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인간 이해의 용어
1. 소마(sw'ma, 몸)
“소마(sw'ma)”의 원래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호머에 처음 등장했으며, 인간 혹은 동물의 죽은 몸, 시체 혹은 송장을 의미했다. 5세기까지 이 의미를 유지했으며, 몸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면서 그 뜻이 전신(全身)에서 전인이 되었다.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에 “소마”는 신체의 기초적인 감각과 연관된 요소와 모습을 의미했다. 그러나 후에 영혼과 연관되어서 몸은 사슬 혹은 무덤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것은 불멸의 영과 대조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가 후에 플라토(Plato)로 인하여 발전하고 몸은 영이 존재하는 하나의 집이 되었고 죽음에서야 비로소 영이 몸에서부터 자유를 얻는다고 하였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러한 사고를 계승했으며, 전통적인 이원론을 주장했다. 엄밀히 말하면, 에픽테토스(Epictetus)가 몸과 영이 아닌 육과 영으로 구분을 지었다. 반면, 스토아 철학자이며 황제였던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인간을 삼분법으로 구분하여 몸, 프뉴마(영 혹은 혼) 및 누스(지성 혹은 이유)로 구분 지었다.
이러한 사고는 지속해서 발전하였고 성서 시대에까지 미치게 되었고 바울의 시대에도 이러한 이분법 및 삼분법 인간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던(J. D. G. Dunn)은 바울의 인간론에서 사용되는 두 가지 가장 중요한 용어로서 ‘몸’과 ‘육체’를 뽑았다. 불트만(R Bultmann)도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의 존재를 특징짓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을 ‘몸’(소마)으로 보았고, 이 개념은 가장 복잡하고 그 이해에 있어서 상당히 어렵다고 정의했다.
구약에서는 “소마”와 상용하는 히브리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칠십인역(LXX)에서 “소마”는 히브리어에서 “바사르”가 뜻하는 육체의 의미를 전달하는 범위로 사용되었다. “소마”는 “사르크스”와 구분이 되며, “소마”는 송장(삼상 31:10, 12), 시체(신 21:23, 사 5:25) 혹은 등(your back, 왕상 14:9, 사 38:17)을 의미한다. “소마”의 개념은 영지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영이 물질적인 세상의 육체와 인간의 몸으로부터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구속을 통하여서 가능하며, 구속은 “코스모스”(우주)와의 관계에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1세기 유대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필로(Philo)와 요세푸스(Josephus)도 “소마”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필로(Philo)는 “소마”를 표현할 때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의 몸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한, 몸의 총체성을 공동체를 통해서 강조하며, 한 지체가 아프면 다른 지체도 아프다고 하였다. 필로(Philo)는 이분법적 인간 이해가 있었으며, 인간을 몸과 영으로 구분하였다. 그는 영은 늙지 않고 영원하다고 주장했으며, 몸은 썩으며 영을 가두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영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썩어 없어질 육신 속에 들어왔다고 하겠으며, 죽음에야 비로소 몸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자유를 얻는다고 하였다. 또한, 죽음 후 인간은 더 이상 몸과 관계를 맺지 않으며 영혼은 이원성에서 단일성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하였다.
