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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 - 로저 올슨

하나님아들 2024. 4. 17. 16:20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 - 로저 올슨

 

 

 

종교와 기독교를 재정의해서 현대성의 산이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종교와 기독교가 계몽주의와 과학 혁명의 파괴력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문화를 이끌어 가는 유력인사들은 화이트가 1896년에 방대한 연구 『기독교 세계에서 과학이 신학과 벌인 전쟁의 역사(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hristendom)』에서

전통적 기독교가 그 전쟁을 계속하면 언제나 진다고 한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을 재정의해서 자연과학이 연구하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게 할 수 있다면 어덜까?

기독교와 과학 사이의 평화에 이르는 접근법 하나는 과학을 사실(fact)의 영역으로,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를 가치(value)의 영역으로 만드는 것이다.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는 그러한 분리를 암시하다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체계적으로 다루었다.

많은 19세기 신학자들은 칸트의 제안에서 과학과 종교 사이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부적을 발견했다. 36.

1. 현대성이 전통적 신학에 도전하다: 초기 현대 신학의 맥락

그 모든 것이 가장 단순한 사상으로부터, 하지만 서구 세계에 혁명을 일으킬 운명인 사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타임」(Time)은 1999년 12월 31일 호에서 "천 년의 인물"(man of millennium)으로 이동식 활자 인쇄기의 발명가인 요한 구텐베르크를 선정해 발표했다. 아마도 천년의 인물은 잉글랜드 출신의 덜 알려진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로서, 1342년 황제의 보호 아래 종교재판(Inquisition)을 피해 바이에른의 뮌헨에 숨어 지내던 윌리엄 오컴이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여러 논란이 된 생각들 중에서도, 오컴은 훗날 오컴의 면도날이라고 알려진 것을 표명했다. 이는 단순한 원리로, 한 원인이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면 더 많은 것이 상정되어서는 안되다는 것이다. 43.

오컴은, 교회의 교권에서는 상당히 당황스럽게도, 가장 단순한 설명이 언제나 가장 지혜로우며 유일한 설명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학자가 먼 훗날 과학 혁명에서 느껴질 충격의 원인이 되는 문화적 격변의 시발점을 오컴과 그의 면도날에서 본다.

오컴은 뮌헨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했지만, 교황에 의해 파문당했기 때문에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는 그곳에 없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훗날 과학 혁명의 대가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뉴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자연의 일들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참이며 또한 충분한 원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인정해서는 안된다." 오컴의 면도날을 기초로 현대 과학은 우주 안에 있는 물리적 사물들과 사건들 (전체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자연적 원인을 점차 발견해 왔으며, 실험 과학에서 초자연적 설명들을 배제해 왔다. 44.

갈릴레오는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긍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경이 간혹 하나님이 눈과 손과 발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참일 수 없는 것들을 사실로 말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적응의 원리에 호소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이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더 논란의 여지가 있게,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성령의 의도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로 가는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지, 하늘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49.

이 선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갈릴레오가 의도한 것이 드러난다. 즉 신학이 과학과 충돌하는 전통적 교리를 계속 주장하기를 고집한다면 성경과 과학 사이에 가능한 충돌의 문제들에서 증명의 부담이 신학에 있다는 점과, 51신학이 과학의 중대한 사실들에 저항한다면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점이다. 편지의 나머지 부분에서 갈릴레오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밝힌다. 그러한 경우 신학이 과학을 인정해야 하며 성경을 재해석해서 과학이 증명하는 것에 맞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 1636년에 이 편지가 출판되자 신학자들은 격노했다. 일부는 갈릴레오가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결과를 예견했다. 즉 신학이 학문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 특히 영적 문제(구원,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규범)의 영역 밖에 있는 문제들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50-51.

먼저, 이신론은 다툼의 대상인 교리들이 없는 기독교의 한 형태를 제시했다. 이신론이 받아들여진다면 더 이상의 종교 전쟁은 없을 것이다. 둘째, 이신론은 현대성의 산과 특히 과학 혁명의 맹공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기독교의 한 형태를 제시했다. 자연 종교인 이신론은 자연의 균일성이라는 새로운-기적과 초자연적 하나님의 개입을 배제하는-세계관과 온전히 조화를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이신론은 많은 사람이 종교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 즉 도덕을 보존했다. 톨런드와 틴들, 그리고 다른 이신론자들에게, 하나님은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이자 도덕적 통치자이며 예수는 선지자이자 인간의 92도덕적 완성의 모범이다. 이것은 유럽의 많은 계몽된 사람들이 원했던 종류의 기독교, 즉 이성적이고 도덕적이고 관용적이며 박해의 고난과 현대성의 침식에 영향을 받지 않는 기독교다. 91-92.

칸트는 이성을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 두 영역으로 나누었다. 그에 따르면 "순수 이성"은 모든 과학에 의해 사용되는 이성이고, "실천 이성"은 도덕적 삶에서 사용되는 이성이다. 116.

칸트는 모든 사람 안에 도덕 법칙이 있으며 이 법칙은 완전히 합리적이라고 빋었다. 그것은 계시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정언 명령"이라 불렀고 이를 두 가지 형태로 표현했다.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타인들을 그들 자체로 목적으로 대하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다. 칸트에게 이것은 철학적 황금률로, 모든 합리적 인간은 직관적으로 이것이 맞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지키는 것이 언제나 행복을 가져오지는 않음을 깨달았다. 현세의 삶에서는 도덕적으로 사는 것과 행복한 것 사이에는 자동적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행복으로 보상받는 곳이 있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이런 곳을 천국이라고 이해하지만, 칸트는 이를 전통적 신학의 용어나 심지어 성경적 이미지를 통해 생각하지 않았다. 내면의 도덕 법칙에 근거하여, 칸트는 실천 이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후의 보상과 형벌을 포함하는 영혼불멸80을 믿도록 요청한다고 주장했다. 116-117.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알게 되는가? 정신의 활동으로서의 역사를 숙고함으로써 알게 된다. 헤겔은 점점 더 큰 정도의 통일을 향한 역사와 문화의 상향적 진보를, 그 전 과정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굳게 믿었다. 역사 자체는 그 역사를 하나님 또는 절대정신의 역사로 이해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 헤겔의 하나님 개념이 이후의 현대 신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임을 고려할 때, 핵심 사상은 범재신론이다. 범재신론은 하나님과 세계, 하나님과 인류는 서로에게 이질적, 외적 존재가 아니며, 관념의 역사(history of idea)라 불리는 상호 활동의 과정에서 본질적으로, 분리할 수 없게 엮여 있다는 사상125이다. 하나님은 "저 밖에 있는 분"(someone our there), "전적 타자"(wholly other)로서 유한학 제한된 모든 것의 반대가 아니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을 인식하는 데 이르는 세계의 의식이다. 한 헤겔 학자의 말에 따르면, "이것〔즉 인류가 사유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실현에 이른다는 헤겔의 하나님 관념〕을 하나님이 신적인 것을 아는 능력(capacity)을 지닌 인간 정신을 '창조했다'는 정도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헤겔은 인간의 정신을…신적인 것의 파생물(offshoot)로 여긴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124-125.

헤겔의 철학은 들어가는 입구가 없는 거대한 체계다. 125

먼저, 헤겔은 종교를 실재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기술로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기독교를 포함하는 종교는 철학적 진리들에 관한 일련의 상징, 표상일 뿐이다. 철학은 정점에 이르면(즉 그의 철학에서) 개념화된 종교가 되며, 종교는 정점에 이르면(즉 그에게는 기독교에서) 상징화된 철학이 된다. 따라서, 예를 들면, 헤겔에게 삼위일체는 절대정신이 타자인 세계를 통해 자기 실현에 이르는 역동적 과정의 상징적 표상이다.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상징들에 상응하는, 과정의 세 "계기"(단계, 양상)가 있다. 헤겔에게 성육신은 127유한자 안을 들어가는 절대정신에 대한, 즉 유한과 무한의 궁극적 통일에 대한 상징적 표상이다. 헤겔에게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죽음은 무한자, 즉 절대정신의 "고난"에 대한 상징적 표상인데, 절대정신이 한계의 고뇌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를 "사변적 성금요일"이라 불렀다. 나중에 모두는 아니어도 일부의 현대 신학자들에게 이 점은 종교, 심지어 기독교가 현대 사상과 화해하는 엄청난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종교는 철학적 진리들의 상징적 표상일 뿐이다. 이런 생각은 일부 20세기 실존주의적 신학에서, 변형된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이 신학에서, 예를 들면,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죽음 후에 제자들의 마음속에 신앙이 회복되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방식으로 설명된다.

둘째, 헤겔의 철학을 모두 이해했다고 주장하지 않는 많은 사람에게조차, 세계 과정 속에 내재하는 하나님이라는 그의 사상은 19세기의 진화 이해와 상통하는 듯 보였다. 또한 그런 그의 사상은 너무나 초월적이어서 인간의 비참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전통적인, 반대할 만한 하나님의 이미지들을 일부 극복하는 듯 보였다. 하나님이 역사에, 세계에, 심지어 인류 안에 내재한다는 것은 19세기와 20세기에 많은 자유주의 신학의 주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은, 비록 다른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에 직접 의존하기는 하지만, 세계와 하나님이 상호의존으로 분리할 수 없게 엮여 있다는 헤겔의 범재신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많은 자유주의 사상가들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세계 안에 있는 악이라는 신비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전능한 역사의 관리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난을 통해 자기인식에 이르는 인류와 함께 상향적으로 진화하는 내재의 영이다. 126-127.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지나친 합리주의적 경향에 대한, 계몽주의에 기초한 반작용이었다. 다시 말해, 낭만주의자들은 현대성이라는 토양에 단단히 심겨져 있었지만 현대주의의 특정한 측면들에 불만을 품었던 시인〔예를 들어, 요한 괴테〕, 음악가〔예를 들어, 루트비히 베토벤〕, 철학자〔예를 들어, 요한 하만〕였다. 일부는 종교적이었고 심지어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또한 일부는 세계관 측면에서 좀더 이교도적이었다. 하지만 모든 낭만주의자는 유럽과 북미의 문명에 크게 기여했던 18세기가 인간의 감정적·정서적 측면과 자연의 영적·역동적· 자발적 측면을 충분히 진지하게 다루지 못했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들은 자연이 기계라는 생각과 이상적 인간이 감정 없이 사유하는 주체라는 생각에 반대했다. 이 운동을 기술하는 한 방식은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위계를 뒤집고 창조적인 것을 합리적인 것 위에 두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셜록 홈스 같은 인물이 현대인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데 반감을 품었을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전근대적인 철학이나 종교, 또는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계몽주의의 이성 강조를 정서적인 것, 직관적인 것, 신비적인 것, 예술적인 것에 대한 동등한 강조를 통해 균형을 이루고 싶어 했다. 그들이 모두 동의했던 한 가지는 지식이 합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낭만주의 운동에는 뚜렷하게 영적 측면이 있었다. 낭만주의자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은 아니었겠지만, 그들은 "무한에 대한 감각과 갈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18세기의 합리주의자들이나 경험주의자들이 모르는 일종의 보편적 육감이나 능력을 믿었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는 연구실에서 과학 실험을 할 때는 좋지만, 자기 자신이나 우주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려 할 때는 커다란 낭패를 보게 된다. 기계적 이성만으로는 참된 의미를 146발견할 수 없다. 더욱이 자연은 불활성(不活性)의 물질로 이루어진 기계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계몽주의와 과학 혁명의 전체적 추이는 대체로 그런 유물론의 입장을 따랐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에는 어떤 불가사의한 것…단순히 유물론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믿었다. 종교적 낭만주의자들이 보기에 "온 창조 세계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고동친다. 그것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콜리지는 잉글랜드의 낭만주의 운동에 깊이 참여했는데, 자신가 같은 시인들로 주로 구성된 운동이었다. 그들의 시는 생명력 있는 자연을 주제로 삼고, 아름다움을 모든 자연 안에 있는 어떤 신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강조했기 때문에, 대로 "형이상학적 시"로 묘사되었다. "그들의 시는 인간의 경험이라는 소재를 사용해 시를 지으며 신적인 것과의 접촉점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그 소재는 무지개나 석양을 보고 깊이 생각할 때 느끼는 우주적 경외감과 양심 안에 있는 옳고 그름의 감각을 포함했다. 콜리지는 자연을 초월하거나 양심 안에 있는 옳고 그름의 감각을 포함했다. 콜리지는 자연을 초월하거나 자연 안에 있는 무한하고 신적인 것을 가리키는 세 가지 "불가사의들"(mysteries, 또한 그는 이것을 인간 경험의 "궁극적 사실들"이라고 불렀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양심, 책임감 있는 의지, 악이 그것들이다. 콜리지 같은 잉글랜드 낭만주의자들은 개념적, 종합적 이해보다, 직관적, 체험적 이해에 더 큰 가치를 부여했다. 하지만 그들을 비합리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단지 그들은 더 확장되고 더 역동적인 이성 개념을 원했을 뿐이다. 144-146.

