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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거듭난 자의 죄 지음에 대한, 구원이 취쇠되는 죄가 있는가?

하나님아들 2012. 11. 21. 17:17
거듭난 자의 죄 지음에 대한 호레이스님의 댓글 모음.|신학토론방
바로미 | 조회 91 | 09.09.09 22:22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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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두 게시글에 있는 호레이스님의 중요한 덧글을 따로 정리하여 올립니다.

상당히 중요한 글이고, 그 덧글 자체가 많은 양을 상당히 압축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덧글을 따로 프린트 해서 성경구절 찾아가면서 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Horace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중생한 자아"로 보고 그것을 "중생한 자의 영"으로 보는 것은 논리비약입니다. 어느 교단의 강도사 글인지 몰라도 '중생한 자의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결론내리는 것은 제가 우려하고 있는 결론들 중의 하나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곧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중생한 자를 말하지, 그 중생한 자의 어떤 부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malkut

하나님께로서 난 ""가 중생한 영이라면 ""라는 관사를 헬라어에서 ""이 중성이므로 중성관사()를 써야하는데 남성 관사()를 쓰고 있네요. 그러니까 중생한 영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 "마다" 여기서 "마다"도 영을 받는 다면 중성 ""을 써야하는데 남성인 "파스"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중생한 자는 남성 관사를 쓰기에 사람을 가리킵니다. 중생한 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원어를 모르면 해석하지 말라는 말은 안했고 도움이 될까 해서 기록했는데 푸대접 받는 기분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다른 분들이 해석해서 제가 구지 해석할 필요도 없구요. 그리고 구지 답글을 많이 달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원문의 해석의 필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하자. ---> 본문은 거듭난 자라고 할지라고 육과 영이 더러워질 수 있기에 자신을 깨끗케하자는 말 이라고 봅니다.

 

Horace

저도 malkut님의 지적에 공감하고 또한 동감합니다.

고후7:1을 잘 지적하셨습니다. 백영희목사의 견해가 위의 요약된 글에 나타나는 것과 일치된다면, 고후7:1같은 구절은 백목사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결정적으로 가르킨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Horace

거듭난 자 속에는 ''이 있습니다만, '' '거듭난 자'를 제한하는 것은, 성경의 기록(원어의 문법)에 근거할 때 잘못되었다는 것이 malkut님의 지적입니다. 저는 그 지적에 동의합니다. 진합태산님께서는 마음을 열고 이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후7:1에 보면 '육의 온갖 더러운 것'만 지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 맥락은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는 것을 보니, 구원받은 자들, 중생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권면이 '육과 영의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합니다. 중생한 자들의 ''도 더러운 것에 더럽혀져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고 malkut님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이 구절을 대한다면, 중생한 자의 ''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식의 해석이 불가능해집니다. 그것이 백영희목사의 견해인지 아닌지는 백영희목사의 글을 좀 더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열린 마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가기를 다시 부탁 드려봅니다

 

8:9~11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중생한 자의 영과는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중생한 자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시지만, 그 중생자 안에 있는 성령님과 중생자 자신의 영을 혼동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10절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고 할 때의 그 영은 중생자의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 영은 인간의 요소들 중의 하나로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앞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고 할 때의 ''은 우리의 생물학적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된 육신, 곧 죄의 실체와 법을 지고 있는 flesh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영희목사님의 입장이 중생자의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확실합니까? 제가 보기로는 그것이 백영희목사의 견해는 아닌 듯 한데요. 그리고 '중생한 자는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구원을 잃을 죄는 짓지 못한다'는 것이 근거도 없는 단정이라고만 하시는데, 저는 비록 그런 주장이 세련되지는 못했다고 여기지만 그래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근거가 분명하지요. 왜냐구요? 중생한 사람은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 근거는 바로 성도의 견인교리에서 표현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가장 확실한 근거이지요. 중생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작업이요 선물입니다. 그렇게 중생시킨 인생으로 하여금 구원을 잃을만한 죄를 짓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겠습니까?

 

저는 결코 중생한 자의 영, 중생한 사람(혹은 자)의 의미상의 차이에 대해서 간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간과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민감한 셈이지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여깁니다. flesh body의 차이입니다. 보통 삼분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차이를 간과합니다. body는 우리의 생물학적 몸입니다. 죄의 도구가 되기는 하지만, 죄의 실체와는 얼마간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몸으로 번역되거나 살로 번역되는 이 flesh는 아주 복합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뉘앙스, 곧 죄의 실체를 담거나 죄의 법을 담고 있는 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진합태산

Horace님 제가 가장 궁금해 한 것이 그것인데요? 다른 것들은 다 뒤로 돌려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 한가지만 확실하게 답변을 주십시오. 다른 분도 다 이 답은 안하고 계시고 엉뚱하게 하나님을 대입시키시는데요. 구원을 잃을만한 죄의 경계가 어디냐 하는 점입니다. 그 경계가 어디이기에 구원을 잃을 죄가 있고, 구원을 잃지 않을 죄가 있다는 말인지요?

죄의 실체를 담을 수 있다는 의미는 어떤 것인지? 단순히 몸(body)에서 flesh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로 어떤 점이 더 부각되어서 죄의 실체를 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는 것인지요? 그게 마음의 요소를 말하는 것입니까?

