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율법
I. 서 론
1. 글쓴 이유와 목적
신약 교회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과 함께한다. 부활하신 주님, 하늘에 오르신 주님이라고 하였은즉 땅위에 내리셨고 죽으셨던 분이시다. 그러므로 영광스럽게되신 주님의 이해는 땅위의 사역이 필수적이며 거기에 토대를 두고 있다.
예수님의 땅위의 사역은 각복음서의 증거가 다르지만 엣 언약의 완성자로서 사역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옛 언약은 모세 언약이다. 구약의 모든 역사는 모세 언약이 토대이다. 그리고 그 언약의 핵심은 율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율법의 성취이다.
율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율법을 어김없이 다 지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예수님이 율법을 지켰으면 주님은 영광스럽게 되지 못하며 여전히 휘장 밖에 있어야된다. 휘장 밖은 저주며 사망이며 죄아래 있는 것이다.
율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율법이 주지 못한 생명을 주심이다. 율법을 다 지켜서는 그 생명이 주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땅위의 사역은 그런 사실을 증거한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죽으시기 전에 증거하신 그 생명을 부활의 생명, 하늘 보좌의 생명, 아버지와 함께 계신 생명으로 완성하였다.
신약 교회는 이 생명의 토대위에 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옛 언약과 대비해서 예수님의 사역과 교회의 생명을 말한다. 이 생명을 여러 서신들이 교회에 증거하며 교회가 이 터 위에 굳게 서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서도 이 관점에서 기록되었으며 이 빛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또한 구약 성경도 부활하신 주님의 완성의 빛 가운데서 보아야한다.
이 생명의 빛은 진리의 빛이다. 교회는 이 빛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 있지 않다. 휘장 밖의 저주 가운데 있지 않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가 이 빛 가운데서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어왔다. 중세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종교 개혁의 칼빈과 루터, 특히 개혁 교회의 토대가 되는 웨스터 민스터 신앙 고백에서도 율법과 의의 문제가 바르게 서 있지 못하였다. 모든 견해들을 다 제시하여야 하겠지만 종교 개혁의 열매이자 개혁 교회의 토대인 웨스터 민스터 신앙 고백서만 살펴 보겠다.
19장은 율법에 관한 것인데 첫째 율법은 의의 완전한 법칙이다. 둘째 의식법, 시민법은 일시적이다. 세째 도덕법은 영원한데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한 순종의 의무이며 반드시 순종해야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더욱 강화하셨다. 세째 율법은 죄의 본성을 드러내며 그렇게함으로 자신들을 살피어 겸손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의의 필요성을 밝히 보인다.(거듭난 자들에게도 마찬가지)
7장의 언약에 관계된 곳에서 동일한 한 은혜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이 다양한 경륜으로 시행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구약 사람들은 구약의 예표들 안에서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온전한 사죄와 영원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다.
8장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하여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을 완전히 수행하여 완전한 순종을 이룬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의 구속 사역의 효력과 효험이 시초부터 만대에 계속적으로 약속과 예표들을 통하여 택한 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말한다.
11장 칭의에서는 예수님의 순종과 보속으로 믿는 자들의 모든 빚을 다 갚으셔서 믿는 자들에게 의가 전가된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구약 백성의 칭의도 신약 백성과 다 같은 것으로 이야기한다.
13장 성화에서는 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성화가 불가능하며, 부패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육과 영의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으로 힘을 얻어 중생한 부분이 이기게되어 은혜 안에서 자라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율법과 복음의 핵심적인 부분들을 살펴 보았다. 이 모든 것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 구원의 도식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 신앙 고백이라고 말할 수 없고 모세의 제자보다 더한 어둠의 저주 가운데 가두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토대가 이 고백서 안에 있었다. 물론 최근에는 시각의 변화가 나타난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도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하는 아들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부요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 논문에서 율법에 대하여 그리고 의에 대하여 성경의 증거를 따라 살펴보고자한다.
2.전개방법
모든 성경의 의미의 토대는 구약 모세 언약에 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이해도 거기에 토대를 두어야한다. 그러므로 먼저 구약에서 말하는 율법에 대하여 살펴 봄으로 율법에 대한 바른 견해를 살피겠다.(물론 구약 성경도 그리스도의 완성의 빛에서 보아야하기 때문에 단순한 증거 본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의 문맥에서 말하는 율법에 대한 기독론적이고 구속사적인 해석을 하여야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율법의 문제를 살핌으로 과연 예수님의 사역은 율법을 지키는 사역인지 아니면 율법을 완성하셔서 새 생명을 주는 것인지를 살피겠다. 바울의 율법관에서도 구원과 칭의가 율법을 지킨 에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대속으로 주어진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 보겠다.
II. 율법에 대한 근본 이해-구약의 증거
1. 언약의 법
1) 애굽에서의 구원의 목표-소유로 삼으심
우리가 이 사실을 언급하기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조상들의 약속을 이루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3:7-8, 출6:1-8, 15:17)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소유로 삼으심이다. 곧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 삼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6:)초태생을 내게 돌리라는 내용도 그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심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4:22, 11:7)그 일에 있어서 마지막 장자 심판이 결정적 사건이다. 그래서 애굽 장자의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였기 때문에 초태생은 내게 돌리라고 말한다.(13:)
해석을 하자면 이 두 목적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번째 목적에 한정하겠다. 또한 19:3~4은 언약을 체결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왜냐하면 19:5은 그러므로의 접속사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일과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엎어 여호와께로 인도하심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4절에서 강조된 점은 너희이다. 곧 너희가...보았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보았다는 의미는 제 3자의 입장에서 그 사실을 간접 체험하는 정도나 사실을 보도하는 정도가 아니다. 보았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의 체험를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였다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그들이 구원 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서 19장 이전에 말했던 구원의 목표인 소유로 삼으리라는 내용과 19장에서 말하는 구원의 일을 보았기 때문에 언약을 체결한다는 것을 일치되게 보아야한다. 또한 우리는 19장에서 그들을 독수리 날개로 인도하신 최종 목적이 내 앞으로에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한다. 곧 시내산 여호와 면전으로 인도하셨다. 여호와 앞으로 인도된 백성이다. 어떻든 여기서 구원의 목표는 소유로 삼으심, 언약 체결이다. 다시말해서 소유로 삼으심과 언약 체결은 같은 말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2) 언약에 참여하는 것은 공로적인가?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짚고 넘어 가야할 문제가 있다. 그러면 언약에 참여하고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킴에 의해서 들어가는 공로적인 것인가. 그 대답은 한마디로 그렇지 않다이다. 율법을 주기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부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을 지키리라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선포하고 있다. 그래서 십계명 서두에 나는 너희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소유로 구별된 백성이기 때문에 율법을 주고 있다. 언약을 지키리라한 백성에게 율법을 주고 있다. 이전 조상들에게는 이러한 법을 주시지 아니햇다. 여호와의 구원을 본 백성, 그래서 여호와를 안 백성들에게 언약의 조건을 제시하며 언약적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먼저 율법을 지킨 백성에게 하나님이 임하신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긍휼과 구원을 본 백성에게, 여호와의 언약을 순종하리라한 백성에게 임하신다.
그렇다면 5절과 6절의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러한 말은 뒤에서 살펴 보겠지만 언약 체결에 있어서 항상 복과 저주의 방식으로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십게명과 그리고 출23:20~33, 레26:, 신명기에서 이러한 것들이 등장한다.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면 복을 주고 그렇지 아니하면 저주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등식은 출19:5,6에 나오는 내용의 발전된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런 복과 저주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복, 거룩한 백성으로서, 열국 중에서 여호와의 소유로서의 복과 저주이다. 특별히 복과 저주의 내용들은 가나안 땅에서의 복과 저주로 나타난다. 이 복은 조상들 때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 주어지는 축복은 이전에 없었던 복을 받는 공로적인 것이 아니라 언약의 복의 지속과 발전이다. 이 복이 충만하게 나타난 시대는 구약에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이다. 그리고 저주가 극에 달한 시대는 바벨론 포로의 시대이다. 열왕기서에서는 그 평가를 언약의 법의 지킴과 불순종에 평가 기준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언약을 지키면 이제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언약 백성들에게 언약적 순종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들이 언약을 지키면 그 언약의 복을 장성하게 누릴 것이며 그렇지 아니하면 언약의 복을 받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이다.
3) 율법은 무엇인가
(1) 언약 지킴=율법 행함
율법 지킴이 언약 백성이 되는 공로가 아니라면 과연 율법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은 이 법은 언약의 법이다. 출애굽기 19:5을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서...내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말씀하셨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언약은 무엇인가. 그리고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명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제히 응답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다 행하리이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아직 그 명하신 것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아니했다. 그 명하심은 20장에 나타나는 십계명과 21:~23에 나타나는 율례와 법도이다. 그러한 사실을 24:에 나타나는 언약 체결식에서 알 수 있다. 24:3에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19:에 있었던 말씀과 동일하다.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은 언약과 동일하다. 곧 율법을 지킴은 언약을 지킴이다.
(2) 율법의 근본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언약이 근본적으로 무엇이가를 살펴야한다. 그래야만 율법의 근본도 밝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앞에서 그 언약은 소유로 삼으심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19장 언약을 체결하기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었는가? 그렇지 않다. 4:22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 내 장자로 말한다. 3;에서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말하며 내 백성의 우고를 들었다고 말한다. 5:1,8:1,20,9:1,13,10:3,에서도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은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5;3과 7:16,9:1,13,10:3에는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로 말한다. 바로는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고 말한다.(8:25,10:8)모세와 아론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린다고 말한다.(8:26)유월절 규례에서 초태생은 다 여호와의 것이다(13:11~16)홍해 심판 후 노래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구원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며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 주의 사신 백성으로 표현한다. (15:) 15:26에서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한다. 16:12에서도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그분이 너희 하나님 이시다. 18:1에서도 모세의 장인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을 들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위하셨다.(18:8)여호와는 이스라엘 중에 계신다.
또한 십계명을 주시는 상황에서 이 사실을 잘 알 수가 있다. 20:2에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말을 살펴 보자. 여기서 하나님 자신을 말하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계명의 말씀을 주시고 있다.
그러면 이전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였는데 시내산 언약에서 소유로 삼는 다는 의미의차이점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그래야만 율법의 의미도 나타난다. 그 차이점은 19장 이하의 내용에 있다. 우리가 모세 오경을 한 책으로 보았을 때 출애굽기19:~민10:까지가 그 특징이다. 이 본문은 모두 시내산에서 말씀하신 규례와 율례들인데 시내산 언약의 특징이 이 부분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삼으심의 특징이다. 그 특징은 하나님이 성막을 짓고 함께 거하심,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에 계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그 상에서 먹으며, 하나님이 거룩하니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며, 여호와의 성막을 호위하고 봉사하며 동행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것이 시내산 언약 즉 모세 언약의 특징인데 이전에는 주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 안에 그 언약의 특징이 나타난다. 그러니 언약의 내용은 소유로 삼으심인데 그 내용은 율법이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언약의 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만고불변한 의의 표준과 도덕적 표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성막에 계신 하나님과 거룩의 삶으로 함께하는 언약의 법이다.
(4) 무엇이 언약의 법인가?(율법의 구분)
앞에서 율법을 언약의 내용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무엇이 언약의 법인가? 십계명과 다른 계명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러한 관계를 살펴보겠다.
a) 십계명
십계명은 언약 체결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두가지점에서 다른 계명과 다르다.
첫째는 계시의 방식이다. 우리는 20장의 계시의 방식을 알기 위해서는 19장과 20장의 문학적인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5의 내용은 여호와게서 이스라엘 백성의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하실 것이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강림하심의 전제는 우리가 살펴 보았던 언약 체결 때문이다. 강림하시는 이유는9절 때문이다. 9절에서는 모세에게 임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임하시는 이유는 모세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모세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다. 그리고 나서 백성들을 3일 동안 성결케하고 있다.
16~19절은 여호와께서 빽빽한 구름과 나팔 소리와 불 가운데서 강림하신 내용과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신 내용이다.
20~25절은 다시 모세를 부르시고 백성들이 성결케하고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명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 19절과 20절 이하는 내용상으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절 이하의 내용은 내용상 첨가되어 있는 인상이 있다. 그 이유는 20절에서 여호와께서 강림하신 내용을 다시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25절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고한 내용은 21~24절의 내용이지 20장의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20장이 19절과 연결된다고 하는 것이 순리롭다.
또한 십계명 단락을 구성하는 20:1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포를 확증하는 구조이다. 20:2에서 너와 나의 관계 는 직접 대면하는 관계를 나타낸다. 그 이하의 계명도 대상이 2인칭으로 되어 있다.(하나님과의 대면의 관계를 나타낼 때는 2인칭으로 서술하고 그외는 3인칭으로 서술한다.) 그래서 20:18이하에서 백성들이 두려워 떨며 모세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로 말하였다. 20:22에서도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라고 말하고 잇다. 신5:22에서도 여호와께서 산위 불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총회에 이르셨다고 되어 있다.
이상의 결론으로 십계명은 계시의 방식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라는 구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계시하신 방식이다.
계시의 형식에 있어서는 언약체결의 형식이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국가간의 종주권 조약 형식으로 이해한다.(전문, 역사적 서언, 계명, 언약 문서 낭독, 증인, 축복과 저주, 맹세의 형식-성경에서 이런 언약 체결 형식이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아담, 아브라함, 다윗 언약에서도 이러한 성격이 나타난다) 물론 십계명에서 그 형식을 모두 채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십계명 자체의 계약 형식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십계명에서는 전문, 역사적 서언, 게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문-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역사적 서언-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19:4~5의 언약 체결의 서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같은 구조이다.)
*계명-20:4~17
축복과 저주에 대한 문제는 19:5,6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언약 즉 명하신 모든 말씀을 지키리라한 백성에게 임하셔서 말씀하신 언약의 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2,3,5계명에 반영되어 있다.
위의 두가지 내용으로 인해서 십게명의 독특성을 알아 보았다. 그 특성은 십게명이 언약의 법인데 언약 그 자체를 표현한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소위 모법, 헌법으로 보아야한다. 즉 근본적 언약 관계, 다시 말해서 너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는 것을 선언하며 그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법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십계명만 언약의 법인가? 다른 계명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b) 출20:22~23:
먼저 십계명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법을 살펴 보자. 그것은 출20:22~23의 내용이다. 이것은 24장에서 모든 율례로 언약서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이 부분의 계명도 언약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그 형식과 내용을 살피면 언약 체결 구조와 같다.
*출20:22은 역사적인 서언으로 볼 수 있다. 그 서언은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이다. 역사적 서언에서 이 법을 특성을 알 수가 있다. 즉 시내산에서 십계명 선포를 보았기 때문에 계명의 말씀을 주고 있다. 십계명의 근거 때문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십계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에서 나타난 언약 관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다른 신상을 만들면 안되며 여러 규례를 지켜야한다.
*계명에 대한 내용은 십계명에 나타난 내용과 상응한다. (20:23~23:19)
*경고와 약속이 주어져 있다.(23:20~30)
그리고 나서 24장에서 언약을 체결을 하고 있다. 그 내용은
*언약 문서를 낭독
*맹세
*언약 체결식
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가지는 19장~24장을 하나의 언약 체결 장면으로 보는 것이다.
*역사적 서언-19장:애굽에서의 구원과 여호와의 강림
*계명
-십계명-20:1~17:하나님의 이 모든 말씀, 직접 계시-헌법
-모세를 중보자로 세움-20:18~21
-모든 율례-20:23~23:1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순종에 대한 경고와 약속-23:20~30
*언약서 낭독:여호와의 모든 말씀(십계명)과 모든 율례
*맹세
*언약체결식
그렇다면 그 이하의 계명들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c)레위기
먼저 레위기를 살펴보자. 레위기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언약의 법과 차이점과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차이점-
레위기는 출애굽기24장에서 언약 체결식에 사용된 십게명과 율례들과는 차이가 있다. 첫째는 언약 체결식에 등장하는 법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격상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 제도를 살펴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성막예 계신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고 성결의 삶을 사는 것과 관게되기 때문이다.
성막은 언약의 법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세에게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주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오라고 명령했는데 그 돌판을 주기 전에 성막 식양에 대해 주된 내용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성소는 하나님이 언약의 법인 돌판을 두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회막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성막에 거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는 것으로 말하고 애굽 땅에서 구원한 목표도 그렇게 말한다.(출29:45~46) 그러므로 구원의 목표와 언약 체결과 회막에 거하는 것은 일치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언약 체결 그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언약 체결의 목표이자 내용이다.
그러므로 레위기도 그러한 성격으로 이해되어야한다. 그러므로 레위기는 성막과 관계된 법으로, 성막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백성인데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백성이다.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사는 백성이다. 그들이 레위기의 법을 지키면 그들은 성막에 계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또한 성결의 삶을 사는 언약의 복을 누린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거룩은 성소에 속한 거룩이다. 왜냐하면 정결의 모든 토대는 제사장의 성결과 성소의 정결이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공통점:언약의 법-
1:1을 보면 이제 더이상 여호와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지 않는다.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말씀하신다.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이 시내산에 임하였던 영광으로 회막 중에 거하시기 때문이다.(출40:34) 이제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규례를 말씀하시고 있다. 레위기의 내용이 규례인 것은 다음의 이유에서 이다.
첫째는 1;1,2의 내용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는 말은 출애굽기20:22부터 전형적으로 율법을 말씀하시는 방식이다.
두번째는 레위기의 반복되는 어구인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어구이다.(11:44,45, 19:2, 20:7,8,26, 21:8,15,22,23, 22:2,32,33)이 말은 두가지 점에서 언약적 성결을 요구하는 말이다. 첫째는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는 점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언약 백성이라는 말이다.(출애굽기19장과 20장 참조)두번째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점이다. 이 말은 첫번째의 근거 때문에 명령하는 말이다.
세째는 레위기 27:34에서 이상은 여호와게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네째 26장은 레위기의 결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출애굽기 23장에 상응하는 전형적인 축복과 저주의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d)신명기 율법
신명기 율법은 출애굽기나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과는 역사적인 사실에서 차이가 난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행한 설교의 말씀인데 가나안 땅에서 행할 규레와 법도이다. 그런 역사적인 사실에서 차이가 나며, 내용에 있어서도 가나안 땅의 삶에 조절되어 있다. 신명기 율법서도 시내산에서 체결한 언약의 법은 아니다. 그러나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언약적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29장 모압 땅에서 세운 언약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순리롭다. 그리고 이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의 말씀도 언약궤 옆에 보관하며 면제년 초막절에 성전에서 낭독하여 이스라엘로 듣게하고 지켜 행하게해야한다.
