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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생하는 이의 새 생명인 거룩한 기질에 대하여

하나님아들 2012. 11. 21. 17:18
<거룩한 기질>에 대한 질문입니다(호레이스님께)|신학토론방
하나로 | 조회 109 | 09.09.15 21:49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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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스님의 댓글)

 

하나로님께서 질문하신 것을 간단하게라도 질문해 드리겠습니다.

 

1) '타락한 기질'이 '거룩한 기질'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일에도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역사으로만 가능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바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고백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2) 이때의 기질은 정의는?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성령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한 사람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의 원리라고나 할까요? 내 안에 성령님께서 계심으로 인해서 내 안에 성령님의 원리(principle)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3) 이 '원리'로서의 '기질'은 결코 습득된 것이 아니고 주입된 것입니다. 주어지는것입니다. 그리고

 

4)'중생의 순간은 주입된 '생명의 씨' 정도로 정의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한 면으로는 옳고 한 면으로는 그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중생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영혼의 의사'라는 책에서 소개받은 '초기중생'의 측면이라면 그것은 '생명의 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와 믿음 이후에 오는 '새출생'으로서의 '중생'에서라면, 그것은 씨 이상입니다. 열매까지는 아니어도 그 씨를 자라게 하고 자란 것으로서의 생명현상이 좀 더 충만해진 상태, 아마도 잎이나 꽃 혹은 줄기쯤 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본성'의 문제는,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인데, 이전 스코틀란드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책이었던 토마스 보스톤'인간의 네 가지 본성상태'라는 책을 보면, 본성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저의 글(윗글 속에 있는) 그 본성이 네 가지 임을 이미 시사해 놓았습니다.

 

창조되었을 때의 본성,

타락한 뒤의 본성,

구속받은 뒤의 본성,

그리고 영화롭게 된 상태의 본성....

 

이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에, 본성문제를 다루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동양사상을 다룰 때 이 네 가지 중의 어떤 것과 유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동양사상을 평가하고 비평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로의 생각들)

새삼 지난 글을 끄집어 내봅니다.

     

       (호레이스님 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거룩한 기질이며, 반복된 훈련과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번에 주어지는 새로운 기질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새 생명의 기질이 며, 옛 생명이 가진 기질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중생)하게 됨으로 새로운 기질이 입히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룩한 기질은 무엇인가? 옛 창조에 속한 감각(sence)인 시각,청각,촉각,미각,후각의 오감과 감성, 이성(reason)등의 옛 감각(기질)에 더하여진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감각들을 새롭게 하는 그 무엇이다.

지금까지 옛 세상에 속해서 옛 사람으로서 모든 감각을 가지고 추구해 왔던 그 방향과 태도를 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전환(concersion)시키게 하는 것이며,

옛사람이 가지고 있던 모든 감각들이 이제는 새로운 방향과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감각으로 모두 재정립된 것이 바로 거룩한 기질이다. 이전 것 그대로이지만, 전혀 새로운 그 무엇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며,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냐 밖에 있느냐에 의해서 세상의 세력권(구심력)에 있던 존재가 성령의 세력권(원심력) 안으로 들어옴으로 새로운 성향을 갖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위의 내용에 대해서 좀더 깊이 묵상해보기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생각들이 자칫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논의로 흐르지 않기를 주님께 간구합니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우리의 생명의 깊이와 지식의 부요함이 그 영의 넘치치는 공급으로 충만해지기를 또한 주님께 구합니다.

 

이러한 탐구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일단 내려놓고,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것 같은 생각들을 정리해보기로 합니다.

 

위의 글에서 호레이스님의 글을 정리하면

 1) 거룩한 기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것이다.

 2)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중생)하게 됨으로 새로운 기질이 입히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옛창조에 대한 그 모든 감각들을 새롭게하는 그 무엇

 4) 옛사람이 가지고 있던 모든 감각들이 이제는 새로운 방향과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감각으로 모두 재정립된 것이 바로 거룩한 기질이다. 이전 것 그대로이지만, 전혀 새로운 그 무엇이다.

 

위의 4가지의 거룩한 기질에 대한 정의가 서로 상이함을 알수 있습니다.

1)번은 기본적인 말씀에 해당하는 것이고,

2)번은 옛기질과 다른 새로운기질이 별도의 실체로서 있어 보이고

3)번은 하나님의 선물인 거룩한 기질이 원인자가 되는 것인데, 결국은 옛기질이 새롭게된다는 것으로서 1)번과는 다른 의미가 됩니다.

4)번은 옛기질이 재정립된 것 자체가 새로운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자세히 묵상해볼수록 2,3,4번의 의미들이 사뭇다르게 다가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것이 무엇일까요? 그 거룩한 기질은 과연 어떤것일까요?

옛기질이 재정립된 것일까요? 아니면, 옛기질과는 다른 실체로서 덧입혀진 새로운 기질일까요? 아니면, 옛기질의 재정립을 다만 도와주는 원인자만일까요?

 

이 부분에 대한 견해들이 있으시면 많은 고언들을 듣고자 합니다.

 

(하나로)

 

이하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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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답변을 주셔서 반갑고 감사합니다. 결론적으로 갈2:20처럼 우리안에 생명의 원리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거하심을 믿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좀더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제가 개혁주의의 구원론에 대해서 좀더 정리가 필요한듯 싶습니다. 예전부터 한번은 정리를 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여지껏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있네요. 저녁에 와서 다시 위의 내용에 대해서 곰곰히 묵상을 해보겠습니다. 09.09.10 21:15
벧후1:4이하에서 성도의 견인이 신의성품을 닮아간다고 한다면, 나의 옛기질이 거룩한 기질을 본받아 닮아간다고 볼수 있을것같습니다. 결국, 옛기질이 변화를 받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입된 거룩한 기질은 성령의 원리요, 옛기질을 거룩함에 참예케하는 원인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됩니다. 09.09.10 23:23
이것을 좀더 살펴보면, 구심력과 원심력의 긴장관계에서 영적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전선의 최전방이 어디일까? 인간의 옛기질에 대한 동서양의 정의와 표현들이 다르지만, 대표적으로 생각,감정,의지로 구분해서 보면, 사람의 생각,감정은 풍랑처럼 시간에 따라서 늘 변화무쌍합니다. 이럴때에 <의지>라는 기관이 행동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09.09.10 23:45
구심력과 원심력의 팽팽한 긴장속에서 의지가 어디로 결정을 내릴지 망설일때에 그 균형추를 무너뜨리는 것은 무언인가? 다만, 인간속에 주입된 거룩한 기질이 강제적으로 의지를 조정하는것인가?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이군요. 09.09.10 23:45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때에, 늘 나의 균형추는 원심력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도덕적인 선'등으로 자신의 의지를 사용할때에 어느 한계에 도달하는것을 느낍니다. 그것을 늘 넘어서는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할때에 그 어떤 옛기질도 침범치 못하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09.09.10 23:45
여기서 <의지>를 너무 강조하면 알미니안으로 기울어진다고 오해가 있을수 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의 원리가 주체가 되어 <의지>의 원인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한다면, 인간의 노력이라는 개입을 방어할수 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09.09.10 23:50
또한, 조심스럽게 호레이스님께 질문드리면, 옛기질의 변화의 성품중에서 만일 그것이 덕,지식,절제,인내,경건중에서 동양의 <인의예지>인 사덕의 덕목이 0%도 신의 성품과 닮은구석이 없는가 입니다. 지금까지의 일반론은 <전혀없다>라는 것인데, 과연 <전혀>라고 하는 것에 다시 질문을 두드려 봅니다. 인간의 어떤 선이라도 그리스도의 생명안에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라는 전제하에서 그 어떤 논의도 허락되지 못할것같은데, 혹시라도 그 빗장을 열수 있는 길이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집니다. 09.09.10 23:58
하나로
롬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에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속에>에 보인다고 합니다. 또한, 롬2:15에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양심>이란 것은 09.09.11 07:37
하나로
동양의 공맹이 비록 하나님을 알지못했고, 복음을 듣지 못했으나, 양심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여 결국, 사단(인의예지)을 밝힌것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이것을 과연 신의성품에 참예하는 것에 0%도 아니라고 단정할수가 있는것인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09.09.11 07:40
하나로
또한, 딤전1:19은 믿음과 착한양심...이라고 하고, 딤전3:9은 깨끗한 양심...이라고 하며, 벧전3:21에서는 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을 근거로, 공맹이 하나님과 복음을 몰랐으니, 믿음에 대해서는 당연히 몰랐을것이나, 그들이 추구했던 <사단>은 선하고 착한양심을 좇아 간것으로 볼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14:18 new
Horace
전통적인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신의 성품’이 아니라 ‘신의 속성’이라는 제목으로 인간과 신의 공유적인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을 논의해 왔습니다. 공맹의 ‘인의예지’는 인간과 신이 공유하는 속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의 성품’은 이것과는 약간 다르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주어진’ 새사람들이 계속되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더하여 갖게 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의 기질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지요. 09.09.12 09:29
Horace
‘인의예지’가 신의 속성일 수는 있어도, ‘신의 성품’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인의예지’가 뛰어난 덕목이요 성품이라도 할지라도 거듭남이 없는 상태에서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공맹의 도가 아무리 높고 깊어도 그리스도 밖에서라면 어느 것도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로님께서도 그것을 인정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09.09.12 09:32
Horace
(선한)'양심'의 문제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나 모든 사람들의 속에 심겨져 있는 '종교의 씨'라는 것과 함께, 간단히 취급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만, 아무리 인간이 양심적으로 선하고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그 양심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개혁주의신학에서 오래전부터 성경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증명해 왔습니다. 공맹이 아무리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양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양심일 수 없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구원받은 자의 양심이 구원받지 못한 자의 양심보다 더 깊고 온전한 경우들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향성(orientation)을 염두에 둔다면 별로 09.09.12 09:36
Horace
어렵지 않은 문제입니다. 곧 천국방향을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의 키가 좀 적은 것과 지옥방향을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의 키가 조금 크다고 해서 그 방향성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처럼 천국을 향하여 가는 구원받은 사람의 양심의 좀 부족함과 지옥을 향하여 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양심의 크기나 정도는 그 방향성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맹의 양심이 어떤 그리스도의 양심보다 훨씬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천국과 지옥의 방향을 결정지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의 문제로 결정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09.09.12 09:38
 
