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악!! 불신앙의 요소!!

구약에서의 악(惡)의 문제

하나님아들 2023. 11. 10. 16:08

구약에서의 악(惡)의 문제               

 

Ⅰ.악의 어원과 정의

 

1.악의 정의

성서에서는 어떤 것(행위, 산물, 인간, 등)을 외관이나 결과로 보아, 무가치하고 부패한 것(즉, 기쁘지 아니하고 흉악하며 근심이 되는 것, 고통스럽고 해하는 것 등)을 악으로 본다.

또한 악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벌이나 응징을 의미하기도 한다.

 

2.악의 어원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악(惡)’이란 본래 실제적이고 질적인 의미가 담긴 용어이다.

구약에는 악을 나타내는 두 개의 기본 용어가 있는데 하나는 (ה)ער(라아),

다른 하나는 רצ(차르)와 הרצ(차라)이다.

1) (ה)ער(라아)는 목표를 향한 적합성의 결여 또는 유익성의 결여를 의미하거나,

특정한 대상의 목표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70인역은 (ה)ער를 대개 κακος 혹은 πονηρος로 표현한다.

‘자연악과 도덕악’, ‘본래적 악과 수단적 악’을 구분하는 현대적인 사고는 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성서에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악을 논리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악 때문에 인간들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2) (ה)רצ(차라)는 사람들을 해치거나 제한하거나 억압하고 그들에게 불행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즉, 존재들의 품성이나 악한 상황을 의미한다.

 

Ⅱ. 구약 각 성경 별 악의 문제

 

1. 모세 오경

모세 오경에서 악은 외적인 세력 또는 초자연적 힘으로 쓰이기보다는 자기의 창조주에 대하여 완강하게 반항하는 인간의 내적 교만으로 나타난다.

창세기에서의 인간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악을 알게 된다(창3:5). 이것은 창조주에게 반역하는 내적 교만이 최초로 나타난 것이다. 이때의 악은 교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룸(rum)이나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다’에 해당하는 마엔(ma`en)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노아의 홍수설화에서도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간은 그 악의 대가로 물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으나 인간은 그 자유로 악을 택하였다. 인간에게 있었던 자유는 악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으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바벨탑 사건 역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도전하는 인간의 교만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악의 형태는 절대 주권자, 창조주에 반역하는 인간 교만의 죄로 표현되어지고, 또한 그 죄에 대해 하나님 편에서의 응징으로 인간의 멸망, 파멸, 재앙의 결과를 갖게 된다는 것으로 표현되어진다. 즉, 인간의 행위(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고통)이라는 인과응보의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죄의 결과로서의 악은 제사법전인 레위기, 민수기, 역대기 등에 뚜렷이 나타난다. 제사장들은 그들의 법전과 역사를 쓸 때에 문학적인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인과응보의 교리를 확신하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요셉의 이야기’에서는 나타나는 악(요셉의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뤄지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최상의 ‘선’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된다.

 

2. 신명기적 신학

신명기적 사관을 주제로 하고 있는 책은 신명기를 비롯해서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로 분류된다. 신명기 저자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는 관계없이 인간자체의 욕망과 충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격리시키는 것일 경우에 한해서 악이라고 본다. 이러한 죄의 결과로 전쟁과 기근, 재난이 닥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신명기적 사관이 인과응보적인 형태를 띠기는 하나,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에 대한 분노가 원인이 아니라 사랑이 심판의 원인이 되며, 그 사랑의 형태는 고통에서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구원의 손길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3. 예언자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사회의 불의, 정치적 부패, 종교적 타락에 대해 고발했으며, 이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충성스럽게 전달함으로 많은 고난을 당했다. 그들은 악을 알았고 권위를 가지고 그 악에 대해 말하였다. 이들이 선포한 악은 두 가지 였는데,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행위이고, 둘째는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의 죄를 징계하기 위해 재난을 보내시는데, 이러한 재난들은 기근이나 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바벨론 포로 생활에 따르는 고통의 영향 때문에 예언자들은 그들의 사고의 전제를 재검토하고 신앙 때문에 받게 되는 새로운 고통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이스라엘을 괴롭힌 무서운 악은 ‘세계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도(道)’이었다는 것을 예언자를 통해 깨닫게 된다. 고통으로써 구속을 받고 정화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이 된다. 여기서 악은 세계의 구속이라는 거룩한 목적을 갖게 되며, 여기서 구속적인 고난의 사상이 생기게 된 것이다