요세푸스(Josephus)는 필로와 마찬가지로 육과 영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인간 이해를 주장했다. 그는 “소마”를 몸, 신체로 이해하였고 “사르크스”는 근육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인간의 죽음 후에 영은 이 육신에서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서 새로운 몸을 입는다고 하였다. 또한, 영은 의로움으로 정화되며 육은 침례로 정화된다고 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소마”는 총 142회 등장한다. 바울서신에서만 9회 등장하며, 고린도전서에서 46회 등장한다. 신약에서 “소마”는 구약과 헬라 사상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다음의 뜻으로 사용이 되었는데, 시체(마 27:52, 눅 17:37), 예수의 몸(마 27:58, 막 15:43, 23:52, 55, 요 19:31) 마태복음 27장 52절에서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와 요한복음 2장 21절의 “그러나 예수는 성전이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에서만 시체와 노예가 아닌 다른 뜻으로 유일하게 사용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소마”는 인간을 지칭하는 특별한 의미로써 사용이 된다. 인간 존재는 - 영(프뉴마)의 영역까지 포함하여 - 육은 로마서 본문에서 “소마”를 전인으로서 사용하고 있다. (6:12, 12:1) 바울은 또한 “죄의 몸”과 “사망의 몸”(롬 6:6, 7:24), “그리스도 육체의 몸”(골 1:22, 2:11), “부활의 몸”(고전 15:44), “성찬의 떡”(고전 10:16-17),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롬 12:4-5, 고전 12:12-27, 골 2:19, 엡 4:12-16)의 의미로써 “소마”를 사용하였다. 또한, 골로새서에서는 더 넓은 의미로서 “소마”를 사용하였다. “우주의 몸”(1:18), “인간의 몸”(2:23), “그리스도의 육체의 몸”(1:22, 2:11), “신성의 충만의 구체화로서 그리스도”(2:9), “최종적 실체이신 그리스도”(2:17) 및 “교회의 몸”(1:18, 24, 2:19, 3:15)이 그것이다.
몸(소마)은 인간 존재의 여러 측면에서 육(사르크스)과 일치하는 현상을 나타낸다. 우선 “소마”는 무엇인가? “소마”는 신체적인 면의 인간을 뜻한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을 보면 바울은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 예수의 흔적은 사고나 박해를 인하여 발생한 육체적인 상처를 말한다. 고린도전서 13장 3절에서 바울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바울이 표현하는 “소마”는 신체적인 면에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바울은 또한 인간을 말하는 데 있어서 몸과 영으로 구성된 이원론적 존재처럼 설명한다. (고전 7:34) 그러나 로마서 7장 25절에는 마음과 육으로 전인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인간 전체를 묘사하기 위하여 영, 혼 및 몸을 나열하며 삼분법적 인간 구성을 말하기도 한다. (살전 5:23) 이러한 이분법적, 삼분법적 사용에 대하여서 로빈슨(H. W. Robinson)은 이와 같은 바울의 기술들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사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권유적 표현양식이라고 지적한다.
“소마”는 인간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을 보면 바울은 “너희 몸(소마)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반문하며 “너희는 너의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권면한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바울은 고백한다. 또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라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이 위의 본문들에서 말하고 있는 “소마”는 전인격, 즉 인간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소마”는 단순히 외적 · 신체적 측면에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크게는 전인을 의미한다. “소마”는 인간의 일부분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자아 또는 영혼에 외부적으로 결부된 것도 아니라 바울에게 있어서 “소마”는 인간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2. 사르크스(savrx, 육)
육의 기본적인 의미는 히브리어 “바사르”의 개념과 같이 우선 인간과 짐승들에게 공통적인 물질적인 육을 의미한다. “바사르”는 엄격한 의미에서(레 13:2) 혹은 몸이라는 확대된 의미에서(창 2:23) ‘살’을 뜻한다. 후자의 경우에 이 단어는 집합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하며(창 6:17, 민 18:15) 혈연관계를 의미하고(창 2:23), 완곡어법으로 사용되기도 하며(출 28:42) 비유적으로 영생(시 16:9), 내적인 태도(시 63:1) 혹은 인간의 약함과 무력을 의미하거나(창 6:3) 은유적인 이미지를 지니기도 한다. (겔 11:19, 사 17:4, 10:18) 바울은 인간의 경우에는 “사르크스”를 사용하였고 동물의 육을 표현할 때는 “크레아스”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칠십인경(LXX)의 용법과 동일하다. 던(J. D. G Dunn)은 복음의 작용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사용한 용어 “육체”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 용어는 하나님의 성령을 대적하는 세력을 묘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정의하였다. “사르크스”는 바울서신에 91회 나타나며, 로마서에만 25회 나타난다. 다른 어떤 신약의 저자들도 바울만큼 “사르크스”의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르크스”는 매우 중요한 용어임을 인식할 수 있다.
