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요한 계시록!!

[스크랩] 요한계시록 설교 22편 모음(송영목교수)

하나님아들 2012. 12. 12. 17:17

 

 

 

일곱 영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 (1:4-6)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으로써 헌신하자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겠다.

 

첫째로,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교회를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시는 분이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축도문은 계 1:4-6절이다. 1:4-6에서 요한은 아시아에 살던 7교회를 향해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 그리고 성자 예수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축도한다. 이 시간에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만 살펴보자.

 

1:4에 보니 성령님을 아주 특이하게 소개한다. 성령님을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고 소개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왕권이 시행되는 보좌 앞에 계시는 일곱 영들이다. 계시록에는 성령님을 두 가지로 방식으로 소개한다. 하나는 '성령' (1:10; 2:7, 11, 17, 29; 3:6, 13, 22; 4:2; 17:3; 21:10)이고, 다른 하나는 일곱 영들’ (the seven Spirits; 1:4; 3:1; 4:5; 5:6)이다. 단수형인 성령은 주로 교회 안에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한다.

 

성령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인 일곱 영들이라고 할 때 일곱은 완전을 상징한다. 그리고 일곱 영이란 말은 계시록에 4번 등장한다. 4번 등장한다고 할 때 4는 동서남북 즉 온 세상을 상징한다. 따라서 일곱 영들은 '세상 속으로 하나님의 왕권을 시행하시는 성령님, 온 땅에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이루시는 성령님의 충만함'을 가리킨다. 이 이유로 계 5:6'일곱 영'을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소개한다. 온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기 위해 저와 여러분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일곱 영이신 성령이시다. 바로 이 일곱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 원하신다.

 

둘째로, 무엇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가? 온 세상에 예수님의 왕권을 시행하시기 위해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

 

요한이 일곱 영을 언급할 때 스가랴 4장 인용한다. 요한에게 있어 슥 4장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예수님과 성령님의 공동 역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본문이다. 선지자겸 제사장인 스가랴는 바벨론에서 태어나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인데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4장에서 스가랴는 가지가 7개나 달린 금 촛대와 그 촛대에 기름을 공급하기 위해 좌우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의 환상을 본다. 세상을 밝히는 순금 촛대는 예수님을, 촛대에 달린 7가지는 교회를 상징하고, 끊임없이 공급되는 감람유는 성령을 상징한다. 4:1014절에 보니, 성령님은 온 세상의 주되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리고 세상 사람이 보기에 교회가 하는 일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바로 그 일을 통해 역사하신다. 스가랴가 본 환상은 일차적으로는 스가랴 당시에 예루살렘에 다시 성전이 건축될 것을, 이차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원의 빛으로 오실 것이고, 예수님과 연합된 교회가 사람의 능이나 힘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구원의 빛을 끊임없이 비출 것을 의미한다.

 

요한이 계시록 전체에서 대답하고자 하는 질문은 소아시아의 7교회가 내외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땅 위에 통치를 이루어 가시는가?”이다. 4:6은 요한에게 그 대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이 때 요한은 스가랴처럼 하나님 나라를 온 땅에 이루어 가시는 성령님과 예수님을 연결시킨다 (16:7).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이제는 성령께서 계속 이루신다는 것을 요한은 알았다.

 

그래서 계 5:6에서 요한은 일곱 영이신 성령님을 어린양이신 예수님과 연결시킨다. 예수님은 어린 양이신데 뿔이 7개요 눈도 7개나 된다. 일곱 뿔은 죽임당한 어린양 이신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와 능력을 상징한다. 일곱 눈은 완전하게 보시는 것 즉 예수님의 전지하심을 상징한다. 그런데 요한은 어린양의 일곱 눈을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일곱 영이신 성령님은 어린양의 능력과 전지하심을 온 땅에 이루기 위해 일하신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룬 구원을 일곱 영이신 성령님은 이제 온 땅에 실현시키신다. 성령님은 일곱 뿔 즉 완전한 권능과 일곱 눈 즉 완전한 전지하심을 통해 온 세상에 예수님을 증거하신다. 이제는 성령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교회에게 지속적으로 공급하사 온 땅에 천국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온 땅에 천국을 이루시는 성령님은 교회를 사용하시기에, 우리는 먼저 지혜와 계시의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눈을 밝히사 우리가 받은 기업인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알도록 간구해야 한다 (1:17-18). 우리가 믿는 복음이 얼마나 강력하며 영광스러운 것인지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어린 양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승리의 권세가 얼마나 강력한지 깨닫도록 기도해야 한다. 온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기 위해 일군된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와 평강을 날마다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도 여러분. 온 땅에, 사회 모든 영역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달란트 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왕권을 이루어 가도록 준비하고 헌신하면 된다. 이 일을 위해 여러분은 말씀의 빛 속에서 전문 기술을 최선을 다해서 배워야 한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관점인 성경의 관점에서 열심히 배우라. 불신자들이 얻지 못하는 성령의 능력과 지혜와 도움을 여러분은 받고 시작하기에 불신자들과 출발점이 다르다.

 

무엇보다 우리의 신분의 복됨을 알라. 4:12에 등잔이 빛을 발하도록 감람유가 흘러 들어오는데 그 기름을 금 기름 (golden oil)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체험하여 맛본 사람만이 그 가치를 알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인 7등잔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 졌다. 금은 고귀함과 정결을 상징한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고귀함과 정결의 신분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 이런 신분적인 변화를 인해 더욱 감사함으로써 헌신하자.

 

마지막으로, 성령의 은혜와 평강을 받는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주시는가? 계속해서 이기는 축복을 약속한다.

 

계시록에서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한번뿐인 구속 사역으로 말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다시 반복될 수 없다. 하지만 요한이 성도를 이기는 자라고 말할 때 현재 분사형으로 말해서 계속해서 이기는 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기는 자를 말할 때 성령님과 연결시킨다 (2:7, 11등 참고). 소아시아 7교회는 교회 내에는 이단들과 영적인 나태함과 세상과의 타협으로, 교회 밖으로부터는 박해와 우상 숭배를 강요 받아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내적-외적 어려움 속에서 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었다면 성령의 능력과 위로와 은혜와 평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은혜와 평강을 기도로 받아서 계속해서 이기는 자로 살아서 헌신해야만 했다.

 

요한 당시는 물론 오늘 날 교회가 주님의 구원 사역을 온 땅에 힘있게 증거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려면 성령의 능력을 기도를 통해서 받아야 한다. 기도를 통해 여러분의 영성이 훈련받아야 하고 튼튼해져야 한다. 영성이 없는 지성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지성이 없는 영성은 사람을 공허하게 한다. 영성과 지성이 겸비된 성령의 사람이 더 확실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자.

 

말을 맺자.

 

우리는 온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시행하기 위해 사용될 성령의 도구이다. 이 일에 사용되도록 성령의 위로와 능력과 평강과 은혜를 사모하라. 그리고 마음 눈을 밝혀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날마다 세상을 이기고 또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날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도록 힘쓰자. 아멘.

 

 

 

 

 

 

 

 

 

 

 

 

 

 

 

 

계시고, 계시었고 오시는 하나님 (1:8)

 

여러분은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어떤 인상을 받습니까? 어려움과 더불어 충격과 공포를 느끼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주신 '계시'이기에 자신을 감추시지 않고 밝히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을 "읽는 자들과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계시록에는 복을 7번 언급합니다. 7은 완전을 상징하기에, 우리가 계시록을 읽고 지키면 큰 복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시록을 읽을 때 받는 느낌은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안에 더 철저히 숨어 계시는 것 같고, 약속하신 복은 점점 더 남의 일처럼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계시록은 주후 66년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성경 66권의 마지막 책이라기 보다 성경의 결론입니다. 계시록의 수신자인 소아시아의 7교회는 지금의 터키 서남부 지역의 교회인데 유대인과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세벨로 상징되는 거짓 선지자들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이런 내적, 외적 어려움은 영적으로 어린 소아시아의 7 교회의 정체성을 흔들만한 것이었습니다.

 

계시록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부하나님께서 직접 계시록 안에서 말씀하시는 곳은 두 군데 밖에 없습니다. 1:8과 계 21:5-8절입니다. 계시록을 요한에게 계시하신 성부 하나님은 자신을 계 18절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우리말 번역은 현재-과거-미래처럼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현재-과거 진행- 현재분사형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알파-처음과 오메가-나중이심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마침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인류 역사의 설계자시요 완성자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44:6). 하지만 어려운 문제는 그 다음 표현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도 있고 (현재), 전에도 있어왔고 (과거 진행), 장차 있을 분 (미래)이라고 하셔야지, 왜 미래를 지금 오고 계시는 분으로 현재분사형으로 끝맺을까요? 요한은 미래의 하나님을 '장차 있을 분' 대신 '지금 오고 계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의 하나님 중심의 시간적 이해의 독특성을 봅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다시 미래로 흐르는 시간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요한의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시대를 결정해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언제나 신실하신 전능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무슨 이유로 우리는 언제나 신실하신 전능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전에도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위해계셨고 역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전에 계셔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로 역사하신 하나님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이라는 과거의 큰 한 묶음의 구원 사역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운명(형편, 상태?)을 결정해 버렸습니다. 주님의 인격과 사역이 시간의 흐름 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계 3:215:5이겼다’ (aorist)라는 말은 예수님을 통한 영단번의 구속 사역을 강조합니다. 주님께서 과거에 이기셨기 때문에 세상과 교회의 모든 형편은 이미 결정되어 버렸습니다. 주님의 오심과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가 이미 이긴 자가 되어버렸고, 사탄의 권세는 점점 패배하게 됩니다.

 

두 번째? 왜 우리는 언제나 신실하신 전능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제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현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계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미래의 예언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계시록 안에는 현재 중심적인 면이 강합니다. 현재 중심이란 말은 요한과 소아시아 7교회 당시에 주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시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 거하시며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현재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시방도/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란 말이 계시록에 4번 등장하는데 그 중 두 번은 (11:17; 16:5) 기도의 문맥에서 등장합니다. 즉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기 위해서는 기도 충만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계속 죄악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며 살 길은 기도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우리는 언제나 신실하신 전능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오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 역사하실 하나님 그리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고 계시는 하나님은 세상을 쉬지 않고 열심히 다스리시는 구원과 심판의 하나님입니다. 요한의 입장에서 볼 때 오고 계시는 분은 주님의 심판주로서의 오심을 특별히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이 오고 계시는 하나님의 활동은 세 부류로 나누입니다. 첫 번째는, 요한 당시의 교회를 향한 현재적 심판입니다. 계시록 2:16에서 보듯이 버거모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버가모교회와 싸워서 심판을 하시겠답니다. 이 심판은 지옥이나 영벌을 위한 심판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를 정화시키고 깨끗케 하시기 위한 현재적인 책망입니다. 주님도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이미 심판이 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지금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해 놓고도 계속 죄 중에 있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심판하십니다. 두번째는 주님의 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심판이라는 임박한 미래이며, 마지막 세번째는 주님의 재림이라는 먼 미래입니다. 예루살렘 심판을 통하여 소아시아 7교회를 핍박했으며 예수님을 배척했던 유대인을 심판하는 주님으로 장차 오십니다. 주님의 재림을 통하여 장차 오실 하나님은 온 세상 인간의 역사를 완성하실 하나님으로 오십니다. 오고 계시는 하나님은 이미 이 세상에 그리고 교회 안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셔서 다스리시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오시고 또 오십니다. 성도에게는 구원자로 불신자에게는 심판주로 오시는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기 위해 지금도 오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오늘도 소망합니다.

 

계시록 안에 이기는 자라는 말은 종종 현재 분사로 표현되어있는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과거의 사역에 기초하여 지금 계속적으로 승리하며 살 것을 말씀합니다. 이 지속적인 승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은 우리를 누구라 부릅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합니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한 복을 받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아버지는 과거에 우리를 위해오셔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따르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현재 우리 안에성령으로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현재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오고 계시는데 우리의 모든 원수를 물리치시며 신원하여 주시며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아멘.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승리의 언약 (2:8-11)

예수님 당시에 편지는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사업을 위한 편지와 개인적인 편지가 발달했고 편지의 형식이 잘 짜여져 있었습니다. 2장에서,편지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교회를 가리키는 등잔 가운데 거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은 교회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편지처럼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말씀으로 교회를 심방하시고 돌보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교회를 돌보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성경과 성령의 감동-감화를 통해서입니다.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승리의 언약이라는 제목으로, “충성하여 언약의 복을 누리자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왜 충성해야 합니까? 우리와 예수님은 언약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언약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계 2-3장의 7교회에게 주시는 편지에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7편지의 형식과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2-3장의 7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보통편지가 아니라 언약의 형식에 맞춘 언약 편지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언약들은 종주라고 불리는 큰 왕과 속국의 작은 왕이 체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등한 것이 아니라 종속적인 언약입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언약은 모두 이런 종류의 언약인데 종주권 언약이라 불립니다.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뿐 아니라 힛타이트와 같은 인근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의 언약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조선시대에 점령군인 중국 왕 앞에 조선의 왕이 절하며 무릎꿇고 항복하면서 조약을 체결하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큰 왕이 원하는 대로 작은 왕은 승낙하고 순종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등한 계약이 아니라, 종속적인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주권 언약은 5가지 특성을 가집니다. (1) 먼저 서론인데 큰 왕이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2) ‘역사적 서언인데, 큰 왕이신 예수님이 신하인 교회에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해주었다는 설명입니다. (3) ‘의무조항로 언약의 내용을 밝히며 (4) 언약이 공개적인 효력을 자지도록 하기 위해서 증인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5) 언약을 지키면 축복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선포하고 마칩니다.

 

이런 종주권 언약의 형식이 서머나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인 계 2:8-11에 나타납니다. 먼저 서론은 8절입니다. 큰 왕이신 예수님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둘째는 역사적인 서언 즉 예수님께서 서머나교회에게 해 주신 일들을 설명하는 것인데 계 29절에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서머나교회의 환난과 궁핍을 알고 계시며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즉 사탄의 회-무리들로부터 받은 핍박도 알고 있습니다.

셋째는 의무조항인데 서머나교회가 지켜야 할 내용인데 10절입니다. 장차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마귀가 10일 동안 서머나교회를 시험할 것이지만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넷째는 증인을 세우는 것인데, 큰 왕이신 예수님은 성령님을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11절에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다섯째는 축복과 저주인데, 서머나교회에게는 축복만 있습니다. 이 언약의 축복은 환난 가운데서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이것과 관련된 축복은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종주권 언약의 형식은 서머나교회 그리고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왕에게 충성해야만 하는 언약관계 속에 있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렇다면 우리의 큰 왕이신 예수님께 우리는 어떻게 충성해야 하는가? 환난 가운데서 이김으로 충성할 수 있습니다.

서머나교회를 핍박하던 주 대적은 예수님을 믿지 않던 불신 유대인이었습니다. 서머나는 지금 터키의 이지미르라는 도시인데 이스탄불과 수도 앙카라 다음으로 3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아시아의 긍지라고 불렸으며 무역이 번성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버가모에는 고대에 이미 20만권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서머나교회는 궁핍했다고 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실상은 (믿음이) 부요한 자라고 주님은 세상의 눈과 다르게 평가해 주셨습니다. 서머나교회는 하나님을 향해서는 부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 당시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어서 교회를 곤경에 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배후에 사탄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교회의 대적을 사탄의 회라고 부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에 언약의 복을 받았기에, 그 복이 예수님 안에서 완전해 졌음을 누구보다도 환영해야 했는데 오히려 주님을 죽이고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실로 사단의 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회당은 헬라 이방신을 섬기기도 했던 종교 혼합주의의 온상 역할을 했습니다. 2:28-29의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불신 유대인들은 이면적 유대인이었지 참되고 내면적인 유대인은 아니었습니다. 불신 유대인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겨서 언약을 깨고 어긴 변절자들이었습니다 (8:39-44). 이제 참 유대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대를 잇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사단은 10절에서 마귀로 불리는데 서머나교회 중 몇 명을 투옥하여 시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간은 다니엘과 3친구들이 시험받은 기간과 똑 같이 10일인데 짧은 시간인 동시에 심한 것이었습니다 (1:11-21).

 

투옥과 환난을 받은 이유는 서머나교회가 세상과 사탄과 타협하지 않았고 처음 사랑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언약을 맺고 있는 사람은 사단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훼방과 중상모략 그리고 박해는 155년경에 서머나의 주교였던 폴리캅의 화형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폴리캅이 신앙 때문에 로마 총독 앞에 잡혀왔을 때 여러 회유와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욕하고 가이사를 믿어라는 말에, 폴리캅은 “86년 동안 나는 그 분을 섬겨왔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전혀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해 준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이때 화난 총독은 야수와 불로 너를 죽일 수 있다고 한층 더 협박했습니다. 이 때 폴리캅은 당신은 한 시간 타오르고 얼마 후에 사라질 불로 나를 협박하지만, 당신은 악인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한다. 나를 합당하게 여기사 당신의 증인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결국은 화형과 동시에 창에 찔려 기독교 역사상 12번째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사탄의 역사가 강력하기에 죽도록 충성하여 이길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머나교회가 섬기고 있는 큰 왕이신 예수님이 바로 처음과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처음과 나중이란 말은 예수님이 인간 역사의 설계자이며 통치자요 완성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절대적인 권세로 세상을 영원히 다스리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에게 위로의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 승리의 주님이기에 서머나 교회는 목숨 걸고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16:33: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기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참된 교회를 알 수 있는 표지들은 바른 설교, 공정한 치리의 시행 그리고 바른 성례의 시행입니다. 하나 더 첨가한다면 아마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중 8복을 말씀하실 때, 7가지 복을 말씀하신 후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교도 신학자인 존 오웬은 말하기를 우리의 모든 박해와 환난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하지만 오직 우리가 그것에 참여할 때만 우리의 것이다” (1:24).

 

주님은 우리의 환난과 실상을 아십니다. 왜냐하면 촛대 사이를 거니시기에. 어렴풋이 아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세밀하게 아십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다 아시되 구석 구석 정확히 아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주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이 이유로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생명의 주님께 충성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충성하는 자가 받을 약속은 무엇입니까?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 둘째 사망을 면하는 것입니다.

 

충성하는 자에게 큰 왕이신 주님은 언약의 복을 약속하십니다. 바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고난이 커서 죽을 경우에는 곧바로 생명의 왕관을, 살아서 고난 당할 때도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곧 둘째 사망인 영원한 죽음을 면하는 것입니다. 20:6에 보니, 둘째 사망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첫째 부활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첫째 부활은 주님 재림시에 우리가 부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죽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다시 살아난 것을 가리킵니다. 성도는 주님 안에 있는 새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이기에 첫째 부활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첫 아담 때문에 겪었던 사망에서 이미 영적인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요한은 생명의 면류관을 설명할 때 버가모의 여신 Cybele가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머나의 Pagos산 위에 세워진 건물들이 왕관 모양이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통해서 더 영광스런 생명의 면류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당시에는 어떤 업적을 달성한 사람에게 표창하는 방식으로 화관을 씌어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훈장을 수여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화관을 머리에 씌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면류관을 이기는 자가 받게 된다는 것은 승리의 상징인 동시에 큰 상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주님 안에 있는 영적인 부활과 영생의 상급을 가리킵니다. 또한 생명의 면류관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이라는 언약의 복의 완성을 소망하게 합니다.

 

말을 맺습니다.

과거에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박해를 통해 교회를 멸하려 했던 사탄은, 요즈음 전략을 바꾸어 교회로 하여금 나태하고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삶에 주님의 이름으로 당하는 어려움과 세계 여러 곳에서 환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환난을 두려워 맙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언약을 맺고 있는 언약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언약백성은 큰 왕이 책임지시는 복된 백성입니다. 주님이 처음과 나중이시기에 언약 백성을 돌보시며 인간 역사를 원하시는 대로 이끄실 뿐 아니라, 죽음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언약의 복을 충성하여 누리도록 힘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권면 (3:14-22)

밧모라 불리는 섬에 유배된 요한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편지를 쓴다. 라오디게아는 지금의 터키 서부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사람이 사는 집은 겨우 몇 채밖에 안 된다. 하지만 요한이 계시록을 썼을 때만해도 제법 상권이 잘 형성된 도시다. 부유한 도시였다. 하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그렇지 않았다. 돈 잘버는 것이 때로는 주님의 은혜도 아니며 축복도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교훈에 주의해 보아야 한다.

나는 주님을 닮아가면서 신앙의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우리에게 왜 신앙의 열정이 식어지는가? 세상과 타협하고 자기 만족에 빠져서 그렇다.