-형식-
신명기의 형식은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겟으나 모세의 설교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설교는 언약 체결의 형식을 따라 배열되어 잇다.
*서언1:1~5
히브리어 성경은 말씀들이니라로 시작한다. 즉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다. 그리고 배경이 설명되어 있다.
*역사적 서문1:6~4:43
지금까지의 역사적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며, 가나안 땅에서도 이 하나님만 의뢰하고 섬기는 것이 그들의 복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이유는 여호와의 규레와 법도를 준행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권면의 전제 조건과 토대를 이룬다.
*율법4:44~26:19
율법 선포의 부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잇다. 이 구분은 출애굽기19:~24:과 구조상 일치를 이룬다. 구조가 일치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가나안 땅의 삶의 법으로 조절되어 있으며 권면의 내용들이 많이 덧 붙여져 있다.
첫째 십계명 부분이다(5:5~5:21)
둘째 모세를 중보자로 세우는 단락이다(5:22~11:32)
세째 가나안 땅에서 평생에 행할 규례와 법도(12:~26:)
*축복과 저주27:1~30:20
축복과 저주27:~28:
언약체결식29:
언약의 유효성30:~34:
e)결론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십계명과 다른 계명들은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계시의 방식에 있어서이다. 그리고 그것이 언약의 두 돌판으로 언약궤 안에 보관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른 계명과 다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 등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오히려 모세 오경의 특성과 계시 방식, 그리고 계명의 성격을 따라 분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실지로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으로 분류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도덕법은 영원하고 의식법과 시민법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그 언약의 법의 특징에 따라서 출애굽기 언약 율법, 레위기 언약 율법, 신명기 언약 율법으로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출애굽기 언약 율법이 시내산 언약 체결의 율법으로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중에서도 십계명은 더 독특하다. 레위기 언약 법은 성막에 나아감으로 언약을 누림에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신명기 언약 법은 그 구조에 있어서 출애굽기 언약과 일치하는데 율법의 내용과 축복과 저주에 있어서는 출애굽기 언약서의 해설처럼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땅에서 행할 구체적인 법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언약의 법의 근본 토대는 출애굽기 언약 율법이다. 그 중에서 토대는 십계명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헌법으로 이해하고 그 이하는 그 시행령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출애굽기 언약 법과 신명기 언약 법은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구조와 내용과 목적에 있어서 이다. 구조와 내용은 살펴 보았다. 목적은 언약 체결의 목적이다. 출애굽기는 근본적인 시내산 언약의 법이고 출애굽기는 모압 평지에서 세운 언약 체결 즉 갱신의 법이다. 레위기 언약법은 오히려 그 언약의 법에 덧붙여진 법이다.
결론적으로 근본적인 언약 관계는 십계명에 있고 그 언약 관계에 토대를 둔 시행령은 여러 율례들이다. 그것이 출애굽기나 신명기에서 나타난 형태들이다. 그리고 레위기는 그 언약 관계의 복을 누리는데 있는데, 그 복은 성막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며 거룩으로 동행하는 복이다.
2.율법은 지킬 수 없는가?
지금까지 율법은 죄 때문에 지킬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메시야를 소망하는 식으로 이해를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율법 자체가 그들의 언약의 내용이며 복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의 소유삼으심을 누리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법을 지키기 쉽다. 그들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원하심으로, 시내산에서 친히 말씀하심으로, 성막에 거처를 두고 함께 하심으로, 모든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신실히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 관계를 나타내며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지키기 쉽다. 소유된 자체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능력이며 율법을 소유한 자체가 능력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면 지킬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율버이 그 관계를 나타내며, 언약적 순종을 나타낸다.
1)신30:11~14
이 단락의 구조를 먼저 살펴 보자. 11절과 14절은 주제적인 말이며 12절과 13절은 11절과 14절의 근거를 제시한다. 11절에서 어려운 것도 아니며 먼 것도 아니다는 말은 14절에서 심히 가까와 행할 수 있다는 말로 발전한다. 율법의 말씀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며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다. 말씀이 심히 가까와서 입에 있고 마음에 있어서 행할 수가 있다. 즉 이 말은 신약의 용어대로 하자면 거듭남의 말씀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직접 들었든지 모세를 통하여 들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예언적인 말이 아니다. 물론 10절까지 그들이 범죄하고 돌이키면 언약을 회복시킬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11절부터 다시 권면의 말을 시작한다. 그 특징은 오늘날에 특징이 있다. 신명기에서 오늘날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 언약 지킴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미래에서 지키거나 지켜질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것이다.
2)신명기 역사서
신명기 역사서는 여호수아~열왕기하까지이다.(여기서는 왜 이 역사서들이 신명기적인지는 논하지 않겠다) 이 역사서의 사관은 신명기 사관이다. 곧 언약의 법인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아니하면 그들에게 저주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가 역사적 사실에 내포되어 있다.
이 역사서는 다윗을 중심으로 나눌 수가 있다. 다윗 이전 역사는 다윗 왕을 목표로 진행되며 이후 역사는 다윗의 길로 갔는지 아니 갔는지로 왕들의 역사를 평가한다. 다윗 이전 역사는 다윗을 목표로하는데 두가지 점에서이다. 하나는 율법의 온전한 시행이다.(삿17:6, 18:1, 21:25)또 한가지는 여호와를 의뢰하고 언약의 말씀을 순종하는 왕국의 나타남이다. 사울은 그 길에 있어서 여호와께 범죄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마음에 합한 자이다. 물론 다윗이 범죄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를 의뢰하였고 용서함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신명기에서도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면 그들에게는 사망이다. 그 사망은 이방 백성에게 끌려감이다. 그러나 죄를 돌이키고 율법을 지키면 돌이키실 것이고 이전보다 더 큰 복을 말씀하셧다. 다윗이 다른 사람의 아내를 범하였는데 그것은 율법으로하면 죽음을 당하여야한다.(마치 율법을 범하면 잇라엘이 이방 땅으로 좇겨나야 하듯이) 그러나 그가 여호와를 의뢰하였고 회개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돌이키시고 복을 주셨다. 즉 언약을 지키는 것은 계명으로서 율례를 말하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까지 포함한다. 왜냐하면 신명기 언약서 자체가 그렇게 언약의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사무엘하 22장의 다윗의 노래에서 이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중심되는 내용은 환난 중에서도 여호와께 아뢰며 의뢰한 내용과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를 앞에 두고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함으로 모든 대적과 원수로 부터 구원한 이야기이다. 분명히 다윗은 여호와의 율레를 범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래에서 그는 여호와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거짓된 고백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행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의뢰하고 회개하고 여호와의 율레와 규례를 지키는 자를 돌이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 순종 때문에 열국이 복종하고 열방의 보화가 그 왕국에 들어 오도록했다. 그리고 율법지킴 즉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 때문에 그 후손에게 여호와께서 인자를 베푸심이 영원하다. 그러므로 다윗 이후의 왕들은 다윗의 길로 갔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로 평가한다. 다윗의 길을 따른 자들은 율법을 순종하고 지킨 자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에서도 알 수 있다. 애굽에서 인도하신 여호와를 순종치 아니하고 이방신을 섬기고 여호와의 율법대로 행하지 아니한 것이다. 곧 그들은 다윗의 길로 걷지 아니함으로 멸망한 것이다.(왕하17장)
시편119편에서 저자는 율법을 행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주의 증거를 지켰고 그 증거를 지극히 사랑하였다고 고백한다. 또한 그는 주의 법도와 증거를 지켜 그의 모든 행위가 여호와 앞에 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율법은 그들이 지키기 쉬우며 지킬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하여 멸망한 이유는 온전히 여호와를 의뢰하고 율법을 지키지 아니한 것이지 율법 지킬 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서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 되심으로 지킬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멸망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으며, 회개하고 돌이켜야한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언약의 복으로 복주신다.
3.구약에서 율법의 평가
1)지혜
지혜와 율법 사이의 관계는 신명기 4:6에서 먼저 나온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레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명기서에서는 율법이 지혜 자체이다.
솔로몬은 열왕기서에서 지혜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2:9) 그리고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다. 그 지혜는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이다.(3:) 이 지혜는 여호와의 율법을 가까이 두고 판결하는 지혜이다. 그 지혜는 동양 모든 사람들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 그리고 모든 민족 중에서,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헤를 들으러 왔다.이것은 신명기 4: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며 다윗과 솔로몬은 신명기 역사서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지혜 문학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으로 이야기한다.(잠1:17, 9:10, 15:37, 욥28:28) 신명기서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모든 율법 준수의 토대이며 율법을 지킴이 하나님을 경외함이다.(신4:10, 6:2, 13, 24, 8:6, 10:12, 20, 13:4, 14:23, 17:19, 28:58, 31:12, 13)
율법을 행하는 복과 저주와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에게 있는 복과 저주의 형태는 언약 율법과 잠언서 전반에 깔려 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고 그렇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저주가 있다는 말이다.
들으라는 권면 형태는 신명기(5:1, 6:4, 9:1, 20:3)와 잠언(1:8, 4:1, 10, 5:7, 7:24, 23:19)의 유사한 권면 형태이다.
시편의 지혜시(시1:, 36:, 37:, 49:, 73:, 112:, 127, 128들에서도 율법과 지혜를 일치시키는 사상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여기 있는 시들이 전적으로 지혜 자체를 찬양하는 시들은 아니다. 그 내용상 교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지헤 문학에 가깝기 때문이다. 교훈과 권면을 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시편 1편을 대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시로 이해되며 지혜시로 구분했을 때 그 특징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복 있는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다. 악인은 그 반대의 사람이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율법을 행하는 의인이다. 이 두 대비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로 나타난다. 복있는 사람은 그 행사가 형통한다. 그러나 악인은 바람에 나튼 겨와 같고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이 대비는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것과 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나타나는 사상들은 언약의 법으로서 율법의 사상을 담고 있다. 특히 율법을 행하면 복이 있고 그렇지 아니하면 저주가 있는 것은 전형적인 신명기적 사상이다.
시편112편은 시현 1편과 서로 상응한다.이 시편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악인은 소멸될 것이다.
시편 37:30~31에서는 지혜와 율법에 대한 동일성이 나타난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결국 율법은 이스라엘의 지혜이며 복이다. 율법을 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며 모든 환난 중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그들이 번성해도 필경은 멸망할 것이다.
2)율법찬가
(1)시19
시편 19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6은 하늘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말하고 7~13은 율법이 나타내는 여호와의 영광을 말한다. 이 부분은 서로 상응한다.
이 시편에서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규레는 같은 말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고, 지혜롭게하고, 마음을 기쁘게하고, 눈을 밝헤하고,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확실하여 의롭고, 꿀과 송이끌보다 더 달다. 이러한 율법에 대한 평가도 같은 말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경계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다.
12절 이하에서는 정결함을 구하고 있다. 이렇게 간구할 수 있는 것은 7~11에서 말했던 여호와의 율법과 그 기능 때문이다.
(2)시119
시편 119편은 알파벳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여덟절이 한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한 연을 이룬다. 이 시편의 내용은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율법이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율법 지킴에 대한 간구이다. 둘째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키는 지혜의 시이다 세째 원수로부터 구원을 간구하는 노래의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단락에 혼합되어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시편 저자의 상황은 그가 환난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주의 구원을 간구한다. 그런데 그 간구의 토대는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지킴에 있다.(신명기 사상-언약의 말씀을 지키면 원수의 손으로부터 구원)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것이 모든 절에 나타난다. 그것은 말씀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 율법, 법, 증거, 법도, 율례, 계명, 판단, 규례, 도와 같은 말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84, 121, 122, 132절 제외)
여기서는 이 시편 저자가 율법을 어떻게 평가하였는가만 살펴 보고자한다.
나의 즐거움이요 모사이다(24)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다(38)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됩니다(92)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함으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98)주의 말씀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끌보다 더하니이다.(103)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주의 증거가 기이하니이다(129)주의 명하신 증거는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도소이다(138)주의 말씀이 심피 정미함으로 주의 조이 이를 사랑하나이다(150)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1420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폈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143)주의 증거는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144)여호와여 주게서 가가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151)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레가 영원하리이다(160)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지니이다(172)
3)결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율법은 언약의 법이다. 신약에서 평가하는 것처럼 평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 백성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의의 길이며 복음이며 생명의 능력과 거룩의 능력과 성화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지키기 힘드는 무거운 짐이나 저주가 아니다. 이 법은 그들에게 복의 근원이며 그들은 이 법을 지킬 수 있고 지켜야한다. 지킴으로 언약의 복을 누리며 산다.
4.율법과 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율법 지킴이 그들의 의이다. 신6:25, 신24:13에서는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모든 명령을 여호와 앞에서 지키면 그것이 그들의 의로움이라고 말한다.
신6: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한 개념이 시1:, 시38 에 나타나는데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 즉 지키는 자는 의로운 자이며 복있는 자이다. 그의 길은 형통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
시24:5에서도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들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거룩한 곳에 서는 자들이며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사46:12은 마음이 완악한 자들을 의에서 떠난 자들로 말하며, 사51:7에서는 의를 아는 자들을 여호와의 율법이 마음에 있는 자들로 언급한다.
겔18:5~9에서도 여호와의 율례를 좇으며 규레를 신실히 행하는 자는 의인이라고 말한다.
레18:5에서는 율법을 지키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한다. 레위기에서 율법을 지키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여호와의 거룩을 나타내고 그 거룩에 참여하는 삶이다. 레위기에서는 율법 안에 사는 것을 저주로 말하지 않는다. 율법 안에 사는 것은 성막에 계신 여호와의 거룩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하는 삶이요 복이다.
5.율법과 이방인
1)거룩한 장벽
구약 시대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 공간과 시간과 사람의 거룩한 구분이 있다. 이 거룩의 구분은 성소와 관련된 구분이다. 즉 성소에 속한 것은 거룩하다. 특별히 민수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거룩의 구분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군대로 계수와 진배치, 행진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군대로 계수한 의미와 진배치에 대한 것은 레위인의 구별에서 잘 알 수가 있다. 레위 지파는 성막 봉사를 위하여 구별된다. 일반 백성은 군대로 계수되어도 그 일을 담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는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이다.(민3:13)그들은 제사장 아론에게 온전리 돌리운 자들로 아론 앞에서 시무하는 자들이다.(3:5~10) 그리고 레위 지파는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붕에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해야한다.(1:47~54)왜냐하면 그 처소는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도 이 본을 따라 회막 사면에 진을 친다. 그리고 그 진은 거룩하다. 그러므로 민5장에 규정된대로 부정한 자는 진 밖으로 나가야한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성소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 그 직무는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성소의 직무를 지키며 다른 사람이 가까이 하면 죽여야한다. 그들의 진은 장막 앞 동편 곧 해 돋는 편에 진을 친다.(민3:38,39) 레위 지파의 진보다는 성막에 더 가까이 있고 거룩하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린 고라당이 죽임을 당하였다. 고라당의 말처럼 회중이 다 거룩하고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계신다. 그러나 여호와께 속한자 즉 거룩한자의 구분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열국의 장자요 제사장 백성이다. 그러나 레위 지파만 성막의 기구를 봉사한다. 제사장만 성막에서 봉사한다. 대제사장만 휘장 안에 일년에 한번 들어간다.
그리고 날의 질서에서도 안식일이 있고 성회로 모이는 날들이 구분되어 있다. 공간의 질서에서도 온 땅을 하나님이 성소로 지었어도 가나안 땅만 하나님의 성소요, 성전만 하나님의 성소요, 그중에서 지성소는 거룩한 처소이다.
왜 구약은 이러한 구분이 있는가? 그것은 근본적인 구분의 벽이 휘장이기 때문이다. 휘장은 지성소와 외소를 구분하는 장이다. 지성소는 법궤 위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 외소는 제사장이 봉사하며 섬기는 장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한 장막에 있어도 하나님과의 거룩의 간격이 있다. 물론 1년에 일차 나가지만 금식하고 나가며 향연으로 가리우고 나가야한다. (레16:)
2)이방인의 구원
위에서 살펴 본 거룩의 장벽 때문에 이방인은 근본적으로 죄의 백성이며 부정한 백성이다. 왜냐하면 모세 언약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 언약에서 주는 구원이 없는 백성이다. 그들이 이 언약에 참여할려면 할례를 받아야하며 언약의 법을 지켜야한다. (창17:출12:48) 그러나 모두 언약의 백성으로 들어 오는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나안 족속은 진멸해야한다. 신23장에서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 오지 못할 자들을 언급하고 잇다.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자는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사생자도 여호와의 총회에 십대까지라도 들어오지 못한다.(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모두)모압과 암몬 족속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다른 족속은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 올 수 있다.
종말론적인 이방인의 구원을 언급할 때도 이러한 사상이 전제된다. 이사야56:6~8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성산에 나아가며 하나님이 그들의 예물을 받으실 것을 말한다. 스가랴서에서는 이방 백성들이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초막절을 지키지 아니하면 재앙이 있을 것이다.
6.새계명(구약 율법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
구약은 신학적 자료를 위한 단순한 증거 본문이 아니다. 이제는 구약을 하늘 보좌의 질서로 완성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책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이 있어야한다. 구약에서 말하는 율법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은 결국 새계명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이것이 구약 율법에 대한 연속성이된다. 그러나 그 연속성은 불연속성이 필연적으로 전제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야 옛 언약의 법인데도 옛 언약의 법이 아닌 새계명, 새언약의 법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논문의 구조와 조직성 때문에 V장에서 언급하도록하겠다.
III.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
1.성전
성전에 관계된 내용을 먼저 살피고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성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성전이 옛 언약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 체결의 목표는 그들과 함께 거하심이다. 둘째는 복음서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이다. 그 위치는 공관복음(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의 이유에 관계되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성전을 정결케한 기사를 그 주제에 맞게 예수님의 초기 사역에 배열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먼저 성전에 관계된 기사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순리롭다고 생각한다.
1)요한복음에서의 성전 청결과 새로 짓는 의미
요한복음에서는 이 기사가 예수님 사역 초기에 배열되어 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의 특성 때문이다.