 

4. 시 편

시편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악의 현상과 그에 따른 감정표현들이 잘 나타나 있다. 많은 시편들이 하나님께서 긴급한 사태에 직면하여 늦게 간섭하시는 것, 사건을 바로잡는 데 느린 것을 소리 높이 애소(哀訴)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영과 육의 불행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동시에 악을 극복할 수 있는 승리적 신앙의 힘을 언제나 실증하고 있다.

시편기자는 악인의 형통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의인에 대한 박해와 고통에 대해 탄원을 올리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선에 대해서 의심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논리적인 변론의 무용성을 깨닫고는 오직 여호와의 통치를 선포하며 그의 선하심과 다스리심에 모든 것을 맡긴다.

 

5. 묵시문학

묵시문학은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인들의 생활 가운데서 언제나 위험에 처했을 때를 반영하고 있다. 묵시문학은 회화적이고, 상징적이며, 비밀스런 문체가 특징이다. 이스라엘의 파멸의 위기 속에서 악의 세력은 기세 등등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암흑과 공포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이 묵시 문학 저자가 무서운 박해 시대에 자기 세대의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그 고통을 분담하였을 때에 그들이 갖고 있던 소망과 신앙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악은 정의를 내릴 문제가 아니다. 묵시문학의 저자는 악을 육체적 고통으로, 영적인 불행으로, 또는 국가적인 패전으로 보았다. 그래서 악은 지적인 문제가 절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극단적인 한계상황에서 악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만왕의 왕이시며, 장차 세상을 통치하실 하나님을 의뢰하는 길 뿐이다.

 

6. 지혜 문학

지혜 문학에는 잠언, 전도서, 욥기가 포함된다. 지혜 문학 가운데서 욥기와 전도서는 하나님과 선과 악에 대해 비정통적인 입장을 취한다.

잠언서에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보응을 이 세상에 공정하게 분배하시는 데 대하여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언제나 지혜를 열심히 추구하는 자를 번영케 하신다. 불행 또한 악한 행위에 대한 단순한 벌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잠3:2). 악인에 대해서는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든 멸망할 것이라는 운명을 지워놓고 있다.

 

전도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의의를 부인하지 않으나, 하나님의 공의와 세계 지배의 비밀을 알려고 하는 것은 쓸 데 없는 것으로 선언한다. 저자는 비관론자, 냉소주의자로 나타나고 악에 문제에 대해서도 정곡을 찔러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구속자로서보다 초월적이고 이신론(理神論)적인 창조주로서 생각하고 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열정도 없고 공의에 대한 열정도 없다. 이것이 다른 사상가와의 차이점이다.

고난과 악의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욥기이다. 여기서 악은 하나님의 권위 가운데서 분명히 사람을 시험하고 죄 있는 자들을 벌하기 위해 이 세상에 들어온다. 이 이야기의 결국은 정의와 참된 경건이 보응을 받는다고 하는 인과응보의 사상의 변론으로 끝나고 있다. 욥의 고난은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라는 질문의 전형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한다. 자신의 무죄함에 대해 계속 주장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하나님은 이러한 항변에 대해 계속 침묵을 지키신다. 아내까지 저주하고 돌아선다. 친구들의 변론은 공정하신 하나님에 대한 주장으로서, 욥의 고난은 그의 죄로 말미암는 것으로 정죄하며, 인과응보의 사상을 뚜렷이 나타낸다. 그러나 ‘야훼의 말씀’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은 욥의 반항과 변론을 무력하게 만든다. 창조주요,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지혜는 그 우월성이 입증되었다. 욥은 마침내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한다. 여기서 악의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의 나타남으로 해결된다. 욥의 사화가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이 세상통치는 의로운 통치라는 것이다.

