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교회와 환원신학 장성우 목사 |
그리스도의 교회와 환원신학 장성우 목사 |
1. 서론
환원신학의 유무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많은 논란이 되어 왔다. 과연 환원신학(Restoration Theology)은 없고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만 있는 것인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육에 있어 환원신학의 발전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정체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교육기관의 성장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확립은 후진양성을 위하여 절대적 필요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교육에는 지식의 구조(Structure of Discipline)와 학습과정(Learning Process)이라는 두 가지의 엄연한 요소가 있다"고 제롬 부루너(Jerome Bruner)는 말하고 있다. 이 지식의 구조는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복음"이라는 말 속에 집약된다. 이 복음 즉 지식의 구조에 대한 분석의 사명을 신학이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은 신학에서 출발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출발점이 신학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신학이 없다고 하는 일련의 사고 때문에 교육의 전진을 볼 수 없었고 교회 교육이나 신학교육은 신학의 부재로 말미암아 교파 교회의 신학을 답습하는데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받아들인 환원운동에 있어서 그 운동의 시발점은 당시의 교회정치 구조의 모순과 교파의 혼란 속에서 도입된 비교파주의 운동이었다.[김익진, {신약교회운동}(참빛출판사), p. 24.] 제임스 디 스마트(James D. Smart)는 "신학은 교회가 그 존재에 대하여 신중히 반성하고 하나님의 교회되기에 부족한 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철저히 검토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본 논문은 초기 환원운동자들이 만들어 놓은 내용 구조를 분석하고 오늘날의 뒤떨어진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회신학을 발전시키며 정립시켜 나가고자 하는 의도에서 연구하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 교육의 입장에서 교육의 구조인 신학의 요청이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음을 알게되고 기독교 교육 역사 속에서 그 시대마다의 교육의 내용구조가 확실하게 나타나 있음을 연구하여 오늘날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어서의 기독교 교육과 신학교육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기 위하여 본 논문을 쓰게되었다"라고 엄만동 목사는 그리스도의 교회 교육의 내용구조에 관한 연구에서 서술하고 있다.[엄만동, "그리스도의 교회 교육의 내용구조에 관한 연구,"(한국목회대학원, 석사학위논문), pp. 94-95.] 신학은 신학자들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는 대학 및 대학교에서 이와 같은 신학 과정을 제공하는 것이 인기가 되고 있다. 그 결과 신학자가 된다는 것을 칼 바르트(Karl Barth),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폴 틸리히(Paul Tillich),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및 기타인들에 관해서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인물들에 관해서 안다는 것이 아마도 도움이 될 것이며 또 분명코 그들과 접촉함으로써 하나님께 관한 우리의 지식이 풍성해진다. 그렇지만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에 관한 사상을 갖기까지는 소위 신학을 대치해서는 안 된다.[Fisher Humphreys, Thinking About God(Insight Press Incorporated, 1974), p. 9] 그리스도의 교회가 "신학이 없다"할 때 우리는 신학의 개념부터 분석해야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환원운동 자체 속에서 신학교육을 하고 있고 신학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은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으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인물 중심 신학을 사고 할 때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학이 없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의 규정과 성격의 신학을 말할 때는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을 환원신학으로 정확히 규정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은 있으나 환원신학(Restoration Theology)은 없다"고 하는데 신학화 작업은 하나의 운동으로부터 출발되고 있음을 알 때 동적 현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정적 요소인 Dogma를 신학적 요소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없기도 하고 있기도한 모순 속에서 앞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지금도 늦지 않았으나 우리의 환원신학 개발에 주력해야 하겠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속의 사람이이며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매사에는 사랑으로(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와 "성서가 말하는 곳에는 우리가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침묵하자(Where the Bible speaks, we speak, and where the Bible is silent, we are silent.)"