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원 신학

[스크랩] 환원신학과 구약, 업

하나님아들 2018. 12. 6. 20:09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 선구자와 구약

 

 

 

 

 

 

 

 

 

박신배 교수

 

 

 

 

 

 

 

 

 

 

 

 

 

 

 

 

 

 

 

 

 

 

 

목 차

 

 

1. 알렉산더 캠블의 성경관 ----------------------------3

 

2. 초기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약관-------------------22

-토마스 캠블---------------------------------------22

-발톤 스톤-----------------------------------------29

-알렉산더 캠벨--------------------------------------33

-월터 스코트----------------------------------------33

 

3.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구자--------------------------58

- 동석기와 구약-------------------------------------59

- 강명석과 구약-------------------------------------

- 이신과 구약---------------------------------------

- 이흥식과 구약 설교---------------------------------

 

4. 신구약의 관계-------------------------------------

5.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약학자와 성서해석----------------

 

 

 

 

1. 알렉산더 캠벨의 성경관

 

토마스-알렉산더 캠벨 부자는 세계 복음화에 있어서 대표적인 운동가들과 함께 하며 연합회를 구성하며 활동하였다. “1810년에 외국 선교를 위한 미국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선교의 앞날은 밝아 보였다. 캠벨 부자의 사역은 고립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위대한 세계운동의 일부분이었다. 존 웨슬리(J. Wesley), 조나단 에드워드(J. Edwards), 윌리암 캐리(W. Carey), 사무엘 존 밀스(S. J. Mills), 고든 홀(G. Hall), 아도니람 저드슨(A. Judson), 토마스와 알렉산더 부자, 그리고 토마스 참머(T. Chalmers)는 세계복음화를 주된 목표로 하는 훌륭한 연합회를 구성했다.” 켐벨 부자는 모두 뛰어난 설교가이었다. 아들 알렉산더 캠벨은 더 뛰어난 신학적 활동을 하였다. 그는 위대한 논쟁에 참여하였고, 밀레이얼 하빙거(천년 왕국의 조짐)와 기독교 개요등 출판하며 왕성한 문서활동을 하였다. 캠벨은 대학은 세워 수많은 복음전도자들을 배출하였고 미국 기독 선교회를 조직하여 협력 사업을 벌여나갔다. 미국 기독교 사상가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알렉산더 캠벨의 성경관을 살피며 오늘의 환원 운동의 효시를 삼고, 한국 환원 운동의 모판을 삼고자 한다.

캠벨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본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를 갖는다고 보며 성경에 있어 구속적이며 구원의 측면은 초자연적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성령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라고 보며 신구약 성경에서 순수 초자연적 성격은 극히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서 사람에게, 사람을 위하여 말씀하신다. 성경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다.” 캠벨의 해석의 원리들은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성경은 구속사이다. 둘째, 한가지 약속(창3:15 원복음), 모든 성경은 이 거대한 약속을 논증하고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메시아에 관한 것. 셋째,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넷째, 새로운 제도의 전조(유대의 제도는 정치, 도덕, 종교적인 면 뿐 아니라 비유적이고 예기적 성격이 있다. 캠벨은 해석의 원리를 세부적으로 7개의 규칙을 들어 진술하고 있다.

 

규칙 1: 성경의 어떤 책을 펼치든 제일 먼저 그 책이 역사적 배경을 숙지하라. 여기에 양식, 제목, 저자, 때, 장소 그리고 쓰여진 이유 등이 나타난다.

*캠벨은 인간의 이성과 역사적 사실들을 받아 들어서 이유 있는 신앙,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 신학이 있는 신앙을 주장하고 있다.

규칙 2: 그 책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교훈, 약속, 권고 등의 내용을 조사하면서 누가 화자이고, 그가 어떤 제도적 환경에서 말하는가 그리고 그가 족장인지, 유대인인지, 또는 그리스도인인지 관찰하라. 또한 수신자는 누구이며 수신자의 편견, 특성 그리고 종교적 관계를 고려하라.

*규칙 1에서와 같이 역사적인 배경과 문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강조하고 있는 교훈, 약속과 권고 등이 무엇인지 알아보라고 말한다.

규칙 3: 주어진 명령, 약속, 교훈 등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반 언어의 특성에서 추론되는 철학적 원리들 또는 다른 문서에 쓰여진 언어를 해석하기 위해 적용된 법칙이 성경의 언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 일반 언어의 특성과 철학적 방법과 원리들을 사용하여 성경의 언어를 해석하라고 말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명령, 약속, 교훈 등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성서 해석학을 사용하라고 말하고 있다.

규칙 4: 사전에 나타난 단어의 의미가 하나 이상일 때 그것이 문자적 또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는지 단지 하나의 의미로 언제나 결정되어야 한다. 단어의 범위, 상황 또는 평행적 문장 구조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적이다.

* 성경 연구에 있어서 문자적 해석과 비유적 해석을 동시에 언급하며 결국 문장 안에서 하나의 의미로 결정해야 함을 주장한다.

규칙 5: 비유적으로 사용된 언어에서는 대상과의 유사점을 알아내고 비유의 성격, 비유의 종류를 유사점으로부터 추론한다.

* 비유적 해석에 대하여 언급한다. 대상의 유사점과 비유의 성격, 종류를 유사점으로부터 추론한다고 방법론을 제시한다.

규칙 6: 상징, 유형, 알레고리 비유의 해석에서는 위의 방법이 최상이다. 예로 들어진 점을 알아내라. 그것은 대조하는 것이 이점을 넘어 상징, 유형, 알레고리 또는 비유에 대한 배경, 속성, 그리고 부속물에 까지 연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알레고리 비유 해석 방법에 대한 특성과 주의 사항을 언급한다. 알레고리 해석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성경의 영적 해석에 대한 통찰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규칙 7: 하나님의 신탁을 유익하고도 신성하게 만든 이해력(지성)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의 법칙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이해의 범위 내에 들어가야 한다. 음성이 전달할 수 없는, 말의 거리감, 또는 귀로 들을 수 없는, 듣기 거리감이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면 가청권 안에 들어와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되는 언어에는 이해의 거리가 존재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 거리를 넘어서는 모든 말로는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경건과 도덕성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그 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신은 이러한 가청권의 중심이다. 그리고 겸손을 그것의 경계선이다.

* 이것은 알렉산더 캠벨의 중요한 성서 보기이다. 그는 인격적 영적 성경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인격으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느냐 하는 결정적인 판가름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을 수 있느냐, 겸손의 인격을 가져야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경계선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캠벨의 가장 중요한 성경 이해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토마스(C. K. Thomas)는 캠벨의 성경 해석 방법에 대하여 3가지로 분류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첫 번째 성경 해석 방법은 이성적 방법, 철학과 종교의 일치점을 찾으려한 칸트의 철학적 방법이다. 두 번째로 알레고리적 방법이다. 이 방법은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와 조상의 신앙으로부터 정신적인 출발의 결과로서 나온 알레고리적 방법이다. 세 번째로 문법-역사적 해석 방법이다. 이 방법은 경건한 영성으로 훈련받은 때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며 영적 해석도 첨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캠벨에 있어서 성서 해석자는 본래의 성경 언어의 사용과 문학(자)적 맥락, 역사적 맥락등 세 차원에서 연구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알렉산더 캠벨은 오늘날의 성서 비평적 방법, 이성적 방법 등을 수용하였고, 더 나아가 알레고리 해석등, 영적 해석을 강조하여 인격적 해석도 제시하는 영감있는 성경학자이었다. 또한 말씀으로 육화된 복음적인 성경 해석자이었다.

캠벨의 구약 관에 대한 다음의 진술은 그의 성경 해석의 한 특징을 보여 준다. “캠벨의 ‘율법에 대한 설교’는 적대자들에 의하여 과장되어 구약을 정경에서 제외시켰던 말시온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사실 캠벨의 구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신학적 해석이었다. 왜냐하면 정경 형성의 역사나 성서비평사가 학문적으로도 전연 논의되지 않았으며, 단지 거룩한 책으로만 이해하였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는 추가로 구약과 신약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성서적으로 확실하게 설명한다. 구약 성서는 신약 성서를 잉태케 하였으며, 구약 성서 39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말씀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지만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구속할 수는 없다.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얼마나 많은 모세의 제자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구약의 가르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가르침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모세가 말한 예배, 의식, 훈련, 제도, 조직 등을 거침없이 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예배, 의식, 훈련, 제도, 조직 등의 형태가 분명히 신약 성서에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라고 구약과 신약의 관계성을 명확히 규정한다.”

캠벨의 구약에 대한 관점은 그의 유명한 설교, ‘율법에 관한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설교에서 알렉산더는 우리가 모세 아래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아래에 있다고 논증한다. “율법은 부분적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율법은 한 시대, 한 민족을 위한 것이라면 복음은 모든 시대와 만민을 위한 것이며 신약 성경은 구약이 유대인들에게 그러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인도자로서 완벽한 것이다. 모세 주의의 진리와 선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교 체계 속에 반영되었다.” 캠벨의 구약 관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약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 해석의 중심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성경은 구속의 역사이기 때문에 예수가 성경 해석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처럼 예수 중심적으로 복음적 성서 해석을 하였다. 그리고 온전하고 경건한, 영적이고 이성적인 성경 해석을 한, 캠벨의 성경 해석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자양분이 되었고 개혁 신학을 이끌어 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2. 켐벨의 성경 해석의 세 가지: 역사성, 계시성, 그리스도인의 일치성

 

캠벨(A. Campbell, 1788-1866)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씀이라고 본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향한 유일한 가치기준이라 본다. 그는 성경으로 환원 신학의 성서적 근거를 공고하게 세운다. 알렌(Allen)과 휴(Hughes)가 주장하기를 오늘날 책임 있는 신학적 작업으로 과거의 특유한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과거의 전통과 계속 대화를 해야 하고 비평적으로 재검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캠벨의 성서관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그의 저작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그리스도인 침례』(Christian Baptist, 1823-1829), 『기독교 체계』(Christian System), 이 두 책을 중심으로 성서관에 대하여 논의할 수밖에 없다. 정남수 교수는 캠벨의 성서관에 있어서 우선하는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성서는 역사적으로 선행하는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성서는 성령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 왕국의 헌법으로서 성서는 신앙의 유일한 가치 기준과 성례, 그리스도인의 일치라는 것이다.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과 해석의 도구는 무엇인가. 이성의 도구와 신앙의 도구로서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 성서의 권위가 강조되어야 하는가. 캠벨은 그 당시의 분파적 당파성에 대하여 비판하고 인간의 신조의 권위를 강렬히 비난한다. 환원 운동 지도자들의 목표는 기독교인의 일치이다.

 

1) 성서는 역사적 선행 사실이다.

알렉산더 캠벨은 베이컨(F. Bacon), 존로크(John Locke), 스코트랜드 현실주의, 일반 상식철학 등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성서 해석학은 문자적이고 귀납적인 개념과 해석적 틀에 가깝다. 다시 말해 증거에 대한 검증, 지나칠 정도로 ‘사실들’에 대한 강조, 조직적으로 분류한 사실에 신학적 강조점을 둔다. 캠벨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두 개의 책, 이성의 책과 계시의 책을 창조했다. 그는 지식이란 이성의 책이나 계시의 책에서 기원한다고 본다. 자연 과학자들은 사실들에서 추론하고, 정확하고 확실한 지식을 얻게 된다. 마찬가지로 성서학자들도 이 지식에서 비롯한다. 모든 지식이 양심의 영감에서 세워지기 때문에 처음으로 특별한 실체를 관찰함으로 자연과 계시로부터 배우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 결론을 형성하기 위해 개별적 정보들을 복합적으로 구성하고 반성하게 된다. 캠벨은 ‘사실’을 말하거나 행하는 어떤 것이라고 규정한다. “하나님의 행위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나 말씀들은 모든 신앙과 희망, 사랑, 경건, 인간성... 등의 근거로서 성서에서 나타나고 보여진 사실들이다.” 캠벨은 성서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에게 성서는 역사적 사건을 가진 관찰할 수 있는 사실들로 간주된다. 캐세이(M. Casey)는 말하기를, 켐벨은 성서를 역사적으로, 즉 기록된 과거의 사건으로 보며, 관찰될 수 있고 신뢰할만한 증인으로서 입증된다고 말한다. 성서적 진리는 경험적으로 증명되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의견이나 이론, 추상적인 이론들이나 말의 정의가 아니라 사실의 책이다. 캠벨은 모든 계시된 종교는 사실에 근거한다고 확언한다. 이렇게 말한 것은 증거는 오직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계시라는 것은 전체적으로, 전반적으로 사실들에 근거한다. 추상적인 의견이나 사변적인 견해가 아니라 그것은 구약 성서나 신약 성서에 확언되고 소통된 사실들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에게 계시로서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러한 캠벨의 견해는 라마르(J. S. Lamer)가 환원 운동의 유산을 이어받아 성서 해석을 형성하게 된다. 라마르는 신학은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사실적으로 일치하는 과학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로일즈(S. Broyles)는 비판한다. “성서를 분석하여 원자화하거나 캠벨의 과학적 방법에 따라 성서 연구를 모델화함으로 성서의 모든 내용의 차별을 제거하는 것을” 비판한다.

 

2)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로버트 오웬과 캠벨의 초기 논쟁(1829년)은 기독교인의 증거에 대한 것이었다. 캠벨은 계시란 영적이고 영원한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교제라고 정의한다. 이런 영적인 지식은 인간이 물질과 감각적 대상에 대한 이성의 작업으로 절대 얻을 수 없다. “이 계시는 천사나 예언자, 사도들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성령의 구체적인 실현이다. 말씀은 감추인 성령 혹은 묘사된 은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마음과 의지를 주어 성령의 말씀으로 소통하게 하신다. 그래서 역사적 맥락에 포함된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캠벨에게 있어서 계약의 이론이다. 이것은 켐벨 사상에서 계약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은 진보적인 계시의 개념이다. 역사와 하나님의 약속은 앞을 내다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도래에 무엇을 행하시는 지, 그가 초기에 말했던 것과 행했던 것과 관련될 수 있다. 캠벨은 하나님 왕국이 형성될 때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계시할 것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근본적으로 세 가지 법 있다고 한다. 족장들, 이스라엘, 세계를 위한 교회 등이다. 하나님의 인격이 나타나고, 우리가 서로 관계하는 데서 계시의 진보가 있다. 캠벨에 있어서 계시는 의견이나 추론적인 이성과는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이성은 전체적이고 전적으로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계시는 말의 영감이 지시하는 곳에서 이해된다. 켐벨은 말하기를, 역사가나 거룩한 기자가 무오하다고 암시하여 말했다. 그들은 신적 교감을 가지고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사나 에피소드는 틀림이 없이 정확하다... 그들의 역사적 기사는 무오하다.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한 영감으로 인용하고 인정하고 인가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캠벨은 성서는 하늘로부터 받아쓴 글이라고 말했다. 신약 성서 기자는 펜멘, 필기자이다. 성서에 있는 진정성(권위)이나 최종 메시지는 성령의 작업으로 확증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 때문에 캠벨은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 완벽하고 무오하고 권위있고, 잘못되지 않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캠벨은 따라서 신약 성서를 “교회의 헌법”이나 새 헌법이라고 부른다. 그는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성서는 완전한 충만한 하나님의 계시이고 의지를 가진 것이라 한다.

캠벨의 성서관은 아주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견해이다. 그가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당연한 견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라고 받아들인다. 캠벨이 그 당시의 이성을 인정하며 합리적 성서 해석 방법을 사용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과학 시대 살고 있는 현대라는 시점에서 성서 연구 방법이 제공하는 다양한 시각으로 성서를 해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확하게 말씀을 해석하는 작업을 동일하게 행하고 있는 것이다.

 

3) 성서에 대한 캠벨의 해석

캠벨은 성서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인 원칙을 수행한다. 하나는 성서가 어떤 다른 문헌에 있는 것처럼 동일한 원칙의 기본위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확신이다. 이런 입장을 취할 때 캠벨은 그의 시대에 가장 훌륭한 해석자들 중에 리더를 따른다. 그래서 성서는 모든 역사적 문서들이 평가되는 동일한 기준에 의해 평가받을 수 있다. 두 번째 캠벨의 근본적인 주장은 성서가 신학자나 학자는 물론 일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국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 성서의 단어들과 구들은 동일한 모든 오랜 문서들, 혹은 정말로 어떤 고대나 현대의 인간의 문서들에 적용된 일반 해석 규칙들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

그리면 어떻게 캠벨은 성서적 진리를 알게 되는가? 그는 지식, 신앙과 의견 사이에 차이를 구별하는데 존로크(1632-1704)의 철학을 가까이 따른다. 캠벨에게 있어서 “신앙은 증언의 단순한 신념이고, 다른 말 속에 있는 확신이다. 지식은 우리가 우리 안에 대상을 가진 경험이다... 의견은 더 이상 개연적 증거는 아니다.”

캠벨은 지식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자연의 책과 계시의 책이다. 그러나 각각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은 동일하다. 논리적 방법은 근본적으로 귀납적이다. 토마스(C. K. Thomas)는 캠벨은 두 가지 종류의 증거를 인용한다. 하나는 진리의 공리적 성격과 다른 하나는 성령의 증명이다. 캠벨은 이성의 가치에 대하여 거절도 감소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성은 받아들인 대상에 대하여 오직 검증하고 평가하고 범주화하는 것 이외에 어떤 새로운 이념도 창출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캠벨은 인간 이성의 자연적 재능이 -성령의 겸손과 정직과 함께-하나님이 부여한 것과 성경을 이해하는 충분한 도구라는, 칼빈주의 입장에 대하여 반대한다.

캠벨은 자신의 이성을 훈련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은 성경을 이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해할 수 있는 인간 언어로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 그의 책임이다. 이러한 강조는 캠벨이 미국 사상에 크게 기여한 점 중에 하나이다. 캠벨에 따르면 이성은 신앙 사역에 이르는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앙은 성경을 이해하는 또 다른 도구이다. 캠벨은 말하기를 내가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는 한, 나는 역시 그것이 온전한 계시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증거는 유일하게 신앙을 낳는다. 혹은 증언은 신앙에 필요한 모든 것이다. 신앙은 우리가 성경에서 듣거나 읽는 예수에 대한 증언 위에 세워진다. 신앙은 단순히 진리와 증언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기쁘게 진리에 찬성하고 수용한다. 캐세이(Casey)와 기포드(Gifford)는 우리가 캠벨의 생각에 대하여 숙고하도록 돕는다. 캐세이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다.

“그것들의 진리는 감각과 반성에 의해 획득한 이념들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 이성은 홀로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을 산출할 수 없다. 그러나 이성은 계시의 진리를 판단하는데, 신앙 안에서 수행하는 단어들의 중요성을 판단하는데 사용되곤 한다.” 기포드는 또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록 진리와 이성, 경험이 계시를 받아들이는데 협력하더라도 신앙은 이성과 경험을 초월해야만 한다. 이성은 그래서 신앙과 계시에 종이 된다. 비록 신앙이 이성과 결코 모순되지 않더라도.”

켐벨에게 있어서 자연(이성)과 성서(신앙/계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두 개의 목소리이다. 그러나 둘 다 “타자가 없는 인간의 환경의 모든 다양성에는 전적으로 충분하지 못하다.”(기포드, 성서에 대한 신학, 81쪽), 그래서 그는 역설적인 것에 대한 어떤 감정도 없이 이성적 초자연주의의 경향성을 가진다. 캠벨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언어로 인간에게 말할 때 그는 한 사람이 -공정하고 명문화되고 잘-세워진 용어의 의미로 다른 사람과 거꾸로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로서 성격상 필수적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어떤 계시가 아니고 하상 이간에게 참다운 의미를 드러내고 계시하는데 일단의 영감 받은 사람들을 요구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계약의 적절한 이해가 전체 성경의 이해에 이르는 길을 열어놓는 것이 요구된다. 캠벨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계약에 대한 이해가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와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진보적으로 발전된다고 한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섭리적 접근(dispensational approach) 방법이다.

캠벨에 따르면 목소리가 도달하지 목하고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넘어, 말하는 거리와 들리는 거리라고 적절히 부르는 거리가 있다. 다른 사람이 듣도록 우리는 목소리가 들리도록 충분한 서클 안에 도달해야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하도록 요구되는 것이다. 캠벨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지금 우리는 예의 바르게 말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존경하듯이, 하나의 이해의 거리가 있다. 그 거리를 넘어선 모든 것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그 거리 내에서 모든 것이 경건상, 도덕상 모든 문제에 그 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 자신은 서클의 중심이고 겸손은 그분의 경계이다.” 성서해석에 있어서 영적 해석의 단계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캠벨의 해석 방법이 영적 해석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어서 뛰어난 부분을 보여 준다. 캠벨의 영적 해석은 인간의 이성과 하나님의 신앙의 차원 이외에 섭리적 접근 방법과 겸손의 이해를 언급하고 있어서 독특한 영적 해석 방법론이라 말 할 수 있다.

