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
장수민 목사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갈라디아서 2:20 5:24-2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5:24-26)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강의 요점>
본 주제에 해당하는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으면서도 그러나 정작 그 의미의 풍요로움이 제대로 충분한 빛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내용들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곳의 말씀들은 상당히 역설적인 내용으로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갈라디아서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한데, 왜냐하면 성도의 삶의 원동력을 말함에 있어서 자신은 죽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원리 안에서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첫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요, 다음으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본문은 상당히 역설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이처럼 역설적인 내용들을 상당히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다만 우리가 왜곡된 진리 안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것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진리인 듯이 오해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와 같은 역설적인 원리들은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시금석으로 삼아야 할 삶의 근본 원리가 됩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자기 안에 이루어진 새 생명의 원리와 능력을 충분히 인식하는 가운데 적용해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원리를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것이요,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에로의 적용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함에 있어서 제시할 수 있는 핵심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영원한 내세에 들어가기까지 현세에서의 삶을 진행함에 있어서 세상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원칙적인 면에서 보자면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고로 현실을 도피하듯이 이 세상을 경멸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유를 남용하여 세상에 집착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절제보다는 남용에 있어서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과도하게 현세에 탐닉되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원리입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7:29-31). 제아무리 풍요하다 할지라도 거기에 절제가 수반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의식주에 대한 지나친 염려, 사치, 방탕, 탐닉 등등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는 인내를 감당해야 합니다. 재산이 없는 자들은 없는 가운데서도 자족할 줄 알아 인내로 지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허망한 재물욕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 입고 있는 의복과 주거에 만족할 줄 모르면 사치한 옷을 입을 궁리와 호사한 주택을 사모하는 일에 온 마음을 빼앗기기 마련이며, 결국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해로운 악에 빠져들기 마련이어서 영적인 일에 민첩하게 순종할 리가 없는 법입니다. 세 번째로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만물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기우셨다는 원리 안에서입니다. 고로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청지기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절제, 자제, 검소, 절약, 온건 등등입니다.
참고 : 사실 그리스도인이기들 원하는 사람이라면, 평생을 살아가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힘써 노력하는 가운데 그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힘쓰기 마련일 것입니다. 만일 성도에게서 이런 것이 없다면, 그렇다면 그의 삶은 불신앙인들의 그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요 따라서 사실상 동물들의 경우보다 나을 것이 없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기 성도들 개개인의 삶을 잘 검토해보면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이런 헛점이 발견되어지곤 합니다. 현세 세상의 화려한 권세와 부귀와 영화에 눈과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저 너머 영원의 세계를 보지 못하곤 합니다. 마음이 온통 탐욕과 야심과 악한 육체의 욕망들로 가득 차서, 보다 높은 영원의 이상에로 올라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전인격이 육체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삶을 사는 일에 본능적으로 집착할 뿐인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원리를 잘 고려하는 것은 현명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보여주어야 하는 합당한 자세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삶을 능력 있게 살기 위하여 이 세상 삶이라는 것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로서의 그 한계성을 근본적으로 전제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된 저 너머의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현세의 세상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세상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을 상실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다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노라면 갖가지 어려운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고려해야 할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지고 계시는 어떤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의 맹목적인 그 본능성으로서 이 세상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신다. 이 때문에 우리를 경고시키시려고 필요한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절제시키고, 깨우치시기 위하여 갖가지 역경과 시련들을 허용하십니다.