는 환원운동의 초석이 되는 명언 속에서 제한과 자유를 공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속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을 가지 성서에 의한 제한과 통일 속에서 자유와 다양성을 그리스도인이 지니는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정체성이다. 미국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는 환원사상의 구현을 위하여 요한 웨슬레(John Wesley)의 사상을 추구하며 그가 주장했던 성서적인 신앙과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제임스 오켈리(James O'Kelly/1735-1826)가 조직화되면서 John Wesley 사상의 퇴색됨으로 감독정치에 회의를 품고 1793년 12월 24일 감리교 총회를 탈퇴하고 그 이듬해인 1794년 같은 환원사상을 지닌 무리들이 버지니아(Virginia)에 모였을 때 같은 동료인 라이스 해가드(Rice Haggard)가 우리는 성서를 유일한 신조로 받아 드려야 하며 자신들은 "그리스도인(행 11:25-26)"으로 불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Enos E. Dowling, The Restoration Movement (Cincinnati: Standard Publishing Co., 1964), p. 214.] 그들의 신학적 근거는 성서였으며 그 뿌리에서 기본 원칙을 채택되게 되었다. (1)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다.(엡1:22-23) 이와 같이 ekklesia(에클레시아) 곧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관을 신학으로서 정립하였다. 예수님도 교회란 자신을 구주로 시인하고 구원의 도를 받아들인 무리로 사용하였다. (2)그리스도인 이름은 성서에 가장 합당한 이름이다. 신앙의 대상으로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상대적 대상은 그리스도인이어야 하고 그에 대한 신앙규범으로 성서와 그리스도인의 품성(品性)의 완비는 교회 구성요소에 중요한 여건이다. 그러나 개인의 판단권리는 무든 사람의 특권으로 주장됐다. 이러한 성서 신학적 근거 위에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1794년 북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의 Chapel Hill에서 세워졌다. 그 때 버몬트의 의사이며 침례교인(Free Hill Baptist)이었던 아브너 죤스(Abner Jones)도 교파적 교의에 대한 회의와 종파심에 대한 갈등 속에서 인위적 신조와 인간적 교의를 버리고 신앙과 행위의 법측에서 1801년 Christian Church를 Lyndon에 세웠고 엘리아스 스미스(Elias Smith)목사도 같은 뜻으로 동조되었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선교 반세기를 지나면서 신학교육기관을 국내 유수한 기관으로 성장시키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신학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역사성과 현재성을 부정하려고 하는 강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초기적 환원운동자들은 순수성서 신학적 입장에서 교회와 구속사적 조명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그 후 발톤 스톤(Barton W. Stone)을 거쳐 토마스 캠벨(Tomas Campbell),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 부자 시대에 이르러 그의 신학 체계는 Alexander Campbell의 {그리스도인의 신학체계} (Christian System)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본 논문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환원신학에서 그 구조와 특성을 소개하고 특별히 환원운동가들의 면모 속에 흐르는 환원신학의 흐름에 대하여 분석하고 앞으로 우리 신학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특별히 환원신학에 있어서 성서신학과 교회신학, 예배신학이 지향해야 할 성경적 근거를 제시코자 한다. 지금 급변하는 세대 속에서 그리고 변화 무쌍한 신학 사조 속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학문적 자세는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거나 주체성을 상실하고 급진사상의 급류에 역류되거나 현대적 상황에 안주해 버리는 자세를 버리고 성서가 요구하는 신학, 교회가 요구하는 신학에 응답하는 발전적 신학 정립을 해야 한다. 본 논문이 오랫동안 환원운동의 중심과제가 되었던 신앙과 행위를 통한 구원신학, 그리고 예배를 중심으로 본 교회의 존재적 위치와 앞으로 신학교육의 방향 제시로 후진 양성의 시대적 요청을 재조명하면서 환원신학의 정립을 도모코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에서 개인을 중심으로 한 인물로 신학을 통용하는 오류도 범하지 않고 어느 교조적 발상에서 나온 교파적 시조화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성서를 중심으로 한 성서신학이며 그것은 성서적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마16:16) 하는 그리스도 앞에 고백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조직신학에 대한 견해를 살펴볼 때 우선 조직신학의 명칭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면 코너(W. T. Conner)는 기독교 교리(Christian Doctrine)[W. T. Conner, Christian Doctrine(Nashville Tennessee: Broadman Press, 1937)]라 했고, 멀린스(E. Y. Mullins)는 신조(Creed) 혹은 고백(Confession)이라 했고, 보이스(J. P. Boyce)는 조직신학이라 했는데, 알렉산더 캠벨은 기독교 체계(Christian System)라 했다. 