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상식 이야기!!

십일조 배경이야기

하나님아들 2024. 6. 1. 17:47

십일조 배경이야기

 

ㅣ. ‘하나님의 것’ 사상 

 

‘하나님의 것’ 구분해 소중히 드린다

‘내 것’ 안에 숨은 놀라운 섭리와 은혜를 잊지 않아

 

오늘날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진통 가운데 하나가 십일조 문제다.

즉,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산물인데 지금 이시대에도 십일조를 내야하나?’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문제가 한국 교회를 힘들게 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들에는 십일조와 더불어 ‘사람과 짐승과 모든 곡식과 과일의 첫 것 또는 첫 열매’까지도 포함된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이나 목회자들이 십일조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이다.

 

이 사상에 근거하여 심지어 말라기에서는 십일조를 구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번 회에서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개념에 대한 고대 성경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정리해보고 십일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하나님의 것’이란

 

고대 성경시대의 히브리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의 것’이란 사상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내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은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적 삶을 살던 성경시대의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하는데 이웃집에 묶여있는 양의 털빛이 너무 좋아 보여 가위를 들고 울타리를 넘어 그 양털을 잘라다가 내 옷을 해 입었다면 그것은 도둑질이 된다. 또 다른 예로써 두 사람이 함께 일하고 적당하게 이익을 나누기로 했는데 나누지 않고 한 사람이 모두 차지해버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 몫을 나눠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이 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몫은 자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 것처럼 써버렸고 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을 이렇게 규명했다. 자신이 일을 해서 얻게 된 소득 안에는 내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소득에서 하나님의 것을 반드시 구분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 내 소득 가운데 ‘하나님의 것’이?

 

그렇다면 내가 땀 흘려 벌어들인 소득 안에 어떻게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 들어 있다는 말일까? 그 사상은 공동체로 함께 일해 얻은 소득을 균등하게 나눴던 삶과 직결되어 있었다. 또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상에 근거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소득을 발생시킬 때는 그 안에는 사람이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이 하신 역할이 있다는 사상에 근거한다.

그 한 예로 고대 농사를 짓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행위와 그 곡식을 추수하는 행위는 본인이 한다. 하지만 그 곡식이 자라는 과정 동안 모든 햇빛과 태양과 적당한 때에 내리는 비는 본인이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내가 얻은 수확물들 중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역할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해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득을 발생시키기 위해 본인도 일했지만 그 소득 안에는 하나님께서도 역할을 하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가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이 삶을 위하여 소득을 얻기 위해 직장에 나간다고 한다면 그가 직장에 나가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능력이지만 그를 건강하게 하셨고 또 직장에서 일 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과 조건과 지혜와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셨다. 우리가 흔히 겪는 일이지만 감기만 심하게 걸려도 직장에 나가지 못한다. 아니 가정에 급한 일만 생겨도 직장에 나가지 못한다. 결국 성도들이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환경들과 조건들을 무리 없게 인도하시는 덕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십일조, 즉 하나님의 것을 드리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유대인들은 십일조를 표현할 때 ‘내 것을 드린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을 구분해서 드린다’고 표현한다. 유대인을 본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신앙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갖자는 것이다.


3. 십일조를 드림은 신앙의 고백

신약성경에서 십일조가 자세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은 명백하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언약이 취소되었다는 말씀이 성경에 없었다면 그 약속을 영원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명령이 취소되기 전까지는 지켜져야 할 영원하신 명령이다. 결국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란 오늘날 이 시대를 살면서도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이며 자신이 그 주권 아래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목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에 대하여 명확하게 성도들을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십일조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하고 십일조를 통해 성도들이 신앙고백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 목사들이 해야 할 사역 중 하나다.

 

ㅣㅣ.  얼마나 드려야 하나?

 

십일조는 10% 아닌 11.8%

공동체서 ‘스스로 소득 발생할 수 없는 자’를 위해 쓰였다

 

십일조는 명확히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구분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얼마가 십일조일까?