 

Horace

좋은 질문입니다. 구원을 잃을 만한 죄의 경계가 어디냐고 한다면, 그것은 우선 이렇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경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도 중생자는 죄를 지을 수 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구원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아무리 선한 짓을 많이 하여도 구원을 얻지 못한 자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어떻게 변별하느냐 하는 문제이겠지요.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던 자들이 바로 청교도들입니다. 제가 그들의 책에 관심을 갖고 또한 번역했던 것도 이 문제이지요. 질문을 하나만 하신다고 하더니, 연속으로 올리셨군요. 뒤에 올리신 질문은 뒤에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질문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중 뒤에 보실 때에 flesh body의 차이에 대한 것도 지금 제가 간단히 답변해 놓을 터이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런 차이에 대해서 묵상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바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로 철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이해를 시도합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풀어가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도래하였지만 그 완성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시대에 이미(already) 도래하였지만, 아직(yet)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곧 우리가 이미(already) 중생받았다고 하지만 아직(yet)은 그 모든 것의 완성된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긴장(신학적으로는 '종말론적 긴장'이라고 합니다)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구원받은 자 안에서도 여전히 갈등이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중생한 사람 안에 있는 영과 혼, 혹은 육체의 갈등이라고 보는 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구속사적 시각을 놓치는 것입니다.

 

중생된 사람 안에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중생한 사람은 이미(already)의 구원받은 자, '올 세대(the age to come)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직(yet) 그 몸 안에 남은 죄(the indwelling sin)을 지니고 있습니다. 갈등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올 세대'에 속한 것은(그것을 앞에 말씀드린 것과 관계시킨다면, 성령의 원리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안에 영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성령과 영은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중심합니다. 하나님지향적입니다. 하지만, 내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이때 내 몸 안에 남아있다고도 할 수 있(이때 몸과 내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의 법은 자기중심적이요. 이 두개의 힘, 세력, 방향력이 상호갈등하고 있는 각축장이 바로 '중생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언제나 겸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각축장이 중생자'라고 한 말은, 때로는 '각축장이 중생자의 영혼'이라고도 할 수 있고, 혹은 '각축장이 중생자의 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구속사적 이해를 전제로 한다면, 그 문맥을 통해서 이 '영혼'이나, ''이 모두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중생자를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Horace

하나로님께서 질문하신 것을 간단하게라도 질문해 드리겠습니다.

 

1)'타락한 기질' '거룩한 기질'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일에도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역사심으로만 가능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바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고백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2)이때의 기질은 정의는?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성령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한 사람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의 원리라고나 할까요? 내 안에 성령님께서 계심으로 인해서 내 안에 성령님의 원리(principle)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3) '원리'로서의 '기질'은 결코 습득된 것이 아니고 주입된 것입니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4)'중생의 순간은 주입된 '생명의 씨' 정도로 정의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한 면으로는 옳고 한 면으로는 그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중생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영혼의 의사'라는 책에서 소개받은 '초기중생'의 측면이라면 그것은 '생명의 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와 믿음 이후에 오는 '새출생'으로서의 '중생'에서라면, 그것은 씨 이상입니다. 열매까지는 아니어도 그 씨를 자라게 하고 자란 것으로서의 생명현상이 좀 더 충만해진 상태, 아마도 잎이나 꽃 혹은 줄기쯤 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본성'의 문제는,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인데, 이전 스코틀란드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책이었던 토마스 보스톤의 '인간의 네 가지 본성상태'라는 책을 보면, 본성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저의 글(윗글 속에 있는) 그 본성이 네 가지 임을 이미 시사해 놓았습니다. 창조되었을 때의 본성, 타락한 뒤의 본성, 구속받은 뒤의 본성, 그리고 영화롭게 된 상태의 본성....이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에, 본성문제를 다루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동양사상을 다룰 때 이 네 가지 중의 어떤 것과 유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동양사상을 평가하고 비평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생한 영혼은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때에 참된 믿음과 동반해서 중생한 사람들 속에 들어오게 되는 일종의 습관적 원리('중생'이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습관적 원리'의 유입'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로서의 '성령의 원리'와 여전히 그 중생한 사람 속에서 작용하는 '남은 죄의 원리'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성령의 원리에도 습관이 작용하고 이전의 습관이 남은 죄 속에도 작용합니다. 습관을 말할 때에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하지요. 하나는 하나님 지향적인 습관이요 다른 하나는 자가지향적인 습관입니다. 혹은 전자는 구심적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원심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두 개의 힘이 밀고 당기는 가운데 벌어지는 전쟁이 영적 전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전투이지요. 중생한 자(생명의 원리로서의 습관을 가지게 된 자)는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때에, 곧 자아지향적인 습관의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아지향적인 생각이나 선택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그것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후회하고 회개하고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원리로서의 습관을 따라서 행하게 되지요

 

 

 

 