예..대부분 공감합니다. 헌데, 위의 글 1~4번에 관한 의견은 주시지않으셨군요. 거룩한 기질에 대해서 정의하는 것이 무언가 상이한 점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져셔요. 09.09.12 11:31
그리고, 공맹의 선한양심(신의속성?)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은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볼수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상황에서 동일한 잣대를 적용할수 있는가?입니다. 물론, 이 이상의 확대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는 생각해보아야겠지만요. 그리고, 윗글에서 사덕(인의예지)에 대해서 그리스도밖이라고 하는 것은 공감하나, 예전에 어떻게 접목을 시도할실려고 했는지가 궁급해집니다. 09.09.12 11:36
 
ㅎㅎ 윗글의 1~4번 정리된 것은 제가 미처 보지를 못했군요. 생각해 보겠습니다만, 하나로님의 묵상에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저로서는 1~4번이 결코 모순된 것처럼 다가오지 않는데, 아마도 어떤 용어상의 뉘앙스에서 서로가 생각하는 바가 다른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좀 생각해 보고 답변 올리겠습니다. ^^ 09.09.12 11:52
  Horace
하나로님께서 질문하시는 것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했으면 해서 제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1)'기본적인 말씀에 해당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2)에서 요약하신 말 중에 '실체'라는 말을 쓰셨는데, 무슨 뜻인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어떤 뜻일까요? 3)에서 1)번과는 다른 의미가 된다고 하셨는데, 1번 정리요약이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기질인 것 같습니다만, 3)의 요약내용이 옛기질을 새롭게 한다는 것으로 요약하셨으니, '주어지는 것'과 '옛기질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 모순되거나 혹 다른 의미라는 뜻인가요? 저는 두 가지가 병행될 수 있다고 봅니다만....그리고 4)에서 2),3),4)의 의미가 사뭇 다르다고 하셨는데, 1)과 비교해서 2),3) 09.09.12 20:10
  Horace
그리고 4)가 다르다는 것인지, 곧 1)과 비교해서 나머지 것들의 요약내용과 서로 다르다는 것인지, 2),3),4) 각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인지....좀 분명치가 않습니다. 아마도 약간 급하신 일들 때문에 빠르게 쓰시느라고 그런 것으로 이해됩니다. 좀 더 명확하게 질문해 주실 수 있는지요? 이렇게 해서 어떤 용어나 개념을 좀 더 서로간에 이해될 수 있는 차원으로 접근해 가는 것....대화의 필수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 09.09.12 20:12

 

(하나로 답변)

1)'기본적인 말씀에 해당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답변) 거룩한 기질(성령의 원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것에 대해서 별이견이 없이 동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주신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도입니다.

   거룩한 기질을 주셨으면 그 <거룩한 기질>의 소유의 주체가 누구인가?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2)에서 요약하신 말 중에 '실체'라는 말을 쓰셨는데, 무슨 뜻인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어떤 뜻일까요?

=>(답변)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중생)하게 됨으로 새로운 기질이 입히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옛기질에 새로운기질이 입혀진다는 의미가 어떤것인가? 옛기질은 그대로 있는데, 그 위에 별도의 실체적으로 새로운 기질이 덧입혀진것인가? 아니면, 옛기질이 점점 변화되어 옛기질은 없어져가고 새로운 기질로 변화되어 가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3)에서 1)번과는 다른 의미가 된다고 하셨는데, 1번 정리요약이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기질인 것 같습니다만, 3)의 요약내용이 옛기질을 새롭게 한다는 것으로 요약하셨으니, '주어지는 것'과 '옛기질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 모순되거나 혹 다른 의미라는 뜻인가요? 저는 두 가지가 병행될 수 있다고 봅니다만....

=>(답변) 4)번과 다르다는 것이었는데, 1)번으로 급히쓰느라 잘못되었습니다. 

3)번은 거룩한 기질이 <옛창조에 대한 그 모든 감각들을 새롭게하는 그 무엇>으로서 원인자가에 해당된다고 보는데, 4)번에서는 옛기질이 재정립된것으로 정의함으로 마치 옛기질이 변화를 받아 새롭게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4)에서 2),3),4)의 의미가 사뭇 다르다고 하셨는데, 1)과 비교해서 그리고 4)가 다르다는 것인지, 곧 1)과 비교해서 나머지 것들의 요약내용과 서로 다르다는 것인지, 2),3),4) 각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인지....좀 분명치가 않습니다.

=>(답변) 위의 1)번이 4)번이 되어야 하는데 잘못되었습니다. 3)번과 연결해서 드린 질문이었습니다.

 

결국, 모두를 종합해보면,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기질>은 누구의 소유인가?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2) 옛기질과 새로운기질은 서로 별도의 실체를 가지고 덧입혀진 형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옛기질이 새로운기질의 영향을 받아 재정립되어 변화된 새로운 기질인가?

 

이상의 2가지 질문으로 압축됩니다.

 

이상으로 간단하게 질문을 다시 정리해드립니다.

-하나로-

 

(추가 하나로 질문)

아래의 내용이 위의 댓글에 함께 있어서 추가질문을 여기 우선 묶어 둡니다. 추후에 별도로 분리할것입니다.

