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원 신학

그리스도의 교회와 환원신학

하나님아들 2024. 4. 17. 16:15

그리스도의 교회와 환원신학

장성우 목사
 
 

1. 서론

환원신학의 유무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많은 논란이 되어 왔다. 과연 환원신학(Restoration Theology)은 없고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만 있는 것인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육에 있어 환원신학의 발전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정체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교육기관의 성장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확립은 후진양성을 위하여 절대적 필요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교육에는 지식의 구조(Structure of Discipline)와 학습과정(Learning Process)이라는 두 가지의 엄연한 요소가 있다"고 제롬 부루너(Jerome Bruner)는 말하고 있다.

 

이 지식의 구조는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복음"이라는 말 속에 집약된다. 이 복음 즉 지식의 구조에 대한 분석의 사명을 신학이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은 신학에서 출발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출발점이 신학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신학이 없다고 하는 일련의 사고 때문에 교육의 전진을 볼 수 없었고 교회 교육이나 신학교육은 신학의 부재로 말미암아 교파 교회의 신학을 답습하는데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받아들인 환원운동에 있어서 그 운동의 시발점은 당시의 교회정치 구조의 모순과 교파의 혼란 속에서 도입된 비교파주의 운동이었다.[김익진, {신약교회운동}(참빛출판사), p. 24.]


역시 한국 초기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자들도 교파분열의 회의로 인하여 성서적인 교훈을 고수하는 환원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이신,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 전개,"(한길사), p.23.]

제임스 디 스마트(James D. Smart)는 "신학은 교회가 그 존재에 대하여 신중히 반성하고 하나님의 교회되기에 부족한 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철저히 검토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과 미국의 초기 환원운동자들은 하나님의 교회 되기에 부족한 점을 찾고 검토하고 토론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 환원운동의 구조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본 논문은 초기 환원운동자들이 만들어 놓은 내용 구조를 분석하고 오늘날의 뒤떨어진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회신학을 발전시키며 정립시켜 나가고자 하는 의도에서 연구하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 교육의 입장에서 교육의 구조인 신학의 요청이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음을 알게되고 기독교 교육 역사 속에서 그 시대마다의 교육의 내용구조가 확실하게 나타나 있음을 연구하여 오늘날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어서의 기독교 교육과 신학교육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기 위하여 본 논문을 쓰게되었다"라고 엄만동 목사는 그리스도의 교회 교육의 내용구조에 관한 연구에서 서술하고 있다.[엄만동, "그리스도의 교회 교육의 내용구조에 관한 연구,"(한국목회대학원, 석사학위논문), pp. 94-95.]

 

신학은 신학자들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는 대학 및 대학교에서 이와 같은 신학 과정을 제공하는 것이 인기가 되고 있다. 그 결과 신학자가 된다는 것을 칼 바르트(Karl Barth),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폴 틸리히(Paul Tillich),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및 기타인들에 관해서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인물들에 관해서 안다는 것이 아마도 도움이 될 것이며 또 분명코 그들과 접촉함으로써 하나님께 관한 우리의 지식이 풍성해진다. 그렇지만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에 관한 사상을 갖기까지는 소위 신학을 대치해서는 안 된다.[Fisher Humphreys, Thinking About God(Insight Press Incorporated, 1974), p. 9]

그리스도의 교회가 "신학이 없다"할 때 우리는 신학의 개념부터 분석해야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환원운동 자체 속에서 신학교육을 하고 있고 신학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은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으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인물 중심 신학을 사고 할 때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학이 없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의 규정과 성격의 신학을 말할 때는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을 환원신학으로 정확히 규정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은 있으나 환원신학(Restoration Theology)은 없다"고 하는데 신학화 작업은 하나의 운동으로부터 출발되고 있음을 알 때 동적 현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정적 요소인 Dogma를 신학적 요소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없기도 하고 있기도한 모순 속에서 앞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지금도 늦지 않았으나 우리의 환원신학 개발에 주력해야 하겠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속의 사람이이며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매사에는 사랑으로(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와 "성서가 말하는 곳에는 우리가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침묵하자(Where the Bible speaks, we speak, and where the Bible is silent, we are silent.)"는 환원운동의 초석이 되는 명언 속에서 제한과 자유를 공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속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을 가지 성서에 의한 제한과 통일 속에서 자유와 다양성을 그리스도인이 지니는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정체성이다.

미국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는 환원사상의 구현을 위하여 요한 웨슬레(John Wesley)의 사상을 추구하며 그가 주장했던 성서적인 신앙과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제임스 오켈리(James O'Kelly/1735-1826)가 조직화되면서 John Wesley 사상의 퇴색됨으로 감독정치에 회의를 품고 1793년 12월 24일 감리교 총회를 탈퇴하고 그 이듬해인 1794년 같은 환원사상을 지닌 무리들이 버지니아(Virginia)에 모였을 때 같은 동료인 라이스 해가드(Rice Haggard)가 우리는 성서를 유일한 신조로 받아 드려야 하며 자신들은 "그리스도인(행 11:25-26)"으로 불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Enos E. Dowling, The Restoration Movement (Cincinnati: Standard Publishing Co., 1964), p. 214.]

 

그들의 신학적 근거는 성서였으며 그 뿌리에서 기본 원칙을 채택되게 되었다.

 

(1)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다.(엡1:22-23)

이와 같이 ekklesia(에클레시아) 곧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관을 신학으로서 정립하였다. 예수님도 교회란 자신을 구주로 시인하고 구원의 도를 받아들인 무리로 사용하였다.

 

(2)그리스도인 이름은 성서에 가장 합당한 이름이다.

신앙의 대상으로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상대적 대상은 그리스도인이어야 하고 그에 대한 신앙규범으로 성서와 그리스도인의 품성(品性)의 완비는 교회 구성요소에 중요한 여건이다. 그러나 개인의 판단권리는 무든 사람의 특권으로 주장됐다. 이러한 성서 신학적 근거 위에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1794년 북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의 Chapel Hill에서 세워졌다.

