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악!! 불신앙의 요소!!

하나님의 섭리와 죄의 원인성의 문제

하나님아들 2023. 8. 29. 23:21

하나님의 섭리와 죄의 원인성의 문제

 

협력을 통해서 신적 섭리의 성격을 규명한 이후에 튜레틴이 다루는 가장 중요한 섭리론의 주제는 죄의 원인성에 관한 문제이다. 죄가 발생했을 때 죄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섭리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교리는 인간의 자유와의 양립 문제와 더불어 인간의 죄의 원인과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귀속되어야 하는가? 라는 또 다른 논쟁을 야기하였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자들은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존재하고 발생함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의 반대자들은 이러한 개혁주의 섭리론이 인간의 자유를 파괴한다고 비평하였다. 또한, 이들은 개혁주의의 가르침대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작정하셨고 그것을 섭리 가운데 이루신다면 결국 죄의 발생 원인도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이 된다는 논리를 펼친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의 반대자들은 개혁주의 섭리론이 하나님을 결과적으로 죄의 원인자로 만든다는 비평을 해왔다. 예를 들어 로저 올슨(Roger Olson)은 전통적 개혁주의 섭리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비난을 가한다. 

 

자유의지 유신론(free will theism)을 거절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죄와 악의 존재를 설명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적 결정론(divine determinism)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까지 그 뿌리가 연결된다. 어떤 면에서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의지하셨고, 그것이 틀림없도록 하셨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죄와 악의 조성자로 만드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하겠는가? 고전적 칼뱅주의자들과 많은 루터주의자들의 경우처럼 대부분 기독교 결정론은 이 문제에서 곤경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죄와 악의 원인자라고 말하지 못한다. ··· 궁극적으로 유신론적 세계관에서 자유의지론에 대한 믿음을 유일하게 대체할 수 있는 믿음인 신적 결정론은 하나님을 이 곤경에서 구해내지 못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든 현실을 결정하시는 분이시고 사람들이 자유 의지적(libertarian) 임의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의 마음과 정신 안에서 악을 향한 최초의 경향성을 포함한 죄와 악의 원인자이시거나 조성자이시다.

 

튜레틴 당시에도 로마 가톨릭, 소시니안주의, 항론파, 그리고 루터파는 개혁주의 섭리론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든다고 비평해왔다. 따라서 튜레틴은 앞으로 논의될 여러 가지 논거들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만들지 않으며, 인간의 죄에 대한 작정과 섭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성과 순결성은 유지된다고 주장하였다. 

 

1. 죄와 허용과 유기에 대한 이해

 

튜레틴은 죄의 원인에 대한 이해가 섭리론 중에서 그 어떤 주제보다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임을 밝힌다. 하지만 그는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한다. 먼저 튜레틴은 죄를 세 가지 측면으로 구분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영역에 다르게 관여하신다고 주장한다. 세 가지 영역 중 첫째는 질료와 연관된 “행위라는 실체 자체”(Ipsaentitas actus)이다. 행위 그 자체는 하나의 실체로서 언제나 선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본성을 보존하시고 ··· 물리적 움직임에 의해 그것의 움직임들과 행위들을 자극하심으로써 행위 그 자체에 효과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협력하신다.” 튜레틴은 사도행전 17장 28절을 인용함으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튜레틴은 두 번째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세 번째 영역을 다룬다. 세 번째는 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우연히 부가된 것으로 죄로 인한 “심판”(judicium consequens)의 영역을 가리킨다. 이것은 창세기 50장 20절과 이사야 10장 5~7절의 경우에서처럼 죄를 허용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죄의 본성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선한 목적을 이루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작정과도 관련되었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영역인데 이것은 행위 그 자체에 결부된 “무질서”(άταζία)와 “사악함”(malitia)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권장하거나”(inspirat) “주입하거나”(infundit) 직접적으로 “행하시지”(facitis) 않기 때문에 이것에 관해서는 “물리적 원인”(causa physica)이 될 수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 “무법”(ἀνομία) 그 자체인 두 번째 영역을 “명령하시거나”(imperat) “승인하시거나”(approbat) “설득하시는”(suadet)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강력하게 금지하시거나 처벌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에 관해서 “윤리적 원인”(causa ethica) 또한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튜레틴은 이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시편 5편 4~6절, 시편 45편 7절, 하박국 1장 13절, 야고보서 1장 13절을 인용한다.

 

튜레틴은 이러한 구분 속에서 죄와 하나님 섭리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러나 죄가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죄는 그것의 시작과 발전 그리고 목적에 관해서 여러 방식으로 섭리 안에 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작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게 그것을 허락하신다. 발전의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현명하게 지도하신다. 그 목적에 관해서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게 [죄를] 종결(terminationem)하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도록 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죄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의 세 가지 단계(gradus)이다.