우리는 "기독교 신학 체계"의 명칭하에 조직신학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학전반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환원신학으로 명확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의 신학으로 존재한다. 성수경 목사는 "초대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 요강"으로 명명하여 신학을 정리했고 최윤권 목사는 "신학교리"로 편집했고, 현재 한성신학대학에서는 교과목에 "환원교리"를 수강토록 강의를 신설했다. 2. 환원신학(還元神學)의 기초와 역사적 고찰환원신학을 논할 때 교육기관과 유관하여 생각할 수 있다. 환원운동의 시작과 함께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성서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교육과정을 통해서 이행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알렉산더 캠벨은 1840년 Bethany College를 설립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인간 구원의 최대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베다니 대학을 세우는 것은 교육(지적, 도덕적, 종교적) 근거에 연유한 것이며 이는 곧 문학, 과학, 예술과의 관계 속에서 또한 환원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받은 자들이 세상과 교회를 다스려야 된다는 확신의 소산이다. 하나님은 재능과 인격과 교육을 겸비한 자들로 구원의 위대한 도구로서 사용하셨다. 베다니 대학의 이념적인 근거는 성서적인 것이요 이방인의 신화, 그레시아인과 로마인의 우상, 우화와 공상적 이야기가 아니다. 즉 오늘의 대학교육은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염세주의적이고, 도덕적이나 종교적이기보다는 세속적이며 나아가서 가증한 짐을 떠맡기고 있는 현상이다.[West. Earl Irvin, The Search for the Ancient Order. p. 280.] 환원운동의 초창기 지도자들인 켐벨 부자, 스톤, 스콧 등은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환원운동의 주체자들은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고 대부분 학교에서 강의하고 행정가로 일했다. 알렉산더 캠벨은 양질의 교육을 중요성을 인식하고 1836년에 "근원성과 유일성을 가진 성서에 헌신적인 사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신앙과 삶의 방법들과 훈련을 위하여 문학과 과학으로부터 유익을 얻어야 한다. 위대한 개척자도 교육받은 자들이었다."[Young. M. Norvel, A History of Colleges Established and Controlled by Members of the Churches of Christ. p.26]라고 했다. 환원신학의 기본 체계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죄인들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위로서 선포한 말씀 즉 신구약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유일한 신앙고백은 성서적 고백이며 인위적인 여하한 고백도 배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교리는 그리스도 가르침이 성서에 있음을 확인하고 효과적인 가르침과 변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지고 있는 진리체계는 어떤 독립된 모체개념들로부터 연역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만 환원신학의 체계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상의 신론, 인간론, 그리스도론은 완전성을 가지고 있고 그 계시가 포함하는 진리체계는 풍성하고 완벽한 것이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와 성경은 가장 위대한 것이며, 성경은 모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 하나님의 실체, 역사자체와 역사철학 등이 그 속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속의 진리를 세상에 전파해야 한다. 신학의 여러 부분들은 이 진리를 전파하는 작업에 기여하고 있다. 교의신학(Dogmatic Theology) 또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은 진리 체계로서의 제목을 제시할 수 있다. 루이스 벌코프는 제목을 (1)신론, (2)인간론, (3)기독론, (4)교회론, (5)구원론, (6)종말론 등이다. 이 교리들은 신학입장에서 성서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입장은 성서적 입장을 완전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Vantil, The Defence of the Faith. p. 142.]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기초는 성경이며 그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내용은 성경 자체이기 때문에 성경이 신학의 초석이 된다.