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
- 2012년 7월호
요 한계시록은 기독교권 내에서 오랫동안 무관심과 무시의 대상이 돼 왔다. 초대 교회 당시 신약 정경의 결정 과정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의 정경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1484~1546) 역시 요한계시록의 정경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가, 후기에 가서 그 입장을 바꿨다. 존 칼뱅(1509~1564)은 요한계시록이 어렵고 난해한 책이라는 이유로 주석을 쓰지 않았다.
칼뱅이 요한계시록에 손대지 못하고 남겨둔 이래로 개신교와 개혁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대해 무관심, 무시로 일관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왔다. 물론 16~17세기 청교도 시대에 역사적 전천년주의(historic premillennialism)와 무천년주의(amillennialism)를 주창한 청교도 신학자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요한계시록과 종말론에 대한 관심은 구원론과 교회론에 대한 관심에 의해 질식되고 말았다.
18세기 계몽주의와 역사의 무한한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가 팽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뉴잉글랜드의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와 영국의 존 웨슬리(1703~1794)는 역사에 대한 낙관적인 관점에 기초한 후천년주의(postmillennialism)를 주창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은 후천년설이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 역사의 종말을 비관적으로 그리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고, 그 결과 후천년주의의 영향력은 현저히 약화됐다.
그러다가 19세기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신학의 아버지인 존 넬슨다비가 요한계시록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전천년주의적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유대인 우월주의에 빠져 그들에게 특권을 주는 방식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환난 전에 휴거가 있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하면서 성경적인 바른 해석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풀러신학대학원의 조지 래드 교수가 초대 교부들 중 대다수가 지지한 바 있는 역사적 전천년주의를 회복하면서 요한계시록은 좀 더 해석하기 쉬운 책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역사적 전천년주의는 미국 복음주의권의 대표적인 학자들 중 대다수가 지지하는 관점으로 자리 잡게 됐다. 현재 밀러드 에릭슨, 돈 카슨, 더글라스 무, 웨인 그루뎀, 로저 올슨, 크렉 블롬버그, 브루스 데머레스트, 크렉 키너, 조지 비슬리 머레이, 로버트 마운스 같은 걸출한 학자들이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박형룡, 박윤선 박사가 역사적 전천년주의를 주창했고, 총신대학교의 김길성 교수와 장신대학교의 박수암 은퇴 교수, 고신대학교의 한정건 교수 등으로 그 계보가 이어진 뒤 목회자인 김형태 목사, 민병석 목사, 이광복 목사에 의해 전천년주의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재림이 정말 가까워진 이 시대에,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온갖 이단이 우후죽순처럼 난무하고 이 이단들에 의해 정통교회가 심각하게 유린되는 이 시대에 요한계시록은 더 이상 무관심의 대상이 되거나 무시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리어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돼야 하고, 더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에 대한 진지한 연구에 열성을 기울여야 한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에 대한 바른 태도와 바른 읽기 방식이 확립되고 널리 확산돼야 한다.
