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성경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장엄한 선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곧 기독교의 뿌리이며, 근원인 것입니다.
이것은 참 신비로운 사실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만물이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빛이 생기고, 하늘이 생기고, 그 하늘을 수놓는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하나님의 한 마디로 생겨납니다. 말씀이 허공에 메아리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조성됩니다.
우리는 생각도 못할 위대한 하나님의 지혜가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그런대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나름대로의 원리와 질서를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물이 순환하고, 대기가 흘러다니고, 큰 짐승부터 작은 곤충까지 나름대로 생명을 이어가는 기술과 능력을 소유하도록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수 천 억의 별들 중에서 은하계의 변두리에 있는 작은 태양계의 지구, 그리고 그 지구상의 50억의 인구 중에서 한반도 작은 땅의 서울, 혹은 부산이라는 한 지역에서 수 백만의 사람들 중에 이름없이 살아가는 ‘나’... 그런 내가 때로는 10명 중에서 혹은 100명 중에서 성적이 앞서고, 기술이 뛰어나다고 잘난체 하며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벌레스런 인생인지...
우리는 감히 고개들 수 없는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앞에 자신을 구원하거나, 보살펴 달라는 말조차 함부로 꺼내기 힘든 위축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나’를 온 우주보다 더 귀하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한 번 효도한 적도 없고, 일평생을 살아도 별로 유익된 일 하나 하지도 못하는 나를 이유도 없이, 조건도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성적은 뒤떨어져 서울대는 바라보지도 못했고, 돈버는 기술도 없어 매일 소비적인 인생을 살아왔으며, 육신의 부모조차 마음편하게 순종하며 모시지 못하고 욱하는 성질에 속상하게 만드는 동물적인 우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사랑이 오늘, 하늘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보잘 것 없는 목수의 아들로 내려와서 마치 갓태어난 자식에게 엄마와 아빠라는 말을 가르쳐 주시듯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기도의 시작과 내용을 가르쳐 주시는 지극한 사랑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배마다 고백하는 주기도문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기도에 있어서 첫 번째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 기도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몇 가지 기본적인 지식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본문의 ‘양식’은 ‘알톤’이라는 헬라어를 해석한 것인데 이는 유대인의 주식이었던 빵을 나타낼 뿐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필요한 일련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양식’은 단지 우리말로 ‘쌀’을 구하는 것뿐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는 기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둘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이라는 말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에서 ‘날마다’라는 말이 쓰인 것처럼 하루에 적당한, 최소한의 것을 구하는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우리가 결코 세상에 많은 것을 욕심내는 인생을 살아서는 하나님과 옳은 관계를 가질 수 없으며 최소한의 것이 있을 때 만족한 것으로 여기고 감사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잠언 30:8,9절의 말씀에는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잠 30:8-9) 『[8]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셋째로 주기도문은 통시(通時)적인 관점에서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려 달라는 기도가 우리의 과거를 위한 기도이고,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가 우리의 현재를 위한 기도라면, 다만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기도는 우리의 미래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 안에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드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본문의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짧은 기도 속에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이해와 쉽게 자만하거나 망각하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본문이 알려 주시는 몇 가지의 교훈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 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밥상에 앉아서 반찬의 가지 수를 가지고 불평하는 사람은 그 밥상이 자기 앞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땀이 있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밥 콕이라는 사람이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떡의 배후에는 방앗간이 있고, 방앗간의 배후에는 농부의 수고가 있고, 그 배후에는 미풍과 비와 해가 있고 그 배후에는 이 땅의 아름다움이 있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양식의 주권자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밥을 먹으면서 밥만 생각하지 말고 밥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오히려 밥보다 중요한 영적인 양식에 눈떠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게 될 때에, 우리의 모든 양식이 줄 수 없는 마음의 평강과 쉼을, 그리고 기쁨을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이 ‘양식’을 세 가지 의미의 떡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육체를 위한 양식과 정신을 위한 양식과 영혼을 위한 양식이 그것입니다.
하루의 힘을 노동으로 소모하고나면 우리는 육체의 건강함을 위하여 좋은 음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건강하게 하기 위하여 좋은 인간관계와 책과 음악의 감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다고 할지라도 우리 마음에 찾아드는 우울과 갈등, 왠지 모를 불안과 초조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영적인 가치가 필요합니다.