“사르크스”가 “소마”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오해가 되기도 한다. 특히, 고전 15:39~49절을 보면 그 초점이 “사르크스”가 아닌 “소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사르크스”는 “소마”와 구별되는 단어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 본문에서는 두 “소마” 간의 대조, 서로 다른 “사르크스” 간의 대조, 또 서로 다른 영광 간의 대조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갈 4:13)라고 말하며 또한 “내 육체에 다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고후 12:7)라고 자신의 육체적 고통에 대하여 언급한다. 따라서 “사르크스”는 인간의 신체적 관점에서 본 몸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사르크스”를 지상적인 영역에 한정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고전 1장 26절에 나오는 “사르크스”의 지혜는 이 세상의 범주에 따른 지혜로 정의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르크스”의 지혜와 대조되며 하나님의 힘은 “사르크스”의 무기와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고전 1:24, 고후 10:4) 바울은 “사르크스”를 지상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며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불트만(R. Bultmann)은 “사르크스”를 인간론적 개념들을 다루는 부분에서가 아니라 죄와 죽음과 함께 묶어서 분석하고 있다. 슈바이처(A. Schweitzer)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사르크스” 안에 있지 않다고 정의하면서 이것은 “사르크스” 안에 자기의 삶을 세우는 것은 즉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하며 육체와 영을 서로 적대적이며 상호배타적으로 이해하였다.
3. 프쉬케(yuch;n, 혼)
바울은 “프쉬케”를 13회 사용하며, 로마서에서 4회 사용하고 있다. 바울의 “소마” 및 “사르크스” 용어의 사용에 비하면 “프쉬케”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프쉬케”의 용법은 바울의 인간론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특히 바울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의 접촉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하여 인식하는 데 상당한 의미가 있다.
구약성경에서 “네페쉬”가 760회 사용된 것에 비하면 바울이 사용하는 “프쉬케”의 용법은 매우 큰 대조를 보인다. 본래 구약이나 신구약 중간기 문헌이나 랍비니즘에서 인간학적 용어의 중심은 “프쉬케”였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그 중심단어가 “프쉬케”가 아닌 “프뉴마”로 나타나고 있다.
고전 헬라어의 용법에서 “프쉬케”는 인간의 몸과 분리될 수 있으며 또한 몸이 멸할 때 함께 멸해지지 않는 사람의 본질적인 핵심을 의미한다.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하는 인간의 내적인 감추어진 부분으로서의 “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의 기원이 바로 여기 있다.
바울은 “프쉬케”를 헬라적 용법에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용법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여러 구절에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프쉬케”가 사용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목숨” 혹은 인간의 생명력의 초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스테이시(W. D. Stacey)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경험은 바울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그의 인간 이해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왔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에게 인간과 관련된 용어인 “프쉬케”는 그 중요성을 잃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으로 설명이 되는 “프뉴마”가 아주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쉬케”와 “프뉴마”는 각기 의미의 범위 속에서 중복되는 면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이 용어들의 기원이 헬라어 용법과 히브리어 용법에 기원이 있음을 말해주지만, 바울의 발전된 용법에서는 히브리적 인간론의 영향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히브리적 인간론은 헬라적 인간론과는 반대로 인간을 하나의 분리될 수 없는 전인으로서 이해한다.
“프쉬케 · 네페쉬와 프뉴마 · 루아흐”라는 두 용어군은 본래 “숨”(Breath)이 생명력으로 여겨졌음을 드러내 주며,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여러 본문에서 이러한 의미상의 중복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 예로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네페쉬)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이 되니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생기는 “네샤마”가 사용되었고 생령은 “네페쉬”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미상으로 “네샤마”의 밀접한 동의어는 “네페쉬”가 아니라 “루아흐”이기 때문이다. (욥 27:3, 사 57:16)
로빈슨(H. W. Robinson)에 의하면 “프뉴마”는 인간의 하나님을 상대하는 면을 더 의미하고 “프쉬케”는 생명력 그 자체를 의미하는 쪽으로 더 제한성을 띠게 된다고 말했다.