 

튜레틴은 죄에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의 세 가지 단계를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한다. 먼저 첫 번째 단계는 시편 81편 12절과 사도행전 14장 16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허용적으로 관계하시는 죄의 시작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허용”(permissio)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죄를 합법적이거나 정당한 것이라고 승인하는 윤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발생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물리적”(physica)인 의미이다. 두 번째로 허용은 하나님께서 의지하시기를 멈추시거나 단순히 “억누르시는”(ανεργία) 것처럼 “부정적으로”(negativé) 생각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죄를 “방해하시기를 의지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방해하지 않기로 의지하신 것”이라는 “긍정적이고”(positivé) “적극적인”(affirmativé)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허용은 하나님께서 그의 “숨겨진 의지의 적극적인 행위”(actum positivumvoluntatis arcanae)에 의해서 “죄를 방해하지 않으시기로 계획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consultò & volens) 결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튜레틴은 또한 허용이 의미하지 않는 것들을 밝힘으로써 죄와 관련된 신적 허용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한다. 첫째, 그는 적극적이면서 동시에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죄를 허용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가 죄 자체를 그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의지는 선한 것만을 그 대상으로 할 수 있고 “악으로서의 악”(malum quà malum)을 의지(意志)할 수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행해지도록 의지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것을 허용하는 것을 원하신다.”(non vult fieri peccatum, vult tantùm permittere) 둘째,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목적의 수단으로 “죄 그 자체”(peccatum, quà tale)를 원하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여기에서의 수단은 “인과 관계적”(causàliter)이거나 “효과적인”(effectivè) 의미가 아니라 “질료적”(materialiter)이며 “객관적”(objectivè)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목적뿐만 아니라 수단도 의지하시지만, 이 두 가지를 의지하실 때 항상 같은 의지를 사용하시는 것은 아니다. 목적은 언제나 선하기 때문에 “효과적인 의지”(volitione effectiva)로 그것을 의지하신다. 하지만 만약 수단이 악일 경우 하나님께서는 “허용적 의지”(volitionepermissiva)에 의해서 그 수단을 의지하시고 이때 수단을 의지하신다는 의미는“수단 그 자체”(volendo medium ipsum)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수단의 사용(usùm medii)”을 의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허용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튜레틴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통해 선을 불러오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죄를 허용하셨다고 주장한다. 가령 만약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징벌적 공의”, “용서의 자비”, “악을 선으로 바꾸는 지혜”, “아들을 교회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보내시는 놀라운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튜레틴은 자기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악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는 것보다 악을 통해서 선을 가져오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더 적합한 것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354-430)의 견해를 인용한다. 이와 더불어 튜레틴은 어떤 면에서 죄 허용의 이유는 타락한 피조물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죄인들에게 그들이 이전에 범한 죄에 대한 처벌로서 신자들의 잘못을 책망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가장 공의롭게”(justissimè) 죄를 허용하시기 때문이다.

 

튜레틴에 따르면 이러한 하나님의 죄의 허용은 불법적인 죄를 짓는 인간에게 직접적인 “유입(influxum)이나 “원인”(causalitatem)이 되는 것이 아닌 죄의 발생을 “막는 것을 단순하게 중단”(meram suspensionem impedimenti)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비록 허용으로 인해 죄가 불변하게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허용은 그것의 “원인”(causa)이 아닌 사건의 발생을 위해 “오직 필연적으로 가정되는 선행조건”(tantùmantecedens, quod necessàriò supponitur)이다. 그리고 죄의 허용은 피조물의 “자발성”(spontaneitatem)이나 “선택”(προαίρεσιν)을 제거하거나 그것이 “가장 자유롭게”(liberrimè) 행동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께서 죄를 허용하셨지만,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따라서 튜레틴은 죄의 허용이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허용과 더불어 튜레틴에게 하나님과 죄의 발생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중요한 개념은 “유기”(desertio)이다. 유기란 “인간이 죄를 범하는 것을 막지 않기 위해 죄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은혜를 거두어 가시거나 시험을 극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은혜를 너무 효과적으로 주지 않음”으로써 인간을 내어버려 두시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거두심”(subtractio)은 전에 주신 은혜를 거두어 가시는 “결핍적인”(privativa) 것과 아담의 경우처럼 의로운 삶을 지속적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새로운 은혜를 주시지 않는 “부정적인”(negativa) 거두심이라는 두 가지 성격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유기는 역대하 32장 31절의 경우처럼 창조주의 도움 없이 인간 본성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인간과 거리를 두시는 “살피심”(exploratio), 이사야 54장 7절이나 시편 125편 3절의 경우들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교회를 잠시 유기하시는 방법을 통해 그들을 다시금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로 불러들이려는 목적의 “교정”(correctio), 죄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열왕기하 21장 14절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들의 불순한 동기에 내어 주시는 “죄의 심판”(poenus judici)이라는 세 가지 다른 종류로 구분될 수 있다.