계몽주의는 기독교를 이론으로, 사변(speculation)으로 취급했다. 이 점이 기독교를 죽인다. 콜리지는 참된 기독교가 "삶의 철학이 아니라, 삶이며 살아 있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진리를 아는 것은 기독교를 실천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실천하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겸손을 요구한다. 그의 경구들 가운데 "시작할 때 어린아이같은 겸손이 없으면 목적지에서 진리에 도달할 가능성이 적다"는 말이 있다. 149.

19세기 신학 연구가 한 사람은 콜리지의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콜리지 자신이 신앙의 모험에 관해 한 설명을 가장 돋보이게 한 것은…신앙의 모험의 합리성을 상술하려는 그의 노력이었다. 즉 이 모험이 이성에 반대되거나 이성을 초월하거나 또는 이성과 별개가 아니며, 오히려 이성 자체의 최고의 순간임을 보이려는 노력이었다."(*Welch, Protestant Thought in the Nineteenth Century, vol.1, p.126) 152.

키르케고르는 "우울한 덴마크인"이며 실존주의의 창시자라 불려 왔지만, 자신의 생애 동안에는 그 선포한 메시지가 주목받지 못했던 덴마크인 기독교 예언자였다. 한참 후에, 20세기에 이르러, 키르케고르가 현대성과 특히 기독교 세계에 대해 보여 준 도전이 (다른 누구보다도) 바르트, 브루너, 라인홀드 니버-소위 신정통주의 또는 변증법 신학의 주요 인물 세 사람-의 신학들에서 다루어지면서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의 신학자 바르트의 고백은 유명하다. "나에게 어떤 체계가 있다면, 키르케고르가 시간과 영원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 말한 것을 가능한 한 언제나 명심한 데 있다.…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다." 키르케고르는 그때까지 그의 고국 덴마크 밖에서는 관심은 고사하고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을 "무력한 시인"(powerless poet)이라 불렀지만, 동시에 분명히 스스로를 예언자이자 순교자라 보았다. 그가 순교자라는 것은 자신의 믿음들 때문에 물리적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덴마크 사회의 시민적 규범을 거부하고 덴마크 사회와 그 국가 교회에 대해 점점 더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스스로 순교자의 삶을 살았다는 의미에서다. 그의 통렬한 빈정거림과 날카로운 비판의 주된 대상은 헤겔과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종교와 특히 기독교에 관련된 모든 현대성에 저항하는 문학적 십자군 운동을 시작했다. 그가 당한 순교는 상류 사회에 의해 그에게 가해진 조롱이었다. 152-153

실제로는 다르게 새겨졌지만, 기르케고르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움을 알았을 때 묘비명으로 사용하도록 지시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여기에 그 단독자가 누워 있다"(Here Lies That Individual).

키르케고르는 지정 단독자였다. 그는 어떤 범주에도 놓이기를 거부했으며, 이는 그의 개인적 삶과 문학적 삶에 모두 적용된다. 그가 선호한 자신의 정체성은 "진리의 증인"이었다. 그는 타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고 믿었고, 자신의 문장력을 사용해-때로는 필명으로 때로는 자신의 이름으로-그것을 그들에게 알게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느꼈다. 그는 다작하는 작가였고 성인이 된 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과 에세이를 쓰며 보냈다. 그것들 가운데 다수가 현대, 중산층, 유럽 문화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일부는 인간 존재의 구조에 대한 주의 깊은 분석이었다. 많은 것이 신학적 주제와 연관되었다. 키르케고르는 보통 철학자로 분류되지만, 그는 또한 156신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의 최우선적 관심은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the individual before God)였다. 그는 국가 교회를 포함하는 "일반 사회"가 기독교의 진리와 진정한 실존의 진리를 상실했다고 생각했는데, 진정한 실존이란, 그가 끊임없이 강조한 바에 따르면, 무리로부터 벗어나 사회의 관습과 습관의 구애 없이 무엇이 될지 책임감 있게 결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155-156.

키르케고르의 핵심은 한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에 관한 그의 이야기에서 가장 잘 표현된다. 정통주의와 현대주의가 모두와 대조적으로,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대한 합리적 접근을 피한다. 그 대신에,

주관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그 결정이 주체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전유는 다른 모든 내향성과 분명히 다른 역설적 내향성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기독교가 무엇이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이 어떻게는 단지 한 가지, 절대적 역설...에만 상응할 수 있다. ...신앙은 객관적 불확실성이며, 고수되던 부조리를 내향성의 열정에서 물리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진술에서 키르케고르는 종교와 관련된 계몽주의의 모든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영적 진리, 궁극적 실재에 관한 진리, 하나님과 자신에 관한 진리는 오직 역설로서, 결단에 의한 내향적 전유를 통해서, 열정의 열기 속에서 알려질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한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것들에 관한 지식에 이르는 비인격적·객관적·합리적 경로는 없다.

종종 오해되는 또 다른 키르케고르의 유명한(또는 악명 높은) 인용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의 도약"(leap of faith)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이 말은 (많은 사람의 생각과는 반대로) 모험 없이는 신앙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험 없이는 신앙이 없다.…내가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나는 믿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믿어야만 한다. 내가 나 자신을 계속 신앙 안에서 유지하기 바란다면, 나는 객관적 불확실성을 단단히 붙잡는 데 계속 전념해야만 한다. 그러면 나는 객관적 불확실성 속에서 "깊이가 칠만 패덤〔약 십삼만 미터〕이나 되는 물 위로" 나를 내맡겨도 믿을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앙의 도약은 캄캄하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비합리적으로, 맹목적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대상으로 소유할 수 없는 하나님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맡기기로 열정적으로 결단하며 인생을 거는 모험이다. 키르케고르는 기독교 믿음의 내용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정통 기독교 교리들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쟁점은 믿음의 방식과 대상이다. 정통 신앙은 교리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여기서는 특정한 교리들을 믿으면 그리스도인이 된다. 계몽주의적 자연 종교 및 칸트와 헤겔은 바른 믿음(이것이 정확히 무엇이든)에 이르는 길을 합리적 객관성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모험이나 열정적 내향성이 아니라 냉정하고 초연한 합리성이다. 키르케고르의 요점은, 물질과학의 경우에 사람이 연구 대상에 무관심할 수 있지만, 영적 삶의 경우에 무관심한 채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적 지식은 헌161신을 요구하고, 헌신은 모험과 결단을 요구한다. 참 하나님은 삼단논법의 끝에서, 또는 교리들(그 교리들이 비록 참이더라도)을 믿음으로써 알려지지 않는다.

참 하나님은 왜 삼단논법의 끝에서 알려질 수 없는가? 키르케고르는 두 가지 이유를 댄다. 첫째로 사람들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오류 안에 있기" 때문이며, 둘째로 하나님은 피조물과 "전적으로 다른 분"이고 따라서 역설로서만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의 문학적 작품들 대부분은 자기기만이라는 인간의 죄성을 면밀히 분석하는 데 공을 들인다. 그는 원죄에 집착했지만, 신화 속 동산에서 있었던 전(前(역사적 타락에 관한 교리로서의 원죄에 대한 집착은 아니었다. 그에게 원죄는 미망(謎妄), 불안, 절망에 속박되어 있는 인간의 상태다. 그가 분명히 밝힌 바에 따르면, 죄는 우리 스스로 초래한 상태다. 즉 유전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죄를 초래한다. 이 점에 대한 설명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그럴 뿐이다. 그는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 힘으로 자신의 속박의 사슬을 만든다"고 단언했다. 인간 실존에 관한 예리한 분석에서 키르케고르는 원죄, 즉 타락은 한계를 넘어서려 노력하는 자유의 남용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원죄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다. 분명히 그는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을 혼동하는 헤겔의 철학적 체계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보았다. 타락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속박의 사슬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 오직 은혜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으며, 오직 신앙의 도약을 통해서만, 불안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만 신뢰하겠다는 영적인 결단을 통해서만 이 일을 이룬다. 이 일은 오직 "한 번에 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 죄인이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마음을 결정하는 개인162적 인격적 결단이다. 언제나 위기와 굴복을 포함하며, 어떤 논증의 달갑지 않은 결론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삼단논법의 끝에서 알려질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과 전적으로 다르며(성육신은 예외), 언제나 주체이지 결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절대정신(Absolute Spirit)으로서의 하나님 개념, 유한을 내포하는 "참된 무한"이라는 개념을 혐오했다. 그에게 이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키르케고르에 앞서 파스칼이 말했던 것처럼, "철학자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는데, 헤겔이 보여 준 것이나 이신론 같은 철학적 신학은 하나님을 죄로 물든 인간과 대조시키기보다는 인간의 모습에 따라 하나님을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철학적 신학이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초월적인 동시에 더 인격저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관계이지 단순한 지식이 아니며, 역설의 수용이지 반대되는 것들의 체계 또는 종합에 대한 합리적 발견이 아니다.

키르케고르에게 기독교의 궁극적 진리는 모든 합리적 지식에도 영향을 미치며, 이는 해결될 수 없는 역설이다. 헤겔은 이성이 전체의 거대한 종합(궁극적으로 헤겔 자신의 체계) 안에서 모든 상반된 명제들을 해소시킬 수 있다고 믿었음을 기억하라. 이것을 그는 "변증법"(the dialectic, 정립-반정립-종합)이라 불렀다. 이에 반대해 키르케고르는 상반되는 것들이 종합 안에서 통일될 수 없는 자신만의 변증법을 제시했다. "영원한 진리가 존재하는 한 개인과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은 역설이 된다." 그가 선호하는 예시는 성육신이다. 신앙이 도약 속에서 파악하는 진리와 실재는 이성에게는 터무니없다. 그 이유는 "영원한 진리가 시간 속에서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63즉 하나님이 존재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탄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육신의 역설은 단지 지성 안에서 배우고 받아들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믿어지는 교리가 아니다. 오히려 신자의 실존을 결정하는 궁극적 사실이며, 신자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전테 토대다.

키르케고르의 삶의 과업은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으로 통하는 많은 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거의 모든 사람이 기독교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기독교가 매력적이게 된다면, 그렇게 제시되는 것은 참된 기독교가 아님을 사람들은 확신할 수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제자도의 조건으로 정하신 그분의 기독교는 아닌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현대성의 공세가 기독교를 온순하고 무해하게 만들게 되었고, 사람들의 소유물이 되고 제어를 받게 했다고 믿었다. 키르케고르가 보기에,

현대인은 〔참된 신앙에 관한〕 이런 개념을 상실했다. 그는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한 묶음으로 본다. 그에게 기독교는 수 세기에 걸쳐 스스로를 충분히 증명했기에 사람들이 더 이상 몸소 헌신할 필요가 없는 아주 오래된 삶의 철학이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그 초월적 가치를 상실한다. 더 이상 충격을 주지 못한다.…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재발견해야 한다. 기독교는 어떤 전통 안에서 전수될 수 없다. 이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새롭게 충격을 받아야 하며, 이 충격에서 신앙으로 나아가거나 절망으로 떨어져야 한다.

164(비록 키르케고르가 이 주제에 관하여 저술한 것과 비교하면 아주 적은 분량이지만) 지금까지 다룬 것들로 미루어, 키르케고르의 삶의 철학과 기독교관은 현대성의 그것과 갈등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전(前)근대의 사람은 아니다. 그는 권위에 대한 믿음을 옹호하지 않았으며,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교회의 권위는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또한 그는 신비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보편적 "내면의 빛" 또는 명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을 혐오했다. 그의 현대성은 인간 개인, 인간 주체를 자신의 철학의 중심에 둔 방식에 잘 나타났다. 그에게 "참된 기독교〔에서〕 〔개인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오직 부차적으로만 공동체와 관련을 맺는다." 참된 교회, 즉 전투하는 교회에는 오직 개인들만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기사"로서, 아브라함처럼, 비록 하나님의 부름을 따르는 것이 전통과 공동체가 믿고 말하는 모든 것에 반대되는 경우에조차 이 부름을 따른다. 이러한 종류의 개인주의는 현대성 밖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초기 현대에 일어나 21세기에도 아직 진행 중인 과학과 종교 사이의 전쟁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해법은 무엇일까? 키르케고르가 옳다면 이 전쟁은 쓸모없는 것이다. 과학은 객관적 세계를 객관적으로 다룬다. 자연과 그 법칙들에 대한 합리적 조사와 관련된다. 참된 종교, 즉 기독교는 관계성과 관련된 것으로 전적으로 주체적이고, 내향적이고, 역설적이고, 과학이나 철학으로서의 철학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키르케고르(혹은 키르케고르주의자들)에게 문제는 과학과 철학이 그것들의 경계를 벗어나 이 관계성에 손을 대려고 할 때(예를 들어, 이 관계성은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망상이라고 말할 때) 비로소 발생한다. 키르케고르는 참된 종교, 즉 기독교를 철학과 과학의 경쟁 너머로 들어올렸다. 철학과 과학은 기독교를 건드릴 수 없다. 또한 확실성에 165관해서 말하자면,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혐오했다. 참된 기독교는 "객관적 불확실성"에 관한 것으로, 이는 오직 결단, 모험, 열정적 헌신을 통해 일어나는 기적, 신앙이다. "진리는 정확히 말해 모험이다. 무한에 대한 열정으로 객관적 불확실성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절에서 나타나듯이 모든 현대 기독교 사상가들이 현대성에 굴복하거나 현대성의 산에 적응한 것은 아니었다. 리드와 스코틀랜드 상식실재론은 상식 경험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계몽주의의 경향을 논의했다. 리드에게 지식은 이성이나 감각적 증거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포함하지만, 기독교는 합리적 논증에 의존하지는 않더라도 이것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넓은 의미의 과학인 객관적 추론을 통해 기독교를 반증하는 것이 아직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과학과 기독교는 서로 철저히 분리된 영역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드가 정의한 대로의 상식이 철학 안에 다시 포함될 수 있다면, 기독교는 매우 높은 수준의 개연성에 객관적으로 부합하는 것으로 정립될 수 있다.