 

(아래의 글은 호레이스님께서 2006년도5월에 <신앙의 습관>에 대한 글을 올리시면서 다셨던 댓글중 일부입니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자료들중 하나입니다. 위의 각주를 자세히 보시면 특별히 화란이나 영국의 청교들에게 있어서 이런 논의는 아주 기본적인 것이었음을 알수 있읍니다. 그리고 이러한 청교도들의 논의는 헬라의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염두에 두었음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런 논의는 Nature(자연,혹은 성)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철학적 검토와 관련됩니다. 유학에 있어서의 논의는 개념정의가 철두철미하지 못한채로 진행되어서 상호간 혼동을 초래한 점이 없쟎아 있는것 같습니다. 결국 조선 중기의 성리학 논쟁이나 말기의 실학논쟁은, 중국철학의 파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좀더 발전시켜가야할 의무가 있는 셈이지요. 기독교의 복음이 그 논쟁들의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하는 것이 저의 소신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로님의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좀 구체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하나로 의견)

<신앙의 습관>에서는 서양철학의 습관에 대한 개념을 주입된 습관과 획득된 습관으로 분리하여 차용하였고,  또한 이러한 논의가 기본적이었다는 것을 볼때에, 우리가 동양적인 사상들을 활용하여 기독교적인 복음을 얘기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해서, 저의 위의 댓글에서의 질문의 취지는 논의의 입구를 찾고 있는 와중에서 드린 질문이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입니다. 서구의 개혁신학자들이 서양철학의 도구를 활용해, <신앙의 습관>에서처럼 많은 논의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신유학(성리학)등을 활용해서 복음의 논의를 함으로서 좀더 지평을 넓힐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런 측면에서 고견이 있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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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마지막 댓글은 아래의 게시판 <동양철학을 그리스도께로>의 6번글 '신앙의습관'에 대한 댓글을 참조한 것입니다 09.09.16 08:25
 
오늘 오후에 강의가 있어서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질문하신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곧 답장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여전한 관심에 오히려 제가 고맙게 여기고 있다는 것....아시지요? ^^ 09.09.17 09:40
 
저도 하나로님 덕분에 많이 묵상하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부족했던 부분이 정리되기도 하고요.. 09.09.17 10:52
 
1)거룩한 기질의 소유자는 분명히 중생자입니다. 그 기질을 수여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곧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역사하여서 그 역사로 인하여 신자 안에 변화된 기질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2)옛사람과 새사람에게 있어서 공통된 것은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일종의 frame입니다. 이 프레임(저는 기능적 구조물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이 옛사람에게는 자기지향적으로 작용하고 새사람에게는 동일한 프레임인데 불구하고 하나님지향적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09.09.18 16:56
 
그것이 옛기질에 새기질이 입혔다는 의미입니다. 추가질문에 대해서) 저는 사단칠정논의를 관심있게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5천원권, 1천원권을 사용할 때마다 떠올려보곤 합니다. 저는 복음의 이해에 있어서 '신앙의 습관'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조선시대때 풀지 못한 철학적 질문에 답을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긍정적으로 추구해 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성리학의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이들의 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관계시키는 것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입은 것이 바로 토마스 09.09.18 17:03
 
아퀴나스의 습관개념입니다. 그렇다 보니까 칼빈같은 개혁주의신학자들은 '습관'이라는 말 자체에 반감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의해서 오용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 청교도들에 있어서(특별히 화란의 보에티우스같은 이, 이를 '청교도'라고 하기는 좀 거시기 하지만) '습관'이 09.09.18 17:04
 
란 단어와 개념이 정교화되면서 다시 신앙을 설명하는데 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변화를 살펴보면, 제 생각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성리학적 습관개념이 개혁주의, 특별히 청교도적 습관개념에 의해서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성리학의 논의를 뛰어넘는 것이 청교도들의 신앙의 습관논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리학적인 습관, 혹은 기질개념은 복음의 설명에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셈이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의 기질개념들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우주관(대우주와 소우주와의 관계, 특별히 주자철학에 있어서)을 이해하고 어떻게 그것이 와해되었는지 등등에 09.09.18 17:07
 
대해서도 살펴봄직합니다. 가능만 하다면, 정약용의 습관(및 기질)개념과 그 이전의 것들과는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를 좀 면밀히 살펴볼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요즘 여유가 없군요. 그래도, 정약용에 관한 책들이 있으면 무조건 구입해 두고 있습니다 ^^
 
 
 
 
Re: <새로운 피조물>의 새로움에 대한 이해(추천)|신학토론방
하나로 | 조회 117 | 09.09.18 06:49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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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른새벽에 주님께서 지금의 논제들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보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새로움에 대한 말씀들과 신앙의습관, 그리고 거듭남과 중생론등을 다루는데 있어서 아래의 새로움에 대한 개념의 이해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글을 올립니다. 부디, 많은 지체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거듭남의 본질, 스테판 차녹 지음, 손성은 옮김, 55p~58p)

 

거듭남은 영혼이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실체나 기능적 구조물들을 아예 제거하거나 없애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아담이 범죄하였을때에 그의 영혼의 실체가 부패하였고, 그래서 그가 새롭게 될때 그 영혼의 실체가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는 영혼의 본체가 아니라, 그 올곧음을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것은 그 사람의 영혼에 새로운 기능적구조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전에 있던 기능적구조물에 새로운 성질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한센씨병(문둥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그 신체의 피부조직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피부에 있는 질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부패의 극심함을 고려할때, 이러한 새로운 습관들에 의하여 영혼이 너무나도 엄청나게 변화되어서, 마치 새로운 영혼, 새로운 이해력,새로운 의지가 생기는 것처럼 보일수도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위에 있던 이전의 특징들을 제거해 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특징들을 새기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본성은 보존되면서 그 본성의 부패한 것이 축출되는 것입니다.

비록 금과 불길이 서로 뒤섞여서, 불의 속성이 금의 모든 부분 속에 흡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의 실체가 파괴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금은 유연하게 되어서 예술가가 만들고자 하는 형태를 더욱 쉽게 만들수 있게 되지만, 금은 여전히 금인것입니다.


거듭남이란, 촛대를 부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촛대위에 새로운 초를 세우는 것입니다.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새로운 성향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화음을 만들기 위하여 악기의 줄을 모두 새것으로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높아진 것을 낮추고 영혼의 교만을 겸비하게 하여 영혼 속에 오직 주님만을 높이는 것입니다.

 

또한 거듭남이란 인간의 근본적인 이성, 그리고 이해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올곧아지는 것입니다. 목재로 조각하는 사람이 나무의 혹이나 까칠까칠한 껍질을 모두 제거해 버리지않고, 오히려 그것을 다듬고 활용하여 그것으로  사람의 모양을 조각할 때, 나무의 실체는 그대로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해력과 의지속에 있는 거칠어진 조각들을 깍아 내십니다. 그래서 그 위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겨 넣으십니다. 여전히 그 사람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가 너무도 엄청나서 그 영혼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이전에 작용하던 원리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종류의 은혜로써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창조를 하나의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이전과 동일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성질이 그 몸에 부여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변화산에서 변형되실 때에, 그의 신성이나 인성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그 두 본성은 모두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변형(metamorphosis)'이 있었던 것과 도 같습니다.


그 신성에 의하여 영광스럽도록 밝은 빛이 주님의 인성 위에 비췄습니다. 이전에는 그 인성에 이러한 참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본체와 기능적 구조물이 여전히 남아 있을지라도, 새로운 종류의 빛이 쏟아 부어짐으로써 다른 성질들이 심긴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사망의 몸을 따라서 행동하면서 그것을 원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동일한 몸을 가진 자로서 새로운 기질을 가지게 된것과 같습니다.