 

허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튜레틴은 이러한 유기가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로우심을 손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기가 인간에게 타락하도록 강요하거나, 타락을 야기하는 악한 의지를 직접 인간에게 집어넣으셨거나 창조 시에 주어진 “내적 은혜”(gratiaminternam)를 제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의 자유롭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인간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 은혜를 주시기를 거절하신 것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선물들을 인간에게 자유롭고 수여하실 수도 있고 거절하실 수도 있는 분이시다. 무엇보다 비록 타락의 필연성이 은혜를 주시기를 거절한 것과 함께 연관되어 있지만, 이에 따라 죄를 짓는 인간의 자유와 자발성은 파괴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유기의 방법을 통해 “인간이 틀림없이 타락하도록 의지”(eum certò labi voluit) 하셨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가장 자유롭게 타락하도록 의지”(liberrimè cum labivoluit)하도록 영원 속에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튜레틴은 인간을 강압하지 않으며 인간의 본성과 조화롭게 발생하는 필연성인 “사건의 필연성”(necesitas eventus)을 야기하는 유기의 성격이 하나님을 결코 “죄의 조성자”(peccati authorem)로 만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2. 섭리의 효과성과 목적 인(因)의 차이에 대한 이해

 

튜레틴은 하나님과 죄의 발생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허용과 유기의 개념을 제시하지만, 허용이나 유기의 개념으로 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 같은 성경 구절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가령 출애굽기 4장 21절과 7장 3절, 사무엘하 12장 11절과 16장 10절, 열왕기상 22장 23절, 이사야 19장 14절 등의 구절들은 죄의 발생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어떤 효과적인 행위”(actio quaedam efficax)가 직접적으로 관여된 것 같이 보인다. 튜레틴은 이 문제를 다루면서 유한한 인간의 지혜는 여기서 나타나는 섭리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하지만 허용과 유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구절과 관련된 “섭리의 효과성”(providentia efficacia)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한다.

 

이에 관한 논의를 위해 튜레틴은 먼저 섭리의 효과성을 “기회의 제공”(oblatio occasionum), “사단에게 넘겨줌”(traditio satana), 그리고 인간 “마음에서의 하나님의 직접적인 작용”(immediata Dei in corde operatio)이라는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하고 각각의 경우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첫 번째로 기회들의 제공은 요셉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 마침 미디안 상인이 지나간 것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이나 대상들을 인간 앞에 두심으로써 인간의 “마음의 기능”(facultates)을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악을 주입하지는 않으신다. 다만 밧세바가 목욕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다윗의 마음속에 있던 정욕이 일어난 것과 아간이 바벨론의 외투를 보고 탐심이 생긴 경우와 같이 협력을 통해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던 악이 실제 행위로 나타나도록 하신다. 그리고 악인들은 바로가 애굽에 내린 재앙으로 인해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강퍅하게 한 것처럼 이러한 기회들을 “잘못 오용하고”(perpertam abuntuntur) 자기 잘못으로 강퍅하게 된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사단과 그들 자신의 악한 욕망”에 넘겨주신다는 것으로 사무엘상 16장 14절과 열왕기상 22장 22절 등이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이때 사단은 인간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역사한다. 첫째는 “외적인” 방법으로 아담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유혹하기 위해 “육신을 기쁘게 하는 대상(선악과)”을 보여주거나 욥의 경우에서처럼 사람들을 절망에 빠트리기 위해 불행과 재앙을 보내는 것이다. 둘째는 “내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지성에 영향을 주어 선에서 돌이켜 악으로 행하도록 하는 어떤 “망상”(phantasiam)이나 육체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기분”(humores)을 통해서 사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인간의 마음속에 집어넣거나 요한복음 13장 2절과 27절에 나온 유다의 경우처럼 인간의 마음속에 직접 들어간다. 섭리의 효과성과 관련된 세 번째 경우는 잠언 21장 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자기 뜻대로 바꾸시는 “어떤 특정한 내적인 작용”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움직일 수 있는 어떤 “대상들에 대한 내적인 계시”(objectorum propositione interna)나 그 자체들로는 선하지만, 타락한 인간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악으로 바뀌게 하는 “생각들의 영향”(cogitationum impressione)으로 행해진다. 에스겔 21장 21~24절에서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군대를 애굽이 아닌 유다를 향하도록 한 것이나 요한복음 11장 50절에 가야바가 말한 것은 선한 것이었지만, 이 말이 그리스도의 잔인한 살해라는 가장 사악한 행위로 오용된 것은 이러한 전형적인 실례들이다. 이러한 구절들은 “마치 아래로 흐르는 물이 장인의 공사로 인해서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인간을 이 방향이 아닌 저 방향으로 “움직이는”(inclinantis)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섭리 외에는 다른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처럼 허용, 유기, 그리고 섭리의 효과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죄의 시작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를 설명한 후 튜레틴은 섭리가 죄의 다음 단계인 진행 또는 발전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관계하는가에 대해서 비교적 간략하게 설명한다. 하나님은 어떤 죄를 아예 끝나게 하시든지 또는 그 죄가 더 이상 거대해지지 않도록 그것의 “의도”(intensionis), 더 오래 진행되지, 넓게 퍼지지 않도록 하는 그것의 “정도”(extensionis), 그리고 더 오래 진행되지 않도록 하는 그것의 “기간”(durationis)에 제한을 두심으로써 죄의 진행 과정에 간섭하신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내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이 있는데, 전자는“죄의 추악함과 그것으로 인한 처벌의 거대함을 지각하게 하고 타락한 욕망을 제한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조명하시지만, 후자는 “사단과 세상의 분노를 억제하시고 악의 원인을 제거하시고 명령과 위협으로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실례들은 라반에서, 발람, 산헤드립, 그리고 특별히 욥과 그리스도로부터 명백하게 확인된다.

