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회와 쉐마(신 6:4~5)
왕대일 (감신대 교수, 구약학)
1. 구약의 가정
구약에서 가족은 보통 “아버지의 집”으로 불린다. “아버지의 집”은 “부권(父權) 위에 세워진 집안”(pater familias)이다. 부계에 따른 혈연의식이 가정을 지탱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사회가 무조건 부권 중심인 것만은 아니었다. 자식의 혈통은 그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계열을 따르고 있다. 예를 들어 에서의 자식이나 야곱의 자식이 모두 이삭의 후손들이었지만, 에서의 자식들이 이스라엘의 계보에 들어오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회의 기초는 가족이다. 이 가족이 모여서 부족/씨족을 이루고, 부족/씨족들이 모여서 지파를 이룬다. 부족/씨족은 같은 장소에 촌락을 이루며 모여 사는 여러 가족들의 공동체이다. 공동으로 드리는 예배와 축제를 통해서 그들은 서로 한 울타리 속에 산다는 것을 확인한다(삼상 20:6, 29). 이 부족/씨족들이 모여서 이스라엘을 이루게 된다. 왕국시대 이후 이스라엘에서는 지파 중심의 공동체가 탈색되지만,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의 뿌리는 가족, 곧 아버지의 집에 있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명칭이 “야웨의 백성”이다(삿 5:11,13; 삼상 2:24; 비교, 출 19:6; 신 7:6 등). 우리가 흔히 “백성”(people)으로 번역하는 히브리어 “암”(??)은 “백성”이라기 보다는 “가족”에 더 가까운 말이다. 그러니까 히브리어로 “야웨의 백성”은 실상 “야웨의 가족”(the family of YHWH)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한다. 원래 히브리어 “암”은 아버지 쪽의 형제를 일컫는 명칭이었다. 그러니까 야웨의 백성이란 명칭은 문자적으로 야웨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대가족이란 의미가 된다. 이스라엘이란 단순히 가족 관계로 뭉친 혈연집단이 아니라 “야웨 신앙에 바탕을 둔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회의 중심에는 야웨 하나님이 계시다.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가정의 호주(戶主)가 되신다는 신념이 이스라엘 신앙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것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이 바로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다는 설명이다. 구약 출애굽기에는 출애굽한 히브리 사람들이 시내 산에 당도한 후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출 19장). 출애굽한 자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면서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야웨 하나님의 백성, 그러니까 야웨 하나님의 가족은 바로 이런 신앙고백 위에 뿌리를 내린 공동체이다.
하바드 대학의 구약교수인 폴 핸슨(Paul D. Hanson)이 쓴 책 가운데 “부름 받은 백성: 성서 안에 있는 공동체의 성장”(The People Called: The Growth of Community in the Bible, 1986)이란 책이 있다. 이 책에서 핸슨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민족”(nation)이라기보다는 “사람들”(people)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왜 그런가? 핸슨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뿌리가 “야웨 신앙에 바탕을 둔 신앙공동체”라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밑바탕에 혈연의식에 기초한 가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을 신앙하는 믿음에서 태동된 믿음의 가족이 되어야만 했다.
2. 이스라엘 신앙과 교회
구약에는 신약의 교회에 걸 맞는 제도나 단체가 없다. 대신 구약에는 교회의 뿌리에 해당되는 신앙공동체의 모형들이 있다. 바로 가정, 성전, 회당, 회막/성막 등이다. 기독교 신앙의 교회는 이스라엘 신앙이 남긴 이 유산들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이스라엘 신앙에서 가정은 하나님의 가족을 양육하는 요람이었다. 족장 시대이래 유다 나라가 망할 때가지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각 가정에서, 부모를 통해서 유전되는 하나님 신앙을 계승해갔다. 그러다가 주전 5세기이래 유대주의가 이스라엘 신앙의 또 다른 대안으로 구체화될 때 유다 사회의 가정은 다시 하나님 신앙을 지키고, 키우며, 이어가는 보금자리 역할을 굳히게 된다. 예컨대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보존하고 지키는 유월절은 각 가정/집에서 지켜야만 되었던 절기이었다(출 12:3-4, 46).