참고 : 사실 갖가지 시련과 역경으로서 이러한 자극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뛰어난 각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 있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하물며 시련이 없이 풍부함과 즐거움만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나빠지겠는가. 세상이라고 하는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빼앗기도록 하는 많은 유혹거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를 즐겁게 하는 많은 달콤한 쾌락거리들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어느 사이엔가 정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랐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인생이란 것이 사실상 안개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고난과 사기와 병듦과 전쟁과 불화 등등의 온갖 침침한 것들이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을 통하여 불현듯이 세상에 집착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다시금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덧없이 지나가고 궁극적으로 썩어질 것에 불과한 재물에 탐닉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도난과 화재와 질병 등등의 수단을 통해서 우리를 저 밑으로 내려놓으신다.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에 방해를 가져올 정도로 결혼 생활에 너무 만족하거나 즐거워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하여 양쪽 부부의 결점을 통해 괴로움을 맛보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강퍆함이 허용되기도, 저희를 조실하는 시련을 주시기도 합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인간이 누리고 즐기는 모든 축복들이란 것이 사실상 불안정하고 덧없는 것이요, 허무한 것임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참고 : 이런 식으로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갖가지 역경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를 창출하게 됩니다. 인생들이 지상에서 즐기는 어떤 것들도 사실상 궁극적인 행복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십니다. 결국 성도들은 눈을 높이 들어 그리스도 안에 감취인 생명을 보게 될 것이요, 그의 나라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모함은 정말로 우리가 현세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을 때라야 간절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현세를 과대평가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세상을 멸시하는 것 사이에 ‘중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온 마음과 영혼으로 세상을 사랑하든가, 아니면 전인격적으로 그것을 철저하게 멸시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십자가의 시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있어서는 마치 이 땅에서 영원불사하기로 작정되어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간혹 장례식에 참여하게 됨으로 죽음의 필연성 속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그야말로 잠시 잠간의 즉흥적 충동으로 끝나고야 맙니다. 우리 가운데 인생을 논하게 될 때, 인생의 그 제한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대화일 뿐입니다. 실제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서는 천년 만년 살겠다는 원리가 지배적인 것입니다. 참으로 어쩌다 죽음의 필연성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할지라도 그야말로 찻잔 속의 폭풍과도 같이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이내 찰나적인 충동이 되어 사라져버립니다.
따라서 내세에 대한 생각은, 의도적으로 끊임없이 훈련함으로써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서 역사하게끔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현세에 집착하고 그것을 과대 평가합니다. 이것이 사라지도록 뚜렷한 각성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자신을 건져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생에 대한 생각이 늘 자기를 지배하여야 하며, 따라서 현세를 과대평가하지 않는 삶을 견지해 나가야 합니다.
이상 논술한 삶의 원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됨의 의미에 대한 철저한 자기 각성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왜 그처럼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각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 깨어 있는 의식만이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가운데, 약속되어진 영원한 기업을 상속으로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로서 자라가게 할 것입니다. 이제 이런 제반 원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특별히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주제 연구
1. 먼저 그리스도인의 삶은 ‘육체 가운데서의 삶’과 ‘믿음 안에서의 삶’이라고 하는 두 가지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⑴ 외적이요 표면적으로 볼 때에 우리의 삶은 ‘육체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에는 불신자들이 사는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외견상 그 모습이 동일합니다. 이는 마치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이 같을 리 없지만, 그러나 외견상으로는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① 세상에 속하여 삽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세상으로부터 취하여 가시지 아니하십니다. 여전히 세상에 두시는 것입니다.
② 세상을 경멸하지는 않습니다. 일부에서 지향하는 은둔주의는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세상을 멀리하고 그 세속적 정신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태도는 그런 식의 공간적 분리를 통해서 실현되지 않습니다.
③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는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세상 속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 그 자체는 경멸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고전5:9을 보십시요.
⑵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삶의 동기를 이끌어 가는 내적 원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는 불신자들의 그것과 확실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의 근원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5장에 나타나고 있는 ‘포도나무 비유’의 의미와도 같은 것입니다.
① 소극적인 의미에서 보건대 세상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즉 매사에 하나님 없이 생각하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식의 사고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② 적극적인 의미에서 보건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모든 삶의 사고방식과 그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열매를 맺어 가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된 신분과 자격과 긍지로서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입니다. 빌3:20을 보십시요.
⑶ 우리의 삶의 원리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12:1-2을 보십시요.