먼저 요한복음의 기록 이유를 살펴 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태초에 아버지와 함께 계신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여기서 거하신다는 것은 이전에 성막과 성전에 거하신 것처럼 우리 중에 거하심을 말한다. 그러나 구약때 처럼 구름 중에, 모세 율법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다. 그 영광은 세상에 아버지를 나타내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우리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아들에 대해 증거하는데 새로운 거처를 우리 중에 두시는 하나님 아들에 대하여 증거한다.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면 자기 백성을 위해서 거처를 예비할 것이며 오셔서 함께 하실 것이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표적을 통해서 증거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을 부를 때 부터 더 큰일(표적)을 보이리라했는데 그것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가나안 땅의 성소가 아니라 인자로 말미암는 새로운 성전을 말한다. 그래서 그 후에 있는 더 큰일들은 이러한 사실을 증거한다.
성전을 청결케하고 새로 짓겠다는 예수님의 사역은 이러한 문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성전에서 소와 양을 파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정당한 것이었다. 공관복음에 비해서 요한복음은 더군다나 과격한 표현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거짓된 행위가 전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초점이 아니다. 여기서의 초점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유대인들이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절)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전 청결의 기사는 19절 이하의 내용 안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예수님게서 성전을 청결케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여기서 가져 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한 것을 기억하였다. 이 인용구절은 시69:을 인용하지만 여기서는 단지 예수님의 죽음에만 관련시키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새로운 성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한 이유로 핍박 당하고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일체 보도하지 않는다.(그것이 암시 될 수도 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로 이 일을 행하고 있으며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신다고 말함으로 유대인의 핍박을암시하기 때문이다-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음)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심으로 새로운 성전을 자기 육체로 지으신다. 그는 그 일에 있어서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옛 성전과 예배 질서는 끝났다. 그는 새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옛성전을 청결케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죽을 것이며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새 성전을 지을 것이다. 그래서 에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하는 것은 단순히 옛 예배를 개혁하는 정도가 아니다. 구약 때처럼 휘장으로 가리운 영광의 처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거처를 함께 두시는 새로운 성전, 만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의 거처를 짓는 것이다.
2)공관복음에서의 성전 청결 의미
공관복음에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나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도 서로 차이가 있게 기록이 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순서가 에루살렘 입성 뒤에 바로 성전청결의 기사가 있다. 마가복음은 입성 뒤에 바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틀 뒤에 베다니에서 돌아 온 뒤에 일어난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사건이 앞서 있다. 아마 마태복음은 예루살렘의 배교 상황과 그로 인한 심판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성 뒤에 바로 위치시킨듯하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마가복음에는 첫째는 병든자를 치료한 기사가 없다. 둘째는 어린아이들의 찬양이 없다. 세째는 성전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는 말을 듣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멸할려고 꾀하였는데 그 이유는 백성들이 그의 교훈을 듣고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는 내용이 있다.
또 한가지 차이점은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고 묻는다.(마21:23) 그러나 마가복음은 성전을 청결케한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묻는다.(막11:27) 그리고 그 이하의 예수님의 가르침 내용도 마태복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책망하고 심판하리라는 내용이 더 조직적이며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마태복음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고 마가복음도 그것을 전제하지만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예수님이 권세 있다는 것을 아울러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설명하도록하겠다.
공관복음은 요한복음처럼 성전을 청결케하는 일이 성전을 새로 짓는 것과 상관이 없다. 21장에 나오는 기사에서는 성전을 새로 짓겠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전을 청결케하는 기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그 문맥을 살펴 보도록하겠다. 21장부터 25장은 한 단락이다. 주된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거절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심판과 그로 인한 예루살렘의 심판 그리고 그때 즉 세상 끝에 교회가 믿음으로 깨어 있을 것에 대한 권면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24장에서 옛 백성의 배교에 대한 심판이 절정에 이르며 종말의 주님의 심판과 믿는 자들의 권면이 연결된다. 교회도 행함에서 이 주님을 거절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21장은 23:37이하와 짝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21장은 공생애에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을 말하며 24:39은 주님 재림할 때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찬양의 내용을 일치시켜서 한세트를 이루게한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왕으로 입성한 주님을 거절한 그들은 주님이 다시 왕으로 오시기 까지 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전 청결 사건도 이해가 되어야한다. 23장과 24장에서는 성전 청결이 문제가 아니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허물어 질 것을 말한다. 즉 배교에 대한 심판의 문맥에서 이해해야한다.
성전 청결의 앞뒤 문맥에서도 그러한 사실이 주가 된다.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왕을 무리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로 찬양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들어가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는 누구냐고 물었다. 이것은 2:3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메시야로 거절하는 것이 전제된 소동이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찬양하지만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거절한다. 그래서 17절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유하셧다.
그것을 18절 이하의 내용에서도 알 수가 있다. 18절 이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내용이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호9:10) 열매 맺지 못한 것은 선지자적인 관점(미7:1, 렘8:13)에서 이스라엘이 에수님을 거절한 것을 나타낸다. 성전 청결 기사는 이 두 사이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성전 청결도 예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이런 문맥의 정황으로 여기서 성전청결은 요한복음처럼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는 의미가 전면에 부각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더 자세히 살펴 보고자한다.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하시고 말씀하셨는데 선지서를 인용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는 이사야서를 인용하고 하나는 예레미야서를 인용하고 있다. 이사야서 56:7의 인용 내용은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내용이다. 이사야서의 문맥은 여호와의 안식일과 언약을 지키는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물과 기도를 드릴 것이라는 내용이다. 마가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대로 인용하고 있고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하기 때문에 생랴된 듯하다. 예레미야의 7:11내용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인데 개작해서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로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 7:11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괴하고 배교하면서 성소에 출입하는 자들에게 한 말이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이사야서의 인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서의 인용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성전 청결케 한뒤로 언급한 말이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는 말이 강조점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청결 기사도 그들의 잘못된 행위나 예배에 대한 것에 대한 책망이 강조점이 아니다. 예레미야 때에는 여호와의 언약을 거절함으로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그들을 책망하고 훼방하는 것은 여호와의 언약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인 자기 자신을 거절함을 인해서 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소에서 행하는 것이 합법하더라도 도적의 행위이며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 아들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 시대를 전제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단순한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로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선지자가 약속했던 여호와의 종, 메시야로서 그 일을 행하고 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성전 자체를 훼방하지 못하였다. 또한 성전을 파괴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사야서의 인용을 말씀함을 통해서 새 시대가 전제됨을 알 수 있다. 구약처럼 제사장과 서기관만 온전한 자만 어른만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치셨고 성전에서 어린아이들의 찬송을 합당케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상하고 분하게 여겼다. 이들의 분함은 옛 방식으로는 당연할지 몰라도(구약 때는 불구자나 어린아이들은 성전에서 찬양하지 못함-레위 지파가 찬양)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거절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기사는 메시야에 의해서 성전이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말이 성취될 것인데 예루살렘은 이 메시야를 거절한다. 이 거절 때문에 그들의 제사 행위는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배교 행위이다. 그래서 주님이 성전을 청결케하고 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그 일을 행하고 있으며 모세 율법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그들의 심판을 상징한다.
3)공관복음에서의 성전 재건의 의미
공관복음에서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내용은 성전 청결의 내용과 함께 있지 않다. 마태복음과 마가 복음에만 나타나는데 모두 예수께서 공회 앞에서 심문 받을 때 나온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았다. 그러나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가복음과는 달리 마태복음은 두 사람의 증인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의 증거가 일치하기 때문에 그 증거는 참되다.(신17:6) 그러므로 성전을 헐고 사흘에 다시 지을 수 있다한 것은 참 증거이다. 이 증거를 말하였으나 예수님은 잠잠하였다. 결국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죽음의 판결을 받는다. 이 증거로 인해서 대제사장인 에수께 묻기를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말하였다. 성전을 헐고 짓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27:40참조) 그 증거 때문에 맹세로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을 ㅇ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시인하였다. 이에 대해 대제사장이 참람하게 여겼고 더이상 증인을 요구하지 아니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고자하는 것은 성전을 새로 짓는 의미에 대한 것이다. 어떻든 여기서 볼수 있는 것은 메시야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성전을 짓는 분이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때도 성전을 짓는 시기는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기에서 지어진다. 성전의 의미는 구약 성경에서 4부분에서 주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주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서 성전 건립의 의미를 살펴 보겠다. 포로 후의 성전이 물론 더 영광스럽다고 하지만은 새로운 식양으로 지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에스겔 성전은 새로운 식양이 제시되고 있지만 구약 역사에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포로후의 성전 문제도 학개나 스가랴, 에스겔의 문맥에 따라 그 의미들을 밝혀야한다.
출애굽 시대 때 성막이 이스라엘 성전의 모든 토대가 된다. 그때 처음 하나님의 거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평강을 허락하셨을 때 성전을 짓는다. 물론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보도하는 바가 차이는 있지만 출애굽 시대의 성막과 규모와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열왕기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전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셔서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게 하신 분이시다. (왕상5:)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다는 것은 곧 여호와를 위함인데 여호와의 거처로서 지음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거하심은 언약궤 안에서 거하심이다. 다시 말해서 이 전은 출애굽기 성막처럼 여호와의 언약궤를 두는 처소이다. 이전에는 움직이는 장막 가운데, 임시 처소에 있었지만 이스라엘에게 평강을 주시고 자기 궁전을 짓고 거하신다. 그래서 언약궤를 그 전에 놓았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고 아무도 능히 섬기지 못하였다. 또한 이 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죄를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회개하고 기도하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을 돌이킬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이 거기 있으며 여호와의 눈과 마음이 항상 거기 있다. 그러나 조건이 있는데 여호와의 율법을 순종하면 복을 줄 것인데 그렇지 아니하면 이 전도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런데 그 전의 건축에 있어서 역대기와 비교해 보았을 때 두가지 점에서 특징이 있다. 첫째는 묘사가 전반적 집과 기구들을 만드는 것에 대한 묘사로 되어 잇다는 것이다. 둘째는 솔로몬 궁전 건축과 함께 언급되어 있다. 솔로몬 궁 건축을 중심으로 앞에는 여호와의 집을 짓는 내용이며 뒤에는 전의 기구들을 만드는 내용이다. 솔로몬 궁은 여호와의 전 안뜰과 낭실처럼 지었다.(왕상7;11) 그리고 그 궁에는 재판하는 보좌의 낭실이 있다.(7:7) 이 장소는 단순한 국정 수행하는 곳이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시행하고 집행하는 곳이다. 결과적으로 ==열왕기서에서 성전은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고 거하시는 여호와의 집이며 궁전이다.
역대기서에서 성전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그 장소는 모리아산이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던 곳이며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나타나 성전 장소로 정한 곳이다. 성전에 대한 묘사는 열왕기처럼 집짓듯이 전반적인 묘사가 아니라 제사 의식과 관계된 곳이 강조되어 있다. 중심되는 언급은 지성소, 휘장, 제사장의 뜰, 놋단, 제사장이 씻기 위한 놋바다, 번제를 씻기 위한 물두멍, 금등대, 금 등잔, 떡상, 금대접, 기타 기구들이다. 성전 낙성식에도 레위인들의 봉사가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레위인들은 24반차로 나누어서 성전에서 찬양한다. 결과적으로 역대기에서 성전은 여호와께서 계시는 처소인데 에배 드리는 장소이며 자기 백성에게 얼굴을 향하시며 자기 백성의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시는 장소이다.
이상에서 구약의 증거들을 보았을 때 한 성전이 불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이전의 구원역사를 완성하시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을 때 하나님의 집도 바뀐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는 질서가 새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 왔을 때 성전 재건의 약속은 종말론적 소망과 결합되어 있다. 특별히 학개서나 스가랴서에서 그런 사상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에스겔서 40장 이하에 나타나는 성전은 구약 역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에스겔서도 메시야적 소망으로 이해한다면 그 성전은 메시야 나라에서 세워질 성전이다. 그랬을 때 그 성전은 메시야 나라에서 세워지는 성전이다. 특별히 스가랴6:12은 그 사실을 약속하고 있다. 또한 유대인들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음을 지금 본문의 증거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그러면 메시야가 세우는 성전은 어떤 성전인가. 복음서의 말대로 지금 성전은 헐고 새로운 성전을 짓는 것이다. 곧 옛 시대 즉 지금 성전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였던 질서는 끝나고 새로운 성전에서 함께 하실 것이다. 메시야 안에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열리기 때문이다. 구원의 새 시대는 예수님의 증거와 사역에서 나타난다. 여기서의 예수님의 증거는 너희들의 말처럼 내가 메시야다는 것과 그러나 이 후에는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예수 자신의 증거를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어떠한 분인가를 설명함 안에서 새 시대의 특성이 나타난다. 마태복음은 이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되셨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영광이 연결되어 있다. 고난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으로 오르기 위한 순서이다.(26:12,64)그래서 그의 죽으심에서 온 땅이 진동케되고 죽은 자들이 일으킴을 받고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 이러한 사건은 구약에서 묵시적이며 종말의 사건을 언급하는 내용인데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특히 성전과 관계하여 보았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옛 제도의 끝과 새로운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을 지시한다. 이것이 새로운 성전의 의미이다. (여전히 옛 성전으로, 옛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새시대를 설명하는 것이 마태복음의 특징이다-21:13, 27:53)
그러면 예수님이 지으신 것은 선지서에 약속된 성전인가? 그렇지 않다. 선지서에 나타난 성전이 이전 시대보다는 영광스러워도 여전히 휘장으로 가리운 성전이다. 그러나 주님이 세우신 성전은 휘장이 제거된 하늘 성전이다. 왜냐하면 죽으심에서 휘장이 갈라졌고 주님이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왕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은 성전을 짓는 것과 왕이 연결되어 있다.-메시야에 대한 강조-26:61~64, 27:40~42) 그 권세로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하신다.
마가복음에서는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짓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땅에 속한 성전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성전을 언급한다. 마태복음과는 달리 예수님의 승천 기사가 있는데 16:13에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올리우신 분이시다. 보좌는 왕적인 강조점이 있지만 구약에서 하늘 보좌는 성소적 의미를 깔고 있다.
참고로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그런 의미들이 나타나다. 스데반이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한 것을 말하면서 그들이 성령을 거스려 예수님을 거절한 사실을 책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다. 그러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것을 보았다. 이것은 하늘 성소를 본 것이다. 여기서의 대비는 손으로 지은 성전과 그렇지 아니한 하늘 성전 그리고 성령을 거스림과 성령의 충만함이다. 결국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하늘 성소에 예수께서 오를 것을 말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신 분이시다.
히브리서9장에서는 그가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말한다. 땅에 속한 시대인 옛 시대는 끝나고 하늘 보좌의 시대인 새 시대가 열렸다. 주님께서 찬송 받을 자의 아들로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2.산상수훈
본 논문에서 산상수훈을 전부 주석을 하지는 않고 산상수훈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한다. 여기서 주장하고자하는 산상수훈은 구약의 도덕법의 정신을 잘지키고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법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언약의 법의 토대에서 읽어져야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언약의 법으로서의 특징과 성격을 밝히겠다. 그 언약적 성격 때문에 다음이 전제되어야한다. 첫째 산상수훈은 언약체결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둘째 첫째 이유 때문에 구원 얻는 기준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째 모세 율법의 해석이나 주석이 아니다.
1)언약체결적 성격
산상수훈은 언약체결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산상수훈의 구조와 내용 자체에 있다. 그 구조는 십계명과 신명기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 그것들의 구조를 살펴 보았는데 전문, 역사적 서언, 계명, 축복과 저주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구조이다.
(1)전문5:1~2
여기 나오는 전문은 출애굽기 20:1(십계명)이나 신1:1~5에 나오는 전문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십계명과 신명기의 유사성을 서로 비교하면서 설명하도록하겠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와 동일 선상에 두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문학적인 형태와 내용을 보고자하는 것이다. 그래야 산상수훈의 성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마태복음 차체의 증거 안에서 이해 되어야한다. 그 내용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쳐 가라사대 안에서 모세를 능가하며 새시대를 주시는 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십계명의 전문과는 그 권위에 있어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십계명 서언에서는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로 말하고 있다.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로 말하고 있다. 십게명은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을 대면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셨고 백성들은 두려워 떨어따.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고 주님이 친히 자기 백성을 대면하시면서 말씀하신다.
십계명을 시내산에 말씀하신것처럼 마태복음도 평지에서 설교한 누가복음과 비교했을 때 의도적으로 산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 산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5장처럼 산에서 말씀하시고 15:29에서는 병자를 치료하시며 높은산에서 영광스럽게 되셨고(17장) 부활하신 후에도 갈릴리의 명하신 산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다.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특이한 것은 산상수훈과 부활하신 후에 있는 내용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산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출애굽기에서 산은 하나님이 친히 강림하셔서 영광을 나타내시고 말씀하신 장소이다. 또한 하나님의 산은 시온산,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일컬어진다. 이사야2:2(미4:1~3)의 말대로 하자면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 나며 많은 백성이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여호와께서 그 도로 가르칠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이 시온에서 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2:2의 상황은 메시야 나라에서 성취될 일을 나타낸다. 마태가 의도적으로 산에서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또한 복음서 전체에서 산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사상이 깔려 있다.
무리를 보시고 앉으셨는데 제자들이 나아왔다. 이것은 마치 구약 시내산에서 백성들은 산 아래 있고 모세가 가까이 가는 것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상은 마태복음에 게속해서 흐르고 있다.
신명기의 내용과는 그 내용에 있어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선포한 장소와 대상, 말씀하신 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말씀의 내용에 있어서다. 구체적인 내용은 뒤에서 설명되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신1:6의 내용이다. 모세가 말한 내용이지만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이 근본적으로 다른 형식이다. 물론 1:6의 말이 어디 까지 한정하는가를 살펴야 하지만 여호와께서 이르셨다는 것이 근본 토대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이르셨다는 구조가 아니라 그가 입을 열어 가르쳤다. 그가 곧 자기 백성 중에 오셔서 천국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세와 같은 반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 전문은 산상수훈이 누구의 말씀인가를 단순히 보도하지 않는다. 시내산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이 분은 하나님의 권세로 말씀하고 있으며 모세보다 크신 분이시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처음부터 임마누엘로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다. 이 아들은 11장의 증거대로하자면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받은 상속자이며 아버지의 계시로서 아들이다. 그는 천국을 가져 오는 하나님이시다. 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구약처럼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시거나 모세를 대신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친히 자기 백성과 대면해서 말씀하신다. 이것이 주님이 세우시는 천국의 특성이다.