그 때 버몬트의 의사이며 침례교인(Free Hill Baptist)이었던 아브너 죤스(Abner Jones)도 교파적 교의에 대한 회의와 종파심에 대한 갈등 속에서 인위적 신조와 인간적 교의를 버리고 신앙과 행위의 법측에서 1801년 Christian Church를 Lyndon에 세웠고 엘리아스 스미스(Elias Smith)목사도 같은 뜻으로 동조되었다.
이상과 같이 최초에 나타난 환원사상가들은 성경중심신학을 가지고 인위적 신조나 고백서를 권위로 인정하지 않고 신학의 보편적 진리와 자유를 구하였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선교 반세기를 지나면서 신학교육기관을 국내 유수한 기관으로 성장시키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신학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역사성과 현재성을 부정하려고 하는 강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초기적 환원운동자들은 순수성서 신학적 입장에서 교회와 구속사적 조명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그 후 발톤 스톤(Barton W. Stone)을 거쳐 토마스 캠벨(Tomas Campbell),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 부자 시대에 이르러 그의 신학 체계는 Alexander Campbell의 {그리스도인의 신학체계} (Christian System)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본 논문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환원신학에서 그 구조와 특성을 소개하고 특별히 환원운동가들의 면모 속에 흐르는 환원신학의 흐름에 대하여 분석하고 앞으로 우리 신학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특별히 환원신학에 있어서 성서신학과 교회신학, 예배신학이 지향해야 할 성경적 근거를 제시코자 한다.

지금 급변하는 세대 속에서 그리고 변화 무쌍한 신학 사조 속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학문적 자세는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거나 주체성을 상실하고 급진사상의 급류에 역류되거나 현대적 상황에 안주해 버리는 자세를 버리고 성서가 요구하는 신학, 교회가 요구하는 신학에 응답하는 발전적 신학 정립을 해야 한다. 본 논문이 오랫동안 환원운동의 중심과제가 되었던 신앙과 행위를 통한 구원신학, 그리고 예배를 중심으로 본 교회의 존재적 위치와 앞으로 신학교육의 방향 제시로 후진 양성의 시대적 요청을 재조명하면서 환원신학의 정립을 도모코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에서 개인을 중심으로 한 인물로 신학을 통용하는 오류도 범하지 않고 어느 교조적 발상에서 나온 교파적 시조화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성서를 중심으로 한 성서신학이며 그것은 성서적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마16:16) 하는 그리스도 앞에 고백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조직신학에 대한 견해를 살펴볼 때 우선 조직신학의 명칭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면 코너(W. T. Conner)는 기독교 교리(Christian Doctrine)[W. T. Conner, Christian Doctrine(Nashville Tennessee: Broadman Press, 1937)]라 했고, 멀린스(E. Y. Mullins)는 신조(Creed) 혹은 고백(Confession)이라 했고,

보이스(J. P. Boyce)는 조직신학이라 했는데,

알렉산더 캠벨은 기독교 체계(Christian System)라 했다.

우리는 "기독교 신학 체계"의 명칭하에 조직신학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학전반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환원신학으로 명확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의 신학으로 존재한다. 성수경 목사는 "초대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 요강"으로 명명하여 신학을 정리했고 최윤권 목사는 "신학교리"로 편집했고, 현재 한성신학대학에서는 교과목에 "환원교리"를 수강토록 강의를 신설했다.

2. 환원신학(還元神學)의 기초와 역사적 고찰

환원신학을 논할 때 교육기관과 유관하여 생각할 수 있다. 환원운동의 시작과 함께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성서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교육과정을 통해서 이행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알렉산더 캠벨은 1840년 Bethany College를 설립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인간 구원의 최대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베다니 대학을 세우는 것은 교육(지적, 도덕적, 종교적) 근거에 연유한 것이며 이는 곧 문학, 과학, 예술과의 관계 속에서 또한 환원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받은 자들이 세상과 교회를 다스려야 된다는 확신의 소산이다. 하나님은 재능과 인격과 교육을 겸비한 자들로 구원의 위대한 도구로서 사용하셨다.

 

베다니 대학의 이념적인 근거는 성서적인 것이요 이방인의 신화, 그레시아인과 로마인의 우상, 우화와 공상적 이야기가 아니다. 즉 오늘의 대학교육은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염세주의적이고, 도덕적이나 종교적이기보다는 세속적이며 나아가서 가증한 짐을 떠맡기고 있는 현상이다.[West. Earl Irvin, The Search for the Ancient Order. p. 280.]

환원운동의 초창기 지도자들인 켐벨 부자, 스톤, 스콧 등은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환원운동의 주체자들은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고 대부분 학교에서 강의하고 행정가로 일했다. 알렉산더 캠벨은 양질의 교육을 중요성을 인식하고 1836년에 "근원성과 유일성을 가진 성서에 헌신적인 사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신앙과 삶의 방법들과 훈련을 위하여 문학과 과학으로부터 유익을 얻어야 한다. 위대한 개척자도 교육받은 자들이었다."[Young. M. Norvel, A History of Colleges Established and Controlled by Members of the Churches of Christ. p.26]라고 했다.

 

환원신학의 기본 체계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죄인들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위로서 선포한 말씀 즉 신구약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유일한 신앙고백은 성서적 고백이며 인위적인 여하한 고백도 배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교리는 그리스도 가르침이 성서에 있음을 확인하고 효과적인 가르침과 변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지고 있는 진리체계는 어떤 독립된 모체개념들로부터 연역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만 환원신학의 체계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상의 신론, 인간론, 그리스도론은 완전성을 가지고 있고 그 계시가 포함하는 진리체계는 풍성하고 완벽한 것이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와 성경은 가장 위대한 것이며, 성경은 모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 하나님의 실체, 역사자체와 역사철학 등이 그 속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속의 진리를 세상에 전파해야 한다. 신학의 여러 부분들은 이 진리를 전파하는 작업에 기여하고 있다. 교의신학(Dogmatic Theology) 또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은 진리 체계로서의 제목을 제시할 수 있다. 루이스 벌코프는 제목을 (1)신론, (2)인간론, (3)기독론, (4)교회론, (5)구원론, (6)종말론 등이다. 이 교리들은 신학입장에서 성서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입장은 성서적 입장을 완전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Vantil, The Defence of the Faith. p. 142.]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기초는 성경이며 그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내용은 성경 자체이기 때문에 성경이 신학의 초석이 된다.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법측을 제시한 것이며 인간의 제약성에 조절된 하나님의 계시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 그리스도인 마음속에 조명되는 것이다. 대일 무디(Dale Moody)도 "그리스도 신학의 궁극적 자원은 언제나 신구약 성경에 있다."하고 "철학적 신학을 표방하는 사람일지라도 결국 성경적 신학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Dale Moody, The Word of Truth(Eerdman Publishing Co, 1981) pp. 2-3]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초대교회의 신앙이 이탈하고 변질되고 부패하여 오던 중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환원에 접근코자 했으나 더 큰 분열과 다른 이탈을 산출하는 비극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환원신학으로 Stone, Campbell 등에 이르러 운동으로서의 환원사상을 신학으로 정립하는 기초를 놓게 되었다. 대일 무디(Dale Moody)는 교회 전통의 주요한 두 가지 형태는 신조(Creeds)와 고백(Confession)이며 신조는 기독교가 분열되기 이전에 발전했고 고백은 분리된 교파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와 같은 신조와 고백은 신학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인위적인 신조와 고백의 창출과 변형을 용인하지 않고 성서적인 것 외에는 배격한다.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교리들을 신학의 자원으로 사용할 때는 그것은 성서이어야 하며 성서를 가르치는 내용이어야 하는 것이다.