먼저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만 받고 미지근해진 원인을 살펴보자. 3:16절의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라는 토해버릴 것이다는 표현은 일상 식사관습에서 온 말인데 속에 담아두면 거북해서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차가운 것과 더운 것에 대해 살펴보자. 주석가들은 뜨거운 것은 히에라폴리스의 온천물을, 차가운 것은 골로새의 차고 시원한 물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라오디게아는 북쪽 히에라폴리스가 아니라 오히려 남쪽에서 올라오는 수로에 의존했다. 히에라폴리스의 온천수는 다량의 석회로 인해 식수로는 부적합했다. 라오디게아의 물은 히에라폴리스의 온천수보다 식용으로 더 적합했다. 따라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히에라폴리스의 온천물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미지근 것을 찾아야 하는가? 더운 것과 차가운 것 모두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왜냐하면 식사관습에 의하면, 열에 의해 갈증을 느낀다면 차가운 것을 마셔야 한다. 반대로 추위에 의한 갈증은 더운 것으로 해갈해야 한다. 더운 것과 차가운 것이 모두 긍정적으로 나타난 경우는 포도주에서도 볼 수 잇다. 대개 포도주를 얼음과 함께 혼합해서 차갑게 먹었지만 때로는 따뜻한 물과 혼합된 포도주도 잔치에 배설되기도 했다. 뜨거운 포도주나 차가운 포도주를 손님들은 선택할 수 있었다. 주전 2세기 이래로 유럽의 지역들 그리고 갑바도기아 지역에는 이를 위해 물을 데우는 설비를 갖춘 부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의 반대인 미지근한 것은 식사 중에 입에 맞지 않아서 내뱉어야만 하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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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근한 물이나 미지근한 포도주를 담은 용기는 그 주위의 온도와 별다를 바 없는 것으로서 구별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미지근함은 라오디게아 성도의 삶이 주위의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무미건조한 삶을 청산해야 한다는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다.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생활의 원인은 이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도 받지 않고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왔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 심취해 버린 라오디게아교인들은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는 줄로 알고 스스로 속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벌거벗은 자요 수치스런 자요 회개해야 할 자였다. 세상의 재미, 세상의 풍요로움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심취해 있으면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주님을 위해 불태워야 할 신앙의 열정은 세상에 빼앗기고 만다.

 

둘째로, 우리는 어떻게 신앙의 열정을 회복할 수 있나? 아멘이시며 참되고 충성된 증인이신 주님을 닮아야 한다.

 

주님이 아멘이시며 참되고 충성된 증인이시라는 말씀은 계 1:5또 충성된 증인으로와 비슷한 말씀이다. 아멘이라는 히브리어는 참됨과 충성이라는 헬라어와 동등한 말이다. 그러므로 아멘이시며 참되고 충성된 증인은 모두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신약에서 유일하게 계 3:14에서만 아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계 3:14 이외의 신약 125번 모두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참된 것을 확인할 때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원래 ‘amen amen lego humin’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특이하게 구약에서는 사 65:16에서만 두 번에 걸쳐 아멘이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하는데 사용된다. 65:16에서 아멘의 하나님 즉 진리의 하나님이란 말이 두 번 사용된다. 아멘이신 하나님이 행하신 것은 사 65:17인데 바로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니라는 말씀이다. 새로운 창조다. 아마 계 3:14의 아멘이신 예수님이 하신 일도 사 65:17의 아멘이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신 일과 똑 같은 것일 것이다. 아멘이시며 참되시고 충성스러우신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은 사람과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창조를 위해 주님은 죽기까지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예수님이 참되고 충성된 증인으로 불린다. 충성된 증인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요한은 아마 시 89:28에 나오는 증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89편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권을 영원히 보장하시며 모든 원수를 정복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이 약속은 해와 달처럼 영원할 것이다. 다윗의 왕권은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영원한 나라를 내다본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이라고 하는 말은 공평과 사랑으로 예수님께서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이 나라에 도전하는 모든 세력은 파멸 당할 것을 말씀한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하는 것을 양식을 먹는 것처럼 절대절명의 사명으로 여기면서 충성하셨다. 지상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치고 치유하시고 설교하신 것인데 조금도 불충성스러운 면이 없었다. 진리를 가르치시되 인기를 추구하거나 세상과 타협하신 일은 없었다.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은 열정 그 자체이셨다. 식사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고치시고 또 고치시고 가르치시고 또 가르치시고 기도하시고 또 기도하셨다. 언제나 공평과 사랑으로 일하셨던 주님을 그 어떤 대적도 그것이 왕이든 종교 지도자든, 풍파, 귀신, 혹은 군병이든 무너뜨리지 못했다.

 

주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가, 예수님처럼 공의와 사랑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한다면 열정을 회복할 수 있다. 주님의 일은 우리가 한평생 모든 것을 바쳐서 불사르듯 열정으로 일 할만 한 것이 아닌가?

 

셋째로, 우리는 어떻게 신앙의 열정을 회복할 수 있나?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통치자이신 주님을 닮아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 (통치자)"이라는 표현은 계 1:5"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이라는 말씀과 비슷하다. 따라서 창조의 근본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목적격적 소유격) 통치자가 되셨다라는 말이다. 지금도 주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새 창조를 통치하시는 주권자로 일하신다.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는 이스라엘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 가셨다면, 천상의 보좌에서는 모든 시대 모든 백성을 다스리시는 우주의 왕으로 통치하신다. 주님의 통치는 신실하다. 변덕스럽지 않다. 언제나 공평과 사랑으로 통치하신다. 바로 이런 주님의 신실함과 불변함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처음 마음먹은 것을 늘 신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가 신앙의 열정을 회복할 때 어떤 약속을 주시는가?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면서 이기고 주님 보좌에 앉게 된다.

 

본문 20-21절이 그 약속이다: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보좌에 앉게 해 줄 것이다”. 성경은 신앙 생활에는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진리라고 말씀한다. 무릇 있는 자는 더욱 많이 받아서 누릴 것이며, 없는 자는 빼앗기고 더 없게 된다. 5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5 달란트를 더 얻는다. 1 달란트를 그냥 땅에 묻어둔 사람은 그것을 빼앗기게 된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그 날은 기쁨으로 감사하면서 살 수 있다. 그 날은 좀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오히려 인내하며 감사할 수 있다. 그 날은 기도 응답을 받고 남에게도 주님의 사랑의 향기를 풍기면서 살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육체의 정욕과 죄 가운데 있다면 그 날은 은혜가 되지 않고 불평만 생기고 되어가던 일도 꼬이게 된다. 성령님과 제대로 정상적으로 교제할 수도 없다. 그 날은 남의 눈에 있는 티가 들보로 보인다.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의 참되심과 공평과 신실하심을 닮고 주님을 영접하면 할수록 더욱 더 주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된다. 더욱 더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게 된다. 더욱 더 주님의 보좌에 앉아서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 생활에서 더욱 부요해지려면, 문제는 우리가 속히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신실하심을 닮는 것이다. 주님의 새롭게 하심을 믿고 더욱 새것답게 사는 것이다. 하늘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을 모든 삶의 부분에 영접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말을 맺자.

 

우리가 신앙의 열정을 잃고 미지근해져서 주님이 꺼려하시고 내뱉어버릴 상태에 있다면 주님을 닮아가야 한다. 주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재창조의 사역을 위해 목숨을 불사르셨고 충성된 증인이셨다.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동일하게 다스리고 계신다. 주님을 닮으면 닮을수록 우리는 더욱 더 풍요로운 교제와 승리를 맛보게 된다. 아멘.

성찬을 통한 왕의 알현 (3:14-4:1)

 

우리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이 일치할 때도 있지만, 다를 때도 종종 있다. 우리 스스로 만족하면서 부유하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하다고 판단하실 때가 있다. 세상의 부요함에 빠져서 미지근했던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주님의 생각은 그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종종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의 생각은 너희와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다 셀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어서 돌이키며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성찬에 참여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주님과 교제해야 한다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주님과 교제하는데 방해되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 동화되는 영적인 나태는 우리를 가난하고 불쌍한 처지로 만든다.

 

소아시아에 위치한 라오디게아는 주전 3세기에 시리아의 왕 안티오커스 2세가 세운 도시다. 안티오커스 2세가 자신의 여동생과 아내 라오디케 (Laodice)의 이름을 따라 라오디게아라 부르게 되었다. 주후 60년경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었을 때에도 로마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도 재건사업을 펼칠 정도로 부유한 도시였다. 라오디게아의 특산물은 양털로 짠 깔개와 옷이었다. 요한 당시에 라오디게아에 은행업도 발전되었다. 불행히도 이 교회는 경제적인 부요함과 자기 만족에 도취된 교회였다 (3:17).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라오디게아교회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에 있었다 (17).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단을 허용한 것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나태하여 위험에 처해 있었다. 소아시아 7교회 중에서 주님으로부터 유일하게 책망만 받은 교회다. 이런 부유함에 만족하면서, 미지근하고 영적으로 해이해진 교회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주님은 (14) 포기하지 않으시고 회개로 초청하신다 (3:19).

 

3:15절의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는 구절을 잘 안다. 이 구절은 라오디게아에서 북쪽으로 약 7km에 위치한 히에라폴리스의 온천물이 흘러와서 라오디게아에 도착해서는 미지근하게 되어버린 것을 염두에 두고 주님이 이 말씀을 했다고 (지정학적인 배경으로) 해석해 온 것이 마치 정론으로 굳어져 버린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정당한 해석인가? 미지근한 것과 반대되는 차가운 것과 더운 것에 대해 살펴보자. 주석가들은 뜨거운 것은 북쪽의 히에라폴리스의 온천물을 가리키고, 차가운 것은 동쪽으로 11마일 떨어진 골로새의 차고 시원한 물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라오디게아는 북쪽과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서 올라오는 수로 (aqueduct)에 의존했다. 히에라폴리스의 온천수는 다량의 석회로 인해 염색이나 관개 혹은 목욕물로는 적합했지만 식수로는 부적합했다. 라오디게아의 물은 히에라폴리스의 온천수보다 식용으로 더 적합했다고 한다. 따라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라오디게아의 온천물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은 아닌 것 같다. 더욱이 어디서도 수로를 통해서 공급된 라오디게아의 물이 거부할 만하고 미지근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라오디게아인들은 로마 시대에는 라오디게아 남쪽 5마일 지점으로부터 수로로 양질의 물을 공급받았다. 따라서 라오디게아의 미지근한 물은 히에라폴리스의 온천과는 별 상관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미지근한 것을 찾아야 하는가? 요한의 독자들에게 익숙한 일상 식사 관습에서 찾을 수 있다. 더운 것과 차가운 것 모두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왜냐하면 식사관습에 의하면, 열에 의해 갈증을 느낀다면 차가운 것을 마셔야 한다. 반대로 추위에 의한 갈증은 더운 것으로 해갈해야 한다. 물론 추위를 탈 때도 더운 것을 필요로 한다. 더운 것과 차가운 것이 모두 긍정적으로 나타난 경우는 포도주에서도 볼 수 잇다. 대개 포도주를 얼음과 함께 혼합해서 차갑게 먹었지만 때로는 따뜻한 물과 혼합된 포도주도 잔치에 배설되기도 했다. 뜨거운 포도주나 차가운 포도주를 손님들은 선택할 수 있었다. 주전 2세기 이래로 폼페이나 유럽의 지역들 그리고 갑바도기아 지역에는 이를 위해 물을 데우는 설비를 갖춘 부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의 반대인 미지근한 것은 식사 중에 입에 맞지 않아서 내뱉어야만 하는 것을 가리킨다. 미지근한 물이나 포도주를 담은 용기는 그 주위의 온도와 별다를 바 없는 것으로서 구별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미지근함은 라오디게아 성도의 삶이 주위의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다.

 

경제적인 부를 소유하고 있지만, 성도가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동화되면 곤고하고 불쌍하고 벌거벗어 수치를 당하고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다 (17). 그 속에는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삶의 예배가 없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도 없다. 세상에 영향력을 미칠 수도 없다. 오직 주님으로부터 뱉음을 당한다.

 

마지막으로,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을 따라 살며 성찬을 통해 왕되신 주님과 교제해야 한다.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진실되게 감당하신 아멘이시고, 참되며 충성된 증인이시며, 창조의 통치자 (근본)이시다. 진리를 위해 죽기까지 아버지 하나님께 충성하신 예수님이시다. 복음의 증인역할을 열심으로 감당하신 분이시다 (14). 그 결과 피조물의 왕으로 높아지셨다. 영적으로 나태해진 라오디게아교회는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서 열심을 내고 진실되게 증인 역할을 감당하면서 불로 연단한 금과 흰 옷을 사서 입고,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한다 (18). 불로 연단한 금은 무엇인가? 예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최고 가치의 새롭고 참된 부요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소유하지 않고 대신 다른 무엇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실제로 가난하고 곤고한 자이다. 흰옷은 거룩하고 진실되고 의로운 행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안약은 어두운 영적인 눈을 신령한 안목으로 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거짓 만족을 버리고,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회개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더불어 먹고 교제하실 것이다. 3:20절은 통상적으로 성도가 마음 문을 열면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내주하실 것이라고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결혼 잔치의 배경과 바로 뒷 구절인 계 4:1절의 열린 문을 염두에 둔다면 소아시아의 7교회가 요한처럼 예배 (특별히 성만찬)를 통하여 천상의 성소에 들어가서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눌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참고 아 5:2; 25:6; 62:9; 39:17; 22:1-14; 14:15-24; 19:9). 예배는 천상과 지상의 경계를 초월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경계도 초월한다. 즉 바로 지금 여기에서 저 하늘의 미래적 영광을 경험한다. 4:1절 이하에서 요한이 천상으로 올라가서 보좌 환상을 보게 된다.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성찬의 교제는 왕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이미 죽어 천국에 가 있는 성도와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시간이다.

 

죄악을 바르게 진단하고 구체적으로 회개하는 삶, 진리를 따라 사신 충성된 증인이신 주님을 닮은 삶, 예배와 성찬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삶을 살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기는 자, 보좌에 앉힌 자로서 살도록 약속해 주신다 (21).

 

말씀을 맺자.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삶은 영적인 나태로 나타나는데 주님이 뱉어버리실 정도로 싫어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 빠져서 만족하는 영적인 나태에 빠질 것이 아니라, 대신 회개하여야 하고, 주님을 부지런히, 열심을 내어 섬겨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면서 주님과 더불어 친근히 교제하고, 성찬을 통하여 먹고 마셔서 왕이신 주님을 알현해야 한다. 왕과 더불어 먹고 마셨다면 자부심을 가지고 세상에서 열심히 우리 왕을 자랑하고 섬겨야 한다. 아멘.

 

 

 

 

 

 

 

 

 

 

 

 

 

 

 

 

 

 

 

 

 

 

 

 

 

 

 

 

이 땅에서 드리는 천상의 예배 (4:1-4)

 

이 땅에서 드리는 천상의 예배라는 제목으로 나는 여기서 천상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4:1절은 세대주의자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구절입니다. 4:1을 통해서 세대주의자들은 요한이 하늘에 올라간 것은 주님의 재림 전에 교회가 대환난을 겪지 않기 위해 휴거 되는 것으로 본다. 그들의 주장의 근거는 계 4:1절 이후로 더 이상 에클레시아 즉 교회라는 용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기에 교회는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고 휴거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틀린 것이다. 예수님이란 이름도 계 4장에서 11장 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기에 계 4-11장 까지는 예수님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가? 없다.

 

첫째로, 왜 우리는 여기서 천상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우리는 이미 하늘 보좌에 앉힌 자이기 때문이다.

 

4:1이 일 후에로 시작한다. 이 일이란 계 2-3장에서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소아시아의 7교회에게 말씀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계 2-3장과 계 4장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3:21-22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보좌가 계 4:1-4의 가장 중요한 단어로 등장한다.

 

요한이 열려진 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간 것은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펼쳐진 환상을 보기 위해서 이다. ‘하늘에 열린 문이란 말에서 열린과거로부터 계속해서 열려져 있는으로 수동형으로 묘사된다. 요한이 열었던 문이 아니다. 즉 신적 수동태로서 하나님에 의해 열려진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상징적인) 하늘 문을 열어 두시고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교회에게 계시하기 원하셨다. 그러므로 지금 요한은 계시의 문을 통과하고 있다. 이렇게 하늘에 올라간 요한이 앞으로 볼 것은 마땅히 (반드시, dei) 될 일들 (중복대 관대)이다 (1).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에 올라간 요한은 무엇을 보았는가?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주위에 24명의 장로를 보았다.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역사의 주관자가 요한 당시의 로마 황제나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이나 헤롯 왕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이 사실을 누구나 다 듣고 알아야 했기에 계 4:1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 하늘에서 들렸다. 3절에 보니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은 벽옥, 홍보석, 녹보석과도 같았다 (28:17; 28:13). 벽옥은 위엄, 청결, 거룩을, 홍보석은 진노와 심판을, 녹보석은 자비를 상징한다. 3 보석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 휘황찬란함, 영광스러움, 위엄과 거룩함을 동시에 나타낸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완전히 표현될 수 없기에 요한은 단지 이 땅에 있는 보물로 하나님을 묘사할 수 밖에 없었다. 보좌에는 또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무지개 역시 하나님의 영광스런 빛을 상징한다.

 

요한이 하늘에서 본 것은 하늘의 보좌 앞에 있는 24 장로들인데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했다. 24장로는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와 신약의 12 제자로 대표되는 신구약 모든 시대의 교회를 상징한다. 모든 교회가 보좌에 앉으신 왕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 준 것이다.

 

이런 천상의 모습은 우리와 무슨 관련있는가? 비록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살지만 영적으로는 하늘의 24장로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이미 하늘 보좌에 앉아 있으면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이다. 3:21-22에 근거해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는 자로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보좌에 앉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보혈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과 모든 시험과 환난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 땅에서, 직장과 학교에서 천상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천상의 예배를 이 땅에서 드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승리와 영광과 존귀를 누리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이 보았던 24장로는 모든 시대의 교회를 상징하기에 우리가 24장로이다. 그러므로 24장로가 입고 있던 흰 옷 즉 순결하고 옳은 행실로 우리를 단장해야 한다. 거룩하고 위엄하며 영광스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거룩하고 순결하고 의로워야 한다. 그리고 24장로가 앉아 있던 보좌는 우리가 왕으로서 다스리며 살아야 함을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기게 하셨다면 우리는 세상을 말씀의 원칙으로 정복하고 다스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24장로가 썼던 금 면류관 (스테파노스)을 우리도 쓰고있다. 면류관은 존귀, 승리, 명예, 왕권, 영광을 상징한다. 즉 우리는 승리한 영광스런 교회임을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상의 예배를 드리도록 주신 것들이다. 1:10절에 보니 24장로는 자신의 면류관을 보좌 위에 계신 하나님의 발 아래 던진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은혜를 우리의 공로로 돌리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늘의 예배를 드리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신 영광과 존귀와 승리와 명예를 성령으로 누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닮는 것이 곧 하늘의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이김과 권세와 명예와 승리가 은혜로운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천상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말씀을 맺자.

 

요한의 독자들은 고난 중에서 이런 영광스런 하늘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요한의 독자들이 이 천상의 예배를 통해 알았던 것은 이 세상의 왕은 보좌 위의 하나님이시지, 로마 황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일이 잘 풀리지 않습니까? 고난 중에 있습니까? 하지만 그럴 때 일수록 우리의 신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떤 조사에 보니 자존감, 자부심, 자신감과 자긍심이 없는 사람은 두뇌활동이 위축되고 더 열등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세상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영광스런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는 작은 왕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기는 자로 여겨 주셨기에 더욱 영광과 의로움과 순결함과 은혜와 권세를 여기서 누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아멘.

