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20절의 말씀은 우리가 보통 전도를 할 때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말씀입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나 자신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입니까? 그러면서 내가 내 삶의 주인일 때 우리의 삶은 평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일 때 참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이 예수님은 당신의 삶의 주인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아직 예수님을 마음 문밖에 세워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그러했습니다. 라오디게아교인들은 분명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교회들은 지금 예수님을 마음 문 밖에 세워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 가운데 예수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는 사람도 과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이 없는 사람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예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여름 수련회를 하는 중에 집에 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담을 넘어 들어가서 화장실 창문으로 저희 집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이때 분명 그 집의 주인은 바로 저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집의 주인이라도 그 집에 들어가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집에 들어가 있지 않아도 그 집은 저의 집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집이 저의 소유이듯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소유가 되고, 예수님의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마음 문밖에 세워놓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에베소서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3장 17절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이 말씀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에베소교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 에베소교인들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즉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이 항상 계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이 예수님을 마음 문 밖에 세워놓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이름만 그리스도인, 신분만 그리스도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름만 가진 그리스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이름만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름만 가진 그리스도인들도 구원받아 천국에는 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만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전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평안과 기쁨과 부요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또한 이 세상 가운데서 빛으로 소금으로서의 삶을 전혀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분상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상사람 들과 똑 같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도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지는 모르겠지만, 천국에 가서 아무 상급이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와 같이 이름만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런 이름만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은 이름만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예수님은 이름만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볼지어다” 즉 “나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름만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를 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이유는 이 사람은 전혀 예수님을 보면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지 않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여기서 행위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미지근하다는 말은 한때는 뜨거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미지근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도 한때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뜨거운 사랑이 식어져 미지근하게 되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배가 부르기 때문입니다.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부자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도 부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육신적으로 부자이기 때문에 이제는 배가 부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갈급함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교회는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이런 그리스도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네 마음 문을 열고 나를 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24시간동안 예수님을 바라보십니까?” 그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24시간 동안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4시간동안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모든 교인들에게 영적 일기를 쓰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루에 얼마나 예수님을 바라보십니까?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뜨거운 사랑으로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부요하지만 영적으로 너무나 가난하고 궁핍한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영적으로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오주님 저는 한 순간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날마다 갈급함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시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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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또 오늘 본문에서 이름만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 마음의 문을 열어서 나를 영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최근 한 달 동안 내 마음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묵상해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제 마음 가운데 항상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까 제 마음 가운데 항상 예수님을 모셔 들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여전히 나의 생각, 나의 기분과 감정, 내가 내 안에 주인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날마다 24시간동안 예수님을 내 마음 가운데 모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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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날마다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려고 하십니까?
1)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날마다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마음 문을 열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기 전에 먼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야 네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폭군과 같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날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죄의 유혹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성도로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절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도박에 빠져 살았습니다. 아무리 그 도박을 끊으려 해도 끊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연스럽게 도박이 끊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며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그것은 예수님과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즉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나의 양식이 되며 나의 음료가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주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세상의 죄가 주는 쾌락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에 빠져 살아가는 것만이 이 세상의 모든 죄의 유혹에서도 이길 수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예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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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또 왜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삶의 왕좌의 자리에 앉기 위함입니다. 이름만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그들의 마음의 왕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여전히 그들 자신 그들 마음의 왕좌에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내 삶의 왕좌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수많은 염려와 걱정과 근심입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가운데 염려와 근심이 있습니까?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의 왕좌에 여러분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내가 내 삶의 머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의 머리가 되기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또 우리가 왜 두려워하고 불안합니까? 내가 내 삶의 주인이기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내일 우리교회에서 임시노회를 합니다. 저는 그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염려한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내 삶의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가 되어주십시오. 그래서 나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오직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제 마음 가운데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전쟁터와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항상 염려하고 걱정하면 근심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내 마음의 주가 되신 예수님께 내 모든 염려를 맡기고 살아갈 것인가?
/날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왕으로 주로 모시며,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같이 불러보겠습니다).