콜리지와 낭만주의는 영적 문제들과 관련하여 합리주의를 거부함으로서 현대성에 대항했다. 이성은 예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포함하는 모든 인간 경험을 설명할 수 있도록 확장되고 더 융통성을 지녀야만 한다. 신학은 현대적 의미의 과학보다는 예술에 더 가깝다. 내면의 빛과 함께 시작해, 확장되고 더 깊어진 추론을 신앙에 의해 이미 믿어진 것을 이해하는 데 사용한다. 과학과 예술이 서로 충돌할 수 없듯이, 과학과 신학도 충돌할 수 없다.

키르케고르와 실존주의가 현대성에 대응한 방식은, 신앙이 아는 것이 166객관적 이성에게 터무니없어 보이도록 객관적 이성과 신앙 사이의 모든 연결을 끊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앙이 아는 것은 과학이 아는 것과 전혀 같지 않다. 과학들은 사물을 연구하고, 신앙은 새로운 관계성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합리적 철학이 하나님을 연구하려 시도하면 언제나 우상만 창조하게 된다. 참된 기독교는 위로부터 오며, 아래로부터의 사물이나 방법들을 통해서는 알려질 수 없다. 그래서 과학은 참된 종교, 즉 기독교와 서로 충돌할 수 없다. 그것들은 서로 철저히 분리된 영역에 존재한다. 159-166.

자유주의 신학은 (그 신학을 유행시킨 사람들이 아니라) 슐라이어마허,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 아돌프 하르낙, 월터 라우센부시 등 주요 신학자들을 연구함으로써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저작들로부터 몇 가지 공통점들을 추출할 수 있는데, 이 공통점들은 신학에서의 자유주의 운동이 어떤 것이었고 자유주의 신학의 정신이 오늘날 아직도 살아 있는 곳이 어디인지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첫째, 현재의 신학적 재구성을 172위해 현대성을 권위 있는 원천이자 규범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나 교회나 기독교 조직은 역사적, 고전적 의미에서의 자유주의가 아니다. 어떤 신학자가 새로운 것을 제안했다고 해서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문화와의 관련성과 기독교적 원천에 대한 충실성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기독교 교리들의 재구성을 목표한다. 대개,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필수요건일 텐데, 현대 문화와의 관련성이 전통적 기독교 원천에 대한 충실성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면 적어도 동등하게 중요하다.

둘째,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낙관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 전망과 방법 측면에서 인간중심적이었다. 낙관론적 19세기의 시대 정신을 아주 잘 보여주는 흔한 말은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계몽주의와 과학 혁명이 세상을 거의 지상낙원으로 이끌 것이라 믿었다. 이런 경향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보적 시류에 편승하는 경우에 더 심했다.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이런 낙관론이 수그러들자 신학자들은 "완화된(chastened) 자유주의"에 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셋째, 자유주의 신학은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한다. 신학을 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위로부터"(from above)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from below)다. "위로부터"란 하나님으로부터의 특별 계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 특별 계시를 건전한 기독교 교리를 구성하려는 의도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이 반드시 동시대적 맥락을 무시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로부터"라는 것은 정확한 믿음들을 결정하기 위한 원천 및 규범과 관련된다.) "아래로부터"란 신학적 숙고를 인간 경험에서부터 시작하면서 그로부터 믿어질 수 있으며 또 믿어져야 하는 것을 결정하려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 기독교 자연 신학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하려는 시도였지만, 여기세어 "아래로부터의" 방식은 "위로부터"의 방식을 통해 믿어지는 것에 대한 합리173적 지원에 국한된다. 자유주의 신학은 보편적 인간 경험으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이 말은 위로부터의 계시를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다만 이 계시를 인간 경험이라는 판단 기준에 맡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인간 경험에 깊이 박혀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비평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즉 성경을 가장 중요한 기독교 고전으로 받아들이지만, 초자연적으로 영감되었다거나 무오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성경을 역사적 측면에서 다른 고대의 책이나 모음집과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고 성장했다. 이 말은 모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영감이나 권위를 전적으로 거부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체로 그들은 성경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한" 영감된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의 권위가 절대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절대적 권위가 없으며 아무도 하나님의 마음에 직접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전적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에는 물론 다른 공통적 특징들도 있지만, 슐라이어마허 및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기독교에 관한 사상을 이해하기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주제들은 이상의 네 가지다. 자유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반드시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다른 전형적 특징들이 있는데, 즉 (과학 혁명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것과 기적들에 대한 회의적 경향, 예수의 인성에 대한 일반적 강조와 그의 신성을 인성의 어떤 측면으로 재해석하려는 경향, 보편 구원론-모든 사람의 구원에 관한 믿음-에 대한 선호, 설령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에 있는 진리를 완성하는 절대적 종교라 하더라도 진리는 모든 세계 종교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가정이 그런 것들이다. 171-173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철학 외에도, 슐라이어마허는 19세길 넘어가는 시기에 베를린을 휩쓸던 낭만주의라 불리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이미 논의된 대로,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차가운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인간의 감정, 상상력, 직관을 강조했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인간의 자기실현 수단인 시와 음악에 큰 가치를 부여했다. 베를린의 살롱 문화를 누리던 젊은 슐라이어마허의 친구들 가운데 다수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자신들이 전통적 교의들에 대한 계몽주의의 비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종교적이거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 가운데 다수에게 낭만주의는 일종의 유사 종교의 역할을 했다. 슐라이어마허의 첫 번째 책은 이 친구들을 위한 강연으로, 이 점은 그 책 제목 『종교론: 종교를 경멸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에 잘 나타난다. 이 책에서 그는 종교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람들을 그들의 인간성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죽은 정통 신앙이나 권위적 도덕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흔한 오해에 반대해 종교를 옹호하려 했다. 일찍부터 슐라이어마허는 경건주의, 계몽주의적 합리주의, 낭만주의를 합쳐서 일종의 종합을 이루려 시도하고 있었다.

『종교론』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경멸하는 교양인"에게 종교가 보편적 인간 "감정"(Gefuhl)의 문제이며 교의들과 별로 관련이 없음을 설득하려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참된 종교는 "살아 있는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로,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 혹은 신조적 명제들에 복종하는 것과 구별된178다" 『종교론』은 종교에 관한 최초의 진정한 현대적 연구들 가운데 하나를 대표하며, 이 책 덕분에 저자는 젊은 천재라는 명성을 얻었다. 177-178.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주로 그의 시대의 문화적·지성적 맥락에 대한 대응으로 일어났다. 그 시기는 정통 기독교에 순탄한 시대가 아니었다. 시대의 정신은 종교에 대해 적대감까지는 아니라도 상대적 무관심을 조장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저술가 볼테르는 파리에서 쫓겨나 인생의 상당한 기간을 망명지에서 보내야 했을 정도로 격렬하게 교회를 공격했다. 독일에서 일부 철학자들은 신학이 대학교 안에서 더 합리적인 다른 과목들과 나란히 자리를 차지할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ㅇ르 제기했다. 프랑스 혁명은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이성의 여신"을 즉위시켰다.

이런 모든 혼란 가운데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를 "종교를 경멸하는 교180양인"에게 실제로 의미 있도록 만들기 위한 좋은 방법을 낭만주의에서 발견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계몽주의의 자녀들이었다. 그들은 권위와 교의적 믿음 체계들에 대한 우려를 공유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의 생동감과 인간의 감정 및 상상의 능력에 대한 감각-그들이 생각하기에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와 유물론에서 상실되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회복하기를 바랐다. 낭만주의가 이처럼 감정을 강조하는 것에서,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가 점증하는 현대 문화의 근본적 정신과 갈등하지 않도록 기독교를 재구성할 단서를 찾아냈다.

잉글랜드 계몽주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현대 문화의 정신을 간명하게 표현했다. "그러니 너 자신을 알라. 어줍짢게 하나님을 살피려 하지 말라. 인류의 합당한 연구 대상은 인간이다." 현대성의 정신은 철저히 인간중심적이다. 하지만 인간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연구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인간이 오직 하나님을 앎으로써만 진정으로 자신을 알 수 있으며, 또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면 어떨까? 종교 일반과 특히 기독교가 인간성에 반대되지 않고 오히려 인간성의 참된 완성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보일 수 있다면 어떨까?

슐라이어마허의 기발하고 논란이 되는 기획은 바로 이것을 하는 것이었다. 즉 종교가 인간성에 필수적인 경험에 기초하며 심지어 그 경험과 동일함을 보임으로써, 신학을 인간 경험에 기초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독교 교리가 인간성을 희생하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고유한 방식으로 결합시킬 수 있도록 기독교 교리를 재구성하려 했다. 하지만 칸트 및 헤겔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노력의 초점은 실천 이성(도덕)이나 문화의 역사(헤겔)가 아니라 직관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게퓔'(Gefuhl)-영어로는 정확한 번역어가 없는 독일어 단어-이라고 부른 근181본적, 보편적 인간 감정에 의지했다. 이 개념으로 그는 실재 전체, 무한,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근본적, 보편적 감각을 의미했다.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런 보편적 감각, 즉 하나님에 대한 이런 인간적 직관은 종교적 선험(a religios a priori)-조사에 따른 결론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존재하며 인간이 자신을 부인하기 전에는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 기능했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방법은 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리는데, 권위적 계시가 아니라 인간 경험을 신학적 기획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학을 인간의 하나님 경험에 대한 숙고라고 봄으로써, 경직된 교조주의적 특징을 지닌 전통적 정통 신앙과 개성 없는 자연 종교인 이신론의 함정을 피하려 했다. 그래서 그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며 인간이라는 것과 거의 동일하다고 여긴 종교적 경험은 신학적 숙고의 참된 원천이 되었다. 계시의 무시간적 진리들이라는, 그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종교적 경험이 대신하게 된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혁명이 성공한 비결은 종교를 인간의 본성과 실존에 근본적이며 다른 무엇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 정립하는 그의 능력이 있었다. 『종교론』에서 그는 자신의 경건주의적 유산과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현상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종교의 참된 본질을 상술하려 한다. 그는 종교의 핵심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증거나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교리들이나 교회의 예전을 비롯한 형식적인 것들에 있지 않고, "인간의 삶과 문화가 가진 근본적이고 명확하여 필수적인 요소"-유한한 것들 안에서 또 그것들을 통하여 드러나는 무한한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에 있음을 보이려 노력했다. 다시 말해, 종교는 누구에게는 있고 누182구에게는 없는 것이 아니며, 어떻게 획득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종교는 모든 인간 안에서 본능적이고 직관적이다.

이런 본유적 종교 경험인 '게퓔'(Gefuhl)은 감각(sensation)을 함축하지 않는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느낌"(feeling)이 아니다. 오히려 슐라이어마허에게 그것은 깊은, 내면의 감각 또는 의식이다. 그것은 "무한자 안에서 또 무한자를 통하여 모든 유한한 것들이, 그리고 영원자 안에서 또 영원자를 통하여 모든 일시적인 것들이 보편적 존재를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에서, 모든 성장과 변화에서, 모든 행위와 열정에서 이 무한하고 영원한 요인을 추구하고 발견하는 것이며, 오직 직접적 감정에서 삶 자체를 살고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주적 경외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이 아름다운 석양이나 더 거대한 전체의 일부라는 감정이다. 슐라이어마허가 낭만주의자였음을 기억하라! 그가 보기에, 이러한 종교적 감정〔때로는 경건, 때로는 하나님 의식(God-consciousness)이라 불리는 것〕은 인간 경험에 기초적이며 보편적이다. 즉 사람들이 이 감정을 드러내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성이나 양심 같은 경험의 다른 측면으로 축소될 수 없다. 그것은 이런 것들과 완전히 구별되지만, 슐라이어마허가 (『종교론』)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인간을 이해하는 데 마찬가지로 필수적이다. 이성과 양심은 과학과 도덕을 낳고, 경건은 종교를 낳는다.