부패한 상태에 있는 아담은 순전한 상태에 지니고 있었던 실체를 기능하게 하는 것과 같은 구조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능적 구조물안에 담겨있던, 그를 하나님께 용납될수 있게 했던  힘(power), 덕(virtue), 그리고 형상(form)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는 능력의 측면에서 볼때, 완전히 패지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바뀌었던 것처럼, 혹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던것처럼 우리의 그 실제적 형상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이 파괴되는것이 아니라, 기품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황폐해지는 대신에 풍부해지며, 일소되는 대신에 오히려 개조되는 것입니다.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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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좋은 글입니다. 그동안 옆에 두고도 묻혀있었군요.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과 그와 관련된 책을 다시 정독을 해야할것 같습니다. 손목사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09.09.18 06:52
Horace
제가 제일 공을 들였던 번역서입니다. 제가 난하주를 많이 붙였는데, 그 진가를 아직 충분히 이해해 주지 못하더군요. 어렵다고만 하고...ㅎㅎ... 09.09.18 17:10
그러시군요. 헌데, 예전에는 읽어볼려고 했는데, 잘 들어오지를 않다가, 이번에는 사뭇다르더군요. 아마도, 연속적중생론에 대한 배움이 있어서인가 생각중입니다. ^^ 09.09.19 07:43
 
많은 내용이 평소 제가 생각하던 것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다음 부분은 다소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형하신 일을 두고 '그 신성에 의하여 영광스럽도록 밝은 빛이 주님의 인성 위에 비췄습니다. 이전에는 그 인성에 이러한 참예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인성을 취하심에는 크게 두 가지 내용이 따라옵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입니다. 이 부분에서 그럼 낮아지신 인성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성이라 할 수가 있을까요? 09.09.18 08:47
 
과연 높아지심은 신성의 참여결과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두 가지 점에서 여기에 의문을 품습니다. 첫째는 예수의 낮아지신 인성은 인간이 그 인성의 바탕의 항상성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낮아진(타락한) 그것과는 다르다하는 사실입니다. 생각할 여지는 많습니다만... 일단 여기까지만 말하고자 합니다. 둘째는 예수의 높아지심 즉 인성의 변화없이 영광스럽게 되심은 신성의 참여로 그리 된다는 것이 맞을까요? 그것은 신조사에 있어 그리스도의 양성은 나누이지 않으나 혼동되거나 교호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과 차이가 있다고 볼 여지는 없는지요. 09.09.18 08:53
좋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본게시판 41번글(참된 케노시스)을 다시한번 정독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칼케톤에 대해서는 신.인성의 상호관계에 대한 것과 양성의 정의에 대한 부분은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성,인성은 분리됨없이 구분되지만, 신성이 인성에 여떻게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서는 별개의 논의라고 생각이 듭니다. 케노시스에서 첫번째 '모르페'(본체)로서의 역할이 있으나, 자신의 권리(신성의 권리)를 포기하고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심으로 자기를 비우신 것에 대해서 신성의 참여가 없었다고 볼수 있을까요? 09.09.19 07:47
 
물론 차녹에 대해서는 들은 바로 탁월한 개혁주의 학자라고 알지만 부분적인 글속에서는 다소 의문이 간다고 생각합니다. 09.09.18 08:52
 
강릉예명님께서 질문하신 것을 보니, 차녹의 글을 혹시 오해하는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됩니다. 차녹은 변화산의 변화가 '신성의 참여'로 그리되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신성에 의하여 밝은 빛에 인성에 비췄다는 식으로 말하고 또한 그것을 밝은 빛의 인성에의 참여라고 말하지 신성의 인성에의 참여라고 하지 않습니다. 곧, 오히려 신성이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 차녹의 견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차녹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엄청나게 두꺼운 책을 써냈던 분입니다. 09.09.18 17:19
 
윗글 자체가, 중생자가 변화되었다고 할 때, 그 중생자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프레임에 있어서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대로 있고 그 프레임의 기능이나 활용의 방향에 있어서 변화가 있었음을 여러가지 비유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그리스도의 변화산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화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님 자신의 자신됨의 기본적인 프레임, 곧 신성과 인성 자체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함께 토론할 수 있는 분이 있으니 즐거운 마음입니다. 조금씩 저의 번역서가 빛을 보기 시작하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만.ㅎ 09.09.18 17:22
 
솔직히 제게 힘이 남아있다면 찬찬히 깊이깊이 새겨가며 이와 같은 저작들을 살펴보고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꾸준하고 통합적인 전망을 갖고 의견을 전개하기에는 어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다만 하나로님이 올린 이 부분에서는 혹여 오해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문제만 제기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레이스님이 말씀하는대로 전체적인 논거에서 변화산의 사례는 예로 든 것임을 윗글에도 명시했기에 직접적으로 완벽한 조응을 이루지 못해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 점은 염두에 두고 읽었습니다. 09.09.18 19:18
혹시, 지병의 상태와 상황을 알려주시면, 저에게 좋은 제품이 있는데 권해드리고 싶군요. 관심 있으시면 쪽지로 연락을 주십시요. ^^ 09.09.19 07:46
 
만일 강력하게 추천한다면 지금 논의되는 문제를 위해 제한적이나마 책을 읽고 준비를 해서 논의에 참여할 마음은 있습니다만... 두려움이 앞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체력을 가지고 길게 가지 못할 것같아서... 어쨌든 신성과 인성의 관계는 의외로 아주 예민한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아주 크기에 조심스러운 태도가 유익할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09.09.18 17:34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적어도 신성의 지지를 받아서가 아니라 흠없으신 인성이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획득하신 의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첫 사람이 실패한 그것을 둘째 아담이(사람이) 성취(성공)하셨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조금이라도 인성의 완전과 영광을 신성의 지지를 통해 이루셨다고 하면... 아마 구속론에도 큰 혼란이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원글의 주된 논의와는 다소 별개의 문제입니다만... 적어도 차녹이 그런 주장의 논거를 위해 그리스도의 인성을 그와 같이 이해했다면 다소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09.09.18 17:46
당연합니다. 저역시 차녹이 그러지 않았을것이라 생각합니다. 역시, 신.인성에 대한 논의는 댓글로서는 한계가 있을것입니다. 본 주제는 아니니, 추후에 기독론에 대해서 별도의 기회가 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도널드 맥클라우드"의 <그리스도의 위격>의 말미에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해볼까 합니다. 09.09.19 07:50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과 중생의 변화는 다른 것이라 예를 든 것도 의문이 갑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첫번째 표적인 그 표적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며 그를 통해 그리스도가 어떻게 멸망당할 인간을 변화시킬 구세주인가를 나타내는 표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물이 포도주로 변화하는 사건을 표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면 물과 포도주를 하나의 연장으로 보고 다만 물이 포도주의 속성을 지니게 되는 것을 거듭남의 변화로 설명함이 옳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중생의 문제에서 그 존재의 동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가나의 표적을 그 표적과 다르다고 예시한 것도 부적절하지 09.09.18 18:23
 
않나 생각해봅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의 표적은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기 위한 계시라고 볼 때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한 그 사건속에서 인간 변화의 어떤 매카니즘적 특징을 유추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09.09.18 20:29
저는 <기능적구조물>이라는 단어선택을 보고서, 저자의 의도를 취한것일 뿐입니다. 너무 곁가지를 붙들면 촛점이 흐려지기 때문이지요. 09.09.19 07:54
그럼 이 부분은 차녹의 글이 아니라 하나로님이 첨가하신 부분입니까? 09.09.19 08:07
아닌데요..차녹의 글입니다. 번역을 그렇게 했다는 것을 두고 한말입니다. 아래에 <개조>에 대한 저의 의견을 적었습니다. 참고하십시요. 09.09.19 08:13
 
물과 포도주의 공통된 것은 그 액체성에 있습니다. 물에서 포도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 액체성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신성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런 중생을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범주착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탄에게서 칭찬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사탄조차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그 어떤 것을 사탄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인내, 사탄의 지혜, 사탄의 열정...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일종의 프레임 자체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것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09.09.19 07:27
 