콜리어(Gary D. Collier)는 그리스도의 교회 내에 성서 해석학에 대한 현대의 논쟁을 평가한 후에 미래의 작업을 제안했다. 우리의 환원 유산을 보다 많이 이해하기 위해 비전문가들을 위한 적절한 성서 독서법을 개발하고, 역사와 신학 사이에 관계를 설명하고, 성서 신학 운동과의 대화에 참여하고, 실제의 삶의 상황에 사람들이 성경을 적용할 수 있는 작업을 제시했다.

 

4) 그리스도인 연합의 유일한 기준

 

교회와 성서가 어떻게 관계가 있는가. 성서는 교회의 닻이다. 개혁 전승에서 프로테스탄 주의는 성경을 신앙과 집행의 유일한 규범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고귀한 감정의 해설은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없게 한다. 전통은 성서를 흐리게 하고, 성서의 근본적인 원칙을 모호하게 덮는다. 사람들의 계명이 성서의 권위를 대체하였다. 그러나 캠벨은 성서가 모든 인간의 신조를 대체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도들의 말이 고대의 예식의 순서가 회복될 때, 유일한 신조, 공식, 신앙과 예배, 그리스도인의 성례의 규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캠벨은 전체 성서에서 성서를 취하였고, 모든 그리스도의 연합과 친교의 근거로서오직 성서라고 말하였다. 그에게 신약 성서의 법은 구약 성서의 법이 유대인을 위한 것만큼 그리스도인들을 강하게 묶는 것이었다. 리찰슨(R. Richardson)은 캠벨의 입장을 회고했다. “성서만이 자연을 포함하고 기독교 체계의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고 있어서 모든 문제를 결정하도록 함에 틀림없다. 사도들의 정경의 밖에는 나에게 있어서 교회의 최상의 구조에 놓인 견고한 대지의 굳은 한 발자욱은 없다.”

환원 운동의 형성 시기에 중심 취지는 교파 교회 사이에 기독교인들의 연합이었다. 환원 운동자들에게는 연합이 가장 큰 목표이었다. 그 연합의 방법은 성서 근본주의, 즉 수단은 인간의 신조나 교파주의의 특징들을 배제하고 성서 만을 사용함으로 다시 발견하는 것이었다. 캠벨은 신약 성서를 ‘교회의 헌장’ 이나 ‘새 헌장’이라고 부른다. 캠벨의 기독교 체계 책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헌장(헌법)적 군주주의라고 묘사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참다운, 완전한 기록으로서 캠벨은 성서는 기독교인을 위한, 교회를 위한 마지막 권위라고 말한다.

토마스 캠벨과 알렉산더 캠벨의 기본적 이성주의적 접근이 성서의 긍정적인 전망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성서의 구절들은 개인적 역사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성서는 본질적으로 관찰적인 사실로서 구성된다. 캠벨은 성서를 완전하고 무오한 권위있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받아들인다. 즉 캠벨 부자는 성서를 기독교인을 위한 “신앙과 성례의 규범”이 된다고 주장한다. 신약 성서는 예배와 제자 훈련, 교회의 통치에 규범적 패턴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알렉산더 캠벨은 성서의 이해에 있어서 이성적 초자연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성은 신앙과 계시에 종이 된다. 신앙은 결코 이성에 대조되지 않는다. 이것이 성서 해석의 도구가 된다. 신앙과 이성은 환원주의자들의 전통이다. 캠벨은 19세기 초, 성서의 문법적-역사적 접근 방법을 사용하여 환원의 해석학적 문맥에서 정통의 가르침을 주었다. 같은 학파 라마르(Lamar)는 본질적으로 원자론적인 귀납적 방법을 취하여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 방법은 성서를 단조로운 것이라고 축소시킨다. 라마르의 저작, “우리는 형제, 하늘의 창이다”에서 토마스(J. D. Thomas)는 “귀납적 방법”의 발전을 도달한다. 라마르의 방법은 양식주의(패턴주의)였다. 캠벨과 라마르, 코마스는 신약 성서는 완벽하게 인식할 수 있는 청사진과 하나의 유일한 교회의 구체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표는 그리스도인의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패턴주의위에 많은 비평주의가 있었다. 셀리(Shelly)와 해리스(Harris)는 성서의 결정적인 위치는 특히 21세기 현대의 상황, 현대 교회학를 발전시키는데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덧붙여 셀리와 해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자로서 예수의 사람은 본래의 격자 눈금이다. 이로서 우리는 신약성서 문서를 읽게 된다. 우리 해석은 그러므로 신학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포이드레스(V. S. Poythress)는 또한 말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 학자들) 협의의 문법적-역사적 주석으로 그것들을 규정하도록 요구해서는 안된다.” 올브리트(Olbricht)는 “우리의 해석은 성서에 중심적인 것에 집중해야만 한다. 특히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이다.” 콜리어(Collier)는 성서 신학 관점을 진술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언과 사도, 구약 성서를 믿어야 한다. 우리는 성서의 책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저자의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신앙과 생애(딤후3:15-17)의 규범이 된다고 수용해야 한다. 성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해석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성서의 해석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남수의 글을 통하여 캠벨의 성서관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여러 환원 운동 문서 연구가들의 글을 통해 알렉산더 캠벨의 성서 해석이 어떠한지 살펴보았다. 성서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선행 사실이라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한 캠벨의 성서 해석 방법이 영적 해석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캠벨의 영적 해석은 인간의 이성과 하나님의 신앙의 차원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이외에 섭리적 접근 방법과 겸손의 이해를 언급하고 있어서 독특한 영적 해석 방법론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성서는 그리스도인의 연합과 교회의 일치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성서만이 그리스도의 교인이 이해하고 따를 규범이자 헌법이고,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가치 기준이 된다고 밝힌다.

 

3. 캠벨의 성경관에 미친 영향들

 

캠벨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존로크(John Locke)이었다. 로크의 종교 철학은 환원 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알렉산더 캠벨의 종교 철학의 밑바탕이 되었다. 로크는 『신앙의 자유에 관한 편지』(Letter Concerning toleration)에서 교회를 그들의 영혼구원에 영향력이 있다는 판단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공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 스스로 조화하는 자발적인 인간 단체라고 정의한다. 교인은 자유롭게 교회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로크는 성서에서 성령에 의해 선언된 것처럼 구원에서의 필수적인 것은 구원에서의 필수적인 것은 회원의 조건에 있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성서가 말하지도 않은 것, 명령하지도 않은 것으로 기독교 신앙 고백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조건인양 교회의 법이 증명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로크는 예배의 양식과 믿음의 조건을 규정하는 성직자의 능력을 부인하였다.

『기독교 신앙의 정당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에서 성서 읽기에 대한 방법을 이야기한다.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서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글을 명백하고 솔직한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성직자나 다른 교회의 근거와 관련 없는 해석을 하는 자들이 바로 개인적 신앙인이다. 그는 종교에서 판단력의 역할에 주목하고, 지식에 대한 학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존로크는 경험론(Empiricism)의 창시자로서 생득 관념을 부정한다. 『인간 오성에 대한 연구』(The Essay on the Human Understanding)에서 그는 관념은 느낌과 성찰로 정의되는 경험으로부터 얻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식에 대한 주관론과 싸운다. 인간은 본질을 사실상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성을 강조하여, 인간이 짐승과 구별할 수 있는 기능이 이성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인간에게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중대한 도구이다. 지식이 관념의 일치나 불일치를 가지는 직관이라면, 인간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바로 이성이라 할 수 있다.

로크는 이성과 믿음 사이를 구별한다. 믿음은 이성의 추론에 의해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의사소통의 방법으로 신뢰에 의해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진실을 깨닫도록 하는 방법을 계시(revelation)라고 말한다. 로크는 이성과 믿음을 비교하여 구별하여, 이성이 가진 명확성보다 월등한 계시의 명확성이 없는 한, 그는 이성에 의지하는 쪽을 택한다. 그는 이성을 넘어선 순수한 믿음의 문제인 부활과 같은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이성의 우월함을 직접적으로 단언한다. “하나님께서 계시한 것은 모두 다 진리이다. 이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인지 아닌지를 이성은 판단해야만 한다.”(4.18.10)

이성을 배제하게 되면 열광주의가 된다. 열광주의는 영적 양상에 대한 이해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인지, 아니면 악마의 소행인지 문제가 된다. 그것은 바로 이성에 의해 증명된다고 본다.

로크는 하나님의 계시의 문제에 있어서 구약을 언급한다. 모세와 불타는 가시덤불과 뱀이 되었던 그의 지팡이의 기적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타는 가시덤불을 보여서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 출애굽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 모세의 지팡이를 통하여 징조를 보여주었다. 물론 이 계시가 다 놀라운 징조로 성취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에 개인적인 확신이 하나님의 계시에서 온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두 가지 해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성과 성서이다.

캠벨의 성경관에 영향을 미친 사람과 철학은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 이신론(Deism), 토마스 리드와 상식 철학(Thomas Reid and Common Sense Philosophy) 등이다.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는 영국계 아일랜드인으로 클로니의 성공회 주교였다. 로크의 지식에 대한 철학을 문제 삼아서, 근본적인 성질과 이차적인 성질을 구별하는 로크의 입장에 차이를 두었다. 이차적인 성질은 여러 가지 지각을 이끌어내는 능력일 뿐, 물체에 의해서 실제로 소유되지 않는 성질이다. 버클리는 근본적인 성질이 이차적인 성질과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이차적인 성질은 주관적일 뿐 아니라 인지자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유형의 존재는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버클리는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은 복합적 관념이며, 관념은 정신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형의 물체는 단지 인지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예를 들어 나무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버클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지하고 있다고 응답한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에든버러에서 태어났고, 스코틀랜드를 철학 탐구의 중심지로 만드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는 지식에 대한 로크의 학설을 보다 논리적이고 완벽한 인간 지식의 이해로 적용하였다. 흄은 인성론(Treatise of Hume Nature)의 철학적 회의론의 창시자이다. 흄은 우주에서 질서의 궁극적 원인은 조금도 지력이라 유추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원인과 영향에 관해 모든 추론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습관뿐이다. 그래서 믿음은 사고하는 본성의 행위보다 더 엄밀한 지각의 행위라고 말한다.

17세기와 18세기의 합리주의 철학으로 이 시대의 종교적 결과는 이신론(Deism)을 낳게 되었다. 무신론에 가까운 태도에 대한 기독교인의 견해를 대부분 수용함으로써 분류된 여러 가지 상태의 이신론이 있었다. 이신론은 순수한 이성적 종교를 강조함으로 계시를 거부하였다. 영국인 이신론자 죤 토랜드(John Toland 1670-1722)에 의해 1696년에 출판된 긴 제목의 논문 “기독교 신앙은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복음에는 이성에 반대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기독교 교의를 신비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에서 이신론이 가진 합리주의 경향을 잘 드러내 주었다. 이신론의 입장에서 성서는 과학적으로 정밀하지 않고 문화적으로 기이함으로 가득 차 잇는 단순한 고대 문헌의 하나로 취급한다. 성서는 자연 종교로 자리 매겨져 있다. 즉, 이성과 경험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이신론자의 사상을 가장 강하게 이끌었던 요소는 과학 혁명이었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케플러(Kepler), 갈릴레오(Galileo), 뉴턴(Newton)이 이룬 발견은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의 물리학을 폐기하였다. 과학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은밀히 관여하였다.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는 그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두움에 감추어져 있었다. 하나님께서 “뉴턴아 있으라!”하니 모든 것이 드러났다. 또한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이신론자 중의 한 명으로서 1726년에서 1729년까지 영국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철학 서간문(Letters Philosophiques』을 1734년에 출판한다. 거기서 로크와 뉴턴을 대중화시키고, 자유가 있는 곳, 신앙의 자유와 진보의 땅으로 영국을 묘사한다. 볼테르의 종교적 관념은 마음속의 종교를 발현시킨 퀘이커교도들에 의해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그들의 꾸밈없음, 진지성, 평화론, 신앙 자유, 성직자와 종교의식이 없음에 대해 칭송한다.

토마스 리드와 상식 철학(Thomas Reid and Common Sense Philosophy), 스코들랜드 상식 철학의 기초자인 토마스 리드(1710-1796)는 『상식이 가지고 있는 법칙에 대한 인간 오성의 연구』라는 논문을 출판하였다. 리드는 캠벨 부자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장로교 목사였던 리드는 에버딘 근처에 태어나 1764년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뒤를 잇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도덕 철학을 강의하게 되었고, 켐벨 부자가 나중에 그곳에서 배우게 되었다.

리드는 흄의 인성론과 버클리의 철학, 로크의 생각들에 반박하며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그의 상식학에는 유신론적 전제가 깔려 있다. 지각의 본질에는 오감에 의해서 드러나지 않는 본래의 근원적인 판단들이 있다. 그것들은 자연이 준 인간 이해의 한 부분이다. 그것들은 개념이나 단순한 이해보다 훨씬 강력한 영감에 의해 착상된다. “이성은 순수한 하늘의 선물이다. 하늘이 그것을 주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교육도 필요로 되지 않는다. 상식은 이성이 충분할 때, 규율과 훈련을 통해 습득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식을 가진 사람은 이성으로부터 깨달은 것이다.” 리드는 상식과 이성을 강조하여 경험 능력을 넘어서 있는 지식의 근원을 회복하였다. 성서에 기초하는 계시된 지식의 실현성을 회복하였다. 리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필요성을 회복시켰다.

이 상식 철학이 미국과 알렉산더 캠벨에 끼친 영향은 컸다. 데오도르 보즈만(Theodore Bozeman)의 베이컨 철학의 근본적인 요소를 잘 요약한다. 스코틀랜드 상식학파의 영향과 로버트 리차드슨(Robert Richardson)의 분파주의 논쟁,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Robert Owen)과의 토론 등에서 캠벨은 자연철학과 이신론, 상실철학, 로크의 합리론에 대한 환원 운동의 성서관과 종교 철학을 논한다.

종교에 대한 지식의 근원은 성서라는 것, 신학자는 성서로부터 독립한 인간 안에서 영적인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켐벨은 종교로부터 차단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변이라고 한다. 그는 과학적 귀납법을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회의론의 공격에서 스크트랜드 학파의 상식 철학으로 회복되었다. 종교적 진리는 인간에게 주기를 즐겨해 온 계시로부터 추론된다. “캠벨은 로크처럼 성서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면서,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캠벨은 로크 철학이 가진 여러 암시, 즉 흄의 회의론과 계몽주의의 이신론은 거부하였다. 스코틀랜드 학파의 상식철학 영향으로, 캠벨은 추론의 효력을 개달았지만 느낌과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이신론적 이해는 거부했다.” 캠벨은 18세기 철학의 발전된 결과인 이신론은 거부하면서 그 방법론은 수용한다.

계시에 대한 유일한 근원은 성서이다. 그는 성서가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신조에는 냉담하였다. 열광주의를 거부하며 꾸밈이 없는 성서의 의미를 강조하는 종교에 대해 합리적인 접근을 유지하려 함에 있어 캠벨은 로크를 따른다. 성서는 학설과 의견이 아니라 사실들로 이루어진 책이다. 이 사실들은 명백하게 계시되고, 밝혀졌고, 환원의 기저를 구성한 성서에만 오로지 한정되었다. 이 회복된 성서의 사실들은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 속으로 모든 분파를 하나 되게 하는 매개가 되었다.

성서는 이성과 상식, 계시의 근원으로서 인간 문제와 세계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보편성과 일치성, 사도성과 우주성을 말하고 있다. 캠벨의 성서 해석 원리는 그 당시의 시대사조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았다. 로크의 철학과 조오지 버클리, 데이비트 흄의 회의론, 이신론, 리드와 스코들랜드의 상식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자연주의 철학과 이성, 과학주의, 귀납적 방법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3. 그리스도의 교회의 원리

 

초대 교회의 가장 좋은, 온전한 교회를 찾으려는 환원 운동의 뿌리는 어디서부터 근원하는가? 교회사적으로 미국의 대각성 운동 때 발원한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 운동은 언제부터 그 뿌리를 찾아야 하는가,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원리는 무엇이고, 동석기 전도자로부터 기원하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현 좌표는 어디에 있는가? 첫 번째 문제에 대하여 알렌과 휴즈는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답을 찾으려 시도한다. 그들은 15, 16세기의 르네상스와 16, 17세기의 개신교 종교 개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존 코튼(J. Cotton), 로져 월리엄즈(R. Williams)은 미국의 환원 운동가에게 영향을 미치었다고 본다. 그리고 침례교 운동이 환원 운동에 대한 근원을 제공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쯔빙글리와 존 칼빈, 청교도들이 뿌리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마틴 루터와 재세례파, 19세기의 오순절 운동이 환원 운동에 영향을 미치었다고 주장한다. 바톤 스톤(B.W.Stone), 월터 스코트(W. Scott), 캠벨 부자의 환원 운동은 미국 개신교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성서 교회, 초대 교회, 환원 운동의 초석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큰 물결의 줄기에서 환원 운동은 미국 개신교의 정통에 빛을 던지었고 성서 교회 운동, 신약 교회 운동에 잣대를 제공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 운동의 3대 문서(선언과 제언,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최후 유언과 증언, 율법에 관한 설교)가 그리스도의 교회의 원리를 잘 나타내 준다. 또한 토마스 캠벨, 알렉산더 캠벨에 의해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신학과 주장이 잘 대변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중요한 주장들을 살펴보자. 먼저, 토마스 캠벨의 행위 지침으로 유명한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침묵한다.”라는 격언은 얼마나 그리스도가 성경에 집중하려고 하는 지 잘 보여준다. 토마스 캠벨은 일치와 자유, 사랑의 그리스도 교회의 정신을 발현하는 ‘선언과 제언’(Declaration and Address)작성하여 연합 운동을 제창한다. 그는 워싱턴 그리스도인 연합을 창립하자고 결의하며 모든 분파의 종지부를 찍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권위인 성경 위에 연합하기를 소원하였다. 연합과 일치의 근거로서 성경을 제시하며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선언과 제언문의 중요한 골자만을 다시 살펴보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원리를 다루고자 한다.

제안1. 지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의도적으로, 조직적으로 하나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그를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형성된다.

제안2.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비록 지역적으로 나뉘어져 구별된 사회 속에서 존재할지라도 분열이나 파벌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용납하심과 같이 피차 용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토마스 캠벨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이며 보편적 교회임을 천명한다. 모든 사람들의 교회, 일치(화동)하는 에큐메니칼 교회임을 제시하고 있다.

제안3.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난 명백한 요구나 가르침을 제외한 그 어느 신조도 교인들에게 가르쳐질 수 없다.

제안4. 신구약 성경은 교회의 선교 사업과 구원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서 전적이고 완전한 계시를 드러내 보이는 불가한 유일한 헌장이다. 구약 성경이 유대인에게 예배의식, 율법 교육, 성전 운영 및 그 외에 의무규정들을 언급했던 것처럼, 신약 성경은 신약 교회에 대해서 예배 의식, 기독교 교육, 교회 운영 및 교인들의 의무들에 관한 완벽한 제도들을 규정하고 있다.

제안5.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의식들에 관하여 성경은 그 행위의 시기와 방법들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이 있다. 성경이 침묵하는 것을 교회의 신조나 예배 속에 허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신약 성경만큼 오래되고 완벽한 제도는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인간의 제도나 신조에 대하여 거부하고 오직 성경의 지시만 따른다. 성경이 침묵하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고 신약 성경이 말하는 규범만 따른다. 성경은 완벽히 교회가 따라야 할 제도나 규범을 성령의 충만함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제안6. 성경의 진술로부터 추론이(올바른 추론일 경우)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리로서 올바로 이해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양심을 구속하지 못한다. 성경에 대한 인간의 추론적 진리들은 교회의 신앙 고백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다.

제안7. 하나님의 진리체계에 대한 교리적 표현이나 신앙 선언은 아주 편의로운 것이거나 명백한 것(물론 많은 추론적 진실을 포함하지만)이라 할지라도, 이성의 능력에 대한 훌륭한 평가일 뿐이다.

제안8.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을 맡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들에 대해서 특별한 지식이나 뛰어난 분별력을 갖출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원의 경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안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그 분에게 복종해야만 된다는 성서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필요하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성경 해석과 인간의 추론은 성경의 진리와 구별되어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중요시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고백과 성서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강조하고 있다.

제안9. 은총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는 상기의 제안과 같은 성경의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실한 성도로서, 똑같은 한 가족으로서, 한 형제로서, 하나의 지체를 가진 자로서, 동일한 희생의 대가로 산 자로서, 거룩한 유산의 공동 상속자로서의 위치를 인식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이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들은 어느 누구도 분열되어서는 아니 된다.

제안10.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이야말로 엄청난 죄악이다. 이 분열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명백한 하나됨을 파괴하는 반 기독교적 행위이며, 둘째로, 스스로의 주권적 권위로 인하여 엄격히 통제된(금지된) 반 성서적 행위이며, 셋째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로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하는 의무를 버린 채 서로를 반대하고 증오하며 저주하는 의무를 버린 채 서로를 반대하고 증오하며 저주하는 비본질적 행위인 것이다. 한마디로 분열은 혼란과 모든 사악한 행위의 산물이다.

