에 대한 답답하고 다급한 이야기들을 먼저 쏟아놓기 시작하면 분하고 억울하고 안타까와서 나중에는 내가 누구한테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울다가 원망하다 보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나의 사정만 보여지니 이것이 기도입니까?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다급하고 답답한 사정이 있더라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생각하는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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