(2)역사적 서언5:3~20
역사적 서언은 전문과 함께 언약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이제 나타난 역사적 사실 때문에 언약 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서언도 십계명과 신명기와 유사하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 즉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구약 언약에서 근본적인 역사적 서언은 그들을 애굽의 권세에서 구원하였다는 것과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드린다는 것이었다. 산상수훈은 역사적 서언이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3~15절과 17~18절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권면하는 내용이 그 서언에 상응해서 두부류로 나누어진다. 16절과 19~20절이다.
첫번째 부분은 두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첫번째는 3~12까지이며 두번째 부분은 13~16까지이다. 3~12은 복에 대해서 선언하고 있다. 그 복은 ...을 받는 것에 의해서 나타나는데 중심되는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다. 지금 그 복이 심령이 가난한자....들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을 천국 백성으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11절 이하에서는 그 대상이 2인칭으로 바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인하여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 지금 복을 받은 백성, 천국의 복에 참여하는 백성을 자기 백성 삼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남은 자들, 긍휼의 하나님과 동행한 신실한 자들이 예수님이 주시는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데 그 복을 받았다는데 핵심이 있다.
13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14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 표현은 선언적인 표현이다. 이전에 하나님이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을 자기 소유삼으심을 나타낸 것처럼 이 표현도 너희는 내 백성이다는 말이 전제되어 있다. 13절과 14~16절은 같은 개념이면서도 그 결과에 있어서는 대비된 표현을 가지고 있다. 13절에서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을 전제한뒤 저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저주는 버리움을 받는 것인데 마태복음 문맥에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14~16절에서는 세상의 빛임을 전제한뒤 적극적인 권면을 하고 있다. 물론 13절에서 저주의 표현을 쓰고 있어도 곧 권면의 말을 하기 위함이다. 결국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약적인 권면을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권면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천국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20절과 7장에서 확대된 방식으로 나타난다.
두번째 서언 부분은 두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17~18절과 19~20절이다. 17~18은 역사적 서언을 새로운 관점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19~20은 거기에 따른 언약적 권면을 하고 있다. 이 서언은 두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첫번째 서언과 21절이하의 연관성 이다. 앞부분과는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지만 상호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완전케하기 위해서 오셨다는데 있다. 여기에서 단지 율법으로 말하지 않고 선지자를 첨가하고 있다. 그렇게함으로 옛 역사를 완성하러 왔다는 것을 말한다. 옛 역사의 완성은 남은자에게 천국을 주심으로, 빛과 소금으로 삼으심으로 완성된다. 그런데도 옛 언약의 완성은 율법의 완성에서 나타난다.
권면의 말에 있어서도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빛과 소금이다는 것은 사60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에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하라로 말하고 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은 20절에서 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와 연결된다.
17~18은 예수님 자신의 오심에 대한 설명으로 설명된다. 17절 말씀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할려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에서 설명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18절에 설명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기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온전케하기 위함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온전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태복음에서 온전케한다, 성취한다는 것은 자주 사용된다.(1:22, 2:15, 17, 23, 4:14, 8:17, 12:17, 13:35, 21:4, 26:54, 56) 마태복음의 특징중의 하나인데 구약 성경의 성취를 언급하는 표현이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께서 옛 약속의 성취자로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도 성취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율법만 언급하지 않고 선지자를 첨가함으로 그가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새로운 계명을 주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지시한다.
그렇다면 18절에 나오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이 말은 천지가 없어지기 까지와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한글 성경은 다 이루리라)에 의하여 한정된다. 이 두가지 한정구는 서로 대응하고 있는데 똑같은 사건을 가르킨다. 17절과 문멕에서 살핀다면 18절은 17절의 이유를 설명한다. 그런점에서 모든 것이 일어나기까지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완전케한다는 것과 연관해서 이해해야한다. 율법은 예수님의 성취의 일이 일어나기 까지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한다. 그것은 천지가 없어지기 까지와도 동일한데 구약에서 천지가 없어지는 것은 종말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에 의해서 구약의 약속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17절과 18절에서 말하고 있다.
사2:2에서 말하듯이 구약 개념은 종말에도 율법이 폐하여지지 아니한다. 오히려 율법은 영원하고 여호와는 그 산 시온에서 만민을 다스리시며 통치하신다. 그리고 열방은 그 도를 베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말에는 페하여져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 자체의 영원함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경륜 안에서의 성취를 말한다.
그런데 구약 약속의 성취를 율법과 관련해서 말하고 잇다. 그것은 구약 언약의 핵심은 율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해석처럼 세상 끝까지만 율법은 영원하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오심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함이 아니라 온전케하려 함이다. 모세 율법은 새 시대에 합당치 않다. 그것은 폐하여져야한다. 종말의 새 질서, 새언약 질서에는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폐함은 소위 무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성함으로 폐함이다. 그것은 새시대에 맞는 온전함을 필요로한다. 그 온전함은 종말론적인 온전함이다. 그 온전함은 예수의 성취를 통한 온전함이다. 그 온전함은 새 언약으로서 온전함이다. 그 온전함은 21절 이하에서 설명되는 새로운 관게로서의 온전함이다.
그러면 어떻게 율법은 온전케 되었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온전케 되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나신 분이지만 임마누엘로 자기 백성 중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으로 오셨다. 그리고 시험을 받으셨으나 사단의 권세를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귀신을 쫓아 내시고 병든자를 치료하시는 권세있는 하나님 나라를 가져 오시는 분이시다. 예수님 오심으로 천국이 임했고 율법은 온전히 성취되었고 옛 시대는 지나갔다. 엣 율법은 주님이 세우시는 천국에는 합당치 않다. 온전치 않다. 그것은 폐하여져야한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관계가 임함으로 온전케 하셨다.
19절 이하에서는 그러기 때문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하고 있다. 19절은 천국에서 큰자가 누구인가를 말한다. 이 계명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지극히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이 계명중에 지극히 작은것 하나라도은 18절에 있었던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와 동일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약 모세 율법을 그대로 행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19절이 17~18절의 결론으로서 말하고 있다는 것과 19절 자체의 대조된 설명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는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와 행하며 에 있다. 여기서 버리고의 의미는 율법과 관련하여 17절에서 말한 폐한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행한다는 말은 율법을 완전케 즉 성취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 행함은 새로운 관계 안에서의 행함이다. 율법을 온전케하는 행함이다.율법의 온전함에 대해서는 21절 이하의 에수님이 예증으로 선포하신 계명에서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이다. 누구든지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율법을 폐하고 또 그같이 가르치는 자는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심은 종말론적 새 시대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권위로 율법을 온전케하려 왔다고 선포하고 있다. 온전케한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율법을 잘 지킴으로 성취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구원 역사의 새 시대가 임했음으로 성취된다는 말이다.
20절의 말씀은 두가지 기능을 하고 있다. 하나는 17~19을 요약하며 21절 이하의 주제를 나타낸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은 모세 율법 안에서의 더 나은 의를 말하지 않는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이다. 그들의 의는 모세 율법 안에 있는 의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의 선포와 사역 안에서 새로운 시대와 관계가 왔다. 그것은 율법을 성취한 시대이다. 이전 율법은 그 자체로는 온전해도 새 시대의 빛에서 온전치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고 잇다.
그렇다면 20절의 말씀처럼 그 의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인가. 여기서 천국에 들어가리라한 것은 언약적 관계 안에서 말씀하는 것이지 율ㅂ버을 잘 지켜 의를 행하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천국을 소유한 백성들에게 이 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 소위 그 의가 공로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13~16절처럼 언약적 요구이다. 출애굽기 19장이나 신명기에서 살펴 보았던 것처럼 이미 언약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이룰 것을 말씀하고 있으며, 이의를 나타낸 자들은 그 복을 누린다는 말이다. 그 복은 지금 천국을 누리며 또한 새언약 백성은 주님 재림하시는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역사적 서언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 천국이 임했다는 것이며 율법과 선지자가 성취된 새로운 시대가 예수의 오심 안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 관계 안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언약적 순종을 말씀하고 있다. 천국의 백성은 이 관계를 드러내야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구약 언약서의 문맥에서 읽어야한다.)
(3)언약의 법5:21~7:12
이 부분의 제목을 언약의 법으로 잡았다. 그러나 오해가 없어야 한다. 여기서 에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새로운 계명과 법규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에서 선포하신 말씀은 그 자체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서언을 잘 이해한 상태에서 접근을 해야한다. 그래야 예수님이 선포한 의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앞에서 20절이 두가지 기능을 한다고 말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21절 이하를 여는 주제적인 말이라고 했다. 20절이 적게는 5:48가지 한정하겠지만 넓게는 7:12이나 산상수훈의 끝까지 보아도 된다. 20절에서 언급된 더 나은 의를 이루는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말씀하기 때문이다. 또한 21절이하는 17~20과 율법을 온전케한다는 것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제자들의 의를 비교한다는 점에서 연결점을 가지고 잇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님이 선포한 것은 새시대의 에증으로서 율법을 온전케하고 성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언약 관계가 임했음을 구체적인 게명의 실례로 보이고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 계명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형식이 옛것과 대비된 방식으로 설명된다는 것에서 알 수가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부분을 계명으로 보고 지킨다면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다. 항상 역사적 서언의 관점에서 보아야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부분의 제목을 언약의 법으로 붙인 이유는 다른 복음서와 비교했을 때 더 조직적이며 계명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본문은 세부분으로 나눌수가 있는데 나누는 기준은 문학 형식에 있어서 그렇다. 여기서 모든 계명을 모두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산상수훈의 성격을 밝히고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a)5:21~48율법의 성취
문학 형식은 옛 사람에게 말해진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의 대조는 옛 사람-너희들, 말해진 것-나는 이른다는 것이 서로 대조 되어 있다. 여기서 옛 사람은 모세 율법을 받은 백성들을 말한다. 그리고 말되어진 내용은 모세 율법을 말한다. 그 이유는 대조되어 있는 율법이 모세 율법을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들었다는 것은 그 내용이다. 즉 옛 사람에게 말한 것 자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모세 율법을 반박하고 있지 율법의 전승이나 해석을 교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밀되어진것과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말되어진 것은 시내산에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또한 그 말씀을 대행한 모세의 말이다. 하나님이 십게명의 말씀을 친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른 규레들은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셧다. 그러나 여기서 수동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이 그들에게 되어졌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구약 하나님이 말씀하심과 대조를 이룬다. 이 말은 하나님의 권세에 대항해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으로, 아버지의 계시로서 친히 말씀하고 있다. 구약 때처럼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두려움 가운데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다가온 옛 언약에서 신실한 자들에게 친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랍비들처럼 율법의 참된 의미를 말한다거나 도덕적인 울타리를 다시 치고 잇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내용은 모세 율법을 능가한다. 즉 모세 율법과 다른 새로운 법을 주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에 새로운 법규와 규칙을 주고 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십계명의 인용에 있어서나 아니면 십계명이 아닌 다른 율례의 인용에 잇어서 구체적인 시행령을 인용하고 있으며 그것과 대비해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윤리적 계명으로 설명된다. 즉 새로운 법규를 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성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에수님 말씀 자체대로 규례로 받아서는 안되고 지금 역사적인 상황 가운데서 그 말씀을 받아야된다. 예수님이 율법을 성취하려 왔다는 빛 가운데서 해석을 해야한다.
(b)6:1~16외식하는 자들(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대비된 의와 상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이 6:1은 이 단락의 주제적이며 서론적인 말이다. 왜냐하면 2절 이하의 문장 구조에서 그 형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2절 이하의 주된 문학 형식은만약에 너희들이...을 한다면 또는 ...할 때에로 시작한다. 그리고 외식자에 대한 설명과 그들의 상, 그리고 외식자와 대비해서 그러므로 너희는 ...하지말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문장 구조는 5장에 있었던 옛 사람에게 말한바-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와 상응하는 구조이다. 5장에서는 예수님이 율법을 성취하러 왓음에 강조를 두고 있고 6장은 제자들이 행해야될 더 나은 의가 강조되어 있다. 그런데 5장처럼 옛 언약과 대비해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한다. 이 말은 2절 이하에 나오는 외식하는 자,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것과 상응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단지 종교적인 행동에서 외식하는 자들을 교정하고 책망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역사적인 전제를 깔고 보아야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모세 율법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했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가 왔다는 것이다. 율법이 폐하여지고 성취된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이 물론 외식하는 자들과 대비된 의를 말하고 있지만 모세 율법의 완성자로서 외식된 삶을 교정하고 있으며 교정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율법과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근본적으로 모세 율법의 의는 사람에게 보이는 의이다. 그 말은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의의 토대는 모세 율법이고 모세 율법의 판결이다. 또한 그들의 범죄와 의는 모세 율법을 맡은 자들의 판결이다. 즉 중보적 직임을 통해서 그들은 판결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 율법 아래의 의는 사람에게 보이는 의이며 외식이 가능한 의이다. 그들이 외식해도 그것이 불의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모세 율법 아래서 합당하며 의로운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모세 율법 아래의 의를 끝내는 주님으로서 말씀하고 있으며 제자들에게 새로운 의를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구약때처럼 하나님이 성소의 언약궤 안에 계시고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들을 ㄴ통해서 지혜의 법이 실행되고 의가 시행되는 시대가 아니라 아들 안에서 새로운 의의 시대가 왔다. 하나님은 휘장으로 가리우고 여러 중보자를 통해서 자기 백성 중에 계신 것이 아니라 아들 안에서 임마누엘 하셨다. 그러므로 이전 시대는 사람에게 보이는 의라고 말할 수 있고 지금은 하나님이 보신다고 말할 수 잇다. 이 말은 구약 때는 하나님이 보시지 아니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다. 여러 중보자를 통한 아버지가 아니다.
사람들을 통해서 의를 판결하시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은밀하게 하라나 은밀히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라는 말은 단순히 다른 사람 모르게나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고 사람에게 보이는 것과 대비된 표현 방식이다. 결국 율법의 말씀이 주님의 말씀 안에서 성취된 것처럼 주님의 말씀 안에서 새 시대가 주어진 것이며 제자들은 이 의를 이룰 수가 있다.
(c)6:19~7:12적극적인 권면(의를 구하라)
이 단락은 앞 단락과 형식에 있어서 차이가 약간 있다. 부정적이거나 대비된 구조는 없고 직접 명령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대비시키는 어구(예를 들어 옛 사람에게 말한바, 혹은 외식하는 자와 같은 어구)가 없지만 구문상 대비가 전제된다. 곧 직접적 명령이 ...하지 말라라는 부정적 명령과 ...하라라는 긍정적 명령이 대비되기 때문이다. 이 명령의 대비는 이방 사람과의 대비를 통한 명령이 아니다. 모세 율법 안의 경륜과 대비된 명령이다. 그래서 부정적 명령에 포함된 것은 모세 경륜을 따라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긍정적 명령에서 말하는 것은 이제 새로운 경륜 가운데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로 바로 앞 단락과 관계된 어구는 없어도 구문 형식은 일치한다. 즉 앞에서 말했듯이 ...하지 말라와 그것과 대비된 ...하라의 구문이 6:1~16의 구문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내용상에 있어서는 같은 내용이다. 그러므로 의를 구하는 것도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지 아니한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나라와 의를 구하느 것이다.
7:12은 이 단락의 결론일 뿐만 아니라 5:17부터 시작된 천국의 의에 대한 결론이다. 그것은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는 말을 통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요약하고 있는 사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것이 마22:37`38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이런 계명은 구약 때는 한 종목이었다. 그러나 강령 즉 모든 율법이 이 두 계명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단순히 구약 율법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는 가운데서 요약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7~11절의 내용 때문이다. 왜냐하면 12절은 7~12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7~12은 구하고 찾으라고 말한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구하라는 말인가? 누가복음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 부분에 이 말이 나오는데 성령을 구하라고 말하고 있다.(눅11:9~13)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승천할 때도 아버지의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면 문맥이 서로 다르다. 야고보서1:5은 지혜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다. 산상수훈 자체에서는 6:33에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여기서는 산상수훈의 문맥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겟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서기과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근접한 단락도 외식하는 자들과 대비된 즉 구약의 의와 대비된 천국의 의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야고보서1:5과도 병행한다. 왜냐하면 구약 개념은 지혜와 율법의 의는 일치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그 의를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의가 아직 없기 때문에 구하라는 말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의가 왔기 때문에 의를 구하라는 것이며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이다. 이것은 언약적 간구를 표현하는 것이어서 천국의 의를 말하는 산상수훈의 결론적 성격으로 합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12절의 말씀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한다. 이제 새로운 의가 왔고 하나님은 그 의를 구하는 자에게 주시기 때문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의는 구약 때처럼 모세를 통해서, 휘장 안에 있는 율법을 통해서 주어지는 의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 친히 말씀하시고 주시는 의이기 때문이다.
(4)축복과 저주(7:13~27)
이 부분의 말은 단순히 이제 구원 얻는 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이 부분은 구약의 언약의 말씀처럼(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언약적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축복의 부분은 구약의 언약서처럼 언약의 결론적 성격으로 축복의 말씀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축복의 말씀은 제일 처음 8복에서 나타났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우시는 언약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구약의 모든 복의 약속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복이 먼저 나와 있다. 그런데 그 복은 구약 자체의 약속된 복은 아니다. 이 복은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이해되어야한다. 또한 이 복은 율법을 지킴으로 주어지는 복이 아니다. 물론 구약에서 언약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이 임할 것이다고 말하고 있고 그래서 구약의 남은 자들이 복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 이 복은 율법을 지킴으로 주어지는 복이 아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의 복은 가나안 땅의 복이지 에수님께서 세우시는 천국의 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저주의 형태가 권면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구약 언약 체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구약 언약의 법에서도 저주를 언급하는 이유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언약 위에 굳게 서도록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처럼 산상수훈도 저주와 유사한 경고들이 나와있다. 이 경고는 두가지의 대비된 길을 제시함으로 나타난다. 좁은문-넓은 문, 좋은 열매-나쁜 열매, 반석 위에 지은 집-모래 위에 지은 집, 지혜로운 사람-어리석은 사람이 대비되어 설명된다. 결국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도 한가지 사상을 반복해서 설명한다. 그것은 마지막에 있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대비에서 나타난다. 즉 주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과 그렇지 아니하는 사람의 두 길에 대하여 설명함으로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구약 지혜문학의 표현 방법이다. II장에서 우리는 구약 지혜는 율법 지킴에 있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또한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의 복과 저주에 대한 것도 살펴 보았다. 그것처럼 여기에 나타난 언어들은 구약 지혜 문학의 언어와 유사하며 듣고 행하는 자는 지혜있는 자로 언급하며 그렇지 아니한 자는 어리석은 자로 말한다.