참고 : 바울은 본문에서 성도들이 자기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두 가지 핵심적인 사실을 말합니다. 첫째로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이요, 두 번째로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일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거듭난 자’로서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자로서의 새로와진 마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는 법입니다. 열왕기하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문둥이들의 양심의 두려움을 주관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당신의 구원 역사를 진행해 나가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을 지킨 것입니다(잠4:23). 그러면 과연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생명이 근원이 이에서 난다는 말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듭난 마음은 양심을 통하여 그 모습을 활발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마음은 양심입니다. 따라서 양심에 꺼리김이 없어야 합니다. 양심이 영향력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마음과 양심은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즉 다윗에게 자각되어진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범죄는 마음의 자책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삼하24:10). 스스로 마음적 양심에 책망받을 것이 없는 상태는, 곧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과 방불하게 취급되기도 하였습니다(요일3:21). 따라서 마음에 꺼리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중요시 여겼다(행24:16).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입니다(히13:18). 뚜렷한 자각을 갖고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경계의 목적입니다(딤전1:5). 선한 양심을 버리는 것은 믿음에 파선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딤전1:19). 그런고로 마음을 지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저버리게 하기 위하여 특별히 고난을 부여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특별히 환난의 시기에 이를 저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 어떠한 류의 가난의 시험과 고난이 찾아와도 결코 시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욥과 같은 믿음이 요구됩니다(욥1:21-22).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롬8:28). 그래서 어려운 시험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것을 도리어 온전히 기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약1:2). 고난당한 것이 도리어 유익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시119:71). 뿐만 아니라 번영의 시기에도 이 마음을 온전히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이러한 때에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은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조심하여야 합니다(신6:10-12). 웃시야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대하26:16). 솔로몬의 경우는 유명합니다(왕상11:1-13). 전반적인 이스라엘의 삶이었습니다(느9:25-26). 참으로 부할 때 마음을 지키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부를 추구하는 곳에 이런 위험이 옵니다(마19:24). 재물이 늘어가는 일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시62:10). 많이 가진 자는 그마만큼 더 큰 청지기적 의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많이 가진 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눅12:48). 부분적인 헌신을 온전한 헌신인양 착각치 말아야 합니다. 예후의 실패가 이런 것이었습니다(왕하10:31). 이상 살펴본 원리에 따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거듭난 자에게 부여된 새로운 각성으로서의 마음을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① 이러한 삶은 하나님께 자신의 일생을 드리기를 기뻐하는 자가 명심해야 할 거룩한 영적 예배의 원리입니다. 즉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사실에다 부여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② 이러한 삶은 육체적인 본능을 추구하지 아니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살아가는 거룩의 원리를 추구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습니다.
③ 그래서 늘 하나님을 향한 봉사의 원리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두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비록 육체 가운데서 살고 있지만, 그러나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④ 그래서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자기 지체를 더 이상 죄에게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않는 것이요,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을 말합니다. 롬6:12-14을 보십시요.
2.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본적인 원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중에 사는 삶’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그와 함께 못 박혀야 만이 비로소 산다’는 역설적인 진리의 선언인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옮기자면 ‘자기를 부정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버렸습니다. 옛 사람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⑴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도록 하여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의 지식을 의지하는 것, 바로 이것이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치 않게 만드는 가운데 결국 영원한 심판으로서의 파멸로 몰고 가는 결정적인 해독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고로 이런 삶은 살지 않아야 합니다.
①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은 그가 겪으신 일 - 고난, 죽음, 장사, 부활, 승천 - 이 바로 ‘나의 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쉽게 말하여 ‘옛 사람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자기부정의 원리’가 나옵니다.
②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가운데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 자들을 향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라고 요구하신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눅9:23을 보십시요.
- 자기를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 자기 자신, 즉 육신과 매 순간마다 싸워야 합니다.
- 자기 십자가는 바로 이 자기부정에 있습니다.
③ 우리는 자기를 사랑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만큼 그마만큼 하나님으로부터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고후5:15을 보십시요.
④ 이것은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을 잊지 말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에 철저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⑤ 이것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일에 열심일 수 없게 됩니다. 사실 ‘자기부정’이 없는 가운데서 되어지는 일체의 선행들은, 반드시 적절한 기회의 때에 교묘한 명예욕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기부정이 있으면 있는 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됩니다.
⑵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가 이끄는 대로 우리의 육신적인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사망의 열매만을 맺을 뿐입니다. 육체에 거하면서 낳게되는 모든 것은 결코 빛이 될 수 없는 것이요, 오직 어두움일 뿐입니다.
①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살면서 맺었던 열매 중에 과연 빛의 열매가 있었던가? 아닙니다.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그 마지막이 사망인바 부끄러운 열매를 맺는 삶만을 살았습니다. 분노와 시기와 탐욕과 그리고 중상모략과 탈취와 혈기와 복수 등등의 사망의 열매만을 맺었을 뿐이었습니다. 롬6:21을 보십시요.
