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이혼을 허락하였는가?(고전 7:1-16 연구)
1.들어가는 말
성격적인 이유나 재정적인 이유, 혹은 외도와 같은 이유 등 다양한 이유로 이혼율이 세계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이혼에 관한 성서적 이해를 살펴보려는 본 연구는 이혼은 해서는 안된다거나, 해도 좋다는 그리스도교적 윤리적인 기준을 제시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에게 이혼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다가온 것은 이혼이 증가하고 있는 사회의 상황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미국에서 신약학으로 학위를 하고 돌아온 모 박사의 지나가는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이 이혼금지를 선언했고, 바울이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혼을 가능한 것으로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과연 바울은 교회 안에서 이혼은 가능한 일이라고 했을까? 이혼에 관한 신약성서의 언급으로는 막 10:1-9에 나타난 예수의 견해와 그 외에는 고전 7장의 바울의 견해가 대표적이다.
바울이 예수와는 달리 이혼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견해는 바로 고전 7:15에서 “믿지 않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문제의식을 갖고 고린도전서 주석들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국내와 국외 모든 학자들이 김지철,고린도전서(성서주석 38),대한기독교서회,1999, 박익수, 누가 참그리스도인인가, 대한기독교서회, 2000, 전경연, 고린도서서신의 신학논제,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144-145; W. Schrage, 1 Kor. (EKK), 1995, 88-128; F. Lang, Kor.(NTD 7), 1986, 87-95; H. Conzelmann, 1Kor.,1969(1981), 150-157; J. Weiss, 1Kor. (KEK), 1910(1076), 176-183; Orr/Walther, 1Cor.(Anchor Bible), 1976, 210-214; Barrett, 고린도전서, (국제성서주석), 한국신학연구소 1985, 187-203; A.C. Wire, The Corinthian Women Prophets, 1990, 82-86.
예외 없이 이 구절을 고전 7:12-13절과 연결시켜 그의 역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7:10-11은 그리스도신앙인들 사이의 이혼과 재혼에 관하여, 7:12-16은 부부 중 한 사람만이 신앙인일 경우에 관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남편과 아내가 둘다 예수 믿는 신앙인의 경우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이혼해서는 안되고, 둘 중 한 사람만 신앙인의 경우는 파트너의 의지에 따라 믿지 않는 파트너가 함께 살기를 원하거든 이혼해서는 안되고, 반대로 믿지 않는 파트너가 이혼을 원할 때에는 다투지 말고 이혼을 해주라는 식이다. 즉 이혼이란 주제에 대해 바울의 가르침은 믿는 자들이 이혼을 주도해서는 안되고, 믿지 않는 파트너의 의지를 따르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신앙인은 이혼을 리-더해서는 안되지만, 파트너가 원하면, 이혼을 당해줄 수는 있다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바울이 그런 의미에서 7:15을 표현했을까? 믿지 않는 파트너의 원함에 따라 이혼 여부가 결정되어야 한다고 바울이 가르치는 것이라면, 고린도 교회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 의심이 생겼다.
바울이 편지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데에는 이유 없이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 상황과 함께 사도 바울의 견해와 조언을 요구하는 현실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 마땅할 것이다. 과연 바울이 고전 7장에서 혼인한 부부들에게 혼인생활에 대해, 이혼에 대해 조언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서는 경전이라는 이유에서, 사람들은 성서에 왜 이런 말이 쓰여졌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서에 접근하기보다는, 성서에 뭐라고 쓰여 있나 알아보기 위해 찾아보고, 여기 이렇게 쓰여있다고 지적하는 방식으로 성서를 배우고 가르쳐왔다. 그 결과 고전 7장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이러한 것이다: 바울은 금욕주의자이며, 금욕이 더 가치있는 일이고, 혼인은 정욕이 불같이 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필요악이다, 그러므로 독신생활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더 유익하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카톨릭 교회에서 신부와 사제에게 독신을 제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관련된 성서 구절들을 열거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7:1)=독신생활이 좋다, 그러나 음행 때문에 혼인을 해야한다(7:2);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독신생활 하기를 )원하나(7:7-8), 성욕을 절제할 수 없는 사람은 혼인을 하도록 하라”(7:9);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 . .”(7:32-34) 등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일까? 바울이 독신생활과 혼인생활 중에 어떤 것이 더 고상한 삶이라고 가르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교인들의 부부생활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 지 혼인생활의 원론적인 가르침을 하기 위한 것일까?