그런데 그 저주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말은 앞에서도 살폈듯이 이제 회개하고 주님의 말을 듣고 행하면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천국된 백성에게 경고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 언약의 복을 누리는 것을 말하는데 궁극적으로 재림하셔서 세우시는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세 율법과 다른 의, 천국의 의였다. 이 말씀을 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가 있다.
5)후기-권세 있는 자와 같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랐다. 왜냐하면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권세 있는 자는 마26:64에 권능의 우편을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로 가르치는 모세나 그의 제자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로 말씀하시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마11:25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는 아버지와 계시에 있어서 일치하는 분이시며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그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그는 권세 있는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지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말씀하고 있지 않다. 그는 자기 백성 중에 임하신 하나님이시며 천국의 권세있는 왕이시다. 구약처럼 대리자를 통해서 대리 왕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의 내용도 권세가 있고 모세 율법과 그 해석하고는 다른 새로운 의의 법이다. 이제 새로운 관계, 하나님이 휘장으로 가리우고 대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2)윤리적 성격과 성취
앞에서 산상수훈은 단순한 규칙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윤리적인 요구는 없고 단순한 새시대의 상징인가? 그렇지 않다. 분명히 산상수훈은 윤리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행치 아니하면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을 듣고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불에 던지바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율법은 지금 전혀 이룰 수 없을 것이다고 말하며 어떤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맞 않다. 분명히 언약적 경고에서는 지금 그 율법을 듣고 행하라고 말하고 있지 미래적인 부분으로 돌리지 않는다. 또한 예수님은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가르치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산상수훈의 말씀이 우리 중에 이루어지는가? 마태복음에서는 바울이 말한것처럼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므로 의를 이룬다는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상수훈의 언약적 성격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상황을 이해해야한다. 예수님이 법을 선포하셨을 때 그것은 자기 백성의 능력이며 복이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겠느냐고 물었을 때 예라고 대답한 것과 같다. 에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려 오셨다, 누구든지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크다 일컬을 받으리라,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닷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새 시대의 경고의 말씀이 되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의의 요구가 자기 백성들을 그 의의 성취자로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킬수 있는 것은 율법이 인친 언약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언약으로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언약을 지킬 수 있엇다. 그런 것처럼 산상수훈의 성취도 이제 새로운 언약 관계, 즉 천국이 임했고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움으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 자녀와 백성과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에 에수님의 말씀 성취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 관계를 나타내며 율법을 지킴으로 그 관계를 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공로적인것이 아니다. 바울의 구원론을 마태복음에 적용하면 안된다. 마태복음은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열매를 맺으면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말한다. 이 나라는 주님 재림하셔서 세우시는 메시야의 나라이다. 이것은 단순한 공로적인 문제가 아니라 언약의 문제이다. 주님이 땅에 오심으로 또한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짐으로 천국이 임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주님 재림하심으로 땅위에 보좌 우편의 영광으로 나타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세례를 받은자는 주님의 제자이며 천국에 참여하엿다. 주님이 가르치는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지금 빛과 소금으로 천국의 권세를 누리며 나타낼 뿐만 아니라 오시는 주님의 나라에 참여할 것이다.
4.안식일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적이나 표적을 행함 때문에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정죄함을 받았고 핍박을 받았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율법을 잘못 알고 있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의 본 정신과 바른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인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이 부분에서는 살펴보고자한다.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복음서에서 나타난 의미들을 해석하는 길이다.
1)공관복음
공관복음에서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신 기사와 이적을 행하신 내용이 많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안식일에 예수님이 행하신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거절한 내용만 살피겠다. 이것과 관계된 내용은 마12:1~20, 막2:23~3:6, 눅6:1~11, 14:1~6의 내용에 나타난다. 본 논문에서는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하겠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한다. 그래서 에수님의 사역을 구약 약속을 성취하신 분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유대인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그 배교의 내용이 전면에 나타난다.
마태복음에서 안식일과 관계된 내용은 두가지 내용이다.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은 것과 손마른 병자를 치료하는 내용이다. 이 기사는 11:25~30의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 12:1그때에로 앞 부분과 정황을 일치시키고 있고 특히 28~30의 내용은 마태복음에만 있다. 문맥적으로 보았을 때 지혜-계시-베움-쉼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 내용뒤에 안식일에 관계된 내용을 배열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는 안식은 단순한 구약 안식일의 새로운 해석이나 적용이 아니라 모세 시대와 대비된 구원 역사적인 안식과 쉼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안식은 아버지의 계시인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아는 쉼의 안식, 율법의 멍애를 벗어버리고 이제는 주님의 멍애 아래서 쉬는 안식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구약 안식의 새로운 법규의 해석이나 적용으로 이해하면 안되고 새로운 안식의 시대의 임함으로 이해하여야한다.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은 기사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말하기를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손마른 자를 치료하는 기사에서는 예수님을 송사하기 위하여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에수를 죽일까 의논하였다. 이들의 반응은 모세 율법 안에서 당연한 것이다.. 안식일은 직접 언약을 파괴하는 죄이다. 안식일에 일을 행하는 것은 죽임을 당해야한다.(출31:12~17, 35:3 이스라엘 언약에 있어서 안식일은 중심된 내용이다. (출31:12~17, 느10:31,사56:1~8, 58:13)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합당하며 예수님은 안식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잘못 이해햇는데 예수님이 바르게 교정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 규례를 재 해석해서 새로운 규례를 준다거나 새로운 틀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에수님은 이전에 주지 못하였던 안식을 자기 백성에게 주고 있다. 그것은 구약 율법의 연속 선상에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증거에서 보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11:25~30부터 계속되어온 문맥을 살펴야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시자이며 아버지의 상속자이다. 그 아들이 세상에 왔고 그러므로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 그러한 사실은 구약 시대에 지혜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다. 그들은 알지 못한다. 율법의 멍애 아래서는 알지 못할 뿐만 아리라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이들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대비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를 안식에로 초청하고 있다. 이 말은 율법이 너무 무겁다는 말이 아니다.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아는 계시에 비하면 그것은 무거운 짐이요, 종된 멍에이다. 이제 구약 시대의 지헤자에게 베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아들에게 베우면 쉼을 얻을 것이다. 구약 지혜자들은 율법 아래서 판단하는 직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들로서 예수님의 증거가 성전보다 더 크신이로 안식일의 주인으로 나타난다. 성전보다 더 큰이, 안식일의 주인은 구약 개념으로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다. 예수님은 그가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전보다 더 큰이의 개념은 두가지로 설명된다. 하나는 다윗이 성전에서 먹는 일과 또하나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일하는 내용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윗처럼 성전에서 먹는 것이 아니라 성전보다 더 큰이로 먹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성전보다 더 크신 분으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가 없다. 구약 성소에서의 안식의 떡이 아닌 들판에 있는 밀이삭도 안식의 떡이며 그것을 먹는 것은 율법에서 규정하는 일이 아니다. 성소보다 더 큰이가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또한호6:6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노라한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왜냐하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호세아의 문맥은 이스라엘의 배교 상황에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알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 병렬 구문에서는 자비와 하나님 아는 것, 제사와 번제가 일치된다. 호6:1부터 설명된 내용은 하나님의 자비의 내용이었고 그 하나님을 알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 자비와 인애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는 자비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다. 구약 방식으로 완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과 증거 안에서 완성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이 자비를 알지 못한다. 이 자비는 모세 율법 안에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 아래서가 아닌 예수 안에서 무죄한 자를 죄로 징치하고 있다. 이 자비는 29절에 설명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과 상응한다. 여기서의 자비는 안식일의 주인으로 성소보다 더 큰 분 안에서 제자들에게 밀이삭을 먹도록한 자비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는 근거 안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세 율법의 안식의 규례에 속한 분이 아니다. 그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에서 핵심되는 말은 사람이 양보다 얼마큼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에 있다. 이 말은 안식일에 행할 수 있는 선의 목록을 지정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병든 자를 치료하는 상황에서 이해되어야한다. 그는 구덩이에 빠진 양처럼 생명이 위급한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은 안식일 말고도 다른 때 치료할 수 있다. 굳이 안식일에 그의 병을 치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12절의 말을 하고 병을 치료했어도 바리새인들은 에수님을 죽일 궁리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행동은 안식일의 규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사건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양-사람은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 율법의 해석으로 맞지 않다.
예수님은 안식의 생명의 완성자로 이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 때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함으로 자기 일을 쉼으로 안식의 복을 누리고 위급한 처지에 있는 생명을 구함으로 그 복을 나타내었어도 온전한 생명의 치료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율법의 멍에 아래서는 생명의 온전한 치료가 없다. 이제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온전한 생명의 회복이 있다. 완성된 안식의 생명이 자기 백성에게 주어지고 있다.
2)요한복음
요한복음은 에수님이 안식일에 주로 표적을 행하였다. 특별히 그 표적은 에루살렘에서 행한 표적이다. (5장, 7장, 9장)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행한 표적은 모두 안식일일 뿐만 아니라 유대 명절이다.
안식일에 행한 처음 표적은 5장에 있는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를 고친 사건이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가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그 날은 안식일이었고 그 사람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옳지 않다고 책망 받았다. 처음에 그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으나 후에 성전에서 만나 알게 되었다. 성전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범한다고하여 예수를 핍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논쟁으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역과 같은 것으로, 결국 자기 자신이 아버지와 동등하다고 말함으로 변호한다. 이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에수님을 더욱 핍박하게 되었다. 17절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은 19절 이하에서 설명된다. 그는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5장에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기이히 여기게 할 것이다. 그 기이한 일은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는 것이다. 구약 때는 이런 기이한 일이 나타나지 아니했다.
출20장에서는 하나님이 창조의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한다. 신5장에서는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기 때문에 안식일을 쉬라고 말한다. 구약 때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자기 일을 마치신 것이고 안식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안식을 자기 백성에게 주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이제까지(지금까지)일하신다고 말한다. 이 일은 구약 때처럼 처음 창조의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일이 아니다. 이 일은 병자를 치료하고 죄사함을 주는 일,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다. 구약때도 이런 치료의 은혜는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일을 보고 행하시는 아들의 은혜의 일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로 하나님은 이제까지 일하신다. 이제 하나님이 지금까지 일하신 일이 아들 안에서 완성되었다. 그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일하셔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 아들 안에 있는 영생을 주는 일이다. 구약의 안식은 그런 의미로 참 안식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아들 안에서 병자가 온전케 되고 죽은 자가 사는 생명의 일이 구약 때는 나타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행하심은 유대인의 말처럼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 창조의 경륜과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경륜 가운데 있는 모세 율법이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안식일 계명의 새로운 해석이 아니다.
7장은 초막절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특별한 표적은 없다. 그런데 유대인과의 논쟁의 원인은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것을 예로 들어 자기 행동을 변호하고 있다. 할례는 남자 아이가 난지 8일 만에 행한다. 이 제도는 조상들에게 난 것인데 레위기에 그 규례를 언급하고 있다.(레12) 여기서의 강조점은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에 있다. 이 문장은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것과 전신을 건전케하는 것이 대비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을 치료한 일은 모세 율법의 안식일 계명이 규정하지 아니한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건전케 하는 일은 모세 율법보다 더 큰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할례의 일보다 더 큰 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든자는 할례를 받았어도 아브라함의 자손에 속하지 못한다. 성소에 나아가고 예물을 드리는 권리와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세 율법 아래서는 부정한 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이 병든자를 건전케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의 회복을 주시는 분으로 말씀하고 있다. 단순히 병고치는 문제가 아닌 할례의 완성자이다. 할례를 통해서도 병든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계산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 주님을 믿음으로 공의의 판단을 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모세 율법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모세 율법에는 안식일에 할례의 규례는 나와 있어도 병든 자를 치료하는 규례는 나와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났고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다고 말한다. 이 일에 대해 무리 들이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출신을 인하여 예수님을 거절한다. 이에 대해8:12절 이하에서 논쟁이 계속되는데 아들을 영접치 아니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치 아니하는 것이요 그래서 그들을 마귀의 자녀로 정죄한다. 그들이 할례를 인하여 자기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은 정당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아들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지 아니하고 영접지 아니함으로 죄의 종이요,마귀의 자녀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제는 혈통과 할례가 아니라 주님에 말씀에 거하면 주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가 자유케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다. 할례를 통한 생명이 아니라 이제 아버지로 부터 난 자를 믿는 자, 그에게 오는 자는 성령을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영광 받으심으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셨다. 아버지께로 돌아 가셔서 보내신 영이시다.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이다. 이 말을 초막절 끝날 곧 큰 날에 말씀하셨다. 이 날은 거룩한 대회로 모이는 날이다. 초막절은 애굽으로부터 구원 받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키는 날이다. 그래서 그 기간 동안 초막에 거한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새로운 구원을 말씀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약속을 따라 할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구원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보낸 받은 자를 영접하는 자에게 생수의 강, 성령을 주시는 구원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한 생명의 영광, 하늘 성소의 영광의 거처를 우리 안에 두시는 구원이다. 하나님이 광야의 초막에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셨던, 가나안 땅에 집을 짓고 함께 거하셨던 방식이 아니라 우리 중에 장막을 치고 거하신다. 이것이 초막절의 완성인데 가나안 땅의 질서의 완성이 아닌 하늘 성소의 질서이다. 이것이 우리의 거룩한 대회이다. 하늘 성소의 거룩에 속한 거룩이며 이것이 참 안식이요 성회다.
9장은 소경을 치료한 기사가 나온다. 이 표적을 통하여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말씀하신다.이 표적도 안식일 날 행한 표적이다. 구약에서 병든자,불구자들은 죄 가운데 낳은 자들로 저주를 받은 자였고 부정한 자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소에 나가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고 말씀한다. 이 말은 5:17의 말과 동일한 말이다.
그가 세상에 있기 때문에 때는 아직 낮이다. 그는 보내신 이의 일을 행하려 왔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 밤이 올 것이다. 그가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다. 그는 세상의 빛으로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잇다. 요한복음 1장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이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둠의 시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구약의 안식은 어둠에 속한 안식이다. 그러므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치료할 수 없다. 그러나 소경된 자를 치료함을 통해서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 참 빛이 세상에 비췬 시대가 왔음을 증거하신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영접지 아니한다. 오히려 소경된 자가 영접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오히려 본다고하는 자들이 죄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모세 율법과 다른 말씀이다. 모세 율법에서는 보지 못하는 자들이 죄 가운데 난 자들이다. 부정한 자들이다.
이제 모세 율법의 증거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 첫 창조의 빛과 성소 안에서 비추는 빛이 아니다. 첫 창조의 빛과 성소에서 비추는 빛은 소경된 자들은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눈뜬 자만 그리고 제사장만 그 빛을 관리하고 볼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소에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들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 그가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를 나타내시는 참 빛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자 인자를 믿는 자가 그 빛을 본다.
구약 시대에도 빛은 있었다. 저녘부터 아침까지 제사장은 성소의 등잔에 불을 켜고 꺼지지 않게했다. 이것이 밤의 어둠을 가르고 자기 백성 중에 비추는 빛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참 빛이 아니었다. 그 빛은 소경은 보지 못한다.
그러나 땅의 성소에 비추는 빛이 아닌 세상에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이 빛을 믿는 자는 죄 가운데 거하지 않는다. 이 죄는 참빛을 영접지 않고 어둠 가운데 그저 있는 죄이다. 모세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이 빛을 깨닫지 못한다. 모세 율법은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참 빛의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정죄하셨다.
주님께서 이제 주의 교회에 등불이 되시고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비추신다. 여전히 해와 달이 비치고 그래서 일자와 연한과 사시가 반복되고 있어도 주님이 우리의 빛이시며 날마다 우리의 거룩한 삶의 징조가 되신다. 저녁이나 낮이나 이날이나 저날이나 참빛 가운데서 아버지의 얼굴을 대하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산다. 우리가 어린양의 보좌에 함께 앉았다.
5.씻지 않고 먹는 문제(마15:1~20)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고 말하였다. 손을 씻고 먹는 것은 구약 레위기22:4~7에 나온다. 거기서는 제사장이 성물을 먹을 때 부정한 것에 접촉하였을 경우 결레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장로들의 유전은 여기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해석과 적용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에서는 합당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거룩하니 거룩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 거룩은 모든 삶에서 제사장적인 정결로 사는 것인데 기본이 물로 씻음이다. 물론 선지서들에 마음의 정결을 요구하는 곳이 있다. 그러나 외적인 정결 의식을 폐할려는 것이 아니라 모세 율법 아래서 진실히 하나님을 섬기고 걸어라는 표현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에 고소에 대해서 그들을 오히려 외식하는 자들로 책망하고 있다. 그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의 유전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모세 율법 아래서는 합당하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빌미삼아 외식으로 돌아선 것이다. 즉 예수님의 책망은 선지자적 맥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단지 그들의 외식에 대해서만 책망하고 있는가? 그렇게함으로 율법의 바른 의미를 깨닫게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11절 이하의 내용에서 엣 결례제도 자체를 폐하고 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하는 것이 아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하지 못하느니라. 이런 말은 장로의 유전 뿐만 아니라 모세 율법까지 폐하는 것이어서 구약에서 말할 수 없다. 구약 때는 요구해도 씻음이 정결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정결은 온전치 못하다고 말한다. 마음의 깨끗함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의 권세를 씻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이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씻지 않고 먹을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구약처럼 몸을 씻고 휘장 앞에서 주님의 상에 앉아 성물을 먹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상에 앉는다. 이것이 내적 정결이다. 온전케된 정결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외적인 씻음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 빛 앞에서 먹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소경된 자들이다. 구약때는 모세 율법을 가지고 잇으면 빛이요 생명이다. 그러나 이제 모세 율법보다 더 크신 분이 오셨다. 그러므로 이 주님의 증거를 받지 아니하고 모세 율법과 그 유전에 머물고 있으면 소경이다.
IV. 바 울 과 율 법
1.로마서에 나타난 율법
1)로마서의 주제와 기록 목적
로마서의 기록 목적은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하는 이유인데 1:8~15과 15:14~33에서 알 수 있다. 첫째는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수신자들을 견고케하려함이다. 그래서 서로 믿음을 인하여 안위함을 얻으려함이다. 무슨 신령한 은사는 로마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1:15)그 복음은 로마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둘째는 서바나에 복음 전하는 일에 함께 동역하기를 원함이다.(15:24)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복음의 내용을 썼다고 말한다. 그 은혜는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예수의 일꾼을 삼아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 은혜의 일에 참여케하기 위해서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1:8~15과 15:14~33은 서로 대응한다. 그리고1:16~15:13의 내용은 1:15에서 말한 복음에 대한 내용을 설명한다. 15;15에서는 이 복음을 썼다고 말한다.
