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의 두 게시글에 있는 호레이스님의 중요한 덧글을 따로 정리하여 올립니다. 상당히 중요한 글이고, 그 덧글 자체가 많은 양을 상당히 압축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덧글을 따로 프린트 해서 성경구절 찾아가면서 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를 "중생한 자아"로 보고 그것을 "중생한 자의 영"으로 보는 것은 논리비약입니다. 어느 교단의 강도사 글인지 몰라도 '중생한 자의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결론내리는 것은 제가 우려하고 있는 결론들 중의 하나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곧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중생한 자를 말하지, 그 중생한 자의 어떤 부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중생한 영이라면 "자"라는 관사를 헬라어에서 "영"이 중성이므로 중성관사(토)를 써야하는데 남성 관사(호)를 쓰고 있네요. 그러니까 중생한 영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 "마다" 여기서 "마다"도 영을 받는 다면 중성 "판"을 써야하는데 남성인 "파스"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중생한 자는 남성 관사를 쓰기에 사람을 가리킵니다. 중생한 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원어를 모르면 해석하지 말라는 말은 안했고 도움이 될까 해서 기록했는데 푸대접 받는 기분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다른 분들이 해석해서 제가 구지 해석할 필요도 없구요. 그리고 구지 답글을 많이 달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원문의 해석의 필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하자. ---> 본문은 거듭난 자라고 할지라고 육과 영이 더러워질 수 있기에 자신을 깨끗케하자는 말 이라고 봅니다.
저도 malkut님의 지적에 공감하고 또한 동감합니다. 고후7:1을 잘 지적하셨습니다. 백영희목사의 견해가 위의 요약된 글에 나타나는 것과 일치된다면, 고후7:1같은 구절은 백목사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결정적으로 가르킨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거듭난 자 속에는 '영'이 있습니다만, 그 '영'에 '거듭난 자'를 제한하는 것은, 성경의 기록(원어의 문법)에 근거할 때 잘못되었다는 것이 malkut님의 지적입니다. 저는 그 지적에 동의합니다. 진합태산님께서는 마음을 열고 이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후7:1에 보면 '육의 온갖 더러운 것'만 지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 맥락은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는 것을 보니, 구원받은 자들, 중생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권면이 '육과 영의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합니다. 중생한 자들의 '영'도 더러운 것에 더럽혀져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고 malkut님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이 구절을 대한다면, 중생한 자의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식의 해석이 불가능해집니다. 그것이 백영희목사의 견해인지 아닌지는 백영희목사의 글을 좀 더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열린 마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가기를 다시 부탁 드려봅니다
롬8:9~11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중생한 자의 영과는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중생한 자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시지만, 그 중생자 안에 있는 성령님과 중생자 자신의 영을 혼동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10절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고 할 때의 그 영은 중생자의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 영은 인간의 요소들 중의 하나로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앞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고 할 때의 '몸'은 우리의 생물학적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된 육신, 곧 죄의 실체와 법을 지고 있는 flesh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영희목사님의 입장이 중생자의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확실합니까? 제가 보기로는 그것이 백영희목사의 견해는 아닌 듯 한데요. 그리고 '중생한 자는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구원을 잃을 죄는 짓지 못한다'는 것이 근거도 없는 단정이라고만 하시는데, 저는 비록 그런 주장이 세련되지는 못했다고 여기지만 그래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근거가 분명하지요. 왜냐구요? 중생한 사람은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 근거는 바로 성도의 견인교리에서 표현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가장 확실한 근거이지요. 중생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작업이요 선물입니다. 그렇게 중생시킨 인생으로 하여금 구원을 잃을만한 죄를 짓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겠습니까?
저는 결코 중생한 자의 영, 중생한 사람(혹은 자)의 의미상의 차이에 대해서 간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간과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민감한 셈이지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여깁니다. flesh와 body의 차이입니다. 보통 삼분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차이를 간과합니다. body는 우리의 생물학적 몸입니다. 죄의 도구가 되기는 하지만, 죄의 실체와는 얼마간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몸으로 번역되거나 살로 번역되는 이 flesh는 아주 복합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뉘앙스, 곧 죄의 실체를 담거나 죄의 법을 담고 있는 몸이라고 할 수 있지요.
