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천국상급”에 대한 연구 류재룡

하나님아들 2024. 4. 28. 19:57

 천국상급”에 대한 연구  류재룡

I. 서론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혼동하는 것 중 하나는 구원과 상급을 같이 보는 것이다. 신자들이 은혜로 구원을 얻었는데 또 무슨 상급이 주어진다는 말이냐? 상급을 주장하다 보면 자기 행위에 대한 자기 의를 과시하게 되고 이는 곧 바리새인처럼 율법주의가 되고 로마 카톨릭의 공로 사상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중세 로마 카톨릭의 타락을 목격한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공로 사상을 강하게 배격하였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개신교에서 특히 개혁주의 일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개인의 행위에 주어지는 보상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공로 사상을 배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신자의 선행에 주어지는 상급을 분명히 제시한 성경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또 다른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 또 상급을 강조하다 보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고, 상급은 자기 행위에 대한 공로로 받는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잘못된 사상이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다. 상급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인간의 행위에 수반되어 주시는 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핍박과 환난 중에도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현실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상급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보상인 동시에 인간이 상받을 공로가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상급문제는 성경 전반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에 대한 바른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이 양자의 관계는 신약 시대 이래로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논쟁 되어온 해묵은 문제이다.1)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의 책임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선택권을 부여하여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매우 제한적이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역할 분담하여 50:50 또는 90:10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려 한다.2)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동시에 인간도 전적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도 일하시며 인간도 일한다고 가르친다. 즉 100% 하나님의 주권이요, 100% 인간의 책임이라고 해야 정확한 이해라 할 수 있다.3)

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는 상급 문제(賞給問題)에 있어서도 분명한 입장 차이를 보여 준다. 상급의 은혜성과 인간의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의 상호 모순되는 듯한 성경의 상급 교리를 바로 이해하는데 본 논문의 목적이 있다. 이렇게 함으로 상급교리에 대한 양 극단의 공로 사상과 상급 무시 사상을 배격하고 상급 교리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바르게 영위해 갈 수 있다.

천국 상급을 연구하기 위해 먼저 상급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강조점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상급 교훈은 유대주의나 로마 카톨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그 바탕을 두고 있음을 제시할 것이다.

다음에 이러한 성경의 상급 교훈을 유대주의자와 로마 카톨릭은 어떻게 왜곡시켰으며 종교 개혁자들은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가 그리고 상급에 대한 최근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는 어떠한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다음에 천국 상급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 그 다양한 내용들을 상급과 신자의 선행과의 관계, 상급의 은혜성, 상급의 동기와 목적, 천국상급의 등급과 그 내용이라는 제목으로 차례로 고찰해 볼 것이다.

이 연구를 위해 신, 구약 성경을 최고의 참고서로 채택하여 개혁주의적 성경 해석의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할 것이다. 또한 상급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을 문헌적 고찰을 통하여 밝히게 될 것이다.


II. 상급에 대한 성경적 개념
1. 구원과 상급의 구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지 못하고 상급에 대한 이해를 바로 하지 못하고 공로사상에 빠지거나 상급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구원과 상급을 성경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에 대하여 성경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지 인간의 행위는 털끝만큼도 상관이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았지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받은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구원은 영원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든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신자는 죄로 말미암은 영원한 형벌의 심판을 이제 받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감당하셨기 때문이다(벧전 2:22-2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행위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전 5:10).

우리의 행함에 대한 심판이 있고 그 결과에 따른 상급이 주어지는 것이다.''..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사람에게는 두 가지 심판이 있다. 하나는 정죄의 심판이고 다음은 상급의 심판이다. 첫 번째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셨으므로 우리가 앞으로 심판받지 않는다.  우리가 앞으로 받을 심판대는 행위 따라 상급을 주시는 상급 심판이다.''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1:12).

''이방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 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계 11:18).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소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장 41-42절). 하나님은 그 백성 각자에게 그들이 일한 대로 상을 주실 것이다(계 22: 12).

구원과 상급의 또 다른 구분은 구원은 기초에 해당되는 것이고 상급은 열매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3장10-15절에 보면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 둔 구원이다. 금, 은, 보석으로 집을 지은 자가 있고 나무나 풀, 짚으로 집을 짓는 자가 있다. 그 집을 지은 행위에 대한 심판은 불로서 한다고 하였다. 불이나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불타고 없어지면 해를 받는데 이런 사람은 ''구원은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집짓는 재료를 가리켜 공력이라고 하였다.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력 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고전 3:13一15).

여기서 공력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구원은 얻지만 믿음의 행위가 없으면 상급을 얻지 못하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위하여 달음질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위하여 달음질하고 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을 얻는 자는 하나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우리 성도는 구원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상급을 위하여 맡은 일에 충성을 하여야 한다.

이제 성경에 나타난 상급을 연구하기 위해 상급에 대한 성경적 용어를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성경의 상급 사상을 고찰하도록 한다.

2. 구약에 나타난 상급
1) 구약의 상급용어
(1) 사칼(ר󰗇󰙴)
이 단어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며 주로 삯(hire), 임금(wages), 보상(rewards)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4) 그 용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5)
상급 - 창 15:1; 대하 15:7;  127:3; 사 40:10; 62:11.
품삯 - 창 30:28 신 15:18; 24:15; 왕상 5:6; 말 3:5.
삯 一 창 31:8; 출 2:9; 슥 8:10.
갚음 - 렘 31:16.
값 一 창 30:18
배상 - 출 22: 14.
보수 一 민 18: 31; 겔 29:18.

그리고 자칼의 파생어로 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명사가 사용되고 있다.6)

세켈 (ר󰗋󰙸 ) 一 사 19:10 ; 잠 11:18.선지자 이사이는 ''삯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 이란 문구를 사용하였고 잠언 기자는 악인의 보상은 불확실한 것인데 반하여 의를 뿌리는 자들의 삯은 확실하다고 말하였다.

(2) 게물(לוּמ󰔻)
이 명사는 구약에서 18회 나오며 보수, 보답, 은혜, 대우를 의미할 때 사용되었다. 그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7)

하나님이 주시는 보응 - 사 3:11; 35:4; 59:18 66:6; 렘 51:60; 애 3:64; 애 3:64; 욜 3:9
인간이 갚는 복수 - 욜 3:4; 시 137:8.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 시 103:2; 대하 32:25.
사람이 행한 행위 - 삿 9:16; 잠 12:14; 사 3:11.

시편 기자는 악인에게 마땅히 받을 것을 응보 하시라고(시 28:4; 94:2) 보복의 하나님을 부른다(렘 51:56; 비교 신 28장).