2)복음의 내용
그렇다면 바울이 쓴 복음은 무엇인가? 1:15의 기록 목적 뒤에 기록된 16절의 내용인데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그런데 이 복음은 1;2~4에서도 설명을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미리 약속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복음을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부터 믿음에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4절의 내용과 연결시키자면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능력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 이 내용은 그 뒤로 쭉 확대되는데 율법과 대비하여 설명한다.율법과 복음(혹은 복음에 나타난 의)의 대비를 위한 예비 작업이 1:18~3:20절이고 3: 21이하에서는 율법과 대비하여 설명한다. 그러므로 3:21이 복음에 대한 설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이제 율법 없이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3:21이하에서 설명한다. 이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데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의는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시고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나타내셨는데 예수 믿는 자도 의롭게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그 믿음에 대한 예증이 4장에 나타난다.
그리고 5장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결과에 대하여 말한다. 곧 의의 내용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 내용은 1~3절에 나타나는데 3절의 이뿐 아니라에 의해서 발전적 개념이다는 것을 알 수 잇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를 소망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부은바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된 것이다. 그러므로 화목된 자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으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한다.
5:12 이하는 앞 단락을 토대로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 즉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신 일을 더 전개시킨다. 그래서 구원역사에서의 죄문제와 대비해서 은혜의 일을 설명한다. 아담 안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 왔는데 한사람 그리스도 말미암아 은혜와 의의 선물이 넘쳤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는 것인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6장에서는 그러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다. 죄가 더이상 우리를 주관치 못한다.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7장~8장은 6장에서 대비시켰던 죄의 종과 하나님의 종, 사망의 열매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죄의 삯과 하나님의 은사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설명한다. 율법 아래서 죄의 권세가 활동했고 사망의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멸의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 그러므로 영으로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 그 고난은 썩어짐으 고난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왜냐하면 아들의 형상을 얻도록하기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였기 때문이다. 그 선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아들의 형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한 고난이며 영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하신 분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9장~11장은 구원 역사에 나타났고 또 나타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대한 내용이다. 그 내용에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으로 넘어진 이스라엘의 죄와 그로인한 지금과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 지혜와 지식은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오히려 이방인에 구원이 이르른 것이며 이방인이 구원 얻은 긍휼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긍휼을 얻게하는 것이다. 구원 역사에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이 긍휼을 얻도록하기 위함이다.
12장~15:13은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으로 권하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이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인 것이다.
3)로마서에서 말하는 율법
지금까지 로마서를 개괄적으로 설명을 했다. 특별히 로마서에서 증거하는 복음의 내용을 살펴 보았다. 그런데 그 복음은 율법과 대비해서 설명된 복음이다. 이제 이 관점 즉 이제 나타난 의의 관점에서 율법은 무엇인가를 살펴 보고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제 나타난 의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율법은 죄와 사망과 관계하여 설명한다. 곧 죄와 사망의 법이다.
(1)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한다.
이 말은 구약 개념과 다른 말이다. 구약에서 살펴 보았던 것처럼 신6:25에서는 율법을 지킴이 의로움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말이 가능한가? 율법은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구약에서는 율법은 지킬 수 있고 지키기 쉽다. 이 말이 가능한 것은 앞에서 로마서의 구조에서 살폈듯이 1:18~3:20은 3:21이하에 나오는 율법 없이 나타난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타난 의는 율법 없이 나타난 의,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 의이기 때문이다.(4:) 이 의는 유대인과 아방인이 차별이 없는 의이다. 구약 때는 차별이 있었지만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3:20에서 말하는 의롭다함은 율법을 행함으로 받는 의로움이 아니다. 그 의는 이제 율법 없이 나타난 의이다. 복음 안에 나타난 의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의이다. 율법의 행위는 그 의를 주지 못한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의는 여호와의 영광에 이르는 의(그것은 근본 시내산과 성막에 나타난 영광),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있는 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은 뒤에서 더 발전된다.
이 단락을 넘어가지 전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잇다. 그것은 1;18~3;20의 내용이다. 앞에서 계속 설명했듯이 이 단락이 속해 있는 문장 안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1:18~3:20의 내용은 문맥안에서 전제된 사실로 접근해야한다.
첫째는 이제 나타난 의의 관점에서 서술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 율법 없이 나타난 의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1:18~3:20에서 특수한 범죄 사실로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선언이 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이 단락에서 율법을 아무도 지킬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킬수 있음을 암시한다. 지킬수 없는 율법을 주고 지키지 못함을 과연 책망할 수 있는가? 그들이 언약의 법을 지키지 안했기 때문에 책망하고 있다. 실지로 구약 신명기 역사서의 문맥에서 보았을 때 그들은 언약의 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멸망하였다. 곧 그들은 모세 율법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과 썩지 아니함을 구하지 아니한 것이다. 여기서는 그런 죄를 언급하고 있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으면은 죄 아래 있다고 선언 할 수 있다.
또한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동등한 입장에서 책망하고 심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2;6~16절의 말이 가능하다. 구약 때는 근본적으로 이런 말이 불가능하다.
행위에 따른 복과 심판의 문제도 보편적인 복과 심판의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다는데 강조점이 있다. 물론 여기 나타나는 복과 심판은 이제 나타난 의에서 주어지는 복과 심판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이제 나타난 의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인은 이방인의 자리에서 유대인은 유대인의 자리에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면 복을 주신다. 불의를 좇으면 심판할 것이다. 그런데 그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때이다. 곧 이제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심판하는 시대가 임했기 때문에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 이제 나타난 의 없이도 율법을 지키면 예수 안에 있는 의를 얻는다는 말이 아니다.
둘째는 근접한 결론은 3:20을 결론짓기 위한 것이다.
한가지 점은 3:20절 자체까지라도 이제 나타난 의의 관점을 전제하여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2:1에서는 주어가 2인칭으로 급격히 바꿔지고 있는데 그 2인칭은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은 2:17에 말한 것처럼 율법을 의지하며,선생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단락에서 강조하고자하는 것은 율법을 가지고 잇는 너희들도 범죄했다는데 있다. 너희들도 죄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약의 개념과 다르다.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를 통해서 장자 백성이고 죄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8:41참조)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율법 아래서 의의 백성이다.
그런데 바울은 죄 아래 있고 그들의 특권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그 사실을 그들의 구체적인 죄를 언급함으로 말한다. 그 죄도 이방인의 죄를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넘어짐을 말하지 인간 본성의 부패함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율법이 수준이 높아서 지키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이 죄 아래 있음을 율법 아래 있음으로 마지막 결론을 내린다. 그것을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한다. 이 인용은 시편14편의 문맥을 전제하면서도(이스라엘의 언약을 파괴한 구체적인 죄를 2:에서 언급하였기 때문) 19절의 일반적 진술을 이끌기 위함이다. 그 진술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하려 함이니라, 이다. 이 말은 20절에서 말하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와 동일한 말이다. 시편의 상황은 율법을 행하지 않는 불의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율법을 행치 않는 불의한 자들의 특수한 죄를 언급하고 잇으며 그런데 그 사실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라는 일반적 진술로 이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그러나 새로운 의의 관점에서 진술하기 때문에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울의 목표는 모든 사람의 본성이 부패했고 죄인이라는 논증을 펼칠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를 얻지 못한다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결과로부터 특수한 상황을 접근을 해야한다.
이제 율법 없이 나타난 의의 시대 이전에 구원 역사에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의를 주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죄 아래 있었다. 그러므로 언약 밖에 있는 이방인은 물론이거니와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도 범죄함이 가능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3:21에서 20절과 강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이 의는 못 지키는 율법을 다 지켜서 주는 의가 아니다. 율법 없이 나타난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율법을 지켜서 의를 주셨으면 여전히 율법 아래 잇는 것이며 죄 아래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예수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심으로 이전의 죄를 간과하심으로 의로우싱을 나타내셧다. 이전의 죄는 우리의 도덕적인 범죄를 말하지 않는다. 이전은 에수를 화목제물로 세우기 전의 시대 율법 아래 있는 시대를 말한다.
(2)율법은 진노를 이루게한다.
4장의 문맥은 크게1:16~4:에 속하는 단락에 속한다. 3:21에서 율법 외에 나타난 의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그리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고 말한다. 4장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길을 성경의 증거를 따라 증거한다. 이제 나타난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 그것을 구약 성경에서 다윗과 아브라함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4:15은 14절의 이유이다. 즉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약속은 폐하여 진다.왜냐하며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한다. 왜 진노를 이루게하는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기때문이다. 율법 아래서 죄의 범함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한다. 그리고 14절은13절의 이유를 제공한다. 그리고 13절은 12절의 이유이다. 결국13~15은 10~12절에 종속된다.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길의 정당성을 말한다. 그런데 의의 길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펴 보았던 시119편에서는 율법을 찬양한다. 이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 새로운 의의 시대에서 가능하다.
그렇다면 율법이 죄를 일으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말은 개인의 죄된 심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그렇게 이해한 적이 추호도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은 구원역사적인, 즉 이제 율법 없이 나타난 의의 시대의 관점에서 가능하다. 뒤에서 더 살펴 보겠지만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하려함이다는 말이나 앞에서 살펴본 죄를 깨닫는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 왜냐하면 율법이 죄를 죄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죄와 사망이 왕노릇한 시대에 주어진 법이엇다.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함을 위하여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정복되는 생명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사는 것은 죄 아래 사는 것이고 율법을 행하는 것은 죄를 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3)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하려 함이다
여기서 율법이 가입했다는 것은 즉 들어 갔다는 것인데 죄에 들어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목적은 죄를 더하기 위해서다. 곧 율법은 죄의 권세 아래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더 풍성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구약 문맥과는 전혀 다르다. 구약 문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소위 아담의 죄 즉 원죄 아래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할례를 통하여 그들은 새로운 출생을 가져 오고 율법을 행함으로 새 백성으로서 의를 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르 말미암아 은혜와 의의 선물이 넘친 빛 가운데서 보기 때문에 율법은 오실자가 오기까지 아담의 범죄 안에서 사망이 왕노릇한 시대에 속한다. 율법이 그 시대에 가입함으로 범죄가 더욱 넘쳤다. 이 말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넘친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대비를 하고 있으며 구원 역사에서의 죄 문제를 언급하고 잇다. 6장의 증거대로 하자면 은혜가 오기 전에는 죄와 사망이 정복되지 아니했다. 예수의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이 끝났고 결국 율법은 죄와 사망을 이기는 능력을 주지 못한다. 물론 율법도 속죄하는 길이 있다. 그들은 할례를 통해서 구약 방식으로 아담 아래 속한 자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의 증거에서 오실 자가 오기까지 죄와 사망이 왕노릇했다고 말한다. 결국 율법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을 이기는 능력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전히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있는 법이기 때문에 범죄를 더하게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와 사망의 질서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이 말은 죄인임을 깨달아야 그리스도의 은혜를 넘치게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이 말은 구원 역사적인 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 율법 안에서 죄의 왕노릇-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왕노릇을 대비하고 있다.
(4)로마서 7장
7장과 8장은 지금까지 논의 되었던 율법과 은혜의 내용을 더 전개 시킨다. 7장과 8장의 서론은7:1~6절이다. 핵심되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데 있다. 그 목적은 율법이 아니라 곧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에게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다. 여기서는 율법에 속하는가 그리스도에게 속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5,6절에서 율법(의문의 묵은것)과 영으로 대조한다. 그 대조가 7:7~25과 8장에 이어진다. 그러므로 7:7~25의 핵심은 5절에 있다. 5절 말씀이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에게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하였다. 이 개념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빛 가운데서 보고 있는 것이다.
7:7~25은 바울의 내적인 갈등 구조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내적인 갈등 구조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론에서 말하는 구원 역사적 대비 구조와 8:1에서 인칭의 변화에서 알수 있다. 7:5의 말을 그렇게 설명하는 수사학적 기교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설명한 이유는 무엇인가? 율법 아래의 상태를 더 호소력 있게 말하고 그 상태를 생동감 있게 전한다. 결국 8장과의 강한 대조를 이루기 위함이다.
이 단락에서 율법 자체는 선하고 의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을 통하여 속이고 죽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선한것 즉 율법이 사망이 되었는가? 그럴 수 없다.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죽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심히 죄되게하려 함이다. 5:20절에서 말했던 범법함을 더한다는 개념과 같다. 다시 말해서 죄가 선한 율법 안에서 역사했다는 것이다.그렇게함으로 죄와 사망이 넘치게되었다.어떻게 죄와 사망이 넘쳤는가. 7,8절의 말대로 하자면은 율법이 죄를 규정하고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각양 탐심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간 범죄 심리를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은 율법과 함께 죄의 권세가 역사했다는 말이다.
9절에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도 인간 의식의 발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역사를 개인의 깨달음으로 표현할 뿐이다. 이 말은 5:13에서 언급했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죄 아래 있는 시대에 율법이 주어진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율법의 선함과 그리고 내적인 투쟁 즉 지체 속에서의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의 문제를 살펴 보자.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선함과 또한 율법이 생명을 준다는 것은 2장에서 말하는 율법을 행하면 의롭다는 것과 같은 유비이다. 율법 안에도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 율법이 주는 생명과 의로움이다. 율법의 거룩함과 선함도 모세 율법 자체의 거룩함과 선함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과 의로움은 아니다. 결국 율법 자체의 선함과 그 선함은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선함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적인 투쟁은 무엇인가?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것은 인간 심리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 율법 시대의 구원 역사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다. 곧 모세 율법의 선함과 그리고 모세 율법을 통하여 역사하게된 죄와 사망의 권세에 대한 이야기를 내적 투쟁의 방식으로 이야기이다.(구약 자체는 이런 말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24절의 탄식도 모세 율법 시대의 탄식이다. 그때는 곤고한 시대, 사망의 시대, 정죄함이 있는 시대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율법 안에서 역사했던 죄와 사망의 권세는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끝냈다. 그러므로 율법의 요구(의가)성취되도록하였다. 이 성취는 모세 율법이 주는 의의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을 이기는 생명과 의를 주지 못했다. 율법의 성취는 죄와 사망을 이긴 영을 좇아 행하는 자에게 이루어지는 의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7장과 8장의 대비는 옛 시대와 새시대의 대비이지 우리 마음 안의 두 본성의 대비가 아니다. 엣 시대는 율법 아래서 죄와 사망의 시대며 육에 속한 시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시대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 육신대로 살지 말라는 것은 마음의 투쟁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믿음의 삶을 살라는 말이다.
(5)로마서10:4
10:4의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문맥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다. 그러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는 4절 이하에서 말하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한다. 분명히 구약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의는 단순한 율법주의적인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나 이제 더 큰 의의 길을 하나님이 내셨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에 믿는 의의 길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는 자기의 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근거로서 10:4에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이하여 율법의 마침이 된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마침은 목표가 아니라 종결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서 모든 사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믿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구약 때는 근본적으로 율법 밖에 있는 이방인들은 율법이 주는 의를 누리지 못하였다. 이제 4절에서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된다는 것에 대한 근거로서 5절 이하에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대비하여 설명한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하였다. 이제 그 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끝났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하지 말라하니 올라 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신30:12이하의 말을 해석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신명기에서는 율법의 말씀을 지키기 쉽다고 언급하고 있지 믿음의 말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해석적 인용이 가능한가?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 믿음의 말씀이 왔기 때문이다. 이 말의 해석은 8절에서 주어진다. 즉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는 말이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의 시대는 끝낫다. 믿음의 말씀이 이제 왔다. 이 말씀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음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셨고 죽은자 가운데서 살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믿음의 말씀은 입에 있고 마음에 있어서 누구든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 의와 구원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주셨다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여서 그 가운데서 살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또한 천하 만민이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2.갈라디아서
1)배경과 기록목적
먼저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알아야 된다. 그 상황은 1:6의 말씀 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이다. 4:21은 율법 아래 있고자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6:12에서는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억지로 할레 받게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았을 때 다음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이 들어 왔다. 둘째 그들이 가르치는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할례가 필수 적이다. 세째 할례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어서 율법을 지켜야한다. 이러한 것은 구약에서 당연한 것이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려면 할례를 받고 언약의 법을 지켜야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증하고 있다. 그래서 로마서에처럼 율법과 대비해서 설명한다.
2)구조와 내용
1:1~5은 편지 서두인데 저자와 수신자 그리고 인사와 그리스도에 대한 송영으로 이루어진다. 갈라디아서의 내용에 맞게 자신이 사도된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엇다고 말한다. 인사의 내용에서도 특별히 그리스도를 말할 때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 분으로 이야기한다. 이러한 내용은 뒤에서 발전된 개념으로 나타난다.
1:6~10의 내용은 다른 복음을 좇은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하면서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고 말한다. 만약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단락은 논쟁의 발단을 이루고 잇다.
1:11 이하는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는 것을 논증하고 권면하고 있다. 곧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증거하고 그리고 율법 아래 종으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는 아들로 살라고 권면한다. 육에 속하지 말고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한다.
일단 1:11~2:14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뜻(한마디로 율법, 유대교)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에 대한 근거를 2:14까지 증거한다.
2:15~21은 바울이 주장하고자하는 핵심 명제 이다. 그것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에 행위에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한 발전과 증명을 3:~4:까지 하고 있다. 그 내용은 한가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종이 아니라 자유하는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읒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하는 아들이 되었다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잇다. 그것을 율법과 대비하여 설명한다. 첫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았다.(3:1~14) 둘째 믿음이 오기 전까지 율법 아래 있었으나 믿음이 온 후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이 되었다.(3:15~4:20) 세째 계집종의 자녀가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다.(4:21~31) 이러한 내용들은 서로 분리되는 내용이 아니라 동일한 내용이다. 믿음성령 받음=아들의 영이 부은바 됨=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음=자유하는 아들의 개념이다. 또한 율법의 행위율법 아래=몽학선생 아래=초등학문 아래=종된 아들의 개념이다.
권면의 내용도 이 개념을 토대로 권면한다. 첫째:그리스도께서 자유케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12) 둘째;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5:13~24) 세째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라(5:25~6:10)
3)율법에 관하여
갈라디아서의 중심되는 내용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데 있다. 이 관점에서 율법에 대한 문제도 해결을 해야한다.
