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6장12절 믿음의 선한 싸움
프랑스의 극작가인 빅토르 위고(V. M. Hugo, 802-1885)는
우리네 인생에 세 가지 싸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자연과의 싸움이고,
둘째는 이웃과의 싸움이며,
셋째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는 이 세 가지 싸움 가운데 가장 힘든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란 사람을 주인으로 등장시켜 자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레미제라불"은 '빵을 훔쳤다는 이유 때문에 절도죄로 19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장발장이 출옥하자마자 그를 환대해 준 한 사제의 은촛대를 훔치고 만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첫머리부터 위고는 우리 인간이 강한 것 같지만, 사실 얼마나 잘 흔들리고 깨어지고 넘어지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연약하고 악한 길로 빠지기 쉬운 악한 존재인 우리 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목회할 것인가에 대해서 교훈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일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을 말씀 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싸우라'(아고니주)는 올림픽 같은 운동 경기에서 '시합하다', '시합에 이기기 위해 애쓰다'의 뜻을 갖습니다.
이것과 동족어인 명사 '싸움'(아곤)은 원래 운동 경기를 위한 '집회'를 의미하였는데 이것이 점차 경기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선한 경기에서 경쟁하라." 혹은 "선한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애쓰라."입니다.
결국 믿음이라는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일 것을 권고합니다(Simpson).
여기서 말하는 ‘싸우라’의 문자적 의미는 ‘상을 얻기 위해 경쟁하라’인데 바울은 특별히 성도의 싸움은 선한 싸움, 즉 영적 싸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로 인간의 삶 자체는 싸움의 연속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혈과 육의 싸움을 하며,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의 선한 싸움 즉 영적 싸움을 경주합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인류를 타락 시킨 이래 아직도 타락시킬 대상들을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찾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8)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벧전 5:9)합니다
우리의 싸움 대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이며 세상의 불의한 집권자들과 그들의 악한 꾀인 것입니다.
만일 신자들끼리 서로 으르렁거리고 교회끼리 서로 싸운다면 마귀는 손뼉을 치고 기뻐할 것입니다. 마귀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한국 교회의 힘을 분산시키고 한국 교회가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치명타를 가해서 파괴하려고 온갖 공작을 다 펴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휘말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마귀의 도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귀와의 영적인 싸움 거룩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엡 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합니다.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무엇입니까?
[엡 6:14-17]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는 믿음에서 나오는 인간의 진실함을 말합니다.
한 남자가 오래동안 마음에 두고 있던 여인에게 프로포즈를 했다고 합니다. 여인이 앞으로 100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제 집 창앞에서 꽃을 들고 밤을 새우신다면 사랑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답니다. 다음 날부터 여인은 매일 밤 꽃을 들고 자기 집 창을 지키는 남성을 보게됩니다. 엄청난 비바람과 번개, 폭풍이 치던 99일째 밤 마침내 감동먹은 이 여인은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문을 열고 창앞으로 달려가 비에 흠뻑 젖은 남자를 끌어안습니다. 이때 남자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저는 알바(이트) 생인데요"
예만 되신 주님을 본 받아 진리의 허리 띠를 띠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모두가 됩시다.
"의의 호심경"은 올바르고 선한 도덕적인 완전함과 공의로움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중죄를 지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석의 자리에서 재판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판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판사는 여러해 동안 보지 못했던 학교 다닐 때의 친구였습니다. 자기 친구는 판사이고 자기는 그 재판석에 죄인으로 서게 된 것입니다. 그 재판은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증인이 와서 죄에 대해서 증언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 판사가 선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판사와 죄인은 그 자리에서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법정에 있는 사람들은 판사가 어떻게 판결을 내리는가 하고 기다립니다. 이 사람이 중벌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가볍게 내릴 것인가 법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선고를 기다립니다. 판사가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가 선고한 판결은 법이 정한 가장 중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그 죄수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아주 많은 벌금이었습니다. 이제 그 벌금을 내든지 아니면 감옥에 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청중들은 그 선고가 너무 가혹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 자기 친구에게 저렇게 할 수가 있을까를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정의의 법정에서 볼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 판사가 자기 자리에서 내려와서 죄수가 서 있는 곳으로 가서 손을 내밀어서 그 죄인의 손을 잡고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 벌금을 자네 대신 물어주겠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해결된 것입니다. 벌금도 내고 그 죄인은 자유롭게 해방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평안의 복음의 신"은 성령 안에서 얻는 평화를 뜻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 하나를 키우는 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원인 모르는 병으로 죽었습니다. 먹구름이 그 가정을 덮은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린 딸이 엄마를 땅에 묻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현관에서부터 시작하여 방, 부엌, 응접실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두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어두운 밤이 되었습니다. 아빠가 딸을 침대에 눕히고 기도해 주면서 편히 자라고 하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 왔습니다. 얼마 후 딸의 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빠가 가 보았더니 '아빠! 무서워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빠가 딸에게 타이릅니다.
'아무리 어둡고 무서워도 아빠가 있으니 무서워 말고 조용히 자거라' 그런데 어린 딸이 눈을 감고 한참 있더니 아빠! 아무리 어두워도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라고 하며 안심하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하나님! 딸의 입술을 통해서 나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 감사합니다. 나의 주변이 아무리 어두워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므로 실망치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가정에 먹구름이 엎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이 느껴지지만 내가 딸을 사랑하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고 힘을 얻습니다. 평안을 얻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할 때 그의 마음에 있던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는 것을 그는 느꼈습니다.
