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에서의 “조직신학”논의 회고와 전망II(4) |
글/ 김광열(총신대 조직신학) |
2. “복음의 현재적 의의”가 균형있게 제시되는 신학으로 앞에서 우리는 박형룡박사의 역사적 전천년설의 입장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같은 차원에서 ‘이미 시작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간과하는 입장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도 세대주의자들의 ‘왕국연기론’에 대해 비판했으며, 신자들은 이미 임재한 천국에서 살고 있으며, 영생이 원칙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점들을 언급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세론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발생할 마지막 일들에만 치중한 타계주의”라는 평가를 받게되는 것은, 이미 지적하였듯이, 그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말하고 세대주의적 왕국연기론을 비판하고 있으나, 재림 이후에 주어질 영원한 내세의 사건들에 더 흥미를 갖고서, 그 곳에 초점을 맞추려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부인했던 것은 아니나, 내세의 영광의 나라에 더욱 관심하고 그것을 강조하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만일 이러한 평가가 정당하다면,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이 한국 보수 교회 성도들의 삶 속에서, 오늘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약화시키며 내세지향적 신앙 태도로 살아가도록 만든 원인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면, 이는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교회가 복음의 현재적 의의를 강조하는 신학에로 나아가야함을 요청하게되는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구원은 그 완전한 성취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온전히 주어질 것이지만, 원리적으로 그것은 이미 신자들의 삶 속에서 시작된 것이며, 그 나라의 능력들은 이미 이 땅에서부터 역사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관점들이 강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의 현재적 의의에 대한 강조’의 필요성은, 21세기의 교회에 대한 전망과 분석을 통하여 더욱 드러나게 된다. H. A. Snyder는『21세기 교회의 전망』이라는 책 속에서 21세기의 교회의 주요 동향들을 제시하면서, 제1장에서는 현재의 교회의 무게중심이 북부와 서부(유럽과 북미)에서 제3세계로 이동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교회는 바로 그러한 무게중심의 이동으로 인하여 남겨진 지역과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 편에 서야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앞으로의 교회는 고통을 아는 교회, 종으로서의 교회, 가난과 억압과 고통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역이 행해지는 교회의 모습으로 나아가야할 것임을 제안한다. 또한 제9장에서는 앞으로의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행동주의’로 나아가게 될 것을 전망했다. 물론 Snyder가 제시하는 것은 그것은 극단적인 정치신학이나 해방신학의 정치참여 차원은 아니다. 오히려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어떠한 동기에서든지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그 결과로 보수적인 도덕 가치관이 다소간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는 전망을 하고 있다. 이러한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참여의 증가 성향은 앞으로 21세기 교회의 모습들 중의 하나가 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책의 분석이 완전히 정확할 수도 없을 것이며, 또한 그것은 대체적으로 북 아메리카의 상황이라는 한계성을 지닐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21세기 교회에 대한 전망은 이미 지난세기 말부터 지적되어온 한국교회 성장정체 현상에 대한 분석내용들과 맞물려서 그 방향성을 더욱 분명하게 제시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 동안, 한국교회 성장 둔화의 원인 중의 하나는 기독교 신앙의 대사회적 의의를 상실해왔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반복적으로 제출되어 왔다. 한국사회 속에서 7,80년대에 한국의 진보적 교회들이 천국복음을 간과한 사회복음의 극단을 추구했고, 반면에 보수적 교회들은 사회,정치적 측면에서의 복음의 의의를 간과한 극단을 추구했었다면, 이제 보수적인 교회들 속에서도 균형있는 총체적 복음전파의 의의를 깨닫고 -적어도- 사회봉사적 차원의 사역들에 있어서 박차를 가하는 경향이 두드러져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21세기의 한국교회를 위한 총신의 조직신학의 방향성에 대해 지적해야할 두 번째 주제는, 위에서 언급했던 신학방법론적 논의의 두번째 내용인 “ii) 성경적 동력을 제공하는 조직신학 연구방법”에서 언급되었던 내용과 연결하여 논의될 수 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성경신학의 열매들이 바르게 적용되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동력을 공급해주는 조직신학에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작업들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었는데, 바로 그러한 작업들의 열매들 중의 하나로서, “복음의 현재적 의의”를 균형있게 제시하는 신학이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는 성경신학적 연구의 통찰력을 통하여 주어진 열매들 가운데 하나가 Vos가 제시했던 “새로운 종말개념”이었음은 이미 지적한 바있다. 