 

죄의 시작 및 진행과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논의를 마친 후 이제 튜레틴은 죄에 관한 하나님 섭리의 마지막 단계인 죄의 목적과 섭리의 관계를 논의한다. 이 단계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명령과 지시로 죄의 본성과 죄의 의지를 넘어서 그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그것을 선한 목적으로 지도하시고 이끄시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악의 허용에는 선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튜레틴에 따르면 창세기 50장 20절, 이사야 10장 5~7절, 욥기 1장 20~22절 등 많은 성경 구절이 이것을 입증한다.

 

그런데 죄를 통해 선한 결과를 불러오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마치 죄의 존재를 예지하시고 그것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후험적”(àposteriori) 방식이 아니라 죄악 된 행위들이 죄인들에 의해서 발생하도록 의지하시는 동시에 그것들에게 선한 목적을 부여하시기로 결정하시는 “선험적”(à priori) 방식을 통해 정해진다. 따라서 죄에 선한 목적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우연적인”(accidens)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의 동일한 사건이 인간과 하나님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귀속되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사건은 하나님께는 선한 일로 귀결되지만, 아시리아에게는 악한 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책망하시고 궁극적으로 회복시키시려는 선한 목적을 의도하셨지만, 아시리아에게는 이사야 10장 6~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사악한 목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의 의지나 행동들을 악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악이 선한 목적을 이루도록 정하심으로써 피조물들의 죄악들을 그들의 의도를 넘어 선한 목적을 이루도록”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튜레틴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어떤 사건에 대한 “목적인”(causas finales)에서의 차이가 하나님을 인간의 죄에 대한 원인자라는 비판을 피하게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 섭리의 협력이 죄인들의 자유, 선택, 그리고 자발성을 제거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들에게 [자신들의 죄에 대해] 어떤 변명거리를 주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가장 사악한 일들에 언제나 가장 거룩하게 선한 목적을 가지고 관련되시기 때문에 인간의 죄에 책임이 없으시다. 강제적이고 최종적인 원인(causas impulsivas, & finales)이 행동의 차이를 만들고, 하나의 동일한 결과에 다른 많은 원인이 있을 때 그 결과는 선한 원인과 관련하여서 선하고 악한 원인과 관련하여서는 악하다.

 

튜레틴은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가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각각 야곱 집안의 보존과 교회의 구원이라는 최선의 목적을 가지시고 작정하셨다. 비록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께서 “발생하도록 의지하지는 않으셨고 단지 허용하도록 의지하신”(quae noluit efficere, sed tantùm permittere) “인간의 사악함”(hominum scelera)에 의해서 수행되도록 의지하셨지만, 그 선하신 목적 때문에 각각의 일들은 하나님의 측면에서 공의롭고 선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사실은 성경에서 인간의 죄가 하나님에 의해서 허락되었다고 말하거나 그리고 선한 목적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하더라도 그 사실들이 인간의 죄악들을 선한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언급되었듯이 어떤 악이 행해질 때 그 행동과 움직임은 “존재와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의 유(類)”(in genereentis, & justa Dei judicia)에서 볼 때 선한 행위이지만, 그 행동과 움직임의 “무법”(ἀνομία)은 “도덕적으로 악한”(moraliter mala)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 3장 8절은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악을 행하는 것과 그것을 허락하는 것, 선한 목적으로 그것을 지도하는 것, 그것을 선으로 바꾸는 것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는 인간의 불의를 후자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함과 능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악인은 자신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을 변명할 수 없다. 그 목적이 선을 이루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들의 행위는 도덕적인 유(類)에서 볼 때 분명한 죄악 그 자체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3. 원인성의 성격에 대한 이해

