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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기도문강해(1)-하늘에 계신 아버지여(08. 5. 17 오전)

하나님아들 2013. 3. 22. 11:5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는 훌륭한 스승들이 제자들을 교육하는 것이 유행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스타일의 교육에 익숙하였으며 대체적으로 암기에 의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적인 교육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스승들을 유대인들은 ‘랍비’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도처에서 훌륭한 스승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식들을 위탁하였으며 그들은 스승을 좇아다니며 수 년씩 가르침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렇게 교육받아 스승의 이름과 견주는 랍비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 그것은 유대인에게 있어 가장 존경받는 성공이었으며 민중에게 있어 정신적인 아버지가 되는 명예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대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름을 따라서 가족과 생업을 버려두고 당장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유대인의 전통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설교)들을 하나씩 가슴에 새겨 그대로 전달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그 가르침을 해설하는 해설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마태복음 6장에서와 같은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그곳에서는 제자가 예수님을 향하여 먼저 요청하였는데, 그것은 세례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기도문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랍비들은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기도를 가르쳐 주어서 규칙적이며 습관적인 기도를 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문은 다른 랍비들의 기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질적으로 다른 많은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문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중에 놀라운 영감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수 없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문을 주셨다는 사실은 몇 가지로 오늘의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첫째, 기도에는 모범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기도 모델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이 사실이 보다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예수님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기도에 반하여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명령으로 주기도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의 의도를 하나님께 아뢰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 깨달아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인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시며, 그 만남의 결과는 곧 우리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변화입니다.

그 만남이 인격적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말을 많이 하거나, 기도에 시간을 많이 쏟아서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하고 명확하게 말할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그런 점에 있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가를 주기도문을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들은 앞으로 주기도문의 내용들을 하나씩 음미하면서 함께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여튼 요점은 이것입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중구난방,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눈감고 다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는 올바른 자세와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것들의 모델을 주기도문을 통하여 보여주고 계십니다.

둘째로, 기도의 중요성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그분은 종교적이며 외형적인 형식들을 결코 좋아하시지도 않고 긍정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파격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규칙화 하여서 하면 안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들을 분류하고 자신의 규칙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종교도 오래되면 항상 기득권층이 존재하고, 부패와 타락이 그늘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모든 부패에 대하여 도전하셨습니다. 항상 예수님은 인간들의 규칙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을 던지셨고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결코 인정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제자의 요청을 받고 기도문을 주셨습니다.

혹시라도 제자들이 그것을 잘못 이해한다면 마치 귀신을 쫓아내는 주문(呪文)이나, 형식적인 우상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규정된 기도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를 다니면서 주기도문을 예배 마칠 때마다 하지만, 그 원래의 정신과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외우기만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우려되었던 오용(誤用)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예감하셨을 것이면서도 이렇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던 것은, 바로 기도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다소 부작용이 있더라도 그것을 무릅쓰고 더 큰 가치를 위하여 주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주기도문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아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쁘고 힘든 중에서도 항상 기도의 시간을 구별하셨고, 기도를 하면 밤을 새우며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고 성경은 적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생활태도가 바로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신 것이며, 그 안에는 기도를 값지게 여기시는 마음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세째로, 기도의 계시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는 당사자는 나 자신이지만, 기도는 결코 내 의사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사대로, 예수님의 의사대로, 성령의 의사대로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것이 성령을 통하여 적용됩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영(靈)인데, 성령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도록 의도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느끼게 하시며,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고, 우리가 더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 가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도를 하려면 내 마음 가운데서 함께 기도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지혜로운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성경은 성령을 많은 별명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 별명들이 아마도 성령이 하시는 일들을 보다 확실히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변호자(우리의 죄와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께 변호하심),

상담자(우리 마음의 문제와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심),

위로자(슬픔과 고통에서 참된 평안을 주심),

중보자(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서로의 이해를 도우심),

보호자(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보호하심)로 불리우십니다.

이러한 별명들은 특별히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목적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기도는 반드시 성령과 함께해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의 성격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뜻을 접어두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대로, 성령이 인도하시는대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기도의 올바른 정신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12제자들이 교회를 섬겼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입을 통하여 고백되어진 공적인 유일한 기도입니다.

처음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를 받았던 시대에도 신자들은 하루에 세 번씩 규칙적으로 주기도문을 고백하였으며, 주기도문에 대하여 처음으로 해석을 달았던 주석가 터툴리안(AD155- 220)은 이 주기도문을 가리켜 “전 복음의 요약”이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기도문 안에 성경전체가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주기도문 안에는 심오한 기독교의 사상적 풍부함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의 힘과 겸허하게 하는 깊은 깨달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주기도문을 함께 살펴가는 동안에 성령이 우리 가운데서 일하심으로 함께 그 모든 풍요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주기 도문중에 기도의 대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이 말을 하나님이 땅에는 계시지 않고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늘이든 땅이든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온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불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는 다른 "거룩하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우리가 보기만 해도 죽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이렇게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지식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자세를 갖게 해줍니다.