제안11.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부분적인 무시(도외시)와 인간적인 견해와 주장의 허용은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서 발원되었던 분열과 파멸의 근원으로서 인식되어 왔으며, 오늘에 있어서도 교회분열의 원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일치와 화합(화동)을 강조한다. 캠벨은 분열하는 공동체, 교회를 부정하고 한 형제, 가족으로서 교회를 중요시한다. 교회의 분열을 강력히 반대하며 일치와 사랑을 주장한다.

제안12. 지상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완전하고 순수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다. 그것은 첫째로, 교인들이 성경에 대해 올바른 지식(제안8)을 갖고 있어서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분 안에서 신앙고백을 행하는 것이며, 둘째로, 복음 전도자들이 말씀 속에서 계시된 거룩함과 그 말씀이 분명히 요구하는 바른 신앙 이외의 것들을 교인들에게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로, 교회의 모든 치리에 있어서 인간적인 견해나 주장의 그 어떤 덧붙임이 없이 신약에서 제시하는 초대교회의 本(模形)에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함으로 신약교회를 향해 더욱 가깝게 나아가는 것이다.

제안13.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 하고자 할 때, 성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서 인간의 편의라는 이름하에 허용되어야 할 필요 불가결한 인위적 상황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을 준수함에 있어서 수반되는 변질성과 상이점이 결국은 교회의 논쟁과 분열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막기 위해 우리는 신성한 본질에 대해서는 어떠한 인위적인 주장(곡해)이라도 일체 배제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완성을 위하여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바른 신앙과 신약 교회, 초대 교회의 본을 따르는 것이 요구된다. 신성한 본질을 추구하며 성경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것은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님이 몸 된 교회로서 신약 성경이 요구하는 일치와 사랑, 성경 중심의 교회를 추구한다.

토마스 캠벨의 그리스도의 교회의 운동은 그의 아들 알렉산더 캠벨이 이어받아 ‘기독교인의 세례’, ‘율법의 설교’를 기치로, ‘밀레니얼 하빙거’ 잡지에 많은 글들을 쓰고 유명한 논쟁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특히 그의 세계 복음적 선교와 연합과 일치의 교회 운동은 빛을 발하였다.

오늘날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운동에 대한 신학적 작업들이 나오고 있다. 1980년대까지 환원 운동의 역사와 전망에 대한 렉처쉽에서 여러 학자들이 발표했던 글들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최근에 대표적인 저작을 들면, 세속의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회를 세우기를 주장하는 알렌(C. L. Allen)과 초대 원시 교회의 고대 신앙의 부활을 주장하는 휴즈(R. T. Hughes), 그리고 현대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교회론적인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한 훠거슨(E. Ferguson)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그들은 세속 교회 속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체성을 찾는다. 이들은 오늘날 미국의 땅에서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늘날 미국의 환원 운동이 어떠한 복음 운동이어야 하는지, 계속 질문하며 대답하고 있다. 그러면 한국의 현실은 어떠하며 한국에서의 환원 운동의 현실은 어떠한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2.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선구자(환원 운동가)와 구약관

 

 

1.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 1763-1854)

 

토마스 캠벨은 1763년 아일랜드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교직 생활을 몇 년간 한 후 분리파 장로 교회에서 목회한다. 그는 1783-1786년 4년간 글라스 고우에서 공부를 하고, 분리파 장로 교회의 이부인 반자치 시민파 신학교에 입학한다. 신학 공부를 마친 후 아일랜드로 돌아와 제인 코내글(Jane Corneigl)과 결혼하고, 1788년에 첫 아들 알렉산더 캠벨을 얻게 된다. 그는 아버지 고향 근처에서 설교와 가르치는 일을 한 후, 1798년 아허리에 있는 집회에서 목회자가 된다. 아허리는 리치힐에서 2마일 거리에 있고 벨파스트와는 남동쪽으로 30마일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였다.

토마스 캠벨은 1807년 4월에 그의 부인과 자녀 일곱 명과 함께 미국을 향해 아일랜드를 떠났다. 1807년 5월 13일에 토마스 캠벨은 필라델피아에 이르렀고, 그 도시에서 북미교회회의 연합을 알게 되었다. 그 교회회의는 반자치시민파의 기구였다. 자치시민은 미국에서 조직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분리파 장로교의 조직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차이티어즈 장로회에 출석이 허락되었다. 1807년 7월 1일에 차이티어즈와 워싱턴 사이 지점인 피츠버그에서 목회할 수 있는 자격을 받았다. 그러나 몇 달 후 그는 교회회의에 심각한 혐의로 기소된다.

1807년 10월 27일에 캠벨에 대한 정통성을 의심하는 비난이 일어났다. 그가 차아티어즈 장로회에 출석하게 되고 오래되지 않아 앨러케이니강 위로 널리 흩어져 있는 반자치시민 장로교회를 여럿 방문하도록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캠벨은 동료 목사인 윌리엄 윌슨(William Wilson)과 동행하였다. 그 여행의 주된 목적의 하나는 개척지에서 멀리 떨어진 부분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에게서 행해지는 주의 만찬ㅇ르 관찰하는 것이었다. 토마스 캠벨은 오랫동안 갖지 못했던 주의 만찬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그 기회를 통해 불일치에 대해 슬퍼하게 되었다. 그는 신앙심이 깊은 청중들과 다른 영적 교감을 느끼며 신앙의 유익을 나누도록 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곳에서 윌슨과의 의견이 대립되었다. 1807년 10월에 장로회 정기 모임에서 기소를 당했고 캠벨은 교리와 교회 규율의 문제점에 대해서 분리파 장로교회와 논쟁에 빠지고 말았다. 캠벨은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으로 간 이유 중 하나는 비정통적 학설을 실행하기에는 미국이 더 자유롭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들어왔지만 분리파 장로교회회의와 부딪치지 않으면 안됐다. 1808년 1월 장로회에서 캠벨에게 일곱 가지 혐의로 정식 고소장이 제출되었다. 그 내용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는 것은 구원하는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믿음의 높은 등급에 속할 뿐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2. 교회에서 신앙고백을 영적 교감의 언어로 사용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3. 치리하는 장로의 직무는 목회자가 없는 모임에서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고 권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4. 우리의 증언에 반대를 표명하는 목사의 의견을 듣는 것도 허용되었다고 주장한다.

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율법의 형벌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훈의 지배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6. 누구든지 생각과 말과 행위에서 죄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7. 정식의 초빙과 선임이 없이 목사들이 있는 집회에서 설교해왔다.

 

캠벨이 분리파 장로교회를 떠나 환원 운동을 하게 된 중요한 신학적 쟁점들이 잘 소개 되었다. 영적 교감의 언어로 신앙고백을 거부하는 것은 미국 환원 운동 이념의 중심이 되었다. 인간의 조직이나 목사에 대한 권위의 거부 등, 목회권을 박탈하는 분리 장로교회회의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 정심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캠벨의 논쟁과 주장이 미국 환원 운동에 이정표를 제시하는 모델이 되었다.

토마스 캠벨은 분리파 장로교회로부터 이탈되어 나와서 펜실바니아주 워싱턴 가까이에서 목회를 계속했다. 그는 듣기 원하는 사람이면 분리파든지 다른 교파든지 아니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자일지라도 누구에게나 설교했다. 1809년 이른 여름에 캠벨은 아브라함 알타즈(Abraham Altars)의 집에서 동역자들과 기구를 형성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만나게 된다. 이 모임에서 두 가지의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첫 번째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행동지침에 대한 캠벨의 결정이다.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말하고, 성경이 잠잠한 곳에서는 잠잠하라.” (Where the Scriptures speak, we speak and where the Scriptures are silent, we are silent) 이 행동 지침이 갖고 있는 암시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명백하였다. 사람들은 즉시로 유아 세례를 거부하는 것을 채택하였다.

두 번째 결정은 두 번째 모임을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1809년 8월 17일에 버팔로크릭의 상류에서 모임이 열렸다. 여기서 “워싱턴 기독교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정기적인 연합체를 구성하게 된다. 연합체의 목적과 방침에 대한 성명서를 써야 할 필요 때문에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토마스 캠벨에게 이 과제가 주어졌다. 캠벨이 완성한 문서가 바로 “선언과 제언”(Declaration and Address)이다.

선언과 제언문에는 네 개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성서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은 두 개 이다. 개인적 판단의 정당성은 성서만이 유일한 권위가 있다는 사상과 연결되었다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나뉘어 지는 이유는 인간의 의견 때문이며, 그 나뉨의 해결책은 오로지 성서에 있다는 것이다. 본래의 규범으로 돌아가야 하며, 우리의 규범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성서만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며, 말씀에 나타난 바대로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본래의 규범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선언과 제언문에 있는 13개의 제언 중에 제 4제언은 신구약성서의 관계를 언급하며, 구약과 신약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의한다. 구약 성서가 구약시대 예배의 규율과 운영에 대한 규범이었듯이, 신약 성서가 신약교회 예배의 규율과 운영임을 또 거기에 속한 일원으로 가져야 할 독특한 의무에 대한 완벽한 규범임을 정의하는 것이다. 선언과 제언문은 분리 장로교회(씨시더 장로회 총회)로부터 나와서 발표한 것으로서 환원 운동의 방향과 사상이 집대성된 문서로서 대헌장(Magna Charter)으로 불려진다. 이 문서는 성서만이 개인과 교회의 절대적인 신앙의 표준임을 주장하는 원리들로서 분열된 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일치시킬 수 있는 대안적 방법론을 제시한 위대한 환원 문서라고 본다.

선언과 제언문에 나타난 토마스 캠벨의 구약의 이해와 생각을 살펴보자. 신앙의 거룩한 조항과 한 때 성자들에게 부과된 의무에 대한 진지한 논쟁에 대하여 논의하는 하는 중에, 골리앗을 언급한 부분이다. “진지한 논쟁을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중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진리와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아마도 오래전에 포기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작 더 무서워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 싸워야 할 많은 악마들보다 골리앗과도 같은 거대한 분쟁이 아닌가.” 캠벨은 교회의 분리와 분쟁이 악마들 보다 더 큰 악의 세력의 골리앗을 비유하고 있다. 다윗이 상대하기에 힘들었던 존재, 골리앗을 이야기 하고 있다. 또 “시온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시온을 언급하고 있다. 시온의 선을 구하는 것, 시온의 모든들(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하고 있다. 구약의 시온, 예루살렘은 시편의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도성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시온의 파괴’를 다시 치유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그리고 가득 찬 신념으로 노력해주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여기서 시온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약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분열하지 않고 일치하는 교회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복과 함께, 나아가 복되고 하나 된 교회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분열은 하나님께 불경스럽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 다수의 죄악들을 숨겨줄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이러한 권능에 의해 여러분들은 우리들 속에 분열로 넘어져 있던 다윗의 성전을 다시 들어올리고, 그것을 다시 그 기초 위에 세우라고 명령을 받았다.”

캠벨은 인위적 규약으로 종파적 구속의 상태를 삼손의 상황으로 비유한다. 일치와 순수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교회가 인위적 규약으로 백성들을 종파적 구속 상태로 묶어둔다. 그것은 마치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묶어 그들의 감옥에 가두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나, 또는 적그리스도가 개혁의 옹호자들을 사로잡아 놓았던 그런 구속과 억류와 같은 것이다. 억류된 삼손의 상황이 토마스 캠벨이 분리 장로교회와 교파 교회로부터 당하는 고난과 유사하였다.

토마스 캠벨은 성서 해석의 오류의 문제점과 교회의 악용을 정확한 눈으로 관찰하여 지적한다. “만약에 기독교의 공적인 직위와 실행들을 불명예스럽게 하고 타락시켰던 인간의 모든 잘못된 교리들과 부정의 행위들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계시의 명백한 말씀이 보여주는 그 세계에 결코 견줄 수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문자와 연고에 의거해서 말하자면 즉각적이고 단번에 자신들이 그린 그림(의미)들을 충분히 설명하려 않는 한, 그래서 그들이 그러한 오류와 왜곡들을 성서의 참된 표현과 형식에 원인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당연히 성서 안에 담겨 있는 건전한 말씀의 형태를 계속 붙들고, 또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로 여겼어야 했을 것이다.....그것이 단순하고 무식한 세상(사람들)을 우리의 거룩한 종교(기독교)에 그동안 해롭거나 걸림돌이 되어 왔던 엄청난 실수, 반목, 파벌, 파문 그리고 핍박으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교회의 일치에 있어서 감정의 통합을 이루어 낼 수 있는가. 토마스 캠벨은 교회의 분열에 대하여 논하며 감정의 통합을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성서만으로 일치의 통합을 이루기 힘들기 때문에 교리적 선언을 하고 신조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일치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진리 안에 연합(unity in truth)만이 일치를 준다고 주장한다. “성서가 그 적합한 곳에서 간직되어서 성령의 약속된 영향 하에 믿음과 성스러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감정의 통합을 만들어내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고, 또한 하나님께서 의도하는 만큼 또는 현재의 불완전한 상태의 그의 백성들이 가능한 한 인정할 수 있을 만큼 혼란과 실수들로 붙어 순결한 교회의 믿음과 예배를 보존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고, 어떤 사람이 감히 말한 것인가.” 캠벨은 역설적인 표현으로 성서가 일치와 통합을 이끌기에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교회들이 실제 일치하지 못하고 분열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앙 고백문이나 신조에 서명을 하는 일을 거론하다. “만약에 예를 들어 아리우스파, 소치니파, 칼빈주의자. 반율법주의자 들이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아타나시우스 신조, 성공회의 교리적인 조항에 서명하지 않았을지도 모를텐데. 만약에 이것이 부정된다면,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들에 호소할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그런 사실들이 존재하며 행해져 왔다는 것을 감히 주장하게 될 것이다. 또는 성서가 그리스도에 관해 선언한 모든 것을, 즉 하나님 말씀 안에서 그에게 고백되고 바쳐진, 그런 모든 영광, 명예, 감사, 그리고 찬미를 그에게 돌리는 것, 그에게 그런 모든 신뢰를 바치는 것, 이 모든 것을 믿는다고 순전한 신앙고백을 하는 순간에서처럼, 어떤 사람이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또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서명을 하는 순간에는 편안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의 마음속에서 아리우스파나 소치니파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성서의 증거, 그 확신과 진리의 확실성을 담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서보다 우위에 신조를 가져간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 교리들을 외우도록 하거나 공식을 인정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값싸고 손쉬운 정통 방법이다. 이 값싸고 손쉬운 정통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알지 않고는 우리를 인도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아시며 최소한 다른 어떤 것을 정하지 말고 성령에 의존하여 성서를 연구함으로써 가르치셨던 것에 반해 성서에 대한 단편적 지식도 없이 개인이 터득한 것이다.” 토마스 캠벨은 성서와 신조와의 차이점을 논술하며 교회의 분열과 연계하여 성서 해석에 대한 이야기와 성서 해석에 대한 문제를 전개한다. “소위 성서의 문자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다. 우리가 제안하기로는 기독교 일치의 회복과 유지를 위해 종교적 주제를 놓고 우리의 감정에 대해 자유 토론을 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할 뿐 아니라, 교회의 전도를 위해 성서를 연구하고 대중에게 설교하는 일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또 캠벨은 그리스도의 믿음과 법, 그리고 기독교인들이나 기독교회 사이에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기독교인들에게 무엇을 지시하는가 질문한다. 교회의 일치와 평화, 진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말씀의 해석과 존재를 하는가 논의한다. 신앙고백서에 있어서 신앙 고백자들이 얼마나 성서적인가 하는 문제를 진술한다. “성서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특징을 근복적으로 구성하는 요소는 바로, 참다운 복음적인 겸손이다. 우리는 희망하기를,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만족스러울 만큼 그 특징을 확인하는 고유한 방법을 가지고 성서적으로 명확하게 그것을 결정했기 때문에, 성서적인 동일한 증거를 통해 같은 단체나 또는 유사한 단체든지 간에, 어떤 상황에 처했든지 간에, 어떤 상황에 처했든지 간에 그들 사이에는 분파도, 잔인한 분열도 없어야 할 것이며, 또한 서로를 형제로서 받아들이고 인식해야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려 한다.” 성서적 방법이라는 것, 성서 정신은 이해와 일치라는 사실을 논증한다.

토마스 캠벨은 모든 신앙인의 법칙, 같은 법칙으로 나가야 한다라는 생각을 구약의 율법과 교회를 비유하여 설명한다. “구약이 율법 아래 이스라엘 선민의 특별한 의무를 위하고 구약 교회를 위한 것처럼 신약은 신약 교회를 위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의무들을 위한 적절하고 직접적인 규범이요, 규칙서이며 형식이다. 동시에 결코 구약은 신약과 분리할 수 없이 연관되어 있고, 신약을 설명하기 위한 기본적인 것으로서, 우리들은 구약을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 구약은, 그것이 즉각적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의 규범은 아니지만, 신성한 사도들에 의해 우리의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그들이 지키고 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가르쳤던 신약의 간섭이나 일치됨 없이, 도덕적으로 당연한 의무의 모든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동등하며 또는 대등한 권위의 모든 법칙이 된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있어서 성서가 성서 교회를 위한 규범이 다고 주장한다. 성서는 교회를 위한 교리서, 규범서인 것이다. 구약은 구약 교회, 신약은 신약 교회를 위한 정경인 것이다. 따라서 캠벨에게 있어서는 구약 보다는 신약성서가 더 중요한 책임을 말한다. 왜냐하면 신약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를 추구하며 완전한 교회의 모형은 신약 교회임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선언과 제언문 첨언에서 구약은 신약에 의해 설명되고 완전해진다고 말한다. 상보의 관계, 보완의 관계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규칙에 이르게 되는데, 구약은 신약에 의해 설명되고 완전해지며, 신약은 구약에 의해서 설명되고 보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약은 기독교회를 위한 적절하고 직접적인 규칙서로, 또한 그들이 준수하고 실천해야 하는 모든 것들에 관한 긍정적이고 특별한 기독교인들의 의무들을 위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더욱이 이런 하나님의 법칙과 이런 확실하고 틀림없는 신앙의 규칙을 준수하는 데 있어 그런 모든 것들은 신성한 일치를 주장하는 동시에 실천의 일치성을 희망하는데 이르게 할 것이다. 우리는 감히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약속과 허용에 의해서 말해지고 행해진 것에 따라 신약 성서에서 보여 지는 바로 그 같은 것들을 말하고, 주장하고, 실천하게 될 것이라고 감히 제안했다.” 교회의 실천서, 신앙의 규칙을 준수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책이 신약 성서임을 강조하고 있다. 토마스 캠벨은 구약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구약은 신약의 성서를 위한 책이라고 보며 신약을 이해하기 위한 책, 성서가 교회를 위한 규범과 규칙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본다. 곧 그에게서 있어서 구약 보다는 신약 성서의 중요성이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한 성서는 교회 일치의 근거와 규범을 제시하는 책으로서 강조하고 있는 것을 살피기도 하였다.

 

2. 발톤 와랜 스톤(Barton W. Stone, 1772-1844)

 

발톤 스톤은 1772년 12월 24일 미국 메릴랜드 주에서 출생하였다. 스톤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 교육을 받았다. 미국 개척 시대에는 마을 마다 작은 학교를 세워서 선생을 초빙하여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도 마을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는데, 선생들이 가르치는데 열정을 가지지 않고 아이들을 방치하는 모습에 회의를 갖고 나중에 가르치는 자로서 올바른 기독교 교육관을 가지게 되었다. “선생은 지식과 가르치는 열정과 교육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피교육자로부터 권위를 인정받고 존경을 받아야 한다.”

1790년 2월에 구일포드 아카데미(Guilford Academy)에 입학하여 수학한다. 이 학교는 목회자 칼드웰(David Caldwell) 장로교 목사가 운영하던 신학교 성향의 학교였다. 학생 수가 50 명밖에 안 되는 조그만 학교이었지만 강도 높은 영성 교육과 도제식 교육으로 많은 인재를 양성하던 명문학교였다. 그는 과다한 성서 교육과 매일 있는 경건 시간 등에 적응하지 못하여 다른 학교로 전할 할 것을 심각히 고려한다. 이 때에 명성있던 맥그리더(James McGready)와 하지(William Hodge) 등의 부흥 집회에 참석하게 된다. 이 집회에서 은혜를 받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다짐한다. 그 후로 간소한 식생활과 최소한의 수면 시간만을 갖는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인문학과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1796년 오렌지 장로회로부터 설교 허가권을 받고 자비량 전도 길을 떠난다. 여기서 사도 바울과 같은 힘든 선교 여행 체험을 하게 된다. 1797년 새로운 전도 지역으로, 그 당시로는 서부의 개척 끝 지역인 켄터키 주로 옮긴다. 케인 린지 교회(Cane Ridge Church)와 콘코드 교회(Concord Church)에서 임시 사역자로 봉사한다. 스톤의 설교 능력이 탁월하여 지역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아 집회 강사로 초청받게 된다. 스톤은 신앙 동지들과 함께 1801년 8월 유명한 케인리지 신앙 집회를 열어 3만 여명이 은혜를 받아 새로운 신앙 물결이 전 지역으로 퍼지게 된다.