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법측을 제시한 것이며 인간의 제약성에 조절된 하나님의 계시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 그리스도인 마음속에 조명되는 것이다. 대일 무디(Dale Moody)도 "그리스도 신학의 궁극적 자원은 언제나 신구약 성경에 있다."하고 "철학적 신학을 표방하는 사람일지라도 결국 성경적 신학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Dale Moody, The Word of Truth(Eerdman Publishing Co, 1981) pp. 2-3]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초대교회의 신앙이 이탈하고 변질되고 부패하여 오던 중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환원에 접근코자 했으나 더 큰 분열과 다른 이탈을 산출하는 비극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환원신학으로 Stone, Campbell 등에 이르러 운동으로서의 환원사상을 신학으로 정립하는 기초를 놓게 되었다. 대일 무디(Dale Moody)는 교회 전통의 주요한 두 가지 형태는 신조(Creeds)와 고백(Confession)이며 신조는 기독교가 분열되기 이전에 발전했고 고백은 분리된 교파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와 같은 신조와 고백은 신학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인위적인 신조와 고백의 창출과 변형을 용인하지 않고 성서적인 것 외에는 배격한다.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교리들을 신학의 자원으로 사용할 때는 그것은 성서이어야 하며 성서를 가르치는 내용이어야 하는 것이다. 멀린스는 "신학은 자연, 역사 및 심리학 또는 기타 자원에서부터 오는 진리를 배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은 기독교 사실 외에 그 자체를 세우고 이런 사실로부터 교리적 견해를 발전시킨다.[E. Y. 멀린스, {조직신학원론} 권혁봉 역(서울: 침례회출판사, 1982), p. 48.] 그렇다. 신학이건 교리이건 이 모든 것은 성경이어야 하며 성경적이어야 한다. 성경을 배제한 어느 것도 진리일 수 없는 신학인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특성은 성경적 신학이다. 죤 피 뉴포트(J. P. Newport)는 "성경은 신의 존재함을 전제한다"고 했다.[J. P. Newport, Layman's Library of Christian Doctrine, p. 74] 성경은 하나의 사실이며 체험이기에 이를 서술하되 조직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신학작업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자는 성경에 따라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자기의 추상이나 상징을 신학의 내용으로 삼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다."(요 12:49) 고 했다. 전하고 믿고 행하는 과정에서 신학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성서를 중심으로 전하고 믿고 기쁨을 느끼는 실제적 신학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성경을 토대로 한 신학이며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데서 침묵하는 신학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환원신학이며 성경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교회 교리 요약그리스도의 교회 교리는 우리가 어떠한 신학을 가졌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신학체계를 찾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체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Aexander Campbell의 The Christian System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Alexander Campbell, The Christian System(Cincinnati: Standard Publishing Co., 1839.] 윈프레드 개리슨(Winfred Garrison)은 "Alexander Campbell's Theology"란 저서에서 "캠벨의 신학"(Campbell's Theology)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알렉산더 캠벨의 신학체계는 어떠했는가? 연구해보자. 그는 종교개혁이후 혼란되어 있는 분파 상황에서 신조를 버리고 개혁의 불일치를 버리고 예수를 주춧돌로 하는 교회를 세우는 운동의 체계를 세워 신조와 당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연합하고 분쟁하는 교회에서 평화회복을 할 것을 주장하면서 교회의 연합된 일치와 공동체의 교제를 이룰 것을 주장했다. 1. 기본 체계 (2)성서관 ㄴ) 성서이해의 원리 (3) 신관 ㄴ)하나님의 아들 ㄷ)하나님의 영(Spirit of God) (4)구원관 (5)인간관 나. 인간과 하나님의 목적 (6)그리스도관 나. 그리스도의 속죄 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라. 메시아의 통치 (7)구원관 ②회개 ③신앙고백 ④세례 나. 세례의 주체 다. 세례의 의미 ⑤회심, 중생 ⑥그리스도인은 사죄, 칭의 성화, 양자됨, 구원의 사람, 유죄 선고에서 칭의, 거룩하지 못한 곳에서 성화, 자신 상실에서 구원, 이방인에서 양자되었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들이 사죄받고 칭의 받고, 성화되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양자되고 구원받는다. 신앙과 참회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보다 신앙의 열매로서 행위인 결과이다. ⑦성령의 은사 (8) 교회관 교회의 견해는 ②기독교 사역 나. 규율 ③기독교 의식 가. 