'게물'의 파생어로 '타그물' (לוּמ󰔾󰚜)이 있다.8) 이는 은혜로 번역된다. 시편 기자는 병에서 회복되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복되고 그 은혜에 무엇을 보답할꼬. 물은 후 자기를 바치고 제물로 드리며 서원을 갚겠다고 대답하였다( 시 116:12).

(3) 슈브(בוּשׁ)
이 단어는 원인(cause)에 대한 결과 (return)를 나타낼 때 사용되며 삼상 26:23과 삼하 16:18에 나온다.9)

2) 구약의 상급 사상
지금까지 살펴본 구약의 상급을 나타내는 명사들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에 보면 '슈브'를 빼고 나머지는 다 '미스도스'(μισθό󰐠)로 번역되었고 '슈브'만 '아포디도미'(αποδιδὠμι)로 번역되었다. 위의 구약 명사들은 K.J.V.에서는 주로 'reward'로 번역되었으나 R.S.V. 나 N.I.V. 에서는 'reward' 외에 문장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이상의 구약 명사들을 통해서 구약의 상급 개념을 살펴볼 때 주로 일한 것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는 보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급 개념은 인간의 보상 개념과 다르다. 하나님의 상급은 인간이 수고한 가치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선물의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언약을 세우시고 이 언약을 근거로 상급을 주시며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10)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 아브라함의 상급(賞給)이 되어주시겠다고 하셨다(창 15:1). 이것은 아브라함의 행위로 상급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나타내 주는 말씀이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순종에 대해서는 축복으로 불순종에 대해서는 저주의 형식으로 상급 개념이 나타나 있다(신 28장).11) 이러한 상벌 사상은 사사기에서 역대기까지의 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셔서 불순종하였으나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다시 축복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다. 이러한 사상은 선지서에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12) 범죄한 백성들에게 심판의 경고를 하셨으나 회개하는 남은 백성들에게는 축복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지혜서에서도 축복과 저주가 순종 또는 불순종과 관련하여 나타난다(시편 1편, 잠언 3장). 한편 선지 서에서는 축복과 저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집합적으로 이해되던 것과 구별하여 개별적인 상급 개념을 강조한 부분이 나타나 있다(겔 18:2,20,21).13)

욥기에도 상급이 단순히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갚으심이 아니라는 것이 나타난다. 욥이 자신은 범죄치 않았는데도 불행이 닥쳤다고 불평하였을 때 엘리후는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욥 35:7)고 대답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로움에 대해 상 주시는 것은 순전히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 여기에 인간의 공로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해 준다. 하나님께서 상을 보류하신다 하더라도 그 분을 불의 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다고 상급을 요구할 수 없는 것은 온 세계가 다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욥 4:11).14)

이렇게 볼 때 구약 전체에 상급 신앙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구약에 나타난 언약이나 심판, 율법, 약속들(이 약속들은 ''만일 '''하면'' 과 같은 조건절로서 동기를 유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은 상급 구조를 떠나서 논의 할 수 없다.

구약의 상급 개념을 살펴볼 때,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상을 잃지 아니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단순히 행위에 대한 대가의 개념을 넘어 하나님의 은혜로 상급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공로를 추호도 내세울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상급에 대한 자기 공로사상이나 상급 경시 사상이 분명히 배격되어짐을 알 수 있다.

3. 신약에 나타난 상급
1) 신약의 상급용어
신약에서는 상급과 관련하여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용어가 나타나 있다.

(1)미스도스(μισθό󰐠)
이 단어는 구약의 '사칼'을 70인 역에서 번역한 것으로 급여, 임금, 보상, 품삯을 의미한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마태복음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며(10회), 마가복음에서 한 번, 누가복음에서 3번, 바울서신에서 5번, 요한의 글에서 두 번 나타난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는 복합어로 세 번 나타난다.15)

미스도스는 하나님 나라와 관계된 예수님의 설교에서 자주 등장한다(마 6:1; 19:21; 막 10:21; 눅 18:22). 예수님은 이러한 설교들과 천국 비유에서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까지도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강조하시면서도(마 10:42; 막 9:41) 아무도 자기의 수고한 상급을 요구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이는 상급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마 20:1-16; 25:24; 눅 17:10; 19:17,19).16) 바울서신에서도 상급에 대한 극단적인 생각을 배격하고 올바른 상급관을 제시하고 있다.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셨고(롬 2:6; 고후 5:10),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이 받는 상(고전 9:24;  빌 3:14)을 말씀하시고 공력이 있으면 상을 받는다(고전 3:14)고 말씀하셨으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상줄 의무가 없고 단지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4:4; 6:23; 고전 9:16,17).17)

히브리서에서는 상급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상급을 향한 소망을 가지도록 격려하고 있다(히 10:2,35; 11:6).18)

(2)아포디도미(αποδιδὠμι)
이 말은 넘겨주다(give away), 포기하다(give up),돌려주다(give back)의 의미가 있으며 주로 원인에 대한 결과를 설명해주는 단어이다. 구약에서는 씨 뿌린 이후 추수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행함에 따라 상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슈브동사, 삼상 26:23; 삼하 16:8).

신약에서 신학적으로 아포디도미는 최종 심판에서 갚아주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비교 막 8:38; 눅 9:26). 이는 마 25:31-46 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상을 주신다는 것이다(마 25:40).

또한 아포디도미는 인간이 자기 행위에 대한 최종적 책임을 져야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롬 2:6; 고전 3:13; 고후 5:10). 따라서 각 사람은 최종심판에서 자기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다(마 16:27; 롬 2:6; 딤후 4:14; 계 20:11一15; 22:12).19) 대부분 이 말은 미래형으로 사용되어 미래에 있을 일의 가능성을 보인다. 그러나 이 상은 자기 행위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 이 주권적으로 상급을 주시는 것이다(마20:1-12; 골 3:24).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롬12:17; 살전 5:15; 벧전 3:9).20)

2) 신약의 상급사상
상급을 나타내는 단어에 일한 자에 대한 품삯의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나 이 말은 인간 대 인간의 사회질서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그 대가를 지불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5:12; 10:41; 막 9:41; 눅 6:35). 여기서 이 말은 하나님의 축복과 관련을 가지며 운행에 따르는 한 몫을 뜻하는 것이다. 보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서 물질적, 비물질적인 것을 초월하여 의인에게 심판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복이 있으니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 5:12). 예수님은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다가올 심판을 결정적으로 구분하셨다. 그러나 이 보상도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인의 주권과 은혜에 의한 것임을 볼 수 있다. 한 시간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 동일한 품삯을 받은 것이다. 상은 품꾼의 일한 결과와 독립적으로 주어진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달려있는 것이다. 따라서 충성한 일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눅 17:10)라고 대답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수고에 대해서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상을 주신다.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눅 10:42)고 주님 이 말씀하셨다. 상급은 하나님의 나라에 부차적인 것으로 말씀하심으로 유대인의 상급개념을 깨뜨리셨다.

