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건강한 교회상
타종교인이나 비종교인들이라도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하여는 존경심을 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반면 교회에 대하여는 고개를 젖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을 마음은 있어도 교회 다닐 마음은 별로 없다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교회가 뭔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이 점을 아주 잘 풍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는데 교회는 그 보다 더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포도주를 다시 물로 원위치 시킨 것입니다’. 몇 년 전 후배 목사로부터 들은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수백 년이 지나서 후대사람들이 오늘의 교회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마치 오늘 우리가 중세시대의 병들고 타락한 교회를 바라보듯이 볼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서부터 떨어졌는가를 깊이 성찰하는 것입니다(계 2:5). 사람들이 짧은 시간에 많이 몰려드는 교회, 헌금이 많이 걷히는 교회, 교회 건물이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 사회유명인사들, 부유층, 지식인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 탁월한 설교자가 담임하는 교회 등이 오늘 한국교회에서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교계의 실권을 쥐고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존의 개념에 대하여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성경이 건강하다고 인정하는 교회의 모습은 과연 무엇인가? 이를 통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교회 본연의 모습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 그림이 분명해질 때 한국교회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고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작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1. 신앙의 공동체성
존 웨슬리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종교이므로 그것을 ‘외톨이’ 종교로 바꾸어 버리는 것은 결국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 신앙의 공동체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꿰뚫는 적절한 논평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이 오늘 날 많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이 개인주의에 의해서 장악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장품의 광고에도 ‘개인주의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등장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학교에서 큰 문제가 되고있는 ‘왕따’라는 것도 가만 보면 진정한 공동체 정신의 상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지성인은 ‘한국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자는 과거의 대통령들이 아니고 아이들’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님들에게 기(氣)살리기 교육을 받고 자랍니다. 싸워서 매 맞고 들어오면 못난 놈이라고 혼이 납니다. 때리고 들어와도 물론 혼이 나기는 하지만 알게 모르게 맞고 들어온 것보다는 낫다는 무언의 지지를 받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이기적 개인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신앙의 공동체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신앙의 공동체성은 한 개인의 소중함을 말살하는 집단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개인의 생명과 인격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막 8: 36, 37).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각 사람에게 일일이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요 1: 9).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성인 니고데모에게(요 3: 1-21), 그리고 더러운 과거를 갖고있는 사마리아의 버림받은 이름 없는 한 여인에게(요 4: 5-26) 동일하게 진지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 뿐 아니라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심으로 핍박을 자초하시고 결국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십니다(요 5: 1-18). 오늘날 한 인간이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취급되고 있는 근대 산업사회의 인간관과는 너무나 현격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는 현대 사회의 왜곡된 이기적 개인주의와도 다릅니다. 예수님은 한 인격의 소중함을 바탕으로 해서 그들 개인을 공동체 속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각자 지내도록 아니하시고 자기와 함께 있게 하면서 공동체적인 생활을 하도록 하셨습니다(막 3: 14). 그들의 진정한 신앙고백을 기초로 해서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 가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마 16;18).
이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창 1: 26, 27). 이것이 후에 개혁신학의 인권 사상의 기초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기적인 개인주의의 기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 속에 이미 공동체성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그 동안 많은 신학적인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은 하나님의 형상에는 하나님의 공동체적인 속성이 담겨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의 형상으로도 표현되었습니다. 아직 삼위일체 신학이 계시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안에 공동체적 사귐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동체적 속성을 지닌 하나님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보시고 좋지 않게 보셨습니다(창 2: 18).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시고 남자와 함께 공동체적으로 에덴 동산을 가꾸게 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인간에게 공동체를 형성해서 자연을 돌보는 가운데 문화를 창조해가라는 사명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놀라운 계획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큰 벽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죄가 확산되면서 인간 공동체는 폭력과 억압이 난무하게 되고(창 6장) 하나님을 대항하는 문화로 얼룩지게 되었습니다(창 11장). 이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정의가 꽃피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감으로써 천하만민을 축복하기 원하셨습니다(창 12:1-3; 18:18-19).
