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에서 마음의 위치와 역할/이경섭
칼빈(John Calvin) 역시 마음의 기능을 ‘복합적’인 동시에 ‘부분적’인 것으로 보았다. 곧 ‘정신과 육체의 신비한 통일체’인 인간이 의존되어 있는 본질적인 부분으로 본 동시에, 전통적인 ‘인간성의 기능들 중 한 부분’으로 보았다. 그는 때때로 마음을 ‘애정 또는 영혼의 지적(知的)인 부분’으로 정의했다가, 또 다른 경우엔 ‘천상의 가르침으로 교육받고 난 다음 내적으로 새로워지게 하는 법이 위치한 곳’으로 정의했다. 칼빈이 이처럼 ‘마음’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그가 마음을 다만 지성 혹은 정서의 기능적 작용만 있는 곳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포괄하며 신앙이 생생하게 체험되는 곳으로 이해한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을 중시하는 이런 그의 입장과 더불어 ‘스콜라주의(Scholasticism)에 대한 그의 경멸’, ‘기독교의 어리석음에 대한 그의 칭송’은 간과한 채, 사람들은 지나치게 그의 이지적인(理智的) 면만 보고 그를 차고 메마른 주지주의자(主知主義者)로 매도한다. ◈전인(全人)이 의존된 생명의 원천 칼빈은 마음이 동원되는 곳에서만 인간의 전존재적 의미가 살아난다고 보았다. 이는 그의 전기 작가 부스마(William Bouwsma)가 <칼빈의 시편 119편 98절 주석>을 분석한 내용에서 잘 나타난다.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들을 차갑게 철학화하지 않고 진지한 애정을 갖고 이러한 가르침들에 자신을 내어맡긴 다윗은 칼빈에게 이러한 지식의 본보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것이 머리로서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무엇을 안다는 것의 의미를 완전히 드러내 주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머리의 지식인 철학적 지식’과 ‘전(全)존재적 지식인 마음의 지식’을 구분함으로서 사변적인 주지주의에 대한 경멸을 나타냈고, 인간 존재(human being)를 결정짓는 중추로서의 ‘마음의 위치’를 부각시켰다. 또한 마음은 ‘지식’만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생명’이 의존되어 있는 곳이며, ‘빛과 어두움’, ‘생명과 사망’이 교차하는 곳이다. 하늘의 은혜와 능력이 머무는 곳인 반면, 사용 방향에 따라 마음은 간음, 살인 등 온갖 악의 원천이 된다(롬 1:28-32). 이러한 생명의 원천인 마음(잠 4:24)은 기독교 영성에서 제일 먼저 주목받아야 할 부분이다. 마음을 소홀히 하고선 신앙생활이 제대로 될 수 없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은혜의 비췸을 얻어야 하는(히 6:4) 이 중요한 곳을 아무렇게나 방치할 수 없다. 16세기 청교도 목사 피터 모펫(Peter Moffat)이 “당신의 샘을 깨끗이 하는 것보다 당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데, 당신의 양떼를 먹이기보다 당신의 마음을 먹이는 데, 당신의 집을 지키는 것보다 당신의 마음을 지키는 데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더 핑크(A. W. Pink, 1886-1952)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을 마귀적이라고까지 말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 책임이 없으며, 별들의 운행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사람들을 부추기려고 하는 것이 마귀이다. 모든 일 중에 마음의 일이 가장 어렵다. 헐렁하고 부주의한 정신으로 종교적 의무를 해내는 것에는 큰 수고가 들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두고, 헐렁하고 헛된 공상들을 끊임없고 진지한 그에 대한 관심 관심에 묶는 일에는 뭔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머리와 가슴의 종교 흔히 사람들은 냉철한 ‘지성(intelligence, 知性)’의 상대 개념으로 ‘마음’을 말하는데, 이는 ‘마음’을 ‘정서(emotion, 情緖)의 상징’쯤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뜻한 사람이 되려면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로 나아가야 하고, 예지(叡智)가 번뜩이는 ‘지성의 사람’이 되려면 냉철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선입견이 ‘마음’과 ‘지성’을 대립적으로 놓았다. 그래서 고도의 ‘지적 탐구력’을 요구받는 자연과학자들에게는 ‘정서적 작업’인 음악, 미술, 문학 같은 예술 분야에 둔감한 것이 당연시되는 반면, 주로 정서를 바탕으로 일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지적 논리를 요구하는 자연과학에 서툰 것이 당연시된다. 