그를 사랑하시는 면에서 만세반석이 되시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을 그때에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찾아온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는 것은
거룩한 싸움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1846년쯤 목사를 지원한 한 젊은이에게 의사는 '이런 병약한 몸으로 목회를 하면 1년 후 사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만 포기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젊은이는 순교한다는 각오로 복음을 증거했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 구제사업을 펴는 가운데 무려 84세까지 살았다. 이 사람이 바로 1878년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엄 부스다. 그는 말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젊었을 때 의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의사를 버렸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했다. 이 믿음이 나를 지켜주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보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심장병 때문에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두려움은 초청하지 않아도 찾아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두려움 자체보다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초원에서 소를 돌보는 한 카우보이가 위대한 교훈을 찾아냈습니다. 보통 소들은 매섭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등지고 이동하다가 울타리에 가로막히면 먼저 나가려고 싸웁니다. 그러다가 서로 뒤엉켜 압사하는 사고가 종종 발생합니다. 그러나 ‘헤리퍼드종’이라는 소들은 겨울바람에 정면으로 맞서며 나아가기 때문에 울타리를 피할 수 있어 한 마리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교훈은 ‘인생의 폭풍우를 정면으로 맞서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피하지 말고 믿음의 방패로 무장하고 맞서 선한 싸움을 싸우는 모두가 됩시다..
"구원의 투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얼마 전에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하이오 주의 한 도시에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그들은 675명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읍니까.”라는 질문을 하자 85% 정도의 사람들이 성경에 나타난 대답을 하지 못했읍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예배를 빠짐없이 참석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선한 일생을 살므로써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런가 하면 단지 성경을 읽음으로써 천국에 갈수 있다고 대답한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기 혼자의 노력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대답하였읍니다.
더우기 무엇을 믿든간에 자기가 믿는 것을 굳게 지킨다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대답한 이들도 있었읍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거듭남” 곧 갈보리의 어린양의 피로 씻음을 받아야만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못박아 말하였읍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라고 하는 분만실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또 흔히 말하는 것처럼 “어머니가 신자니까”라고 하는 식으로 교회 일원이라는 분만실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선행이라는 분만실에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태어나는 것은 갈보리에서입니다.
죄로부터 돌이켜 믿음 가운데 서서 구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인으로 탄생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검"은 곧 우리가 유일하게 마귀를 향하여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모라비아 교회 선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최초로 그린랜드에 파견되었을 때 그들은 그 곳 사람들에게 먼저 자연 종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단 한사람의 개종자를 얻는데 무려 17년이라는 세월이 걸릴 정도로 비참한 것이었다. 어느 날 카야르낙이라는 매우 사악한 사내가 선교사의 움막에 들렀다가 우연히 선교사가 성경 읽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때 선교사가 읽고 있었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원주민은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으며, 죄인들은 그 분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고 그에 대해 자세히 듣기 위해 선교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에게 자세히 말씀히 주십시오. 저도 구원받고 싶습니다.'
뜻밖의 일에 선교사는 깜짝 놀랐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카야르낙과 그의 가족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은 그린랜드에서 구주께 드려진 첫 열매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선교사들은 죄인들에게 가장 먼저 설교해야 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희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The Teacher)
마귀는 영물입니다. 영적인 힘을 가진 마귀를 이기려면 내가 그 보다 더 강한 영적능력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 능력을 바울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 차례 세 가지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고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기려면 성령의 능력과 말씀으로 무장하면 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싸워야 할 거룩한 싸움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싸움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싸울 수가 있습니다. 마귀와의 영적인 싸움을 내 힘으로 싸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내 힘으로 싸우려고 덤벼들었다가는 100발 100중 패하고 맙니다.
영적인 전쟁터에 나가며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마귀와의 거룩한 싸움을 싸울 힘과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룩한 싸움을 싸우러 나가는 제게 힘과 능력을 주옵소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혀 주옵소서. 내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을 싸울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거룩한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매일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싸우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나간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간호사 생활을 50년동안 했던 80세된 한 노인이 자신의 집으로 한 목사님을 초대하였습니다. 굉장히 큰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님이셨지만, 목사님에게는 큰 시련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노인의 간곡한 요청 때문에 그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한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그림은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갇혀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사자를 바라보지 않고 위로 뚫린 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생존한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려운 시련의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시62:5-8]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그럼 언제까지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까?
(딤전 6: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곧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명령입니다. 육신을 안고 사는 우리들의 영적인 삶은 이 육신과 끊임없이 투쟁하며 싸워야 합니다. 이와 같은 전쟁은 영혼을 거스리는 육신이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평생 대적과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적으로부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지켜 낼 수 없습니다.
지켜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 어떤 것들입니까? 빼앗으려고 사단이 노리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 영생, 성령의 은사, 성령의 충만, 기쁨, 평안, 사랑, 감사, 교회,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빼앗기고 잃어버리기에는 아까운 너무나 고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쉽게 항복하고 사단에게 다 내어주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목숨을 걸고 싸워서 지켜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우리에겐 승리도, 면류관도 없습니다. 신앙이 점점 후퇴하는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를 나가기 위해 싸우면, 기도 응답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더 내기 위해 힘쓰면,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전도하기 위해 영적 싸움을 하면,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싸움을 포기하여 복도 포기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웁시다.
예수 이름으로 나아가면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바울은 인생의 종착점에 이르러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담대히 싸워 이김으로 승리의 기쁨과 영광의 면류관을 차지할 것을 확신 합니다.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우리도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마칠 때 우리를 위해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쓰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교육하는 교회로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해에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하는 달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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