 

죄와 섭리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튜레틴이 사용하는 또 다른 주요한 논거는 원인성의 구분이다. 먼저 튜레틴은 행위와 결과가 “도구적 원인”(causa instrumentalis)이 아닌 제일원인(causa principalis)에 귀속되기 때문에 사단과 악인들을 그의 사역을 위해서 “도구”(instrumentis)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죄의 원인”(peccati causam)이 된다는 비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박한다. 첫째, 이 주장은 두 원인이 “같은 종류의 원인”(causis homogeneis)일 때는 맞는 말이다. 가령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아합을 속인 거짓 선지자들과 그를 통해 역사한 사단은 모두 같은 성격을 가진 “소극적 원인”(causa privativa)으로 이 경우에 위의 논지는 참이 된다. 하지만 이 주장은 두 원인이 “다른 종류의 원인성”(causaheterogeneis)인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것의 설명을 위해 튜레틴은 “공정한 재판관”(justus Iudex)의 유비를 사용한다. 공정한 재판관의 도구로서 죄에 대한 대가로서 죄를 벌하는 처형 집행자나 검을 사용한 사람은 유죄로 처벌받지 않으며, 더더욱 그 재판관은 그 범법자를 죽였다는 살인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주요 원인인 하나님은 “적극적이고 물리적이고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원인”(causa positiva,physica, άνυπθαινως)인 반면 도구적 원인으로서 악을 행하는 인간은 “소극적이고 도덕적인 원인”(causa privativa, moralis)이고 율법을 위반한 것이 된다. 두 번째로 죄인들은 비록 도구적 원인이지만, 죄의 책임이 있다. 만약 어떤 도구적 원인이 앞선 유비의 칼과 같이 순수하게 비이성적인 도구일 경우에는 죄의 책임이 없고 그것을 사용한 인간에게 살인의 원인이 귀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죄인은 순전하게 비이성적인 도구가 아니고 죄의 “고유한”(propria) 그리고 ”적절한”(adaequata) 원인인 “악”(malitiam)을 그들 스스로에게서 가져오는 “이성적, 은유적, 그리고 순수하지 않은”(rationalia, metaphorica, & mixta) 도구이다. 따라서 죄의 책임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도구의 행위와 주요 원인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같은 의미를 가질 때 위의 비평은 말이 된다. 하지만 어떤 행위에 작용하는 두 원인이 질료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는 같은 성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같지 않다면 두 원인은 동일하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의 같은 물리적 행동이라도 법에 종속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라는 행위자의 성격에 따라서 의롭거나 불의한 것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악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위는 도구의 행위와 오직 물리적인 측면에서만 같고 도덕적인 측면에서는 다르다. 이러한 구분을 바탕으로 튜레틴은 사무엘하 16장 10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시므이에게 법적인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섭리의 명령으로, 도덕적으로 설득하는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지시적인 명령으로, 마치 공정한 법관처럼 명령하는 입법자로서의 의지를 가지고 처벌하시고 응징하고자 하는 선하고 기뻐하는 뜻에 따른 사법적 명령으로, 하지만 승인하는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소위 고유한 의미에서 그것을 시므이에게 알게 하여 그를 순종하도록 의지하는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나를 뱉어내라고 물고기에게 명령하신 것처럼 비본래적이고 은유적인 의미에서의 명령으로 다윗을 저주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결국 다윗의 처벌을 위해 시므이의 악한 의지를 죄로 움직인 하나님의 효과적 조치에 불과하다.

 

튜레틴에 따르면 열왕기상 22장 22절에서 하나님께서 아합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셨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승인한 것이 아니라 허용한 것이며 악한 왕의 처벌을 위하여 그것을 효과적으로 정하신 것”(non est approbantis, sed permittentis, & efficaciter ordinantisad impii Regis poenam)이다. 또한, 튜레틴은 하나님께서는 그 거짓말 하는 영에 거짓말하는 권리를 준 것이 아니라 바라는 그것을 억제하던 것을 풀어준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음으로 튜레틴은 어떤 원인의 원인은 또 다른 원인에 의한 원인이라는 전제 가운데 하나님께 죄의 책임을 돌리려는 시도가 잘못된 것임을 밝힌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것이 “그 스스로” 어떤 원인의 원인이고, 단지 “열등한 원인”(causa inferior)이 단순히 그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뿐만 아니라“어떤 결함으로부터”(aliquo defectu) 그 결과를 만들어낼 때라는 의미에서 “우연히”(accedente) 원인 된 것의 원인이라면 위의 전제는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 의지의 원인이기에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는 범죄 할 때 “제일원인의 질서로부터”(ab órdine primæ causae) 돌아섬으로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의지 자체의 원인”(causa voluntatis perse)이신 하나님은 악한 행동의 원인이라고 불릴 수 없다. 악한 행동은 “단순하게 존재의 유(類, genus)에서의 의지로부터가 아니라 도덕들의 유(類)에서의 율법에 관해 실패하는 의지”(à voluntate non simpliciter ingenere entis ··· sed ab ea deficiente à lege in genere moris)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4. 강퍅케 하심과 시험에 대한 이해

