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원 신학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사

하나님아들 2018. 10. 16.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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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2.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사의 자료들

3. 초기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1)동석기 전도자(1881-1972)

(2)강명석 전도자(1897-1944)

(3)이흥식 전도자(1912-1991)

4.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의미

1.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1999년 1월 10일 현재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무악기)는 우리 교회를 포함하여 107개소가 있다.[주: 1999년도 1월 10일 현재 {그리스도의 교회 한국 교역자회}에서 발간한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 주소록}에 나타난 통계이다.]

교회 외에도 교육기관으로 그리스도신학대학교[주: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6동 산 2번지 소재] 그리스도신학대학교 부설 보육교사 교육원, 목회신학교 [주: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연지동 301-10에 소재], 등촌중학교[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2동 534-9에 소재] 등이 있고, 선교기관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회[대표: 말콤 이 파수리, 서울 특별시 강서구 화곡6동 산 204번지에 소재]와 문서선교 기관인 성경통신교육원[원장: 빌 램시, 부원장: 양상용. 서울특별시 강서구 공항동 32-3에 소재. 특히 성경통신교육원에서는 전국적으론 통신으로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성경통신강좌를 개설하고 있는데, 1999년도 현재 약 16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강좌를 통해 성경을 배웠고,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었다. 또한 매년 겨울(1월)에는 약 2주간의 합숙을 통해 성경을 가르치는 BCC동계대학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성서적 일군들을 배출하였는데, 이곳을 통해 배출된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수도 수십 명에 이른다.]이 있다. 그리고 저널로는 참빛사[주: 발행인: 원종호.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연지동 301-10에 소재]의 신앙 월간지 {참빛}[주: 참빛은 주로 목회자와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신학, 신앙 잡지이다.]과 도서출판 바이블링크[발행인: 빌 램시. 서울특별시 강서구 공항동 32-3에 소재. 인터넷 
http://bible.or.kr]에서 발간되는 {오늘의 능력}[주: 이 월간지는 미국의 {20세기 크리스챤 재단(20th Century Christian Foundation)}에서 발간하는 오늘의 능력(Power of Today)을 국문으로 번역한 일일 명상집이다.]이 있다. 특히 오늘의 능력은 인터넷과 기독교방송을 통해 영어와 한국어로 세계인들이 듣고 볼 수 있도록 현대화한 저널이다.

현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파송한 국외선교사로는 러시아에 유태권, 최상용, 인도네시아에 김부열, 호주에 김우태, 라오스에 김복룡, 방글라데시에 박천록, 하와이에 신상수 선교사 등이 있다.

교회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마련된 기관으로는 재단법인 그리스도의 교회[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2동 199-77에 소재]가 있다.

한편 교회 수는 주소록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지만, 성도 수는 정확히 파악된 통계가 없기 때문에 잘 알 수가 없다. 혹자는 그리스도의 교회교인 수를 약 3만여명일 것이라고 추산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어린이, 학생, 청년, 장년을 모두 합산하여 1교회당 평균 100-150여명으로 어림하여 볼 때 약 1만-1만5천여 명으로 추산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왜냐하면, 필자는 1994년 9월에서 12월 사이에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 12개소를 주일 낮 예배 시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에 파악한 학생부 이상 장년부의 평균 인원이 약 70여 명이었다. 당시 결석한 사람들과 어린이들의 숫자를 감안하여 100%정도 더 가산한다면 약 140여명이 된다. 그후 5년이란 시간 차, 개척 등의 가산변수, 그리고 농촌 및 미자립 교회 등의 감산변수 등을 감안해 볼 때에 전체 평균 100-150명은 추산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 숫자도 일천만명을 헤아리는 개신교인 전체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양적 질적으로 이 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성서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을 위해 많은 전도자들과 성도들이 땀 흘려 수고하며 복음을 전하였기에 그 의의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를 알아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정확한 뿌리 파악은 그에 연결된 줄기와 잎이 성장하도록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그것이 곧 꽃 피우고 열매 맺게 하는 것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정립은 우리 자신의 뿌리 찾기 이고, 현실의 줄기 파악이며, 미래의 한국교회가 열매 맺기 위한 밭갈이이기도 하다.

