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아들 2024. 5. 3. 20:43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3.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읽고 다른 사람이 보이고, 다른 교회들이 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 천리 만리 주님 앞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이 자신 이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가짜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학문으로써 신앙의 본질을 찾기 위한 툴로서 사용되는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찾기 위한 하나님 나라는, 신앙의 본질을 찾고 우리시대에 이해될 수 있는 용어로 설명되어지는 것을 연구합니다.

이것은 지금 시대에 유행하고 있는 신앙의 본질을 연구하는 툴과 방법론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으로써는 가장 적합한 신앙의 본질을 연구하는 방법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기준을 세우는데 있어서 하나님 나라 툴을 이용하여, 신앙의 본질을 찾는 작업을 하겠습니다.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승천이후 신앙의 본질이 복음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어진 3가지 발전단계를 가지고, 신앙의 본질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체로 인식하고,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그냥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 분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한 교제는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친밀한 교제가 있을 때, 우리 신앙의 모든 부분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 어떤 신앙적 노력도,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넘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많은 영적 거장들과 2000년 기독교 역사가운데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던 영적거장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가 그 무엇보다도 우선순위였습니다.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

 

하나님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서 깊은 교제의 시작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하나님과 동산에서 거닐면서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담과 하와의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창3:8-10)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을 에굽에서 건지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주된 목적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함이었습니다(출19:3-6).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명령과 구례를 지키는 것보다 우선입니다(신30:15-16).

의식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우선입니다.(호6:6)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표준새번역)

 

하나님을 안다는 표현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먼저 전제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개념으로서의 안다는 표현은 지식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알 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지신 계획대로 움직였습니다. 하루하루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통해 믿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명하신 그 일을 순종하고 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나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식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나간 것이 아니라, 인격체되신 하나님 그분을 온 삶으로 알아나갔던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안다는 표현은 바로 아브라함이 경험한 것과 같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을 통해 알아가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반드시 보완적인 모습입니다. 아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그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을 인간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여 그것을 이루는데 동참합니다.

 

구약에 있어서의 신앙의 본질은 호세아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것과 하나님을 아는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하나님이 행하고 계신 비전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1.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사역의 중심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학자들이 대부분 다 동의하는 바입니다. 침례(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회개를 선포하였습니다. 회개를 선포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 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한 마디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2. 예수님 시대에는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의 입을 다물게 할 정도로 박식하게 말씀하신 소문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모였습니다.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예수님이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시험하여 이렇게 묻습니다.(마 22:34-46)

“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답하십니다.

또 다른 질문을 마친뒤 바리세인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한 마디도 능해 대답하지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바리새인은 구약에 있어서의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지식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변론해서 그의 이단성을 반박할 수 없음도 알고 있었습니다. 신학적으로도 예수님은 전혀 문제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이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라는 그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많이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은 신앙의 본질에 대한 지식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게 하는 것에 무지하였습니다.

 

3. 첫 번째 주님이 외치신 말씀은, “회개하고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전파하신 주님의 의도를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제자들이 외친 메시지는 ‘회개하라’(막6:12)와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10:7) 였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회개하라는 내용은 지금 다루지 못하고 다음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에 대하여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유대인의 개념속에는 하늘이 3가지로 되어있습니다.

1천층 - 우리가 살 고 있는 하늘

2천층 - 우주

3천층 - 하나님이 계신 천국

 

헬라어의 본문에는 단수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하늘의 개념 중에 1천층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은 그렇게 이해했지만, 2000년 지난 오늘은 이것을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하나님이 바로 이 자리에 임재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너무 멀리 계신 하나님을 찾지말고 여기 이 자리에 계신 그 하나님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한 성육신이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또는 “임마누엘”이 가장 완벽하게 나타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의 실마리를 우리 옆에 항상 계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하고, 그것이 실제가 되는 삶을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로렌스 형제는 인생말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는 순간순간 하나님께 가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내게 위안이 되는 것은 내가 이제는 그분을 믿음으로 뵙는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뵙다 보니 간혹 이런 고백까지 하게 된다. 나는 그분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냥 뵈올 뿐이다.” 이말을 조직신학적으로 분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을 잊지 않기 위해 전 인생을 갈망하였던 영적대가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한 표현입니다. 우리의 성품과 이해가, 하나님의 통치가 더해질수록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가운데 더해지며, 우리는 그것을 성화라 부를 수 있게됩니다.