오늘의 주제를 위해 고전 7장 15절의 “믿지 않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는 바울의 말이, 믿지 않는 파트너의 의지에 따라 이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고 가르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인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생긴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2. 고린도교회의 문제 상황: 남편은 안 믿는데, 아내 혼자만 그리스도인이 된 경우이다.
2.1. 부부생활에 관한 원칙론적인 언급과 그 이유(고전 7:1-9)
바울이 편지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온 후에 그 공동체를 향해 편지를 보내는 데에는 분명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다. 이유 없이 쓰는 글이란 없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생긴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고전 7:1에 “여러분이 적어보낸 글에 대하여”라고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 바울에게 무슨 문의가 간 것이 분명하고, 이 문의에 대해 바울이 답변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7장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적어보낸 글의 내용이 무엇인지 쉽게 파악할 수는 없다. 더욱이 7장 1절 하반부에 나오는 표현으로는 더더욱 모호하기 짝이 없다: “남자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 글은 마치 남녀칠세 부동석이란 유교의 가르침을 대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사실 기독교 역사에서도 바울이 금욕주의자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바울이 왜 이 표현을 쓰고 있는 지 아직은 명확하기가 않다.
문제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바울의 편지의 흐름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바울은 혼인한 부부간에 지켜야 할 원칙을 제시한다. 혼인을 한 이상 남편과 아내는 서로 상대에 대해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남편은 아내와 자녀들의 부양에 대한 의무, 아내는 남편을 보필하고 자녀들을 양육할 의무가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부양과 보필의 의무라는 경제적인 의무보다는 성적 파트너로서의 성실한 의무를 말하고 있다. 이는 2절에서 혼인의 기본적인 이유와 성생활과 관련된다는 것을 밝힌 것과 4절에서 의무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서 몸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아내와 남편의 관계만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는 아무리 남편과 아내 사이라 하더라도 한 파트너가 의사가 없을 때 강제로 성행위를 하려고 해도 강간에 속한다고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파트너가 원할 때 응해주는 것이 부부간의 도리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부부간의 의무에 대한 원칙론적인 발언 만으로는 고린도교회 안에 생긴 구체적인 문제를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힌트를 주는 것은 5절에 “서로 상대방을 혼자 지내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는 권면이다. 즉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 혼인한 사람들 중에 파트너를 혼자 있게 하는 사람이 있다, 다시 말하면, 파트너가 원하는데도 싫다고 주장하면서 동침을 거부하는 경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도대체 고린도 교인들 중에 누가, 어떠한 이유에서 그러는 것일까?
7:7-9은 7장 2절과 함께 이제까지 바울이 독신을 선호하고 혼인은 정욕이 불같이 타오르는 사람이나 하라는 식으로 해석되어온 구절이다. 그래서 독신은 고상한 삶이고 혼인은 열등한 삶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독신이 더 나은 삶인 것처럼 언급하는 이유는 고린도교회에서 이혼을 하고 혼자 살겠다고 하는, 독신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고려하고 하는 말이다: ‘그래, 혼자 살면 좋겠지요. 지금 혼자 있는 미혼자나 과부들에겐 나처럼 혼자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혼인한 사람들은 혼인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따? 다른 관계와는 달리 부부관계의 차별성은 성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혼인을 안했으면 모르지만, 혼인한 이상은 파트너의 성적 욕구를 배려해야만 합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2.2.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힌트를 주는 것은 고전 7:10이다.
앞서 부부간의 의무를 말할 때(3-4절)에는 남편-아내를 매우 대등하게 언급한 반면, 이혼을 금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매우 급속하게 아내에 대한 권고 사항을 사정없이 강경하게 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지 마시오”. 바울은 감정을 절제하고 남자와 여자를 공평하게, 쌍방을 향해 권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긴박한 발언이 나갔던 것이다.