본문의 기도는 이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나’만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만 잘먹고 잘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향한 세 가지 청원에서 모두 ‘우리’라는 말씀을 반복하셔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독단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함께 화목하며 서로 같이하는 ‘우리’의 삶인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 하나님과 나와의 개별적인 것이라고 단언한 나머지 산속의 기도원에 들어가 평생을 기도만 하면서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앙인에게 세상속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우리’를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양식이 그득하다고 만족하며 웃을 것이 아니라, 우리 중에 누군가의 양식이 핍절하지 않았는지 살피는 겸손과 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8은 우리가 돈을 벌어야 하는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각기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하여 살아갑니다. 차를 바꾸고, 더 넓은 집으로 옮기고, 해외여행을 가고, 쇼핑과 레포츠로 여가를 즐깁니다. 그리고도 남으면 자기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곰팡이가 피도록 쌓아둡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부름받았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주기도문을 드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긴장된 삶의 자세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의 평생 먹을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을까요?
일생에 한 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인데, 이왕이면 제자들과 그 이후에 믿어 이 기도문을 대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평생’을 보장하는 기도를 해주시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감당할 우리의 그릇에 있습니다.
우리가 먹어 배부르게 되면 하나님을 망각하고 점차적으로 옳은 길을 벗어나 타락할 수 있는 소지가 많은 체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니라,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에 피를 타고 흘러온 죄의 유전적인 특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저의 주위에서 보아도, 돈을 벌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관계와 가정을 망가뜨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하루하루 긴장된 노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축복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허왕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하루 땀흘려 일해서 가족을 부양할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고 감사하는 태도로 살아가면 그 하나님이 결코 굶주리거나 망하게 하시지 않고 일생을 보장하실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육신의 양식 때문에 다소 긴장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삶에 양약이 되어서 영적인 믿음과 겸손함을 배우게 하는 기회가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넷째, 이 기도 안에는 한없는 축복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한정된 얼마의 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살아가기 때문에 1공기의 쌀이면 하루가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100사람을 책임지기 때문에 1가마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수 만 사람을 책임져서 수 천 가마의 쌀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기도에는 한계점이 없습니다. 자기만을 위할 때에는 궁색한 지경이지만, ‘우리’의 범주를 넓혀가면 넓혀갈수록 이 기도 안에 있는 축복의 가능성은 무한한 것입니다.
스위스에서 수 천 명의 고아들을 길러낸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기도의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일생동안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5만번이나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날, 고아들과 먹을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그가 운영하는 고아원은 2차대전 이후의 어려운 여건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늘상 그런 한계점에 도달할 때가 무척 많았습니다.
그는 이 어려움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모든 원생들을 식당으로 모았습니다.
빈 접시를 식탁에 차려놓고, 포크와 수저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이들과 함께 눈을 감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그 기도가 끝났을 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마을의 빵장사가 빵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아침부터 빵을 굽는데, 자꾸만 ‘고아들에게 한 번쯤은 빵을 가지고 가야 할텐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아서 견딜 수 없어 그 아침에 구운 빵을 모두 가지고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우유배달부가 들어왔습니다. 우유를 가득 싣고 이웃마을로 배달을 가다가 마침 고아원 앞에서 차가 고장이 났는데, 쉽게 차를 고치지는 못하겠고 시간을 더 허비하면 우유가 다 상해서 못먹을 것 같아서 이왕이면 고아원에 기부나 하려고 들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아들은 감사의 기도대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풍성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의도하는 풍성함은 결코 자기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일,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고 풍성하기를 구한다면 얼마든지 풍성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찬의 풍성함이 세상적인 풍성함과 다른 것은 바로 보람이 있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사랑이 있고, ‘우리’를 향한 기도 속에서 풍성하여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경을 넓혀 가십시오. 손을 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을 의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당당하게 그 많은 ‘우리’를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구하십시오. 밀린 인건비와 가정을 꾸릴 생활비를 하나님께 청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오늘은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에 대한 청원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기도가 형님의 생활 가운데서도 그대로 이루어져서 항상 주님께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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