셈이라고 보면 어떻습니까? 중생의 본질적인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탄을 예로 들어서 칭찬할 것이 있다고 해서, 저를 사탄숭배자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범주착각의 오류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사탄숭배자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09.09.19 07:28
 
제가 건축을 전공해서인지, 여기에 어울리는 건축적인 용어가 있어 소개합니다. 보통 말하는<리모델링>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건축적으로 3가지로 구분됩니다. 1)Reforming : 구조물의 뼈대와 칸막이등을 모두 그대로 두고 껍데기만 벗기고 갈아끼우는 것 2) Remodeling : 구조물의 구조부재는 그대로 두고, 공간의 기능을 바꾸는 것 3) Refreshment : 구조물의 부재까지도 바꾸어서 구조적 성능개선, 기능개선까지를 모두 바꾸는 것 등입니다. /여기서 기능개선은 보통 칸막이를 해서 주방으로 쓰던 공간적 기능을 공간을 쪼개서, 일부는 창고로 일부는 침실의 기능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09.09.19 08:08
 
위의 저자인 차녹의 '새로움'에 대한 이해는 제가 보건데, 2) 3)에 해당돤다고 보는 좀더 세밀하게 얘기해보자면, 2)번에 해당하는 리모델링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혼의 뼈대에 해당하는 구조들과 칸막이로 구성되는 기능들, 예를들면 생각,감정,의지, 동양적인 구분법인 사단(인의예지),칠정(희노애락애오욕)등의 본질적인 칸막이까지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성능을 새로운 기능으로 바꾸는작업이라 생각해 봅니다. 09.09.19 08:11
 
제가 마지막으로 올린 댓글 이후에 이어진 댓글들이 감이 잘 안잡힙니다. 좀 더 살펴봐야겠는데... 넓은 방향으로 나가야할 것같은데... 지금은 많이 머뭇거려집니다. 제가 거듭남에 대한 제 아이디어를 따로 올린 것은 제가 기왕에 가진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면 덜 피곤할 듯해서 그런 것인데...너무 베이직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Re:스테판차녹 & 안토나 후크마 중에서|신학토론방
하나로 | 조회 75 | 09.09.16 13:25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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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바로알아야 할 거듭남의 본질(스테판 차녹)

#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아는 자요, 그를 아는 자는 그와 한 몸이 되어 이미 연합된자(Union with Christ)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성령의 역사를 통해 믿음의 통로로 날마다 수혈을 받는자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 위해 호흡하고 살아가는 존재’인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윤종훈 교수)


#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 형성된 참되고 놀라운 변화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 1)거듭남은 회심과 다릅니다.

거듭남은 영적인 변화이며, 회심은 영적인 활동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힘을 부여하는것이며, 회심은 이 힘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환할 수 있는 원리가 주어지고, 회심은 바로 그 전환하는 것 자체를 말합니다. 그 원리로써 우리는 자연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들어오게 되며, 회심은 하나님에게 실제로 고정되는 '최종단계'로서의 우리의 행동입니다. 거듭남은 '행할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고, 회심은 그렇게 주어진 능력으로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1)회심이 결과라면, 거듭남은 원인입니다.

생명의 활동이 있기 전에 먼저 생명이 생겨야 합니다. 생명이 그 활동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에 있어서 새마음, 새영, 그리고 그 언약을 맺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영을 불어 넣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것과 구분됩니다.(겔36:27)(스테판 차녹, 43p)

 

# 거듭남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지만, 회심에서는 능동적입니다.(44p)

 

# 거듭난 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진 날이며, 거듭남으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올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날입니다. 회심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때 피조물은 능동적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지만,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산불능의 자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영혼안에 먼저 심긴 것입니다.(46p상)


 

# 거듭남은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은 실제의 변화입니다. 또한 그것은 영혼을 새로운 본성으로 채우는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 거듭남의 변화는 본성의 변화입니다. ... 칭의가 상태(state)의 변화라면, 거듭남은 기질(disposition)의 변화입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직접적인 열매입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하심을 얻었은즉”(롬5:9). 반면, 거듭남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3:5)이라고 부릅니다. 칭의의 질료(matter)는 우리들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지만, 거듭남의 질료는 우리들 내부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은 습관입니다. 칭의의 형상(form)은 ‘전가하는(imputing)'것이고, 거듭남의 형상은 ’주입하는(imfusing)'것, 혹은 우리들 안에 ‘들여 넣어지는(putting into)’것입니다.


# 갈4:4-6절의 “아들을 보내사.....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말씀은 우리가 입양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아들과 닮게 하실 것인데, 그러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의 영을 보내심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와 닮아가는 것을 은연중에 알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가 형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 됨에 근거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허게 함을 입은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히2:11). 그래서 모두가 같은 본성(nature)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본성은 그리스도께서 영원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신적 본질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의하여 가지게된 성품으로서의 본성(nature)입니다. 그분께서는 지금 하늘의 영광가운데 계시면서도 한 본성이 되셔서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는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적인 성품(nature)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계에서 말미암습니다.(51p)


# 영혼 안에서는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육체의 부패한 정서뿐만 아니라 육체 자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옛 본성은 그것에 딸린 모든 것과 함께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지 않으면 양자됨은 있을 수 없습니다.(52P)

# 중생은 동일한 한 성령께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 활동하시는 것이므로 모든 사람들 안에 동일한 기질을 양산해 냅니다.


# 거듭남이란 새로운 씨앗이 영혼의 토양속에 뿌려지는것이며, ‘썩지 아니할 씨’(벧전1:23)가 심겨져 자라나도록 자극하는 것입니다. . . . 그러므로 깨어나게 하는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게 하는것, 곧 부활인데,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62p)


# 거듭남은 실제적인 변화로서, 본성에서 은혜로 실제적으로 전이되는 변화이며, 전적으로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주어진 형상은 창조때에 다른 피조물 속에 주어졌던 형상 만큼이나 실제적입니다. ‘신적인 성품’, ‘하나님의 형상’ , ‘마음에 심긴 법’과 같은 용어들은 명목적이거나 개념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소유하게 되는 실재입니다. 실제 그대로, ‘새로운 사람’ , ‘새로운 마음’ , ‘새로운 영’ , ‘새로운 피조물’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은 부활이라고 합니다.(69p)

# 새로운 피조물은 자연스럽게 영혼을 움직이게 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복종하게 만드는, 생명에 관한 능력의 원리입니다. . . . 새로운 피조물은 숨은 사람, 곧 속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 피조물이 생명을 가지고 운동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효과가 그 원인에서 나오는 것처럼, 육체의 생명이 영혼에서 나오고, 영혼의 생명은 은혜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거듭난 사람 속에 있는 영적 생명의 공로적 원인이며, 그것의 효력적 원인이 성령에 의한 것이라면 은혜는 이 생명의 형상적인 원인입니다.(112p)


# 그리스도인은 아담에게 자연적인 생명이 주입되었던 것처럼, 자기 안에 불어 넣어진 영적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113p)


# 새로운 피조물은 그 낳으신 분, 곧 하나님과 닮은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타락 이후 모든 인류를 덮친 죄가 사탄의 형상을 각인했다고 한다면, 거듭남의 은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각인했습니다. (179p)


# 새로운 피조물은 신적이라고 불립니다. 신적 원리인 그 은혜가 거듭난 영혼 속에서 가장 탁월하기 때문입니다.(180p)


# 그것은 하나님의 본체에 참예하는것이 아닙니다. 즉, 본체가 아니라 본성이 닮은것입니다. 그것은 내적 기질의 유사함이지, 무한한 본체의 유사함이 아닙니다. 무한한 본체의 유사함은 발생에 의해서 성자에게, 그리고 발출에 의해서 성령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의 신적 본체는 다른 피조물에게 전달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이라는 것은 표상될 수도 없고, 더더욱 전달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되는 것은, 처음부터 그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첫 창조 때에 신적인 본체가 전달된 것이 아니라, 아담의 본성으 ㅣ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의와 닮은의가 전달된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었던 그 하나님의 형상이 사도 요한에 의하여 ‘의와 진리의 거룩함’(엡4:24)의 형상에 적용되었습니다.(181p)