필자는 고전 7:1-16(아니 더 나아가 24절까지)의 내용은 바로 교회 안에 기혼여성들 중에 이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곤란함을 느끼는 고린도교회의 문의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라고 본다. 아내가 원할 때 싫다고 거부하는 남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혼인한 남자가 아내를 혼자 두는 일도 별로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의 경우, 여자들이 그러는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2.3. 세례를 받음으로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자기 이해(고전 6:11)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교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새롭게 가진 자기 이해를 알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6:11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와 함께 새로운 피조물됨을 경험하였다. 이 구절이 바울이전 전승으로서 세례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은 U. Schnelle, Gerechtigkeit und Christusgegenwsrt, 1982, 37-44 참조. P.Kim, Heilsgegenwart bei Paulus. Eine religionsgeschichtlich-theologische Untersuchung zu Suendenvergebung und Geistgabe in den Qumrantexten 내쟏 bei Johannes dem Taeufer, Jesus und Paulus, Diss. 1996, 68-76.
이 구절이 세례와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부사구와 “씻음을 얻었다”는 동사가 말해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이 구절은 과거와 달라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피조물됨을 씻음을 얻었다, 거룩함을 얻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세 가지 동사로 표현하고 있다. “씻음을 얻었다”고 번역된 그리스어 아폴뤼에스타이는 세례 전통에서 유래된 말로서, 그리스나 유대교의 정결 예식 전통에 서 있는 말이다. 그리스나 유대교의 정결예식이 반복적인 데 반해, 신약성서는 세례 때에 일회적인 죄용서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씻음”은 새로움과 내용상 같은 말이다. “거룩함”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온전함, 접근불가능성을 표현하던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에 대한 형용사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유대문헌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 공동체에 대한 형용어로 “거룩한 사람들”이란 표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단 7:21; 토 8:15; 막상 1:46; 1QSb 1,5; 1QM 6:6). 바울에게서 “거룩함”이란 표현은 세례와 관련되어 있다.
이 구절이 세례와 관련된 말이라는 것은 “씻음을 얻었다”는 표현 외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라는 부사구로도 알 수 있다. 세례요한의 세례나 쿰란 -에세네 공동체의 침수예식 쿰란공동체의 침수예식과 세례요한의 세례의 공동점과 차이점에 대해서는 H. Stegemann, Die Essener, 1993, 306-307 참조.
에서 그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던 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면서 세례받는 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킨 것같다(고전 1: 13 참조). W.Heitmueller, 'Im Namen Jesu'. Eine sprach- und religionsgeschichtliche Untersuchung zum Neuen Testament, speziell zur altchristlichen Taufe, 1903,
마태복음에 나오고 오늘날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일(마 28:19)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주는 세례보다 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이 세례와 관련된 구절에서 나온다는 것은 세례 때에 하나님의 영이 작용한다는 이해가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세례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이때 작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교에서 구원받을 의인들이 받을 구원 은사 중에 “성령 수여”가 있는데, 이 구절이 세례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이 수여되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와 함께 그들이 죄로부터 씻김을 받고, 거룩하여지고 의롭다함을 받은 존재들로 이해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가부장 사회에서 가정의 대표인 가장인 남자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경우 그에게 속한 아내와 자녀, 노예까지도 세례를 받게 했을 것이다. 빌레몬서의 경우 빌레몬 가정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이 예수를 믿고 세례받을 경우는 그 가정에 속한 모든 사람들, 즉 아내와 자녀, 노예 모두 그리스도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가정 내에서 무슨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적은 것 같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문제이다. 즉 문제되는 것은 남편은 믿지 않는데, 아내가 우연히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듣고 예수 믿기로 하고 세례를 받았을 경우이다. 이러한 세례신학 의해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가진 여자가 자기는 거룩하여진 몸, 성령을 받은 몸인데, 그렇지 못한 남편과 성생활을 함으로써 다시 더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혼을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상황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토대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남편이 믿지 않고 아내 혼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경우, 그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믿지 않는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생긴 문제이다. 그러나 실제로 혼인한 여자가 남편의 성적 욕구를 거부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게다가 만일 예수 믿고 세례받기 전에 부부관계가 좋았던 부부일수록 남편의 성적 욕구를 거부하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므로, 여자들이 이혼할 의사를 밝히는 것이다. 당시 여자가 이혼을 소송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유대여자라면 전혀 그럴 권한이 없다. 이혼권은 남자만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교인들이 대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고전 5:2; 12:2 참조)을 고려할 때 여자들이 이혼을 제기하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무리가 없는 가설이다. 로마사회에서는 이혼을 제시할 수 있는 권한이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혼 사유가 남자와 여자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가이거, “신약성서주변세계에서의 이혼 여성의 위치”, 원시그리스도교의 여성, 윤선아 역, 분도츨판사 1992, 176.
