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마 6:9-13)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식탁 위에 있는 모든 음식들은 점심 때 교회 식구들이 찾아왔을 때 대접하고 남은 음식들이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이 대표기도해요.”
식탁위의 음식들을 한 번 훑어본 남편이 대답했다.
“여보, 이 음식들은 점심때 목자님께서 이미 감사기도 드렸던 것들이잖아. 또 기도할 필요없어.”
예 식사기도는 비단 그 음식이 새로 나온 것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지요. 무슨 제사도 아니구요...
그 음식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또한 그 음식으로 더욱 충성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자기 중심적 사고는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어떤 분은 “예수를 왜 믿느냐?”는 질문에 대해 “외로워서”라든가 “몸이 몹씨 아픈데 예수를 믿으면 몸이 나을까 해서”라고 대답합니다. 더러는 “세상이 불안해서 믿는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아직 신앙이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긴 하지만 아뭏튼 이런 경우도 자기 중심적 신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의 초보에서 벗어난 사람들도 기도할 때는 영락없이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치 초보 운전때 다른 주변 상황을 신경쓰지 못하고 자기만 생각하고 운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운전이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변상황에 잘 대처를 해야 합니다. 신호등도 봐야하고 앞에, 옆에, 뒤에 있는 차의 흐름도 파악해야 하고, 보행자도 볼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초보는 그런데 신경을 못 씁니다. 오직 자신이 몰고 가는 차에만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이런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일에 하나님께서 사인을 해달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실때 무엇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십니까? 아마도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제일 많이 반복되는 말이 ‘주시고’ ‘주시옵소서’ ‘주시사’ 이런 말들 일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거의 ‘내게 필요한 것을 달라’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즉 내 중심적인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 말에 동의를 하기 어렵다 하시는 분은 오늘 여러분이 기도하는 중에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몇 번이나 사용하는지 잘 관찰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주님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그 중심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도의 제일 마지막이 누구에게로 향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주기도문을 처음 시작 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면서 그 기도가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기도문의 제일 마지막도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면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렇듯 기도의 시작과 끝, 모두가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인생의 시작과 끝은 초점이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맞추어져 있습니까? 어느날 우리주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의 시작이며, 역사의 끝이십니다. 즉 모든 역사가 그분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고백대로 이 세상의 역사가 그분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마침내 그분에 의해 종결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도 그분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분에 의해 종결되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끝을 맺어야 합니다.
즉 내 기도의 관심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이 시간에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1.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기독교가 지극히 ‘내세지향적’이어서 사회에 무관심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비판에 대해 우리는 겸허히 수용할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동안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암울했던 시기 즉, 일제의 식민지시대를 거치고, 6.25동란과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후반까지 경제적인 빈곤을 거쳐오는 동안 희망을 잃은 우리민족에게 소망을 심어주기 위해 내세지향적인 면을 무척 강조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에 대해서는 자연히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을 희석시키거나 바꿀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가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더라면 주님은 이스라엘을 먼저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는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롯유다와 같은 열심당원을 제자로 두시고도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시는 처소는 이스라엘의 독립이 아니라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빌라도 앞에 섰을 때에도 자신의 나라는 “이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천년만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100년 남짓 살고 인생을 마감합니다.
우리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고작 100년 밖에 되지 않은 삶을 보장하는 것일까요? 온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의 능력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삶에 국한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의 100년의 삶을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살 천국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자신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 나라를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때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주님 나라 임하시네~ 주의 날은 멀지 않았네
이제 일어나 주를 따르라 하나님 날 부르시네
세상은 아직 어둠속에 빛되신 주 보기 원하네
너는 일어나 빛을 발아라. 주님의 영광 네게 임했네
<신앙인의 죽음에 대한 간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주님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번 아니 만번을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양 사는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있습니다. 천국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계시는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진실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영생’입니다. ‘하나님나라’입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나라
2. 두 번째는 ‘권세’입니다. 즉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나라를 통치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세상의 권세는 정말 보잘것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권세는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는 온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는 권세일뿐 아니라 그 권세는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계속되는 권세입니다.
역사적으로보면 세상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를 누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초대교회때 네로황제는 로마를 불지르고는 기독교인들이 불을 질렀다고 거짓소문을 퍼트렸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된 소문으로 기독교인의 씨를 말려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왕성하게 뻗어갔습니다.
중국의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하에 자신의 세력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개인숭배를 강요하기위해 종교말살정책을 펼쳤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중국정부는 정부가 정식으로 인정하고 있는 삼자교회외에 그 어떤 기독교인들의 집회행위를 규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그렇게 하면 교회가, 하나님의 권세가 꺽일 줄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 삼자교회외에 수많은 지하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권세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감히 세상의 권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권세를 당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을 했다가 자신들이 오히려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무수히 보아왔습니다.
성도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권세였습니다.
우리주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놀라운 권세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우리의 삶의 전영역에 미쳐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풍랑을 만나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는 권세를 보여 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도 인생의 풍랑을 만나 두려움이 있을 때, 그 인생의 풍랑을 잠잠케 해 주실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병든 자도 낫게 하셨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던 맹인과 38년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던 병자와 심지어 이미 죽었던 나인성과부의 아들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고,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실 권세가 있으십니다.
그 질병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하시면 가능합니다. 그 놀라운 권세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길르앗에는 유항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렘8:22)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된 치료자가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치료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막케 잊어 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사실을 잊어버린 유다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께는 질병을 치유하실 권세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3. 세번째는 ‘영광’입니다. 물론 이 영광은 두말할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외에 그 어떤 것도 영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우상에게 돌렸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절하면서 그 헛된 것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도 헛된 것에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우리의 생각이 허망합니다. 마음도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에게 돌리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에 돌리고 있다는 말은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 절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헛된 것에 다 빼앗겨 버렸다는 말입니다.
우리주위를 돌아보면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도 마음을 세상의 것에 다 빼앗겨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빨리 예배마치고 결혼식장에 가야할텐데… 오늘따라 목자님의 설교가 왜 이렇게 길지”, “내일 아주 중요한 계약이 있는데 과연 성사가 될까?”, “이사가려고 집을 내 놓았는데 도대체 사람들이 왜 집을 보러오지 않는 것일까?” 등등,
예배드리는 이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이 엉뚱한 것에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뜨끔하셨나요? zz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 모두를 빼앗겨야 할텐데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고백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이사야 선지자는 이처럼 온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아멘’입니다.
아멘이란 단어에는 크게 4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확인과 기원과 충성과 헌신입니다. 이 네 가지 의미중 우리는 흔히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라는 기원의 의미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 그 모든 것이 그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멘’입니다. 오늘 주기도문의 제일 마지막이 ‘아멘’으로 끝나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사도요한이 역사의 종말을 고하는 계시록 제일 마지막에도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주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계22:20-21)으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가 주 안에서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가 주 뜻안에서 이루어 지길 원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의 제목이 주님께 향한 기도이길 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부터 주님께만 만족하는 나의 삶이길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내 것만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진 기도이길 원합니다.
아멘으로 화답한 성도님들께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인생 마지막도 ‘아멘’으로 끝나길 소원합니다. 역사의 종말에 ‘아멘’이라고 요한이 말한 것처럼, 기도의 마지막에 ‘아멘’이라고 말한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이땅에서의 삶을 다 살고 마지막 눈을 감을 때에도 ‘아멘’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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