그 가르침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신약의 성도들이 앞으로 주의 재림 때에 들어갈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에만 관심하지 않고, 오늘 여기에서의 현재적 교회의 삶 속에서도 의미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 이미 공급되기 시작한 그 나라의 능력들을 부여받은 신자로서, 오늘의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하는 “복음의 현재적 의의”를 제공해주는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의의에 대한 강조의 필요성은, 박형룡박사의 내세론에 대한 논의에서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칼빈주의 인간론 논의에서도 지적될 수 있다. 예를들면, 전통적인 칼빈주의 인간이해는 부정적인 혹은 패배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게된다고 지적받기도 하는데, 그 이유들 중의 하나는 칼빈주의의 전통적인 교리인 전적부패나 전적 무능력의 가르침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인간론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조망할 때, 균형있는 인간이해가 제공될 수 있다. 구속역사적인 관점에서 성경적 인간이해는 일반적으로 3단계로 나뉘어 설명될 수 있는데, 그것들은 타락 이전의 인류, 타락 이후의 인류,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 안에서 회복된 인류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조직신학에서의 논의의 구조란, 앞 부분의 2단계에 집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loci전개 방식이 그 구조상, 기독론과 구원론이 제시되기 전에 인간론 논의가 끝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구조 속에서 인간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역사의 직접적인 영향이나 결과들과는 분리된 채 설명되고 있으며, 결국 복음의 역사를 경험한 이후에도 그러한 죄로 인해 부패한, 부정적 인간이해가 신자의 사고 속에 자리잡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은혜언약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구속된 인류의 삶을 전망해볼 수는 있으나,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풍성한 영적 삶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결여되고 마는 것이다. 기존의 loci 전개방식은 이미 시작하고 있는 그 나라 백성의 부활생명의 풍성한 삶의 능력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제시되기 어려운 구조를 갖고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의 교리는 칼빈주의의 핵심적인 가르침들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우리가 변경할 수 없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불가능성에 대한 강조는 동시에, 구속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그러한 비관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부활의 새생명 가운데서 살아가는 복음적 소망을 지닌 인간에 대한 강조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타락한 인류의 절망적인 모습에 대한 강조를 잃어버리지 않은 채, 그와 동시에 구속사의 새로운 국면,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도래한 새로운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새 인류의 회복된 모습도 분명히 그려주어야 한다. 성경의 결론은 죄 중에 빠져있는 인류를 제시하는 단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통치 안에서 살아가는 인류를 제시하려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의 논지는 3:20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4장을 거쳐 5장-8장에 까지 이르는 ‘새롭게 재창조된 인류의 풍성한 삶’의 모습에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복음의 영적 축복들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가서야 주어질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풍성한 삶의 출발은 오늘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밝혀주는, 복음의 현재적 의의를 제시하는 신학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Murray의 결정적 성화교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성화관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인류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미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에게 허락된 그러한 복음의 풍성한 삶의 원천과 근거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복음의 현재적 의의를 밝혀주는 가르침이 되고 있다. 