(1)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
2:16의 상반절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 여기서 우리는 15절의 말처럼 이방 죄인이 아닌 유대인이다. 그 믿는 목적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함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토대가 잇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토대가 있다는데 있다. 그래서 유대인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의는 무엇인가? 분명히 15절은 유대인은 이방 죄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할례와 율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은 율법 언약 밖에 있기 때문에 구원이 없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이룬다.(레18:5, 신6:25, 느9;29, 겔20:11, 13, 21) 이 의는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한마디로 율법의 저주를 끝내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다르다. 율법의 행위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지 못한다. 특별히 갈라디아서에서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하는 아들된 의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는 이 자유를 주지 못한다. 그것은 종된 아들로서의 의이다. 그 내용은 뒤에서 더 밝혀진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아무도 율법을 못지키는데 율법을 다 지킨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율법을 향하여 죽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게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
(2)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
3:10의 내용은 3:1이하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에 대한 논증 부분이다. 그 논증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그것은 이방인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3:8~14절이 구속사의 발전(아브라함-율법-그리스도)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그래서 율법은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저주를 내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구속사를 전제하면서 그 발전을 말하고 있지 않다. 단지 믿음과 율법,복과 저주를 대비할 뿐이다. 왜냐하면 3:10~13은 3:8, 9절의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4절은 13절의 목적이지만 율법-저주와 믿음-복의 대조에서 비롯된 결론이다.
그 관계를 더 자세히 살펴 보고자한다. 구약 율법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받았다. 또한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할려면 할례를 받아야 되며 또한 율법을 지켜야된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10절에 나타난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누구든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근거로서 신27:26을 인용한다.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다. 여기서 9절에서 언급된 믿음으로 사는 사람과 율법의 행위로 사는 사람이 대조 되어있다. 그리고 축복과 저주가 대조되어 있다. 그러면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율법의 행위를 대조시키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율법을 잘 지키면 아브라함의 복, 조상들의 복을 약속하고 잇다. 결국 율법의 행함을 통해서 저주를 받지 않고 조상들의 복을 받는다. 그런데 바울은 그와 반대로 설명한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고 아브라함의 복음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신27:26처럼 율법을 항상 행치 아니하기 때문에 즉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는 말인가? 우리는 II장에서 이러한 문제를 살펴 보았다. 여기서의 인용은 단지 율법-저주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인용할 뿐이다.
이 말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인용도 구약 문맥에서는 이방인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를 받지 아니한다. 할례 받음으로 그 복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인용도 두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는 믿음과 의를 연결시키고자함이고 둘째는 아브라함의 의와 약속이 율법 전에 있기 때문에 인용하고 있다. 세째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끝내시고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 시대를 여신 관점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인용은 구약 자체의 해석과 문맥이 아닌 바울 자신의 해석적 인용이다.
둘째는 11절의 내용에서도 알수 있다. 11절에서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함을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하박국서를 인용함으로 설명한다. 여기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인용도 하박국의 문맥이 아닌 믿음-의인을 연결시키기 위한 인용일 뿐이다. 왜냐하면 물론 하박국의 문맥은 율법에 약속된 복을 뛰어 넘는 신앙을 말하지만, 근본적으로 믿음으로 사는 의인은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시행되지 못함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행하며 걷는 자이기 때문이다. 믿음-의인을 연결시킴으로 율법-의롭게되지 못함을 대조하기 위한 해석적 인용이다.
세째 11절의 말을 12절에서 보충 설명하기를 율법은 믿음으로부터 나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 안에서 살리라했다. 이 말은 레18:5을 인용한 말인데 레위기 자체의 문맥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복이며 특권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지 못함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의 인용은 그 반대이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면 율법 안에 사는데(구약에서는 그것이 복) 저주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이미 말하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바울은 그것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 안에 사는데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구약과 다르게 바울 주장에 맞게 인용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약속을 받고 양자된 새로운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율법으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에서 저주로 규정하는 나무에 달림으로 주어진 것이다. 바울은 이 저주 받음을 율법의 저주를 끝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해석도 율법과 관계 없이 설명할 수가 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오기 전에 믿음으로 의를 얻었고 그 의는 율법을 행함을 통해서 얻은 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의와 우리의 의가 같은가? 전혀 다르다. 여기서는 물론 그 다름을 강조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구약 문맥에서 이방인의 복과 의는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 율법 아래 있는 복은 이 복의 관점에서 저주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지금 우리의 믿음을 연결시킬 수가 있다. 이 복은 율법을 행함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왜냐하면 나무에 달린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의 저주는 지키지 못하는 저주가 아니라 뒤에 나오는 3:19~25의 내용으로 보아 율법 자체의 저주를 말한다. 나무에 달리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끝내시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이 성령의 약속은 아들의 명분을 얻게하심이다.
(3)몽학선생
3:19~25은 율법의 목적과 기능을 말한다.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다. 게시될 믿음의 때까지, 그리스도 때까지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었다. 이것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전적인 해석이다.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구약에서는 전혀 이러한 말을 하지 않는다. 믿음의 때, 그리스도의 때가 왔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19절에서 율법은 범죄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의 손으로 베푸신 것이다. 19절의 약속의 자손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손인 그리스도이다. 이 미리 정하신 약속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하지 못한다. 이 약속은 율법으로 난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의 약속이나 아브라함의 씨에 대한 약속이 율법으로 오지 않는다면 율법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4가지이다. 첫째는 죄때문에 더한 것이다. 둘째는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이다. 세째는 천사들을 통한 것이다. 네째 중보의 손을 통해 베푸신 것이다. 물론 둘째 이하는 첫째의 더한 것이다를 수식하는 절이나 구이다.
첫째 죄때문에(혹은 죄를 위하여) 더한 것이다에 대하여 살펴 보자. 먼저 여기서 말한 더한 것이다를 살펴보고자한다. 더한다는 것은 약속에 더한 것이다. 왜냐하면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잇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약속에 더한 것인데 죄때문에 더한 것이다. 이 말은 22절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과 상응한다. 그렇다면 죄 때문에 주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 주었다는 것인가?
먼저 죄의 성격을 살펴 보자. 2:16을 이야기할 때 구약 개념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죄인이 아니었다고 말하였다. 그리스도로 인한 의의 시대가 옴으로 율법을 가지고 있는 시대는 죄 아래 있는 시대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스도 오기 전의 시대는 율법이 있기 전이든 후이든 죄의 시대이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 그리스도가 오기 전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죄는 개인의 죄, 범죄 심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역사적인 죄문제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도록하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옳지 않다. 앞에서 설명햇듯이 약속의 자손이 오기까지 죄때문에 그 약속에 더해진 것이다. 즉 죄아래서 약속이 진행된 것이 율법 아래 시대이다. 다시 말해서 죄아래서, 율법 아래서 약속이 진행되었다.
둘째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까지를 살펴 보자. 구약 창세기에서 약속의 자손은 이삭이다. 후손이라고 했을 때 후손의 총체를 의미하는 곳도 있다.(창13:15, 17:7, 8, 22:18참조) 그러나 일차적으로 약속의 자손은 이삭이다. 그리고 그 자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또한 남자가 행하는 할례가 언약의 표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에 인도하심을 조상들의 약속의 성취로 본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약속의 자손을 그리스도로 말한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 율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설명을 했지만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약속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이 성취는 이스라엘 안에 즉 율법 안에서 성취된 약속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한 성취이다. 그러므로 4:21~30에서는 종의 자녀와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두 언약의 비유이다.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자에 대한 비유이다. 구약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의 영으로 난 자들이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고 약속을 따라 난 자들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까지 율법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손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이스마엘과 같이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며 믿음에 속한 자녀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약속의 자손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할 수 있다.
세째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통해 베푸신 것을 살펴 보자. 구약 개념에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천사들로 말미암아 주셨다는 것은 없다. 시103:20이나104:4에서 말하는 것은 직접 시내산 율법에 적용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권세와 사역에 대한 찬양이다. 시내산 언약은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중보자 모세를 통해 친히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의 형식을 대비함으로 결국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의 형식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통해 말씀하시지 아니했다. 그 형식은 3:8에서는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셨다고 되어 있고 3:17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언약으로 이야기한다. 또한 그리스도에게 성취된 언약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 나게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하심으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 이것은 천사들로 말마암는 것이 아니어서 아들의 명분이 가능하다. 구약 백성도 하나님의 자녀였다. 그러나 이 아들의 관점에서 율법의 특성을 말하기 때문에 그들은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다. (4:8)
이 구절과 병행된 것이 히1:과(히브리서의 시103이나 104의 인용은 해석과 편집적 인용이다) 행7:38이다. 구약 때 하나님은 천사들을 바람으로 불꽃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이 구약에 나타나심은 바람과 불꽃으로 나타나셨다. 곧 천사들을 통해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천사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은 시내산에 말씀하신 것처럼 천사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로 말미암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율법도 천사들을 통해서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들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즉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천사들처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사들처럼 종에 속한 백성이다. 만약에 천사들을 통해 주시지 아니했으면 율법 아래서 자유하는 아들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1:8에 하늘로 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복음은 하늘에 있는 천사는 모르는 것이다. 오히려 교회를 통해서 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엣 율법을 천사들을 통하여 종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중보자의 손은 모세를 언급한다. 레26:46에서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모세로 세우신(직역:모세의 손을 빌어) 규레와 법도와 율례니라.(레위기까지가 시내산 율법)에서 알 수 있다.즉 모세의 손과 중보자의 손은 일치된다. 그 중보에 대한 개념이 20절에서 제시된다. 여기서 중보자에 대해 말함을 통해서 율법의 열등함을 더 설명한다. 여기서 두개의 정의된 문장이 나온다. 중보는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와 하나님은 하나이시다이다. 문장 구조는 중보와 하나님 그리고 한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와 하나이시다가 대비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보에 대해서 말할 때 중보의 일반적 개념을 말할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중보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통하여 베푸신 것이다에 나오는 중보에 대한 언급이다. 그 중보와 하나님은 한분이시다는 것을 대비한다. 즉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친히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닌 중보를 통해서, 천사들을 통해서 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중보자가 두 단게이다. 천사들과 중보자인 모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종된 것이다.
19절과 20절에서 말한 율법의 개념을 받는다면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대항하는가? 그러나 바울의 말은 강한 부정을 사용하여 결코 아리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능히 살게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질문을 하여 긍정적인 질문을 유도하였는데 도리어 바울이 원인을 제공하기는 부정적인 원인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대항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율법을 구약에서 평가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고(구약에서 율법은 생명을 준다. 신32:46, 47)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율법으로 대답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대항하는 것은 아니지만 능히 살게하는 율법은 아니다.
21절에서 전제한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리지 않는다는데 대한 해답을 22절에서 설명한다. 22절은 21절과의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리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게하려함이다. 약속을 거스리지 않지만 죄 아래 가둔다. 그런데 약속을 거스리지 않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22절 하반절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21절처럼 긍정과 부정이 서로 섞여져서 내용을 형성한다. 그것은 19~20절에서 정의했던 율법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여기서 성경은 모세 율법을 포함하는 구약 성경을 가르킨다. 여기서 율법에서 성경으로 말한 이유는 엣 시대 전반을 말하기 위함이다. 즉 율법이 오기 이전과 이후의 성경의 시대를 말한다. 그 시대에 죄 아래 있었는데 특별히 율법 아래 있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이 이스라엘 백성을 죄 아래 가두는가? 혹은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을 죄 아래 가두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죄의 백성이 아닌 의의 백성으로 산다.
죄 아래는 23절에서 설명하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다(율법이 몽학선생)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다(4:8)는 것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개인의 죄 문제를 언급하고 죄를 용서하실 분을 간구하도록 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그리스도까지 인도하는 것이다. 즉 구원 역사에서의 성경과 율법의 역할이다. 이 말은 19절에서 말했던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다는 것과 상응한다. 곧 율법은 죄 아래서 더해진 것이어서 결국은 죄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의 표현대로하자면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 율법이 옴으로 죄가 왕노릇했다. 로마서에서 보았듯이 율법이 오히려 범죄를 가중시켰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의의길과 죄의 길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율법 전에는 율법의 행함으로 죄와 의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즉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율법이 죄를 죄로 여긴다. 즉 죄를 죄로 여기기 때문에 죄가 왕노릇했다는 것이다. 죄를 죄로 여겨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의길, 생명의 길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특별히 죄 아래 있음은 위에서 잠간 언급했듯이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함과 일치한다. 즉 단순한 도덕적 죄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의 자녀로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못지킨 죄가 아니라 율법 아래서의 근본적인 문제인 종된 자녀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죄 아래 가두는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게하려함이다. 이 말은 24절에서도 설명된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까지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설명한다. 이 말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이전의 율법 시대가 그 목표를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율법은 죄의 시대를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이었다.율법 아래 매인바 되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몽학 선생 아래서 진행되었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구원 역사의 시대적인 역할이며 기능이지 지금도 우리에게 반복되는 역할이 아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반복되면은 율법 아래 있는 자이며 몽학 선생 아래 있어서 종된 자녀이다.
그러나 믿음이 온 후로는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자는 그리스도로 옷입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에 관한 문제도 두 본성의 투쟁이 아니다. 믿음 안에서 자유하는 아들로 살것인지, 율법의 행함 안에서 종된 자로 살것인지의 문제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은 자 되었기 때문에 성령으로 살라는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믿음 위에 사는 자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이며 자유하는 아들로서 사는 자이다.
3.에베소서
1)에베소서의 내용
에베소서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3:과 4:~6:이다. 앞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신 사실을 말한다. 이 복은 에베소서 비밀, 때가 찬 경륜, 부르심의 소망, 영광의 풍성, 능력의 크심,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 진리, 복음, 말씀과 일치된 개념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이 복을 토대로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사랑 가운데서 서로 하나가 되고, 평안의 메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한다. 이 하나됨은 전반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된 사실에 근거한다.
2)율법
에베소서에서 율법의 가장 큰 특징은 2:15에서 말하는 원수된 것이 특징이다. 이 원수된 것은 14절에 있는 중간에 막힌 담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왜 율법을 거룩한 것이 아니라 원수된 것이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는 관계가 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율법을 원수된 것으로 말한다.
그런데 이 원수된 것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폐하셨다고 말한다. 육체로 폐하심은 16절에서 말하는 십자가로 소멸하심과 같다. 십자가로 소멸하심은 십자가로 둘을 한몸으로 하나님과 화목게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과 화목게 된다는 것은 창세전에 택하신 경륜 가운데서 우리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을 삼으심이다. 이 일은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오른편에 앉히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하늘과 땅이 통일)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화목된 교회는 구약처럼 땅에 성소에 속한 것도 아니며 휘장으로 가리운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되신 주님 안에서 하늘 보좌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되었고 유대인과 이방인도 화목되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며 할레로 말미암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심은 엣 시대의 율법의 기능, 거룩한 장막으로서의 기능을 폐하심이다. 이제 율법 안에서 이루어진 화목이 아니라 보좌에 앉으신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몸으로 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기 때문에 율법은 원수된 장막이다.
이 일은 만세전부터 감추인 것이다. 율법 안에서는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사들로 말미암아 말씀하신 것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천사들도 모르는 것이다. 이 계시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것이고 사도 바울은 이 일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 복음 때문에 바울을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이 영광의 풍성을 깨닫게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 한몸을 이루는 삶을 살라고 권면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늘과 땅이 통일된 화목을 베푼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에서 저주라고 말하는 십자가를 통해서 화목을 이루셨는데, 죽은자 가운데서 살으셔서 만유의 주가 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만약 율법을 지킴으로 이루어졌다면 여전히 원수된 장막이 있으며 이방인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약속도 없고 소망도 없는 백성으로 있는 것이다.
4.히브리서
히브리서는 저자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부분에 포함시키겠다. 율법을 어떻게 말하는가는 히브리서의 주제에 따라 전개하려고 한다. 히브리서는 율법은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시대와 새시대를 명확히 대비시키고 있다.
1)아들로 말미암아 말씀하심
히브리서에서 아들은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나타낸다. 구약 율법 아래서는 이런 대제사장을 두신 적이 없다. 그래서 그 아들의 탁월함을 구약 시대의 중보직임과 대비시켜서 4:13까지 말한다. 이 대비는 존재론적 대비가 아니라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와 구약 영광의 직임들과의 대비이다. 즉 천사보다 뛰어나시며,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으실만하다. 이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며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신 분이다.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인데 아들의 이름을 얻었다. 천사들이 그에게 경배하며 천사들은 부리는 종이다. 그러나 아들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시다. 모세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온집에서 충성하였지만 그리스도는 집 맡은 아들로서 충성하였다. 이 대비는 근본 구약과 신약의 대비이다.
2)승천하신 하나님 아들 대제사장
4:14~7:까지에서는 구약 대제사장 직분과 비교해서 에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탁월함을 말하고 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연약하며 죄가운데 있고 죽음 아래 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야 되며 죽음 때문에 제사장 수효가 많다.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으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우리 연약함을 체율하신 분이며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는 모든 고난 중에서도 순종함으로 온전케되셔서 영원한 근원이 되셨다. 그의 고난은 옛시대의 반복되는 죽음의 고난이며 순종은 대제사장으로서 순종이다. 그의 온전하심은 승천하신 하나님 아들로서 온전케되심,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 칭함을 받음으로 온전케되셨다. 그는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온전한 대제사장이시다.
두 직분의 대비에서 아론 계통의 제사장은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아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율법은 연약하며 무익하며 아무것도 온전케 못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율법이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율법이 그렇게 레위 지파에 속한 자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율법을 좇아 대제사장된 것이 아니다. 율법 후에 있는 맹세의 말씀으로 된 것인데 영원히 대제사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신다. 그가 영원히 계시기 때문에 제사 직분이 갈리지 아니하며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가 있다. 이 온전함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온전함이다. 이 가까이 나아감은 휘장안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구약 율법은 그 자체로 온전하다. 연약하며 무익하지도 않다. 율법 아래서 제사장이 있음이 그들의 복이다. 그러나 하늘보다 높이되신 에수 그리스도가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에 율법은 무익하며 폐하여져야한다.