4. 프뉴마(pneuvma, 영)
신약성경에서 “프뉴마”는 총 379회 등장한다. 바울서신에서 총 146회 등장하며, 구약성서의 “루아흐”와 비슷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프뉴마”를 성령을 지칭하는 데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즉, 바울에게 복음이란 사람 속에 내재하면서 바깥으로 표출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영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영이 바깥으로부터 사람에게 역사하고 사람 속에서 활동하는 것에 관한 점이라는 것이다. 영이란 사람의 인격이 하나님과 가장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수단이 되는 인간 인격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스테이시(W. D Stacey)는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프뉴마”는 주로 하나님의 성령에게, 영적인 은사로, 악의 영역에서, 불순종의 영으로, 신자에게만 허락된 “프뉴마”로서 또한 개인적인 “프뉴마”로 사용된다고 하며 마지막 용법을 바울의 “프뉴마”의 인간학적 언어로 보았다. 래드(G. E. Ladd)는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프뉴마”를 소유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피츠마이어(J. A. Fitzmyer)는 영이란 사람의 인격이 하나님과 가장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수단이 되는 인간 인격의 차원이다. 즉, 바울에게 영은 인식력과 의지력을 소유한 자아, 그 능력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을 받기에 특별히 더 적합한 자아를 말한다고 하였다.
바울은 “프뉴마”를 인간학적인 용어로 37회 정도 사용하였다. “프뉴마”의 활동 범위는 인간 가운데 있으며, 그 “프뉴마”는 하나님의 영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인간의 영과 함께 활동한다. 그래서 “프뉴마”로서의 인간은 주님과 연합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고전 6:17) 큄벨(W. G Kuemmel)은 인간이 신적 영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과 밀접히 살아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프뉴마”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프뉴마”의 보다 중요한 의미는 인간의 외적 자원인 “소마”와 대조되는 내적 차원으로서(고전 7:34, 고후 7:1) “사르크스”와도 대조되며(빌 3:3, 롬 2:28), 심지어 “누스”와 구별되기까지 하는 내적 생명을 의미한다.
5. 속사람 – 겉 사람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18절에서 속사람과 겉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속사람과 겉 사람은 헬라 사상적 언어 세계에서 유래하였고 헬라철학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플라톤, 스토아 철학자, 필로) 불트만(R. Bultmann)은 속사람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고 자기 삶을 개척하고 외적인 사태발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정신적 인간이라고 정의했다.
바울은 오히려 속사람과 겉 사람을 다르게 이해한다. 겉 사람은 부패하거나 사라질 악한 물질로 보지 않는다. 또한, 감각에 따라 사는 인간도 아니고 “옛 아담”도 아니며 오히려 소멸성과 외적인 존재에게 맡겨져 있는 존재이다. 바울의 인간학에서 속사람은 고유의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감각적인 삶과 대립하는 정신적인 삶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 삶으로서 성령으로 인하여 새롭게 된 사람이다. 하지만 이러한 속사람도 아직 완성된 세계 속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은 매일 매일 새로워져야만 하는 것이다. (16절) 매일 매일 새로워진다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의 사로잡힌 사람은 그 사람 안에 내재하는 그리스도의 존재로 인하여 매일 새롭게 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해서 경험되는 현실이며, 이웃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윤리로 표현되는 새로운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다. (갈 5:22) 이 인간은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서 인내하는 인간이다. 인간은 시간적이며 소멸적이다. 그러나 이 영광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은 알고 있다. (17, 18절)
변화되지 않은 겉 사람은 시험에 들기 마련이다. 이 겉 사람은 영적으로 매우 약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화된 속사람은 영적으로 강하다. 환난을 이겨낼 수 있으며, 부활의 날에 있을 영광을 위하여 인내할 수도 있다. 겉 사람은 시험에 빠지지만, 속사람은 시험을 오히려 극복한다. 겉 사람은 어려움에 빠지지만, 속사람은 어려움을 즐길 수 있는 인내가 생긴다. 겉 사람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만, 속사람은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 겉 사람과 속사람은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겉 사람이 “나”이며 또한 속사람도 “나”이다. 겉 사람은 속사람으로 이해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겉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한 변화를 통해서 속사람이 된다. 바울이 말하는 겉 사람과 속사람은 다른 차원의 사람이 아니다. 둘 다 인간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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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인간학적 용어들