신자의 삶이란 죄의 세력 아래 붙들린 채,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보장없는 싸움판에 던져진 생이 아니라, 확실한 승리의 소식을 들은 후에, 새로이 공급받은 강력한 화력을 지닌 무기 가지고 죄의 잔병들을 처리해나가는 과정임을 밝혀주는 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 확실한 승리의 소식이란 단지 주의 재림에서만 누릴 수 있는 소식이 아니며, 오늘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 확인되는 실체이며, 그 무기의 강력한 화력이란 칭의의 법적 관계 상에서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성화의 삶 속에서도 의미있는 변화를 가져온 화력임을 밝혀주기 때문인 것이다. Murray는 로마서 6장, 베드로전서 2장, 4장 등의 본문에 대한 주경적 연구를 통하여, 신자가 “죄에 대하여 죽은 죽음”이란 우주적인 죄의 세력의 붕괴를 의미하며, 그러한 사건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그와 연합한 성도들을 죄의 통치와 권세에서 의의 통치와 권세 아래로 옮겨준 사건이 되었음을 밝혀주었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총은 그의 재림 때에 완성될 축복이기도 하나,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들의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능력으로 이미 역사하고 있는 축복임을 제시함으로서, 복음의 현재적 의의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현재적 의의에 대한 강조의 필요성은, 박형룡박사가 신근본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고있다는 점을그가 총신과 한국교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에 비추어 고려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20세기 초엽에 미국의 개신교 교회사에서 발생되었던 자유주의자와 근본주의자 논쟁의 문맥에서 이해되었던 ‘근본주의’와는 달리, Harvie Conn교수가 말하는 신근본주의(Neofumdamentalism)적인 성향이 박형룡박사의 신학적 논쟁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했던 그의 본래적 의도는 그 당시의 문맥 속에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칼 바르트의 신학을 신정통이라고 한다면, 복음주의 안에서 NAE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신학운동은 신자유주의라고 봐야 한다는 그의 판단에서부터 야기된 결과였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한평생 지켜왔던 그에게는, 영감과 무오를 구별하며 무오교리를 변질시키는 폭넓은 성경관을 제시하는 그들의 신학사상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신복음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성경관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했던 Fuller Seminary의 신학이 점차적으로 신정통주의적 성경관의 방향으로 떨어지게 된 것도 역사가 주는 교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신복음주의자들에 대해 박형룡박사가 파악했던 위와 같은 부정적인 시각은, 그들이 원래 (신)근본주의를 염려하면서 시도해왔던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까지도 부정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신근본주의가 과학을 무시하고 반문화적이며 반사회적, 반지성적인 태도를 지닌 것에 대하여 신복음주의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며, 문화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것을, 박형룡박사는 WCC 내지는 사회복음주의라는 관점에서만 평가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의 이러한 입장은 그의 내세론적 신학입장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도 내세의 영광의 나라를 더 중시하기를 원했던, 그의 내세론적 신학은 문화와 사회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던 신복음주의자들을 거부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총신의 어제를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박형룡박사의 이러한 신학성향을 고려해볼 때, 우리는 이제 21세기를 바라보는 총신과 한국교회 안에서 ‘복음의 현재적 의의와 중요성’을 밝혀주는 신학적 관점이 균형있게 제시되어야할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복음의 현재적 의의를 강조한다는 것은, 해방신학이나 W.C.C.와 같은 정치신학에서 말하는 복음의 사회화, 정치화를 정당화한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적 복음의 본질을 간과한 채, 단순히 사회복음만을 말하는 정치신학적 극단은 여전히 주의해야할 대상임에 틀림없다. 즉, 여기에서 우리가 지향하려는 바는,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인간의 노력과 제도의 개선으로 지상에 인간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세속주의적 낙관주의 역사관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사회적 참여가 반드시 정비례적으로 교회의 성장을 불러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총신의 신학은 언제나 주님의 재림으로만 이 땅에 진정한 평화의 나라가 온전히 성취됨을 바라보며, 소망하는 신학이었으며, 또 그것이 성경적인 견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주님의 복음은 그의 재림에 가서야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제한성을 지니고있지 않다는 점이 동시에 제시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것은 의미있는 능력이며,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킨 복음이며, 이 땅에서부터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삶을 가능케해준 능력인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는 여전히 죄의 영향력이 드리워져 있을지라도, 복음의 능력은 오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을 통해서, 교회와 사회 속에 드리워진 죄의 잔영들을 걷어낼 수 있게하는 총체적 능력이며, 따라서 의의 통치가 새로운 주권자로 도래하였음을 확인케하는 능력인 것이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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