사도바울도 행위에 대한 상급개념에 관심을 기울였다(롬 2:6; 고전 5:10). 바울은 상급을 경기장에서 승리하는 것과(고전 9:24; 빌 3:14) 지혜로운 건축자에게 돌아가는 상(고전 3:14)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공로가 되지 않음은 바울이 말한 대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니라''(고전 9:16).

히브리서는 상급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서 10장 35절은 하나님의 상급을 가져다주는 약속의 축복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10:35).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 행위가 상급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이 상급인 것이다. 또 11장 6절에는 하나님을 설명할 때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자'로 소개하였다.

모세는 '상주심을 바라보는 자'라고 모세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다(히 11:26).

야고보서는 특히 상급을 강조하고 있다. 올바른 기도는 응답의 상급을 받고(약 1:5-8), 시험을 참는 자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며(1:1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다(2:26). 겸손한 자는 높아지는 상급을 받는다(4:10). 야고보는 행함의 믿음이 있어야 칭의의 믿음에 보완이 되어 진다고 강조하고 상급 사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계시록은 전체가 심판을 주제로 하는데 심판 자체가 상벌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행함에 대한 상벌을 강조하고 있으며 최후에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을 강조함으로(22:12), 상급 교훈으로 성경을 마감하고 있다.

성경은 또한 상급에 대한 종말론적 성격을 나타내주고 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도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심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요 4:36-38). (비교 레 26:5; 신 28:33; 삿 6:3; 시 126:5; 암 9:13; 미 6:15; 마 9:37 눅 10:1). 여기서 품삯을 받는 시기는 종말론적 시간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상급에 대한 용어들을 정리해 보면

1)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것과

2)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은 결코 자기 공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

3)상급은 최종적으로 최후의 심판에 관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II.  상급에 관한 역사적 이해
1. 유대교의 공로사상
유대교는 그 교리의 근거를 대부분 구약성경에서 찾았다. 이미 십계명에 보상의 약속이 있고 신명기에는 자주 율법의 실천 여하에 따라 상벌이 주어진다고 하였다. 바리새인들의 신학에서 제일 중추되는 개념은 하나님은 정의롭다는 것이다. 그가 정의롭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가리고 응분의 처분을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 관심있는 분야는 옳은 행위와 그른 행위의 구별이었다. 행위에는 그 행한 사람의 운명이 달려있기 때문이다.21)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보상은 보다 더 나은 상태를 바라보는 것으로 이는 구약과 신약의 보상 개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바리새인에게 특이한 것은 공로 사상이다. 그들이 말하는 자쿠트(zakuth)는 구약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를 영어로 번역하면 메리트(merit)가 된다. 즉 공로는 행위에 덧붙여져 사람이 전력을 다하여 의로운 행위를 힘써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 행하는 자에게 생겨지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행위로써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행한 것이 된다.

유대교에서 공로사상이 생기게 되는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다.

''계명을 수행하는 데는 큰 희생을 치루든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든지 한다. 그래서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한다. 이 계명 실행의 행위는 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합침으로 성립한다. 공로라는 것은 사람의 의지에 속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나는 계명을 실천하므로 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선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하였다.22)

이러한 공로의 이론은 사람에게 자기의 의를 내세울 위험 속에 있다. 사람의 눈은 행위에 대한 관심으로 어둡게 하여 자비로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사상은 유대 랍비들의 계명관 속에서도 발견된다. 유대 랍비들은 계명들을 문자적으로 또는 외부적으로 지키면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얻고 반면에 계명을 어기면 하나님 앞에서 빚을 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공로가 빚보다 많으면 의롭다고 간주된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이 자력으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수 있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주장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상업적 거래관계가 있고 인간은 스스로 의롭다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23)

율법의 표준은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 스스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하고(눅 18:13), 자신의 무가치성을 깨달아야 하며(눅17:7-10), 율법의 완성 자이신 메시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의 표준을 하나님의 수준에서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사람들이 지킬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2. 로마 카톨릭의 功勞 思想
로마 카톨릭의 공로 사상은 당위 공로(meritum de condigno)와 가당 공로(meritum de congruo)로 구분된다.24) 전자는 사람이 중생 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받아 행해진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상받을 만한 가치를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로를 말한다. 후자는 사람이 중생 전에 단순히 준비적 은혜의 효력으로 실현할 수 있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그 행위자의 마음에 은혜를 침입시킴으로 상주시기에 가당(可當)한 공로이다. 로마 카톨릭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선행할 수 있는 재능은 그리스도의 연고로 죄인의 마음에 침입된 은혜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후에는 그 선행이 공로 즉 구원과 영광의 정당한 청구권을 가진다는 견해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자들은 자기들의 구원에 필요한 것보다 많은 여분의 행위를 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의 이익에 보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로마 교회는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가진다는 공로 사상을 주장하며 이를 트렌트 회의에서 정식으로 채택하였다. 그들은 공로를 '다른 사람을 위한 업적'으로 말하였고 이로 인해 사람이 보상에 대한 청구권을 얻는다고 보았다. 즉 사람이 행위에 의해 공로를 얻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와 공로를 동일시하는 사상은 결국 하나님이 사람에게 빚을 지시는 결과가 된다.25)

이 교리는 “죄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할 수 있으며 율법의 요구 이상으로 행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 것으로 이는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지 인간의 행위가 결코 공로로 작용할 수 없다는 성경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상은 결코 일해서 얻는 계약상의 청구권이나 공로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3, 종교개혁자들의 상급관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의 공로 사상에 반대하여 일어난 것으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한 운동이었다.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을 가지고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공로 사상을 비판하였다.26) 그는 신앙을 가지면 반드시 그 열매로 선행을 수반하며 선행을 하였다고 자기 공로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신앙은 율법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며 자진해서 기쁨으로 실행하게 해 준다. 신앙은 선행들을 행하게 하고 자유롭게 해준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루터는 신앙을 강조하여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공로 사상을 바로 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한편으로 율법의 행위를 경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믿기만 해라. 그러면 네가 모든 것을 행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신앙은 반드시 선행을 유발한다고 주장하였다.27)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공로 사상을 비판하는 것은 좋았으나 신앙의 행위와 그에 따른 상급을 경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루터가 칭의의 교리를 강조한 데 비해 칼빈은 칭의의 교리와 동시에 성화의 교리를 강조하였다. 그는 칭의와 성화는 사실상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하나님은 의의 실행을 위해 자기의 은혜로 의인으로 간주하신 사람들을 실제로 갱신시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칭의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하였고 “당신이 성화의 참예 자가 아니면 당신은 그를 소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들이 없이 의롭게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통하여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것이 칭의와 마찬가지인 성화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28)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제3권 15장에서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공로 사상을 공박하면서 ''공로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잘못된 말이며 위험한 말''이라고 하였다. 그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사람이 자기의 선한 것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자기에게 있는 칭찬할 만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자비에서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의 행위에는 아무런 보상받을 가치가 없으며 명령받은 일을 다 행한 후에도 자기는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눅17:10).29)