 

 

 

 

 

 

 

 

 

 

 

 

 

 

 

 

 

 

 

어린양과 사자 (42:5-13; 5:1-14)

 

매년 초에 대통령이 국회에 시정방침을 알리는 문서를 연두교서라고 부른다. 대체로 연두교서에서 발표된 대로 그 해의 국정운영이 일관성있게 진행되어 간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연두교서도 중요하지만, 국제 역학 관계상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22일에 있었던 북한 핵무기 개발에 대한 부시대통령의 단호하고 강경한 연두교서는 우리에게도 민감한 사항이 되었다. 국제적인 위상 때문에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는 전세계의 중요한 문제를 모두 다루는 듯하다. 하지만 계 5장에서는 이런 대통령의 연두교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백서가 등장한다. 이 통치백서에 따라 하나님은 전체 세상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나는 제사장 나라로서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한다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우리는 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세상 역사를 어린양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사 사자가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다스리기 때문이다.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요한은 주일에 하늘의 환상을 보게 된다. 4장에서부터 요한이 본 하늘 보좌 환상을 설명한다. 4장에는 보좌 위의 위엄의 심판자이신 성부 하나님이 중심이다. 세상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보좌 중심으로 전개된다. 5장에서는 예수님이 중심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세상을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요한은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두루마리가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계 5:1절에 보니, 그 두루마리는 7인으로 인봉되어 있어서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인봉된 이 두루마리는 요한 당시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서이며, 교회의 대적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의 선고문으로서 통치백서’ (統治白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계획, 방식, 시행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 하나님은 세상 역사를 아무렇게 다스리지 않으신다. 하나님 나라의 공의롭고 은혜로운 원칙과 섭리를 따라서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10:29). 세상 역사는 대통령이 마음대로 다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좌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들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그런데 요한이 보았던 보좌는 왕궁의 모습인 동시에 법정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마치 어전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요한은 이 두루마리에 담긴 하나님의 통치백서에 포함된 선고문을 들으려고 하늘의 법정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요한은 이 인봉된 두루마리를 열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보지 못해서 울고 만다 (5:4). 그 어떤 사람도 아버지 하나님의 의중을 알아낼 판단력과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알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무도 두루마리를 펼쳐서 읽을 사람이 없는 상황은 계시록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극적인 등장을 위한 적절한 배경이다. 보좌 주위에 있던 장로 중 한 명이 울고 있던 요한에게 말한다: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5:5). 예수님은 7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의 내용을 계 8장에서 7나팔을 통해서 말씀하실 것이고, 16장의 7대접을 통해서 보충하시며 계시하실 것이다. 실제로 계시록의 7-7나팔-7대접 사이에 병행되고 반복되는 구절이 많다. 7인이 하나씩 떼어질 때 마다, 7나팔이 하나씩 불려질 때마다, 7대접이 하나씩 부어질 때마다, 교회의 대적이 심판을 받고 교회는 구원을 받게 된다. 이처럼 계시록에 하나님의 심판이 7번 연속적으로, 그것도 3번이나 시리즈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욜 1장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 1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해서 연속적으로 메뚜기 재앙, 기근, 불의 재앙, 바벨론 군대의 재앙을 내리셨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의 범죄가 너무 완고하고 심각해서 한번의 징계로는 고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한 당시의 교회를 핍박했던 교회의 대적은 불신 유대인들과 로마 제국이었다. 이들을 향해 예수님이 시행하시는 심판은 불가피했다. 이들을 공의롭게 심판하시고 교회를 보호하시는 것이 공의로운 하나님의 통치이며 퉁치백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교회인 우리 개개인을 통하여 뜻을 펼치시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고 의롭게 살아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우리 주님의 통치백서에 맞추어 사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오늘 하루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그대로 사는 것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 드리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를 제사장 나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유다지파의 사자이며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님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고 통치백서 대로 시행하신다 (5:5).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왕의 지파인 유다의 후손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다윗의 왕국이 내다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분이시다. 무슨 이유로 예수님만 두루마리를 봉인했던 7인을 떼시고 그 내용대로 시행할 수 있는가? 이유는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시려고 유월절 어린양처럼 일찍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시사 일곱 뿔 즉 완전한 권세와 일곱 영 즉 성령을 가진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족속과 백성과 방언 가운데 사람을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려 나라와 제사장’ (제사장의 나라, 제사장의 왕권)으로 삼으셨다 (5:9-10). 주님이 피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상속하는 하나님의 기업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이 땅에서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서, 우리 자신을 산제물로 드림으로써 왕노릇할 것이다 (10).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우리를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것은 사 42:5-13절의 성취이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자신의 종 예수님에게 부어주사 세상에 공의를 이루시도록 계획하셨다.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예수님을 이방을 비추는 구원의 빛과 백성의 언약이 되게 하셨다 (6). 이 계획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소경을 보게하며, 흑암에 있는 자를 해방하는 새로운 일을 성취하셨다 (7). 그러므로 이사야선지자는 모든 열방에게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10). 그리고 이사야는 용사시며 전사이신 여호와께서 스스로 열심을 내시어 크게 외치며 나아가 대적을 크게 치실 것을 예언한다 (13). 이것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올 것을 예언하는 것인 동시에 여호와의 종이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이루실 구원의 사역을 가리킨다. 42장의 예언이 계 5장에서 어린양이시며 사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흑암에 있던 우리의 눈을 여시고, 빛을 비추시며, 용사로서 찾아 오셔서 우리의 원수를 물리치신 주님 때문에 우리는 새 노래를 부르면서 제사장 나라로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제사장 나라로서 살 수 있는가? 겸손히 우리 자신을 기도와 찬양 가운데 드려서, 주님이 주시는 높아짐과 승리를 기대해야 한다.

 

본문 계 5:8절에 보니, 예수님이 두루마리를 취하시는 것을 보고 전체 피조물을 상징하는 4생물과 모든 구원받은 백성을 상징하는 24장로가 거문고와 향이 담긴 금 대접을 예수님에게 바친다. 거문고는 찬양과 감사를, 향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가 예수님에게 찬양과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제사장 나라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왕권을 찬양과 더불어 기도로 기려야 한다.

 

어린양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으실 때 보좌 주위에 있던 4생물과 24장로가 새 노래를 부른다 (5:9-10). 이 새 (kainos, 질적인 새로움) 노래는 어린양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기리는 내용이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시작된 새시대의 백성인 우리도 새 노래를 불러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어린양이며 사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이처럼 새롭다는 것이 계시록의 핵심 메시지가 아닌가! 이 새로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진부해 지지 않고, 날로 더 새로워진다. 우리가 부를 새노래를 히 13:15절은 우리가 예수님을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씀한다. 제사장 나라인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산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 새노래로 찬미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러야 할 새 노래의 내용은 무엇인가?

 

본문 12절에 보니, 많은 천군천사가 찬송한다: 예수님에게 능력, , 지혜, , 존귀, 영광, 찬송이렇게 7가지 요소를 돌려드린다. 어린양의 경이로움과 완전한 영광을 7가지로 찬송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능력과 부를 말하면서 예수님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지혜를 논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다. 모든 지혜는 예수님과 관련지어서 설명되어야 한다. 모든 학과와 전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 속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우리가 존귀를 말하면서 존귀하신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고, 우리가 영광을 말하면서 예수님의 충만한 영광과 그 통치를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힘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과 무관하게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예수님은 만유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예수님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고 영적인 사람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참된 지혜와 능력과 힘과 부와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13절에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도 찬송한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이 찬양 후에 본문 14절에 보니, 4생물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24장로는 하나님을 경배한다’. 천군천사, 모든 만물, 구원받은 모든 백성이 서로 화답하여 찬송하는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멋진 광경인가? 우리가 보좌 주위에 있던 4생물과 24장로이기에 이 영광스런 천상의 예배에 공적 예배 가운데 참여할 수 있다. 이런 완전한 찬양과 경배를 우리는 주님 오시면 저 천국에서 영원토록 돌리며 살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제사장 나라로 살면서 이미 저 천국에 가 있는 신앙의 선조와 천군천사와 더불어 새노래를 부르며 경배와 섬김의 삶으로 맛볼 수 있다. 예수님이 먼저 어린양이 되심으로 사자가 되신 것처럼, 멸시와 고난을 당하시며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먼저 겸손히 헌신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 주실 것이다. 우리가 먼저 협력하여 겸손히 섬기고 헌신하고 희생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이 땅에 이루면서 왕노릇 할 수 있다.

 

말씀을 맺자.

 

예수님은 유다지파의 사자이시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로서 그의 백성을 사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교회를 신원하고 돌보시려고 지금도 찾아 오시는 용사이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죽임당한 어린양이 되셨기에 승귀하신 사자가 되셨다. 우리도 먼저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때로는 고난을 겸손히 통과할 때 주님의 높이심이 있다. 제사장 나라로 새 노래를 부르면서,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는 우리가 되자. 아멘.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6:1-17)

 

현대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질병은 성급함나태라고 그 누가 말한 적 있다. 성급함은 지긋이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서 안달이 나는 것이다. 식당에서는 아줌마! 빨리 주세요라고 주문한다. 도로 신호가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뀐 지 1-2초만 지나도 빨리 출발하라고 뒤에서 빵빵거린다. 커피 자판기에 빨간 불이 꺼지지 않았는데도 이미 손은 종이컵을 잡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4-5초만 기다리면 되는데 닫힘버턴을 누른다. 닫힘 버턴 한 번 누를 때마다 전기세 150원이 더 든다고 한다. 첫 인사도 천천히 오세요가 아니라, ‘어서 오세요이다. 장애우들에게 어서 오세요는 부담스러운 인사가 될 수 있다.

 

성경은 반대로 오래 참음과 인내를 강조한다. 성도에게 있어서 낙심치 않고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이다. 기도하고 난 후 응답을 받기 위해 우리는 오래 참아야 한다. 씨를 뿌리고 결실하기 까지 기다리며 인내해야 한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땀을 흘리면서 인내해야 한다. 때로는 애인이 약속 시간에 조금 늦더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인내하며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이 그 애인을 잡을 수 있다 (. 2002년 여름- 12시간). 본문 계 6:10절에 보니,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제여!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고 급하게 강청하는 듯한 음성을 듣는다. 이 때 하나님은 조금 더 기다리며 인내할 것을 11절에서 말씀하신다. 사람은 종종 조급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방식대로 일을 이루신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때와 방식에 우리 시간표와 의지를 맞추는 훈련을 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때가 앞당겨지도록 해야 한다.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는 제목으로, “나는 주님의 공의가 바로 서며 복음의 대적이 진멸되도록 인내하며 강청해야 한다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왜 우리는 주님의 공의가 바로 서며 복음의 대적이 진멸되도록 인내하며 강청해야 하는가? 공의가 주님의 성품에 일치하며 지금은 주님 나라 확장시기이기 때문이다.

 

본문 계 6장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자. 요한은 예수님이 두루마리를 들고 계시는 장면을 환상을 통해서 본다. 예수님이 쥐고 계신 그 가죽 두루마리에는 안팎으로 글이 쓰여져 있었다. 둘둘 말아 바깥 쪽으로 나가면서 인-풀을 하나씩 붙여서 총 7개로 인봉된 두루마리이다. 이제 예수님이 바깥에 붙어 있는 인-풀을 시작으로 해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7개 모두 떼신다. 7개로 봉인 된 것은 유언장임을 암시한다. 이 두루마리는 예수님의 유언장이며 옛 언약 백성에게 주는 이혼증서이다.

 

6:1절에 보니, 예수님이 첫번째 인을 떼시자 소아시아의 7교회의 대적, 복음의 대적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시작된다. 2절에 보니, 흰 말이 나온다 (6:1-7). 이 백마를 탄 사람은 활을 가지고 있고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있다. 백마를 탄 이분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활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3:9, 11; 45:3-5). 이 활은 노아 언약과 관련있다. 9:13-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면서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무지개를 하늘에 걸어 두신다. 그 후 겔 1:26-28절에 보면, 선지자 에스겔이 하늘 보좌로 올려갔을 때 거기서 무지개를 보았다. 요한이 하늘에 올라갔을 때에도 여전히 무지개가 보좌 주위에 있었다고 계 4:3절에서 말씀한다. 하지만 본문 계 6장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이 두루마리를 받기 위해서 다가 갔을 바로 그때 무지개 즉 활을 취하셨다. 활은 예수님이 복음의 대적을 무찌르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예수님은 정복자이시다. 왜냐하면 흰말의 색깔에서 알 수 있듯이 흰색은 정복과 승리를 상징한다. 그리고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이 쓰고 계신 면류관도 예수님이 이미 왕이요 이미 승리자가 되셨음을 상징한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승리하신 것을 말씀한다. 따라서 계 6:2절은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신 주님이 계속해서 원수를 정복하시며 승리하셔서 그 분의 나라를 견고히 확장하시려고 하심을 말씀한다. 인간 역사는 부활과 승천으로 결정적으로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의 정복 역사의 연장이다! 그러므로 정복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고 거역하는 것이야 말로 패망의 지름길이다. 이 정복 역사는 요한 당시에 복음이 이방 나라로 확장되는 것이다.

 

두루마리의 두 번째 인은 3절에서 떼어진다. 4절에 보니, ‘붉은 말을 탄 사람이 등장한다. 이 붉은 말은 전쟁을 상징하는데, 말탄 자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이스라엘 땅에서 화평을 빼앗아 버린다.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 유대-로마 전쟁 중에 (66-70), 로마 군대를 동원하여 불신 유대인들을 죽이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세 번째 인은 5절에서 떼어지는데, ‘손에 저울을 들고 검은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 등장한다. 검은 말은 극한 상황 속에서 굶주림으로 인해 죽는 것을 상징한다 (참고 애 5:10). 6:6절에 보니, 이런 기근과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밀 한 되에 한 데나리온이며, 보리 석 되에 한 데나리온이나 된다. 평상시 보다 1000%나 되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주요 식량과 생필품의 부족현상이 심각하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땅이 소출을 제대로 내지 못한 것으로 언약적 저주의 결과이다 (18:24-28; 28:15-34). 하루 종일 일해야만 겨우 먹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검은 말을 탄 사람은 감람유와 포도주를 헤치면 안 되었다. 감람유와 포도는 시 104:15절을 비롯한 많은 구절에서 신실한 이스라엘백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감람유와 기름이 보존되는 것은 심판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를 보호하시는 모습이다.

 

6:7-8절에서 넷째 인이 떼어 질 때 청황색 (green colour) 말이 나온다. 청황색은 창백한 모습과 죽음 직전의 색깔이다. 이 말을 탄 사람의 이름은 사망이다. 말탄 자를 바짝 뒤따르는 것은 음부 (Hades, 무덤)이다. 청황색 말을 탄 사람이 칼과 흉년과 사망과 짐승으로 복음의 대적을 죽인다.

 

6:9절은 예수님이 다섯째 인을 떼시는 장면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다는 이유로 순교한 사람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다. 순교자가 성전 제단 아래에 있다는 말은 구약 제사의 모습과 관련된다. 구약 성전 제단 밑에는 제물의 피가 흘렀고, 생명의 근원이 피에 있었기에 순교자의 생명이 부어졌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이 제단에서 죽었다면 예루살렘의 성전의 제사장이 그 살해 주범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요한 당시의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잔악한 죄악상을 볼 수 있다 (23:34-37). 인간 역사상 첫 살인자였던 가인으로 대변되는 옛 언약의 사람이 아벨로 대변되는 새 언약의 의로운 사람을 죽인 것이다.

 

바로 이 때, 6:10절에서 이 순교자들이 -이스라엘에 사는 자들을 향한 보복 혹은 신원을 하나님께 간절히 큰 소리로 호소이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제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6:3; 1:12). 그 답은 11절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순교자의 수가 찰 때 까지 잠시 동안 쉬어라!’. 이들 순교자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로부터 하나님의 신원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참되신 대주제이신 하나님의 속성에 호소한다 (89:14; 18:7). 원수 갚는 것은 성도가 할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다. 땅에 거하는 자들 즉 불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도의 무고한 피를 많이 흘린 것에 대한 심판을 호소하는 절규이다. 이 사실은 이 불신 박해자들이 요한 당시에 아직 살아 강력하게 활동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6:12-17절에서 6째 인이 떼어질 때, 감람산 강화 (24:29-34)에서 기록하듯이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지진,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고, 별이 떨어지고 하늘은 종이가 말리듯이 떠나가고 산과 섬은 제자리를 떠나고, 땅의 임금, 왕족, 장군, 부자, 강한자, , 자주자들이 굴과 산으로 도망간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다. 이런 엄청난 천지 대격변적인 묘사는 바로 예루살렘 멸망을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던 옛 질서와 세대가 지나가고 새 시대의 질서가 도래함을 묘사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지만 회개하지 않는다. 6개의 인이 떼어지는 것을 통해서 요한은 박해받던 7교회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심어 준다. 복음의 대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진멸되지만 교회는 구원을 받는 것을 확신시켜주었기 때문이다.6장에서 묘사하는 소아시아 7교회는 고난 가운데서 인내하면서 전투하는 교회인 동시에 승리하는 교회였다.

 

예수님이 두루마리를 봉인했던 인이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벌어진 무서운 심판은 레 26장과 신 28장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14:21절에 의하면, , 기근, 짐승, 전염병은 하나님이 대적을 심판하시는 수단이다 (14:12). 하지만 우리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 역사는 다름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의 정복 역사임을 확신하는 가운데 담대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전쟁과 기근, 홍수와 가뭄,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통제와 허락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 46:8절과 같이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두루마리의 인이 하나씩 떼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있던 4생물들은 주저함 없이 기쁘게 심판의 대행자들을 향하여 오라라고 말한다. 이것이 불신 세상의 심판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 속에 복음과 교회의 대적을 주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멸하시도록 늘 간구해야 한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조명 속에서 교회와 복음의 대적이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왜 주님의 공의가 바로 서며 복음의 대적이 진멸되도록 인내하면서 강청해야 하는가? 10절에서 보듯이, 세상 역사의 대주제이신 하나님은 거룩하고 참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죄악을 보지 못하시며 참되시기에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지금은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통해서 세상을 정복하는 시대이기에 복음의 대적이 진멸되도록 인내하며 강청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님의 공의와 복음의 대적 진멸을 위해 인내하며 강청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대적에게는 연속적으로 심판을 내리시고 성도에게는 조속한 승리와 안식을 주신다.

 

왜 하나님은 두루마리 겉에 풀 한 개만 붙여서 인봉하여 떼시지 번거럽게 7개나 차례로 떼시는가? 이유는 복음의 대적이 아주 완고하여 연속적인 심판이 필요했던 것이다. 11절에 보니, 주님은 이 순교자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쉬어라고 말씀하신다. 흰 두루마기는 승리의 옷, 개선장군이 입던 옷이다. 비록 주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불신 유대인과 로마 제국에 의해 순교당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실패자가 아니라 개선 장군과 같았다. 그래서 잠시 쉬어라고 말씀하신다. 잠시 쉬어라는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심판이 임박하게 대적에게 임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속한 심판이 시행되는 시기는 11절에서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주님이 원하시는 정도의 인내와 헌신 그리고 믿음의 강청이 있을 때 이 신원이 이루어진다.

 

우리 안과 밖에 있는 인본주의, 교권주의, 이기심, 좌절감, 예배 참석을 방해하는 환경,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함에 대한 자기 변명, 율법주의, 학벌주의, 행함없는 지성주의, 지역주의, 교만, 불충성, 불경건, 사랑없음, 물질만능주의, 원칙없는 편의주의, 혼합주의 및 타협, 질병, 게으름, 영적인 무지와 같은 복음의 대적이 아무리 강해보이더라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잠간 후에 순교자의 수가 차기만 하면 내가 심판을 시행하리라. 내가 공의를 이루리라”. 우리는 눅 18장에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서 원한을 풀어주도록 밤낮 찾아가서 강청한 과부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기도하면서 삶 속에서 제자요 새 시대의 일군으로서 치루어야 할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말을 맺자.

 

여러분 속에 있는 복음의 대적은 무엇인가? 주님의 뜻과 공의가 시행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과 왕권이 시행되는데 방해가 되는 대적은 무엇인가? 우리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지 못하도록만드는 복음의 대적은 무엇인가? 우리 가정, 학교, 사회, 나라의 복음의 대적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이 공의롭고 거룩하신 주님의 심판을 받도록 인내하면서 강청하자. 이 대적을 없애는 것이 우리가 새 시대의 일군이 되어가는 것이요 주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성화되어 가는 것이다. 내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하니이다. 아멘!

 

 

 

 

 

인 맞은 144,000(7:1-17)

 

우리는 책을 사면 이름을 적거나 도장을 찍어둔다. 이 책은 내 것이라는 표시이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도장을 찍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는다 혹은 보호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환난 가운데에서도 담대해야 한다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본문이 말씀하는 우리의 신분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인을 받아 절대적인 보호와 인도를 받는 사람이다.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요한은 계 5장에서 환상 가운데 두루마리 하나를 본다. 이 두루마리를 가지고 계시는 분은 보좌 위에 앉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는 7개의 도장으로 찍혀서 풀로 밀봉되어 있다. 요한이 보니까 이 두루마리를 펼쳐서 자기에게 보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울고 만다. 그 때 보좌 주위에 있던 장로 중 한 명이 오직 어린양이신 예수님만 두루마리를 개봉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손에 있던 두루마리를 받자 하늘에서 오케스트라의 음성이 울려 퍼진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5:12). 6장에는 예수님께서 이 두루마리의 6개 인을 떼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하나씩 뗄 때마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난다. 계시록의 무서운 심판은 신실한 하나님의 교회에게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에게 내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시록을 읽을 때 무서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찬송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6째 인까지 떼어진 후 이제 마지막 7째 인이 떼어져야 하는데 (8:1), 본문 계 7장에서는 7째 인이 떼어지지 않고 81절에서 떼어진다. 그래서 계 7장은 다른 사건이 첨가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속 시원하게 예수님이 두루마리 7개 인을 다 떼어 버리시지 남겨두시고 다른 사건을 첨가하시는가? 그 이유와 연관해서, 6개의 인이 하나씩 떼어 질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이 배교한 유대인에게 내려졌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과연 이 심판의 와중에서 구원받을 사람은 누구인가? 모두 하나님이 심판에 죽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계 7장이 존재한다.

 

7장과 비슷한 구약 말씀은 겔 9장이다. 9장에서도 하나님의 천사는 붓을 잉크에 담궈 사람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는다. 9:4절에 보니,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9장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되지 않고 보호될 남은 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증한 일을 인하여 애통하며 우는 자였다. 하나님 나라의 의와 통치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함을 인하여 애통하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요즈음 무엇 때문에 애통하고 있는가?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조금 더 나아가지 못하여 애통하고 있는가? 하나님 말씀 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해서 애통하고 있는가? 나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아서 애통하고 있지 않는가?