한국 교회 내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신앙적 관심이 앞으로 더욱더 증대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필자는 성경 중 가장 어려운 책이라고 불리는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선입견과 편견을 타파하라
우선 요한계시록을 접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몇 가지 근거 없는 선입견과 편견을 타파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다양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먼저 요한계시록은 읽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다. 요한계시록을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이 상징을 사용해서 기록됐고,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는 점에서 특히 더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쉽게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는 아예 접근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그야말로 근거 없는 선입견에 불과하다. 만약 요한계시록이 정말 어려운 책이라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은 어려우니까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을 남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한계시록 초두에서 주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은 어려우니까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요한계시록을 읽고, 다른 사람이 요한계시록을 읽어 주거나 해석하는 것을 잘 듣고, 또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것을 잘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즉 요한계시록은 얼마든지 읽어서 해석해내고 소화해낼 수 있는 책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누구든지 읽고 자신의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책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은 요한계시록의 최종 수신자가 바로 “그 종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라고 밝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대한 예언서라는 점에서, 그리고 많은 상징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경의 다른 책들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을 가진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애초부터 요한계시록은 정말 어려운 책이니 감히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편견은 반드시 타파돼야 한다. 누구든지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키면 주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키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복이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 일반 성도들뿐 아니라 목회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또 하나의 편견은 요한계시록은 무섭고 두려운 책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무섭고 두려운 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6장에서 19장까지 나오는 대환난에 대한 내용이 두렵고 가공할 만한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하는 너무나도 무서운 내용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두렵고 무서운 내용을 가진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침체와 절망을 경험하거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위로보다는 삶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요한계시록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유익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요한계시록을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편견에 불과하다. 요한계시록이 정말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하고, 영적 침체와 절망을 초래하는 책이라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서운 책이니까 조심하고,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을 남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요한계시록 초두에서 주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고 말씀하신다. 요한계시록은 공포와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책이 아니라, 도리어 복을 가져다주는 책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읽어야 하고, 적극적으로 들어야 하고, 적극적으로 지켜야 할 당신의 복된 말씀임을 명증하신다.
물론 요한계시록의 상당 부분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애초부터 요한계시록은 정말 두렵고 공포스러운 책이니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잘못된 선입견은 반드시 타파돼야 한다. 요한계시록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우리는 곳곳에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핍박과 환난을 겪게 될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상한 위로와 배려를 감지할 수 있으며, 우리를 영원한 승리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열심에 감격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 두 가지 편견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권세가 만들어낸 철저한 오해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 편견을 타파하고, 이 선입견들로부터 벗어나라! 그러면 당신은 요한계시록이 품고 있는 진리의 광맥을 발견하고 기쁨에 겨워 영광스러운 춤을 추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라
성경 66권의 어느 책을 읽든지 그 책의 기록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성경해석학의 가장 초보적인 진리다. 성경의 거의 모든 책들은 기록 목적을 책의 초두 아니면 마지막 부분에서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1~4은 누가가 누가복음을 쓴 목적이 직접적으로는 데오빌로에게, 간접적으로는 모든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확실한 내용을 전하기 위함임을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 20:31은 요한사도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밝히고 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요한계시록 1:1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확증해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다시 말하면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대해 주신 계시를, 그 종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 알게 하시려고,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 알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이다. 요컨대 요한계시록은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알게 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덮어두려고 하는 자들은 요한을 통해 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셔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정면으로 배치된 엄청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요한계시록은 공포와 두려움만을 조장하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회피하려고 하는 자들은 요한을 통해 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셔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알게 하시고, 나아가 재림에 대한 놀랍고 영광스러운 기대와 소망을 독려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외면하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10에서 주님은 당신의 천사를 통해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요한계시록을 덮어두지 말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에 따라 바르게 읽고 듣고 지키라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런 자들을 위해 예비된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목회자들이여, 요한계시록을 그 기록 목적에 맞게 바르게 읽어라. 읽고 성도들에게 바르게 해석하고 풀어줘라. 그것이 목회자들을 불러 말씀의 사역자로 삼으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신실하게 행하는 일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요한계시록 본문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하라
요한계시록 본문의 성격은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은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가장 근본적으로 ‘미래에 대한 예언서’의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은 요한계시록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미래에 대한 기록임을 확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근본적으로 요한계시록은 과거에 대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현재에 대한 것도 아닌 미래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미래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서라는 사실에 기초해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대한 책이라는 사실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현재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철저한 오해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을 미래의 책으로 읽을 때에야 비로소 요한계시록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책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로,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반드시 일어날 사건을 예고하는 성격을 가진다. 다시 말해 요한계시록은 잠언서와 같이 삶의 지혜를 교훈하는 책이 아니며, 서신서와 같이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다루는 책도 아니고, 복음서나 사도행전과 같이 과거에 일어난 일을 보고하는 책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 즉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적 기록의 성격을 갖는다. 여기서 ‘사건’이란 말이 매우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사건적 측면을 무시하고, 요한계시록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신앙적·신학적 의미에만 초점을 맞춰 왔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근본적인 성격에 부합하는 바른 독법이 아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의 근본 성격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편의적이고 자의적인 독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요한계시록의 독법으로 제시된 전통적인 방식 중에서 ‘과거주의적’, ‘역사주의적’, ‘이상주의적’ 해석보다는, ‘미래적’ 혹은 ‘미래주의적’ 해석이 요한계시록 본문의 성격에 가장부합하는 방식이라고 확신한다.