# 그러나 그림이 아니라, 실재의 자연입니다. 그것은 신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활동에만이 아니라, 본성이 서로 닮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적인 모습과 사랑을 피조물에게 나타내실 수 있으시다면, 왜 그보다 더 탁월한 본성을 나타내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하나의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 성경은 영적출산과 양자 삼음에 의해서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은혜는, 또 다른 형태로 신적인 성품을 전달하는 것입니다.(184p)


#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게 됩니다. . . . 새로운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집니다.(골3;10). (186p)


#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취하심으로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성을 부여하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께 일치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씨’라고 부르는 것입니다.(187p)


# 자연인이 개괄적으로 육(flesh)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개괄적으로 영(spirit)이라고 불립니다. “육으로 난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것은 영이니”(요3:6). 육으로 난것은 그 본성이 육을 닮은 것처럼, 성령으로 난것은 그 본성이 성령을 닮았습니다. ... 본성에 있는 원리들과 인상들은 성령께서 가지신 것들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거룩과 은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랑과 열정의 영이십니다.(189p)


# 생명이 있는 것들은 당연히 자라납니다. 살아있는 나무 가지가 자라지 앉은 채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새 본성은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본성이 가능한 만큼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288p)


7. 안토니 A.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


# 우리는 제일 먼저 중생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진다. 거듭남이라고도 불려지는 중생이 의미하는 바는, 성령께서 먼저 그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산 연합에 이르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한때는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이제 영적으로 새롭게 살리셨다는 것을 말한다.(99p)


#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여 하심이라“(엡2:10). ”지음을 받았다“라는 말은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그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생겨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를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새로운 영적 피조물로 지음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함은 선한 일들로 다득찬 삶, 사랑으로 번쩍이는 삶,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된, 완전히 새로워진 삶을 의미한다. 이 새 생명은 중생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새롭게 지음받았다.(중생되었다)라는 사실을 목도케 된다.(101p)


# 그리스도인은 ... 그들은 새로운 사람들일뿐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한다. 루이스(C. S. Lewis)는 그의 책 Mere Christianity에서 두가지 종류의 삶(생명)을 헬라어에 입각하여 구별짓고 있다. 하나는 비오스(Bios), 또 다른 하나는 조에(Zoe)라는 단어이다. 비오스는 일반적으로 각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생명을 가리킨다. 반면에 조에(Zeo)는 영적인 생명을 가리키는데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말한다. 이 생명은 영원히 계속되는 삶이다.(155p)


#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에서 중생이다(요3:3,5)(156p)


#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기 때문에 우리의 새 생명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한 생명이다.(165p)


7. 안토니 A.후크마의 개혁주의 인간론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볼때 하나님의 형상이 새롭게 되는것은 맏음으로 성취되는 일이다. ... 하나님의 형상의 이러한 갱신이 중생(거듭남)의 목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의 지식, 의로움, 거룩성의 새로워짐을 의미한다. 이러한 형상의 갱신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형상이신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닮아 간다면 우리가 참된 경건과 의로움과 순결, 그리고 지성을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것이다.(84p,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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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거듭난 사람 속에 있는 영적 생명의 공로적 원인이며, 그것의 효력적 원인이 성령에 의한 것이라면 은혜는 이 생명의 형상적인 원인입니다.(112p) 09.09.16 13:30
Horace
여기에 나오는 '공로적 원인', '효력적 원인', '형상적인 원인'이란 표현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론'에 대한 예비적인 지식을 요구합니다. 이런 원인론에 대한 분석을 실은 칼빈도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무조건 이방의 철학자들의 개념과 표현들을 반대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저도 아무리 생각해도, 중생의 원인론, 혹은 구원의 원인론(칼빈이 다루고 있음)을 다루는 중에, 이 원인론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철학에 대해서 좀 살펴보고 있는데, 이런 철학자들의 생각에 항복할 것은 없지만, 잘 활용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09.09.19 11:25
 
차녹은 <<거듭남으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올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날입니다. 회심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때 피조물은 능동적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지만,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46p>>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안에 떨어진 중생1에 해당하는 '생명의 씨'는 우리안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군요. 09.09.18 05:51
 
차녹은 거듭남을 중생1에 해당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영혼의 본질적인 활동에서의 변화가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활동입니다.58p>> 09.09.18 05:55
Horace
차녹의 이 말들은 오해되기가 좀 쉽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중생1이나 2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 주권적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곧 생명의 씨앗이 처음 들어오게 되는 것(중생1, 혹은 초기중생)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해서이고 그것이 점점 자라서 응애하고 해산하게 되는 것(중생2, 새출생)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난 것이 아니라면, 중생2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중생2의 순간에 중생자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결정적인 터닝을 결심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하심 없이는 스스로 불가능한 것임이 강조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생명의 씨'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자연인으로서의 우 09.09.19 11:30
 
리 안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신성의 씨', 혹은 '종교의 씨'와는, 그 '생명의 씨'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원래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의 씨', 혹은 '종교의 씨'는 일반은총에 의한 것이라면, '생명의 씨'의 부여는 특별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신성의 씨'나 '종교의 씨'에 의해서 일반 모든 종교활동이나, 혹은 신비적 체험 등이 가능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동양종교에 있어서 사단칠정 같은 것도 이 일반은총에 의한 '신성의 씨'나 '종교의 씨'에 발현되어진 것이라고 보면 어떨까요?
 
 
 
Re: 존오웬과 벌코프 중에서|신학토론방
하나로 | 조회 105 | 09.09.16 13:23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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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존 오웬의 그리스도의 영광중에서

이 신적질서를 따라서 모든 세대의 택한 백성들이, 운행하시면서 새로운 창조의 그 구성재료에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양지워지고 영적인 생명과 빛과 은혜와 능력으로 살아나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존오웬,그리스도의 영광,232p)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 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교통하시는 일은 본래 성부의 값없는 은혜의 행동,성부의 허락,성부의 재가를 통해서 나온것입니다.(고전1:30, 롬5:15-17) (그리스도의 영광,234p)


택한 백성들을 그리스도께 허락하사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로인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그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전달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을 하게 하고 그에 수반되는 수고를 당하게 하신것입니다.(요17:6) (235p)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 안에도 역시 같은 성령께서 거하셔서 그 몸 전체가 살아나게 하시는 신비는 진정 신적 지혜의 말로 다 할수 없이 영화로운 열매인 것입니다.(237p)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성령을 모든 신자들에게 주셔서 그들 안에 거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요14:14-20; 고전6:17; 롬8:9) 이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그들 모든 신자들 사이에 깨어질수 없는 분명한 연합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인하여 인성을 당신 자신의 인격에게로 받아들인것 같이,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는 우리의 인격을 당신 자신과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게 받아 들이셨기 때문입니다.(237p)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일을 우리 안에 새로운 성품, 곧 당신 자신의 성품을 형성시켜 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것입니다.(238p)



교회의 경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 성품을 전달하시는 분량의 정도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러한 점에서 차이가 날 뿐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신의 성품이 그리스도 안에도 있고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복음의 보배로운 약속들을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적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만일 주께서 당신의 성품을 우리의 것이 되게 주시지 않으셨으면, 그가 인성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취하신 것 만으로는 우리에게 충분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 영혼 속에 그 진수와 실질까지를 포함하여 그 모든 은혜로운 자질들을 심으로셨습니다.

