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서의 “쉼” 이해
최 종 진 (서울신학대학교 교수/구약학)
스트레스 속의 현대인
오늘 우리는 급격하고 신속한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의학적으로, 변화가 있는 곳에는 스트레스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위험”과 “위기”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체 내부의 기능은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주어진 변화(스트레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대처하여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미묘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이런 육체적, 정신적인 변화가 더욱 지나치면 ‘변태’나 ‘변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암세포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외적 내적 요인에 의해 내 몸의 정상 세포가 스스로 규제할 수 없는 암세포로 변화된 것이라 한다.
쉼의 필요
이런 변화가 주는 스트레스는 쉼을 원하게 한다. 성서도 인간을 쉼이 필요한 존재로 보고 있다(마 11:29). 하나님도 창조라는 엄청난 변화에서 쉼을 필요로 하셨다. 그래서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3). 그 쉼이 인간에게도 필요하다고 보아 그 날을 안식일로 하여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현대인에게 쉰다는 사실처럼 반가운 것이 없다. 왜냐하면 바쁘고 피곤하게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쉼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창조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다. 현대인이 쉬지 못하는 이유에는 바쁘다는 구실 외에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이기적 사고가 깃들어 있다. 쉬는 것을 말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현대인은 계속 바쁘다. 그는 자기가 자는 동안에도, 더욱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세상일은 여전히 잘 진행되고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그래서 이 쉼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게 된다(창 2:2-3).
세상이 움직이는 것은 잘 쉴 줄 아셨던 안식일의 주인인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쉬신 시간에 온 만물이 우리에게 더욱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다가온다. 쉼은 일(창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는 이 대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쉼을 배워야 한다. 이 날의 하나님의 쉼은 피조물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담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피조물과 함께 사귀기 위해 안식을 필요로 하신다.
쉼의 오해(誤解)
안타깝게도 현대인은 이 안식을, 쉼을 잃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쉼과 안식을 잃은 것과 관련 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노래방이나, 디스코테크를 찾아 시간을 소리로 채우고, 취하도록 마시거나 밤새도록 고스톱을 치지만 그것으로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는다. 고요가 없는 곳에 쉼이 있을 수 없고 쉼이 없는 곳에는 창조가 있을 수 없다. 시내산 아래서는 요란스런 반동이 일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기도하며 쉬고 있던 모세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여유로웠던 것처럼 각자의 고된 일터에서 쉼의 얼굴로 사람들에게 여유를 보이며 쉼을 나누어주는 얼굴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런 여유와 쉼에서 우리는 온유와 안식을 얻게 된다. 여유를 잃은 현대인은 성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쉼을 찾아야 한다. 안식일을 찾아야 한다.
구약의 시간 이해
구약종교는 시간의 성화(聖化)에 목표를 둔 시간의 종교이다. 공간적 인식에는 시간이 일정하고 반복적이며 동질적(同質的)이지만 구약성서는 시간의 다양한 특성을 지각하고 있다. 시간은 사건이 포함된 흐름을 말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사적 사건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일어나는 시간이다. 그래서 똑같은 두 개의 시간은 없다. 구약은 그래서 시간 속에 있는 거룩함에 애착을 가지며, 거룩한 사건들에 애착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께 속한 날에 그 하나님을 만나는 제사와 연결되어 있다. 거룩이란 귀한 단어가 창조 이야기의 끝에 쉼의 내용과 함께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 야웨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구약의 창조 기록에는 공간 속의 어느 장소적 대상(특정 지역이나 건물)에 거룩함의 특성을 부여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시간에 적용되고 있어 의미심장하다. 쉼은 장소도 중요하지만 시간적 여유와 질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무수한 사건과 일 속에서 쉼을 얻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끝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안식, 쉼의 의미를 간략히 살펴본다.
구약에서의 쉼의 의미
창조에서의 안식의 의미는 창 2:2-3에 나타난다. 여기에 주동사 4개가 나오고 모든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이다.