2.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사의 자료들

현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에 관하여 연구된 구체적인 자료는 많지 않다. 동석기 전도자가 1930년 11월에 그의 고향 함경도 북청에 처음 세운 그리스도의 교회를 기준으로 할 때에 한국교회 선교 역사는 68년이 되었지만, 이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무악기) 중심으로 엮은 연구서로는 김세복 씨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회사(1969)", 김익진 교수의 "신약교회 운동사(1986)", 신민철 전도자의 "그리스도의 교회사 연구(1992)" 등이 있고, 최근 연구된 것은 김익진 교수의 학위논문인 "강명석과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다. 한편 그리스도의 교회(유악기) 입장에서 기술한 연구로는 김찬영 씨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 역사}, 최윤권 씨의 {내가 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1997)}, 박대순 씨의 {간추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 등이 있다.

3. 초기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는 한국에 어떤 경로를 통하여 들어오게 되었는가?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래된 선교의 경위, 한국교회를 위해 힘쓴 사람들에 대하여 약술하려고 한다.

선교는 보통 외국인 선교사에 의하여 전파되어지는 것이 상례인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의 씨앗은 한국인에 의하여 뿌려졌다. 이 점은 교파 교회의 경우와도 동일한데[주: 교파교회의 공식적인 선교사 입국은 1884년에 지금의 제물포 항에 내린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셀러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나, 그 이전에 이미 한국인들이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복음을 듣고 귀국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공이 감리교 목사였다가 신약교회 환원한 동석기 전도자와 강명석 전도자 등이 미국 유학 도중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을 듣고 깨달아 귀국하여 한국에 그 씨앗을 뿌렸다.

동석기 전도자는 북한지역과 서울지역에서, 강명석 전도자는 울산, 경주를 시작으로 영남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특히 강명석 전도자에 대하여 최근에 알려진 바, 그가 끼친 학술적인 공헌은 그리스도의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흥식 전도자는 1939년 10월에 동석기 전도자에게서 복음을 받은 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그의 80여 평생을 바쳐 발전시킨 전도자였다. 동석기, 강명석 전도자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개척자였다면, 이흥식 전도자는 그것을 발전 계승시킨 사람이었다.

한편 이흥식 전도자와 동시대 또는 그 뒤를 이은 박경동, 정히건, 김관평, 동주급 씨 등, 현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힘쓴 3세대 전도자들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지만, 그것은 반드시 이후에 정리하고 연구되어져야 할 것이다. 현재 이 분들 가운데 동주급 전도자는 소천하였고, 박경동 전도자는 부산 청학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정히건 전도자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산타아나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김관평 전도자는 제주도의 서귀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각각 노익장을 과시하며 활동하고 있다.