하나님을 가깝게만 알면 우리의 기도는 자칫 너무 천하고 경박스럽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이란 것을 반드시 기억하고,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에 대해 솔로몬은 (전 5:1-2)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 5:1-2) 『[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우리는 솔로몬의 말과 같이 기도할 때에 급한 마음으로 입을 열거나 감정에 들떠서 서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는 전능하고 거룩한 분이며, 우리는 땅에 거하는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사람은 결코 급한 마음으로 서원을 하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은 먼저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구절은 기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두 가지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둘째로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선한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악한 것을 주지 않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성이나 주문에 설득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2. 우리 하나님께 기도한다.

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입니다.

"우리"라는 말속에 하나님의 자녀된 공동체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웃을 형제로, 자기를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믿고 그 안에서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공동적으로 고백할 때에, 같은 고백을 한 두 사람은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공동체적 유대와 그 화목한 관계하나님을 부르는 기도 속에 벌써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을 자기의 전매 특허된 개인 소유물처럼 독점하려는 어리석은 믿음을 보고 유감 되게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특징 중에 하나가 이 공동체 의식에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아버지인 동시에 네 아버지이며, 결국 우리 아버지입니다.

나에게 사랑을 베푸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십니다.

이 같은 바른 신앙고백이 우리의 기도 속에서 늘 새롭게 확증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크게는 하나님을 자기 민족의 하나님 또는 자기 인종의 하나님으로 독점하고 스스로 독선과 아집에 매이 며 자기 우월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협소한 민족주의로 표방된 선민사상들은 언제나 이 "우리 아버지"의 뜻을 잘못 이해한 데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성, 즉 앗수르 나라의 수도에 가서 "외치라" 할 때에 불평하며 다시스로 도망가려 한 것도 사실은 그의 협소한 신앙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내게는 원수이지만, 저들도 하나님의 자녀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 "우리 하나님" 개념 안에서 우리들의 형제 관계가 분명해져야 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면서 한 마음으로 형제의 사랑을 느끼면서 "우리 아버지"를 부른다면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윤리적 관계가 될 것입니까?

교만한 바리새교인은 세리와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고 세리를 멸시하다가 응답 없는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는 바른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3. 아버지께 기도한다.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며, 자녀 된 자의 신분존재가 분명해질 뿐 아니라 기도가 의무이기보다는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이니 이것은 소중한 자녀 된 자의 특권임이 틀림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말이 그저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크신 권능으로써 "본래 진노의 자녀였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며,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그가 우리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심으로써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가 되어서 (요 20:17)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제 감히 아버지라 부르며 또한 성령의 은혜로 인하여 "양자의 영"(롬 8:15)을 받아,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주의 기도문에는 "하나님"이란 말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 뿐입니다.

하나님이란 말은 유대인들이 쓰는 "엘로힘"이란 히브리어로써 흔한 이름이고, 저들이 아주 소중히 여기는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지칭하는 이름이었습니다.(출 3 : 15)

이 때문에 제 3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시하며 유대인들은 참으로 그 여호와를 부르기를 꺼려하여서 "아도아이"(주)란 말로 대칭해서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라 부르라고 친절하게 가르치십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아버지의 개념은 생명의 근원이라는 데 있습니다.

자녀의 생명이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상징적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다스리시는 주관자로서 자녀를 보호하는 분입니다.

자녀들은 그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고 또 필요한 것을 청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녀가 확실한 자녀된 존재그 자세를 분명히 할 때에 가질 수 있는 권리입니다.

자녀답지 못한 자로서 그 신분을 완전히 떠난 자가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욕이며 큰 불명예를 끼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탕자의 비유(눅 15)에서 탕자가 돌아오면서 자기 스스로 뉘우칠 때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자기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은 곧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그 아버지는 사랑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탕자를 내 보내주며, 기다려 주시고 또 돌아왔을 때 그처럼 큰 잔치를 베풀며 영접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였습니다.

또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며 "찾도록 찾으시는"(눅 15 : 4)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계시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참으로 희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시된 사랑은 부성적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특징은 공의로운 사랑이며 구체적이며 적극적이고 효과적이라는 데 그 깊은 뜻이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몹시도 진노적이었고, 신약에 계시된 사랑은 자애로운 것으로 비쳐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들과 또 십자가의 큰 사건에 비춰진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로우며 진노적인 부성적 사랑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진노 속에 구체화되어 집니다.

사랑하기에 진노하시며, 구체적이기에 진노로 나타나고, 효과적이며 적극적이며 행동적이기에 그의 진노는 불같이 나타납니다.

그 속에 부모적 사랑의 신비로움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감상적이고 힘없는 나약한 사랑이라면 눈물 흘리면서 벌써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대로 실망 하든가 포기하지 아니하며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 주실 뿐 아니라 반드시 그 사랑을 실천하시며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이것이 그의 진노입니다.

또한 이 진노적인 공의로운 사랑이 마침내 아버지의 자기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사건과 그 뜻에 대한 여러 가지 논리적 해석이 역사적으로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희생을 통하여 그의 참된 사랑을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부성적인 공의로운 사랑이 이렇게 구체화되어서 십자가 안에 계시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6:1 이하에서 하나님은 때리시고 치료하시는 진노의 사랑을 보여주셨음을 설명합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아버지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아버지 자신이 지불하신 그 큰사랑을 마음깊이 뜨겁게 느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으로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세 마디 고백 중에서 우리의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또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기도의 자세가 분명해져야 할 것입니다.

출처 : 하나님의 종 바나바의 자료
글쓴이 : 끝장보는 신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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