   
생명의 성령의 법 VS 죄와 사망의 법/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이 사망을 이겼고, 또한 그 생명은 결코 상실될 수 없는 영원한 것이기에 - 구심력이 원심력을 이기고 승하게 되는 것이네요. 그리고 한 번 주입된 습관, 성령의 원리로서의 습관은 상실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볼(자아지향적 생각이나 선택)이 되는 듯 하지만 결국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오고야 마는 변화구가 연상이 되네요. ^^; 09.09.10 00:12
 
윗 글을 읽고 나니 지난 번 보았던 "신앙의 습관"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느껴집니다. 09.09.10 14:46
 
바로미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한군데로 모아주시니, 이 부분에 대한 앞으로의 논의가 더욱 분명해질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솔라그라티아님의 비유도 무척 흥미롭기도 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볼이지만 결국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오는 변화구 ^^ 멋진 비유입니다. 때론 저는 '넘어져도 천국을 향해서 넘어져라'는 말로 성도들을 권면하기도 합니다. 지옥을 향해서 걸어가고 달려가고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옥행이지요. 넘어져도(죄를 지어도) 천국을 향해서 걸어가는 중에 넘어가는 것은, 은혜의 주님의 역사에 의해서 다시 일어서게 되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습관적인 죄가 한개라도 있다면|신학토론방
행복한당신 | 조회 388 | 09.09.07 22:51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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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밤에 잘려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말 안듣는 저의 강아지 아톰이 같이 누워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주인의 입장에서 아톰을 한번 끌어 안아줬습니다 그리고 말했죠 " 이 귀여븐것 "

그래도 아톰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릅니다 자기 할일만 합니다 주인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는것이지 강아지의 순종함과 상관이 없다는것을 말입니다. 강아지가 말을 잘듣거나 강아지가 착하거나 해서 이뻐하는것이 아니라 강아지는 똥싸고 오줌싸고 털 깍기 싫어서 으르렁 거리고 물려고 하고 먹을것 줄때만 좋다고 옆에오고 , 시끄럽게 짖고 그래도 주인이 일방적으로 강아지를 사랑하는것이지 강아지의 잘나고 못나고가 아니란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불순종하면 죽이고 이런것이 아니란것을 말입니다 만약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미워하신다면 모든 사람들이 심판받아 죽었을 겁니다 우리가 잘나고 못나고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기때문에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는거겠죠. 일방적인사랑 누리며 삽시다! 만약 우리가 죄를 습관적으로 짓는다면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프실거에요. 아톰은 털깍을때 불순종하고 이리와 해도 불순종하고 오줌싸지마 똥싸지마 해도 불순종하고 아무때나 오줌싸고 털깍으려면 물려고 그러고 이리와 하면 저리가고 먹을거 있을땐 이리와 안해도 먼저오고 앉아하면 앉고 이러지만 택한자녀들은 이제 하나님의 맘을 품은 자들이잖아요. 그러니 순종하며 살아요 습관적인 죄를 끊으며 살아요

 

습관적인 죄를 짓지 맙시다! 습관적인 죄를 한개라도 짓지 맙시다! 습관적인 죄를 한개라도 지으면 그래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사랑하시지만 사랑하는 만큼 습관적인 죄 한개 지을때 너무 맘이 아프실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습관적인죄 한개라도 짓는 않는 사람들이 되어보아요 ....

 
 
중생된 자라고 해서 습관적인 죄를 안짓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주관적(?)이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주관적이라고 함은 어떤 분을 지적함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범위의 느낌>이라는 의미로 적었습니다. 혹시 오해하시지는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습관적이니 죄를 짓는것이 본인이 알고 있는 습관적인 것도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습관적인 것은 더 많습니다. 단지 자기가 모를 뿐이지요. 그러나 점점 사람이 자라가면서 죄가 밝게 나타나고 깨닫게 되는 가운데 알게 될수도 있고, 또는 죽을때까지 모를 수도 있지요. 09.09.08 10:04
 