 

멀린스는 "신학은 자연, 역사 및 심리학 또는 기타 자원에서부터 오는 진리를 배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은 기독교 사실 외에 그 자체를 세우고 이런 사실로부터 교리적 견해를 발전시킨다.[E. Y. 멀린스, {조직신학원론} 권혁봉 역(서울: 침례회출판사, 1982), p. 48.] 그렇다. 신학이건 교리이건 이 모든 것은 성경이어야 하며 성경적이어야 한다. 성경을 배제한 어느 것도 진리일 수 없는 신학인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특성은 성경적 신학이다. 죤 피 뉴포트(J. P. Newport)는 "성경은 신의 존재함을 전제한다"고 했다.[J. P. Newport, Layman's Library of Christian Doctrine, p. 74] 성경은 하나의 사실이며 체험이기에 이를 서술하되 조직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신학작업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자는 성경에 따라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자기의 추상이나 상징을 신학의 내용으로 삼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다."(요 12:49) 고 했다. 전하고 믿고 행하는 과정에서 신학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성서를 중심으로 전하고 믿고 기쁨을 느끼는 실제적 신학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성경을 토대로 한 신학이며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데서 침묵하는 신학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환원신학이며 성경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교회 교리 요약

그리스도의 교회 교리는 우리가 어떠한 신학을 가졌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신학체계를 찾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체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Aexander Campbell의 The Christian System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Alexander Campbell, The Christian System(Cincinnati: Standard Publishing Co., 1839.] 윈프레드 개리슨(Winfred Garrison)은 "Alexander Campbell's Theology"란 저서에서 "캠벨의 신학"(Campbell's Theology)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알렉산더 캠벨의 신학체계는 어떠했는가? 연구해보자. 그는 종교개혁이후 혼란되어 있는 분파 상황에서 신조를 버리고 개혁의 불일치를 버리고 예수를 주춧돌로 하는 교회를 세우는 운동의 체계를 세워 신조와 당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연합하고 분쟁하는 교회에서 평화회복을 할 것을 주장하면서 교회의 연합된 일치와 공동체의 교제를 이룰 것을 주장했다.

 

1. 기본 체계


(1)우주관
전체는 7천 5백 만개의 태양계 속에 수 억의 위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기적 무기적으로 구성된 체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리되고 응고되어 있어도 일정한 체계 속에 운행되고 있고, 하나님의 섭리와 창조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 한계는 유한한 것으로 이 우주는 인간의 이해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주의 창조의 지극한 단면이며 이 우주를 논함에 있어 인간의 지식은 극히 제한적이며 불합리하고 부적합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체를 이루고 있는 골격, 신경, 근육, 피의 흐름 등을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우주도 영원한 섭리의 계획의 유기성 속에 있는 것이다. 체계가 이루고 우주의 움직임 속에서 인간의 존재의 연약함을 다시 깊이 느끼게 하고 겸손과 겸양의 자세를 지니도록 만드는 것이다.

 

(2)성서관


ㄱ) 성서란 무엇인가?
질서의 하나님이며 한 분이신 하나님은 하나의 윤리체계 속에 있는 우주의 창조자이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의 육체적(Animi), 지적(Intellectual), 윤리적(Moral) 속에 있는 본질과 우주와 연계되어 있다. 고로 성경은 영원한 인간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와 의지가 담겨 있고, 인간에 관한 지식이 있는데, 그것은 물리, 천문, 지질, 정치와 형이상학적 실존인간 뿐 아니라, 윤리, 종교적 인간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성서 없이는 인간의 영적 존재성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의 바른 이해는 그 관념을 명확히 파악하는 사실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태양이 빛과 생명의 기원이며 원천이듯이 성경은 영적 영원성의 원천이 된다.

 

ㄴ) 성서이해의 원리
①역사적 배경
순서, 명칭, 저자, 날짜, 장소, 상황, 역사, 편집 등 순서의 중요성 속에 이해와 적용이 필요한 것이다.
②내용, 개념, 파악
교훈, 약속, 권고 등의 문안을 파악하여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직책은 무엇인가를 파악하여 말씀의 전제와 특성과 종교적 관련성에 적합한 적용을 하는 것이다.
③사용된 본래 언어의 연구
언어학적 원칙에 따라 그 내용을 연구하고 다른 책의 언어와의 관계를 연구한다.
④증언의 의미파악
그 내용 속의 증언이 사실적인가 비유적인가 영역(scope)인가 상황(context)인가를 파악하여 저자의 목적, 의도, 상황, 변천 등에 사용된 문구의 정확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⑤비유적 언어
비유적 언어의 유사점 조사와 특징, 종류를 판단한다.
⑥상징, 양식, 비유의 해석
그 법칙을 발견하고 예화의 요점 조사와 비교를 통하여 속성, 성질을 요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⑦말씀의 영적 이해
말씀 속에 지식을 통하여 영적이고 윤리적인 이해와 올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통찰력의 건전성을 지니며 겸손한 자세로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영혼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신관


ㄱ) 하나님
①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와 선하신 분이시며 그 본질과 완전성을 성경에 계시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가장 순결하시며 최고의 지혜를 가지시고 섭리하신다. 그는 또한 정의와 진리와 신성을 선포하시고 무한성, 영원성, 불멸성의 특징을 지니고 복음으로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신다.
②하나님은 존재의 일치(Unity), 영성(spirituality), 영원성(Eternity) 속에서 신으로 계시되었다. 그는 창조주로서 지혜와 능력과 선을 가지고 공의자로서 정의와 진리와 선함을 펼치시고 구속자로서 자비와 친절과 사랑을 행하시는데 전체로서의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불멸하시고 영원하신다.
③한 분의 하나님(One God), 한 분의 주님(One Lord), 한 분의 성령(One Holy Spirit)
신적 본질은 본질적으로 필연적으로 하나뿐이나 그것이 인격화하여 나타날 때는 복수적으로 표현된다. 서로 다른 사역 속에서 신성을 포함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삼위는 동일한 신적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 삼위일체를 수학적 단위로 아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 역시 수학적 단위가 아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속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수학적 단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러나 사물은 수학적 단수와 복수로 계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적 복수성도 첫째 아담과 둘째 이브와 첫 아들 가인에게서 셋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셋 속에 나타난 인격은 다양한 것이었다.