셋째로,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반드시 속히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적 기록으로서 다양한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고 해석할 때 요한계시록이 사용하고 있는 상징을 신구약성경 전체의 컨텍스트에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계시록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사용된 적이 있는 상징들을 많은 부분 재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요청된다. 다시 말하면, 요한계시록 본문을 다른 65권의 성경과 관련시켜서 해석하는 것이 가장 건강하고 균형 잡힌 독법이라는 것이다. 다른 65권의 성경을 무시한 채 요한계시록의 본문만 극단적으로 파헤치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오해와 잘못된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해석하는 독법이 소위 ‘상징주의적 해석’, ‘우화적 해석’, ‘알레고리적 해석’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상징주의적 해석이 문자적·문법적·역사적 해석을 통한 본문 그대로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도외시한 채 어떤 본문의 영적·신령적 의미만을 추구하는 해석이라면,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해석하는 독법은 문자적·문법적·역사적 해석을 통한 본문 그대로의 의미를 파악한 다음, 그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상징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독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 집단들이 상징주의적이고 우화적이고 알레고리적인 해석으로 많은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경계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바르게 이해하라
성경 66권의 거의 모든 책들은 그 책이 어떤 구조로 돼 있으며,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내재적 구조를 밝혀주는 중요 구절은 1:19이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이 구절이 제시하는 구조에 따르면 요한계시록 1장은 사도 요한이 본 것 즉 과거의 사건을, 2~5장은 지금 있는 것 즉 현재 소아시아 7교회의 상태와 천상의 현재 모습을, 그리고 6~22장까지는 요한의 관점에서 여전히 미래로 남아 있는 장차 될 일을 증거한다. 6~22장도 두 단락으로 세분화될 수 있는데, 6~19장은 재림 직전의 대환난의 시기와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을, 20~22장은 재림 이후의 천년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증거한다.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요한계시록에 좀 더 쉽고 편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더 나아가서 요한계시록의 내재적 구조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무천년주의나 후천년주의보다는 전천년주의적으로, 즉 천년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는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어내도록 이끈다. 그리고 전천년주의 중에서도 교회의 환난 통과를 거부하는 세대주의가 아니라, 교회의 환난 통과를 인정하는 역사적 전천년주의적 독법으로 이끈다.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이란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는 것을 의미하는가?
간단하게 말해서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이란 ‘밝은 종말론’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밝은 종말론’이란 한국 교회 일각과 이단, 사이비 집단에서 횡행하고 있는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이다.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의 대표적인 실례는 지난 1992년 다미선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한부 종말론 운동이다. 시한부 종말론은 예수님의 재림을 매우 두렵고, 어둡고, 또 긴박한 것으로 그림으로써 종말론의 본질을 왜곡하게 만든다. 그래서 다가오는 종말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만들며, 현실을 무시하거나 도피하게 하고, 일상 속에서 주님과의 긴밀한 교통을 누리는 비밀스러운 기쁨을 앗아가는 종말론이다.