따라서, 그리고 바로 이 점에 우리의 현대 신학 이야기에서 특히 중요한 데, 슐라이어마허는 "과학과 도덕이라는 두 영역에 속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권리 주장도 모두" 기꺼이 포기하려 했다. 대신에 그는 종교를 경멸하는 교양인이 종교를 그 자체로 인간에게 독특한(sui generis) 것으로 인정하고, 과학이나 윤리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을 중단하기를 바랐다. 그는 종교가 그 고유한 실재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경건은 과학과 도덕 이외의 필수불가결한 제 3의 것으로, 즉 과학 및 도덕과 성격상 동등한 것, 즉 여러분이 과학과 도덕에 부여하는 것 못지 않은 위엄과 탁월함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의 과학과 윤리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있었다. 즉 신학은 과학 및 윤리와 완전히 다른 것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과학 및 윤리와 갈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경건과 종교를 과학 및 도덕과 구별하기 원했을 뿐 아니라, 신학의 교의 및 체계와도 구별하기 원했다. 신학의 교의와 체계는 그 자체로는 참된 종교와 다르며, 기껏해야 경건을 언어로 진술하려는 인간적 시도들이다. 그가 단언하는 바에 따르면, 종교는 교의와 개념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종교적 감정에 대한 숙고는 교의와 개념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그것들을 창조한다. 다시 말해, 교의와 개념은 종교의 불가피한 산물이지만, 종교는 감정지지 교의와 개념이 아니다.

신학은 어떤가? 종교가 감정이라면, 신학은 무엇인가? 가장 넒고 가장 일반적 의미로 말하자면, 신학은 종교에 관한, 즉 경건이나 하나님 의식에 관한 인간적 숙고다. 하지만 슐라이어마허는 일반적 종교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경건은 언제나 구체적 형태의 종교적 삶에서 그리고 종교적 공동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는 184어떤 구체적 종교 전통이나 공동체 및 그 예배 형식("실증적 종교")와 유리된 자연 종교를 찾으려는 계몽주의적 시도를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숙고인 신학은 언제나 종교적 삶의 구체적 형태를 하나님 의식에 비추어 숙고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조직신학 『기독교 신앙』에서 신학을 기독교의 종교적 감정을 언어로 진술하려는 시도로 정의했다. 기독교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적 관계 안에 존재하는, 보편적 인간의 경건의 한 형태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의 하나님 의식이라 부른 특정한 형태의 경건을 인식했다. 이것이 그가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감정"으로 의미했던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의 성취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이다.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해 형성되고 완성되는 하나님 의식에 대한 기독교적 경험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기독교의 독특한 본질은 기독교에서 모든 종교적 감정들이 나사렛 예수가 이룬 구속과 관계된다는 사실에 있다." 기독교 신학은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일련의 명제들을 체계화하는 과업이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경험을 일관성있게 진술하려는 시도다. 이 경험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해 매개되는 하나님 경험이기 때문에, 모든 교리는 예수와 그의 구속 사역에 중심을 두고 또 관계를 맺고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슐라이어마허에게 신학은 종교적 감정에 관한, 즉 하나님의 의식에 관한 숙고로서, 종교적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려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하나님 의식을 갖고 있다. 하나님 의식은, 비록 잠재의식적으로나마,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해서 하나님을 더 인격적이고 관계적으185로 알기 위한 가능성이 된다. 이것이 종교다. 하지만 언제나 종교는 특정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기를, 상대적으로 조직된 표현에 이르기를 추구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인격적이고 관계적으로 ㅇ라기 위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능력을 가진, 즉 구원이 있는 종교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the Redeemer)인 것은 그가 충만하고 완전한 하나님 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의 하나님 의식을 매개한다. 신학은 이러한 감정과 경험을 언어와 개념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이지만, 언어와 개념은 그 자체로는 하나님 의식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 경험의 일부가 아니다.

슐라이어마허가 신학에 가져온 혁신은 "믿는 주체로의 전환"(turn to the believing subject)으로, 사람의 종교적 경험을 교리를 검토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첫 번째 원천이자 규범으로 삼은 것이다. 신적으로 계시된 일련의 정보가 아니라 신자들의 경험이 신학의 주제이며 판단 기준이다. 그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학이 교리적 공식들을 지속적으로 재검토해서 그것들이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의식을 표현하는데 적합한지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교리는 인간이 만든 것이고 어떤 교리도 신성불가침하지 않다. 기독교에 관한 모든 것은 경험 자체를 제외하고는 수정의 여지가 있다. 신학의 과업은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이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의식에 대한 당대 최고의 분석과 엄밀한 일치를 유지시키는 것으로,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유지되어야 하고, 버려져야 하고, 또 간직되기 위해 수정되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이 과업을 예리하고 끈기 있기 수행했다. 그는 당대의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의식을 표현하는 데 부적합한 교리적 표현들을 자신이 더 낫다고 여긴 표현들로 대체하려 시도했다. 이 과업에서 그의 기초적 작업 가정은 186다음과 같다. "모든 교리적 형식은 특정 시기에 국한되며 영속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현존하는 종교적 의식의 암시들을, 비판적 숙고를 통해, 새롭게 표현하는 것은 모든 시대에 주어진 신학적 과업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방법은 게몽주의를 수용하는 동시에 종교와 신학에 부과된 계몽주의 제한들을 뛰어넘으려 했다. 이성의 시대에 맞추어 그의 사고는 인간 경험에 중심을 두었고, 권위를 배척했으며, 지식을 아래로부터 쌓으려 했다. 그는 칸트를 따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경험될 수 있는 것에 국한했으며 "하나님 자신"(God in himself)이나 다른 형이상학적 주제들에 관한 사변을 멀리했다. 하지만 칸트가 종교를 오직 이성의 한계에 국한하기 원했던 반면,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오직 경건의 한계에 국한했다. 그의 신학적 방법은 감정과 직관적 지식을 강조한 점에서 낭만주의자들에게 호소했지만, 낭만주의의 주관주의와 비합리주의는 피했다. 무엇보다 슐라이어마허는 인간 경험의 축소할 수 없는 요소로서의 종교의 독특성과 하나님 의식의 최고의 표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강조함으로써 계몽주의와 결정적으로 단절했다.

슐라이어마허의 구체적인 기독교 교리 재구성들이 그의 방법만큼 현대 신학에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몇 가지는 그의 출발점이 기독교 믿음들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예시로 보여 준다. 또한 그의 재구성은 자유주의 신학의 선두에 서서 미래에 있을 많은 발전의 경향을 확립했다.

성경은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서 토대의 역할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독교 교리는 일차적으로 또는 독점적으로 성경으로부터 도출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자의187식〔즉 하나님 의식〕, 즉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경험으로부터 추출되어야 한다"고 그는 썼다. 성경은 가장 초기의 기독교 공동체가 가졌던 종교적 경험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더욱이 신약은 이후 세대들을 위해 예수의 완벽한 하나님 의식과 그것이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친 영향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후대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적 상황들에 대한 예수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에서 모형으로 기능한다.

분명히 슐라이어마허는 성경이 초자연적으로 영감되었다거나 무오하다고 보지 않았다. 성경에서 그는 어떤 구절이나 심지어 책 전체가 참된 기독교 경건에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구약 전체가 그에게는 신약의 "기준으로서의 품위"(normative dignity)를 결여하는 것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그는 성경이 완전히 독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보았다. 그 기록 과정에서 성령의 영향이 무엇이었든지, 그것은 다른 곳에서의 성령의 영향과 비교할 때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단지 정도의 차이의 차이로 여겨져야 한다. 그에게 성경은 그리스도 자신이 가졌던 하나님 의식의 순수한 모형을 드러내는 경우에 한하여, 또 그러한 경우에는 언제나 기독교 신학을 위한 상대적 권위를 가진다. 하지만 신학을 위한 궁극적 진리 판단의 기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에서 재생산되고 삶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 자신의 하나님 의식이지 성경 자체가 아니다. 179-187.

흥미롭게도, 하나님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됨(omnicausality)에 관한 슐라이어마허의 생각은 자연이 원인과 결과의 지배를 받는다는 계몽주의의 관점에 아주 잘 어울린다. 뉴턴이 정확했다면, 비록 칸트가 인과 관계를 내재화한 것이 참이라 하더라도, 온 우주는 깨질 수 없는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자유의지는 예외인 것처럼 보였으며,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슐라이어마허의 하나님과 자연에 대한 생각은 급진적이며 뉴턴의 견해와도 잘 어울린다. 그는 단지,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 가설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 라플라스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하나님 의식이 하나님의 실재를 보여 준다고 믿었다. 우리가 인정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직감한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완전한 의존의 감정에서 직감하고 경험하는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것을 창조했으며 다스리는 존재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자신 외부의 어떤 190것에 의존적이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하나님 의식의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인이어야 한다. 그는 물리적 우주에서는 자연 법칙을 통해, 인간의 내적 세계에서는 다른 이차적 원인들을 통해 일한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죄와 악을 포함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슐라이어마허에게 기적과 기도가 재정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기적은, 자연의 질서를 무효로 만드는 특별한 사건들이라는 의미에서는, 절대적 의존의 감정과 모순될 것이다. 내가 기적을 믿는다면, 나는 하나님이 처음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가 창조 세계에 개입하도록 하는 어떤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새로운 지식을 위해 자기 외부의 어떤 것에 의존하며 개입을 필요로 하도록 만들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기적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만일 어떤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의 일부였으며 이미 우주에 짜여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도록 시간보다 앞서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지,일어나는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한 반응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실 초자연적지 않다. 하지만 슐라이어마허가 기적을 믿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를 기도의 문제로 이끈다. 슐라이어마허는 간구하는 기도(petitionary prayer)의 효능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기도를 영적 미성숙의 수준으로 강등시켰다. 사건의 진로를 바꾸어 달라고 하나님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 진로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든 독립적이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최고의 행동이 무엇인지 말하는 기도자에게 어떻게든 의존적이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기도는 일들을 바꾸지 않는다. 기도는 나를 바꾼다"는 속설은 기도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견해를 잘 표현한다. 그의 말에 191따르면, 간구하는 기도는 아주 성숙한 형태의 기도는 아니다. 성숙한 기도는 찬양과 경배 및 감사의 형태를 띤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간구하는 기도를 한다면 그 효과는 그의 의식을 하나님의 의지에 맞추도록 하는 것일 수 있다. 간구하는 기도가 일어나기로 예정된 일을 바꾸지는 못한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미리 모든 것을 지혜롭게 정해 놓지 않기라도 했듯이 말이다. 또한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이 때로 간구하는 기도에 응답할 수 있다고 암시했지만,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기도와 응답은 "원래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일 뿐이며, 따라서 어떤 다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전혀 무의미하다."

슐라이어마허가 초자연적인 것에 해당하는 모든 범주가 참된 신앙에 해롭다고 여겼다는 점이 이제는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에게 초자연적인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적절한 하나님 의식과 충돌했다. 슐라이어마허는 "초자연적"이라는 것이 세계에 맞서 있는 하나님을 암시한다고 믿었다. 즉 하나님과 창조 세계 사이의 관계가 상대적 독립성을 통해 성립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의 경건은 하나님을 절대적인, 무한한 능력으로 이해한다. (유한한 존재 전체를 포함하는) 모든 유한한 것들이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상이 되며, 스스로는 자기 외부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말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초자연적인 것의 범주를 제거한 점은 과학의 시대에 기독교에 재기되는 긴급한 문제에 대한 편리한 해법을 제공해주었다. 189-191.

19세기말 자유주의 신학에서 대표적 인물은 리츨이었다. 리츨은 독창성, 창의성, 또는 장기적 영향력 측면에서 슐라이어마허와 비교할 수도 없지만(슐라이어마허는 리츨보다 상당히 앞서 살았으며 리츨이 나아갈 방향을 정립했다), 1875년 무렵에서 1925년까지 리츨의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리츨주의는 자유주의 개신교라는 말과 사실상 동의어였다.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의 학파가 아닌 신기원을 열었지만, 리츨은 신기원이 아닌 학파를 세웠다. 198.

리츨의 신학적 저술들 전체에서 하나님 나라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두 초점, 즉 종교적 초점과 윤리적 초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 초점은 칭의인데, 죄인이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았다고 선언되는 구원의 계기다. 윤리적 초점은 하나님이 인간 남녀를 불러 이웃을 향한 사랑의 이상을 실현하도록 한다는 주장에 있다. 리츨에게 구원은 두 초점을 모두 포함해야만 한다.