 

ㄴ)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성육신 하셔서 관념 속에서만 계시던 하나님이 표현된 관념으로 나타나 "육체가 되신 말씀"으로 "나를 본 자는 또한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는 인격적 표상을 이루었다. 인간 육체 속에 거하시는 말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주님이며 하나님으로 오셨다. 그는 실제적으로 사람의 아들(人子)이 되셨고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되시고 경배받는 신성을 포함하신다.

ㄷ)하나님의 영(Spirit of God)
Spirit of God는 Holy Spirit를 말하며 이 영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영이다. 성령은 한 하나님, 한 주, 한 영으로의 사역을 말하는데 교회의 창시자이며 성화자이며 위로자이고 그리스도인에게 생명과 생기를 주는 원리이다. 하나님의 신성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 육체 속에 나타날 때 영이며 영을 영화롭게 한다. 우리가 받는 침례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고 구원을 받게 된다.

 

(4)구원관
죄의 용서는 구원 교리 속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제자들을 복음을 가르쳐 죄에서 용서받게 하고 구원받았음을  선언하고 의인으로 호칭하여 "성화된 자"임을 "하나님과 화해된 자" "하나님의 가족으로 양자된 자"임을 선언하고 그들을 구원받은 자로 교육했다.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그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in) 그리스도 아래(under), ①용서받은 자 ②의로워진 자 ③성화된 자 ④화해된 자 ⑤양자된 자 ⑥구원 받은 자가된다. 구원은 생각의 변화로 보지 않는다. "복음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믿음의 순종을(the obedience of Faith) 위하여 만민에게 알려진 것이다."(롬 16:26) 구원 상태의 변화는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생겨진 행위(act)의 변화인 것이다. 고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①듣고 ②믿고 ③회개 ④고백 ⑤세례받는 단계를 말한다. 세례는 중생을 위한 죄 씻는 행위로 마태복음 19장 28절, "새롭게 되어"이며, 디도서 3장 5절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례의 행위없이 인격적인 중생을 말할 수 없는데 요한복음 3장 5절과 디도서 3장 5절은 신구교의 일치된 견해로 말하고 있다. John Wesley도 "세례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계약 속에 들어가며 이것은 곧 교회에 받아들여 지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5)인간관
가. 인간이란?
인간은 지상의 창조물과 제도의 완성에 대한 것뿐 아니라, 영적인 것과 신성한 생명에 관한 것에 대하여도 동일하게 마련된 양면성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경외하며 즐겁게 할 수 있는 존재이고 이 땅에서 행복한 존재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동물적 존재가 아니라 지적, 도덕적이며 순결하고 거룩한 존재이다. 아담의 반역으로 죄가 오고 주의 영광은 멀어졌고 죄악 속에 전율했다. 그리고 자신의 나신을 보고 부끄러워 했고 심판을 받는 존재가 되고 사형선고와 죄의 세습 유산을 가져왔다. 죄성과 부패 속에서 하나님의 지식과 계시된 뜻을 중재자를 통한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나. 인간과 하나님의 목적
①모든 하나님의 목적들과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 졌다. ②하나님께 감추어 있던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을 뿐 아니라 언약되고 체계화되었다.
하나님의 총체적 구원방법이나 복음은 성부, 성자, 성령의 계시된 특성들의 기초 위에서 목적되고 준비되고 계획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 위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선지자, 대제사장, 왕의 권세를 가졌고 그는 중보자로 보냄을 받았다. 그리고 새로운 통치를 위하여 영원한 평화, 사랑, 기쁨을 이루려 계시되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 애정을 가지고 영생을 주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첫째로 선택하였는데 그들은 큰 사랑 속에서 인간을 선택하고 사명을 맡겨 세우고 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 목적에 의하여 영적이고 영원한 축복을 인간자신에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은 그리스도안에 선택받는 명령앞에서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택의 명령 앞에 충성스럽게 그리고 확실한 소명으로 서야하는 것이다.

 

(6)그리스도관


가. 인간에게 오신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일과 우리가 받아들여 행하여야 할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오신 메시야는 은사요, 희생, 칭의, 성령, 영생, 성화 모두가 은사이다. 그리스도인의 육체적 생명과 위로를 위하여 천국으로부터 생명의 떡으로 아무 공로없는 우리에게 공급된 것이다. 비록 공로의 조건이 없더라도 본질이나 은혜 속에서 기쁨을 충분한 조건으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위로부터 허락하시는 은혜와 우리가 행하여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나. 그리스도의 속죄
죄를 위한 희생으로 그리스도는 속죄, 화해, 구속을 위해 오셨고 그것은 "제물의 피흘림을 통하여 이루는 신성하고 거룩한 예식"이다. 구약적 희생은 제물을 봉헌함을 의미하는데 특히 어린양을 속죄물로 사용했다. 고로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불렀다. 피 흘림 없이는 죄의 용서가 있을 수 없다. 희생의 제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며 인간의 죄악을 위하여 드려지며 제사장에 의하여 드려졌다.
이 희생은 Propitiation(화해), Reconciliation(조정), Expiation(대속), Redemption(구속)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이것을 통하여 사면되고 성화되고 죄로부터 구원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와 효력이며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희생은 우리에게 Justification(칭의), Sanctification)성화), Adoption(양자됨), Eternal Life(영생)을 가져왔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한 독특한 계시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참된 속죄를 통하여 ①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고 ②그리스도의 통치를 확대하고 ③증거와 보증을 통한 화해를 이루고 ④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위안과 평안과 기쁨을 주며 ⑤불멸과 영생 안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주어 형제로 화목케 하고 ⑥모든 죄악으로부터 막아준다. 이러한 속죄제를 통하여 새 하늘, 새 땅, 새 몸, 새 기쁨, 새 영광을 얻게 한다.

 

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성육신 되신 그리스도, 영감으로 쓰여진 말씀,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과 영광을 주시고 그 종들에 의하여 신약성경은 쓰여졌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의 희생 위에 칭의를 허락하시고 생명의 빛을 나타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하셨는데, 이 빛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하는 것인데 말씀 속에 진리가 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진리를 통한 자유를 허락하셨다.

 

라. 메시아의 통치
구속함을 받은 백성은 메시아의 통치 속에 있는 것이다. 그분은 죽으시고 제사장되시고 예언자되시며 우리의 전적 위탁을 부탁하시고 우리의 주가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권세와 통치권을 부여받고 만군의 주, 우주의 왕, 만물의 심판자와 보응자가되셨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이며 또한 성령의 주로서 통치하신다.
이상과 같이 속죄제가 드려지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이 땅 위에 나타나서 모든 지혜, 지식의 보화, 신성의 충만으로 계시되고 하나님과 중재자로 존재하신다.