동석기 전도자(1881-1972)는 함경북도 북청 출신이다. 23세 되던 해인 1904년 젊은 나이에 하와이로 이민하였다가 미국 본토로 건너가 일리노이 주에 있는 노스웨스턴 대학교 게레트 성서학원에서 학사학위를 받아 감리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13년 귀국하여 원주 순행 목사, 인천 내리교회의 2대 담임 목사가 되었고, 1917년에는 마포 교회, 1919년에는 수원의 남양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일찍이 미국 유학을 한 관계로 세계 정세에 밝았으며, 3·1독립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로 서명했으나 이후 33인의 일원이 되지는 못했다. 3·1운동의 중요한 내외국 연락 책임을 맡았으며, 그 관계로 일경에 체포되어 7개월간의 옥고를 치루었다. 1927년 다시 도미하여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 성서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환원운동에 대한 시작이었다. 이곳은 성서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환운운동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그는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서적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웨이볼리 벨몬트 교회 후원을 받아 귀국여비와 선교자금을 약속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전도자가되어 1930년 11월에 귀국하여 고향인 함경북도 북청을 중심으로 환원운동의 불길을 점화시켰고, 이로 인하여 일곱 개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다. 1935년 다시 도미하여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자 자신이 선교사가 되어 다시 돌아와서 1936년에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남한에 세워진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동석기 전도자는 우리 중앙 교회와도 연관이 있다. 우리 교회를 세우는 데에 크게 기여한 초대 전도자 이흥식 씨가 바로 동석기 전도자로부터 복음을 들었고, 전도자가 되었다. 아울러 1964년도 예배당 건축 시에는 건축 위원장을 맡아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 한반도 이남에서 복음을 전하며 특히 울산을 중심으로 환원운동을 펼쳤던 강명석 전도자[주: 이 분이 바로 현 부산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본 교회 강경태 집사의 부친이시다. 강명석 전도자는 강문석이라고도 불리웠는데, 미국인들이 강명석 전도자의 이름 중 '명'자를 잘 발음하지 못하자 강문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사실여부를 자제 분 되시는 우리 교회의 강경태 집사에게 문의한 결과 동일한 대답을 듣게 되었다.]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거의 밝혀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김익진 교수의 연구가 발표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뿐 아니라 전체 한국 기독교와 사회에 끼친 강명석 전도자의 영향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그리스도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는 김익진 교수는 1997년도에 강명석 전도자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명석 전도자는 환원운동에 못지 않게 학문적 열정도 대단하였던 분이다.

강명석 전도자는 1920-30년대 한국 기독교 문단에서 활동하면서 그의 신앙과 심오한 신학사상을 펼쳤던 신학자이자 사상가였다. 1922년 {기독신보}에 기고한 "유년주일학교"에 대한 글을 시작으로 기독교 문단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신학적 기반은 현장 체험을 통해 이론과 실제를 접목시킨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었다. 1920-30년 당시에는 우리나라 사회주의의 권위자이기도 하였다. 사회주의라 함은 이데올로기적 공산주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사회주의는 다 함께 행복한 사회 구현을 위한 한 방법으로서 지향되기도 한다. 특히 강명석 전도자가 사회주의에 대하여 기고할 당시에는 이러한 분위기가 지식인 사회에 보편적으로 만연하였었다. 그러나 30년대 중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한 이후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추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큰 변화를 갖는다. 크리스챤 신문 등에 기고된 그의 사회주의와 기독교에 관련된 그의 글들은 지금도 그 당시 사회와 기독교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큰 자료로 활용되고 있을 정도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강명석 전도자가 처음부터 신약교회를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 간사이가꾸엔 대학 신학부(關西大學 神學部)에서 공부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돌아와 고향인 밀양에서 목회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 당시 감리교 감독을 지낸 양주삼 박사의 주선으로 도미하여 테네시주 네시빌에 있는 벤더빌트 대학교 신학부에 유학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와 접촉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참다운 기독교 신앙은 인위적인 교파의 신조보다는 오직 성서로 돌아가서 초대교회의 순수성과 단일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거기에서 1년을 더 머물며 환원운동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후리드 하드만 대학(Freed-Hardemon College)에서 공부하였다. 1936년도에 귀국하여 울산교회, 경주교회, 월성의 동방교회, 진양반성교회 등, 여러 곳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고, 1937년에는 서울로 상경하여 신당정, 동교정, 대현정, 인천의 송현정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아쉽게도 환원 운동이 막 뿌리를 내리려던 그 즈음인 1944년 5월 28일, 47세의 한창 일할 나이에 소천함으로써 그가 수고했던 교회들은 모두 해체되거나 타교단으로 넘어가 버렸다. 조금만 더 오래 이 땅에서 활동했더라면 아마도 그의 깊은 신학적인 체계와 세운 교회들, 그리고 실천적인 열정이 환원의 꽃으로 바뀌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에 더욱 크게 공헌하였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교회 현장에서는 동석기 전도자의 흔적이, 문헌으로는 강명석 전도자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교회 현장에서 강명석 전도자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동석기 전도자가 이흥식 전도자 등 후진을  양성하여 그의 복음 사업을 계승시킨 반면, 강명석 전도자는 한창 일할 나이에 소천함으로 그를 이를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명석 전도자가 그의 해박한 지식을 글을 통해 남겨 놓았다는 것은 초기의 한국 교회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현재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교회는 동석기 전도자가 1936년 서울 내수동에 세운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와 강명석 전도자가 같은 해에 울산에 세운 '울산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주: 이흥식 전도자에 대한 글은 그리스도 신학대학교 기준서 교수가 월간 {참빛} 통권 204호(1991년 1,2월호), 2-3쪽에 기고한 내용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일부를 요약 발췌하였다. 이 지면을 빌어 감사 드린다.]