또한 신천지나 하나님의교회와 같이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을 주창하는 이단, 사이비 집단들은 복음적인 구원론을 철저히 왜곡시킨다. 특히 신천지 집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정통 기독교의 참된 복음을 거부하고, 교주의 지시와 훈계를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얻는 율법주의적 행위 구원을 주창하고 있다. 그들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한 바 ‘다른 복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과 대비되는 ‘밝은 종말론’은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다시 오셔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맞이해 혼인잔치를 베푸실 것을 고대하고 대망하는 종말론을 의미한다. 오매불망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랑을 맞이하는 그날이야말로, 신부인 교회에게 있어서는 엄청나게 영광스럽고, 환희에 차고,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날이 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에 기초한 종말론이다.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음을 경험하셨으나, 3일 만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를 완성하기 위해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신다는 소식이야말로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영광스럽게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끌어 가실 주님에 대한 예언적 기록이 바로 요한계시록이기에, 모든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을 읽고 들을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환희와 기쁨과 승리의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인 것이다.
또한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이란 미래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예수 재림 직전에 있을 대환난의 시기를 교회가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오늘의 삶 속에서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고, 영적으로 무장하기 위해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며,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며, 끝까지 견디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성도들을 권면하는 독법인 것이다.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딛 2:12~13)하는 독법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주님께서 대환난의 시기에도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승리케 하신다는 확신을 고취시키는 독법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이런 관점에서 읽고 해석하고 적용할 때 모든 성도들은 밝고, 건강하고 균형 잡힌 종말론으로 무장하게 되며, 그 결과 요한계시록 2~3장이 약속하고 있는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복을 누리도록 성숙해가게 된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건강한 관심을 회복하길 기대하며
주님 재림의 징조가 날마다 더 뚜렷하게 보이는 이 시대에, 주님의 재림이 진정 가까운 이 시대에 요한계시록은 정말 더 이상 무시돼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온갖 이단과 사이비가 활개를 칠수록 정통 교회는 더더욱 요한계시록에 대해 건강한 관심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바르게 읽고, 듣고, 지켜 주님이 약속하신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전심전력해야 한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 목회적 독법은 ① 요한계시록이 이해하기 어렵고,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하는 책이라는 편견을 타파하는 것, ②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 ③ 요한계시록 본문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 ④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 ⑤ 밝은 종말론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읽고 해석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존귀하신 주님께서 사랑하는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에 대한 건강한 관심을 회복시켜 주셔서,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복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한국 교회가 한 차원 더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칼뱅이 요한계시록에 손대지 못하고 남겨둔 이래로 개신교와 개혁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대해 무관심, 무시로 일관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왔다. 물론 16~17세기 청교도 시대에 역사적 전천년주의(historic premillennialism)와 무천년주의(amillennialism)를 주창한 청교도 신학자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요한계시록과 종말론에 대한 관심은 구원론과 교회론에 대한 관심에 의해 질식되고 말았다.
18세기 계몽주의와 역사의 무한한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가 팽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뉴잉글랜드의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와 영국의 존 웨슬리(1703~1794)는 역사에 대한 낙관적인 관점에 기초한 후천년주의(postmillennialism)를 주창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은 후천년설이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 역사의 종말을 비관적으로 그리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고, 그 결과 후천년주의의 영향력은 현저히 약화됐다.
그러다가 19세기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신학의 아버지인 존 넬슨다비가 요한계시록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전천년주의적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유대인 우월주의에 빠져 그들에게 특권을 주는 방식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환난 전에 휴거가 있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하면서 성경적인 바른 해석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풀러신학대학원의 조지 래드 교수가 초대 교부들 중 대다수가 지지한 바 있는 역사적 전천년주의를 회복하면서 요한계시록은 좀 더 해석하기 쉬운 책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역사적 전천년주의는 미국 복음주의권의 대표적인 학자들 중 대다수가 지지하는 관점으로 자리 잡게 됐다. 현재 밀러드 에릭슨, 돈 카슨, 더글라스 무, 웨인 그루뎀, 로저 올슨, 크렉 블롬버그, 브루스 데머레스트, 크렉 키너, 조지 비슬리 머레이, 로버트 마운스 같은 걸출한 학자들이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박형룡, 박윤선 박사가 역사적 전천년주의를 주창했고, 총신대학교의 김길성 교수와 장신대학교의 박수암 은퇴 교수, 고신대학교의 한정건 교수 등으로 그 계보가 이어진 뒤 목회자인 김형태 목사, 민병석 목사, 이광복 목사에 의해 전천년주의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재림이 정말 가까워진 이 시대에,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온갖 이단이 우후죽순처럼 난무하고 이 이단들에 의해 정통교회가 심각하게 유린되는 이 시대에 요한계시록은 더 이상 무관심의 대상이 되거나 무시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리어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돼야 하고, 더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에 대한 진지한 연구에 열성을 기울여야 한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에 대한 바른 태도와 바른 읽기 방식이 확립되고 널리 확산돼야 한다.