 

4. 하나님 나라는 통치이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장 1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가까왔으니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가운데 임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들은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러한 의미의 영역이나 영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 나라는 reign 또는 rule 로서 통치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보다 근접한 개념입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하나님 나라 역시 모두 통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에서 나라는 ‘말쿠스(malkeuth)',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에서는 ‘바실레이아(basileia)'라고 쓰여 있는데 이 두 단어 모두 왕이 행사하는 지위, 권위, 주권이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는 왕이 다스리는 통치 또는 주권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각자의 삶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요청하는 기도요, 그 분의 왕적인 주권과 권세가 개인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해 달라는 기도요, 그분의 의로운 통치로 인해 악들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통치의 영역은 우리의 삶 모든 부분이며, 우리의 사회와 교회 모든 부분에 그 영역이 확장되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문제는, 주님의 통치를 우리 삶에 실제가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그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 주님을 경험하고 알게 되면서 그분의 성품을 닳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우리가운데 자연스럽게 배우고 알아져서 우리 삶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질문이 바로 이런 개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목표로하면, 그 분이 옆에 와계셔서 그분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안에 있다는 포도나무 비유에서의 표현처럼, 주님을 실제의 삶 가운데 인식하며 동행하는 삶을 사는데, 모든 생각과 행동과 말과 뜻의 주도권이 이제는 내가 아니라 주님에게 있는, 실제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겸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기 때문에 내가 겸손해야지 하는 생각을 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마음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그분의 존전 앞에 머물면, 그분의 통치와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은 창조주 우리는 피조물임을 아는 것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가 하나님은 창조주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것도 실제 차원에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은 창조주 우리는 피조물의 관계를 원하십니다. 이 삶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삶입니다.

 

①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실제 잠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이 말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실재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살아가는가?

특히 내 자신, 사랑하는 사람, 물질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살아가는가?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나의 목표, 목적, 계획, 꿈, 뜻, 시간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목적이 나의 목적이 돠는 것.

 

눅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유권이 하나님께 이전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기꺼이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많은 사람이 입술로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실재로는 여전히 주도권을 드리지 못합니다.우리는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있는지, 하나님께 있는지. 이것은 우리가 반응하는 것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반응하는 그것이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에 반응한고 있다면 여전히 삶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반응한다면 우리 삶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 반응할 것입니다. 그분이 힘이시기 때문에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며, 문제 앞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엇에 반응하고 있습니까?

지금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세요. 자주 낙심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기쁘거나 슬프게 합니까? 무엇이 나로 좌절하게 하는지 살펴보십시오. 내가 자주 반응하는 그것에게 나도 모르게 주도권을 넘긴 것입니다.

그것이 배우자나 자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배우자나 자녀가 변화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변화되었는지를 보다가 약간 변화의 조짐이 있으면 기뻐하고 변화의 조짐이 없으면 낙심해 버립니다. 여전히 주도권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 증거는, 낙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린 자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때에 이루실 것을 신뢰하며 주님께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물질도 풍요하면 기쁨이 넘치지만 물질적으로 어려우면 금방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물론 물질은 우리의 필요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불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의 전 영적에서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수단으로 하여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이 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반응합니까?

그것이 내 인생의 주도권을 잡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내려져야 합니다. 지금 그것이 발견되었다면 지금 주님께 주도권을 넘기십시오.

잠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의 길을 구체적으로 인도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릴 때, 우리의 길을 구체적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②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주권을 인정하는 삶에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한 것은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기쁨과 기도와 감사는 항상 같이같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만 가능합니다.

상황에 따라가 아니라, 왜? 내 모든 상황과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지금현재 내가만나는 모든 문제와 상황과 현실을 통해서 가장 최선의 길로 하시는 완전하신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권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면, 원망, 불평, 낙심 하게되고, 결국 불신에 빠지게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순복하라는 겁니다. 그리하면 공급하겠다. 주권 앞에 들어오라는 겁니다. 기꺼이 주권 앞에 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는 삶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주권은 하나님의 기준, 성경적인 기준이기에 내 생각은 하나도 안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아래 들어갈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는데 그때 하나님의 공급, 풍요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이모든 것의 주도권을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성령의 의한 삶으로 하나님을 다시 나타내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 그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세워져가는 삶은 아직 멀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반응합니까? 그것이 내 인생의 주도권을 잡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내려져야 합니다. 지금 그것이 발견되었다면 지금 주님께 주도권을 넘기십시오.

잠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의 길을 구체적으로 인도해 나가실 것입니다

 

복음

 

지금까지 구약의 신앙의 본질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어느 순간 복음이라는 단어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와 복음이 같이 쓰이기도 하고,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많이 사용되고, 이방인을 향하여 ‘복음’이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많이 사용되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완성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완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기쁜 소식을 복음이라 하였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그 신앙의 본질을 이미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곁에 계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시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곳이, 무한한 기쁨으로 가득한 세상임을 보여주셨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에 동참하는것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인 모든 인류의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이제 제사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가지 않고, 십자가 앞에 달리신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히 나아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하나님의 성품을 더 이상 멀리서 그리고 힘들게 찾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8-11)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적극적으로 알고 사랑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이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하나님의 길로 사신 그 모든 삶,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 부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기신 그분이 가지고 계신 비전. 모두가 복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 전부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모범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정한 뜻인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의 죄 때문에 제사가 필요 없어 졌습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주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의지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길로 하나님의 뜻과 의중이 이 땅에 이룰 수 있는지 모든 모범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 모든 곳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어입니다. 이 의미는 바로 그리스도가 바로 옆에서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의 모든 영역에서 배어져 나오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통치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표준새번역 갈2:20) 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그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2. 복음은 지식적으로 동의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을 통해 만나는 것입니다.