이흥식 전도자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시발지였던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939년 10월에 동석기 전도자로부터 복음을 받은 후, 그의 일생을 마치기까지 전도자로서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을 위해 일했다. 

그는 '부산중앙, 부산서면, 부여합송, 대구, 청량리, 홍제동, 정릉, 번동, 대전중앙, 춘천' 등, 10여개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거나 동역하였다. 

재단법인 그리스도의 교회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교회 재산 보호에 힘썼고, 학교법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학원 이사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그리스도 신학대학교 본관인 환원관을 신축하는 등, 대학 발전을 위하여서도 힘을 쏟았다.

이흥식 전도자의 생애는 크게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출생에서 복음을 받기까지인 1912-1939년이고, 제2기는 복음을 받은 후 북청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1939-1947년이며, 제3기는 월남해서 남한에 수 많은 교회를 개척하며, 복음을 전파하던 1947-1970년이고, 제4기는 청량리 교회에서 목회하며 재단법인과 학교법인 이사로서 활동하던 1970-1987년이다. 이 시기들 중 한국교회와 형제들에게 의미를 주는 시기는 제3기와 제4기이다.

제3기 속에 있던 시기의 그는 흡사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과 같다. 뜨겁고, 담대하고, 정렬적이고 희생적이다. 이 시기에 그는 10여개 교회를 개척하거나 동역하였다. 그는 남한으로 월남한 이후 주를 위하여 독신으로 지내며 청빈과 금욕으로 희생의 한 평생을 보냈다.

제4기 속에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서신 속에 그려진 바울의 모습과 같다. 그는 재단법인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물질을 탐내는 이리들로부터 교회재산을 보호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학교법인 이사로 재직하면서는 신학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교육시설 확충을 위해 손수 건축을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 이 땅 위에 신약교회 운동을 함에 있어서 확고한 교리 위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실천하였다. 교회의 양적인 성장만을 추구하는 속에 성서의 가르침을 유보하거나 채색하지 않고, "성서의 침묵성"을 기본으로, "본질에 일치를" 교리의 핵으로 믿었다. 이처럼 그의 확고한 교리적 입장은 한국 교회를 교리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양적 성장만을 크게 보는 풍토, 과정보다는 결과를, 방법보다는 목적을 중요시 생각하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그의 신앙이 시사하는 바는 대단히 크다 하겠다.

4.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 운동의 의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루어 온 환원운동은 몇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미래의 한국사회와 교회 갱신 및 성서회복운동을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점이다. 한국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입되던 193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의 한국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과 궁핍, 그리고 빈곤의 극치를 달리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몸부림 치던 시기였다. 당시 한국 사회의 주요 관심사는 성서회복 운동보다는 독립운동, 사회운동, 경제성자에 치중되어 있었다. 사회의 특성을 굳이 이름 붙이자면 어느 계몽 운동의 노래 가사에 나오듯이 "잘살아 보세 운동"이었다. 따라서 교회라고 하는 단체(?)는 사회 발전을 위한 하나의 부속물이었고, 자연히 성서로 돌아가자는 외침 역시 사람들의 관심사에 깊이 각인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해방 이전의 교회는 그에 맞는 일을 참으로 많이 하였다. 19세기 말기에는 한글 성경을 번역, 보급함으로 민족의 문맹 퇴치에 기여하였고, 학교를 세워 우매한 백성들을 일깨웠으며, 병원 및 사회복지 단체를 세워서 사회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을 뿐 아니라 그 치료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렇게 일천만 성도라는 거대함을 이룬 배경은 복음을 사랑하는 열심과 사회 계몽운동의 성공이 그 비결이었다. 