아니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하시면서 바로 그 모든 것을 부여 받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경이 그렇게 충만하게 증거하는 새사람, 새로운 피조물, 신의 성품, 성령으로 거듭난 영,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됨,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요3:6; 고후3:18; 고후5:17; 엡4:20-24; 벧후1:4)


신자들 안에 그러한 식으로 형성된 새로운 하늘에 속한 성품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그들 신자들에게 똑같이 거하셔서 생겨난 생명력있는 최초의 효력입니다. 그러한 성품은 바로 특이한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안에 그 성품의 본질적인 이데아가 있고 , 우리 안에 그 성품의 실증이 있습니다. 그 성품이 우리 속에서 산출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발산되어  전해지는 능력과 덕과 효능으로 말미암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자신을 전달하시는 정말 놀라운 하늘에 속한 방식입니다. 그러한 방식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우리에게 지혜와 거룩함”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대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중의 살이로다(창2:23)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 안에서 내 자신, 내 자신의 성품을 본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240p)



이 교회의 영광은 하나님께 대하여 새로운 창조의 첫 열매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창조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새롭게 하는 일을 가져왔습니다. 주께서 실제 당신 자신을 그 일에 연관 시킴으로써 . . .그 일은 주께서  . . . 복음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되는 일이고. . . 그리스도께서 부단하게 영적 생명과 지원, 그리고 활동과 은혜 안에서 강한 것을 계속 공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친히 포도나무 비유에서 정말 신적으로 이 사실을 가르치십니다.(요15:1-5)(240p)


그리스도와 신자는 상대 안에 상호존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모든 충만함으로 전체 교회,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향하여 항상 지속적으로 교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적 생명의 모든 목적과 의무들을 영위하게 하십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입니다.(241p)


저는 여기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의 상대 안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 신자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써 그들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방식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게 같은 성령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인하여 그들 속에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우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 속에 그렇게 깊은 신비와 영광이 서려 있습니다.



4. 존 오웬의 기독론

 

제15장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그의 본을 따르는것 

3. 그리스도의 위격과 관련해서 우리가 그에게 돌려야할 세 번째 의무는 그와 일치(conformity)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신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큰 계획이다. 모든 신자들은 북음의 거울을 통해 자기들에게 제시된 대로 믿음의 눈으로 본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이나 형상을 가지고 있다. 고후3:18절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본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새겨진 그의 형상의 영광을 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마음은 우리에게 나타난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상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 하고 있는 그와의 일치이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신자들은 자기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닮고자하는 습관적인 경향이나 열망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이 없는 곳에는 믿음이나 사랑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어렵지 않다.(존 오웬의 기독론, 261p)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안에서 우리가 아담안에서 잃어버렸던 우리의 본성에 속한 형상을 아담이 참여하지 않았던 많은 영광스러운 것들을 더하셔서 완벽하게 갱신시키셨다.(262p)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모든 은혜를 채우시고, 그 위에 자신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부여하신 목적은 그로 하여금 우리가 동일한 은혜로 갱신되고 열심히 노력해서 본 받아야할 한 예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과 본질적으로 연합되기 위해서는 은혜가 충만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신성의 충만이 그 안에서 육체로 거하실 때” 그의 육체는 거룩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눅1:35) (263p)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는 더 나아가서 그를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갱신과 이에 따라오는 영광의 모형과 예가 되도록 계획을 세우셨다. 그는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은혜와 영광을 전달받아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될지에 대한 모델이었다. 그는 또한 우리가 행해야 할 모든 의무의 모형이 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여 하셨다(롬8:29).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안에서 가지신 위대한 게획은 우리가 우리의 본성의 부패에 있어서 “첫사람 아들의 형상”으로 태어났던 것처럼 우리의 갱신에 있어서 “둘째 아담의 형상”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15:49절은 “우리가 흙에 속한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모든 은혜의 모형이었던 것처럼 영광의 모형이기도 하다. 우리의 모든 영광은 비록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우리가 “그와 같아지는데”있다.(요일3:2).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빌3:21) 그러므로 은혜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충만히 부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그에게 영광스럽게 심겨진 것은 그의 인성으로 하여금 교회가 그를 통해 참여할것에 대한 원형이요 예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265p)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일치되는데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그 생명의 주되고 효율적인 원인인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그와 같이 되도록 하는것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시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의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그들을 바로 세우는 복음의 본래의 의무는 하나님의 형상이 놓여 있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혼의 모든 은혜로운 원리들과 자질들에 있어서 그와 일치되도록 하는 것이다. (266p)


하나님의 무한한 완벽함들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으로 생각할 때 그것들이 어떻게 우리가 모방해야 할 대상이 될수 있는지 생각하기 어려울만큼 불가해한 영광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을 때 그것들은 우리 영혼의 갱신된 기능들에 적합하고, 새로운 피조물 혹은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의 은혜로운 원리에 적합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성은 그것들을 묵상할수 있고 이를 통해 동일한 형상으로 바뀌어 갈수 있데 되었다. 바로 여기에 사람의 영혼에 거하는 기독교의 많은 생명과 능력이 있다. 이것이 참으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자신들의 삶의 주된 목표이다. 그들은 매사에 예수그리스도와 같아지고자 한다.(268p)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1;26,27) ... 인간의 창조에는 토의와 실행이라는 말이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창조의 사역에서는 결정이라는 말과 실행이라는 말이 동일했다. . . . 사람을 창조 하실 때 다른 절차를 따라 하셨다. 다음과 같은 말들은 시간에 따라서가 아니라, 본질에 따라서 구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이것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먼저 작정이 계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는 ” 실행이 나왔다. 이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무언가 월등한 것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의하고 실행하셨다는 것은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모든 위격이 인간의 창조에 각자가 구분되는 역할을 가지고 참여허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283p)



5. 벌콥의 조직신학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영광스러운 지체, 새로운 인류로 간주되었다. 이 연합이 역사의 과정에 실현된 효능 때문에 그리스도는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히2:13)고 말씀하실수 있었다.(195p)


예수님은 그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수 없음이라”(요15:5)


믿는자는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롭다 함을 받은자”이기 때문에“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갈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a  new creature)뿐이니라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one new man)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the new man)을 입으라

겔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a new spirit)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겔18:31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a new heart)과 영(a new spirit)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겔36:26 또 새 영(a new spirit)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a new heart)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newness of spirit)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mind)을 새롭게(renewing)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renewed)

엡4:23 오직 심령(the spirit)으로 새롭게(renewed) 되어

골3:10 새 사람(the new man)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image)을 좇아 지식(knowledge)에까지 새롭게(nenewed) 하심을 받는 자니라

딛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the Holy Ghost)의 새롭게(renewing)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신비적인 연합(197p)

1) 유기적인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한 몸을 형성한다. 이 연합의 유기적 특성은 요15:5; 고전6:15-19; 엡1:22,23; 4:15,16; 5:29,30과 같은 구절들에서 교훈되고 있다. 이 유기적인 연합에서 그리스도는 신자에게, 신자는 그리스도에게 봉사한다. 몸의 각 부분이 다른 부분에게 봉사하고 봉사를 받으며, 또한 그것들은 함께 분리시킬수 없는 연합으로 전체에 봉사한다.