 

성경에는 인간의 죄와 관련된 여러 난해 구절이 있다. 튜레틴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각각의 구절들과 그것에 함의된 신학적 의미들을 설명함으로써 죄와 섭리와의 관계를 바르게 조명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죄의 원인자가 아님을 변호하고자 한다. 가령 예레미야 5장 3절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에 관해서 튜레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일깨우시지 않거나 부드럽게 하지 않으시는 소극적인 방식으로써, 인간이 은혜를 오용한 후에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의 은혜를 거두어 가시는 박탈의 방식으로써, [죄의 발생을] 막지 않으시는 허용적인 방식으로써, 눈을 멀게 하거나 인간에게 자연적인 완고함을 가져오는 적극적인 방식으로써 ···· 외적인 상황들을 그들에게 제공하시는 객관적인 방식으로써, 눈멀게 함으로 그들을 치시는 심판적인 방법으로써 ···· 그들의 허영의 족쇄를 헐겁게 하고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 넘겨주고 노예가 되게 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많은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하심으로써 사람을 눈멀게 하거나 강퍅하게 하신다.

 

튜레틴에 따르면 의로운 판단에 근거해서 이전 죄들에 대한 처벌로서 죄인들을 강퍅하게 하시 하나님은 여전히 의롭고 순결하시다. 반면 그들 스스로를 강퍅하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에 죄의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 

 

튜레틴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시험의 의미에 관해서도 상세히 논의한다. “시험”(tentatio)은“연단”(probationis)과 “유혹”(seductionis)이 있는데, 전자는 하나님께 속한 선한 것이고 후자는 마귀에게 속한 악한 것이다. 야고보서 1장 3절의 말씀에서처럼 하나님은 누구도 죄로 유혹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창세기 22장 1절과 신명기 8장 2절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시험은 유혹이 아니라 연단의 시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믿음과 신실함을 알아보기 위해 행해진다. 물론 이것은 “전지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모르셔서가 아니라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기도문에서의 시험은 후자의 경우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 유혹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의 말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 등을 근거로 튜레틴은 만약 그 반대인 그것을 허락하거나 사단에게 우리를 넘겨주어 우리가 시험에 들지만,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유혹과 관련된 몇몇 성경 구절은 마치 하나님께 죄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진술하고 있다. 가령 예레미야 20장 7절은 언뜻 보기에 마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거짓과 오류로 이끈 것처럼 이해된다. 하지만 튜레틴은 이것이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된 아합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두셨지만, 예레미야와 같은 거룩한 선지자들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거짓된 것을 예언하도록 오류를 범하게 하거나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튜레틴은 몇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먼저 긍정적 의미에서 히브리어 동사 “ynI…t;yTiPi” 는 창세기 9:27, 잠언 25:15, 호세아 2:14의 경우에서처럼 “매료시키다”, “매혹하다” 또는 “설득하다” 등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에 본문은 “당신은 나를 이끌었고 나는 이끌렸습니다”와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다른 해석 가능성은 이 구절이 에스겔 14장 9절의 경우처럼 “유혹”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가정적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 경우 본문은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도록 유혹받았다면, 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유혹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해석된다. 하지만 튜레틴은 이 두 가지 해석이 모두 옳지 못한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튜레틴은 지금 예레미야가 자신의“연약함과 육신적 판단으로부터 하나님께 속임을 당했다고 불평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훨씬 다른 것을 예레미야는 경험했고 이에 대한 불평과 마음의 혼란을 “인간적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화자의 잘못이 아니라 청자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욥기 12장 16절은 튜레틴이 유사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실례이다. 그에 따르면 이 구절은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속은 자와 속이는 자와 하나님의 관계를 “여격”으로 이해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 된 뜻을 저항하는 사람들을 사용해서 자신의 숨겨진 뜻을 이루시는 동안 속은 사람의 무지와 속이는 사람의 악함이 마치 하나님의 사역자들처럼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 기여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속는 자와 속이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속격”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때 속는 자나 속이는 자 모두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한 누구도 속이거나 속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튜레틴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행동은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죄인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변명의 구실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죄를 포함한 어떤 사건의 발생은 하나님에 의해서 “가장 정의롭게” 작정 된 것을 이루시는 숨겨진 의지의 실현이요, 비록 하나님 의지의 실현이 인간에 의해서 방해받을 수 없지만, 그것은 인간을 “강요”(coactio)하지 않고 “당위의 필연성”(necessitas consequentis)이 아닌 “귀결의 필연성”(necessitas consequentiae)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하나님 자신이 강퍅하게 하고 눈멀게 했다고 말할 때 하나님의 행동은 인간 행동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결과되지만, 동시에 인간이 “가장 자유롭게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기”(seipsum etiam liberrimè excoecat) 때문이다. 더구나 인간은 이전의 죄들의 결과로 마땅히 그러한 대가를 받을만하기 때문이다.