그러다 혹 공학도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음악가가 논리학과 수학에 재능을 보이면, 아주 특이하게 여긴다. (물론 이는 개인차와 함께 중등학교부터 문과 이과로 나눠, 학문을 지나치게 이분화 하는 교육 제도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분법(二分法)은 신앙세계에도 그대로 통용되어, 교인들을 ‘지성적인 신자’와 ‘감정적인 신자’로 양분한다. 그러나 주지하듯 ‘지성과 정서(마음)’는 상호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고 유기적(有機的)이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지·정·의’의 균형 잡힌 인격으로 창조했다. 그러나 타락 후 그 균형이 깨어졌고, 개인의 기질과 편향성에 의해 더욱 그 쏠림이 심화됐다. 기독교가 ‘지성’을 우위에 둔다 해서, 중요한 은사(恩賜)인 ‘마음(정서)’의 기능을 등한시하진 않는다. 이는 ‘전인적 영성(holistic spirituality)’ 원리에도 위배된다. 칼빈은 믿음의 정의에서 ‘머리와 마음의 연합’을 강조했다. 개혁자들은 하나님과 믿음에 있어, 단지 ‘지성’ 혹은 ‘감정’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은 전인적 열정에 불탔던 사람들이었다. 18세기 미국의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가 당대의 차갑고 말라빠진 ‘주지주의(主知主義) 신앙’을 비평하면서 “진정한 신앙은 머리의 종교가 아니고 가슴(마음)의 종교라야 한다. 진정한 덕과 거룩은 머리보다 심장에 그 자리가 잡혀야 한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지·정·의를 유기적으로 아우름 인간을 논할 때 흔히 심리학자는 ‘인격론적’으로, 철학자는 ‘존재론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인간을 주로 지·정·의적 존재로, 후자는 마음(혹은 영혼)과 육체를 가진 존재로 접근한다. (그리고 지·정·의를 ‘마음’에 포함시켜 전자보다 포괄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인격론적 입장이든 존재론적 입장이든, 유기체인 ‘지·정·의’는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구분 짓기 어렵다. 이러한 유기체적 인식(Organismic Understanding)은 역시 칼빈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지·정·의’의 계층구조를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을 엄격하게 구별 짓기를 거부했다. 그는 심지어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구별하는 것”마저 미심쩍게 여겼다. 이는 인간을 ‘포괄적 관점’에서 보는 그의 입장 때문이다. 오늘 일부 영성 이론은 사람을 전인적·통합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지·정·의를 분리시켜,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인간을 ‘영·육(靈肉)’으로 구분지어 그의 ‘영(靈)’이 어떻다느니 ‘육(肉)’이 어떻다느니 하며 인간의 ‘전인성과 유기체성’을 훼손한다. 또 ‘감정’의 문제는 홀로 감정만의 문제가 아닌, ‘지성과 의지와의 유기체성’ 아래서 된 ‘전체 마음’의 문제이다. 환언하면 ‘마음’이란 단지 ‘지성이나 의지’만도 아니고, 단지 ‘정서나 감정’만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이해, 진실, 의지, 따뜻함, 애정’ 등 ‘지·정·의’의 포괄적 의미 외에 모든 내면적인 것들의 총체이다. 심지어 ‘마음’은 ‘육체’와도 유기체적으로 상호 교호(Interaction)한다. 다음의 성경 구절은 그것의 상징처럼 보인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사람들의 감정 행사의 미숙함, 태도의 경직됨, 지나치게 비판적(negative criticism)이 됨은 타락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유기체성 훼손과 그로 인한 편향성의 심화 때문이다. 성숙한 영성은 지·정·의의 균형을 유지한다. 사물에 대해 냉정한 분별력을 가지면서도, 경직되지 않는다. 불가피하게 누구를 ‘판단(고전 5:12)’해야 할 경우에도, 그것이 ‘비난(눅 6:37)’으로 흐르지 않도록 판단에 온기가 깃들어 있다. 그리고 기쁜 일, 슬픈 일을 만날 때에도 그것에 지나치게 도취되지 않고 적절한 분출과 통제력을 갖는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종교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마음 종교’ ‘마음’은 신·구약 종교개혁의 중심 주제였다(사 29:13). 예수님이 가장 신랄하게 정죄한 죄는 ‘거듭난(벧전 1:23, 25)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외식적 경건’이었다. 저 유명한 ‘예수님의 일곱 가지 화(七禍, 마 23장)’는 그것에 대한 정죄였다. 