그러나 성경에 입각한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에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영혼 구원의 올바른 길과 올바른 예배의 방법을 모색하지 못한 채, 교파주의 (혹은 종파주의)에 빠져 분열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제야 말로 "성서로 돌아가자!"는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외침은 아주 적절한 외침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등 서구 사회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중요성이 그동안 한국교회와 사회에 크게 부각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이 땅에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 기초적인 복음조차 듣지 못한 토대 위에서 신약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쳤기 때문이다. 성서회복운동의 중요성이 교회와 사회 전체에 인식되기 이전의 일이었다는 것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에 장애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주: 미국의 경우 발전 스톤이나 토마스 캠벨 같은 이들이 나타나 "교회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신약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던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기는, 교회가 각성하여 변화되어야 한다는 대각성 운동의 공감대가 사회 전체에 형성되어 일어났을 때였다. 곧바로 그 영향력이 미국 사회 전체에 퍼진 점은 환원운동 성공 비결의 하나를 보여 준 좋은 예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순수하게 성서로 돌아가려는 운동을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동안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해온 것은 순교자적인 사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의 개신교가 비대해져 가면서, 교파교회 자체 내에서 교회 갱신운동, 예배 갱신운동 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교리적, 영적, 윤리적, 대사회적인 모습에서 많은 교회들이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교회 개혁의 순서로 보아 성서회복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는 신호이다. 그런 점에서 초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은 한국교회 전체의 미래를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은혜이자 섭리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두 번째 의미는 올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인내하고 수고하는 본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오랜 세월 한국인의 정신적 바탕을 일어 온 불교, 유교, 무교의 사회적 바탕 위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고수해 온 결과 거대한 기독교의 복음화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기독교는 그러한 틈바구니에서 성장하였다. 그중 극소수에 불과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기독교라고 말하는 대규모 교파 교단들 사이에서, 성서의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불이익을 당하여 왔다. 무지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단이라고 잘못 이해하기도 했고, 대부분의 한국민들 역시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알지 못하여 전도에도 많은 악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었다.그러한 와중에서 성서에 나타난 교회를 이루어가고, 가르치신 말씀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믿음과 인내의 본을 보였던 성도들과 일군들의 노고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노고는 결코 작게 평가할 수가 없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그들의 수고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없이 가르쳐 준다. 그들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올바른 신앙을 우리에게 물려준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좋은 신앙을 물려 주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이다.

세계의 교회 역사 속에서도 소규모의 신앙운동이 사회와 기존 교회 및 교단들로부터 박해 및 불이익을 당하였던 예는 비일비재하였다. 그러나 영원히 소규모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진리의 편에 서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16세기의 재세례파(Anabaptists), 17세기의 경건주의자, 모라비안 등이 그랬고, 심지어는 환원운동의 일군들이었던 토마스 캠벨, 알렉산더 캠벨 부자(父子), 발톤 스톤 같은 이들도 처음에 그들이 속했던 교단들로부터 제명 당하거나 탈퇴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특히 재세례파 같은 이들은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세례는 침수세례였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힘쓰다가 천주교와 종교개혁의 선두주자인 독일의 루터파, 스위스의 쯔빙글리파 등으로부터 협공을 당하여 공개적인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올바른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수고한 사람들은 교회 역사 속에 많이 있었다. 진리의 근거를 다수와 소수의 의견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두고 믿고 지키려 하였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말씀에 굳게 서서 성서에 입각한 신약교회의 모습을 이루어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시기가 알맞게 무르익었으므로 거두기 위하여 들에 나가 일하는 일군이 되어야 한다.[참고: 부산중앙 그리스도의 교회, {우리 교회의 반세기사}, 151-164쪽]. 



출처: http://sangdochurch.tistory.com/83 [상도동 그리스도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