그러나 칼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행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의 것이라 부르시고 그것에 대해서 상까지 주시겠다고 증거하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보상을 강조하였다.30)

칼빈은 강요 제3권 18장에서 보상의 의미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은 자기의 선행에 대한 공로를 주장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다. 다음 칼빈의 설명을 들어보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라고(마16:27)하는 말씀을 고찰하겠다. ''우리가 다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3: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롬2:10).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으리라”(잠 13:13).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눅 6:23),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하신대로 보응하시되”(롬 2:6), 그러므로 주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요 6:2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라는 말씀이 첨가됨으로 ‘일한다'는 말이 은혜와 반대되는 뜻이 아니라 노력한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신자들이 자신이 구원의 장본인이라든지 구원은 그들의 행위에서 유래한다든지 하는 결론이 나을 수가 없다.31)

칼빈은 이렇게 보상의 의미에 대해서 바로 설명한 후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아님을 바로 인식시키기 위해 보상을 종이 받는 삯이 아니라 자녀들이 받는 기업(엡 1:18)으로 설명하였다.32) 그는 ''주께서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만이 이 기업을 향유할 수 있으며(갈 4:30), 그렇게 되는 데는 양자로 삼으신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엡 1:5-6)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영원한 복락을 행위의 결과로 돌리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 데 돌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이전에(창 22:3) 먼저 그의 자손으로 인해서 모든 백성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창 15:5; 17:1 이하,18:18 참조). 아브라함 행위 이전에 행함에 대한 보상을 약속받았다는 면에서 상급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칼빈은 주장하였다.

칼빈은 이렇게 잘못된 공로사상을 배격하고 올바른 보상의 의미를 정립시켰지만 로마 카톨릭의 공로사상을 지나치게 반박하다보니 보상을 '행위 이전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설명함으로 행함에 대한 상급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33)

4. 최근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
1) 賞給 無視 傾向
총신의 권성수 교수는 그의 논문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상급 교훈”에서 개신교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상급교리를 무시하는 이유를 신학적, 역사적, 도덕적, 주석적인 네 가지 근거 때문이라고 하였다.34)

(1) 신학적 근거
권성수 교수는 먼저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신학적 이유를 들었으며 래드(G. E. Ladd)와 프라이스커(H. Preisker)의 예를 들고 있다. 래드는 예수님의 많은 교훈이 천국 복음과 천국상급으로 암시되고 있다고 하면서도 상급은 결코 은혜에 속한 것이며, 누구에게나 똑 같은 것이며 이는 천국 그 자체에 미리 예정되고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35)

프라이스커도 예수님의 상급교훈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과 하나님 앞에서 있는 인간의 복종과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강조하면서 천국상급의 차이성을 무시하였다.

(2) 역사적 근거
멕닐(A.H.Mcneile)은 예수님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천국상급의 차이성을 부인하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행동과 정신을 지적하실 때 자주 유행어로 사용하셨지만 예수님의 교훈은 실상 상급사상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예레미아스(J,Jermis)도 예수님이 당시에 상급이란 용어를 썼지만 이는 상대방을 논박하기 위해 상대방 용어를 사용한 것이지 실상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감사라고 하였다.

(3) 도덕적 근거
와일더(A.M.Wilder)는 예수님의 상급교훈을 도덕화하여 상급의 차이성을 부인하였다. 즉 예수님이 상급을 언급한 것은 교육 수준이 낮은 유대인들에게 하나의 상징으로 언급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4) 주석적 근거
미켈리스(W.Mchaelis)는 마태복음5:10에 근거하여 천국상급을 하나의 비유로 보고 상급은 천국에 소속된 것이며 이는 팔복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이로 볼 때 '상급은 결국 은혜(마20:1 이하 참조)''라고 하였다.

헌터(Hunter)도 기독교는 '무엇을 위한 도덕'이나 '상업상의 계약'이 아니라고 하면서 약속된 상급은 바로 천국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러므로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며 차등 상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2) 賞給 重視 傾向
(1) 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
화란의 칼빈주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는 “개혁파 서술자들에게 너무 오랫동안 상의 문제가 등한시된 것이 의심스럽다”고 하면서 개혁주의 내에서의 상급경시 사상을 비판하고 상급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36) 그는 “선행의 공로성을 두려워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 약속된 상들이 죽은 것 같이 침묵에 누워 있도록 수난하였으니 이로 인해 상의 풍부하고 다양한 약속의 형식으로 성경이 공급한 경건에의 격려가 무디게 된다.''고 하였다.37)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어 영생과 상을 구별하여 “영생은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 칭의되므로 구속된 모든 신자들이 다 받는 것이나 상은 이에 추가적인 것으로 특별한 선물이며 보상의 성질의 것'이라고 구분하였다.38) 그러면서 카이퍼는 하이델베르그의 요리 문답이 상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한 노선을 따랐다.

따라서 카이퍼는 상급에 대한 공로사상이나 상급경시 사상을 배격하고 상급에 대한 올바른 입장을 취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헨리 포스터의 見解
헨리 포스터는 그의 고린도서 주석에서 사역자들에 대한 상급을 설명하면서 천국의 차등 상급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성공과 그 결과들을 결코 간과하시지 않으시는데 그들의 노고를 올바르게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의 노고의 정도에 따라 그 노고에 대한 상급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성실성도 결코 간과하지 않으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아볼로의 노고를 다 기억하시고 이러한 판단에 따라 그들에게 상급을 내려 주시는 것이다.39)

헨리 포스터는 이렇게 천국의 차등 상급을 분명히 하였으나 주로 사역자들에 국한하여 설명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3) 헨드릭슨의 見解
헨드릭슨은 그의 저서 내세론 제19장에서 “내세에는 완전한 평등이 있는가? 아니면 행복과 고통의 정도의 차이가 있는가?”란 제목으로 천국상급의 문제를 다루었다.40) 그는 사람들이 평등화의 욕구를 가지고 있으나 완전한 평등은 비성경적(잠 24:30-34)이라고 말하였다.41) 다음 헨드릭슨의 설명을 들어보자.