 

(7)구원관


①믿음-믿음은 원인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확신이며 신앙은 또한 결과이다. 신앙은 믿음을 갖게 하는 진리를 의미할 수도 있다. 기독교가 주체와 객체에서 인격적 실제인 것처럼 구원의 본질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추상적 교리, 증언, 진리의 믿음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즉 구세주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확신 속에 낙착하지 못하는 어떤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은 이해없이 단순한 순종으로 설득되는 것은 거짓없는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이며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②회개
회개는 신앙의 결과다. 그리고 죄를 해결하는 결단이다. 이것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라 하고 "개혁(Reformation)"이 되는 것이다. 회개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기로 실제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증거에 대한 믿음의 결과이며 원인은 아니다. 참된 회개는 삶의 실제적 개혁 속에 완성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는 희생을 통하여 사죄를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형제와 화목한 다음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신다(마 5:23-24).

③신앙고백
"나사렛 예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고백의 독특성과 속성을 명시한 것으로 충분한 고백한 고백의 의미를 가지고 베드로에 의한 보존으로 이룩되었다. "이 반석 위에서" 베드로는 그의 이름과 머리 위에 축복으로 응답을 받았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이 기초(터)에 대하여 바울은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퉁이 돌로 은혜 성전의 기초를 두셨다. 하나님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포하시고 성령의 가시적 임재를 허락하시고 저주와 반역의 세상에 생명과 평화의 메시아를 보내셨다. 이 신앙고백은 인격에 대한 개념으로 성스러운 관계와 인자의 직무에 대한 개념으로 그리스도의 직무적 신분과 영광에 대하여 옹호하고 있다. 이 신앙고백 속에서 그 영혼을 하나님과 맺어주는 수많은 사상과 동기들이 있고 가장 정열적인 헌신을 할 수 있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보장하는 강력한 결속력을 이룰 수 있다. 교회 안에서 다른 신앙고백은 존재할 수 없고 이 하나의 근거 안에서 분열이 있을 수 없고 의롭다함을 얻을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신앙고백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구원을 얻기 위해 그 신앙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로 결속되어 성령의 일치를 주장하는 불변의 동기 속에서 한 주, 한 신앙, 한 세례를 가지고 있다.

 

④세례


가. 세례행위
세례행위는 법과 제도나 도덕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강제적 본질에서 나온 것이다. 세례는 Baptism이며 영어표기로 Baptisma, Baptismos이다.


A. 이것은 침수(immersion)의 뜻이며 적례(Sprinkling, 뿌림)나 주례(Pouring, 부음)의 의미가 아니다. 원어상 침수하다(immerse)와 침수(immersion)로 번역되고 주례, 적례가 아니다. Baptizo는 고대, 현대 모든 권있는 희랍사전은 침례(immersion)이고 적례, 주례가 아니다.
B. 라틴역, 영역, 독역, 불역, 사본은 거의 다 침수와 동의어로 번역했다. 그것은 분명히 강에서나 그 외의 장소에서 잠기게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C. 초대교회에서는 침례를 시행하였음을 로마, 희랍, 영국, 역사가들은 확인하다.
D. 강, 연못, 목욕장, 물 많은 곳에서 초대교회에서는 세례가 시행되었음을 주례, 적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물 속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나와 올라왔다(행 8:38-39). 요한은 많은 물이 있는 곳에서(요 3:23), 바울과 실라도 밤에 간수에게 세례를 베풀기 위해 빌립보 감옥을 나왔다.


 E. 세례는 예수의 죽음, 장사, 부활과 관련하여 장사와 부활의 상징으로 기록되었다(롬 6:1, 골 2:12).

 

나. 세례의 주체
세례의 주체는 회개한 신자들 즉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자들이 주체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 많은 고린도 사람은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고(행 18:8) 세례받고 믿었고 복음들은 것이 아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 11:6).

 

다. 세례의 의미
마가복음 1장 4절, "세례 요한이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전파," 24장 47-48절는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 사도행전 2장 38절는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갈라디아서 3장 27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고," 로마서 6장 3절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고," 골로새서 2장 12절은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15장 3절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로마서 4장 25절은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사도행전 22장 16절은 "이제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희 죄를 씻으라." 고린도전서 6장 11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세례는 추상적인 효력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명백한 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깊고 진실한 회개 없이는 물 속에 잠기는 것을 포함해 어떤 행위도 평화와 사죄의 축복을 우리에게 보장할 수 없다. 믿고 회개한 자에게 세례는 죄악으로부터의 구제를 받는 수단이다.

 

⑤회심, 중생
침례를 받고 완성된 변화는 "살리심(being quickened)," "소생됨(made alive),"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김(passing from death to life)," "거듭남(being born again),"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남(having risen with Christ)," "주께로 돌아감(turning to the Lord)," "비췸을 받음(being enlightened)," "회심(conversion)," "화해(reconciliation)," "생명 얻은 회개(repentance unto life)" 등의 표현으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새 창조"라 불리는 위대한 변화인 것이다. 이 변화는 "애정의 변화(a change of affections)," "상태의 변화(a chage of state)," "삶의 변화(a change of life)"라고도 불리어진다. 이것은 "한번 비췸을 얻고"(히 6:4),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요일 3:14), "너희의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골 3:1),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 "생명 얻는 회개"(행 11:18)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변화이다. 이것은 중생, 거듭남, 신생이며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빛의 비침을 받고 마음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관계와 도덕적 변화, 그리고 삶의 태도가 의와 진정한 거룩함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⑥그리스도인은 사죄, 칭의 성화, 양자됨, 구원의 사람, 유죄 선고에서 칭의, 거룩하지 못한 곳에서 성화, 자신 상실에서 구원, 이방인에서 양자되었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들이 사죄받고 칭의 받고, 성화되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양자되고 구원받는다. 신앙과 참회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보다 신앙의 열매로서 행위인 결과이다.

 

⑦성령의 은사
"오직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성령이 - 그의 위에 머물렀도다"(요 1:32).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 2:4).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하나님의 영과 말씀은 구별되지 않고 성령이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사역 속에서 행하시는 무엇이든지 말씀 속에서 행한다. 우리는 추상적 성령이나 추상적 말씀을 믿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 성령과 말씀을 믿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의 인격형성, 의로운 자의 부활 완성, 영생성취, 우리의 소명과 선택의 확신을 위한 영적 강건과 생활의 수단활용에 대한 명령은 우리 편에서는 은혜와 전념과 노력의 모든 수단으로 우리 하나님의 성령의 모든 도움을 요청하면서 권면, 훈계, 경고를 받는 것이다. "상태와 관계"가 관련되는 한 성화는 세례와 동시적이다. 그리고 성화는 거룩한 인격 형성이다. 예수는 "거룩하신 아버지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하나님의 영은 성령(Holy Spirit), 거룩의 영(the spirit of holiness)라 불리우는데, Holy Ghost(성령), Spirit(영)의 어구는 성경에서 94번이나 찾을 수 있는데 모든 유대인의 책에서는 단지 3번 찾아 볼 수 있다. 성령은 모든 우리의 거룩의 완성자이다. "성령은 우리 연약함을 돕고"(롬 8:26), "그 영광의 품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신다"(엡 3:16). 그리스도인이요 성령의 전이며 진리로 그들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과 감화로 일으킴을 받고 활력을 얻고 격려 받으며 성화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계시하신 뜻을 따라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그리고 이 은사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받거나 모든 대적에 대항하여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도 없다. 그리고 선한 싸움의 전우들은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하고 인내로서 기다리며 감사의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 믿고 회개하고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교통하신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이다. 신앙, 회개, 세례를 통해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의 바른 통치를 받고 현재적이며 영적이며 영원한 구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인 우리에게 역사하신다.