실제로 하나님은 이러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애굽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기억하시고 모세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를 통해 바로의 손아귀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심으로 그들을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출 19:6). 하지만 그들은 결국 실패합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보내셔서 새로운 공동체 즉 교회를 만들어 가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공상태에서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바로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가고자 했습니다. 하나님나라와 교회는 동일시 될 수 없지만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A. 로이지의 유명한 주장 즉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예고했는데 정작 생긴 것은 교회였다’라는 말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약신학자인 G. 래드는 하나님나라와 교회와의 관계를 잘 요약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The reign of God)로서 간주되어야 하며, 교회는 하나님의 영역 즉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며 그의 통치하에 있는 인간 공동체이다’. 그는 이를 좀더 세분화해서 다섯 가지 기본적인 요점을 제시합니다. ①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②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한다. ③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한다. ④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이다(음부가 이기지 못함). 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관리인(custodian; 열쇠를 갖고 있음)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의 부분적 현시(顯示)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순간부터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고전 12: 13). 교회론은 구원론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교회라는 공동체로 불러드리셔서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구원을 완성해나가게 하셨습니다(빌 2:1-12). 이 점을 깊이 깨달은 칼빈은 초대교부 씨프리안으로부터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을 수 없다’는 명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하나님은 교회라는 가슴 안으로 그의 자녀들을 불러들이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유아기와 소년 소녀 시절에 그의 도움과 섬김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장성하여 믿음이 목표하는 바에 도달할 때까지 그의 모성애적인 보호를 통해 안내 받도록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이들에게 교회는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교회라는 자궁 안에서 잉태하시고 그의 가슴을 통해 먹이시고 장성할 때까지 그를 돌보고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떠나서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만일 교회가 이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보통 치명적인 일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실망하고 등지면 안 됩니다. 오히려 교회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의 정성을 다 바쳐야 합니다. 그 길은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2. 교회의 본질
우리는 교회를 보통 건물과 연결시킬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성전 개념을 여기에 대입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로 인한 오해 때문에 그 동안 한국교회 안에 잘못된 관행과 병폐들이 자리 잡아 왔습니다. 특히 많은 교회들이 교회 건물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는 데 교회의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단어, 에클레시아(ekklēsia)2)가 의미하는 데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모인 사람들 혹은 그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을 설명해주는 성경에 나타난 교회에 대한 여러 그림 언어들을 살펴 볼 때 분명해집니다. 또한 이 그림 언어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는가가 분명해질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실현해갈 때 비로소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활력을 따라 수고하며 애써야지 만 새 사람의 모습이 그 실체를 들어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어떤 점에서 교회 금고에 들어있는 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보화를 믿음으로 꺼내 써야만 합니다. 보화를 금고 안에 집어넣은 채 보관만 하고 있으면 교회는 참으로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몸(고전 12:12, 13, 27; 엡 1: 22, 23; 4:11-16)
바울이 경험한 신비는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어 유기적 관계를 맺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신비를 보면서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건물이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명백해 집니다.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점은 첫째,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님과 생명이 연결되어 있어 유기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지키려면 머리되신 예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야만 합니다. 바울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있는 교회 구성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습니다(골 2:19):
그는 머리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각 마디와 힘줄을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몸은 머리에 잘 붙어 있어야 신진대사가 되고 영양을 공급받아 건강을 유지하고 자라게 됩니다. 머리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잠시 몸통이 꿈틀거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좀 끔직한 비유입니다만 교회에 너무나 중요한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지 않으면서도 붙어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입니다(계 2:1-7). 그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 인내를 했습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지만 실제로는 아닌 자들을 잘 분별해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고난도 견뎌내고 낙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한 가지 모자란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만일 첫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는 망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갈수록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데 한국교회는 여전히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다양한 활동들과 행사들이 끊임없이 기획되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바치고 시간을 내고 많은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단 사냥에 수고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린다면 교회는 멸망의 내리막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식사대접을 하기 위하여 매우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너무 바빠진 나머지 그 안에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하여 그는 마리아가 자기 일을 안 도와주고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이 말씀을 듣는 동생이 너무 미워졌고 예수님에게까지 불평을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무서울 정도로 냉정합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눅 10:42).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겉모양은 다르지만 본질로 들어가면 에베소 교회와 마찬가지 형편에 처해 있었습니다(계 3:14-21). 그 교회의 문제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것입니다. 이유인즉 경제적으로 풍요해지자 자만심에 빠져 영적인 갈증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내적으론 형편없이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어 있었지만 그들은 전혀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이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교회의 문을 두들기시며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맘몬이 주는 풍요와 즐거움에 빠져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간 한국교회의 문을 주님이 두들기고 계십니다. 문을 활짝 열어 제쳐 주님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머리되신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다시 회복하여야 합니다.