그렇지만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신앙을 파수하는 자리는 성전이었다. 성전제의는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립한 이후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삶과 신앙에 그 뿌리를 내렸다. 예루살렘은 야웨 하나님의 거룩한 산이자(시 2:6; 3:5; 15:1; 43:3; 48:1; 87:1; 99:9), 하나님의 도성인 시온이다(시 48:2, 11; 74:2; 78:68; 125:1, 2; 133:3). 성전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다(시 68:29). 시온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온다(시 14:7; 20:2; 53:6). 시온에 하나님이 계신다(시 9:11; 76:2; 99:2; 135:21).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시온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시 65:1; 147:12), 시온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다.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성전이 파괴되면서 일어났다. 주전 587년에 터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이스라엘의 종교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성전이 느부갓네살 군대에게 파괴되면서 여태까지 지속되던 이스라엘 종교제도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몰아닥쳤다. 성전이 무너지면서 희생제사가 사라지게 되었고, 그 자리에 대신 기도하고 찬미하며 말씀을 읽는 예배가 자리 잡게 된다. 이 변화의 중심에 바로 회당(synagogue)이 있었다. 물론 회당이 언제부터 유대 사회 속에 등장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회당의 기원을 언제로 보든, 중요한 것은 성전이 파괴된 이후 산산조각이 났던 하나님의 백성의 경건이 회당을 중심으로 다시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회당은 말 그대로 집회처였다. 결코 성전을 대체하기 위해서 세워 놓은 성소가 아니었다. 같은 유대인들끼리 교제하며, 가르치고, 배우며, 사귀는 장소이었다. 과거 하나님의 집(성전)에서 평신도들은 결코 성소 안 거룩한 곳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성전이 이스라엘 종교의 구심점이었을 때 성전을 찾은 평신도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집을 찾은 손님에 불과하였다. 이런 하나님의 집(성전) 제도에 비해서 회당은 무척이나 민주적인(!) 곳이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참여하여 서로 친교를 나누며 기도하고 거룩한 말씀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회당에서 제사장들은 결코 주인이 아니었다. 아니 회당에는 제사장이 있어야 할 자리가 없었다! 회당에서 제사는 결코 중요한 문제가 못되었다. 회당에서 소중한 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교육이었다.
성전의 멸망, 성전의 파괴와 함께 과거 예배의 구경꾼이었던 자가 예배하는 자의 위치를 회복하게 된다. 예배생활의 손님이었던 자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주인공이 되게 된다. 없어져 버린 성전이나 제단 대신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영성의 모판으로 자리잡게 된다.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 대신, 말씀을 읽고 해석해 주는 선생(랍비, 서기관)이 이스라엘 신앙생활의 주요한 역할을 떠맡게 된다. 희생제사보다 더 시급한 것은, 아니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듣고 그대로 사는 것은 생각을 키우게 된다.
회당의 뿌리는 회막/성막 신앙에서 왔다. 회막/성막에 대한 가르침은 구약의 오경에 집중되어 있다. 오경의 가르침에는 성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수단으로 희생제사 제도를 처방하고 있으면서도, 성전에 대해서는 결코 아무런 말이 없다. 성전이 아닌, 회막/성막 앞에서 드리는 희생제사를 설명할 뿐이다(레 1:5; 4:7; 15:29-31; 16:1-34 등). 회막/성막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숱하게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회막 신앙이 시내 산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 아래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 중에 머물러 계시기를 원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다(출 25:1, 8, 22).
하나님이 회막에서 이스라엘과 만나시기를 원하신다. 이 회막은 움직이는 성소이다. 시내 산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을 향해 “내가 너를 만나서 머물 성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셔서 세우게 된 성소이다. 이 성소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막을 치고 머물러 있는 곳 한복판에 세워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회막에서 그 백성과 만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삶의 영역에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더불어 사시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신학적 강령이 된다.
이런 오경의 가르침이 이스라엘 신앙인들의 귀에 다시 생생하게 들려지게 되던 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포로 후기이다. 에스라의 종교개혁(느 8장)이 그 구체적인 실례이다. 에스라가 살던 시대는 주전 5세기 중엽 혼란하던 때였다. 그러한 때 에스라는 산산조각으로 흩어져만 가던 유대인들의 삶과 신앙을 모세의 토라를 읽고 깨닫게 함으로써 바로 잡았다. 부정과 혼합주의로 치닫기만 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포자기를 제대로 일으켜 세운 사람이 바로 학사(서기관) 에스라이었다. 에스라의 종교개혁에서는 제사장이나 희생제사가 감당했었던 역할이란 결코 없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이다(스 7:6). 에스라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사겸 제사장”이다(스 7:12, 21).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이스라엘의 전승들을 보존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것이 바로 가문 제도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이방인과의 통혼을 없애고 비유대인과의 결혼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이런 조치는 당시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모세의 율법에 근거해서 에스라는 유다 백성이 언약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눈물로 호소하였다.
