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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에서의 “조직신학”논의 회고와 전망II(2)

하나님아들 2024. 5. 7. 13:51
총신에서의 “조직신학”논의 회고와 전망II(2)
 
글/ 김광열(총신대 조직신학)
 
 
 
 

2. 성경적 동력을 제공하는 조직신학 연구방법

일반적으로 성경신학은 조직신학 논의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성경신학이 원자재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조직신학은 그 원자재를 가지고 작업하여, 건물을 세우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신학의 방법론을 논하게될 때, 성경신학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물론 여기에서 성경신학의 의미는 신정통신학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운동을 가리켰던 ‘성경신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혹은 그 이전에-정확히 말하면- 18세기 후반부에 독일의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의 배경 속에서, 성경의 영감과 정경적 단일성을 거부했던 ‘성경신학’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성경신학이란 프린스톤의 성경신학 교수였던 Geerhardus Vos가 그의 책에서 제시했고, 또 그를 이어 웨스트민스터에서 가르쳤던 J.Murray, Meredith G. Kline, 그리고 Richard B. Gaffin, Jr.등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온 학문의 분야로서의 개혁신학적 성경신학이다.

이 전통 안에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사이의 구별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Charles Hodge에게서 발견되는데, 그는 성경신학이란 성경의 사실들을 찾아 진술하는 것이나, 조직신학이란 그 사실들을 가지고 다른 관련된 진리들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조화와 일관성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핫지가 성경신학을 단순한 석의(exegesis) 정도의 학문으로 제시했던 방식을 넘어서서, 워필드는 성경신학이란 주경학의 잘익은 열매이며, 조직신학의 기초와 원천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 성경신학에 대해 체계적인 학문전개와 발전을 이룩한 이들로는 역시 Geerhardus Vos, 그리고 그를 계승한 John Murray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성경신학’이란 용어를 싫어하여, “특별계시의 역사”(History of Special Revelation)라는 표현을 선호했는데, 어쨋든 성경신학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란 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한 면에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관계란 결국 계시역사와 조직신학과의 관계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전자는 역사적인 접근방식이나, 후자는 논리적인 접근방식을 지니는 것이다. 또한 전자는 계시를 발전과정의 관점에서, 후자는 완료된 것으로서 간주하고 연구하게 되는데, Vos는 이를 직선을 그리는 것과 원을 그리는 것에 비유했다. 또한 그 두 분야를 구별하는 또 다른 요소로는, 후자는 -전자와는 달리- 일반계시도 포함하여, 종합적인 진술을 이끌어내려 한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그 두 분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우선, 양자 모두가 다같은 성경의 자료들을 취급하는 학문의 분야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나,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는 그 양자의 분야들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있다고 보게되는 이유를 지적해볼 수 있다. 그것은, 조직신학의 임무가 성경의 교훈들을 상호 결합하여, 적절한 주제들로 종합하는 것이라고 할 때, 성경의 일정한 개개의 단락들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돕는 주경학은 그 임무를 위하여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며, 그 단락들 속에 함축된 의미들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주경신학은 매우 유익한 학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J. Murray는 조직신학이 주경적 열매들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생명력을 잃고 그 본연의 임무를 감당치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판에 박힌 교의학 논의를 벗어나는 것은, 그것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끌어낸 성경신학적 열매들을 통하여 더욱 더 심화되고, 풍부해지며, 확장될 수 있음으로서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살아있고 능력이 있는 말씀이므로, 성경신학적 열매들은 그 살아있는 말씀의 동력들을 조직신학에 공급해주는 일을 하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그것이 올바르게 형성된 개혁신학적 성경신학의 열매들에 얼마나 뿌리내리고 있느냐에 따라, 그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신학적 논의들의 열매들은 성경적 동력을 조직신학에 상당히 제공해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Vos나 Murray의 신학작업들을 통해서 입증되어왔다. G. Vos의 경우, 그가 그의 구속역사적 연구를 통하여 얻어낸 성경신학적 통찰력이 있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종말론 개념을 예수님의 초림에서부터 시작하는, 즉 교회의 현재의 상태를 포함하는 종말개념으로 보게해준 일이다. Vos의 이러한 새로운 성경신학적 통찰력은 종말론에서 뿐만 아니라, 기독론 그리고 구원론과 같은 논의들 속에서 또한 성경적 시각의 새로운 회복을 기대할 수 있게 하였다. 즉 구원론의 경우도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열매들이 풍성히 진행되고 있는 측면들에 대한 바른 이해들이 주어지게 되었고,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풍성한 이해를 가능케해 주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J. Murray의 경우, 그의 성경신학적 논의의 열매들을 통한 조직신학적 공헌들 중의 하나를 “결정적 성화교리”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교리는 로마서 6장, 벧전 2장, 4장, 그리고 요일 3장, 5장 등과 같은 성경본문에 대한 주경적 연구의 열매들을 통하여 확립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의 결정적 성화론이 여러 가지의 중요한 신학적 의의들을 지니고 있으나, 특히 본고의 논의와 연관하여 볼 때, 전통적인 성화론 논의의 중심을 이루고있는 점진적 성화개념의 보완적 교리를 제시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는 Vos에 의해서 출발되어진 관점인,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풍성한 삶의 기초를 분명히 제시해주었다는 점이다.