중생한 자가 하나님과 끊어질 정도의 죄는 안짓는다고 보는 것도 상당히 위험합니다. 과거에 신사참배를 놓고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논리라면 신사참배한 분들은 다 지옥갔다고 해야하거나, 중생도 안된 분들이 총회장을 하고 목사를 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09.09.08 10:05
grace
제가 말하는 것은 구원이 취소될죄는 안짓는다는 것입니다(구원취소는 없으니까요)연약하여서 신사참배했더라도 구원받은 사람도 있을것이고(뼈아픈 회개를 했겠지요) 실제로 구원받지 못해서 신사참배에 동참한 사람들도 있겠지요, 09.09.08 10:08
grace
중생하지 않는 사람들은 습관적인 죄인식 자체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09.09.08 10:09
중생치 않은자는 자기의가 충만해서 자신은 잘하고있는줄 알죠 .. 09.09.08 10:10
그게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얼만큼 해야 구원이 취소됩니까? 구원의 취소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이 완전구원이 아니라는 것이 아닌가요? 완전구원, 영원구원, 단번구원 이것이 우리 개혁교의 구원관이 아닌가요? 09.09.08 10:12
죄송하지만 신사참배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분들이 고신을 제명시킨게 장로교의 역사가 아니던가요? 그렇다면 이 분들의 거취는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09.09.08 10:13
grace
제 글을 잘못 읽으시네요. 저는 중생한 자에게는 구원취소가 절대로 없다고 했는데요? 그러니 중생한자는 그러한 죄는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신사참배후 회개할 필요가없다고 한 사람들의 거취는 각각 다르겠지요 . 한경직목사님처럼 이후에라도 진실된 회개를 한사람도 있을것이고 아예 양심의 가책도 없는 사람도 있을거고(본래 중생한자인지 의심스러운)...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사항이겠지요, 09.09.08 10:24
진합태산님이 뭔가 오해를 하신거에요 그레이스님이나 이 카페는 구원취소를 절대로 가르치지 않아요 다시 읽어보시면 오해가 풀릴겁니다^^ 09.09.08 10:20
grace님 제가 이해를 못했는지 다시 여쭤볼께요... <구원이 취소될 죄는 안짓는다>는 말은 구원이 취소될 죄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제가 어떤 점에 오해가 있다는 것인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9.09.08 13:07
grace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취소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배교의 죄를 지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배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 즉 유사그리스도인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말장난같지만 구원받은자에게는 구원취소될죄 자체가 없지요ㅡ 09.09.08 13:20
kiki
그레이스님 께서 말씀하신 구원이 취소될 죄는 그만큼 심각한 죄를 안 짓는다라는 가정하에 비유의 뜻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더 그레이스님의 댓글을 이해 하셨으면 합니다 09.09.08 13:22
kiki
아..제가 글 쓰는 중간에 그레이스님께서 올리셨군요.. 09.09.08 13:24
 
안짓는다 못짓는다도 차이가 있지만 ...ㄴ 안짓는다라는 말과 ...ㄹ 안짓는다 이것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또 안짓는다는 것은 지을 수 있다는 말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이지 어떤 여지가 없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제가 오해를 했는지요? 09.09.08 13:09
 
중생한 영혼은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때에 참된 믿음과 동반해서 중생한 사람들 속에 들어오게 되는 일종의 습관적 원리('중생'이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습관적 원리'의 유입'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로서의 '성령의 원리'와 여전히 그 중생한 사람 속에서 작용하는 '남은 죄의 원리'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성령의 원리에도 습관이 작용하고 이전의 습관이 남은 죄 속에도 작용합니다. 습관을 말할 때에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하지요. 하나는 하나님 지향적인 습관이요 다른 하나는 자가지향적인 습관입니다. 혹은 전자는 구심적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원심적이라고 할 수 있 09.09.08 14:28
 
지요. 이 두 개의 힘이 밀고 당기는 가운데 벌어지는 전쟁이 영적 전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전투이지요. 중생한 자(생명의 원리로서의 습관을 가지게 된 자)는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때에, 곧 자아지향적인 습관의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아지향적인 생각이나 선택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그것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후회하고 회개하고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원리로서의 습관을 따라서 행하게 되지요. 09.09.08 14:31
 
너무 어려운데요...^^;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위에 제가 달아놓은 질문에만 집중해서 답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grace님 배교의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은 배교의 죄가 있다는 말을 전제로 하지 않나요?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서 좀더 직관적으로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이라는게 아 다르고 어 다른것인지라, 위의 말을 그대로 가져가면 모르는 사람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제가 이렇게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어서 확실하게 짚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님을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제 머리를 정리하려는 의도입니다.) 09.09.08 15:24
 
질문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정리를 해서 질문해 주실 수 있습니까? 위의 댓글들을 보니 용어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로 대화들이 오고가는 통에 오히려 혼미스러워지는군요. 제가 정리해놓은 글을 음미하시면 너무나 쉽다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진합태산님의 질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정리해 주시면 제가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좀더 직관적인 설명을 요구하시니, 원심력과 구심력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만큼 직관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09.09.08 16:06
 
중생과 성화의 구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중생한 영혼이 습관적인 죄로부터 벗어나는 경험을 실제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놀라게 됩니다.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습관으로부터도 자유할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다시 옛습관으로 돌아가 있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 좌절하게 되지요. 이 때 자신의 믿음과 구원의 확신이 금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시 한 번 도약하게 됩니다. 이러한 반복은 다시 중생 전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성화의 과정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09.09.08 16:14
 
즉, 자신의 연약함, 죄된 본성을 깨닫고 한편,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 없이는 절대 아무것도 되지 않는구나... 그러한 깨달음이 더욱 깊어져 가는 과정 자체가 성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주제와 관련해서 예전에 고민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중생한 자도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는가? 지금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겠지요. 자살하려고 한 사람은 중생하지 못한 것인가? ...시37편 24절이 항상 은혜가 됩니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 수많은 시행착오와 범죄함 속에서도 결국에는 우리를 지켜내실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를 살려주시는 것 아닐까.... 09.09.08 17:08
 
자살은 돌이킬 수 없는 죄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궁금함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중생한 자에게 구원이 취소되게끔 하는 죄 자체가 발생할 수 없다는 맥락 하에서 자살이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 역시 중생한 자에게는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09.09.08 16:31
 
우선 여러 분이 글을 올리니까 더 혼선이 오는 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다시 덧글들을 읽어보고 정리를 해서 별도로 글을 올려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09.09.08 17:02
 
grace님 위 SolarGratia님의 견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덧글들 속에서 계속 위와 같은 논리가 보여서 혼선이 오는 것을 해결하고자 함입니다. 제가 올린 질문들을 전체를 다시 한번 보시고 위 솔라님의 덧글과 비교해서 의견을 주시면 안될까요? 님이 위에 제게 적어준 글에 대한 이해를 못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논리하는 것이 가능하느냐 하는 점이 제 원 의도입니다.
 