② 우리가 우리의 육체가 이끄는 대로 행하여 육체 가운데 거했을 때에는 오직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그 행하는 모든 일들이 마귀의 종노릇하는 짓이었습니다. 엡2:2-3을 보십시요.
③ 이런 것들이 자기를 내세우고 주장하는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부끄러움의 실상인 것입니다. 이 탐욕의 육체를 죽이는 곳에 새 생명의 증거가 드러나게 되고, 새 생명의 원리가 구현되는 곳에 부패한 육체는 죽는 것입니다.
④ 육체의 정욕은 언제나 거듭난 거룩한 영혼을 거스리고 대적할 뿐입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제어해 나가야 합니다. 벧전2:11을 보십시요.
⑶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리사욕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몸의 사욕을 추구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가장 해독인 것입니다. 밖에서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말미암은 위험보다는, 반대로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들로 말미암은 위험이 더욱 무서운 독소인 것입니다.
① 육체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치 않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것들입니다. 아니 놀랍게도 하나님을 향하여 원수가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롬8:7을 보십시요.
② 육체의 것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는 고사하고 그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조차도 없습니다. 고전2:14을 보십시요.
③ 죄는 이처럼 부패한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몸의 사욕을 충동시킴으로 역사하기 마련입니다. 롬6:12-14을 보십시요.
3.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삶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얼마나 복된 일이며, 얼마나 영광된 일입니까?
⑴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살아도 그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그를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진정하고도 최고한 가치가 바로 이에 있습니다.
① 최초의 인간 아담 안에서 보유하고 있던 삶의 목적이 회복된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합니다. 롬14:8을 보십시요.
② 우리는 철저하게 자기를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 성령으로 지배됨으로, 하나님의 완전하신 소유물이 된 것으로서의 그의 것으로서 존재하는 데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특성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고전6:19을 보십시요.
③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으로서 나타나야 합니다. 고전10:31을 보십시요.
④ 원래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본분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를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일체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죽음까지도 하나님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12:13을 보십시요.
⑵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와 지혜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여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것이 아님을 배우고, 그래서 자기의 이성에서 그 지배권을 빼앗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자기의 지성 의지를 포기하라.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구원받은 증거가 보여지기 마련입니다.
① 지식의 본질은 여호와를 경외함에 있습니다. 잠1:7을 보십시요.
② 지혜의 본질도 여호와를 경외함에 있습니다. 잠9:10을 보십시요.
참고 : 우리는 신학 혹은 신앙을 단순히 하나의 학문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원리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기 존재의 의의를 찾는다는 데서 나타납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고, 계속해서 그 말씀에 의해 재창조되어져 갑니다. 바로 여기에서 신앙은 학문이 아니요, 삶으로서의 생활 그 자체인 사실이 여실히 선언되고 있습니다. 신학의 목적은 여호와를 섬김에 있는 것이지, 여호와의 어떠하심을 이론적으로 분해해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결과를 도출해내지 않는 일체의 신학은 이미 그 자체로서 거짓이요 허무며 사단적인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위장된 어두움일 뿐이지 결코 빛이 아닌 것입니다. ‘헤르만 바빙크’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를 돕는 것은 나의 학문도 아니요, 교리학 책들도 아닙니다. 오직 신앙만이 나를 구원합니다.’ 과연 신학의 목적은 여호와를 경외하려는 데 있는 것이요, 그분을 보다 진실되이 섬기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의 최종적인 결론은 절대적으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써 나타나야 합니다.
⑶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생활의 목표를 맞춤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이제 ‘심령으로 새롭게 됨’이요, 또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으로서의 ‘중생인의 삶’을 능력 있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엡4:22-24을 보십시요.
① 부정적인 면에서 옛 사람을 벗어버립니다. 이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삶을 특징으로 합니다.