구원얻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에 평등하게 은혜를 입어서 각기 똑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한다. 하지만 불평등과 차별과 행복한 정도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영광의 정도 차이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는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서 잘 나타난다(마 25:14-30). 비록 구원을 받긴 했으나 평등한 분량이 아닌 상급을 받을 것이다(고전3:10-15). 모든 사람들은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천사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지 아니한가? 모든 천사들이 제각기 다 천사장인가?42)

이렇게 헨드릭슨은 천국의 차등상급이 있음을 실명한 후에 이 차등상급은 달란트비유에서 보듯이 충성의 정도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43) 심지어 그는 천국에서 뿐 아니라 지옥에서도 평등하지 않고 차등이 있을 것을 말하였다.44)

(4) 그루뎀의 견해
그루뎀은 그의 책 조직신학(하)에서 상급에 대한 견해를 분명하게 지지하고 있다.  

그루뎀은 신자들도 심판을 받을 것이며 심판대 앞에서 형벌을 면하고 상급을 받을 것을 말하였다. 다음 그루뎀을 말을 보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했다(고후 5:10; cf. 롬 2:6-11. 계 20:12,15). 마태복음 25:31-46에 기록된 심판의 장면에도 그리스도께서 양을 염소와 구별하여 그의 복을 받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신자들을 위한 이 심판은 평가해서 상급을 주기 위한 것으로서 신자들이 영원히 정죄를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심판 날은 신자들은 상급을 받고 불신자들은 형벌을 받는 날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교린도 교인들에게 이미 놓인 터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어떻게 교회를 지어야 할는지 조심할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5)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일에 따라 받는 상급의 정도가 다를 것을 암시한다.

므나의 비유에서도 10개의 므나를 더 남긴 사람에게는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리라''고 했고. 다섯 므나를 더 남긴 사람에게도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눅 19:17, i9)고 말씀하셨다. 이 외에도 마지막 심판 날에 신자들이 받을 상급의 차이가 있을 것을 가르치거나 암시하는 구절이 여럿 있다.45)

그루뎀은 또한 상급의 내용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참 행복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신분과 상급을 기뻐하는 데 있다. .. 천국에서 더 큰 상급을 받고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들, 즉 하나님이 보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신분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을 인하여 즐거워한다(계 4:10-11).46)

그러면서 그루뎀은 천국상급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확실히 인식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론 유익할 것이라고 하였다. “서로 경쟁하게 만들기보다는 모든 사람이 하늘에서 큰 상을 받도록 서로 격려하고 권하게 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실 만큼 무한한 복을 가지신 분이시며 우리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cf.고전 12:26-27).47)

(5) 박형룡 박사의 見解
박형룡 박사는 그의 박형룡 저작 전집 제5권 구원론, 제7장 성화 부분의 제 7절에서 상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카이퍼의 견해를 지지하여 상급에 대한 올바른 입장을 취하였다. 즉 그는 성경의 증언과 우리의 신도게요서(cf. Heidelberg Confession of Faith, Ch. X VI. Art)들도 약속된 상에 의하여 자유롭게 말한다고 하면서 상급을 강조하였다.48)

이어 박형룡 박사는 상은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주시는 것이되 공로에 대한 대가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는 것이며 상급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육체의 연약에 위안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 카톨릭의 공로사상을 비판하였다.

이렇게 박형룡 박사는 상급에 대한 공로사상과 경시사상을 다 비판하고 올바른 상급관을 가졌다.

(6) 박윤선 목사의 見解
박윤선 목사는 그의 공관 복음 주석, 신상수훈 주해에서 천국 상급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천국의 본질 중 보상의 문제를 다루면서 상급 무시사상과 상급에 대한 공로 사상을 배격하고 올바른 상급관을 제시하였다. 다음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상에 대한 보상을 복음서가 많이 말한다. 상을 얻기 위해서 의를 행함은 비열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당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를 자나 자유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마 6:1-4을 보면 인간은 하늘에서 상을 얻기 위해서 의를 행하여야 될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천국의 시상 원리에서는 선을 행한 자의 보상이 유대주의의 그것과 달라서 율법의 기계적 작용이 아니며 상리적 보상도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순종하고라도 상을 요구할 아무런 권리가 없음을 가르치신 것이다(눅 17:7-10). 의를 행하게 됨은 은혜요, 그것을 행한 뒤에 상을 받는 것도 은혜라고 함이 예수님의 교훈이다.(마 24:47; 25:21,23; 10:41,42; 20:1-16; 눅 17:10 참조).49)

(7) 권성수 교수의 見解
총신의 권성수 교수는 “마태복음의 상급교훈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신학 지남에 7 차례에 걸쳐 연재하였다. 그는 서론에서 상급 무시 경향의 네 가지 방면을 설명한 후 상급교훈은 성경 속의 금광과 같이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구약에서 상급교훈은 구약교훈 전체 속에 씨줄과 날줄처럼 짜이어 있다고 하였다.50)

그는 또한 구약전체에 상급신앙이 깔려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세히 문서화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신약에서도 구약과 마찬가지로 상급교훈이 금맥을 형성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51) 특히 유대인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책인 마태복음, 히브리서 및 야고보서에는 상급구조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그 외에도 바울서신과 계시록에도 상급구조가 나타나 있으며 사도행전과 복음서에도 역시 상급교훈이 각각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마태복음에 상급교훈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마태복음의 상급 교훈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52)

이어 권교수는 본론을 2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산상 보훈의 상급론을 취급하였고 2부에서는 기타 본문에서 상급 교훈을 취급하였다. 1부는 상급의 차등(마태복음 5장 중심, 제2장)과 상급을 통한 동기 유발(마태복음 6장 중심, 제3장)을 다루었고 2부에서는 선교 강화에서의 상급교훈(마태복음 10장, 제4장),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의 상급 교훈(마태복음 20장, 제5장), 달란트 비유에서 상급 교훈(마태복음 25장, 제6장)을 순서대로 다루었다. 이러한 권성수 교수의 마태복음의 상급 교훈에 관한 연구는 상급에 있어서 공로사상과 상급 무시 경향을 배격하고 올바른 상급관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상급에 관한 매우 바람직한 태도라 할 수 있다,


IV. ''천국상급''에 대한 성경적 이해
1.상급과 선행과의 관계
성화의 과실(果實)로서 선행이 있고 이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으로 상급이 있다.53) 이와 같이 선행과 상급에는 그 원인과 결과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선행은 신적 도덕률의 요구에 완전히 응답하여 행위언약의 조건 아래서 능히 영생의 상급을 얻을 만한 내재적 가치를 가진 완전한 행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 한 이후 타락한 인생은 그 행한 것이 다 더러운 옷과 같아서(사64:6)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영생의 후사로 열납 될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화의 과실로서 신자의 행위는 새롭고 거룩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성경은 이를 선행이라 칭하였다.(행 9:36; 엡 2:1; 딤후 3:17; 딛 2:14).54) 중생한 새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성향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기 때문에 선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마 7:17,18; 12:33; 15:9; 롬 12:1; 고전 10:31; 골  3:17,23).