죄와 구원의 교리에서 리츨의 신학에 있는 혁명적 현세성의 측면이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그가 믿기에 구원은 일차적으로 이생에서 또는 훗날 하늘에서 복락의 상태를 성취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가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오히려, 구원은 일차적으로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내세적 종교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 영감을 받은 윤리적 행위를 통해 세계를 변혁하는 종교다.

아마도 리츨의 신학에서 가장 논쟁적 측면은 그의 기독론이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서도 다시 한번 그의 교리를 통제하는 중심이며, 하나님 나라를 이용해 리츨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이기에 참된 종교와 다른 전통적 교리(위격적 연합)의 측면들을 대체했다. 여기까지 읽으며 리츨에게서 무엇이 그렇게 자유주의적인지 궁금한 독자들은 그의 기독론을 보면 궁금증이 풀릴 것이다.

고전적 정통 기독론은, 451년 칼케돈의 정의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두 본성-인성과 신성-을 가진 한 인격이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점을 단언한다. 이러한 두 본성의 연합의 인격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말씀, 로고스, 삼위일체의 둘째 위격이다. 두 본성은 그의 성육신의 방식이다. 그는 자신을 한 인간으로 변화시켰거나 단지 인간의 피부를 걸친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스스로 인성을 짊어졌으며 이를 통해 인207간의 삶과 죽음을 경험했다. 이 정통 교리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가 신적 본성을 인간적 본성과 동시에 가졌다는 데 있다. 또한 그가-과거에도 또 지금도 그의 인격인-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데 있다. 리츨은 이 전통적 공식이 종교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라는 이유로 확고하게 거부했다. 말하자면, 그에게 이 공식은 서로 다른 두 유형의 언어를 혼동하는 것이며 과학과 종교 사이의 경계를 침범하는 것이다.

리츨에 따르면, 이 전통적 교리는 예수의 가치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예수가 사람들에게 미친 모든 영향 이전에 그리고 그와 별개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어떤 것에 관한 무심한 주장이다. 그가 단언하기를, 예수에 관한 참으로 종교적 평가는 그가 역사 속에서 한 행동과 영향, 그의 종교적 확신과 윤리적 동기에 관심을 가지며, 그가 가졌다고 여겨지는 선천적 특질이나 능력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후자가 아니라 전자를 통해 우리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츨의 논증에 따르면, 예수의 신성에 대한 긍정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삶이 그들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가치에 기초해 내리는 가치 판단이다. 그가 하나님 나라의 유일무이한 전달자로 왓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하나님의 가치를 지닌다고 판단한다.

리츨은 자신이 예수를 "단지 사람"으로 축소시켰다는 혐의에 대해 민감했다. 그는 이런 비판을 예상하고 그에 대해 방어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그는 에수의 신성을 성부 하나님이 예수에게 준 유일무이한 "소명"으로, 즉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구현체가 되라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소명을 예수가 완벽히 성취한 것이다. 예수가 이 삶의 과업을 자신만의 배타적 소명으로 받아들여 완벽히 실현했기 때문에, 그의 인격208자체가 하나님과 인류의 최고선이 성취되도록 한 역사에서의 영향이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이라 고백한다. 이것이 그의 삶이 하나님과 인류에게 가지는 가치에 근거한 가치 판단이기 때문이다. 206-208.

다시 역사주의에 대한 논의로 돌아오자. 역사주의란 정확히 무엇인가? 역사주의에 대한 한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사회적·문화적 현상들을, 혹은 이 현상들을 다루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그것들이 과거로부터 발전한 과정에 비추어 해석하고 평가〔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역사 안에 있는 사건들은 "언제나 그것들의 맥락에 의해 좌우되며", 이는 기독교의 발전에 있는 모든 지점을 포함한다. 이것은 자연과학에 상응하게, 진정으로 현대적이고 과학적이기 위해 모든 결과에 자연적 원인이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초자연적 원인들은 자연과학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20세기로 넘어가는 트뢸치의 시대에 이르러, 교육받은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은 사실상 거의 모두가 자연과학에 관한 이 언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의 우려는 역사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신학이 역사 연구에 있는 이 상응하는 규칙을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주의가 바로 이 규칙이다. 트뢸치가 보기에, 이 규칙을 무시하거나 벗어나려 하는 것은 시간을 전근대적 기독교로 되돌리는 것이며, 곧 교조주의와 궁극적으로는 종교전쟁으로 되돌리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역사주의를 포함하는 현대성이 역사 의식을 수용한 것은 지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 역사적 방법의 사용은 신학에서 교조적 방법의 파괴라는 결과를 낳는다. 어떤 개별적 역사의 사건도 배타적으로 신적 인과성 때문에 나머지 역사보다 더 현저하게 중요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된다. 하지만 역사적 방법은 보편성을 추구한다. 즉 이 방법은 어떤 사건이 전체적 발전과의 관계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트뢸치 본인의 말에 따르면, "현대의 역사 개념은 계시나 자연 이성의 진리같은 비교적 단순한 몇몇 개념들을 통해 순진한 주장들의 타당성을 확보하려는 〔기독교의〕 교조적 개념화에 마침표를 찍고", "모든 교조(dogmas)를 소멸시킨다."

그렇다면 이것은 교육받고 계몽된 그리스도인이 상대주의를 받아들여야 함을 뜻하는가? 역사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예수는 어떤가? 예수가 그의 과거와 현재, 그의 문화적 맥락 안에 있던 역사적 힘들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트뢸치의 주장대로 역사주의가 철저히 진지하게 수용된다면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역사주의의 진리를 실현한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전과 같을 수 없다. 역사주의적 기독교는 재구성된 기독교일 것이지만, 현대성이 모든 교육받은 사회의 표준이 됨에 따라 그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기독교의 사멸이다. 또는 아마도 기독교는 밀교로 전락하여 사회의 그 어떤 공적 역할에서 분리된 신비 종교가 될 것이다. 이것은 트뢸치나 그의 학자 동료들에게, 또는 유럽의 국가 교회들에게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1세기 초의 많은 미국인은 이것이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트뢸치는 기독교가 민간 신앙 같은 것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막겠다고 각오했다. 또한 그는 역사화된 (현대) 기독교를 상대주의로부터 지키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분명히 그는 상대성(relativity)이 상대주의(relativism)을 요구한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역사주의는 기독교의 절대성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239조차, 그들이 현대적이기를 원하는 한, 기독교는 절대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트뢸치에게 초자연적 확실성은 더 이상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의 기적도 내면의 기적도 더 이상 상소 법원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신앙은 확실성을 주지만, 그 확실성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고 정립되어야만 한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때때로 트뢸치는 끔찍할 정도로 모호하다. 분명히 그는 기독교를 파괴하거나 기독교의 진리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적 정직은 기독교의 역사적 상대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타협할 것을 요구한다고 믿었다. 그는 일반적 의미의 상대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역사 안에 있는 가치들을 추구했고 그것들을 신뢰했다. 또한 그는 신앙의 타당성을 역사적 연구 이외의 결정으로 단언했다. 237-239.

왜 기독교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트뢸치의 대답은 기독교가 새로운 "문화적 종합"을 위한 유일한 희망을 제시한다는 그의 믿음과 관련된다. 242.

트뢸치가 기독교에 관해 말한 다른 것들과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에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도 기독교가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규범적(normative) 종교, 즉 〔동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뿐 아니라〕 현재까지의 모든 역사에 규범적 종교"라고 믿었다. 여기서 독자들이 고개를 갸우둥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트뢸치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트뢸치가 말하는 "규범적"은 "절대적"을 뜻하지 않는다. 그는 "위대한 종교들 가운데 기독교가 인격주의적 종교 이해의 가장 강력하고 응축된 계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트뢸치는 기독교의 상대성에 관한 그의 모든 언급에서 상대주의를 피했다. 그가 보기에, 모든 다른 위대한 세계 종교와 비교할 때〔명시적으로 그는 "원시 종교들"(primitive religions)을 고려 대상에서 배제한다〕, 기독교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종교적 삶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더 잘 표현한다는 점에서 우월하다. "종교들 사이의 차이는…단지 더 높은 수준의 삶이 계시되는 깊이, 능력, 명료성에만 존재한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의 차이는 정도에 있지, 종류에 있지 않다. 기독교는 모든 종교가 지니는 공통의 열망을 드러내는 것에서 더 대단한 깊이, 능력, 명료성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규범적이지, 절대적이지는 않다.

그러므로, 트뢸치에게, 모든 것이 그저 상대적이지는 않다. 오직 역사만 246상대적이다. 절대적인 것, 즉 모든 의미와 가치의 근원인 하나님은 역사의 한 부분이 아니다. 역사 안에 있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이 절대적인 것을 절대적으로 소유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근원과 목적으로서 유익하다. 즉 "우리의 과거"의 "풍요롭고 심오한 가치들"을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절대적인 것을 간접적이고 상대적으로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도달한 그 절대적인 것에 다른 전통들과 공동체들은 다다를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러한 앙상한 철학의 뼈대에 어떤 살을 붙일 수 있을까? 트뢸치의 작품에는 가치에 대한 그의 전제가 깊이 묻혀 있다. "그는 인간 문화를 최대한 통일 할 수 있는 가치들을 추구한다." 그에게 "인류의 통일"은 절대적 가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고의 가치다. 이 가치의 기저에 있으며 역사 연구만으로는 거의 입증이 불가능한 기초 전제는, "삶의 모든 것은 살므이 신적 기초의 표현이자 이 기초가 총괄적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내적 운동이라"라는 것이다. 이런 전제는 역사 연구의 발견보다는 오히려 신앙처럼 들린다. 하지만 트뢸치에게 그것은 단지 "확신"이지, 증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니다. 245-246.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세 명의 가톨릭 신학자, 즉 오스트리아 사람인 프리드리히 폰 휘겔 남작, 그리고 르와지와 티렐이 현대주의의 주축을 형성했다는 점에 동의한다. 267.

자유주의 개신교도들과 대조적으로, 르와지는 451년에 칼케돈 공의회에서 표현된 위격적 연합 같은 기독론의 신조적 정의들이 오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다수 자유주의 개신교도들에게 이 특정한 교리는,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인격 안에 있는두 본성의 연합이라는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후예들 치하의 교회가 신약에서 발견되는 단순하고 순수한 예수의 복음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벗어났는지 보여 주는 증거였다. 하르낙은 위격적 연합의 교리가 교회의 헬라화에 대한 증거라고 비난했다. 르와지는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교회가 예수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표혀니하고 이단적 가르침에 맞서 방어하기 위한, 그 시대 그 장소에서 최상의 시도였다고 보았다. 르와지가 반대했던 것은 위격적 연합 같은 교리나 교의가 아니라, 그런 것들을 모든 시대와 문화에서 교정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지극히 높이는 태도였다. 또한 그는 그런 고대의 교의들을 계시된 진리로 보는 교회의 견해에 반대했다. 그에게 고대의 기독론적 공식들은 인간의 창조물이자 상징들이지, 계시된 진리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기독교적 삶의 기초를 이루는 신비들의…불충분한…제시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들은 명제가 아니라 경험의 형태로 오는 계시된 진리들 위에 있는 "보호 덮개들"이다. 276-277.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는 용어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생각과 감정이 들게 하지만, 이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영국과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한 보수적 개신교도들의 운동을 가리키기 위해서였다. 자유주의 신학이 현대성을 최대한 인정하는 것이었다면, 근본주의는 최대한의 보수주의였다.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자유주의 신학이 발흥하기 전까지 개신교 안에서 군림했던 개신교 정통주의의 유산을 의도적으로, 때로는 전투적으로 보존하고 방어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에 근본주의는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들을 현대성과 자유주의 사상의 산(酸)으로부터 방어했다. 이 명칭의 기원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1910년에 출간된 소책자 시리즈 『근본적인 것들』(The Fundamentals)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소책자들에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보수적 개신교 교리들을 옹호하는 중요한 보수적 개신교 신학자들의 논문이 실려 있었다. 1920년대와 그 이후에 보수주의는 다른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즉 분리주의적인, 심지어 동료인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도 분리주의적인, 그리고 종종 반지성적인 색채였다. 1940년대부터는 일군의 근본주의자들이 이 운동이 취한 방향에 환288멸을 느끼고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라 불리는 더 온건한 형태의 보수적 개신교를 만들어 냈다. 훗날 거기서 "신"(neo)이 빠졌고 복음주의라 알려진 운동이 되었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에 걸쳐 특히 미국 근본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되었고, 스스로 복음주의자들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미디어를 통해 종교적 우파(the religious right)로 알려진 느슨하게 조직된 현상을 만들어 내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지난 한 세기를 이어오는 동안 원래의 근본주의와 종교적 우파를 묶어 주는 한 가지는 보수적 개신교 가치들과 교리,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는 것에 대한 헌신이다. 원래의 근본주의자들 중에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같은 좌파 경향의 정치인들도 있었다. 요점은, 원래의 근본주의가 정치저긍로나 경제적으로 동일하게 보수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미국 근본주의가 보수적으로 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원래의 근본주의자들이 찰스 하지와 다른 프린스턴 신학자들을 경외한 것은, 보수적 믿음들을 간직한 최고의 지성이면서 동시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존경도 받았기 때문이다. 옛 근본주의자들이 수용한 기독교 믿음 체계와 접근 방식의 많은 부분은 하지와 프린스턴 신학에서 온 것이다. 어떤 대표적 하지 연구가의 말에 따르면, "하지의 세계관과 독특한 성격 해석은…20세기 개신교 근본주의를 위한 지적 틀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왜 하지를 현대 신학에 관한 이 책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많은 사람이 "현대"와 "자유주의"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실제로 초기의 근본주의자들은 반대자들인 자유주의 산학자들에게 현대주의자들이라289는 딱지를 붙여서 이런 현상에 일조했다. 하지만 "현대"가 반드시 "자유주의"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뒤에서 보겠지만, 하지는 보수적 개신교 신학에 대한 자신의 해설과 방어에 분명히 현대적 방법들을 사용했다. 게다가-키르케고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현대성에 반대하는 것 때문에 현대 신학자의 요건을 충족시킬 수도 있다. 아마도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스스로를 현대적이라 여기지 않았겠지만, 특히 하지는 정확히 현대적 공간에, 현대주의자는 아닐지라도 현대적 태도로 서 있다. 그렇다고 그가 현대성의 모든 것을 수용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를 들어, 그는 진정한 정통 개신교 신학이 어떻게 과학적일 수 있고 또 드래야 하는지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는 리드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으며 또 의존했다. 비록 리드가 흄에게 대응하고 있었지만, 또한 그는 로크와 경험주의 계통의 계몽주의적 토대주의에 기초해 있었다. 하지도 일종의 토대주의자, 성격적 토대주의자로서 성경 안에 있는 신적 계시가 합리적이라고 논증하는 데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현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많은 면에서 현대적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그는 근본주의자였지만, 그 근본주의는 어떤 대표적 복음주의 학자가 "광신적 집단이 된 정통주의"라 부른 것으로 추락하기 전의 근본주의였다.