1. 십일조의 양

 

먼저 100만원에 대한 십일조를 생각한다면 보통 10만원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1/10을 떼어낸다는 그 마음이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 소개하고 싶은 부분이 또 하나가 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십일조의 규모를 규정할 때는 십일조는 10퍼센트가 아니라 11.8퍼센트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유대인들은 7년 안식년의 사이클(cycle)을 갖고 있다. 그래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소득을 얻기 위해 노동해서 얻은 6년 동안 드리게 되어 있었고 안식년에는 쉬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6년 동안 십일조를 구분해서 드리게 되는데 모든 십일조를 구분할 때는 가장 먼저 구분해야 할 부분이 2퍼센트의 ‘테루마’라는 것이 있다. ‘테루마’란 쉽게 이야기하자면 성전의 상근직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을 위해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100만원을 소득으로 얻었다면 십일조를 계산할 때 맨 먼저 테루마 2퍼센트를 떼어내야 한다. 그러면 2만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남은 98만원에서 비로소 ‘마아세르’라고 말하는 본격적인 십일조를 뗀다. 그러면 9만8000원이 된다. 이 9만 8000원의 십일조를 구분하는 이유가 매해 다른데, 십일조를 내는 여섯 해의 기간 중 첫 번째, 두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의 마아세르, 즉 9만 8000원들은 자기 성읍 주변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여섯 번째 해의 마아세르는 자기 소득을 발생시킬 수 없는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위하여 드렸다. 결국 한 사람이 한 해에 구분해야할 십일조는 매해 11만 8000원이 되며 그 안에는 성전의 상근직과 각 성읍 주변에 함께 살고 있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위해 주는 것 그리고 가난한 자 고아 과부들에게 주는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2. 십일조의 사용처

기본적으로 자기 소득을 발생시키는 것에서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던 십일조는 이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힘으로 소득을 발생시킬 수 없는 자’들이 함께 살 수 있도록 하는데 쓰였다. 그런 사람들로는 첫째 레위인, 제사장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먹고 살 것 즉 소득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를 하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께서 먹이신다고 말씀하셨다. 둘째는 가난한 자, 고아, 과부들이었다. 이들 역시 자기 힘으로 생계를 위해 소득을 발생시킬 밭도 없었고 이들을 돌봐줄 사람들도 없었기 때문에 주변의 이웃들이 돕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위해 십일조를 집행하게 되는데 집행하는 방법은 개인이 스스로 매해의 적용 대상에게 자의적으로 주는 것이었다.


3. 십일조를 구분해내는 방법

 

     
  ▲ 십일조.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해석하고 시행하는 것을 통해 본다면 십일조를 구분해 내는 방법은 소득을 얻는 그 순간에 맨 먼저 하나님의 것부터 구분해 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만약 십일조를 먼저 구분하지 않고 자기의 소득을 사용하다가 나중에서야 십일조를 구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면에서 맞지 않았고 또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이 섞일 수가 있기 때문에 소득이 발생하는 즉시 먼저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는 것을 권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소득의 십일조를 구분해 내는 것은 남자들의 몫이 아니라 보통 집안의 아내들의 몫이었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의 것’으로써 십일조를 먼저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들에게 소득으로 먹을 것을 만들어 먹이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행위로 인식되었고 아내가 십일조를 구분하지 않음으로 남편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먹었는데 나중에 알았다면 그것은 이혼의 조건이 될 정도였다.


4. 제사장들은 십일조를 낼까?

 

십일조를 받은 제사장들도 다시 십일조를 드려야 했다. 가끔 질문들 가운데 ‘십일조를 각 개인들이 아무 제사장들에게나 자의적으로 줄 수 있었다면 많이 받는 제사장이 있을 수도 있고 적게 받는 제사장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아닙니까?’라고 묻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 제사장들 가운데는 많이 받는 제사장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제사장들은 누구도 가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에게 올라온 십일조는 다시 거기서 십일조를 떼어서 같은 동료 제사장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제사장들은 자신의 십일조를 주위의 가난한 동료 제사장들에게 줌으로써 제사장들에게 올라온 십일조는 계속 제사장들 사이에서 맴돌게 되고 결과적으로 모든 제사장들은 그 수입에 있어서 균등하게 된다. 그래서 어느 제사장도 십일조를 통해 부유하거나 가난하게 되지 않고 모두 균등하게 될 수 있었다.

 

온전한 십일조는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동시에 자기 소득을 발생시킬 수 없는 사람들의 양식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간혹 이런 질문도 듣게 된다. “그렇다면 십일조의 배경을 오늘날 교회에 적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적용이란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있을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원리들을 잘 기억해 본다면 오늘날 십일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또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장재일 목사(이스라엘 밥 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