 

본문 계 7장에서도 비슷한 환상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한 자를 구별하여 인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쳐들어 왔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서 구원받은 남은 자는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예루살렘 교회이다. 그러므로 계 7:4절의 144,000이란 숫자는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 하나님의 인도로 예루살렘을 탈출했던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를 상징하는 숫자이다 (21:20 이하). 이 탈출 사건은 역사가들이 밝히듯이 요단강 동편의 펠라 (Pella)로 예루살렘교회가 도망간 사건이다 (참고 막 13:14). 그리고 인 맞은 사람이 구약의 12지파에서 각각 12,000명 씩 선발되었다는 말은 (7:4), 예루살렘 (유대인)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백성의 대를 잇는 참된 (혹은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저와 여러분도 구약의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을 계승한 참 하나님의 백성이요 남은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144000명은 구약의 12지파 곱하기 신약의 12제자 곱하기 무수히 많은 숫자인 1000의 합이기에, 우리도 이 숫자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새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남은 자이며 도장을 받아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늘 찬송하면서 환난 가운데서라도 어린양의 피에 옷을 희게 해야 한다.

 

본문 계 7:10-12절에 보니 하나님의 인을 맞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승리를 상징하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찬송한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이 찬송을 들은 하늘 보좌 주위의 모든 천사들이 아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찌로다 아멘!”이라고 화답찬송을 부른다. 이 때 요한에게 보좌 주위에 있던 장로 한 명이 나타나 찬송을 부른 사람들이 누구인지 설명해 준다. 14절에 보니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144000명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들이다. 무슨 말씀인가? 요한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스데반이 순교했고, 예수님의 형제요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 인물이었던 야고보가 죽고, 베드로와 사도들이 투옥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환난이 불어 닥쳤다. 그 뿐 아니라 계시록을 받았던 소아시아의 7교회 성도 역시 흩어진 유대인들과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사실 이 때는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박해자였던 네로가 로마 황제로 있었던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4000명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고 환난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오히려 그 환난과 유혹과 세상과 타협하라는 끈질긴 협박과 회유 속에서라도 어린 양의 피의 권세를 믿고 행위를 정결케 했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구원하심이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만 있도다!”. 무슨 말씀인가? 오직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이 이기도록 해주셨고 장막을 치셔서 성령으로 도와 주셨고 절대적인 보호를 해 주셔서 이길 수 있었다는 신앙고백이다.

 

여러분 삶 속에 지금 무슨 어려움과 환난이 있는가? 건강, 직장 구하는 것, 사업문제, 대인관계, 자녀의 교육, 장래 문제, 신앙의 문제, 정신적이고 영적인 문제... 하지만 기억하자. 이런 환난 가운데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좌절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의 행실을 더욱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승리하는 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장막이 된 것을 믿고 더욱더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승리하는 방법은 우리는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담대히 믿음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인 맞은 사람으로 살 때 어떤 약속을 주시는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장막을 치셔서 해를 당하거나 상하지 않도록 하신다. 그리고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생명수 샘에서 마시고 위로를 받는다.

 

본문 15절에 보니,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우리 위에 하나님이 장막을 치셔서 함께 거하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16절에는 우리가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고 태양과 뜨거운 열기도 해치 못하겠다고 약속하신다 (2:14, 친백성). 주림과 목마름은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에게 내린 심판이다 (28:47-48; 8:21). 하나님께서 주리고 목마르게 하신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백성의 영혼을 소성시키는 분이심을 믿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종종 태양의 강렬함이 활동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했고, 그 열기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36:30; 30:30).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장막이 되셔서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본문 17절에 보니, 144000명에게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저희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신다고 말씀한다 (25:8; 34:23). 여기서 인도한다’ (hodegesei)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에 구름과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을 때 사용한 동사이다 (13:17; 1:33: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지금은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사 모든 진리로 이끄신다 (16:13). 보좌 위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말씀은 절대적인 왕권으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주님은 생명수 샘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목마르지 않도록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급한 마음으로 생명수 샘을 사모하면서 더욱 나아가자. 생명수이신 성령의 위로를 더욱 바라보자. 하나님은 사모하는 심령을 만족케 하신다. 믿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더욱 성령의 교제하심과 인도하심을 잘 받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을 받은 우리를 하나님은 위로하신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가 우리의 상한 심령, 우리의 찢긴 심령을 토로하기만 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와 소망을 다시 주신다.

말을 맺자.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인을 맞은 남은 자이다. 여러분의 이마를 만져보라.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위에 장막을 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로 승리할 수 밖에 없다. 이 승리와 보호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어린양의 보혈의 공로 때문이다. 환난 중에서 오히려 더욱 행실을 거룩하게 하자. 오히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찬송하자. 나의 구원은 오직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뿐이십니다!”. 나의 영혼을 소성케 하시며, 나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쉴만한 물가와 생명샘으로 인도하여 주소서! 우리가 장차 주님의 보좌 앞에 흰 옷을 입고 완전한 복락 가운데 영광의 찬송을 부를 때 까지, 이 땅에서도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라가면서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과 위로를 얻도록 하자.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리라 (10:1-11)

계시록 안에는 책이 몇 권 등장한다. 구원받은 사람의 명단이 기록된 생명책과 사람의 행적이 기록된 책들 (20:12) 그리고 두루마리가 있다. 이 중에서 특별히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통치 계획을 밝히는 책이다. 이 두루마리는 원래 7인으로 봉인되었지만 예수님이 열어서 쥐고 계신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통치 계획을 세상에 알리시는 분이시며 통치의 대리자이심을 의미한다. 이 두루마리의 내용이 계시록의 7인의 재앙, 7나팔의 재앙, 7대접의 재앙으로 반복해서 나타난다. 10장의 환상에서는 요한이 이 두루마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받아서 먹고 세상에 전해야 했다.

 

요지: “나는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세상에 전해야 한다.”

 

첫째로, 본문이 말씀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역사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이 땅의 대리자이다.

10장에서 요한이 본 환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에서 내려온 영광스럽고 힘센 천사가 등장한다. 이 천사는 계 1장의 승천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흡사하기에 예수님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구름을 덮어 쓰고, 머리에는 언약의 무지개가 있고, 그 발은 불기둥 같다. 예수님의 이 모습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시며, 불기둥과 같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분이시며, 언약을 이루시는 분임이 강조된다. 5장에서 7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가 이제 펼쳐진 체 예수님의 손에 있다. 두루마리가 펼쳐져 있기에 주님의 통치 계획은 알려지고 공정하게 시행될 것이다. 예수님이 사자가 포효하듯이 큰 소리로 외치니 7천둥이 그 소리를 울려 퍼뜨린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려다가 기록하지 못했고 인봉해 두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두고 맹세로 지체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야 대망과 메시아 왕국이 지체없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소망의 말씀이다. 그리고 요한이 바로 그 두루마리를 받아서 먹는다. 두루마리를 먹은 이유는 많은 백성, 나라, 임금에게 가서 그 두루마리의 내용을 예언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 속히 이루어 지리라고 맹세하셨다. 주님의 맹세하신 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분없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는 내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역사는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펼쳐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요한은 모든 백성과 임금들에게 이 하나님의 비밀을 전해야만 했다. 이 비밀은 달고도 쓰다. 이 기쁨의 소식을 생활 속에 전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삼아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확장하도록 명령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온 땅에 이루시는 주님의 대리자이다.

 

둘째로,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천국 복음을 깨달아 고통 속에서라도 전파하는 것이다.

 

본문 5-6절에 보면, 예수님이 하늘을 향하여 오른 손을 들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맹세하여 말씀한다: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There will be no more delay). 예수님의 맹세이기에 이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요한은 여기서 단 12:7절을 인용한 것이다. 12:1-4절에 의하면, 종말에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갈 것인데 다니엘이 이것을 기록하여 종말 때까지 인봉할 것을 명령받는다. 12:7절의 맹세는 이런 놀라운 종말에 있을 영생-영벌을 위한 부활이 일어나기 전에 얼마나 시간이 경과하여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그 답은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난 후이다 (12:7). 이것은 계시록의 42개월, 1260, 3년 반과 같은 표현으로서 짧은 기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단 12장의 이 예언이 계 10장에서 성취되었기에, “지체하지 않겠다고 예수님이 계 10:6절에서 맹세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사가 절정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십자가와 부활, 오순절 성령강림뿐 아니라 요한 당시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에 있을 주후 70년 사건이 구속사의 절정 부분을 함께 이루고 있다. 이런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본문 7절의 하나님의 비밀하나님이 계시하신 구원의 성취는 먼저 유대인의 선민으로서의 경륜이 주후 70년에 혹은 끝났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비밀은 바울이 엡 3:3-6절에서 말한 것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여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될 필요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우주적인 구속사건을 가리킨다. 온 세상 나라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이 영원히 왕으로 다스리실 그 날이 하나님의 비밀이 성취되는 날이다.

 

하나님은 이 통치를 일군을 통해서 이루시기 원하신다. 본문 10절에서 요한이 책을 먹는 행동은 겔 3:1-3절과 14절을 연상시킨다.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한 에스겔이 책을 먹었던 것처럼 요한도 유사한 상황에서 작은 책을 먹고 입에서는 달지만 (119:103; 15:16) 배에서는 쓴 것을 체험한다. 두루마리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서 내면화하고 삶 속에 작용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달고 쓴 것은 구원과 심판의 양면성을 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할 수록, 하나님의 경륜과는 반대로 움직이는 경향이 많은 이 세상의 현실을 직시함으로 참으로 쓰라리게 된다. 혹은 복음을 따라 살며 증인 역할을 하는 교회의 고난 중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복음을 소화시켜야만 전할 수 있다. 복음을 소화하고, 복음에 따라 살고, 그 복음을 요한 당시처럼 우리 시대의 대결적 구조 속에서 선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천국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 어떤 복을 약속하시는가? 언약과 영광 그리고 보호이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남은 이미 계 1:16절에서 밝힌바 있다. 예수님의 두 다리가 불기둥 같다는 말씀은 광야의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보호한 불기둥을 연상케 하는데, 예수님의 교회를 향한 보호와 인도의 능력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땅과 바다를 동시에 밟고 계심으로 (2) 이 두루마리에 담긴 메시지가 우주적이며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시위하신다. 3절에 보니, 바로 이 우주의 통치자이신 예수님이 사자처럼 크게 부르짖으신다. 그 때 하나님의 크고 두려우심을 상징하는 일곱 우뢰도 소리를 발한다. 승리한 유다지파의 사자이신 주님의 이 외침은 피조물에 나타난 창조주 여호와의 엄위하신 능력을 기리는 시 29편을 연상시킨다. 천지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강조하는 시편 29편의 문맥은 바다와 땅 즉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강조하는 계 10:2-3절의 문맥과 일치한다. 그리고 암 3:8사자가 부르짖은 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도 상기시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과 말씀을 맡은 자로서 어떻게 잠잠할 수 있겠는가? 전하는 사람, 외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 이 일이 이루어 지는 것이 주님의 소원이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승천하신 예수님은 복음을 깨달으며, 소화하여 전하며,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며, 고통 속에서라도 실현하려는 우리를 보호하신다.

 

말씀을 맺자.

 

바다와 땅을 밟고 계시는 예수님은 온 세상의 통치자이시다. 우리는 그 왕국의 비밀을 깨달은 자로서 온 세상에 말씀을 전해야 한다. 우리 가정, 사회, 학교를 향한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선포하는 예언자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왕이신 주님의 대리자로 이 땅에 사는 길이다. 그 비밀은 달고도 쓰다. 그러나 능력과 영광과 언약의 주님이 이 복음의 비밀을 전하도록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아멘.

 

 

 

 

 

 

 

 

 

 

 

 

 

 

 

 

 

 

 

 

 

 

 

 

 

 

나의 두 증인 (11:1-13)

 

건물을 짓기 전에 측량하는 일이 중요하다. 측량은 기계를 사용해서 물건의 길이, 높이, 넓이, 깊이와 거리를 재어 헤아리는 것이다. 성경에도 측량하는 장면이 몇 번 등장한다. 성경에서 측량하는 것은 단순히 길이나 높이를 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의미이다. 에스겔 40장에 보면 한 사람이 막대기를 들고 서 있다. 그는 막대기로 성전을 측량한다. 비슷하게도 본문 계 11:1절에서 환상 가운데서 요한은 지팡이 모양의 갈대를 가지고 성전을 측량한다. 40장과 계 11장에서 성전을 측량하는 시점이 중요하다. 그 시점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직전이기에, 전쟁의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보호하신다는 의미이다. 본문 계 11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연속적으로 시행되는 7나팔이 불려 지는 가운데 등장한다. 7나팔은 하나님께서 요한 당시의 교회의 대적을 심판하시는 것인데, 6째 나팔까지 불려진 후 마지막 7째 나팔이 즉각적으로 불려지지 않고 계 11장의 성전 측량 환상이 등장한다. 이것은 6나팔이 불려 질 때 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된다면 이 연속적인 심판의 와중에서 과연 누가 살아 남을 수 있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이다. 그 답은 하나님의 측량을 받은 참 성전 뿐이다.

 

나의 두 증인이라는 제목으로, “나는 주님의 증인으로서 세상에 구원의 빛을 밝혀야 한다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본문이 밝히는 우리의 신분은 무엇인가?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밝히는 복음의 증인이다.

 

본문 1-2절에 보니, 요한은 지팡이로 성전과 성전 안의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사람들을 측량하지만 성전 밖 마당은 측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전 밖 마당은 이방인에게 42달 동안 짓밟힐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인들에게 짓밟힐 것을 상징한다. 이렇게 성전을 측량하는 장면은 요한 당시에 수 많은 환난 가운데서라도 교회를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3절에 보니, 하나님은 굵은 베옷을 입은 두 증인에게 1260일 즉 42달 동안 예언하도록 권세를 주시는데, 두 증인의 별명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이다.

 

성경에서 ‘2’는 증인의 숫자이다. 이 두 증인이 베옷을 입은 것은, 이들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슬픈 소식을 전할 것을 암시한다. 이 두 증인은 요한 당시의 복음 증거에 힘썼던 성도를 상징한다. 이 두 증인의 별명은 두 촛대와 두 감람나무인데 슥 4장의 촛대와 감람나무와 비슷하다. 4장에 보니 촛대가 불을 밝히기 위해 감람 기름을 공급받아야 하기에 두 감람나무 옆에 서 있다. 따라서 본문의 두 증인은 요한 당시에 복음을 전한 성도로서, 감람유로 상징되는 성령으로 충만한 증인인데, 어두운 세상을 말씀으로 밝히는 촛대역할을 했다 (11:4).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후로 초대교회의 신실한 복음의 선포자들이 활동한 것을 1,260일 동안 (유대-로마 전쟁 기간 혹은 네로 박해 기간) 활동했다고 상징적으로 말씀한다.

 

이 두 증인의 사명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 성전으로 측량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 확장에 수종들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다. 우리는 세상을 밝히는 촛대이다. 보통 촛대가 아니라, 성령의 지속적인 힘을 공급받는 증인이다.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측량함을 받아 보호 가운데 있는 증인이다. 우리의 복음 증거의 능력은 성령의 능력에서 나온다. 특히 예루살렘 멸망과 같이 대 환난의 기간 동안 복음을 전했던 초대교회 성도처럼 우리 시대가 혼란 할수록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된다.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싶은가? 복음을 전하라.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고 싶은가? 복음을 전하라.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을 확신하고 싶은가? 복음을 전하라.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영생과 구원을 확인하고 싶은가? 복음을 전하라.

 

둘째로, 우리는 주님의 증인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우리는 애통하는 마음과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충만으로 증인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가 주님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먼저, 굵은 베옷을 입어야 한다. 즉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세상의 넘치는 죄악을 보면서 우리는 애통해야 한다. 기준이 없고 가치관이 혼란스런 이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애통해야 한다. 우리 가족과 친척과 이웃이 밥 먹고 직장 다니며 잘 사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사랑과 도움과 은혜와 천국의 기쁨과 하늘의 신령한 은사를 알지도 보지도 누리지도 못하며 사는 자체가 지옥을 경험하는 삶인 것을 보고 애통해야 한다.

 

그리고 5절이 밝히듯이, 우리 입에서 불이 나와서 대적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 입에서 불과 같은 강력한 말씀, 성령의 양날선 검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증인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지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상황에 맞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경을 암송하고 알고 있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불과 같은 능력이 있는 것을 믿어야 능력있는 전도가 된다.

 

그리고 감람 기름인 성령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한다. 전도자 바울은 인간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전도하지 않았고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성령의 확신과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고백했다 (살전 1:5). 애통한 마음, 능력의 말씀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야말로 우리가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는 왜 복음을 전할 때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의 능력을 입어야 하고 성령의 권능을 입어야만 하는가? 복음을 전할 때 사단은 반대와 조롱과 어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본문 10절에 보니, 교회의 대적이 두 증인의 죽음을 보고 즐거워 기뻐하면서 예물을 서로 주고 받는 모습을 다룬다 (에스더 9:22). 이들이 이렇게 기뻐한 것은 이 초대 교회의 증거의 사역은 교회의 대적들의 죄를 지적했을 것이고 회개를 촉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 가운데서라도 성령의 능력 주심과 애통해 하는 마음과 기도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자.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이 거룩하고 불신자들의 눈에도 선하고,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애통하는 마음도, 말씀의 능력도, 성령의 권세도 아무 소용없게 된다. 우리의 삶이 윤리적이지 못하고, 세상 사람과 똑 같은 수준으로 산다면 전도의 문은 막히고 말 것이다. 이웃을 섬기는 윤리적인 삶을 기초로 하여, 애통한 마음, 말씀으로 무장함, 성령의 능력을 입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님의 증인으로 살 때 어떤 약속을 주시는가? 기적과 부활 생명의 약속을 주신다.

 

6절에 보니,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던 이 두 증인은 기적과 권세를 가지고 예언을 한다. 어떤 기적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가? 이 두 증인은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도 하고, 물을 피로 만들기도 하고, 재앙으로 땅 (이스라엘)을 심판하기도 한다. 비가 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왕상 17장에 엘리야에 의해 초래된 3년 반의 가뭄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물이 피로 변한 것과 여러 재앙은 출애굽 시에 모세가 나일 강을 피로 만든 것과 애굽 땅을 재앙들로 친 것을 연상케 한다 (7-13). 엘리야와 모세는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에도 함께 등장했다 (9). 그리고 이 둘은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인데 대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내다보는 인물들이다.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던 하나님은, 초대교회 사도를 통해서도 신기한 기적과 표적을 민간에 많이 행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생명을 주셔서 돌아 오게 했다. 사도행전이 이 사실을 증거한다.

 

하지만 이 두 증인이 사역을 마쳤을 때 짐승에 의해 죽임 당한다 (7). 짐승은 사탄의 지시를 받고 있는 교회의 대적을 가리킨다. 요한 당시에 짐승은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 제국과 불신 유대인이다 (17:5-8; 살전 2:14-17). 2증인이 비록 죽임을 당하지만 그들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이 다한 후에야 죽임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셨다. 사단이 우리를 대적하고 방해하더라도 우리가 죽는 시점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다 마친 후이다.

 

그런데 이 두 증인의 시체가 소돔 혹은 애굽에 버려져 있다. 이 소돔과 애굽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인 예루살렘이라고 말씀한다 (8). 마치 타락한 이방 도시 소돔과 이방 나라 애굽처럼 요한 당시의 예루살렘은 교회의 대적으로서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 이 두 증인의 시체가 사흘 반이나 장사지내지 못하고 방치되어 버려졌다 (9). 시체가 무덤에 장사지내지 못한 것은 공개적인 수치 중의 수치였다 (비교. 왕상 13:20-22; 8:1-2).

 

하지만 11절부터 상황이 달라진다. 11절에 보니 하나님은 이 두 증인을 살리신다. 두 증인은 순교로 죽었지만 부활을 경험한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는 항상 세상의 조롱거리와 괴롭힘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하지만 부활 생명을 주님은 각 시대의 교회에게 약속했다. 12절에 보니 이 증인들은 하늘로 올라간다. 부활을 경험했던 두 증인은 이제 승천한다. 원수들도 이 승천 장면을 구경한다. 이 장면은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죽기까지 수행한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적인 승천을 통해 왕노릇할 것을 보여준다 (2:6).

 

13절에 보니 예수님과 교회의 승천의 결과 교회의 대적에게 심판이 임했다. 바로 그 승천의 때에 예루살렘 성의 10분의 1이 무너지고 지진으로 7천명이 죽는다. 10분의 1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나팔 재앙은 완전한 심판을 다루지 않고 재앙의 경고적 차원으로 볼 수 있다. 심판으로 죽은 7천명은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과 정 반대다 (왕상 19:18). 구약에서는 겨우 7천의 남은 자가 있었지만, 새 언약에서는 7천 이외의 다수가 남은 자요 언약에 신실한 자이다. 이 남은 자는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구원받을 사람은 항상 회개하고 믿는다 (7:19; 26:9; 42:12; 13:16; 5:16; 벧전 2:12 ). 승천은 주님과 교회가 세상의 왕노릇하는 것이기에 교회의 대적은 심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부활생명을 이 땅에서 체험하게 하시고 기적과 승천의 체험을 주신다.