 
 
 
하나로님의 저의 글의 요약과 질문-이 논의와 관계되어 옮겨옵니다|신학토론방
Horace | 조회 74 | 09.09.08 17:38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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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스님의 <나는 개혁되었는가>의 글이 새로운 본성 논의의 대략적인 방향이라고 하여, 자세히 읽어보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래는 읽었던 내용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관련된 것들을 정리했습니다.

 

종교 개혁에서의 참된 회개란 심령과 마음의 개혁이다.

심령(heart)과 마음(mind)의 개혁에 있어서 본성(nature)만을 언급하고, 본성의 4가지 중에서 타락한 인간본성만을 살펴본다.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은 습관으로서의 본성의 개혁이었고, 이것은 참된 회개와 참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거룩한 기질이며, 반복된 훈련과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번에 주어지는 새로운 기질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새 생명의 기질이 며, 옛 생명이 가진 기질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중생)하게 됨으로 새로운 기질이 입히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룩한 기질은 무엇인가? 옛 창조에 속한 감각(sence)인 시각,청각,촉각,미각,후각의 오감과 감성, 이성(reason)등의 옛 감각(기질)에 더하여진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감각들을 새롭게 하는 그 무엇이다.

 

지금까지 옛 세상에 속해서 옛 사람으로서 모든 감각을 가지고 추구해 왔던 그 방향과 태도를 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전환(concersion)시키게 하는 것이며, 옛사람이 가지고 있던 모든 감각들이 이제는 새로운 방향과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감각으로 모두 재정립된 것이 바로 거룩한 기질이다. 이전 것 그대로이지만, 전혀 새로운 그 무엇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며,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냐 밖에 있느냐에 의해서 세상의 세력권(구심력)에 있던 존재가 성령의 세력권(원심력) 안으로 들어옴으로 새로운 성향을 갖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며,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없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잘못된 비성경적 개념을 주장하게 되면, 그리스도인도 아니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다.또한, 우월한 영빨영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직 그가 그리스도인됨을 모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무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를 모두 경계 해야한다.

 

또한,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회개가 많다. 죄에는 죄의 죄책성과 패괴성의 두가지 속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한다. 구원에 이르는 첫번째 참된 회개, 곧 죄의 뿌리를 통째로 들어내는 그 회개가 필요하다. 죄의 패괴성을 알고 그 죄에서 그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 달라고 주를 바라보는 자는 복이 있다. 이런 회개가 자기 개혁의 시작이요 근본이다. 이것이 없이는 자기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

 

제안한 심령개혁은 나의 본성과 습관과 기질이 변화되는 회심과 중생에 근거한 자아개혁, 나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만 할 수 있는 이 개혁이, 교회의 참된 개혁일 것이다.

 

또한, 위의 글들과 연결해보니, 처음에 올리셨던 <새로운 습관으로서의 새본성>에 대한 글도 좀더 이해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정리하면서, 주입된 습관은 존 머레이의 확정적 성화로 보고 , 획득된 습관은 점진적 성화로 정리하였습니다.

 

또한, 호레이스님은 확정적 성화가 왜곡되었을 때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산출되고 구원의 본질을 잘못되게 한다는 것을 무율법주의로서 설명되었고, 점진적 성화의 방면으로 극단으로 갔을 때에도 신율법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였고, 이것은 죄의 패괘성은 치유하지 않은 채 죄의 죄책성 만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부분도 지적하셨습니다.

 

호레이스님의 글을 종합해보면, 말씀하신대로 <심령개혁-나의 본성과 습관과 기질이 변화되는 회심과 중생에 근거한 자아개혁>에 전체적인 흐름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령heart로 보고, 마음mind로 보고 있고, 습관은 주입된 습관 , 그리고 확정적 성화의 중요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 기질에 있어서는 타락한 기질전환(conversion)재정립을 통해서 거룩한 기질(spiritual sense, or spiritual propensity)로 변화되는 것을 말하고 있고, 나타나는 결과는 <건전한 마음의 법칙>의 내용들을 통해서 참고 삼아 개략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기질거룩한 기질이게 하는 그 무엇이 어떤것이냐에 대해서는,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한 차이점의 설명에서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 세상의 세력권에서 성령의 세력권으로 옮겨졌다는 비슷한 설명으로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고, 저 역시  결과론적으로는 인정되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언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아마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금단의 영역인 것같기도 하고, 연구의 필요성이 있는것인가에 대한 회의감까지도 들곤 합니다.

 

굳이 내용을 밝혀보자면, 옛 세상에서 살던 옛 사람이 어느 시점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났을(중생) 때에 타락한 기질이 순간적으로 변화하여 거룩한 기질이 될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때의 기질은 어떻게 정의해야하는가? 또한 이 기질은 주입된 것의 습관(기질)인가? 획득된 습관(기질)인가?