신자의 선행은 그 자체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신자의 본분을 말한다. 즉 중생, 신앙, 칭의를 받은 성도에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생활을 하는 성화의 생활의 열매로서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것이 선행이다(요 15:1-7).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이 선행을 요구하신다(롬 7:4; 8:12,13; 갈 6:2). 이 선행은 또한 신앙의 증거로서(약 2:14,17,20-22), 감사의 표현으로서(고전 6:20), 신앙의 확신을 위하여(벧후 1:5-10),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요 15:8; 고전 10:31)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선행에 대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즉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주시며(마 16:27), 우리는 다 각각 선악 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며(고후 5:10),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받게 된다(요 5:29)고 성경은 증거한다.55)

그런데 이 신자의 선행과 상급과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잘못된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곧 상급에 대한 공로사상과 유 신앙론(唯 信仰論)이다.56)

유 신앙론은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율법의 적극적 요구를 이루어주셨으므로 신자는 이를 수행할 책임을 면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주장은 결국 선행의 필요성을 부인하여 성경적 교훈에 배치된 것이다.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율법만이 신자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폐하여진 것이지 삶의 도덕적 법칙으로서의 율법은 영원한 효력을 가진다. 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선행이며 이 선행에 대한 보상이 곧 상급인 것이다.

그러므로 상급과 신자의 선행과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상급에 대한 잘못된 공로 사상이나 선행과 상급을 무시하는 유 신앙론의 오류를 벗어날 수 있다.

2. 상급의 은혜성
신자의 선행에 대하여 하나님이 천국의 상급으로 보상하신다고 하여 인간의 행위에 공로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상급은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의 성취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세상에서의 상은 공로에 기초하여 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성경에서의 상은 인간에게 공로가 전혀 없기 때문에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가 공로적 행위가 되려면 행위 자체 안에 내재한 가치와 존귀 때문에 공의에 의해 상받을 만한 행위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다 정죄 아래 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행위에 이러한 내재적 가치와 존귀를 가진 자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것이다.57) 설사 인간이 그런 가치있는 행위를 하였다 하더라도 자기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을 빚진 자로 만들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빚을 지시지 않는다.

투레틴(Turretin)은 행위가 어느 정도 공로적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어 야 한다고 말하였다.

1)그 행위가 빚 곧 행위자가 이행할 본분 아래 있는 것이 될 것,

2)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일 것, 즉 우리 자신의 자연적 정력에 의해 성과 되는 것일 것

3)그것이 완전할 것

4)그것이 공로로 받는 상과 동치일 것

5)상은 이 같은 행동에 응당한 공의의 것일 것이다.58)

이러한 조건들로 볼 때 피조물 편의 공의라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상급을 자기 공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주장하였다. 상급의 은혜성은 예수님의 포도원 품꾼 비유(마 20:1-16)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59)

3. 상급의 동기와 목적
상급을 향한 선행의 동기는 과연 옳은 것인가? 또한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상급 이해에 매우 중요한 사항일 것이다. 여기서는 상급의 동기와 목적을 차례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상급의 동기
예수님은 신상수훈에서 천국의 상급을 제자들에게 권면 하셨고 이러한 예수님의 상급관은 복음서 전체에 나타나 있다. 상급의 동기를 부인하는 사상의 배경에는 칸트의 이상주의 윤리관의 영향에 있다. 칸트의 이상주의 윤리관은 ''선은 선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다른 목적을 위해 선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60) 이러한 영향으로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자신의 행복을 염원하고 행복을 향유하기를 진지하게 소망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도사리게 되었다. 더구나 상급을 바라보고 선행을 하는 것은 마치 커다란 윤리적인 결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한다.61)

또 상급을 기대하는 것을 순수하지 못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급을 불순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생각이다. 히 11장 26절에 모세는 ''상주심을 바라보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모세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바울도 빌 3장 14절에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쫓아가노라” 하였는데 바울이 순수하지 못하다 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하나님이 약속하신 상급을 바라보고 일하는 것은 참된 신앙인의 자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받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마 7:7-11), 영생을 소유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순수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상급 약속이 실현되기를 기대하며 선행하는 것도 매우 순수한 것이다. 오히려 주님의 상급을 거부하고 의무 자체를 위해 선행한다는 생각이 불순한 것이다. 왜냐하면 '덕 자체를 위해 덕을 행한다'는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상급에 대한 일체의 생각을 부인하고 자신의 미덕을 자랑하려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그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주장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상에서 개인적인 행동을 고려하지 말고 천국을 위해 이를 희생시키면서 겸손하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려는 목적으로 선행을 하는 이기적인 자기 과시 주의를 경고하셨지만 선행의 결과를 보상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바라보도록 권고하심으로 상급의 정당한 동기를 강조하셨다(마 6:1,4,6,18). 하나님 아버지는 선행의 가장 깊은 동기까지 보시며 은밀한 중에 행한 것까지 다 살피시고 보상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는데 우리에게 상급을 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중심의 인본주의의 상급동기를 가져서는 안 되고 은밀한 중에 행한 것까지 다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본주의의 상급동기를 가져야 한다.

2) 상급의 목적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상급을 주시는 것은 신자가 상급을 받을 공로가 있어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만 있지 무엇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라'(눅 17:10)고 고백할 것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피로 구속하시고 각양의 현실을 통해 연단하시고 이 연단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하늘의 상급까지 주시마고 약속하셨다. 주께서는 이 복을 "상'', ''보수", ''보상"이라고 부르신다(마 5:12; 6:1 이하).62) 이는 행위의 공로를 고려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받을 불행과 고난과 고통에 대한 보상이라는 뜻이다.

또 하나님이 상급을 주시는 목적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소망을 견고케 하시기 위함이다. 신자가 고난을 받을 때 미래의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보고 현재의 시련을 참고 이길 수 있는 용기와 위로를 받을 수 있다(벧전4:12-13),

4. 상급의 등급과 그 내용
이 상급에는 등급이 있는가, 그리고 그 내용은 무엇인가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상급의 등급
상급이 은혜라는 관점에서 공로가 들어설 자리가 없지만 상급이 또한 하나님의 명령 순종에 대한 보상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상급에 그 등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차등상급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성경에 나타난 차등 상급의 예를 살펴보고 이 상급과 영생과의 차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성경에서는 여러 부분에 걸쳐 차등 상급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신상수훈에서 천국에서 ''큰 자와 작은 자''란 구절(마 5:19)을 통해 차등 상급을 말씀하셨다.63) 또 마 5:12에서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하심으로 의를 위해 핍박당하는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여기서 상이 크다는 말은 헬라어로 큰 상급(폴뤼스 미스도스, πολύ󰐠 μισθό󰐠)으로 이는 곧 차등상급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할 때 '선지자의 상', '제자의 상', '의인의 상'을 말씀하시며 차등상급을 언급하셨다(마 10:40-42).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눅 19:21-27)에서도 차등상급의 개념이 드러난다. 바울서신의 여러 부분에도 잘 나타난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니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38). '우리가 다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게할더스 보스는 그의 책 '바울의 종말론''에서 차등상급에 대한 여러 구절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64)

(2) 영생과 상급의 구별
신자가 그리스도의 대속공로로 누구나 받아 누리는 영생권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성화와 선행을 이룬 사람이 그의 은혜로 받는 상급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즉 영생권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상급은 차등으로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을 혼동하는 신학자들이 많다.