 

말을 맺자.

 

우리는 측량을 받은 참 성전이다. 이 말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밝히는 촛대요 증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떄 반대와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증인으로 살려고 할 때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공급하신다. 그리고 부활과 승천의 약속을 주신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 완수될 때 주님은 우리를 부르실 것이다. D.L. 무디처럼, 우리도 적어도 하루에 한 사람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님을 자랑하자. 하루에 한 명에게도 전도하지 못한 날은 괴로워서 잠이 오지 않아서 한 밤중에 다시 일어나 전도하러 나갔던 사람이 대 부흥사 무디였다. 우리 속에 전도에 대한 열정과 실천이 없다면 우리 교회 안에는 새 생명의 역사가 결단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에게 부활 생명있음을 감사하고 자랑할 때, 이 시대를 향한 애통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 입에서 능력이 말씀이 나올 때, 성장하며 부흥하는 역사가 일어 날 것이다. 아멘!

 

 

 

 

 

 

 

 

 

 

 

 

 

 

 

 

 

 

 

 

 

 

 

하늘의 두 가지 이적 (12:1-17)

성탄절 하루 전인 오늘 나는 주님의 보혈과 증인의 삶으로 사탄을 이기며 천국을 맛보아야 한다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12장은 우리의 신분을 무엇이라 밝히는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출애굽을 하여 고난 가운데서도 보호를 받는 사람이라 한다.

저는 지난 2000년에서 2002년까지 만 3년 동안 계 12-13장을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연구해보았다. 하지만 유한은 무한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처럼, 유한한 죄인인 제가 하나님의 거룩하고 심오한 말씀을 여전히 제대로 깨닫지 못함을 고백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방법은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을 바라보면서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읽는 것이다.

우리는 계시록의 핵심장을 읽었다. 12장은 위치상으로도 계시록 전체 22장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 구절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가 주님의 보혈과 교회의 증인의 삶을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진 것을 찬송하는 계 12:10-11절 송영 부분일 것이다.

12장에는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본 두 가지 환상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다. 요한이 본 첫 번째 환상 즉 하늘의 큰 표적은 한 여인에 관한 것이다. 요한이 본 여인은 태양을 옷처럼 입고 있으며, 발 밑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12별로 된 왕관을 쓰고 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아기를 임신했고 출산하기 직전이다. 그래서 산고를 겪고 있기에 아파서 부르짖고 있다. 요한이 본 두 번째 환상은 크고 붉은 용에 관한 것이다. 그 용은 머리가 7, 뿔은 10, 왕관은 7개를 쓰고 있어 아주 흉측한 모습이다. 용은 꼬리로 하늘 별의 3분의 1일 쓸어버리면서 땅에 던진다. 그리고 용은 여인이 해산하면 아이를 삼켜버리려고 벼르고 있다.

그 여인은 드디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장차 쇠막대기로 천하만국을 다스릴 남자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곧 바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아들을 낳은 여인은 광야로 도망하여 거기서 1260일 즉 3년 반 동안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장소에서 보호를 받는다. 그때 하늘에서 큰 전쟁이 있어 났는데 미가엘과 용이 붙은 한판 승부였다. 미가엘이 이겼고 용은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다. 그래서 하늘에는 큰 잔치가 벌어졌고 큰 소리로 찬양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예수님의 권세가 이루어졌다. 교회는 주님의 보혈과 증인의 삶으로 마귀를 이겼다. 하늘에서 마귀가 쫓겨났기에 땅과 바다에 사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한다는 찬송이다 (10-12). 이 찬송이 끝나자 13-17절에 6절과 똑같은 사건이 중복된다. 용이 여자를 광야까지 추격하지만 하나님은 독수리의 두 날개로 여자를 옮겨서 안전하게 3년 반을 보호하신다. 용은 여자를 추격하기를 포기하고 여자가 낳은 많은 후손들과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환상에 나온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 여자는 구약과 요한 당시의 교회를 상징한다. 아들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용은 마귀를 상징한다. 미가엘은 천사장이라기 보다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따라서 여인으로 상징된 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승천 후에 사탄으로부터 박해를 받아서 마치 광야에 살고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교회는 광야에서 3년 반 즉 짧은 기간 동안 핍박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 광야는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신 곳이며,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연단을 받았던 장소이다. 그러므로 광야라는 말은 계 12장의 내용이 새로운 출애굽사건과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인이 도망갈 때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서 도망갔다는 14절의 표현은 출 19:4의 인용인데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표현할 때도 독수리의 날개로 업어서 날랐다고 했다. 그러므로 독수리의 날개라는 표현도 요한 당시의 교회가 새로운 출애굽을 예수님 안에서 경험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데,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출생하심과 승천하심으로 주님 안에서 죄와 사탄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출애굽을 한 존재임을 밝힌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광야교회에서 살고 있다. 광야교회는 어려움을 시시때때로 겪지만 더욱 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와 살아서 역사하심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계 12장은 우리의 신분을 예수님 안에서 사탄으로부터 출애굽한 광야 교회라고 소개한다.

 

둘째로, 광야 교회인 우리가 곤경과 죄와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주님의 보혈을 믿는 믿음과 증인의 생활이다.

 

12장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여인은 요한 당시의 소아시아의 7교회를 1차적으로 가리킨다. 이 교회는 내적으로는 이단의 위협과 영적인 나태함으로 고난을 당했다. 외적으로는 로마 황제의 숭배 요구를 거절하느라 고생했고, 불신 유대인의 위협을 감수해야만 했다. 2-3장에 보니 이런 내외적 어려움을 두려워하여 타협해 버린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이런 상황에 있던 그의 독자들을 향해서 요한은 10-12절에서 하늘에서 드리는 큰 찬양을 들려준다. 그 내용은 하늘에서 마귀가 패배 당한 후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 임했고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권세가 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내외적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보혈의 권능을 믿고 타협하지 않고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밝힌다. 계시록에는 전쟁과 심판의 언어로 가득 차 있지만 한번도 무력의 사용이나 폭력적인 저항을 허용하지 않는다. 늘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보혈의 권세를 믿으며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할 것을 말씀한다.

 

교회가 비록 주님 안에서 새로운 출애굽을 경험했지만, 광야 같은 세상에서 갖가지 어려움을 시시때때로 겪고 사탄의 도전과 유혹을 받는다. 그 때 이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주님의 보혈이 사탄과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겼음을 믿어야 한다. 주님의 보혈에는 사탄을 이기는 권세, 주님의 보혈에는 죄를 이기는 권세, 주님의 보혈에는 모든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가 복음으로, 증인의 삶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하늘에서 완전하게 임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도 이루어 가기를 위해 기도하시고 응원하신다. 교회는 복음과 주님의 보혈을 통해서 세상을 정복하지 전투기나 폭탄이나 첨단 무기를 통해서 세상을 정복할 수 없다. 요한 당시의 로마 제국이 이루려고 했던 Pax Romana는 실패했다. 2003년 지금 미국이 제국주의적인 발상에서 이라크에서 이루려는 Pax Americana는 비록 전쟁에서는 승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승리와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그것을 하나님은 인정하시지도 원하시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열심당도 실패했다. 그 어떤 무력도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고 세상을 정복하지 못했다. 우리는 보혈과 증인의 삶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주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은 주님 보혈과 증인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약속을 주시는가? 현재적인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권세와 보호를 누리는 축복이다.

 

12장의 여인은 요한 당시의 교회를 상징한다. 그 교회를 삼키려고 용은 물을 입에서 토해서 몰살하려고 했지만 땅이 입을 벌려서 여인을 구해버렸다. 사탄이 내뿜은 물은 거짓 교리를 상징한다. 땅은 이스라엘 땅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교회를 박해하려던 사탄의 거짓 교리는 오히려 불신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고 말았다. 광야에서 교회는 3년 반 동안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다. 3년 반 은 짧은 환난의 기간을 의미한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는 주후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쳐들어왔을 때 성령의 지시로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요단 강 동편 Pella로 피신하여 거기서 3년 반 동안 보호받은 역사적인 사건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해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때로는 우리에게 닥친 시험과 고난을 불신자에게 돌려서 우리를 보호하시기도 하고, 성령의 특별한 능력과 인도로 우리를 보호하시기도 하신다. 특별히 우리가 보혈의 권세를 믿고 증인의 삶을 살 때 주님의 권세와 능력과 나라가 현재적으로 임함을 더욱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초대교회의 선교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바울의 삶과 사역을 보라. 그가 복음 때문에 고난을 심하게 당하면 당할수록 주님의 권세와 보호와 나라가 더욱 임했던 것을 알지 않는가? 우리 직장에서, 우리 가정에서 사탄을 내쫓으시고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보혈의 권세를 믿고 더욱 증인의 생활을 하자.

 

말을 맺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출애굽을 한 사람이다. 따라서 주님의 보혈의 권능이 광야 교회 생활을 하는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심을 믿자. 우리가 승리하는 길,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경험하는 방법은 복음과 관련된 삶을 사는 것이다. 더욱 교회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살자. 아멘!.

 

 

 

 

 

 

승천 축하 예배설교 (12:1-6)

 

승천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근처 마을인 베다니 근처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사건이다. 주님은 승천 때의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승천축하예배는 예수님이 하늘 위로 들려 올라가신 것을 축하하는 것이다. 이것을 왜 축하해야 할까? 개혁교회에서는 승천기념일이 되면 그날이 화요일이던, 목요일이던 이웃 교회와 함께 저녁에 모여서 축하예배를 드린다. 1998년 포쳅스트룸 북 다리교회 (Noordbrug)에서 드린 승천축하예배 시에 프랑소와 펄륜교수가 엘리야의 승천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의 승천의 의의를 설교한 것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전에 남아공에서 승천일은 공휴일이었다. 그들은 승천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고난주간과 부활주일과 성령강림주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승천일도 중요하다. 그래서 승천기념주일도 제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죽음과 부활이라면 주님의 승천도 나의 승천이다.

 

나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왕권을 시행해야 한다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승천으로 예수님은 어떤 지위를 얻으셨는가? 절대적인 권세로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 되셨다.

 

12장에서 요한은 2가지 하늘 환상을 본다. 첫 번째 환상은 본문 1-2절에 나온다. 어떤 여자가 태양을 옷처럼 입고, 달을 밟고, 12별을 왕관처럼 쓰고 있다. 이 여자는 임신 중이며 남자 아기를 출산할 것이다. 산통을 호소하고 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출산할 구약과 요한 당시의 교회를 상징한다. 요한이 본 두 번째 환상은 본문 3-6절에 나온다. 그것은 붉은 색의 큰 용이 등장하는데 머리가 7, 뿔이 10개나 가지고 있는 흉측한 모습이다. 머리 마다 면류관을 쓰고 있다. 용은 꼬리를 휘둘러 하늘의 별 3분의 1을 땅에 던진다. 용은 사단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천사 중에서 3분의 1정도를 마귀로 만들어서 타락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용이 여자가 해산하면 아이를 죽이려고 벼르고 있다.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앞으로 쇠막대기로 세상을 통치할 분이다. 아기가 태어나자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라가버렸기에 용이 아기를 죽이지 못했다. 헤롯 대왕이 2살 이하 아기를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했지 않는가!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에서부터 약속된 것이기에, 사단과 사람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의 승천과 재위를 본다. 용이 아기 대신 여자를 핍박하려고 하니, 여자가 광야로 도망가서 1260일 동안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으로 도망가서 보호를 받는다. 이 환상은 예수님의 출생과 승천 그리고 승천 후에 지상의 교회가 당하는 어려움과 하나님의 보호를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하셨고 나중에 승천하셨는데, 요한은 것을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승천은 예수님이 철장 즉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고 만국을 다스리시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신 등극 사건이다. 승천 이후의 세상 역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구원의 사역을 펼치시는 역사이다. 특히 사도행전의 핵심 메시지는 승천하신 예수님이 오순절 성령님과 교회를 통해서 이루시는 천국 확장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승천을 축하할 때 예수님이 세상의 왕, 나의 왕이심을 축하해야 한다. 나를 다스리시고, 교회를 다스리시고, 직장을 다스리시고, 대한민국을 다스리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다.

 

둘째로, 주님의 승천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우리를 하늘에 앉힌 자요, 이 땅에서 왕의 자녀로 만드셨다.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5). 바울은 우리도 하늘에 앉힌 자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2:6). 예수님의 승천은 곧 우리의 영적인 승천이라는 의미이다. 즉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에, 우리는 하늘 시민으로서 왕의 자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성령충만하여 천국 시민으로 사는 것이 하늘에 앉힌 자의 삶이다. 이 땅에서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은사를 발견하고 누리는 것이 하늘에 앉힌 자의 삶이다. 주님의 승천은 우리를 존귀한 왕 같은 족속으로 만든 영광스런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삶은 왕이신 우리 예수님의 통치를 세상에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혜와 지식의 주이신 예수님은 학문의 왕이시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교회의 왕이시다. 의와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활동하는 모든 영역에 의와 평강이 실현되기를 원하신다. 만유이신 예수님의 우리의 경제적인 활동, 취미활동, 전공, 직업에서 왕으로 다스리기를 원하신다. 주님 손에 들려있는 철장 (iron rod)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교회와 복음의 대적을 진멸시킬 것을 주문하신다. 왕의 자녀는 시시한 존재가 아니다. 항상 왕의 상에서 먹고, 자부심을 가지고, 세상의 주인공으로 사는 존재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왕이신 예수님의 왕권을 어떻게 시행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보호를 믿으며 사단의 권세를 물리쳐야 한다.

 

주님이 승천하신 후로 교회는 오순절 성령님을 보혜사로 모시고 살고 있다. 주님 승천 후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의 박해와 유대인의 박해로 스데반이 죽고 사도 이외에는 흩어지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교회는 더 넓은 지역에 흩어져서 복음을 사마리아와 온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지상의 교회가 불완전하고 내외적 어려움을 겪고 광야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본문 6절에 보니, 1260일 동안 여자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 교회가 1260일 즉 3년 반 즉 짧은 기간 동안 사단에 의해 도전과 시험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로 감당할 수 있음을 뜻한다. 지상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도요 전권대사로서 사역을 감당할 때 사단과 죄라는 대적을 만날 수 밖에 없지만, 여호와 이레와 여호와 닛시의 도움으로 넉넉히 감당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요한의 수신자들이 유대인과 로마의 박해를 받고 있을 때 큰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 비록 곤고함이 엄습하는 광야길, 불뱀이 있으며 추위와 목마름의 길을 걷고 있지만, 오히려 광야는 불기둥, 구름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물을 내는 반석도 있다. 광야는 시험과 고난의 장소인 동시에,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하심과 승리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이다. 주님이 먼저 온갖 고난을 당하셨기에 광야길을 걷는 백성에게 위로를 주실 수 있다. 주님이 사단을 이기셨기에 우리에게도 죄악과 사단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다.

 

말씀을 맺자.

 

주님의 승천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우리는 주님의 왕되심을 삶으로 전해야 한다. 나의 생각과 말이 주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가?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어떤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왕이신가? 우리 학교와 직장에 주님이 왕으로 다스리고 계시는가? 승천은 주님이 왕으로 다스리심을 믿고 광야 길을 더욱 힘차게 걸어갈 것을 다짐하는 시간이다. 비록 사단의 도전과 위협이 있더라도, 주님이 승천하심으로 보내주신 성령께서 우리 앞에 샘물을 내시고, 시의 적절하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시고, 불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심을 믿자. 승천하신 주님은 왕권을 완성하시려고 이 땅에 다시 내려 오실 것이다. 아멘.

 

 

 

 

 

 

 

 

 

 

 

 

 

 

 

 

 

 

이길 수 밖에 없는 싸움 (13:1-18)

 

부시대통령이 승전을 선언한지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라크전쟁은 끝나지 않고 여전히 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피 흘리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명분없는 일방적인전쟁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다. 그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분명한 것은 미군과 영국군이 대규모 전쟁에서 이긴 것은 분명하지만, 완전한 소탕작전을 위해 애를 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도의 삶과 유사한 점이 더러 있다. 우리도 이미 이긴 전쟁의 연속선상에서 벌어지는 계속되는 전투를 힘겹게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는 제목으로 나는 인내와 믿음과 충성으로 교회 내외적인 도전과 고난 가운데서도 이길 수 있다라는 요지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게 된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 대장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기 때문이다.

 

12:7절 이하에 보면 하늘의 전쟁에서 미가엘로 나타난 예수님이 사탄을 이기심으로 그 결과 사탄은 땅으로 내쫓겼다. 이 하늘의 전쟁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탄이 패배한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승리는 교회의 미래를 결정해 버린 사건이다. 우리 대장 예수님이 이기셨기에 우리 역시 이길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을 계 13:6절이 다른 방식으로 증명한다. 소아시아의 7교회를 박해하는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바다 짐승이 입을 열어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장막 (His tabernacle)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했다. 요한은 성도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3:20). 이미 우리는 하늘 보좌에 앉힌 자들이다 (1:20; 2:6). 하나님은 우리를 장막-거처로 삼아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특별히 주일에 드리는 공적 예배는 영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매주 하늘로 올라가 보좌 위에 계신 우리 왕이신 하나님을 알현하는 승천사건이다. 천상의 주일 예배 후 월요일부터 세상 속에서 주일에 받은 하늘의 평강과 은혜와 기쁨의 빛을 반사하며 증거해야 한다. 오늘 날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와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그분의 나라를 예배와 삶 속에서 체험하는가? 13장이 밝히는 우리의 신분은 예수님 때문에 이기는 자, 이미 하늘에 거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자이다.

 

둘째로, 우리는 무엇과 싸워 이길 수밖에 없는가? 교회의 외적인 박해와 도전이다.

 

성도가 당하는 외적 고난을 계 13:1-10절이 다룬다. 131절의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요한 당시에 열국을 다스리며 혼란을 가중시킨 로마제국 혹은/그리고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 이스라엘 혹은 밧모섬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지중해이며 이 바다 너머에 로마가 있다. 2절에 보니 이 바다 짐승은 먹이를 덮치는데 빠른 표범과 비슷하고, 발은 마치 고집과 끈기 그리고 강한 집착력을 가진 곰의 발 같고, 입은 마치 마구 삼키는 사자의 입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바다 짐승은 용 (사탄)의 능력, 보좌 그리고 큰 권세를 가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요한은 여기서 단 7:1-6절에 나타난 세계의 4대 제국 중 첫 3제국 (바벨론, 메데-바사, 그리스)을 묘사할 때 등장하는 짐승을 모두 동원한다는 점이다. 7:7절에 보니 마지막 4번째 제국인 로마는 이전의 3제국의 모든 악함을 포함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능가하는 포학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편 이 짐승은 짐승 같은 네로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4절은 사탄이 로마와 네로에게 권세를 부여함으로써 이스라엘 땅에 사는 사람들이 용과 짐승을 경배하고,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이 짐승과 더불어 싸우리요? 라고 말한다. 사탄의 하수인인 로마의 힘에 대해 탄복하는 불신 유대인의 모습이다. 5절에서 받고라는 말을 통해서 볼 때 바다짐승이 악한 일을 행하지만 그의 권세 역시 하나님의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42달 일할 권세를 받았기에 교회의 대적의 활동은 제한적이고 짧다. 42개월은 주후 64년 중순에서 68년 초순까지의 문자적인 42개월 동안의 네로의 박해 기간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7절에 보니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사실 요한 당시의 사탄은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리도록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다.

 

소아시아의 7교회를 향해 포학하게 달려들었던 로마 제국의 박해와 같은 외적인 박해가 7교회를 없애버렸는가? 아니다. 지금은 이런 외적 박해가 별로 없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교회 밖으로부터의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이런 도전과 박해는 하나님의 허락 속에 그리고 제한된 기간 안에 일어나는 것이다. 교회의 존립 자체를 흔들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손으로 지켜주신다.

 

셋째로, 우리는 무엇과 싸워 이길 수밖에 없는가?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혼합주의, 세상과의 타협 그리고 우상숭배이다.

 

이것을 계 13:11-18절에서 밝힌다. 11절의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누구인가? 계시록의 땅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불신 유대인 박해자 즉 이스라엘에서 나타난 박해자를 의미한다. 땅 짐승은 새끼 양처럼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는 땅짐승이다. 외모는 예수님의 모방자이나 말은 속이고 현혹하고 기만하고 유혹하는 것으로서 용-사탄의 사주를 받고 있다. 땅 짐승은 거짓 선지자다 (16:13; 19:20). 어떤 의미에서 초대교회의 가장 큰 대적은 이런 유대인에 의한 거짓 증거였다. 24:5절 그리고 11절에서 예수님이 예언하신 것이 이스라엘 안에 성취되고 있다: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리라”. 유대교는 구약과 관련된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참된 신앙을 거부한 이단과 같다. 다른 이단과 마찬가지로 유대교는 성경에서 그 권위를 찾지만 사람의 전통에 뿌리 박고 있다. 정통 기독교만 구약 신앙을 계승한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13:12절은 거짓 유대교가 완전히 로마제국의 시녀 역할을 하는 것을 밝힌다. 주목할 표현은 이 땅 짐승이 바다 짐승 '앞에서' 권세를 행한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역설-페러디이다. 삼상 1:22절 등에 보면 참 선지자는 주님의 면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죽게된 상처가 나은 짐승의 연고로 짐승 숭배를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모방이다. 교회는 주님의 부활을 예배하고 주님의 부활을 인해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공예배로 모인다.