세례 2) 세례의 의미 3) 세례의 행위 나. 주의 만찬 2) 알렉산더 캠벨의 일곱 가지 명제 (9)종말관 4. 환원신학의 미래적 방향제시환원신학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하여 현재 그리스도의 교회신학 동향을 살펴보고 비판하여 미래적 방향을 정하여야 한다. 신학이 없다고 하는 비판적 여론은 신학정립 없는 교육으로 교육의 현주소를 잃어 버렸다. (1)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 동향 1960년 유신체제로 사회 전체가 경제발전을 위한 방편으로 중앙집권적이고 독재적 체제로 강화된 입장에서 개교회주의적 성향과 민주적 성향이 강한 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부흥될 수 없는 여건이 당시 상황 아래서의 형태 및 구조였다. 그러나 나라가 민주화되면 될 수록 총회정치와 중앙집권적 교회는 빛을 잃게 되고 민주화된 교회, 회중교회, 조합적 교회가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미국의 환원신학은 알렉산더 캠벨의 불어,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에 능통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특히 기독교 체계 신학 또는 조직신학(Christian System)은 그의 해박한 지식이나 뛰어난 암기력으로 성경을 통달하여 미국의 학문연구의 자유와 대학의 자유의 고귀한 정신과 접목을 이루어 환원신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미국의 학문연구의 자유와 대학의 자유는 확고하여 이런 전통의 계승은 신학의 자유화에 의한 계승으로 이어지고 환원신학의 정착은 환원운동과 함께 지속적인 꽃을 피우면서 열매맺게 되었던 것이다. 환원운동이 일어나던 그 시절의 미국의 종교계는 편협적이고 교파적 분열로 오늘 우리의 실정처럼 큰 괴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때 환원신학을 토대로 한 환원운동가들이 출현한 것이었다. 기존 종교체제를 부정하고 종교적 도덕성의 회복을 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위대한 환원신학은 싹트게 되었다. 1983년 환원사상(Restorational Thought)을 발간했던 그리스도 신학대학 기준서 학장은 창간사에서 한국의 환원운동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930년 11월 29일 처음으로 환원의 씨앗이 떨어진 후 반세기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신약교회 운동은 성서적 확신이나 사상적 이념이 없는 생활의 방편으로서 시작된 종교적 구걸운동이었다. 말씀의 선교와 진리의 증거보다도 선교자나 피선교자가 똑같이 선교비 모금과 사용에만 깊은 관심을 가졌던 비적자운동이었다. 진리를 주장하고 수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순교자적 신앙운동이 아니라 개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종교운동이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로 환원하기를 갈망하였지만 말씀과 사랑이 결여된 이 운동은 결국 꿈도 비전도 없는 하나의 교파운동으로 전락되었으며 환원 동지적 형제애도 믿음과 신의도 없는 다툼과 정죄만의 분파운동이 되었다. 환원사상의 진실이 제외되고 형식과 형태만 전달된 환원운동은 비교파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군소 교파운동이 되었으며 우리들의 주장과 호소는 형식주의자(Legalistic)로 낙인찍혀 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땅에 환원운동의 자국은 있으나 뿌리는 내리지 못하게 되었으며 교파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는(고전 1:10-17) 있으나 비교파로서 성서적 교회는(롬 16:16)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 안에 있던 우리는 신앙의 번지수를 잃은 소외된 종교적 신생아가 되어버렸다.[김익진, {신약교회 운동사}(서울: 참빛출판사, 1986), pp. 302-303.]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독선적 성서 교리적 울타리를 치고 무조직의 교리를 아집적 방법으로 해석해 환원운동자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썼으며 장기적 교권을 누리기 위해 선교금과 신학의 울타리를 이용했던 것이다. 자기 나름의 창조해낸 어떤 형태의 틀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이단자 취급과 소외당할 수 밖에 없는 종교적 군주시대를 사는 동안 우리들은 피차 불신과 단절의 뚝을 높이 쌓아갔다. 말씀과 사랑의 생명력이 넘쳐흐르던 초대교회로 환원하기를 갈망하던 형제들은 이같은 문제들 속에 신앙적 아픔을 감내해야만 되었으며 그렇지 못하면 떠나가야만 되는 종교적 희생자가 되었다.[Ibid., p. 303.] 오늘 우리 신학을 지키는 자들 속에 자각은 한국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대학 교육의 확립과 함께 싹트게 되었다. 시대적 요청이 있고 학문의 요람지로서 신학교육의 정착이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환원신학의 연구가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오늘 환원신학이 가지고 있는 고충은 역사적 비평적 방법을 통한 학문 즉 "학문 지향적 탐구"와 아울러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조화 있게 이루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또한 환원신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으로 미국에서 1900년 초 제자교회운동을 주의 깊게 연구하여야 한다. 제자교회는 오늘 세계 속에 Ecumenical Movement(에큐메니칼 운동, 교회연합운동)하는 교회로 잘 알려진 그리스도의 교회 중의 하나이다. 