 

복음은 죄인된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상에 이루신 그 일을 기초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신 뜻과 의중을 나의 비전으로 삼고, 그분의 비전을 이루는데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03)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인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지식을 성경공부와 교육을 통해 습득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자서전에 비유한다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한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어떠한 일을 하셨고, 또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등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삶의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사탄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을 믿습니까?” 그러자 사탄은 “저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기 전부터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방해하였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죄가 하나도 없으셨고, 하나님을 믿는 모범을 보여주신 것을 믿습니까?” 사단은 “저는 예수님에게 죄를 짖게하려고 하였지만, 그 분은 한번도 저의 꾀임에 빠진적이 없으신 선하신 분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믿습니까?” 사단은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모든 만물에게 부활의 능력을 선포하시는 것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의 능력을 믿습니까?” 사단은 “예 저는 모두 사실인 것을 믿습니다.”

 

이 대화에서 보면,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다 믿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왜 지옥에 갈까요?

사탄은 십자가 공로를 다 진실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을 뿐 아니라, 그분을 알고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을 아는 것은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주님에 관해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주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기록인 반면,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신이며, 살아 계신 인격체이십니다. 주님을 아는 것은 그 분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합니다. 인격적인 주님을 알게 될 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연구와 교육을 통해서 습득되는 반면, 주님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만, 우리는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표준새번역, 에베소서 1:17)

 

주님을 아는 것은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기초요 또한 핵심입니다.

 

3. 십자가의 의미

 

5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을 것이요,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않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표준새번역 요6:53-58)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한국 성경에는 시제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히브리어나 특히 헬라어는 시제가 한국말보다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두번째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 한 주님의 말씀의 시제는 단순과거형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한번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십자가에서의 구원을 염두하신 것 같습니다.

죄인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의지하여, 그의 대속과 부활을 시인하고,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을 지칭합니다. 이것은 과거에 한번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하여 일생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를 섬기는 기도를 드립니다.

 

세 번째 내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라 한 주님의 말씀의 시제는 현제형입니다.

이것은 과거에도 십자가를 경험하였고, 현제도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고, 미래에도 역시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는, 늘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는 현제형의 의미입니다. 매일매일마다, 시간시간마다, 순간순간마다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의 중요한 핵심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면, 풍요로운 영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보지 못하면 십자가를 순간순간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로마서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쓰여진 많은 사람들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성도를 향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 범주 속에는 반드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시인하고 인격적으로 그 분을 만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 하였습니다” 또 “선한 것이 없되, 하나도 없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헬라어에서는 모두 시제가 현제형입니다. 바울은 이미 영적으로 높은 영역까지 올라간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과거의 자신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현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더 높은 단계까지 올라갈수록, 영적거장들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십자가를 의지하여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기준이 세워지는 것을 통하여 자신을 보게 됩니다.

 

복음 속에는 단순과거형처럼 과거에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아주 중요한 핵심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현제형과 같이,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순간순간 인식하고 십자가를 의지하여 담대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분과의 인격적인 친밀함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4. 복음은 자신의 전 인생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자신의 전 인생을 통해 알아가는 것입니다. 단순과거형과 같이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경험한 것은 매우 귀중하고 중요한 신앙고백이며, 인생의 전환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만이 복음이 아닙니다. 전 인생을 드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시작하면,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성품과 마음가운데 자연스럽게 닮아가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의 경험을 통해, 다른 여러 가지 주님이 인도하시는 것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성장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가 세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쓸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 알고싶다고 하였습니다.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표준새번역 빌3:10)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기 위해 자신의 최고의 초점으로 두었습니다. 복음은 한평생 우리가 추구하고 알아가야할 신앙의 본질입니다.

 

 

에필로그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알기 위해, 가지고있던 책을 다 버린채로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선교지라는 열악한 환경가운데, 무슬림 속에서 무슬림차림으로 무슬림 문화를 배우고 말을 배우며, 내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책은, 껍데기를 일반 책처럼 위장한 성경책 한권이었습니다.

내가 배운 모든 지식을 동원하고, 인터넷으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많은 것을 수집하였지만, 제가 지금 설명한 하나님나라에 대한 내용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성경이 이 모든 것을 정리하는데, 핵심적인 힌트를 주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그분을 계시한 책”입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주제는 “하나님이 일하신다”입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을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물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제가 배운 신앙의 선배님들(교수, 목사님)이 저에게 많은 힌트와 길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학위논문을 쓰실분들은 인용하실 것을 허락합니다. 이 글을 좀 더 학문적으로 정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해 책으로 낼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저를 위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카페 회원들이 하나님의 기준위에 영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이 유익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기준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좋은 충고와 가르침이 이 글을 더욱 알차게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 등을 통해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조금씩 내용이 발전하고 다듬어 질 것을 소망합니다.

김바울 선교사 // 다음카페 // 빛과 흑암의 역사 http://cafe.daum.net/aspir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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