둘째, 오직 머리되신 예수님만을 최고 권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절대 권위에 대하여 골로새 교회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골 1:17-18);
17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근원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건강한 교회란 이렇게 예수님을 만물의 으뜸으로 모시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으뜸 되는 자리를 노리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세 번째 받은 시험이 바로 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악마는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고 말하였습니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마 4:8, 9). 얼마나 달콤한 유혹입니까? 미친 척하고 딱 한번 만 꾸뻑 악마에게 절하면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와 영광을 준다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그러나 이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리더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섬기기 보단 자기의 영광을 누리려는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끝까지 괴롭힌 것도 바로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으뜸 되는 자리를 놓고 ‘누가 더 크냐’는 주제로 지속적으로 논쟁하며 기(氣) 싸움을 했습니다. 그 본능을 못 이겨낸 것이 결국은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였습니다. 자신의 영광에 사로잡힌 그들의 눈과 마음에 고통 당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예수님이 들어 올 자리가 없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리더들은 입만 열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주님의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증거 중에 하나가 대형교회 담임목사직이나 대형선교단체 대표직의 세습입니다. 물론 세습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가장 놀란 것 중에 하나는 이들 대표직엔 세습할 만한 특권이 없을 뿐 아니라 무거운 책임과 고통만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까지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단장 선거에 당선되기 위하여 억 대의 돈을 뿌립니다. 금권선거를 뿌리 뽑을 길을 찾지 못해 제비뽑기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단장이라는 영광의 자리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한 때 제비뽑기가 가장 좋은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임한 후 7명의 교회 리더들을 뽑을 때 제비뽑기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기준을 정해주고 제자들이 중의를 모아 선택했습니다(행 6:3-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그들에게 사람을 제대로 분별하고 선택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제비뽑기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회장도 민주적 선거로 뽑는 시대에 교단장을 제비뽑기로 선출해야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교회가 끊임없는 세력다툼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고전 1: 10-12). 광성교회의 경우 원로목사 측과 담임목사 측의 알력다툼으로 큰 고통을 겪다가 둘로 찢어져 폭력수단까지 동원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담임목사와 장로들 사이의 고질적인 갈등으로 고통을 겪어 온 영락교회 문제도 같은 맥락 가운데 있습니다. 한국교회 하나되기 운동이 오랫동안 한목협과 교단장회의를 중심으로 추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될 듯 될 듯 하다가 무산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물론 진보와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연합기구들 사이에 신학적 차이가 있고 그 동안 걸어온 길이 다른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다면 연합운동의 실마리는 훨씬 더 쉽게 마련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건강을 회복하려면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과 행동으로 주님의 머리되심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 분께만 영광을 돌리는 철저한 자세를 찾아야 합니다.