 

(8) 교회관
①그리스도의 몸-주의 회중(Congregation) 또는 교회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독특한 공동체를 이룬 제도는 "회중(Congregation)"이나 "교회(ekklesia)"라 불리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다.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나 하나님의 집은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와 구세주로 인식하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그 자체를 세우며 신약이 권위를 부여한 단체 속에 연합하고 명하신 의식과 계명으로 살아가고 구성된다. "하나님의 회중"(the Congregation of God)은 특별한 공동체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하나의 공동체이다. 그들 독특한 주의 회중들은 공유의 주, 한 신앙, 하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이 거룩한 교제와 교회들의 협력은 서로 친숙하고 세상 끝 날까지 동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역간의 조화와 협력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한 부분이다. 이것은 조직으로 하나님의 권속(가족, family)이다. 언약의 방주처럼 예배의식이나 교훈 윤리적 선악의 법칙은 영감받지 않고 손을 댈 수 없는 것이나 어느 지역 교회에 등록할 것인지 주일에 한번 이상 모일 것인지, 어떻게 앉아 예배 드릴 것인지 등 성경에 계시된 것 외의 것은 자유롭게 정황에 따를 수가 있는 것이다. 사도시대부터 지금까지 협력적인 교회협회(Co-operative Association of Churches)는 지역 명칭의 교회들로 협력을 이루고 있다. 협력의 필요성은 사람들의 협회에서도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하늘 섭리의 일부이다. 세속적이고 교회적인 양면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열성, 경건, 인도주의로 잘 훈련되고 공동으로 대처하며 연대적 행위의 결과를 내는 것이다. 많은 공동체가 이루어지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혹은 교회의 일부여야 하는 것이다. 정치적, 상업적, 학문적, 윤리적, 종교적의 일정수의 독립적이며 독특한 공동체들은 자신의 상호유익과 보편적 선에 대한 타협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견해는
로마에 있는 모든 성도들(롬 16:5,10,11,14,15)
이방의 모든 교회(롬 16:4)
그리스도의 교회들(롬 16:16)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고후 1:1)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고전 1:2)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한다(고전 16:19)
이상 모든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오직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개인적으로 그리고 상호적으로 구원에 모든 문제를 협력하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②기독교 사역
가. 성직
기독교 공동체의 지속적이고 변치 않는 사역을 감독들, 집사들, 전도자들로 이루고 있고 각 직분에 은사를 제시하나 오직 하나의 질서 속에 있는 것이다. 각기 유기적 관계 속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각기 중요성을 가진다. 감독은 통할하고 가르치고 공동체를 교화하여 지식과 이해로 주의 교회를 양육하고 집사와 일군들은 관리자, 분배자, 청지기, 문지기, 사자로서 봉사직분을 가지고 있고 전도자는 세상에 파견되어 전도의 직분을 가진다. 장로들의 임직은 교회업무 관리를 위한 것이고 교사들은 가르치는 일, 목사들, 목양자들을 말하고 교회의 장로회(Presbytery)나 장로직(eldership)의 안수는 전체 공동체가 선택한다. 그리고 교회 선임자들은 거룩한 손을 얹어 성스러운 약속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와 금식으로 시행되어야 한다(행 6:6; 13:3; 16:23). 공동체 교회, 믿는 자의 무리는 공권력의 근원이다. 이 권력은 그 몸 자체에 있고 일군들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나. 규율
진리 안에서 조직체가 아니면 어떤 회중도 규율이 있을 수 없다. 몸과 지체는 유기적이다. 사실과 법은 모든 규율의 으뜸이며 그것은 항상 참된 증거와 범죄자의 자백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다. 피고인이 회중에 호소한다면 그 경우 재고 되어야 하고 후속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며 증거가 채택되어진다. "범죄한 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모든 규율의 초기 단계는 공개되는 것에 신중을 가지도록 하고 최종 판결에서는 참석하기를 원하는 모든 회중 앞에서 결정해야 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고전 10:23). 법 그 자체는 실제적으로 기껏해야 어떤 합리적 목표에 적합하고 그 발표되는 때에 전제된 하나의 방편 즉 수단일 뿐이다. 결국 모든 도덕법의 원리는 사랑이며 이것만이 합리적이며 인간적인 행복을 이끄는 유일한 방법과 수단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제정하신 예배법 예식 등은 자유재량에 의한 것이 아니다. 사랑의 법은 종교, 윤리, 방편의 최고의 법이다. 법전없이 백성을 순수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지킬 수 있는 법전(Code of Laws)은 없으나 영과 혼과 몸을 지킬 수 있는 최고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③기독교 의식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기독교 의식을 준수하는데 그것은 세례와 성만찬이다.

가. 세례
1)세례의 중요성
"믿고 세례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막 16:1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세례는 죽음, 장사, 그리고 죽은 자들로부터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표상하는 상징이다(롬 6:4-5).

2) 세례의 의미
세례는 그리스도의 권위, 복음전파, 신앙, 회개, 고백, 죄의 용서, 성결, 새 피조물, 영적출생, 구원,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와 부활, 그리스도로 옷 입음, 새생활과 관계가 있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세례는 회개하는 신자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바른 관계로 이끌어 준다(마 28:19; 요 3:5). 세례는 죄의 용서를 받는 조건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의 조건이다. 세례는 우리가 용서를 받는 표시와 조건이다. 세례는 하나의 출생이다(요 3:5). 세례는 죽음, 장사, 부활, 출생의 상징이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명백한 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깊고 진실한 회개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 기독교의 세례는 회개가 전제되어야 함으로 유아세례는 적용될 수 없다.

 

3) 세례의 행위
세례의 법은 대위임(마 28:18-20)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주어졌다.
ㄱ)용어의 뜻
밥티조(Bpatizo)의 뜻은 "잠그다," "가라 않히다," "살짝 담그다"란 뜻이 있다. 침례(immersion), 주례(pouring), 적례(sprinkling) 중 하나만 시행해야 하는데 주례는 헬라어로 취오(cheo)이며 적례는 헬라어로 라이노(Raino)이다.