1)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셨다(לכיו:2절)
2)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תבשׁ: 2, 3절)
3)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셨다(ךרביו:3절)
4) 하나님은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שׁדקיו:3절)
첫째로, 쉼의 배경과 근거는 일의 완성, 또는 마침과 직결된다. 1번에 사용된 לכי은 “완료하다, 완성하다” (complete), “끝내다, 마치다”(finish)의 뜻을 가진 동사 הלכ의 Piel waw 연속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이다. 하나님이 안식하게 된 근거는 1장의 천지를 창조하시고 6일간의 만물을 지으신 창조행위와 밀접히 연결되고 있다. 6일 동안의 구체적 일을 끝마침이 전제되고 있다. 천지 만물을 이루기 위해 하시던 엿샛날까지 일을 다 마침이 결국 참 안식을 가져온다. 그래서 진정한 안식은 어떤 일의 목표를 성취한 다음에 얻어지는 쉼일 때 가능하다. 일이 완수되었을 때 거기서 느끼는 즐거움을 말한다. 한편 이 하나님의 휴식은 그 휴식에 인간이 참여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희구하신다(히 3-4). 오늘 자기가 이루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하고 거부한 자에게는 진정한 쉼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쉼은 “휴식”과 일로부터의 “분리”와 “재충전”의 뜻을 간직한다.
2번에 “쉬셨다”는 תבשׁ (Kal 3인칭 남성 단수)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이는 1) “노동, 일로부터 쉬다, 땅을 개간하지 않고 놓아두다”로 “쉰다”, “휴식하다”는 의미이며 2) “멈추다, 끝내다, 중단하다”, “자신의 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다”로 자신이 하는 일을 그치고 일단 그 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여 새로운 차원에 머무는 것이며 3) “장래를 위하여 따로 남겨 주다(put away)”, “저축하다”로 내일을 위해 재충전한다는 의미가 있는 단어이다. 창조 사역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쉬셨다”는 의인법적(擬人法的) 표현은 인간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역설적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의 연결선상에서 인간에 쉼을 주시는 성별한 축복의 상징으로, 창조의 완성을 축복으로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 안식의 의미는 복됨을 함축한다.
3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렛날을 복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ךרבי는 “몸을 구부리다”(to bend), “무릎을 구부려 찬양하며 숭배, 예배하다”(to adore, to worship by praising on bended knees(시 10:3, 수 24:10), “…을 신성하게 하다”, “신이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다, 축복하다”(to bless), “인사하다”(greet, salute) 등을 의미하는 동사 ךרב의 Piel waw 연속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로서 피조의 세계에 풍성한 결실과 번영된 삶을 주셨고 행복과 성공의 시간들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런 축복의 활력을 부여하여 인간존재가 풍성케 되는 능력을 새로이 공급하는 날로서 안식일의 쉼을 뜻한다. 한편 하나님이 인간을 확인하고 만물의 영장으로 인정하고 대우하여 축복적 존재의 의미를 갖게 하는 안식이다.
넷째로, 이 안식일을 거룩케 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4번).
구약은 거룩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보다는 누가 거룩하냐를 묻는다. 야웨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께 속한 것이 거룩한 것이다. 안식일이 왜 거룩하냐면 야웨께 속한 날이기에 거룩하다. 이스라엘 땅이 왜 성지(聖地)냐면 하나님께 속해서 거룩한 땅이다. 즉 구별되어 하나님께 성별된 날이기에 안식일이 거룩하다. 이 하나님께 속한 시간이 참 안식이 되고 복이 되고 참 쉼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 그의 통치권 안에 있어 그의 평강과 희락을 간직할 때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참 쉼을 얻게 된다(시 23).
구약, 혹은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거룩함의 관념이 공간으로부터 시간으로, 자연의 영역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사물에서 사건들로 서서히 이동되었다. 신성함의 특질은 물체의 알맹이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하는 행위와 하나님과의 지속적 관계에 의한다. 예언자들도 “야웨의 날”을 “하나님의 집”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강조한다.
안식일은 계약의 상징적 물체나 부적들이 불필요하다. 안식일 자체가 계약의 징표요 상징이다. 안식일에 모든 영혼들이 거룩함 속에 부활하는 소생의 활력을 얻는다. 거룩한 시간이 우리 인간에게는 참 안식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날의 시간이 참 쉼으로 표현된다(시 84:10). 선한 한 시간이 일평생의 가치에 대등할 수가 있으며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피함으로써 잃은 것들을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순간에 회복 받을 수도 있다.
여기의 안식은 단순히 쉬는 것만이 아니라 예배와 더불어 미래를 위한 재충전의 기회를 의미한다. 이 안식일은 안식년(채무 면제, 종의 해방)으로 그리고 희년(땅 안식, 토지 재분배, 노예 해방, 속죄, 속량)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오직 시간의 성화를 통하여 시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변장한 영원이다. 인간의 과업은 공간을 정복하고 시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안식일에는 시간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룩함에 동참하라는 호소를 받게 된다. 심지어 영혼이 시들고 그리하여 꽉 잠긴 목구멍으로부터 단 한 마디의 기도가 나오지 않을 때에도 안식일의 청아하고 안온한 안식은 우리를 가이 없는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여 영원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시작되게 한다.
