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교회다. 사도행전 2:36-41
ㅇ 하나님의 대안, 교회
오륜교회를 위한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여러분입니다. 오륜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육이 강건한 성도가 되는 것이 오륜교회를 위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향한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이후에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이 땅을 위한 선물로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의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 말고 다른 것을 만드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대안은 교회였습니다. 도대체 교회가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시면서 자신을 대신할 대안으로 교회를 만드신 것일까요? 한국교회 초대 선교사들의 이력을 보면 이들은 소위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나라에서 그대로 살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 땅에 건너와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려고 했을까요?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에 대한 여러 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 말하는 교회가 아닌,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처음 교회가 만들어질 때 '어떻게, 왜,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살펴보면 교회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그 부분에 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
1. 교회는 선명한 복음을 선포하는 곳이다.
교회는 선명한 복음, 즉 예수를 선포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가장 저주스러운 방법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예수를 120명이 각종 외국어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전하는 곳입니다.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이 선명한 복음을 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세상은 '죄' 이야기를 싫어합니다. 죄를 기호의 문제로 봅니다. 죄를 문화의 문제로 봅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죄를 죄라고 말하는 곳입니다. 내가 죄인이고, 당신이 죄인이며, 모두가 죄인임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는 죄로 인해서 시작된 것이고, 궁극적인 문제 역시 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의 문제를 보다 선명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한결같이 죄의 문제를 말씀하셨고, 죄인의 구원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4대 성인정도로 보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직 예수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이 외침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영광은 교회다움을 지킬 때 나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교회다움을 지킬 때 나옵니다. 우리나라 말의 '아름답다'에서 '아름'은 '나'라는 의미입니다. 즉, '아름다운' 것은 '나다운'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다울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교회는 선명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2. 교회는 영혼을 살리는 곳이다.
교회는 영혼을 살리는 곳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7) 이런 반응은 성령이 주시는 반응으로서, 4차 산업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한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떻게 살아나는 걸까요?
① 마음의 찔림
본문에 '마음에 찔려'는 '격하게 찔러 관통시키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뜨끔한 것이 아니라 칼로 잘라낸 것입니다. 수술한 것입니다. 사람의 전공은 위장술입니다. 숨기고 가립니다. 그러나 말씀의 전공은 드러내는 것입니다. 숨겨둔 내면의 실체를 찌르고 잘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검보다도 예리합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십니다. 이 땅의 칼은 살을 벨 수는 있어도 심령을 베지는 못합니다. 이 땅의 칼은 육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지만, 말씀은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영혼을 향한 강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② 자신의 세계가 무너짐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이는 우리의 삶과 가치관, 우리의 세계, 우리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소리입니다. 이 외침은 자의적으로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닙니다. 찔림을 경험했다고 다 이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찔림을 경험했지만, 그는 돌이키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강한 찔림을 경험했지만 돌이키지 않고 이를 갈며 귀를 틀어막고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우리의 이전 세계가 무너져야 합니다. 인생의 대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져야 합니다. 우리 안에 어떤 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이 무너져야, 새로운 것을 세워 갈 수 있습니다.
③ 회개
자신이 믿고 있는 세계가 무너져 '어찌할꼬?'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 2:38) 영혼의 회복을 원한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찔림'이 감정이고, '어찌할꼬'가 의지적 결단이라면, '회개'는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회개의 사건이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회개란 두 가지 요소를 품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방향 전환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 방향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참회로 시작되지만 참회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죄에서 해방됩니다. 회개는 단지 죄에 대한 수치심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해방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한 분명한 흔적은 가슴을 치는 회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의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④ 세례
회개한 사람이 처음으로 하는 순종이 세례입니다. 당시 세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대교로부터 공개적인 변절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세례를 받으라는 말은 그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걸라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3) 당시 세례를 받을 때는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의식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물속에 들어가는 의식은 죽음을 의미하고, 물 밖으로 나오는 의식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곳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살리는 곳입니다.
○ 예수로 충만한 교회
처음 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인 이유는 예수님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 2:41) 베드로의 이 한 번의 설교로 3,000명이 주께 돌아왔습니다. 이 3,000명은 당시 예루살렘 인구의 3%라고 합니다. 이런 역사가 오륜교회 안에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교회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오륜교회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오륜교회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더욱 선명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제자 삼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더 많이 울고 절망하기도 하지만, 더욱 세워지고, 강건해지고, 예수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 나가는 사랑하는 오륜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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