오늘날은 여자가 이혼을 할 때 위자료나 자녀 양육비, 재산 분할 청구권 등을 제기할 수 있다. 당시에도 이런 권한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별로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과거에 여자들이 혼인 생활에 불만이 있어도 이혼하지 않았던 것은 사회적인 편견뿐만 아니라, 가장 구체적인 이유는 재정적인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남편이 포악하고 외도를 심하게 한다해도 이혼을 원치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이유는 여자들이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4.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는 성가족 공동체(고전 8:6) 고린도전서 7장을 쓰게 된 동기를 찾아 보려고 시도한 최근 연구로는 J.D. Gordon, Sister or Wife: 1Corinthian 7 and Cultural Anthropology, Scheffid 1997를 지적할 수 있다. 고전 8:6에 근거하여, 이전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였던 사람들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형제와 자매의 관계로 변함으로써 오는 혼란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은 무엇을 믿고 이혼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오늘날처럼 당시 이혼을 청구하는 여자가 남편으로부터 이혼 후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재정적인 부담을 요청할 수 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결혼지참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것 뿐이다. 가이거, 앞글, 175-176.
특별히 이 고린도 교회의 경우는 남편이 외도를 하였다거나 그외 가정에 대해 소홀히 했거나 하는 사유에 의해서 이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아 거룩하여졌다는 의식을 가진 여자들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때, 남편으로서의 허물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은 미래 자신의 생계 문제나 노후 대책과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고려하는 것은 다만 자신의 새로운 피조물됨, 세례로 인해 획득된 거룩성을 유지하려는 욕구 뿐이다. 그들이 남편으로부터 놓여져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직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즉 고린도교인들은 당시 매일 저녁 만찬을 나누었다. 교회에서 매일 하는 공동식사를 믿는 것이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만 먹으면 목숨은 유지 할 수 있다.
콜만은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매일 저녁 하루 일과가 끝나면, 지역공동체의 부유한 집에 모여 함께 공동식사를 했다고 본다. B.Kollmann, Ursprung und Gestalt der fruehchristlichen Mahlfeier, Goettingen 1990.
저녁일과가 끝나는 시간이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에 대해 바울은 고전 11:18이하에서 “기다리라”고 조언한다. 공동식사는 오늘날의 성만찬처럼 빵 조각 하나에 포도주 한 모금이 아니라, 배가 부르도록 먹고 흡족하게 마시는 식사였다. 고린도교회 뿐만 아니라 그외 다른 초기 공동체들도 이러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기대되지만,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고린도에 이러한 식사가 있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들이 매일 공동식사를 실천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는 고전 8: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거룩한 성가족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 공동체의 멤버들은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며 공동식사를 통해 그들의 이념을 실천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공동체 허입예식으로 시행되었고, 공동식사는 멤버들의 가족공동체의 실천이란 점에서 이루어졌다고 몰 수 있다. 고린도전서 7장이 쓰여진 이유는 세례와 공동식사의 신학적 이해에 근거해서 새로워진 자기이해를 갖게 된 기혼여성들이, 기존 부부생활의 이념,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이념과 충돌하면서 생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즉 남편이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 부인 혼자만 세례받아 그리스도인인 경우에 발생한 문제라고 몰 수 있다. 고전 7:12-16의 사례 언급이 교회 상황의 구체적인 상황을 말해준다.