나. 주의 만찬
1) 의식의 본질
성경은 주의 만찬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그것을 준수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영적생활의 근원으로 인식한다. 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고 오실 때까지 죽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기념식이다(고전 11:26).

2) 알렉산더 캠벨의 일곱 가지 명제
아래와 같이 7가지로 말했다.
①이 땅에는 하나님의 집이라 불리우는 집이 있다.
②하나님의 집에는 언제나 주의 상이 있다.
③오직 하나의 떡이 있어야 한다.
④감사와 기쁨과 죽으심을 기억한다.
⑤"떡을 뗌"의 제도다.
⑥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다.
⑦"주의 만찬"은 예배의 일부분이며 회중의 교회이다.

 

(9)종말관
①기독교의 소망
영생의 소망, 곧 새 몸,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사회, 새 기쁨이다.
②악인의 운명
악인은 심판날이 있고 멸망의 날이 있다. 사망과 음부가 있고 둘째사망은 불못이 있다.[최재운, {알렉산더 캠벨의 환원 체계](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 서울지방회, 1987); 김익진,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에 관한 연구"(한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8)]

4. 환원신학의 미래적 방향제시

환원신학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하여 현재 그리스도의 교회신학 동향을 살펴보고 비판하여 미래적 방향을 정하여야 한다. 신학이 없다고 하는 비판적 여론은 신학정립 없는 교육으로 교육의 현주소를 잃어 버렸다.

 

(1)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 동향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은 그 집단의 구성요인이 되는 교인의 질적 상황에 의하여 좌우된다. 일제 치하에서는 기독교 연합단체와 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보수적 경향이 강하여 핍박받았으며 기독교 연합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다"하는 결의의 대가로 교회문을 열고 예배를 드리게 되고 많은 교단들은 그것에서 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합회와 동조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지하교회가 되어 교세 확장에 실패했다. 그러나 신앙의 지조를 꿋꿋하게 지켰다.[성낙소, "나의 자서전," 1952.]

1960년 유신체제로 사회 전체가 경제발전을 위한 방편으로 중앙집권적이고 독재적 체제로 강화된 입장에서 개교회주의적 성향과 민주적 성향이 강한 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부흥될 수 없는 여건이 당시 상황 아래서의 형태 및 구조였다. 그러나 나라가 민주화되면 될 수록 총회정치와 중앙집권적 교회는 빛을 잃게 되고 민주화된 교회, 회중교회, 조합적 교회가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미국의 환원신학은 알렉산더 캠벨의 불어,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에 능통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특히 기독교 체계 신학 또는 조직신학(Christian System)은 그의 해박한 지식이나 뛰어난 암기력으로 성경을 통달하여 미국의 학문연구의 자유와 대학의 자유의 고귀한 정신과 접목을 이루어 환원신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미국의 학문연구의 자유와 대학의 자유는 확고하여 이런 전통의 계승은 신학의 자유화에 의한 계승으로 이어지고 환원신학의 정착은 환원운동과 함께 지속적인 꽃을 피우면서 열매맺게 되었던 것이다. 환원운동이 일어나던 그 시절의 미국의 종교계는 편협적이고 교파적 분열로 오늘 우리의 실정처럼 큰 괴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때 환원신학을 토대로 한 환원운동가들이 출현한 것이었다. 기존 종교체제를 부정하고 종교적 도덕성의 회복을 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위대한

환원신학은 싹트게 되었다. 1983년 환원사상(Restorational Thought)을 발간했던 그리스도 신학대학 기준서 학장은 창간사에서 한국의 환원운동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930년 11월 29일 처음으로 환원의 씨앗이 떨어진 후 반세기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신약교회 운동은 성서적 확신이나 사상적 이념이 없는 생활의 방편으로서 시작된 종교적 구걸운동이었다. 말씀의 선교와 진리의 증거보다도 선교자나 피선교자가 똑같이 선교비 모금과 사용에만 깊은 관심을 가졌던 비적자운동이었다. 진리를 주장하고 수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순교자적 신앙운동이 아니라 개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종교운동이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로 환원하기를 갈망하였지만 말씀과 사랑이 결여된 이 운동은 결국 꿈도 비전도 없는 하나의 교파운동으로 전락되었으며 환원 동지적 형제애도 믿음과 신의도 없는 다툼과 정죄만의 분파운동이 되었다. 환원사상의 진실이 제외되고 형식과 형태만 전달된 환원운동은 비교파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군소 교파운동이 되었으며 우리들의 주장과 호소는 형식주의자(Legalistic)로 낙인찍혀 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땅에 환원운동의 자국은 있으나 뿌리는 내리지 못하게 되었으며 교파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는(고전 1:10-17) 있으나 비교파로서 성서적 교회는(롬 16:16)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 안에 있던 우리는 신앙의 번지수를 잃은 소외된 종교적 신생아가 되어버렸다.[김익진, {신약교회 운동사}(서울: 참빛출판사, 1986), pp. 302-303.]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독선적 성서 교리적 울타리를 치고 무조직의 교리를 아집적 방법으로 해석해 환원운동자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썼으며 장기적 교권을 누리기 위해 선교금과 신학의 울타리를 이용했던 것이다. 자기 나름의 창조해낸 어떤 형태의 틀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이단자 취급과 소외당할 수 밖에 없는 종교적 군주시대를 사는 동안 우리들은 피차 불신과 단절의 뚝을 높이 쌓아갔다. 말씀과 사랑의 생명력이 넘쳐흐르던 초대교회로 환원하기를 갈망하던 형제들은 이같은 문제들 속에 신앙적 아픔을 감내해야만 되었으며 그렇지 못하면 떠나가야만 되는 종교적 희생자가 되었다.[Ibid., p. 303.]

오늘 우리 신학을 지키는 자들 속에 자각은 한국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대학 교육의 확립과 함께 싹트게 되었다. 시대적 요청이 있고 학문의 요람지로서 신학교육의 정착이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환원신학의 연구가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오늘 환원신학이 가지고 있는 고충은 역사적 비평적 방법을 통한 학문 즉 "학문 지향적 탐구"와 아울러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조화 있게 이루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또한 환원신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으로 미국에서 1900년 초 제자교회운동을 주의 깊게 연구하여야 한다. 제자교회는 오늘 세계 속에 Ecumenical Movement(에큐메니칼 운동, 교회연합운동)하는 교회로 잘 알려진 그리스도의 교회 중의 하나이다. 주장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그리스도교 신앙(Christian Faith)은 좀더 호의를 받는 발언의 기회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재 진술되고 재 해석되어야 한다. ~ 하나님의 메시지를 제외하고 현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관점에서 수용되어야 하는데 예수의 신적의식(神的意識, Divine Consciousness) 등 몇 가지 본질적 요소들은 변질 없이 다루어져야 하고 수용되어야 할 것은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②기독교의 본질은 교리적 신조에 얽매인 고정된 인식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는 인식의 표현이다. ~인간의 인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은 단지 믿고 따라야 한다는 주장들과 반드시 일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신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며 가슴속에 품고 있던 믿음이 솟아날 때 표현되는 것이다.