렉싱톤 노회는 이 집회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스톤과 그의 동지들을 출교시키려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장로회 헌법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목회 정직처분을 내린다. 스톤은 이같은 교권적 횡포에 승복할 수 없음을 밝히고 “스프링필드 장로회”라는 새로운 노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변호(The Apology of the Springfield Presbytery)문을 발표한다. 얼마 후 노회 구성 자체가 비성서서적이며 형제 사이를 분열시키는 일임을 깨닫고 스프링필드 장로회를 해체한다. 이러한 입장은 얼마나 고무적인가. 오늘 우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조직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신, 환원 정신을 해치면서 삼분오열하고 있는 일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다. 발톤 스톤의 지혜를 배우려는 겸허한 자세가 요구되는 때이다.

스톤은 모임을 해체한 후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서로 돌아가서 하나로 일치할 것을 호소하는 유언적 문서를 발표하게 된다. 이 문서가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최후의 유언과 증언”(The Last Will and Testament of the Springfield Presbytery)으로 700자에 간결한 환원문서로서 현존하는 신앙고백서 중에 가장 높이 평가되고 있다.

스톤은 성령의 역사로 놀라운 케인리지 집회의 부흥 사역 후, 영적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우리 가운데는 이 집회 사역과 흥왕케 하는 복음의 교리에 대해 반대하는장로교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숨겨서는 안 되겠다. 그들은 매 집회마다 그들이 고백해오던 신앙고백이 무시되는 것을 싫어했다. 그들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각 교회들이 이 집회 사역에서 주장하는 교리를 전적으로 거절하도록 하였고, 교회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갱신 운동의 교리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다른 교단들도 참된 경종을 울리는 복음을 깨닫기 시작하여 칼빈의 교리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곧 ‘전쟁’이 시작되었고, 기존의 교회들은 더욱 특정 교리(칼빈의 교리)를 확고히 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으며...시온의 황폐화되는 것, 즉 연합이 깨어지는 것과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스톤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였는지 이해 할 수 모습이다.

켄터키 노회 의장 앞으로 보낸 서신(1803년 9월 10일)에는 로버트 마샬, 요한 둔라비, 리처드 맥나마르, 발톤 스톤, 요한 톰슨 등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스톤은 켄터키 노회 의장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성서 해석에 대한 말을 언급한다. “2. 우리는 신앙고백문 1장 9절에 의거하여 성서는 성서를 통하여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모든 논쟁들을 종식시킬 최후의 심판을 믿는다. 모든 공의회의 신조와 고대 교부들의 견해들, 인간의 교리들과 사적인 영성들은 재조사되어야 하며, 이 선고를 통하여 성서에서 말씀하신 성령 이외에는 누구도 침묵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귀 노회가 보여주는 태도는 성서를 성서로 해석하는 특권을 누릴 수 없게 만들며, 말씀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전통적 해석에 매어 있게 할 뿐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 편지에서 성서는 성서를 통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원리를 보인다. 이것은 성서의 맥락을 파악하고, 성서의 상호 본문 간의 해석을 하여 올바른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것을 보여준다. 노회의 입장이나 신앙 고백문이 성서의 말씀보다 더 권위를 가진 것을 지적하고 있다. 전통적인 해석이 말씀 뒤에 숨은 깊은 의미를 훼손하다고 지적한다. 성서의 행간의 의미와 숨겨진 의미를 지적하는 것을 통하여 성서 해석의 깊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발톤 스톤이 스프링필드 장로회를 설립하고 의장과 서기를 선출하고 켄터키 장로회에다 보낸 편지에서 성서 해석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성서 해석의 확실한 열쇠는 ‘성서를 해석한 문서’가 아니며 다른 인간의 문서도 아닌 성서 자체이다. 우리는 복음의 진정한 교리로부터 빗나가 있다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해 가능한 빠르고 편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전처럼 복음을 전하고 주의 만찬을 집례하기로 결정했다.” 성서로 성서를 해석하기, 성서 그 자체의 해석을 주장하고 있고,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복음 전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성서 해석과 교회의 일치, 교회 운영과 예배의 집례, 주의 만찬의 실시 등의 예식을 밝히고 있다. 성서 해석은 교회 신학과 연관되어 교회 일치와 신학이 환원 운동가들의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발톤 스톤은 루터의 종교 개혁에 대한 언급을 교회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지, 진정한 교회는 무엇인지 역사를 거론한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사무를 처리하는 법적 권위가 은혜의 성령의 몫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이런 권위를 가지고 사무를 처리하는 것이 합법화적이라고 여긴다. 이 원리가 적용되려면 어떤 목회자도 사도들로부터 직접 ‘정식계승’을 받지 않아야만, 설교, 행정, 임직식 등을 집행할 어떤 합법적 권위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 ‘정식계승’은 자주 중단되어 왔고, 이 서열을 다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 표준이 되는 로마 교회를 세우거나 가톨릭 안에서 하나로 뭉치면 되는 것이다. 그곳으로 돌아가 연합하지 않는다면 다시 질서를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모든 분파와 소분파들의 일원들은 목회직을 정지당하거나 파면 당할 공통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이는 루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60일 내에 그의 잘못들을 끊고 파문의 고통 속에서 교황의 조치에 순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총회의 존중할 만한 결정을 받기 위해 교황의 선고에 항소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항소가 로마의 법정에서 무시당할 것이며, 그의 의견은 무효화되고 그의 머리에 ‘파면자’라는 표지가 붙으리라는 것을 예견하였기 때문에, 또 반대의 움직임 없이 권위를 행하고 있는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 그는 강제로 끌려 나오기 전에 스스로 가톨릭으로부터 탈퇴하였다. 동시에 그는 공개적으로 이 현명한 결론을 실행하기로 결심하였다. 타락하고 미신에 사로 잡힌 교회로부터 그가 스스로 물러난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교황이 그의 영혼에 위협을 가하기 전이었다. 이런 속에서 1520년 12월 10일에 그는 비텐베르크(Wittenberg)도시의 사방이 개방된 곳에 나무토막들을 쌓아 놓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엄청난 장면을 연출했는데, 그는 그에게 항거하는 내용을 출판한 교황의 교서와 교령집, 그리고 교황의 최고 판결관에 관련된 법규집들을 불에 때워 버렸다. 이로 인해 그는 이제 그가 더 이상 로마 교구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며, 그 결과, 로마로부터 올 것으로 기대되는 파문의 선고도 전적으로 헛되고 하찮은 것이라고 세상을 향해 선언했다.

스톤이 스프링필드 장로회를 설립하고 켄터키 노회에 저항하는 국면이 루터가 카톨릭 교황청과 대항하는 형국과 비슷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우리가 신앙고백문 보다 성서를 선호하고 신앙고백문의 교리보다 성서의 교리를 선포하고자 했던 것뿐이다.” 신앙 양심을 표출하면서 성서가 신앙 고백문 보다 더 우위에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는 스톤의 성서 해석과 성서 중심의 교회관을 잘 보여준다. 스톤은 복음과 진리 말씀, 믿음에 대하여 논하며 구약의 신앙인들을 열거한다. “우리가 이미 말한대로 믿음은 에녹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가게 했다. 믿음은 노아를 두려움 속에 감동시켰으며,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의 마을을 떠나도록 했다. 또한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분이라 믿은 사라에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강건함을 주었다(11절).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거센 물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모험을 강행하게 했으며, 여리고 성벽을 포위하도록 하는 등의 영향을 미쳤다.”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 출애굽의 신앙을 언급하며 구약 신앙인들을 언급한다. 그들이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을 말하며 믿음이 거듭남에 우선됨을 논의한다. 또한 스톤은 매일 성서를 읽고 상고하기를 권고한다.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성서대로 교회를 세우자는 주장을 한다. 1804년 6월 28일, 켄터키 버본 카운티에서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최후 유언과 증언(The Last Will and Testament of the Springfield Presbytery)"이라는 문서로 밝힌다. 거기서 레버란드(Reverend)라는 칭호를 버리고 주님의 이름 하나만 남기를 유언한다(유언2). “우리는 성서만이 유일한 구원의 안내자로 믿기에 다른 책들로 인하여 신앙적으로 피해를 입는다면 그 책들을 불 속에 버릴 것을 유언한다. 왜냐하면 한 책을 가지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많은 책을 가지고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낫기 때문이다.”(유언7), “마지막으로 우리 모든 자매 교회들이 성서를 주의깊게 읽는 가운데 자신들이 성서 안에 결정된 운명을 깨닫고 늦기 전에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할 것을 유언한다.”(유언11) 발톤과 그의 동지들이 신약교회 운동을 시작함에 있어서 성서가 중심에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성서 이해와 성서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앙 고백문 보다 성서를 강조하고 성서 한 권에 구원의 길이 제시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3.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 1788-1866)

 

미국 환원 운동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한 알렉산더 캠벨은 1788년 9월 12일 환원운동가인 아버지 토마스 캠벨의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엄격하고 철저한 주입식 가정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하루 두 번 가정 예배와 개인 지도로 성서 교육을 집중적으로 시켰다. 그의 암기력은 놀라워 잠언, 전도서, 시편 등을 완전히 암기하였다. 그는 삼촌이 운영하던 마켓 힐 아카데미(Market Hill Academy)와 아호레이 아카데미(Ahorey Academy)에서 문학, 철학, 논리학과 성서 언어들을 교육받는다. 이 때에 로크(John Locke)의 경험론에 깊이 심취한다. 그 후에 영국의 그라스고우 대학교에서 신학과 역사를 수학하고 스코틀랜드 독립운동가 들과 가까이 교류하면서 그들의 성서 회복 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 후에 1809년 신앙의 자유를 위해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는 아버지 토마스 캠벨의 환원 운동의 대헌장이라 불리는 “선언과 제언”에 영향을 받고 신앙의 자유와 개교회의 자율성을 주창한다. 분열된 교회가 하나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서로 돌아가는 길이며, 그 안에서 갖는 일치, 자유, 사랑만이 교권적 억압으로부터 교회들이 자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호소한다. 캠벨은 신앙 동지들과 함께 이상적인 신약 교회를 꿈꾸며 1811년 5월 4일 브루쉬런 교회(Brush Run Church)를 세운다. 초대 교회의 신약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밝히며 1813년 레드 스톤 침례 연합회(Redstone Baptist Association)에 가입한다. 1816년에 연합회 연례 총회가 크로스 크릭 교회(Cross Creek Church)에서 모인다. 이 때 캠벨은 지도자 천명이 모인 집회에서 “율법에 관한 설교(Sermon on the Law)”의 제목으로 강론한다. 로마서 8장 3절의 말씀을 주 텍스트로 하여 로마서 전체와 갈라디아서, 고린도후서를 인용하여 율법의 연약성과 임시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 뿐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관계성까지 명확히 설명한다.

캠벨의 “율법에 관한 설교”는 적대자들에 의해 비난받는다. 구약을 정경에서 제외시켰던 마르시온과 동일하게 취급당했다. 캠벨의 구약대한 새로운 해석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신학적 해석이었다. 왜냐하면 정경 형성의 역사나 성서 비평사가 학문적으로도 전연 논의되지 않았으며, 단지 거룩한 책으로만 이해하였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이단으로 몰기에는 교리적으로 충분하였다. 캠벨은 구약과 신약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성서적으로 확실하게 설명한다. 구약 성서는 신약 성서를 잉태케 하였으며, 구약 성서 39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말씀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지만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구속할 수는 없다.

캠벨은 구약의 교회와 신약의 교회를 분리하여 신약의 교회 예배 규범을 좇아가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의 상황과 유사하다. 오늘 한국 교회들은 십일조를 강조하며 십일조 정신에 담긴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봉헌하는 것을 잊어버린 시대가 되었다. 구약의 제도를 강조하는 한국 교회가 되었고,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추구하는 시대상은 신약 교회가 보여준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율법에 관한 설교”는 레드스톤 침례교 연합회에서 알렉산더 캠벨을 이단을 몰기 위하여 제출케 했던 설교문 이었다. “울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캠벨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문을 작성한다. 서론에서 설교가 가지는 성격에 대하여 논하면서 문서가 지는 특징과 구어체 설교가 갖는 특징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타난 신상(神像)을 비유로 그리스도교의 순수하지 못한 혼합된 요소들이 융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문제는 중요한 것임을 밝힌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는 진리의 하나님을 증거하여야 한다고 본다. 알렉산더 캠벨은 율법에 대하여 먼저 정의를 한다.

“일반적인 어법에서 율법이란 용어는 ‘행위의 법’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족장들과 예언자들에게 내려진 계시를 랍비나 율법박사의 전통과 계명으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서, 예수님 당시까지 유대인들에 의하여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대인들은 다윗의 시편을 율법이라 칭하였다(요12:34). 구약 성서가 완성되어, 유대인들이 그것을 회당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그 내용을 구분하였을 때, 그들은 구약성서를 율법, 예언서, 및 시편으로 양식을 분류하였다.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말씀하신바 있다. 율법이 행위의 법을 가리키고, 회당에서 사용하던 모세 오경의 책을 율법이라고 하였던 것을 지적하고 있다. 율법이 구약 성서에 약 30회 사용되고, 모세가 전한 모든 율법을 가리키는 형용사와 함께 자주 나타나고 있다고 어휘 분석을 한다.

“하나님 통치의 교리가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모세의 경륜과 대조를 이루기 시작했을 때, ‘율법’이란 단어는 아주 일반적인 것이 되었고, 특별한 형용사 혹은 제한적 정의 없이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반드시 전반적인 법률 혹은 모세의 의하여 제정된 율법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의미로, 신약성서에서 약 150회 정도 사용되고 있다.” 알렉산더 캠벨의 성서 읽기, 성서 연구의 치열성과 학자적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다음 설교 본문에서 율법이란 용어의 용례 두 가지를 찾아낸다. 하나는 특별한 특성이나 제한적 정의를 가지고 쓰인 경우와 제한성이나 형용사가 없는 율법, 모세의 전반적 법률이나 율법을 의미한 경우이다. 전자는 제왕법, 신앙법, 자유법, 그리스도의 율법, 생활 정신법 등이고, 후자는 “율법은 모세에 의하여 주어졌느니라”, “율법과 예언서는 요한까지 였느니라”, “너희는 성령에 의하여 인도를 받으면, 너희는 율법아래 있느니라”, “너희는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느니라” 등이다.

캠벨은 율법의 용어 정의를 하고 나서 구약의 율법, 모세에 의하여 제정된 모든 법을 거론하면서, 타죄이전론자(Supralapsarians)와 타죄이후론자(Sublapsarians)에 대한 교리와 사도들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진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캠벨 시대에는 장로교 칼빈주의 예정설에 대한 논쟁의 문제를 다룬다. 타죄이전론자(墮罪以前論者)는 인간의 창조와 타락이 이미 예정되었다고 믿는자이다. 타죄이후론자(墮罪以後論者)는 어거스틴의 신봉자나 칼빈의 추종자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은 창조를 계획하고 인간의 타락을 용서하고 선한 자를 택하여 그 구원을 위하여 계획하고 나머지 인간들은 영원히 징벌한다고 믿는 자이다. 캠벨 당시의 사람들의 교리관이 과연 진리의 말씀과 신약 시대의 말씀을 기록한 사도들의 글의 의미와 얼마나 일치하고 가까운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구약 성서는 율법을 말하고, 율법은 구약의 교회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약 성서가 말하고 지시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특히 사도들이 말하는 진리의 교회가 중요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율법 가운데 십계명을 들어, 도덕법이라고 정의하고 도덕법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인간에 대한 의무를 구별하고, 종교와 도덕에 대하여 구별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십계명이 도덕법이라고 단언하면 모순점을 가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십계명이 모든 도덕법을 실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언급한다. 이혼과 보복의 문제도 십계명에서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바울은 십계명은 죽음의 법이라고 언급한다(고후3:7,14).

모세의 율법이 두 개의 원리, 즉 계명들과 법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주 하나님을 정성과 영혼과 마음과 전력으로 사랑하라. 그리고 너희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이 예수의 계명은 모세 율법과 예언서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가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렉산더 캠벨은 예수를 우리의 위대한 예언자라고 부른다. 율법에 대한 캠벨의 법 정신 이해와 전체적인 법지배의 의미를 살필 수 있다. 율법이 성취하지 못한 것을 살펴보면, 첫째 율법은 의와 생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 둘째, 율법은 죄의 악성과 결점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 셋째로, 율법은 이 불완전한 상태 때문에 인간에게 적절한 생활 규칙이 될 수 없다. 율법의 불완전함을 지적한다. 율법은 인간이 허약하기 때문에 율법의 목적이 성취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캠벨은 이 율법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보완하고 완성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한다.

구약의 예언과 율법의 기능을 이야기 하며, 변화산상에서 예수가 본 구약의 인물들, 모세와 엘리야 등을 설명한다. 아벨과 아브라함, 에녹을 들어 변화산에서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거론하며 유대 나라에서 존경받는 예언자 들 중에 특별히 모세와 엘리야가 존경받았으며,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서는 엄격하고도 중요한 누락이 필요했다고 한다. 율법은 모세에 의하여 주어지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오기 때문에, 구약을 넘어서는 분은 예수라는 것이다. 예수는 율법을 완성하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규칙이 될 수 있는가 질문한다.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칙이 될 수 없고,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언급한다. 복음 증거에서 율법이 아닌,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라고 한다. 구약이 아니라 신약에 의하여 선임된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설교자들이 위대한 예언자로부터 받은 가르침에 대하여 매우 정직한 경의를 표하였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모든 나라들로 나아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한다. 그러나 이때 율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율법의 완성을 전파했던 것이다.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가 알파요 오메가 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령이 수 천명을 구원시키는 효과적으로 역할을 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알렉산더 캠벨은 복음과 율법을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설명함으로 복음이 무엇인지 잘 설명한다.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여 율법과 그리스도의 대조적 성격을 이분법으로 해석함으로 복음이 무엇인지 신약 교회의 원형이 무엇인지 소개하고 있다. 율법에 관한 설교는 캠벨의 구약의 대한 견해를 잘 보여주는 고전적 설교이다. 캠벨은 구약은 신약의 복음에서 완성되는 하나의 전례, 한 예시라고 보고 있다. 신약의 복음이 바로 율법을 완성하고, 구약을 완성하는 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4. 월터 스코트 (WALTER SCOTT, 1796-1861)

 

월터 스코트는 환원 운동가 4인(발톤 스톤, 알렉산더 캠벨과 토마스 캠벨) 중에 한 사람으로서 처음에 테네시 내쉬빌에 있는 제자파 그리스도의 교회(the Disciples of Christ Historical Society)에 들어갔다. 환원 운동에 있어서 스코트의 위대한 기여는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자로서, 설교가로서 이었다. 정말로 환원 운동에 있어서 그의 영향은 막대하였다. 알렉산더 캠벨은 환원 운동에 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하면, 월터 스코트는 복음 전도의 열정을 제공하였다. 월터 스코트는 캠벨 부자가 이룩한 단단한 기초위에다 자신의 환원의 건물을 세웠다. 1821, 1822년 여름, 알렉산더 캠벨이 처음으로 스코트랜드 사람, 월터 스코트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의 인격과 추진력은 캠벨과 침례교회가 분리하게 되는, 커다란 요소 중에 하나였다. 월터 스코트는 ‘금(金)신탁의 목소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금 신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스코트는 그의 대변인이었다. 그의 학생들이 교실에 들어갔던 문 위에서 그는 분필을 가지고 큰 글자들로 기록하곤 했다.

누가 독특한 사람인가? 월터 스코트는 모팻(Moffatt), 스코트랜드에서 1796년 10월 31일에 태워났다. 그의 부모는 자녀가 남녀 다섯씩 10명의 자식을 낳았다. 월터는 여섯 째 아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존 스코트는 음악 선생님이었다. 어머니는 깊은 종교심을 가지고 있다. 두 분은 아들들이 장로교 목회자가 되기를 바랬다. 월터는 음악성이 뛰어나서 플루트를 배워서 음악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한 때에 그는 전 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자라고 말했다. 월터 스코트는 1812-1818년 에딘버그(Edinburgh)대학을 다녔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스코트랜드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고, 그는 부모님을 다시 볼 수 없었다. 1821년 양친 부모님이 동시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월터의 아버지가 이웃 마을에 놀러갔다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그의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돌아가셔서 두 분이 동시에 같은 무덤에 묻히게 되었다. 월터가 1818년 7월 미국 뉴욕으로 다시 돌아와 삼촌인 죠지 인즈(George Innes)와 함께 살았다. 26세의 스코트는 롱아일랜드에 있는 고전 아카데미 학술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후에 월터 스코트는 피츠버그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소년을 위한 학교에서 교직을 가지게 되었다. 그 학교의 교장인 조지 포레스터(George Forrester)를 만나서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포레스터는 비정통 장로교인이었다. 그는 스코트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회중 교회를 설립한 할데인 형제들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코트는 포레스터의 성서에 대한 지식에 깊이 감명을 받고 그와 함께 성서를 공부할 것을 결심하였다. 곧이어 그는 세례가 아닌 대리인으로서는 결코 참된 신앙과 속죄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희랍어 성서를 공부한 후에 스코트는 포레스터에게 침례를 베풀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곧이어 스코트는 강단에 올라가 신앙고백을 한 후 포레스터에 의해 침례를 받았다.