칼빈에게 있어 ‘믿음’ 역시 복음적 역사에 대한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머리보다는 마음에, 이해보다는 애정에 가까운 어떤 것이었다. 그가 ‘믿음’의 위치를 ‘마음’에 둔 것은 참된 지식의 ‘내면성’을 시사한 것이었다. 다음의 ‘마음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강조는 이 논증을 더욱 확고히 한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선 외면적인 덕들을 갖춘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사랑이 우선돼야 한다. …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말의 가르침이 아니라 생명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전 영혼을 사로잡고, 우리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를 발견하고 거하게 되어야만 참으로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다. 이 지식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일상 속에 침투해야 한다.” 청교도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이 정의해 준 ‘경건의 본질’ 역시 동일하다. “경건은 내적인 것이다. 경건은 주로 마음 속에 있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롬 2:29)’.이슬은 잎사귀에 달려 있고 수액은 뿌리에 숨겨져 있다. 도덕론자의 종교는 온통 잎사귀에만 있는 것으로서 외면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경건은 영혼에 뿌리 내린 거룩한 수액이다. 고대 갈대아어로 ‘내 속’이라는 것은(시 51:6) ‘마음속 비밀한 곳’으로 해석된다.” ◈신비의 여지를 남김 칼빈(John Calvin)은 마음을 ‘지·정·의의 유기체’로 보면서도 지·정·의를 초월하는 그 무엇으로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마음’을 인위적으로 분석,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다음의 글에 그런 그의 생각이 잘 반영돼 있다. “지식의 기존 체계와의 불연속성, 부정합, 모순돼 보이는 것 끼리에 대해서까지 억지로 짜 맞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 모든 것이 일정한 체계 안에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이런 그의 태도는 믿음 한가운데 위치한 신비(루터 역시 믿음을 신비로 보았다),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자각, 신학의 인위성과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인간 경험의 모순된 실재들에 대한 그의 개방성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런 그의 신학 태도는 ‘신비에 대한 담론’을 열어 주었다. 하워드 라이스(Howard L. Rice) 역시 칼빈의 이러한 입장을 지지한다.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칼빈의 많은 추종자들은 한 가지 잘못을 범했다. 이들은 ‘정확한 교리에 대한 동의로서의 믿음’과 신뢰하기가 매우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한 ‘감정적 반응으로서의 믿음’ 이 둘을 분리시켜 버렸다.” 그는 계속하여 ‘믿음의 합리성’에만 매달리는 어리석음을 질타한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의 믿음은 의미 없는 헛소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합리성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믿음은 마음으로 파악될 수 있는 어떤 것에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믿음은 지적 동의를 구하는 언어적 공식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 외에 ‘믿음의 신비’에 대해 담론을 열어주는 또 한 가지 요소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 마음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이다. 심리학과 두뇌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인격의 관계’, ‘영혼과 인격의 관계’, ‘육체와 마음의 관계’ 등 마음의 실체에 대한 미진한 규명들이 사람들을 겸손하게 했고, 그러한 겸손은 모든 것을 파헤치겠다는 인간의 오만과 불필요한 호기심을 접고, 신비를 겸허히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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