 

5. 협력에 의한 설명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이루는 섭리의 방식으로 앞서 논의되었던 신적 협력의 개념은 섭리와 악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여기에서의 핵심이 되는 논의는 하나님은 선과 악에 다른 방식으로 협력하신다는 것이다. 선한 행동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는 “그것의 저자로서”(eorum author) 인간의 의지를 “선행적으로 움직이신다(praemovet).” 이때 하나님께서는 “본성의 유(類)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덕적 선함에 따라서 일반적이고 동시에 개별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서뿐만 아니라 행해지는 것이 잘 행해져야 하는 양태에 관해서도 [인간의] 의지를 결정하심으로써 미리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도움” 또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통한 “선한 자질들”(banas qualitates)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협력하여 그 행위를 하도록 그들을 도우시고 이끄시고 자극하신다. 튜레틴은 고린도후서 3장 5절, 잠언 16장 9절, 학개 1장 5절, 에스겔 36장 27절 등을 이에 관한 성경적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튜레틴에 따르면 악한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협력은 다르게 나타난다. 하지만 악한 행위들에서는 그것들을 발생시키거나 돕거나 승인하도록 협력하지 않는다. 대신 악을 주입함으로써가 아니라, 이성적 피조물이 존재의 유(類)에서 그 행위의 실체를 물리적으로 결정하도록 함으로써[죄의 발생을] 허용하시거나 효과적으로 인도하신다. [반면] 인간들은 그것들을 자유롭게 그리고 의지적으로 행하면서 도덕의 유(類)에서 그것들을 나쁜 행위들로 움직이고 결정한다. 따라서 죄책은 인간들에게만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부터 자유하시다.

 

그러므로 튜레틴은 비록 하나님의 선 결정 운동이 악한 행위들에게까지 관계되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나 그 잘못에 관해 유죄(有罪)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행위의 실체”(actus substantiam)라는 “질료적이며 존재적인”(materialiter, & entitativè) 면에서 후자와 관계하시지 “도덕적인”(moraliter) 면에서 후자의 “악”(malitiam)과는 관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의 행위가 물리적(physicè)이면서 동시에 도덕적인(moraliter) 측면으로 구분될 수 있고 하나님의 협력하심은 이에 따라 각각에 다르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튜레틴은 여러 가지 유비(類比)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주권자는 사형수에게 가해진 죽음의 원인이다. 하지만 처형 시에 나타난 잔인함의 원인은 아니다. 하프 연주자는 소리의 원인이지만 줄 자체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의 원인은 아니다. 절뚝거리는 말을 모는 사람은 말의 운동의 원인이지만, 절뚝거림의 원인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질료적 행위에 참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협력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결부된 죄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사악함은 본질적으로 타락의 결과로 “결함이 생긴 인간의 의지로부터”(à voluntate creata deficiente) 나온다. 부연하면 인간의 의지는 “물리적 행위자”(agens physicum)로서 “물리적 행위의 원인”(causa physica actu)이 되지만 “도덕적 행위자”(agens morale)로서 그 “악의 도덕적 원인”(causa moralis malitiae)도 된다. 즉, 하나님의 법에 종속된 인간이 물리적 행위자로서 “존재의 유(類)”(in genere entis)에서 어떤 행위를 발생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자로서 하나님의 법이 금지하는 어떤 행위를 행하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한 의지에” 그 죄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튜레틴은 “죄의 원인”(causalitaspeccati)이 하나님께 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튜레틴은 죄의 사악함은 어떤 행동이 인간의 “자유 선택”(liberum arbitrium)에 의해서 원인이 될 때 “본성의 유(類)”(in genere naturae)가 아니라 “도덕적 유(類)”(in genere moris)의 범주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변호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토마스 카제탄(Thomas Cajetan, 1469-1534) 디에고 알바레즈(Diego Alvarez,1550–1635) 등의 견해를 인용한다.