스코트가 처음으로 알렉산더를 만난 것은 1820년 겨울이었다. 그는 캠벨의 지적인 능력과 뛰어난 웅변력을 존경하고 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나 학식, 재능, 웅변력 및 창의적 소질에 있어서 거의 비슷하였다. 그들은 자주 함께 성서를 연구하였다. 캠벨이 청중들에게 마르스 힐(Mars Hill)위의 바울을 상기시킬 때면 언제나 그 시간은 스코트에게 있어서 오순절 날의 베드로처럼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스코트의 선교 행위가 없었다면, 캠벨 부자의 업적은 잊혀졌을 것이라고 누군가 진술한 바가 있다. 이처럼 캠벨과 스코트는 각자가 서로의 일을 완성시켜 줄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1821년 스코트는 기독교의 중심 사상이 예수의 메시아 성이라는 그의 생애에 위대한 사상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 “사상의 진리는 곧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로서 예수가 기독교의 신조인 성서의 가장 유일한 본질적 사실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이 사상은 모든 영혼들을 위한 ‘황금의 신탁’이 되는 성경은 오직 유일한 진실의 고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알렉산더 캠벨의 제안으로 마호닝 집회의 복음 전도를 위해 스코트가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스코드는 그 제안을 받아 들여 서부 보호 지역에서 복음 전도를 하여 3년 동안(1828-1830년) 매년 약 천명 정도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스코트는 구원의 방법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그 방법은 환원 운동이 가르치고 있는 교훈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1831년 10월 알렉산더 캠벨은 밀리니얼 하빙거(The Millennial Harbinger)지(誌)에다 스코트의 전도 사역을 소개하였다.

스코트는 복음의 세 가지 모습을 말한다. 그 세 가지 면은 사실과 명령, 약속이다. 즉 믿어야만 하는 사실과 복종해야만 하는 명령, 향유할 수 있는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월터 스코트는 복음을 다섯가지 내용으로 돌려서 강조하였다. 첫째, 마음을 변화시키는 믿음, 둘째, 삶을 변화시키는 회개, 셋째, 자신의 형편을 변화시키는 세례, 넷째, 죄의식을 깨끗게 하는 죄 씻김, 다섯째, 신앙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고 또한 하나님의 본질 속에 동참하도록 하게 하는 성령의 은사 등이다. 스코트는 문서 활동도 활발하게 하여 ‘복음주의자’(The Evangelist, 1832년) 잡지를 발간하고, ‘되찾은 복음’(The Gospel Restored, 1836년)과 ‘메시아와 위대한 논증’(The Messiah or The Great Demonstration, 1857년)을 저작하여 좋은 영향을 끼쳤다. 스코트의 설교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메시아성(Messiahship)이었다. 이는 스코트가 구약의 메시아 사상을 잘 알고 있었고, 구약에 정통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의 신조이며 교회의 기초와 연합의 근거가 3중 직무(선지자, 제사장, 왕중의 왕)을 행한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의 인성을 고백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스코트의 메시아적이며 기독론적 해석, 이에 대한 그의 말과 글의 능력을 겸비한 유창한 주장은 그 어느것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기독교적 사상과 삶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스코트는 이처럼 구약의 3중 직무를 수행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월터 스코트는 환원 운동에 있어서 실천적 차원에서 기여하였다. 존로크, 할데인 형제, 발톤 스톤, 토마스와 알렉산더 캠벨 부자 등과 같은 사상가들이 일찍이 만들어 놓은 근본적인 신학적 결론들을 실천에 옮기는 일을 하였다. 그는 복음주의적인 전도 패턴을 확정시킨 자로서 역할을 감당하였다.

 

 

 

3.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구자

-동석기, 강명석, 이신, 이흥식 전도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선교사에 의해 생성되지 않고 먼저 한국에서 자생한다. 한국 신앙인이 먼저 교회를 세우고 미국 유학하여 미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더 배워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원리와 신약 교회 운동을 발전시켰다. 미국 교회의 장점을 배워서 한국에 다시 적용하는 과정에서 토착화의 작업을 겪게 된다. 그리스도의 교회 선구자이자 선각자인 강명석, 동석기 전도자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지도자로서 신학의 방향을 정하고, 교회 개척을 이끌었다.

이 두 선구자의 인물 연구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역사적으로 누가 선구자인가? 참다운 선구적 역할을 감당한 전도자의 효시를 누구로 볼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의 실마리를 푸는 암시를 주는 글이 있다. 그것이 바로 최초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김세복의 책이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회사’라는 1969년 출간된 책으로, 1930-1968년간의 역사를 담은 것이라는 부제로 담고 있다. 이 책에서 김세복은 제 2 장 그리스도의 교회의 조선 선교라는 부분에서 1절 초기 그리스도의 교회 조선 선교라는 서두에, 강문석(명석)의 사진을 붙이고 개괄적인 역사적 배경과 두 전도자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2절에서는 동석기 전도자에 대하여 다루고, 3절에서는 사진 없이 강명석 씨의 초기 활동이라는 제목으로 목회 활동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강명석 전도자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델이 될 선구자적 인물이 되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 평가를 하고 있는 저자의 다른 의도가 있지 않는가 질문해보려 한다. 혹 개인적인 선입견이나 인간관계의 불편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점도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먼저, 김세복의 글에 주목하고자 한다.

 

“일제 36년간의 민족의 비운은 선물(?) 비 협조와 비 단결에서 온 것으로 일본 군경들의 쇠고랑은 우리를 묶어 놓아 속국으로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당시 조선 땅에 있는 어느 단체라도 총독부에 등록하게 되어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도 하나의 단체라는 명목으로 등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등록된 때는 소화 12년 12월 30일 조선 총독부 관보 제 3188호에 “조선 기독교회”라는 명칭으로 교회대표 동석기 전도자로 등록하게 되었다. 이때에 교회 대표를 누구로 할 것이냐는 문제가 교회 내에 있게 되자 강명석 전도자보다는 년령적으로나 또 모든 면에 선배 되는 동석기 전도자가 되어야 의리적이라고 하여 그분으로 추대 결정하게 되었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두 분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지도력이 팽팽하였다는 것과 강명석 전도자의 리더십이 컸다는 것을 보여 준다. 대표자 문제로 거명될 정도의 인물이었다. 선구자 두 분의 사역과 인생 역정, 사상과 인물됨을 먼저 살펴보고,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세 파로 나뉘어 진 현실을 보면서 연합 운동과 일치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자로서 이신 박사의 사상을 살펴보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복음 전도자의 전통을 수립한 평신도 사역자로 시작하여 전도자․목회자로서 귀감이 된 이흥식 선생에 대하여 다루고자 한다.

1. 동석기의 부권적 지도력과 강명석의 모성애적 카리스마

 

1) 동석기(1881-1970)

 

동석기 전도자는 인생 90세를 살았다. 그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고 격동의 민족사에 수난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일제 시대 초기와 3.1 운동, 일제말기, 해방기, 6.25 동란, 그 이후의 동석기 전도자의 생애로 나누어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다. 그는 종교적인 여정, 긴 여로를 밟게 된다. 감리교 목사에서 그리스도인 교회(Christian Church, 일명 유악기)를 거치고,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일명 무악기)에 자리 잡게 되었다.

동석기 전도자는 1881년 4월 6일 함경도 북청에서 4남 1녀의 형제 중에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7세에 결혼을 하고 19세에 서울에 상경하여 관직에 들어가지만 여의치 않자, 23세에 하와이 노동이민을 가게 된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성실하게 일하다가 주인의 마음에 들어서 유학의 기회를 갖게 된다.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법학을 먼저 공부하게 되었다. 그 후에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1913년 노스웨스턴 갈렛 신학부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는 곧 바로 귀국하여 1913년 원주 지방에서 순회 목회를 시작으로 14년간 감리교 목회를 한다. 그가 1919년 경기 수원 지역 남영 교회에서 목회할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동석기 전도자는 민족 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인 박희도와 친했고, 수원지방의 독립 운동 책임자였던 김세환도 자주 만났다. 그는 구미 소식통의 역할을 하며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러다가 징역 7개월의 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감옥 생활을 한 이후에 그는 목회를 하다가 1927년 두 번째 도미를 하게 된다. 오하이오주에 있는 신시내티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게 되어 다시 침례를 받고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한다. 그가 이 학교에서 졸업 논문으로 쓴 제목은 “미국에서 환원 운동의 초기 역사 연구”이다. 그는 이곳에서 공부 한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귀국준비를 하다가 그리스도의 교회사람 톰슨(T. B. Thompson) 전도자와 홀 콜혼(Hall Calhoun)과 샘패트맨(Sam Pettman)을 만나서 매월 선교비를 약속 받는다. 동석기 전도자는 다음과 같이 그때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때를 회고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것이 주의 섭리라고 믿었다. 이 학교는 우리가 가르치듯이 진리를 성경 말씀 그대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배 시에 악기를 사용하고 있었지요.” 그는 이때 신약성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발견하고 그는 침수 세례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전도 할 것을 결심하였다.

동석기 전도자는 한국에 돌아오자 아내를 먼저 전도하고, 남자 10명과 여자 10명에게 구원의 침례를 거행하였다. 1930년 1월 29일에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국에 세워진다. 그 교회는 동석기 전도자의 고향 동네인 북청에 함전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그 후 서흥리 교회(1931년 5월 14일), 수동 교회(1932년 5월 22일), 임차동 교회(1936년 10월 11일), 명경리 교회, 진산리 교회, 수서리 교회 등이 세워 진다. 그 후에 1945년 9월에 남하하여 내수동 교회를 중심으로 1949년까지 서울에 4개 교회, 부산에 1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교회 개척을 위해 여러 차례 미국에 가서 선교비를 모금한다.

“1949년 교회 개척에 필요한 선교비를 마련하고 한국에 파송될 선교사를 찾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갔다. 이때부터 내쉬빌에 있는 트리니티 레인 교회가 후원 교회가 된다. 미국에서 모금을 위해 활동을 하고 있는 때에 6.25 전쟁이 일어난다. 동석기 전도자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자. 죠지아주 포트 배닝에 있는 미 육군 보병학교에서 훈련받기 위하여 그 곳에 온 한국군 장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이때에 약 160여명의 고급 장교들이 동석기 전도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다.”

동석기 전도자는 대부분의 시간들을 미국에서 교회 개척을 위한 모금 활동에 보낸다. “동석기 전도자는 틈틈이 귀국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개척과 선교사 선교 활동을 지원하다가 1966년 은퇴한 후 1971년 12월 26일 캘리포니아에서 그의 여생을 마감한다.”

 

2) 강명석(1897-1944)

 

강명석 전도자는 47세 짧은 인생을 보냈다. 그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결코 짧지 않은 인생의 족적을 남기었다. 특히 그는 사랑의 삶을 살며 사상과 기독교 철학을 널리 알리며 그리스도의 교회의 대표적 지성으로서 문필 활동을 하였다. 그의 활동들은 김익진의 ‘강명석과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글에 잘 나타나고 있다.

“강명석은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고, 일본 관서 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했다. 한편 방학 때는 한국에 돌아와 버림받은 나병 환자 촌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예배를 주관하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는 사역을 하는 일종의 현장 목회 실습을 했다. 당시만 해도 나병이 유전병과 전염병이라는 확실한 의학적 연구가 없어 강명석은 약혼한 상태에서 개인적으로는 많은 갈등을 하고 있었음이 ‘감사, 고백, 호소’라는 글에 나타나 있다.”

강명석은 나병 환자를 위하여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위대한 사랑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대표적 인물로 꼽힐 수 있는 점이 바로 이 대목이다.

두 번째, 사상가로서 면모는 기독 신보와 청년이라는 잡지에서 보여준다. 그는 이 곳에 많은 글을 기고하고 있는데, ‘톨스토이와 간디의 종교 사상에 대하야’ 논하는 대목에는 그러한 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또 신학자로서 모습도 ‘신약전서 개론과 팔레스틴의 약사’라는 글에서 보여 준다. 목회의 글을 써서 교회에 유익을 주고, 경제사상에 대하여 논하며, 한국 지성인들을 위한 교훈도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강명석의 문필 활동은 그의 정신 세계가 무한대에 가 있음을 보여 준다.

강명석은 1931년 3월 2일 도미하여 어렵게 미국에 입국하여 밴더빌트 대학에서 ‘현대 목회자의 직능’이라는 제목으로 1935년 6월 3일 신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 후 그리스도의 교회에 참석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귀국을 늦춰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 운동의 교육기관인 프리드 하드만 대학에서 1년간 공부를 한 후 한국에 돌아오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영향을 받고, 신약 교회 운동과 전도인의 삶에 대한 깊은 각성을 한다. 그리고 기독 신보에 강문석이라는 이름으로 ‘전도인의 생활과 그의 일’라는 제목으로 기고를 하고, 또한 청년이라는 잡지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사상을 전한다. 그는 활발한 문필 활동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개척의 역사를 시작한다. “전통과 습관적 교리에 매여 있는 교파들은 새로운 환원 운동적인 신약 운동에 냉대를 보였으나 우리 주님은 12명의 제자로 세계를 정복하시고 그의 후세의 제자인 강문석 형제에게도 그러한 역사가 임하시여 울산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되여 다시 경주로 올라가 경주교회를 세우고 경북 월성군에 있는 동방교회를 울산군 수동면 반천에 있는 진양반성 교회를 세우는데 역사적인 성공을 보게 되었다.

1937년 강문석 형제는 좀 더 활발한 복음 선교를 위해 서울로 올라와 지금의 내수동 106번지 그리스도의 교회 옆에 있는 양옥집을 얻어 살림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교회로서 발족을 보게 된 것은 1937년 3월 6일 신당정에서 시작하였으며 다시 동교정에 5월 1일에 교회를 세웠으며 동년 10월 30일에 감리교파에 속해 있는 원익상 목사가 맡고 있던 대현정 예배당을 구입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곧 발걸음을 인천으로 향해 인천 송림동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이르렀다. 그가 가는 곳마다 진리가 퍼졌으며 교회가 세워져 그야말로 초대 사도행전에 나타난 것과 같은 교회가 두루 밝은 빛이 되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동석기 전도자와 강명석 전도자의 인생과 사역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선구자로서의 면모들을 살펴보았다. 두 분의 선구자적 역할을 평가해보자. 누가 더 위대한 가라는 질문보다는 그 분들의 사역과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따져보는 것이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보겠다. 아버지의 역할로서 동석기 전도자는 아브라함의 순례 여정처럼 함경도의 북청에서부터 서울 내수동으로, 하와이에서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로, 알라바마주 몬트고메리에서 테니시주 내쉬빌로, 노년에는 80세에 재혼을 하여 캘리포니아 양노원에서 여생을 보내는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내며 교회와 선교의 사람으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창립하고 만들어간 개척자요 선구자이었다. 이에 비해 강명석(문석) 전도자는 어머니의 역할을 한 선구자이었다. 결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대표적 인물로 그를 내세워도 손색이 없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는 사랑의 사도로서 나환자들과 함께 하였던 성자이었고, 한국의 대표적 지성으로서 필체를 기독신보와 청년지에서 발휘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 개척자로서 많은 교회를 세우며 경상도에서 서울로, 인천으로 옮겨 다니는 전도자의 생애를 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한 쌍을 이뤄 소개해야 할 대등한 선구자라고 보는 것이, 후세의 역사 평가자에게 올바른 이해를 줄 것이다.

그래야 역사의 두면, 이중적인 측면을 보고 균형 잡힌 역사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편적인 예를 들면 미국에 대한 두 선구자의 입장은 상이한 것 같다. 강명석은 미국을 미국(米國)이라고 표기하며 그렇게 아름다운 나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미국에 유학 가려다가 신체 검사에서 거부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반면 동석기 전도자는 미국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며 그곳에서 뼈를 묻을 정도로 감사한 나라(하와이 이민에서부터 유학, 모금 등으로)로 항상 여겨지는 미국(美國)이었다.

이제 두 분의 생애와 역할을 정리해보자. 두 선구자의 인생 여정이 비슷한 면(장로교, 감리교에서 그리스도인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 미국 유학과 선교 모금)이 많지만 또한 다른 면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한 쪽의 선구적 역할을 논하던 초장기의 논의를 벗어나 이제는 두 분의 역사적 업적을 공정하게 평가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로, 똑같이 둘이자 하나인 선구자로서 평가를 할 때 후대의 후배들은 두 분의 장점을 본받아 균형 잡힌 그리스도의 교회 앞날을 만들어 갈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러한 이해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에 새 차원을 열며 교회의 평화와 공존, 번영을 위한 유익을 주는 지평을 열게 할 것이다.

 

2. 이신의 예술적 전위 신학과 이흥식의 열정적인 복음전도자의 화신

 

초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을 주도한 선구자로서, 이신 박사는 동석기, 강명석, 성낙소(1890-1964)를 든다. 물론 잠간 최상현를 언급하고 있지만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 김익진 교수는 최상현(1891-1950 한국전쟁, 행방불명)목사에 대하여 문필 활동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분 들 외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학자와 전도자 두 분, 이신과 이흥식을 살핌으로 한국 교회에 자랑할 만한 신학자와 목회자 상을 정립하고, 미래의 역사를 이끌어 나갈 새 인물을 기대하고자 한다.

 

1) 이신(1927-1981)

 

이신 박사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 운동의 전개’라는 글에서 자신의 환원 운동으로 전환하게 된 배경을 선구자 세 명(동석기, 강명석, 성낙소)에서 찾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에로의 환원이 모든 인간적인 종파와 교권적 권위를 버리고, 본래적이고 순수한 것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에 크게 감명을 받는다. 이 초대 교회 환원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현 그리스도 대학교)의 지도자 동석기와 강명석, 유악기 그리스도의 교회(현 서울 기독대학교) 지도자 성낙소를 만나게 된 것이 큰 계기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신은 토착화 신학을 주창하여 미국의 환원 운동을 한국의 현실에서 다시 해석하여 복음을 적용해야 함을 강조한 신학자였다. 그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 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나아갈 바를 천명하게 된다. “우리는 한국인의 자각으로 이해하는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형태에 대해서 외국인의 독자적 신앙과 교회에 대해서 어떤 외국인의 독자적 신앙이나 교회 형태가 한국인의 신앙적 결단을 무시하고 간섭할 수 없음을 믿는다. 그러나 외국인의 독자적 신앙과 교회에 대해서 성서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이를 존중하며 또 우호적이어 한다고 믿는다.”

그는 또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 분리하고 분열할 것이 아니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 정신을 따라 연합하고 협력할 것을 소원하였다. 부여에서 사역(1955년)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환원 운동 지도자들과 성령 이해에 대한 차이를 느끼고, 한국에 들어와서 1974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 회장을 하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을 발표하고, 한국 토착화 신학과 연합 정신을 강조하였다. 그는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개교회주의와 메마른 형식주의에 반대하고 ‘유기체적 교회론’과 ‘성령 중심의 신학’을 추구한 그 나름대로 기독교 ‘한국 토착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은선․이경은 이신 박사를 ‘고독과 저항의 신학자’라고 명명한다. 이신은 끝까지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 초대 교회를 향한 참 교회 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어려운 좁은 길로 향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았던 신학자였다. 그는 화가이자 예술 신학자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5년의 유학, 1967-1971년, 밴더빌트 대학원 박사학위)에 많은 그림 창작도 할 수 있었고, 여러 번의 개인 전람회를 통해서 학비와 생활비도 조달하면서 커다란 경제적인 위협 없이 창조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때 그린 그림들이 그의 귀국 후의 분실로 오늘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귀국 후 어려운 상황에서 그린 그림들과 도미 이전의 작품들이 남아 있다.”