3. 바울의 해법
3.1. 부부생활의 특징과 의무(7:1-9): 성생활에 성실하십시오
고린도교회 안에 생긴 문제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졌던 세례 이해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고전 7장의 바울의 표현이 상당부분 이해가 된다. 남편은 아직 안 믿는데 부인 혼자 예수 믿고 세례를 받은 기혼 여성들의 생각이 잘못 되었다고 강하게 나무라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그들을 잘 회유하여 교회 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큰 무리가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 7:1-9의 표현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바울의 의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어디 그러기가 쉽습니까?(1절) 모두들 성적 관심이 있기 때문에 혼인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혼인을 했다는 것은, 다른 모든 인간관계와는 달리 성적인 관계인 것입니다(2절). 그러니 혼인한 사람들은 파트너의 성적 관심을 고려해야 합니다(3-6절), 여러분이 미혼이거나 과부라면, 나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하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은 혼인을 한 사람들이 아닙니까?(7-9절)
3.2. 주의 말에 의지한 바울의 권면: 이혼하지 마십시오
바울이 지상에서 활동하던 예수를 만났다거나, 그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거나 하는 직접적인 교제는 없었다는 것이 성서학자들과 역사가들의 입장이다. 실제로 공관복음서에 전하는 많은 예수의 말들을 바울서신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의 지상의 예수를 몰랐고, 예수의 위대한 가르침에 감동받아 예수를 따른 것도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중 기적적인 일로 돌아선 사람이다. 바울이 지상의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직접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혼 금지에 관한 예수의 입장은 당시 널리 유포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말로 직접 가르치는 것보다 주님의 명령을 제시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했던 것같다.
3.3. 고전 7:17 이하의 언급이 고전 7:1-16에 주는 효과(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원칙): 그대로 지내시오.
이혼과 관련해서 바울이 7:16절로 권면을 일단 마무리한 다음 17-24절에서 “각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권면한다(7:20). 이제는 이혼이란 주제의 주인공인 남자와 여자라는 카테고리를 넘어, 할례자와 무할례자, 종과 자주자의 카테고리로 범위를 넓히고 있으나, 바울의 주장은 모든 카테고리에 같은 것을 적용시킨다: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4). 여기 언급되고 있는 두 카테고리는 갈 3:28절을 연상시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할례자나 무할례자, 종이나 자주자, 남자나 여자 없이 하나니라”, 고전 7:17-24의 권면은 문맥에 따라 할례자나 무할례자, 종이나 자주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혼하고자 하는 기혼여성들을 고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믿고 세례받을 때 기혼인 사람은 기혼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7:25절 이하의 권면이 많은 주석서와 연구서에는 미혼자와 과부에게 주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고전 7장에서 주안점은 결코 미혼자나 과부가 아니다. 이 구절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그대로 지내라”는 것이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혼인이고 이혼이고 그런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7:27-28, 36-38), 혼인을 한 이상은 남편을 위해 신경을 좀 쓰시오(32-34)’이다.
7장을 마감하는 말로써 제시하는 39-40절에서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며, . . .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는 표현에 의거해 볼 때도 파트너가 원한다면 이혼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울이 가졌다고 보기가 어렵다.
4. 바울이 이혼을 금하는 이유
4.1. 교회 외부인들의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고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다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혼신을 다하는 바울에게 ,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며 형제애를 나누며 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고전 8:6)가 대견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세상에 있으나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자들이다. 바울은 당시에 유포된 세례에 대한 이해를 받아들이고 가르쳤다.
고린도인들 중에 기혼여성들이 세례 신학에 근거해서 믿지 않는 남편과 부부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이혼을 하려는 문제 앞에서 바울은 쉽게 허락해 줄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거룩한 공동체가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 않기를 바랬던 것 같다. 자신이 세례로 인해 거룩하여 졌으므로, 아직 거룩하지 못한 남편과 동침할 없다는 이유로 이혼을 한다는 것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해 줄 수 없는 문제이다. 예전부터 부부사이가 나쁜 부부였다면, 문제가 적을른지 몰라도, 부부사이가 좋았던 사람이 어느날 예수 믿고 세례받은 이후로는 남편을 거부한다면, 그 남편부터 예수 믿는 이 집단이 어떤 종교집단이기에 남편을 거부하게 만드는가 하고 참으로 이상한 집단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예수 믿으면, 부인이 남편을 거부하고 결국 가정 파탄난다는 선입견으로, 아내가 그 집단과 접촉할 기회를 막으려고 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고, 결국 복음전하는 데 막대한 지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오래 지탱하기 어려운 종교로 절락할 것이다.