 

현재 저의 견해로는 중생의 순간은 주입된 생명의 씨 정도로 정의하고 싶고, 아직은 이 기질로 까지 정의하는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생명기질을 동일한 개념안으로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본성(nature)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검토한 바에 의하면, nature의 표현은 KJV, NewKJV , NIV 3가지 버전을 통합해서 추출해보면 42회정도가 나오는데, 이 구절들의 내용들이 과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본성이라는 것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 현재 호레이스님의 본성이라는 단어에 대한 한 단상에서 살펴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점들이 동양철학의 사상들이 스며들어 성경의 본질을 왜곡하여 발생하는 것들을 볼 때에, 동양철학에서 얘기하는 ()에 대한 사상을 고찰하여 기존의 문제점들을 도출하고, 나아가서 참된 교회개혁을 갈망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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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님께서 질문하신 것을 간단하게라도 질문해 드리겠습니다.1)'타락한 기질'이 '거룩한 기질'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일에도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역사심으로만 가능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바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고백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2)이때의 기질은 정의는?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성령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한 사람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의 원리라고나 할까요? 내 안에 성령님께서 계심으로 인해서 내 안에 성령님의 원리(principle)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3)이 '원리'로서의 '기질'은 결코 습득된 것이 아니고 주입된 것입니다. 주어지는 09.09.08 17:45
 
것입니다. 그리고 4)'중생의 순간은 주입된 '생명의 씨' 정도로 정의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한 면으로는 옳고 한 면으로는 그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중생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영혼의 의사'라는 책에서 소개받은 '초기중생'의 측면이라면 그것은 '생명의 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와 믿음 이후에 오는 '새출생'으로서의 '중생'에서라면, 그것은 씨 이상입니다. 열매까지는 아니어도 그 씨를 자라게 하고 자란 것으로서의 생명현상이 좀 더 충만해진 상태, 아마도 잎이나 꽃 혹은 줄기쯤 된다고나 할까요? 09.09.08 17:48
 
 
 
 
Re: 댓글에 대한 하나로의 생각|신학토론방
하나로 | 조회 59 | 09.09.10 17:19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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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스님의 댓글)

 

하나로님께서 질문하신 것을 간단하게라도 질문해 드리겠습니다.

 

1) '타락한 기질'이 '거룩한 기질'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일에도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역사으로만 가능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바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고백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2) 이때의 기질은 정의는?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성령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한 사람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의 원리라고나 할까요? 내 안에 성령님께서 계심으로 인해서 내 안에 성령님의 원리(principle)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3) 이 '원리'로서의 '기질'은 결코 습득된 것이 아니고 주입된 것입니다. 주어지는것입니다. 그리고

 

4)'중생의 순간은 주입된 '생명의 씨' 정도로 정의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한 면으로는 옳고 한 면으로는 그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중생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영혼의 의사'라는 책에서 소개받은 '초기중생'의 측면이라면 그것은 '생명의 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와 믿음 이후에 오는 '새출생'으로서의 '중생'에서라면, 그것은 씨 이상입니다. 열매까지는 아니어도 그 씨를 자라게 하고 자란 것으로서의 생명현상이 좀 더 충만해진 상태, 아마도 잎이나 꽃 혹은 줄기쯤 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본성'의 문제는,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인데, 이전 스코틀란드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책이었던 토마스 보스톤'인간의 네 가지 본성상태'라는 책을 보면, 본성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저의 글(윗글 속에 있는) 그 본성이 네 가지 임을 이미 시사해 놓았습니다.

 

창조되었을 때의 본성,

타락한 뒤의 본성,

구속받은 뒤의 본성,

그리고 영화롭게 된 상태의 본성....

 

이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에, 본성문제를 다루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동양사상을 다룰 때 이 네 가지 중의 어떤 것과 유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동양사상을 평가하고 비평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로의 생각들)

새삼 지난 글을 끄집어 내봅니다.

     

       (호레이스님 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거룩한 기질이며, 반복된 훈련과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번에 주어지는 새로운 기질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새 생명의 기질이 며, 옛 생명이 가진 기질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중생)하게 됨으로 새로운 기질이 입히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룩한 기질은 무엇인가? 옛 창조에 속한 감각(sence)인 시각,청각,촉각,미각,후각의 오감과 감성, 이성(reason)등의 옛 감각(기질)에 더하여진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감각들을 새롭게 하는 그 무엇이다.

 

지금까지 옛 세상에 속해서 옛 사람으로서 모든 감각을 가지고 추구해 왔던 그 방향과 태도를 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전환(concersion)시키게 하는 것이며, 옛사람이 가지고 있던 모든 감각들이 이제는 새로운 방향과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감각으로 모두 재정립된 것이 바로 거룩한 기질이다. 이전 것 그대로이지만, 전혀 새로운 그 무엇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며,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냐 밖에 있느냐에 의해서 세상의 세력권(구심력)에 있던 존재가 성령의 세력권(원심력) 안으로 들어옴으로 새로운 성향을 갖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위의 내용에 대해서 좀더 깊이 묵상해보기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생각들이 자칫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논의로 흐르지 않기를 주님께 간구합니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우리의 생명의 깊이와 지식의 부요함이 그 영의 넘치치는 공급으로 충만해지기를 또한 주님께 구합니다.