② 긍정적인 면에서 새 사람을 입습니다. 이 새 사람은 심령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참고 :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상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한 자들이지 다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며,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 구원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며,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골2:3).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그에 입각하여 살아간다. 이렇게 보면 믿음이 온 후로 저의 삶은 분명한 변화를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즉 소극적인 의미에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상호 배타적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림이 없이는 새 사람을 입을 수가 없고, 새 사람을 입음이 없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이의 삶의 의미를 본문을 중심으로 좀더 세부적으로 알아봅시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니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여야 하는 이유 혹은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⑴ 그것은 먼저 나에게 제공된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이라고 했습니다.
① 여기 ‘사랑하사’라는 말과 ‘버리신’이라는 말은, 과거에 분명히 발생하였던 어떤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켜주고 있습니다.
② 이 사랑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던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처럼 실제로 일어났던 엄청난 역사적 사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③ 그 실제적인 역사의 내용인즉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께서 처참하게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④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그러한 죽음의 신학적 성격에 있습니다. 그가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죄 값을 위한 것이요, 그가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에게서 일어난 모든 일의 효과를 혜택 입게 됩니다. 롬6:3-5을 보십시요.
⑵ ‘자기 몸을 버리신’이라는 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셨던 자기 희생의 극치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마지못해서 되어졌던 불가항력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사건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의식적’으로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던 데서 되어진 일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두 가지의 자기 희생이 등장하였습니다.
① 첫째로 성부 하나님의 자기 희생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기꺼이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이랄 수 있는 독생자를 희생시키셨던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그를 화목제물로 보내셨습니다. 롬3:25을 보십시요.
-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요3:16을 보십시요.
② 두 번째로 성자 예수님의 자기 희생이 있습니다. 성자께서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갈1:4-5을 보십시요.
- 그는 거역치 않으셨고, 기꺼이 자신을 비어 속죄를 이루기 위한 종의 몸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빌2:6-8을 보십시요.
③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루어진 이 놀라운 두 희생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희생과 성자 하나님의 희생이라는 이들 두 가지 측면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④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희생하셨고, 아들은 자기를 기꺼이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 그의 죽으심은 자발적인 것이었고 또한 그렇게 되기로 결정되었던 일이었습니다.
- 그의 죽으심의 의미는 우리의 죄 값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 그의 죽으심의 목적은 우리를 양자로 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그의 죽으심의 결과로 인하여 우리는 은혜와 평강을 누립니다.
- 그의 죽으심의 종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⑶ 예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자기 희생은 ‘나를 사랑하신 데서 되어진 일’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라고 했고, 그리고 ‘나를 위하여’라고 했으며, 그 결과 ‘자기 몸을 버리신’이라고 말해진 것입니다.
① 이처럼 그의 죽으심이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요 오직 타인을 위한 것이었음이 틀림없는 한에는, 이제 그것에 근거하여 바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막10:45을 보십시요.
②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의 의미가 추상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나 자신을 위한 죽음’인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사망의 형벌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대신 지워졌던 것입니다.
③ 그러면서도 이 같은 원리는 다시 ‘나’라고 하는 한계를 넘어서 전 우주적으로 확대되면서, ‘나의 아내와 남편과 자녀와 부모님과 친구들을 위한 죽음’의 차원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⑷ 이 단계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합니다.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과대 평가를 깨끗이 떨쳐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처절하리만큼 비참한 죄인된 존재라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① 분명 핑계할 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혹 의인이요 선인일 수 있겠으나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히 죄인인 것입니다.
②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그 뒤에 따라올 심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가 받아야 하는 영원한 심판과 형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③ 그런데 놀랍게도 이 무서운 심판과 형벌의 고난이 면제되는 일이 이제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④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까지 삼아주셨습니다. 갈4:4-7을 보십시요.
5. 그러면 그의 이와 같은 죽으심의 사랑이 어떻게 나의 것으로 확보되는가의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어야 하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그의 그러한 죽으심의 효과를 내 것으로 확보하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방법을 떠나서는 그 엄청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의 사건을 자신의 것으로 확보하는 ‘실제적인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⑴ 오늘날 믿음의 개념을 너무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의 기본적인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 중에, 감히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논의하는 모순된 삶을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실 성경은 믿음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① 경건한 교훈을 소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② 개인이 가지는 강력한 소원을 말합니다.
③ 비록 지금은 사라졌지만 기적을 행하는 어떤 초월적인 은사를 말하기도 합니다.