4.2. 교회 내부에서 생길 질서 와해와 재정적인 부담의 위험성 고려
기혼녀가 세례신학에 근거하여 이혼을 했을 경우, 성생활에 전혀 관심이 없으면 몰라도, 대부분은 세례받은 남자 교인들, 즉 형제들 안에서 관심을 갖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시 문화로 볼 때 기혼 남성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다면, 그에게 속한 아내와 자녀, 노예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거룩한 남성들은 대개 기혼자거나, 여성보다 수가 매우 적었다고 볼 수 있다. 믿지 않은 남편을 가진 아내가 이혼을 하여 혼자 되었을 때에 교회 안에서 불미스런 일들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질 것을 바울은 염려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이루어졌던 공동식사는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으로 모인 성가족의 실천이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장만하고, 어려운 사람은 각자 준비할 수 있는 분량을, 아주 어려운 사람은 거저 와서 먹을 수 있는 식사였다. 만일 여성들이 이혼을 할 경우, 당시 문화로는 여성이 홀로 경제 생활을 수행하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혼 여성이 늘면, 교회에서 부담할 재정적인 부담이 더욱더 커질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고린도서신보다 30여년 후에 쓰여진 목회서신을 보면 이러한 문제가 교회 안에 생긴 문제 중 큰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딤전 5:9-16 참조).
5. 고전 7:15의 해석 가능성에 관하여
5.1. 문맥상
고린도교회에서 생긴 문제와 이에 대해 바울이 염려하는 내용을 고려해 볼 때 바울이 이혼을 어떤 이유로도 이혼을 허락했으리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이 이혼을 허락했다고 주장하는 모든 주석들과 해석들이 고전 7:15절을 그 단서로 잡는다. 놀랍게도 기존의 모든 주석서들과 바울 해석서 그 어떤 것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된 동기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고전 7:10-16절의 내용을 그 쓰여진 글에 따라 다음과 같은 제목을 붙인다: “상이한 그룹들(미혼자들과 과부들, 혼인한 사람들, 불신자와 신자의 혼인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바울의 권면”(김지철, 박익수,전경연, Schrage,Lang, Conzelmann, Weiss, Orr/Walther, Barrett). 이러한 해석의 오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겠다.
1) 그러나 이 구절은 서로 상이한 세 그룹에게 주는 권면이 아니다. 7장 8절은 미혼자와 말한다고 시작하지만, 그 권면은 미혼자와 과부에게 주는 권면이 아니라 이혼을 하겠다고 주장하는 부인들에게 주는 권면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나처럼 그냥 독신으로 지내시오”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들이 나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 좋습니다”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혼인한 사람들에게 주는 주님의 명령은 10-11절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10-16절까지 모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혼인한 사람들이란 표현이 둘다 그리스도인인 부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다. 12절 이하에서 바울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가 말한다고 표현한 것을 근거로 하여, 10-11절은 주님의 명령, 12절 이하는 바울의 권고, 10-11절은 그리스도인 부부에게 주는 말, 12절 이하는 한쪽 만 믿은 부부에게 주는 말로 보는 것은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해석에 불과하다.
10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혼인한 사람들에게 내가 권고합니다, 아니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아내는 남편에게서 갈려서는 안됩니다. 11절은 부가어처럼 표현된다: 그러나 만일 갈렸다면, 혼인하지 말고 그대로 있든가, 아니면 남편과 화해하시오. 바울에게 주님의 말씀은 이혼 금지뿐만 아니라, 이미 이혼한 사람의 재혼 금지까지도 포함한다.
3) 그러므로 “12절에 ”남은 사람들(토이스 로이포이스)“이란 표현의 해석이 문제가 된다. 바레트틑 이 어휘의 해석을 문제로 삼았지만, 더 이상 논구하지 않고 다른 모든 주석자들과 같이 10-11절이 았다. 바레트, 고린도전서, 198-199.