바울의 종말론적 인간 이해는 사회학적, 생물학 관점에서 조명되고 해석된 인간 이해나 헬라의 철학적인 사변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바울의 인간 이해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은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 있는 종교적인 인간이며,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전인으로서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가질 뿐만 아니라(영적으로), 한편으로는 가지지 않는다. (육적으로) 이처럼 바울의 종말론적인 인간 이해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바울서신에 따르면 바울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어떤 고정된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다. 때로는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묘사했고(고전 5: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때로는 삼분법으로써 묘사했다. (살전 5:23,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그러나 이 구절을 보고 바울이 인간을 이분법, 삼분법으로 해석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바울의 인간 이해가 이분법인지, 삼분법인지 아니면 단일체적 인간 이해인지에 대해서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어왔다. 이러한 인간 이해를 통해 인간의 죽음 이해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인간 이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울서신에서 인간학적인 용어는 주로 몸(소마), 육체(사르크스), 혼(프쉬케), 영(프뉴마)이며, 그 외에 속사람(에소 안드로포스), 마음(카르디아), 양심(쉬네이데시스) 등의 용어가 나오는데,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것 중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되었는지, 분리되었는지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바울의 몸, 육, 혼, 영의 개념 위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몸(소마)
몸은 인간의 죄와 부패 속에 있는 육(사르크스)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며, 다른 한편 인간 부활의 운반체이다. 그러므로 몸(소마)은 바울의 인간론과 그의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영생에 관한 전 복음 사이의 연결고리이다. 따라서 몸(소마)은 가장 중요한 바울의 인간학적 개념이다.
루돌프 불트만(R.Bultmann)은 “인간은 한 몸(소마)을 가지고 있지 않고 몸(소마)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몸(소마) 개념에 대해 “너희의 몸들을 신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라고 권할 때, 몸(소마)이 육체의 형식 또는 단순히 육체만을 표시하지 않고 오히려 몸(소마)으로 전(全) 인간으로 생각되었다고 말한다.
콘첼만(Conzelmann)도 바울에게 있어서 몸(소마)은 어떤 사람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서 몸(소마)은 대체로 전인을 뜻한다. 이들의 전인적 인간 이해는 단일체 내지 통일체적 인간 이해이다. 즉, 신약성경은 인간을 이분적 내지 삼분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분리할 수 없는 하나, 즉 통일체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인간 이해는 전형적인 헬라 사상의 용법을 배격하고 히브리 사상의 영향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몸(소마)은 인간이다. 이것은 통일되고 복합체이고 살아 있는 유기체이며 위격체이기까지 한 인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인간, 그의 인격 전체를 몸(소마)으로 지칭될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속한다”(고전 6:15)라는 것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고전 12:27)와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라”(롬 12:11)라는 것은 “너희 자신”을 드리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몸(소마)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요 예배의 장소이다. (롬 12:1, 고전 6:20)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영혼이 아니라 몸(소마)이라는 것이다. 몸(소마)은 곧 “나”를 가리킨다. (고전 13:3).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나”이며 동시에 행동을 걸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나”이다. 결론적으로 몸(소마)은 다만 타락하기 위한 기능으로만 창조된 것이 아니고, 몸(소마)이 죽으면 몸(소마)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데, 바울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몸(소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몸(소마)은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로서 피조 세계와 연대 속에 있는 인간을 나타낸다.