③현대과학은 기독교 안에서 영속적이고 중심적인 가치가 되는 것은 밝혀내고 진술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 진화론이 환원사상에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나 기독교가 간직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방법의 과정을 현대과학으로 하여금 설명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④성서는 초자연적인 간섭이나 영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시대와 현장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하여 자료가 수집되고 개정과 가납(嘉納, acceptance) 등의 오랜 과정을 거쳐 생성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 모세오경에 모세 저술권 문제, 이사야서 단일성 문제, 성서내용과 다른 자료들에 대한 수용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⑤성서의 기적 즉 홍해도하, 동정녀 탄생, 부활 사건 등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 실제적 사건으로 인식하는 초자연적 요소와 현대과학이 같이 수용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토대에서 발달된 진보주의 신학은 계속적으로 미국 환원교회에 수용되고, 1869년 L. L. 핑커톤(Pinkerton)은 "이성과 계시"(Reason and Revelation, 1868)에서 밀리건(Robert Milligan)의 영감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 프랑스와 독일의 합리주의에 대하여 롱건(George W. Longan), 알렉산더 프록터(Alexander Proctor) 등이 수용하고 "사도시대"(Apostolic Times, 1869-1872)란 논문에서 라드(Moses Lard)와 맥가비(J. W. McGarvey) 등이 이에 비판을 가했다. 1883년 이삭 에레트(Isaac Errett)는 "성서야말로 하나님의 의지의 진실한 전달체이며 확고한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1885년 롱건은 미주리주에서 "과학적 방법론"을 강연했다.

보수적 환원운동가이며 성서대학 학장이던 맥가비가 1911년 죽자 그 후임 학장겸 교수인 캘호운(Hall L. Calhoun)의 사임후 1917년부터 진보주의가 환원운동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진보주의 신학파의 일부가 제자교회로 결집하게 되었다.[윌리암 우드슨, {환원운동에 있어서의 자유주의의 발달} 김익진 역.]

이와 같이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이에 진통을 겪으면서 양극화 되는 현상을 일으켰고 환원신학의 정체성을 재조명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방향을 정립해야 할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2)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방향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기독교의 신앙과 행위를 바탕으로 한 환원신학임을 확실히 하여 앞으로 방향에 대한 제시를 목적으로 기술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교회 신학이며 예배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설립하시고 예배 속에서 세례를 행하시도록 하여 인간을 구원하신다. 오늘 신학의 양극화는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신학에도 도입되어 보수적 교회는 성령위주의 신학 은사위주의 신앙으로 성령론 쪽으로 치우치면서 심령부흥, 교인증가, 교회의 외형화로 치닫는가 하면 진보적 교회는 사회복음적 신학을 주장하고 인간화와 사회화에 중점을 두어 개인의 구속과 화해를 약화시킨다. 대일 무디(Dale Moody)는 급진주의 신학(Radical Theology) 가운데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추상적 합리주의(Speculative Rationalism)로 철학적 신학으로 구속사적 신학의 실천적 성격을 빼버린 신학으로 전락되고 비신격화의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와 사신신학의 알타이저(Thomas J. J. Altizer)도 급진신학이다. 또한 그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기독교 신학을 "위에서부터"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의 신학은 "밑으로부터" 예수의 부활과 함께 시작한 신학이라고 했다. 몰트만(Jurgen Moltmann)의 희망신학(Theology of Hope)은 성서신학이 아니라고 했고, 몰트만을 중심한 미래지향적 입장의 주창파들은 역사와 기독교 전체를 순전히 종말론적 입장에서 보는 종말론적 우선주의를 낳게했다.

이상 모든 것은 신학 조류에서 탈선적, 독선적, 고립적 신학인 것이다.[권혁봉, {복음과 실천}, 제10집(침례신학대학교), pp.103-104.]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신학은 교회신학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를 통하여 성례를 행하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교회의 목적이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중심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최종적 목표가 하나님의 통치의 핵심인 교회인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예배, 전도, 양육, 봉사뿐 아니라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 자체가 목적이지 다른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불러 뽑는 무리들의 모임"인 것이다. 한스 킹은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가르치는 전비(Vor-zeichen)"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온전한 의미의 교회는 교회자체에 교회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향하는 목적에 있다"고 하고, "교회는 따라서 교회 자신을 목적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반면 정통 보수파에서는 "교회는 왕국을 촉진하고 확장하기 위한 하나님의 대행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세상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양면성 속에서의 계시인 것이다. 세상과 대립 개념에서 하나님 나라지만 나아가는 교회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공상의 존재상태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제도이며(Divine Institution), 신령한 유기체(Spiritual Organism)이며 피로 값주고 얻은 기구(Blood-bought Band)이며 민주적 기관(Democratic Organization)이다.[Dale Moody, The Word of Truth(Grand Rapids: W.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1), p. 30.]

교회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이요, 교회 속의 신학이며, 그 목적은 교회의 능동적인 존재를 위한 것이며, 교회로부터 이루어지는 신학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신학은 실천신학의 방향으로 발전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초대교회가 예시하신 교회를 확립하고 그 속에서 구속사적 사명을 완성하는 기독교적 전제를 가지고 기독교 교리를 정리하는 성경에서 유출된 성경중심의 신학으로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인위적 조건적 신학이나 철학적 실존적 신학으로부터 성경중심적 신앙을 회복하는 신학으로 정체성을 가지고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5. 결론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의 유무와 정체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있고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환원신학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환원신학은 성경적 기초를 가지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적 신학인 것이다. 환원신학의 주요 교리 즉 신학의 내용은 성경을 중심한 교회신학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말씀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신학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세전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교회일 찐데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든 생각과 활동은 교회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인본주의 신학, 신본주의 신학, 성결위주 신학, 은사위주의 신령주의 신학 등 다양성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성서로 돌아가자는 신학"으로 생활 속에 복음을 강조한다.

결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은 생활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고 적응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강조하는 신학이며 운동인 것이다. 그것은 계시된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구성된 기독교 자체라는 체험을 분석, 해석하면서 종합 정리하는 실천적 신학임을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 문헌

<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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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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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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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과 잡지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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