대부분의 학자들이 남은 사람들을 그 다음에 이어지는 바, 부부 중 한쪽만 신앙인의 경우라고 보고 있지만, 이 또한 작위적인 해석이다. 10절의 이혼 금지 규정에 관한 예수의 발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하다. 쌍방이 믿는 경우만, 주님의 명령이 유효하고, 한쪽 만 믿을 경우는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울이 권고한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 논리이다. 남은 자들이란 ”혼인한 사람들에게(10절)에 대립되는 말이 아니라 11절에 “만일 갈라졌다면”의 대립어로 이해해야 한다. 즉, 남은 사람들이란 아직 갈라서지 않은 사람들, 이혼하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이혼한 사람은 주님의 명령대로 재혼하지 말고 혼자 있거나, 아니면 남편과 화해해야 하고, (아직 이혼하지 않은,) 남은 사람들에겐 , 내가 - 주님처럼 강경하지 않게 - 다음과 같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12절과 13절의 표현을 살펴보면, 형제(남자신앙인)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는데, 그녀가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그녀를 버리면 안됩니다., 또 어떤 아내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데, 이 사람이 그녀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그 남편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이 두 구절은 형제와 자매가 대칭이 되었다면, 믿지 않는 아내를 가진 남자교인과 믿지 않는 남편을 가진 여자교인을 향해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구절이 조건절로 되어 있기 때문에 믿지 않는 파트너의 의사가 이혼을 하느냐 혼인생활을 계속하느냐의 관건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믿는 남자에게 믿지 않는 아내의 경우는 현실에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앤와이어가 관찰했다. 원시그리스도교의 잊혀진여성들, 조태연 역, 대한기독교서회2001, 58.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가부장이 믿고 세례를 받을 경우, 아내를 비롯한 모든 가족 구성원이 세례를 박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2절은 문제의 장본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려는 바울의 배려 차원에서 쌍을 이루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실제 고린도교회의 문제 상황은 13절이 말해준다. 믿는 여자 성도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을 때, 예전부터 부부사이가 나쁘다면, 세례받은 후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부부관계를 거부한다해도 큰 문제나 갈등의 요소는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에전에 매우 부부애가 좋았던 부부가 아내 혼자 예수 믿고 난 후의 갈등인 것이다. 그러니 남편이 부부애를 나누며 함께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더욱 고민하는 것이다. 조건절로 되어 있는 이 구절은 이혼 사유의 근거가 믿지 않는 남편의 의지에 달린 것으로 해석할 가능성을 제공해 주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13절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을 쓰게 된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혼하지 말 것을 권면한다. 사실상 주님의 명령과 같은 것을 제시한다. 그 이유는 믿지 않는 남편도 이미 거룩하여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4절). 그리고 아직 믿고 세례박지는 않았지만, 그도 거룩하여졌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자녀가 거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여자가 남편과 함께 세례받지 않고 혼자 자의에 의해 세례를 받았을 경우, 자녀도 함께 세례받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녀는 부모가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 자녀가 거룩하다는 것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거룩하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16절도 역시 이혼하지 말 것을 권하는 설의법적 질문이다. 아내된 자여, 당신이 당신의 남편을 구원할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라는 질문은 이혼하지 말고 그가 구원받을 때까지 참고 인내하라는 권면이다.
그러므로 15절은 믿지 않는 사람이 함께 살 의지가 없으면 이혼해도 좋다는 식의 해석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울의 의도에 합당한 것일까?
5.2. 문법상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 헤어지려고 하면, 헤어지게 하십시오.”(표준새번역)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표준새번역이 15절을 12-13절과 대비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번역한 반면, 개역의 번역은 보다 객관적으로 헬라어 본문을 잘 살렸다고 볼 수 있다. 개역에는 해석이 가미되어 있지 않다. 헬라어를 직역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4절과 16절을 고려해 볼 때, 15절이 없어도 바울이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은 충분히 거론한 셈이다. 그리고 모든 주석에서 제시하고 있는 바, 믿지 않는 파트너의 의지에 따라 이혼을 할 수도 있다는 해석은 15절이 없더라고 12-13절을 반대로 유추해서도 가능한 해석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두 구절에 조건적인 뉴앙스가 없잖아 있지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파트너가 이혼을 원한다면 이혼해도 좋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15절을 쓸 필요는 없고, 그렇게 해석할 경우 14절과 16절의 이유가 무색해지기 때문이다.
15절은 바울이 예수와 마찬가지로 이혼 금지에 관한 권면을 하고 나서, 혹시 이들이 이혼을 금하는 주님의 가르침과 바울 자신의 가르침을 교인들이 확대해석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까지 적용하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이혼 문제에까지 관여하지 말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근거로 첫째, 이 문장에서 믿지 않는 자(호 아피스오스)가 주어이다. 아피스토스(apistos)가 가리키는 명사가 없이 절대적 용법으로 언급되고 있다, 둘째, 코리제타이(xorijetai)라는 동사는 나누다(코리조 xorijoo)의 수동태형으로 갈리다는 의미를 지닌, 이혼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혼을 나타내는 말로 세 어휘가 사용되고 있다: 고린도전서에는 코리조(xorijo-나누다, 가르다의 의미가 강함)(고전 7:10, 11, 15; 마 19:6; 막 10:9)와 아피에미(aphiemi 용서하다, 혼자 남기다, 떠나다)(고전 7:11, 12, 13), 그 외에 복음서 전승에서는 아폴뤼오(apoluo-풀다, 해체하다)(마 5:31,32; 19;3,7,8,9; 막 10:2,4,11,12)도 사용되고 있다.