셋째, 각각의 은사를 가진 교인들은 한 몸을 이루는 지체임을 가르쳐 줍니다. 성경에 보면 다양한 은사 목록이 나옵니다(고전 12:8-10; 고전 12:28-30; 롬 12:6-8; 엡 4:7, 11, 12; 벧전 4:10, 11). 그 목록을 종합해보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행함, 예언, 영분별, 방언, 방언 통역, 사도, 선지자, 교사, 서로 도움, 다스림, 권위, 구제, 긍휼을 베풂, 섬김, 복음 전하는 자, 목사, 하나님 말씀 전파, 봉사 등입니다. 어느 한 은사도 모든 목록에 모두 나타나지 않습니다. 8개의 은사는 위의 목록 중 하나에만 나타납니다.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위의 목록에 없는 새로운 은사도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찰스 웨슬리 같은 이는 찬양작사의 은사가 있어서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이를 볼 때 성경에 나타난 은사목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 가는 데 쓰임 받을 수 있는 능력이라면 모두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의 은사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은사에는 가치의 경중이 없습니다. 모두 그리스도의 몸에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사를 서로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갖거나 우월감을 갖는 것이 모두 잘못된 것임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발은 손에 대하여 귀는 눈에 대하여 열등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이에 바울은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고 묻습니다. 모든 지체가 몸에 꼭 필요한 중요한 것임을 분명히 말씀합니다(고전 12:15-20). 한편 눈은 손에 대하여 머리는 발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다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덜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지체들에게 더욱 풍성한 명예를 덧입히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주는 것을 예로 듭니다(고전 12: 21-26).
한국교회는 여전히 은사 문제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말씀전하는 은사를 너무 높인 나머지 황제처럼 군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설교 잘하는 목사가 교회에서 전횡을 일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초자연적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너무 자랑하여서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병 고침과 방언에만 너무 몰두하다 보면 교회가 해야할 다른 일들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은사를 멀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은사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랑의 능력을 성령의 열매로 맺어 가는 것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고전 12:31-13:13).
2)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엡 2: 19a)
바울은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들을 다른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을 말합니다. 이는 곧 교회가 이러한 시민들의 공동체인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골 1: 13). 국적이 바뀐 셈입니다. 물론 이미 언급한 것처럼 교회가 하나님 나라 그 자체는 아닙니다. 지상의 교회는 아직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의 통치를 받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합니다. 이는 오늘 우리 교회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어떤 이는 ‘교회 공화국’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움직여 가는 것이 세상의 공화국이 움직이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꼬집기 위함이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인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야 합니다(롬 14: 15).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마 6: 34). 교회 구성원 사이에는 신분에 있어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세상의 지위가 교회 안까지 스며들어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가족(엡 2: 19b):
예수님을 믿는 것은 또 다른 관계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분의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롬 8: 14-17).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을 향하여 그들이 자신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임을 분명히 하십니다(마 12: 50).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성(性), 학력, 외모, 부(富), 건강, 사회적 지위 그리고 교회 직분에 따라서 부당하게 사람을 차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똑 같은 일을 해도 남전도사에 비해 여전도사는 더 낮은 대우를 받곤 합니다. 부교역자는 흔히 소모품처럼 취급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교회 안에서마저 장애자들이 무시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부자를 예우하기 때문에 가난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없는 사람들은 장로 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장로 임직 시 많은 경우 기천만원을 내는 것이 묵계(黙契)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최근 인천의 어느 교회가 장로 피택자들에게 보내는 질문서에 “이번 장로로 선택될 시에 2000-3000만원의 헌신을 할 수 있나”라는 내용을 포함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매관매직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돈을 주어 그 권능을 사려고 하자, 베드로가 분노하여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무서운 말씀을 듣고 한국교회는 경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돌봐주시는 공동체요 서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늘 여러 가지 걱정과 염려에 잠겨있고(마 6: 25-32), 차갑고 냉랭하다면 이는 교회의 중요한 한 본질을 상실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항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한 신앙고백을 드리는 교회입니다.