3)그리스도의 하늘 성소의 직무와 참제사
8:~10:18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무와 참제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직무와 제사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제사 직분을 행하는 것이 제사장의 직무이다. 그런데 구약 대제사장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옛 언약의 허물과 흠은 모세를 통해서 하늘의 식양대로 사람이 만든 장막이다. 구약 제사장들은 휘장 밖에서 섬긴다. 일년일차 피와 함께 지성소에 나아가도 이 피가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온전케할 수 없다. 이런것은 육체의 예법만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땅의 성소에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늘 성소에서 섬기는 직분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예수그리스도는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할 수 없다. 오히려 죄를 생각나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의 피가 죄를 없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복되는 피뿌림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온전한 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그의 피는 땅의 성소에 뿌려진 것이 아니라 하늘 성소에 뿌려졌다. 피가 뿌려지는 의미는 피가 뿌려진 곳의 거룩으로 속함을 의미한다. 구약의 피뿌림은 반복될 뿐만 아니라 땅의 지성소에 뿌려짐으로 근본적으로 하늘 성소의 거룩의 관점에서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온전한 속죄가 아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도 단순한 도덕적 죄문제를 말하지 않는다. 구약때도 속죄제는 성소의 거룩으로 다시 속함 받는 의미이지 도덕의 개선을 의미하지 않았다. 대속죄일의 피뿌림도 아담 안에 있는 원죄의 보상이 아니다. 지성소의 거룩으로 자기 백성을 일년에 일차 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속죄이다. 이제 주님이 이루신 속죄는 하늘 성소의 거룩, 보좌우편의 거룩으로 속함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온전하다.
8장에서 예레미야31장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것도 문자적인 인용이 아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애굽에서 구원하여 세운 언약보다 더 나은 언약을 약속하고 있다. 그 언약은 그들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고 법을 그들의 마음판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물론 예레미야의 약속된 새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하지만 이스라엘의 범죄와 대비된 언약이 아니라 근본 옛 언약의 무익함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서가 말하는 새언과 신약 특히 히브리서가 말하는 새언약은 다르다.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의 범한 범죄를 기억지 아니함으로 새롭게 집행되는 언약이다. 율법으로하면 언약의 파괴의 죄는 죽어야되며 속죄의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며 큰자나 작은자나 여호와를 알것이다. 그런 의미로 마음판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선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경륜 가운데서 집행되기 때문에 새언약이다. 그래도 예레미야의 새 언약은 모세 경륜이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옛 시대 자체의 무익함이며 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할 것이다. 즉 하늘 성소의 거룩으로 속하기 때문에 이전에 땅에 속한 모세 시대의 죄(땅에 속하기 때문에 죄)를 기억지 아니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이 하나님을 알것이다. 그런 의미로 하나님의 법은 마음판에 새겨질 것이다. 마음판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진다는 것은 마음의 어떤 죄의 본성을 바꾼다는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말한다. 이러한 새로운 경륜 가운에 집행되기 때문에 새언약이다. 그래서 옛 것은 낡아지는 것이며 쇠하여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 히브리서의 대비는 옛 언약과 새언약의 대비이다. 그리고 에수님의 사역은 율법을 지켜서 속죄의 공로를 자기 백성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이다. 그의 사역은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으로서 사역이며 이 대제사장이 우리의 형제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에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
V. 새계명
예수 그리스도는 시내산 계명처럼 새로운 법을 선포하지 아니했다. 사도들도 새로운 율법을 말하지 아니했다. 왜냐하면 율법의 토대, 하나님 나라의 법의 토대가 시내산에서 놓여졌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영원한 것인가? 그렇다. 그러나 모세 율법 자체로 영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하다. 즉 모세 율법은 폐하여짐으로 영원하다. 율법의 본 정신의 구현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상황 가운데서 집행됨으로 영원하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십계명 자체가 아닌 율법의 시행령을 대비시켜서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십계명의 본 의미는 시행령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율법의 새로운 시행령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행령적인 말로 표현함으로 새로운 관계, 새로운 상황이 왔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온전케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 율법은 여전히 신약 백성에게 규범적이다. 모세 경륜 안에서 집행되는 규범이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집행되는 참빛 가운데서 규범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모세의 법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법이다.
1.요한일서2:7~8, 요13:34, 14:21
요한 사도는 새로운 계명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인데 다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쓴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옛 계명은 모세 율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새계명이며 참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기 때문이다. 참빛으 비췸은 하나님의 비췸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이 빛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비췬바 되었다. 그것은 에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심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세상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며 모세 율법의 어두움의 법이며 옛 계명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 보내심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나타내셨다. 이것은 세상에 참 빛이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은 이 빛가운데서 시행되기 때문에 새계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도 예수님이 제자들엑 새 계명을 말씀하고 있다. 이 새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새계명의 특징이다. 이 사랑은 주와 스승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음으로 본을 보이셨다. 이 발 씻음은 정결케 씻음을 나타낸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3:10~11) 이 섬김은 표적인데 십자가에 죽으셔서 물과 피를 흘림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은 자기 몸을 제자들을 위해 주심으로 섬기신 사랑이다. 물과 피는 정결을 상징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거듭남을 말한다. 이 거듭남은 아들에게 속함으로 아버지께 속하는 영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를 씻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 섬김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께 속했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속한 사랑의 관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님이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여야한다.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있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것이다.
요한일서처럼 구약 때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소유 관계, 한몸된 관계, 주님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인 관계, 친구인 관계,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한몸된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에 새 계명이다. 이 법은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 아버지와 아들의 영인 진리의 영을 받은 자는 지키기 쉽다. 그는 아들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2.야고보서
1).지혜
야고보서는 지혜를 구하라고 하는 것이 주제이다. 이 지혜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는 지혜이다. 이 지혜가 중심 사상으로 야고보서 전체에 발전된다.
그 지혜는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 보는 것이다(1:27)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는 것이다(2:)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형제를 저주하거나 비방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3:~4:) 결국 이 지혜는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지혜이다. 그래서 이 지혜는 이웃을 서로 사랑하라는 율법과 일치하다.(2:8) 이러한 지혜 사상은 구약 지혜 사상과 일치한다.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구약의 지혜는 모세 율법 안에 있었다. 모세 율법 자체가 지혜이다. 그러한 개념이 야고보서에 나타난다.
야고보서에 말하는 율법은 다른 율법이 아니라 모세 율법이다. 특히 2:8의 인용의 말씀에서도 잘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지혜는 모세 율법 자체의 지혜인가? 아니면 신약 백성에게 있어서 새로운 율법인가를 살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몇가지 점을 살펴보고자한다.
(1)산상수훈이나 예수님의 말씀과의 병행 구절
1:5---마7:7(지혜를 구하라), 1:1~7-마7:11, 1:22-마7:21(듣고 행하라), 1:23-마7:26(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2:5-마5:3(눅6:20)(가나한 자들에게 약속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하심) , 2:13-마5:7, 2:14~26-마7:21,25:31~46(형제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임) 3:12-마7:16, 3:18-마5:9(열매로 안다), 4:4-마6:24(두주인을 섬기지 못함), 4:9-눅6:25, 4:10-마23:12(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4:11-마7:1~5(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5:1-눅6:24(부요한 자에게 미칠 화), 5:2-마6:19(재물의 썩음), 5:9-마5:22,(형제를 원망하는 자는 심판을 받음) 5:10-마5:12(고난 받은 선지자들의 본), 5:12-마5:34~37(맹세하지 말라), 5:19~20-마18:15(죄의 길에서 형제를 돌아서게함)
이러한 병행 구절은 물론 문맥에서 아주 떠난 것들도 있다.(괄호의 설명이 없는것들) 그러나 문맥과 일치되는 병행 구절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내용과 내용상에서 일치한다. 특별히 이런 병행구들은 야고보서에서 중심되는 위치를 차지한다. 이런 병행구들이 야고보가 예수님의 교훈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병행구들을 통해서 야고보서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의 내용상 예수님의 교훈과 성격이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율법을 폐하려 하심이 아니라 성취하려 오신 말씀이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그것은 모세 율법이 새로운 경륜 안에서 집행되도록하는 말씀이다. 그 외의 예수님의 선포의 말씀도 율법을 온전케하는 말씀이다. 구약과 대비되고 구약과 다른 새로운 관계의 의를 주러 오신 분으로서 선포하신 말씀이다.(의와 지혜는 율법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일치) 이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주의 강림이 가까움을 가지고 있는 신약 백성의 지혜이다. 이 지혜는 모세 율법이 주지 못한 지혜이다.
(2)야고보서에서의 율법에 대한 이해
야고보서는 율법과 동등하게 사용되는 말들이 있다. 그 말들을 살펴봄으로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지혜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한다.
1:25에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자는 듣고 잊어 버리는 자가 아니요 오직 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이 말은 22절의 도와 21절에서 말하는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기운 도와 일치한다. 영혼의 구원은 성내는 것을 나타내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과 대비된 구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문맥상 18절에서 말하는 진리의 말씀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15절에서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는 것과 18절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은 서로 대구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19절이하에서 명령형으로 권면의 말로 나타난다. 즉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의 심기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 마음에 심기운 도, 도, 자유하게하는 온전한 율법은 같은 개념이다.
그렇다면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 개념이 필요하다. 구약에서 율법을 진리의 말씀으로 말한다. (시119:43)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백성 중에 장자이다.(출4:22, 신7:6, 렘2:3) 그 이유는 하나님이 율법의 말씀으로 그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가지고 있음으로 여호와의 장자이며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언약을 지키면 제사장 나라로서 그 복을 누릴 것이다. 그처럼 신약의 교회도 낳은바 되었는데 조물 중에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 15절과 대구한다고 보았을 때 사망과 대비된 첫 열매가 될 것이다. 즉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난 첫 열매로 남이다. 이 첫열매는 구약 율법 즉 구약 진리의 말씀이 주지 못하는 출생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새로운 언약 관계의 나타남을 말한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 심기운 도는 언약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도를 행하는 자가 되라, 자유하게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는 자는...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하고 행하기도 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자유하게하는 율법은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이기는 자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는 자유,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치 아니하는 자유이다. 이 자유를 구약 율법, 진리의 말씀, 도에서는 주지 못한다.
2)행함의 능력
위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출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곧 율법으로 우리를 낳으심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복음과 일치한다. 곧 야고보서에서는 율법이 복음이다.
왜 이런 말이 가능한가? 구약 때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을 때 그것은 율법을 가진 백성으로서 새롭게 출생된 백성이다. 또한 율ㅂ법의 말씀을 주신 자체가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약 백성의 동행의 법, 삶의 법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신약 백성에게 새로운 법이 주어졌을 때 이것은 자기 백성에게 능력이며 생명이며 새로운 출생이다. 이러한 율법을 가진 백성이 없었다. 이 법은 죄와 사망과 마음의 모든 더러운 것을 이기는 법이다. 왜냐하면 법이 그렇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구 그 자체가 백성에게 복이며 실행의 능력이다. 이것은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언약 백성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생명의 능력이며 기쁨이며 발의 등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이 복음이며 윤리 성취의 능력이다.
3)모세 율법과의 관계
야고보서에 말하는 율법은 근본 모세의 율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의 율법이며 마음에 심기운 도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모세 율법의 율례 자체를 그대로 신약 백성의 삶의 법으로 적용하고 있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여전히 모세의 종으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행하라고 말해도 이 법은 영광의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행하는 법이다. 즉 새로운 구원 역사적 상황에서 시행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형제를 외모로 취하지 말라(구약은 근본 외모로 취할 수 있음). 선생이 되지 말라(구약은 선생되는 것이 목표).형제를 판단치 말라(구약은 판단의 법).부한 자들아 울고 통곡하라(구약은 근본 부한 자들은 복된 자임)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세의 법이 이제는 새언약 백성의 삶의 법, 새 계명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인용해서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할 수 있다.
3.정결법
지금까지 소위 의식법으로 분류하는 레위기 법은 완전히 폐하여 졌고 도덕법만 영원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도덕법이고 무슨 법이고 상관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전체로서 폐하여졌고 전체로서 온전케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레위기를 읽으면 신령한 법이다.
그리고 레위기의 제사들과 정결법들은 예수님의 속죄 사역에서 완결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속죄 사역의 의미상의 토대는 레위기 언어가 어느 정도 사용되어도 레위기 자체가 단순한 속죄의 일만을 말하지 않는다. II장에서 살펴 보았듯이 성막에 계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며, 그 상에서 먹으며, 하나님이 거룩하니 거룩한 삶을 살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레위기가 어떻게 신약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법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으로 읽혀지는 것인지를 간단히 살펴 보고자한다.
먼저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관하여 살펴보자.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번제적 삶이나 속죄적 삶이나 화목제물을 지시하는 예표가 아니다. 레위기에서는 거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백성이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얼굴 빛 앞에서 먹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들이 부지 중에 범죄해도 속죄제와 속건제를 통하여 나갈 수 있다. 예물의 근본 토대는 번제가 토대이고 목표는 화목 제물 즉 하나님 앞에서 먹고 교제하는데 있다.
신약 교회는 이런 예물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것도 회막 앞 뜰까지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하늘 성소,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간다. 예물을 드릴 때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이 주님 앞에 있는 삶이며 모든 삶이 예물을 드리며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삶이다.
거룩의 법도 구약 거룩의 규레가 우리에게 직접 오는 것이 아니다. 신약의 거룩은 땅의 성소에 속한 거룩, 여호와의 거룩이 아니다. 하늘 성소의 거룩이며, 보좌에 앉으신 분의 거룩이다. 그래서 구약 때처럼 여전히 죄와 사망의 질서가 왕처럼 활동하고 구약의 규정대로 모든 부정한 곳에 접촉되어도 부정한 자가 아니다. 오히려 하늘 성소의 거룩의 죄와 사망을 이긴다. 그리고 모든 삶에서 보좌 우편에 속한 거룩과 영광을 나타낸다.
구약 때는 지성소와 성소와 그리고 제사장과 백성의 거룩에 차이가 있다. 흠있는 자는 성소에 나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구약 시대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우리 중에 거처름 함께하심으로 이러한 간격이 없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흠있는 자나 없는 자나 아들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다. 주 예수를 믿는 자는 하늘 성소에 속한 거룩한 백성이며 믿지 않는 자는 아무리 모세 율법으로 정결케해도 부정한 자다.
VI. 결 론
1.결론
율법은 도덕적 죄책감을 깨달아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은 근본적으로 모세의 율법이며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생명의 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치 지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의를 주지 못한다. 휘장 밖의 저주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 율법을 예수님이 온전히 지켰다고 신앙을 고백하여 왔다. 그 이유는 율법을 만고불변한 도덕적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 기준을 지킬 수 없는데 예수님이 온전히 지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언되었으며, 그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선물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의 기준에 합당하게 행하고 그 기준에 합당한 공로로 구원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방 종교의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한마디로 기독교가 아니다. 구약 시대보다 더한 저주이다.
또한 만약에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한다면 예수는 신약의 구원자가 되지 못하며 모세의 발 아래 있는 자이다. 율법의 중보자는 모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는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그 법이 여전히 우리의 삶의 규범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구약 성경의 율법을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표준으로 말하기 때문에 신약 교회에 그대로 적용한다. 결국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죄와 사망 가운데 있지 않는 교회를 저주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 아래 있으면 저주 아래 있고 죄와 사망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큰 연관성이 있으며 중심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옛 언약의 중심은 율법이며 그 율법의 완성으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이다. 이 완성은 율법이 주지 못한 것을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 하늘 성소의 영광으로 완성한 것이지 문자 그대로 완성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율법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이다. 이것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서로 포괄하며 포함하는 관계이다. 연속성은 불연속성 안에서 이해되어야하고 불연속성은 연속성 안에서 이해되어야한다. 그래야만 신약의 구원이 이방 철학적인 구원이 아니라 옛 시대를 완성한 구원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 의미로 기독론적이며 종말론적, 구원 역사적 해석을 하여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도 세목을 나누어서 어느 부분은 영원하고 어느 부분은 일시적이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모세 율법 전체가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페지 되었고 완성되었다. 폐지는 하늘의 질서로 완성됨으로 엣 질서의 종결을 의미하며 완성은 옛 언약에서의 의미의 토대를 둔다는 의미에서의 완성이다. 그런의미로 율법과 복음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개념은 성경의 다른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신구약의 서로 상응하는 부분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결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그렇게 되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 뿐만 아니라 모든 구약의 것이 기독론적 해석 없이 신약의 규범으로 작용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교회 내에 여러가지 해석이 분분하고 바른 진리 안에 서지를 못한다. 도덕적으로 연결하든지, 종교적인 틀을 그대로 가져오든지, 성경의 이적이 지금도 반복된다고 하든지, 여러 방법으로 교회를 미혹한다. 그렇기 성경을 구원역사적으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모세의 제자며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며 저주 가운데 종된 자녀로 있는 것이다.
신약의 능력은 구약 율법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됨으로 윤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권능과 에수님의 지상 생애와 초대 교회의 이적과 표적이 반복되는 것이 능력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능력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며 신약 교회는 사망이다. 우리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 구약의 질서와 땅위의 질서를 하늘 보좌의 생명으로 완성하신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과 함께 함으로 의의 종, 순종의 종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는 것이 교회의 윤리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다. 진리의 성령의 증거를 따라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한 생명을 증거함으로 죄인들을 돌이키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다. 모든 삶을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보좌 우편으로 사는 것이 교회의 생명이다.
주님은 교회를 보좌 우편의 영광으로 부르셨고 참 진리의 빛가운데 두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둠 가운데 있지 않다. 또한 말씀의 사역자를 교회에 두셔서 교회가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자라게 하신다. 이것이 교회에 주신 복이다. 교회는 모든 어둠을 벗어 버리고 이 빛가운데서 만유의 주가 되시며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께까지 자라가야 할 것이다.
2.과 제
필자는 특별히 모세 율법과 관계된 부분, 특히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유대인과 큰 관건이 되었던 것만 살폈다. 그리고 바울에게 있어서도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만 다루었다. 그러나 성경에 있어서 율법은 근본적이며 모든 의미의 토대를 이룬다. 그런 의미로 각 성경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세 율법의 법규하고만 관계된 부분만 살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신약은 옛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이 옛 언약의 토대의 빛에서 새 언약의 완성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한다.
=참고도서=
1. 국제 성서 주석
2. 구약성서신학/G.폰라트/분도 출판사
3. 최근의 십계명 연구/노희원/은성
4. 산상수훈/로버트 귈리히/도서출판 솔로몬
5. 산상수훈-문학적 배경/강창희/도서출판 솔로몬
6. 바울, 율법, 유대인/E.P.샌더스/크리스챤 다이제스트
7. 예수와 유대교/ E.P.샌더스/크리스챤 다이제스트
8. 복음과 율법의 관계/서철원/도서출판 엠마오
9. 바울연구II/최갑종/기독교 문서 선교회
10. 바울의 율법과 복음/홍인규/생명의 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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