바울의 몸(소마) 개념은 그의 신령한 몸(소마)의 부활 사상과 더불어서 중요한 개념을 가진다. 몸(소마) 개념이 묵시문학 시대에 와서 하나의 변천을 겪게 되는데, 묵시 문학가들이 공의의 심판 사상을 강조하여 악인이나 의인이나 똑같이 심판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상에서 몸의 부활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이것이 바울의 인간 이해에 있어서 신령한 몸(소마)의 부활이란 중심개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몸(소마)의 개념에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개념(하나님의 전)과 전인적인 개념(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려라)을 부여함으로써 몸(소마)에 인간학적 용어의 대표성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인간 이해는 통전적이고도 종합적인 인간 이해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2. 육(사르크스)
바울의 인간 이해에 있어서 몸(소마)과 육(사르크스)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바울은 육(사르크스)을 단순히 육체를 말하고 있으며, 이 용어는 자연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전 1:29, 롬 1:3, 3:2, 갈 1:16) 바울은 육을 ‘영’의 개념의 반대로 쓰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인 개념에만 적용된다. 자연인의 기준으로 하여, 육(사르크스)은 고귀한 것과 대조되는 인간의 비천한 본질을 말하고, 하나님과 구별되는 전인의 상태를 말한다.
바울이 육(사르크스)으로써 인간을 말할 때, 그것은 그 인간을 보는 특별한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라든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할례당이라”(빌 3:3)라고 말할 때, 육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과 대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육(사르크스)은 하나님과 대조되는 인간을 말하면서, 자연히 인간의 약함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관점에서 본 인간의 존재이다. 그래서 큄멜(Kümmel)은 바울이 육을 인간의 적대적인 힘이라고 언급한다.
육(사르크스)은 또한 육신적인 혈통과 자연적 인연 등 인간을 다른 사람들과 묶는 인간적인 관계를 의미하고(롬 1:3, 9:8, 11:14), 이 용어는 사회적 지위에 관련된 인간을 표시하고(롬 1:3, 4:1, 9:3, 8, 고전 10:18), 또 이 개념은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적인 인간 존재를 특징짓는 생활양식을 묘사하는 데까지 확대되고 있다. 바울은 이 육(사르크스)이 정복되었음을 말한다. (갈 5:24) 즉 육(사르크스)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못 박혔다고 말하면서(롬 7:5, 8:8-9)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삶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갈 2:20)
바울은 몸(소마)과 육체(사르크스)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다른 관점들로 지칭하는데, 제임스 던(James. Dunn)의 견해에 의하면 바울이 이 둘의 차이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본문으로 고린도전서 15장 35~50절로 보는데, 여기에 나타나는 내용 가운데 중요한 점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다”라는 것(고전 15:50)과 몸으로 이어받으리라는 것(고전 15:44)을 서로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바울은 육(사르크스)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기 때문에(고전 15:50), 바울은 육(사르크스)의 부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몸(소마)의 부활만을 선포한다. 육(사르크스)과 몸(소마)은 각기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본 인간 전체를 의미한다. 육은 부패할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3. 혼(프쉬케)
혼(프쉬케)은 바울의 인간학적 용어들 가운데서 가장 비중이 작은 말이다. 바울은 이 단어를 13회만 사용하였는데, 영이란 어휘에 완전히 압도되었기 때문에 그 빈도수가 매우 낮다. 혼(프쉬케)이란 말은 주로 인간의 생명을 가리킨다. (롬 11:3, 16:4, 빌 2:30) 본래 이 단어는 구약이나 신구약 중간지 문헌이나 그리고 랍비니즘에서 인간학적 용어의 중심단어는 혼(프쉬케)이었다. 그런데 바울에게서 그 중심단어는 영(프뉴마)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프뉴마)은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었지만, 혼(프쉬케)은 획기적인 퇴보를 거두었다는 것이 바울서신의 하나의 특징이다. 