Horace님 제가 가장 궁금해 한 것이 그것인데요? 다른 것들은 다 뒤로 돌려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 한가지만 확실하게 답변을 주십시오. 다른 분도 다 이 답은 안하고 계시고 엉뚱하게 하나님을 대입시키시는데요. 구원을 잃을만한 죄의 경계가 어디냐 하는 점입니다. 그 경계가 어디이기에 구원을 잃을 죄가 있고, 구원을 잃지 않을 죄가 있다는 말인지요? 죄의 실체를 담을 수 있다는 의미는 어떤 것인지? 단순히 몸(body)에서 flesh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로 어떤 점이 더 부각되어서 죄의 실체를 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는 것인지요? 그게 마음의 요소를 말하는 것입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구원을 잃을 만한 죄의 경계가 어디냐고 한다면, 그것은 우선 이렇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경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도 중생자는 죄를 지을 수 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구원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아무리 선한 짓을 많이 하여도 구원을 얻지 못한 자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어떻게 변별하느냐 하는 문제이겠지요.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던 자들이 바로 청교도들입니다. 제가 그들의 책에 관심을 갖고 또한 번역했던 것도 이 문제이지요. 질문을 하나만 하신다고 하더니, 연속으로 올리셨군요. 뒤에 올리신 질문은 뒤에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질문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중 뒤에 보실 때에 flesh와 body의 차이에 대한 것도 지금 제가 간단히 답변해 놓을 터이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런 차이에 대해서 묵상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바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로 철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이해를 시도합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풀어가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도래하였지만 그 완성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시대에 이미(already) 도래하였지만, 아직(yet)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곧 우리가 이미(already) 중생받았다고 하지만 아직(yet)은 그 모든 것의 완성된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긴장(신학적으로는 '종말론적 긴장'이라고 합니다)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구원받은 자 안에서도 여전히 갈등이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중생한 사람 안에 있는 영과 혼, 혹은 육체의 갈등이라고 보는 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구속사적 시각을 놓치는 것입니다.
중생된 사람 안에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중생한 사람은 이미(already)의 구원받은 자, 곧 '올 세대(the age to come)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직(yet) 그 몸 안에 남은 죄(the indwelling sin)을 지니고 있습니다. 갈등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올 세대'에 속한 것은(그것을 앞에 말씀드린 것과 관계시킨다면, 성령의 원리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안에 영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성령과 영은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중심합니다. 하나님지향적입니다. 하지만, 내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이때 내 몸 안에 남아있다고도 할 수 있(이때 몸과 내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의 법은 자기중심적이요. 이 두개의 힘, 세력, 방향력이 상호갈등하고 있는 각축장이 바로 '중생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언제나 겸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각축장이 중생자'라고 한 말은, 때로는 '각축장이 중생자의 영혼'이라고도 할 수 있고, 혹은 '각축장이 중생자의 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구속사적 이해를 전제로 한다면, 그 문맥을 통해서 이 '영혼'이나, '영'이 모두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중생자를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로님께서 질문하신 것을 간단하게라도 질문해 드리겠습니다.
1)'타락한 기질'이 '거룩한 기질'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일에도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역사심으로만 가능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바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고백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2)이때의 기질은 정의는?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성령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한 사람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의 원리라고나 할까요? 내 안에 성령님께서 계심으로 인해서 내 안에 성령님의 원리(principle)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3)이 '원리'로서의 '기질'은 결코 습득된 것이 아니고 주입된 것입니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4)'중생의 순간은 주입된 '생명의 씨' 정도로 정의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한 면으로는 옳고 한 면으로는 그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중생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영혼의 의사'라는 책에서 소개받은 '초기중생'의 측면이라면 그것은 '생명의 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와 믿음 이후에 오는 '새출생'으로서의 '중생'에서라면, 그것은 씨 이상입니다. 열매까지는 아니어도 그 씨를 자라게 하고 자란 것으로서의 생명현상이 좀 더 충만해진 상태, 아마도 잎이나 꽃 혹은 줄기쯤 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본성'의 문제는,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인데, 이전 스코틀란드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책이었던 토마스 보스톤의 '인간의 네 가지 본성상태'라는 책을 보면, 본성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저의 글(윗글 속에 있는) 그 본성이 네 가지 임을 이미 시사해 놓았습니다. 