그는 당대의 한국 신학자들(서광선, 윤성범, 변선환)과 교류하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 세계를 펼쳐나갔다. 니콜라이 베르자이예프의 사상을 소개하였고, 카리스마적 신학을 통하여 독창적인 성령의 신학을 발표하였다. 특히 1981년, 그리스도 신학대학교 1학년인 필자가 신약 개론 수업 시간에 들어가 수업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갖을 수 있었다. 그 해 여름 방학 때 헬라어를 특별히 잘 할 수 있는 암기법을 전수하기 위해 학생 20명을 데리고 논산으로 특강하러 내려가서, 거기서 숙식을 같이하며 열강을 했던 제자 사랑의 정신이 남달랐던 교수이었다. 전임 교수가 아니었지만 제자를 사랑하셔서 각 대학에서 가르치던 제자들을 모아 여름 어학 강좌을 열어 마지막 강의를 하셨던 것이다. 그 후 그 강의를 듣고 온 윤선배가 아침에 헬라어 강의를 하여 필자를 비롯한 길성남 교수(고신대학원 신약학교수), 김환중, 송계성 등 여러 명에게 이신 박사의 강의법을 전수해주었던 것이다. 그는 이처럼 진정한 스승으로서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슐리어리즘과 영의 신학, 영의 목소리를 붙잡으려는 계시의 영역인 영의 경지를 추구하는 신학이다. 성령의 신학, 카리스마적 신학은 영의 신학으로서 ‘하나님의 영과 적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글을 통하여 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신학적 방법이다. 그의 신학의 중심에는 묵시문학적 사상이 있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연합과 일치운동의 이상향을 가르쳐 주고, 한국적 신학과 전위 예술 신학을 보여주신 줏대 있고 멋있는 도인의 세계를 보여 주신, 예수의 삶이 진정 무엇이었냐는 것을 깨닫고 묵시문학적 지평을 제시해주는, 스승으로서 이신 박사의 지도력은 다시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2) 이흥식

 

“1947년 일제에 의해서 축출되었던 선교사 존 체이스가 재입국하였고, 1949년 3월 5일에는 존 힐 선교사가 재입국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는 다시 문을 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송월동에서 계속되었다. 그동안 앞서 말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 운동에 호응한 사람들이 이 신학교에 들어와 공부하였다. 당대의 교수로는 존 체이스, 존 힐 선교사, 성낙소, 최상현, 신현창, 서병렬, 목사들이었으며, 학생들 가운데 후일에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김은석, 구광서, 이흥식(李興植), 정희건, 함창현, 김광수, 한현태, 이종만, 김동환, 김재건, 김봉섭, 조국형, 최병권, 성수경, 강병천 등이었다. 해방후 짧은 기간이었으나 이들 신학생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각지에 나가서 전도하여 여러 곳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정희건 전도자와 이흥식 전도자가 여기서 공부한 것 같다. 정히건 전도자는 성낙소 목사에게 영향을 받아 유악기 그리스도의 교회에 갔다가 성경 통신원의 빌램지를 만나고 나서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 서대문 교회를 개척한다.

이흥식 전도자는 동석기 전도자에게 영향을 받아 복음 전도자로서 인생을 살아간다. 함남 북청군 덕성면 시흥리 교회에 출석하다가 1947년 월남하였다.

“동석기 전도자는 1930년 11월 그의 고향 함경도 북청을 중심으로 이곡면 초리에 함전 교회, 덕흥면 시흥리 교회, 수동리 교회, 하거서면 임자동 교회, 수서리교회, 맹경리 교회, 진산리 교회 등 7개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작하였다.”

“그(동석기)에게 영향을 받아 환원 운동에 몸담고 있는 인물로는 동충모, 이흥식, 동주급, 이영진 등이 있는데 이들은 해방 후 한국 교회의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동석기 전도자와 동향인으로서 그와 교류하다가 함께 내수동 교회를 개척하고 단신으로 남하하여 집사 직을 잘 수행하며 바울처럼 평생 독신의 은사를 가지고 전도자의 생애를 살았다.

이흥식 형제는 함남 북청군 덕성면 그리스도의 교회에 나가고 계시다가 1947년 월남하였다. 그는 내수동 교회에 적을 두고 집사로 충실하게 교회를 돌보았다. 그러면서도 스테반과 같이 항상 전도열에 불타고 한 사람이라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기회가 생기는 대로 전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내수동 교회에서 나와 청량리 교회를 개척하게 된다. 그러다가 6․25 동란으로 부산에 피난 내려가게 되고, 거기서 영주동에 현 부산 중앙 교회를 개척하게 되고, 다시 서울에 올라가서 청량리 교회 건축을 하게 된다. 그 후에 내수동 교회를 사임한 박선흠 전도자가 청량리 교회 담임(1957년 12월)을 맡게 되고, 다시 1958년 4월에 홍제동 교회를 개척하게 된다. 그 후에도 번동 교회 등 여러 교회를 개척하는 전도자로서 사명을 감당한다. 청량리 교회에서는 여성 지도자 신옥녀 전도자와 함께 동역하게 된다. 그녀는 신사 참배를 반대하다가 수년간 옥고를 치른다. 1951년 피난길부산 용두산에서 이흥식 전도자를 만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還元)하였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여전도회를 이끌며 여성 사역자로서 척박한 이 땅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어려운 여성의 역할 한계에서도 진정한 여성 전도자의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또한 그녀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협력 사역자의 모범이 되었다. 이흥식․신옥녀, 두 분의 영적 지도자로서 복음 전도에만 전력하며 교인을 사랑하고 교회를 키우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일제시대와 해방 전후, 6․25 동란, 피난 시절 등을 거치며 민족의 혼란기에 순수한 신앙을 지키며 복음 전도자로서 삶을 살아갔던 성자(聖者) 바울의 생애였다.

이흥식 전도자의 모 교회는 청량리 교회이었다. 북청 교회에서 시작된 신앙생활이 내수동에서, 피난 시절 부산 영주동에서 교회 개척을 하지만 청량리 교회는 항상 그의 교회 신앙생활의 중심이었다. 청량리 교회 출발이 1948년 5월경에 내수동 교회 출신인 장정협 씨 가정,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시작하게 된다. 장정협 씨가 청량리로 이사하면서 동석기 씨의 사재에서 나온 10만환으로 청량리 1동 초가집을 사게 된다. 이것이 청량리 교회의 전신이 된다. 1950년 6․25 전란으로 부산 영주동으로 피난가게 되고, 거기서 강순명 전도자를 만나 감화를 주어 전남 광주 교회를 개척하도록 그를 독려한다. 이 일에 동석기 전도자가 1955년 10월에 크게 기여한다. 대구에도 교회가 설 수 있도록 임봉수 형제를 세워 동석기 전도자의 후원금에 힘입어 1953년 1월에 가옥을 사서 내부를 수리해 교회를 세운다. 피난 시절 부산 영주동 그리스도의 교회 문을 열게 되었다. 거기서 김관평 형제를 전도하고 1952년 첫 예배를 드리며 부산 서면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게 하고, 1958년 8월에 교회 건축을 하여 완공을 하게 된다.

이흥식 전도자는 피난 생활이 끝나고 다시 서울이 수복되자 1954년 영주동 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이 전도자는 교회 건축을 한다. 청량리 산 1 번지의 372평의 땅을 임대하여 동석기씨의 100만환과 교인들의 연보 150만환으로 61평의 건물을 1955년 11월에 완공하였다. 그 때의 교회 건축 상황을 교회 약사에서 잘 소개하고 있다.

“교우들은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약 150만환의 연보를 거출했고 동석기씨가 2000불 당시 금액 100만환을 사재에서 기부하여 그럭저럭 61평이나 되는 건물은 1955년 11월 27일에 완공되었다. 이 건물의 완성과 더불어 특히, 예배당 건축에 신옥녀 자매는145일간, 김순녀 자매는 127일간, 조종순 자매는 75일간을 봉사했으며 평균 45일 간씩 피와 땀을 흘려 성전을 지었다. 새 건물에서 예배의 출발을 보게 됐다.

청량리 교회 탄생은 실로 초대 교회와 같이 교우의 방 한 구석에서 시작하여 천막으로 또한 벽돌집으로 그 면모가 변화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큰 교회를 이루고 있고 건물도 적지 않은 것이다. 1957년 12월 박선흠 전도자가 내수동을 사임하면서 곧 청량리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흥식 전도자님은 홍제동 교회 개척에 착수 했던 것이다. 1958년 4월 7,8명의 교우를 얻어 천막 교회를 세우고 동년 8월 경에 홍제동 교회 담임 전도자로 전임했다. 당시 청량리 교회는 박선흠 전도자의 담임으로 약 150명이 출석하고 있으며 200명 주일학교 학생과 약 40명의 중고등학생이 적을 두고 있었다. 이제 바라기는 불타던 처음의 신앙과 처음 사랑을 잃지 말고 배전의 부흥이 있을 것이 기대된다.”

그 후 이흥식 전도자는 화계동 교회를 1963년에 개척한다. 1963년 5월 7일에 성북구 화계동 교회는 이흥식 전도사님과 리철선 선교사님이 시작한 교회라고 월간 ‘그리스도의 교회’지는 소개한다. 뒤에 김진건 형제가 시무하여 교회가 부흥하였다고 전한다. 이흥식 전도자는 리철선 선교사를 도와 그리스도의 교회 월간 신앙 잡지 출간을 돕기도 한다. 후원자가 무궁화 회원, 장미 회원, 백합 회원으로 나뉘는데 그는 백합 회원으로 후원을 한다. 1965년 2월에는 대전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경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내려가, 대전시 선화동 100의 5에 전세를 얻어 예배를 드리다가 이철선, 박규헌 전도자의 협조를 얻어 이층 전세로 옮겨갔다. 교회 발전의 기틀을 세우고 북아현 교회에 계시던 심희선 형제를 목회자로 세우게 된다.

이흥식 전도자는 동석기 전도자를 만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에 동역자로서 위대한 초기 사역을 감당한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초석은 이 두 사람의 노고와 사역 위에 놓여 진 것이다. 오직 교회와 복음 전도, 교회 건축에 생애를 불살랐던 인물이 이흥식 전도자였다. 거기에 신사 참배 거부의 불굴의 신앙을 가졌던 신옥녀 전도자와 동역하고, 김진건 씨의 폐병을 고치게 하고, 교회를 개척하도록 지도하며 그리스도의 교회 교리를 기록하게 하기도 하였다. 맨발의 전도자, 최춘선 전도자와 친한 친구가 되어, 그가 전도하다가 찾아오면 김교신, 우찌무라 간조, 다미안 신부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 전도자의 삶이었다. 바울과 같이 복음 전도자의 생애를 살았던 이흥식, 최춘선을 기억하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 대부로서 그를 좇아가는 대열이 있기를 바란다.

맺는 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된 지 어언 76년이 되었다. 1930년 11월, 북청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때부터 계산하면. 아니 동석기 전도자의 출생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시작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면 1881년 4월 6일,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는 126년이 된다. 짧지 않은 역사이다. 그런데 교회 부흥은 답보상태이다. 김세복의 교회사 책(1930-1968년간의 역사 기록, 1969년 발간)에 의하면, 전국에 교회가 38개 이다. 2006년 교역자 수첩에 기록된 교회는 110 교회이다. 80년간 교회 72개가 늘어났다는 결과이다. 너무도 양적인 성장이 없었다. 김세복 씨가 쓴 책과 같은 역사책도 그간 발간되지 않았다. 이제 반성하고 회개하여, 역사를 다시 정리하여 교회의 새 도약을 위해 준비해야 할 때이다. 이 논문에서는 동석기․강명석의 생애와 사상이 선구적 역할이었다는 것을 살폈다. 동석기는 아브라함과 같이 여러 곳을 순례하며 후대의 신앙인들이 걸어야 할 여정을 준비하였다. 그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초석을 놓기 위해 미국의 유악기․무악기 신학교를 거치며 미국의 선교 후원 여건을 선용하여 한국에 연결하였다. 실로 부권(父權)적 지도력을 가지고 활동해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아버지라 칭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강명석은 기독교 선교 초기에 모든 기독교 지성인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사상을 펼치며 깊은 기독교 철학으로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병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함께 삶과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모성애적 카라스마를 갖춘 전도자로서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 두 분의 선구적 역할에 더하여 이신 박사의 신학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평을 더 넓혀 놓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연합 정신(에큐메니칼)을 가질 것을 호소하였다. 한국적 토착화 신학으로 한국인의 심성과 문화에 맞는 기독교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예술적 신학과 묵시적 사상으로 시대의 혼합주의와 종말론적 상황을 직시하고 고독하게 구도자의 삶을 살아감으로서, 기독교인들이 좁은 문으로 가야함을 그의 삶을 통하여 가르쳐 주었다. 이흥식 전도자는 오직 복음에 대한 열정 하나만을 추구하며 교회 건축을 직접하며 살았던 이 시대의 바울이었다. 북한에 두고 온 부인을 생각하며 독신으로 평생을 지내면서 오직 교회와 성도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살았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대부(代父)로서 그의 손길이 한국 교회와 신학교, 각 기관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복음의 열정을 불사르고 갔던 선생으로서 후대에 사표(師表)가 되었다. 이 네 분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좋은 모범이 되어 이제 대를 이을 후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새로운 세기를 열어 줄 주의 종을 기다리며 이 글을 마친다.

 

 

5.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 선구자와 구약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국 전래는 1930년 11월 8일 동석기 전도자(1881. 4. 6-1971. 12. 26)가 한국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테네시주 내쉬빌에 있는 웨이블리 벨몬트 그리스도의 교회와 12번가 그리스도의 교회,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의 카토마 가(街)의 그리스도의 교회 등이 중심에 되었고 여러 형제들이 선교비를 보조함으로 한국에서 교회 개척을 시작한다. 동석기 전도자는 고향 함경도 북청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7개를 개척하였다. 한국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시작 때에 세례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조선 사람 20명이 침수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한국인 동석기 전도자에 의해서 자생적으로 시작한 자주성이 있다.

 

1. 강명석과 구약

 

강명석은 성경에 표현된 경제 사상(1), 신약에 표현된 경제 사상이라는 글 다음으로, 성경에 표현된 경제 사상(2), 부제로 구약에 표현된 경제사상이라는 글을 『진생』1927년 9월호에 발표하였다. 신약에서 복음에 표현된 경제 사상과 역사 편과 서적 중에 나타난 경제사상을 다루고, 구약에서는 고리대금금지법과 개인주의의 발달과 예언자의 교훈을 다룬다.

 

3. 고리대금금지법

 

“고리대금업자는 일종의 공인 도적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원시시대에 있어서 공평한 사회제도를 불공평한 사회제도로 만든 해독물의 일종은 고리대금업 제도이다. 여기 쓴 고리대금업자 중에는 전당업자도 포함되어 있다. 사유재산제도가 성립된 이상에는 고리대금업 제도가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런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사유재산제도의 산물인 고리대금업은 용인할 수 없는 죄악이라는 말도 조금도 틀림없는 당연한 말일 것이다. 이러한 해독물인 고리대금업의 제도는 옛날 히브리 민족 가운데도 있었다. 그래서 소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무산자들이 가진 약간의 금전과 의복 기타 물품들을 약탈하여 수많은 빈민을 산출하였다. 전 호에 논술한바와 같이(신약에 표현된 경제 사상) 빈민과 노예 보호법등을 제정한 당시 집권자들은 민간에 이러한 놀랄만한 제도가 산출되는 되는 것을 그대로 시인하여 주지 않았다. 공평하지 못한 제도는 언제 까지던지 절대로 배척하는 원시적 법률에 따라서 고리 대금업 전당업 같은 제도는 엄중하게 금지하였다. 따라서 비단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고리 이(利)받는 것만 엄금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채무자의 계(빚) 대하여서는 가혹한 대유를 하지 말라고 훈령하는 동시에 극히 빈곤한 자의 계는 자선적 대부를 하여 주라는 명령까지 광포(廣布)하였다.

 

너희는 너희 형제에게 돈이나 양식이나 아무것 이던지 취리하지 말라(신23장19절)

무릇 네 이웃에게 꾸어줄 때에 네가 그 집에 들어가서 전집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섰고 네게 꾸는 자 전집물을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여든 너는 전집물을 가지고 가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신24장 10-12절)

나의 백성 너희 중에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 임이니라(출22장25-27절)

네가 형제의 이식(利息)을 취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게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레25장 36, 37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 하리이다(시15편 5절)

 

이상에 인용한 구절은 당시의 사회지도자들의 일치적 공동의 정신이 얼마나 풍부하였든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동시에 사유재산제가 급속하게도 발달되어 기시(基時)에 벌써 사회의 불평제도가 속출된 것도 우리에게 잘 말하여준다.”

강명석 전도자는 고리대금업에 대한 성서의 지적을 말하며 구약 시대에 일치적 공동체, 공산(共産), 빈부가 없는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추구하는 성서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강명석은 자신이 살던 시대의 공산주의 사상에 응답하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나타내며, 자본주의 모순과 사유재산의 폐해를 예언자 시각에서 날카롭게 지적하는 면모를 볼 수 있다. 김익진 교수는 강명석의 경제 사상을 연구하여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강명석의 사상을 언급한다.

 

4. 개인주의의 발달과 예언자의 교훈

 

과거에 있어서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서 원시적 공산 제도를 그대로 보존하여 주지 않았다. 거기 따라서 옛날 히브리 민족 가운데서도 이상에 쓴 빈민과 노예 보호법 이라 던지 고리대금업 금지법 등은 영구히 시행치 못하였다. 공평한 사회를 영속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든 모세와 여호수아와 기타 영웅들이 없어진 동시에 사취와 안락의 생활을 낙으로 삼든 솔로몬 같은 인물이 당시사회의 지도자 된 이후로는 사회주의적 제도가 소멸이 되는 반면으로 개인주의적 제도가 발달이 되었다. 물론 그것은 이론상으로 보아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솔로몬의 취한 호사스러운 생활은 실로 당시 사회에 있어서 기(基)이상(以上) 없는 해독물이었다. 멀고 먼 레바논에 있는 재목을 예루살렘까지 운반(運搬)을 식혀다가 소(小)귀인(貴人)의 소용을 위하야 광장(廣壯)한 건축물을 세운일등은 임의 빈부의 간격이 얼마나 심하여 졌는가를 잘 가르쳐 준다. 실로 솔로몬 시대의 외부적 광채는 그 내부에 있어서 불공평한 제도가 여지없이 발달된 것을 잘 말하여 준다. 그뿐만 아니라 순전히 농업만을 경영하든 시대가 지나고 상업이 점차로 발달되는 때 따라서 빈부의 간격은 더욱 심하여지는 동시에 사회는 더욱 불공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전 시대에 있어서 히브리 민족의 자랑거리이든 사회주의적 제도는 소멸이되는 동시에 대다수의 민중은 노예적 경애(境涯)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시대가 예언자를 산출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겠지 만은 기원전8, 9세기에 일어난 예언자들은 당시 불공평한 무질서한 사회제도를 볼 때에 그대로 묵과할 수는 없었다. 사취를 다하는 소수의 유산자가 있는 반면으로 다수의 무산자가 속출하는 참혹한 광경을 볼 때에 그대로 묵과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예언자들은 유산자들이 무리하게 폭리를 취하는 것을 폭로시켜서 훈계하는 동시에 빈민의 속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회 개량(改良)의 급선무를 절규(絶叫)하였다.

“빚진 자의 전당을 도로 주며 남의 물건을 겁탈치 아니하며 주린 자를 먹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꾸이고 이를 취치 아니하면... ... 의인이라 그 생명을 보존하려니와... 궁자(窮者)를 학대하거나 남의 물건을 약탈하거나 빚진 자의 전당을 돌려주지 아니하거나... 이를 탐하여 꾸이면 더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니 살겠느냐 자기 죄로 죽고 살지 못하리라”(에스겔 18장 7-13절)

“백성의 지아비와 지어미가 크게 부르짖어 그 동족 유대인을 원망하되 혹은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 번 자녀로 곡식을 받고야 먹었다하며 혹은 말하기를 기근이 심하므로 우리의 밭과 포도주와 집을 전당하여 곡식을 얻어 먹었다하며 혹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을 전당하여 돈을 얻어서 세금을 들였노라 우리의 옴은 동족의 옴과 같고 우리의 자녀는 동족의 자녀와 다름이 없거늘 이제 우리 자녀 중에 노비된 자가 없으나 속량할 힘이 없고 남은 자녀로 노비로 골겠으며 밭과 포도원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하며 부르짖는 지라 내가 듣고 대노(大怒)하여 중심에 계획하고 귀족과 민장을 책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동족에게 취리를 하느냐 하고 대회를 열고 저희를 공격하여 가로되 이방에의 동족을 동족에게 팔려느냐 하니 저희가 묵(黙)무언(無言)이어늘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불의(不義)하도다...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나와 나의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곡식을 백성에게 취하여 주나니 우리가 취리함이 불가한지라 우리가 오늘날 그 밭과 도원원 감람원과 집과 곡식과 새 술과 기름 다 받은 돈과 그 변리마저 돌려보냄이 마땅하니라 (느헤미야 5장 1-11절)”

“욕심을 참고 주린 자에게 주며 괴로운 자를 평안케 하라 네 암묵이 변하여 정오같이 명(明)하며...(이사야 58장 10절)”

 

이상에 인용한 몇 구절을 보더라도 당시 예언자들이 그러한 해독물을 없이하기 위하여 얼마나 분노한 것과 그러한 해독물을 없이 하기 위하여 얼마나 열열하게 교훈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실로 예언자들은 열광적으로 공평된 사회를 요구한 인물들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불란서의 레난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을 평하여 이렇게 지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우리가 금일 사회주의자 또는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과 동일형의 열열한 정론가이었다”라고.