 

Ⅲ. 죄, 악, 그리고 고통

 

1.악의 원인으로써의 죄

악의 원인은 무엇일까? 인간이 악의 근원인가? 인간의 부패행위가 구약에서 언급되어 있지만(창6:5,12;8:12; 시38:3; 51:5), 인간의 타락(창3:1-7)은 악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인간은 그의 죄나 인류에 대한 죽음의 지배에 대하여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러한 악의 기원은 인간 자신의 밖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악은 인간의 죄가 없었더라면,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변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성경에서 모든 악의 근원으로 간주되고 있다.

 

죄와 사탄은 유관하다. 그렇다면 사탄이 악의 근원인가? 사탄은 이 세상에서 악을 낳는 권세를 가졌고, 악한 자의 아버지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나 사탄에게 권세가 주어져 있지만 그 권세는 제한 되어있고 창조성도 결여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존재를 가능케 하셨고, 그 악의 발전을 내어버려 두셨을 뿐 아니라 억제하신다.

 

2.악의 결과로써의 고통

악은 고통의 원인이다. 구약성경은 인간을 그 전체성(Totality)으로 보기 때문에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악을 인간 자체(정신과 육체:Totality)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성경은 그 어느 한 쪽(정신과 육체)의 고통의 기원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최후의 목적지를 말하며, 고통의 이유(WHY?)와 목적(For What?)에 대해서 말한다. 이스라엘 민족 최초에는 고통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이해하며 죄에 대한 심판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들은 재난을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로 이해했고, 그들에게 있어 고통은 왕의 사악함이나 선조들의 죄 때문이었다.

 

3.악(허용)의 목적으로써의 섭리, 또는 악의 신비로써의 섭리,

(죄의 결과이고 고통의 원인인) 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의로운 자가 고통을 받게 되었는가? 구약은 여러 가지로 그 해답을 말한다.

 

1) 인과응보적 고난관:

a. 욥은 부정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에 자신을 맡겼다.

b. 시편44편의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소홀히 하신 것을 격렬하게 공격한다.

c. 다른 시편의 기자들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들을 변호해 주시고, 의인을 압제하는 자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신다고 믿는다.

d. 종말론적 사고가 우세하게 되자 그들은 즉각적인 도움을 바라지 않고, 모든 인간의 불의가 똑바르게 될 미래의 야훼의 날을 고대하게 되었다.

e. 신구약 중간시대의 유대교는 사후의 의로운 자의 보상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았다.

2) 훈육적인 고난관: 백성들을 인간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으로 되돌아와 하나님께 복종케하는 하나님의 교육으로 받아들인다.

3) 하나님의 종을 통한 대속적 고난관: 하나님의 종은 그 백성과의 연대성 속에서 그 나라의 형벌을 스스로 대속적으로 담당한다.

4) 자기 대속적인 고난관: 인간은 자기의 형벌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의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대속적인 고난사상이다.

5) 허무주의적 고난관: 고통은 우연한 것이며, 도덕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라고 본다.

6) 신비주의적 고난관: 고통을 하나님의 목적 속에 감추어진 신비로 보며, 인간의 한계성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극단적인 간격이 강조된다.

7) 종말론적 고난관: 메시아 시대가 오면 모든 불의가 고쳐진다고 보는 묵시사상적 맥락에서 고통을 이해한다.

 

Ⅳ. 구약에서의 악의 문제

 

악의 원인이 무엇이든 구약성서 기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중요한 것은 형이상학적인 논리가 아니라 당면한 악의 현실이었고 이에 대한 극복이었다.

 

악은 하나님과 대립되는 성질의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피조물 중에 하나이며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섭리 아래에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악의 고통 중에 부르짖었다. 그리고 왜 의인이 고통받아야 하는지를 깨닫았다. 그들은 고통에 직면하여 하나님을 만났다. 욥이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보았다. 하박국은 고통 중에 부르짖다가 하나님의 소망을 찾고 하나님을 만났다.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통해 메시야를 바라보았다.

 

고난에 직면하여 항거하고 질문하던 자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고통을 벗어버리고 오히려 감당하기 벅찬 하나님의 은혜로 기뻐 날뛰게 되었다.

구약성서는 고통을 이유에 대답하지 않는다. 고통은 하나님을 생각게 하며 문제의 해결처이었다. 고통은 신비이며 하나님과의 뜨거운 만남에로의 유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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