창조되었을 때의 본성, 타락한 뒤의 본성, 구속받은 뒤의 본성, 그리고 영화롭게 된 상태의 본성....이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에, 본성문제를 다루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동양사상을 다룰 때 이 네 가지 중의 어떤 것과 유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동양사상을 평가하고 비평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생한 영혼은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때에 참된 믿음과 동반해서 중생한 사람들 속에 들어오게 되는 일종의 습관적 원리('중생'이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습관적 원리'의 유입'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로서의 '성령의 원리'와 여전히 그 중생한 사람 속에서 작용하는 '남은 죄의 원리'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성령의 원리에도 습관이 작용하고 이전의 습관이 남은 죄 속에도 작용합니다. 습관을 말할 때에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하지요. 하나는 하나님 지향적인 습관이요 다른 하나는 자가지향적인 습관입니다. 혹은 전자는 구심적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원심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두 개의 힘이 밀고 당기는 가운데 벌어지는 전쟁이 영적 전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전투이지요. 중생한 자(생명의 원리로서의 습관을 가지게 된 자)는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때에, 곧 자아지향적인 습관의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아지향적인 생각이나 선택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그것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후회하고 회개하고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원리로서의 습관을 따라서 행하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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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밤에 잘려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말 안듣는 저의 강아지 아톰이 같이 누워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주인의 입장에서 아톰을 한번 끌어 안아줬습니다 그리고 말했죠 " 이 귀여븐것 "
그래도 아톰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릅니다 자기 할일만 합니다 주인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는것이지 강아지의 순종함과 상관이 없다는것을 말입니다. 강아지가 말을 잘듣거나 강아지가 착하거나 해서 이뻐하는것이 아니라 강아지는 똥싸고 오줌싸고 털 깍기 싫어서 으르렁 거리고 물려고 하고 먹을것 줄때만 좋다고 옆에오고 , 시끄럽게 짖고 그래도 주인이 일방적으로 강아지를 사랑하는것이지 강아지의 잘나고 못나고가 아니란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불순종하면 죽이고 이런것이 아니란것을 말입니다 만약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미워하신다면 모든 사람들이 심판받아 죽었을 겁니다 우리가 잘나고 못나고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기때문에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는거겠죠. 일방적인사랑 누리며 삽시다! 만약 우리가 죄를 습관적으로 짓는다면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프실거에요. 아톰은 털깍을때 불순종하고 이리와 해도 불순종하고 오줌싸지마 똥싸지마 해도 불순종하고 아무때나 오줌싸고 털깍으려면 물려고 그러고 이리와 하면 저리가고 먹을거 있을땐 이리와 안해도 먼저오고 앉아하면 앉고 이러지만 택한자녀들은 이제 하나님의 맘을 품은 자들이잖아요. 그러니 순종하며 살아요 습관적인 죄를 끊으며 살아요
습관적인 죄를 짓지 맙시다! 습관적인 죄를 한개라도 짓지 맙시다! 습관적인 죄를 한개라도 지으면 그래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사랑하시지만 사랑하는 만큼 습관적인 죄 한개 지을때 너무 맘이 아프실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습관적인죄 한개라도 짓는 않는 사람들이 되어보아요 ....
호레이스님의 <나는 개혁되었는가>의 글이 새로운 본성 논의의 대략적인 방향이라고 하여, 자세히 읽어보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래는 읽었던 내용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관련된 것들을 정리했습니다.
종교 개혁에서의 참된 회개란 심령과 마음의 개혁이다.
심령(heart)과 마음(mind)의 개혁에 있어서 “본성”(nature)만을 언급하고, 본성의 4가지 중에서 “타락한 인간본성”만을 살펴본다.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은 “습관으로서의 본성의 개혁”이었고, 이것은 참된 회개와 참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거룩한 기질”이며, 반복된 훈련과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번”에 주어지는 새로운 기질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새 생명의 기질”이 며, 옛 생명이 가진 기질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중생)하게 됨으로 새로운 기질이 입히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룩한 기질은 무엇인가? 옛 창조에 속한 “감각(sence)”인 시각,청각,촉각,미각,후각의 오감과 감성, 이성(reason)등의 “옛 감각(기질)”에 더하여진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감각들을 새롭게 하는 그 무엇이다.
지금까지 옛 세상에 속해서 옛 사람으로서 모든 감각을 가지고 추구해 왔던 그 방향과 태도를 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전환(concersion)시키게 하는 것이며, 옛사람이 가지고 있던 “모든 감각”들이 이제는 새로운 방향과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감각”으로 모두 재정립된 것이 바로 “거룩한 기질”이다. 이전 것 그대로이지만, 전혀 새로운 그 무엇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며,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냐 밖에 있느냐에 의해서 세상의 세력권(구심력)에 있던 존재가 성령의 세력권(원심력) 안으로 들어옴으로 새로운 성향을 갖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며,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없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잘못된 비성경적 개념을 주장하게 되면, “그리스도인”도 아니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다.또한, 우월한 “영빨”과 “영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직 그가 “그리스도인됨”을 모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무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를 모두 경계 해야한다.