칼빈도 그의 기독교 강요 제3권 18장에서는 양자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18장 1절에서 ''하나님이 신자의 행한 대로 갚는다''고 하여 차등상급을 언급하였지만 곧이어 2절에서 '보상은 기업이다.'65)라고 하여 천국에서 받는 기업과 유업의 상을 동일시하면서 이것을 영생권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이 상급과 영생권을 구별하지 않은 것은 천국의 차등상급을 몰랐던 것이 아니고 그가 구원의 근거와 관련한 로마 카톨릭의 공로사상에 대항하기 위한 강조적인 서술을 하다 보니 이러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칼빈이 그의 강요 제 3권 25장 부활 장에서 차등 상급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선물을 분배하실 때 모든 성도에게 꼭 같이 빛을 비추시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실 때에도 그 영광의 정도가 꼭 같지 않으리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날에 ''너희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마 19:28)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영적 선물을 아낌없이 주시고, 하늘에서는 영광으로 그들을 장식하시리라 것을 안 바울은, 자기의 수고에 해당하는 특별한 면류관이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딤후 4:8). 다니엘서에도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다(단 12:3). ..성경은 신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할 뿐 아니라, 사람에게 특별한 보상을 약속한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서....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한다(딤후 1:18). 이 점을 확인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마 19:29) 하신 약속이다.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의 몸의 영광을 각양각색의 선물로 나타내기 시작하시고 점점 그 영광을 증대하시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그 영광을 완성하실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도 영생 자체와 영생에 따르는 특별상인 존영과 영광과 쾌락 곧 그 나라에서 받을 상급과 분명히 구분을 짓고 있다.66) 즉 영생은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 칭의됨으로 구속받은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것이며 여기에 추가하여 받는 특별한 선물이 천국의 상급이라는 것이다.

지상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급을 영생권과 구별하여 차등상급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상급의 내용
사람들이 차등 상급을 부인하는 것은 천국상급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상급은 결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들이다. 이제 천국에서 받게 될 상급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경에 천국에서 받게 될 상급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1) 하나님의 칭찬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누가복음 19장에는 무나 비유로 나와 있음)를 보면 하나님의 칭찬이 상급으로 나타나 있다. 즉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맡긴 주인이 오랜 후에 회계하러 돌아와서 다섯 달란트 남긴 자와 두 달란트 남긴 자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하고 칭찬하였다. 여기서 주인은 바로 우리 주님이신데 초림하신 주님이 십자가의 대속과 성령의 선물로 구속, 중생시키시고 각자에게 달란트를 허락하여 주셔서 성화 시키시며 선행을 하게 하시고 그에 따라 상급을 주시려고 다시 오실 것이다.

그 때에 맡긴 달란트를 잘 관리한 자와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준 자(마24:45)에게 주님의 칭찬이 상급으로 주어질 것이다.

또 고린도전서 4장 5절에는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주님께 칭찬받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뿐만 아니라 이 칭찬은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과 천군 천사들 앞에서 받는 것이며 그 칭찬은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다.

(2)천국잔치에 동참하는 즐거움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이 충성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주인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상급을 허락하셨다. 이 즐거움은 희열 또는 잔치를 뜻하는 것으로 완성된 천국에서의 메시아 잔치로 해석된다. 이는 열 처녀 비유에서의 천국잔치로 볼 수 있다. 천국은 잔치와 같은 축제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또 즐거움은 주의 영광스러운 현현이 제공하는 넘치는 기쁨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신자들은 다 메시아의 완성된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참석한 사람의 즐거움의 정도가 차이가 난다. 종들의 충성의 정도가 동일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은혜롭게 매겨질 상급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 잔치에서누리는 구속의 기쁨과 은혜가 사람마다 차이가 날 것이다. 즉 충성 된 자로서 인정된 사람은 주의 영광에 참예하여 영원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3) 천국을 다스리는 권세
다음에 누가복음 19장 12-27절에 나오는 므나 비유에서 보는 것처럼 충성한 결과에 대해서 천국의 기업과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는 상급내용이 나타나 있다. 어떤 귀인이 먼 나라를 떠나면서 열 명의 종들을 불러 각각 한 므나씩 나누어 주고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그 왕위를 받아가자고 돌아왔을 때 그는 각각 장사해서 얼마나 이익금을 남겼는지 종들을 불렀다. 첫째 종이 열 므나를 남겼다고 보고할 때 주인이 그에게 이르기를 '잘하였도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의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였다. 또 둘째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다고 보고하자 다섯 고을의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종은 수건에 싸두었다가 그냥 가지고 왔을 때 주인이 그 있는 것까지 빼 앞아 버렸다. 이 비유에서 종 열이 각각 동등한 기회를 받았으나 충성한 결과에 따라 받을 권세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은 밭아도 그 나라에 가서 아무런 권세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고 말 것이다.

이 하늘나라의 권세에 대한 성구는 그 외에도 많이 있다. 계시록 3장 21절에는 사랑의 주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우리도 이기는 자는 그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 같이 하리라.''

딤후 2:12에도 우리가 주와 함께 왕 노릇할 것을 말씀하셨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주와 함께 고난 받는 자의 영원한 상급을 다스리는 권세로 말씀하고 있다.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도 이 다스리는 상급을 말씀하셨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 2:25-27).

이 권세는 신자가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한다고 말씀에서도 알 수 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니.,'' (계 20:4,5).

심지어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천사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고전 6:3).

12 사도에게 대해서도 다스림의 권세를 말씀하고 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쫓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자파를 심판하리라'(마 19:27).

(4) 영광의 차이
천국의 차등 상급에 대해서 서술한 내용 중 무엇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영광의 차등이다. 고린도 전서 15장 41절에 이것이 잘 나타나 있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부활체의 영광이 이렇게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67) 이렇게 볼 때 그 나라에서 받게 될 영광의 차이는 세상에서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차이가 있게 될 것을 알 수 있다.

천국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질 영광은 그들이 세상에서 살 때의 정절과 주님과 연합 및 그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의 봉사에 대한 헌신의 정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고백하였다.