1872년 4월 24일에 찰스 하지 교수의 프린스턴 신학교 봉직 5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74세의 신학자에게 축하하기 위해 뉴저지의 작은 도시 프린스턴에 모였다. 도시의 상점과 회사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문을 닫았다. 국내와 유럽에서 축전이 쇄도했다. 명사들290의 찬사가 이어진 후에, 하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프린스턴 신학교의 학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 "어떤 새로운 사상도 이 신학교에서 기원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어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분명히 말했다.

지금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종종 킥킥대기도 하겠지만, 하지와 그의 동료 및 추종자들에게는 그것이 업적에 대한 진술이었다. 그들을 둘러싼 세계는 변하고 있었고, 기독교는 그들이 보기에 극히 치명적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를 현대적으로 만드는 데 대한 관심으로, 신앙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재정의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것이 하지와 그의 집단이 이해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혐오했던 것은 단지 자유주의 신학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부흥주의-두 번의 대각성운동에서 비롯된 독특한 미국적 복음전도와 예배-도 싫어했다. 19세기의 위대한 부흥주의자 두 명을 꼽는다면 찰스 그랜디슨 피니와 무디였다. 그들은 소위 새로운 복음전도 방식을 도입했는데, 이는 하지와 그의 충직한 개혁파 일꾼들이 보기에 조작이고 신학적으로 불건전한 것들이었다. 하지와 구파 장로교도들이 본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않고는 하지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변화의 바람은 익숙한 모든 것을 파괴할 조짐을 보였다. 누군가가 나서서 개신교 정통주의의 전통을 고수하고, 그것을 비기독교적 철학과(다원주의 같은) 반(反)기독교적 과학 이론들에 적응하지 않으면서 설명하고 수호해야 했다. 하지가 바로 그 일을 담당할 만한 사람이었다. 287-290.

종합하자면, 하지는 참된 기독교가 경험과 교리 모두라고 여겼던 깊이 경건한 사람이었다.

하지는 자기 자신의 전제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만큼 늘 의식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었던 모든 것이 성경 속에서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대교리문답과 소교리문답을 포함하는 표준적 장로교 신앙의 진술들)의 표현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전의 신학과 철학의 경향들이 그의 신학적 숙고에서 작용하는 것을 종종 인지했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개혁파 신앙고백주의, 더 나아가 개혁파 스콜라주의, 그리고 스코틀랜드 상식실재론(리드)이다.

개혁파 스콜라주의가 한 유형을 이루는 개신교 스콜라주의는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난 신학 접근법이다. 종교개혁은 여러 면에서 가톨릭 스콜라주의에 대한, 더 나아가 스콜라주의 자체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원래 "스콜라주의"(scholaticism)란 "학교들의 신학"을 의미했는데, 여기서 학교들은 중세296의 대학들을 가리킨다. (때때로 학교들은 대학이 출현하기 이전의 수도원적 교육 기관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에 "스콜라주의"는 그곳에서 사용되던 신학 접근법을 가리키게 되었다. 즉 기독교 교리에 관한 모든 상상할 수 있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종종 사변을 사용했던 고도의 논리적, 합리적 신학 방법이다. 이 신학을 희화화한 하나의 극단적 예는 "얼마나 많은 천사가 바늘 끝에서 춤출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스콜라 학자들은 더 중요한 문제들을 매우 상세히 검토하고, 계시에 천착하면서 논리를 사용해 그것들에 답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스콜라주의에 대한 최고의 예는 토마스 아퀴나스다.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기독교 철학과 신학에 관한 방대한 책을 썼다. 그의 대표작은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으로, 신과 구원에 관한,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사고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갖는 모든 주제에 관한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여러 권의 엄청나게 두꺼운 책들이다. 토마스는 성서나 기독교 전통에서 대답하지 않은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 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용했다. 때때로 그는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그리스도 한참 전에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지했다. 하지만 토마스를 스콜라주의의 본보기로 만든 것은 그의 신학의 건축학적 구조였다. 그것은 마치 모든 부분이 다른 부분들에 필수적인, 하나의 토대 위에 지어진 거대한 중세 성당과도 같다. 다시 말해, 극도로 체계적이다. 모든 생각이 다른 생각들에 논리적으로 의존한다. 적어도 그것이 스콜라주의 사상의 이상이었다. 과연 누군가가 그 이상을 성취했는지 여부는 미지수다.

루터, 츠빙글리,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많은 것을 그냥 신비로 남겨 두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이성에 대한 태도를 달리했지만 모두 조직신학 책을 쓰지 않았다. 루터는 이성을 거부했으며 신비 안에 머물기를 즐겼는데, 그에게 신비는 하나님의 초월에 대한 표시였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철학과 논리에 많이 의존했지만 중세 때 있던 것과 같은 기독교 사상 체계를 구성하려 하지는 않았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썼는데, 이 책은 기독교 교리들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에 관한 많은 것을 신비의 영역에 남겨 두었다는 점에서는 스콜라주의적이지 않았다. 『기독교 강요』는 칼뱅이 해석한 성경적 교리의 훌륭한 요약이었지만, 스콜라주의적 방식으로 체계적이지는 않다. 종교개혁자들은 스콜라주의를 경멸했으며 (그들이 보기에) 중세 가톨릭교회의 교리적 오류들의 많은 부분을 스콜라주의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공교개혁 후에 많은 루터파 및 개혁파 신학자들은 논리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스콜라주의 같은 신학 체계들을 구성해서, 첫 종교개혁자들이 신비의 영역에 남겨 둔 질문들에 대답하려고 했다. 그 한 예가 개혁파 신학자들 사이에서 있었던 신적 작정들(divine decrees)의 순서에 관한 논쟁, 즉 타락 전 예정설(supralapsarianism)과 타락 후 예정설(infralapsarianism)사이의 논쟁이었다. 이 논쟁의 기저에 있는 문제는,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의도에서, 세계와 인간을 창조한다는 하나님의 작정이 먼저인지 혹은 선택받은 자를 구원으로 예정하고 유기된 자를 지옥으로 예정하는 하나님의 작정이 먼저인지 여부다. 개혁파 신학의 각각의 학파(츠빙글리와 칼뱅의 후예)는 신적 작정들의 순서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폈다. 비스콜라주의적 개신교도라면 그것을 성경에서 떠나게 하고 사변으로 이끄는 무익한 노력이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 스콜라주의자들은 그것을 중요한 질문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타락 전 예정설)과 하나님의 선의(타락 후 예정설) 중에서 선택하는 데 필수적이라 보았다. 칼뱅 연구가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질문은, 칼뱅이 이 논쟁에 연루될 정도로 오래 살았다면 어느 편을 들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칼뱅 연구가들은 칼뱅이라면 양측에게 경고해서, 과도한 사변과 논리를 사용해 하나님의 신비를 들여다보지 말도록 했으리라고 본다.

하지는 프린스턴 신학교 학생 시절에, 필수과목인 조직신학을 통해 개혁파 스콜라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하지 자신의 『조직신학』도 프란298키스쿠스 투레티누스의 고도로 스콜라주의적 『변증 신학 강요』(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의 수정이었다. 당시의 대다수 신학 저서들처럼 투레틴의 책도 라틴어로 쓰였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학생들은 세 권으로 된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암기해야만 했다. 투레티누스의 스콜라주의는 이전의 개혁파 신학에 있는 모든 느슨한 결말을 분명히 매듭지으려는 그의 바람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성경무오설의 강력한 옹호자였는데, 그가 말하는 성경무오설이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이 성경의 궁극적 저자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실수나 불일치나 모순이 있을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투레티누스는 자신의 성경 무오성 교리의 문제를 인지했다. 모호한 부분들은 어떤가? 어떤 성경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성경 안에 오류들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릭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로 된 책들의 본문에는 모음이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원래 히브리어가 모음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투레티누스 당시의 최상의 히브리어 성경 본문은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소위 마소라 본문이었다. 마소라 편집자들이라고 알려진 일군의 유대교 학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경이라 부르는) 히브리어 본문에 모음을 달았다. 투레티누스가 직면한 문제는, 모음 부호들이 첨가된 이 히브리어 본문들이 원래의 영감 받은 예언자들이 쓴 것을 반영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투레티누스는 본문의 의미를 고정하기 위해 마소라 편집자들이 첨가한 모음 부호들이 영감을 받았다고, 혹은 마소라 편집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정확한 모음 부호299들을 오류 없이 첨가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언자들이 구약의 부분들을 쓸 때 무엇을 의미했는지 또는 현존하는 최상의 구약 본문들이 실제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들이 생긴다. 분명히 투레티누스는, 참으로 스콜라주의적 방식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고정시키고 모호성을 최대한 제거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성경의 신적 영감을 마소라 편집자들에게까지 확대하겠다는 생각은 그의 많은 동료와 흠모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지나친 것으로 보였다.

하지도 그 정도로 투레티누스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그를 열렬히 흠모했고 그의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하지는 투레티누스와 다른 개혁파 스콜라주의들에 관한 논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고풍스런 저자들에게 수많은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경직되어 있고 장황하고 인위적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큰 장점이 있는데, 언제나 그들은 자신들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가 이해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분위기는 차갑고 매섭지만, 명확하다." 여기서 그는 투레티누스의 신학을 자신이 공상적이고 모호하다고 본 당대의 낭만주의 개신교 신학과 대조하고 있지만, 자신의 신학을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투레티누스처럼, 하지만 아마도 그보다는 온건하게, 하지도 동시대의 영어권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고도로 체계적 형태의 기독교 교리 개요서를 갖기를 바랐다. 그의 『조직신학』은 진리에 대한 그러한 스콜라주의적 사고 방식을 일부 반영한다. 하지 연구가 한 사람은 그의 신학 접근법을 "합리적 정통주의" 또는 "초자연적 합리주의"라 부르면서, 다음을 의미했다.

300진리는 〔하지에게〕 하나의 통일체였으며, 또한 신학의 진리들은 (신학이 권위있는 계시에 의존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과학이나 철학의 진리들과 동일한 논리적 위상을 지녔다. 계시가 이성에게 말해졌다. 즉 계시는 이성을 전제했는데, 이 이성은 증거들을 검토함으로써 계시의 신뢰성을 판단할 임무를 가졌다.