 

이러한 탐구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일단 내려놓고,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것 같은 생각들을 정리해보기로 합니다.

 

위의 글에서 호레이스님의 글을 정리하면

 

 1) 거룩한 기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것이다.

 2)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중생)하게 됨으로 새로운 기질이 입히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옛창조에 대한 그 모든 감각들을 새롭게하는 그 무엇

 4) 옛사람이 가지고 있던 모든 감각들이 이제는 새로운 방향과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감각으로 모두 재정립된 것이 바로 거룩한 기질이다. 이전 것 그대로이지만, 전혀 새로운 그 무엇이다.

 

위의 4가지의 거룩한 기질에 대한 정의가 서로 상이함을 알수 있습니다.

 

1)번은 기본적인 말씀에 해당하는 것이고,

2)번은 옛기질과 다른 새로운기질이 별도의 실체로서 있어 보이고

3)번은 하나님의 선물인 거룩한 기질이 원인자가 되는 것인데, 결국은 옛기질이 새롭게된다는 것으로서 1)번과는 다른 의미가 됩니다.

4)번은 옛기질이 재정립된 것 자체가 새로운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자세히 묵상해볼수록 2,3,4번의 의미들이 사뭇다르게 다가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것이 무엇일까요? 그 거룩한 기질은 과연 어떤것일까요?

옛기질이 재정립된 것일까요? 아니면, 옛기질과는 다른 실체로서 덧입혀진 새로운 기질일까요? 아니면, 옛기질의 재정립을 다만 도와주는 원인자만일까요?

 

이 부분에 대한 견해들이 있으시면 많은 고언들을 듣고자 합니다.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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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답변을 주셔서 반갑고 감사합니다. 결론적으로 갈2:20처럼 우리안에 생명의 원리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거하심을 믿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좀더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제가 개혁주의의 구원론에 대해서 좀더 정리가 필요한듯 싶습니다. 예전부터 한번은 정리를 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여지껏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있네요. 저녁에 와서 다시 위의 내용에 대해서 곰곰히 묵상을 해보겠습니다. 09.09.10 21:15
 
벧후1:4이하에서 성도의 견인이 신의성품을 닮아간다고 한다면, 나의 옛기질이 거룩한 기질을 본받아 닮아간다고 볼수 있을것같습니다. 결국, 옛기질이 변화를 받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입된 거룩한 기질은 성령의 원리요, 옛기질을 거룩함에 참예케하는 원인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됩니다. 09.09.10 23:23
 
이것을 좀더 살펴보면, 구심력과 원심력의 긴장관계에서 영적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전선의 최전방이 어디일까? 인간의 옛기질에 대한 동서양의 정의와 표현들이 다르지만, 대표적으로 생각,감정,의지로 구분해서 보면, 사람의 생각,감정은 풍랑처럼 시간에 따라서 늘 변화무쌍합니다. 이럴때에 <의지>라는 기관이 행동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09.09.10 23:45
 
구심력과 원심력의 팽팽한 긴장속에서 의지가 어디로 결정을 내릴지 망설일때에 그 균형추를 무너뜨리는 것은 무언인가? 다만, 인간속에 주입된 거룩한 기질이 강제적으로 의지를 조정하는것인가?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이군요. 09.09.10 23:45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때에, 늘 나의 균형추는 원심력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도덕적인 선'등으로 자신의 의지를 사용할때에 어느 한계에 도달하는것을 느낍니다. 그것을 늘 넘어서는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할때에 그 어떤 옛기질도 침범치 못하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09.09.10 23:45
 
여기서 <의지>를 너무 강조하면 알미니안으로 기울어진다고 오해가 있을수 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의 원리가 주체가 되어 <의지>의 원인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한다면, 인간의 노력이라는 개입을 방어할수 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09.09.10 23:50
 