주장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그리스도교 신앙(Christian Faith)은 좀더 호의를 받는 발언의 기회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재 진술되고 재 해석되어야 한다. ~ 하나님의 메시지를 제외하고 현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관점에서 수용되어야 하는데 예수의 신적의식(神的意識, Divine Consciousness) 등 몇 가지 본질적 요소들은 변질 없이 다루어져야 하고 수용되어야 할 것은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②기독교의 본질은 교리적 신조에 얽매인 고정된 인식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는 인식의 표현이다. ~인간의 인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은 단지 믿고 따라야 한다는 주장들과 반드시 일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신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며 가슴속에 품고 있던 믿음이 솟아날 때 표현되는 것이다. ③현대과학은 기독교 안에서 영속적이고 중심적인 가치가 되는 것은 밝혀내고 진술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 진화론이 환원사상에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나 기독교가 간직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방법의 과정을 현대과학으로 하여금 설명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④성서는 초자연적인 간섭이나 영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시대와 현장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하여 자료가 수집되고 개정과 가납(嘉納, acceptance) 등의 오랜 과정을 거쳐 생성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 모세오경에 모세 저술권 문제, 이사야서 단일성 문제, 성서내용과 다른 자료들에 대한 수용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⑤성서의 기적 즉 홍해도하, 동정녀 탄생, 부활 사건 등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 실제적 사건으로 인식하는 초자연적 요소와 현대과학이 같이 수용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토대에서 발달된 진보주의 신학은 계속적으로 미국 환원교회에 수용되고, 1869년 L. L. 핑커톤(Pinkerton)은 "이성과 계시"(Reason and Revelation, 1868)에서 밀리건(Robert Milligan)의 영감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 프랑스와 독일의 합리주의에 대하여 롱건(George W. Longan), 알렉산더 프록터(Alexander Proctor) 등이 수용하고 "사도시대"(Apostolic Times, 1869-1872)란 논문에서 라드(Moses Lard)와 맥가비(J. W. McGarvey) 등이 이에 비판을 가했다. 1883년 이삭 에레트(Isaac Errett)는 "성서야말로 하나님의 의지의 진실한 전달체이며 확고한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1885년 롱건은 미주리주에서 "과학적 방법론"을 강연했다. 보수적 환원운동가이며 성서대학 학장이던 맥가비가 1911년 죽자 그 후임 학장겸 교수인 캘호운(Hall L. Calhoun)의 사임후 1917년부터 진보주의가 환원운동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진보주의 신학파의 일부가 제자교회로 결집하게 되었다.[윌리암 우드슨, {환원운동에 있어서의 자유주의의 발달} 김익진 역.] 이와 같이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이에 진통을 겪으면서 양극화 되는 현상을 일으켰고 환원신학의 정체성을 재조명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방향을 정립해야 할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2)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방향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교회 신학이며 예배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설립하시고 예배 속에서 세례를 행하시도록 하여 인간을 구원하신다. 오늘 신학의 양극화는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신학에도 도입되어 보수적 교회는 성령위주의 신학 은사위주의 신앙으로 성령론 쪽으로 치우치면서 심령부흥, 교인증가, 교회의 외형화로 치닫는가 하면 진보적 교회는 사회복음적 신학을 주장하고 인간화와 사회화에 중점을 두어 개인의 구속과 화해를 약화시킨다. 대일 무디(Dale Moody)는 급진주의 신학(Radical Theology) 가운데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추상적 합리주의(Speculative Rationalism)로 철학적 신학으로 구속사적 신학의 실천적 성격을 빼버린 신학으로 전락되고 비신격화의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와 사신신학의 알타이저(Thomas J. J. Altizer)도 급진신학이다. 또한 그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기독교 신학을 "위에서부터"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의 신학은 "밑으로부터" 예수의 부활과 함께 시작한 신학이라고 했다. 몰트만(Jurgen Moltmann)의 희망신학(Theology of Hope)은 성서신학이 아니라고 했고, 몰트만을 중심한 미래지향적 입장의 주창파들은 역사와 기독교 전체를 순전히 종말론적 입장에서 보는 종말론적 우선주의를 낳게했다. 이상 모든 것은 신학 조류에서 탈선적, 독선적, 고립적 신학인 것이다.