이점에 대해서 스테이시(Stacey)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바울의 사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따라서 이전에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자세는 그의 모든 사상에 영향을 주었고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인의 경험 이후에 인간의 생명에 대한 단어인 혼(프쉬케)은 그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해서 인간에게로 흘러가는 영(프뉴마)이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테이시는 이것을 바울에게서 혼(프쉬케)이 작은 빈도수로 나오는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고전 헬라어 용법에서 혼(프쉬케)은 “인간의 몸과 분리될 수 있으며 또한 몸이 멸할 때 멸해지지 않는 사람의 본질적인 핵심”을 의미한다.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하는 인간 내적인 부분으로서의 “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혼(프쉬케)은 히브리어에서 파생된 것이 확실한데, 즉 “네페쉬”에서 온 것으로서 육신의 살아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혼(프쉬케)은 사람이 지상 존재에 속한 것이다. 육체적 생명이 없으면 그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 의해서 그것이 해방되고 아무것에도 속박받지 않는 순결 속에서 산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사람이 죽을 때 그것은 끝장이 난다. 혼(프쉬케)이라는 단어는 또한 그 사람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몸, 육, 영과 관련되어 있다. 혼(프쉬케)과 대립하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몸이 아니라 영이다. 혼(프쉬케) 개념은 몸과 구별되거나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영혼’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구약성서 개념인 “네페쉬”의 의미에서 인간이 피조 되었음과 살아 있음을 표현한다. 에바브로 디도가 바울을 위하여 위험을 무릎 썼을 때 그는 거의 죽음의 상태에 이르렀다. (빌 2:27) 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바울의 혼(프쉬케)을 위하여 그들의 목숨을 걸었을 때 그들은 거의 생명을 잃은 상태였다. (롬 16:4) 이 구절에서 바울은 ‘생명’을 “프쉬케”로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불트만도 바울에게 있어서 혼(프쉬케)은 “네페쉬”처럼 자연적인 생명의 힘, 혹은 이 생명 자체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좀 더 자세히 혼(프쉬케)은 노력하고 의지하고 목적하는 자아로서 인간 안에 내재하는 살아 있는 존재 상태라고 한다. 그러므로 혼(프쉬케)은 인간 본질의 불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 표현과 기분 그리고 지각적인 인간을 나타낸다. 이처럼 혼(프쉬케)이란 의미는 육신의 관점에서 관찰된 인간의 살아있는 존재, 인격, 생명력으로서의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4. 영(프뉴마)
영(프뉴마)이 헬라 사상에 있어서는 육에 대립한 정신적 원리였던 것과 달리 바울에게 있어서는 침례로써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의 생의 원리이다. 이것은 또한 사람의 어느 부분이 아니고 전체적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와 교제하며, 그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 역시 영(프뉴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이 영(프뉴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프뉴마)이 전 인간을 말하거나 인간의 삶의 모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7장 34절과 5장 3절에서 몸과 영은 함께 전인(全人)을 묘사한다. 그러나 영(프뉴마) 홀로도 서신의 마지막 인사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사람 자신을 가리킬 수 있다. 즉,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와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는 의미상 아무런 차이도 없다. 영(프뉴마)도 역시 사람 속에 있는 어떤 형이상학적 원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살아 있는 나를 가리킨다.
모든 인간은 영(프뉴마)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과 특수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때 인간의 영(프뉴마)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는 기관”이라 불릴 수 있다. 그래서 래드(Ladd)는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영(프뉴마)을 소유했기 때문이라 했다. 영(프뉴마)의 활동 범위는 인간들 가운데 있으며, 그 영(프뉴마)은 하나님의 영이 관심을 두고 있는 인간의 영(프뉴마)과 함께 활동함으로써 영(프뉴마)으로서의 인간은 주님과 연합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고전 6:17) 그러므로 바울이 영(프뉴마)의 사후의 생존에 대해 기록하고 있음은 주목할 가치를 지니는데(고후 5:8, 빌 1:23), 이는 중간상태와 그리고 부활의 몸의 특성과 연관 지어 볼 때, 바울의 인간 이해에 있어서 해결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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