한국 교회 내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신앙적 관심이 앞으로 더욱더 증대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필자는 성경 중 가장 어려운 책이라고 불리는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선입견과 편견을 타파하라
우선 요한계시록을 접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몇 가지 근거 없는 선입견과 편견을 타파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다양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먼저 요한계시록은 읽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다. 요한계시록을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이 상징을 사용해서 기록됐고,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는 점에서 특히 더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쉽게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는 아예 접근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그야말로 근거 없는 선입견에 불과하다. 만약 요한계시록이 정말 어려운 책이라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은 어려우니까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을 남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한계시록 초두에서 주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은 어려우니까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요한계시록을 읽고, 다른 사람이 요한계시록을 읽어 주거나 해석하는 것을 잘 듣고, 또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것을 잘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즉 요한계시록은 얼마든지 읽어서 해석해내고 소화해낼 수 있는 책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누구든지 읽고 자신의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책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은 요한계시록의 최종 수신자가 바로 “그 종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라고 밝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대한 예언서라는 점에서, 그리고 많은 상징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경의 다른 책들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을 가진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애초부터 요한계시록은 정말 어려운 책이니 감히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편견은 반드시 타파돼야 한다. 누구든지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키면 주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키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복이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 일반 성도들뿐 아니라 목회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또 하나의 편견은 요한계시록은 무섭고 두려운 책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무섭고 두려운 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6장에서 19장까지 나오는 대환난에 대한 내용이 두렵고 가공할 만한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하는 너무나도 무서운 내용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두렵고 무서운 내용을 가진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침체와 절망을 경험하거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위로보다는 삶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요한계시록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유익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요한계시록을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편견에 불과하다. 요한계시록이 정말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하고, 영적 침체와 절망을 초래하는 책이라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서운 책이니까 조심하고,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을 남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요한계시록 초두에서 주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고 말씀하신다. 요한계시록은 공포와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책이 아니라, 도리어 복을 가져다주는 책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읽어야 하고, 적극적으로 들어야 하고, 적극적으로 지켜야 할 당신의 복된 말씀임을 명증하신다.