하지 자신이 말했다. "계시는 진리를 정신에 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계시의 전달은 계시를 받을 능력을 전제한다.…진리들은, 신앙의 대상들로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지성적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계속해서 그는 자신이 말하는 "지성적으로 파악된다"는 것과 계시를 받을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했다. 이성은 계시의 신뢰성을 판단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어떤 것을 믿는 것이 가능한지 판단하는 기준이다. 신학에 적용되는 이 기준에는 두 가지 원칙들이 있다.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을 하거나, 용인하거나, 명령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에게 이것은 공리의 위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는 그것을 선험적으로 참이라 여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명할 수 없는 것은 모두 거짓으로 거부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릇된 것을 하라고 명할 수 없듯이, 터무니없는 것을 믿으라고 명하라 수도 없다." 다음으로 하지는 신학에 적용되는 이성의 두 번째 판단기준인 비모순율을 단언한다. "하나님이 직관이든, 경험이든, 이전의 계시든 모든 제대로 입증된 진리와 모순되는 어떤 것을 참이라고 계시하는 것은…불가능하다."

이것은 하지가 이해하고 지식에 이르는 접근법으로 기술한 합리주의(rationalism)가 아니다. 그가 보기에 합리주의(Rationalism, 하지는 합리주의를 언제나 대문자로 썼는데, 아마도 합리주의를 자신이 사용하는 이성과 구별하기 위해서다)는, 사람이 계시나 신앙의 도움 없이 이성만으로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되며 실제로 알 수 없다는 믿음이다. 그것은 권위에 의지해서, 심지어 하나님의 권위에 의지해서도, 어떤 것을 믿기를 거부한다. 그는 합리주의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합리주의는 인간 지성이 모든 진리의 척도라고 상정한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피조물 편에서의 미친 가정이다. 만약 아이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부모의 약속에 의지해 무조건적 확신을 갖고 믿는다면, 분명히 인간도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인다. 하지의 신학을 "초자연적 합리주의"라고 부른 학자의 지적대로, "그는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했다." 분명 그는 가장 극단적인 의미의 합리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기초적 합리주의에 대한 그 자신의 정의에 따른다면 일종의 합리주의잘 여겨져야 할 것인데, 왜냐하면 무엇을 믿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그의 공리들은 인간 지성을 계시가 말할 수 있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하지는 스콜라주의 같은 신학 접근법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루터 또는 심지어 칼뱅이 이런 공리들을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으리라고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키르케고르는 하지를 스콜라주의자이면서 합리주의자라고 여길 것이다. 295-301.

거의 모든 하지의 신학 논평가들은 하지의 신학이 리드의 스코틀랜드 상식실재론(이하 스코틀랜드 실재론)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아마도 하지는 그것을 철학이라고, 특히 계몽주의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실재론의 한 측면은, 모든 보통의 인간이라면 정신 외부에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아는 특정한 타고난 능력을 가졌다고 믿는 것이다. 스코틀랜드 실재론의 옹호자들은 이 점을 흄이나 칸트의 것 같은 회의주의와 사변에 오염된 철학에 대한 저항이라 여겼다. 하지는 자신의 신학이 철학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철학에 반대303한 것도 아니었다. 한편으로 그는 '철학으로 여겨지는 것들의 대부분은…단지 인간의 사변일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은 〔그의 체계 안에서〕…〔그것이〕 합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철학에 귀속된다"고도 말했다. 하지가 신학을 하고 기독교를 옹호하는 방법을 주의 깊게 검토하면,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명백한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실재론의 영향이 나타나며, 아마도 그는 이 점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 따르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스코틀랜드 실재론을 "흡수"했따. (그가 홀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닌데, 스코틀랜드 실재론이 19세기 미국에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스코틀랜드 실재론이 정확히 무엇인지 상기시키는 내용을 간단히 덧붙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대체로 스코틀랜드의 인식론은 정적(靜的)이다. 정신이 외부 세계를 안다는 것이다. 정신은 그 자체로 실체적이다. 즉 일정한 특징이나 성격들을 갖는 종류의 것이다.…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 자연철학자는 일정한 규칙들을 다소 기계적으로 따른다.

하지가 스코틀랜드 실재론의 영향을 받았다는 한 증거는, 그가 인간의 본성 안에 심겨진 일정한 "믿음의 법칙들"(laws of belief)에 바나복해서 호소한다는 점이다. 하지는 이것들을 높이 평가하며 계시 자체에 버금가는 아주 중요한 지위로 끌어 올렸다. 하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언을 분별하라고 권면한 것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영들을 분별해야한다"고 썼다. "하지만 기준 없이 어떻게 우리가 분별할 수 있겠는가? 또한 304우리 본성의 법칙들과 입증된 하나님의 계시 이외에 어떤 다른 기준이 있을 수 있는가?" 『조직신학』 서두에서 하지는 자신의 신학 방법이 "우리 본성의 구조 안에 주어진" 일부 가정들과 함께 시작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스코틀랜드 실재론에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인간 본성의 한 가지 법칙은 "우리는 증거 없이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은", 그가 쓰는 바에 따르면, "맹목적, 비합리적 동의가 아니라 적절한 근거들 위에서 진리를 지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가 스코틀랜드 실재론에 빚지고 있음은 다음의 진술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위와 명령 때문에 믿어져야 하는데, 그것들은 자연의 작품들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완벽성과 유사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 자연과 그것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우리의 능력에 자기 입증적 측면이 있듯이,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도 자기 입증적 측면이 있다. 그 계시의 의미는 편견 없이 접근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명확하다. 두 경우 모두에서 진리는 정신 외부에 있으며, 바른 정신 활동의 일정한 법칙들 때문에 실제 있는 그대로 파악되고 이해될 수 있다.

아마도 하지가 스코틀랜드 실재론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예는, 그가 모든 합리적 사람들이 사실로 알고 있는 것에 자주 호소한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리드를 비롯한 상식실재론자들에게 그렇듯, "지나치게 복잡하지 않은 문제들의 경우에는 일반적 사람들의 집단 판단이 진리를 판단하는 시금석이다." 어떤 진리들은 자명하고 직관적이며 모든 보통 사람들이 그것들에 동의한다. 이 책 1장에서 제시한 예는 다른 305정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정상적 사람이라면 이것을 진심으로 의문시하지 않는다. 스코틀랜드 실재론은 더 나아가서, 우리의 기본적 직관들 중에서 모든 보통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것은 외적 실재의 객관적·사실적 성격과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인간 정신의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칸트의 비판적 관념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데, 그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공간과 시간은 외적 실재의 특징들이 아니라 정신의 기능들로, 감각의 원자료(raw data)위에 외적 실재의 특징들을 부과한다. 스코틀랜드 실재론은 그것을 단호히 배격한다. 하지도 그랫다. 그에게 지식은 정신이 실재를 파악한 것이다. 즉 지식은 정신의 내용이 외적 실재와 상응할 때 존재한다. 302-305

계몽주의의 한 결과이자 현대성의 한 측면은, 지식을 논리적으로 또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에 국한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성이 신학에 가져다 준 위기였다.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19세기 문화의 주도자들 대다수에게, 종교는 지식을 포함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의견306의 위상을 가질 뿐이었다. 일부의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사실과 가치 사이를, 또는 사실과 감정 사이를 이간질시킴으로써 이 점을 받아들였고, 이로써 신학은 가치 또는 감정의 영역으로 밀려났다. 아직 그들은 신학을 지식의 한 형태로 여기지만, 하지가 보기에는, 신학을 사실 이외의 범주에 넣음으로써 현대성의 세속적 사조에 너무 많이 양보한 것으로 보였다. 그 결과로 목사들은 자신들이 설교하는 주제를 안다고 주장하지 않게 되었다.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느낌이나 의견이나 단순한 훈계의 표현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하지가 한 일은 종교가 사실들에서 멀어지는 19세기의 기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에게는 신학이 사실들의 합리적 체계로서 갖는 여왕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조직신학』 서두에서 하지는 진리를 인식하는 정돈된 방법으로서 신학이 갖는 과학적 위상을 주장했다. 그의 말은 신학이 소위 물질과학 또는 자연과학의 하나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기본적 인식 방법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305-306

다시 말해, 하지에게 모든 과학은 신학을 포함하며, 그것이 작용하는 "사실들의 창고"를 갖는다. 어떤 것을 과학이 되게 하는 것은 직관적, 보편적 추론의 규칙들(제2원리들)을 객관적으로 사용하여 그 창고로부터 사실들을 채굴하는 데 있다. 자연과학들에서 그러한 규칙 한 가지는,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신학에서 그러한 규칙 한 가지는 "미덕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명령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으로 토대주의적 신학 접근 방식을 따르면서, 성경과 제1원리들을 토대로 사용하면서, 신학308자는 자연과학들과 동등한 수준의 지식을 소유한다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

분명히 하지는 자신이 계몽주의적 사고의 영향 아래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가장 공감하는 현대의 해석자들조차 이 점을 인정한다. 물론 하지는 자신의 신학 방법이 계몽주의 특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겠지만, 하지 이전에 신학적 방법을 이렇게 진술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분명히 그는 계몽주의에 기초한 문화적 맥락에 있으면서 이 맥락에 대응하고 있었고, 토대주의적 기반들 위에서 신학을 방어하려 시도했다. 적어도 키르케고르라면 하지가 이토록 사실들, 이성, 방법, 체계를 강조하면서 현대주의의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비난할 것이다. 신학이 하는 것은 자연과학들이 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가? 신학이 성경에 대해 갖는 관계는 지질학이 지구의 표면에 대해 갖는 관계와 동일한가? 어느 정도는 정당하게, 하지가 제시한 신학 방법은 복음주의적 계몽주의라 불려 오고 있다.

마크 놀(Mark Noll)은 하지와 프린스턴 신학 일반에 대한 특히 예리하면서도 공감하는 해석자로서, 그들의 신학이 가진 이런 측면을 드러내는 데 앞장서 왔다. 그의 논평에 따르면, "그들의 철학적 충성은 때때로 그들을 과학적 실증주의자들처럼 생각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놀이 특히 (비난까지는 아니더라도) 비판하는 부분은, 신학을 객관적 사실들에 대한 객관적 과학으로 다루는 하지의 경향이다. "객관적 신학 방법을 향한 하지의 열망은 그의 경력 전체에 걸쳐 자주 반복되었다." 다시 말해, 하지는 신학이 신비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았던 베이컨적 과학 방법을 모방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놀의 지적에 따르면, 하지는 한 가지 측면에서 순수한 309과학적 객관성이라는 자신의 이상들에서 벗어났다. 다시, 스코틀랜드 실재론이 등장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실제로 하지는 자신의 신학을 구성하기 위해, 일부 중요한 쟁점들에서, '사전에 형성된 이론들'을 기꺼이 사용했다." 적어도 놀에 따르면, 하지는 성경에만 의지할 수 없을 때 자신의 보편적 도덕 직관들 개념과, 인간 체질에 장착되었다고 여겨지는 추론과 인식의 제1원리들 개념에 다시 의존했다. 놀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하지 자신이 널리 공표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신학적 사상이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나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사상은 신학적 추론을 위한 안내자로서 하지 자신의 도덕적 직관들이 선택적이고, 임의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놀이 의미하는 바는, 심지어 하지도 신학에서 주관성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분명 하지가 염려했던 것들 가운데 하나는 당시의 신학, 즉 19세기 개신교 신학이 주관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내면의 빛이나 감정에 따라 그들 자신의 눈에 옳게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고 가르치거나, 단지 현대적이기 위해 관념론적·합리주의적 철학에 굴복하고 있었다. 그는 신학자들이 현대성에 걷어차이는 아픔을 피하기 위해 비적실성이라는 도랑으로 뛰어들었다는, 한 세기도 넘어 출현한 빈정거림에 틀림없이 동의했을 것이다. 한 신학적 적수에 대응해서, 그는 종교를 객관적 사실들과 관련 없는 감정에 기초시키려는 19세기의 경향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307-309.

다시 인용할 가치가 있는 것은 "하지의 세계관과 특별한 성경 해석이…20세기 개신교 근본주의를 위한 지성적 틀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다른 비판가에 따르면, 마땅히 하지는 "성경주의자이자 교조주의자"락 불릴 수 있다. 놀은 "하지가 간혹 성경을 단순히 사실들의 보고(寶庫)로 다루려는 의지를 보였음"을 언급하면서, 〔하지와 같은〕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다음 단계는 근본주의다"라고 말한다. 이런 지적들은 그를 흠모하는 학자들로붙 나온 강한 표현들이다. 무엇이 그런 표현들을 가능하게 하는가?