“382장 1.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후렴)주 너를 지키리 아무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아멘
2. 어려워 낙심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3. 너 쓸 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 구하는 것을 주시며 주 너를 지키리
4. 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 구주의 품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3)또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들어오를 원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연약과 무능, 눈물의 한복판에 우리를 위로하고 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복음서에서 갈릴리 바다는 원래 제자들의 생업지였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는 제자들의 자신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는 이제 제자들의 연약과 무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갈릴리바다는 제자들의 눈물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과 무능과 눈물의 바다 한 복판에 찾아오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함과 무능함의 한 복판에 서 계시기 위함입니다.
지난주에 화요독서모임에서 우리의 삶에 어떨 때 무능을 느끼는가에 대해서 나누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데, 너 이것밖에 못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때 무능을 느낍니다. 또 결혼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 가운데 현실적인 무능함과 연약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나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물밖에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전도할 때 이런 무능을 느낍니다. 또 말씀을 전할 때 이런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런 무능을 느낍니다.
예수님 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이런 우리의 무능과 연약과 눈물의 한복판에서 서 계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무능과 연약을 위로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무능과 연약과 눈물 속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에게 있는 무능과 연약이 사라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도바울은 그 무능과 연약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도바울의 무능과 연약 속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을 위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연약함 속에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4)또 예수님께서 왜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의 풍성함, 능력의 풍성함과 부요하심을 나누어주시기 위합니다. 또 요한계시록 5장에는 예수그리스도에게 “모든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 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5:12).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날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 내 삶의 주가 되셔서 나의 모든 염려와 근심의 짐을 대신 져 주시기 위해서 내 마음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 우리의 연약과 무능과 눈물의 한 복판에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위로해주시기 위해서 날마다 내 마음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 무엇보다 예수님의 풍성하심을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3. 그런데 왜 우리들은 예수님을 날마다 내 마음에 모셔 들이지 못합니까? 왜 우리들은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놓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것은 절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모두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 마음 가운데 들어오시는 것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제일 먼저 우리의 잘못된 습관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가운데 모셔 들인다는 것은 무엇보다 기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매일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모시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마음은 항상 그렇게 기도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을 보면 하루에 단 몇 분도 조용하게 기도할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 많은 시간을 티브이 드라마를 보거니 인터넷을 하는데 사용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무리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려 해도 나의 잘못된 생활습관들 때문에 예수님을 내 마음 가운데 모시지 못합니다.
-또 우리가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도 너무나 많이 내 이야기만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 기도할 때도 우리에게 세미하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만져주는 것을 전혀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까 머리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입으로도 믿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우리 마음에 들어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합니다.
-또 우리는 기도의 자리만 아니라 이 예배의 자리에서도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번만 겨우 예배에 참석합니다. 또 이 예배의 자리에서도 정말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셔 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교회에서 연세 드신 분들이 영적으로 부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젊은 분들이 영적인 부자라고 생각합니까? 당연히 연세 드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연세드신 분들이 더 많은 시간을 기도와 예배에 집중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분들이 시간이 많아서 라고만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습관 때문입니다. 요즘 대학생들도 보면 방학이 되어 시간이 많습니다. 그러면 더 기도하면 되지 않습니까? 시간이 되면 찬양집회라도 가면 되지 않습니까? 또 말씀의 은혜 받는 자리에 더 나가야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잘못된 생활습관 때문에 예수님을 밤이고 낮이고 새벽이고 마음 문밖에 세워놓고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새벽에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 저녁에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 낮에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마음의 문을 열고 날마다 모셔 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날마다 사랑과 은혜와 평강과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왜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란 단순한 윤리적인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가 있더라도 회개하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우리가 자꾸만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고자 하는 죄를 말합니다. 내가 영적으로 굶어 죽더라도 더 이상 예수님을 찾지 않으려는 죄를 말합니다. 그래서 육신적으로는 부요하지만 영적으로는 거지로 살아가고자 하는 죄를 말합니다.
/또 우리 안에 육신적으로는 부지런하지만 영적으로는 게으른 게으름의 죄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영적인 열심을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루 24시간 매일 공기를 호흡하며 살아가듯이, 하루 24시간 매일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심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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