2) 생명의 연합이다. 이러한 연합에서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전체 몸의 생명적이고 통치적인 원리이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신자들 안에 내주하고 생기를 불어넣는다. 따라서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들 속에 이루어지게”되는 것이다.(갈4:19) 그것에 의해 그리스도는 그들의 생명 형성원리가 되며 또한 그것을 하나님꼐로 인도한다.(롬8:10; 고후13:5; 갈4:19,20)


3) 성령에 의해 중재된 연합이다. 성령은 특별한 기능에 있어서 중보자의 부상의 일부분 이셨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을 형성하기 위해 오순절날에 부어졌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지금 신자들안에 거하시며, 그들을 그 자신과 연합시키시며, 또한 그들을 거룩한 ㅇ녀합으로 함께 결합시키신디ㅏ.(고전6:17; 12:13; 고후3:17,18; 갈3:2,3)

고전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4) 상호적인 동작을 포함하는 연합이다. 발단적 행동은 신자들을 중생시켜 그들 속에 신앙을 산출하심으로써 신자들을 그 자신과 연합시키시는 그리스도의 행동이다. 한편 신자는 역시 의식적인 신앙행동으로 자신을 그리스동하 연합시키며 또한 성령의 감화 아래 끊임없는 신앙의 수행으로 이 연합을 계속한다.(요14:23; 15:4; 갈2:20; 엡3:17)


5) 개인적 연합이다. 각 신자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직접 연합되어 있다.  . . . 중생된 신자마다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와 연결됭 그로부터 그의 생명을 받는다. 따라서 성경은 언제나 그리스도와의 결소을 강조하고 있다.(요14:20; 15:1-7; 고후5:17; 갈2:20; 엡3:17,18)


6) 변형적 연합이다. 이 연합에 의해 신자들은 “인성을 따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성취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와 더불어 일어나는 바의 재현이라고 할수 있다. 객관적인 의밍서 뿐만아니라 주관적인 의미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며 못박히고 죽고 새 생명을 일으킴을 받는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분량으로 그들의 주님에 대한 경험을 맛본다.(미16:24; 롬6:5; 갈2:20; 골1;24; 2:12; 3:1; 벧전4:13)



중생에 대하여


“중생(팔링게네시아)“에 대한 헬라어는 단지 마태복음19:28과 디도서 3:5에서만 발견되는데, 디도서3:5은 개인 신자들의 새생활의 시작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딛3:5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이 시작의 개념은 보다 일반적인 동사 ‘겐나오’(요3:3) 또는 그것의 합성어 ‘아나겐나오’에 의해 표현된다. 이러한 단어들은 “낳다,거듭나다,출생하다”를 의미한다.(요1:13; 3:3,4,5,6,7,8; 벧전1:23; 요일2:29; 3:9; 4:7; 5:1,4,18). 하나의 구절, 즉 야고보서 1:18에서는 ‘아포쿠에오(낳다,생산하다)’라는 말이 사용되고있다. 더욱이 새 생명의 산출 사상은 ‘크티죠(창조하다)’(엡2:10)에 의해 표현되며, 이 창조의 산물은 ‘카이네 크티시스(새로운 피조물)’(고후5:17; 갈6:15) 또는 ‘카이노스 안드로포스(새사람)’(엡4:24)로 불린다. 끝으로 ‘수조오포이에오(함께 살리라,소생시키다)’는 역시 두 구절에서 사용되고 있다(엡2:5;골2:13)


이 용어들은 주목할만한 몇가지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다.


a) 중생은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이며 따라서 “사람은 순전히 수동적인 역사”이며 인간이 협력할 여지가 없는 역사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점인데, 이는 그것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b)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는“새 생명”을 산출하는데, 그것의 효력으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부활한 생활에 참여하며 또한 새로운 피조물로 불릴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c) 두 요소들은 중생에서 구별되어야만 하는데, 즉 “발생 또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출산 또는 출생:인데 그것에 의해 새 생명은 그것의 숨겨진 심연으로부터 출생된다. 중생은 새 생명의 원리를 영혼에 심으며 또한 새 생명은 이 원리로 하여금 그 자체를 행동으로 나타나게 한다. 이 구별은 중생을 정당하게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216p,2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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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우리안에는 거룩한 기질,생명의원리이신 성령께서 함께 거하시고, 그것으로 새롭게 창조된 <피조된 생명,고후5:17>이 있습니다. 09.09.18 04:56
 
이렇게 하나로님께서 열심히 연구하시는 모습을 보면 저도 힘이 납니다. 깊은 묵상에 우리 주님께서 조명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
 
 
Re:웨민 신앙고백해설12장 &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중에서|신학토론방
하나로 | 조회 47 | 09.09.16 13:13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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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12장


# 신자가 믿음을 품고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순간에 두가지 일이 동시에 또 불가분적으로 이루어진다. 즉

(1) 하나님과의 관계와 생명의 언약으로서의 율법과의 관계가 전적으로 변화며, 또

(2) 그의 내면적 영적 본성이 변한다.

관계의 변화는 의롭다하심이, 본성의 변화는 중생이 표시한다. 중생은 하나님의 행동이며, 신자의 심정 속에 새로운 영적 생활을 새로 일으킨다. 중생한 결과로 된 저 새로운 피조물의 즉각적인 처음 행동은 믿음 즉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를 받아들여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251p)


# 거룩게 하심은 중생에게 심어진 새 생명이 완전한 성숙을 향해서 점진적으로 성장한다는 뜻이다.자녀로 삼으심은 새로운 피조물을 그 새로운 관계들 안에 둔다.- 즉 뜻이 맞는 심정으로 새 관계들을 가지며, 뜻이 맞는 자기 집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며, 생명의 성장을 도우며 축복을 씌워주는 관계들에 둘러싸인다. 의롭다 하심은 관계들을 바꿀 뿐이며, 중생과 거룩하게 하심은 영혼의 내면적인 영적 상태를 바꿀 뿐이다. 자녀로 삼으심은 이 두가지를 다 포함한다. 새로 중생한 피조물이 의롭다 하심에 의해서 여러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총괄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자녀로 삼으신다는 것이 복합개념이다.(251p)


# 하나님에게서 영적 본성을 얻는다(너희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려 함이다(벧후1:4; 요1:3; 약1:18; 요일5:18)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며,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새로운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받는 자니라(골3:10; 롬8:27; 고후3:18)


#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셔서, 우리 안에 자녀다운 영 즉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영을 형성하신다.(252p)


#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는 사람속에 중생으로 새로운 영적 본성을 심으신 후항상 계속적으로 그 원리를 배양하며 발전시키시기 위해서 말씀과 성령을 그 속에 거하시게 하시며, 그 원리가 완성되게 하신다.(256p)



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사람의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이란, 중생을 얻고 영광을 얻음 사람의 영원한 존재인데, 이는 사람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이 그에게서 완전히 회복되어 완전한 지혜와 의와 복락을 소유하고 있거나 영원한 기쁨과 하나님의 참된 지식과 사랑을 부여받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58문,521p)


영생은 사람이 하나님과 완전히 화합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 완전한 지식과 사랑에 있고 또한 사람의 영혼과 육체 모두의 영광에 있다 할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당한 사고를 갖기 위해서는 다음 두가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1)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함 2)하나님을 완전히 따름.(58문,522p)

 

영생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신자들 속에 영원히 거주하시는 것이며, 하나님과 그의 역사하심과 뜻을 아는 참되고 완전한 지식에 있는데 이 역시 동일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직접적으로 마음에서 일깨워지며, 참되고 완전한 지혜와 의, 그리고 마음과 뜻의 모든 힘과 능력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완전히 일치하는데에 있는데 이러한 기쁨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주어지며 금생에서 이미 시작되며 내생에서 완전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들에게 영원토록 찬양받으시고 영광받으시게 되는것이다.


이 정의의 각기 다른 모든 부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한다.

 

1) 영생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백성 가운데서 영원토록 거하시는것을 뜻하는 것은 다음의 본문들이 입증해준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2)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완전한 지혜가 거기에 포함된다는 것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것이니이다.(요17:3)  에서 드러난다.


3) 영생은 완전한 의를 포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의를 소유할 자들은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눅20:36) 들이기 때문이다(눅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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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으로는, 신자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며, 새생명,거룩한 기질의 성령의 원리가 되십니다. 이 성령의 원리로 말미암아 사람은 <피조된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성령과 피조된생명인 사람이 함께 동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원리인 거룩한 기질은 <피조된 생명>이 아니며, 성령 자신입니다. 사람은 다만, 피조된생명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한 기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곧 옛기질이 변화를 받아 거룩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출처 :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글쓴이 : 혼인잔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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