 

13:13-15절은 행 8:9-24절이 마술사 시몬을 예로 들어 밝히듯이, 거짓 유대인 선지자들이 기적을 행하여 교회를 대적하는 것을 의미한다. 감람산 강화에서 이것이 예언되었다 (24:24). 2:21-22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지적하고 있다. 우상숭배는 사실 광의로 해석할 수 있다. 15절에서 불신 유대인들이 로마황제 숭배를 독려하는 모습을 본다. 우상이 말하는 것은 복화술 (ventriloquism)로 이해할 수 있다 (참고 시 135:15-16). 즉 요한 당시의 큰 우상-동상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말하여 마치 우상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을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상징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말-사상으로 세상을 미혹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16-17절은 교회가 로마의 황제나 이방신을 섬기지 않을 때 당하는 실제적인 경제적 압박을 묘사한다. 유대인의 회당이 예수님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숭배하도록 강요한다. 여기에서 짐승의 표는 당연히 하나님의 인침의 페러디이다 (3:12). 하나님의 인침은 의와 거룩 그리고 성결과 축복과 보호의 표이다.

 

18절의 666은 네로인데 게마트리아 (gematria) 즉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알파벳은 숫자의 가치를 가진다는 이론에 근거한 결론이다. 네로를 히브리어로 쓴다면 그 알파벳의 합은 666이며 마지막 자음을 빼버리면 616이 합이다. 때로 우리는 616으로 된 사본을 보는데 이것 역시 네로를 지지한다. Chilton666을 로마제국으로 본다. 게마트리아를 계시록 중에서 유일하게 이 구절에서만 적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666을 불완전의 종교인 유대교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숫자로 볼 수도 있다.

 

복음을 가장한 거짓 교리와 타협 그리고 혼합주의는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탄의 전략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 여러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주로 예수님과 복음을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이것들을 물리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런 싸움에서 어떻게 이기는가? 언약적인 충성과 인내와 믿음으로 이긴다.

 

13:9-10이 그 답을 준다.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아마 이 표현은 종이 종신토록 주인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 귀를 뚫었던 관습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21:5-6). 만약 이것이 맞다면 이 구절은 종 (교회)이 주인 (하나님)을 향해서 평생토록 순종하겠다는 언약적인 결단을 의미한다. 13:10은 렘 15:2; 42:11을 희미하게 나마 연상시키는데,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멸망되기로 작정되어 있어서 기도하지 말 것을 명령받았다. 따라서 예루살렘 멸망의 문맥에서 이 구절이 이해되어야 한다. 모세와 사무엘이라는 막강한 중보자가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은 들으시지 않겠다고 말했다 (15:1).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했다. 이 구절은 또한 예수님이 예루살렘 여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 예루살렘 여자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3:28-31)를 연상케 한다. 여기서 요한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구약 이스라엘의 상황을 암시하면서, 2의 바벨론인 로마에 의해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대한 확신은 고난 가운데서 인내하도록 하는 힘을 제공한다. 교회는 평생 주님의 종으로 순종하며 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주님이 교회의 대적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믿고 인내해야 한다.

 

말을 맺자.

 

13장이 밝히는 우리의 신분은 예수님의 승리로 인해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악은 여러 모습으로 교회를 대적하게 하고 우상 숭배를 강요한다. 우리 시대에는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신앙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 삶 속에서 나태하고 세상을 따라,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세속적으로 사는 유혹을 이겨야 한다. , 바다 짐승, 땅 짐승은 3위 하나님의 모방에 불과한 힘없는 존재이다. 외적인 고난과 내적인 유혹과 우상 숭배를 이길 수밖에 없다, 그 방법은 인내와 충성과 믿음이다. 아멘!

 

 

 

 

 

 

 

 

 

 

 

 

 

 

 

 

시온산 위에 선 사람들 (14:1-5 )

 

나는 지금 여기서 주님과 교제하면서 승리를 누려야 한다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본문은 우리의 신분을 무엇이라고 밝히는가? 예수님 안에서 승리한 자라고 밝힌다.

 

본문 계 14에서 요한은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밧모섬이라는 곳에서 환상을 본디. 이 환상은 너무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이 환상을 우리가 마음속으로 한번 그려보자.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하나 있는데 시온산이 다. 그 산 위에 어린양과 144,000명이 서 있다. 그 산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서 있다. 자세히 보니 144,000명 각자의 이마에 어린양과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폭포수와 같이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가 들리는데 거문고-하프연주소리처럼 들린다. 144,000명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보좌 주위의 4 생물과 그 보좌를 둘러 싼 24명의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른다. 144,000명으로 구성된 세계 최대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웅장하며 무대가 컸겠는가! 이 합창단원들은 여자로부터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지휘자인)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었고, 구원의 첫 열매들이었고 예수님과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줄 몰랐고 흠이 없는 완전한 사람이었다.

 

144,000명은 누구인가? 요한 당시의 성도를 가리킨다. 14장의 환상은 계 13장에 나타난 악의 세력의 삼위 일체인 용, 바다 짐승 그리고 땅 짐승의 세력보다 더 강력한 3위 일체 하나님의 힘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요한으로 하여금 144,000명이란 엄청난 사람을 환상을 통해 보게 하신 것은, 구약의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이 영적인 눈을 떠서 이스라엘의 대적보다 더욱 많은 군대와 병거가 함께 함을 목도했던 것과 유사하다 (비교 왕하 6:15-17). 그리고 이 환상은 시 2편과 비슷한데, “내가 나의 왕을 시온산에 세웠다는 말씀처럼 승리하신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교회인 144,000명과 함께 시온산에 서 계심을 말씀한다.

 

여기서 산의 계시사적 중요성에 주의해 보자. 성경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산은 무슨 산입니까? 에덴 동산이다. 28:13-14에서 에덴 동산을 하나님의 거룩한 산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산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 그리고 바로 그 모리아 산에 건축된 솔로몬 성전을 비롯하여, 구약에서 산에서 벌어진 많은 사건들 (22:2) 뿐 아니라 산의 회복에 관한 약속들 (2:2-4)은 낙원 즉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서 땅 위에 이루어질 것을 내다본다.

 

따라서 시온산에 서 계신 어린양은 모든 대적을 정복하여 낙원을 만드신 승리의 예수님을 가리킨다. 이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언약 백성과 함께 에덴 동산의 회복된 교제를 누리는 승리를 의미한다. 많은 산 중에서 특별히 시온산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온산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거룩한 산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온산에 세상 모든 나라가 함께 모여서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며, 바로 거기서 하나님은 교회와 함께 하시며 승리를 주시기 때문이다 (9:1-20; 24:21-23). 이 이유로 계 14:1에 보니, 어린양이신 주님만 승리를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이 공유한다. 왕이신 주님의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이다.

 

144,000명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이것은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호하시고 소유하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계 13:16-17절에서 짐승이 불신자들을 인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144,000명은 요한 당시의 성도로서 주님의 소유이며 보호를 받는 승리한 군대이며 남은 자-교회이다. 지금은 영적으로 우리가 144,000명에 포함되어 있다. 주님의 소유로서, 보호를 받으면서 주님과 늘 함께 동행하면서 살고있는 승리한 교회가 저와 여러분이다. 이것이 계 14:1-5이 밝히는 우리의 신분이다.

 

둘째로, 우리는 어떻게 지금 여기서 주님과 교제하면서 승리를 누릴 수 있는가? 천상의 새 노래를 부르며 정결한 삶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14:2-3절에서 요한은 어린양과 그의 144,000명의 군대를 보지만 영광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하늘의 오케스트라의 큰 소리를 듣는다. 천상의 오케스트라는 하나님의 보좌와 4생물과 24장로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144,000-승리한 교회가 부르는 승전가를 연주한다. 이 승리의 새 노래는 구속받은 교회만 알고 부를 수 있는 독특한 것이다 (2:17; 5:9). 아마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구원과 보호와 인도하심 그리고 위엄을 찬송했을 것이다.

 

4-5절에서 요한은 구속받은 144,000명의 모습을 자세히 세부적으로 묘사한다. 이들은 여자-음녀로부터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이다. 글자 그대로 총각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으로 정결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참고 고후 11:2). 마치 마태복음에서 고자가 독신을 가리키는 상징인 것과 같다 (19:12). 좀 더 특정적으로 여기서 말하는 정절은 구약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 중에는 여자와 성적인 접촉을 가지지 않는 것을 연상케 한다 (19:15; 삼하 11:8-11). 정절과 반대되는 것은 계 14:8-10(배교와 우상숭배를 상징하는) ‘음행인데, 짐승과의 연합으로 묘사되는데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설명된다 (참고 사 1:21; 2:14).

 

따라서 어린양 주위에 모인 승리한 군대는 한 마음을 가지고 이 거룩한 전쟁을 위해서 헌신하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어 정절로써 참여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은 어디나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간다는 말은 복음서에서는 제자의 순종을 가리키는 말이다 (9:9; 9:38).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어디든지 따라가는 교회의 모습이다. 우리가 가고 싶은 곳, 우리가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가고 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고 인도하는 곳으로 가는 사람이 참된 주님의 백성이다.

 

또한 이들은 사람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아 첫 열매들 (first fruits)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하게 된 자들이다. 첫 열매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소유로서 하나님께 희생으로 바쳐져야 했다 (22:29). 이들은 사도 시대에 있었던 제 1세대의 고백적-순교적 교회이다. 요한 당시의 바로 144,000명을 통해서 주님은 많은 구원의 두 번째, 세 번째 열매를 거두어 들이셨다. 그리고 이들의 입에는 거짓이 없고 흠이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참소자요 고발자인 마귀의 자녀들과는 달리 (8:44), 진실한 사람이다 (4:24-27). 144,000명의 입에 거짓말이 없었다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대신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비교 렘 23). 사실 계시록의 중심 주제 중 하나는 참 선지자-증인과 거짓 선지자 사이의 대결이 아닌가! 입에 할례를 받은 자들, 입에 파수군을 세운 자들이 교회다.

 

여기서 주의해 볼 것은, 요한은 시온산 (1) 위의 예수님과 144,000명을 보았고, 천상의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는 하늘 (2)로부터 들었다. 시온산과 하늘이라는 공간적인 배경이 동시에 등장한다. 즉 요한에게 있어서 종종 지상과 천상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경계가 허물어진다 (12:12; 13:6).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이미 하늘 나라를 경험하고 있는 승리한 전투적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설명한다. 이것이 히 12:22-23이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144,000명인데 이 땅 위에서 정결한 생활로 새 노래를 불러 천상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거짓이 없고 정결한 생활을 하면 할 수록 우리는 더욱 있는 천상의 군대로 무장하게 된다.

 

말을 맺자.

 

우리는 시온산에 주님과 함께 서있는 사람이다.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소유, 주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다. 주님의 승리를 새 노래를 부르면서 찬양해야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진실하고 정결한 군대이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과 원하시는 장소에서 섬겨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지금 하늘의 영광을 맛보며 승전가를 불러야 하는 사람이다. 입술에 할례를 받고 입술에 파수군을 세운 사람들이다. 이런 놀라운 복을 주신 주님을 찬송하지 않겠습니까? 아멘.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15:1-8)

 

15장은 요한이 지금은 그리스에 속한 밧모라는 섬에서 유배생활 중에서 보았던 환상이다. 아주 특별한 찬양대에 관한 환상이다. 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교회 밖으로부터 불어닥친 고난과 핍박과 위협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내에서 일어난 영적인 나태함과 미지근함, 이단을 허용하면서 세상과 타협하려는 분위기에 처해 있었던 소아시아의 7교회를 위로하고 책망하시길 원하신다.

 

요지는 나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왕이신 하나님만 경배해야 한다이다.

 

첫째로, 15장은 우리의 신분,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고 밝히는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출애굽을 이미 경험한 승리자로 밝힌다.

 

요한은 우리에게 노래 한 곡을 들려준다. 제목은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3중 정복자이다. 이 가수들은 짐승을 이긴 사람이며, 짐승의 우상을 이긴 사람이며, 짐승의 이름의 숫자를 이긴 사람들이다. 짐승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인 소아시아 지역의 7교회를 박해했던 로마제국과 불신 유대인을 가리킨다. 이 교회의 박해자들을 이긴 사람들이 지금 노래를 부른다. 연주를 위해 동원된 악기는 하나님의 거문고-하프다 (3-4). 노래를 부르고 있는 무대는 유리 바다-수정 바닷가이다. 매년 1월이 되면 저의 고향에서 유리바다와 비슷한 것을 보았다. 수 십 만평이나 되는 엄청난 문천지라는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인공호수가 어는데, 겨울 오후의 태양 빛이 강렬히 내리 쬐면 호수 전체가 빛난 수정 바다처럼 빛난다. 소아시아의 7교회가 겪었던 시련과 환난은 마치 불세례와 같은 것이었기에 이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유리 바다가 불로 섞여 있다고 한다. 아마 요한이 보았던 유리 바다는 큰 저수지나 못이 얼어 있는 모습과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이 바다는 불과 섞여 있다.

 

유리로 만든 바다와 비슷한 것이 구약 시대의 성전 마당의 번제단 앞에 있었던 놋으로 만든 큰 대야였다. 그것을 놋바다라고 부른다. 놋 바다는 직경이 5m, 높이는 2.5m. 용량은 66,000리터였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전에 놋바다의 물로 몸을 먼저 씻어야 했다. 그런데 대하 6:12-42에 보니, 솔로몬왕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놋바다 앞에 있던 높은 단에 무릎꿇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솔로몬은 먼저 자신을 위해 강력하게 일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방인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은혜받도록 간구한 것이다 (대하 6:32-33). 솔로몬이 놋단 위에 서서 기도를 마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제물을 태우고 성전에 구름이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대하 7:1-2). 비슷하게 본문 3-4절에 보니, 하나님은 만국의 왕이요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고 한다. 그리고 본문 8절에도 교회의 원수를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성전을 가득채워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유리 바다가에서 부른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의 내용은 이집트의 바로왕과 그 군대를 물리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불렀던 노래와 비슷하다 (15; 32). 유리 바닷가에서 노래부르는 사람들은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넌 후 바닷가에 서서 구원의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양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비슷하다. 유리 바닷가의 사람들은 다름아니라 소아시아의 7교회 성도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소아시아 7교회는 구원을 얻었고, 그들의 대적은 애굽의 바로와 군대가 홍해에서 몰사한 것처럼 심판을 받게 된다. 3절에 보니 하나님은 크고 기이한 일을 행하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크고 기이한 일이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새로운 출애굽을 하여 승리자로 만드신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경험한 새로운 출애굽이란 무엇인가? 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온갖 시련과 도전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유리 바닷가에 선 사람들이 3절 마지막에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다'고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을 괴롭혔던 원수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셨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지, 의롭고 참되신지,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신지 의문이 갈 때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롭고 참되시며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만국의 왕이라고 노래한다.

 

이 찬송이 끝나자 5절에 보니,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다. ‘증거 장막의 성전이라는 말은 십계명이 적힌 돌판 두 개를 보관한 언약궤가 있던 지성소를 가리킨다. 요한은 이미 성도를 하늘에 거하는 하나님의 장막 (skeines)이라고 불렀다 (13:6). 따라서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렸다는 말은 교회는 이미 영적으로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 성전으로부터 7천사들이 나와서 교회의 대적을 심판한다. 따라서 계 15장이 밝히는 우리의 신분은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출애굽을 경험한 승리자요, 하늘에 앉힌 성전이요, 대적을 심판하는 사람이다.

 

둘째로, 우리는 왜 하나님만 경배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려있고, 그 성전으로부터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가득찬 접시를 든 7천사가 밖으로 나온다. 하나님은 이 7명의 천사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보내어 심판이 담긴 접시를 부으라고 명령하신다. 심판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간음 때문이다. 31:16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32:5에서, 하나님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반역을 당하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32:5). 15장에서 천사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시행하실 심판은 신 28:49-57에서 이미 나타난다. 28장에 보면, 매우 두려운 나라가 일어나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지만 '남은 자'는 구원을 받으며, 궁극적으로 이 남은 자의 수는 옛 이스라엘의 수를 능가하게 되어 셀 수도 없게 된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때로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시다. 부모가 자식이 버릇없이 잘못된 길로 가는데도 그저 예쁘게만 보고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아이를 망치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적인 간음을 행하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진정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매질하시는 것은 사랑하신다는 표현이며 의로우신 분이라는 증거다.

 

본문 8절에 성전에 구름이 가득하여 아무도 들어 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교회의 대적에게 내릴 심판을 멈추도록 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서 중보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죽이고 교회를 괴롭혔던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멈출만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불신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제국에 의해 주후 70년에 파멸되어야 했다.

 

이제 예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영적 간음을 저지런 혈통적인 유대인들이 중심이 된 옛 시대가 물러가야, 신약의 교회의 시대가 도래한다. 율법과 죄와 사탄이 지배하던 시대가 지나가야만 은혜와 복음과 성령의 새 시대가 온 세상에 도래한다. 새언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만국의 왕으로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시대이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이란의 Bam에서 발생한 지진을 생각해 보라. 최근 10년 이내의 가장 큰 참사였다. Bam은 한 때 페르시아 제국의 번성한 도시였다.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의 불 신전과 이슬람의 사원들이 있던 곳. 비록 150년 전부터 거의 버려진 도시처럼 되었다가 복원사업이 진행된 도시다. 누가 4-5만 명이 한꺼번에 죽은 사건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가? 공의의 하나님은 실로 두려운 분이시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출애굽을 경험한 우리도 영적인 창녀로 산다면, 우리 스스로 교회의 대적이 되어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언행심사가 거룩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증명하는 것과 무관하다면 우리는 새언약의 백성에 걸맞지 않게 사는 것이며 의로우신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시기에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만 경배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면서 삶의 예배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본문 2절의 불이 섞인 유리 (수정=크리스탈) 바다는 계 4:6에 보니 하나님의 보좌 앞에 펼쳐져 있다. 이 유리 바다는 모세가 율법을 받으려고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보았던 하나님의 발 아래에 펼쳐진 청옥과 비슷하다 (24:10). 그리고 이 유리바다는 에스겔선지자가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지나갔던 남보석 궁창과도 비슷하다 (1:26).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유리 바다가에 서 있던 노래하는 사람들을 비추고 있다. 저와 여러분은 하늘의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 왕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영광을 찬송하고 그 은혜를 맛보고 기뻐한다. 예배는 우리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 알현하는 시간이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개혁교회에서는 시 121:1-2을 읽고 예배를 시작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 다음에 예배를 드리러 하나님께 나아온 무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복을 축도로 선포한다. 그리고는 예배를 마칠 때도 축도로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여 세상을 향해서 전진해 가도록 한다. 예배 시간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려서 만왕의 왕을 만나러 수정바다처럼 펼쳐진 하늘 보좌로 올라가는 승천의 시간이다. 보좌로부터 나오는 하나님 영광과 은혜의 빛을 받고 체험하는 시간이다.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경험한 사람은 1주일 동안 하나님을 삶으로 예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모시고 살고 싶어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추며 살고 싶어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출애굽을 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막이 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다.

 

말을 맺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와 더러움 그리고 사탄과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이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이다. 그 결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참되신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친밀히 모시고 교제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 함께 의롭고 거룩하신 만왕의 왕되신 우리 아버지를 찬양하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찬란하게 반사되는 수정 바다가에 서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문고를 들고, ‘새로운 모세되신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면서 경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멘!

 

 

 

 

 

 

 

 

 

 

 

 

 

 

일곱 대접을 쏟으매 (16:1-21)

 

요즘 부쩍 증가하고 있는 지진과 여러 가지 자연 재해로 두려워하면서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까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16장에 보면, 지진과 흑암, 사람을 죽일 정도의 뜨거운 태양의 열기, 바다, , 하늘에 임한 재앙 그리고 아마겟돈 전쟁이 등장한다. 마치 한 편의 무서운 지구의 종말과 암울한 미래를 보는 듯하다. 16장은 과연 암울한 지구의 종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청사진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세상을 무조건 낙관적으로 보아서 마치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대신 핑크 빛 밝은 미래만 선포한 거짓 선지자처럼 되어서도 안 된다. 대신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를 바로 알고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교회의 대적이 진멸되고 천국이 임하도록 깨어 기도해야 한다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우리는 왜 교회의 대적이 진멸되도록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교회의 대적을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고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16장에 나타난 7대접의 심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 당시의 교회를 괴롭힌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에게 임할 심판이 아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읽을 때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7나팔의 심판과는 달리 7대접의 심판에서는 심판의 영역이 3분의 1에서 전체로 확대됨으로 교회의 대적의 철저한 파괴를 볼 수 있다. 즉 점층법적 기교가 나타난다. 7대접의 재앙은 출애굽시의 10재앙과 유사하다. 이 사실은 소아시아의 7교회와 우리는 새로운 모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 2의 출애굽을 경험한 새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렇게 진노의 대접을 부으시는 것은 구약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주제이다. 스바냐 선지자는 훈계와 책망을 들어도 무감각한 남 유다에게 자신의 불타는 진노를 쏟으시는 여호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3:7-8).