물론 요한계시록의 상당 부분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애초부터 요한계시록은 정말 두렵고 공포스러운 책이니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잘못된 선입견은 반드시 타파돼야 한다. 요한계시록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우리는 곳곳에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핍박과 환난을 겪게 될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상한 위로와 배려를 감지할 수 있으며, 우리를 영원한 승리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열심에 감격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 두 가지 편견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권세가 만들어낸 철저한 오해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 편견을 타파하고, 이 선입견들로부터 벗어나라! 그러면 당신은 요한계시록이 품고 있는 진리의 광맥을 발견하고 기쁨에 겨워 영광스러운 춤을 추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라
성경 66권의 어느 책을 읽든지 그 책의 기록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성경해석학의 가장 초보적인 진리다. 성경의 거의 모든 책들은 기록 목적을 책의 초두 아니면 마지막 부분에서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1~4은 누가가 누가복음을 쓴 목적이 직접적으로는 데오빌로에게, 간접적으로는 모든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확실한 내용을 전하기 위함임을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 20:31은 요한사도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밝히고 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요한계시록 1:1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확증해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다시 말하면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대해 주신 계시를, 그 종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 알게 하시려고,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 알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이다. 요컨대 요한계시록은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알게 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덮어두려고 하는 자들은 요한을 통해 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셔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정면으로 배치된 엄청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요한계시록은 공포와 두려움만을 조장하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회피하려고 하는 자들은 요한을 통해 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셔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알게 하시고, 나아가 재림에 대한 놀랍고 영광스러운 기대와 소망을 독려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외면하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10에서 주님은 당신의 천사를 통해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요한계시록을 덮어두지 말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에 따라 바르게 읽고 듣고 지키라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런 자들을 위해 예비된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목회자들이여, 요한계시록을 그 기록 목적에 맞게 바르게 읽어라. 읽고 성도들에게 바르게 해석하고 풀어줘라. 그것이 목회자들을 불러 말씀의 사역자로 삼으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신실하게 행하는 일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요한계시록 본문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하라
요한계시록 본문의 성격은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은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가장 근본적으로 ‘미래에 대한 예언서’의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은 요한계시록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미래에 대한 기록임을 확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근본적으로 요한계시록은 과거에 대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현재에 대한 것도 아닌 미래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미래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서라는 사실에 기초해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대한 책이라는 사실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현재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철저한 오해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을 미래의 책으로 읽을 때에야 비로소 요한계시록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책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로,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반드시 일어날 사건을 예고하는 성격을 가진다. 다시 말해 요한계시록은 잠언서와 같이 삶의 지혜를 교훈하는 책이 아니며, 서신서와 같이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다루는 책도 아니고, 복음서나 사도행전과 같이 과거에 일어난 일을 보고하는 책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 즉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적 기록의 성격을 갖는다. 여기서 ‘사건’이란 말이 매우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사건적 측면을 무시하고, 요한계시록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신앙적·신학적 의미에만 초점을 맞춰 왔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근본적인 성격에 부합하는 바른 독법이 아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의 근본 성격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편의적이고 자의적인 독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요한계시록의 독법으로 제시된 전통적인 방식 중에서 ‘과거주의적’, ‘역사주의적’, ‘이상주의적’ 해석보다는, ‘미래적’ 혹은 ‘미래주의적’ 해석이 요한계시록 본문의 성격에 가장부합하는 방식이라고 확신한다.
셋째로,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반드시 속히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적 기록으로서 다양한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고 해석할 때 요한계시록이 사용하고 있는 상징을 신구약성경 전체의 컨텍스트에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계시록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사용된 적이 있는 상징들을 많은 부분 재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요청된다. 다시 말하면, 요한계시록 본문을 다른 65권의 성경과 관련시켜서 해석하는 것이 가장 건강하고 균형 잡힌 독법이라는 것이다. 다른 65권의 성경을 무시한 채 요한계시록의 본문만 극단적으로 파헤치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오해와 잘못된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해석하는 독법이 소위 ‘상징주의적 해석’, ‘우화적 해석’, ‘알레고리적 해석’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상징주의적 해석이 문자적·문법적·역사적 해석을 통한 본문 그대로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도외시한 채 어떤 본문의 영적·신령적 의미만을 추구하는 해석이라면,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해석하는 독법은 문자적·문법적·역사적 해석을 통한 본문 그대로의 의미를 파악한 다음, 그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상징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독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 집단들이 상징주의적이고 우화적이고 알레고리적인 해석으로 많은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경계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바르게 이해하라
성경 66권의 거의 모든 책들은 그 책이 어떤 구조로 돼 있으며,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내재적 구조를 밝혀주는 중요 구절은 1:19이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이 구절이 제시하는 구조에 따르면 요한계시록 1장은 사도 요한이 본 것 즉 과거의 사건을, 2~5장은 지금 있는 것 즉 현재 소아시아 7교회의 상태와 천상의 현재 모습을, 그리고 6~22장까지는 요한의 관점에서 여전히 미래로 남아 있는 장차 될 일을 증거한다. 6~22장도 두 단락으로 세분화될 수 있는데, 6~19장은 재림 직전의 대환난의 시기와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을, 20~22장은 재림 이후의 천년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증거한다.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요한계시록에 좀 더 쉽고 편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더 나아가서 요한계시록의 내재적 구조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무천년주의나 후천년주의보다는 전천년주의적으로, 즉 천년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는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어내도록 이끈다. 그리고 전천년주의 중에서도 교회의 환난 통과를 거부하는 세대주의가 아니라, 교회의 환난 통과를 인정하는 역사적 전천년주의적 독법으로 이끈다.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이란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는 것을 의미하는가?