이 영광의 차등은 고린도전서 3장 13-15절에 나타난 '공력에 따라 받는 상급'에서도 잘 드러난다. ' 그 날에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으리라.''

즉 신자가 구원을 입고 천국에 가지만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을 사람이 있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사람도 있는 것이다.

(5) 면류관
성도가 받을 상급을 성경은 또한 면류관으로 표현하고 있다. 면류관은 승리한 자에게 주시는 상급이다. 신자가 받을 면류관에 대해 성경은 여러 가지로 표현하였다.

①생명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은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다. 물론 신자는 누구나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지만 그 누림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 면류관은 시험을 참는 자와 충성한 신자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함몰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20).

②썩지 않을 면류관

고전 9:25一27에는 '썩지 않을 면류관'이란 표현이 나와 있다. 이 면류관은 경기에서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다. 인생은 경기와 같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누리다 죽을 때에 없어질 썩을 면류관을 향해 달려가지만 우리 구원받은 신자들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③기쁨의 면류관
이 면류관은 복음 전도자에게 주실 영원한 상이다. 전도자가 한 영혼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한 결과로 맺어진 열매는 영원히 그에게 '기쁨의 면류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 4:1). 이 기쁨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복음 홀 위해 어떤 수고도 무릅쓰고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④영광의 면류관
양 떼를 친 자들에게 주시는 상급으로 또한 영광의 면류관이 나와 있다.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4).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으로 영혼을 돌보고 먹이고 키운 목회자에게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⑤의의 면류관
이 면류관은 칭의받은 모든 성도에게 공통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산 결과로 주님이 마지막 날에 오셔서 주시는 영원한 면류관이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 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一8).

이 의의 면류관은 계시록 19장에 성도의 옳은 행실과 관련된다.

"...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 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 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계 19:7-8)

어린 양의 혼인 예식에 참여할 신부들은 성도들인데 그 나라에서 혼인잔치에 참예할 예복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 즉 성도들은 주님의 신부로서 영원히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 함께 동거하게 되는데 그 때에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옳은 행실을 입고 살게 될 것이다.

신부는 신랑을 위해 몸을 정결케 하고 신랑을 간절히 기다린다. 의의 면류관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자신을 정결케 하고 그의 재림을 대비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신자들이 그의 삶을 정결케 하고 주 앞에서 의롭게 살며 영혼 구원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여 이 의의 면류관을 준비하여야 한다.

(6) 섬김
또 다른 천국의 차등상급의 내용으로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의 차등이 있다. 계시록 5장 11-14절에 보면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음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들으니 하늘 위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제세토록 돌릴찌어다 하니 네 생물은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여기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이들이 보좌와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많은 천사들 나아가 우주의 모든 만물로 나타나 있다. 천국에서는 모든 만물이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천국에 가서 할 일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 보좌 가까운 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도 있고 멀리서 섬기는 성도도 있다. 이 섬김도 천국의 차등 상급의 한 부분이다.

또 22장 3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라는 말씀이 있다. 착하고 충성 된 종들은 천국에서 하나님 가까이서 섬기는 상을 받게 된다.

(7) 존귀
성도가 받게 될 상급에 대해 가장 적절하게 표현된 성구는 베드로 전서 1장7절이다.''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함이라.'

곧 믿음의 시련에 대한 상급을 한 마디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 계시록 21장 鵠절에는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라고 표현하여 영광과 존귀의 상급을 말씀하고 있다.

주님께서 지급도 우리에게 주실 상급을 준비하고 계신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대가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계 22:12).

상급에 있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기억하는  것이다. 교회는 천국은 모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서 완성될 천국은 주님이 교회에 대해 언급하신 몸의 비유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 4장 4절에 보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성도들은 교회의 그의 몸된 교회의 각 지체들인 것이다. 그런데 몸에는 다양한 지체들이 있어 각 지체가 몸을 돕고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성숙을 위하여 각 사람의 분량대로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수행해야 할 기능을 소유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거니와 그 지체들이 각기 다른 제 기능을 성실하게 발휘할 때 교회는 영적으로 풍성한 공동체가 되게 마련이다. 성도들의 올바른 은사의 사용은 교회의 덕을 세우며, 다양한 은사의 조화는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풍성한 분량에 도달하도록 이끈다.

따라서 우리가 천국에 가서 살 때 우리가 교회의 각 지체로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다른 지체를 섬긴 결과만큼 성장하여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모든 지체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따라서 천국의 상급은 서로 높아지려 하는 것이나 대우받으려 하거나 군림하려는 것이 아니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간에 위화감이 생길 이유가 없고 본인은 쓰임받음이 즐겁고 다른 지체는 도아주어서 즐거운 것이다.  

V. 결론
지금까지 .천국상급"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천국 상급에 관한 성경적 고찰을 하고 상급개념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한 뒤 상급과 선행과의 관계, 상급과 은혜, 상급의 동기와 목적, 상급의 등급과 그 내용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았다. 상급에 대한 극단적 견해 곧 상급을 공로사상과 결부시키는 태도와 상급이 없다고 하는 상급 무사사상을 비판하였고 상급에 대한 바른 이해를 시도해 보았다.

상급에 대한 것을 정리하면 첫째, 상급은 신자의 선행에 따른 하나님의 보상이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보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둘째, 이 상급은 신자의 공로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신자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상급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계산과 심판은 하나님 한 분만이 하시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믿는 올바른 동기이기 때문에 이를 세속적 동기와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상급을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요, 신자에게 선을 장려하며 신자의 연약을 돕기 위함이다.

넷째, 상급에는 반드시 그 등급이 있으며 그 내용은 세속적인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와 다스림과 하나님에 대한 섬김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고 물질적인 안정과 세상적인 쾌락을 위해 일생을 달려가고 있다. 특히 천국을 소망하고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치 천국이 없는 양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양 이 땅의 성공을 위해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일깨워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6장에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드셨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불신자들은 이 세상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 성공을 위해 정신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신자는 천국을 분깃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나라를 위해 우리의 전부를 다 투자하여 살아야 하는데 천국에 관심이 없고 열심도 없고 충성도 안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청지기는 쫓겨난 이후를 생각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주었다. 우리도 청지기처럼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서 살 사람인데 천국 준비를 잘하여야 한다. 그것은 바로 불의 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눅 16:9).

우리의 보물을 하늘나라에 쌓아두어야 한다.  '오직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말씀하셨다. 우리 인생은 하나의 경주와 같다. 경주를 한 후 승리한 자에게는 반드시 상급이 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조만간에 주님이 구름 타고 우리 인생을 정산하러 오실 것이다. 그때에 부끄러운 자로 나타나지 않고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신자들은 열심히 신앙의 경주를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이 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굳센 신앙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