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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신앙

하나님아들 2024. 8. 28. 23:11

이성과 신앙

 

  

초기 교부였던 터툴리안 (Tertullian)의 유명한 질문이 있다. “도대체 아테네(그리스)과 예루살렘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즉, 이성(철학)과 믿음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느냐 하는 이 오래된 질문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오늘도 답을 얻기위해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성에 끌려 신앙을 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성을 신앙의 적으로 규정하고서 그 의미를 격하시키기에 바쁘다.

그리스 시대부터 이성은 인간의 삶과 사고방식에 아주 귀찮은, �아내면 어느새 다시 나타나 앵앵거리는 쇠파리 같은 개념이었다. 소크라테스라처럼 이성을 강조하는 쇠파리 같은 존재가 아테네의 권력가들과 시민들에게서 어떤 대접을 받았고 또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독배를 마셔야 했다. 그러나 그의 불행때문에 우리는 날파리가 주는 교훈의 가치를 알게 되고, 또한 그 가치를 존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처럼 이 쇠파리란 귀찮은 벌레가 필요한 때가 또 있었을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거나 간과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신앙과 이성이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같거나 비슷한 것이 두 개 이상일 때 배타성과 독점권의 추구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성과 신앙은 결코 같거나 비슷한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은 “이성의 부재” 또는 이성은 “또 다른 신앙”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이 존재와 관계성의 상태를 결정하는 출발점이라면 이성은 그 존재/관계성을 발전시켜 가는 방법론(과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동시에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신앙과 이성의 관점에서 한 교인을 신앙적이다 아니면 이성적이다라고 단순한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여전히 단순화 된 면은 있지만 최소한 네가지 형태로 구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1. 비이성적이며 신앙이 없는 사람 – 이 부류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음과 동시에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도 않는다. 그의 출발점은 비신앙적이며 사고방식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인식하지도 않음과 동시에 그의 사고체계는 그러한 관계의 필요성도 고민하지 않는다.

2. 이성적이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 – 이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 있진 않지만 사고체계는 이성적이다. 이성은 견고하나 존재와 관계의 출발점이 다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불신앙이 이성적으로 옳은 일이라 생각하고 당연히 신앙에 대하여 근거, 증거 자료를 요구한다. 주로 비이성적인 신앙인(아래 3)과의 잦은 마찰 속에서 스스로가 옳음을 더욱 확신하곤 한다.

3. 비이성적인 신앙인 –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나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주어진 이성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 모순을 감추거나 애써 무시할 뿐 어떤 연결점을 찾으려고 고민하지 않는다. 그는 올바른 출발점에 서있으나 더 깊고 의미있는 관계를 향한 여정을 떠나질 못한다. 때로 성령의 도움으로 관계의 깊은 면을 인식하기도하고 진실의 의미를 찾기도하나, 이성적 사고의 결여는 보다 성숙한 신앙에 이르는 과정에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이 때론 흔들리기도하며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는 사실 차체를 두려워하기 하기 때문이다.

4. 이성적인 신앙인 –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이성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성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이성도 하나님의 본성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출발점에 서있으며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비록 이성적 비신앙인(2번에 해당)을 만족시킬만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나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과 변호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또한 비이성적 신앙인 (3번에 해당)으로 하여금 이성적 사고가 성숙된 신앙에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할 수도 있다.

당연히 이성적인 신앙인들은 귀찮은 벌레의 역할을 해야 한다. 비이성적 신앙인들 사이에 이성에 대한 불신이 아주 깊게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성에 대한 불신은 대부분의 경우 신앙이 없는 이성적 사람들(2번)과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앞서 살폈듯이 이성적이긴하나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비이성적 신앙인들의 고백이나 설득은 그 이성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이 곧 “이성은 불신앙이다” 라는 결론을 낳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비이성적 신앙인들이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사항이 있다. 이성적 비신앙인들이 여러분들의 고백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이유가 과연 그들이 이성적이어서인지 아니면 그들이 신앙이 없기 때문인지 말이다. 이성적 신앙인들도 이성적 비신앙인들에게는 신앙의 근거를 설득하기가 어렵다고 말하였다. 오직 신앙을 변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성적 비신앙인들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그들의 이성의 문제라가 보다는 불신앙의 문제라고 보는게 옳지 않은가. 즉, 그들은 관계의 출발점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지 그들의 이성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오늘날 쇠파리처럼 귀찮은 신앙인들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도전을 받고있다. 이성을 기피하는 형제들이 그들의 시험, 증명되지 않은 많은 주장들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를 천국에서 내리는 만나 또는 계명을 지키는 언약궤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계시에 의존하는 종교에서 이러한 현상이 유행하게 되면 감성적, 주관적 경험은 신성불가침이 되며 그로인한 직관적 주장은 항상 이성을 이기게 되어있다. 어떤 성경 구절이 이들에게 특정한 의미로 다가서는 순간, 다른 해석이나 의미를 제시하는 사람은 곧바로 신앙의 적인 이성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이들과 달리 말하는 사람들은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자들이며 불화의 원인인 것이다.

그러나 대충만 훑어봐도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쩌면 바로 그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게 성경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럴때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쇠파리처럼 귀찮게 여기는 자들을 세우셔서 그 잘못된 여정을 중시시키며 다시 진리의 길로 들어서게끔 만드신다. 흔히 이 귀찮은 쇠파리들은 정치권력, 종교권력 그리고 스스로를 하나님의 사람들이라 주장하는 대중의 감성에 철저히 반하는 위치에 서있곤 한다. 그래서 아주 자주 이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던 집단으로부터 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도리어 처벌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희생이 끝난 후에야 비로서 이들 ‘예언자’들의 경고가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다시 아테네로 돌아가보자. 아테네는 소크라테스에게서 두 가지의 죄목을 찾았다. 첫째, 그는 그리스 신들을 의심하는 질문들을 하였고 (권력과 대중들은 이를 불신앙으로 판단했다), 둘째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소년들에게 시험받지 않은 기성세대의 가정들을 막연히 수용하지 말라고 권유하면서 과거의 실수를 새로운 세대는 반복하지 말 것을 경고했던 것이다.

옛 예루살렘(구약)이 새 예루살렘(신약)에게 주는 교훈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크고 강력한 쇠파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한 세대의 실수가 마지막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그는 오래된 종교적 전통이 바뀌어야 함을 보았고 어떤 것은 깊은 심연 속으로 떨쳐버려야 함을 인식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예수는 시대에 불편한 존재가 되었고 사랑 받지도 못했으며 왜곡되게 인식되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질문을 제기하고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로인해 고통받고 또 영광을 입은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을 쇠파리 잡듯이 간단히 무시한 후 다시 무지의 깊은 잠에 빠질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은 이 귀찮은 쇠파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손바닥으로 뿌리쳐 내고서 다시 잠을 잘 것인가, 아니면 귀찮더라도 일어나서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제 우리가 들어야 할 때이다.”라는 것이 아닐까?

여전히 많은 신자들 사이에 심지어 스스로를 이성적이라고 자처하는 신자들마저도 ‘비이성적 신앙’에 대해 질문하고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경우가 많다. 언제부터인가 의문이 불순종이고 이성이 ‘진리’의 가장 큰 적이 되었고 침묵과 열정적 직관이 신앙의 표본이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