구약의 예언자들이 사회의 정의를 외치고, 부정을 고발하는 사람이었던 것을 보여준다. 강명석은 솔로몬 시대의 부정부패를 보고 그 당시 시대의 불공평한 제도를 고발하고 있다. 사회주의적 평등 사회를 추구하는 히브리적 민족 평등 공동체가 와해 된 왕국시대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무질서한 사회제도와 착취와 억압이 있는 사회 불공평 상태를 보이며 하나님의 의를 보여준 자가 바로 예언자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전당과 저당 잡힌 것, 전집이 된 것, 빚을 갚기 위해 노예로 자녀를 볼모 잡힌 것 등이 부당하다고 예언자들은 고발하고 있는 것을 소개하며 이스라엘 사회가 평등 사회이며, 사회주의적 공동체임을 보여준다. 구약은 정의를 외치는 예언자가 중심이 된 경전이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구약의 경제관, 경제 사상은 바로 사회주의 공동체 이념이 표출 된 것임을 가르쳐 준다. 예언자 사상과 구약의 예언자에 능통해 있으며, 구약 역사에 해박한 강명석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대목이다.

 

2. 이신과 구약

 

이신의 박사학위 논문이 ‘전위 묵시 문학 형성’이다. 그의 논문은 신구약 중간사에 대한 역사 신학적 주제이지만 구약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구약의 묵시 문학은 예언 문학의 후반기에 태동하는 것으로서 예언문학과 반대의 성격을 가진다. 예언 문학이 열려진 미래로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반면에, 묵시 문학은 닫혀진 미래로서 극한 종말론적 상황을 보여준다. 구약의 다니엘서나 스가랴서9-14장 등이다. 이신 박사가 구약의 묵시 문학을 연구하려는 의도와 목적은 원시 기독교 신학의 배경을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 이신은 논문의 서론 초두에서 케제만의 명제, 묵시문학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모체였다 라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논문을 시작한다. 이신 박사가 왜 묵시문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을까. 아마도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어둡고 암울한 묵시적 상황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일제 36년 식민 통치 시대, 6 · 25 동란,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은 묵시문학적 상황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하면서 박사 논문을 묵시 문학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종교 현상학적 방법으로 묵시문학적 의식과 그 지향점을 고찰하고자 한다. 묵시문학적 현상의 자율적 본질이 무엇인가 밝히고, 묵시문학적 현상을 기독교 선언과 특히 메시아와 그의 왕국이라는 원형적 상(像)과 연관시키려 한다. 이 연구에서 묵시 문학의 특성과 기원, 심리학적 용어를 살펴보고 현상학적 판단 중지가 특징적인 전제가 된다는 것을 연구하고, 신구약 중간기의 문학적 유산과 종교적 신념들과 관련한 창조적 소수파를 논의한다. 수직적 역사관을 다룬다. 묵시문학자들의 역사 의식과 초월 의식을 다루고, 현대의 전위파(avant-garde) 운동이 묵시문학과 연장선상에 들어오는 것을 연구한다. 환상 의식의 지향점과 역사에 대한 부정과 전환의 변증법적 운동을 고찰한다. 메시아와 메시아 왕국 연구를 통해 메시아 왕국이 평화와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우주적 공동체로 파악한다.

이신은 묵시 문학의 모호성을 다루는 논문 1장에서 프로스트의 구약 묵시 문학(Old Testament Apocalyptic)이라는 저서를 소개한다. 그 책에서 묵시 문학이 예언서와 아주 다른 양식의 저작이라고 말한다. 묵시 문학의 다서 가지 성격을 소개한다. 묵시 문학의 역사적 환경은 바빌론 포로나 마카비 시대 초기에, 역사적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환면과 박해의 콤플렉스에서 나온 현시대에 대한 극도의 믿음 결핍과 소망 결핍이다. 두 번째 역사에 대한 호소, 출애굽과 같은 구출 행위를 상기하거나, 세상의 죄악과 의인의 불행을 보여주려고 재난을 강조한다. 세 번째 민족주의. 네 번째 익명과 가명, 자기 세대에게 심각하게 할 말이 있었던 사람들은 고대의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택해서 그 이름으로 그리고 그 인물의 시대를 배경삼아 글을 쓴다. 다섯 번째 신화적 요소, 여섯 번째 상징주의(symbolism) 등이다. 묵시 문학이 무엇이냐는 논의를 먼저 하면서 이신은 구약의 문헌을 이해하는 작업을 학문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특히 묵시 문학에 대한 구약학의 대가인 폰라드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구약학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살필 수 있다. “폰라드에 의하면, 묵시문학에는 네 가지로 구별되는 역사 이해의 양상들이 그 윤곽을 드러낸다고 한다. 우선 묵시문학적 역사관은 ‘극도로 결정론적이다.’ 묵시문학에서는 역사적 사건들이 ‘하나의 연결된 실재로서 나타나며’ 그 전체의 과정이 태초로부터 예정된 것이다. 둘째, 예언자들은 물론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도 있지만 대개 고립된 역사적 사건들을 말하는데, 묵시문학은 전체의 역사적 과정을 함께 묶어서 그것을 개념적으로 객관화시키려고 한다. 셋째의 차이점은 묵시문학적 역사관은 비관론적이고 역사를 심연과 대파국으로 이끌어 간다. 넷째, 묵시문학에서 나타나는 뚜렷히 다른 역사 이해는 예언자들이 예언을 할 때는 언제나 그들 자신의 시점이나 시대에 서 있는 그들의 관점을 공개적으로 택하고 그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나 미래를 고찰하지만, 묵시문학자들은 역사를 종말(eschaton)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한다는 것이다. 이신 박사는 당대에 구약 신학의 권위자의 책을 인용하며 학문적 논의를 하면서 묵시 문학의 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쿰란 문서, 하시딤 운동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묵시문학적 사고와 의식에 대하여 철학적 방법과 심리학적 방법, 문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한다. 짜라투스트라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솔제니친의 소설등을 인용하고 있고, 구약의 외경 문헌들, 솔로몬의 시편, 바룩, 에녹서, 12족장의 언약서, 제 4에스라서, 아담과 이브의 책, 모세의 승천서, 희년서 등을 텍스트로 연구하여 묵시문학의 의식을 연구한다.

묵시 문학과 전위 문학의 관계가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묵시 문학자가 누군가 질문한다. 그는 묵시문학자가 지적인 엘리트라고 주장한다. 카리스마적 지식의 지적인 엘리트라고 한다. 현인이며 에녹과 같이 참 지혜의 유일한 대표자, 지극힌 높으신 이의 기술자라고 주장한다. 스피노자의 의미에서는 예언자적인 환상가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묵시문학자는 번민가이다. 전위 사상가들은 그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인해 사회에서 고통을 당한다. 미래지향적 환상으로 인해 그들은 심히 번민한다. 키에르케고르, 니이체,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19세기의 전위적인 인물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전위파는 사회에서 특별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국외자의 위치에서 불안정한 처지로 남아 있다. 그들은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에, 그들의 개인적 의지와 그 사회의 집단적 의지 사이에 회피할 수 없는 모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마음에 심대한 고통과 번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세 번째, 묵시 문학자는 소외 당한 사람이다. 전위파에게서 소외는 또 다른 특징이다. 그들은 반항함이 없이 다수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 묵시문학자들은 당대의 사회에서 항상 국외자이거나 이방인이며, 불가피하게 그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고립 속으로 내몰린다. 이 묵시문학자들은 에세네파 운동의 사람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는 이 에센 운동을 잘 보여 준다. 니체는 전통적인 가치들과 전통적인 도덕 개념들이 무기력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래서 그는 신은 죽었다고 공언했다. 그는 삶, 힘, 권력에의 의지, 초인, 구원, 회귀, 디오니소스 등의 새로운 개념들을 긍정함으로써 인간과 사회를 재생시키려고 했다.

넷째로 묵시문학자는 투쟁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전위파는 열렬한 환상가로서 정열적인 헌신에 의해 투쟁 정신으로 무장했다. 화가 반 고호(Vincent van Gogh)와 고갱(Paul Gauguin)은 전위파의 역동성과 환상가의 열정을 드러낸다. 본회퍼는 나찌의 폭정에 저항하고 이상(李箱)은 일제의 폭정에 저항하다가 고문당한다. 최제우는 조선의 학정과 전통 종교에 항거하다가 참수형에 처한다. 열심당과 쿰란 공동체의 관계에서 열심당의 투쟁적 기질을 연관해서 보며, 그들이 묵시문학적 환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살핀다.

묵시문학자는 마지막으로 환상의 미래파였다. 창조적 소수파로서 묵시문학자들만이 현재의 역사에 대한 급진적인 부정, 과거에 대한 반항적 행위와 아울러 묵시문학을 발흥하였고 역사를 재생하여 전진시켰다.

이신은 묵시문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철저히 소외되어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신학교를 전전긍긍하며 시간강사로서 생활을 하며 전위 예술가, 화가로서 그리스도의 예술 세계를 펼쳐갔다. 고난의 삶이 바로 예술의 소재가 되었고 신학교의 신학생들이 예술 세계의 재료가 되어 그들이 예수의 화폭에 담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묵시문학적 신학 세계를 전수하며 예언자와 현인의 묵시전통을 전해주었다. 그는 한국 현실의 고난과 고통을 보고 번민하는 지식인, 고뇌하는 환상가였다. 기존의 체제를 보고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손길을 기대하며 한국 역사의 묵시적 상황을 바라보았다. 창조적 소수파로서 역사의 미래를 바라보며 전위파 운동을 하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앙 고백과 그 선언문을 발표하고 한국교회의 갱신과 초대 교회의 신학 운동, 교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신은 구약의 묵시 문학과 현대의 전위 운동을 연관시켜 성서 이해의 지평을 열어 주었다. 현대 사상가들 중,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니이체, 카프카 등이 묵시문학적 기수라고 강조한다(William Hubben). 이들이 창조적 소수라고 밝히고, 한국 신학 토착화 작업의 선구적 역할로서 이상과 최제우을 들며, 한국의 전위 예술가와 묵시문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신은 그의 박사 논문 마지막 장에서 묵시문학적 환상이 무엇인지 소개한다. 묵시 문학적 환상이 네 가지 형태를 가진 것을 보여준다. 초의식, 부정과 변환, 원형, 구현된 환상 등이다. 미래를 향한 묵시문학적 환상이 초의식의 상태로 나타난 것을 언급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지성의 자연적 빛’은 자연적 질서 안에서, 상상력 안에서 나타난 신적인 빛의 개입이라는 것이다. 칼 야스퍼스의 심리학을 인용하여, 창조적 개인의 초의식에서 나타나는 특이성을 의식의 고양, 거룩한 병, 초건강적 광증 등으로 표현한다.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분벽에 글자를 쓰는 이야기에서 환상 의식이 생생하게 표현된다. 이 환상 경험은 초월적 경험으로서 묵시문학자의 상상력과 지성에서 암유적으로 매개된 경험이라고 파악 될 수 있다.

환상 의식의 지향점이 무엇인가. 다니엘서에 표상화된 ‘벽 위의 손가락’ 이야기는 환상 의식의 지향점에 도달하는 길을 열어 줄 수 있다.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이 구절은 이중적인 해석의 방향을 지향하는 의식의 지향점을 드러낸다. 첫째로 바빌로니아 왕국의 종말을 경고하는 것이요, 둘째는 벨사살 시대로부터 메대와 페르시아 시대로의 역사적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다.

환상 의식의 지향점에는 두 가지의 근원적인 환상의 암시가 있는데, 그 하나는 종말론적 역사 심판 또는 현재에 대한 부정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의 새로운 미래에로의 전환이다. 사르트르의 원상(Image)이 세계와 현실적 제 존재에게 갖는 그 입지적 행위(positional act)와 같은 작용을 한다. 야스퍼스의 암호 개념과 상통하고, 키에르케고르의 ‘변증법적 상충’이라는 개념과 통한다. 묵시문학적 환상은 현시대(aeon)에 대한 철저한 부정에서부터 미래의 시대에 대한 철저한 긍정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전환의 좁은 길을 제시한다. 역사적 전화의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서 부활의 환상은 중요하다. 부활의 환상은 신기원(aeon)으로서 역사적 변혁의 전조이다. 베르자에프(Nicolai Berdyaev)의 개인의 부활이 ‘세계체’(body of the world)의 부활과 연관되어 있다.

묵시문학적 환상이 표상하는 역사 변환의 지향점에는 두 개의 원형이 있다. 하나는 ‘메시아’ 혹은 ‘택함을 받은 자’에 대한 환상이요, 다른 하나는 ‘메시아 왕국’에 대한 환상이다. 이 메시야 왕국에 대한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신구약 중간 시대의 구약 외경을 참고문헌으로 들고 있다. 제 1에녹서와 12족장의 언약서, 무녀의 신탁서, 유다의 언약서, 제 4에스라서, 제부룬 언약서, 단 언약서, 희년서 등이다. 메시아 왕국이 자유와 평화와 기쁨의 왕국이며, 지적인 엘리트, 환상가, 내면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전위파 예술가들이 도달하려는 왕국이다. 이신이 좋아한 베르자에프의 말을 인용하며 그 왕국의 개념을 자유와 노예의 개념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인간의 노예성은 인간의 타락이며 인간의 죄이다. 이 타락은 그 자체의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죄로부터의 회개와 속죄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창조적 힘의 활동에 의해서도 극복되는 것이다.”

이신은 묵시문학적 환상이 구현된 것은 묵시문학의 전통위에서 인자 개념과 ‘사람의 아들’ 개념을 통해 신약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라고 본다. 요한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 케제만(Ernst Käsemann), 몰트만(Jürgen Moltmann), 판넨버그(Wolfhart Pannenberg)등의 학자들은 신약 성서의 종말론은 유대 묵시 문학과의 연관성에서 살핀다. 묵시문학적 작업이 현대에는 러시아의 반체제 학자로서 소련의 전위파 작가인 안레이 아마리크(Andrei Amalic), 알렉산더 솔제니친(Alexander Solzhenitsyn)등을 소개하며 소련의 미래를 여는 묵시문학적 작업을 소개한다.

이신 박사는 구약, 신약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상가로서, 또 조직신학자로서 면모를 보인다. 그의 논문에서 철학자들의 사상과 기독교 사상가들의 철학이 소개되고 있다. 그는 학위 한 후에 한국에서 교수하면서 베르자에프의 책, 「노예냐 자유냐」(1979년, 인간사 출판), 인간의 운명(1984년, 현대사상사 출판)이라는 책을 번역하였던 것도 그의 사상에 매료된 연유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신의 박사 논문을 살펴보았다. 이신 박사가 얼마나 구약학에 정통하였으며, 묵시문학에 대하여 조예가 깊은지 알 수 있었다. 묵시문학 연구에 있어서 현대 철학자와 기독교 사상가들의 개념 이해와 예술 개념을 통하여 이해의 지평을 넓혀 주고 있고 전위 학자들을 소개하고 예술 신학을 언급하며 한국 신학과 문학을 소개함으로 신학의 지평을 확대하는 것을 살필 수 있었다. 그는 우리 시대의 묵시문학자이자 전위예술가로서 환상가와 번민가로서 삶을 살아가면서 창조적 소수파로서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었다. 54세(1927-1981)의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묵시적 비전을 가지고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미래의 비전을 보았고, 카리스마적 영을 가지고 살아갔다. 그는 구약 학자로서 묵시문학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2) 고독과 저항의 신학-키에르케고르와 본회퍼 신학의 비교 연구- 성서관

 

이신은 본회퍼와 키에르케고르의 신학을 비교 연구하면서 그들이 신학의 아카데미즘에 빠지지 않고 역동성을 가지고 학문의 상아탑 속에 안주 하지 않고 시대의 문제점과 실존의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두 신학자는 루터 교회의 출신으로서 전통에 항거하며 신학의 실천적 차원을 강조하였다. 수도원의 절대 헌신적 생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교계를 향하여, 수도원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두 신학자들이 성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자.

“성서만이 우리들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겸손히 그리고 집요하게 회답을 얻기 위해서 (성서를 향해서) 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본회퍼의 고백이다. 본회퍼에 있어서 성서는 그의 신학적 구조의 근거이며 그의 생활의 거점이다. 당시에 유행하던 역사적 예수의 문제에 대하여 그는 실존의 문제에 차원에서 예수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회퍼의 성서 해석은 근본주의적 이해와는 엄밀히 구별되는 것이다. 근본주의적 성서 이해는 역사의 객관성에 의존한다든지 또는 성서의 여자적(與字的) 해석을 따르기 때문에 성서의 비판적 연구를 시도하는 것을 큰 변이나 난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 또는 철학적 비판이 성서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성서의 축자 영감설을 뛰어 넘어 객관적이고 역사 비평적 해석이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이야기 하고 있다. 본회퍼는 역사적 객관적 입장도 아니고 또 성서의 비판적 해석을 강조했으나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지도 않고 물론 근본주의적 이해에 찬성한 것도 아니다.

본회퍼는 성서를 단순히 신학자의 신학 재료원이나 목사의 설교 재료원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성서를 헌신적인 생활의 일용할 양식으로서 성서라고 보았다. 성서는 그의 파란 많은 생애의 어려운 문제에 해답을 주는 음성이었다. 본회퍼의 세 가지 성서 해석의 원리는 교회의 책, 역사적이고 철학적 방법을 사용, 신학적 해석, 경건의 해석 등이다. “첫째로 본회퍼는 성서를 교회의 책으로 보고 그것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어디가지나 교회의 책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 방법론적인 면에서 신학상의 전제는 어디까지나 성서적 기초를 가져야 할 것이고 성서는 역사적인 그리고 철학적인 비판에 의해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이런 객관적인 연구 태도가 결코 성서의 내용에 있어서의 특이성을 손상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신앙의 해석을 강조한다. 매일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말씀을 듣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근사성을 가진 것으로,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절대적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본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무한한 관심은 성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이며 내면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다. 두 신학자가 성서에 대한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는 면에서 일치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문자에 사로잡힌 근본주의적 성서관을 비판한다. 구세대의 희극적 의문 신학(儀文, the letter-theology)이라 했고, “불행한 희비극적 낭만주의적 문자 노예”(an unhappy slave of the letter in his tragic-comic romanticism)라고 했다. 그는 글자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닌 글의 정신, 그리스도의 정신에 담긴 구원의 메시지를 강조한 것이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성서관은 기독교 신앙의 내면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기독교는 영적인 것이다. 영적이란 내면성이요 내면성은 주체적인 것이요 주체적인 것이란 근본적으로 열정적인 것이다. 그 최고 정점은 영원한 행복 속에 있는 무한한 인격적인 열정적 관심 그것이다.” 이러한 두 신학자의 성서관은 이신 박사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서관에 입장을 형성한 것이다.

이신 박사의 신학을 슐리어리즘(Surrealism)의 신학이라고 한다. 이 신학은 영(靈)의 신학이다. 영의 목소리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슐리어리즘의 신학은 초현실의 방법의 방법인데 사실은 방법이 없다는 말로도 말할 수 있다. “슐리어리즘은 비(非) 혹은 반논리주의인가 하면 그것도 너무나 속단일 것이고 슐리어리즘은 단순히 문법이나 논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또 그런 것과 시비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슐리어리즘의 사랑이 그런 것과 화합하면서 그 이상의 것으로 뛰어 넘어 보려는 NEO-TRANSCENTALISM(신초월주의)의 자리를 취하려고 한다. 여기는 초월이 있기는 있으나 그 전 모양으로 먼 데 있는 초월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데 있는 초월이고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없는 세계의 초월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면서도 우리가 의식 못하고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먼 그런 것이다.” 이신은 슐리어리즘의 신학을 설명하며 용어 정의를 한다. 앙드레 브레톤(Andre Breton, 1924년)과 길로므 아폴리나르(Guillaume Apollinaire)가 초현실주의, 조자연주의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이신 박사는 동양의 지자(知者)가 이미 언급하였다고 지적한다. 슐리어리즘은 무위지사(無爲之事)에 처하는 것이요 불언지교(不言之敎)에 행하는 묘미가 있는 것이라 밝힌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말씀대로 ‘언어’에서 더 한층 다른 단계로 넘어서야 한다. 곧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것은 말씀이 역사가 됐다는 말이다. 그러나 말씀은 역사가 된 다음에 역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 과정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또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을 줄로 생각하며, 또 이것이야말로 슐리어리즘이 담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동시에 또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신학을 설명하고 이 신학을 정의하면서 이사야 55장 10절을 인용하며, 그 말씀대로 반드시 하니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고야 마는 그런 말씀인데, 기도해서 이룬 일이야 말로 영원히 무너지질 않을 일이라고 말한다.