또한,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회개가 많다. 죄에는 죄의 죄책성과 패괴성의 두가지 속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한다. 구원에 이르는 첫번째 참된 회개, 곧 죄의 뿌리를 통째로 들어내는 그 회개가 필요하다. 죄의 패괴성을 알고 그 죄에서 그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 달라고 주를 바라보는 자는 복이 있다. 이런 회개가 자기 개혁의 시작이요 근본이다. 이것이 없이는 자기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
제안한 “심령개혁”은 나의 본성과 습관과 기질이 변화되는 회심과 중생에 근거한 자아개혁, 나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만 할 수 있는 이 개혁이, 교회의 참된 개혁일 것이다.
또한, 위의 글들과 연결해보니, 처음에 올리셨던 <새로운 습관으로서의 새본성>에 대한 글도 좀더 이해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정리하면서, 주입된 습관은 존 머레이의 확정적 성화로 보고 , 획득된 습관은 점진적 성화로 정리하였습니다.
또한, 호레이스님은 확정적 성화가 왜곡되었을 때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산출되고 구원의 본질을 잘못되게 한다는 것을 “무율법주의”로서 설명되었고, 점진적 성화의 방면으로 극단으로 갔을 때에도 “신율법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였고, 이것은 죄의 패괘성은 치유하지 않은 채 죄의 죄책성 만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부분도 지적하셨습니다.
호레이스님의 글을 종합해보면, 말씀하신대로 <“심령개혁”-나의 본성과 습관과 기질이 변화되는 회심과 중생에 근거한 자아개혁>에 전체적인 흐름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령’은 ‘heart’로 보고, ‘마음’은 ‘mind’로 보고 있고, 습관은 ‘주입된 습관’ , 그리고 ‘확정적 성화’의 중요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또, 기질에 있어서는 ‘타락한 기질’이 ‘전환(conversion)’과 ‘재정립’을 통해서 ‘거룩한 기질(spiritual sense, or spiritual propensity)’로 변화되는 것을 말하고 있고, 나타나는 결과는 <건전한 마음의 법칙>의 내용들을 통해서 참고 삼아 개략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기질’이 ‘거룩한 기질’이게 하는 그 ‘무엇’이 어떤것이냐에 대해서는,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한 차이점의 설명에서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 ‘세상의 세력권’에서 ‘성령의 세력권’으로 옮겨졌다는 비슷한 설명으로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고, 저 역시 결과론적으로는 인정되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언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아마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금단의 영역인 것같기도 하고, 연구의 필요성이 있는것인가에 대한 회의감까지도 들곤 합니다.
굳이 내용을 밝혀보자면, 옛 세상에서 살던 옛 사람이 어느 시점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났을(중생) 때에 ‘타락한 기질’이 순간적으로 변화하여 ‘거룩한 기질’이 될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때의 ‘기질’은 어떻게 정의해야하는가? 또한 이 ‘기질’은 주입된 것의 습관(기질)인가? 획득된 습관(기질)인가?
현재 저의 견해로는 중생의 순간은 주입된 ‘생명의 씨’ 정도로 정의하고 싶고, 아직은 이 ‘씨’가 ‘기질’로 까지 정의하는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생명’과 ‘기질’을 동일한 개념안으로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본성(nature)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검토한 바에 의하면, nature의 표현은 KJV, NewKJV , NIV의 3가지 버전을 통합해서 추출해보면 42회정도가 나오는데, 이 구절들의 내용들이 과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본성’이라는 것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 현재 호레이스님의 ‘본성이라는 단어에 대한 한 단상’에서 살펴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점들이 동양철학의 사상들이 스며들어 성경의 본질을 왜곡하여 발생하는 것들을 볼 때에, 동양철학에서 얘기하는 ‘성(性)’에 대한 사상을 고찰하여 기존의 문제점들을 도출하고, 나아가서 참된 교회개혁을 갈망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호레이스님의 댓글)
하나로님께서 질문하신 것을 간단하게라도 질문해 드리겠습니다.