4) 하나님의 집(엡 2: 20-22):
집은 누군가 거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란 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라는 뜻입니다. 즉 교회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인 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지나치게 개인적 경험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공동체에 합류하여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함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로 어우러져서 공동체를 이룰 때 거기에 임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마 18: 20). 그러므로 교회 건물에는 관심이 있으면서 공동체적인 삶에는 관심이 없다면 교회의 본질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집이 되려면 집의 구성 요소가 서로 잘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따로 따로 흩어지면 집은 구멍이 뚫리고 결국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버립니다. 그런 곳에는 하나님이 임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건물과 화려한 분위기와 멋진 음악에 힘입어 무언가 거룩함을 느끼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면 우리의 감정에 속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의 신부(엡 5: 22-33):
이는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요 이스라엘은 종종 하나님의 아내로 묘사되곤 했습니다(사 54: 1-8; 호 2: 14-20).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신부로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함으로써 다시금 교회를 탄생시키시고 그의 신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을 받습니다. 교회는 이 사랑을 늘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러한 사랑을 받는 교회의 본분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남편으로 모시고 그 분만을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신부로 삼기까지 사랑하신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죄에서 씻음 받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세상의 물질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 가치관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가 구체적으로 극복해야 할 것은 기복신앙의 유혹입니다. 하나님을 축복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신앙에 매몰되어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나라의 의를 위하여 핍박받을 준비가 너무나 되어있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신앙의 순결을 회복하게 될 때 한국교회는 많은 질병으로부터 치료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런 본질을 가진 교회 안에서의 생활은 어떤 모습을 취하여야 합니까?
3. 교회 안의 생활
1) 예배: 엡 1: 3-14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속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임을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예배는 교회의 삶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교회를 찾고 계신다(요 4: 20-24). 이러한 예배는 입술만 움직이고 마음은 딴 데 있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다(사 29: 13).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상하고 통회함으로 드리는 예배이고(시 51: 16, 17) 그렇게 예배드릴 때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새롭게 맛보게 된다. 또한 이런 예배는 진리의 말씀에 기초한 예배이다. 그저 감정을 흥분시키거나 자극시키는 예배는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오늘날의 열린 예배에 이런 위험성이 있음을 잘 알고 수용해야 한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말씀을 자세히 배우고 마음이 뜨거워 졌다(눅 24: 25-32). 우리는 이러한 예배를 사모해야한다. 또한 삶이 동반되는 예배여야 한다(미 6: 6-8). 이러한 예배를 드리려면 성령(엡 5: 19, 20)과 말씀(골 3: 16)이 충만해야 한다. 그리고 예배는 교회 전체의 덕을 세우며 모든 순서가 적당하고 질서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고전 14: 3, 12, 17, 26, 40),
2) 교제: 성도들 사이의 교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모르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요 5: 42). 또한 위의 교회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교제는 당연히 교회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가 한 가족이요, 몸인데 어찌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래서 예수님과 바울은 교회가 하나되어야 함을 강조하신다(요 17: 11, 21-23; 엡 4: 1-3). 이를 가장 아름답게 실천한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이다(행 2: 42, 44-46; 4: 32-35). 여기서 진정한 교제는 단순히 감정적인 교류가 아니라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공유하는 삶인 것을 알 수 있다. 언제든지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라면 내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특히 성만찬에 함께 참여 할 때 새롭게 할 수 있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3) 봉사: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의 봉사는 특정의 사람들에게 국한 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있다. 결국 이는 목회자의 실수와 오류 혹은 범죄로 타락하게 될 때 교회 전체가 깊은 병에 걸리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심각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엡 4: 11-12을 보면 이는 전혀 교회의 원래의 모습이 아닌 것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그리스도가 직분자들을 세우신 것은 성도들을 잘 키워서 그들이 봉사의 생활을 함으로써 교회가 몸으로서 잘 자라가게 하는 것이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몸의 지체된 성도들이 힘을 얻어 자기의 봉사의 본분을 다하면서 서로 잘 연결 될 때 교회는 아름답게 무럭무럭 자라게 된다(엡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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