신자의 신앙생활이 단지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의 연속적 과정으로만 이해될 수 없으며, 아담의 타락 이후에 죄의 세력 아래에서 고통하며 좌절하고, 그래서 내세에 주어질 그 나라만을 바라보는 신앙에 머물러있기만 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성화론인 것이다. 오히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안으로 들어온 것이며, 그 분 안에서 시작된 새창조(고후 5:17)의 새로운 구조 안에서 제공된 성화를 소유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Murray의 결정적 성화론은 1)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전 우주적인 변동이 발생했음을, 즉 우주적인 죄의 세력이 패배되었음을 명확히 인식케 해주며, 2) 따라서, 아담 안에서 그의 범죄로 인하여 인류에 임했던 죄의 통치가 무너졌음을 밝혀주는 가르침이 되며, 죄와의 싸움 속에서 패배와 좌절을 겪는 신자들에게 성경적 동력을 제공해주는 성화론이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신학적인 통찰들을 통하여, 조직신학 연구에 던져주었던 새로운 빛들은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내용들을 더욱 말씀의 동력에 가깝게 이끌어주고 있으며, 생명력있는 조직신학의 전개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주고 있다. 물론 20세기 초에 신학수업을 한 박형룡박사에게서 이러한 최근의 개혁신학 안에서의 신학논의들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의 교의신학의 내용들은 성경의 구절들을 꾸준히 인용하면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성경중심적 신학원리를 확립한 매우 귀하고 값진 신학작업이었으며, 특히 성경의 권위를 거부하는 당시의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에 대항하여, 성경을 신앙과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신학연구에 있어서도 궁극적인 준거점(final reference point)으로 삼는 개혁주의 성경관에 일치되는 신학접근법이었다는 점에서 총신의 조직신학 연구의 귀한 전통을 확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성경신학의 역사적 통찰들이 충분히 고려되지 못할 때, 조직신학은 그 본연의 임무를 실패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지적될 필요 가 있는 것은, -Murray가 지적했듯이-, 계시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성경신학적 관점은 조직신학의 잠재적 위험성인 “추상화의 경향”을 극복케해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Murray의 지적을 달리 표현한다면, -Gaffin의 설명과 같이- 바로 비역사화(de-historicize)의 경향이며, 비시간적(timeless) 진술로 전락되게하는 경향이다. 따라서, 그것은 성경의 역사적, 언약적 동력(dynamic)을 약화시키는 신학진술로 떨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성경이 교리학의 핸드북이 아니라 극적인 흥미로 가득찬 역사책이라는 Vos의 통찰력을 놓치게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가 중요시하는 조직신학 연구를 위한 성경신학적 통찰력에 대한 강조가, 성경신학이 조직신학의 틀을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그 임무가 수행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둘 사이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라고 해야한다. 성경신학적인 연구들은 조직신학의 포괄적인 틀과 주제별 논의의 틀과 관련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Gaffin교수는 현재 영어권 안에서의 복음주의 성경학자들 가운데는, 그러한 조직신학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불확실하거나 혹은 조심성없는 태도로 말미암아 목회자들과 교회 안에 신학적 혼동과 교리적 무질서를 초래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한국교회 안에서도 배제되기 어려운 분석이라고 사료된다.

따라서, 21세기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박형룡신학의 성경중심적 접근방법, 즉 성경을 신자의 삶과 신앙에 있어서만 아니라, 신학적 진술의 최종적 근거와 기준으로 삼는 개혁신학적 전통을 계승하여 나가되, Vos, Murray, 그리고 Gaffin으로 이어져오는 성경신학적 조망들을 적용함에 있어서, 미흡했던 부분들을 보완해야할 것이다. 그리하여,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이 갈등 관계 속에서 부정적인 소모전만을 하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게 훌륭한 동반자적 봉사를 충실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우리는 21세기 총신 안에서 개혁신학의 보배로운 유산들의 성숙한 요소들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고, 개혁신앙의 풍성한 삶의 기초들을 제공해줄 수 있는 조직신학의 틀과 내용들을 확립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