간단하게 말해서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이란 ‘밝은 종말론’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밝은 종말론’이란 한국 교회 일각과 이단, 사이비 집단에서 횡행하고 있는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이다.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의 대표적인 실례는 지난 1992년 다미선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한부 종말론 운동이다. 시한부 종말론은 예수님의 재림을 매우 두렵고, 어둡고, 또 긴박한 것으로 그림으로써 종말론의 본질을 왜곡하게 만든다. 그래서 다가오는 종말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만들며, 현실을 무시하거나 도피하게 하고, 일상 속에서 주님과의 긴밀한 교통을 누리는 비밀스러운 기쁨을 앗아가는 종말론이다.
또한 신천지나 하나님의교회와 같이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을 주창하는 이단, 사이비 집단들은 복음적인 구원론을 철저히 왜곡시킨다. 특히 신천지 집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정통 기독교의 참된 복음을 거부하고, 교주의 지시와 훈계를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얻는 율법주의적 행위 구원을 주창하고 있다. 그들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한 바 ‘다른 복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과 대비되는 ‘밝은 종말론’은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다시 오셔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맞이해 혼인잔치를 베푸실 것을 고대하고 대망하는 종말론을 의미한다. 오매불망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랑을 맞이하는 그날이야말로, 신부인 교회에게 있어서는 엄청나게 영광스럽고, 환희에 차고,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날이 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에 기초한 종말론이다.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음을 경험하셨으나, 3일 만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를 완성하기 위해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신다는 소식이야말로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영광스럽게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끌어 가실 주님에 대한 예언적 기록이 바로 요한계시록이기에, 모든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을 읽고 들을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환희와 기쁨과 승리의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인 것이다.
또한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이란 미래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예수 재림 직전에 있을 대환난의 시기를 교회가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오늘의 삶 속에서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고, 영적으로 무장하기 위해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며,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며, 끝까지 견디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성도들을 권면하는 독법인 것이다.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딛 2:12~13)하는 독법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주님께서 대환난의 시기에도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승리케 하신다는 확신을 고취시키는 독법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이런 관점에서 읽고 해석하고 적용할 때 모든 성도들은 밝고, 건강하고 균형 잡힌 종말론으로 무장하게 되며, 그 결과 요한계시록 2~3장이 약속하고 있는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복을 누리도록 성숙해가게 된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건강한 관심을 회복하길 기대하며
주님 재림의 징조가 날마다 더 뚜렷하게 보이는 이 시대에, 주님의 재림이 진정 가까운 이 시대에 요한계시록은 정말 더 이상 무시돼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온갖 이단과 사이비가 활개를 칠수록 정통 교회는 더더욱 요한계시록에 대해 건강한 관심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바르게 읽고, 듣고, 지켜 주님이 약속하신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전심전력해야 한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 목회적 독법은 ① 요한계시록이 이해하기 어렵고,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하는 책이라는 편견을 타파하는 것, ②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 ③ 요한계시록 본문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 ④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 ⑤ 밝은 종말론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읽고 해석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존귀하신 주님께서 사랑하는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에 대한 건강한 관심을 회복시켜 주셔서,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복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한국 교회가 한 차원 더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출처 : 김광석 목사와 함께 하는 성경 공부
글쓴이 : 김광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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