[권혁봉, {복음과 실천}, 제10집(침례신학대학교), pp.103-104.]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신학은 교회신학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를 통하여 성례를 행하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교회의 목적이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중심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최종적 목표가 하나님의 통치의 핵심인 교회인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예배, 전도, 양육, 봉사뿐 아니라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 자체가 목적이지 다른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불러 뽑는 무리들의 모임"인 것이다. 한스 킹은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가르치는 전비(Vor-zeichen)"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온전한 의미의 교회는 교회자체에 교회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향하는 목적에 있다"고 하고, "교회는 따라서 교회 자신을 목적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반면 정통 보수파에서는 "교회는 왕국을 촉진하고 확장하기 위한 하나님의 대행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세상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양면성 속에서의 계시인 것이다. 세상과 대립 개념에서 하나님 나라지만 나아가는 교회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공상의 존재상태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제도이며(Divine Institution), 신령한 유기체(Spiritual Organism)이며 피로 값주고 얻은 기구(Blood-bought Band)이며 민주적 기관(Democratic Organization)이다.[Dale Moody, The Word of Truth(Grand Rapids: W.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1), p. 30.] 교회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이요, 교회 속의 신학이며, 그 목적은 교회의 능동적인 존재를 위한 것이며, 교회로부터 이루어지는 신학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신학은 실천신학의 방향으로 발전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초대교회가 예시하신 교회를 확립하고 그 속에서 구속사적 사명을 완성하는 기독교적 전제를 가지고 기독교 교리를 정리하는 성경에서 유출된 성경중심의 신학으로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인위적 조건적 신학이나 철학적 실존적 신학으로부터 성경중심적 신앙을 회복하는 신학으로 정체성을 가지고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5. 결론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유무와 정체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있고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환원신학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환원신학은 성경적 기초를 가지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적 신학인 것이다. 환원신학의 주요 교리 즉 신학의 내용은 성경을 중심한 교회신학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말씀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신학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세전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교회일 찐데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든 생각과 활동은 교회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인본주의 신학, 신본주의 신학, 성결위주 신학, 은사위주의 신령주의 신학 등 다양성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성서로 돌아가자는 신학"으로 생활 속에 복음을 강조한다. 결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생활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고 적응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강조하는 신학이며 운동인 것이다. 그것은 계시된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구성된 기독교 자체라는 체험을 분석, 해석하면서 종합 정리하는 실천적 신학임을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 문헌<한서> <역서> <외서> <논문과 잡지기사> |
'환원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의 환원운동 역사 (0) | 2023.07.28 |
---|---|
이강평 총장 환원운동을 말한다 (0) | 2023.07.28 |
[스크랩] 환원운동의 정체 (0) | 2018.12.06 |
[스크랩] 환원신학과 구약, 업 (0) | 2018.12.06 |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사 (0) | 2018.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