④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⑤ 그러나 이상의 것들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규정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개념은 총체적으로 규정되어야 합니다. 비록 성경이 믿음의 다양한 면을 소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나게 하는 믿음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⑵ 믿음의 개념이 일상적인 삶의 영역과 연결되어 생각되지 않는 것, 그것 자체부터가 벌써 잘못인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에 대해서 많이 논의한다 할지라도, 그 믿음이 자기 자신의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면, 그렇다면 그 믿음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성경적인 올바른 믿음은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기 마련입니다.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고 : 성경이 보여주는 일관성 있는 믿음의 본질은 한 마디로 말하여 주님을 따른다는 데 있습니다. 동시에 성경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한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감에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자기부정의 여부에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기부정이 없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으며, 자기부정이 있는 곳이라야 주님의 통치가 극대해지는 법입니다.
⑶ 믿음은 어떤 마술적이며 요술적이거나 또는 신비적인 정체불명의 신기루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나의 삶’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분명히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나의 삶의 근거요 총체가 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바른 이해와, 또한 바른 적용이 있어야 합니다.
① ‘믿음’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의 목적’을 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막연한 이해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될 수 있어야 합니다.
-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습니다.
-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입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입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행위의 목적’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자신의 것으로 붙잡고 소유하는 가운데, 이제 그것이 의미하는 바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③ 자신에게 구체적이며 실질적으로 직접 적용시키지 않는 선에서 논의되는 믿음이란 전혀 무익한 것입니다. 구체화시키고 실제적으로 적용시켜야 합니다.
④ 습관적이며 상투적이고 그리고 형식적인 데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라고 말해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 갈6:14과 같은 확신이 일어나야 합니다.
- 빌3:7-9과 같은 확신이 일어나야 합니다.
⑷ 여기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첫째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고, 두 번째로는 자기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말이 의미하는 보다 진전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갈5:24을 보십시요.
②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의미에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 수동적인 의미에서 ‘육체가 못 박혔습니다.’ 갈2:20을 보십시요.
- 능동적인 의미에서 ‘육체를 못 박습니다.’ 갈5:24을 보십시요.
③ 이렇게 되는 것을 통하여, 원칙적으로 자기부정의 삶과 또한 자기헌신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즉 비록 육체 가운데 살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일은 나타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일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 육체의 일들 : 갈5:19-21의 15가지 목록들을 보십시요.
- 성령의 일들 : 갈5:22-23의 9가지 목록들을 보십시요.
⑸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이제 ‘육체적인 영역’과 ‘믿음의 영역’이라고 하는 두 가지 면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으로서의 특징을 가집니다.
① 외적인 의미에서는 육체 가운데서 삽니다. 그런데 이 육체 가운데 사는 삶은,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 있어서 제아무리 화려하고 권세가 있다 할지라도,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건대 결국 죽는 것으로서의 특징을 가집니다. 그것은 생명이 없고 초라하고 한정된 삶입니다.
- 우선 보기에 제아무리 강건하고 부요하다 할지라도 그 종국은 파멸입니다.
- 소유의 넉넉함이 제아무리 풍부하다 할지라도 그 종국은 뻔한 것입니다.
- 불행과 고통의 영원함은 도저히 피할 수 없습니다.
② 내적인 의미에서는 믿음 가운데서 산다. 육체 가운데서 살지만,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는 믿음 가운데서 사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이라면 지금 비록 죽고 있다 할지라도, 사실상 그것은 정말로 사는 것입니다.
③ 이 같은 오묘한 삶의 모습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성구가 있습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⑹ 결론 :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조용히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본문은 분명히 말하기를,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서 사신다면, 그렇다면 오늘의 육체의 죽음은 사실상 영원한 생명을 위한 진짜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죽으면 죽는만큼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사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각인에게 요구되어집니다. 그 분이 내 속에 계신 것으로서의 존재가 인식되는가? 그 분이 사셨던 삶이 내 삶의 모범으로 적용되는가? 그 분의 사셨던 삶의 동기가 내 것으로서 적용되는가? 참으로 내게 사는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셔야 합니다. 우리의 육적인 이성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용해선 안됩니다. 이상의 삶을 사는 것이, 곧 본문의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씀의 풍부한 의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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