1) '타락한 기질'이 '거룩한 기질'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일에도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바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고백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2) 이때의 기질은 정의는?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성령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한 사람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의 원리라고나 할까요? 내 안에 성령님께서 계심으로 인해서 내 안에 성령님의 원리(principle)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3) 이 '원리'로서의 '기질'은 결코 습득된 것이 아니고 주입된 것입니다. 주어지는것입니다. 그리고
4)'중생의 순간은 주입된 '생명의 씨' 정도로 정의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한 면으로는 옳고 한 면으로는 그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중생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영혼의 의사'라는 책에서 소개받은 '초기중생'의 측면이라면 그것은 '생명의 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와 믿음 이후에 오는 '새출생'으로서의 '중생'에서라면, 그것은 씨 이상입니다. 열매까지는 아니어도 그 씨를 자라게 하고 자란 것으로서의 생명현상이 좀 더 충만해진 상태, 아마도 잎이나 꽃 혹은 줄기쯤 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본성'의 문제는,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인데, 이전 스코틀란드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책이었던 토마스 보스톤의 '인간의 네 가지 본성상태'라는 책을 보면, 본성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저의 글(윗글 속에 있는) 그 본성이 네 가지 임을 이미 시사해 놓았습니다.
창조되었을 때의 본성,
타락한 뒤의 본성,
구속받은 뒤의 본성,
그리고 영화롭게 된 상태의 본성....
이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에, 본성문제를 다루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동양사상을 다룰 때 이 네 가지 중의 어떤 것과 유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동양사상을 평가하고 비평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로의 생각들)
새삼 지난 글을 끄집어 내봅니다.
(호레이스님 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거룩한 기질”이며, 반복된 훈련과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번”에 주어지는 새로운 기질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새 생명의 기질”이 며, 옛 생명이 가진 기질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중생)하게 됨으로 새로운 기질이 입히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룩한 기질은 무엇인가? 옛 창조에 속한 “감각(sence)”인 시각,청각,촉각,미각,후각의 오감과 감성, 이성(reason)등의 “옛 감각(기질)”에 더하여진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감각들을 새롭게 하는 그 무엇이다.
지금까지 옛 세상에 속해서 옛 사람으로서 모든 감각을 가지고 추구해 왔던 그 방향과 태도를 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전환(concersion)시키게 하는 것이며, 옛사람이 가지고 있던 “모든 감각”들이 이제는 새로운 방향과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감각”으로 모두 재정립된 것이 바로 “거룩한 기질”이다. 이전 것 그대로이지만, 전혀 새로운 그 무엇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며,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냐 밖에 있느냐에 의해서 세상의 세력권(구심력)에 있던 존재가 성령의 세력권(원심력) 안으로 들어옴으로 새로운 성향을 갖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위의 내용에 대해서 좀더 깊이 묵상해보기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생각들이 자칫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논의로 흐르지 않기를 주님께 간구합니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우리의 생명의 깊이와 지식의 부요함이 그 영의 넘치치는 공급으로 충만해지기를 또한 주님께 구합니다.
이러한 탐구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일단 내려놓고,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것 같은 생각들을 정리해보기로 합니다.
위의 글에서 호레이스님의 글을 정리하면
1) 거룩한 기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것이다.
2)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중생)하게 됨으로 새로운 기질이 입히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옛창조에 대한 그 모든 감각들을 새롭게하는 그 무엇
4) 옛사람이 가지고 있던 “모든 감각”들이 이제는 새로운 방향과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감각”으로 모두 재정립된 것이 바로 “거룩한 기질”이다. 이전 것 그대로이지만, 전혀 새로운 그 무엇이다.
위의 4가지의 거룩한 기질에 대한 정의가 서로 상이함을 알수 있습니다.
1)번은 기본적인 말씀에 해당하는 것이고,
2)번은 옛기질과 다른 새로운기질이 별도의 실체로서 있어 보이고
3)번은 하나님의 선물인 거룩한 기질이 원인자가 되는 것인데, 결국은 옛기질이 새롭게된다는 것으로서 1)번과는 다른 의미가 됩니다.
4)번은 옛기질이 재정립된 것 자체가 새로운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자세히 묵상해볼수록 2,3,4번의 의미들이 사뭇다르게 다가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것이 무엇일까요? 그 거룩한 기질은 과연 어떤것일까요?
옛기질이 재정립된 것일까요? 아니면, 옛기질과는 다른 실체로서 덧입혀진 새로운 기질일까요? 아니면, 옛기질의 재정립을 다만 도와주는 원인자만일까요?
이 부분에 대한 견해들이 있으시면 많은 고언들을 듣고자 합니다.
(하나로)