또한, 조심스럽게 호레이스님께 질문드리면, 옛기질의 변화의 성품중에서 만일 그것이 덕,지식,절제,인내,경건중에서 동양의 <인의예지>인 사덕의 덕목이 0%도 신의 성품과 닮은구석이 없는가 입니다. 지금까지의 일반론은 <전혀없다>라는 것인데, 과연 <전혀>라고 하는 것에 다시 질문을 두드려 봅니다. 인간의 어떤 선이라도 그리스도의 생명안에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라는 전제하에서 그 어떤 논의도 허락되지 못할것같은데, 혹시라도 그 빗장을 열수 있는 길이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집니다. 09.09.10 23:58
롬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에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속에>에 보인다고 합니다. 또한, 롬2:15에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양심>이란 것은 09.09.11 07:37
동양의 공맹이 비록 하나님을 알지못했고, 복음을 듣지 못했으나, 양심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여 결국, 사단(인의예지)을 밝힌것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이것을 과연 신의성품에 참예하는 것에 0%도 아니라고 단정할수가 있는것인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09.09.11 07:40
또한, 딤전1:19은 믿음과 착한양심...이라고 하고, 딤전3:9은 깨끗한 양심...이라고 하며, 벧전3:21에서는 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을 근거로, 공맹이 하나님과 복음을 몰랐으니, 믿음에 대해서는 당연히 몰랐을것이나, 그들이 추구했던 <사단>은 선하고 착한양심을 좇아 간것으로 볼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09.09.15 14:18
Horace
전통적인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신의 성품’이 아니라 ‘신의 속성’이라는 제목으로 인간과 신의 공유적인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을 논의해 왔습니다. 공맹의 ‘인의예지’는 인간과 신이 공유하는 속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의 성품’은 이것과는 약간 다르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주어진’ 새사람들이 계속되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더하여 갖게 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의 기질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지요. 09.09.12 09:29
Horace
‘인의예지’가 신의 속성일 수는 있어도, ‘신의 성품’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인의예지’가 뛰어난 덕목이요 성품이라도 할지라도 거듭남이 없는 상태에서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공맹의 도가 아무리 높고 깊어도 그리스도 밖에서라면 어느 것도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로님께서도 그것을 인정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09.09.12 09:32
Horace
(선한)'양심'의 문제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나 모든 사람들의 속에 심겨져 있는 '종교의 씨'라는 것과 함께, 간단히 취급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만, 아무리 인간이 양심적으로 선하고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그 양심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개혁주의신학에서 오래전부터 성경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증명해 왔습니다. 공맹이 아무리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양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양심일 수 없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구원받은 자의 양심이 구원받지 못한 자의 양심보다 더 깊고 온전한 경우들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향성(orientation)을 염두에 둔다면 별로 09.09.12 09:36
Horace
어렵지 않은 문제입니다. 곧 천국방향을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의 키가 좀 적은 것과 지옥방향을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의 키가 조금 크다고 해서 그 방향성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처럼 천국을 향하여 가는 구원받은 사람의 양심의 좀 부족함과 지옥을 향하여 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양심의 크기나 정도는 그 방향성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맹의 양심이 어떤 그리스도의 양심보다 훨씬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천국과 지옥의 방향을 결정지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의 문제로 결정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09.09.12 09:38
 
예..대부분 공감합니다. 헌데, 위의 글 1~4번에 관한 의견은 주시지않으셨군요. 거룩한 기질에 대해서 정의하는 것이 무언가 상이한 점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져셔요. 09.09.12 11:31
 
그리고, 공맹의 선한양심(신의속성?)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은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볼수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상황에서 동일한 잣대를 적용할수 있는가?입니다. 물론, 이 이상의 확대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는 생각해보아야겠지만요. 그리고, 윗글에서 사덕(인의예지)에 대해서 그리스도밖이라고 하는 것은 공감하나, 예전에 어떻게 접목을 시도할실려고 했는지가 궁급해집니다. 09.09.12 11:36
 
ㅎㅎ 윗글의 1~4번 정리된 것은 제가 미처 보지를 못했군요. 생각해 보겠습니다만, 하나로님의 묵상에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저로서는 1~4번이 결코 모순된 것처럼 다가오지 않는데, 아마도 어떤 용어상의 뉘앙스에서 서로가 생각하는 바가 다른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좀 생각해 보고 답변 올리겠습니다. ^^ 09.09.12 11:52
 
하나로님께서 질문하시는 것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했으면 해서 제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1)'기본적인 말씀에 해당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2)에서 요약하신 말 중에 '실체'라는 말을 쓰셨는데, 무슨 뜻인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어떤 뜻일까요? 3)에서 1)번과는 다른 의미가 된다고 하셨는데, 1번 정리요약이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기질인 것 같습니다만, 3)의 요약내용이 옛기질을 새롭게 한다는 것으로 요약하셨으니, '주어지는 것'과 '옛기질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 모순되거나 혹 다른 의미라는 뜻인가요? 저는 두 가지가 병행될 수 있다고 봅니다만....그리고 4)에서 2),3),4)의 의미가 사뭇 다르다고 하셨는데, 1)과 비교해서 2),3) 09.09.12 20:10
 
그리고 4)가 다르다는 것인지, 곧 1)과 비교해서 나머지 것들의 요약내용과 서로 다르다는 것인지, 2),3),4) 각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인지....좀 분명치가 않습니다. 아마도 약간 급하신 일들 때문에 빠르게 쓰시느라고 그런 것으로 이해됩니다. 좀 더 명확하게 질문해 주실 수 있는지요? 이렇게 해서 어떤 용어나 개념을 좀 더 서로간에 이해될 수 있는 차원으로 접근해 가는 것....대화의 필수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
 
그리고 '본성'의 문제는,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인데, 이전 스코틀란드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책이었던 토마스 보스톤의 '인간의 네 가지 본성상태'라는 책을 보면, 본성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저의 글(윗글 속에 있는) 그 본성이 네 가지 임을 이미 시사해 놓았습니다. 창조되었을 때의 본성, 타락한 뒤의 본성, 구속받은 뒤의 본성, 그리고 영화롭게 된 상태의 본성....이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에, 본성문제를 다루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동양사상을 다룰 때 이 네 가지 중의 어떤 것과 유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동양사상을 평가하고 비평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출처 :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글쓴이 : 혼인잔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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