에스라는 유대인의 가을 추수절기에 맞춰 백성들을 예루살렘 성의 수문 앞 광장에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는 특별히 만든 “나무 강단”에 서서 “모세의 율법책”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었다(느 8:1). 에스라가 말씀을 읽었을 때 레위인들이 에스라 옆에 서서 백성들에게 그 말씀을 해석해 주었다. 그 말씀을 들었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기대에서 너무나도 멀리 벗어나 있는 자신들의 죄악스런 삶을 통회하면서 눈물로 참회하였다. 에스라가 중재기도를 드린다. 언약갱신의식을 가진 것이다(느 9장). 마틴 루터가 “오직 성서로만”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기 근 이천년 전에 에스라는 벌써 오직 말씀으로만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설 수 있음을 간파하였다. 느헤미야 8장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날 그 곳에 모였던 유대 사람들은 너도 나도 할 것없이 에스라가 강단 위에 서서 낭독하고 레위 사람들이 통역했던 말씀을 듣고 울면서 뉘우쳤으며, 뉘우치면서 말씀 앞에서 다시 새 잔치를 배설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꺼져만 가던 유대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타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신앙이 제단이 아닌 강단 중심의 종교로 변모하고 있다. 희생제물 대신 말씀을 선포하고 깨닫는 일에서 하나님의 참 된 만남을 이루고 있다. 어떻게, 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힘 때문이었다. 말씀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그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의 가족인 이스라엘이 무엇을 해야만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각성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정체성(identity)과 자기 생존의 길(ethos)을 일깨워주게 된 것이다. 신앙 백성의 얼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은 것이다.
3. “쉐마”와 이스라엘 신앙
구약 신명기 6:4-5은 “쉐마”(???)라고 불리는 본문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4-5). “쉐마”는 신명기 6:4 서두에 나오는 “들어라”라는 히브리 명령형을 음역한 표현이다. “쉐마”는 구약성서의 신앙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 “쉐마”는 이스라엘을 부르는 초청의 말씀("이스라엘아 들으라")에 이어서 하나의 선언문("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과 하나의 명령("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으로 이루어져 있다.
“쉐마”의 선언문은 히브리어로는 단 네 단어에 불과하다. "야웨 엘로헤누 야웨 엑하드"(??? ???? ????? ????)! 이 말은 크게 둘로 번역될 수 있다. 하나는 "야웨 우리 하나님, 야웨는 한분이시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야웨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오직 야웨만이 야웨만이”라는 것이다. 전자로 옮길 경우 “쉐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가 누구이신 지를 가름하는 신앙고백이 된다. 반면 후자에서 “쉐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께 대한 충성과 헌신을 나타낸다.
신명기 6장 본문은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께 대해서 전적인 충성과 헌신을 서약하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조건으로 삼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와 축복을 보장하신다는 것이다. “쉐마”를 이렇게 읽을 경우, 본문은 단순한 유일신론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다. 본문은 많은 신 중에서 오로지 야웨 하나님께만 이스라엘이 기우려야 할 신앙과 헌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쉐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가르치고 있다.
“쉐마”는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신 5:7)라는 제 1 계명을 신앙고백문으로 바꿔서 표현한 가르침이다. 십계명의 제 1 성(聲)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부정적인 표현(You shall not......)으로 밝히고 있다면, “쉐마”는 이것을 긍정적으로, 아주 낭만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바꾸고 있다. 곧 "네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여기 "사랑한다"(아하브 ???)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나 우리말에서 아주 낭만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끼고 위하며 한없이 베푸는 일을 나타낸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정이 들어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관계를 지칭한다. 무엇인가를 몹시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나타낸다. “쉐마”는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을 적극적으로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로 바꾸어서 풀이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내가 선택한(나를 선택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상의 의미를 지니지 만은 않는다. "사랑한다"라는 말속에는 헌신과 충성, 책임과 돌봄이 모두 들어가 있다. 신명기의 “쉐마”는 하나님 신앙을 아주 철저한 "격정적인 관계"(passionate relationship)로 바꾸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신명기 6:5 본문은 구체적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고, 네 능력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라는 말로 적고 있다. 이런 식으로 “쉐마”는 한없이 어렵게만 느껴졌던 하나님 신앙을 쉽고, 감동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신명기의 “쉐마”는 오경 중에서 최초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선언하는 구절이다. 지금까지 오경의 가르침은 하나님 경외만을 이야기해 왔다. 신명기는 여기에다가 하나를 더 첨가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쉐마”는 알고 고백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쉐마”는 마음에 새기고, 손목에 매며, 문설주와 바깥 문에 붙여놓는 기록으로까지 나타나야 한다(6:6-9; 11:18-20). “쉐마”는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앉는다, 간다, 눕는다, 일어난다"라는 동작은 삶의 매 순간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곧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터에서나 쉼터에서, 날마다 겪는 삶의 모든 일상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는 것"(6:8-9)은 하나님의 말씀이 손으로 하는 일을, 눈으로 하는 일을, 집안 일이나 사회생활을 관장하도록 하게 하라는 지시이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시각화해서 나타내는"(visualizing) 동작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것을 어디에서부터 실천하는가? 바로 가정이다. “쉐마”을 가르쳐야 될 책임이 부모에게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가정이 하나님 신앙을 교육하는 산 현장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쉐마”는 멀게만 느껴졌던 신앙의 차원을, 높게만 느껴졌던 믿음의 차원을, 사람들의 피부에 와 닿는 차원으로 변환시켜 가르치고 있다. 믿음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용어를 사랑이라는 감정적인 언어로 바꾸어서 설명하려고 하는 “쉐마”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요 14:21). 신앙인의 가정은 바로 이 “쉐마”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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