다섯째로, 구약에서 최초의 실제 안식은 광야의 기나긴 여정을 끝내고 약속된 땅에 들어가 안전한 거처에 머물게 된 하나님 백성이 소유했다. “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수 1:15)에서 안식을 나타내는 동사는 “휴식하다”(to rest), “익숙되어 안정되다, 정주하다”(settle down)는 חונ의 ꖏיꗼꖷ (Hiphil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형이다. 영적인 차원보다는 오히려 현실적, 육체적으로 곤고하고 피곤한 사막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에 안전하게 정착하여 얻는 휴식으로 평안히 거함을 의미한다. 또한 사방의 대적(對敵)을 다 멸하고 전쟁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안식을 의미하기도 한다(수 23:1, 삼하 7:1, 왕상 5:4). 이는 구속과 구원의 개념으로 발전했다. 주위 환경과 생활의 안정으로 평강의 안락된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룻 1:9, 3:1). 가나안 땅에서의 휴식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 백성을 위한 것이다. 이는 미래의 희망과 축복의 값진 교리로 발전한다(삼하 7:1).
여섯째는 계약 공동체적 노동과 휴식의 평등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신명기에 나타난 안식일은 출애굽 사건에 근거한 시내산 계약의 표징으로 그 계약 백성이 안식일을 맞이할 때마다 계약 백성으로 자기를 확인했다. 할례가 신체상의 계약 표징으로 순간 순간 확인되는 것이었다면 안식일은 시간 속에 나타난 계약 징표로 그날에 계약 공동체는 누구나 일에서 쉬도록 하여 휴식의 평등화를 이루며 계약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이다(신 5:14).
일곱째로, 잠의 쉼이 있다.
모든 이에게 기본적으로 휴식이 되는 것이 바로 잠이다(욥 3:13). 그래서 시편 시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시 127:2)고 했다. 여기에 사용되는 אנש는 “평안하게 해주다”, “쉬다”(rest), 그리고 “잠자다”, “조용히 있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 ןשי 의 명사이다. 경쟁 사회에서 바쁘고 수고가 많은 세상살이에서(시 127:1-2)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가장 진정한 쉼이 되는 잠을 주신다는 것이다. 생체에는 여러 리듬이 있어 여러 기능을 효율적으로 조절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리듬이 “24시간 순환 리듬” (circadian)이고 이 중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수면 리듬이다. 수면은 안구가 급속히 운동하는 “REM 수면”과 그렇지 않은 “NREM(Non-REM) 수면”이 있다. REM 수면 중 80%에서 꿈을 꾸며, 이 두 가지 수면에서 각각 내분비와 생리 기능이 달라진다.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 때 자아 붕괴, 환각, 망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REM 수면 중에 나타나는 꿈을 못 꾸게 하면 과민성, 피로가 나타난다. 잠은 낮 동안 소모되고 손상된 부분을 회복시키고, 낮 동안의 생존 기능과 본능적 보조 기능을 잘 할 수 있도록 준비, 조절하도록 한다. 더욱이, 인지적 기능으로 낮 동안 학습된 정보를 재정리하여 불필요한 것은 버리고 재학습 및 기억시키게 하는 기능도 한다. 또한 감정 조절 기능으로 불쾌하고 불안한 감정들이 꿈 등을 통해 정화되어 아침이면 상쾌한 기분을 갖게 한다. 잠이 쉼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현대인은 죄책이나 죄로 말미암는 갈등을 고상한 말로 바꿔서 스트레스나 콤플렉스 등의 무화과 잎으로 가린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갈등과 피곤의 깊은 곳으로 추적해 들어 가보면 죄 문제가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게 많다(시 38편). 그러기에 하나님께 나아가 죄가 눈같이, 양털 같이 희어질 때 근본적 참 안식을 얻게 된다(사 1:18). 그래서 창조의 하나님의 안식의 결과인 “축복”과 “거룩”은 안식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믿음으로 동참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한 주일의 6일간을 우리는 공간적 물체의 압제 아래서 살다가 안식일에는 시간 속에 있는 거룩함에 조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안식일은 우리가 시간 속에 있는 영원한 것에 동참하고 창조의 결과들로부터 창조의 신비로, 창조의 세계로부터 세계의 창조로 돌아가는 날이다. 그래서 쉼, 안식을 철저히 지켜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 안에 거룩하게 사는 것이 참 쉼의 지름길이다. 의롭고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 〈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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