“하니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고야 마는” ( אם עשת את צשר תבעתי)그런 ‘말씀’인데 여기서는 단순한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이루는 말씀(דבר)으로서, 이루는 일이란 원래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기도해서 한 일이란 무너진 것 같으나 또 다시 이루고야 마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여간 강인한 것이라 반드시 이루게 된다고 본다. 이신의 슐리얼리즘의 신학은 기도의 신학이요 말씀의 신학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구약의 신학과 히브리어 지식, 그리고 이사야 말씀으로 논증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동양의 지혜와 동양의 신학, 토착화 신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그러면서 독특한 자신의 슐리얼리즘의 신학, 영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3) 동석기와 구약

 

동석기는 1881년 4월 6일 함경도 북청에서 동주홍과 김씨 부인 사이에서 4남 1여중 장남으로 때어났다. 북청 지역 초리에는 30여 가구가 살던 전형적인 농촌으로 동(董)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 동석기의 집은 농사를 짓는 중류 가정에 전통적인 유교 집안이었다. 그는 서당을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머리가 총명하여 한문 공부의 학습 진도가 빨라 훈장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는 엄격한 유교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을 안에서 서당 교육만을 받기에는 모자라 그는 모험심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남달라 14세가 되는 해에 서울로 상경하여 고생하다가 고향에 돌아온다. 17세에 그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서 김씨 규수와 결혼하고 시골 농사꾼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19세에 동네를 떠나 서울로 상경하여 관리가 되지만 부패한 조선 말엽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23세에 하와이로 노농자 이민을 가게 된다. 동석기는 1903년 22세 나이에 현해탄을 건너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된다. 거기서 성실히 일하는 그를 농장 주인이 잘 보고 9개월 만에 하와이의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 본토로 들어가서 감리교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1913년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그는 한국 감리교의 큰 기대를 받고 원주 지방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14동안 목회를 한다. 1914년 인천 내리 교회에 교역자로 부임하고, 1916년 기독신보의 감리회 통신에 글을 기고하기도 한다. 동석기는 1917년 성루 마포 교회에서 목회하였고, 1919년 경기 수원 지역 남양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동석기는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박희도와 절친했고 수원 지방의 독립 운동 책임자였던 김세환도 자주 만났다. 이 만남을 통해서 한국의 독립에 대하여 자주 논의하였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경력으로 영국과 미구의 외교관들과 친분이 깊었고 당시 세계 정세에 밝아 3·1 운동 직전 동석기는 민족대표로 서명하였으나 이후 33인의 일원이 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구미 소식통 역할을 하며 박희도 등 여러 인사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경기 사강, 비봉 지역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의 고취로 그의 목회지 수원 지방 일원에서 3·1운동이 성역이 되도록 하였다.

그는 3월 11일이 되자 상경하여 오후 2시에 회집된, 파고다 공원의 집회에 참가하였고, 독립선언식을 마친 후에 만세를 부르며 남대문, 의주로를 경유하여 정동의 미국 영사관, 광화문 서대문을 거쳐 프랑스 영사관 총독 관저 등을 다니며 시위를 하였고, 미국 영사관에 민족 자결주의 운동의 정황을 파리 강화회의에 타전 의뢰하다가 검거되어 8월 30일 경성지방 법원에서 징역 7개월 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복역 후 충남 청양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22년 교회를 사임하고, 만주 봉천의 영고탑 교회에서 1년간 목회를 하였다. 독립 운동하는 상황에서 교회를 맡았고 그의 목회는 나라 독립을 지하 운동이자 경찰의 눈을 따돌리는 피신의 역사이었다. 짧은 교회 봉직의 역사는 그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석기전도자는 2차로 미국에 건너간다. 독립운동으로 감옥에서 느낀 것은 진정한 독립이 무엇이냐는 영적 차원에 대한 고뇌를 하였고 민족 전체의 영적 구원을 위해 더 많은 성서 지식과 깊은 영성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신학 공부를 위해 1927년도미한다.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신학교에서 유악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공부하고 1929년 5월에 환원 운동에 대한 졸업 논문을 쓰고 침수 세례를 받는다. 신학 석사 학위 논문은 “미국에서 환원 운동의 초기 역사(The Early History of the Restoration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였다. 8장으로 된 논문에서 환원 운동가 토마스 캠벨, 알렉산더 캠벨, 발톤 스톤, 월터 스코트, 라쿤 존 스미스, 로버트 리차드슨 등의 사상을 소개하고, 후반부에서는 환원 운동이 일어난 동기와 원인, 운동의 성질, 본질, 목적 등에 대하여 논술한다. 환원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에 대한 사상을 연구하고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 환원 신학을 깊이 연구한 것이다.

동석기 전도자에게 신앙의 진리의 여정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구자로서 인도하였다. 동석기 전도자가 귀국 준비하여 모금하기 위해 중남부 지역으로 여행하던 중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에서 톰슨(T. B. Tompson)전도자를 만난다. 그의 집에서 성서에 대해 토론하는 중 예배 때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비성서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톰슨의 추천으로 테네시 주(州)에 있는 내쉬빌로 가서 홀(Hall Calhoun)과 샘(Sam Pettman) 교수로부터 신약 교회에 대한 성서 공부를 한다. 웨이볼리 벨몬트 교회에서 귀국 경비를 지원받고 한국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매월 선교비를 보조해주어 1930년 11월 한국에 귀국하여 이 땅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무악기 교회를 전교(傳敎)한다.

동석기 전도자에 대한 초기 생애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4. 신구약의 관계

 

“우리는 구약 성경은 율법이요, 신약성경은 은혜라고 생각하는데, 이 또한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약 성경은 기록된 글자(성문화된 법률이라는 뜻)이고 신약 성경은 영(성령)입니다.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어나갈 때 구약의 율법적인 관점을 갖고 읽는다면, 신약성경도 우리에게는 단지 글자로 기록된 율법의 나열로만 보여집니다. 하나님과 생명을 주는 관계는 도외시하고, 단지 성경에 쓰여 있는 명령을 지키는 것에만 집착하는 것은 생명이 없는 죽은 종교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5.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약학자와 성서 해석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고 세계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약학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무슨 연구를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 운동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세계 구약학 연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구약학 분야에서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가. 먼저 잭 펄 루이스(Jack Pearl Lewis) 기념 논문집, 『성서적 해석』이라는 책을 통하여 미국의 구약학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성서 해석 개론이라는 부분에서 교수 6명이 성서 해석에 대한 글을 발표한다. 테드 캐루스(Ted Carruth,)는 베일러(Baylor) 대학에서 박사학위(Ph. D)를 하고, 대비드 립스콤(David Lipscomb)대학교에서 성서학 교수로 재임 중에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 일치를 위한 성서 해석의 적절한 원칙의 암시’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기고하였다. 래리 슈나르드(Larry Chouinard)는 풀러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과정 중에 있다. 캘리포니아 우드랜드 힐의 우드랜드 힐 그리스도의 교회의 담임 전도자이다. 그는 ‘신약성서 해석사’를 기고한다. 이완 페어(Ian A. Fair)는 남아프리카의 내이탈(Natal)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에블린 대학교에서 성서학과장으로서 ‘성서 해석과 관련된 원칙’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빌 프레트(Bill Flatt)는 멤피스 주립 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를 하고 하딩 대학원에서 상담학 교수를 하고 있다. 그는 ‘성서 해석의 전제와 태도의 기능’이라는 논문을 기고한다. 레이몬드 켈시(Raymond C. Kelcy)는 남서 침례 신학대학원에서 Th. D를 하고 오클라호마 기독교 대학에서 성서학과장을 한다. ‘범위와 본문의 맥락을 동일화하기’ 라는 글을 발표한다.

퍼만 키어리(F. Furman Kearley)는 히브리 유니온 대학-유대 종교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복음 옹호자(Gospel Advocate)라는 잡지의 편집장이 되고 텍사스 모한스(Monahans) 그리스도의 교회의 담임 목회자이다. 전에는 에블린 대학교 성서 대학원장이었다. ‘다이아 그램과 문장 분석’라는 논문을 기고한다. 에드워드 마이어(Edward P. Myers)는 드류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알라바마 기독 대학원장으로 있으면서 ‘비유적 언어 해석’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2부에서는 구약 성서 해석이라는 파트로, 8개의 논문이 발표된다. 티모티 해드리(Timothy D. Hadley)는 히브리 유니온 대학-유대종교대학원의 박사과정 생으로서 러벅기독교 대학교에서 성서와 성서 언어의 조교수이다. 그는 ‘구약 성서 해석의 역사’라는 글을 발표하고, 돈 새켈 포드(Don Shackelford)는 뉴 올리온즈 침례신학원에서 Th.D를 하고, 하딩대학교에서 부학장으로 있으며 ‘구약 성서 본문 비평’이라는 논문을 기고한다. 휴고 맥코드(Hugo McCord)는 뉴 올리온즈 신학대학원에서 Th. D를 하고 오클라호마 기독대학교에서 성서 교수였다. 조엘 엘리오트(Joel Elliott)는 베일러 대학교의 박사 과정 생이다. 그들은 ‘히브리 단어 연구’를 공동으로 연구한다.

존 윌리스(,John T. Willis)는 밴더빌트 대학교의 박사학위를 하고 에블린 대학교의 성서학과 구약 교수이다. 그는 ‘히브리어 문맥 해석’이라는 글을 기고한다. 존 맥레이(John McRay)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휘트 대학원에서 신약 교수와 대학원장으로서 재직하고 있다. 그는 ‘구약 성서 해석에서 고고학의 기여’ 라는 글을 발표한다. 클라이드 밀러(Clyde M. Miller)는 하딩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하고 대비드 립스콤에서 성서학 교수를 한다. ‘성서에서 시문학 해석하기’라는 논문을 기고한다. 찰스 마이어(Charles F. Myer, Jr.)는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Northeastern 기독대학교에서 성서와 성서 언어과 교수와 학과장을 하고 있다. ‘초성서 자료에서 온 표본 해석: 누리 자료와 족장 기사’ 연구를 발표한다. 잭 반실(Jack W. Vancil)은 히브리어와 인지 학습을 위한 Dropsie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구약교수로서 하딩대학원에서 ‘창조에서 혼돈까지: 예레미야 4:23-26 주석’ 논문을 기고한다.

3부에서는 13개의 논문 중에 3개의 논문이 일반적인 성서 해석에 대한 글이다. 토마스(J. D. Thomas)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에블린 대학교에서 성서학 교수(은퇴)를 하고, ‘해석학에서 생생한 원칙과 실제’라는 글을 기고한다. 에드워드 마이어즈(Edward P. Myers)는 드류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알라바마 기독 대학원장이다. 그는 편집자로서 ‘성서 해석의 참고 문헌’을 소개한다. 애니 루이스(Annie May Lewis)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A.M. 학위를 하고 하딩대학원에서 도서관 주임을 하며 잭펄 루이스의 부인이다. 그녀도 편집자로서 ‘잭 펄 루이스의 학문적 저작의 문헌들’을 소개하는 글을 낸다.

 

오늘날의 성서 해석과 그리스도의 교회 성서 해석 방향

 

하딩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인 폴 폴라드(J. Paul Pollard)가성서 해석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최근 경향들’이라는 논문을 1992년에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성서 해석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발표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서 해석에 대한 입장이 어떠해야 할지를 질문하고 있다. 그는 성서 해석에 다양한 방법들을 4가지 관점에서 카테고리를 나누어서 소개한다. 철학적 해석학과 문학적 접근방식들, 사회 과학과 해방 신학들의 관점에서 성서 해석의 결과들을 소개하고 있다. 현대의 성서 해석과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통적인 해석학적 방법과 서로 비교하면서 사용되고 있다.

철학적 해석학에서는 불트만의 제자, 에른스트 푹스(E. Fuchs)와 게르하르트 에벨링(G. Ebeling)이 시도하며,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다. 2천년 전에 살았던 다른 문화와 언어권의 사람들이 썼던 성서 본문이 어떻게 오늘날 사회에서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해석학의 문제이다. 이 해석학 방법론은 성서 본문이 과거 의미했던 것으로부터 현재 성서 본문이 의미하는 것으로 이르는 해석 방식이다. 이 방법을 통하여 언어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자아이해를 통해서 삶의 변화를 도출할 수 있다.

이 새로운 해석학은 전이해(前理解, Pre-Understanding)를 문제 삼는다. 성서에서 개인의 심리학적 요인들, 문화적 요소들, 사회, 정치적 요인들을 고려하여 성서 본문에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두 번째 중요한 문제는 역사비평 방법(Historical -Critical Method)이다. 종교사학파가 성서 본문을 해석할 때 갖는 태도와 같이 성서 본문, 그 문학, 형식, 편집비평을 중요한 도구로 사용한다. 실존주의자들은 역사비평자들과 달리, 역사 비평자들이 중요시 여기는 성서 본문의 저자 의도와 그 주제를 비평한다. 이 새로운 철학적 해석학은 해석학에 있어서 해석자의 상당한 겸손을 요구한다. 어느 누구도 성서본문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그 본문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폴 폴라드는 새로운 해석학과 성서 본문 해석의 관계를 잘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 ‘여기 우리 앞에 성서 본문 자체가 있다’ 라는 사실이 존중되어야 한다. 이 새로운 철학적 해석학은, 환자를 수술하기 위하여 외과용 메스를 들이대는 의사처럼, 우리가 그 성서본문을 넘어서서 그 본문을 해부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책임을 정확히 져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그 성서본문과 함께 진지하게 대화하여야 하며, 오히려 우리 자신이 그 성서 본문에 취약하도록 노출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편한 대로 해석하거나 길들이려는 충동에 저항해야 한다.” 복음주의 신약학자, 카슨(D. A. Carson)과 퍼거슨(D. S. Ferguson)의 입장을 부각하며 폴라드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서 해석의 입장을 밝힌다. 새로운 해석학과 역사 비평의 방법의 차이에 있어서 가치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해석자들은 새로운 해석학자적 양식들을 찾기 위하여 역사비평적 방법을 포기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고 본다. “허쉬(E. D. Hirsch)는, 성서 본문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시도가 없이는 어떠한 유효한 해석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학 비평은 역사나 언어적 관심으로부터 돌아서서 성서본문의 구조로 그 관심을 가진다. 문학적 접근 방식에서는 마땅히 분석되어야 하는 작은 성서본문의 단편들이 세속적이든가 아니면 종교적 특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성서로 돌아가자!”를 주창하였던 환원운동가 알렉산더 캠벨은 자신의 성서 해석학적 법칙에서 주장하기를, 성서는 그 당시의 다른 문화적 자료가 해석되는 방식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문학적 비평가들과 같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역사적 준거(상황)에서 성서를 이해하였다.

오늘날 세 가지 다른 문학적 접근방식들로는 구조주의와 수사학비평, 그리고 독자반응 방식이 있다. 구조주의(Structuralism)는 문장조직들의 구조를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수사학적 비평(Rhetorical-Criticism)은 하나의 성서 본문이 어떻게 당대의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쓰여 졌는가를 질문한다. 독자 반응비평(Reader- Response)은 본문을 읽는 독자에 주목한다. “우리는 성서본문을 전체로 읽어 본 경험에서 그리고 그 본문의 자료들이나 기원과 같은 질문들로부터 좀 떨어져서 그 본문이 요구하는 정신적 이동들을 간파함으로써 그 성서 본문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모든 문학적 접근 방식들은 성서 본문에다 아주 흥미로운 새로운 통찰들을 제공한다. 수사학적 비평은 역사적 준거(방법)를 이용하며 많은 방법에서 구조주의나 혹은 독자 반응식 접근방식 보다는 더 전통적 해석학에 위협적이지 않다. 문학적 접근 방식들은 전통적, 역사적 잇슈들에 어느 정도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고 있다고 본다. 사회과학(Social Sciences)적 방법은 기술적 방법(descriptive)과 분석적인 방법(analytical)으로 사회학적 범주에 대한 질문을 한다. 사회학자는 역사가의 정보를 이용하여 그 역사 밑에 있는 무의식적 요소들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한다. 참다운 사회학적 방법은 어떤 상황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문제 삼는다. “사 회학적 접근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보완해 줄 수 있는 한 방식을 제공해준다. 이 방식은 또한 우리의 환원 운동의 고유한 방식이기도 하다. 사회학적 접근의 또 다른 한 기류, 곧 성서본문에 대한 사회학적 방법들과 분석 이론들의 결과는, 사회 역사가에 의하여 제공된 기술적 접근 방식보다는 덜 만족스러우나 사실 더 위협적이다.”

폴라드는 사회학적 접근 방법이 초대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방법론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또 이 방법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 정신을 파악하는 유용한 방법론이 될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초기 신약 교회, 신약 공동체에 대한 이해 없이는 환원 운동의 목표가 설정될 수 없고 그 목적을 이룰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해석자들은 전에도 그렇거니와 현재에도 이같은 사회적 탐구에 너무나 주목해 오지 않았다. 사회과학, 특히 사회학은 초기 교회의 정신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어느 시대에서도 환원 운동은 신약 성서에 기술된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해방신학들(Liberation Theologies), 성서 해석에 있어서 다양한 해방 신학들(흑인 해방, 라틴 아메리카(남미)해방, 여성해방신학)이 있었다. 이 해방신학은 고대 세계(성서 본문)의 ‘그 때’로부터 오늘날의 ‘지금’으로 이동하는 도전과 시도에(성서해석) 또 다른 접근 방식을 제공한다. 해방 신학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상황과 함께 시작하고 거기다 마르크스적 사회분석이론을 가미한다. 해방 신학은 성서의 이야기들을 현재의 역사로 연구한다. “아마도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서가 제기하는 그같은 사회학적 이슈들을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참다운 신약 교회의 실재에 대하여 질문 받을 때,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성원들은 아마도 거의, 교회의 조직, 예배, 구성원 자격의 문제를 말해주고 있는 사도행전에서 발견되는 교회의 ‘표식들’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자는 빈곤과 억압이 참다운 신약교회의 특성을 기술한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미국의 그리스도의 교회의 참다운 교회의 실재가 무엇이냐 할 때, 예상된 대답을 해방신학자의 관점과 비교해서 논술하는 장면이다. 추구하는 세계가 다르지만 참다운 교회의 표식과 표지는 그리스도의 교회, 예수의 나라, 천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이것을 구현하는 방식은 해방과 신약 교회이다. 이것을 추구하는 방식이 다른 것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교파적 성격과 해방의 목표가 다른 것을 알게 된다. 오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약 교회의 현실과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성원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똑같이 제기될 수 있다.

“아주 중요한 방법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이들 해방신학으로부터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다. 대체로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그 힘든 일에 우리의 손을 내밀어, 그들의 고통과 우리 자신이 함께 하기를 그 동안 원하지 않았었다. 흔히 도시인들의 이동을 나타내는 인구 통계가 바뀜에 따라, 우리도 자연스럽게 이동하고 그들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홀로 감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마 이들 사람들은, 짓밟힌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진실로 우리의 삶 속에서 보기까지는, 우리의 환원운동과 사상에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해석학은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요구한다. 우리는 그 가난한 자들을 남 보듯이 하는 하나의 해석학적 방법으로부터벗어나서 이제 그들의 삶에 책임을 갖는 모습으로 나가야 할 때이다.” 폴라드는 해방신학에게서 환원 신학이 배워야 함을 강조한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 짓밟힌 사람들을 돌보는 일, 환원 운동과 사상에서 주목해야 할 대상들이 누구이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밝힌다. 훌륭한 해석학은 바로 삶의 현장에서 책임감 있게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 관심을 갖는 것임을 드러낸다. 환원 신학,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서 해석 방향이 거기에 있음을 알게 된다.

페미니스트(여성)해방적 해석학(Liberation Feminist Hermeneutics), 최근에 성서연구에 있어서 지난 15년 사이에 여성의 주제가 많이 연구되었다. 카롤 오자이크(Carol Osiek)는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취해진 성서에 대한 다섯 가지 중요 해석학적 접근 방식들을 제시하고 있다. 거부주의자(rejectionist), 충성주의자(royalist), 수정주의자(revisionist), 승화주의자(sublimationist), 해방주의자(liberationist) 접근방식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약 교회의 모형을 추구한다. 고린도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여성 침묵 요구로 인해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이 많이 위축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주의적 성서 해석은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성서본문의 페미니스적 분석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교회 안팍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 대해 보다 더 민감하게 인식하도록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광범위한 여성들에 대한 착취의 현실에서 우리는 이제 그들을 돕고 상담하고 나아가 안정된 피난처를 보다 더 제공해야 한다.” 여성성이 갖는 독특한 점, 섬세하고 조용하고 세심한 배려 등은 인류의 어머니로서 이브, 하와가 갖는 장점이다. 여성이 없으면 인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은 교회의 주인과 같은 역할을 한다. 교회 봉사의 80%는 여성 성도들이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의 주장은 여성이 잠잠하고 교회 내에서 발언권을 줄일 때, 상대적으로 남성의 역할 커지고 교회가 균형적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가정 안에서, 사회와 국가 안에서도 똑같은 현실 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성서 이해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통적인 해석학적 틀은 성서의 명령, 모범적 실례, 추론의 방법들이다. 이 방법들은 한계가 있어도 그 동안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폴라드는 오늘날의 성서 해석 방법들이 많은 통찰력을 주고 그리스도 교회들 안에서 수용되고 수정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성서를 보다 21세기에 관련시키기 위하여 크게 고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법들을 상호 보완해 가는 많은 동조자들을 얻고 있다. 그들 방법론 속에 잇는 옳은 통찰을 차용함으로써, 성서의 이야기와 사건은 오늘날의 탐구자들의 삶 속에서 새로운 생명력과 위력 그리고 당면한 중대한 사건으로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성서 해석 방법은 새롭게 개발되고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정신, 환원 정신에 입각하여 새로운 성서 해석에서 좋고 옳고 유익한 실천적 해석으로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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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언서 연구
글쓴이 : 박신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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