 

결과적으로 튜레틴은 어떤 행위의 도덕적 성격을 판단할 때 존재의 유에서 행위의 실체와 도덕적 유에서 같은 행위의 선과 악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고, 단순하게 질료적 관계가 있는 지성과 의지의 행위는 합법적인 것이나 불법적인 것을 지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의지적으로 행하는 것과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지금 여기에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며 훔치는 “의지하는 행위”(volitio)는 다른 사람의 재산과 관련하여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지만, 그 상황이 발생하게 하는 “의지하는 행위”(volitio) 그 자체는 선한 것이다. 따라서 “단순하게 존재의 유에서 질료와 관계된”(in genere entis respectu materialis) 하나의 행위라면, 하지만 훔치는 행위에서처럼 어떤 행위가 도덕의 유에서 “상황화 된”(circumstantiata) 행위로서 “형상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면”(nonrespectu formalis) 하나님께서 “어떤 행위 그 자체의 원인”(causam istiusacionis)이 되는 것은 아무런 윤리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죄의 원인은 하나님께 귀속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선 결정은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지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tantùm physica non moralis) 오직 도덕적인 결정만이 죄악된 것이다.

 

한편 튜레틴은 악한 행동들에 관계하는 하나님의 선 결정과 하나님의 허용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 결정과 허용은 동일한 대상에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자는 “행위의 실체”에 그리고 후자는 “악함”에 관계한다. 또한 전자는 그 행위를 발생시키는 “질료”에 후자는 “유일하게 결함 있는 도덕적 원인”인 인간의 “자유 선택”(libero arbitrio)에 속하는 “형상”에 관계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악한 행위와 관련해서 “결과의 관계”(rationem effectus)와 “결함의 관계”(rationem defectus)라는 이중적 관계가 있다. 이러한 구분 속에서 튜레틴은 하나님께서는 “결과의 관계가 있는 [어떤] 것은 선 결정하여 움직이실 수 있지만 결함의 관계가 있는 [어떤] 것은 오직 허용만 하실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6. 죄와 악의 참된 원인자

 

앞선 논의를 통해 튜레틴은 하나님께서 죄의 원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변호해 왔다. 만약 하나님이 죄와 악의 원인자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인간 죄와 악의 원인인가? 이미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었듯이 튜레틴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고 일관되게 인간의 죄의 원인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인간의 죄의 원인은 인간의 타락한 의지의 잘못된 선택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작정 가운데 인간의 타락과 죄를 결정하셨고 그것을 섭리와 그것의 방식인 협력을 통해 실현되도록 하셨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도록 강압하지 않으셨다. 또한 섭리가 발생하는 필연성은 인간을 강압하는 절대적 필연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선택과 양립할 수 있고 오히려 그것의 자유롭고 우발적인 성격을 보장하는 가정적 그리고 귀결의 필연성이다. 따라서 인간은 섭리가 발생하는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 선택으로 자유롭게 하나님께 범죄하였다. 인간은 외부의 어떠한 강요 없이 자유롭게 자의적으로 죄를 범했기 때문에 자신의 죄의 참된 원인자가 되고 자신들의 죄에 책임이 있다.

 

인간이 죄와 악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에덴동산에서 벌어진 아담의 최초 타락 사건에 대한 튜레틴의 논의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아담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 선택을 하고 악을 행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마찬가지로 아담은 자신이 원했다면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의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담은 왜 타락하였는가? 튜레틴에 따르면 아담은 선한 존재로 창조를 받았지만,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변성”(mutabilitas)을 가진 존재였고 결국 자신의 “자유 선택”(liberum arbitrium)을 잘못 사용함으로 자신의 선택으로 타락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튜레틴은 아담이 죄의 원인자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므로 인간[아담]이 홀로 그의 악의 원인이다. 비록 그가 원했다면 죄를 쉽게 피할 수 있는 그러한 힘과 도움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자발적으로 죄를 지었고 자유롭게 그리고 어떤 강요나 외부의 강압 없이 자신의 본성을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였다. 사건의 불변성을 가져오나 본성의 조건을 변화시키지 않는 섭리도, 만약 그가 원했더라면 쉽게 저항할 수 있었고 그 자신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을 사단의 유혹도 그 자발성(spontaneitatem)을 제거하지 않았다.

 

물론 튜레틴은 사단이 “유혹의 원인자”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유혹을 받아들인 것은 인간 자신이었고 여기에는 어떠한 강압이나 강요도 없었다. 따라서 튜레틴은 “근접 및 고유한 원인”(causa proxima, & propria peccati)으로서 선악과를 자발적으로 취한 아담 자신이 죄와 악의 원인자로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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