셋째 이러한 일들에(엔 토이스 토이우토이스)라는 표현은 그 앞의 문장을 모두 받아, “믿지 않는 자의 이혼 문제들”로 보아야 한다. 넷째 하나님이 너희를 평화 안에서 불렀다는 표현은 “믿지 않는 남편이 이혼하자고 할 때,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이혼해 주시오”라고 해석해 왔지만, 이 구절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이혼 문제에까지 관여하여,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리며 분쟁을 일으키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이 교회 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언하다가 교회 외부의 사람들을 의식하며 교인들에게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음행하는 자를 사귀지 말라는 뜻은 교회 안에 음행하는 자를 두지 말라는 뜻이지, 교회 밖의 음행하는 자들과 교제를 일체 끊으라는 말이 아니다: 고전 5:9-10 참조).
6. 결론
세례와 공동식사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상적, 실천적 기초를 이루며 시행되었다. 세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멤버쉽을 주는 예식으로 이루어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줌으로써 세례받는 자와 그리스도의관계를 맺어주고, 예전의 삶과 달라졌다는 것을 선언해 준다. 세례받은 사람은 “주 예수”를 외침으로써 새로운 주인인 예수를 부르게 된다. 과거의 주인이 남편이고, 상전이었다면, 세례받아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주인은 예수이고, 주 예수를 부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형제요 자매의 관계이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이혼이 거론된 이유는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졌던 세례이해(세례를 통해 거룩하여졌다)와 기존의 부부 이념(부부는 일심동체)이 충돌하면서 생긴 문제이다. 예수 믿고 세례받은 부인이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남편과의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는 주장 앞에서 바울은 이혼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혼의 사유가 된다면, 교회 외부인들로부터 받을 평가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내부에서도 감당할 수 없을 문제들이 생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파트너와 부부생활을 할 때, 믿지 않는 파트너가 살기를 원하거든 이혼하지 말고, 믿지 않는 파트너가 이혼을 원하거든 이혼해 주어라는 해석은 바울과 고린도교회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낳은 작위적인 해석이다.
그리스도인은 이혼을 제기해서는 안되지만, 상대방이 원할 때는 이혼을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을 타인의 결정에 따르는 무책임하고 피동적인 인간으로 가르치는 결과를 낳게 될 뿐만 아니라, 고린도교회와 바울의 염려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예외 규정은 안 믿는 남편을 가진 여성들로 하여금, 모두 이혼할 수 있는 구실을 주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내 남편이 이혼을 원해요”라는 사유로 이혼이 가능하다면, 거룩을 이유로 이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핑계의 기회를 제공할 뿐이기 때문이다.
고전 7당 15절은 문맥상, 그리고 바울이 표현한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믿지 않는 사람이 갈리거든 갈리게 하시오. 이러한 일들에(즉, 믿지 않는 사람의 이혼 문제에) 믿는 사람(형제나 자매)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혼하지 말라는 내 말은 믿는 사람들(형제나 자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혼하는 문제까지 간섭하여, 옳으니 그르니 하며 논쟁하지 마십시오,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 전체를 통해 전하는 말씀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은 안 믿는데, 혼자 자녀들과 함께 세례받은 여자성도들의 이혼문제에 관하여.
믿는 (여자성도) 여러분들은 이혼하지 마시고, 그대로 사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믿고 거룩하여졌고, 안믿는 남편은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도 거룩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자녀는 당신과 당신의 합작품이고, 당신의 자녀도 세례받아 거룩하지 않습니까? 자녀가 거룩하면, 부모도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니 안 믿는 남편이 믿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언제 구원받을 지 모르는 일이니, 이혼하지 마시고 남편을 기쁘게 해주십시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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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카르코피노, 고대로마의 일상생활, 류재화 역, 우물이 있는 집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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