 

본문 1절에 보면,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난다. 지성소에서 하나님이 직접 7천사를 불러서 재앙이 담긴 대접을 나누어 주시면서 차례로 쏟아 부으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교회의 대적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2절에 보니, 이 재앙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을 숭배하는 땅 위의 사람들에게 임한다. 그러나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에게 돌아왔다는 언급이 없다.

 

7절에 보니,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될 때 제단 즉 향단 아래에 있던 순교자들이 이 심판은 참되고 의롭다고 찬송한다. 6:9-10절에 의하면, 향단 아래에 있던 순교자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죽임당한 자들인데,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의 피를 신원하여 주소서”. 성도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교회와 복음의 대적을 방관하지 않고 심판하시고 주님을 위하여 고통받는 성도를 돌보아 주시도록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고 참되시기 때문이다.

 

16장의 대접이 하나씩 부어질 때, 악하고 독한 헌데 (피부병), 바다, , 물이 피로 변함, 태양이 뜨겁게 열을 발하여 사람을 죽임, 어둠과 종기, 사단의 졸개인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모여듬, 그리고 큰 우박과 지진으로 교회의 대적이 철저히 파괴된다. 이 모든 것은 요한 당시의 교회의 대적인 불신 유대인들과 로마 제국이 불가피하게 받을 극렬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무서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6절에 보니, 성도와 선지자의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교회를 박해하되 순교자를 낼 정도로 악랄하게 핍박을 가했던 것이다.

 

16장의 7가지 재앙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대적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훼방하고 반항한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4-14장에 보면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보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총 18번에 걸쳐서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 본문 12-16절에 보면, 심판을 받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군대를 모으고 힘을 합쳐서 더욱 반발한다. 그러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더욱 촉발시킬 뿐이다. 그래서 패배와 황폐함을 상징하는 아마겟돈만 맛볼 뿐이다.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이 임할 때 즉각 회개하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단의 종노릇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매를 자청하고 저항하여 결국 멸망당한다.

 

18:7절에 보면,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서 강청한 과부가 등장한다. 하물며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신원하여 주었다면, 거룩하고 참되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대적을 물리쳐 주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대적을 물리치시도록 기도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 대적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복음을 전하여 더 큰 심판을 받기 전에 돌이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속에 복음이 전진하지 못하게 방해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대적을 발견하고 없애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안일함과 나태, 냉랭함, 사랑없는 무정함과 무관심, 성숙하지 못한 언행, 편의와 타협주의가 아닌가!

 

둘째로, 교회의 대적이 진멸된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교회의 대적을 심판하심으로써 천국을 확장시키신다.

 

본문 17절에 보면, 7대접이 다 쏟아 부어진 후에 하늘의 지성소 보좌로부터 되었다’ (현재완료, 능동태, 직설법, 3)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되었다, 그것이 완성되었다는 무슨 뜻인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이 이제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계획은 과거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이미 성취되었지만, 소아시아 7교회의 대적인 불신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을 심판하심으로써 계속해서 성취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19절에 보면, 7대접의 심판으로 큰 성읍 바벨론이 파괴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대적인 바벨론이 파괴됨으로 그 자리를 새 예루살렘이 대신한다. 교회의 대적이 파멸되면 새 예루살렘 즉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진다.

 

본문 18절의 바벨론 성에 임한 지진은 대적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설명한다. 계시록에는 지진이 7번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지진은 언약적인 차원을 지닌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새 언약의 우주적인 대 지진을 유발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지진이 일어나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났다 (27:51-52).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만유를 변혁시키는 사건이었다는 의미이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옛 세상이 파멸되고 새 세상이 도래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대적을 심판하셔서 옛 세상을 청산하신다.

 

대적이 심판을 받아서 진멸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본문 20절의 섬과 산악이 없어지더라라고 말씀하다. 섬과 산악이 없어지는 것 (단호함-아오리스트)은 옛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새 세상이 도래하는 변혁을 의미한다. 18:21, 22절에서는 바벨론이 다시 보이지 않는 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러므로 계시사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옛 세상이 물러가고 메시아의 새로운 언약 시대가 개시됨을 의미한다.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신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교회의 대적을 진멸하심으로 옛 세상을 계속해서 물리치신다. 그 결과 새로운 세상인 천국을 계속적으로 주신다.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본다면, 우리 속의 옛 성품이 죽고 육체의 소욕이 진멸되면 성령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더욱 변해서 천국을 더욱 맛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대적이 심판을 받을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교회의 대적이 심판 받는 것을 보고 우리는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어 경성해야 한다.

 

본문 15절에 보면, 우리 예수님은 교화의 대적을 심판하시러 도적같이 임하신다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도록 깨어 경성하라고 말씀하신다. 벌거벗어서 수치를 당하지 말 것을 이미 계 3:18절에서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권고에서 말씀하셨다. 흰 옷을 사서 입고 안약을 사서 발라라고 말씀한다. 나체를 가리는 흰 옷은 성도의 의로운 행실이다. 즉 교회의 대적이 심판을 받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고 더욱 의롭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그리고 안약을 사야 한다. 즉 영적인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눈으로 시대를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 눈이 밝아져서 천국의 소망과 은혜의 풍성함을 깨달아야 한다. 성령충만하여 천국을 여기서 누리고 즐기는 사람이 경성하고 깨어 있는 사람이다. 주님을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소망 중에 바라보면서 즐기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이다.

말씀을 맺자.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자신의 백성의 고통에 동참하시고 (4:15), 신원하여 주실 것을 간구할 때 대적을 물리쳐 주신다. 우리 교회 안과 밖에 있는 교회의 대적은 무엇인가? “그는 흥하여야 하겠는데이 흥함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의 교회가 확장되고 이 땅에 주님의 왕되심을 선포하며 사는데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게 하는 죄악과 육체의 소욕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이 진멸되도록 기도하자. 대신 강력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임하도록 깨어 기도하자. 오늘도 대적을 진멸하시고 우리를 신원하시기 위해 권고하시는 하나님을 경성함으로 바라보자. 우리가 깨어 잇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을 즐거워하면서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아멘.

우리 삶을 받으시는 하나님 (19:1-8)

 

우리 삶을 받으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나는 하나님을 옳은 행실로 예배해야 한다라는 요지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왜 우리는 하나님을 옳은 행실로 예배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물리치시고 승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2003년 봄 극장가에는 메트릭스-리로우디드 (Matrix reloaded)”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초인적인 세력들이 전쟁을 벌이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이 영화에는 우리 귀에 익숙한 이름 몇 가지가 등장함.- 신탁이란 이름의 오라클’, 도시 이름인 시온’, 그리고 느부갓네살’. 이런 이름은 선과 악의 싸움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묵시적인 용어입니다. 사실 요한계시록도 예언적 묵시로 선과 악의 싸움을 반영합니다. 이것 때문에 계시록을 읽어가면서 전쟁과 심판의 장면 때문에 무섭다는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요한은 계시록에서 군사용어를 사용하지만, 비폭력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승리하심으로 요한과 7교회에게 승리를 반드시 주신다는 점을 말합니다. 이 승리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계시록 곳곳에서 7교회의 대적이 패배 당한 후 온 세상이 승전가를 불러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합니다. 특히 찬송과 송영이 등장하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권세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 것을 찬송합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누가 예배를 받기에 합당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만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강조합니다.

 

계시록 4장부터 요한은 밧모 섬에서 환상을 통해서 천상의 예배의 모습을 본다. 그 중심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계시록의 주인공이시다.

 

천상의 예배는 계 19장에도 나타남. 19:1이 일 후에로 시작합니다. 이 일이란 계 18장의 바벨론의 파멸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은 요한의 7교회를 괴롭힌 교회의 대적을 가리킵니다. 이 대적은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키 서부 지역에 살고 있던 불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바벨론입니다. 이 교회의 대적이 파멸된 후에 요한은 하늘에서 찬송이 교대로 불려지는 것을 듣습니다.

 

요한은 먼저 하늘의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찬송의 내용은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바벨론을 향한 심판은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그 음성이 두 번째로 할렐루야하니 바벨론의 파멸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갔습니다. 신약 성경 중 여기서 처음으로 할렐루야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19장의 찬송은 구약의 할렐 시편이라고 불리는 시 111-118편과 비슷합니다. 할렐 시편은 할렐루야라는 말이 계속 등장하는 시편인데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예배할 것을 예언하는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교회의 대적을 영원히 파멸하신다는 찬송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이 패배당하고 복음으로 교회의 대적이 정복당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비록 우리 시대에 죄악이 관영하는 것처럼 보이고 사람들이 더 강퍅해지는 것 같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승리와 권세, 복음의 정복하는 힘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삶으로 예배해야 할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로서 3위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19:7절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어떤 성격의 잔치입니까? 우리는 이 잔치를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에서 혹은 주님의 재림 이후에 있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지금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위해 준비된 신부의 등장은 하나님의 도성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한다는 사실과 병행을 이룹니다 (21:2-3).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신부이며 하나님의 도성이며 새 언약의 성전입니다. 21:22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교회의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교회가 성령의 전인 동시에 하나님이 교회의 성전인 사실입니다. 요한은 교회와 하나님 사이의 신비로운 연합을 혼인잔치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 볼 것은 비록 계 19장에서 혼인잔치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만 이혼도 암시적으로 나타납니다. 교회의 원수인 바벨론의 파멸을 하나님과 대적의 이혼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이혼은 결혼을 유발시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물론, 오순절도 새 언약의 개시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루살렘이 파괴된 사건 역시 배교한 유대인들과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이혼한 것이기에 언약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하나님과 교회가 지상에서 바로 지금 여기서 누리는 연합을 가리킵니다. 이 연합은 교회가 예수님의 신부로서 성령의 전이 됨으로 누리는 연합입니다. 성령의 역살 하나님의 전이 되어 감으로 누리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가는 연합이기에 교회와 3위 하나님의 교제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3위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복된 사람임을 기억합시다. 따라서 3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어떤 성격입니까? 우주적인 예배의 성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 구약과 신약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과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요한은 이제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서있는 24장로와 4생물의 화답 찬송을 듣습니다. 24장로는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4생물은 모든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이들이 엎드려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아멘 할렐루야라고 화답합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24장로이기에 지금 여기서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을 구약의 모든 성도와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구약의 모든 성도와 앞으로 존재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모든 피조물과 함께 경배하는 우주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24장로는 구약의 제사장의 24 반열 즉 24팀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영적인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주적인 구원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할렐루야라는 말입니다. 19장에서 할렐루야라는 히브리어가 소리나는 대로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구약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할렐루야라고 하나님을 찬송한다면 그것은 바로 구약의 히브리어를 사용했던 모든 하나님의 백성과 신약의 오고 오는 모든 세대들이 함께 합창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할렐루야라는 말은 우주적인 구원과 우주적인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하늘의 하나님을 지상에서 찬송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여기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천상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며 구약의 성도와 함께 찬송하는 것입니다. 끄래서, 본문 5절에 보니, 보좌에서 예수님의 음성이 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까? 옳은 행실로 해야 합니다. 예배는 말로 드리는 것을 너머 삶으로 드려야 합니다.

 

이 때 다시 6절에서 허다한 무리의 음성이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 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의 정확한 표현은 그 아내가 스스로 예비했다입니다.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가 주님 앞에서 옳은 행실로 늘 스스로 경성하여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물리치시고 승리를 주셨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삶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힘써 옳은 행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되어 가야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선한 행실이 없고 거룩한 삶이 없는 사람은 진짜 거듭난 사람입니까?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겉으로 나타나는 예배의 모양, 신자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그 속에는 하나님이 없었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공적인 예배는 삶의 중심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맙시다. 이런 공적인 예배처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신부로 정결하게 사는 우리의 생활입니다. 따라서 직장을 구하더라도 돈이 우선이 아니라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직장을 먼저 구하십시오. 결혼 대상자를 구하더라도 돈 많은 사람, 학벌 좋은 불신자를 구하지 말고 함께 신앙으로 설 수 있는 동역자를 구하십시오. 주님의 신부로서 스스로 매일 단장되어 가야 한다는 바른 목적을 분명히 세우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복음의 권세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우리는 옳은 행실로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와 함께 부르는 승리의 노래입니다. 하나님 만 온 세상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승리자인 우리는 특별히 예수님의 신부로 거룩하고 정결한 행실로 예배 드려야 합니다. 아멘.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20:1-10)

우리가 사는 시대는 약 10년 전에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신종 질병과 범죄들이 많다. 예를 들어 인터넷의 보급으로 인한 더러운 문화와 사이버 범죄가 얼마나 많아서 현대인의 정신과 영을 황폐화시키는가? 동성애자들은 이제 떳떳이 결혼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시가행진을 하기도 한다. 오히려 정상적인 사람이 부끄러워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은 회복될 소망이 없는 것처럼 비관적으로 말한다. 오존층의 파괴로 북극의 빙하가 녹아서 수면이 상승하고 있고, 천연자원이 고갈될 것이라는 걱정, 그리고 환경오염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끔찍한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면 세상 말세다라는 말을 종종 한다. 1-2명이 죽어서는 특종이 될 수 없고 사람의 별다른 관심도 끌지 못하고, 세인의 기억 속에 빨리 잊혀지고 만다. 많은 크리스챤조차도 마치 이 세상에 죄악이 최고조에 달하고 타락이 극점에 달한 시점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아주 부정적인 말세 이해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 있다고 많은 성도가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다시 오실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이 최고로 악해지려면 세월이 계속 지나야 하기에 영원토록 주님이 오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의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하는가? 진짜 말세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웠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말세를 오해한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 그리고 승천하심으로 이루신 구원을 믿는 사람들과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에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충만하여 복음이 온 세상을 정복할 것을 말씀한다 (11:9).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말세와 주님의 재림의 징조를 긍정적인 것으로 즉 승리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크리스챤은 근본적으로 복음의 권세와 언약의 승리를 믿는 낙관주의자이지 비관주의자나 염세주의자 혹은 패배주의자가 아니다. 이렇게 우리 시대의 범죄와 타락으로만 말세를 예측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면서 우리가 오해하는 말씀은 계 20:1-10절의 천년왕국이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며 제사장으로 살아야 한다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누가 천년왕국에 참여할 수 있나? 모든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다.

글자 그대로 천년왕국이란 예수님께서 천년동안 성도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말한다. 반대로 천년왕국 동안 사단은 무저갱이라 불리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많은 성도는 천년왕국을 예수님께서 미래에 이 땅 위에 1000년 동안 사단과 죽음과 질병과 그 어떤 고통이 조금도 틈타지 못하도록 만드실 복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천년왕국이 끝나면 사단이 성도를 마지막으로 철저히 박해하는 7년 대환난이 있을 것이며 이 기간 동안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성도는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휴거를 경험하고, 666이라는 짐승의 표를 받은 불신자는 이 땅에 남아서 고통 가운데 죽는다고 믿는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천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홀 린세이, 스코필드, 그리고 라이리 같은 미국의 몇몇 사람들에 의해 퍼진 이론일 뿐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아니다.

 

본문 계 20:1-10절은 상징적인 언어로 설명하기에 1000년 역시 상징적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만일 1000년을 상징적으로 보지 않고 글자 그대로 365x1000으로 보아서 365,000일로 보면 곤란하다. 1000년을 문자적으로 처음으로 본 사람은 초대교회 시기의 이단 케린투스이다. 그는 1000년 왕국에 대한 교리를 천사가 직접 자기에게 와서 가르쳐주었다고 주장한다. 이단 케린투스는 바울 (1:8)과 요한의 대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공중목욕탕에서 케린투스를 만나자마자 진리의 대적 케린투스가 목욕탕 안에 있기 때문에, 목욕탕 지붕이 내려앉아 죽기 전에 나는 도망가야 한다고 외치면서 나와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오히려 100010x10x10 즉 완전을 의미하는 103번이나 곱해진 것으로 긴 시간 혹은 충만한 시간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행 2:36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설교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볼 때 1000년을 훨씬 넘어 2000년 이상 지나고 있다. 따라서 계 20:2절의 일천 년은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체 기간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천년왕국이다.

 

그런데 계 20:4-6절에 보니 천년왕국에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이 나온다. 그 자격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짐승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첫째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다. ‘첫째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3일 만에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을 믿는 것이 첫째 부활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부활신앙이 없기에 첫째 부활을 경험할 수도 없고 천년왕국에 참여할 수도 없다.

 

첫째부활과 천년왕국이 민 19:11-12절에 예언되어 있다. 구약에 시체를 만진 사람은 1주일 간 부정했다. 정결케 되기 위해서는 제 3일과 제 7일 총 두 번에 걸쳐 몸을 씻어야 했다. 이 구약의 규례는 죽음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예언하는 것인 동시에 이 주님의 부활이 부활의 첫 열매임을 믿는 사람은 모두 부활할 것을 상징한다.

 

첫째 부활은 우리가 주님을 믿어 중생하는 것이며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첫째 부활을 경험하도록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하늘 보좌에 함께 앉히셨다 (2:5-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우리는 지금 여기서 천년왕국에 살고 있음을 믿자.

 

둘째로, 예수님은 어떻게 천년왕국은 실현하셨는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천년왕국을 이루셨다.

 

본문 1절에 사단을 쇠사슬로 결박하고 무저갱-감옥으로 던져 넣는 천사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 손에 있는 무저갱 열쇠와 쇠사슬은 사단을 통제하시는 주님의 힘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 (, 옛 뱀, 마귀) 사단을 쇠사슬로 결박한다는 말씀은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단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쇠사슬로 묶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탄이 묶인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이 이미 패배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천년왕국은 예수님의 부활 승리에 기초하여 교회가 승리하는 기간이며 복된 기간이지 암울하고 절망적인 기간은 아니다.

 

13:8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한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사단은 예수님께 패배 당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12:28-29). 이 세상을 미혹하여 잠시 왕자가 된 사탄은 (12:31)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결정적인 파멸을 당했다. 10:18-19에는 70인 제자들이 사역을 마치고 보고할 때 예수님은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사단이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하지 못한다는 3절 말씀은 교회의 복음 증거의 사역을 사단이 막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복음이 사단을 물리칠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단의 영역이 무너지는 곳에 천국의 임함이 분명해 진다. 열방이 이새의 뿌리이신 예수님에 의해 구원받고 주님에게 소망을 둘 것이다 (15:12). 하지만 지금도 패배한 사탄은 활동한다. 하지만 사단의 활동은 제한적이다.

 

마지막으로, 천년왕국에 사는 우리의 임무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왕과 제사장으로 살아야 한다.

 

본문 4절에 보니 천년왕국에 참여한 사람들이 보좌들위에 앉아 있다. 이 보좌들은 24장로가 앉아 있는 자리이다. 24장로는 신구약의 전체 교회를 상징한다. 즉 우리가 왕의 신분을 받은 것을 말씀한다. 그리고 24라는 숫자는 구약의 제사장의 24 반열을 상징하기에 교회가 제사장직을 수행함을 가리킨다. 교회는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다. 그래서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베드로가 말한다 (벧전 2:9). 교회가 왕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영적인 일이다. 다름 아니라, 지상명령에서 밝히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가르치고 제자삼는 것이다 (28:18-20). 하지만 이런 영적인 왕권의 시행은 우리가 준비되어 있어야만 제대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다가 목베임을 당할 각오가 필요하고, 하나님 이외에 짐승이나 다른 그 무엇에게 절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사명도 감당해야 한다.

 

교회가 이 땅 위에서 왕과 제사장으로서 사는 동안 본문 7절에 보니, 천년이 차매 사단이 옥에서 놓일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마치 주님에 의해 패배당한 사단이 다시 힘을 쓸 것이라는 의미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단의 최종적인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단이 잠시 놓여서 교회를 대적한다면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본문 8절에 보니, 사단에 의해 조종되는 불신 세력을 상징하는 곡과 마곡은교회를 향해 싸움을 걸어온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제 3차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으로 보면서 러시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대환난 기간에 일어날 미래적인 최후의 전쟁으로 본다. 하지만 요한은 여기서 요한은 겔 38-39의 환상을 인용한다. 39:9절에 보니, 곡이 이스라엘을 쳐 들어왔을 때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곡의 무기를 모아서 7년 동안이나 벌목할 필요없이 땔감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곡의 군대 시체를 장사지내기 위해 7개월을 소비해야 했다고 한다. 7년과 7개월 모두 완전한 승리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곡과 마곡은 사탄의 사주를 받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방나라를 상징적으로 가리킨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의 대적과 싸우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이지, 인류가 파멸될 3차 대전은 아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죄성과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대항하여 수행 중인 영적인 전쟁이다.