319첫째, 하지에게는 성경을 사실들의 보고로, 즉 아직 체계화되지 않은 조직신학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강조점은 분명히 교리적 체계로서의 기독교에 있으며, 하지가 그의 체계에서 비본질적인 것들의 영역에 남긴 것들은 거의 없다. 하지는 개인적으로는 관대한 사람으로서, 대다수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고 구원이 신학적 정통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그의 언어 표현은 올바른 믿음에 대한 그의 시각에 기초한 배타적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회색지대에 거의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소문난 이분법적 사상가였다. 그에게 대부분의 교리들은 참이거나 거짓이었으며, 그는 자신이 속한 기독교 전통 외에서는 가치있는 것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둘째, 하지는 자신이 받은 문화적 영향들을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 신학자 데이비드 켈시(David Kesey)가 올바르게 지적하는 것처럼, "하지는 자신이 문화적 맥락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에 대체로 무감각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미국주의와, 독특하게 미국적 형태의 스코틀랜드 실재론에 철학적으로 헌신했으며 적응해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놀은 하지에게 모호한 찬사를 보낸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의 저작에서 정말 주목할 만한 점음, 그들이 미국적 지성의 관례들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들의 사상을 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서 깊은 칼뱅주의가 그토록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하지는 사회적·역사적 의식이 전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교리적 발전을 부인했으며, 오히려 모든 교리가 직접 성경으로부터 떨어지며 자신의 교리 체계는 어느 시대에나 세계의 어느 곳에도 전달될 수 있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타당하다고 생각하기를 선호했다. 많은 면에서 그는 트뢸치의 정반대였다. 즉 하지는 역사주의를 거부했는데, 그러면320서 심지어 자신의 믿음 체계가 문화와 역사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완전히 무감각할 정도였다.

하지의 비판자들이 올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이 모든 것은 하지가 활동하던 환경을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는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을 교리적 일탈 및 배신과 다름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 맥락은 하지의 신학이 취한 형태와 방향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많은 21세기 보수적 개신교도들은 자신들이 탈현대성의 인식적·도덕적 혼란이라고 여기는 상황에서 하지를 재발견하는데, 그들은 더 대중적으로 제시된 동일한 교리적 체계를 피난처로 삼아 도피한다. 318-320.

4. 중재 신학들이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 다리를 놓다

호러스 부시넬은 46세였고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에 있는 노스 회중교회에서 이미 15년간 목회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의심과 거리낌에 시달렸다. 예일 칼리지의 학생 시절에 어떤 부흥회에서 결단한 후 목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지만, 주로 그의 기독교 신앙은 경험이라기보다는 의무였다. 그는 영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경건서적을 읽고 기도하고 있었다. 1848년 2월의 어느 아침에 그는 집안 서재에서 깊은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마치고 나왔다. 그의 아내는 즉각 그에게서 뭔가 다른 점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무엇을 봤어요?" 그는 짧게 대답했다. "복음." 훗 날 이 뉴잉글랜드의 목사-신학자는 그 현현(顯現)을 기록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와 그 안에서 제시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발견하는 사건에 의해 압도되었다"고 했다. 분명히 그날 부시넬이 경험한 사건은, 존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 가(街)의 모라비아 교도 집회에서 가졌다는 그 유명한 "가슴이 따뜻해지는" 경험과 유사하게,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적이고 비매개적으로 경험한 사건이었고, 이는 영원히 그를 바꾸어 놓았다. 356.

그(부시넬)는 조직신학을 저술한 적이 없고 신학이 정확히 체계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체계가 기독교를 죽인다는 경건주의 지도자 친첸도르프(Zinzendorf)의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특정한 공통의 실마리들이 그의 다양한 신학 저서들을 묶어 준다. 주된 실마리는 그리스도였다. 부361시넬의 저작 모음 편집자 한 사람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그의〕 사고와 사역의 매력적인 중심이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부시넬의 책들은 뉴잉글랜드 개신교에서 있었던 신학적 논쟁들을 배경으로 쓰였다. 그는 이 논쟁들에 뛰어들어, 양자택일의 사고를 초월하는 더 높은 관점들을 통해 잘못된 이분법을 극복하려 했다. 그의 신학적 제안들 중에서 일부는 경악과 심지어 거부에 부딪혔다. 그 제안들은 상당히 대중적 언어로 쓰였을 때조차 늘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것들은 보수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새로운 제안들이었다. "그의 책들은 늘 비난을 받앗고, 그는 자신의 사역 대부분에 걸쳐 소외되고 고립되었으며, 그의 견해를 받아들인 목사들은 말을 삼가야만 했다." 그의 저작들 모두를 관통하는 반복되는 주제 하나는 "모든 신학적 언어는 필연적으로 완전한 객관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과, 그렇기에 "절대적으로 객관적 혹은 과학적 신학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분열시키는 신학적 논쟁들의 다수는 신적 계시를 너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과, 계시된 진리들을 절대적으로 합리적 정합성에 억지로 맞추려는 시도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는 쉽게 그러한 오해를 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진리가 역설적으로 제시될 때 우리는 균형 잡힌 이해에 가장 근접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런 주장은 신학이 과학적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당시의 신학자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시넬의 신학은 전통적 기독교 교리들을 재구성하려는 일련의 시도로서, 적응에 굴복함 없이 현대 지성에 말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려 했다. 자유주의 개신교도들과 달리, 그는 초자연적인 것을 굳게 붙잡고 옹호하면서 하나님의 행위를 자연의 기계적 힘과 의식의 상태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에 반대했다. 보수적 개신교도들과 달리, 그는 교리들을 갱신해서 그것들이 (특히 율법과 윤리에 관한) 기독교적 경험과 현대 사상에 더 적절하도록 만들고 싶어 했다. 그는 한 발은 기독교 전통에, 다른 한 발은 현대 사상의 세계에 디딘 채 일했다. 그런 이유로 그의 신학은 "진보적 정통주의"로 분류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여기서 그가 중재 신학자에 포함되는 이유다. 360-362.

모든 위대한 신학자들 뒤에는 영향을 미친 철학자가 있는데, 부시넬의 경우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있었다. 이 잉글랜드의 시인이자 철학자가 부시넬에게 유일한 영감의 원천은 아니었지만, 그를 모르고서는 이 뉴잉글랜드 신학자를 이해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부시넬을 슐라이어마허와 연결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이 둘의 공통되는 기반은 낭만주의이고, 낭만주의는 주로 콜리지를 통해 부시넬에게 중재되었다. 사람들이 부시넬을 이해하려 할 때 겪는 어려움은 대부분 바로 이 때문이다. 콜리지는 종종 모호했는데, 부시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종교를 일차적으로 경험의 문제로, 그리고 신학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언어를 통해 이 경험을 표현하려는 불충분한 시도로 보았다. 부시넬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뉴잉글랜드 신학을 분열시키던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를 초월하는 신학방법론을 찾는 데 몰두했다. 콜리지의 낭만주의는 부시넬이 찾던 방법을 위한 열쇠를 제공했다.

부시넬의 보고에 따르면, 어느 날 그는 콜리지의 『성찰에의 도움』을 읽363고 이 책이 "애매하고 몹시 난해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후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놓쳤음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그의 훗 날 기록에 따르면, "모든 것이 명확했고 교훈적이었다." 그가 콜리지에게서 찾은 가장 큰 도움은 상상이 "초월적으로 지각적이고, 창의적이고, 통일시키는 능력"이라는 생각이었다. "상상은 악마의 놀이터"라는 옛말이 있다. 하지만 이 속담의 "상상"과 콜리지의 "상상"은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 콜리지에게, 그리고 부시넬에게, 상상력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인간 인격성의 창조적 능력으로, 분석적 이성으로는 얻을 수 없는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상상은 종합적이며, 이성이 단지 모순만을 볼 수 있는 곳에서 통일성을 본다. 이성은 모든 것을 명제들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상상은 은유 및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상상은 이성이 보지 못하는 패턴을 볼 수 있다. 부시넬은 신학을 과학보다는 예술로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 신학은 과학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더 이성적 성향의 신학 동료들과 빚은 마찰의 원인이 있다. 부시넬은 비합리에 빠지지 않으면서 신학에서 계몽주의적 토대주의를 넘어서려고 시도했다.

부시넬이 콜리지로부터 받은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어, 그 영향을 매우 깊고 전체에 퍼져 있다. 이 목사-신학자는 성경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책보다 콜리지의 『성찰에의 도움』에 빚졌다고 스스로 말한 바 있다. 콜리지는 부시넬의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켰으며, 더 체계적인 다른 사상가들이 보지 못하는 진리의 전망들을 부시넬이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예를 들면, 성경 안에서 종종 그렇듯이, 진리는 시와 비유를 통해 가장 단순하게 전달될 수 있다. 이 진리는 의미적 손실 없이는 합리적 명364제로 번역될 수 없다. 합리적 명제로 번역되면 이런 진리는 죽고 만다. 부시넬에게는, 콜리지에게 그렇듯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표현을 한 의미가 '몇몇 진부한 명제'로 정의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된 경건과 지성 모두에 대한 모독이다." 성경이 의미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영적이고 시적이며, 이성이나 합리적 증명 혹은 역사적 증거에 호소하지 않고 자기 입증적이다." 콜리지와 마찬가지로 부시넬은 기독교 진리가 "영과 생명이며…자연적 이해를 위한 자료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부시넬의 콜리지 전유(專有)가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여기서 잠시 멈추고 이 둘이 모두 종교를 일차적으로 정보(information)보다는 변혁(transformation)으로 여겼다는 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신학자들이 입으로는 이 진리에 동의하겠지만, 콜리지와 부시넬은 신학자들이 신조적 진리를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교의적으로 주장할 때 이 점을 부정한 것이라고 보았다. 콜리지와 부시넬에게 종교의 본질은 "신적인 것에 대한 감각"과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 지식"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친교다. 부시넬은 "가장 잘 설계된 신학적 의견들이 지금까지 제공해 줄 수 있었을 것보다도, 한 시간 동안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와의 최고의 친교에 그리스도의 참된 빛이 더 많이 있다"고 썼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참되게 아는 방법은 의견이 아니라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깨달음은 의견이 아니라 신앙과 올바른 감정, 영, 생명을 통해 실현된다. 둘째, 콜리지와 부시넬 모두 명제적 교리, 즉 신조적 공식을 기독교 경험에 부차적이며, 기껏해야 말로 적절히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365현하려는 미미한 시도로 여겼다. 362-365

부시넬에게 "삶의 훈육에서 가장 의미 있고 숭고한 모든 것"은 형이상학적 영역보다는 미학적 영역에, 문자적 영역보다는 시적·은유적 영역에, 개념적 영역보다는 경험적 영역에 있다. 이 모든 것에 있는 콜리지의 영향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말은 부시넬이 활발한 신학적 논쟁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개념을 담고 있는 언어적 표현들이 동등하게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하나님의 계시와 기독교적 경험을 더 잘 표현해 낸다. 송영적이고 윤리적인 것에서 분리된 순수하게 지적인 것은 죽이는 반면, 경험적인 것, 상징적인 것, 은유적인 것은 살린다.

부시넬의 신학이 얼마나 혁명적인지 이해하는 것은 그의 언어 이론과 특369히 신학의 언어를 이해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대체로 학자들은 그의 언어 이론이 혁신적이고 통찰력 있는 동시에 또한 약간 모호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것은 훗날 20세기와 21세기의 종교 언어에 관한 신학 사상들의 전조前兆가 되었지만, 그의 당대 사람들에게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이론은 19세기 미국 신학의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만연했던 스코틀랜드 실재론에서 철저히 벗어났다. 아마도 훗날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이를 환영하겠지만, 부시넬의 시공간에서는 지식에 대한 순전한 회의주의로 대개 거부되었다. 하지만 이 회중교회 신학자에게 그 이론은 하나님의 신비가 하나님에 관한 지나치게 지성화되고 형이상학적 사고의 담화에 의해 정복되고 축출되는 것을 막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이론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하나님을 단번에 기술하는 체하는 교리의 영속적 진리들에 의해 막히지 않게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전통적 신학은 진리대응론(the 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이라 불리는 것을 사실로 상정했는데, 그것은 곧 말과 명제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직접 기술한다는 믿음이다. 칸트는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들은 모두 정신이 사물들을 구성한 것에 따라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런 믿음을 흔들어 놓았다. 우리는 사물들 자체에 대한 직접적 지식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실재론은 칸트에 대한 대응으로, 19세기 영국과 미국의 자유주의 및 보수주의 신학자들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부시넬 당시의 대다수 미국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에 관한 말들이 하나님을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적어도 적절히 기술할 수 있다고 상정했다. 예를 들어, 전통적 관점에서, 하나님이 능력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의미 있는, 심지어 문자적인 무엇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적어도 비례적으로 인간의 능력에 대해 유비적이다. 부시넬에 따르면, 이 가정은 잘못된 것이며 많은 신학적 혼란과 논쟁의 원인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한 신학자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예정한다고 말하고, 다른 신학자는 하나님이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자유의지를 행사하도록 능력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부시넬은, 뒤에서 보겠지만, 이 오래된 논쟁을 벌이는 칼뱅주의자와 아르미니우스주의자 양측에게 그들이 은유와 이미지로 말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서로의 견해가 반드시 다르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요청했다. 확실히 하나님이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둘 다 하는 것일 수 있다. "예정하다"와 "능력을 부여하다" 같은 말들은 이미지이며 은유지, 어떤 신적 실재에 완벽히 어울리는 본질은 아니다. 368-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