 

이 사실을 본문 9절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곡과 마곡이 사랑하시는 성읍을 향해 돌진해 와서 포위한다. 사랑하시는 성읍은 새 예루살렘 즉 교회를 상징하는데 이것은 천년왕국 중에 살고 있는 성도를 가리킨다. 비록 새 예루살렘이 곡과 마곡으로 상징되는 교회의 대적에게 포위되지만 어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요한은 설명하지 않고, 대신 즉각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전쟁이 종결될 것으로 본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악인을 심판 할 것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세상은 핵전쟁으로 망하게 될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것도 아브라함 당시에 소돔과 고모라에 임했던 유활불 심판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심판의 격렬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섬기며 살 때 사단의 세력인 곡과 마곡은 우리를 대적하고 괴롭힐 것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임박하게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 왕이요 제사장으로 살고 있는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다 세고 계신 하나님은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시며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말씀을 맺자.

 

천년왕국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때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천년왕국에 살고 있다. 우리가 천년왕국에서 살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 보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왕과 제사장의 사명을 받았다. 이 복된 사명을 감당하도록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단의 도전을 물리치시고 심판하신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과 함께 세상을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정복하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경배하면서 제사장으로 사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한다. 아멘.

 

 

 

 

 

 

 

 

백보좌 심판 (20:11-15)

 

천국은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통치하시는 영역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천국을 개시하셨다. 그래서 천국은 이 땅에 벌써 임했고 확장되고 있다. 하지만 천국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만 완성된다. 눈물과 더 이상의 고통과 걱정과 슬픔이 없는 그러한 천국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실 천국에서, 우리는 영원히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며 살 수 있다. 이처럼 주님의 재림은 영광스러운 천국을 완성하시는 것이기에 우리가 간절히 사모해야 할 바이다. 그래서 벧후 3:12절에서 베드로는 이 세상이 대변혁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되는 하나님의 날이 이르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며 살 수 있는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상을 바라보면서 마귀와 싸우고 이 땅에서 왕노릇하자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주님이 다시 오셔서 무엇을 행하시는가? 최후 심판을 하시며, 죽음과 사단의 세력을 진멸하신다.

 

본문 11절에서 요한은 크고 보좌에 앉으신 분을 본다. 왕좌에 앉으신 공의롭고 위엄있으신 심판자는 예수님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계 6:2절과 19:11절에서 흰말을 타셨고, 14:4절에서는 흰구름 위에 앉아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속의 중보사역을 마치시고 승귀하신 예수님에게 심판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고 요 5:22절에서 말씀하신다. 주님이 최후심판을 하시는 것은 왕적인 영광의 일부이다.

 

본문 앞 10절에 보면, 주님이 다시 오시면 사단과 그 졸자인 마귀를 모아서 심판을 하시며 불못에 던지신다. 14절에 보면, 사망과 음부도 주님의 심판을 받기에, 영원한 천국에는 죽음이 더 이상 역사하지 못한다. 여기서 요한은 그의 독자와 불신 유대교나 이방 로마세력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영적 싸움이 최후의 싸움이 아님을 주의시키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대적의 배후에 있는 마귀와 사망이야말로 하나님에 의해 진멸될 마지막 대적이라고 밝힌다.

 

13절은 바다가 그 속에 죽은 자들을 내어준다고 말씀한다. 노아 홍수와 홍해에서 죽은 자들은 사악한 자들을 상징한다 (참고 시 18:4). 그리고 사망과 음부도 그 안에 죽은 자들을 내어 놓는다 (18:5). 이 말씀은 주님이 재림하시면 백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기 위해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게 된다.

 

14-15절에서, 사망과 음부 (Hades)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고 말씀한다. 사망뿐 아니라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도 불못에 던지운다. 바울은 고전 15:26절에서 주님이 오실 때 멸망할 마지막 대적은 사망이라고 밝혔다. 사망과 음부의 권세가 교회인 우리를 이기지 못하지만, 그 세력이 진멸되는 시점은 주님이 최종적으로 오시는 때 즉 역사가 완성될 때이다. 주님은 왜 재림하시는가? 죽음과 사단의 세력을 멸하시고, 악인을 최종적으로 심판하기 위해 반드시 오신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재림이 성도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주님의 재림은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을 주시는 것이기에, 상급을 바라보면서 왕노릇해야 한다.

본문 바로 앞 단락인 계 20:1-6절에 보면 천년왕국이 등장한다. 불신 유대인과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의 7교회는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천년왕국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천년왕국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때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전체 기간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천년왕국 동안 사단은 무저갱에 감금된다. 이것은 사단을 지하 감옥에 실제로 붙잡아 넣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패배당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천년왕국에 참여할 사람의 자격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단의 온갖 유혹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사단과 싸우는 사람이다. 천년왕국이 다 마쳐질 무렵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이미 패한 사단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적인 전투에 늘 담대하게 임해야 한다. 우리 왕되신 예수님을 담대히 따라가야 한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넉넉히 보장해 주신다.

본문 11절에 보면, 주님이 오실 때 하늘과 땅이 온데 간데 없어진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이 세상이 한 순간에 대변혁을 겪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주님은 이 땅을 새로운 낙원으로 변형시키실 것이다.

12절에 보니, 죽은 사람은 행한 대로 심판 (damnation)을 받는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계 20:5절의 무론 대소하고 죽은 사악한 자들을 가리키며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13:8절과 17:8절에는 창세 이후로’ (from the creation of the world)라는 말이 생명책 앞에 붙어 있지만, 여기 12절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유는 마치 개인의 심판이 영원 전에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숙명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바는 숙명론적인 심판이 아니라, 사람이 복음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즉 개인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심판의 여부가 달려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지만, 진정한 칭의적 믿음은 행위를 배제하지 않는다 (2:17-20).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시고 갚아 주신다고 말씀한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물으시면서 회계하신다. 우리는 5달란트를 받았다면 5달란트를 남겨야 한다. 1달란트를 받았다면 5달란트를 받은 사람을 시기하지 말고 1달란트를 남기고 100배의 결실을 맺어야 한다. 주님 오실 때 주님 앞에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 주님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은 얼마나 되는가? 신실한 청지기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사단과 싸우며, 상급을 바라보며, 영원한 낙원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말씀을 맺자.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살 것처럼 살지 않는가? 아니면 우리가 죽을 때까지는 주님이 오시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가? 하지만 주님은 반드시 오시며 재림하실 때는 언제든지 가능하다.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바라보면서 오늘이 나에게 주신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되 오는 세상의 생명인 영생을 맛보며 살아야 한다. 아직도 주님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지옥을 향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전도하자. 주님이 이미 사망과 사단을 정복하신 것을 믿고 담대하게 영적 전쟁터로 나아가야 한다. 아멘 주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

 

 

 

 

 

새 예루살렘성과 신사도행전적 초대교회 (2:42-47; 21:9-27)

찬송가 223장과 225장은 새예루살렘성과 관련있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죽어서 갈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기도 한다. 그곳은 빛난 보석으로 꾸며지고 영광스럽고 영원한 복과 기쁨만 있는 곳이라고 찬송한다. 과연 그러한가? 새예루살렘성은 우리가 죽어서 갈 장소인가? 하지만 성경은 새예루살렘성을 예수님의 신부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새예루살렘성이다. 미래적으로 본다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될 것인데, 그곳에 살 사람이 새예루살렘성이다. 우리는 이 땅에 천국이 이미 임한 것을 믿기에 예수님의 신부인 새예루살렘성으로 살아야 한다. 비록 불완전하고 슬픔과 죄악과 고통이 우리 삶에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신실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신부로 살아야 한다. 고난 가운데서도 영광스럽고 멋지게 예수님의 신부로 사는 모습을 행 2장의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볼 수 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계 21장에 묘사된 새예루살렘성에 매우 가까운 교회였다. 이 둘을 비교해 보면서 우리 자신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우리 함께 신사도행전적 초대교회의 역사를 계속 쓰자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신사도행전적 초대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와 역사가 가득한 교회이다.

 

17-19장에 보면 음녀 바벨론이 하나님에 의해 파멸된다. 사치와 방탕과 유혹의 힘을 가진 바벨론은 계시록의 수신자인 소아시아 7교회를 박해하고 있었던 대적인데 구체적으로 불신 유대인들과 로마 제국을 상징한다. 음녀가 파괴되니, 정결한 신부가 등장할 차례이다. 바벨론 성이 무너지니, 새예루살렘성이 필요하다. 이 새예루살렘성이 계시사적으로 영광스런 교회를 가리키기에, 이상적이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성경에서 찾아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다. 그 이상적인 교회를 사도행전의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승천 후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며 복음이 온 땅에 어떻게 확장되는 가를 다루는 사도행전의 내용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승천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박해 가운데서도 성장하고 있는 가를 밝히는 계시록의 내용과 사실 일치하는 것이다.

 

2:42-47절의 예루살렘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다. 진리 위에서 교제가 이루어지는 교회였다. 사도는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했고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이 기사와 표적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와 역사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루살렘교회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여유있는 성도는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 특별히 가난한 자가 없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성전과 가정 교회에서 영광스러운 예배와 교제가 계속되었다. 찬양의 공동체로서 예루살렘교회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고 교회의 멤버가 되는 부흥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로서 지상에 임한 천국이었다.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었던 교회였다. 하지만 계 21장에 나타난 새예루살렘성은 초대예루살렘 교회보다 더 영광스러운 교회이다.

 

21장의 새예루살렘성은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를 상징한다. 새예루살렘성 안에는성전 건물이 없는 대신 하나님과 예수님이 성전이시다. 그리고 성은 정육방체로 지성소와 같고,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빛이 늘 비취기에 항상 낮이다. 사방에 문이 3개씩 있어서 만국이 왕래할 수 있다. 성벽이 높아서 안전하고, 성문과 기초석은 보석으로 되어 있어서 영광스럽고 휘황찬란하다. 그 속에는 눈물과 한숨과 슬픔과 배고픔이 없고, 대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강렬하고 충만하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능가하는 모습이 새예루살렘이다.

 

21:27절에서 새예루살렘성에 들어오지 못할 사람은 속된 것, 가증한 일, 거짓말하는 자라고 밝힌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올 수 있다. 즉 이 자격을 밝힌 구절은 구원의 백성은 거룩하고 진실된 생활을 해야 할 것을 격려하는 말씀이다. 참으로 새예루살렘성인 우리는 성령의 공동체로서 예배와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와 능력있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러한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신사도행전적인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신사도행전적 교회를 어떻게 가꾸어 갈 수 있는가? 우리 삶 속에서 옛 것과 그림자를 물리치고 천국의 실제를 맛보아야 한다.

 

계시록의 수신자들인 소아시아의 7교회가 새예루살렘성에 대한 글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지상의 예루살렘 성전을 연상했을 것이다. 구약의 예루살렘은 크고 높으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왕의 도성이었다. 하지만 사실 예루살렘 성이나 돌성전은 계 21장의 새예루살렘성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다. 새예루살렘성에는 남편이신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죄악과 옛 세상에 속한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과 짐승의 피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대신 신구약의 모든 언약 백성이 대제사장처럼 하나님의 완결된 구원 사역의 은혜를 기리며 찬양한다.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 온다는 것은 우리의 본향이 하늘임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위로부터 거듭난 사람으로 영생을 가지고 있다. 새예루살렘성의 빛은 보석 빛처럼 빛나고 맑기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존이 우리 안에 있다. 그 영광은 원래부터 우리에게 있지는 않았는데, 주님의 영광 때문에 우리가 빛을 발산하게 된다. 크고 높은 성곽은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산성, 요새, 피난처되심을 의미한다. 이것을 사 60:18절은 성벽을 구원으로 그리고 성문을 찬양이라고 설명한다. 12문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성곽의 기초석에는 12제자의 이름이 새겨진 것은 (48:30-35) 구약과 신약의 교회가 합쳐져서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가르쳐 준다 (2:20). 성을 측량해 보니 길이, 넓이, 높이가 12000스타디온 (2200km)으로 동일하여 지성소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다 (왕상 6:20). 성의 길이를 측량하는 것은 교회를 하나님의 소유로 인치고 보호하는 것을 상징한다 (11:1-2). 성벽은 144규빗 (65m) 두께 (혹은 높이)인데, 14412곱하기 12 즉 신구약의 모든 구원받은 백성의 숫자이다. 12문은 진주로 장식된다. 새예루살렘성의 큰 길 (great street)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깔려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성의 남북, 동서의 길은 10-13미터 넓이였지만, 새예루살렘성의 길의 폭은 만국이 통행할 정도로 더 넓다. 교회가 만물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한다. 성전은 없고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다. 돌로 만든 성전은 더 이상 필요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이 등 (lamp)이 되심으로, 해와 달의 비췸이 필요없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온다. 천국 시민은 혈통과 인종의 구분을 초월한다. 왕들도 구속의 은총을 입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다. 밤이 없다. 성문은 항상 열려있다 (60:11). 어두움은 하나님의 속성에 맞지 않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온다.

 

예루살렘은 계 11:8절에 의하면 주님이 죽임당하신 곳이며, 교회의 대적의 본부라고말씀한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의 대적인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물러가야 한다. 그래서 그림자와 같은 돌성전은 이제 지나가고 영광스러운 새 예루살렘성이 내려온다. 옛 것, 그림자는 새롭고 실제하는 것에 의해 대체되었다. 무엇을 말씀하는가? 우리 삶 속에 죄악된 요소가 물러가고 주님이 주시는 새로움을 계속 이루어 가고, 하늘의 실제를 맛보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구체적인 모델인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계승하여 신 사도행전적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말씀을 맺자.

 

3:12절에서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승리할 때, 새예루살렘의 이름을 주리라고 약속하신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전투하는 교회요 이기는 자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준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모델인 신사도행전적인 초대교회를 꿈꾸어야 한다. 하나님의 강력하신 임재와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 끊임없이 뻗어나가며 확장되는 교회, 사랑의 교제와 섬김이 충만한 교회로 자라가자. 우리는 죄없이 완전한 하나님의 임재와 슬픔이 없는 영원한 복된 상태를 소망하자. 아멘.

 

 

 

 

 

 

 

 

 

 

새 에덴에서의 신부수업 (22:1-5)

 

미혼 여성에서 아내가 되는 것은 여자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큰 변화이다. 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미리 훈련을 해야 한다. 그 훈련을 신부수업이라고 한다. 예전에 신부수업은 연탄갈기나 된장찌개 끓이는 정도였다. 신부수업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요리교실이 생각난다. 요즘은 맞벌이 부부가 많다 보니, 신랑수업도 한다. 가전제품의 구성 및 작동을 알고, 쓰레기 분리배출도 배우고, 레인지 후드도 갈아보고, 빨래 너는 법, 힘있는 남편이 아내를 도와서 해야 할 일을 배운다. 신부수업은 조용하고 참신하고 살림 잘하는 아내를 만들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변화는 우리가 영적인 창녀에서 예수님의 신부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신부가 되었지만 계속해서 영적인 창녀의 습성을 버리고, 정결한 주님의 아내가 되는 신부수업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받아야 할 신부 수업은 독특한 것인데, 신랑 예수님이 프로그램을 짜서 훈련을 시킨다는 점이다. 그 신부수업 프로그램은 성령님이 도와주셔야만 성공적으로 수료할 수 있다. 그리고 1-2달에 마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받아야 하는 수업이다. 우리 신랑되신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부수업 프로그램은 어떤 것인지 계 22:1-5절을 통해서 살펴보자.

 

하나님 나라의 생명에 풍성한 신부가 되자라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신부수업의 주제는 무엇인가? 새 에덴의 생명에 풍성한 신부이다.

 

22:1-5절은 새예루살렘성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이미 요한은 계 21:9절 이하에서는 새예루살렘성을 길이와 넓이와 놀이가 똑 같은 지성소와 같다고 소개한 바 있다. 새예루살렘성은 예수님의 신부인 우리를 가리킨다. 그런데 계 22:1-5절에서는 새예루살렘성이 새로운 회복되고 변형된 에덴동산과 같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지성소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존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고, 동시에 에덴 동산의 복된 상태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이런 복된 상태는 마귀와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된 주님의 신부만 누릴 수 있는 복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이단 여호와의 증인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불신자를 영원한 형벌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후에 영혼을 멸절시켜 존재를 없이해버린다고 잘못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교주 러셀의 주장을 따라서 지옥이 없다는 지옥 부재설을 주장한다. 무덤은 지옥의 전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은 지옥이 분명히 있고 그 반대인 천국도 있다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신부인 우리는 우리 신랑 예수님 덕분에 지옥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지금 여기서 천년왕국을 즐기면서 천국을 맛보고 있다. 본문 계 22장에는 그 천국을 회복된 새로운 에덴동산으로 설명한다.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 동산에는 그 주위에 4개의 강이 흘렀다. 에덴 동산에서 발원한 강이다. 그리고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범죄 후 아담과 하와는 죄악 가운데 영생하지 못하도록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새예루살렘성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흐른다. 이 생명수강 양쪽에는 생명나무들이 심겨져 있고 12종류의 과실을 매달 맺는다. 그리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치유하고 소성케 한다. 이 모습은 생명의 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내린 생수이신 성령께서 복음으로 많은 사람을 회개시키고 돌이키실 것을 말씀한다 (4:10-14; 7:37-39). 아무리 메마르고 완악하고 거부하는 심령이라 할지라도 일단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돌이키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매를 맛보며 새로운 에덴동산 지기로 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사실 계 22:1-5절의 중심 용어는 새로운 에덴동산의 생명이다: 생명수 강, 생명나무, 만국을 소성케 함. 생명나무가 매달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부인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지속적으로 풍요로워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새예루살렘성에는 더 이상 배고픔이 없다. 생명나무 잎사귀가 만국을 치유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의 공사역 중에 수로보니게 이방 여인의 딸과 거라사 땅의 귀신들린자를 치유하시는 사역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바울을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복음 전파로 활발히 진행된 것이다. 에덴동산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기에 생명을 나눠주고 만국을 음녀에서 신부로 회복시키는 전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어떤 신부로 수업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을 친밀히 섬기고 예배하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본문 4절에 의하면, 새 에덴에서는 교회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창 3:9-11절에서 범죄 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반전된 것이며, 33:20절과 23절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의 반전이기도 하다. 이런 친밀한 대면 속에는 저주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 (3).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3절의 저주라는 말은 예루살렘 안에 다시 저주가 없으리라는 슥 14:11절과 관련된다. 스가랴서에서 저주 (히브리어로는 herem, 헬라어로는 anathema, katathema)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배교한 국가의 완전한 파멸을 가리킨다. 3:16-19절에도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저주가 나타난다. 하지만 어린양의 보혈로 저주가 사라져 버린 새에덴에서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 가운데 영원토록 주님을 섬기게 되며 예배하게 될 것이다 (3). 저주가 사라지고 대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 즉 예배하게 되었는데, 새 에덴의 신부인 우리는 새로운 지성소의 대제사장들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도 에덴 주제와 성전 주제가 연결되어 나타난다. 이 교제를 위한 대면은 성경에 시종일관 나타나는 예배의 목표가 완성되는 것이다. 주님의 보좌가 예수님의 신부인 우리 가운데 있어서 거기로 마음껏 나아갈 수 있다 (3). 보좌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은 특별한 복이다. 무슨 이유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가 있으며, 우리는 가장 가까이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할 수 있는가? 소유권과 보호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예수님의 신부라는 말씀이다. 인간적인 표현을 쓰자면, 예수님은 우리를 신부로 삼으셨고,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셔서 서로 우리를 차지하기를 원하고 돌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예배와 섬김의 신부수업을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떤 신부가 되어야 하는가? 빛의 자녀로서 왕노릇하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본문 5절에 의하면, 새예루살렘성에는 밤이 없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다. 이유는 주 하나님의 빛이 대낮같이 항상 비취기 때문이다 (21:23, 25). 동시에 이것은 계 21:23-27절에 묘사된 부정적인 요소들 즉 죄의 영향인 밤, 닫혀진 문, 부정결, 수치, 속임 등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이 땅에서 성도는 빛의 자녀로서 어둠을 물리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빛의 전령으로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 곧 왕노릇하는 것이다. 성도가 왕노릇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치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동산지기로 동산을 가꾸고 주권을 시행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1:28) 성도는 영원한 나라인 새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주님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계시록의 독자들은 로마 황제의 신상 앞으로 가서 제사드리는 것을 거부했지만 이제 주님의 얼굴을 보며 경배할 뿐 아니라 함께 앉아서 통치할 이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고 힘과 위로를 얻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 삶 속에 부정한 것과 어둠의 세상과 타협한다면 다시 신부가 아니라 음녀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신 항상 환하게 비취는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어둠을 물리치며 승리하신 주님의 통치에 동참하는 신부수업을 받아야 한다.

 

말씀을 맺자.

 

예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순간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요 새예루살렘성이 되었다. 바로 그 때 새로운 에덴 동산으로 초청되어 복과 생명을 받게 되었다. 회복된 에덴 동산지기로 살도록 우리의 신부수업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 수업은 하나님의 현존을 늘 느끼며 사는 것이다. 우리의 신부수업에서 필수과목은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만국을 회복하고 생명을 나눠주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빛의 자녀로서 어둠을 물리치며 왕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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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김광석 목사와 함께 하는 성경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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